력사를 찾아서
《만주와 한반도 12,000년 전~ 2,000년 전 년대기》 4.1 홍산문화(3) 본문
《만주와 한반도 12,000년 전~ 2,000년 전 년대기》 4.1 홍산문화(3)
대야발 2024. 2. 9. 11:48《만주와 한반도 12,000년 전~ 2,000년 전 년대기》
4.1 홍산문화(3)
〈요서지역 홍산문화와 요동~압록강 유역의 토기 비교〉
(출처; https://eastsearoad.tistory.com/316?category=735220)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홍산문화의 우하량 유적에서 ‘여신묘’에 대한 의심〉
『홍산문화의 논점의 중심에는 ‘우하량’이라고 하는 유적이 있다.
우하량 유적은 홍산문화의 핵심유적이다. 중국에서 주장하는 대부분의 홍산문화를 대표하는 성격은 이 유적에서‘만’ 확인된다.
요녕성 서부 구릉산지대의 조양시 능원현의 산등성이에 위치한다(그림 1).
여러 지점에서 다양한 무덤이 확인되었고, 옥기가 출토되었다.
그림1. 우하량 유적의 전경(이른바 여신묘는 NIJI이다)
그 중에서는 제2산등성이의 꼭대기와 가까운 곳에 1지점에서 이른바 대형의 ‘여신묘(그림 1, 2)’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냥 글자만 보기에는 어떤 여성의 무덤인가 하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이 유적의 다른 무덤과는 달리 특이한 유구(그림 2)가 확인되었다.
인간의 무덤이 아닌 이 유구는 아주 넓은 범위에 소토(불맞은 흙)가 넓게 퍼져있는 데, 그 곳에서 토제로 만든 얼굴마스크 및 인간형상물과 역시 토제로 만든 동물형상물의 편 들이 확인되었다.
우선 이 유구의 구조와 크기를 살펴보자.
무덤은 반지하식 건축이라고 한다. 북쪽의 긴 부분이 주체이고, 남쪽의 작은 부분이 단체라고 한다. 북쪽에는 7개의 방이 서로 이어져 있는데, 가장 중심이 되는 방은 원형이다. 북쪽의 유구는 가장 긴 곳을 기준으로 하면 18.4m이다. 남쪽으로 2m가량 아래에 단실무덤이 한 곳 더 있다(그림 2). 이 유구에는 석재를 쓰지 않았고, 토목 구조로 알려졌다(그림 2).
그림 2. 우하량의 1지점 이른바 '여신묘'( 사진의 하단에 있는 긴 유구가 북쪽의 다실묘이고 상단이 남쪽의 단실묘이다)
이 유구에서는 인간형상물주로 얼굴모양 마스크(그림 3) 및 손(그림 4), 팔(그림 5), 귀(그림 6) 등이 확인되었고, 여성의 가슴으로 추정된다고 하는 신체부위 파편(그림 7) 2점도 출토되었다.
또한 이 유구에서는 돼지곰, 곰용, 곰(그림 8)으로 해석되는 토제 동물의 잔편과 매의 발톱과 날개편(그림 9)도 출토되었다고 한다.
그림 3. 우하량 1지점에서 출토된 토제 얼굴모양 마스크
그림 4.우하량 1지점에서 출토된 토제 손
그림 5. 우하량 1지점에서 출토된 토제 어깨
그림 6. 우하량 1지점에서 출토된 토제 귀
그림7. 우하량 1지점에서 출토된 토제 인간부위, 추정 가슴
그림 8. 우하량 1지점의 토제 추정 곰의 주둥이(좌)와 발(오른쪽 상, 중)
그림 9. 우하량 1지점에서 출토된 추정 매의 발톱(상단)과 날개(하단)
위의 내용은 우하량의 정식보고서(遼寧省文物考古硏究所, 2012)에 실린 내용 중 여신묘와 관련된 부분을 간추렸다. 그림도 그 곳의 것을 인용했다.
그런데 몇 가지 의심이 있다.
1. 이 유구가 여신묘일까?
여신묘라고 주장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인간형상물이 여성이어야만 한다.
토제로 만든 여성인형을 두고 제사를 지내기 위한 독특한 무덤이라는 명제를 성립시키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인간모양마스크만을 두고 여성으로 볼 수는 없다. 선사시대 인간형상물을 두고 여성임을 주장하는 가장 합당한 증거는 여성의 가슴이다. 이는 후기구석기시대부터 인간이 여성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가슴을 표현한다. 그런데 그림 6을 두고 가슴의 일부라고 주장할 수 없다. 단면은 원추형이며, 평면형태는 알 수 없다.
따라서 얼굴모양마스크가 여성의 것으로 단정 지을 수는 없다.
2. 정말 ‘곰용’ 혹은 ‘곰’, ‘매’의 일부일까?
이 유구가 더 신비스럽게 보이는 이유가 그림 8,9가 곰과 독수리의 일부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 유구가 최초로 보고될 당시에는 돼지곰(遼寧省文物考古硏究所 1986년)으로 보고되었다.
곽대순은 곰용으로 주장했고(2005), 정식 보고서에는 ‘곰’으로 최종 보고되었다.
곰으로 보고된 유물은 곰의 주둥이, 발톱, 귀라고 한다. 매는 날개와 발톱부분으로 소개되었다.
그런데 곰과 매로 단정 지을 수 있을까?
필자는 동물모양형상물은 발굴자의 의도가 가장 많이 들어가는 유물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동물은 형상화해서 만들기 힘들고, 만든 사람의 의도가 그대로 전달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여러분도 도화지에 그림을 그리면 인간보다는 동물이 그리기 힘든 사람이 많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동물형상은 만드는 사람의 의도와 보는 사람의 관점이 다른 경우가 너무나 많다.나는 호랑이를 그렸는데, 남들은 고양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 것이다.
유적에서 출토되는 유물 가운데 동물모양을 가장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근거는 어떤 동물에 대한 가장 큰 특징 및 자연환경이라고 생각한다. 이 부분은 다음에 설명한다.
필자는 여신묘 출토의 추정 여성가슴, 추정 곰과 매를 단정 지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냥 여러분이 보고도 의심이 가면 그건 의심이 가는게 맞다. 고고학도 역사의 일부임으로 모든 사람이 자유롭게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보고단계에서 이렇게 자신의 감정을 이입해서 설정하면, 이는 사료를 조작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출처; https://eastsearoad.tistory.com/289)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우하량 유적의 1지점을 왜 여신묘라고 주장했을까?〉
『앞서서 포스팅한 바와 같이 여신묘라고 불리지만, 여성의 묘라고 하기에는 증거가 불충분하다. 여신묘라는 명칭자체가 추상적인데, 이는 제사관련시설로 해석하기 위한 것이니 발굴자 혹은 학계의 의지가 들어갔다고 볼 수 있다. 모든 역사적 사실은 정황의 해석이 따르니 그 부분은 그럴 수 있다.
하지만 필자가 문제제기 하는 것은 최소한 여성과 관련된 시설임이 입증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곳에서는 사람형상의 토제소조품이 출토되긴 하지만, 가장 잘 남아 있는 것은 얼굴모양 마스크인데, 그것만으로 여성으로 주장하기는 적당치 않다. 뿐만 아니라 여성의 가슴(유방)이라고 주장하는 평면형태 원형, 단면 원추형의 토제품도 확실하지 않다.
여러 모로 보아서 붉게 타고 남은 흙 범위(일명 여신묘)에 아주 큰 의미를 부여하고 싶어했다고 생각이 든다. 만약에 이곳에서 흙으로 만든 여성형상물이라도 출토되었다면 필자는 이를 크게 부인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정황은 없다.
그렇다면 왜 여신묘라고 주장할까?
여신묘는 홍산문화를 문명화 시키고자 하는 중국학계의 뜻이 포함된 것이다.
여신묘가 포함된 우하량 유적은 홍산문화라고 하는 문화의 사람들 전체가 공유하는 일종의 제사장소였을 것이다. 여신묘나 각 무덤은 혼자서 축조할 수 없는 거대한 규모 임으로 노동력의 집약이 필요하고, 이를 통솔할 수 있는 권력자의 존재가 있었다. 유적의 각 지점에서 확인되는 일명 적석총과 출토되는 옥기도 이를 뒷받침한다. 그래서 이곳에 묻힌 사람들은 특별한 사람으로 제사를 주관하던 제사장이었을 것이다. 유적의 무덤은 모두 같지 않고, 4등급으로 구분됨으로 통치자 집단도 계급이 있었다. 출토된 옥기들도 전문장인에 의한 것으로 직능에 의한 분업체계가 있었다. 즉 최고통치자 및 분업이 있던 사회라고 하는 것이 곽대순(郭大順 2009)의 주장이다.
홍산문화를 문명단계로 만들고자 한 사람은 소병기(蘇秉琦)이다. 그는 씨족사회에서 고국古國, 방국方國, 제국帝國의 단계를 거쳐 국가가 형성된다는 이론을 만들었다. 고국은 부락단계를 넘어선 견고하고 독립적인 정치체, 방국은 비교적 성숙하고 발달한 높은 단계의 국가로 정의했다(蘇秉琦 1994). 소병기의 견해를 적극 받아들인 곽대순은 홍산문화 후기는 고국단계이기 때문에, 문명사회라고 주장한 것이다.
필자는 이 이론의 옳고 그름을 논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소병기의 주장은 중국 문화혁명 이후 소수민족정책의 변화와 궤를 같이함으로 다분히 정치적이기 때문이다.(필자는 정치는 옳고 그름의 판단과는 거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곽대순이나 소병기의 주장은 홍산문화의 다양한 유적 가운데, 우하량 유적의 1지점에서 확인된 정체불명의 유구가 여신묘로 둔갑 되면서부터 그 전제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일명 여신묘는 여신묘일 가능성이 희박하다.
환단고기 2012역주본에서는 고조선의 원향을 요서지역이고, 시간적으로는 홍산문화로 지목한다. 특히 우하량 유적과 그에서 출토된 옥기들을 주목하고 있다. 옥기 가운데 곰과 닮은 옥기가 출토되었다는 것이다. 결국 단군신화를 입증하기 위한 것처럼 보인다(환단고기 2012년 역주본).
그러나 중국학계에서 홍산문화는 정치화의 수단이다. 문화혁명이후 소수민족정책을 다양성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바꾸는 것처럼 보이지만, 민족융합정책의 방법을 다른 방향으로 바뀐 것이라고 필자는 평가한다. 소수민족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 전의 억압정책이 성공하지 못하였음으로 소수민족을 달래서 중앙집권화를 강화 하려는 게 결국은 그들의 목적이었다.
민족융합정책을 위한 이론적 모델이 요구되었고, 이론모델은 소병기가 중국 요서지역에서의 구체화는 곽대순이 해석한 홍산문화의 우하량 유적이다.
그런데 왜 그들은 민족융합정책에 요서지역 홍산문화를 끌어들였을까?
이는 현재의 ‘중화민족’을 설명하기 위해서이다. 사회학자인 배효통(背孝通)은 현재 널리 이용되며 교과서적 이론이라는 중화민족론을 만들었다(김정열 2009). 현재 중국에 존재하는 56개의 민족은 낮은 단계의 민족이고, 중화민족이 높은 단계의 민족인데, 낮은 단계의 민족이 수천년에 걸친 접촉과 융합을 통해 높은 단계의 중화민족을 일체로 형성했했으며, 그 범위는 지리적으로 현재 중국과 일치한다는 내용이다(背孝通 1989). 그런데 이 이론은 소병기의 고고학문화구계유형론을 바탕으로 성립되었다는 것은 잘 알려졌다(김정열 2009).
중국의 신석기문화가 몇 개의 지역으로 구분되며, 시간에 따라서 문화 발전과 계승의 맥락을 따른다는 고고문화구계유형론(蘇秉琦·殷瑋璋 1981)은 나중에 국가발전단계(蘇秉琦, 1994)로 발전되었다. 연산이북에 위치한 요서지역의 신석기문화(홍산문화)도 현재의 중화민족으로 나아가기 위한 한 과정이었다고 본 것이다.
이것이 중국학계가 홍산문화를 연구하는 입장이다.
그런데 필자가 환단고기 역주본(2012)를 비판하는 것은 이러한 연구배경이 있는 홍산문화를 비판없이 여과하지 않고 여신묘를 여신묘, 옥웅룡을 곰이라고 하는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여서 한국역사로 바꾸려고 한다는 점이다.
만약 우하량 유적의 여신묘가 아니라면, 여성을 위한 공간이라는 것이 입증할 수 없고, 제사장소로 해석하기 힘들다면, 어떨까? 곽대순이 홍산문화를 정치체로 볼 수 있었을까? 그럼 홍산문화 없는 환단고기 역주본이 또 만들어 질 것인가?
홍산문화의 후기에 해당하는 이 유적(5500~5000년 전, 기원전 3500~3000)은 홍산문화의 시작단계인 6500년 전(중국주장)과 시간차이가 많다. 이에 대한 의심도 필자는 있다. 우하량의 초창기 여러 중간보고에서는 이 유적에서 홍동 즉 순동이 출토된다고 하는 보고가 있었다.
지금은 홍산문화의 여러 개론서에도 등장하지 않지만....』
(출처; https://eastsearoad.tistory.com/2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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