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와 한반도 12,000년 전~ 2,000년 전 년대기》

4.2 소주산문화(小珠山文化); 6500년 전~4000년 전(BC45002000)

소주산문화는 크게 소주산하층문화·중층문화·상층문화로 대별되며 요동반도 지구의 신석기시대 문화를 대표한다. 소주산 하층문화 유적은 19301940년대부터 알려지기 시작하였으며 1978년의 광록도(廣鹿島) 소주산유적, 유조구(柳條溝) 동산(東山), 대장산도(大長山島) 상마석(上馬石) 유적의 발굴을 통해 그 실체가 명확히 알려지게 되어 전형 유적의 이름을 따 1981년 소주산하층문화로 명명되었다. 소주산하층문화는 현재 요동반도지구의 가장 이른 시기 신석기문화이다. 주요 분포범위는 요동반도와 주위 도서이다.

 

소주산하층문화의 토기는 활석을 포함한 협사도(挾沙陶) 위주이며 기형은 대부분 기벽이 직선적인 통형관(筒形罐)이다. 이외에 목이 좁고 배가 부른 고복관(鼓腹罐)이나 분(), (), () 등이 있다. 무문양토기는 거의 없고, 문양은 90% 이상이 압인문(壓印文)이며 침선문이 그 다음을 차지한다. 대표적인 주문양은 횡으로 배열된 자문, 능형집선문 등이며 그 외 평행선문, 평행사선문, ‘자문, 격자문 등이 있다. 평행선문은 구연부나 동체부에 문양대의 구획 역할과 함께 시문되는 것이 일반적이며, 주문양으로는 구연부에 집선문, 동체부에 자문을 시문한 복합문 형식이나 집선문 단독의 형식, ‘자문 단독의 형식 등이 있다. 호형토기는 견부에 세로 또는 가로의 고리형손잡이가 있다. 주거지는 원형의 수혈식이 일반적이며 판상의 돌을 이용한 방형 또는 원형의 노지가 설치된다.

 

소주산하층문화의 자문이나 구연상의 평행선문 등은 하요하지구의 신락문화 토기와 유사하여 대체로 신락문화와 병행하거나 한 단계 늦는 것으로 생각되며 절대연대상으로 기원전 45004000년 전후에 해당된다. 북오둔(北吳屯)유적에서는 돼지뼈가 다량 출토되었는데, 집돼지로 감정된 바 있으며, 이외 석산(?)이나 석도(石刀)의 존재로 보아 농경이 있었음을 추론할 수 있다. 그러나 유적이 주로 해안이나 도서에 분포하고 있고 많은 패총 및 석촉, 어망추, 야생동물뼈의 존재 등으로 보아 수렵과 어로가 중요한 생업이었음을 알 수 있다. 주요 수렵대상은 사슴과 동물이며, 북오둔유적에서는 주거지 내에서 의례와 관련된 것으로 생각되는 사슴 한 개체의 완전한 뼈가 출토되기도 하였다. 패총의 주요 패류는 굴, 대합, 소라 등이다.

 

소주산중층문화는 일제강점기 문가둔(文家屯)유적의 조사에서 확인되었으나 본격적인 양상이 알려지고 문화명이 설정된 것은 1970년대 후반 소주산 3·4층과 오가촌(吳家村) 등의 유적을 조사한 이후이다. 곽가촌(郭家村) 35층 역시 이 문화 단계에 해당된다. 분포는 요동반도 남부와 주변 도서이다. 토기는 협사홍갈도(夾砂紅褐陶) 위주이며 일부 운모나 활석이 포함되어 있다. 통형관이 기본 형태를 이루며 이외 소구고복관(小口鼓腹罐), 발 등이 있다. 이외에 소량의 정(),(),(?), (?), (?), 채도 등의 기물이 확인되는데 이는 동시기의 산동반도 대문구문화(大汶口文化)와 관련 있는 기물이다. 채도는 니질 홍도에 흑색 또는 홍색으로 삼각형, 직선, 호선, 타래, 격자문 등을 시문한 것이다. 니질도 중에는 무문양토기도 많다. 요동반도는 이 시기부터 산동반도와의 교류가 매우 활발해진다. 협사도의 토기문양은 평행사선문, 격자문, ‘자문 등 침선계 문양이 주류를 이루며 무문양토기도 현저히 증가한다. 소주산 3·4층과 오가촌 및 층위를 이룬 곽가촌 35층 출토 유물의 비교를 통해 몇 개의 분기로 나뉠 수 있다. 석기는 마제 위주이며 호인석부, 방형석도, 갈돌, 갈판, 유엽형석촉, 장조형석분 등이 있다. 각종 골각기와 패도(貝刀), 패겸(貝鎌)도 확인된다.

 

주거지는 소주산, 오가촌과 곽가촌에서 확인되는데 한 변 약 4m 내외의 말각방형 수혈식이며 중앙에 노지가 있다. 기둥구멍은 벽가와 중앙을 따라 배열되어 있다. 다량의 돼지뼈와 석도 등의 존재로 보아 농경이 활발히 실시되었음을 알 수 있다. 오가촌에서는 주거지 내에서 돼지 한 마리의 뼈가 완전하게 출토된 바 있다. 대문구문화 관련 유물과 절대연대측정치를 기초로 할 때 연대는 대략 기원전 35003000년 사이에 해당된다. 주변의 후와상층, 마성자 유적 등에서 확인되는 후와상층문화의 침선문토기와 관련이 있으며 이러한 문화들은 자문토기문화에서 침선계토기문화로 이행하는 양상을 잘 보여준다.

 

소주산상층문화는 소주산 1·2층으로 대표되며 이외에 상마석(上馬石)중층, 사포자(沙泡子)상층, 사평산(四平山) 등 많은 유적이 있다. 유적 밀도가 높고, 규모가 크며 퇴적층이 두터운 것이 이 단계 유적의 특징이다. 토기는 협사흑갈도(夾砂黑褐陶) 위주이며, 소량의 마광흑도, 난각도(蛋殼陶)가 있다. 문양으로는 침선의 수직문, 삼각집선문, 격자문, 현문, 유점문(乳點文)과 부가퇴문 등이 있다. 기형은 고복관, 대족규(袋足?), 천반(淺盤), 누공두(鏤孔豆), 환족반, 편착족정(扁鑿足鼎), 난각흑도(蛋殼黑陶), 고족배(高足杯), , , 뚜껑 등이 있다. 흑도와 대족규, 천반, 누공두, 환족반, 편착족정, 고족배 등은 산동 용산문화 단계의 주요 기물과 일치하며, 이 단계는 요동반도로 산동 용산문화의 기물들이 대거 유입되는 시기에 해당된다.

 

석기는 주로 마제로, 타제석기는 감소하며 세석기는 없다. 편평호인석부와 유견석부(요동형석부), 석분, 유단석분, 쌍공 반월형석도, 마제 만입석촉, 갈돌, 갈판 등이 확인된다. 동물뼈는 돼지뼈가 많고 그 외 개나 사슴뼈가 확인된다. 주거지는 말각방형 또는 원형의 수혈주거지이다. 일부 기둥구멍에는 돌을 받친 것도 확인되며 노지는 수혈식이다. 연대는 기원전 25002000년 사이에 해당된다.

(출처; 한국고고학 전문사전(신석기시대편)

http://portal.nrich.go.kr/kor/archeologyUsrView.do?menuIdx=795&idx=940)

 

4.3 대문구문화(大汶口文化); 6300년 전~4500년 전(BC 43002500)

중국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 산동성 태안현(泰安縣) 대문구에서 확인된 중국 신석기시대 문화로, 1959년 유적을 발굴하면서 이 같은 이름을 얻게 되었다. 1964년에 대문구문화로 명명되었다. 이 유형의 유적은 100여 지점이 넘으나 태산(泰山) 주위, 동쪽으로는 황해, 서쪽으로는 노서평원(魯西平原) 동부 근처, 북으로는 발해 남안, 남으로는 강소(江蘇)와 회북(淮北)일대까지 분포되어 있다. 방사성탄소보정연대로 기원전 43002500년에 해당한다.

 

대문구문화의 발전단계는 조기·중기·만기의 3단계로 나눌 수 있다. 토기는 사질계 홍도(紅陶)와 점토질의 홍도가 위주이며 회도(灰陶)와 흑도(黑陶)가 있다. 또 백도(白陶)도 소량으로 나온다.

 

토기는 조기에는 물레를 이용하지 않았으며 소성온도도 비교적 낮고 종류도 많지 않다. 중기부터 물레로 만든 작은 그릇들이 나오며, 만기에는 커다란 그릇들이 출현한다. 매우 얇고 광택이 나는 흑도 고병배(高柄杯)같은 그릇들은 당시의 토기제작 기술이 최고수준에 이르렀음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 (), 각종 형식의 정() 등이 특징이다.

 

침골(枕骨)의 인공변형과 발치(拔齒) 풍속도 유행하였다. 발굴된 무덤은 2000여 기 정도인데, 대부분 토광묘이나, 만기의 것 가운데는 자형 또는 다른 형식의 목곽(木槨)이 출토된다. 장례는 신전장(伸展葬)으로 혼자 묻는 것이 가장 많으며 굴신장(屈身葬), 복장(伏葬), 2차장 등은 비교적 적다. 이른 시기의 부장품은 그다지 차이가 없으나 중·만기로 갈수록 각 무덤마다 차이가 심해지며, 옥기·상아 그릇과 정교하게 만든 토기 등이 나타난다. 돼지의 아래턱뼈는 빈부의 차이를 나타내는 표지유물로서, 많은 경우는 32개까지 출토된다.

생업경제는 농업위주이며 주요 작물은 좁쌀이다. 어로도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대문구문화의 공예수준은 무척 뛰어나서 화판문(花瓣文)의 상아통 등 상아나 돌로 만든 여러 예술품들에서 당시 투조(透彫) 및 상감기법이 성숙했음을 알 수 있다.

 

대문구문화는 위로 북신문화(北辛文化)를 계승하고 아래로는 산동(山東) 용산(龍山)문화로 이어져 산동·소북(山東·蘇北)지방의 신석기시대 문화연구에 주요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출처; 한국고고학 전문사전(신석기시대편),

portal.nrich.go.kr/kor/archeologyUsrView.do?menuIdx=795&idx=647)

 

 

중앙일보 2001 3 22일자 기사 "중국 대문구 문화 일군 동이족=고조선족"

 

"중국 대문구(大汶口) 문화의 주인공은 고조선족이었다. "

서울대 사회학과 신용하(64) 교수가 최근 나온 한국학보(102)에서 이런 주장을 해 주목을 끌고 있다. 신교수는 이 논집의 고조선 '아사달' 문양이 새겨진 산둥(山東) 대문구 문화 유물이라는 글에서 이같이 밝혔다.

 

아직 우리에겐 생소한 '대문구 문화' 는 중국의 룽산(龍山)문화 이전에 이미 산둥반도에 존재했던 동이(東夷)계 문화다. 중국의 고고학계도 어느 정도 인정하는 바다. 그 시기는 BC 4300~BC 2200년께로 추정된다.

이 대문구 문화의 주인공인 동이족이 바로 대동강 유역에서 살던 고조선족이라는 게 이번 주장의 골자다. 중국학계의 학설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동이족고조선족' 으로 보는 것. 그는 이곳에서 나온 아사달 문양(사진 가운데 윗부분)이 그 증거라고 확신했다.

 

1961년 이곳에서 출토된 다량의 형이형 토기에는 이상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신교수는 이 팽이형 토기는 고조선 전기(신석기)문명 특유의 토기 형식이며, 여기에 새겨진 아사달 문양이야말로 고조선과의 연관성을 증거하는 결정적 자료라고 주장했다.

 

이 상형(象形)문양을 풀이하면 결국 '아사' 는 아침의 고조선어고 ''은 산을 뜻하는데, 이를 합쳐 하나의 '아사달' 로 표시하면 고조선 말에 의한 나라와 수도 이름을 뜻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팽이형 토기를 제작해 쓰던 대문구의 동이족은 고조선족이라는 해석이다.

 

 

 

 산동반도 대문구문화 유적에서 출토된 아사달문양이 새겨져 있는 팽이형 토기.

 

신교수는 이런 주장을 이른바 '고조선문명론' 이라는 거대한 가설 속에서 분석한다. 그는 이번 논집보다 먼저 나온 한국민족의 형성과 민족사회학(지식산업사)이란 책에서 "세계 4대 문명인 황허(黃河)문명에 버금가는 '고조선 문명'  BC 2400년을 전후로 대동강에서 랴오허(遼河)의 서쪽에 이르는 방대한 지역에 걸쳐 형성됐다" 는 가설을 제기했다.

 

대문구 문화는 바로 이런 고조선 문명권의 영역 하에서 고조선족의 후예들이 세운 문화라는 이야기다. 이런 주장은 지금껏 학계에선 누구도 한 바가 없어 논쟁거리가 될 것 같다. 정재왈 기자

(출처; http://news.joins.com/article/4052315)

 

4.4 신개류유적(密山 新開流 遺蹟); 6100년 전(BC 4100년)

『中國 黑龍江省 密山縣 興凱湖畔에 위치한 신석기시대 유적으로, 1972년 발굴되었으며, 면적은 약 24,000㎡에 달한다. 新開流 유적은 상· 2층으로 나뉘는데 하층은 방사성탄소보정연대로 B.C. 4100년 무렵에 해당한다.

 

유적에서는 10여 기의 원형(圓形) 혹은 타원형(?圓形)의 물고기 저장움이 나왔는데, 움(竪穴) 안에는 물고기뼈가 가득 차 있었으며 그밖의 신석기문화 유적은 찾지 못했다. 출토유물 가운데에서는 물고기잡는 도구가 가장 풍부하며, 그 중에서도 세석기(細石器)가 가장 많아서 삼각형 원저촉(圓底鏃), 유엽형요저촉(柳葉形凹底鏃), 긁개, 새부리형 찌르개 등이 특징적인 유물이다. 뼈나 뿔로 만든 도구도 많고 복잡한데 물고기 잡는 창, 작살, 물고기 꿰는 핀, 투창, 낚시, 살촉, , 비수, 칼손잡이 등이 나와 물고기잡이 위주의 생업경제를 잘 보여주고 있다.

 

토기는 모래 섞인 것이 많으며, 기형(器形)은 관(罐), 바리(鉢) 두 종류로 손으로 빚어 만들었다. 무늬로는 물고기 비늘무늬와 물고기모양에 가까운 마름모 무늬가 특징적이다.

 

무덤은 32기를 찾아냈는데 1차장과 2차장이 있으며 2차장이 대부분이다. 1차장은 홀로 묻은 것이나 2차장에는 혼자 묻은 것(單人葬)과 여러 사람을 같이 묻은 것(多人葬) 2가지가 있다.  1차장 옆에 2차장을 만든 것도 있다. 장법(葬法)으로는 펴묻기(伸展葬)가 많으나 굽혀묻기(屈身葬)도 있으며, 껴묻거리(副葬品)는 비교적 풍부하여 생활용품과 생산도구들을 주로 넣었다. 新開流 유적의 발굴은 중국 동북 북부지방의 신석기시대 사회문화 발전의 특별한 예를 보여주는 것으로서 중요하다.』

(출처; 한국고고학사전(2001),

http://portal.nrich.go.kr/kor/archeologyUsrView.do?menuIdx=792&idx=11549)

 

4.5 세로보문화; 6000년 전~5000년 전(BC 4,000~BC 3,000)

토기의 형식과 문양은 이사코보문화와 매우 유사하며, 다른 문화와 달리 주거지가 다수 발견되었다. 이사코보문화와 비슷하게 토광을 파고 그 둘레를 석판으로 돌린 것이지만 석판이 더 크고 정교하게 배치되어 있어 일부 석판묘로 볼 수 있는 것도 존재한다. 첨저포탄형의 토기 중 일부에서는 저부를 향한 삼각형 파수가 존재한다. 토기 표면은 그물 같은 것을 덮어서 표면을 만든 후 정면구로 정면을 하고 구연부에는 반관통 공열문을 시문한 경우와 긴 사선문이 횡렬로 압인되고 구연부에 각목이 된 경우로 구분된다. 낚시바늘·작살·물고기모형·어망추 등 어로도구가 다수 발견되었다. 후기 세로보문화에는 판암계 석제의 낚시바늘 몸통에 골제·목제·판암계의 낚시바늘 끝을 달아 조립한 조합식 낚시바늘이 확인되어 한반도 신석기시대 조합식 낚시바늘과의 유사성이 주목된다. 주거유적에서는 돌로 외곽을 돌린 노지, 훈제고기와 절인 물고기를 저장하기 위한 대형 저장공이 확인되었고, 주거지는 원추형 천막이나 막사형의 지상가옥으로 추정된다. 

 

 

 

세로보문화 출토유물(최몽룡 외 2003:177)

 

연대는 B.C.4,000년기 중반~B.C.3,000년기 말엽이다.

세로보문화 이후에는 초기청동기시대인 글라즈코보문화가 이어진다.

(출처; 김동훈, 시베리아동부 바이칼 일대의 고고유적과 문화프리바이칼 소해협과 자바이칼 울란우데의 주요유적을 중심으로, 러시아연구 제21권 제2)

 

4.6 자이사노브카문화(Zaisanovka文化); 6000년 전~3500년 전(BC 4000년~BC 1500년)

『자이사노브카문화는 러시아 연해주의 신석기시대 후기를 대표하는 문화이다. 연해주의 최남단 하산지구(두만강 하류)의 자이사노브카-1유적에서 침선문토기를 비롯해서 새로운 형식의 토기가 확인되면서 자이사노브카문화가 설정되었다. 애초에는 침선문토기와 뇌문토기가 유적을 대표하였고, 압날·압인문토기 중심의 루드나야문화와 가장 대비되는 요소였다.

 

그러나 2000년대 들어서 새롭게 크로우노브카-1, 자이사노브카-7 유적이 발굴되고, 한 주거지 내에서 침선문토기와 함께 압날승선문토기가 출토되었다. 또한 레티호프카, 노보셀리셰 유적 등에서는 횡주어골문이 아닌 궁형문의 침선문토기 등이 확인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종전의 자이사노브카문화의 개념을 수정하게 하였다.

 

자이사노브카문화는 지역에 따라 두만강 유역을 중심으로 한 자이사노브카유형과 한카호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또한 자이사노브카문화의 지역을 넓혀서 두만강유형, 한카호유형, 목단강유형으로 구분되기도 한다.

주거지는 크로우노브카-1유적의 4·5호 주거지가 가장 양호하게 잔존한다. 강에 의해서 일부 파손되었지만, 평면형태가 말각방형에 가깝고, 중앙에 노지가 설치되었다. 주거지 벽 가까운 곳에 저장구덩이도 확인된다. 그보즈제보-4유적에서는 수혈이 확인되지 않고 기둥구멍과 노지만 확인된 지상식주거지도 발견되었다.

 

토기는 이른 시기에는 압날승선문토기와 자돌점선문토기, 늦은 시기에는 침선문토기가 유행하며, 연해주 내륙에서는 남쪽 해안가 보다 더 늦게까지 침선문토기가 지속된다. 토기문양을 기준으로 자이사노브카문화를 승선문과 자돌점선문이 사용되는 전기, 침선문이 주류는 중기, 침선문이 퇴화되며 무문토기 양이 증가하는 후기로 세분하기도 한다. 자이사노브카문화는 기원전 4000년 기 중엽부터 기원전 1500년대까지 지속된다.(김재윤)』

(출처; 한국고고학 전문사전(신석기시대편),

portal.nrich.go.kr/kor/archeologyUsrView.do?menuIdx=795&idx=1213)

 

4.7 궁산문화(弓山文化); 6000년 전~2200년 전(BC 4000년~200년)

북한에서 1950년 온천 궁산유적을 처음 발굴한 이후 이 지역의 신석기시대 물질문화양상에 대하여 명명하면서 비롯된 것이다. 1957년 봉산 지탑리유적의 발굴에서 궁산문화는 전기와 후기(1기와 2기)로 나뉘게 되었다. 이후 평양 금탄리유적 발굴보고서에서 금탄리를 1·2문화층으로 나누어보고 이를 기존의 ‘궁산문화’에 후행하는 것으로 설정함으로써 실질적으로 궁산문화는 4기의 편년 틀을 갖추게 된다. 1970년대 중반 이후 금탄리 1·2문화층을 ‘궁산문화’속에 포함시키면서 궁산문화 4기 편년체제가 공식화된다. 그 이후 평양 남경유적의 발굴(1979∼1981년)을 통해 남경1기와 2기를 설정함으로써 궁산4기를 2단계로 세분하게 되어, 현재 궁산문화는 5기의 편년체제 속에서 이해되고 있다.

 

1990년대 후반 이후 북한에서는 고고문화의 설정을 체계화시키면서 청천강 이남 및 남한전역을 포함하는 둥근밑 토기문화를 운하문화라는 하나의 문화로 설정하고 궁산문화는 그 하부의 지방유형으로 파악하고 있다.

 

궁산1기 유적으로는 궁산유적의 일부와 지탑리유적 1지구 1호주거지가 대표적이다. 이 단계는 타래문 등의 곡선계 문양이 아직 등장하지 않은 순수한 3부위 구분시문토기를 중심으로 한다. 구연부 문양은 점열문이 많으며 소수의 단사선문이 있다. 동체부 문양은 종주어골문으로 대표되며, 기타 능형문, 횡주어골문도 소량 확인된다. 평저발형토기에는 구연부 점열문 아래에 능형문이나 점열파상문을 부가문으로 시문한 예들도 확인된다. 저부 문양은 사선대문, 횡주어골문이 기본이 된다. 전체적으로 문양이 매우 정연하게 시문되며, 평저발형토기는 동체부 이하가 무문으로 남겨진 예들이 많은 반면 첨저 심발형토기는 3부위 시문이 엄격하게 잘 지켜졌다. 기종은 크게 심발과 발, 무경호, 뚜껑 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소형 발형토기는 주로 평저인 반면 나머지 기종은 첨·원저를 이루고 있다.

 

궁산2기는 지탑리유적 2지구 2호 및 3호 주거지 조사성과를 토대로 1기와 분리되었으며 봉산 마산리유적 조사를 통해 그 양상이 더 자세히 알려지게 되었다. 궁산유적의 일부, 온천 용반리유적의 일부, 청단 소정리유적 2지점 1호, 3지점 1·2호, 인산군 주암리유적 등이 이 단계에 해당하는 유적들이다. 이 단계의 가장 큰 특징은 타래문, 중호문으로 대표되는 곡선계 점열문의 등장이다. 기본적인 시문규칙은 궁산1기의 전통을 그대로 유지하여 구연문으로는 여전히 점열문이 많이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구연문과 동체문 사이에 부가문(또는 어깨문)이 시문되는 사례가 많아지며 부가문으로는 주로 중호문이 많다. 동체부에는 새로이 타래문이 단독으로 시문되기도 하며 원저발의 경우는 중호문이 동체문이 되기도 한다. 동체부의 기본문양은 여전히 종주어골문이다. 그러나 궁산1기의 종주어골문에 비해 상하로 압축된 형태의 종주어골문이 많은 것이 특징이다. 저부 문양은 사선대문과 횡주어골문이 주로 시문되어 이전 단계와 유사하다. 궁산2기의 기종구성은 1기와 마찬가지로 심발과 발, 호로 크게 대별된다.

 

그런데, 지탑리유적 1지구에서는 주거지 퇴적층과 주거지 밖 유물로 보고된 소위 변형빗살무늬토기라고 하는 일군의 토기가 있다. 이 토기들은 지탑리유적 2지구에서는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시기차를 가지는 것으로 이해되어 왔으며 북한에서는 기본적으로 궁산3기 단계의 유물로 편년하고 있다. 그러나 한영희, 미야모토[宮本一夫]는 궁산1기와 2기의 사이에 위치시키고 있어 차이가 있다.

 

궁산3기는 금탄리유적 조사를 통해 금탄리 1문화층과 2문화층이 설정되고 난 후, 이들이 궁산문화 내로 공식적으로 편입되면서 설정되었다. 주요 유적으로는 금탄리 1문화층, 평안남도 증산 용덕리, 덕천군 남양리, 영변 세죽리 7호주거지 등을 들 수 있으며, 황해도에도 청룡리, 반월동, 소정리 1지점 등의 유적이 있다. 궁산3기 토기는 금탄리1식토기로 불리며 기본적으로 3부위 구분시문이 사라지고 기면에 2∼3종의 문양을 교대로 반복시문하는 문양패턴이 주류를 이룬다. 주요 문양은 기면전체를 몇 개의 구획대로 나누는 구획문이라 할 수 있는데, 다치의 횡선문 또는 다치압날문이 있고, 그 내부를 충진하는 문양으로 삼각집선문이 주로 사용되며 기타 횡주어골문, 능형집선문 등도 보인다. 저부에는 횡주어골문이 시문되는 예가 많다. 호형토기에는 전단계의 특징을 잇는 것으로 보이는 침선화한 타래문이 확인된다. 기종은 크게 심발형과 호형토기로 나뉜다. 앞 단계까지 존재했던 평저발형토기가 보이지 않는데, 유적 수의 부족에서 기인하는 현상으로 생각된다. 심발형토기는 내만하고 배가 부른 기형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태토에 활석이 많이 첨가되는 것도 이 단계의 큰 특징이다. 이 단계, 이 지역의 토기가 주변의 넓은 지역 즉 한강유역, 금강하구, 강원 영동지역 등에서 소량씩 확인된다.

 

궁산4기는 금탄리 2문화층, 금탄리2식토기로 대표된다. 주요한 유적으로는 금탄리유적, 남경유적, 평양 장촌유적, 표대유적 등을 들 수 있다. 금탄리2식토기의 기본적인 특징은 전면 또는 저부를 제외한 전면에 횡주어골문을 시문하는 동일계토기, 띠대문, 1열의 융기문 등을 들 수 있고, 기형상에서 외반구연이 많아지며 배가 부르고 저부가 원저화하는 경향이 많아지는 특징을 들 수 있다. 또한 무문양토기가 현저하게 많아지는 현상도 이 단계에 두드러진다. 남경유적의 조사를 계기로 남경1기와 2기라는 2개의 소단계로 세분되었다. 남경1기는 주로 활석질태토로 2기와 구분된다. 기종은 여전히 심발형, 발형, 호형토기로 나눌 수 있다. 심발형토기에는 저장용으로 생각되는 초대형의 토기가 두드러진다. 활석 첨가 태토가 이 단계의 이른 시기를 제외하면 거의 사라지고 모래질 태토로 바뀌게 된다.

 

궁산문화의 주거지는 시기에 따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궁산 1·2기의 주거지는 지탑리유적 1지구 1호주거지, 2지구 2·3호 주거지, 궁산유적의 예를 볼 때 방형 및 원형 평면이 기본이다. 내부시설로는 주거지 중앙에 위석식의 노지가 있으며, 기둥배치는 일관되지는 않으나 기본적으로 4주식으로 생각된다. 이 지역 주거지 내부시설 중 특이한 것은 노지 근처에 설치된 토기 저장시설(?)이다. 대형토기의 저부를 떼어내고 거꾸로 주거지 바닥에 박아 넣은 시설인데, 이 시설에 대해서는 저장시설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듯하나 구체적으로 어떤 용도인지는 아직 불분명하다. 궁산1기부터 보이며 궁산3기의 예는 아직 없지만 궁산4기에도 보이기 때문에 궁산문화 전 기간을 통해서 사용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외의 시설로는 반원상으로 돌출한 출입시설이 지탑리와 마산리유적에서 확인된 바 있다.

 

궁산3기가 되면 금탄리나 남양리, 용덕리 유적에서 보듯이 새로이 장방형주거지가 등장한다. 내부시설 중 노지는 기본적으로 수혈식이 사용되는데, 주거지의 정중앙에서 벗어나 단벽 쪽으로 치우친 곳에 위치하는 것이 특징이다. 평면형은 원형 또는 (장)방형이며 노지 주위를 점토로 돌리거나 바닥에 점토를 바른 예가 확인된다. 이러한 노지형태는 궁산4기로 이어지게 된다. 궁산4기의 주거지는 크게 2가지 형태로 나눌 수 있다. 첫번째 형태는 방형 평면 주거지로 주공이나 노지는 잘 확인되지 않으나 위석식 노지가 확인되기도 한다. 주로 소형이다(금탄리 5호주거지, 남경 37호주거지 등). 다른 한 형태는 장방형 평면에 긴 복도식 출입구를 가진 주거지로 내부에는 중앙에(장)방형 노지가 있는 형태이다(남경 12호주거지, 소정리 1·2지점). 이러한 주거지 중에는 2단 굴광을 한 예도 보인다. 남경유적 31호주거지는 2단 굴광에 내부공간은 대형 장방형 평면을 하고 있으나 복도식 출입시설은 보이지 않는다.

 

궁산문화의 주거지는 이와 같은 변화를 보이는 것으로 정리할 수 있는데, 원형 또는 방형에서 시간이 흐름에 따라 방형 또는 장방형으로 변화하는 양상은 주변지역의 양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한강 이남지역에 방형계 주거지가 궁산 2·3·4기 단계에서도 크게 유행하는데 반해 평안남도 황해지역은 궁산3기 단계부터 장방형주거지가 등장하여 궁산4기 단계에는 장방형주거지가 유행하는 것은 차이점이라 하겠다. 또한 현재까지 자료로 보는 한 후기 단계에 이르기까지 하천변 충적지가 주요한 입지로 유지되고 있다는 점도 주변지역과 다른 점이다. 주변지역에서는 후기로 가면서 구릉상 입지가 현저해지기 때문이다.(임상택)』

(출처; 한국고고학 전문사전(신석기시대편),

;portal.nrich.go.kr/kor/archeologyUsrView.do?menuIdx=795&idx=539)

 

4.8 용강 궁산리유적(龍岡弓山里遺蹟); 6000년 전~5000년 전(BC 4000년~3000년)

『북한 평안남도 온천군 궁산마을에 있는 석기시대 신석기의 빗살무늬토기 등이 출토된 조개더미.

1950년에 북한의 조선물질문화유물조사보존위원회 고고학부에서 발굴하여 움집 5기와 6개의 구덩을 찾았다. 집자리는 대개 원형이며 바닥은 찰흙으로 다졌고 화덕〔爐址〕과 기둥구멍이 드러났다. 화덕 곁에서는 밑창을 떼어내고 거꾸로 박아놓은 큰 토기들이 출토되었다. 이 속에 녹색 염토가 굳어 있는 것은 유기물이 썩은 것으로 보인다. 즉 저장을 위한 움이었을 것이다.

 

광량만에 닿은 벌판의 해안을 따라 남북으로 뻗어 있는 해발 100m 미만의 구릉 가운데에는 궁산마을에 접한 2개의 언덕이 있다. 이 중 남쪽의 해발 20m의 것을 소궁산이라고 한다. 유적은 이 소궁산의 동남쪽으로 향한 경사면에 위치해 있다.

 

제1호 집자리는 120∼130 깊이의 둥근 형태로 지름은 5.6∼5.8m이다. 테두리 가장자리를 돌아가며 남아 있는 기둥구멍은 모두 안쪽으로 기울어져 있어 원추형 집으로 판단된다. 바닥은 단단하게 다졌다. 집자리 중앙부에는 지름 80∼90㎝의 원형에 가까운 30 깊이의 화덕이 있었고 그 둘레에는 깨진 판돌조각을 올려놓았다.

 

제3호 집자리는 제1호에서 서북쪽으로 약 50m 거리에 있었다. 분명하지는 않지만 지표에서 120∼130 깊이의 풍화된 암반층에 있었고 화덕자리가 있었다. 제4호 집자리는 밑테두리 지름 5.2∼5.5m, 윗테두리 지름 약 6.2m로 불규칙하였다. 깊이는 북쪽에서 남쪽으로 가면서 점점 얕아져서 남쪽 끝은 55㎝였으나 남쪽 일부가 파괴되어 정확한 규모는 알 수 없었다.

 

바닥은 5 두께로 진흙으로 다졌고, 중앙부분에 지름 약 80㎝, 길이 약 20 규모의 화덕이 있었고 안은 재로 가득 차 있었다. 화덕 옆에는 토기가 거꾸로 놓여 있고 밑부분은 없어져 있었다. 이 토기 안에는 조개껍데기와 생선뼈 등이 담겨 있었고 판돌로 덮여 있었다.

 

제2호 집자리는 제4호 집자리가 폐기되고 난 뒤에 퇴적된 조개껍데기를 들어내고 마련된 것이다. 깊이는 약 70㎝에 이르나 파괴되어 정확한 규모는 알 수 없다. 남북 85㎝, 동서 75 규모의 화덕이 있었고 그 둘레는 진흙으로 테두리를 만들었다.

 

제5호 집자리는 제2호 집자리의 동남쪽 약 200m 거리에 있었다. 긴축〔長軸〕을 동북-서남선상에 두고 있는 부정형 원형이다. 중앙부의 길이 5.2m, 동북쪽 너비 2.9m, 서남쪽 너비 4m이다. 동남쪽으로 약간 치우쳐 있는 화덕은 남북 약 50㎝, 동서 약 70㎝, 중앙부 길이 약 35㎝이다.

 

출토유물로는 빗살무늬토기편·민무늬토기편·돌촉〔石鏃〕·돌창편〔石槍片〕·그물추〔漁網錘〕·갈돌·돌괭이〔石鋤〕·돌도끼〔石斧〕·돌대패·돌끌〔石鑿〕·숫돌〔砥石〕·뼈송곳〔骨錐〕·뼈바늘〔骨針 등 다수가 있다. 이 유적은 유구 및 출토유물을 통해볼 때, 우리나라 신석기시대의 시기를 달리하는 주거지유적임이 분명하다.

 

의의와 평가

이 유적은 서해안 신석기문화를 대표하며 이곳의 문화상을 ‘궁산문화’라 부른다. 1·3·4호 집자리는 궁산문화 1기로 BC 4000년 기에 해당하며, 2·5호 집자리는 궁산문화 3기로서 BC 3000년 기 중반으로 편년되고 있다. 집필(1996년) 조유전, 개정(2009년) 강성봉(성균관대학교)』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Contents/SearchNavi?keyword=%EC%9A%A9%EA%B0%95%EA%B6%81%EC%82%B0%EB%A6%AC%EC%9C%A0%EC%A0%81&ridx=0&tot=1258)

 

4.9 영변 세죽리 유적(寧邊 細竹里 遺蹟); 6000년 전~2300년 전(BC 4000 ~ BC 4C)

『평안북도 영변군 영변읍 세죽리에 있는 선사~고대 유적으로 청천강가의 하안충적층(河岸沖積層)에 있다. 1961년 홍수로 무너진 강가의 지층에서 유적을 찾아 고고학 및 민속학연구소에서 1962~63년에 걸쳐 2차례 발굴하였다. 발굴은 4개 지구에서 3개의 문화층이 확인되었고 집자리(住居址) 27기가 나왔다.

 

아래로부터 1문화층은 신석기시대, 2문화층은 미송리-묵방리형(美松里-墨房里型)토기가 나오는 청동기시대 또는 고조선시기, 3문화층은 철기와 노끈무늬(繩蓆文) 토기가 나오는 고대 문화층으로 고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유적으로 볼 수 있다.

 

신석기시대에 해당되는 1문화층에서는 집자리 1기(7호)와 포함층이 조사되었다. 움집터는 홍수에 일부 깎여나간 상태로 장축, 단축, 깊이가 4.5×3.5×0.7m 규모로 남아있다. 움집의 바닥은 진흙으로 다졌으며 중앙부에 화덕자리(爐址)가 있다. 집터 안에서는 띠무늬, 세모꼴무늬, 무지개무늬가 조합된 빗살무늬토기(櫛文土器)들이 출토되었다. 포함층에서는 몸통에 각이 져 있는 납작바닥의 바리형(鉢形) 토기에 생선뼈무늬(魚骨文)가 시문되어 있는 것이 출토되었고, 석기로는 갈판(?石)과 발화석(發火石) 및 곱돌장식품 등이 출토되었다. 보고자들은 이 유적의 집터 안에서는 금탄리 1문화층의 유물들이 주로 출토되지만, 포함층에서는 금탄리 2문화층과 압록강 유역의 빗살무늬토기가 보이는데 이를 시기차이에서 오는 결과로 해석하였다. 이에 따라 시기구분도 움집 안은 B.C. 3000년 기 전반기로, 포함층은 B.C. 3000년 기 후반기로 편년하였다. 그리고 압록강 유역의 신석기문화 유형에 속하는 것으로 인용되어 왔다. 그러나 1990년대에 들어와 북한지역의 신석기 시기구분이 크게 바뀌면서 세죽리 유적에 대한 관점과 편년도 많이 달라지게 되었다. 즉 꼬불무늬(??之??字文)가 출토된 미송리 유적의 연대를 신락 유적과 대비하여 B.C. 6000년 기(신석기시대 전기)로 올려 잡게 되자 세죽리 유적 1문화층도 상향 조정되어 신석기시대 중기 즉 B.C. 4000년 기 후반에 넣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집터 밖의 포함층 연대는 B.C. 3000년 기 전반(신석기시대 후기)에 편년되고 있다.

 

청동기시대에서 해당되는 2문화층에서 나온 집자리를 보면 네모꼴(方形) 평면의 움집으로 규모는 작은 편이다. 27호 집자리의 경우 길이, 깊이가 3.7×0.7m 정도이다. 27호 집자리는 10?28호 와 함께 청동기 시대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것이고, 그 위에 6?24호 집자리가 놓였으며 가장 늦은 시기에 해당하는 것으로는 4?20?23호 집자리가 있다. 이른 시기의 집자리에서는 덧 입술에 납작 바닥을 한 토기와 목이 달린 단지, 덧띠를 붙인 그릇들이 있다. 중간층에 있는 집자리에는 바리(鉢), 검은간토기(黑陶), 그리고 띠 손잡이 달린 그릇이 나왔다. 늦은 시기에 해당하는 집자리에서는 묵방리형토기와 회색 빛갈의 굽다리접시(高杯)가 나왔다. 석기로는 돌창(石槍), 돌화살촉(石鏃), 돌도끼(石斧), 반달돌칼(半月形石刀), 턱자귀(有段手斧), 홈자귀(有溝手斧), 달도끼(環狀石斧) 등이 있다. 2문화층의 연대는 B.C. 4세기 이전에 해당된다.』

(출처; 한국고고학사전(2001),

http://portal.nrich.go.kr/kor/archeologyUsrView.do?menuIdx=792&idx=11414)

 

4.10 봉산 지탑리유적(鳳山 智塔里遺蹟); 6000년 전~5500년 전(BC 40003500)

황해북도 봉산군 지탑리에 위치한다. 주변으로는 서흥천이 흐르고 있으며 유명한 지탑리토성이 위치한 곳이다. 지탑리유적은 1954년 지탑리토성을 지표조사하는 과정에서 시대를 달리하는 유물을 확인한 후 1957년에 발굴조사 하였다. 지탑리유적은 크게 I지구와 지구로 나뉘는데, I지구는 지탑리토성 내 동북모서리 부근에 위치하며, 지구는 I지구로부터 동남방향으로 약 750m 떨어진 지점의 반전차 참호가 굴착된 곳을 선정하여 발굴조사 하였다. I지구는 1957 4 13일부터 5 6일에 걸쳐 발굴하였으며 층위단면 조사를 위해 5 22일에 하루 더 조사하였다. I지구에서는 8×6m의 구획을 3개 굴착하였는데, 신석기시대 주거지 1(1호주거지), 고대의 건축유구인 주춧돌을 확인하였다. 지구에서는 8×6m의 구획을 6개 굴착하였는데, 신석기시대 주거지 2(2·3호 주거지) 및 파괴된 주거지 1, 팽이형토기 관련 문화층을 조사하였다.

 

지탑리유적 I지구의 층위는 표토층-(중세문화층)-고대문화층-원시문화층으로 구분된다. 고대문화층(5060)에서는 주춧돌과 벽돌무지, 돌무지, 다량의 기와 및 화분형토기, 철재(鐵滓) 등이 출토되었다. 원시문화층(2030)은 사질양토층으로 1호주거지(G1)가 조사된 지점에서는 주거지퇴적층(사질점토층)-점토층-바닥층(검은 재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두께 10의 점토층은 주거지가 화재로 폐기되는 과정에서 지붕에 덮였던 흙이 무너져 내려 퇴적된 것으로 해석하였다. 따라서 점토층 위에서 출토된 것은 주거지퇴적층 유물로 분류하였다. 주거지퇴적층과 고대문화층에 의해 교란된 층에서는 활석질의 변형빗살무늬토기, 석면 혼입의 무문양토기, 팽이형토기, 마치와 메, 편암조각 등이 출토되었다. 바닥층에서는 활석질의 변형빗살무늬토기나 석면질의 무문양토기는 출토되지 않았고, 첨저의 석면질 빗살무늬토기, 평저의 점선무늬 토기, 화살촉, 창끝, 도끼 갈돌과 갈판 등이 출토되었다. 바닥층에서는 퇴적층에서 출토되었던 마치와 메, 편암조각 등은 출토되지 않았다. 이처럼 토기와 석기에서 집자리퇴적층과 바닥층은 서로 차이를 보이는 것으로 이해하였으며 이를 시간에 따른 차이로 해석하였다. 원시문화층 아래는 모래층의 생토층으로 중간 중간에 자갈층이 끼어 있어 본래 하상층이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지구의 층위는 2구획의 층위단면을 기준으로 하여 아래로부터 I(적색사질점토층-원시문화층, 7080), (사질층,무유물층, 2030),(흑색사질점토층-고대문화층, 5060), (부식토층-중세문화층, 2030), V(경작층, 2030)으로 구분된다. 4구획에서는 생토층 위에 팽이형토기를 내는 층이 확인되기도 하였다. 2기의 주거지(G2·G3) I층의 바닥에서 확인되었다.

 

I지구의 1호주거지는 평면 방형으로 네 변이 각각 6.7m, 6.65m, 7.35m, 7.m로서 서남과 동남변이 약간 더 긴 형태이다. 주거지 어깨선은 지표하 120의 생토층에서 확인되었으며 주거지의 깊이는 4050 정도이다. 주거지의 바닥과 네 벽면은 점토를 발랐는데, 바닥은 두께 약 10, 북벽은 무려 100에 달하고 나머지 벽은 약 20의 점토를 보강하였다. 점토는 굳게 다져진 상태였다. 집은 화재로 폐기되어 내부에서는 다량의 재와 목탄이 노출되었다. 벽가를 따라서는 타다 남은 기둥의 흔적들이 확인되었지만 바닥에서 기둥구멍의 흔적은 찾지 못하여 바닥 위에 바로 기둥을 세웠던 것으로 판단하였다. 출입구는 동남쪽과 동북쪽 두 곳에서 확인되었는데, 동남쪽 출입구는 집밖으로 직경 0.8m의 반원상 돌출부가 경사지게 확인되었으며 동북쪽에서는 집안으로 길이 1.1m, 너비 0.25m의 계단상 출입구가 설치되었다. 노지는 주거지 중앙에 위치하며, 평면 타원형으로 장경(長徑) 1.11.2m이다. 0.15m 깊이의 수혈을 파고 수혈 벽면을 따라 14개의 규암질 자갈돌을 돌린 위석식노지 형태이다. 노지 내부에는 부드러운 재가 가득 차 있었고, 돌들과 주변 흙은 불을 맞아 검붉게 변해있었다. 노지는 1차에 걸쳐 확장되었는데, 처음 노지는 동서 장경 0.8m의 타원형이었다. 이 노지 남쪽에 잇대어 토기저부를 잘라내고 거꾸로 하여 바닥에 박아놓은 토기 저장구멍이 설치되었는데, 노지가 남쪽으로 확장되면서 이 토기 저장구멍 위로 노지의 남벽 돌이 놓이게 되었다. 확장한 노지의 남벽에 잇대어서도 동일한 토기 저장구멍이 확인되었다. 이러한 토기 저장구멍은 주거지 남쪽에서 2, 서남쪽 및 동남쪽 s확인되어 총 6개었다. 이러한 토기들은 구경 3565의 대형 토기들로 석면이 혼합되고 기벽이 얇은 것들이다. 주거지 바닥에서 3040 깊이로 거꾸로 박은 토기 내부바닥은 산화철 성분이 엉켜서 굳어진 5 정도의 붉은색모래층이 확인되었고, 노지 옆의 것은 내부에서 유기질이 썩은 듯한 녹색의 점토층이 깔려 있었다. 토기저장구멍 내에서는 종종 석기가 출토되는데, 화덕 곁의 토기저장구멍에서는 완형의 갈돌과 갈판 한쌍, 파손된 갈판 1, 약간의 토기가 출토되었다. 출입구쪽의 토기 저장구멍들에서는 작은 그물추 10여 점이 출토되었다. 보고자들은 이 시설을 낟알이나 도구를 저장하는 용도로 판단하였다. 주거지 내부에서는 제자리에 엎어 놓은 상태로 발견된 토기들도 여러 점 확인되었다. 토기편들 중에는 화재시 불을 맞아 회색으로 변한 것들이 많았다. 석기도 석촉, , 도끼, 갈돌 및 갈판, 그물추 등이 출토되었는데 갈판은 완형의 것만 4점이나 되며 파손된 것도 23개체분 출토되었다. 토기는 주로 벽가를 따라 확인되었으며 일부는 화덕자리 부근에서 확인되었다. 석기는 토기저장구멍 내에서 발견된 것들을 제외하면 대체로 벽가를 따라 확인되었으며 완형의 갈돌과 갈판의 경우는 동북과 서북쪽에서 출토된 것은 한 쌍씩 뒤집어 놓은 상태로 확인되었다.

 

지구에서는 2개의 완전한 주거지와 1기의 파괴된 주거지를 확인하였는데 2호주거지에서 서남쪽으로 11m 떨어진 곳에 3호주거지가 위치하며, 그 사이에 파괴주거지가 있다. 2호주거지는 모가 죽은 방형으로, 어깨선은 동변 4m, 남변과 서변 4.2m, 북변 4.4m로 넓이는 17이며 바닥은 15로 바닥 면적이 작아 벽선이 완만하게 기울어 있다. 깊이는 0.50.6m이다. 주거지 중앙의 노지는 위석식이며 깊이 0.34m, 면적 56이다. 내부에는 재도 있으나 섬록암, 판암제 석재, 반제품, 돌마치 등이 출토되었다. 노지 동쪽에 잇대어서는 토기저장구멍 자리로 생각되는 수혈이 확인되었다. 주거지 바닥에서는 작은 수혈이 여러개 확인되었으나 기둥배치는 정연하지 않다. 동남모서리에서 계단상 출입구가 확인되었다. 유물은 노지를 중심으로 서부와 북부에서는 석기가, 그 반대편에는 주로 토기가 출토되었다. 주거지 바닥의 남쪽에서는 두 개의 토기가 거꾸로 묻힌 채 확인되었다. 토기 내부에서는 재나 유기질이 썩은 듯한 회색토가 있었으며, 큰 토기 내부에서는 불에 탄 뼈도 출토되었다.

 

3호주거지는 원형에 가까운 말각방형으로 각변 3.2m, 3.2m, 3.8m, 4m로 면적은 약 12이다. 바닥은 점토로 다졌으며 중앙에 장경 1.1m, 단경 0.9m, 깊이 0.2m 의 타원형 노지가 위치한다. 노지에서는 돌은 확인되지 않았으나 원래는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노지 주변에서는 토기 저장구멍자리로 생각되는 수혈이 2개 확인되었다. 기둥자리는 정연하지 않으며, 동남변에서 계단상의 출입구가 확인되었다. 지구 1구획에서는 파괴된 주거지가 확인되었는데, 보습이나 토기가 일괄로 출토되는 양상을 확인하였으나 주거지 윤곽은 확인하지 못하였다.

 

1호주거지에서는 30여 개체에 달하는 토기가 출토되었다. 토기는 기본적으로 장란형을 띠며 일부 평저의 토기가 있다. 태토에는 석면을 많이 섞었으며 활석을 함께 섞은 것도 많다. 문양은 전면에 걸쳐 시문하였으며, 구연부에는 주로 점열문을, 동체부에는 종주어골문으로 세로로 그은 이깔잎무늬를 주로 시문하였다. 저부쪽에는 횡사선대문이나 횡주어골문을 시문하였다. 일부 평저토기에는 구연 점선 문양 아래 파상점열문을 한 줄 돌리기도 하였다. 당시 보고자들은 장란형의 토기와 평저계 토기를 서로 다른 계통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주거지 출토 석기는 활촉, 창끝, 도끼, 갈돌 및 갈판, 숫돌, 그물추, 마치, 닦음돌 등이 있다. 이 중 도끼는 전면을 잘 마연한 합인사릉부(蛤刃四稜斧)로 특징적이다. 갈돌은 총 9, 갈판은 7점이 출토되어 양이 많다. 갈돌은 단면 원형, 반원형의 봉상이며, 갈판은 대체로 평면 장방형으로 사용에 의해 중앙이 오목하게 되어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주거지 퇴적층 및 각 구획에서 출토된 토기들 중에는 주거지 바닥 출토 토기와 차이를 보이는 것이 많은데, 태토에 활석을 다량으로 혼입하고, 첨저보다는 원저가 많은 특징이 있다, 특히 문양에서 구연부 점열문 밑 동체부에 침선으로 거치상의 이중구획을 하고 그 내부에 격자문을 채워 넣은 것이 많다. 이 토기를 보고자들은 소위 변형빗살무늬토기로 부르고 있다. 여기에는 가로고리형의 손잡이가 붙은 것도 여러 점이다. 석기들도 주거지 바닥층보다 다량 출토되어 석촉 40여 점, 도끼 14, 갈돌 36, 망치류 60여 점, 편암제 박편 등이 확인되었다. 주거지 퇴적층은 층위와 유물상에서 바닥층에 후행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지구의 토기는 여전히 석면을 혼입한 것이 압도적으로 많고, 활석을 혼입한 것도 상당량에 이른다. 구연부는 점선열문이 시문되는 전통이 강하며, 동체부에는 종주 어골문 이외에 점열에 의한 타래문(점선물결무늬, 파상점선문)이나 중호문을 시문한 것들이 새로이 유행하게 된다. 석기상에서도 농경과 관련되는 굴지구인 대형의 보습 또는 따비형석기가 60여 점이나 출토되었고 낫도 8점이 출토되었다. 보습 중에는 길이가 65에 이르는 대형도 있다. 이외에 갈돌 및 갈판, 도끼와 자귀, , 석촉과 찔개살, 그물추, 숫돌, 망치류, 고석 등 기타 석기들은 I지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외에 2호주거지에서 토기에 담긴 탄화곡물이 출토되었는데, 정확한 감정은 거치지 않았고 조 또는 피로 보고되었다. 2호주거지에서는 석면덩어리도 출토되었다.

 

지탑리유적은 중서부지역을 대표하는 신석기시대 유적으로 I지구와 지구의 유물 차이에 근거해 궁산문화를 전기와 후기로 나누어볼 수 있게 해 준 유적이다. 지탑리 I지구 단계는 현재 궁산1기로, 지탑리 지구는 궁산 2기로 불리는 시기로 중서부지역에서는 가장 이른 전기 단계인 기원전 4000년 이전3500년 무렵에 해당된다.

 

지탑리유적은 학사적으로 궁산문화의 첫 세분을 가능하게 해준 점에서 높이 평가되며, 궁산문화 주거지의 특징을 잘 밝혀준 유적이기도 하다. 또한 지구의 보습류와 낫 등 농경관련 도구와 조 또는 피로 보고된 탄화곡물의 확인을 통해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신석기시대의 농경관련 자료를 구체적으로 확보하기도 하였다. 이를 통해 북한에서는 신석기시대 갈이농사가 이 단계에 이미 이루어졌다고 보았으며 남한 학계에서도 지탑리를 위시한 봉산 마산리, 서울 암사동 유적 등의 이른 단계에 초기농경이 실시되었다고 보는 것이 널리 수용되고 있다.

(출처; 한국고고학 전문사전(신석기시대편),

http://portal.nrich.go.kr/kor/archeologyUsrView.do?menuIdx=795&idx=1302)

 

4.11 서울 암사동유적; 6000년 전~4000년 전(BC 4000~2000)

『사적 제267호. 서울시 강동구 암사동 153-157 일대에 위치한다. 한강변 자연 제방상에 자리잡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알려진 신석기시대의 마을유적으로서는 가장 대규모에 속하며 주거지와 함께 야외 화덕자리, 많은 양의 빗살무늬토기와 각종 석기 등이 확인된 대표적 신석기시대 유적이다. 암사동유적은 일제강점기인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에 많은 양의 유물이 노출되면서 일본인 학자 요코야마[橫山將三郞]의 지표조사에 의해 처음 알려지게 되었다. 해방 이후에는 국내 학자들에 의해 소규모의 발굴조사나 지표조사 등을 통해 유적의 성격이 조금씩 알려지게 되었다. 고려대학교 김정학에 의해 1960∼64년에 걸쳐 6회의 지표조사와 간단한 시굴이 이루어졌고, 1968년에는 한국대학박물관협회가 주관한 국내 최초의 대학연합발굴이 이루어졌으나 서울대학교 역사교육과에 의해 조사된 구역만 보고가 이루어져 2기의 주거지가 보고되었다. 1971년에서 1975년에 걸쳐서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의해 본격적인 대규모 발굴조사가 이루어져 암사동유적이 대규모의 신석기시대 마을유적임이 분명해지게 되었다. 1971년에 주거지 8기, 1973년에 주거지 1기, 1974년에 주거지 6기, 1975년에 주거지 11기와 적석유구 1기가 조사되었다. 이러한 조사 성과에 힘입어 1979년 암사동유적은 사적 제267호로 지정 되었다. 이후 유적공원을 조성함에 따라 다시 1983년과 1984년에 긴급조사가 이루어지게 되었으며 이때 2기의 주거지가 새로이 조사되었다. 1988년 공원조성과 함께 유물전시관도 건립되어 일반에 공개되고 있다. 1998년 전시관 확장에 따른 조사에서도 3기의 주거지가 추가로 조사되었으며 이후 암사동유적 관리계획과 관련하여 여러 차례 조사가 진행되기도 하였다.

 

암사동유적에는 지표 아래 크게 3개의 문화층이 존재하고 있다. 제1문화층으로 불리는 최하층은 신석기시대에 해당된다. 여기에서는 현재 총 30기 가까운 주거지가 조사되었는데, 아직 조사되지 않은 지역의 면적까지 고려하면 암사동에는 이보다 훨씬 많은 주거지가 존재하고 있었을 것이다. 제2문화층은 청동기시대의 유물이 확인된 바 있으며 최상층에 해당되는 제3문화층에서는 6각형 주거지 등의 삼국시대 백제 유구와 유물이 출토되어 암사동유적은 신석기시대뿐 아니라 역사시대에 이르기까지 오랜 기간 사람들에 의해 점유되어 이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암사동유적에서 지금까지 조사된 신석기시대 주거지는 총 33기인데, 평면형태는 말각 방형이나 원형을 띠고 있으며 방형이 우세하다. 규모는 평균적으로 원형보다 방형이 큰 편이다. 기둥은 뚜렷한 경우는 4주식이 확인되는데, 집의 네모서리에 기둥을 세우고 도리를 얹은 후 그 위에 서까래를 걸친 형태로 추정되며 이럴 경우 집은 밖에서 볼 때 원뿔형이나 사각뿔의 형태를 하게 된다. 주거지 중앙에는 노지(爐址)가 있는데 할석이나 천석을 돌린 위석식으로 평면 원형과 방형이 있다. 대체로 주거지 평면형태와 노지의 평면형태가 일치한다. 75-2호주거지에서는 노지의 남쪽에 토기를 거꾸로 박아놓은 시설이 확인되었다. 이러한 시설은 북한지역의 온천 궁산, 봉산 지탑리, 평양 금탄리 유적 등에서 이미 발견된 바 있는데 중서부지역 신석기시대 주거지의 독특한 시설이다. 이 시설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잘 알 수 없지만 아마도 불씨나 곡물, 도구 등을 저장, 보관하기 위한 시설로 생각된다.

 

암사동유적에서는 매우 많은 양의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대부분은 토기와 석기들이다. 토기는 크기와 관계없이 대부분 첨저의 포탄형을 하고 있다. 소형토기 등에서 평저가 보이지만 소량이다. 이 토기들에는 거의 전면에 걸쳐서 문양이 가득 새겨져 있는데, 부위별로 서로 다른 문양을 시문한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특징으로 인해 구분계 빗살무늬토기라고 불린다. 구연부에는 주로 단사선문을 눌러서 시문하였고 조문이나 점열문, 격자문 등도 확인된다. 동체부에는 종주어골문이나 횡주어골문을 침선으로 새긴 것이 대부분이다. 횡주어골문에는 단치구와 다치구로 시문한 것이 있는데, 다치구로 시문한 횡주어골문은 문양 단위가 크고 찰과상으로 얕게 시문되었으며 저부문양이 생략되는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다치구에 의한 찰과상 횡주어골문은 한강유역을 포함한 중부지역에서만 국한되어 확인되는 것으로 대동강유역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이외에도 동체부에는 능형문, 점열 타래문 등 여러 형태의 문양이 시문된다. 구연과 동체부 사이에는 중호문이나 격자문 등 다양한 문양을 채워넣기도 한다. 저부는 횡주어골문, 사선대문, 방사상문 등으로 시문하였다. 이와 같이 토기의 전면에 문양을 가득 채워 넣은 것이 암사동 빗살무늬토기의 큰 특징이자 한강유역 신석기시대 토기문양의 특징이다. 물론 전면을 찰과상 횡주어골문으로 시문한 동일계토기나 토기의 가운데 부분이나 아랫부분에 문양을 그려 넣지 않고 비워두는 경우도 있고 심지어 아예 문양을 새겨 넣지 않은 것들도 있지만 소수이다.

 

토기 이외에 가장 많은 양을 차지하는 것은 식량을 얻거나 생활재료들을 가공하는데 사용되었던 석기들이다. 석기는 크게 용도에 따라 식량 획득용 도구, 벌채, 목공용 도구, 굴지구, 식량처리용 도구, 공구 등으로 나누어진다.

 

식량획득용 도구는 석촉, , 그물추, 채집에 사용되었을 굴지구(堀地具) 등이 있다. 암사동유적에서 나온 석촉은 단면 렌즈상의 무경양익촉이나 단면 편육각형의 삼각촉 형태로 모두 마제이다. 창 역시 갈아서 만들었다. 그물추는 작은 강돌을 골라 양쪽 끝을 깨트려 홈을 만든 일반적 형태이다. 그물추를 통해 그물어로의 존재를 알 수 있지만 암사동유적에서는 동물뼈가 남아 있지 않아 어떤 물고기를 잡았는지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 다만, 강변에 위치하고 있는 점, 다른 유적의 예 등을 고려하면 주로 잉어나 붕어 등을 잡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물추는 매우 많은 양이 출토되기 때문에 당시에 물고기 잡이가 매우 활발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열매나 뿌리를 먹는 식물 등의 채집에는 특별한 도구가 필요 없어 채집용의 도구로 확정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다만 뿌리를 먹는 식물의 경우는 땅을 파야하므로 굴지구는 채집용 도구로도 사용되었을 것이다. 암사동유적에서는 채집의 대상이 되었던 것들 중에서 도토리 열매가 발견된 바 있다. 도토리는 참나무과 열매의 총칭으로 우리나라에는 이러한 도토리가 전국적으로 분포하기 때문에 당시에는 매우 유용한 먹을거리였을 것이다. 실제로 우리나라의 여러 유적에서 도토리가 많이 확인되었고, 남부지역에서는 도토리의 저장구덩이가 발견되기도 하였다. 이외에도 농경도구로 사용할 수 있는 굴지구로 따비형석기 및 괭이형석기가 다량 확인되었고 수확도구로 생각되는 낫이 발견된다. 따비형석기는 보습으로도 불리는 것으로 지탑리유적의 것과 비교했을 때 대부분 소형에 해당된다. 괭이형석기는 대부분 타제로 제작되었고 폭이 좁은 장조형이다. 낫은 마제와 타제가 모두 보인다. 이러한 유물들이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놓은 것으로 보아 암사동유적 주민들은 수렵·채집·어로 이외에 초기농경을 병용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암사동유적에서 실제 곡물은 출토되지 않았지만 주변 유적들의 예를 보면 신석기시대에는 주로 조와 기장을 재배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황해도 봉산 지탑리·마산리, 경기도 시흥 능곡동 유적, 부산 동삼동패총 등에서 실물로 조나 기장이 확인되고 있는 점에서 알 수 있다. 이러한 식량을 가공 처리하는데 사용되었던 도구로는 갈돌과 갈판, 고석이 있다. 봉상 갈돌과 말안장형 갈판이 기본적인 형태이다. 거의 매 주거지마다 확인되고 있는 기본 도구 중 하나이다. 식량의 획득과 가공, 조리에 사용된 도구 이외에는 벌채 목공용의 각종 합인석부와 단인석부, 대팻날, 석착 등이 다량으로 출토된다. 암사동유적에서는 전면마연석부도 있지만 인부만을 마연한 합인과 단인의 석부류들이 더 많다. 합인석부는 횡단면 원형이나 타원형, 렌즈형 등이 일반적이고 지탑리나 궁산 유적에서 보이는 사릉부(四稜斧)는 확인되지 않는다.

 

암사동유적은 오래전부터 중서부지역 신석기시대 이른 시기를 대표하는 유적으로 알려져 왔다. 대동강유역과의 대비를 통해 궁산1, 2기와 병행하는 것으로 판단하는 것이 일반적인 것이다. 그런데 암사동유적에는 대동강유역에는 보이지 않는 다치구에 의한 찰과상 횡주어골문이 가장 많이 존재하고, 궁산3기에 해당하는 금탄리1식토기가 확인되는 등 유적의 존속 시기를 단순히 궁산1, 2로만 한정하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최근에는 암사동유적이 전기 후반부터 중기에 걸쳐 존속했던 것으로 보려는 시각이 늘어나고 있으나, 암사동유적 내에서 층위적으로 이를 분리하기가 어려운 점이 문제가 된다. 최근 주변지역에서 암사동유적보다 단순한 구성을 보이는 토기상이 확인되는 취락유적의 조사가 증가하고 있으므로 암사동유적의 편년문제는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절대연대는 기원전 4000∼3000년 사이가 많으나 기원전 4000년을 넘어서는 연대와 2000년대로 떨어지는 연대도 일부 있다.

 

암사동유적은 명실공히 우리나라의 신석기시대를 대표하는 유적이다. 첨저의 빗살무늬토기문화가 가장 먼저 출현한 지역이 암사동을 포함한 중서부지역이라는 점에서 첨저 빗살무늬토기문화의 등장과 확산을 이해하는데 암사동유적은 가장 중요한 자료 중 하나가 된다. 신석기시대 주거지와 취락의 전개과정을 이해하는데도 역시 암사동유적은 중심적 역할을 한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암사동유적으로 대표되는 중부지역의 빗살무늬토기문화가 동쪽과 남쪽 대부분 지역의 신석기문화의 토대가 되었다는 점이다. 토기의 문양이나 형태, 주거지의 형태 등으로 볼 때 동해안이나 남부지역의 신석기문화는 중기가 되면 암사동유적과 같은 중부지역 문화의 영향을 받아 문화가 크게 바뀌게 되는 것이다. 이와 함께 곡물의 재배와 같은 새로운 기술과 생업방식도 같이 확산된다. 즉 중서부 이남의 신석기문화 전반에 걸쳐 암사동식의 생업방식과 문화가 확산되고 정착되는 것이다. 암사동유적은 이러한 점에서 한반도 중서부 이남 지역의 신석기시대 문화상을 이해하는데 핵심이 된다.(임상택)』

(출처; 한국고고학 전문사전(신석기시대편),

http://portal.nrich.go.kr/kor/archeologyUsrView.do?menuIdx=795&idx=1043)

 

4.12 인천 운서동유적(仁川 雲西洞遺蹟); 6000년 전~3500년 전(BC 40001500)

인천광역시 중구 운서동 은골마을에 위치한다. 유적은 영종도(永宗島)의 서쪽으로 백운산(해발 252m)에서 남서쪽으로 완만하게 뻗어내려 가는 해발 1935m 내외의 나지막한 구릉사면부에 입지한다.

 

유적은 인천경제자유구역 영종지구 영종 하늘도시내 건설공사 부지 내에 대한 지표조사에서 신석기시대 유물이 확인되었고, 2008년도에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운서동유적은 1지점과 2지점으로 나누어져 발굴조사가 진행되었는데, 신석기시대 유구는 주거지 66, 야외노지 12, 패총 1기가 조사되었다.

 

주거지는 해발 1935m 내외의 비교적 나지막한 구릉의 주능선부나 사면부에 조성되었다. 주거지의 평면형태는 원형과 방형이 대다수를 차지하며, 장방형이 1기에 불과하다. 특히 원형과 방형의 주거지는 순수 원형 주거지와 방형 주거지로, 외부는 원형과 방형에 가깝게 굴착한 후 내부는 ()방형으로 생활공간을 조성한 것으로 다시 세분된다. 규모는 길이와 너비가 57m이며, 깊이는 1m 내외이다. 주거지 내부에 조성된 화덕자리는 구덩이를 파고 조성한 수혈식노지(竪穴式爐址)로 일부 주거지에서는 2기의 화덕자리가 시간성을 가지면서 조성되었다. 이러한 주거지의 재사용(再使用)은 인근의 인천 삼목도유적에서도 확인되며, 34기의 군집(群集)을 이루며 확인된다는 점에서 특징적이다. 출입구시설은 원형주거지와 방형주거지의 일부를 제외하면 뚜렷하게 확인되지 않는 경우도 있지만, 외부는 원형이나 방형으로 굴착한 후 내부에 ()방형으로 생활공간을 조성한 주거지는 돌출형·내만형·중간형으로 조성되어 있다. 기둥구멍은 네모서리벽 하단부에 4주식(柱式)의 기둥배치가 많으며, 정형화된 기둥의 배치가 확인되지 않는 것도 있다.

 

야외노지는 구릉의 정상부에 해당하는 주능선부나 완만하게 경사져 내려가는 사면부에 조성되었다. 야외노지의 평면형태는 대체로 원형에 해당되며, 내부에는 10 내외의 할석이 채워져 있는 것이 많다. 야외노지는 주거지가 폐기된 이후 퇴적토 상부에 중복되어 조성되어 있다.

 

패총은 1지점의 북서사면 하단부에 위치하고 있다. 이는 주거지가 입지한 곳과는 반대쪽으로 경사가 급하고 만입부에 해당되는 지역이다. 패총의 규모는 동서길이 약 12m로 소형이다. 유물은 주거지에서 출토된 문양이 소수에 불과하며, 문양이 조잡하거나 정형성이 보이지 않는 토기가 출토되었다. 패각류는 굴이 주를 이루며, 백합 등의 일부 조개류도 출토되었다. 주거지 내부에서 출토된 유물은 토기와 석기류가 있다. 토기는 구연부에 단사선문, 조문(爪紋)이 시문되는 것이 주를 이루며, 일부 점열문 등도 확인된다. 동체부 문양으로는 종주어골문 위주로 구성되며, 횡주어골문, 사선대문 등도 출토되었다. 저부 문양으로는 어골문, 사선문, 무문이 있다. 태토에는 운모가 혼입된 것이 많으며, 석면이 다량 혼입된 토기는 기벽이 얇은 특징을 갖고 있다.

 

석기류는 굴지구(堀地具)와 석영제 석기, 갈돌의 출토량이 많다. 굴지구는 장타원형에 가깝고, 인부(刃部)가 조갯날의 형태로 마연된 것도 다수 확인된다. 석영제 석기는 주판알 형태의 것이 다수 출토되어 주목된다. 그 외에 석부, 석착, 석촉, 찔개살, 어망추 등의 석기류와 장신구로 추정되는 석기도 출토되었다.

 

주거지는 한반도 남부지역에서 조사된 신석기시대 최대규모의 취락으로 존속 시기는 최근의 연구 성과에 의하면 신석기시대 전기 후반인 기원전 40003600년으로 추정되며, 패총과 야외노지 및 57호주거지는 만기인 기원전 23001500년 무렵으로 추정된다.

 

유적의 주거지는 외형과 주생활공간의 분리, 침상시설, 단시설, 출입구의 조성에 따른 공간분할, 출입구나 4주식의 기둥배치를 고려하여 노지의 위치를 치우치게 축조하는 등 기존에 조사된 주거지와는 평면형태, 내부구조에서 많은 차이점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개별 주거지에 대한 검토뿐만 아니라 향후 신석기시대 취락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로 생각된다. 또한 주거지 내부에서 출토된 유물의 분석을 통하여 중부내륙지역에서 조사된 주거지의 구조 및 변화상을 비교·검토하여 한반도 중부이남지역의 신석기시대 편년과 서북한지역과의 관련성을 밝혀낼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이상복)

(출처; 한국고고학 전문사전(신석기시대편),

http://portal.nrich.go.kr/kor/archeologyUsrView.do?menuIdx=795&idx=1151)

 

2019 8 15일 서울경제 기사 5,000년 전 빗살무늬토기 속 곡식흔적

 

 

 

인천 운서동의 전기 신석기 유적의 토기 틈에서 신석기시대 조의 흔적이 발견됐다. /사진제공=문화재청

 

영국의 고고학자 고든 차일드는 농경의 시작을 신석기혁명이라 명명했다. 농경과 함께 나타난 토기와 간석기(갈아 만든 석기)의 출현을 신석기문화의 대표 요소로 들었다. 실제로 신석기시대 유적을 발굴하면 집 자리와 야외 노지 같은 곳에서 토기와 간석기가 자주 발견되며 신석기 유물을 전시하는 박물관이면 어디서든 이들 유물을 볼 수 있다.

 

신석기시대의 대표 유물인 빗살무늬토기에 대해 흔히 그 무늬나 형태에만 주목하는데 토기 표면에 나 있는 작은 구멍도 유심히 볼 필요가 있다. 신석기시대의 농경을 가늠해볼 수 있는 조·기장 등의 재배식물과 당시 생활상을 알 수 있는 팥·들깨·곤충·조개 등의 다양한 흔적이 구멍 속에 남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신석기인들은 토기를 제작하면서 우연히 혹은 의도적으로 식물이나 곡물들을 넣었고 이후 이들이 타고 남아 눌린 흔적이 토기에 종종 남아있다.

 

일반적으로 농경을 확인할 수 있는 고고학적 증거는 불에 타서 남은 종자, 토양이나 갈판에 남아 있는 화분·식물 규산체·전분 등이다. 하지만 이 증거들 중에는 생물교란, 보존환경 등의 문제로 연대 해석이 잘못되거나 식물의 흔적이 보존되지 않아 분석이 어려운 경우도 많다. 토기에 남은 흔적은 적어도 토기 제작연대와 동일한 시기라는 점, 신석기시대 출토 유물의 절대다수가 토기라는 점에서 그 분석이 매우 유용하다.

 

최근 토기에 남은 눌린 흔적을 찾는 조사(압흔 분석)를 통해 한반도 중서부지역인 인천 운서동의 전기 신석기 유적에서 그동안 보고되지 않았던 조와 기장이 발견됐다. 5,000년 전 토기 덕에 당시의 생계활동과 농경 출현 경로 등이 새롭게 조명 받게 됐다. /조미순 문화재청 발굴제도과 학예연구관

 

 

 

양양 송전리 신석기 중기 유적지에서 당시의 곤충 흔적이 발견됐다. /사진제공=문화재청

(출처; https://news.v.daum.net/v/20190815171251339)

 

4.13 통영 연대도유적(統營 烟臺島遺蹟); 6000년 전~4000년 전(BC 4000~2000)

사적 제355(지정명칭은 통영 연대도패총). 경상남도 통영군 산양면 연곡리 24 일원이며 연대도에 위치한다. 연대도는 통영 항에서 남쪽으로 18 떨어져 있으며, 오곡도와 함께 연곡리를 이룬다. 섬은 경사가 급하고, 남쪽 해안에는 높이 10m 가량의 해식애(海蝕崖)가 발달하였다. 북서쪽 해안의 오목한 곳에 연대 마을이 있고 그 동쪽에 유적이 위치한다.

 

섬의 주봉에서 북동쪽으로 가장 깊은 골짜기가 흘러내려 삼각주상의 대지가 형성되어 있는 곳에 패총이 입지하고 있다. 조선시대까지는 이곳에 마을이 있었다고 하며, 발굴조사에서도 그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 현재는 대부분 밭으로 경작되고 있으나 폐교가 된 초등학교 분교와 통신공사 분지점, 어패류 양식장 등을 만들면서 패총의 상당 부분이 파괴되었다. 패총의 최대 범위는 동서 약 240m, 남북 약 180m에 이르며, 패총의 동쪽 부분은 태풍에 의해 여러 차례 훼손되어 단애를 이루고 있다.

 

1980년대 초반부터 학계에 알려져 있었으나, 1987년 태풍 셀마에 의해 파괴되어 단애부가 생기면서 유적이 노출되었다. 발굴조사는 지구와 지구로 나누어져 이루어졌으며, ‘ 지구의 조사 부분에 대해서는 보고서가 발간되었다. ‘ 지구에서는 신석기시대 이른 시기(기원전 40002000년경)의 유물포함층과 무덤군이, ‘ 지구에서는 신석기 중기(기원전 2000년경) 이후의 유물포함층이 확인되었다. ~

 

층위는 다음과 같이 크게 4개의 층으로 정리할 수 있다.

 암반 바로 위에 형성된 흑갈색점토층으로 단애부 F, 단애부 , AM피트의 , PU피트의 층 등이다. 유물이 거의 출토되지 않으며 연대도 신석기시대 가장 이른 시기 사람들의 생활면으로 추정된다.

 

 PU피트의 층에서 비교적 명확하게 나타나는 층으로 큰 자갈과 할석이 포함된 흑갈색부식토층이다. 융기문토기가 출토된다. 5호무덤이 포함되어 있다.

 

 굴을 주종으로 하는 패각층으로 단애부 G, 단애부 의 다층, AM피트의 c, PU피트의 층 등이다.

 

 단애부  E층과 J, 단애부  , AM피트의 a, d, PU피트의 층 등으로 융기문토기와 압인문토기가 많이 출토된다. 5호무덤을 제외한 대부분의 무덤이 포함된 층이다.

 

이를 종합하면 연대도유적 지구의 층위는 두 개의 문화층으로 구분할 수 있다. 상기 은 문화층이 아니다. 의 순패각층을 어디에 포함시키든 상기  의 문화층으로 나눌 수 있다. 는 융기문토기를 내는 남해안 신석기시대의 조기(기원전 40003000년경), 은 전기(기원전 30002000년경)에 편년된다.

지구는 지구의 서쪽에 위치하는 탐색 트렌치와 피트조사 구역이다. 골짜기를 이루는 부분에 형성된 깊은 패총은 약 20여 개의 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바닥까지 완전히 발굴하지 않았다. ‘ 지구보다 늦은 시기에 속하는 남해안 태선집선문토기 이후의 유물과 유구가 조사된 것으로 약보고 되었다.

 

유구로는 무덤과 음식물 조리시설, 기둥구멍, 불을 지핀 시설 등이 조사되었다.

무덤은 모두 15기이나 이 가운데 인골이 같이 나온 경우는 13기이다. 조사지역 내에 매장시설이 밀집하고 있으므로 당시에 이미 생활공간과는 구별되는 매장구역이 정해져 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무덤은 대개 구덩이를 파고 납작한 돌이나 토기편을 깐 뒤, 시신을 놓고 그 위를 작은 돌, 고운 흙, 토기조각 등으로 덮은 방식이다. 7호무덤의 구덩이는 머리 쪽이 발치쪽 보다 넓어 이른바 두광족협(頭廣足狹)을 이룬다. 침향은 대개 서침인데 바다를 바라볼 수 있는 방향이다. 신전장이 대부분이나 특이하게 엎드려 묻은 것으로 보이는 부신장(俯身葬)도 있다. 모두 한사람씩 묻었으나 2호무덤의 경우 신생아의 뼈와 함께 모두 세 사람의 뼈가 찾아져 합장의 풍습도 있었다고 보인다. 무덤 주위나 내부에서 부장품도 많이 나왔다. 이 가운데 7·11·14호 무덤의 부장품은 질과 양에서 다른 무덤의 것과 뚜렷이 구별되어 신분지위상의 차이가 있었다고 추정된다.

 

그 밖에 3호유구와 같은 몇몇 구덩이 시설, 기둥구멍 등이 조사되었으며, 장경호의 구경부가 거꾸로 박히고 그 주위가 불에 탄 시설도 있다. 구덩이 시설에서는 숯, 불탄 흙, 불탄 짐승 뼈 등이 출토되고 있어 매장풍습에 따른 시설물이거나 조리시설로 추정하고 있다.

 

무덤에서 나온 인골은 두개골의 장폭지수(長幅指數) 79.0으로 중두(中頭)의 상한, 즉 단두(短頭)에 가깝다. 인골 가운데 키를 알아낼 수 있는 것으로는 남성의 두 예가 있는데 1 167, 7 161이다. 특히 인골에서 외이도골종(外耳道骨腫)과 하악융기(下顎隆起)가 잘 관찰된다. 이 현상은 어로, 잠수 등 바닷가의 생업형태와 관련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유물은 토기, 석기, 골각기, 옥제품 등 인공유물 외에도 어패류와 다양한 동물유존체가 고루 출토되었다. 토기는  지구에서 주로 신석기 이른 시기의 무늬인 융기문(隆起文), 압인문(押引文), 세침선문(細沈線文) 등이, ‘ 지구에서는 중기 이후부터 신석기 마지막 단계의 토기들이 나온다. ‘ 지구에서는 소위 영선동식으로 불리는 압인문의 빈도가 높다. 입술은 대개 직립하나 융기문토기는 바라진 것이 많다. 특히 도도로키[]식토기를 비롯한 일본 조몬[繩文]시대의 토기도 출토되어 주목된다.

 

석기는 작살, 결합식조침 축부, 그물추 등의 어로구, 수렵구인 화살촉, 긁개, 자르개 등의 타제석기와, 도끼, , 대패, 갈돌과 갈판, 숫돌, 절구, 공이, 망치돌, 등의 마제석기 계통으로 나눌 수 있다. 작살은 모두 마연면을 가졌으며 4점 밖에 없는데 비해 화살촉이 41점이나 되는 것으로 보아 화살촉 가운데 어로구로 쓰인 것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화살촉의 형태는 촉머리와 날개의 경계가 직선인 것, 안쪽으로 오목한 것, 세장(細長)한 것, 정삼각형 등 다양하다. 결합식조침은 보통 축부를 돌로 만들고 침부는 동물의 뼈로 만드는데, 축부가 뼈로 된 것 1, 침부가 돌로 된 것도 1점씩 있어 특이하다. 그물추는 모두 석제로 납작한 냇돌의 가장자리를 떼어낸 것으로 강가나 내륙지방의 것보다는 크고 무거운 편이다. 화살촉은 흑요석이나 사누카이트 같은 단단한 재질의 석재를 떼어서 만든 것이 대부분이다. 특히 일본에서 주로 출토되는 석시(石匙)도 출토되었다. 사누카이트 암질은 흑요석과 함께 일본 규슈[九州]지역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마제석기 중 도끼, , 대패 같은 공구류는 날 부분만 간 것이 대부분이며 무덤의 부장품으로도 출토된다. 갈돌, 공이 등은 음식물의 조리와 가공에 쓰였을 것으로 보이지만 역시 부장품으로도 나타난다.

 

골각기로는 사슴 뼈로 만든 송곳과 찌르개가 가장 많으며, 각종 선각무늬를 새긴 장신구와 비녀, 결합식조침의 침부 등이 있다. 7호무덤의 인골 발목에 채워진 상태로 출토된 발찌는 돌고래, 수달, 너구리의 이빨을 가공하여 만든 것이다. 또한 조개팔찌는 대부분 투박조개로 만들었다. 14호무덤의 관옥형 팔찌와 2호무덤 주변의 환옥제품은 옥제장신구의 기원을 신석기시대로 끌어올린 중요한 출토품이다.

 

자연유물도 다양하게 출토되었다. 사슴과와 멧돼지를 비롯한 육지의 짐승류와 오리, 논병아리류의 철새(조류), 도미를 비롯한 각종 어류, 상어류, 그리고 고래류를 포함하여 모두 40여 종의 척추동물이 나왔다. 연대도 신석기인들이 잡아먹은 조개류는 굴이 80% 정도로 대표적이다. 홍합, 소라, 전복 등이 적은 양 나오고 있다. 이는 조개류가 많이 나온 통영 상노대도유적이나 부산 동삼동패총 비해 매우 빈약한 양상을 띤다. 한편 유적 주변의 자연환경을 알아보기 위해 달팽이껍질을 분석한 결과에 의하면 모두 14종이 분류되었다. 전체의 8090%가 깨알달팽이를 비롯하여 삼림지역에 서식하는 9종의 달팽이로 이루어져 있어 당시의 유적 주변이 삼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결과를 종합하면 남해도서지역뿐만 아니라 일본 규슈지역과의 교류나 문화권을 설정하는데 중요한 유적이며, 자연유물의 분석을 통한 당시의 자연환경과 식생활 연구에도 많은 도움이 된다. 무엇보다도 신석기시대의 무덤과 이를 통하여 사회구조나 계층의 문제, 인골에 대한 형질인류학적인 연구가 가능하게 되었다. PU피트 층의 조가비를 시료로 하여 방사성탄소연대측정을 한 결과 기원전 52564540, 기원전 53284660년의 연대를 얻었다.(임학종)

(출처; 한국고고학 전문사전(신석기시대편),

http://portal.nrich.go.kr/kor/archeologyUsrView.do?menuIdx=795&idx=10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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