력사를 찾아서
《만주와 한반도 12,000년 전~ 2,000년 전 년대기》 4.15 시흥 능곡동유적~4.21 소하연문화 본문
《만주와 한반도 12,000년 전~ 2,000년 전 년대기》 4.15 시흥 능곡동유적~4.21 소하연문화
대야발 2024. 2. 9. 12:27《만주와 한반도 12,000년 전~ 2,000년 전 년대기》
4.15 시흥 능곡동유적(始興 陵谷洞遺蹟); 5730년 전~5200년 전(BC 3730∼3200년)
『경기도 시흥시 능곡동 산15 일대에 위치한다. 유적이 입지한 구릉에서 해안선까지의 직선거리는 3㎞ 정도이나, 간척사업 이전에는 인접한 곳까지 해안선이 형성되어 있었다. 이와 함께 100m내의 저평한 구릉들이 연속되어 고대로부터 사람들이 살기에 매우 적합한 지형적 조건을 갖추고 있다.
유적에서는 전체 5개 지점에서 신석기시대 주거지, 청동기시대 주거지와 수혈, 삼국∼통일신라시대의 석실묘 등이 확인되었다. 그 중 신석기시대 유적은 1지점에서 주거지 24기가 조사되었다.
신석기시대 마을이 확인된 1지점은 조사지역 최북단에 위치하고 있으며, 택지개발지구 동쪽경계를 이루는 산줄기에서 남서쪽으로 갈라져 나온 해발 33m의 큰 구릉과 서쪽으로 갈라져 나온 해발 30m의 작은 구릉, 그리고 이 두 구릉 사이의 계곡부에 해당된다. 신석기시대 주거지는 해발 33m 구릉의 능선 정상부와 남쪽의 완만한 경사면 상단부에 동서로 길게 조성되었다. 전체적인 배치양상은 구릉 정상부의 평탄면을 따라 동서로 길게 1열이, 인접한 하단의 완만한 남사면에 1열이 위치한다. 주거지 간의 중복은 확인되지 않았다. 평면형태는 모두 방형으로 규모는 한 변의 길이가 2.6∼5m 내외이다. 4.5∼5m인 큰 주거지들은 7∼15m의 간격을 두고 정상부에 분포하는데 비해, 4m 미만인 것들은 남사면과 정상부 동쪽에 3∼6m 정도의 간격을 두고 위치한다. 이 중 3m 내외인 가장 작은 것들에 속하는 3기는 동쪽의 경사면에 위치하는 양상이다.
내부시설은 중앙에 구덩형 화덕자리 1기가 위치하며, 기둥구멍들은 주로 네모서리에 분포한다. 각 모서리마다 지름 0.2m 내외, 깊이 0.3∼0.5m의 비교적 깊은 기둥구멍이 하나씩 존재하고 보다 규모가 작은 것들이 주위를 감싸고 있는 양상이다. 이 밖에 도랑과 저장구덩이 등이 확인되었고, 출입구시설은 확인되지 않았다.
화덕자리는 중앙에 위치하고 평면형태는 원형, 타원형, 방형의 세 가지 형태로 구분된다. 각각 4기, 5기, 10기로 방형이 높은 비율을 보인다. 방형 화덕자리는 한 변의 길이가 3.5m가 넘는 주거지들에서만 확인된다. 규모는 원형이 직경 0.5m 내외, 타원형이 길이 0.5∼0.65m, 너비 0.3∼0.45m, 방형은 한 변의 길이가 0.4∼0.6m이고, 깊이는 세 가지 형태 모두 0.1m 내외로 얕다. 열을 받은 범위는 그 둘레에 10㎝ 정도 고르게 관찰되고 내부는 바닥 보다 벽면을 중심으로 비교적 강하게 나타난다.
저장구덩이는 6호주거지 북서 모서리 부근에서 소형의 첨저심발형토기(尖底深鉢形土器)가 4/5 가량 묻힌 채로 확인되었다. 저장구덩이의 평면형태는 원형이며, 규모는 직경 0.2m, 깊이 0.18m이다. 땅을 판 후 토기편과 점토를 채워 넣고 그 위에 토기를 고정시켰다.
유물은 토기, 석기와 함께 식물유체가 확인되었다. 토기가 222점, 석기가 63점이며 도토리, 조, 기장, 팥 등의 식물유체가 다수 확인되었다.
빗살무늬토기는 첨저심발형토기와 말각평저발형토기(抹角平底鉢形土器)의 두 종류로 대별된다. 첨저심발형토기는 밑이 포탄처럼 뾰족하며 동최대경이 입술에 있고 높이가 입지름보다 큰 토기이다. 말각평저발형토기는 모를 죽인 납작밑이고 원통상에 가까우며 입지름 20㎝ 이하의 소형에 속한다. 크기는 입지름 25㎝를 기준으로 소형과 대형으로 분류하였다. 평저발형토기는 모두 소형이며, 첨저심발형토기는 소형과 대형에서 모두 확인되고 주거지 내에서 두 가지 크기가 함께 출토된다.
토기의 태도는 대부분이 장석·운모·석영과 세석립이 혼입된 점사질토이다. 거의 모든 토기편에서 입자가 균일하고 미세한 장석과 운모가 관찰되는데, 입자가 굵은 석영은 비교적 적은 비율로 혼입되어 있다. 세석립의 비율은 토기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기형과 기종, 무늬에 따라 크게 다르지 않다. 이외에 점질토에 활석이 혼입된 토기는 다른 정면방식과 무늬형태를 보이고 있어 주목된다. 기벽(器壁)이 얇고 매우 단단하며 외면은 잘 정면 되었으나, 내면은 매우 거칠다. 무늬는 다른 토기들에서는 보이지 않는 점열타래문·점열중호문이 시문되었다. 이러한 활석계토기는 무늬형태와 정면기법이 일반적인 토기와는 다른 특수 토기이거나 외부로부터 유입된 토기로 판단된다.
토기는 무늬가 있는 것과 없는 것으로 구분되나, 무늬가 없는 것은 수량이 매우 적고 태토나 기형, 크기 면에서 다른 차이점은 보이지 않는다. 시문범위는 구연부와 동체부에 시문되고 저부에는 확인되지 않는다. 문양대 구성은 구연부에만 국한되고 동체부와 저부에는 시문되지 않은 구연한정시문토기, 구연 바로 아래에서 부터 동하위까지 시문된 구분문계토기(2부위시문)와 동일문계토기의 세 가지 형태로 분류된다.
구연부 무늬는 단사선문, 점열문, 단선문, 조문, 종방향 사선대문, 사격자문이 확인되고, 동체부 무늬는 횡주어골문, 종주어골문, 삼각집선문, 점열타래문, 점열중호문, 종방향 사선대문, 사격자문이 있다. 이 중 구연부 단사선문과 동체부 횡주어골문이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한다. 구연부 단사선문은 시문방식에 따라 압날(押捺)방식, 연속압날(連續押捺)방식, 압인(押引)방식의 세 가지 형태로 세분되며, 동체부 횡주어골문은 시문구에 따라 단치(單齒)와 다치(多齒)로 세분된다.
중심 무늬인 단사선문 중 압날은 2∼8단 시문되며, 연속압날은 6∼16단, 압인은 7∼20단까지 시문된다. 시문범위의 길이는 대체로 시문방식과 단수에 비례하는 양상이나, 토기의 크기에 상관없이 최대 11㎝를 넘지 않는다. 무늬를 새길 때에 약간의 여백을 두어 시작과 끝을 알 수 있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이는 점열문, 단선문, 조문에서도 확인된다.
동체부 횡주어골문도 구연부 문양과 마찬가지로 여백을 두어 무늬 새김의 시작과 끝을 알 수 있는 경우가 있다. 형태는 대체로 진행방향을 바꿔 마름모꼴의 공간을 내는 것이 많고 동일한 방향으로 진행하여 지그재그 형태의 빈 공간을 갖는 것도 일부 확인된다.
즉 능곡동유적 출토 빗살무늬토기는 무늬를 새길 때에 횡방향으로 전면을 쉼 없이 일주(一週)하는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여백의 모양을 계획하고 일정한 단위 폭 만큼씩만 돌려가면서 새겨 전체적인 무늬를 구성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석기는 고석(敲石), 갈돌[硏石棒], 갈판[硏石], 돌도끼[石斧], 숫돌[砥石], 모룻돌[臺石], 돌칼[石刀], 돌화살촉[石鏃] 등이 출토되었다. 이 중 고석이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한다. 갈판은 12호와 13호 주거지에서 각각 1점씩 모두 2점이 출토된 데 반해, 갈돌은 15점으로 갈판에 비해 다량 출토되었다. 대부분이 간석기이며, 일부 뗀석기도 확인된다.
재료는 석영, 화강암, 운모편암, 편마암, 응회암, 섬록암, 규암, 슬레이트 등으로 다양한 편이다. 주변에 흔히 구할 수 있는 석영은 고석을 만드는데 주로 쓰였으며, 화강암과 운모편암·편마암은 갈돌·갈판·숫돌, 규질편마암은 돌도끼, 슬레이트는 돌화살촉을 만드는데 쓰였다. 용도별 구성은 갈돌·갈판의 식료가공용이 높은 비중을 차지하며, 바닷가와 인접해 있지만 어로구는 한 점도 나오지 않았다. 이러한 양상은 경기도 서해안 지역에서 최근 조사된 인천 삼목도Ⅲ유적과 안산 신길동유적과 매우 유사하다.
토기와 석기 이외에도 도토리, 조, 기장 등의 다양한 식물유체가 확인되었다. 부산 동삼동패총과 남강댐 수몰지구 신석기시대 유적에서도 확인된 바와 같이 유적에서 나온 조와 기장으로 보아 작물 경작이 채집경제와 함께 생업경제의 일부였음을 보여준다. 그 동안 신석기시대 갈돌과 갈판 세트는 주로 유적에서 출토된 도토리 등의 견과류를 갈기 위한 도구로 추정되었다. 그러나 13호주거지 출토 갈판의 전분분석을 통한 조속 종자의 검출은 견과류뿐만 아니라 곡물을 가는 데도 사용되었음이 확인되었다.
주거지는 하나의 구릉에 크기에 따라 열상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서로 중복이 없고, 유사한 유물이 출토된 점으로 미루어 시기차가 거의 없는 단일 마을유적으로 추정된다. 토기무늬의 양상들은 중서부지역 상대편년에서 가장 이른 단계인 삼부위구분시문 보다 후행하는 중기의 무늬 요소들이다.
중기에 들어서면 구분문계토기는 저부무늬의 생략화과정이 일어나며, 동일문계토기와 구연한정 단사선문 토기도 이 시기에 출현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또한 구분문계와 구연한정시문 토기의 단사선문 중 늦은 요소인 압인방식이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 이를 더욱 뒷받침해준다.
방사성탄소연대값은 기원전 3730∼3200년 사이에 속하며, 기원전 3600년 정도가 유적의 중심 연대이다. 따라서 능곡동유적은 유물과 절대연대 등으로 보아 중서부지역 중기에 위치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주거지 내에서 출토된 공반관계가 확실한 토기의 무늬를 중심으로 중서부지역 중기 편년에 많은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전기와 중기가 혼재된 서울 암사동유적과의 비교검토를 통해 전기에서 중기로 이행되는 과정을 파악할 수 있는 좋은 자료로 판단된다. 또한 단일유적으로서 주변의 신길동, 용인 농서리, 삼목도Ⅲ 유적들과 함께 중서부지역 신석기시대 중기의 마을연구에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이동훈)』
(출처; 한국고고학 전문사전(신석기시대편),
http://portal.nrich.go.kr/kor/archeologyUsrView.do?menuIdx=795&idx=616)
4.16 옥천 대천리유적(沃川 大川里遺蹟); 5500년 전~5000년 전(BC 3500년∼BC 3000년)
『충청북도 옥천군 옥천읍 대천리에 위치하고 있다. 유적은 마성산에서 북동쪽 방향으로 뻗어 내린 산줄기의 끝자락에 해당하며, 얕은 구릉지역의 정상부에 위치한다. 유적의 동쪽에는 인접하여 금구천이 흐르며, 구릉 북쪽은 노루메기들, 남쪽은 말그미들, 장판들이 펼쳐져 있는데, 이들 저지대는 해발 100m 이하의 지역으로 현재 벼농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또한 유적의 북쪽에는 약 3㎞ 떨어져 소옥천이 흐르고 있는데, 소옥천은 북동쪽으로 흘러 금강으로 흘러든다. 신석기시대 주거지가 조사된 지점과 주변의 저지대는 8m 내외의 고도차가 있다. 유적이 위치한 옥천분지는 대체로 해발 약 400∼500m 이하의 산봉우리들로 둘러 싸여 있으며, 해발 약 150m 이하의 지역이 밭이나 논 등으로 경작되고 있다. 유적은 옥천분지의 서쪽부분에 위치하며, 옥천분지의 외곽지형을 두루 바라볼 수 있는 지리적인 조건을 잘 갖추고 있다. 해발 108m 지점에서 신석기시대 주거지 1기가 조사되었다.
주거지의 평면형태는 장방형으로 동벽의 가장자리 일부가 유실되었으나 나머지는 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었다. 주거지의 크기는 잔존 동서길이 9.5m, 남북너비 5.1m, 최대깊이 0.35m이며, 면적은 약 48.5㎡이다. 화강암 풍화토를 거의 수직으로 파서 만들었고, 주거지의 길이방향은 동서이다. 바닥은 대체로 평탄하며, 부분에 따라 황백색 모래를 깔았던 것으로 보인다.
주거지의 북벽 서쪽부분에는 움벽에 찰흙을 발랐던 흔적이 남아 있고, 그 주변의 바닥부분은 불을 먹어 붉은색을 띠며 단단하게 굳어진 흙덩이가 드러나 있었다. 움벽 겉면은 찰흙과 풀(갈대 혹은 짚)을 섞어 덧바른 것으로 나타났다. 불 먹은 흙덩이들은 이곳에 집중되어 있었는데, 바닥에서 약간 떠 있는 상태로 놓여 있었다. 불 먹은 흙덩어리들은 벽체나 그 밖의 다른 구조의 시설물이 불의 영향을 받아 생긴 것으로 추정된다.
주거지 내부에서는 많은 수의 기둥구멍과 소형 구덩이가 확인되었다. 이 중 주거지의 동벽 가장자리와 서쪽부분의 남·북벽에 인접해 있는 기둥구멍은 중심기둥구멍으로 판단된다. 다른 구덩이들의 지름이 0.2∼0.5m인데 반해 4개의 중심기둥구멍은 0.6m이상으로 넓다. 또한 중심기둥구멍의 깊이는 0.65m이상인데, 다른 구덩이들의 깊이는 약 0.2∼0.5m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중심기둥구멍 사이의 동서거리는 약 4.8m, 남북거리는 4.3m이다. 중심기둥구멍의 바닥에는 회색 찰흙이 단단하게 굳어 있는 상태로 조사되었는데, 기둥을 세우기 위한 기초다짐으로 추정된다.
주거지 내부는 중심기둥구멍을 중심으로 크게 두 개의 공간, 곧 생활공간(동쪽부분)과 부속공간(서쪽부분)으로 나뉜다. 또한 생활공간 안에 있는 화덕자리와 기둥구멍의 배치상태로 가늠할 때, 이 생활공간은 다시 두 개의 작은 공간으로 나누어질 가능성이 높다. 하나는 화덕자리가 위치한 작업공간(취사·난방의 역할 포함), 다른 하나는 거실공간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거실공간은 작업공간과 다르게 유물의 출토가 빈약하며, 기둥구멍이나 내부시설이 설치되어 있지 않다.
생활공간의 가운데 부근에서는 2기의 화덕자리가 조사되었다. 화덕자리는 바닥을 8∼10㎝ 깊이로 약간 파서 만들었으며, 평면형태는 말각방형이다. 화덕자리는 불의 영향을 받아 단단하게 굳어져 있었으며, 화덕 사이의 거리는 0.5m정도이다. 서쪽에 위치한 화덕자리 크기는 0.68×0.67m이며, 동쪽의 화덕자리는 0.65×0.62m로 크기가 서로 비슷하다.
부속공간의 중앙에는 평면형태가 부정형을 띠며, 2단 구조로 이루어진 수혈이 1기 조사되었다. 수혈의 전체 크기는 길이 1.67m, 너비 1.4m, 깊이 0.81m이다. 부속공간의 서벽 바깥부분에 인접하여 타원형 수혈이 조사되었으며, 크기는 길이 1.6m, 너비 0.94m, 깊이 0.74m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주거지는 충청 내륙지역을 비롯한 금강유역에서 집중적으로 확인되는 주거지의 특징을 보이고 있어 대천리식주거지로 불린다. 대천리식주거지의 평면형태는 장방형으로 4주식 기둥배치(생활공간)를 하고 있으며, 돌출된 출입구시설, 구덩형 화덕자리, 내부공간분할 양상을 보인다. 주거지는 구릉 정상부에 입지하며, 길이방향이 등고선의 흐름과 나란하게 조성되어 있는 특징을 지닌 주거지로 금강유역을 중심으로 한 충청 내륙지역의 대표적인 신석기시대 주거지이다.
주거지에서 출토된 토기 중에는 능형집선문이 시문된 빗살무늬토기와 금강식토기(능격문토기)가 가장 많이 출토되었는데, 능형집선문이 시문된 빗살무늬토기 중에는 구분문계에 해당하는 것이 확인되었다. 구연부에 한줄의 횡선을 긋고, 다시 아래쪽으로 약간의 간격을 두고 모두 세 줄의 횡선을 그었다.
횡선의 사이에는 단사선문이 시문되었으며, 마지막으로 횡선의 아래쪽으로 능형집선문이 새겨져 있다. 능형집선문은 각각의 능형단위가 서로 인접하여 붙어 있어 여백이 거의 없는 것과 어느 정도 여백을 두고 시문된 형태로 구분된다. 이 밖에 횡단선문, 구획단사선문, 조문(爪文), 횡선문, 횡주어골문, 사선대문 등이 시문된 빗살무늬토기도 출토되었으나 소수에 불과하다.
또한 문양이 시문되지 않은 빗살무늬토기도 다수 존재한다. 결국 유적에서는 능형집선문토기가 중심이 되고 이외 무문양토기와 금강식토기도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충청 내륙지역을 비롯하여 주변지역의 신석기시대 유적에서 출토되고 있는 단사집선문을 비롯하여 격자문, 삼각집선문, 조우문, 점열문 등은 출토되지 않는 특징을 보인다.
주거지에서 출토된 석기는 모두 40점인데, 갈판 2점, 갈돌 2점, 숫돌 1점, 돌도끼 1점, 무늬새기개 1점, 굴지구(掘地具) 17점, 공이 2점 등 다양한 종류의 석기가 출토되었다. 이중에서 갈판은 중서부지역에서 출토된 것 중 매우 큰 편에 속하는데, 길이 69㎝, 너비 34㎝이다. 또한 굴지구류는 형태와 규모에 따라 5가지(장타원형·장방형·타원형·신바닥형·첨인형)로 구분되는데, 이러한 분류는 굴지구의 기능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소형의 굴지구 중에는 사용 중에 혹은 후퇴적과정에서 부러진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납작한 돌을 가로방향으로 절단하여 이용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것들도 확인된다. 이는 절단된 면이 매끄럽게 처리되었으며, 소형이라도 충분히 나무날과 결합시켜 굴지구로서의 기능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굴지구들은 한면이 편평한데 반해, 다른 한 면은 편평하지 않고 떼어낸 흔적으로 인해 굴곡이 있다. 이는 굴지구의 한면을 돌아가며 떼어내는 과정에서 생겨난 것으로 볼 수 있지만, 굴지구의 사용방법에 의해 의도적으로 이러한 형태로 제작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즉 굴지구의 편평한 면을 자루면에 붙여 사용하기 편하도록 한 면을 편평하게 만들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굴곡이 있는 면이 땅과의 마찰을 받게 되며, 이곳에 갈린 흔적이 남아 있게 된다. 결국 굴지구 그 자체가 삽날의 역할을 한 것이 아니라 나무로 된 삽날 끝부분에 결합된 것으로 보인다.
무늬새기개는 한쪽부분을 화살촉의 슴베처럼 매끄럽게 갈아 만들었다. 슴베부분은 토기의 무늬를 새기는데 사용하였던 것으로 판단되는데, 주거지에서 출토된 빗살무늬토기(능형집선문)의 문양과 무늬새기개의 슴베 단면 폭이 일치해 이를 뒷받침해주고 있다.
주거지에서 출토된 유물 중 가장 주목되는 것은 탄화 곡물로 쌀, 보리, 밀, 조, 기장을 비롯하여 벼규소체의 존재도 재층에서 확인되었다. 유적은 주거지에서 측정된 방사성탄소연대측정값과 출토된 빗살무늬토기를 통해 보면, 중서부지역의 신석기시대 중기(기원전 3500∼3000년)에 해당한다. (구자진)』
(출처; 한국고고학 전문사전(신석기시대편),
http://portal.nrich.go.kr/kor/archeologyUsrView.do?menuIdx=795&idx=660)
4.17 충주조동리유적(忠州 早洞里遺蹟); 5500년 전~5000년 전(BC 3500년~BC 3000년)
『충청북도 기념물 제126호(지정명칭은 충주조동리선사유적). 충주시 동량면 조동리 조돈마을에 위치하고 있다. 유적은 북쪽의 용천산(해발 293.7m) 줄기가 남쪽으로 길게 뻗어 내려와 남한강에 이르는 끝부분에 발달된 넓은 충적지대(해발 74∼78m)에 자리하고 있다. 충주댐으로부터 강줄기가 곧게 흘러오다 유적 앞에서 크게 휘돌아 흐르는데, 이 같은 충적대지는 남한강변을 따라 4㎞ 정도 발달되어 있다.
유적에서는 신석기시대 야외 화덕시설 1기와 다량의 빗살무늬토기가 출토되는 문화층이 확인되었다. 조사지역 전면에 걸쳐서 빗살무늬토기가 출토되고 둥근 형태로 숯이 집중된 부분이 확인되었다. 야외 화덕시설은 평면 타원형으로 바닥을 얕게 파고 안에 납작한 강돌과 할석을 이용하여 1∼3겹 쌓아 만들었다. 규모는 길이 1.7m, 너비 1.2m, 잔존깊이 0.15m 정도이다.
출토 유물 중 빗살무늬토기의 태토는 사질점토계이고, 석영이 많은 비율로 섞여 있고, 장석·운모 등이 섞여 있으며, 활석이 섞인 것도 있다. 토기에 시문된 문양은 비교적 단순한 편으로 횡주어골문, 사선문, 격자문, 조문(爪文), 점열문, 기타 복합문 등이 있으나 횡주어골문과 사선문이 다른 문양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은 양이 출토되었다.
빗살무늬토기 중에서 주목되는 것은 구분문계 토기로 구연부에 단사집선문이 시문되고, 동체부에 횡주어골문이 시문된 토기이다. 빗살무늬토기 중에는 단사집선문과 횡주어골문 사이에 부가문이 시문된 것도 확인된다. 이는 기존의 중서부지역 신석기시대 편년에서 이른 시기에 해당하는 것으로 유적의 존속시기가 상대적으로 길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출토된 대부분의 빗살무늬토기와 방사성탄소연대측정값을 통해 보면, 중서부지역의 신석기시대 중기(기원전 3500∼3000년)에 해당한다. (구자진)』
(출처; 한국고고학 전문사전(신석기시대편),
http://portal.nrich.go.kr/kor/archeologyUsrView.do?menuIdx=795&idx=1252)
4.18 춘천 교동 동굴유적(春川 敎洞 洞窟遺蹟)-신석기시대 전기 말~중기 초
『강원도 기념물 제1호(지정명칭은 춘천혈거유지). 춘천시 후평동 671에 위치한다. 1962년 춘천 봉의산(鳳儀山) 동쪽 산사면에서 옛 성심여자대학교(현 한림대학교) 신축공사 중에 동굴이 발견되어 김원룡의 현지조사에 의해 신석기시대 동굴유적으로 밝혀졌다. 이 동굴은 해발 105m 위치에 풍화된 화강암반을 굴착하여 만든 것으로, 경사면에 인공적으로 조성한 동굴주거지였으나 이후에 무덤으로 용도가 변경된 것으로 판단된다.
입구는 아래쪽 길이 2.5m, 높이 1.7m 정도이고, 서쪽의 바닥부분은 점차 높아지면서 위로 올라가는 돌출부가 있는데 이 부분이 저장공으로 추정된다. 굴의 바닥은 공사 중 작업으로 원상이 훼손되었으나, 암반의 중앙이 약간 깊게 파여 있고, 이곳에 흙을 깔아 정지하였다.
동굴 발견 당시 내부에는 3구의 인골이 발견되었는데, 모두 발을 중앙부로 향하였고 2개의 유골은 머리를 입구 방향으로, 다른 하나는 머리가 입구 반대편 방향으로 똑바로 누운 상태였다. 인골은 고운 가루흙 위에 위치하며, 가루흙 30㎝ 아래 동쪽 인골 밑에서 석기류와 노지가, 입구 부근에서는 토기류가 출토되었다. 노지는 동쪽 인골의 북쪽, 입구 가까이에서 발견되었으며, 별다른 시설은 확인되지 않았다. 출토 유물로는 대형석부, 자귀, 석촉, 공이, 관옥, 평저토기 5점, 결합식조침 축 등이 있다.
그 중 토기는 높이 9∼13㎝의 소형 평저호인데, 정선된 점토질의 바탕흙으로 제작하였으며 저부와 동체부는 따로 만들어 붙였고 외면은 잘 마연되었다. 구연부가 짧게 외반하는 1점 외에는 모두 직구(直口)로 끝나고 있다. 가로로 둥근 구멍이 뚫린 손잡이가 1쌍 부착되어 있는 것도 있다. 무문양의 토기 1점을 제외한 4점 모두 구연부에만 문양이 시문되었는데, 점열문이 8열과 12열 시문된 것, 조문이 3열 눌러진 것, 단선이 수직으로 2열 눌러지고 각 단선 밑에 점문이 복합된 것이 있다.
석기는 석부, 석착, 석촉, 석검, 공이, 결합식조침 축 등이 있고, 관옥과 수정편, 백옥편도 출토되었다. 이 유적은 최초보고서에서는 평저토기와 대형석부에서 보이는 동북지방적 요소 및 석착과 석촉에서 보이는 서해안적 요소를 근거로 양 지역의 신석기문화가 공존·혼합된 문화로 보고, 나아가 토기의 점토질 바탕흙, 시문 부위의 축소 등을 근거로 무문토기문화와 접촉된 신석기말기의 유적으로 보았다.
그러나 양양 오산리유적 하층에서 출토된 토기와 비교하면 점열문, 조문, 횡단선의 압날문으로 구연부에만 시문된 문양의 유형과 시문기법이 기본적으로 같고, 토기표면을 마연하여 매끄럽게 처리한 점, 턱이 지면서 약간 꺾인 구연과 구순의 끝마무리, 가로구멍이 뚫린 손잡이, 점토질 바탕흙 등에서도 많은 유사성을 보이고 있다. 또한 오산리유적의 특징인 결합식조침 축이 출토된 점도 양 유적의 연결성을 뚜렷이 보여주기 때문에 교동 동굴유적은 오산리문화에 동북지방적 요소가 더욱 가미된 것으로, 오산리유적보다는 연대가 다소 내려오겠으나 신석기시대 전기 말에서 중기 초까지 소급될 가능성이 있다.
석촉 중 보트형은 대동강유역에서는 궁산, 봉산 지탑리 유적에서부터 나타나 평양 금탄리와 청호리 유적에서 특히 성행하며, 한강유역의 서울 암사동유적에서도 출토된다. 동북지방에서는 서포항2기부터 나타난다. 반면, 유경식 석촉은 동북지방의 신석기유적에서는 출토된 예가 없고, 서해안에서도 후기에 속하는 청호리유적에서만 보고되었다. 대형석부가 출토된 울진 후포리나 통영 연대도 유적도 모두 늦은 시기의 유적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교동 동굴유적의 연대는 유경식석촉과 대형석부에서 보이는 후기적 요소 및 토기와 조합식어구에서 보이는 전기적 요소가 합쳐지는 모순이 생긴다. 결국 이들 유물은 여러시기에 걸쳐 매납되었던지 혹, 동시기에 매납된 것이라면 석기 연대와 토기의 연대 둘 중의 하나가 조정되어야 한다는 문제가 생기게 되기 때문에 종합적인 비교·검토작업이 필요하다.』
(출처; 한국고고학 전문사전(신석기시대편),
http://portal.nrich.go.kr/kor/archeologyUsrView.do?menuIdx=795&idx=517)
4.19 부산 수가리패총(釜山 水佳里貝塚); 5350년 전~3030년 전(BC 3350년~1030년)
『부산광역시 강서구 범방동 가동 일대에 있는 패총으로, 김해시 장유면과 부산광역시 강서구의 행정구역이 경계를 이루는 지점에 위치한다. 발굴 당시 수가리패총의 소재지는 경상남도 김해군 장유면 수가리 가동마을이었으나 부산경남공동경마장이 건립되면서 행정구역이 변경되어 현재는 행정구역상 ‘부산광역시 범방동 가동패총’으로 유적명칭도 변경되었다. 그러나 수가리패총은 학사적으로 정착된 유적명이기 때문에 그대로 ‘수가리패총’으로 사용한다.
유적은 태백산맥의 남쪽 자락에서 남서쪽으로 뻗은 지맥의 동북쪽 말단에 입지하는데 동쪽에는 낙동강이 흐르고, 북쪽으로 낙동강의 상류에서 밀려온 토사가 퇴적되어 형성된 김해평야가 펼쳐져 있다. 즉, 해발 242.5m인 금병산의 북쪽사면과 김해평야가 분포하는 충적지가 맞닿아 있는 곳에 유적이 형성되었다.
유적 동북쪽에는 부산 북정패총과 죽림동유적이, 북서쪽에는 김해 화목동유적이 위치한다. 그리고 남쪽으로 1㎞ 떨어진 곳에 부산 범방패총이 금병산의 남사면에 위치하고 있으며 구릉 주변에는 범방동 사구패총, 녹산동 세산유적 등이 분포한다.
현재 산쪽으로 이어지는 남측은 민가의 계단상 논밭으로 이용되고 있고, 북측에는 낙동강 삼각주의 퇴적작용으로 형성된 후 개간된 김해평야가 펼쳐져 있다. 지금은 부산?마산간 고속도로가 건설되어 유적의 대부분이 파괴되고 일부만 잔존해 있다. 수가리패총은 1970년대 부산대학교 박물관에서 실시한 남해안지역 선사유적 지표조사에서 확인되었고, 부산?마산간 고속도로의 예정부지에 위치하여 파괴의 위험에 처하자 1978년과 1979년 2차에 걸쳐 구제발굴을 실시하였다.
유적 일대는 가옥들과 계단식 논밭으로 이용되고 있어 패각층이 지표면에 드러난 상태였다. 5개의 패총이 존재함을 확인할 수 있었고 도로면에 면하여 동쪽부터 차례로 1구부터 5구까지 명명하였다. 1차 발굴 시에 1·2·4·5구의 조사는 완료하였지만, 3구는 남쪽에 들어서 있던 가옥으로 인해 전부 조사하지 못하고 2차 조사 시에 발굴을 종료할 수 있었다.
1구패총은 도로 가까이의 넓은 대지상에 형성되어 있는데 파괴와 교란이 극심하였고, 2구패총은 1구패총으로부터 서쪽으로 약 200m 떨어진 곳의 가, 나, 다 지점으로 나뉘어 조사되었으며, 다지점을 제외하고는 거의 파괴되었다. 3구패총은 2구패총에서 서쪽으로 약 20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5개의 패총 중 잔존상태가 가장 양호하다.
조사 시 도로에 가까운 낮은 곳을 나지점, 높은 곳을 가지점으로 구분하였다. 4구패총은 3구패총에서 서쪽으로 약 100m 떨어져 있는데, 도로면에서 10m 정도 높은 대지상의 경작지에 위치한다. 마지막으로 5구패총은 4구패총에서 서쪽으로 약 20m 떨어져 있다.
모든 지구에서 신석기시대 패총이 확인되었으며 5구에는 삼한시대 이후의 패총도 잔존하고 있었다. 신석기시대 패총은 3구를 제외한 나머지 지구들에서는 파괴가 심해 패총의 잔존상태가 양호하지 못하고 유물도 그다지 풍부하지 못하였다. 반면에 3구패총은 넓은 범위에 걸쳐 패층이 비교적 두텁게 남아 있었으며 깊은 곳은 2.5m 정도 남아 있었다.
발굴범위에 2.5×2.5m의 피트를 39개, 트렌치 2개를 설치하여 조사하였는데 유적 북쪽에 있는 나지점과 남쪽의 가지점 사이에 골짜기상의 지형을 이루고 이 부분에 패층이 집중적으로 퇴적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또한 각 부식토 상층에서 목탄이나 불 맞은 돌이 둘러진 노지시설들이 확인되고, 부식토층에서 출토된 유물량이 패각층보다 2배 정도 많아 각 부식토층이 생활면으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노지는 3구패총에서 1기, 4구패총에서 2기 그리고 5구패총에서 2기가 확인되었다. 3구패총의 노지는 직경 1.5m 규모의 원형으로 10㎝ 내외의 할석이 둘러져 있고, 일부는 깔려 있다. 돌들은 하나를 제외하고 모두 불에 탄 흔적들이 나타나며 목탄편도 검출되었다. 주변으로 직경 2.4∼3m 정도 일정간격을 두고 기둥구멍으로 생각되는 구멍이 10개가 확인되었는데 길이 4∼29㎝로 일률적이지는 않다.
4구패총에서는 직경 20∼30㎝의 돌 7개를 원형으로 돌린 것과 직경 0.74m, 깊이 0.2m의 원형 수혈을 파고 주변에 일부 돌을 놓아 설치한 것 2기가 확인되었는데 노지 내에 소토나 목탄, 그리고 돌이 불 맞은 흔적이 확인되지 않아 노지로 단언하기는 어렵다.
5구패총에서도 직경 약 0.7m로 주변에 돌을 원형으로 돌려 설치하고 노지 내부에 불탄 흔적과 함께 목탄이 나타나는 것과 이미 많이 교란되어 직경 0.9m 정도에 큰 돌과 작은 돌들이 정형성 없이 몇 개가 남아있고 그 내부에 황갈색을 띠는 소토와 목탄이 확인되는 것 등 2기가 확인되었다.
층위는 부식토층(Ⅱ·Ⅳ·Ⅵ층)과 패각층(Ⅰ·Ⅲ·Ⅴ)이 교대로 퇴적되어 6개층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유물의 출토양상으로 보아 Ⅰ·Ⅱ층(3문화층), Ⅲ·Ⅳ층(2문화층), Ⅴ·Ⅵ층(1문화층)으로 구분하였다. 특히 토기의 문양형태와 문양대 구성, 시문수법, 기형을 기준으로 하였다.
1문화층은 붉은간토기, 석기, 토제품, 골각기와 함께 문양형태는 압인단사선문, 삼각집선문, 구획집선문, 능형집선문, 방형집선문, 사격자문, 횡주어골문, 자돌점열문 등이 상호 결합되어 나타나는 복합문, 혹은 단독문형태로 시문된 태선침선문계의 전면시문토기를 특징으로 하여 설정된 수가리Ⅰ식토기가 주로 출토되었다. 저부는 환저, 첨저, 평저 모두 출토되어 신석기시대 중기의 다양한 기형을 보여준다. 그 외 사슴과와 멧돼지, 돌고래 등의 짐승뼈와 매가오리, 졸복, 농어, 도미과, 재첩, 굴, 조개 등의 자연유물이 확인되었다.
2문화층은 수가리Ⅰ식의 태선침선문이 퇴화·단순화되고, 문양대가 축소 및 간략화되는 것이 특징인 퇴화침선문토기인 수가리Ⅱ식토기가 주를 이루는 후기에 해당된다. 그러나 수가리Ⅱ식이 매우 소량의 자료를 바탕으로 설정됨으로써 형식의 제속성이 충분히 반영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석기로는 지석과 갈돌, 갈판이 출토되었고, 골각기로는 찌르개와 조개팔찌가 있다. 1문화층 출토의 짐승뼈 외에 오소리, 살쾡이, 너구리 등과 가오리, 대구, 감성돔 등의 생선뼈, 바지락, 피불 고둥, 홍합, 동죽 등의 조개껍질이 출토되었다.
3문화층은 침선문기법이 거의 사라지고 새롭게 이중구연, 단사선문토기가 성행하는 말기에 해당된다. 마제석부와 석착(石鑿), 흑요석제 석촉, 어망추, 방추차 등이 출토되었으며, 짐승뼈로는 멧돼지와 사슴과 외에 너구리, 오소리, 곰 등과 더불어 꿩이나 새뼈도 확인되었다.
수가리패총은 심한 중층관계가 확인되지 않고 층위별 유물 변화가 뚜렷하고 일정한 시간차를 반영하고 있어 층위별 유물분석을 통해 수가리Ⅰ식토기, 수가리Ⅱ식토기, 수가리Ⅲ식토기를 설정하고, 각각 신석기시대 중기·후기·말기로 위치시켜 부산 동삼동패총과 함께 남해안지역의 신석기시대 기본 토기편년망을 구축하였다는 점에서 그 학사적 의의는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패총 중의 패각마모층을 확인하고 이를 해변형성과 관련시켜 신석기시대의 기온상승 및 해수면변동을 제기하여 당시에 미진하였던 고지형복원에 대한 자료제시와 분석은 특히 특기할 만하다.
최근 신석기시대 유적 발굴 예가 증가하면서 수가리Ⅰ식에 전기 유물이 혼재되었다는 견해, 수가리Ⅱ식의 실체가 불분명하다는 점, 그리고 수가리Ⅱ식과 경상남도 내륙의 봉계리식토기와의 관계, 수가리Ⅲ식의 세분경향 등 수가리패총을 둘러싼 새로운 이견들이 제기되고 있다.
유적의 연대는 세분된 토기편년 작업 외에 각 문화층에서 확인된 방사성탄소연대가 있는데, 1문화층은 기원전 3350∼2700년·기원전 3320∼2780년·기원전 3020∼2490년, 2문화층은 기원전 3030년∼2610년·기원전 2910∼2490년이며, 3문화층은 기원전 1740∼1420년·기원전 1440∼1030년으로 절대연대가 측정되었다. 2문화층과 3문화층 사이에 1300년이라는 공백기간이 확인된다.
이 세 문화기는 각각 남부 지방 빗살무늬토기문화의 중기·후기·말기에 해당되며 이 유적은 남부지방 빗살무늬토기 편년연구에 지표가 되는 중요한 유적이다.』
(출처; 한국고고학 전문사전(신석기시대편),
http://portal.nrich.go.kr/kor/archeologyUsrView.do?menuIdx=795&idx=959)
4.20 양저문화; 5300년 전~4200년 전(BC 3300∼BC 2200년)
『중국 장강(長江) 하류역의 태호(太湖) 주변과 영소(寧紹)지역 일대에 분포하는 신석기시대 후기 단계의 문화로 존속시기는 기원전 3300∼2200년 사이에 해당한다. 주로 강소(江蘇) 남부와 절강(浙江) 북부에 분포하며, 숭택문화(崧澤文化)를 계승한 동석병용시대(銅石倂用時代)의 문화로 알려져 있다.
이 문화는 중국 최초의 도시문명시대에 들어선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으며, 농업에서는 이미 수도(水稻)재배가 행해졌던 것으로 밝혀졌다. 토기, 방직, 칠기, 목기 등 수공업분야에 있어서 고도로 발달된 공예기술과 그 위에 기초한 대형 무덤의 존재, 특수 도상으로서의 신인수면문(神人獸面文), 그리고 요산(瑤山), 회관산(匯觀山) 등지의 산 정상부에 만들어진 제단 등의 존재는 이 문화의 특징을 잘 반영하고 있다.
이 문화의 명칭을 얻은 양저(良渚)는 절강성(浙江省) 여항현(余杭縣)에 속하며, 항주(杭州)에서 호주(湖州)로 가는 1시간 정도의 거리에 위치하는 작은 시골마을이다. 1936년, 양저(良渚)유적을 발굴하면서 양저문화 내용이 처음으로 알려지게 되었는데, 당시에는 산동 용산문화에 속하는 소지방의 한 유형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이후 조사가 진전되고 태호 주변에서 더 많은 유적들이 확인되면서 장강 하류역의 독립된 하나의 문화로서 인정받게 되었다.
양저문화는 존속시기와 특징에 따라 전기와 후기로 구분된다. 전산양(錢山樣), 장릉산(張陵山) 등의 유적은 전기를 대표하며 양저(良渚), 작막교(雀幕橋) 등의 유적은 후기를 대표한다. 토기는 대개 녹로를 이용하여 성형하였으며, 대부분 가는 사질계의 검고 광택이 있는 회도가 중심이다.
그 외 유적 내에서 출토되는 소량의 흑도는 삼탄법(?炭法)으로 만들어 기면에 연흑색(鉛黑色)의 금속성 광택을 띠고 있다. 이러한 토기류는 양저문화의 독특한 특징이라 할 수 있으며, 소성온도가 상당히 높아 두드리면 맑고 경쾌한 소리가 난다고 한다.
오현(吳縣) 초혜산(草鞋山)의 양저문화 무덤에서 발견된 ‘T’자형의 다리가 있는 정(鼎)과 긴 목의 쌍비호[黑陶細刻文帶個雙鼻壺]에는 세밀한 원와문(圓渦文), 반리문(蟠?文), 회전구연문(回轉鉤連文), 현문(弦文), 곡절문(曲折文), 조문(鳥文) 등이 관찰된다.
전반적으로 용문과 비조문(飛鳥文)과의 조합이 이루어진 도안이 세심하게 새겨져 있으며, 다른 쌍비호에는 조두반(鳥豆磐) 용문이 도안으로 장식되었다. 또 다른 흑도 세각문(細刻文) 활파호(闊把壺)의 외면에는 곡절문(曲折文)과 조문(鳥文)도 나타나며, 유(流) 부분의 외벽에는 날개를 펴서 나르는 듯한 입면도로 장식되었다.
또한 영소지방(寧紹地方) 봉화명산후(奉化明山後)유적에서 발견된 두반(豆盤)의 파편에는 잘 새겨진 용문의 도안이 발견되고 있다. 문양은 정교하고 아름다우며, 복잡하면서도 동시에 구상의 교묘성 및 균형이 잡혀있고, 도안의 양상 또한 생생하여 문양을 새기는 기술이 상당히 숙련된 수준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문양을 가진 토기는 수적으로 매우 적기 때문에 거의 예기(禮器)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전형적인 그릇은 물고기 지느러미 모양의 족정(足鼎)과 대나무 마디모양의 손잡이가 달린 두(豆), 관이호(貫耳壺), 배(杯) 등이 있다. 그릇은 일반적으로 얇고 꽃을 새기거나 구멍을 뚫은 것이 소량 나타나며, 표면은 매우 반들반들한 편이다.
절강성에 존재하는 양저문화의 대형 무덤은 흙으로 굳게 다져진 높은 언덕 위에 조영되어 있다. 강소장릉(江蘇張陵)의 양저문화 무덤은 8.4m 높이의 성토 위에 만들어져 있으며, 강소사돈(江蘇沙墩)의 무덤은 약 20m 높이의 성토 위에 조성되어 있다. 상해 청포 복천산(福泉山)유적의 경우는 높이 약 3.6m, 동서길이 90m, 남북너비 80m의 성토 위에 조성되어 있는데, 쌓아 올린 흙의 체적은 25,920㎡에 이른다. 또한 절강성 여항현 반산(反山)유적의 양저문화의 무덤은 길이 약 100m, 너비 약 30m, 높이 약 7m이며, 그 위에 구덩을 파고 시신을 매장한 후, 약 1.3∼1.4m 높이로 흙을 덮었다.
절강성 여항현 막각산(莫角山)유적에서는 면적 38㎡ 규모의 판축기단이 확인되었다. 기초가 되는 흙을 굳게 다진 부분은 모래층과 진흙층의 퇴적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전체 두께는 5㎝ 전후로 판축 층은 9∼13층에 이른다. 건축 기초는 총면적 30㎡나 되는 인공구조물 위에 만들어져 있는데, 높게 다져진 땅 위에는 붉은 소토덩이가 방대한 면적에 퇴적되어 있어서 이 장소가 특수한 용도를 가졌을 것으로 판단된다.
무덤은 전기에는 움이 없으나 후기에 주로 장방형의 움이 나타난다. 펴묻기[伸展葬]가 많으며 대소 2종류로 나뉘는데, 큰 것은 길이 4∼5m, 너비 1.5∼2m에 나무 장구(葬具)를 갖추었다. 껴묻거리[副葬品]는 토기, 석기, 옥, 상아제품 등이 있으며, 질이 뛰어나고 수량도 많은 경우 500여 점에 이른다. 절강성 여항현 반산유적의 20호무덤에서는 547점의 껴묻거리가 출토되었는데, 이 가운데 옥기가 무려 511 점이나 된다. 무덤 내에서는 돼지의 아래턱뼈가 출토되기도 한다. 그러나 작은 무덤에서는 규모만 작을 뿐 아니라 껴묻거리가 1~2종류에 지나지 않거나 아예 없는 경우도 있다.
순장(殉葬)의 풍습도 이미 출현하였다. 절강성 오현(吳縣) 장릉산(張陵山)유적의 경우 한 무덤 내에서 세 사람의 두개골이 확인되었으며, 상해 복천산(福泉山)유적 145호무덤에서는 두 사람의 손을 베어 묻은 예 등이 있다.
양저문화기에는 몇 개의 제단도 확인되고 있는데, 그 중 여항현 병요진의 회관산제단과 여항 안계향(安溪鄕)의 요산(瑤山) 제단이 대표적이다. 제단은 모두 산 정상부에 만들어졌고, 평면은 방형이다.
여항 병요진(甁窯鎭)의 회관산 제단은 약 45×35m 규모로 회관산의 중심부에서 약간 서쪽 변에 위치하며, 구를 판 후 다시 메우는 방식으로 만들어져 있다. 전체 상황은 약 10×8m의 방형 테두리를 만들고 평면상 내외 삼중의 흙색 제단으로 된 대상묘(臺狀墓)와 분구묘(墳丘墓)로 구분할 수 있다. 동서 양변은 분구 정상부보다 1∼1.5m 정도 낮고, 남북 방향에는 2개의 배수구가 파여져 있다.
분토(墳土)의 서남부에서 이를 파괴하고 설치된 4기의 무덤이 확인되었는데, 여기에서는 옥기, 토기, 석기 등 40여 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4기의 무덤 중 4호무덤의 묘광 크기는 4.75×2.6m이며, 관과 곽을 갖춘 양저문화 중 최대 규모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내부에서는 48점의 석월(石鉞)이 부장되어 양저문화 무덤 중에서 가장 많은 출토량을 보여주고 있다.
요산 제단유적의 경우 내외 3층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가장 안쪽 부분은 방형 홍토대를 만들고 주위에 주구(周溝)를 판 후 회토(灰土)를 깔았으며, 외각에는 황갈색 흙으로 대(臺)를 축조하는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평면은 방형으로 동변 7.6m, 북변 5.9m, 서변 7.7m, 남변 6.2m의 규모이며, 주구의 너비는 1.7∼2.1m, 깊이 0.65∼0.85m로 확인되었다. 구 내부는 회색의 얼룩진 생토로 메워져 있는데, 유물은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주구 바깥은 서, 북, 남의 3면에 있고, 거기에는 각각 5.7m, 3.1m, 4m의 황갈색의 얼룩진 생토가 쌓여 있는데, 여기에서 12기의 무덤이 발견되었다. 무덤은 남북 방향으로 나란히 배치되어 있으며, 부장된 옥기 조성의 차이를 통해 북쪽 열이 여성의 무덤, 남쪽 열이 남성의 무덤 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요산유적의 특징은 12기의 분묘 중 부장품으로서 옥벽(玉璧)이 1점도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러나 요산에서 5㎞ 떨어진 반산유적에서는 11개의 분묘에서 합계 125점의 벽(璧)이 출토되었다. 종(琮), 벽, 월(鉞)이 각각 신권, 재권, 군권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한다면, 부장 옥기 조성에서 보이는 차이는 각별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옥기는 제사와 신앙에 관련되는 법기(法器)이므로 제사상의 직능을 표시하는 것이기도 하였으며, 또 그 신분을 상징하는 기능을 가진 물건이기도 하였다.
옥기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종과 벽이다. 이것들은 양저문화, 석가하문화, 산동 용산문화, 중원 용산문화, 객성장2기문화에서도 발견되었으나 그중 양저문화에서 가장 집중적으로 출토되고 있다. ??주례(周禮)?? 대종백(大宗伯)에는 ?以蒼璧禮天, 以黃琮禮地?라 나타나고 있으며, ??주례(周禮)?? 전단(典端)에 나타나는 ?疏璧以斂尸?등의 기록을 참고한다면 종과 벽은 천지신기(天地神祈)를 제사하는 제사용 옥이며, 또 주검을 묻어 장의에 쓰이는 장옥(葬玉)이기도 하다. 종과 벽은 천지를 통한다는 뜻이 있다고 한다. 종과 벽이 사용된 염시는 주로 제단 오른 쪽, 분구 위에 만들어진 대묘에서 찾아진다. 제단 위에 놓인 주검의 신분은 제사를 모시는 무당[巫師]이라 추측되는데, 종과 벽은 종교적 수령이 스스로 집행하는 제사행위에 있어서 일종의 법기였던 것으로 볼 수 있다.
특히 반산유적 출토 옥종(玉琮)에 새겨진 도상이 그 용도를 분명히 하고 있다. 또한 옥벽(玉壁)은 서로 크기가 다르고 높이도 일정하지 않음에 비해 이들 예기는 크기 차이가 거의 없고 규칙적이다. 이 중 옥종의 경우에는 최고품이라 할 수 있다. 선 모양이 가늘고 새김이 얕은 선을 미묘하게 조각해 가는 기술로 여러 문양이 새겨져 있는데, 이러한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신인수면문이라 할 수 있다. 이 외에도 구슬, 청옥, 도끼모양 등 의례성 옥기와 새, 물고기, 거북 등 동물성 옥기, 옥관식, 옥 허리장식, 옥팔찌, 옥가락지 등 다양하고 복잡한 종류의 옥제품들이 최근 들어 무덤에서 대량으로 출토되고 있다.
양저문화에는 성곽이 발견되지는 않지만, 석가하(石家河) 취락을 능가하는 규모의 복합취락이 존재한다. 양저유적군은 동서 10㎞, 남북 5㎞ 범위 내에서 20개소 이상의 옥기 출토지가 분포하며, 그 중심에 위치하는 막각산(莫角山)에는 6.7×4.5m의 인공 봉토 기단이 존재한다.
이외에도 많은 옥기가 부장된 분구묘로 양저유적 이외 상해시 청포(靑浦) 복천산(福泉山), 강소성 소주(蘇州) 막혜산(莫鞋山), 곤산(昆山) 조릉산(趙陵山), 무진사돈(武進寺墩) 유적 등 10개소 이상이 알려져 있다. 이들은 지역 수장층의 무덤으로 판단된다. 반면 분구가 없고 부장품도 극히 드문 공동체 일반 성원의 무덤은 평지 상에 있으며, 머리, 다리 등이 절단되고 손발이 묶인 순장자도 발견된다. 이러한 격차를 감안할 때 계층차가 존재하며, 지역 수장에게 권력이 집중된 사회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절강오흥(浙江吳興)의 전산양유적에서는 재배식물, 잠두콩, 참외, 표주박 종류, 수박 등의 종자가 발견되었으며, 이외에도 각 유적에서 메벼와 콩, 땅콩[落花生], 참깨[芝麻], 누에, 오이류 등의 작물이 알려져 있다. 아직 도작이 주류는 아니지만, 당시 수전농경이 상당한 규모와 수준에 이르렀던 것을 알 수 있으며, 직물 기술은 대나무로 짠 것들이 성행하게 되고, 여러 부문에서 사용된 견, 마의 생산도 본격적으로 행해졌다.
전산양(錢山?), 수전판(水田坂) 유적 등지에서는 석제 농구[石耕田器]가 발견되었다. 장방형, 반원형의 얇은 돌칼, 그리고 절구와 절구공이를 이용해서 곡물을 가공하였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으며, 이 외에도 우수한 생산공구인 대형 삼각형 여상기(黎狀器), 편평유공석부(扁平有孔石斧), 턱자귀[有段手斧], 낫, 석도와 석검 등이 발견되었다. 북방지방의 육도[畑作]지역 곡물가공방법과 달리 남방지방의 수전 도작지역에서는 선사시대 이래 일관되게 절구, 공이, 방대 등과 같은 빻는 힘을 이용하여 볍씨를 가공하는 농구가 사용되어 왔다. 이러한 농업 공구의 개량과 진보는 원시 농업을 한 단계 발전시켰으며, 농업 생산의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이외에도 나무 다듬는 솜씨도 매우 발달하여 노(?), 추, 바가지 등의 목기가 나온다. 나무로 만든 노가 나온다는 것은 배가 중요한 교통수단이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대나무를 엮어 짜는 솜씨도 충분히 숙달되어 있으며 비단 및 마직물도 출현하고 있다. 비단조각을 분석한 결과, 집에서 기른 누에로 만든 것임을 확인하였다. 마포조각 역시 마 방직품으로서 이것이 중국에서 가장 이른 저마(苧麻) 방직의 실물로 알려져 있고, 주택은 간란식(干欄式) 건축이며 우물이 나타나고 있다.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껴묻거리의 수량 및 질적 차이, 순장풍습의 발생, 제단유적의 출현 등 여러 상황으로 보아 양저문화의 사회성격은 복합사회의 일면을 갖고 있으며, 문명의 기원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이동주)』
(출처; 한국고고학전문사전 신석기시대편,
http://portal.nrich.go.kr/kor/archeologyUsrView.do?menuIdx=795&idx=1058)
4.20 평양남경유적(平壤南京遺蹟); 5000년 전~2200년 전(BC 3000년~BC 200년)
『북한 평양직할시 삼석구역 남경마을에 있는 석기시대 이후 집터와 돌널무덤·독무덤 관련 생활유적.
평양시 삼석구역 호남리 남경부락 대동강 북안 충적대지에 위치하고 있는 신석기시대~철기시대의 복합 유적이다. 대동강 유역을 중심으로 하는 서북한 지역의 신석기시대~청동기시대 물질문화를 연구하는 데 주요한 표지를 이루고 있는 유적이다.
1974년 4월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가 평양시 삼석구역 호남리 남경부락의 남쪽, 대동강의 북안에 제방 공사와 관련하여 지표 조사를 하던 중 강물의 침식에 의해 잘려나간 단애면에서 문화층을 발견하였다. 이를 계기로 1979년부터 1981년까지의 기간 동안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가 발굴 조사하였다.
유적의 범위는 남북 너비 50m, 동서 길이 1,000m 가량이다(면적 50,000㎡). 처음 조사한 지점이 1지점, 1지점으로부터 동쪽으로 450미터 떨어진 지점의 유구군이 제2지점이다. 1지점과 2지점 사이에서는 주거지 등이 존재하지 않는다. 1지점에서는 신석기시대 주거지 3기(31호, 32호, 37호), 청동기시대 주거지 15기(1~10호, 30호, 33~36호), 청동기시대 무덤 3기(2~4호), 철기시대 무덤 9기(1~9호)가, 2지점에서는 신석기시대 주거지 2기(12호, 17호), 청동기시대 주거지 7기(11호, 13호~16호, 18호, 19호), 청동기시대 무덤 17기(1호 등)가 조사되었다.
신석기시대 주거지에서는 서북한 지역 전형의 신석기시대 토기 외에 경부에 융기문이 있는 토기 또한 출토되었다. 융기문토기는 남경 유적 신석기시대 유구가 조사되기 이전에는 청호리와 금탄리 유적 등에서 소량 출토된 것이 있는데, 이 유적을 조사한 것을 계기로 평양을 중심으로 하는 대동강 유역에도 동북한 지역과의 교류를 통해 융기문토기가 일부 들어와 있었음이 분명해지게 되었다. 북한 학계에서는 남경유적의 신석기시대 주거군을 토기 비교 등을 통해 궁산 유적을 표지로 하여 설정된 궁산문화 4기에 속하는 것으로 보고 있고, 구체적인 연대는 기원전 3000년기 후반에서 기원전 2000년기 초로 설정하고 있다.
청동기시대 주거지에서는 서북한 지역의 청동기문화인 신흥동유형 전형의 팽이형옹과 팽이형호 외에도 여러 기종과 형식의 토기들이 조사되었는데, 이 가운데 북한 학계에서 남양형단지라고도 부르고 있는 변형 미송리형호 등도 포함되어 있어, 미송리형호를 중심으로 한 요동과 서북한 지역 토기문화의 흐름과 시간적 위치를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되고 있다. 남경 유적의 청동기시대 유적은 유구 간 중복 관계와 토기 및 석기의 기종 구성 및 형식 등을 고려할 때, 기원전 10~5세기의 기간 동안 각 주거군이 일정한 단계를 이루며 변모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남경 유적에서 철기시대 유적은 1~7호 옹관묘 등이 있다. 옹관은 대부분 화분형토기를 2옹 또는 3옹식으로 연결하여 횡치한 형식으로 되어 있는데, 6호의 경우에는 회색승문타날문 옹형토기 1점과 화분형토기 2점을 합구하여 횡치하여 놓았다. 남경 유적의 화분형토기는 대체로 동체가 다소 부른 포탄형을 하고 있는데, 1호 옹관의 막음옹으로 사용한 화분형토기의 경우에는 저부가 평저가 아닌 환저여서 마치 전국연 또는 서한 전기의 환저부와 유사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유물이 출토되지 않아 구체적인 편년을 하기는 어려우나, 화분형토기와 회색승문타날문토기의 형태 등으로 보아, 늦어도 기원전 2세기를 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남경유적은 시대와 시기가 다른 유구 간의 중복 관계가 여러 단위 확인되어 평양을 중심으로 하는 서북한 지역의 선사문화, 특히 청동기시대부터 철기시대까지의 유물 양상의 변화는 물론 연대를 편년하는 데 중요한 표지 유적이다. 예를 들어, 신석기시대 32호 주거지 위에 청동기시대 주거지 10호와 33호가 중복되어 있고, 신석기시대 31호 주거지 남쪽 퇴적층에 청동기시대의 2호 석관묘가 조성되어 있다.
그리고 청동기시대 9호 주거지 위에 청동기시대 8호 주거지가 중복되어 있으며 청동기시대 30호 주거지가 청동기시대의 4호와 10호 주거지에 의해 각각 중복되어 있다. 또한 청동기시대 4호 주거지 내부 퇴적층 내에 철기시대의 옹관이 조성되어 있으며 신석기시대 12호 화재 주거지 내부에 벽체와 지붕 시설을 이루고 있던 탄화목이 온전히 남아 있어 당시 주거지의 구조를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이밖에 신석기시대 17호 화재 주거지의 벽체에 탄화 기둥과 벽체가 상당수 남아 있어 벽체의 목가구를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된 점을 예로 들 수 있다.
남경유적 청동기시대 2기층의 3호, 10호, 11호, 16호 주거지에서는 북한학계에서 남양형단지라고도 부르는 변형 미송리형호 또한 출토되었는데, 주거지의 공반 유물과 중복 관계 등과 함께 요동~서북한 지역 미송리형호의 전개 과정 및 편년과 관련하여 중요한 표지 유물로 인식되고 있기도 하다. 이외 36호 주거지 등에서 다량의 탄화미, 조, 수수, 콩, 기장 등의 식물 유체가 출토되어 청동기시대 농경과 관련하여 중요한 자료로 인식되고 있기도 하다. (2016년)오강원(한국학중앙연구원)』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4.21 소하연문화; 5000년 전~4000년 전(BC 3000년~2000년)
『중국 내몽고자치구 적봉시(赤峰市) 오한기(敖漢旗)의 석양석호산(石羊石虎山)유적에서 1960년부터 이 문화의 단서가 조사되었다. 소하연문화는 서요하(西遼河)유역에 분포하는 문화이며, 소하연문화에 속하는 유적은 사능산(四稜山), 남대지(南臺地), 대남구(大南溝), 삼도만자(三道灣子) 등이 대표적이다.
이 문화는 홍산(紅山)문화와도 밀접한 관련을 가지며, 연대는 기원전 2500년 전후의 시기로 알려지고 있다. 소하연문화 유적에서의 유구는 삼도만자에서 저장구덩이, 사능산에서 6기의 가마터, 남대지에서 4기의 주거지와 8기의 저장구덩이 조사되었으며, 무덤은 석양석호산의 무덤을 비롯하여 대남구 석붕산(石棚山)무덤에서 77기가 조사되었다.
이 문화기에 출토되는 도기(陶器)는 수량이 많으며, 모든 유적에서 출토되지만 대남구 석붕산무덤에서 217점으로 가장 많다. 도기는 채도, 회도, 흑도, 홍도 등이 있으며, 유적에 따라서 점유물이 다르다, 문양은 기대(器臺)의 경우는 전면에, 존형기(尊形器)는 동부 상반 위로 시문되며, 능형문(菱形文), 와문(渦文) 등이 보인다.
도기의 기형은 통형관(筒形罐), 절복분(折腹盆), 회도발(灰陶鉢), 고족배(高足杯), 호(壺), 두(豆) 등 다양하며, 채도의 장식문양은 삼각문, 능형문(菱形文), 격자문(格子文), 평행사선문(平行斜線文) 등 홍산문화의 문양과 유사하다. 쌍구호(雙口壺), 호, 두 등은 문양이 없는 경우도 있다.
대남구 석붕산무덤은 77기가 조사되었으며, 주변지역까지 합치면 83기에 달한다. 무덤의 구조는 수혈무덤, 반동굴식이 있으며, 3기의 합장무덤도 확인되고 있다. 부장품은 많은 양의 석기, 도기, 장신구 등이 출토되었다.
특히 석붕산 52호무덤에서는 7가지의 부호가 새겨진 직통관(直筒罐)이 출토되었는데, 이는 갑골문, 상형문자의 기원으로 보고 있다. 소하연문화는 홍산문화의 후기 혹은 만기의 단계이며, 황하유역의 앙소(仰韶)문화 후기와 산동반도의 대문구(大汶口)문화 후기와도 관련이 있는 듯하다.
앙소문화와의 관련은 석붕산무덤의 채도발(彩陶鉢)이 하북성의 조요(趙窯)유적 출토의 것과 유사하며, 도상부호(圖象符號)도 거의 같다. 대문구문화도 석기, 도기, 문양, 도상문자(圖象文字)에 있어서 소하연문화와 유사하다. 소하연문화는 요하유역과 중원지구의 문화가 상호교류에 의해 발전한 것이며, 이후 청동기시대의 하가점문화(夏家店文化) 하층으로 계승되고 있다.』
(출처; 한국고고학 전문사전(신석기시대편)
portal.nrich.go.kr/kor/archeologyUsrView.do?menuIdx=795&idx=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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