력사를 찾아서
《만주와 한반도 12,000년 전~ 2,000년 전 년대기》 5. 4,500년 전~2,000년 전 5.1 흑룡강 앙앙계유적~5.3 조선(1) 본문
《만주와 한반도 12,000년 전~ 2,000년 전 년대기》 5. 4,500년 전~2,000년 전 5.1 흑룡강 앙앙계유적~5.3 조선(1)
대야발 2024. 2. 9. 15:20《만주와 한반도 12,000년 전~ 2,000년 전 년대기》
5. 4,500년 전~2,000년 전
5.1 흑룡강 앙앙계유적(黑龍江 昻昻溪遺蹟); 4500년 전~4000년 전(BC 2500년~2000년)
『중국 흑룡강성 제제합이시(齊齊哈爾市) 앙앙계구(昻昻溪區) 서쪽 약 6㎞에 있는 오복역[五福火車站]남쪽 모래언덕 위에 위치한다. 1930년 중동철로(中東鐵路)의 러시아 국적 고용인이었던 루카스킨(Lukashkin)이 사냥 중 유물을 발견하여, 1930년 양사영(梁思永)이 발굴을 진행하였다. 1960년대 초 눈강유역(嫩江流域)의 고고조사를 비롯해 1970년에도 앙앙계지역에 대한 조사는 계속 이어졌고, 1980년 앙앙계 동남쪽으로 1㎞에 있는 등가강자(?家崗子)유적에서 주거지, 무덤, 회갱(灰坑) 등을 발굴하기도 했다. 앙앙계유적은 1930년 양사영이 발굴한 오복(五福)지역 주변으로 같은 문화유형을 보이는 지점이 계속 발견되고, 새로운 자료도 계속 축적되어 앙앙계문화(昻昻溪文化)로 통칭하게 되었다. 앙앙계문화는 앙앙계가 중심이 되는 눈강유역 길림성 서부지역에서 주로 발견된다.
앙앙계유적의 입지를 보면, 송눈평원(松嫩平原)의 서쪽 끝자락으로, 서쪽으로 대흥안령(大興安嶺)과 가까워 서북쪽이 높고 동남쪽이 낮은 지형이다. 그리고 눈강 중류지역에 속해 있어 강 양쪽으로 드넓은 대지 위에 크고 작은 모래언덕[沙丘]들이 발달되어 있는데, 오랜 시간 풍화작용을 받아 곳곳에 늪지[窪地湖沼]를 형성하고 있다. 이러한 늪지 가까운 곳에 비교적 안정된 모래언덕 위에서 유적들이 발견된다. 이것은 물고기잡이에 유리한 조건이 된다. 그래서 출토 유물 중에서도 물고기잡이와 관련된 세석기와 뼈도구들이 상당수를 차지한다.
1930년에 양사영이 발굴한 지역은 오복(五福)지역에 있는 모래언덕 4곳으로(Ⅰ·Ⅱ·Ⅲ·Ⅳ), 그중 Ⅰ·Ⅲ호 모래언덕에서만 유물이 나왔다. Ⅲ호 모래언덕에서는 무덤이 2기 발굴되었다. 첫 번째 무덤인 M1은 무덤구덩이는 뚜렷하지 않으나 머리뼈가 북쪽을 향하고, 척추뼈들의 배열이 정연한 편이다. 껴묻거리는 모두 27점으로 대부분 다리뼈 근처에서 나왔고 머리뼈 옆에서는 토기단지[陶罐] 1점이 나왔다. 껴묻거리의 종류는 대부분 석기와 뼈도구들이고 토기는 단 2점 뿐이다. 그중 특징적인 유물은 둥근밑 단지[?底罐]와 손잡이 달린 바리[帶流鉢], 낚싯바늘[單排倒刺穿孔魚?], 뼈창끝머리[骨槍頭]와 뼈칼손잡이[骨刀柄]이다. 두 번째 무덤인 M2는 M1의 남쪽에서 발견되었는데 무덤의 일부만 남아 있다. 부서진 뼈들 사이에서 석기가 22점 찾아졌고 뼈도구는 매우 적다. 토기는 둥근밑 단지 1점, 손잡이달린 소래기[帶流盆] 1점이 각각 출토되었는데, 그 모양이나 배치가 M1과 거의 같다.
오복무덤에서 나온 유물을 보면 낚싯바늘과 같은 뼈도구[骨器]가 많고 발달되었다. 석기는 눌러뗀[壓制] 세석기가 주요한 생산도구이며, 그 크기가 작고 제작 기술도 매우 정교한 것이 특징이다. 토기는 바탕흙을 그다지 정선하지 않아 모래를 많이 함유하고 있고, 일부 조개가루가 포함된 것도 있다. 많이 출토된 토기는 회갈색과 황갈색의 진흙질토기[灰褐泥質陶]로 찍은[拍印] 불규칙한 삼각무늬, 덧무늬[附加堆紋], 그은무늬[劃紋], 손톱무늬[指甲紋] 등을 베푼 것이다. 앙앙계유적의 연대에 관해서는 아직 뒷받침할 만한 절대연대값이 없으므로 출토 유물을 통해 시기를 추정하고 있다. 앙앙계유적에서 특징적인 유물은 세석기와 토기이다. 세석기문화는 비교적 긴 시간동안 지속된 문화로 보는 만큼 앙앙계문화도 이른 시기와 늦은 시기가 공존할 가능성이 있는데, 그 안에서 토기가 시기구분의 기준이 되고 있다. 오복무덤은 토기의 기형이 단순하여 앙앙계문화 중 이른 시기의 유적으로 보고 있다. 앙앙계문화의 연대를 이른 시기는 기원전 2500년 이전, 늦은 시기는 기원전 2000년경으로 추정하고 있다.(진소래)
(출처; 한국고고학 전문사전(신석기시대편),
http://portal.nrich.go.kr/kor/archeologyUsrView.do?menuIdx=795&idx=1052)
5.2 청원 쌍청리유적(淸原雙淸里遺蹟); 4500년 전~4180년 전(BC 2500년∼BC 2180년)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오송읍에 있는 석기시대 빗살무늬토기·숫돌 등이 출토된 집터. 수혈주거지.
1993년 국립청주박물관에 의해 발굴 조사되었다. 이 유적은 쌍청리 새터마을 북서쪽에 형성된 해발 50m 정도의 나지막한 구릉상에 위치한다. 신석기시대의 움집터[竪穴住居址] 2기와 삼국시대의 움집터 2기가 확인되었다.
신석기시대의 움집터는 충청북도에서 처음으로 조사된 것이다. 여기에서는 신석기시대 후기로 편년되는 다양한 빗살무늬토기[櫛文土器]와 함께 조갯날도끼[蛤刃石斧], 미완성의 반달돌칼[半月形石刀], 돌보습[石製牢先], 가판[碾石棒], 숫돌[砥石], 석영암제 석기 등 많은 석기류도 출토되었다.
이 중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전형적인 신석기시대 토기인 뾰족바닥의 빗살무늬토기와 함께, 바닥과 몸통이 둥글고 몸통 상반부 전면에 빽빽이 무늬를 베푼 독특한 형태의 토기이다.
이런 형태의 토기는 지금까지 충청북도 영동 금정리(錦汀里) 유적과 대전 둔산동(屯山洞) 유적 등 금강수계와 중서부 해안의 일부에서만 나타나는 강한 지역색을 보여, 이른바 ‘금강식토기’(錦江式土器)로 명명된 것이다.
또한 출토된 석기 중 돌보습, 반달돌칼, 가판 및 갈돌 등은 금강식토기가 출토되는 유적의 입지가 주로 내륙의 구릉 사면이라는 점과 함께, 신석기시대의 초보적인 농경을 암시하는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이 유적의 신석기시대 주거지에서 출토된 목탄을 시료로 한 탄소연대측정 결과는 기원전 2500∼2180년으로 나타났다.
삼국시대의 움집터에서는 타날문단경호 등 백제토기편과 함께 철촉 등이 출토되었다. 평면형이 사각형을 이루는 움집 바닥에서는 외부 지형이 높은 쪽의 벽에 붙여 ‘ㄱ’자모양의 배수도량(排水溝) 시설이 확인되어, 중부내륙 지방의 삼국시대 주거지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집필(1999년) 신종환』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5.3 조선(고조선, 단군조선, 고대 조선); 4353년 전~2258년 전(BC 2333년~BC 238년)
『《환단고기》〈단군세기〉는 단군의 치세에 대해 자세히 기록하고 있으며, 그 역년은 다음과 같다.
왕검(王儉)단군: 재위 93년
부루(扶婁)단군: 재위 58년
가륵(嘉勒)단군: 재위 45년
오사구(烏斯丘)단군: 재위 38년
구을(丘乙)단군: 재위 16년
달문(達文)단군: 재위 36년
한율(翰栗)단군: 재위 54년
우서한(于西翰) 혹은 오사함(烏舍咸)단군: 재위 8년
아술(阿述)단군: 재위 35년
노을(魯乙)단군: 재위 59년
도해(道奚)단군: 재위 57년
아한(阿漢)단군: 재위 52년
흘달(屹達) 혹은 대음달(代音達)단군: 재위 61년
고불(古弗)단군: 재위 60년
대음(代音) 혹은 후흘달(後屹達)단군: 재위 51년
위나(尉那)단군: 재위 58년
여을(余乙)단군: 재위 68년
동엄(冬奄)단군: 재위 49년
구모소(緱牟蘇)단군: 재위 55년
고홀(固忽)단군: 재위 43년
소태(蘇台)단군: 재위 52년
색불루(索弗婁)단군: 재위 48년
아홀(阿忽)단군: 재위 76년
연나(延那)단군: 재위 11년
솔나(率那)단군: 재위 88년
추로(鄒盧)단군: 재위 65년
두밀(豆密)단군: 재위 26년
해모(奚牟)단군: 재위 28년
마휴(摩休)단군: 재위 34년
나휴(奈休)단군: 재위 35년
등올(登兀)단군: 재위 25년
추밀(鄒密)단군: 재위 30년
감물(甘勿)단군: 재위 24년
오루문(奧婁門)단군: 재위 23년
사벌(沙伐)단군: 재위 68년
매륵(買勒)단군: 재위 58년
마물(麻勿)단군: 재위 56년
다물(多勿)단군: 재위 45년
두홀(豆忽)단군: 재위 36년
달음(達音)단군: 재위 18년
음차(音次)단군: 재위 20년
을우지(乙于支)단군: 재위 10년
물리(勿理)단군: 재위 36년
구물(丘勿)단군: 재위 29년
여루(余婁)단군: 재위 55년
보을(普乙)단군: 재위 46년
고열가(古列加)단군: 재위 58년
치세 기간은 기원전 2333년 ~ 기원전 238년으로, 47대 2096년간 지속되었다고 한다.』
(출처; 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wiki/%ED%99%98%EB%8B%A8%EA%B3%A0%EA%B8%B0)
〈신용하의 인류 5대 ‘古朝鮮문명’ - ⑦ 고조선 태동과 정치적 기반〉
요령성 출토 새·곰·범 청동장식… ‘고조선=한·맥·예 연맹’ 증거
2019년 9월 11일 문화일보
▲ 요령성 평강지구에서 출토된 ‘새’ 토템족이 ‘곰’ 토템족, ‘범’ 토템족, ‘이리’ 토템족을 휘하에 거느린 동안의 청동장식.
『■ 신용하의 인류 5대 ‘古朝鮮문명’ - ⑦ 고조선 태동과 정치적 기반
- 한민족 고고학
한족·맥족 혼인동맹 통해 출생한 단군이 건국… 예족은 자치권 가진 제후국으로 결합
도읍 ‘아사달’은 원래 나라 이름… 아침 뜻하는 ‘아사’·나라 뜻하는 ‘달’ 한자로 의역해 ‘朝鮮’
▲ 산동반도 대문구문화 유적에서 출토된 ‘아사달문양’이 새겨져 있는 팽이형 토기.
‘새’ 토템 ‘한’족의 군장국가 군장 환웅(桓雄)이 ‘곰’ 토템 ‘맥’족의 여군장(부족장)과 혼인동맹으로 그 사이에서 후손 ‘단군’(檀君)이 태어나 성장하자, 단군은 ‘아사달’(阿斯達)에 도읍을 정하고 ‘조선’(朝鮮)이라고 호칭한 고대국가(나라)를 개국했다.
‘삼국유사’에 인용된 중국 고문헌으로는 “‘위서’(魏書)에 이르되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에 단군(壇君)왕검이 있어, 도읍을 아사달에 정하고 나라를 개창해 이름을 조선이라 하니 高(堯)와 같은 시기이다”라고 역사적 사실만을 간단히 기록했다. 한편 삼국유사에 수록된 ‘고기’(古記)는 ‘단군설화’를 수록하면서 환인의 아들 환웅과 웅녀(熊女:곰 토템 부족 여족장)의 혼인에 의한 한·맥의 혼인동맹 사이에 출생한 아들인 단군왕검의 ‘조선’(朝鮮, 古朝鮮) 개국을 기록했다.
중국 고문헌들에 나오는 ‘한맥’(한貊)도 새 토템 한족과 곰 토템 맥족의 결합에 의한 ‘고조선’과 한국원민족의 형성을 인지한 기록의 한 사례다. 범 토템 ‘예(濊)’족은 다른 방식에 의해 한·맥족과 결합했다. 예족의 고조선 국가에의 결합양식은 일정의 자치권을 가진 ‘후국’(侯國)제도에 의거한 것이었다. 예족에 관한 최초의 고문헌 기록인 ‘일주서’(逸周書) 왕회해(王會解)편에 ‘예인’(穢人)이 나오고, 그 주에는 “예(穢)는 한예(韓穢)이니 동이(東夷)의 별종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여기서 ‘韓穢’는 한과 결합한 예 또는 한의 예 의미를 포함한 것으로 해석된다.
한·맥·예 3부족 결합의 증거는 고고 유물에서도 보인다. 고조선 강역이었던 만주 요령성 평강지구에서 고조선 후기 커다란 새(독수리, 삼족오)의 지휘와 보호 아래서 곰과 범이 순종하고 있고 그 옆에 이리가 따르는 금도금 장식으로 조각 유물 2점이 출토됐다(왼쪽 위 사진 참조). 이 장식물의 동물은 부족 토템 상징으로서, 커다란 새는 한족의 토템이고, 곰은 맥족, 범은 예족의 토템이며, 이리는 후에 고조선 후국족이 된 ‘실위’족 등 유목민족의 토템이었다. 이 유물은 한족의 중심적 지휘 아래서 고조선이 한·맥·예 3부족이 연맹해 형성되고, 후에 이리 토템 족이 참여했음을 잘 증명해 준다.
고조선의 건국 시기는 언제인가? 종래 여러 가지 견해와 조사연구가 진행돼 왔다.
▲ 단군조선의 탁자식 고인돌들. ① 한반도 강동 문흥리 2호 고인돌 ② 요동반도 해성 석목성 고인돌 ③ 요동반도 개주 석붕산 고인돌 ④ 요동반도 대석교 석붕옥 고인돌
(1)삼국유사에서 인용된 위서에서는 고조선의 건국 시기를 고중국의 ‘요’(堯)임금과 동시기라고 했다. 중국에서는 요임금의 즉위년에 대해 무진(戊辰)년설과 갑진(甲辰)년설이 병존했다. ‘동국통감’(東國通鑑, 서거정 편찬)은 무진년설을 택했는데, 구한말에 이를 서기 BC 2333년으로 환산했다. 고조선 건국 시기를 BC 2333년, 즉 BC 24세기로 보는 문헌학적 견해가 정립된 것이다.
(2)고고 유물에서 보면, 고조선 건국 직후 고조선 이주민(중국학자들의 동이족) 소호(少호 또는 少昊)족의 유적인 산동반도 ‘대문구(大汶口)문화’ 유적 상층 유물에서 ‘아사달문양’이 새겨져 있는 고조선 ‘뾰족밑 팽이형(변형) 민무늬토기’ 11점(파손분 포함)이 출토됐다. 이 11개 토기 술잔은 형태가 고조선 특유의 뾰족밑 팽이형 민무늬토기일 뿐 아니라, 토기 위의 잘 보이는 위치에 아사달문양까지 새겨 넣었으니(오른쪽 위 사진 참조), 이것은 고조선 건국 후 산동반도에 이주해간 고조선 이주민의 토기임이 명백한 것이다. 아사달문양 토기의 편년을 취하면, 고조선 건국 시기는 BC 3000년∼BC 2400년 이전으로 볼 수 있다.
(3)북한 고고학자들이 1993년 강동읍의 단군묘를 발굴해 보니 남녀 한 쌍의 인골 잔편이 출토됐다. 두 기관에서 24∼30차 측정한 평균치는 bp 5011±267년(bp는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법에 의거해 1950년을 기준으로 역산한 고고학의 연대)이었으니, 이 뼈를 단군의 유골로 본다면 BC 30세기경 건국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한편 중국 사회과학원은 1996년 5개년 계획의 ‘하상주단대공정’(夏商周斷代工程)의 결과, 중국 최초의 고대국가 하(夏)나라의 건국 연대를 BC 2070년이라고 발표했다. 이것은 고조선 건국 연대 BC 30세기보다 9세기 뒤늦은 것이며, 가장 낮은 연대인 BC 2333년보다 263년 뒤늦은 것이다. 종합해 보면, 환웅 족의 ‘군장국가’ 시기를 제외하고서도, 단군의 고대국가 고조선 건국 시기는 BC 30세기∼BC 24세기라고 보면 틀림이 없을 것이다. 고조선은 BC 30세기∼BC 24세기에 건국된 동아시아 최초의 고대국가인 것이다.
고조선의 원래 나라 이름은 ‘아사(시)달’이었다. 일연의 삼국유사에 인용된 위서와 고기는 고조선의 나라 이름을 ‘조선’이라고 기록했다. 일연은 이것이 삼국(고구려·백제·신라) 이전의 ‘옛 나라’임을 나타내기 위해 ‘古’(고)자를 붙여서 ‘고조선’(古朝鮮)이라는 항목 이름을 사용했다. 그러나 ‘朝鮮’은 한자 이름인데, 고조선의 건국 시기에는 한자가 아직 없었으므로, 순수한 고조선말 원래 나라 이름이 있었을 것임은 틀림없다.
위서와 고기에서 고조선의 도읍이라고 기록한 아사달이 바로 고조선의 나라 이름일 것으로 본 기존 학설에 필자는 찬동한다. 고대 역사에서는 도읍 이름과 나라 이름이 동일한 경우가 종종 있는데, ‘아사’는 현대 일본어에서도 ‘朝’를 아사(아침)로 읽으며, ‘달’은 ‘땅·나라’의 뜻이니, 아사달을 뒤에 한자로 의역한 것이 ‘朝鮮’이라고 본 것이다. 고조선의 고조선말 고유의 나라 이름은 ‘아사달’(Asadar)이었다.
고조선의 서변지역과 고중국에서는 ‘사’(sa)가 ‘시’(si)로 변음돼 ‘아시달’(Asidar)이라고도 했다. 여기서 ‘달’은 ‘땅’(land)·‘나라’의 뜻이고, ‘아사’·‘아시’는 ‘태양이 맨 처음 솟는 아침’의 뜻이다. ‘아사달’·‘아시달’은 ‘태양이 맨 처음 뜨는 나라’(land of the sunrise), ‘태양이 맨 처음 뜨는 아침의 나라’(land of morning)라는 뜻이다.
고조선의 수도 아사달은 ‘밝달 아사달’(대박산 아사달)이라고도 했다. 이것은 상징적으로 고조선 나라의 대명사로도 사용됐다. 고중국에서는 밝달 아사달을 ‘發朝鮮’(발조선)으로 번역해서 사용하기도 했다. ‘밝달’이 ‘發’로 음차표기되고, 아사달이 ‘朝鮮’으로 의역표기돼 합쳐진 것이다. 고조선 첫 도읍지 밝달 아사달의 밝달은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고조선 민족의 상징적 호칭 대명사로서도 의미가 확대됐다. 그리하여 고조선 사람들을 밝달 사람, 고조선 민족을 밝달 민족으로 호칭하기도 했다. 후에 밝달을 한자로 번역할 경우에는 ‘倍達’(배달)로 음차표기되기도 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고조선의 ‘아시(사)달’(land of the sunrise, 태양이 맨 처음 뜨는 나라)이 ‘아시아’(Aisa: land of the sunrise)와 동일한 뜻을 가진 나라 이름이라는 사실이다. 고조선 서방후국들 사이에서 아사달은 상고음으로는 아시달로 발음되고 있었다. 왜 유럽 사람들은 ‘아시(사)달’이 있는 동방을 ‘아시아’로 이름 붙였을까? 서양인들도 그리스문명 시대에 유라시아대륙의 동방 끝에 태양이 처음 뜨는 곳 ‘아시(사)달’이라는 나라가 있다는 정보를 알고 있지 않았을까?
삼국유사, 고기에서는 고조선의 첫 도읍지가 아사달이라 하고, 옮긴 도읍을 ‘백악산 아사달’(白岳山 阿斯達)이라고 했다. 아사달이 밝달(백산, 白山)과 중첩 사용돼 왔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밝달은 한자로 ‘白山’(백산), ‘白岳’(백악), ‘朴山’(박산), ‘朴達’(박달), ‘北岳’(북악), ‘檀’(밝달나무 단) 등 여러 가지 한자로 음차표기돼 왔다. 삼국유사에 고조선의 초기 도읍을 단지 아사달로만 기록하지 않고 ‘백악산 아사달’이라고 기록한 것은 고조선의 첫 도읍지를 비정하는 데 매우 중요한 참고가 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평안도 강동현(江東縣)조에 ‘대박산’(大朴山)과 ‘아(사)달산’(阿達山) 이름의 연속된 산이 있다. ‘강동군읍지’의 지도를 보면, 대박산의 비탈이 거의 끝나는 기슭 옛 현청 동헌의 뒤에 ‘아달산’이 그려져 있다. 대박산이 ‘큰 밝달’(太白山·태백산의 뜻)과 동일한 것이고, 아달산이 아사달임은 바로 알 수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강동현조에는 왕릉으로 ①단군묘(檀君墓) ②고황제묘(古皇帝墓)의 2개 고대왕릉이 이 책이 처음 편찬된 15세기까지 남아 있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단군묘’가 15세기에도 둘레가 410척(약 123m)이라고 했다. 이 거대한 규모는 이 무덤이 왕릉임을 알려준다. 단군묘 등 옛 왕릉이 2개나 15세기까지 남아 있는 곳은 옛 왕조의 도읍지가 아니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또한 ‘강동군읍지’에는 강동현에 조선 후기까지 ‘황제단’(皇帝壇)이라는 제천(祭天)용 거대한 ‘제단’이 남아 있었는데, 둘레가 607척(약 182.2m), 높이가 126척(약 37.8m)이라고 기록했다. 이러한 거대한 제단은 여러 계단의 피라미드형 큰 제단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강동현조를 자세히 검토해 보면, ‘왕궁터’(대궐터)까지도 찾을 수 있다. 이 고문헌은 강동현의 마을들 가운데서 특히 6개 마을을 별도로 구태여 ‘고적’(古跡)으로 분류했는데, ①잉을사향(仍乙舍鄕) ②기천향(岐淺鄕) ③반석촌(班石村) ④박달관촌(朴達串村) ⑤마탄촌(馬灘村) ⑥태자원(太子院) 등이다.
이 6개 마을 가운데, ‘이두’로만 읽히는 마을이 ‘잉을사향’(王宮里의 뜻)이다. 이것을 이두식으로 풀어 읽으면, ‘임금집마을’=‘왕궁리’(王宮里)가 된다. 이곳이 고조선의 왕궁이 있던 ‘터’임이 명칭으로 남겨져 전해온 것이다. 잉을사향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15세기에는 ‘용흥리’(龍興里)로 호칭됐다. 그 주변 문흥리에는 고조선 왕의 무덤으로 보이는 거대한 탁자식 고인돌도 남아 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고조선은 개국 후 2번 천도했다가 다시 아사달로 돌아왔다고 했다. 천도는 부수도와 관련돼 있는 것으로 보이며, 이 경우에도 ‘강동(江東) 아사달’은 ‘원도읍’으로서 계속 존속됐다고 추정된다. 요컨대 고조선의 첫 도읍은 대동강 중류 동쪽 ‘강동 아사달’이었고, 그다음 천도한 두 번째 도읍은 요동의 ‘개주(蓋州) 아사달’이었다고 본다. 개주지구 주위에 거대한 왕릉인 탁자식 고인돌이 지금도 10여 개 남아 있고, 그 주변에 다시 또 다수의 탁자식 고인돌이 남아 있기 때문에 이를 알 수 있다.』
(출처;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19091101031712000001)
〈신용하의 인류 5대 ‘古朝鮮문명’ - ③ 동아시아 최초 청동기문화〉
대동강유역서 출토된 세밀한 청동공예품… 中문명보다 1000년 앞서
2019년 6월 26일 문화일보
■ 신용하의 인류 5대 ‘古朝鮮문명’ - ③ 동아시아 최초 청동기문화
『한반도 서북 평남 성천군서 BC31세기 첫 청동조각 발견
용곡리지역 비파형 청동창끝 고조선 성립 BC26세기 추정
특유의 청동거울 ‘다뉴조문경’ 세계유일 조립식 ‘비파형동검’
아름다운 기하학도안 ‘팔주령’ 한반도·요동·요서 고루 분포
광석 녹여 합금하는 청동기술 문명 고도화의 중요한 지표
中, 빨라야 BC20~BC16세기 日은 BC4세기 들어서야 개막
인류는 신석기 시대 후기·말기에 자연동·자연금·운철(隕鐵: 운석 속의 타고 남은 철) 등 자연 광석을 채집·단조해서 금속을 도구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자연 광석들을 녹여 ‘합금’을 만들면 더 견고한 도구를 제작할 수 있음을 알게 됐다. ‘합금’은 고도의 과학기술의 응용을 알려주기 때문에, 문명 형성의 중요한 지표가 된다. 인류가 최초의 합금을 제조한 부문은 동(순동·자연동(自然銅))과 주석과 아연 등을 녹여 합금해서 제조한 ‘청동기’의 생산이었다. 청동기의 생산과 청동기 시대의 시작은 인류가 과학적 문명의 시대에 들어섰음을 알리는 것이었다.
고조선문명권에서 신석기 농업혁명이 시작된 것은 고한반도 중부지방 ‘한강문화’였지만, 최초의 청동 유물이 나온 것은 BC 31세기경 청동합금 조각이 출토된 ‘대동강문화’였다. 대동강 중상류인 평안남도 성천군 용산 무덤에서 5069년 전(1995년 기준 BC 3074년)의 것으로 측정된 청동(靑銅) 조각들이 팽이형 토기, 돌도끼, 돌도끼 조각과 함께 출토됐다. 이것은 청동 무기나 도구를 제조하기 직전의 준비된 중간재 청동 조각이지만, 이미 자연동(銅)과 석(錫)과 연(鉛)의 세 광석을 합금시켜 제조한 합금 조각이기 때문에, 청동기 시대가 한반도 서북지방에서는 BC 31세기에 시작되고 있었음을 강력히 시사하는 것이다.
이어서 고조선(단군조선) 성립기인 기원전 26세기의 것으로 측정된 비파형 청동 창끝이 강동군 용곡리 5호 고인돌 무덤에서 나왔다. 기원전 26세기(4593±167년 bp)의 것으로 측정된 청동 단추와 청동 창끝도 발굴됐다. 또한 상원 장리에서 BC 3000년 기 전반기의 큰 규모 고인돌(오덕형) 무덤의 무덤 칸에서 청동 교예 장식품 1개, 청동 방울종 2개, 청동 끌 1개를 비롯한 청동 제품들이 나왔다. BC 26세기의 유적·유물로 측정됐다. 이 가운데서 청동 2인 교예 장식품은 서로 어깨를 끼고 발목을 합친 2인의 교예사가 각각 1개씩의 둥근 고리(環)를 들고 또 다른 2개의 둥근 고리 위에 올라서 재주를 부리는 형상을 제작한 것이다. 옷의 몸통과 팔, 소매, 바지에 고조선 문명 특유의 굵은 기하학적 번개무늬가 돋쳐 있고, 얼굴에는 입·코·눈·귀가 잘 묘사돼 있는, 작지만 매우 숙련된 기술의 우수한 청동 공예품이다(<그림 1-3> 참조).
또한 청동 방울종은 원추형의 종처럼 아가리가 넓고 꼭대기가 좁은 형태로, 울림통·고리·추로 이뤄진 작은 방울종이다. 역시 고조선 문명 특유의 굵은 기하학적 번개무늬가 돋친 것으로서 숙련된 기술로 어려운 구조를 만든, 매우 뛰어난 청동 공예품이다(<그림 1-4> 참조). 고조선 문명의 대동강문화에서 BC 31세기 청동기 시대의 시작은 동아시아 최초다. BC 31세기의 청동 합금 조각이 아직 청동기는 아니라고 불안해하는 경우에는 BC 26세기의 비파형 청동 창끝 2점, 청동단추, 청동 교예장식품, 청동 방울종 2점, 청동 끌, BC 25세기∼BC 24세기의 금동귀고리 3점 등 청동기 유물이 발굴돼 시계열이 완벽하게 형성됐으므로 이때 청동기 시대가 시작됐음은 명백한 것이다. 고조선은 BC 31세기∼BC 26세기에 초기 청동기 시대로 진입했다.
요하 서편 홍산문화의 우하량 유적에서도 BC 30세기경의 순동(純銅)귀고리 1점과 거푸집이 발굴됐다. 이를 두고 중국 고고학자 일부는 홍산문화를 금석병용기로 설정하고 있으나, 이것은 자연동이지 아직 주석 및 아연과의 ‘합금(合金)’이 아니므로 청동기라고 볼 수 없다. 동아시아에서는 고조선 문명의 대동강문화에서 BC 31세기∼BC 26세기에 처음으로 청동기 시대가 성립돼 주위로 전파된 것이다. 서방 수메르 문명에서는 BC 33세기∼BC 30세기의 청동기 유물이 출토되기 시작해 이 시기부터 청동기 시대에 들어서게 됐다고 보고 있다.
고조선문명 청동기 문화의 특징적 유물 중 하나는 청동거울인 다뉴조문경(多粗紋鏡)과 다뉴세문경(多細紋鏡)이다. 보통 뒷면 무늬그림의 줄의 섬세한 정도에 따라 다뉴조문경과 다뉴세문경으로 구분한다. 고조선식 청동거울은 모두가 둥근 태양 모양에, 뒷면에 붙은 꼭지가 2∼3개의 ‘다뉴’(多, 여러 꼭지)이고 중심부의 약간 위에 꼭지를 붙여 제조돼 있다. 무늬는 ①햇빛(태양광선) 무늬와 ②번개무늬가 대종을 이루고 있다. 이에 비해 그 훨씬 후의 고중국식 청동거울은 둥글거나 사각형 모양에 뒷면에 붙인 꼭지가 중심부에 한 개뿐인 단뉴(單, 한 개 꼭지)로 제조돼 있으며, 무늬는 각종 동식물 등 구상물이 대종을 이루고 있다.
고조선문명의 다뉴조문경과 다뉴세문경의 완전하게 둥근 형태는 해(태양)를 상징한다고 본다. 고조선 사람들은 천손의식을 갖고 하늘과 해(태양)를 숭배했으므로, 청동거울을 항상 해와 같이 둥근 모양으로 만들고, 뒷면의 무늬는 햇빛(태양광선)을 기하학적으로 형상화했다. 고조선문명에서 다뉴조문경과 다뉴세문경의 뒷면에 동심원을 1∼3개 그리고 햇빛을 삼각형 또는 별무늬 모양으로 나눠 그린 것도 사실은 모두 햇빛(태양광선)의 기하학적 무늬다. 종래 이것을 별무늬 또는 삼각무늬, 톱니무늬로 이름 붙여 설명해 온 것은 해(태양) 숭배 사상과의 관련을 간과한 정확하지 않은 설명이라고 본다.(<그림 2-1> 참조)
이 고조선 다뉴조문경의 지역적 발굴 분포를 큰 강을 경계로 가정해 지도에 옮겨보면 <그림 3>과 같다. <그림 3>에서도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고조선 다뉴조문경은 한반도 전역과 만주의 요동·요서 및 연해주지역에도 분포돼 있다.
고조선문명의 청동기문화 유물들 가운데 독특한 청동기로 ‘비파형동검’이 있다. 이 청동단검은 그 모양새가 고대 악기 비파(琵琶)와 비슷한 곡선으로 도안돼 있으므로 붙여진 명칭이다. 고조선문명의 비파형동검은 고중국의 직선으로 도안된 동검이나 또는 북방 오르도스식 구부러진 도안의 동검과는 확연히 모양새가 달라서 누구나 쉽게 구별할 수 있다.
고조선 비파형동검의 큰 특징으로는 첫째, 비파형 청동단검은 중간 부분의 양날에 돌기를 만들고, 그 돌기를 중심으로 검 끝과 검 아랫부분을 부드러운 곡선 모양새로 만들어서 마치 고대 악기 비파 모양처럼 도안했다는 점이다. 전 세계 청동검 양식에서 비파형 도안은 오직 고조선 청동단검과 비파형 청동 창끝만 가진 매우 독특한 도안이다.
둘째, 비파형 청동단검은 검몸과 검자루를 별도로 주조해 조립하는 세계 유일의 ‘조립식’ 청동단검이다. 두 개 부품을 별도로 주조해 조립하는 것이므로 청동기 주조 기술이 상당히 높은 수준에 도달해야 제작할 수 있는 동검이다.
셋째, 비파형 청동단검은 검몸의 한가운데 ‘등대’가 검의 거의 끝에서부터 검자루 이음매까지 세로로 곧게 만들어져 있다. 이것은 동검을 견고하게 하면서 조립을 정확히 하기 위한 것이다.(<그림 2-3> 참조) 주목할 것은 고조선의 비파형 청동단검은 ①한반도 ②요동 ③요서 지역에서 출토되는 비파형동검의 형태와 구조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는 사실이다.
고조선문명의 세형동검은 철기 시대의 동검이다. 고조선에서 BC 12세기경에 철기 시대가 시작돼 철제무기, 특히 철 장검과 철 단검이 점차 비파형 청동단검을 대체하기 시작하자, 이와 관련해 비파형 청동단검에도 아름다운 곡선의 실용적 직선으로의 변화가 일어나서 세형동검이 출현·발전했다. 세형동검도 조립식 동검이다.(<그림 2-4> 참조)
비파형 청동단검과 병행해 성립한 청동무기로 ‘비파형 청동 창끝’이 있다. 비파형 청동 창끝은 손잡이에 긴 나무막대를 끼워 긴 창으로 사용한 것인데, 나무막대는 삭아 없어지고 청동 창끝(銅矛)만 출토된다. 가장 오래된 출토 비파형 창끝은 덕천 남양유적 집자리에서 나온 BC 26세기의 비파형 창끝이다. 모든 금속문명권에서 청동 창끝을 사용했으나 이러한 비파형 청동 창끝은 고조선문명에만 있었고, 이웃 고중국 계열에는 없었던, 고조선의 독특한 청동무기다. 고조선문명에서 청동도끼도 많이 출토되는데, 부드러운 곡선을 넣어 도안한 ‘부채꼴’(扇形) 청동도끼다. 이것은 이웃 고중국의 직선도안 ‘책꼴’(冊形) 청동도끼와 쉽게 구별된다.
고조선문명에서는 각종 의례·의식에서 의기(儀器)를 청동기로 제조해 사용했다. 고조선에서는 특히 제천의식을 담당하기 위해 국읍(國邑)에는 천군(天君)이라는 담당자를 두고 그의 제천 제사 지역을 소도(蘇塗)라고 해 신성시했다. 소도는 단군신앙을 담당한 성스러운 곳이었으므로, 여기서 고조선 시대에 사용한 제의용 청동기들은 단군신(檀君神) 숭배와 관련이 있다고 해석된다.
여기서 사용한 청동의기들은 방울종과 방패형 의기가 대종을 이루고 있다. 청동방울종은 동령(銅鈴: 작은 청동 방울종)과 동탁(銅鐸: 큰 청동 방울종)이 발굴되고 있다. 동령 가운데 팔주령(八珠鈴)은(<그림 2-2>) 8각형 구도의 중앙 몸체의 중심에 1개 태양(해)과 태양광선(햇빛살)을 도안하고 8각의 끝에는 동그란 종방울을 달아 두 개 타래머리무늬(雙頭渦紋)를 조각한 청동기다. 팔주령은 단군신앙의 소도의 제의기이므로, 중앙의 태양은 단군, 그 둘레의 원(圓)은 단군의 밝달조선의 상징이고, 8각 끝의 8방의 작은 종방울들은 단군의 8방의 후국을 상징하는 8개의 작은 태양으로 해석된다. 이러한 고조선문명의 청동기는 당시 세계 최고 기술과 아름다운 기하학적 도안의 예술품으로도 세계 정상의 것이었다.
고중국의 청동기는 고조선 후국 고죽국 지역 당산(唐山)에서 출토된 BC 20세기의 홍동(紅銅) 조각 2점과 용산문화 유적에서 출토된 BC 18세기의 작은 청동 추가 있다. 상(商) 시대의 하남성 이리두문화 유적에서 나온 삼족기 청동 술잔, 향로, 청동 칼, 추, 끌은 BC 16세기∼BC 13세기의 것이었다. 중국 고고학계는 일찍 잡아도 중국에서는 BC 20세기∼BC 16세기 초기 청동기 시대가 시작됐다고 설명했다. 고조선 아사달지역의 BC 31세기∼BC 26세기보다 약 1000년 뒤의 일이다. 일본 청동기 시대의 개막은 야요이 시대(BC 4세기 중엽∼AD 3세기 후반)이므로 다시 이보다 훨씬 후의 일이다.
고조선문명에서 최초의 청동기가 나왔다는 사실이 한자(漢字) 만들기에도 반영돼 있다. ‘鐵’(철)의 옛 글자(상·서주 시대)는 ‘철’(철, 쇠, 금속)이었다. ‘철’(철)은 ‘동이의 금속’이라는 뜻이다. 즉 고대 중국 지식인들은 동·금·철 등 금속이 동이(고조선)에서 중국으로 들어온 것임을 당시에는 잘 알고 있었다.
유럽 고고학자들은 1928년 상(商)의 청동기(BC 16세기∼BC 13세기)를 발견하고 경탄해 이때부터 ‘황하(고중국)문명’의 개념을 정립하기 시작했다. 고조선이 그보다 1000년이나 앞서 찬란한 청동기를 만들고, 상나라 사람 자체도 고조선의 청동기술을 갖고 간 고조선 이주민이었는데, 우리가 ‘고조선문명’론을 정립하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출처;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19062601032712000001)
〈 [차근차근 한국미술사 20] 다뉴세문경의 기원은 청동단추가 아니라 천문(天門) 〉
2019년 3월 8일 오마이뉴스
『국보 제141호 다뉴세문경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이 청동거울이 세상에 나온 지 60년이 지났는데도 우리는 이 거울의 정체를 알지 못한다. 거울 뒷면의 무늬는 그때나 지금이나 '기하학적 추상무늬'이다. 앞으로 3회에 걸쳐 한반도 청동거울의 기원과 거울 뒷면의 무늬, 이 거울에 담긴 세계관은 무엇인지 밝혀 보고자 한다. - 기자말
▲ 〈사진145〉 국보 제141호 다뉴세문경 뒷면(왼쪽)과 앞면. 지름 21.2cm. 지금은 녹이 슬어 검은빛이지만 처음 만들었을 때는 은빛이었다. 앞면을 반질반질하게 윤을 내 얼굴을 비추어 보았을 것이다. ⓒ 한국기독교박물관
'기하학적 추상무늬'란 말의 본뜻
이 거울은 1960년 이전 충남 논산 육군훈련소 가까이에서 한 군인이 참호를 파다 발굴했다고 전해진다. 이도 최근 2008년에야 밝혀졌다. 그전에는 강원도(또는 원주)에서 나온 것으로 알고 있었다. 1960년이면 지금으로부터 60년 전인데, 그동안 학자들은 이 거울을 연구했지만 밝혀낸 것은 거의 없다.
단지 거울의 재질이라든지 선이 1만 3300개쯤 된다는 것만 밝혀진 상태이다. 이 거울의 디자인이 무엇을 '구상'으로 한 것인지, 이 거울에 어떤 '세계관'이 담겨 있는지는 아직도 오리무중이다. 우리는 역사 유물을 교과서에서 보면 학자들이 모두 밝혀냈을 것으로 지레짐작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은 유물이 아주 많다. 이 거울도 그 가운데 하나다.
그동안 여러 방송국에서 이 거울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찍었다. 최근에 찍은 것은 유튜브에 거의 올라와 있는데, 거울의 정체를 밝혀낸 다큐는 찾아보기 힘들다. 우리는 다뉴세문경 다큐를 볼 때 수없이 듣는 말이 하나 있다. 바로 '기하학적 추상무늬'라는 말이다.
이 말은 신석기 미술사를 읽을 때 수없이 나오는데, 이때 우리는 이 말을 다른 말로 한번 번역을 해서 읽어야 한다. 학자들이 선사시대 어떤 무늬를 두고 '기하학적 추상무늬'라 하면, '아, 이 사람도 모르고 있구나!(I don't know!)'로 읽어야 한다. (사실 학자들은 이 말을 몹시 하기 싫어하거나 할 줄 모른다) 하지만 학자들이 기하학적 추상무늬라고 하는 것도 나중에 알고 보면 '기하학'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고, 물론 그 무늬는 추상무늬가 아니라 '구상무늬'일 때가 많다. 다뉴세문경 무늬도 마찬가지다.
▲ 〈사진146〉 거울 빛깔이 검은 까닭은 땅속에서 녹이 슬었기 때문이다. 동그라미 부분은 깨진 곳인데 보는 것처럼 은백색에 가깝다. 이 거울은 구리 61.6퍼센트에 주석 32퍼센트다. 청동은 주석 비율이 22퍼센트일 때 가장 단단하다. 그리고 그 이상 들어가면 강도가 급격히 떨어진다. 당시 한반도 청동기인들은 이 사실을 알았는데도 지금의 거울 빛깔과 비슷하게 하려고 일부러 주석을 최대치까지 넣었던 것으로 보인다. ⓒ 한국기독교박물관
Bronze Mirror With Geometric Designs
2007년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은 다뉴세문경 보존처리를 한다. 이 거울은 19조각으로 깨져 있었다. 군인의 삽에 부딪혀 깨졌는지, 아니면 원래 깨져 있었는지는 모른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 붙인 곳에 틈이 나고, 더는 미룰 수 없어 다시 분리해 보존처리를 한 것이다. 보존처리는 그해 6월부터 시작해 이듬해 8월까지 14개월이나 걸렸다. 이때 박물관은 그동안 하지 못했던 종합조사를 해 《한국기독교박물관 소장 국보 제141호 다뉴세문경 종합조사연구》(2009)를 낸다.
〈사진146〉은 《다뉴세문경 종합조사연구》 논문 사이사이에 있는 간지 부분이다. 여기서 눈여겨봐야 할 구절은 'Bronze Mirror With Geometric Designs(기하학적 무늬 청동거울)'란 말이다. 연구자들은 이 거울의 무늬를 처음부터 '기하학적 무늬'라고 아주 못을 박고 논의를 펼쳐 나간다. 거울의 정체를 풀 수 있는 것은 무늬인데도 그들은 거울의 무늬를 '기하학적 무늬'라 하면서 더는 문제 삼지 않는다. 이 한 구절은 지금까지 다뉴세문경을 놓고 이루어진 모든 논의의 민낯이라 할 수 있다.
▲ 〈사진147〉 다뉴세문경 고리. 〈사진148〉 다뉴세문경 동심원 확대 사진.
ⓒ 한국기독교박물관
이 거울은 과연 '태양(해)'을 상징할까?
〈사진145〉 청동거울을 '다뉴세문경'이라 한다. 다뉴(多紐 많을다·끈뉴)는 말 그대로 끈을 꿸 수 있는 고리(紐)가 많다는 말이다. 〈사진145〉 거울 뒷면을 보면 가운데 약간 위쪽 두 곳이 튀어나와 있다. 이 튀어나온 꼭지에 구멍이 〈사진147〉처럼 옆으로 나 있다. 이 구멍 두 개에 줄을 꿰어 묶고, 그 사이로 손을 넣어 손바닥으로 받치고 얼굴을 봤던 것이다. 또는 줄을 길게 해 목에 걸기도 했을 것이다. 이렇게 줄을 꿸 수 있는 고리를 '뉴(紐 끈뉴)'라 한다. 이 거울은 뉴가 두 개지만 어떤 거울은 다섯 개, 많게는 아홉 개까지 달린 것도 있다. 그리고 '세문경(細文鏡 가늘세·무늬문·거울경)은 가는 무늬 거울이라는 뜻이다.
이 청동거울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배우는 역사 교과서 청동기 시대 편에 늘 실려 있어 한 번쯤 보았을 것이다. 이 거울은 흔히 '태양(해)'을 상징한다고 알려져 있다. 더구나 몇 해 전 김양동은 《한국의 고대문화 원형의 상징과 해석》(지식산업사, 2015)에서, 우리 겨레가 고대부터 태양을 '숭배'했다고 하면서 빗살무늬토기의 빗살무늬를 '빛살'무늬로 보고, 이 거울의 빗금무늬 또한 '빛살'로 해석한다. 그러자 이 가설은 그대로 《환단고기》를 믿는 사람들에게 건너가 거의 정설이 되어 굳어져 버렸다. 하지만 한반도 신석기인과 청동기인이 '태양'을 숭배했다는 근거는 없고, 물론 유물도 없다.
한반도 청동기인, 컴퍼스를 쓰다
〈사진148〉은 다뉴세문경 동심원을 확대한 사진이다. 가운데 두 동그라미를 보면 다른 동그라미와 달리 엉성하게 되어 있다. 그 까닭은 이렇다. 동심원은 모두 22줄로 되어 있는데, 청동기인은 톱니가 20개 달린 컴퍼스(그림쇠)를 만들어 동심원 무늬를 새겼다. 가운데에 쇠를 찔러 고정하고 빙 돌렸던 것이다. 이렇게 하면 동그라미 골이 20개가 된다. 청동기인은 컴퍼스를 뺀 다음 쑥 들어간 송곳 자리를 끝이 뭉툭한 무늬새기개로 잘 메꾼 다음 그 무늬새기개로 두 원을 그렸다.
그래서 가운데 두 원이 정밀하지 않은 것이다. 이것으로 보아 청동기인은 거푸집을 만들 때 활석(무른 돌)에 새긴 것이 아니라 고운 흙이나 모래가루를 반죽해 그 위에 새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는 활석 가루를 반죽해 새긴 것으로 짐작한다. 활석을 서로 문질러 갈아 가루를 내고, 그것을 반죽해 평평한 거푸집 평면에 고르게 바른 다음 살짝 굳었을 때 정밀한 자와 컴퍼스 같은 그림쇠로 무늬를 새겼을 것이다. 그리고 활석 가루를 반죽할 때 마르더라도 갈라지지 않게 도토리나 식물줄기에서 나오는 녹말 성분 즙 같은 것을 넣었을 것으로 본다.
▲ 〈사진149〉 중국 은허 M202호 묘에서 나온 칠각성문 청동단추. 은허는 중국 허난성(河南省) 안양현(安陽縣) 샤오툰촌(小屯村)에 있는 고대 상(商)나라 수도다. 〈사진150〉 청동단추. 경상북도 영천 어은동유적(지금의 영천시 금호읍)에서 나왔다. 지름 2.5㎝ 안팎. 이곳 유적은 1세기 청동기·철기시대 유적으로 알려져 있다. ⓒ 국립중앙박물관
청동거울의 기원은 과연 '청동단추'일까?
지금까지 한중일에서 나온 다뉴세문경은 100여 점쯤 된다. 이 거울은 청동검과 함께 청동기문화를 대표하는 유물이라 할 수 있다. 청동거울이 나온 뒤 수많은 학자들이 90년 남짓 연구를 했는데, 안타깝게도 한중일 학자들 모두 청동거울의 기원을 중국 상나라 은허 부호묘(기원전 14-13세기)에서 나온 청동단추(〈사진149〉)나 중국 네이멍구(內蒙古) 자치구 오르도스(Ordos, 기원전 10세기)에서 나온 청동단추(銅泡 구리동·거품포)에서 찾았다. 그런데 학자들은 청동단추에 그 기원을 둔다고 하면서도 정작 단추의 무늬는 해석하지 않는다. 그 까닭은 청동거울이든 청동단추이든 거기에 있는 무늬는 '기하학적 무늬'이기 때문이다. 기하학적 무늬이기에 더 이상 연구를 할 까닭이 없는 것이다. 어떤 유물에 대한 연구에서, 더구나 그 무늬가 아주 중요한데도 '기하학적 무늬'라 전제해 놓고 연구를 한다면 그 연구 방법이 과연 합당하다고 할 수 있을까.
이 거울의 본질은 뒷면에 있는 무늬를 푸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그랬을 때만이 거울의 정체도 비로소 알 수 있다. 그런데 우리 학계뿐만 아니라 중국·일본 학자들도 이 거울의 무늬를 단 한마디, 즉 '기하학적 추상무늬'라고만 할 뿐이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 〈사진151〉 용문공심전(龍文空心?) 탁본. 길이 117cm. 중국 함양 진궁전 유적지에서 나왔다. 가운데 원판, 천문(天門) 안에 작은 동그라미 무늬를 수없이 그렸다. 이는 천문의 강조라 할 수 있다. ⓒ 중국 섬서성
중국학계의 엉뚱한 무늬 풀이
〈사진151〉 용문공심전(龍文空心磚)은 벽돌인데, 속이 비어 있는 벽돌을 말한다. 이 벽돌은 진나라 때 함양에 지은 궁전 터에서 나왔다. 중국 학계에서는 이 벽돌 그림을 아직 제대로 해석하지 못하고 있다. 중국 학자들은 가운데 둥근 원판을 옥(璧 둥근옥벽)으로 보고, 거기에 용 몸통이 붙어 있는 것으로 해석한다.
그들은 후한시대 역사서 《한서(漢書)》 〈율력지(律歷志)〉에 나오는 구절, "해와 달은 마치 옥을 합친 것 같고, 오성(五星 수·금·화·목·토성)은 꿰어 놓은 구슬과 같다(日月如合璧 五星如連珠)"에서 옥(璧)의 뜻을 가져와 옥과 용이 하나가 되어 있으니 완벽하다, 조금도 어긋남이 없이 조화롭다로 해석한다.
하지만 이 풀이는 엉뚱하기 그지없다. 이 벽돌 그림에는 해와 달도, 오성(五星)도 없다. 무늬 해석은 전체 무늬가 자연스럽게 맞아떨어져야 한다. 즉 무늬의 이야기(story)가 한 묶음으로 드러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해석에는 용과 원판의 관계가 빠져 있다. 왜 둥근 옥인지, 그 안에 있는 수많은 동그라미 무늬는 또 뭔지, 더불어 용 몸통에 동그라미 무늬가 왜 있는지, 용 몸통을 비늘로 하지 않고 왜 빗살무늬로 했는지, 이런 것을 설명하지 못한다. 대체 그들은 왜 이것을 해석하지 못하는 것일까.
용(龍) 갑골과 금문은 y축에서 본 천문
〈사진151〉 벽돌 그림은 용의 기원을 말하고 있다. 하늘 천문(天門·원판)에서 용이 태어난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곡옥(曲玉)을 용의 기원으로 보아 왔지만 이도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 그리고 이 천문(天門)은 청동거울의 기원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청동거울의 기원이 청동단추가 아니라 천문(天門)이라는 것이다.
천문은 중국과 한반도 신석기인에게 이 세상 만물의 기원이기도 하다.
'하늘 속 물(水)'이 이 천문을 통해 구름으로 나오고, 이 구름에서 비가 내려 이 세상 만물이 태어난다고 믿었던 것이다. 즉 천문화생(天門化生), 우운화생(雨雲化生)의 세계관이다. 이것은 앞글 '빗살무늬토기의 비밀' 연재글에서 충분히 밝혔던 것이기도 하다('조선백자 자라병과 암사동 신석기인의 세계관' 참조 바람).
▲ 〈사진152〉 한자 용(龍), 해일(日) 갑골, 용(龍) 갑골과 금문, 위상(上) 갑골과 육서통, 운(云←구름운(雲)의 본자) 갑골. 중국과 암사동 신석기인은 파란 하늘(경계) 넘어 공간을 거대한 물그릇으로 여겼다. 거기서 천문을 통해 구름이 나오고, 그 구름에서 비가 내리는 것으로 본 것이다. ⓒ 김찬곤
〈사진151〉이 x축에서 본, 그러니까 사람이 땅에 서서 고개를 쳐들고 본 천문과 용이라면 〈사진152〉 용(龍) 갑골과 금문은 y축(옆)에서 본 천문과 용이다. 여기서 먼저 알아야 할 것이 있는데, 갑골과 금문에서는 천문(天門)을 〈사진151〉처럼 둥그렇게 그리지 않고, 반드시 y축에서 본 것으로 그리고 있다는 점이다. x축에서 본 천문(동그란 천문)은 육서통에 이르러서야 볼 수 있다. 중국 고대인들은 왜 천문을 이렇게 그렸을까. 그것은 해(日)와 관계가 깊다.
중국 고대인들은 해(日)를 동그랗게 그리지 않고 네모 속에 짧은 가로획을 그었다(〈사진152〉 참조). 이렇게 한 까닭은 거북 배딱지에 송곳으로 글자를 새길 때 동그라미를 새기기 힘들어서이기도 하지만 그들은 해(日)와 달(月)과 천문(天門)을 구별할 필요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셋 다 모양이 둥근데도 해는 네모지게, 달은 그믐달이나 초승달 모양으로 그렸다. 그리고 천문은 y축에서 본 것으로만 그린 것이다. 세계적인 한문학자 시라카와 시즈카는 y축에서 본 천문을 '꽃받침'으로 본다. 이에 대해서는 신석기 세계관과 관련하여 사라카와 시즈카의 한자학을 다룰 때 아주 자세히 다룰 것이다.
용(龍)과 구름(云)은 위상(二)에서 비롯한 글자
한중일 한문학계에서는 용(龍) 갑골과 금문에서 아래쪽 152-② '구름'은 읽어내고 있으나 위쪽 ①번 천문, 물그릇, 하늘 속 물(水)은 아직 읽어내지 못하고 있다. 보통 이 부분을 용 '뿔'로 보는 듯싶다. 이렇게 된 까닭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동한시대(25-220) 허신의 《설문해자》(121)에서 그 내력을 찾을 수 있다.
허신은 위상(二)과 아래하(二가 뒤집어진 꼴)를 상형글자로 보지 않고 지사문자로 본다. 흔히 지사문자를 눈으로 볼 수 없는 추상적인 생각이나 뜻을 점이나 선으로 그린 기호(symbol) 글자로 풀이한다. 그렇다면 중국 신석기인에게 위상과 아래하 글자는 눈으로 볼 수 없는, 그런 추상적인 것을 나타내는 기호였을까. 그건 아니었다. 그들은 파란 하늘 너머에 커다란 물그릇이 있다고 봤고, 그 그릇에 물(水)이 차 있고, 그 물이 천문(天門)을 통해 시시때때로 구름이 되어 온 세상을 덮었다가 비가 되어 내리는 것으로 여겼다. 근대의 관점으로 보면 이는 지극히 추상적인 사고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고대 신석기인에게 이러한 생각은 결코 추상적이거나 관념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들에게 그것은 언제나 생생한 실제이고 구상이었다.
더구나 중국 신석기인들은 이 세상을 위상과 아래하 단 두 글자로 표현했다. 어쩌면 이 두 글자는 한자 가운데 가장 먼저 생겨난 글자일 가능성이 높다. 또 이 두 글자를 합쳐, 그러니까 위상 아래에 아래하를 붙여 한 글자로 표현한 금문도 있다. 한자학계에서는 이 글자를 상(二) 자로 보고 있다.
용(龍)과 구름(云) 또한 위상(二)에서 비롯한 글자이다(〈사진152-③〉 참조). 하지만 허신은 위상과 아래하뿐만 아니라 이 두 글자에서 생겨난 여러 글자, 특히 중국 신석기인의 세계관을 헤아릴 수 있는 글자(云天气雨霝示言音龍不否丕辛王帝)를 한일(一)부나 두이(二)부 아니면 다른 여타 부수에 넣어 버렸고, 그 뒤 중국의 신석기 세계관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흐릿해지고 만다. 무엇보다도 허신이 주역의 세계관으로 중국 한자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중국 한자에 깃들어 있는 신석기 세계관은 송두리째 날아가고 만다. 한마디로 허신은 신석기 세계관을 주역으로 전도시켰다고 볼 수 있다. 언제나 그렇듯 일단 전도가 일어나면 기원(신석기 세계관)은 순식간에 사라지기 마련이다. 이에 대해서는 '빗살무늬토기의 비밀' 연재글 말미에서 아주 자세히 밝힐 것이다.』
(출처;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517624)
〈갑골음으로 바른 역사 복원하기⑧ (최종회)〉
2017년 6월 28일 한국NGO신문
『최춘태 박사의 『갑골음으로 잡는 식민사학ㆍ동북공정』은 우리 상고사를 복원하는 데 매우 귀한 자료다. 단지, 내용의 난해성으로 말미암아 저자와 독자 사이에 공감대가 제한되어 있고, 학문적으로 아직은 널리 인정을 받은 상태가 아니지만, 미국 프린스턴대학이 세계 최고학자로 공인한 유창균 박사의 학문임을 감안하면 최 박사의 연구결과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
‘아사달’은 ‘ᄀᆞᄉᆞᄃᆞᆯ’로 환(桓)족의 땅이란 의미
지금까지 낙랑, 노룡, 갈석 등 우리 겨레와 관련된 단어의 상고음이 [ᄀᆞᄅᆞ]와 [ᄉᆞᄅᆞ]이고 그것이 gəsər(ə)라는 환(桓)의 갑골음에서 나온 것을 소개했다. 우리 겨레를 일컫는 예맥(濊貊)의 예(濊)의 갑골음도 gəsər(ə)로 桓과 같다. 그러니 [ᄀᆞᄅᆞ]와 [ᄉᆞᄅᆞ]라는 발음이 나는 지역은 환(桓)족, 예(濊)과 관련된 지명으로 볼 수 있다.
비슷한 예로, 현재 우리가 ‘아사달’이라 읽는 단군의 첫 도읍지와 관련 『설문해자』에서 ‘阿는 可성’이라고 했다. ‘가’로 읽어야 한다는 말이고, 그래서 阿斯의 상고음은 ‘ᄀᆞᄉᆞㄹ’가 되니 환(桓)ㆍ예(濊)족의 땅이라는 의미가 데서 찾을 수 있다.
맥(貉)의 성부인 각(各)이 ᄀᆞᄅᆞ로 읽혔으니 濊족보다 조금 늦은 시기에 나온 우리의 족명이고, 맥(貊)의 상고음인 bərg(), mərg()이 현재의 ‘밝다’, ‘맑다’는 桓자의 의미로 남아 있다. 그리고 bərg과 그 앞선 음인 bər에서 r이 i-breaking현상으로 반모음 j가 되어 ‘백’이 되고, 배달의 ‘배’가 되었다. 우리가 맥족의 후예라는 말이다.』
(출처; http://www.ngonews.kr/96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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