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와 한반도 12,000년 전~ 2,000년 전 년대기》

5.4 하가점(샤자덴)하층문화(夏家店下層文化); 4000년 전~3500년 전(B.C. 2000~1500)

중국 동북지방의 청동기시대 전기 문화로 최초로 內蒙古 赤峰 夏家店 유적 하층에서 발견되어 이름이 붙여졌다. 방사성탄소연대측정 결과에 의하면 그 연대는 대체로 B.C. 2000~1500년에 해당된다. 샤자덴하층문화(夏家店下層文化) 유적은 주로 燕山을 중심으로 남북 지역에서 모두 발견되는데, 북으로는 西拉木倫河 유역, 동으로는 예巫閭山 서쪽 기슭, 서로는 河北省 張家口地區, 남으로는 河北省 承德-唐山-天津地區에 분포한다.

 

샤쟈덴하층문화는 홍산문화(紅山文化)보다 시기적으로 늦으며, 연산 이북 지역에서는 샤쟈덴상층문화에 의하여 대체된다. 지금까지 발굴된 중요한 샤쟈덴하층문화 유적으로는 內蒙古 赤峰 지구의 夏家店, 藥王廟, 南山根, 大甸子 유적과 遼寧省 朝陽지구의 豊下, 水泉 유적 등이 있다. 샤쟈덴하층문화 토기는 그 특징이 뚜렷한데, 생활용 토기는 청회색 위주이고 수제(手製)로 점토띠를 판축하였고 소성 온도는 비교적 높은 편이다. 많은 경우 승문(繩紋)이 장식되었는데, 비점문(?點紋), 원권문(圓圈紋) 등 각종 압인(押印) 문양과 융기문(隆起紋)도 있다. 무덤에 부장된 토기의 경우, 소성 온도는 비교적 낮고 기표면은 흑색을 보이며 마연의 흔적이 있거나 홍(), () 2종류의 색깔로 채색한 경우가 많다. 토기의 종류로는 우(), (?), (?), (), (), (), (), (), (), (?), (), (?) 등이 있다.

 

샤쟈덴하층문화에서 발견된 금속제품을 보면 소형 생산공구와 장식품이 대부분인데, 청동손칼, 귀걸이, 반지와 금귀걸이 등이 있으며 아직 용기(容器)는 제작되지 않았다. 대전자 무덤 자료를 볼 때, 당시 안틀과 바깥틀을 조합한 거푸집(鎔范)으로 청동기를 주조하였음을 알 수 있다. 당시의 석기 가운데 가장 많이 보이는 것은 삽, 칼 등으로 나무 손잡이에 매달아 사용한 농업 생산공구이다. 그밖에 돌도끼(石斧), 뼈화살촉(骨鏃) 등의 무기도 있다. 대롱형 옥구슬과 마노 구슬 등을 꿰어 찬 목걸이와 녹송석(綠松石) 구슬, 패각 장식품 등의 개인용 장식품도 다수 발견된다.

 

샤쟈덴하층문화의 집자리(住居址)는 하천 기슭의 대지 위에 자리잡았는데 비교적 규모가 큰 취락의 경우 담을 쌓거나 도랑을 파서 방어시설을 설치한 경우도 있다. 집자리는 반지하식이 대부분이지만 돌로 벽을 쌓아 만든 것도 있는데 평면은 원형에 가까우며 직경은 2.0~3.0m 가량이다. 문은 동남쪽으로 설치된 경우가 많다. 바닥과 벽면에 풀과 흙을 반죽한 것을 바르기도 하고 백회(白灰)를 깐 것도 있다. 집자리 주위에는 저장구덩이(貯藏穴)들이 발견된다.

 

샤자덴하층문화의 무덤은 규모가 일정하지 않은데, 대전자 유적의 경우 무덤이 1,000여 기에 가까운 대형무덤 유적이다. 무덤은 모두 장방형(長方形) 수혈토광묘인데 목관, 석판, 벽돌 등을 이용하여 관 구조를 만들었다. 어른과 어린이의 무덤은 크기와 구조에서 차이를 보이지만 대부분 측신직지(側身直肢)의 매장법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어른의 무덤에서는 격, , 우 등의 토기가 부장되었으며, 무덤을 채운 흙 속에서 가끔 돼지가 순장된 채로 발견된다. 비교적 규모가 큰 무덤에서는 격과 관 토기가 2쌍 혹은 3쌍 부장되었고, , 작 등의 주기(酒器)가 발견되기도 한다.

 

샤쟈덴하층문화의 생업경제(生業經濟)를 보면 조 등의 농업에 기반을 둔 정착생활을 영위하였으며, , , 돼지, 개 등의 동물도 사육하였다. 사냥과 채집 등의 활동도 활발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샤쟈덴하층문화의 종교활동과 관련된 증거로는 점복술(占卜術)을 들 수 있는데, 동물의 어깨뼈나 다리뼈 등을 사용하여 길다란 판을 만든 뒤 소형의 원형 홈을 파는 등의 준비를 하였다. 샤쟈덴하층문화의 채색토기에서 보이는 동물얼굴 문양은 상주(商周) 청동기에서 보이는 도철문(??) 도안과 그 분할 및 배치, 문양의 배합 등에서 유사함을 보이지만 그 정확한 의미는 아직 알 수 없다.

(출처; 한국고고학사전(2001),

portal.nrich.go.kr/kor/archeologyUsrView.do?menuIdx=792&idx=10259)

 

 

2007 10 12일 경향신문 기사 [코리안루트를 찾아서](2) 고조선 추정 청쯔산·싼줘뎬 유적〉

 

『-거대한 성, 수천 년 전 韓민족을 증거하다-

 

 

 

 

 

 

고조선의 성일 가능성이 많은 싼줘뎬 석성 안에 있는 원형건축물 흔적. 조상신·하늘신에 제사 지낸 제단일 가능성이 높다.

 

10여개의 작은 산들이 둘러싸고 있는 청쯔산의 전체 유적 규모는 6.6㎢다. 아(亞)자 형태인 주봉 유적만 해도 총 면적이 15만㎡나 된다. 주위에는 성벽 같은 반원형의 마면식(馬面式·치) 석축이 있다. 찬찬히 뜯어보니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200기에 달하는 적석총과 석관묘, 그리고 하늘신과 조상신에 제사를 지냈다는 돌로 쌓은 제단터와 사람들이 살았거나 공무를 보았을 대형 건물터…. 많은 적석총과 석관묘…. 외성과 내성으로 잘 조성된 성벽…. 여섯 구역에서 확인된 원형석축건물지만 무려 232개나 된다니….

 

 

 

치가 13개나 되는 싼줘뎬 석성의 위용.


# 청쯔산 정상에 선 나라는?

 

 

 

싼줘뎬에서 수습한 덧띠무늬 토기편. <츠펑/김문석기자>

 

이형구 선문대 교수와 윤명철 동국대 교수는 “거대한 무덤터이자 제단터이며, 유적의 규모와 내용으로 보면 국가단계의 사회조직일 수밖에 없다”고 입을 모았다.


내성에서는 최고위층이 거주한 것으로 보이는 건물지 10개가 확인되었습니다. 중국 학자들의 말처럼 고국(古國)의 형태가 분명합니다.”(이형구 교수)


탐사단의 눈을 끄는 것은 우리와의 친연성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샤자뎬(하가점, 夏家店) 하층문화의 대표적인 유적 가운데 하나라는 점이다.


그런데 샤자뎬 하층문화는 학자들 간 논란이 있지만 늦춰 잡아도 대략 BC 2000~BC 1200년 사이의 문화이다. 눈치 챘을 테지만 고조선의 연대와 비슷하다는 점에서 관심을 끈다.


“적석총과 석관묘, 제단터는 물론이고, 성벽의 축조 방법을 보면 고구려·백제와 비슷합니다. 할석으로 한 면만 다듬어 삼각형으로 쌓고, 다음 것은 역삼각형으로 쌓는 형식 말입니다.”


이형구 교수는 “할석과 삼각석(견치석), 그리고 역삼각형의 돌로 견고하게 쌓은 성벽은 인천 계양산성의 축성 방식을 연상시킨다”고 밝혔다. 기자를 비롯한 탐사단은 청쯔산 정상에 널려 있는 이른바 덧띠무늬 토기편을 수습했다. 이 역시 우리나라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인 문양이다.


그렇다면 혹 고조선? 기자는 솟구치는 의문점을 가슴에 담아둔 채 하산하고 말았다. 학자들도 기자의 구미에 맞는 속시원한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

 

# 어마어마한 석성의 실체는?


그런데 청쯔산 탐사는 그저 리허설에 불과했다. 다음날. 츠펑에서 북서쪽으로 40㎞쯤 떨어진 싼줘뎬(삼좌점, 三座店)으로 향했다. 역시 힘겨운 여정이었으나 탐사단은 소풍 가는 어린아이처럼 설렌다. 지난해 정식 발굴을 끝낸, 그래서 발굴보고서도 아직 나오지 않았고, 국내 언론에도 소개되지 않은 ‘싱싱한 싼줘뎬 유적을 찾아가는 참이니…. 유적은 2005년 인허(음하, 陰河) 다목적댐 공사 도중 발견되었고, 지난해 말까지 발굴을 끝냈다.


과연 댐 공사가 한창이었다. 오른쪽엔 야트막한 야산이 보였다. 청쯔산과 비슷한 입지다. 기자 일행은 메마른 산등성이를 서둘러 올라갔다.


“와!” 역시 1착으로 뛰어오른 기자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저 보이는 대로 카메라 셔터를 눌러댈 뿐. 마치 어제의 청쯔산 집터처럼 완연하게 드러난 집터와 적석총이 끊임없이 펼쳐져 있었고, 제사터와 그리고 도로 혹은 수로가 구획 사이에 조성돼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양념. 정상부에 오르자 거대한 성벽의 행렬이 꿈처럼 펼쳐지고 있었다. 학자들도 처음 보는 유적이라 흥분에 휩싸인 듯했다.


“치(雉·적을 제압하려고 성벽 밖으로 군데군데 내밀어 쌓은 돌출부)가 도대체 몇 개야?”(이형구 교수)


이교수가 성의 행렬을 더듬으며 세어보니 확인할 수 있는 것만 13개나 되었다.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성벽이다. 유적의 연대는 BC 2000~BC 1500년 사이(샤자뎬 하층문화)의 것이란다.


# 고구려·백제를 빼닮은 전통


“전형적인 초기 형식의 석성이네요. 기저석을 쌓고 수평으로 기저를 받친 뒤 ‘들여쌓기’를 한 모습…. 횡으로 쌓은 뒤 다음 단은 종을 쌓았어요. 4000년 전에 이렇듯 성벽이 무너지지 않게 견고하게 쌓았다니….”(이교수)
윤명철 교수는 “주거지에 샤자덴 하층문화 때의 토기편들이 널려 있다”면서 “치가 촘촘하게 있다는 것은 육박전 같은 대규모 전투를 염두에 둔 것”이라고 해석했다. 이교수가 실측해보니 치는 5 간격으로 서 있었다. 대각선을 뚫은 문지(門址)도 발견되었는데, 이는 은신하면서 드나들 수 있는 출입문이다.


성이 무너지지 않게 견치석을 적절하게 배치한 석성의 또 다른 특징은 아군의 추락을 막고 적병의 침입을 방어하려고 여장을 쌓았다는 것이다. 유적의 전체 면적은 1만4000㎡였고, 건물지 수십기와 석축원형제단, 적석총, 그리고 석축 저장공(13개)이 확인되었다.


석성은 츠펑 지구를 포함한 발해만 북부지역에서 발전한 축성술이다. 이 전통은 고구려와 백제로 그대로 이어진다. 또한 조선시대에 쌓은 수원 화성의 공심돈(치의 역할)에서도 그대로 볼 수 있는 유서 깊은 우리 축성술의 전통이다.


놀라운 석성과 제단터, 주거지, 무덤…. 어쩌면 이렇게 어제 본 청쯔산성과 오늘 확인한 싼줘뎬 석성이 빼닮았고, 이 전통이 고구려와 백제로 이어질 수 있었을까. 그렇다면 또 한번 생기는 궁금증…. 고조선의 채취가 물씬 풍기지 않나. 정녕 고조선의 성은 아닌가.


# 중원엔 하(夏), 동북엔 고조선?


중국학계의 분석에서 어떤 단서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랴오시(요서, 遼西)의 샤자뎬 하층문화는 하(夏)나라와 같은 강력한 방국(方國)이 존재했다는 증거이다.”(궈다순 랴오닝성 문물연구소 연구원)


“(청쯔산 같은) 유적은 초기 국가의 형태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며, 하(夏)~상(商)나라를 아우를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우한치 박물관 도록)


이형구 교수도 “중원의 하나라(BC 2070년 건국)와 동시대에 청쯔산과 싼줘뎬 같은, 수천기의 석성을 쌓은 국가권력을 갖춘 왕권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중국 학자들도 동의하듯 제사 공간, 주거지는 물론 거대한 적석총·석관묘까지, 여기에 행정 조직과 공장을 갖춘 왕권 말이다. 이교수는 “산 위에 이런 큰 규모의 돌들을 운반해서 성을 쌓고 건축물과 돌무덤을 조성할 정도면 전제권력을 갖춘 국가가 아니면 어림도 없었을 것”이라고 부연한다.


그렇다면 고조선이냐. 이형구 교수나 윤명철 교수는 확언하지 못하지만 뉘앙스는 짙게 풍긴다. 여러 증거로 보아 “중원 하왕조 시기에 섰던 동이족의 왕권국가”가 분명하며, 이것은 ‘4000년 전의 고구려성’일 가능성은 충분하다.


하지만 고조선의 경우 ‘내가 고조선 유물·유적이요’하는 명문(銘文)을 달고 나오지 않는 이상 100% 확인하기는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고구려의 것’을 빼다 박았지만 2000년의 시차가 있다는 점도 풀어야 할 과제이다.


# 고조선 연구의 밑거름


그러나 지난해 싼줘뎬 석성과 청쯔산 유적을 보았던 복기대 단국대 박물관 연구원은 “백암성 같은 고구려의 성과 너무도 똑같지 않으냐”면서 한 가지 시사점을 던진다.


, 샤자뎬 하층문화 인골 134기를 분석한 주홍(朱泓) 지린대 교수는 “샤자뎬 하층문화 인골은 정수리가 높고, 평평한 얼굴의 특징을 갖고 있으며 이는 ‘고동북유형’이 속한다”면서 “이 같은 유형은 랴오시 지역과 전체 동북지역에서 가장 빠른 문화주민”이라고 분석했다. 허베이성(하북생, 河北省), 산시성(산서생, 山西省), 산시성(섬서생, 陝西省), 네이멍구(내몽고, 內蒙古) 중남부 지구에서 보이는 ‘고화북유형’과는 다른 인종이라는 것이다. 결국 샤자뎬 하층문화인들은 동북유형의 문화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지금까지 측정된 12곳의 샤자뎬 하층문화 유적 탄소연대측정값이 BC 2400~BC 1300년이라는 점이나, 고조선의 연대와 부합된다는 점도 심상치 않다는 것이다. 어쨌든 막 발굴을 끝낸 싼줘뎬 석성과 청쯔산 유적은 우리 고대사와 고대문화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는 점은 분명하다.


분명한 것은 이들 유적을 만든 이들의 문화전통은 동이의 것, 그 가운데서도 석성과 제단, 돌무덤의 전통을 쌓은 우리 민족의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 전통의 흔적은 청쯔산, 싼줘뎬에서 그치지 않는다. 지금으로부터 8000년 전까지 소급된다. 아니 그 이상 장구한 세월 동안 이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가야 할 탐사단의 여정은 그 머나먼 세월의 발자취를 찾는 것이다. 처음부터 “고조선이 아니냐”며 끈질기게 물고 늘어진 기자의 조급함에 스스로 채찍을 가한다. 이기환 선임기자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710121457011&code=210100)

 

5.5 무산 호곡동(범의구석) 유적(茂山 虎谷洞 遺蹟); 4000년 전~3000년 전(BC 2000~BC 1000)

함경북도 무산군 무산읍 호곡동에 있는 선사시대 유적으로 ??범의구석??이라고도 부른다. 1959년부터 1961년까지 5차례에 걸쳐 발굴하였다. 유적은 무산읍 서쪽에 두만강과 성천수가 합쳐지는 곳에 놓여 있다. 이곳에는 ??말기?? 라고 부르는 언덕에서 시작하는 3단의 단구가 이루어져 있는데 유적은 3번째 단구 비탈에서 시작하여 서쪽으로 두만강가에까지 이르고 있다. 발굴 결과 4개 지점에서 50여 기의 집자리(住居址)가 드러났고 신석기시대로부터 철기시대에 이르는 6시기의 문화층이 나타났다.

 

1기는 신석기시대 무늬그릇이 나오는 층이고 제2~4기는 청동기시대층, 5~6기는 철기시대에 속한다. 청동기시대는 3시기로 구분되는데 제2기층에서 붉은간토기(紅陶), 3기층에서 갈색간토기(褐陶), 4기층에서는 검은간토기(黑陶)가 나오는 것을 기준으로 하였다. 유적의 층위는 여러 시기의 집자리들이 중복된 관계로 자연 퇴적층에 의한 구분이 매우 어렵게 되어 있으나 대체로 보면 겉흙층(두께 60~80) 아래에 있는 문화층의 두께는 160~180쯤 되며 시기구분의 기준은 집자리들이 중복된 상태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신석기시대 문화층에서는 모두 10기의 집자리가 확인되었다. 집자리의 긴축(長軸)은 대부분 동~서 방향이며, 평면은 방형(方形)으로, 한 변의 길이가 3.5~4.5m의 규모로서 큰 차이는 없다. 움의 깊이는 0.5~1.0m 사이에 위치하며, 바닥은 7기가 원토층을 그대로 사용하였고, 나머지 3기는 진흙을 다짐 처리하였다. 내부시설로는 기둥구멍(柱孔)과 화덕자리(爐址)가 확인되었으며, 화덕은 강돌(川石)을 이용하여 타원형(?圓形)으로 돌려 만들었다.

 

범의 구석 1기층에서 나온 무늬그릇들은 완전히 복원된 2개체(點列文) 이외에는 출토량이 적으며 무늬의 짜임새도 매우 간략하다. 번개무늬(雷文), 퇴화된 생선뼈무늬(魚骨文), 물결무늬(波狀文), 그리고 겹입술 계통의 공렬 + 빗금무늬가 있다. 민무늬그릇은 들린굽과 평편밑의 납작밑으로 만들어졌는데 보시기, 바리(), 굽손잡이 그릇 등이 있다.

 

범의 구석에서 나온 흑요석기는 모두 1,000여 점이나 되며 이들 가운데 가장 많은 것은 길쭉한 버들잎형으로 눌러떼기한 격지(剝片)들과 피라미드 모양의 몸돌(石核)이다. 그밖에 반마반타(半磨半打)의 도끼류, 곰배괭이와 갈돌(石棒), 그물추(漁網錘) 등이 있다. 뼈 도구로는 송곳과 바늘 종류가 있으며, 새다리뼈를 잘라서 만든 대롱구슬(管玉), 주판알 모양에 무늬가 새겨진 가락바퀴(紡錘車) 등이 출토되었다. 연대는 B.C. 3000년기 후반기로 알려져 있다.

 

청동기시대 문화층에서 나온 집자리는 모두 16기이다. 장방형(長方形) 평면의 움집으로 집자리의 크기는 보통 40~70이고 작은 것은 20 되는 것도 있다. 2기의 집자리는 긴축이 남~북 방향으로 놓이고 움이 깊은 것이 특징이다. 유물은 화살촉(石鏃), 반달돌칼(半月形石刀), 돌도끼(石斧) 등이 나온다. 15호 집자리에서는 바닥에 나무판자를 깔았던 흔적이 남아 있고 2층의 집자리에서 기장과 수수 낱알이 나온 것을 보면 당시 주민들이 곡식을 저장할 수 있을 정도로 농사가 활발했던 것을 알 수 있다. 40호 집자리에서는 뼈로 만든 갑옷 조각(札甲)이 나와 방어용 무기에 관한 자료를 제공하였다.

 

3기의 집자리는 긴축이 동~서 방향으로 놓이고 기둥구멍이 4줄로 나있고 주춧돌이 남아 있는 경우도 있다. 유물로는 버들잎모양 돌화살촉(柳葉形石鏃)이 있다. 4기의 집자리는 긴축이 남~북 방향으로 놓이고 3~4줄로 주춧돌이 놓여 있는 것이 특징이다. 출토유물은 간석기(磨製石器)가 많아지고 앞 시기에 많이 쓰이던 흑요석뗀석기가 줄어든다. 3기의 19호 집자리와 4기의 33호 집자리에서는 흙단추가 나왔고 4기의 8호 집자리에서는 돼지 조각품과 흙을 빚어 만든 남자인형, 점뼈(卜骨) 등이 나와 신앙생활에 관한 증거와 함께 남성인형은 청동기시대에 부계사회로 넘어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으로 풀이하는 경우도 보인다. 50호 집자리에서는 청동 덩어리가 나온 것이 있다. 청동기시대 문화층의 연대는 B.C. 2000년 기 후반에서 1000년 기 전반에 드는 것으로 보고 있다.

(출처; 한국고고학사전(2001),

http://portal.nrich.go.kr/kor/archeologyUsrView.do?menuIdx=792&idx=11472)

 

 

5.6 용천 신암리유적(龍川新巖里遺蹟); 4000년 전~1500년 전(BC 2000~AD 6C)

북한 평안북도 용천군에 있는 석기시대 이후 집터와 유물포함층 관련 복합유적.

용천군 군소재지에서 동북으로 4 정도 떨어져 있는 신암리 부락의 서··북쪽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구릉에 위치한다. 서쪽은 청등말래 유적, 남쪽은 공동묘지, 북쪽은 모래산 유적으로 각각 명명되어 있다. 1964년에서 1965년에 김용간·이순진 등이 3차에 걸쳐 모래산과 청등말래 유적의 3지점을 발굴 조사하였다.

청등말래 유적의 층위는 표토층(30) 밑에 문화층인 검은모래층(3050)과 생토층인 황색모래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검은모래층에서는 신석기시대에서 청동기시대로 넘어가는 시기의 파괴된 집터 1기가 조사되었다.

 

집터는 남쪽은 서벽 9m, 깊이 30인 장방형 움집터로서 바닥은 진흙을 깔아 다졌다. 이곳에서는 복원 가능한 토기 15점과 반달돌칼半月形石刀·돌살촉·돌도끼·달도끼環狀石斧·대팻날·돌낫·숫돌·그물추·가락바퀴紡錘車·팔찌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그중에서도 이 유적에서 출토된 토기는 쌍타자 유적 3기층의 토기와 서로 통한다. 토기 구성에 나타난 이러한 공통점은 압록강 하류 지방의 청동기시대 주민들과 요동반도 남쪽끝의 주민들 사이의 문화적 연계를 보여주는 것으로, 이들이 같은 생활풍습을 가진 종족이었음을 말해준다.

 

모래산 유적의 층위는 표토층(20) 밑에 황갈색사질토층(20)과 검은모래층(2025)으로 구성되어 있다. 황갈색사질토층에서는 잔·시루·회색경질토기·쇠칼·도끼날형쇠촉·쇠못·쇠도끼·말재갈·금귀걸이 등의 고구려시대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검은모래층은 청동기시대층으로서 화분형 토기가 출토되는 초기철기시대의 구덩이로 인해 일부 교란되어 있었다. 검은모래층에서는 미송리형 토기가 출토되는 집터 5기와 시설물 1곳이 조사되었다.

 

집터는 장축방향이 서남에서 동북인 길이 20m, 규모 2040의 장방형 움집터이다. 점토를 펴 다진 바닥에서는 돌로 테를 돌려 만들기도 하고, 진흙과 모래를 섞어 만든 화덕이 조사되었다. 이들 집터에서는 미송리형 토기·겹아가리二重口緣토기·외반아가리단지() 등의 토기와 미늘식逆刺式돌살촉·돌도끼·반달돌칼·돌끌·숫돌·달도끼·가락바퀴 등의 여러 석기들이 출토되었다.

 

이 유적에서는 6개의 문화층이 확인되었다. 신석기시대 만기에서 민무늬토기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1민무늬토기 조기(2민무늬토기 초기(3민무늬토기 중기(4초기철기시대(5고구려시기(6)로 구분된다.

 

1기는 중국 요동반도의 민무늬토기시대 문화와 한반도 서북지방의 신석기 만기문화가 공반되는 양상을 보인다. 2기는 1기의 문화에 중국 요령지방·장산열도의 가지무늬彩文토기·바리형鉢形 토기 등이 추가되어 있다.

 

3기에서는 신석기시대의 문양토기가 완전히 소멸되는 대신 민무늬의 목단지有頸壺·굽다리접시高杯형토기가 출현한다. 또한 청동손칼刀子·청동단추가 반출되고 있어 청동기시대로 전환된 단계로 생각된다. 특히 청동손칼은 이 유적의 유물들 가운데서 청동단추와 함께 가장 이목을 끈다. 자루 끝에 고리가 달리고 자루의 아래위에는 턱이 졌고 등은 약간 휘고 날은 한 쪽에만 있다. 길이는 18.6cm, 너비는 1.9cm이다.

 

4기가 되면 요령식 동검과 공반하는 부채동도끼扇形銅斧와 미송리형 토기가 등장해 본격적인 청동기문화가 정립된다. 5기는 4기가 끝나고 얼마간의 공백기를 가진 뒤 청천강 이남지방에서 유행하고 있던 초기철기시대의 문화가 유입되는 단계이다. 6기는 본격적인 고구려 중기의 문화층이 된다.

 

각 시기의 유물상으로 볼 때, 1기는 서기전 2000년 기 말, 2기는 서기전 1000년 기를 전후하는 시기, 3기는 서기전 87세기, 4기는 서기전 65세기, 5기는 서기전 21세기, 6기는 56세기로 편년할 수 있다.

 

의의와 평가

신암리 유적은 우리나라 서북지방 선사문화의 기원을 밝힐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지리적인 위치와 문화사적인 관계에서 볼 때, 당시 같은 문화를 공유하던 중국 요령지방과 압록강 하류지역을 포함하는 공통된 문화권 중 대표되는 한 유적으로도 그 의미가 크다. 집필(1996) 한영희, 개정(2009) 강성봉(성균관대학교)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Contents/SearchNavi?keyword=%EC%9D%98%EC%A3%BC%EC%8B%A0%EC%95%94%EB%A6%AC&ridx=7&tot=194)

 

5.7 통영 욕지도유적(統營 欲知島遺蹟); 4000년 전(BC 2000)

경상남도 기념물 제27(지정명칭은 통영 욕지도패총). 경상남도 통영군 욕지면 동항리 528, 529에 위치한다. 1988, 한국전력공사 욕지면출장소 건물을 짓던 중에 유적이 파괴되어 알려지게 되었다.

 

통영시에서 서남쪽으로 약 32 떨어져 있는 섬으로, 동서 약 6.5, 남북 3.7, 면적은 14.95에 이른다. 통영군 내 가장 큰 섬으로 해안선은 굴곡이 매우 심하다. 인근 수역에서는 방어, 참치, 감성돔, 멸치 등이 잡힌다. 연평균 기온 14.7, 연강수량 1400mm로 해양성기후를 보이며, 온대 및 아열대작물인 밀감, 고구마 등이 재배된다. 이와 같은 온화한 기후와 기온, 알맞은 강우량, 충분한 수산자원 등의 자연조건은 신석기시대인에게도 적합한 환경이었다.

 

섬의 중심부에서 남쪽으로 치우쳐 해발 392.4m의 천황봉이 우뚝 솟아 있고, 이를 중심으로 동쪽 사면의 말단부에 촌락이 군집되어 면소재지를 형성하고 있다. 현재의 면소재지 일부 지역은 과거에 바닷물이 들어왔던 곳으로 이를 매립하여 조성하였다고 한다. 유적이 해발 610m 사이에 분포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유적이 조성될 당시의 해수면은 유적 앞까지 미쳤던 것으로 판단된다. 욕지도 면사무소 앞이 경상남도 기념물로 지정된 패총지구이며, 분포면적은 21,080에 달한다. 발견 당시 표토에서는 홍도, 무문토기 등이 출토되었다고 하나, 현재는 경작지로 형상이 변경되었다.

 

발굴조사에서 확인된 퇴적양상은 대체로 층에서 층까지 4개의 자연층위로 구분된다. 층은 현지표층으로 경작층이다. 층은 흑색부식토와 패각층이 거의 수평을 이루고 있으나, 패각층 먼저 형성된 것으로 파악된다. 조사당시 설치된 E·F·G열 피트에서 확인된 돌무지시설 I 2기의 무덤이 이 층에 해당하며, 각종 토기, 석기, 몸돌, 격지 등이 집중 출토된다. 층은 흑갈색진흙층으로 A피트의 돌무지시설가 포함된 층이다. 융기문토기의 출토빈도가 층보다 높다. 층은 생토와 구분되는 무포함층이다.

 

유구는 무덤이 포함된 돌무지시설 2기와 다수의 기둥구멍 등이 확인되었다. 돌무지시설 E3~E5, F3F5, G4피트의 층에서 조사되었으며 일부는 D4, D5, C5피트까지 연결된 것으로 보인다. 1020 크기의 산돌과 냇돌이 9×67m 범위에 깔려 있고, 돌 틈 사이에 각종 토기·석기·동물뼈 등이 박혀 있다. 돌무지시설 아래에서는 층위상의 변화 없이 두 곳에서 인골이 출토되었다. 당시의 집단무덤이었을 것으로 판단되며, 출토된 인골에 따라 1호와 2호무덤으로 명명하였다.

 

1호무덤은 G4피트에 위치하며 인골은 어른 남자의 것으로서 1점과 대퇴부가 수습되었다. 출토된 상태로 보아 서침하고 있으며, 자연경사면을 따라 머리 쪽이 높은 곳에 위치한다. 묘광은 확인되지 않으며 두향이 바다 쪽을 향하고 있다. 2호무덤은 G4피트와 F4피트에 걸쳐 있으며, 1호무덤의 북동쪽에 인접한다. 이 무덤에서는 연령층이 서로 다른 2구 이상의 인골이 검출되었는데, 하나는 깊은 곳에 잠수를 하여 생기는 외이도골종(外耳道骨腫)이 있는 어른 남자이며 하나는 20세 전후의 여자였다. 두향은 서침으로 머리가 바닥 쪽을 향하고 있으며, 하반신 쪽에 패각층이 형성되어 있어 인골의 상태가 양호하다. 부정형의 묘광의 흔적이 있으나 수직각을 이루지는 않는다.

 

돌무지시설 A8피트의 층에서 조사된 것으로 돌 틈과 돌무지 아래에서 융기문토기와 빗살무늬토기가 섞여 출토되었다. 그러나 돌무지시설에서보다 융기문토기의 출토빈도가 더 높은 편이다. 또한 돌의 크기가 상당히 크고 정연성은 떨어지며, 범위도 사방 3m 가량이어서 돌무지시설과는 외형상 다르다. 돌무지 가장자리 일부에서는 소토가 확인되었다. 보고자는 이 유구를 3호무덤으로 명명하고 있다. 1·2호 무덤보다는 아래층이다. 돌무지 아래에는 다량의 토기, 석기들이 집중되어 있다. 뗀석기 여러 점과 흑요석제 석촉 2, 흑요석제 작살 1점이 출토되었다.

 

한편 이들 돌무지시설에 대해서 돌무지 사이에 각종 생활용 석기와 몸돌, 격지 등이 다량 박혀 있으며 돌무지 아래에서 조사된 기둥구멍과 소토 등으로 미루어 석기제작소 혹은 임시주거지의 가능성을 제기하는 연구자도 있다.

 

4호무덤은 D2피트 북동모서리에서 인골이 검출된 사진만 보고되었다. 상부 교란이 있고 대퇴골 외에는 골편이 없어 유구로 보고하지 않았으나, 대퇴골을 덮고 있는 콩알무늬의 주칠토기, 주위에 없는 큼직한 돌의 존재 등으로 보아 무덤으로 추정된다. 남아 있는 대퇴골의 상태로 보아 남서침이며 묘광은 확인되지 않는다. 층의 바닥 혹은 층의 상부에 속한다. 인골을 덮고 있는 토기는 형태가 특이한 주칠토기이다. 몸통과 거의 직각되는 아가리를 그릇 안쪽에 붙이고 세로로 길쭉한 두립문 모양의 띠를 약간 바라지게 세웠다. 아주 고운 모래질 바탕흙에 안팎면 모두 주칠하였다.

 

기둥구멍은 공반관계를 알 수 없어 성격이 명확하지 않다. 대부분 정연성을 갖추고 있지 않다. 모두 층의 흑갈색진흙층을 파고 설치된 것들이다. D4피트와 E3피트에서 확인된 기둥구멍은 지름 15, 깊이 1015 가량이며, 일정 부위에 집중되어 있는 듯하다. 돌무지시설의 아래층에서 조사된 것은 2호무덤 주위에 집중되어 있다. G3피트에서 조사된 구멍은 지름이 20, 깊이 30 가량으로 상대적으로 크나 나머지는 소형이거나 깊이도 1015로 얕다. 2호무덤의 두개골 북쪽에 인접한 기둥구멍은 바닥에 2매의 소형 판석이 2중으로 놓여 있어 특이하다.

 

소토 덩어리는 D5피트 층에서 45개소가 확인되었다. 서벽 쪽의 것과 중앙부에 있는 것은 3050 규모로 타원형태를 띠고 있고, 범위도 크며 부분적으로 불탄 정도가 심한 편이다. 두께도 15 이상 되어 한 번에 굽혀진 것이 아니라 꽤 장기간 굽혀진 것으로 파악된다.

 

연대도유적 출토 토기들은 1층에서 4층까지 신석기시대 마지막 단계의 이중구연토기나 중기(기원전 2000년경)의 두도태선문(頭島太線文), 압날단사선문, 어골문, 삼각집선문, 능형집선문, 그리고 이른 시기(기원전 40002000년경)의 압인문(押引文)과 융기문토기까지 섞여 있다. 크게 교란되었지만 남해안 신석기시대의 전 기간에 걸쳐 생활했던 유적으로 보인다. 구경이 40가 넘는 대형의 토기들도 많아 당시 이곳 사람들의 살림살이 규모가 컸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또 평저토기와 원저토기가 공반되고 장경호, 엽맥문(葉脈文)의 저부, 붉은간토기[紅陶]와 무문양의 토기도 많다. 이들은 모두 남해안 신석기유적의 출토양상과 일치한다.

 

석기 또한 화살촉, 작살, 긁개, 그물추, 찍개, 혼펠스로 만든 도끼, , 자귀, 갈판과 갈돌, 숫돌 등 다양한 종류가 다량으로 출토된다. 재료는 혼펠스가 가장 많고 흑요석제 화살촉과 박편도 두드러진다. 골각기로는 사슴 뼈로 만든 찌르개가 많고 낚싯바늘, 화살촉, 작살, 조개팔찌도 있다. 멧돼지 이빨이나 바다사자 이빨로 만든 장신구도 있다. 멧돼지로 보이는 토제품도 나왔다.

 

욕지도유적은 신석기시대 유적 중 최초로 인골과 함께 무덤이 나왔다는 점에서 의의가 매우 크다. 더구나 인골의 분석을 통해 이들의 잠수 행위도 밝혀낼 수 있었다. 욕지도유적은 입지로 보아 물고기잡이나 조개채취 등의 어로생활이 가장 주된 생업이었을 것이나, 출토 유물로 보아 사냥의 비중도 컸던 것으로 보인다. 유적의 점유연대는 신석기 전 기간이었으나, 중심연대는 태선침선문으로 보아 신석기시대 중기(기원전 2000년경)로 판단된다.(임학종)

(출처; 한국고고학 전문사전(신석기시대편),

http://portal.nrich.go.kr/kor/archeologyUsrView.do?menuIdx=795&idx=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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