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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와 한반도 12,000년 전~ 2,000년 전 년대기》 5.9 민무늬토기 문화~5.15 여주 흔암리유적 본문

지음/《만주와 한반도 12,000년 전~ 2,000년 전 년대기》

《만주와 한반도 12,000년 전~ 2,000년 전 년대기》 5.9 민무늬토기 문화~5.15 여주 흔암리유적

대야발 2024. 2. 9. 1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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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와 한반도 12,000년 전~ 2,000년 전 년대기》

 

5.9 민무늬토기 문화(민무늬토기 시대, 무문토기, Mumun Culture); 3500년 전~2300년 전(BC 1500~BC 300)

 

 

민무늬토기 시대(無文土器時代, Mumun pottery period)는 한반도의 고고학적인 시대구분이다. 청동기 시대에 해당하는 기원전 1500년부터 기원전 300년경에 이른다. 이 시대의 전형적인 토기가 표면에 아무런 무늬가 없는 특징으로 인해 민무늬 토기 문화라고 명명되었다.

 

개요

대규모 농경이 시작됨과 동시에 사회에 계급이 생겼으며, 원삼국 시대의 원시 국가 형성으로 연결된다. 일본에서는 시대적으로는 야요이 시대와 겹치며, 이것에 영향을 주었다고 추측하고 있다. 특히 전기의 북부 큐슈에는 한국과 공통적인 문화 요소가 나타난다.

예전에는 청동기 시대로 불렸지만, 청동기가 출현한 것은 기원 전 8세기이며, 보편화된 것은 말기이기 때문에 청동기 시대가 아니라 민무늬 토기 시대로 부르고 있다.

무덤의 형태는 거대한 고인돌이 특징적이고, 또 석곽묘나 독무덤이 출현하고 있다.

 

시대 구분

민무늬 토기 시대는 빗살무늬토기 시대에 이어지는 시대이다. 기원전 1800년부터 기원전 1500년경, 북방의 랴오허 유역에서 북한을 걸쳐 고인돌, 민무늬 토기나 대규모 주거가 출현하고 있어, 이것이 민무늬 토기 문화의 원류라고 생각되고 있다.

 

전기

전기는 기원전 1500년부터 기원전 850년경까지로 여겨진다. 농경 외에도 어로, 수렵, 채집을 했다. 농경에는 아직 석기가 이용되었다. 큰 직사각형의 움집으로 된 취락이 영위되었다. 주거에는 부뚜막이 여러 개 있는 경우가 있어, 여러 세대가 같이 살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후반에는 취락이 대규모화되었으며, 취락마다 유력자가 생겨났다. 기원전 900년경을 지나면 소형의 주거가 일반화되었고, 부뚜막이 아니라, 중앙에 난로와 같은 노가 파졌다고인돌과 부장품인 붉은칠 토기, 돌칼 등 민무늬 토기 시대를 통해서 계속 되는 종교, 장제의 특징이 이 시대부터 시작되었다.

 

중기

 

 

 

진주시 대평유적에서 출토된 중기 민무늬 토기

 

중기는 기원전 850년부터 기원전 550년경으로 추측된다. 대규모 농경이 시작되었고, 사회의 계급과 분쟁이 생겼다. 한반도 이남에서는 대규모 논도 만들어졌고, 수백 채 이상 되는 대규모 취락도 출현했다. 또 청동기가 출현하였고, 그 외에도 공예품 생산이 활발해져서 교역이나 지배 계층에 의한 분배도 이루어졌다.

 

중기 민무늬 토기 문화는 중부의 유적명을 따서 송국리 문화(松菊里 文化)(충남 부여군 초촌면)라고도 불리며, 특히 중남부에서 발전하였다. 남쪽 분포 범위는 제주도에서부터 시작하여 북부 큐슈에도 영향이 미쳤다.

중기 후반(기원전 700-기원전 550년경)에는 청동기가 부장품으로서 나타났다. 이 시기에는 한반도 남부에서 직접 제작이 시작된 것 같다.

 

중기 민무늬 토기 시대 후반에는 대규모 무덤이 존재하며, 특히 남해안 지역에는 다수의 고인돌이 만들어졌다. 일부에서는 청동기, 비취, 돌칼, 붉은 칠 도기 등의 부장품이 발견되고 있다.

 

민무늬 토기 문화는 벼농사 문화의 시작이기도 하지만, 전기 및 중기에는 벼농사가 주요 작물은 아니었다고 추측된다. 북부에서는 보리, , 잡곡 등이 재배되었다.

 

후기

후기는 기원전 550년에서 기원전 300년경으로 추측된다. 환호집락이나 고지대에서 발견되는 취락이 증가한 것을 볼 수 있다. 특히 남해안 부분에 인구가 집중되어 있다. 취락 수는 전 시대보다 줄어들고 있어, 소수가 모여 사는 현상이 진행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야요이 시대의 시작은 민무늬 토기 문화가 영향을 준 가능성도 있다. 특히 북부 큐슈에서는 민무늬 토기, 고인돌이나 독무덤 등, 한반도 남부의 민무늬 토기 문화와 직접 연결시킬 수 있는 요소가 많이 발견되고 있다. 이것은 민무늬 토기 시대 중기 또는 후기에 해당된다고 추측할 수 있다.

 

민무늬 토기 시대 말기에는 철기가 출현하며, 주거에는 온돌용 아궁이(, )가 나타난다. 또 중기에 북방에서 전해진 비파형동검(요동식 동검)의 영향 하에 세형동검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는데 이것은 야요이 시대의 동검, 동모(방패) 등의 기초가 되었다.

 

말기

보통 민무늬 토기 시대의 말기에 철기가 출현하였다고 하지만, 토기 양식의 연속성을 중시해 기원 전후를 포함하는 설도 있다. 그러나 기원전 300년경부터 청동기가 광범위하게 보급되어, 철기도 이 시기를 경계로 한반도 남부에 보급되고 있다. 이러한 기술적, 사회적 변화를 중시한다면, 민무늬 토기 시대를 이 시기까지로 하는 것이 적절하다.

 

유적지

제천 황석리 유적 - 충청북도 제천군 청풍면 황석리

부여 송국리 유적 (사적 제249) - 충청남도 부여군 초촌면 송국리

울주 검단리 유적 (사적 제33) - 경상남도 울주군 웅촌면 검단리

여수 적량동 유적 - 전라남도 여수시 적량동 상적 호남정유공장내

속초 조양동 유적 (사적 376) - 강원도 속초시 조양동

울산 반구대 유적 (국보 제 285) - 울산시 울주군 언양면 대곡리

고령 양전동 유적 (보물 제 605)- 경상북도 고령군 개진면

진주 대평 유적 - 경상남도 진주시 대평면 대평리

(출처;

https://ko.wikipedia.org/wiki/%EB%AF%BC%EB%AC%B4%EB%8A%AC%ED%86%A0%EA%B8%B0_%EC%8B%9C%EB%8C%80)

 

 

 

 

5.10 서단산(씨투안싸안)문화(西團山文化); 3300년 전~2100년 전(BC 14C~BC 1C)

 

중국 동북지역의 대표적인 청동기시대 문화의 하나로서, 1964년 동북고고발굴단이 지린(吉林) 씨투안싸안(西團山) 유적을 발굴한 것이 계기가 되어 새로운 문화유형으로 설정되었다. 지린성(吉林省)의 중부지역인 지린-용지(永吉)를 중심으로 관련 유적이 집중적으로 조사되고 있다. 분포 범위는 동쪽으로 짜앙꾸앙차이링(張廣才岺)과 웨이후링(威虎岺), 서쪽은 이통허(伊通河)와 도옹리야오허(東遼河)유역, 남쪽은 훈허(渾河)와 리야오허(遼河) 상류, 북쪽으로는 라린허(拉林河)유역을 포함하는 지역이다. 그 중에서도 제2송후와지앙(松花江)이 흐르는 지린지역에서 많은 유적들이 발굴되었다. 이곳에는 주로 남쪽에서 북쪽으로 흐르는 제2송후와지앙을 비롯하여 인마허(飮馬河), 후이파허(輝發河) 등이 있고 대부분 해발 500m 안팎의 구릉지대가 형성되어 있는 곳이다.

 

씨투안싸안문화 유형으로 해석되는 유적은 지금까지 4백여 곳에서 조사되었으며, 대부분 무덤墓葬 관련 유적이다. 집자리住居址는 강 언저리의 비교적 높은 지역에 주로 분포하며, 후기 것은 평지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평면은 방형이나 장방형인 반움집半竪穴住居址으로 둘레에 자연석을 쌓아 벽을 만든 것도 있다.

무덤으로는 초기에 장방형의 얕은 무덤구덩墓壙을 파고 그 안에 돌널石棺을 만든 돌널무덤이 유행하다가 후기에는 움무덤土壙墓과 독널무덤甕棺墓이 조성되었다. 껴묻거리副葬品를 보면 초기에서는 살림살이, 연장이 많지만, 후기로 갈수록 치레걸이裝身具 등 꾸미개류가 많은 점이 주목된다. 묻기는 홑무덤單人葬으로 바로펴묻기伸展葬를 하였고, 껴묻거리를 놓기 위하여 딸린 널副棺을 만든 것이 독특하다.

 

껴묻거리 가운데 토기는 거의가 12점이며 단지와 두레박이 많고, 드물게 세가랑이솥·세발솥도 찾아진다. 그리고 돌널무덤에서는 돼지뼈가 많이 출토된다. 한편 묻힌 사람의 성별과 껴묻거리의 관계를 보면, 주로 남성 무덤에는 돌도끼石斧·돌끌石鑿·화살촉 등의 연장이나 무기류가, 여성 무덤에는 작은돌칼小石刀, 가락바퀴紡錘車가 출토된다. 무덤방에 껴묻거리가 놓이는 자리를 보면 석기와 청동기의 무기류는 양손이나 허리 부근에 있고, 치레걸이는 주로 머리, , 가슴쪽에 놓이며 토기는 딸린 널이나 발끝쪽에 자리한다.

 

씨투안싸안문화 유형의 토기(土器)는 바탕흙胎土에 굵은 모래질의 찰흙이 많으며, 대부분 홍갈색을 띤다. 겉면은 간 흔적이 관찰되고 드물게 무늬가 있는 경우도 있다. 토기를 제작한 방법이 상당히 거친 편이고 목 부분과 몸통, 바닥을 따로 만들어 서로 붙인 경우가 많이 관찰된다. 종류로는 두레박, 긴목단지長頸壺, 세가랑이솥, 세발솥, 바리, 시루 등이 있다. 단지는 2종류가 있는데 입이 넓고 몸통의 최대 지름이 아래쪽에 있으며 가로 손잡이가 달려 있는 것과 목이 길고 몸통의 넓은 것이 아래에 있는 것이 있다. 그리고 물동이는 가로 손잡이가 달려 있고 입이 오므라든 모습이다. 한편 이 유형의 토기를 주변 지역과 비교하여 보면 훈허, 타이즈허(太子河) 유역의 미송리형토기와 비슷한 점이 많이 찾아진다.

 

석기(石器)는 대부분 갈아서 만들었고 종류로는 돌도끼, 돌자귀石傅, 돌끌, 숫돌砥石, 반달돌칼半月形石刀, 돌화살촉 등이 있으며, 드물게 몸통 아래 끝 양쪽이 날개처럼 벌어진 화살촉, 돌가래, 둥근 석기 등 뗀석기打製石器도 있다. 돌도끼는 전체를 갈아서 만든 것도 있지만 날부분刃部만 간 것도 찾아졌고 날 모양은 곧은날直刃, 둥근날, 기운날이 모두 관찰된다. 반달돌칼은 긴네모모양長方形과 배모양舟形이 있으며 대부분 배모양이다.

 

청동기(靑銅器)는 연장이 대부분이고 상대적으로 무기는 적은 편이다. 연장은 작은 청동손칼靑銅小刀子, 청동송곳銅錐, 청동도끼銅斧, 청동끌銅鑿 등이며, 무기는 청동투겁창銅棠, 비파형동검(琵琶形銅劍), 청동화살촉銅鏃 등이 있다. 투겁창의 경우 날부분을 보면 곧은날과 굽은날曲刃로 나누어진다. 곧은날은 중원지역의 투겁창과 비교되며, 굽은날은 비파형동검과 비교되어 동북지역의 특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또한 옷에 붙인 것으로 여겨지는 청동단추銅泡가 출토되었다. 씨투안싸안문화의 관련 유적에서 출토되는 이러한 청동기는 거푸집鎔范이 발견되고 있어 주조되었을 가능성이 많다. 지금까지 거푸집이 조사된 곳은 지린 무어판싸안(磨盤山) 유적, 용지 양투운(楊屯) 유적, 통후아(通化) 등이며 재질은 돌과 흙이 섞여 있다. 그리고 늦은 시기에 해당하는 후아띠앤(樺甸) 씨후왕싸안투운(西荒山屯)의 청동기에 대한 성분분석 결과 유물의 성격에 따라 구리와 아연의 함량이 서로 다른 것으로 밝혀져 주목된다.

 

뼈연장骨器은 멧돼지 이빨로 만든 치레걸이와 뼈송곳骨錐이 있다. 그리고 직물인 모포건(毛布巾)이 씨잉씨잉싸오 16호 무덤에서 찾아졌다. 이것은 죽은 사람의 얼굴을 덮은 몽면(蒙面)인 것 같다.

 

씨투안싸안문화의 생업경제는 출토유물 가운데 농경 관련 연장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어서 농경이 바탕이 되고 가축화가 이루어진 복합생산 단계로 발전하였던 것 같다.

 

지금까지 이 문화유형의 관련 유적에서는 상당히 많은 방사성탄소연대측정이 이루어져 여러 측정값을 얻었다. 연대측정값을 통한 연대폭은 용지 씨잉씨잉싸오(星星哨) 유적이 2970±100 B.P.이고 용지 양투운 따하이멍(大海猛) 유적이 2100±75 B.P.로 기원전 14~1세기로 가늠된다. 그러나 주변지역의 관련 유적과 비교·검토할 때 이 문화 유형은 기원전 13~3세기에 형성·발전된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합리적일 것으로 판단된다. (하문식)

(출처; 한국고고학 전문사전(청동기시대편),

http://portal.nrich.go.kr/kor/archeologyUsrView.do?menuIdx=796&idx=2144)

 

 

 

 

5.11 춘천 중도유적; 3300년 전~2600년 전(BC 14C~7C)

 

춘천 중도유적은 북한강과 소양강이 합류하면서 형성된 하중도河中島(강 가운데에 강물의 속도가 늦어지면서 만들어진 섬)에 만들어진 유적이다. 원래는 섬의 북서쪽을 통하여 춘천분지로 이동이 가능하였으나 1967년 의암댐이 만들어지면서 현재와 같이 상중도上中島와 하중도下中島 2개 섬 으로 분리되었다.

중도유적은 1970년대 후반부터 알려졌으며, 1980년 국립중앙박물관에 의해 중도 1호 주거지가 조사된 이래 지표조사와 발굴조사가 10여 차례 이상 진행되어 신석기시대부터 원삼국시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유적이 분포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번(2013~15)의 중도유적에 대한 조사는 이 지역에 레고랜드 테마파크와 관광시설 조성계획에 따라 실시되었으며, 한강문화재연구원(원장 신숙정), 고려문화재연구원(원장 김병모), 예맥문화재연구원(원장 정연우), 한백문화재연구원(원장 서영일), 한얼문화유산연구원(원장 조원창)  5개 조사기관이 연합하여 발굴조사를 진행하였다.

 

조사 결과 청동기시대 조기~중기에 이르는 생활유적과 함께 묘역식지석묘墓域式支石墓, 돌널무덤石棺墓(돌로 세우거나 쌓아서 만든 관) 등 무덤유적, 삼국~통일신라시대로 추정되는 밭 (경작유구) 등을 확인하였다.

 

춘천지역의 지석묘는 1915 鳥居龍藏에 의해 처음 조사되었으며, 중도유적에서는 1981년 중도선사유적발굴조사단에 의해 지석묘 2기가 조사되었고, 이 중 2호 지석묘 에서 적석시설積石施設(돌을 여러 겹 쌓은 시설)이 확인되어 묘역식지석묘가 분포하고 있음이 알려졌다.

 

이번 조사에 서는 묘역식지석묘(석관묘 포함) 101기가 확인되었으며, 주거지와 따로 떨어진 곳에 열을 지어서 축조된 것과 주거지가 위치하고 있는 곳에 흩어져서 축조된 것이 모두 확인 되었다. 묘역식지석묘는 시신을 안치하는 돌널石棺을 만든 후 그 위에 강돌과 깬돌을 깐 묘역시설墓域施設이 추가된 것으로 써 이 묘역시설은 무덤의 영역을 표시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묘역식지석묘는 대체로 청동기시대 중기에 이르러 널리 확산되며, 상석上石(윗돌)을 받치는 지석支石(기둥돌)이 사라지고 묘역시설 위에 바로 상석이 놓이는 개석식蓋石式(덮 개돌 방식)의 축조 비율이 높아진다. 중도유적에서 상석이 남아 있는 묘역지석묘는 모두 개석식으로 만들어졌다.

 

묘역시설의 형태는 ()방형이 주를 이루고, 원형은 비교적 크기가 작은 것에서 확인된다. 석관은 위치에 따라 지하식地下式(석관이 지하에 위치)과 지상식地上式(지상 즉, 묘역시설에 위치)으로 구분된다. 그리고 축조방식에 따라 판석板石(얇고 편평한 돌)을 세워서 만든 조립형組立形과 강돌이나 깬돌을 쌓아서 만든 석축형石 築形으로 구분된다.

 

조립형 석관은 석관과 묘광墓壙(무덤구덩이) 사이를 강돌을 채워 보강한 예가 많다. 석관을 덮은 개석蓋石(덮개돌)은 주로 판석이 사용되었는데, 개석을 두 겹二重으로 덮은 것도 확인되었다. 유물은 돌화살촉石鏃, 돌창石槍, 돌칼石劍 등 석기류가 많이 부장되며, 관옥管玉(대롱모양의 구슬) 등도 소량 확인된다.

 

묘역시설에서는 깨진 토기편과 돌도끼石斧가 출토되기도 하는데, 토기를 깨어 넣는 행위는 일반적으로 장송의례葬送儀禮(죽은 사람을 장사지낼 때 하는 행사, 또는 사회적 풍습)의 하나로 이해되고 있다.

 

한강문화재연구원에서 조사한 29호 지석묘에서는 비파형동검琵琶形銅劍 1점이 상석 바로 아래에서 출토되었는데, 슴베부분(손잡이에 연결되는 부분)과 검 의 아랫부분만 남아있다. 이 지석묘는 시신을 안치하는 공간(석관)을 따로 만들지 않고 묘역시설과 상석만 설치하였는데, 이는 이 지역 일대가 무덤지역임을 표시하는 일종의 묘표석墓標石(공동무덤 지역임을 알려주는 돌로 만든 시설)으로써의 기능을 하였으며, 동시에 의례가 행해진 공간이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겠다.

 

또한 4호 지석묘에서는 8~10세로 추정되는 어린아이의 머리뼈와 다리뼈가 옆으로 누워진 채 확인되었고, 35호 지석묘에서도 머리뼈와 치아 일부가 수습되어 각각 서울대 해부학교실과 국립문화재연구소 보존과학실에서 DNA분석 등을 진행하고 있다.

 

중도유적의 묘역식지석묘(석관묘 포함) 중 주거지와 중 복되어 있는 것은 모두 묘역식지석묘가 주거지를 파괴하면서 축조되어 있었다. 주거지의 축조 연대가 대부분 청동기 시대 중기에 해당됨을 감안하면 묘역식지석묘의 축조가 청동기시대 중기의 어느 시점부터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묘역식지석묘에서 나온 인골과 목탄의 AMS연대와도 부합되는데, 4호 지석묘와 24호 지석묘의 인골, 30호 지석묘의 목탄시료에 대한 방사성탄소(AMS)연대들은 기원전 5세기 또는 그 이전에 해당할 만큼 청동기시대로는 늦는 것이다.

 

이번 중도유적의 묘역식지석묘 조사를 통해서 묘역식지 석묘의 구조와 축조방법, AMS연대에 대한 자료 등을 확보하였고, 앞으로 발굴조사가 마무리되면 정밀한 연구검토와 분석을 진행할 예정이다. 특히 묘역식지석묘에서 수습된 고인골에 대한 분석이 완료되면 청동기시대 사람들의 모습과 식생활 등을 파악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출처; 2014 한국고고학저널

portal.nrich.go.kr/kor/journalUsrDtlView.do?menuIdx=801&idx=&d_idx=357)

 

 

 

 

2014 7 28일자 매일경제 기사 고인돌 101..한반도 최대 마을 유적 발견

 

춘천 의암호내 중도서 청동기 유구 1400기 확인 집터만 917..레고랜드 조성사업 차질 있을 듯

 

 

 

강원도와 춘천시의 최대 역점 사업인 레고랜드 개발 예정지에서 고인돌을 비롯한 3000년 전에 조성된 청동기시대 공동묘지와 마을유적 등 선사시대 유적이 무더기로 발견돼 주목받고 있다. 매장문화재 발굴 전문기관 5곳은 지난해 10월부터 춘천시 중도에 추진 중인 레고랜드 조성사업지에서 실시한 1차 문화재 발굴(면적 203127) 조사 결과, 고인돌 101기 등 총 1400여 기의 청동기 시대 유구(遺構)를 확인했다고 28일 밝혔다.

 

발굴 조사에는 한강문화재연구원과 고려문화재연구원, 예맥문화재연구원, 한백문화재연구원, 한얼문화유산연구원이 참여했다. 찾아낸 유구는 고인돌 101, 집터 917, 구덩이 355, 바닥 높은(고상식) 집터 9, 긴 도랑 등이며 청동기 시대와 삼국시대 이후 밭도 일부 발견했다.

 

고조선의 대표 유물의 하나인 고인돌이 강원도 지역에서 대규모로 확인발굴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고인돌은 열을 맞춘 것이 특이하며 용지 남쪽에 3열로 길게 축조된 40여 기가 있었다. 고인돌은 또한 석재를 이용한 원형 또는 장방형의 묘역 시설을 갖췄으며 마을 공간 안에도 다수 분포해 있다. 10여 기는 원형이 지금까지도 잘 남아 있으며 제일 큰 것은 11에 달했다. 집터 40호와 37호 내부에서는 비파형 동검과 청동도끼 등이 1점씩 출토됐다. 역시 고조선의 지표유물인 비파형동검은 지금까지 주로 무덤에서 발굴돼 왔으며 주거지 출토는 매우 드문 일이다. 청동도끼는 세로 7 크기로 함경남도 북청군 토성리 출토품과 형태가 흡사해 양지역 교류 가능성 등이 제기된다.

 

아울러 조사구역에서 전체 둘레 약 404m(내부 면적 1)에 이르는 네모난 대형 환호(마을 주변에 도랑을 파서 돌리는 시설물)를 갖춘 집터와 출입구 시설도 확인돼 청동기시대 마을 유적의 구조와 성격을 이해할 수 있는 획기적인 자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 최종래 한강문화재연구원 부장은 "환호는 고랑의 깊이가 현재 1로 당대에는 훨씬 깊었을 것으로 추측돼 방어개념으로 만든 것으로 이해된다"고 설명했다.

 

집터 20호에서 출토된 '둥근 바닥 바리 모양토기(원저심발형토기)'는 신석기 시대에서 청동기 시대로 넘어오는 전환기를 보여주는 중요한 유물로 평가된다.

 

특히 장방형 집터도 다수 확인됐는데 '돋을띠새김무늬토기(각목돌대문토기)'가 출토된 집터는 시기가 기원전 12~14세기로 거슬러 올라가 청동기시대의 가장 이른 단계에 속한 것으로 추측됐다.

나머지 대부분은 중기에 해당하는 기원전 7~8세기 유물로 해석됐다.

 

최 부장은 "이번 발굴 조사에서 900기가 넘는 거주지 유구가 드러남으로써 면적으로나 유구 수로나 단일 유적으로는 한반도 최대 마을유적으로 기록될 전망"이라고 말했다. 중도는 80년대 국립중앙박물관의 8차에 걸친 시발굴조사를 통해 신석기시대부터 삼국시대에 걸쳐 조성된 집터와 고인돌 등이 270여 기 이상 발견된 바 있다. 이어 이번에 또다시 대규모 선사시대 유적이 수습됨에 따라 2011년부터 본격화된 레고랜드 조성사업에도 차질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출처; http://v.media.daum.net/v/20140728170306472)

 

 

 

 

2014 7 28일 기사 연합뉴스 춘천 '레고랜드' 조성부지서 대규모 선사 유적 발굴

 

 

 

춘천 중도서 발굴된 고인돌 (춘천=연합뉴스) ()한강문화재연구원 등 매장문화재 발굴 전문기관 5곳은 춘천시 중도 레고랜드 조성을 앞두고 지난해 10월부터 시행한 매장문화재 발굴조사에서 1차 발굴지 12225를 조사한 결과 고인돌(지석묘) 101기 등 총 1400여기의 청동기 시대 유구(遺構)를 확인했다고 28일 밝혔다. 사진은 이번에 발굴된 고인돌 유적지 전경. 2014.7.28 <<문화재청>> rae@yna.co.kr

 

고인돌 등 청동기 시대 유구 1400여기 확인

강원 춘천시 중도의 개발예정지에서 고인돌을 비롯한 청동기시대 공동묘지와 2천 년 전 조성된 마을 유적 등 선사시대 유적이 대규모로 발견됐다.

()한강문화재연구원 등 매장문화재 발굴 전문기관 5곳은 지난해 10월부터 춘천시 중도에 추진중인 레고랜드 조성사업지에서 시행한 1차 문화재 발굴(면적 12225) 조사결과 고인돌 101기 등 총 1400여 기의 청동기 시대 유구(遺構)를 확인했다고 28일 밝혔다.

 

 

 

춘천 중도서 발굴된 청동기시대 주거지 (춘천=연합뉴스) ()한강문화재연구원 등 매장문화재 발굴 전문기관 5곳은 춘천시 중도 레고랜드 조성을 앞두고 지난해 10월부터 시행한 매장문화재 발굴조사에서 1차 발굴지 12225를 조사한 결과 고인돌 101기 등 총 1400여기의 청동기 시대 유구(遺構)를 확인했다고 28일 밝혔다. 사진은 이번에 발굴된 청동기 시대 주거지 2014.7.28 <<문화재청>> rae@yna.co.kr

 

이번 발굴 조사에는 한강문화재연구원 외 ()고려문화재연구원, ()예맥문화재연구원, ()한백문화재연구원, ()한얼문화유산연구원이 참여했다.

 

확인된 유구는 고인돌(支石墓) 101, 집터 917, 구덩이(竪穴) 355, 바닥 높은 집터 9(高床式), 긴 도랑(溝狀遺構) 등이며, 청동기 시대와 삼국 시대 이후의 밭도 일부 확인됐다.

고인돌이 강원도 지역에서 대규모로 확인·발굴된 것은 처음이다.

특히 이번에 확인된 고인돌 묘는 열을 맞춘 것으로 드러나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

 

 

 

춘천 중도서 발굴된 청동도끼와 청동검 (춘천=연합뉴스) ()한강문화재연구원 등 매장문화재 발굴 전문기관 5곳은 강원 춘천시 중도 레고랜드 조성을 앞두고 지난해 10월부터 시행한 매장문화재 발굴조사에서 1차 발굴지 12225를 조사한 결과 고인돌 101기 등 총 1400여기의 청동기 시대 유구(遺構)를 확인했다고 28일 밝혔다. 사진은 이번에 발굴된 청동도끼와 청동검 2014.7.28 <<문화재청>> rae@yna.co.kr

 

고인돌은 부지 남쪽에 3열로 길게 축조된 40여 기가 있으며 마을 공간 안에도 다수 분포해있다.

석재를 이용한 원형 또는 장방형의 묘역 시설을 갖췄고, 그 중심에는 시신을 안치한 돌널무덤(석관묘) 위에다 상석을 올린 구조다.

돌널무덤은 묘역 시설과 동시에 축조하거나, 먼저 축조하고 나서 그 위에 묘역 시설을 설치한 것 등 다양한 형식이 확인됐다.

()한얼문화유산연구원이 조사한 집터 40호와 37호 내부에서는 비파형 동검과 청동도끼 등이 각각 1점씩 출토되었다.

 

 

 

전체 둘레 404에 이르는 대형 환호(環濠) (춘천=연합뉴스) ()한강문화재연구원 등 매장문화재 발굴 전문기관 5곳은 춘천시 중도 레고랜드 조성을 앞두고 지난해 10월부터 시행한 매장문화재 발굴조사에서 1차 발굴지 12225를 조사한 결과 고인돌 101기 등 총 1400여기의 청동기 시대 유구(遺構)를 확인했다고 28일 밝혔다. 사진은 이번에 발굴된 전체 둘레 404에 이르는 네모난 대형 환호(環濠··마을 주변에 도랑을 파서 돌리는 시설물) 전경. 2014.7.28 <<문화재청>> rae@yna.co.kr

 

비파형동검은 지금까지 주로 무덤에서 발굴돼왔으며 주거지 출토는 이례적이다.

이번에 출토된 청동도끼는 함경남도 북청군 토성리 출토품과 유사해 양 지역 간의 비교 연구에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이 조사 구역에서는 전체 둘레 약 404m(내부 면적 1)에 이르는 네모난 대형 환호(環濠·마을 주변에 도랑을 파서 돌리는 시설물) 내 집터와 출입구 시설도 확인돼 청동기 시대 마을 유적의 구조와 성격을 이해할 수 있는 획기적인 자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

 ()예맥문화재조사연구원이 조사한 집터 20호에서 출토된 '둥근 바닥 바리모양토기'(圓底深鉢形土器)는 신석기 시대에서 청동기 시대로 넘어오는 전환기를 보여주는 중요한 유물이다.

 

 

 

춘천 중도 유적지 전경 (춘천=연합뉴스) ()한강문화재연구원 등 매장문화재 발굴 전문기관 5곳은 춘천시 중도 레고랜드 조성을 앞두고 지난해 10월부터 시행한 매장문화재 발굴조사에서 1차 발굴지 12225를 조사한 결과 고인돌 101기 등 총 1400여기의 청동기 시대 유구(遺構)를 확인했다고 28일 밝혔다. 사진은 춘천시 중도 유적지 전경. 2014.7.28 <<문화재청>> rae@yna.co.kr

 

이번 조사에서 기원전 96세기 시기의 장방형 집터가 다수 확인됐는데, 특히 '돋을띠새김무늬토기'(刻目突帶文土器)가 출토된 집터는 기원전 11세기 이전 청동기 시대의 가장 이른 단계에 속한 것으로 나타났다.

최종래 ()한강문화재연구원 연구원은 "이번 발굴 조사에서 900기가 넘는 거주지 유구가 확인됨으로써 면적으로나 유구 수로나 단일 유적으로서는 한반도 최대 마을유적으로 기록될 전망이다"라고 말했다.

재단법인 한강문화재연구원 등 발굴 기관들은 29일 오후 2시 발굴조사 현장에서 전문가 검토회의와 유적 설명회를 개최할 예정이다.

한편 중도는 1980년대 국립중앙박물관 조사결과 섬 전체가 대규모 주거지로 확인된 곳이다. 당시 8차에 걸친 시·발굴조사를 통해 신석기 시대부터 삼국 시대에 걸쳐 조성된 집터와 고인돌 등이 270여 기 이상 확인됐다.

 

 

 

<그래픽> 춘천 레고랜드 조성부지서 대규모 유적 발굴 (서울=연합뉴스) 장예진 기자 = 강원 춘천시 중도의 개발예정지에서 고인돌을 비롯한 청동기시대 공동묘지와 2천 년 전 조성된 마을 유적 등 선사시대 유적이 대규모로 발견됐다. jin34@yna.co.kr @yonhap_graphics(트위터)

 

하지만 유적 보호를 위한 그 어떤 조치도 취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2011년 레고랜드 조성 사업이 확정돼 지난해부터 대규모 문화재 발굴조사가 이뤄지게 됐다.

강원도는 문화재청의 권고에 따라 유물이 밀집되고 잔존상태가 좋을 것으로 추정되는 일부 지역에 대해 유적 박물관과 야외 유구 전시공간을 만드는 등 보존대책을 마련했다.

하지만 이번 조사결과 중도 섬 전체가 경주를 방불하는 밀집도 높은 유적지로 드러나면서 현장 보존 문제를 둘러싼 논란이 벌어질 전망이다.

레고랜드 코리아 조성사업은 강원도와 춘천시의 최대 역점사업이자 박근혜 정부의 투자활성화를 위한 5대 현장대기 프로젝트에도 선정된 사업이다. 강은나래 기자

(출처;

https://news.naver.com/main/ranking/read.nhn?mid=etc&sid1=111&rankingType=popular_day&oid=001&aid=0007038234&date=20140728&type=1&rankingSeq=100&rankingSectionId=103)

 

 

 

 

 

5.12 정선 아우라지 유적; 3200년 전~조선시대(BC 13C~조선시대)

 

정선 아우라지 유적은 정선군의 아우라지 관광단지 조성사업 계획에 따라 실시한 시굴조사(2005) 결과, 새김덧띠무늬토기刻目突帶文土器와 함께 석상위석식노지石床圍石式爐址가 발견되어 우리나라 청동기시대의 개시연대를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유적으로 주목을 받아 왔다.

 

이후 진행된 1차 발굴조사(2006~2007) 결과, 신석기시대 집자리住居址 3, 신석기시대 야외노지 10, 청동기시대 집자리 18기와 수혈유구 4, 분묘 5, 철기시대 집자리 1기와 독무덤甕棺墓 1, 삼국시대(신라) 집자리 3, 자연수로 1기 등 총 46기의 유구가 확인되었고, 이 중 새김덧띠무늬토기가 출토된 집자리가 확인됨으로써 청동기시대 조기의 마을유적임을 알 수 있게 되었다.

 

2016~2017년에 실시된 2차 발굴조사에서는 신석기시대 집자리 1, 청동기시대 집자리 45기와 분묘 8, 철기시대 집자리 1, 삼국시대(신라) 집자리 12, 통일신라시대 집자리 8, 조선시대 집자리 3, 적석유구 1, 미상유구 2, 움무덤土壙墓3, 수혈유구 10기 등 총 94기의 다양한 유구가 확인되었다. 특히 새김덧띠무늬토기가 출토된 집자리에서 청동 장신구 등이 확인되어 청동기시대 시대구분의 근거를 확실하게 제시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삼국시대에 조성된 벌집모양의 적석유구가 최초로 확인됨에 따라 새로운 고고학적 자료를 얻을 수 있었다.

적석유구의 경우 조사지역 중심 지역에서 확인되었는데, 적석유구는 종전에 고려~조선시대의 유구로 추정하였지만 조사 결과, 삼국시대 층위에서 확인되어 삼국시대 유구임이 밝혀졌다.

당시 표토층에 바로 돌을 쌓아 조성하였으며 굴광흔은 확인되지 않았다.

바닥을 다지거나 판축하여 쌓아 올린 흔적도 확인되지 않았다. 적석유구 내에서 방형과 장방형의 방들이 확인되었다.

 

적석유구의 3차 조사 결과, 적석유구 내의 방은 모두 51개가 확인되었으며, 동벽과 북벽 또는 남벽에 강돌을 이용하여 세로로 받침돌을 세워 벽을 보강하였다. 방의 축조 방향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확장하면서 축조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으며, 각 방은 시기 차가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또한 받침돌은 방의 벽을 조성한 후 바깥쪽에 돌린 것으로 파악되었으며 방은 네 벽을 한꺼번에 조성한 것이 아니라 기존의 벽을 이용하여 두 벽만 완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방은 주로 강과 직교하는 남북 방향의 주축 방향을 가지고 있으나 12314번방처럼 강과 나란한 동서 방향의 방도 확인된다. 방은 주로 방형이 많으나 적석유구의 중앙 부근에 위치한 163438번방처럼 장방형의 형태를 나타내는 방도 확인된다.

 

2번 방 내부 퇴적토 제토 과정 중에 백제계의 회청색 타날문토기와 함께 화천 원천리 유적에서 출토된 유물과 유사한 토기편(어깨에 사격자문이 시문)도 함께 출토되었고, 동쪽 경계 부근 2728번 방 사이의 내부퇴적토 제거 과정 중 신라 장경호를 축소한 듯한 대부배臺附杯 3점이 출토되어 삼국시대에 조성된 적석유구임을 알 수 있었다. 또한 멧돼지의 하악골과 함께 돼지뼈, 말뼈 등이 함께 수습되어 분묘를 위한 제사와 관련된 유구로 생각되었다.

 

이를 뒷받침 하여 주듯 적석유구 40번방에서 인골이 수습되어 분묘의 가능성이 가장 높을 것으로 판단되었다. 40번방에서 확인된 인골은 수습 당시 동물뼈로 추정되어 개체 선별을 위해 서울대학교 연구팀에 분석을 의뢰하였고,

 

최종적으로 인골로 확인되었다. 그러나 인골에서 설치류가 갉아먹은 듯한 흔적이 확인되어 분묘에 안치한 정황과는 다른 양상을 나타낸다는 분석결과가 도출되었다.

 

이와 함께 동물뼈 등도 확인되었고 석렬 내부에서 다수의 청자편 및 백자편, 기와편, 상평통보 등이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삼국시대 조성된 적석유구가 고려~조선시대에 걸쳐 인근 민가의 폐기장 등의 용도로 사용됨에 따라 유물이 다양하게 출토되는 것으로 추정된다.

 

조사 결과, 정선 아우라지 유적은 신석기시대에서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유구가 발견되어, 이곳이 선사시대부터 역사시대에 이르기까지 오랜 기간 원주민이 거주하였던 지역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특히 이번에 확인된 적석유구는 우리나라에서 지금까지 확인되지 않은 유구로, 토층의 퇴적양상으로 보아 삼국시대에 조성된 것임은 확인하였으나 적석유구의 정확한 용도에 대해서는 추후 활발한 연구가 진행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출처; 2017 한국고고학저널,

portal.nrich.go.kr/kor/journalUsrDtlView.do?menuIdx=801&idx=&d_idx=446)

 

 

 

 

2008 08 29일 경향신문 [고고학자 조유전과 떠나는 한국사 여행](11) 강원도 정선 아우라지의 청동기마을

 

택리지(擇里志)를 쓴 이중환(1690~1756)은 강원도 정선 땅을 걸으면서 혀를 내둘렀다. 요즘에야 도로가 뻥 뚫려 있지만 예전에는 산 첩첩 하늘 한 뼘이라는 말이 있을 만큼 두메산골이었다.

 

 

 

아우라지 고인돌에서 청동기시대 인골이 출토되는 모습이다. 서양인의 염기서열을 지닌 인골이라 해서 주목을 끌었지만, 아직은 정확한 분석결과가 나오지 않은 상태다. <강원문화재연구소 제공>

 

정선지역에는 신동읍 덕천리 소골과 운치리·여량리는 물론 영월 쌍굴유적, 횡성 중금리 등 남한강 유역에서 신석기 유적들이 발견되었어요.”(조 관장)

 

신석기뿐 아니라 덕천리 소골과 소사, 운치리, 수동, 정선읍 가수리, 용탄리 등에서 철기시대 유물이 확인됐고, 삼국시대 고분과 산성유적들이 다수 보이고. 강변을 따라 있는 충적대지에서 사람들이 끊임없이 살아왔다는 얘기죠.”(지현병 강원고고문화연구원장)

 

그리고 2005. 정선군은 아우라지(정선군 북면 여량2) 일대를 아리랑을 주제로 한 관광단지로 조성한다는 야심찬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그 뜻을 접어야 했다. 강변의 충적대지가 바로 신석기시대부터 조상들이 집단으로 살았던 흔적이었기 때문이었다.

 

신석기~청동기~철기~신라시대 유적이 켜켜이 나왔어요. 특히 청동기 주거지가 무려 28동이 나왔는데요. 그러나 단순히 많이 나왔다는 것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윤석인 강원고고문화연구원 조사1부장)

그랬다. 아우라지 유적에서 확인된 두 가지는 한국선사고고학을 뒤흔들 핵폭탄과도 같은 것이니 말이다.

 

먼저 청동기시대 주거지에서 나온 이른바 덧띠새김무늬토기(각목돌대문토기·刻目突帶文土器·눈금 같은 무늬를 새긴 덧띠를 두른 토기)의 출현이다. 독자들은 아마도 지난해 초 2007학년도 고교국사교과서에 수정된 청동기 기원문제에 대한 치열한 논쟁을 떠올릴 것이다.

 

 

 

아우라지에서 확인된 덧띠새김무늬토기. 한반도 청동기시대 전개과정의 고리를 이어주는 중요한 유물이다.

 

신석기시대 말인 기원전 2000년쯤에 중국 랴오닝(遙寧), 러시아 아무르강과 연해주 지역에서 들어온 덧띠새김무늬토기가 앞선 빗살무늬 토기문화와 약 500년간 공존하다가 점차 청동기시대로 넘어간다. 이때가 기원전 2000년께에서 1500년께로 한반도 청동기시대가 본격화된다.”(2007년판 국사교과서)

 

이 대목은 신석기시대를 이어 한반도에서는 기원전 10세기쯤에, 만주지역에서는 이보다 앞선 기원전 15~13세기쯤에 청동기시대가 전개되었다는 기존 내용과 비교할 때 가히 혁명적인 변화였다. 한반도 청동기문화의 기원을 500~1000년 올려본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학계일각에서는 너무 성급하다고 비판하는 등 논쟁의 소용돌이에 빠졌다.

교과서 내용 중에 있듯 덧띠새김무늬토기는 바로 조기(早期) 청동기시대, 즉 가장 이른 시기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유물에 속한다.

 

한반도 조기청동기의 시원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다르지만 대략 BC 15~13세기 정도이다. 청동기시대는 고조선이 출현하는 등 우리 민족사의 기틀이 마련되는 아주 중요한 시기이다.

 

달리 보면 우리 역사를 우물안 개구리처럼 한반도로 국한시키니까 이런 논쟁이 벌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이형구 선문대 교수의 말마따나 우리 민족문화의 시원을 한반도가 아니라 발해연안에서 찾으면 논쟁의 여지가 없을 텐데 말이다. 어찌됐든 당시 교과서를 쓴 최몽룡 서울대교수가 한반도 청동기시대를 끌어올리면서 단적인 예로 든 것이 바로 막 조사된 정선 아우라지 유적이었다.

 

남한강 최상류인 정선에서도 가장 이른 시기에서 조기 청동기의 대표적인 유물인 각목돌대문토기(덧띠새김무늬토기)가 나온 것은 매우 중요하지요. 그리고 이런 토기는 정선뿐 아니라 경주 충효동, 진주 남강, 산청 소남리 등에서 숱하게 확인된 바 있어요.”(최몽룡 교수)

 

덧띠새김무늬토기는 발해연안에서부터 일의대수(一衣帶水)로 한반도까지 뻗어 있어요. 발해연안인 다쭈이쯔(大嘴子), 상마스(上馬石)유적에서부터 한반도 신의주 신암리-평북 세죽리-평남 공귀리-강화 황석리·오상리-서울 미사리-여주 흔암리-진주 남강 상촌·옥방까지.  BC 15~13세기 유적들이지. 남한강 최상류(아우라지)까지 그 당시의 덧띠새김무늬토기가 나온 것은 의미심장하지.”(이형구 교수)

 

이 교수는 도로가 없었던 예전에는 강이 고속도로 기능을 했을 것이라면서 남한강 최상류까지 선사유물이 존재하는 것을 설명했다.

 

비단 남한강뿐이 아닙니다. 북한강 수계인 최근 홍천 외삼포리 같은 곳에서는 AMS(질량가속분석기) 측정결과 BC 14~13세기로 편년되는 유적에서 덧띠새김무늬토기가 나왔는데요. 모두 한강수계라는 점이 의미심장합니다.”(김권중 강원문화재연구소 원주팀장)

 

결국 정선 아우라지 유적은 한반도에서 청동기시대의 전개과정을 알려주는 지표유적이라 할 만하지.”(조유전 관장)

 

또 하나, 아우라지에서 수수께끼 같은 유물이 나왔다. 2005 714일 오후. 당시 조사단(강원문화재연구소) 현장책임자였던 윤석인은 아우라지 유적 한쪽에 서 있던 고인돌을 노출시켰다.

 

고인돌 4기 가운데 한 기에서 사람의 두개골과 대퇴부뼈가 나왔습니다. 서울대 해부학교실에 분석을 의뢰했는데, 뜻밖에 서양인의 염기서열과 비슷하다는 결과를 구두로 통보받았습니다.  170 정도의 남성인데, 현재의 영국인과 비슷한 DNA 염기서열이라는.”(윤석인)

 

물론 이 인골의 연대는 BC 8~7세기로 측정되었으므로, 덧띠새김무늬토기(중심연대가 BC 13세기)가 나온 곳과는 시간차가 있다. 어쨌거나 만약 2800년 전 서양인의 염기서열을 지닌 사람이 한반도에서도 두메산골인 정선에서 살았다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이것은 학계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46년 전인 1962년 제천 황석리 고인돌에서도 수수께끼 같은 인골이 확인된 적이 있었다.

 

당시 인골분석을 맡은 서울대 의대팀은 두개골과 쇄골, 상완골 모두 현재 한국인보다 크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현대 한국인의 두개장폭지수(頭蓋長幅指數·이마~뒤통수의 길이와 귀~귀 사이의 길이 비율) 100 80~82이고, 서양인은 100 70~73 사이입니다. 그런데 황석리 인골은 100 66.3이란 말이지. 이로 미루어 보면 황석리 인골은 한반도로 이주한 초장두형 북유럽인일 수밖에 없어.”(김병모 한양대 명예교수)

 

더구나 얼굴전문가인 조용진 얼굴연구소장이 복원한 황석리인은 그냥 보아도 서양인의 그것과 똑같다. 또한 지금도 충북과 경북 산간지역의 사람들 가운데는 황석리인과 비슷한 사람들이 있다고 하니 얼마나 놀라운가. 이런 상황에서 아우라지에서 출토된 서양인 염기서열을 지닌 인골의 노출 소식이 알려졌으니. 무엇보다 황석리와 정선은 같은 남한강 수계가 아닌가.

 

한반도에서 서양인의 염기서열이 나왔다고 해서 놀랄 일은 아니라고 봅니다. BC 18~17세기 무렵 히타이트족의 정복으로 흑해지역에 살고 있던 아리아족이 인도 쪽으로 이민했거든. 그런데 인도에서 살던 사람들 가운데는 벼농사 전래경로를 따라 동남아시아~한반도로 이주한 사람들도 있었을 겁니다. 이들의 경로는 고인돌 문화의 전파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고.”

 

하지만 아직은 서양인의 유전자와 관련해서는 퍽이나 조심스럽기도 하고, 민감하기도 한 주제다. 제천 황석리나 정선 아우라지나 모두 고인돌에서 나온 인골이다. 고인돌은 청동기시대 지배층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서양인이 청동기시대 한반도를 지배했느냐는 의문이 생길 수도 있고, 우리가 서양인의 후손이냐는 회의감이 들기도 한다.

 

물론 황석리인이나 아우라지 출토 인골이 한민족의 조상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 다만 현대의 한국인이 하나의 유전자로 이어지지는 않았겠지. 갖가지 교류를 통해 여러 인자를 받았을 테지. 그렇게 생각해야 해.”(김병모 교수)

 

하지만 아직은 확실하지 않다. 분석을 맡은 서울대 해부학 교실팀은 신중에 신중을 거듭하고 있다. 확실한 결과를 얻기 위해서다.

 

공식적으로 발표된 자료는 전혀 없습니다. 검증된 결과가 나와야 하고 해외 학계에서도 학술적으로도 인정받아야 합니다. 무엇보다 아직 결과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결과가 나올 때까지 기다려 주십시오.”(신동훈 교수)

 

어쨌거나 지금은 일본과 이스라엘 등 해외기관에도 분석을 맡겨놓은 상태. 아직 분석팀의 연구결과와 공식발표가 없는 만큼 기다릴 수밖에 없다. 이기환 선임기자

(출처;

http://news.khan.co.kr/section/khan_art_view.html?mode=view&artid=200808291734585&code=900305)

 

 

 

 

2016 11 16일 헤럴드경제 기사 아우라지에 3000년 전 귀족이 살았나..희귀 유물 대거 발굴

 

정선아리랑의 본고향으로 국민에게 익숙한 아우라지 일대에서 신석기에서 청동기로 넘어가는 전환기의 토기와 청동제 장신구, () 악세사리, 정교한 화살촉, 고인돌 하부구조 추정 석곽 및 석관 등 희귀 유물이 대거 출토됐다.

 

 

 

[사진=각목돌대문토기]

 

또 신석기~조선시대의 장구한 세월의 유적이 다양하게 발견돼, 이곳이 신석기 시대 이후 정치사회문화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기능을 한 지역이 아닌가 하는 추론을 낳고 있다.

 

강원도 정선군(군수 전정환)과 강원문화재단부설 강원문화재연구소(소장 오제환)는 지난 3월부터 최근까지 여량리 아우라지역 일대 2차 발굴조사를 벌인 결과 이같은 성과를 얻었다고 16일 밝혔다.

 

 

 

[사진=() 장신구]

 

지난 2006~2007년 있었던 1차 조사에서는 신석기 시대 주거지와 야외노지(爐趾:고대 주거지의 불 땐 자리), 청동기 시대 주거지와 수혈(지면에서 곧게 내리판 굴)유구, 분묘유구, 철기 시대 주거지 등 총 46기의 유구를 확인한 바 있다. 유구(遺構)는 옛날 토목건축의 구조와 양식을 알 수 있는 실마리가 되는 자취를 말한다.

2차 조사는 1차 조사지역 이외의 나머지 구간(41218)에서 진행됐는데, 신석기 주거지 1, 청동기 주거지 42기와 분묘 11, 철기시대 주거지 1, 삼국(신라)시대 주거지 14, 통일신라시대 주거지 8, 조선시대 주거지 3, 수혈유구 23, 적석유구 1, 미상유구 2, 토광묘 3기 등 총 109기의 다양한 유구가 확인됐다.

 

특히 조사지역 중앙부 17호 청동기시대 주거지 내에서는 청동제 장신구가 출토됐다. 기원전 13~11세기 것으로 추정되며 옥() 장식품(관옥)과 함께 섞여 출토됐다.

 

 

 

[사진=삼각만입 석촉]

 

또 신석기에서 청동기시대로 넘어가는 시기에 유행하던 것으로 아가리 부분에 덧띠를 덧붙인 각목돌대문토기(刻目突帶文土器, 일명 새김덧띠무늬토기’), 돌로 정교하게 만들어진 화살촉인 삼각만입석촉(三角灣入石鏃)과 버드나무 화살대, 장방형 돌칼(석도) 등도 발견돼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모은다.

 

청동기 시대 분묘유구는 고인돌을 포함하여 석곽묘 및 석관묘 등 8기가 새로 확인되었다. 상부 개석이 없이 확인된 석곽과 석관의 경우 고인돌의 하부구조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석곽묘에서는 적색마연토기(赤色磨硏土器, 붉은간토기) 1, 옥장식품(환옥) 8, 삼각만입석촉, 일단경식석촉(一段莖式石鏃) 등이 확인됐다.

 

 

 

[사진=청동제 장신구]

 

석관묘 경우 평면 형태는 장방형으로 동일하지만 석곽묘보다 규모가 작다. 그중 1호 석관묘 내부에서는 성인으로 추정되는 인골과 함께 귀걸이로 보이는 곡옥(曲玉) 2, 목걸이로 보이는 환옥(丸玉) 100여 개 정도가 확인됐다.

 

신석기 이후 수천 년 동안 아우라지에서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을까. 문화재청과 강원문화재연구소는 16일 오후 2시 현장설명회를 연다. 함영훈 기자

(출처; http://v.media.daum.net/v/20161116095304416)

 

 

 

 

2017 11 9일 동아일보 기사 [단독]"아우라지 유물, 세이마 계통.. 한반도 청동기 뿌리는 시베리아"

 

강인욱 경희대 교수 논문서 주장

 

 

 

강원 정선군 아우라지 유적에서 출토된 기원전 13세기 청동 장신구(위 사진)와 시베리아 솝카 유적에서 출토된 기원전 18세기기원전 15세기 청동 장신구. 두드려서 얇게 판으로 만든 뒤 구부린 형태가 서로 닮았다. 강원문화재연구소·강인욱 교수 제공

 

한반도 청동기의 뿌리는 기원전 20세기 시베리아 북방 유목문화라는 주장이 나왔다.

기존 학계는 비파형동검의 중국 랴오닝(遼寧)지역 전래설 위주로 한반도 청동기 기원을 논의해 왔다. 이번에 제기된 견해는 지난해 11월 강원 정선군 아우라지 유적에서 발견된 우리나라 최고(最古) 청동 유물을 연구한 결과다.

 

강인욱 경희대 교수(북방 고고학)는 최근 발표한 논문 한반도 청동기 사용의 기원과 계통에서 정선 아우라지에서 발견된 4점의 청동 장식은 한반도에 청동기가 들어온 연대를 파격적으로 끌어올릴 수 있는 결정적인 증거라고 밝혔다.

 

실제로 돌 반지처럼 얇게 편 고리와 대롱옥을 닮은 청동장신구 4점은 방사성탄소연대 측정 결과 기원전 13세기 유물로 판명됐다.

 

지금껏 남한에서는 비파형동검(기원전 9세기기원전 8세기)보다 앞선 시기의 청동유물이 드물어 이른 청동기시대를 놓고 무문(민무늬)토기 시대라는 애매한 용어를 사용해 왔다. 청동기시대를 정의하는 핵심 기준인 농경 흔적은 확인되는데 정작 청동기가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우라지 유물이 발견됨에 따라 기원전 13세기의 이른 시기에도 청동기가 사용된 사실이 증명된 것이다.

 

강 교수는 논문에서 아우라지 청동기와 시베리아 솝카 유적에서 출토된 기원전 18세기기원전 15세기 청동기를 비교했다.

 

돌 장신구에 끼울 수 있도록 청동기를 두드려 얇게 판으로 만든 뒤 구부린 양식이 서로 일치했다. 그는 아우라지 청동기는 세이마-투르비노 계통의 청동 제련기술을 발전시킨 것으로 시베리아 바라바 초원에서 유행한 양식이라고 설명했다.

 

무기나 마구보다 청동 장신구 위주인 세이마-투르비노 문화는 시베리아에서 연해주를 거쳐 한반도에 도달한 것으로 추정된다. 초기 청동기시대에 국한할 때 중원(中原)의 영향은 상대적으로 미미했다.

 

다만 중국 북방지역의 초기 청동기문화는 평북 신암리 유적으로 대표되는 한반도 서북지방에만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시베리아 북방 유목문화가 전파되는 과정에서 일방통행만 있었던 건 아니다. 곡옥(曲玉)을 모방한 청동기처럼 한반도 고유의 문화 요소도 가미됐다.

 

강 교수는 석기 전통이 강한 한반도에서는 청동기가 들어온 이후에도 오랫동안 석기를 버리지 않고 함께 사용했다고 말했다. 돌 장신구에 끼워 사용할 수 있도록 제작된 아우라지 청동기가 대표적인 사례다. 철기가 도입돼 석기의 효용성이 사라진 세형동검 단계 이후에야 한반도에서 청동기 사용이 급격히 늘어난 것으로 분석된다. 김상운 기자

(출처; https://news.v.daum.net/v/20171109030125518)

 

 

 

 

5.13 정선 매둔동굴서 청동기유골 발견"불로 의식 치른 흔적; 3100년 전~2700년 전(BC 12~8세기)

 

2017 5 23일 뉴스원 기사 정선 매둔동굴서 청동기 유골 발견"불로 의식 치른 흔적"

문화재청 "주검 안치 전 매장풍습 보여주는 사례"

 

 

 

매둔굴 사람뼈 1호 출토. (문화재청 제공) © News1

 

청동기 시대에 시신을 안치하기 전 불을 이용한 의식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동굴무덤이 강원도 정선에서 처음 확인됐다. 문화재청의 허가를 받아 연세대학교 박물관(관장 한창균)이 발굴하고 있는 강원도 정선의 매둔동굴 유적에서 청동기 시대 매장의례를 파악할 수 있는 동굴무덤이 확인됐다고 문화재청이 23일 밝혔다.

 

정선 매둔동굴은 2016년 시굴조사 이후 올해 25일부터 약 한 달간 동굴 입구 지점의 청동기 시대 문화층을 중심으로 발굴을 시행했다. 그 결과 한국의 청동기 시대 유적에서 알려지지 않았던 불과 매장의 관계를 보여주는 독특한 유형의 무덤을 처음으로 확인됐다.

 

 

 

매둔굴 동벽단면(문화재청 제공) © News1

 

문화재청에 따르면, 이 동굴무덤에서 청동기 시대에 형성된 재층(최대 두께 약 18)에서 적어도 네 사람분에 해당하는 사람 뼈와 함께 다양한 종류의 유물이 출토됐다. 재층은 크게 윗부분의 백색 재층과 아랫부분의 회색 계열 재층으로 구분되며, 1호 사람 뼈와 2호 사람 뼈는 백색 재층 바로 위에 잇닿아 안치돼 있고, 나머지 2구로 추정되는 뼈들은 재층 속에 흩어진 상태로 발견됐다.

 

 

 

어린이 허벅지뼈로 추정되는 유골. (문화재청 제공) © News1

 

문화재청은 "방사성탄소연대측정 결과, 재층은 전체적으로 기원전 12~8세기(중심 연대는 기원전 10세기)에 속하며, 이 연대는 백색 재층 위에 안치된 1호와 2호 사람 뼈가 청동기 시대에 해당한다는 것"이라며 "지금까지 조사결과로 정황을 판단하면, 주검을 안치하기에 앞서 불을 이용한 의식이 먼저 행해졌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나타난다"고 분석했다.

 

 

 

빗살무늬토기 앞면. (문화재청 제공) © News1

 

또한 이 동굴무덤의 회색 계열 재층에서 신석기 시대 빗살무늬 토기 조각 등을 비롯해 청동기 시대의 돌화살촉이 함께 발견됐다.

 

문화재청은 "매둔동굴에 거주했던 청동기인들이 불을 사용하는 과정에서 과거 신석기 시대에 형성된 문화층의 상부 지점에 퇴적되어 있었던 빗살무늬토기 조각 등이 청동기 시대의 재층 안으로 뒤섞이게 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추가 조사를 통해 신석기 시대에서 청동기 시대로 이행하는 동안 일어났던 다양한 문화적 현상들을 밝힐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연세대학교 박물관은 이번 발굴조사 결과 확보된 사람 뼈에 대한 유전자 분석을 시행해 주검의 성별, 나이, 체질 특성과 무덤의 성격 등을 밝히는 연구를 이어나갈 계획이다. 김아미 기자

(출처; http://news1.kr/articles/?3000733)

 

 

 

 

5.14 안면도 고남리패총(安眠島古南里貝塚); 3100년 전~2400년 전

 

충청남도 태안군 고남면 안면도에 있는 석기시대 이후 민무늬토기 등이 출토된 조개더미.

1983년 한양대학교박물관이 안면도에 대한 지표조사를 실시해 여러 조개더미를 발견함에 따라 알려지게 되었다.

 

발굴조사는 19881996년 모두 7차례에 걸쳐 실시되었다. 1988 1차 발굴(A지구)에서는 청동기시대와 신석기시대에 해당하는 조개더미가 각 1개씩 조사되었다.

 

상당부분 파괴가 진행되었던 신석기시대 조개더미(2호 조개더미)에서는 전형적인 빗살무늬를 갖춘 것에서부터 표면에 진흙을 바르고 마연하는 등 민무늬토기의 영향을 받은 토기편들까지 출토되었다. 이로써 이 유적의 상한과 하한의 시간 폭이 컸음을 알 수 있었다.

 

청동기시대의 조개더미(1호 조개더미)에서는 특별한 유구는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송국리형의 민무늬토기·세모돌칼·홈자귀·대패날··붉은간토기 등의 유물이 출토되어 송국리 유적과 유사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1989년의 2차 발굴에서는 인근 B지구에 대한 조사를 실시하였다. 1차 조사 때 발견된 청동기시대의 조개더미(1호 조개더미)와 함께 순수한 청동기시대의 조개더미가 발견되었다는데 큰 의의가 있었다. 2차 발굴에서는 총 3기의 집자리가 발견되었다.

 

형태는 말각장방형으로 장축방향은 동서축에서 약간 틀어졌다. 규모는 대체로 동서 약 3.54.7m, 남북 2.43.1m, 최대 움깊이 4065cm정도이다.

 

집터 바닥면에는 중심에서 한쪽으로 약간 치우쳐서 화덕시설로 보이는 타원형의 구덩이가 설치되어 있었다. 일부에는 배수구로 생각되는 홈이 파여져 있었다. 출토유물은 1차 발굴 때와 같은 양상을 보였다.

 

1990 3차에서 1996 7차 발굴까지는 2차 발굴지였던 B지구에서 130m 정도 떨어진 C지구를 대상으로 실시하였다. 그 결과, 1·2차 발굴에서는 조개더미의 대부분이 파괴되어 존재여부만이 확인되었던 신석기시대 조개더미를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청동기층과 신석기층이 별도의 조개더미로 존재하지 않고 서로 층위를 이루며 발견되어, 안면도 지역에서 신석기문화와 청동기문화의 연속성을 파악할 수 있는 좋은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패각층을 분석한 결과 패각층을 이루는 조성성분의 대부분은 굴이었고, 그 다음으로 반지락·피뿔조개·대수리 등이 많았다.

 

1·2차 발굴 때 채집한 시료에 대한 C14연대측정 결과, 청동기문화층 및 주거지는 대략 2,4002,600년 전에 형성되었고, 신석기문화층은 서기전 15세기 전후에 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4차 발굴 때 청동기문화층에서 채집된 샘플은 대략 2,4902,590년 전, 6차 발굴 때 신석기문화층에서 채집한 샘플은 3,0703,190년 전으로 나타났다. 집필(1998) 문은순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Contents/SearchNavi?keyword=%ED%83%9C%EC%95%88%EA%B3%A0%EB%82%A8%EB%A6%AC&ridx=0&tot=53)

 

 

 

 

5.15 여주 흔암리유적; 3000년 전~1200년 전(BC 11C~BC 3C)

 

경기도 여주시 점동면에 있는 청동기시대 쌀·보리·수수·조 등의 곡물이 발견된 집터. 시도기념물.

이 집터는 한강과 평행하는 긴 구릉에서 한강쪽으로 뻗은 지맥의 표고 123m 능선 위에 있으며, 이 지맥은 강가에서는 2030m의 절벽으로 되어 있다.

 

1962년에 이 곳 구릉에 토기와 석기들이 산포되어 있음이 알려져 19721977년까지 서울대학교박물관과 고고학과에 의해 발굴 조사되었다. 모두 14기의 집터가 확인되었는데, 더 많은 집터의 존재가 예상된다.

 

집터는 지맥의 장축(長軸)과 직교각으로 만나는 남북장축의 장방형이 대부분이며 풍화된 화강암반을 자로 파고 지붕을 씌운 것이다. 14기 중 3기는 구릉 동쪽 경사면에서, 나머지 11기는 서쪽 사면(한강쪽)에서 발견되었다.

 

집의 크기는 작은 것은 5m×2.5m, 큰 것은 10m×4m 정도이다. 기둥구멍이나 화덕자리가 없는 것도 있으나, 기둥구멍이 3열로 배치되어 맞배지붕을 시사하는 것도 있었고, 바닥에는 10 두께로 점토를 다지고 저장공(貯藏孔)을 가진 것이 있었다.

 

1977년에 발굴된 12호 집터는 북동-서남장축의 9.7m×3.7m 크기로, 모두 39개의 기둥구멍이 벽선과 중앙선에 3열로 배치되어 있었다. 3개의 화덕자리와 7개의 저장공이 있었다.

 

유물들은 주거 바닥에서 구멍무늬토기孔列土器 3, 민무늬토기 4, 붉은간토기 1, 간돌검磨製石劍 4, 반달돌칼 1, 바퀴날도끼環狀石斧 1, 돌도끼 4, 외날돌도끼 4, 돌살촉 10점 등이 발견되었다.

 

민무늬토기는 화분형 사발·단지·짧은목토기短頸壺 등이다. 구멍무늬토기는 아가리가 넓고 깊은 사발형이면서 아가리 아래쪽에 조그만 구멍이 1줄 뚫리고 아가리 윗면에는 톱날새김을 하고 있다. 붉은간토기는 고운 흙으로 만들어진 얇은 토기이며 파편뿐이어서 원형을 알기 어려우나, 다리가 홀쭉한 굽다리접시高杯모양으로 추측된다.

 

석기 중에는 돌도끼와 끌에 냇돌을 이용해서 만든 뗀석기가 있는 것이 주목되며 한강유역의 빗살무늬토기시대의 전통이 반영되고 있는 듯하다.

 

돌칼은 1단자루, 2단자루 두 형식이 모두 있으나 이른바 피홈식血溝式이 있는 것이 연대결정상 중요하다. 돌살촉에는 자루식有柄式·슴베식有莖式 두 종류가 있으며 모두 전형적인 청동기시대 형식이다.

 

한편, 토기 안의 흙 속에서는 탄화된 쌀(2겉보리(2(1수수(1)가 발견되었다. 쌀은 평균 길이 3.7, 너비 1.6로서 길이와 너비의 평균 비례는 1.62이다. 이것은 자포니카종(Japonica) 중에서도 단립극소형(短粒極小形)임이 밝혀졌다. 수수는 선사시대 것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이다.

 

이 유적에서 얻어진 방사성탄소연대는 140(7호 집자리), 서기전 566·691·721(8호 집자리), 서기전 230·670·970·1030·1260(12호 집자리), 서기전 160·340(13호 집자리) 등이 있다.

 

몇 개의 극단치를 제외하면 대체로 서기전 68세기에 모여 있어 청동기 전기에 해당되며, 그 연대는 구멍무늬토기·붉은간토기의 결합상으로도 뒷받침된다.

 

그러나 제12호 집터에서 피홈식 돌칼이 나온 사실은 이 곳 문화단계가 대체로 청동기시대 전기에 해당되면서도 그 실제 연대는 서기전 43세기경까지로 내려올 가능성을 시사해주고 있다.

 

의의와 평가

이 흔암리 유적은 전후 수백 년간 존속한 청동기시대 전기의 한강변의 농경민 취락지로서 한때 적어도 10채 내외의 집이 있었던 것으로 믿어진다. 이들의 경작지는 외국에서의 경우로 미뤄볼 때, 지맥과 지맥 사이의 조그마한 골짜기로 추측된다.

 

·보리·수수·조 등 여러 가지 곡식의 발견은 청동기시대 전기에 한강유역에서 쌀이 재배되었다는 새로운 사실을 알려주었다. 또한 우리나라의 벼의 전래경로가 화남(華南)산둥반도(山東半島)한국 중서부라는 종래 일부 학자들의 학설의 타당성을 증언하는 결과가 되었다. 집필(1996) 김원룡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Contents/SearchNavi?keyword=%EC%97%AC%EC%A3%BC%ED%9D%94%EC%95%94%EB%A6%AC%EC%84%A0%EC%82%AC%EC%9C%A0%EC%A0%81&ridx=0&tot=1554)

 

 

 

 

2016 7 13일자 동아일보 기사 [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12> 여주 흔암리 유적 발굴한 임효재 서울대 명예교수

 

일본보다 600년 앞선 탄화미 발견 내 인생 최고의 유물

허 참, 임 선생이 미국서 요상한 걸 배워왔네.”

 

1975 11월 경기 여주시 흔암리 발굴 현장. 이곳을 찾은 선배 교수들이 임효재 당시 서울대 고고학과 전임강사(75·서울대 명예교수)를 미덥지 않은 눈으로 바라봤다. 땅을 파기도 빠듯한 시간에 임효재가 이끄는 발굴팀은 화덕 자리(爐址·노지)의 흙을 여섯 포대나 퍼 담아 연구실에서 온종일 분석에 매달렸다. 교수들은 궁금했다.

 

도대체 뭘 찾아내려는 건가?” “불에 탄 쌀(탄화미·炭化米)을 찾고 있습니다.” “바닥에 떨어진 낱알도 찾기 어려운데 땅속에서 그 미세한 걸? 음 알겠네.”

 

임효재는 1968년 스튜어트 스트루에버 미국 노스웨스턴대 교수가 창안한 부유법(water flotation technique)을 국내에서 처음으로 흔암리 발굴 현장에 적용했다. 부유법은 탄화곡물이 있을 가능성이 높은 화덕 주변의 흙을 물에 붓고 위에 뜬 물질을 채로 걸러내 돋보기나 현미경으로 조사하는 방식이다. 탄화곡물은 불에 탄 상태라 미생물에 의해 부식되지 않고 오랫동안 땅속에 보존돼 있다.

 

유구에서 토기와 같은 인공(人工)의 유물을 찾아내는 게 발굴의 전부였던 당시 국내 고고학계에서 자연 유물을 찾는 것은 시도된 적이 없었다. 40여 년 만에 흔암리 유적을 다시 찾은 임효재는 모두들 반신반의했지만 한반도 최고(最古)의 탄화미를 결국 찾아냈다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과도 맞바꿀 수 없는 내 인생 최고(最高)의 유물이라고 회고했다.

 

 일본 학계의 한반도 전파설을 깨뜨리다

 

 

 

1976 4월 발견된 탄화미. 연대 측정 결과 기원전10세기 것으로 추정됐다.

 

선생님, 아무래도 뭔가 나온 것 같습니다.”

 

1976 4월 여주 흔암리 현장 연구실. 핀셋으로 부유물을 하나씩 헤집으며 한참 돋보기를 들여다보던 서울대 학부생 이남규(현 한국고고학회장·한신대 교수)가 임효재를 급하게 불렀다. 전형적인 타원형의 탄화미였다. 꼬박 6개월 동안 충혈된 눈으로 작업한 끝에 나온 값진 성과였다. 앞서 임효재는 19721975년 미국 텍사스주립대 유학 시절 부유법을 배웠다. 임효재는 “1970년대 초반까지 우리 학계는 농경유적에서조차 곡물을 찾아내지 못할 정도로 눈 뜬 장님과 같은 처지였다고 말했다.

 

발굴팀은 연대 측정을 위해 탄화미와 함께 출토된 목탄(木炭)을 한국원자력연구소와 일본 이화학연구소에 동시에 보냈다. 객관성을 높이기 위해 양국 연구소에서 교차검증을 실시한 것이다. 방사성 탄소연대 측정 결과는 놀라웠다. 두 연구소 모두 기원전 10세기로 나왔는데, 이에 따르면 흔암리 탄화미는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것인 동시에 일본보다 600년 이상 앞선다. 흔암리 발굴 이전 최고(最古) 탄화미는 김해 패총에서 발견된 것으로 연대는 기원후 1세기였다.

 

학계는 흥분했다. 벼농사 기원에 대한 일본 학자들의 한반도 전파설이 깨졌기 때문이다. 1970년대까지 일본 학계는 후쿠오카(福岡) 현 이타즈케(板付) 유적에서 발견된 탄화미의 연대(기원전 3~4세기)가 김해 패총보다 빠르다는 이유로 벼농사가 중국 남부에서 일본 열도를 거쳐 한반도로 전파됐다는 주장을 펴고 있었다. 그러나 흔암리 탄화미 발견을 계기로 상황이 역전된 것이다. 이로써 세계 고고학 교과서의 내용도 바뀌었다. 임효재는 벼농사의 황해 횡단설을 제기했다. “중국 양쯔(揚子) 강에서 황해를 건너 한반도 중부지방으로 벼농사가 들어왔다고 봅니다. 이후 한강을 따라 퍼지면서 일본 열도까지 전해진 것이지요.”

 

 아시아 문화교류사 열쇠를 찾아

학계는 벼농사의 기원이 고대 아시아의 정치, 사회, 문화를 결정한 핵심 요인이었다는 점에서 흔암리 발굴의 의미를 높게 평가한다. 벼농사가 아시아 대륙을 횡단해 전파됐다는 점에서 동아시아 문화교류사 연구에서도 중요하다. 1978년 흔암리 발굴보고서는 흔암리 탄화미는 기원전 713세기 전후 한반도 문화에 영향을 미친 중국 룽산(龍山) 문화의 파급과 깊은 연관이 있다고 분석했다.

 

특히 흔암리 유적은 자연유물이 고고학 연구의 중요한 연구 분야로 떠오르는 계기가 됐다. 실제로 임효재의 제자인 이경아(미 오리건대 교수) 안승모(원광대 교수) 김민구(전남대 교수) 등이 식물고고학 분야에서 활약하고 있다.

 

노교수에게 흔암리 유적의 남은 학술적 과제를 물어봤다. “흔암리 유적에 담긴 당시 사회구조가 아직 제대로 규명되지 않았습니다. 주거지별로 흙을 채취하면 곡물의 양이나 종류가 각기 다릅니다. 이들 사이에 사회계급이나 기능의 차이가 있었다는 얘기죠. 후학들의 추가 연구가 필요한 부분입니다.” 김상운 기자

(출처;

http://news.donga.com/List/Series_70040100000214/3/70040100000214/20160713/79164040/1#csidx8dc3371cfd555ba929d59c9eebb920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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