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와 한반도 12,000년 전~ 2,000년 전 년대기》

5.16 하가점(샤쟈덴)상층문화(夏家店上層文化); 3000년 전~2300년 전(BC 1000~BC 300)

중국 동북지방의 청동기시대 후기 문화로 그 연대는 B.C. 1000~300년까지에 해당된다. 샤쟈덴상층문화(夏家店上層文化)의 유적은 내몽고자치구(內蒙古自治區) 동남부의 昭烏達盟, 哲里木盟, 遼寧省 朝陽 지구를 비롯한 요서(遼西)지방, 그리고 하북성(河北省) 承德지구 등에서 발견된다. 샤쟈덴상층문화의 연대를 보면, 西拉木倫河 이북의 林西縣 大井 유적의 방사성탄소연대측정 결과가 B.C. 1000년 전후의 수치를 보이고 있지만, 서랍목륜하 이남에 분포하는 유적은 연대가 상대적으로 늦은 것으로 추정된다. ()나라와 진()나라의 장성(長城) 이남 지대에서 발견되는 샤쟈덴상층문화의 유물들은 모두 연과 진으로 대표되는 전국(戰國)시대의 유물보다는 비교적 빠른 것으로 보인다.

 

샤쟈덴상층문화는 제일 먼저 內蒙古 赤峰 紅山後 유적에서 일본 고고학자들에 의하여 발견되어 당시는 적봉2기문화(赤峰二期文化)라고 불리워졌다. 하지만 1960년 적봉 샤쟈덴 유적 발굴을 통해 적봉2기문화는 서로 다른 시기의 2가지 문화를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져, 그 이전의 인식과 구별하기 위해 그중 늦은 시기의 문화를 샤쟈덴상층문화라고 부르게 되었다.

 

샤쟈덴상층문화의 토기는 모두 사질(沙質)토기로서 점토띠를 판축하여 손으로 만든 것으로 보이는데 물레의 사용 흔적은 발견되지 않는다. 토기의 표면에는 깎아 다듬은 흔적이 보이지만 문양이 장식되어 있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소성 온도는 비교적 낮았던 것으로 추정되며 토기 표면은 일정하지 않은 홍갈색을 띤다. 무덤에 부장된 토기와 실용기는 별다른 차이가 없다. 토기의 종류로는 정(), (?), (?), (), (), () 등이 있다.

 

샤쟈덴상층문화의 청동기는 그 종류가 다양한데, 청동용기(靑銅容器)는 비교적 적은 편이고, 무기(武器)와 공구(工具), 장식품(裝飾品) 등이 가장 많다. 청동용기의 경우, 중원(中原)지구에서 사용된 것과 동일한 것도 있지만, 샤쟈덴상층문화 토기의 형태와 유사한 정, , , 관 등의 청동기도 있어서 이 지역의 수요를 충족하기 위해 이들 용기가 자체 제작되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자주 보이는 청동공구와 무기로는 손칼(刀子), 송곳, 도끼, , 화살촉, , 단검 등이 있는데, 북방지구의 다른 문화에서 보이는 것들과 그 형태가 유사하다.

 

단검으로는 날과 자루가 함께 주조된 것과 따로 주조된 것이 있는데, 날의 형태도 직인(直刃)과 곡인(曲刃)이 모두 보인다. 손칼이나 단검의 자루, 혹은 자루 머리 등에 동물형이나 기하문양이 장식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유적에서 여러 차례 돌거푸집(石製鎔范)이 발견된 바 있고, 샤쟈덴하층문화와 비교할 때 청동기의 종류가 매우 다양하고 수량이 훨씬 많아서 당시 청동주조기술(靑銅鑄造技術)이 광범위하게 보급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무덤 유적에서 출토된 중원지역의 서주(西周) 후기, 혹은 전국시대 전기의 청동 유물로 볼 때 샤쟈덴상층문화와 중원지구 사이에 밀접한 문화적 접촉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샤쟈덴상층문화의 집자리(住居址)는 대개 하천 기슭의 언덕 위에 위치하고 있는데, 반지하식의 집은 물론 지상 위에 축조한 것도 있다. 주거면에는 화덕자리(爐址)의 흔적이 발견되며, 집자리 주위에 주머니모양의 저장구덩이(貯藏穴)를 설치한 경우가 많다.

 

무덤은 주로 장방형(長方形) 수혈토광묘인데 돌을 쌓아 관을 만든 것도 있고 목관을 사용한 경우도 보인다. 샤쟈덴상층문화의 무덤은 대부분 단인장(單人葬)인데, 2인 합장묘(合葬墓)도 가끔 보인다. 부장품으로는 관이나 발 등의 토기와 소수의 청동기들이 있는데, 여성의 무덤에서는 가락바퀴(紡錘車), 바늘, 송곳, 손칼, 목걸이 및 각종 장식품이 발견되며, 남성의 무덤에서는 뼈화살촉(骨鏃)이나 청동화살촉(銅鏃) 등의 무기와 도구 등이 발견되는데 단검이 부장된 경우는 상대적으로 드물다. 샤쟈덴상층문화의 대표적인 대형 무덤으로는 內蒙古 赤峰市 寧城縣 小黑石溝 돌덧널무덤(石槨墓) 1기와 南山根 돌덧널무덤 2기를 들 수 있는데, 대개 길이, 너비, 깊이가 3.0~4.0×2.0×2.0m 가량의 크기이고 청동공구, 무기, 용기 등과 함께 중원지구에서 사용된 청동예기(靑銅禮器)가 다수 발견되었다.

 

샤쟈덴상층문화의 생산도구로는 반달돌칼(半月形石刀)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농경도구가 보이지 않아 농경이 차지하는 역할이 상대적으로 적었음을 알 수 있다. 목축의 증거는 상대적으로 훨씬 풍부한데 사육된 동물로는 소, , 돼지, 개와 함께 말이 있다. 청동마구나 뼈조각 위에 조각된 그림으로 보아 당시 말은 수레를 끄는데도 사용되고 승마용으로도 쓰였음을 알 수 있다.

 

샤쟈덴상층문화 사회는 무덤 부장품의 종류와 수량으로 볼 때 사회 내부의 분화가 이루어져, 사회 계층화가 이루어진 것으로 보이지만 무덤에서 나온 인골(人骨)을 분석한 결과 계층간의 체질상의 차이는 발견되지 않았다. 샤자덴상층문화에서는 또한 점복술(占卜術)이 유행하였는데 동물의 어깨뼈를 주로 이용하였다.

 

샤자덴상층문화는 같은 시기의 시투안샨(西團山)문화와 활발한 접촉이 있었던 것으로 믿어지며, 같은 시기 중원지구의 각 제후국(諸侯國)과도 밀접한 관계를 유지한 것으로 보인다. 샤자덴상층문화의 존재 시기와 분포 지구로 보아 그 족속(族屬) 사기(史記)에서 보이는 동호(東胡)라는 주장과 산융(山戎)이라는 주장이 맞서고 있다.

(출처; 한국고고학사전(2001),

portal.nrich.go.kr/kor/archeologyUsrView.do?menuIdx=792&idx=10258)

 

5.17 요령 남산근유적(遼寧南山根遺蹟); 2800년 전~2700년 전(BC 9C 중반BC 8C 후반)

중국 요령성 영성현(寧城縣) 남산근촌(南山根村)에 있는 청동기시대 청동그릇·비파형동검 등이 출토된 돌덧널무덤. 석곽묘.

 

노합하(老哈河)의 지류인 곤도하(坤都河) 상류의 남쪽산 아래에 있는 다섯 갈래의 구릉상에 있다. 1958년 이곳에 있는 2기의 무덤으로부터 사람뼈[人骨] 1구와 청동기 71점을 수습하였다. 1961년에 본격적인 발굴을 실시하였고, 1963년에도 청동기를 다수 포함한 돌덧널무덤[石槨墓] 1기를 발굴하였다.

 

돌덧널무덤인 101호분은 타원형의 토광을 파고, 자갈돌로 벽을 쌓았다. 바닥은 작은 판석을 잇대어 깔았고 뚜껑돌[蓋石]에도 일부는 판석을 사용하였다. 바닥에 부식된 목질(木質)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원래 나무널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한다. 장법(葬法)은 단인장(單人葬)이다.

 

101호분에서는 모두 500여 점에 이르는 청동유물을 출토하였다. 중원(中原)지역에서 사용한 예기(禮器)와 유사한 각종 청동그릇 11점과 함께 손칼·도끼··화살촉·꺾창·투겁창·칼집·방패·투구 등의 공구와 무기들이 있었다. 차마구로는 재갈·말방울·장식·고리·단추 등이 있었고, 그밖에 거울 및 각종 장신구 등이 있었다. 이와 함께 중원지역의 예기와는 양식이 전혀 다른 일상용 토기의 형태와 유사한 청동그릇도 다수 출토하였다.

 

102호분은 101호분보다 소형이고, 앙신직지장(仰身直肢葬)이며, 머리가 동남쪽을 향하고 있다. 부장유물로는 청동손칼··송곳·화살촉·말재갈·마구·거울 및 각종 장신구와 함께 돌도끼·뼈화살촉·구슬 등을 출토하였다.

남산근유적의 주요한 출토품인 고식(古式)의 비파형동검은 이곳을 하가점상층문화(夏家店上層文化)의 표준유적으로 만들어 놓은 중요한 유물이다. 이 유적의 연대는 유사한 모양의 다른 유적의 연대로 미루어보아 서주 만기(西周晩期)춘추 초기(春秋初期), 즉 서기전 9세기 중반8세기 후반으로 추정한다.

 

남산근 유적은 한반도의 청동기문화와 관련이 깊다. 한국의 청동기시대 설정이나 문화를 언급할 때 비파형동검은 어느 유물보다 중요한 유물이다. 이 유물의 분포는 내몽고로부터 중국 동북지방, 그리고 우리나라의 남단에 이르기까지 광대한 지역에 퍼져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부여 송국리 등지에서 출토한 비파형동검의 조형(祖型)이 남산근에서 발견되었다. 또 남산근의 돌덧널무덤과 유사한 형식이 대전 괴정동, 아산 남성리, 부여 연화리 등지에서 발견되었다. 나아가서 요령지방의 돌무지무덤[積石塚]과 돌널무덤[石棺墓]도 한반도와 유사한 형태를 가진다. 남산근유적을 통해 요령지방에서 한반도에 이르는 지역이 당시에 문화적 동질성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의의와 평가

요서지방 청동기문화의 담당주민과 그 성격을 중국학계에서는 동호(東胡) 또는 산융(山戎)이라 보고, 북한 학계와 일부 남한학계는 예맥(濊貊)으로 파악한다. 그러나 요서지방의 청동기문화를 하가점상층문화라 통칭하면서, 그 문화의 성격과 주민을 일괄적으로 해명하고자 함은 타당성이 희박하다. 즉 요서의 청동기문화는 노로아호산 이북의 남산근문화와 그 이남 대릉하유역의 십이대영자문화(十二臺營子文化)로 나누어진다. 그리하여 최근에는 남산근문화(南山根文化)는 북방계, 십이대영자문화는 요동의 비파형동검문화(琵琶形銅劍文化)와 연계된 문화로 보는 경향이 있다. 집필 (1996) 강인구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Contents/SearchNavi?keyword=%EC%9A%94%EB%A0%B9%EB%82%A8%EC%82%B0%EA%B7%BC%EC%9C%A0%EC%A0%81&ridx=0&tot=1263)

 

2008 4 11일자 경향신문 기사 [코리안루트를 찾아서](26) 난산건의 비밀

 

고조선문화 토대로 창조 독특한 발해연안 청동검

이쯤해서 삼국유사’(1권 고조선 왕검조선조)를 인용해보고자 한다.

“(단군 왕검은) 1500년간 나라를 다스렸다. 주나라 호왕(무왕을 뜻함)이 즉위한 기묘년에 기자(箕子)를 조선에 봉했다. 이에 단군은 장당경(藏唐京)으로 옮겨갔다가 뒤에 돌아와서 아사달(阿斯達)에 숨어 산신이 되니 나이는 1908세였다고 한다.”

 

 

 

 

단군신화는 신화가 아니다

, 이제 우리가 지금까지 검토해왔던 각종 고고학 자료를 토대로 복원한다면 아주 흥미로운 시사점을 끌어낼 수 있다. 즉 주나라 무왕이 은()을 멸한 시기는 BC 1046년쯤이다. 물론 이 연대는 최근 중국 측의 하··주 단대공정으로 결정된 것으로 100% 확신할 수 없다.

 

어쨌든 그쯤(BC 1046)을 기준으로 단군왕검이 나라를 다스렸다는 1500년을 더한다면 BC 2600년쯤이 된다. 이게 다가 아니다. 단군 이전, 즉 환인과 그 아들 환웅, 그리고 곰이 변해 사람이 된 웅녀(熊女)의 시대를 감안해보자. 즉 곰신앙이 움텄고, ··인을 소통시키는 무인(巫人)이 지배하는 제정일치 사회가 개막하기 시작한 훙산문화(紅山文化·BC 4500~BC 3000)시대를 연상할 수 있다.

 

정리하자면 환인환웅웅녀단군 시대, 즉 훙산문화를 모태로 단군조선, 즉 고조선이 성장했다. 여기서 단군은 물론 지도자, 즉 제정일치 사회의 우두머리라는 뜻이며,  단군 가운데 왕검이라는 분이 단군조선의 시조라는 뜻일 게다.

 

그런데 BC 1600년쯤 단군조선 영역에서 출발한 동이족의 일파(성탕·成湯)가 중원의 하나라를 멸하고 은()을 세웠다. 그러니까 동이족이 험준한 옌산(연산·燕山)을 사이에 두고 남북으로 천하를 양분했다는 얘기가 된다. 그러다 중원의 동이족 나라인 은()이 주()의 침공을 받아 멸망하자 은()의 왕족인 기자(箕子)가 이른바 종선왕거(從先王居), 즉 선조의 본향으로 돌아갔다는 얘기다.

 

 

 

발해연안식 청동검이 출토된 난산건 유적 전경. 웬일인지 표지석에는 난산건 유적임을 알리는 글자가 훼손돼 있다. | 이형구 교수 촬영

 

물론 옌산 북부, 즉 발해연안엔 고조선, 즉 단군조선이 존재하고 있었을 것이다. 고조선이 단군왕검 이후 1500년 동안 존속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이 이를 입증해준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단군신화가 단순한 신화가 아니라 ···결을 갖춘 제국의 흥망성쇠를 담고 있는 역사라는 신화학자 양민종 교수(부산대)의 말이 새삼 떠오른다.

 

이것은 중원 하나라(BC 2070~BC 1600) 시절 발해연안에 하나라의 규모와 맞먹는 거대한 나라가 존재했다고 인정한 쑤빙치(소병기·蘇秉琦) 등 중국학계의 견해와도 일치한다.

 

식민사관에 따라 단군신화를 신화로만 보았던 것이 잘못이지. 단군신화를 역사로 보고 연구해야 했는데 그게 안됐어요.”(이형구 교수)

 

그렇다면 기자(箕子)가 종선왕거, 즉 선조의 본향으로 돌아왔을 때 단군조선과는 어떤 방식으로 조화를 이뤘을까. 다시 삼국유사로 돌아가면 주나라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하자 단군은 장단경으로 옮겨가~아사달에 숨어 산신이 됐다는 내용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고도로 발전한 은()의 문화로 무장한 기자족은 지금으로 치면 엘리트 계층이었겠지. 갈등이 왜 없었겠습니까. 기자가 오자 단군이 장단경으로 옮겨가 결국 산신이 되었다는 것은 정권이 기자에게 돌아갔다는 뜻이 아닌가. 이때 단군조선과 기자조선이 교체되는데 우리는 기자가 단군과 같은 동이족이라는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이형구 교수)

 

물론 갈등도 있었겠지만 같은 핏줄인 토착세력(고조선)과 은()의 유민(遺民)들이 곧 조화를 이루며 살았을 것이라는 얘기다. 그 답을 우리는 고고학 발굴성과로 풀어야 한다.

 

난산건에서 쏟아진 청동무기들

1958, 랴오닝성 닝청셴(寧城縣·지금은 네이멍구 자치구) 쿤두허(坤都河) 상류에 있는 난산건(남산근·南山根)에서 한 기의 무덤이 확인된다. 석곽이 있고 그 안에 목관의 흔적이 남아있는 무덤에서는 모두 71점의 청동기가 확인됐다. 5년 뒤인 63 6, 한 농부가 그 무덤에서 서쪽으로 120m 떨어진 곳에서 2기의 무덤을 더 발견한다. 그로부터 다시 3개월 뒤인 914. ·중 합동 고고학 발굴대가 이곳을 찾는다. 북한과 중국의 합동발굴이었다.(경향신문 2007 128일자 코리안루트를 찾아서-랴오허 동서쪽의 적석총들 참조)

조사결과는 무척 흥미로웠다.

 

전형적인 은말주초의 청동예기는 물론 토착(고조선)세력, 그리고 중국 북방의 영향을 받아 만든 청동기들이 쏟아진 겁니다. 청동솥의 다리가 날씬해지고 길어졌다든지, 은말주초의 전형적인 모습과는 다른 항아리(雙聯罐·작은 단지를 이은 항아리), 뼈로 만든 구슬(骨珠), 금으로 만든 고리(金環) 등이 나왔다든지.”(이형구 교수)

 

두 번째 중요한 변화는 무기의 다량 출토이다. 청동투구와 청동꺾창, 청동화살촉, 청동검, 청동도끼 등이 쏟아진 것이다. 은말주초의 청동기가 조상신, 하늘신에 대한 제사 위주의 예기였다면 난산건 유물은 다양한 지역 문화가 융합된 예기와, 전쟁에 쓰인 무기가 공반된 것이 특징이다. 무엇을 말해주는 것일까.

 

난산건 문화(샤자뎬상층문화에 해당) BC 9~BC 7세기 사이에 유행한 문화예요. 그런데 잘 살펴봅시다. 춘추전국 시대의 도래를 검토해야죠.”(이형구 교수)

 

춘추전국시대라. 다시 문헌을 검토해보자. 무왕의 건국(BC 1046) 이후 170년 가까이 이어지던 서주는 10대 여왕(·재위 BC 877~BC 841)에 이르러 중대한 고비를 맞는다. 여왕이 부정부패의 화신으로 정권을 농단한 영이공(榮夷公)이라는 인물을 기용한 게 화근이었다. 여왕은 듣기 싫은 직언을 금하고 비방하는 자를 죽이자 백성들은 길에서 만나면 눈짓으로 의사를 표현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자 충신 소공(召公)이 간했다.

 

 

 

난산건 유적에서 출토된 뼛조각. 짐승·사람문양과 함께 2대의 수레 문양이 새겨져 있다.(왼쪽) 그런데 이 수레 문양은 한자(漢字) 수레 거()’자의 원형을 표시하는 상형문자들과 흡사하다.()

 

백성의 입을 막는 건 물을 막는 것보다 나쁩니다. 물이 막혔다 터지면 피해가 더 많지 않습니까. 치수하는 자는 수로를 열어 물을 흐르게 하고, 백성을 다스리는 자는 백성들을 이끌어 말을 하게 합니다. 백성이 말하는 것은 속으로 많이 생각한 후에 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왕은 듣지 않았다. 3년 뒤 마침내 백성들이 난을 일으켜 여왕을 습격했다. 여왕은 체(·산시성 훠셴:)로 달아났다. 이때부터 소공과 주공(周公·무왕때 주공의 둘째아들 후손) 등 두 재상이 나라를 14년간 다스리니 그 시대를 공화(共和)라 한다. ‘공화정의 시효라 할 수 있다. 두 재상은 14년 뒤 성장한 여왕의 아들 선왕에게 왕위를 물려주었지만 39년 뒤 다시 강족(姜族)의 침략을 받고 대패한다.

 

이때부터 천하에 혼란의 조짐이 보인 것이다. 그러다 선왕의 뒤를 이은 유왕(幽王·재위 BC 782~BC 771)에 이르러 파국을 맞는다.

 

엄연히 정처(왕후·申侯의 딸), 그 사이에 낳은 태자(의구·宜臼)가 시퍼렇게 살아 있었는데, 그만 애첩 포사()를 너무도 사랑한 것이다. 그것도 모자라 포사를 정처로, 그가 낳은 아들 백복(伯服)을 태자로 삼으려 획책한다.

 

그런데 포사라는 여인은 용()의 타액이 주나라 후궁의 몸에 들어가서 태어난 인물. 용의 타액은 주나라의 손에 망한 포나라 선왕(先王)의 변신물이라 하는데, 일설에는 망한 포나라의 복수를 위해 일부러 주 유왕의 품에 들어갔다고 한다.

 

어쨌든 유왕은 좀체 웃지 않는 포사의 환심을 사려 무진 애를 썼다. 그러다가 한가지 묘수를 알아냈으니 바로 봉화를 올리는 것이었다. 봉화를 피우자 제후들이 난리가 난 줄 알고 뛰어왔다가 거짓인 줄 알고 투덜댔다.

 

그런 제후들의 모습에 포사가 깔깔거리며 웃지 않는가. 유왕은 옳다구나, 이거다 싶어 계속 봉화를 피웠다. 마침내 제후들은 짜증을 내며 봉화를 올려도 달려오지 않았다. 비극의 서막이었다. 유왕이 포사와 백복을 왕후와 태자로 삼으려 하자 정처인 신후는 증()나라와 견융(犬戎)과 연합하여 유왕을 공격했다. 유왕이 봉화를 올렸으나 제후들은 양치기 소년을 믿지 않았다.

 

유왕은 결국 죽었고, 제후들은 원래 태자인 의구를 왕위에 세웠으니 그가 바로 평왕(平王·재위 BC 771~BC 720)이다. 평왕은 BC 770년 오랑캐의 침략을 피해 낙읍(洛邑·뤄양 洛陽)으로 동천했다. 바야흐로 동주(東周)시대의 개막이다.

 

청동단검의 전통

하지만 천자의 권위는 회복 불능 상태로 빠졌고, 천하는 제후들간 약육강식의 시대로 접어든다. (), (), (), ()이 강대해졌고, 정권은 방백(方伯·제후들의 우두머리)에 의해 좌우된다. 춘추전국시대가 도래한 것이다.(사기 주본기)

 

 

 

난산건 출토 청동솥(). 은말주초의 전형적인 청동솥과 비교하면 다리가 길고 날씬한 편이다. 고조선 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때 무려 170여개의 소국이 난립했다고 합니다. 대혼란기에 접어든 것이죠. 천자를 모시는 예악(禮樂)이 무너지고, 힘이 천하를 지배하는 전쟁의 시대가 시작된 것입니다.”(이형구 교수)

 

이 교수가 예로 든 것이 바로 서주말 동주초의 유적인 뤄양(洛陽) 중저우루(中州路)의 시궁돤(西工段) 주나라 무덤이다.

 

“260기의 무덤 가운데 청동예기를 부장한 무덤이 9기인데, 청동병기를 수장한 예는 19기가 됩니다. 이것은 청동예기 시대에서 병기시대로 옮겨졌음을 알려주는 단적인 예가 됩니다.”

 

바로 여왕~평왕 사이,  BC 9~BC 8세기 무렵에 대혼란의 시기, 즉 전쟁의 시기에 접어들었음을 보여주는 문헌과, 중원(뤄양)은 물론 발해연안(난산건)에서 확인할 수 있는 고고학 자료가 일치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발해연안 난산건에서 확인된 병기 가운데 가장 중요한 유물은 바로 발해연안식 청동단검’(이른바 비파형 청동단검)이다.

 

발해연안식 청동검이야말로 고조선 청동기문화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유물이지. 이런 형태의 청동단검은 난산건을 필두로 랴오닝(遼寧)성 차오양(朝陽젠핑(建平진시(錦西푸순(撫順칭위안(淸原) ·뤼다(旅大) 등에서 쏟아집니다. 한반도에서는 평양시 서포동을 비롯해 황해북도 연안군 부흥리 금곡동과 충남 부여군 송국리, 전남 여천시 적량동 등에서도 보입니다.”

 

그런데 또 재미있는 사실은 이런 청동단검이 석관묘와 석곽묘, 그리고 적석총 등 모두 우리의 전통 묘제에서 확인된다는 점이다. 또한 난산건에서 확인된 유물 가운데는 역시 동이의 전통문화의 하나인 복골(卜骨)이 있다는 것이다. BC 9세기부터 시작된 이 청동단검의 전통은 한반도로 이어져 급기야 한국식 세형동검이라는 독특한 청동기 문화를 낳는다.

 

한반도 청동기 문화의 대표격인 이 세형동검이 출현한 시기는 BC 4세기 무렵이다. 결국 발해연안식 청동단검과 세형동검은 샤자뎬 하층문화~은말주초의 청동기 문화, 즉 고조선이라 토대에서 창조된 독특한 문화인 것이다. 이기환 선임기자

(출처;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804111810025&code=210000#csidx6e967149e86140f891abfb6528f9ca4)

 

 

5.18 요령 십이대영자유적(遼寧十二臺營子遺蹟); 2800년 전~2300년 전(BC 9CBC 4C)

중국 요령성 조양시 조양현(朝陽顯) 십이대영자(十二臺榮子)에 있는 청동기시대 앞트기돌덧널무덤 등이 발굴된 무덤군.

 

이 유적은 십이대영자 남쪽 약 600m의 백산(柏山) 북쪽 밑의 고지상에 있다. 1958년 관개작업 중에 3기의 무덤이 발견되었으나, 2기는 이미 파손되었고 1(1호묘)만 발굴하였다. 부장유물로 청동단검 및 잔무늬거울[多鈕細紋鏡]을 출토하였다.

 

1호묘의 무덩방은 자연괴석과 자갈돌로 네 벽을 6층으로 쌓고, 묘바닥에는 자갈돌을 깔았으며, 무덤문이 서쪽으로 난 앞트기식돌덧널무덤[橫口式石槨墓: 돌덧널무덤의 세벽만을 쌓고 한쪽 벽으로 출입한 후 마지막으로 밖에서 벽을 쌓아 마무리하는 무덤형식]이다. 무덩방은 길이 180, 너비 100, 높이 120이고, 지표 밑 2m에 천장이 있다. 무덩방 내에서는 부부합장으로 보이는 인골 2구가 머리를 서쪽으로 향하고, 돗자리가 깔린 목판 위에 있었다.

 

이곳에서 출토한 부장품은 대부분 청동기이다. 2점이 발굴된 청동단검은 같은 형식으로 전체 길이 35.6, 날부분 길이 30.7이다. 날은 비교적 얇으나 예리하고, 자루부분에 마사(麻絲) 흔적과 목질이 있어 자루로 나무가 쓰인 것을 알 수 있다. 잔무늬거울도 2개가 확인되었다. 그 조형·무늬·크기가 똑같고 지름 20.4, 두께 5㎜∼6이다. 뒷면의 가장자리 가까이에 3개의 꼭지가 3각형으로 배열되어 있다. 그 밖에 Y자동구(銅具도끼··()와 같은 청동기가 있었다.

 

2호묘는 1호묘의 남쪽으로 약 5m에 있다. 묘실은 길이 230, 너비 100, 높이 70이고, 구조 및 부장품은 1호묘와 비슷하다. 특히, 잔무늬거울은 뒷면에 4개의 꼭지가 방형으로 배치된 점이 특이하다.

 

3호묘는 2호묘의 서쪽으로 약 10m에 있다. 이곳에서 출토한 잔무늬거울은 뒷면 전체에 기하학무늬가 있고, 3개의 꼭지가 자형으로 배열되어 있다.

 

여기에서 출토한 청동검과 잔무늬거울은 요령지역뿐만 아니라, 한반도와 연해주 남부 일대에도 분포한다. 이곳의 돌덧널무덤은 남산근유적(南山根遺蹟)과 같은 구조로 대전 괴정동, 아산 남성리, 부여 연화리 등지의 돌덧널무덤과 일치한다.

 

이 유적의 특징에 대해서는 서로 반대의견이 주장되었다. 한 쪽에서는, 십이대영자유적을 중심으로 대·소릉하(·小凌河) 유역의 청동기문화는 요서지방 전체로 보았을 때 유물상의 차이점만 보일 뿐, 문화적 특징에서는 차별성을 밝히기 어렵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십이대영자문화를 하가점상층문화(夏家店上層文化)의 한 지방유형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반대로 이 지역의 문화는 하가점상층문화와는 다른 독립적인 문화로 봐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이 유적은 이지역 주변에서 발견되는 특징적인 비파형동검과 잔무늬거울을 공반한다는 점을 특징으로 한다. 그것이 바로 한국의 청동기문화·고조선과 연결될 수 있는 중요한 점이다. 비파형동검과 잔무늬거울 등은 한반도 전역에 걸쳐 고루 출토하고 있기 때문이다. 십이대영자유적은 축조 주체가 누군가에 따라 고조선의 초기 중심지가 평양인지, 요서지방인지 바뀔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라 할 수 있다.

 

또 한편 이 무덤이 춘추시대 말기 혹은 전국시대에 해당하며, 동호족(東胡族)이 주인공일 것으로 추정하였다. 이 무덤이 처음 보고된 1960년대만 해도 서기전 65세기에 동호라는 북방민족의 유적이라는 견해가 압도적이었다. 그러나 1980년대부터는 서기전 8세기경에 고조선이 남긴 유적이라는 견해가 힘을 얻고 있다.

 

의의와 평가

최근 연구자들은 십이대영자문화를 요하 이동, 곧 요동의 청동기문화와 관련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들은 요동지방 청동기문화의 담당자를 예맥(濊貊)으로 본다. 십이대영자문화는 요동비파형동검문화와 더불어 예맥청동기문화로서의 성격을 하고 있다.

 

이와 같은 십이대영자문화는 기원전 9세기 요서 서북부에서 처음으로 유물 복합이 형성된 이후 기원전 8세기 요서 대부분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서기전 7세기에는 의무려산(醫巫閭山)과 유하(柳河)유역이 비파형동검문화권에 새로이 포섭되었으며, 서기전 65세기에는 요하 이동으로 직접 확산되는 동시에 객좌(喀左심양(沈陽)으로 분화하였다.

 

그리고 서기전 54세기에는 요하 양안에 걸쳐 있던 정가와자유형의 매개 역할로 요령 전 지역에 통합적인 네트워크가 형서되었다. 즉 요령 전역이 완전한 하나의 문화 단위를 이루게 되었다. 요령 지역의 비파형동검문화는 길림과 한반도의 청동기문화에도 큰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서북한의 세형동검문화가 결국 요령 지역 비파형동검문화의 후계문화라는 것은 중요한 사실이다. 집필 (1996) 강인구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Contents/SearchNavi?keyword=%EC%9A%94%EB%A0%B9%EB%82%A8%EC%82%B0%EA%B7%BC%EC%9C%A0%EC%A0%81&ridx=3&tot=1263)

 

5.19 울산 검단리 유적(蔚州 檢丹里 遺蹟); 2800년 전(2880±70 B.P.)

울산광역시 울주군 웅촌면 검단리 산 62번지 일대에 위치한다. 울산 칸트리클럽 증설공사구역에 포함되어 1990년 부산대학교박물관이 약 3개월간 발굴 조사하였다. 조사결과 집자리住居址, 환호(環濠), 고인돌支石墓과 함께 삼국시대와 조선시대의 유구도 확인되었다. 회야강(回夜江)과 곡천천(曲泉川) 사이의 산 능선 중앙부에서 서쪽으로 뻗어 나온 낮은 구릉의 정상부와 서남쪽 사면에 해당한다.

 

집자리는 대체로 등고선에 평행하게 배치되며 평면 형태는 방형과 장방형이 많다. 기둥구멍柱穴의 배치를 보면 방형은 4주식(柱式), 장방형은 6주식의 구조이며, 화덕자리爐址는 중앙에서 한쪽으로 치우친 곳에 1기가 설치되었다. 집자리는 유구의 중복관계와 공간배치를 통해 환호의 설치를 기준으로 하여 3단계로 나누어진다. 기는 환호 설치 이전의 취락, 기는 환호취락, 기는 환호가 폐기된 후의 취락으로 각 단계는 시기 폭이 적을 것으로 추정된다.

 

기는 집자리 26기가 확인되었는데, 집자리의 면적은 14를 초과하지 않는 중·소형이 많다. 4호는 크기가 380×()490×20의 장방형이다. 화재로 폐기된 집자리는 환호가 지나가는 곳에 위치하고 있어 환호 설치 시 의도적으로 폐기했을 가능성이 높다. 토기는 일부 빗금무늬斜線文도 있지만 구멍무늬토기孔列土器가 많으며, 깊은바리모양토기深鉢 가운데 손잡이把手가 부착된 것이 몇 점 있다.

 

기는 집자리 17기가 확인되었는데, 1단계에 비해 규모가 크다. 5호는 크기가 364×378×50의 방형이고, 31호는 ()555×392×40의 장방형이다. 주거영역(住居營域)은 환호의 안과 밖으로 나누어지는데, 환호 안은 집자리 6, 망루로 추정되는 굴립주건물지(掘立柱建物址) 1기와 주거구역과 떨어진 곳에 위치하여 제사용(祭祀用)으로 추정되는 2기의 도랑으로 이루어져 있다. 출토된 토기는 구멍무늬토기는 소수만 남고 짧은빗금무늬와 횡선무늬橫線文가 증가하며, 붉은간토기丹塗磨硏土器와 손잡이달린깊은바리모양토기把手附深鉢形土器가 증가한다.

 

기는 집자리 37기가 확인되었는데, 이전에 비해 집자리의 수도 많아지고 분포범위도 확대되는 현상을 보여 이전 단계에 비해 인구의 증가를 예상할 수 있다. 환호가 폐기된 후 구릉의 정상부와 경사면의 두 그룹으로 주거영역이 구분되며 대형과 소형집자리 간의 격차도 심해진다. 9호는 크기가 548×360이고, 29호는 552×372×28의 장방형이다. 출토유물은 구멍무늬토기는 소멸되고 기부터 유행한 짧은빗금무늬와 횡선무늬가 지속되면서 손잡이달린깊은바리모양토기는 더욱 증가한다. 반달돌칼半月形石刀, 홈자귀有溝石斧, 돌낫石鎌 등 농경문화와 관련된 석기의 종류와 수량이 가장 많다.

 

환호는 능선을 따라 타원형상으로 둘러져 있는데, 규모는 총 연장 298m로 남북에 각 1개소의 출입구를 기준으로 장경 118m, 단경 70m이다. 환호 안쪽에는 집자리, 굴립주건물, 도랑, 구덩유구竪穴遺構가 있으며, 바깥쪽에는 1520m정도 떨어져 집자리와 도랑 외에 3기의 무덤이 있다.

 

무덤은 고인돌支石墓 2기와 돌덧널무덤石槨墓 1기가 있다. 고인돌 1호는 덮개돌上石 크기가 240×132×32이며 고임돌支石이 있다. 덮개돌이 뚜껑돌蓋石을 겸하고 지하에 매장시설을 마련하지 않은 지상식(地上式) 고인돌로 추정된다. 3호는 덮개돌 주위에 석열(石列)을 돌려 묘역(墓域)을 표시하고, 덮개돌 아래에 깬돌을 설치하여 돌덧널의 역할을 한 유사석곽형(類似石槨形)의 지상식이다. 유물은 출토되지 않았다. 무덤구역을 주거구역과 의도적으로 분리해서 축조한 점으로 보아 영역의 구분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환호의 완전한 모습과 그와 관련된 마을의 구조가 확인된 유적으로서 이 후 본격적인 환호취락 유적 조사의 시발점이 되었다. 방사성탄소연대 측정결과는 22 2830±100 B.P.(보정연대 B.C. 880), 59 2880±70 B.P.(보정연대 B.C. 930) 101 2660±100 B.P.(보정연대 B.C. 710)이다. 사적 제332. (배진성)

(출처; 한국고고학 전문사전(청동기시대편),

http://portal.nrich.go.kr/kor/archeologyUsrView.do?menuIdx=796&idx=1484)

 

2016 11 2일자 동아일보 기사 [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19> 울산 검단리 유적 발굴한 안재호 동국대 교수

 

국내 첫 발굴 환호  청동기문화 한반도 전래설 밝혔다

지난달 26일 울산 검단리 유적. 10분 정도 올라갔을까, 구릉 위로 평탄한 잔디밭이 넓게 펼쳐졌다. 인위적으로 흙을 파내고 땅을 고른 흔적이 역력했다. 안재호 동국대 교수(62·고고학) 지금 우린 청동기시대 마을 위에 서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구릉 서쪽에는 강이 흐르고 북쪽과 동쪽은 산으로 막혀 취수(取水)와 방어에 유리한 곳이었다.

 

 

 

1990년 당시 촬영한 울산 검단리 유적 발굴 현장. 사각형의 주거지 유구 주변을 원형으로 감싼 환호가 보인다. 안재호 교수 제공

 

바로 이 잔디밭 아래 지금으로부터 3000년 전에 조성된 청동기시대 환호(環濠)가 묻혀 있다. 1990년 안재호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발굴한 환호다. 환호란 선사시대 마을 경계를 구분하거나 적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외곽을 둘러싼 도랑을 말한다. 청동기시대 후기가 되면 잉여 생산물을 놓고 집단 간 갈등이 벌어지는데, 환호는 이때 방어수단으로 만들어졌다. 고고학자들은 환호가 계급 발생이나 초기 국가 형성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고 본다.

 

 일본 청동기문화 한반도 전래 입증

이쯤에서 끝나야 하는데 거참 이상타.”

 

1990 3월 초순. 안재호는 조사원 동진숙(현 부산시청 연구관), 이현주(정관박물관장)와 함께 청동기 주거지를 발굴하면서 의구심이 생겼다. 주거지라면 일정 범위에서 끝이 보여야 하는데 흙을 걷어낼수록 유구의 범위가 오히려 넓어지는 양상이었다. 발굴 경험이 많은 그도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아래쪽 유구도 상황이 비슷했습니다. 그때 혹시 두 지점을 연결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얼핏 스쳤어요.”

 

그의 직관은 적중했다. 유구를 이어보니 휘돌아나가는 너른 구덩이가 눈앞에 나타났다. 전형적인 환호였다. 수많은 환호가 발견된 일본이나 중국과 달리 그때까지 한반도에서는 환호가 전혀 나오지 않았다. 이 때문에 일본 학계는 자신들의 청동기문화가 한반도를 거치지 않고 중국에서 바로 넘어왔다는 주장을 폈다. 일본의 고대 철기문화도 삼한이 아닌 낙랑에서 넘어왔다고 설명하는 등 가급적 한반도 도래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일본 학계의 태도가 반영된 시각이었다. 그러나 울산 검단리를 계기로 전국에서 30여 기의 환호가 잇따라 발굴되면서 일본 학계는 한반도의 영향을 부인하기 힘들게 됐다.

 

환호 발굴 직후 국내 학계의 반응은 미지근했다. 환호 안팎에서 수습된 청동기나 석기의 수량이 적었기 때문이다. 당시만 해도 유구 간 맥락을 통해 사회상을 유추하기보다 유물을 분석하는 데 집중하는 분위기였다. 반면 일본학계의 관심은 뜨거웠다. 하루나리 히데지(春成秀爾) 국립역사민속박물관 교수 등 일본 학자들이 검단리 발굴 현장을 직접 찾아와 환호의 형태부터 주거지 개수까지 세부적인 내용을 파악했다. 2년 뒤 검단리 발굴 성과는 주요 학술지인 일본 고고학 연구에 다양한 컬러 사진과 함께 비중 있게 게재됐다.

 

 한일 환호의 차이점은

검단리 환호는 주변 유구의 양상을 감안할 때 존속 기간이 불과 한 세대( 30)에 불과했던 것으로 조사됐다. 수백 년에 걸쳐 환호가 2, 3중으로 계속 확대되는 일본 환호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다. 또 일본이나 중국에 비해 환호 내부의 주거지 수가 적어 쉽게 폐기될 수 있었던 점도 특이하다. 현장을 방문한 하루나리 교수도 검단리 환호 내 주거지가 21기에 불과하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한국과 일본 환호 유적의 차이는 무얼 말해주는가. 안재호는 환호를 통한 차별화 내지 계층화보다 공동체를 하나로 인식하려는 한반도 선사문화의 특징을 보여 준다고 설명했다.

 

검단리에서의 환호 발굴은 유적층 위에 쌓인 퇴적층을 굴착기로 걷어내 전체 유구의 양상을 파악하는 데 집중한 것이 주효했다. 당시 발굴 현장에 중장비를 동원하는 건 이례적인 일이었다. 안재호는 일일이 수작업으로 흙을 걷어냈다면 둘레 300m, 면적 6000m²에 이르는 환호를 온전하게 파악하기 힘들었을 것이라고 했다.

 

그래도 돌아보면 아쉬움은 남는 법. 검단리 발굴에서 후회되는 게 있는지 물었다. “당시 환호 안에 청동기시대 사람들이 버린 각종 쓰레기들이 쌓였을 겁니다. 음식물부터 꽃가루까지 다양한 식생 자료가 포함됐을 거예요. 환호 바닥 흙에 대한 자연과학 분석을 시도했다면 마을의 성격을 규명할 만한 다양한 자료를 얻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김상운 기자

(출처;

http://news.donga.com/List/Series_70040100000214/3/70040100000214/20161102/81119267/1#csidxd0bf9bba4543b8eb7cc2e35868b86b0)

 

5.20 속초 조양동 유적(束草 朝陽洞 遺蹟); 2700년 전~2500년 전(BC 8~6세기경)

강원도 속초시 조양동 남쪽에 있는 청초호와 경계하여 양양과 연결되는 7번 국도변의 구릉 위에 위치하는 청동기시대 유적이다. 조양동 일대는 낮은 구릉과 평야지대이면서 청초호와 접하고 있어서 선사유적의 입지조건으로서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 이 유적은 한국토지개발공사의 택지개발지구로 책정되어 1992년 강릉대학교박물관이 발굴 조사하였는데, 집자리(住居址) 7기와 고인돌(支石墓) 2기가 확인되었다.

 

집자리 평면형태는 대부분 장방형(長方形)으로 장축, 단축은 각각 8.1×6.8, 12.8×6.0, 6.6×5.1, 8.9×5.8, 6.2×4.7, 10.8×6.0m 등이다. 기둥구멍(柱孔)은 대부분 집자리 네 벽의 바로 밑에서 확인되었고, 4호 집자리에서 장축의 중심선에 4개의 기둥자리가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 맞배지붕형식인 것으로 이해된다. 화덕자리(爐址)가 분명하게 확인된 것은 5호뿐이며 규모가 가장 큰 2호 집자리에서는 벽과 모서리 쪽에 3개의 좁고 긴 불 맞은 흙이 있는 홈구덩이가 확인되었다. 기둥구멍과 기둥구멍을 연결하는 홈은 강원 영동지방의 청동기시대 전기 집자리의 특징적인 시설이다. 저장구덩(貯藏穴)이는 모서리나 벽면에 접해있으며 직경 1.2m 내외의 대형과 0.5m 내외의 소형이 확인되었다.

 

7호 집자리는 민묘(民墓)로 인해 바닥의 상당부분이 파괴되었다. 출토된 토기를 보면 아가리(口緣部) 장식이 다양해서 구멍무늬토기(孔列文土器), 골아가리토기(口脣刻目土器), 구멍무늬+골아가리토기, 구멍무늬+골아가리에 이중구연과 단사선(短斜線) 장식이 함께 하는 등 경기도 여주 흔암리(欣岩里)와 제주 상모리(上摹里) 유적의 토기 출토양상과 비슷하게 나온다.

 

석기로는 간돌도끼(磨製石斧) 이외에 배 모양의 반달돌칼(半月形石刀), 이단병식(二段柄式)에 피홈(血溝)이 있는 돌검, 무경식 돌화살촉(無莖式石鏃), 돌가락바퀴(紡錘車), 숫돌(砥石) 등이 출토되었으며 토제 가락바퀴도 나왔다. 방내리(坊內里), 포월리(浦月里), 조양동(朝陽洞)은 전형적인 민무늬토기문화로 지형조건과 집자리 형태 그리고 구조도 유사하다. 흔암리(欣岩里) 유적의 연대와 비슷한 B.C. 8~6세기경의 청동기시대에 속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고인돌 2기 가운데 1호 고인돌은 덮개돌(上石)이 비스듬히 기울어진 상태로, 일부 파괴된 덮개돌은 장축, 단축, 두께가 1.94×1.3×0.19m로 소형이며 상면에 채석을 위한 정자국이 남아있다. 하부구조는 깬돌(割石)로 축조된 돌덧널형(石槨型) 무덤칸이며, 장축이 남~북 방향인 무덤칸 크기는 길이, 너비, 깊이가 1.72×0.6×0.45m 4벽 중 동벽과 남?북벽 일부만 남아 있다. 무덤칸 바닥에는 작은 깬돌과 자연석을 전면에 깔았고, 깬돌 밑에 다시 판돌(板石)을 깔았다. 출토유물로는 동벽석에 인접하여 부채꼴청동도끼(扇形銅斧) 1점과 북벽에 치우쳐 화살촉 8점이 발견되었다.

 

유물 중 동도끼는 비파형동검(琵琶形銅劍) 문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유물이며, 돌화살촉은 삼각 또는 삼각만입(三角灣入)에 가까운 형태이다. 2호 고인돌은 1호 고인돌에서 능선 위쪽으로 40m정도 올라간 구릉의 정상부에 위치하고 있는데, 덮개돌은 없어지고 하부구조만 파괴된 채로 노출되었다. 고인돌의 장축방향은 동~서 방향이고, 남은 무덤칸은 길이, 너비가 1.5×1.2m로 전체 규모의 절반 이상이 파괴된 상태였다. 바닥 처리는 잡석을 깔고 밑에는 깬돌를 깔았다. 출토유물로는 유경식 돌화살촉 3점과 삼각형 돌화살촉 1점 등 4점이 있다.

(출처; 한국고고학사전(2001),

http://portal.nrich.go.kr/kor/archeologyUsrView.do?menuIdx=792&idx=10758)

 

5.21 여수 적량동 고인돌(麗水積良洞); 2700년 전~2300년 전(BC 8C~BC 4C)

전라남도 여수시 상적마을 GS칼텍스 공장 내에 있는 청동기시대 남방식 고인돌.지석묘.

여천시 적량동은 광양만 남쪽의 영취산(靈鷲山, 510m) 북쪽 줄기의 협소한 계곡에 위치해 있다.

고인돌은 계곡 사이의 약간 높은 대지상의 선상지에 계곡과 반대방향으로 14기가 무질서하게 배치되어 있었다. 현재는 호남정유공장이 자리하고 있으며, 고인돌이 위치해 있었던 곳은 공장의 남쪽 길에 인접한 지역이다.

 

산기슭 아래의 대지에 위치한 적량동 고인돌은 상석 14기에 대한 조사를 실시했으나 4기에서만 석실이 확인되었다. 그나마 제7호만 완전하고 나머지는 파괴된 상태였다.

 

상석들은 대개 동서이열을 이루고 있었다. 그 중 5기는 괴석형 상석이고 모두 대형 지석이 고이고 있는 남방식 고인돌이었다. 완전한 제7호 고인돌은 대형 지석 6 개위에 괴석형 상석이 올려져 있는 남방식으로 석실은 할석을 34단 정도 쌓았으며, 바닥은 잔자갈이 전면에 깔려 있었다.

 

고인돌 주위에서 석실 26기가 군집되어 발견되는 등 원래는 30여 기의 고인돌이 분포하고 있었다. 이 석실들은 판석으로 짜맞춘 석관형이 3, 할석을 쌓거나 세운 석곽형이 23기였다. 석실의 군집상태와 방향, 적석상태에서 6개의 구역으로 나뉘어 진다. 이것은 적석이 뚜렷한 것에서 개별적인 석실군으로 변화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석실들은 뚜껑돌이 덮인 것도 있지만 대부분 파괴되거나 교란된 것이 많으며 원래 상석이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상석이 있었다 하더라도 소형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출토유물은 비파형동검 7, 비파형동모 1, 관옥 5, 석검완형이 1, 편이 2, 석촉 3, 유구석부 1, 유단석부(턱자귀) 1, 돌끌 2, 방추차 1, 옥마연석 1점 외에 무문토기편과 홍도편이 있다.

 

7호 고인돌 석실 바닥에서 출토된 완형의 비파형동검 1점은 지금까지 여타 고인돌에서 편이나 절단된, 즉 이차전용품이 출토되는 것과는 다른 것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또한 제21호 석곽에서는 파편이지만 완형으로 추정되는 비파형동검과 비파형동모, 그리고 소형 관옥 5점이 일괄로 출토되었다. 특히, 비파형동모가 확실한 유구에서 확인된 것은 처음으로 초기 청동유물에 있어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적량동 고인돌의 연대는 상한을 전형적인 비파형동검으로 보아 서기전 8~7세기로, 하한을 유구석부와 소형관옥으로 기원전 4세기로 설정할 수 있다. 그러나 중심 연대는 서기전 6~4세기를 전후한 시기로 추정된다.

 

적량동 고인돌에서 청동유물이 8점이나 출토되었다. 이러한 예는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하며 오히려 요령(遼寧)지방의 초기 청동유물 출토 유적과 비견된다. 또한 고인돌의 부장유물로 동검이 사용되고 있는 점에서 우리나라 청동기문화뿐만 아니라 고인돌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Contents/SearchNavi?keyword=%EC%97%AC%EC%88%98%EC%A0%81%EB%9F%89%EB%8F%99&ridx=0&tot=120)

 

2016 8 3일자 동아일보 기사 [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13> 여수 적량동 고인돌 발굴 이영문 목포대 교수

 

 

 

이영문 목포대 교수가 7 20일 전남 여수시 GS칼텍스 정유공장 내에 보존된 고인돌 2기 앞에서 발굴 당시를 설명하고 있다. 고인돌 무게는 각각 90t에 이른다. 여수=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비파형동검 발굴의 달인 국내 40점 중 18점을 그의 손으로

지난달 20일 전남 여수시 적량동 GS칼텍스 정유공장. 저유탱크들 사이로 나란히 선 거대한 돌덩이 두 개가 멀리서도 눈에 보였다. 덮개돌 무게만 90t에 이르는 고인돌 2. 하나는 고임돌 4개가 육중한 덮개돌을 받치고 있는 바둑판식, 다른 것은 덮개돌만 있는 개석식(蓋石式) 고인돌이다. 현대문명을 상징하는 화석연료 공장 내부에 있는 거석(巨石)은 선사시대로 시간을 되돌리는 타임머신처럼 느껴졌다.

 

이들을 직접 발굴한 이영문 목포대 교수(63)는 오랜만에 만난 자식을 대하듯 고인돌 곳곳을 살피고 어루만졌다. 그는 반경 500m 안에서 고인돌이 300기나 나왔는데 이 2기는 다른 것들보다 510배나 컸다 너무 거대해서 다른 고인돌처럼 외부로 옮기지 못하고 결국 공장 안에 남겼다고 말했다. 그는 고인돌을 바라보며 27년 전 기억을 하나씩 되살렸다.

 

 온전한 형태의 비파형동검 첫 출토

 

 

 

2009년 전남 여수시 월내동 고인돌 유적에서 출토된 비파형동검들. 동북아지석묘연구소 제공

 

선생님, 파괴된 석실에서 동검 조각 같은 게 여럿 나왔습니다.”

동검? 자네 잘못 본 거 아닌가?”

“3년 전 주암댐에서 나온 것처럼 홈이 파여 있습니다.”

뭐라고? 당장 그리로 가겠네.”

 

1989 1 18일 여수 적량동 호남정유( GS칼텍스) 공사 현장. 사업부지 확장 공사 과정에서 발견된 고인돌 25기를 조사하던 도중 이영문은 제자로부터 다급한 전화를 받았다. 대어가 걸린 느낌에 그는 서둘러 현장으로 달려갔다. 붓과 꽃삽을 잡고 조심스레 유물을 노출시키자 비파형동검(銅劍)과 비파형동모(·청동투겁창) 조각들이 보였다. 발굴에 들어간 지 사흘 만에 여수반도에서 동검과 동모가 처음 출토된 순간이었다.

 

그해 3 5일까지 발굴이 진행된 이 유적에서는 비파형동검 7점과 비파형동모 1, 관옥 5점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비파형동검이 이처럼 많이 나온 건 전례가 없었다. 더구나 고인돌에서 쪼개지지 않고 완전한 형태의 비파형동검이 나온 것도 처음이었다. 청동기시대 고인돌에는 주술적 의미를 담아 동검을 2, 3조각으로 쪼개서 매장하는 게 보통이다. 동경(銅鏡)을 깨뜨려 무덤에 부장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완형의 동검이 나온 고인돌(7)은 보존 상태도 좋았다. 당시 덮개돌과 고임돌 6개가 온전히 남아 있었다. 덮개돌을 걷어내자 작은 돌들로 채워진 지하석실이 있었고, 돌무지 아래서 동검이 나왔다. 다음은 이영문의 회고.

 

경험상 석실 깊은 데에서 나오는 동검은 오히려 보존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7호 고인돌 동검은 불과 지표로부터 20cm 아래에서 출토됐는데 상태가 훌륭했습니다. 지금도 제가 발굴한 것 중 최고로 치는 유물이죠.”

 

 팠다 하면 비파형동검 우수수국내서 가장 많이 발굴

고고학계에서 이영문은 비파형동검 발굴의 1인자로 통한다. 그의 손에서 출토된 비파형동검만 지금까지 총 18점에 이른다. 전국에서 출토된 비파형동검(40여 점)의 절반에 육박하는 숫자다. 내로라하는 고고학자들이 여수반도 고인돌에서 동검을 찾아 헤맸지만 오직 그만이 이런 성과를 거두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고인돌의 메카 전남 화순군이 그의 고향인 것도 마치 고인돌 고고학자의 운명을 예고한 것처럼 보인다.

 

고향인 화순 벽송리 마을에 고인돌들이 있어요. 어릴 때 선산을 오가면서 친척들이 이게 뭔데 여기 있느냐며 궁금해했던 기억이 납니다. 당시는 그게 고인돌인 줄도 몰랐죠. 나중에 대학에서 수업을 듣고서야 고인돌이라는 걸 알게 됐습니다.”

 

이후 그의 인생은 확 바뀌었다. 전남대 사범대를 졸업하고 1979년 해남 북평종합고 교사로 발령받았지만, 한 달 만에 사직서를 내고 전남대 박물관에 들어갔다. 고인돌 발굴에 본격적으로 매달리기 위해 안정적인 교직까지 버린 것이다.

 

고고학계는 그가 발굴한 비파형동검이 중국 랴오둥(遼東) 지방에서 북한을 거쳐 남해안 일대까지 이어지는 동북아 문명교류의 양상을 보여주는 핵심 자료라고 평가한다. 특히 고인돌에서는 세형동검만 출토되는 것으로 알려진 기존 학설을 깰 수 있었다.

 

앞으로 풀어야 할 과제를 묻자 그는 청동기시대 당시 여수 일대에서 고인돌을 쌓은 집단들의 생활유적을 찾는 것이라고 답했다. “다양한 비파형동검들이 모두 외부에서 전래됐다고는 보지 않습니다. 이것들을 여수에서 직접 제작했던 장소가 분명 어딘가 있을 겁니다.” 김상운 기자

(출처;

http://news.donga.com/List/Series_70040100000214/3/70040100000214/20160803/79533967/1#csidx66bf4c4f721f5b8881a7ded668f59be)

 

5.22 연해주 바라바시 철기가공작업장; 2600년 전(BC 75C)

2008 3 27일 서울신문 기사 한반도 철기문화 새 유입통로 발견

 

·러 국경서 철기가공작업장 발굴

·러 국경에서 블라디보스토크 쪽으로 70 떨어진 러시아 바라바시 마을에서 초기철기시대인 BC 75세기의 철기가공작업장이 발굴됐다.

 

 

 

 

그 동안에는 중국에서 BC 5세기에 이르러서야 철기가 본격적으로 사용됐다는 점 때문에 동아시아의 철기문화는 BC 4세기 이전으로 올릴 수 없다고 보는 것이 통설이었다.

 

따라서 이번 발굴 결과는 동아시아의 철기가 중국에서 단선적으로만 이동한 것이 아니라 비중국적인 또 하나의 철기 전통이 존재했음을 보여 준다.

 

국립 부경대 한·러 국경지역 선사유적발굴단은 지난해 67월 연해주 남부 바라바시 마을의 주거지를 조사했다. 그 결과 쇠도끼와 쇠화살촉을 비롯한 9점의 철기와 토기를 비롯하여 2000점 남짓한 유물을 찾아냈다.

조사 지역에서 400m 200m 떨어진 지점에서는 각각 발해유적도 발견되어 이 유적이 한반도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

 

바라바시 유적에서 돌도끼는 전혀 발견되지 않아 눈길을 끌었다. 반면 철기 유물은 대부분이 쇠도끼와 쇠도끼의 파편이어서 이 시기에 이미 돌도끼의 역할을 쇠도끼가 대체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바라바시 유적이 속한 얀콥스키문화는 한반도의 고인돌문화와 함께 석검문화권으로 이번에도 석검이 나왔다. 동반 출토된 반월형석도도 동아시아에 폭넓게 분포하는 유물로 한반도와 관련성을 보여 준다.

 

러시아 고고학계가 연해주지역 철기시대의 기원을 BC 9세기 이전으로 올라갈 수 있다고 본 것은 이미 1950년대 후반이다.A P 데레비얀코 러시아과학원 시베리아분소 고고민족학연구소장은 중앙아시아에는 이른 시기에 철기가 유입되었고, 청동기를 거치지 않은 채 일찍부터 철기를 썼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남규 한신대 교수는 이번에 출토된 철기가 회주철로 중국보다 적어도 23세기가 빠르다고 보았다. 야철사에서 주철은 BC 5세기에 중국에서 처음 등장한다는 것이 정설로, 흑연을 섞어서 철을 만드는 회주철은 백주철보다 발달된 기술로 중국에서는 BC 2세기에 등장하여 BC 1세기에 본격적으로 퍼졌다는 것이다.

 

한편 이번에 확인된 철기작업장은 장인들이 단기간 철기를 만들고 시설을 고의적으로 파괴한 뒤 다른 지역으로 떠난 것으로 추정됐다. 이후 이 지역의 발해나 여진의 대장장이들도 자신들의 시설을 완전히 없애고 이동하여 노하우의 유출을 방지했다고 한다.

 

이번 발굴조사의 단장을 맡은 강인욱 사학과 교수는 이른바 동북공정에 대한 우리 학계의 대응은 중국이 제공하는 자료를 재해석하는 수준에 그치고 있다.”면서 연해주 지역의 선사문화 조사는 비중국적인 지역적 전통을 부각시켜 동북공정에 좀 더 발전적이고 합리적인 대응을 가능하게 할 것이라고 말했다.

 

부경대 발굴단은 올 상반기를 목표로 정식 보고서를 작성하고 있으며, 보고서 발간에 앞서 대략적인 발굴 내용을 고고학 전문 계간지 한국의 고고학 봄호에 실었다. 서동철 문화전문기자

(출처;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080327023006)

 

5.23 홍천 철정리유적서 BC 7세기 철기유물출토; 2600년 전(BC 640-BC 620)

2007 10 21일 연합뉴스 기사 BC 7세기 철기유물 강원 홍천서 출토

 

 

 

 

"철기시대 개막 앞당길 획기적 자료"

기원전 7세기 무렵에 제작돼 사용한 것이 확실시 되는 철기 유물이 강원도 홍천에서 출토됐다.

이는 기원전 300년 무렵에 철기가 제작, 사용됨으로써 한반도는 '초기철기시대'에 접어들었다고 보는 한국 고고학계 통설에 일대 의문을 던지게 하는 획기적 성과가 될 전망이다.

 

강원문화재연구소(연구실장 지현병)는 원주지방국토관리청이 시행하는 국도 44호선 홍천 구성포-두촌간 도로확포장 공사구간에 포함된 홍천군 두촌면 철정리 1246-16번지 일대 126509(38268)를 지난해 2월 이후 발굴 조사한 결과, 청동기시대 한 주거지에서 송곳과 같은 형태의 단조품 철기 1점을 수습했다고 21일 말했다.

 

지현병 실장은 "이 소형 철기는 무문토기가 출토된 58호 주거지에서 유물을 수습한 뒤 바닥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확인됐다"면서 "주거지 내부에서 수거한 목탄() 시료를 채취해 서울대 기초과학공동기기연구원 AMS연구실에 탄소연대 측정을 의뢰한 결과 BC 640-BC 620(BP 2540±80, BP 2500±50)이라는 연대를 얻었다"고 전했다.

 

지 실장은 "청동기시대 중기 또는 후기에 만들었다고 판단되는 주거지에서 철기가 출토된 것은 국내 최초이며, 특히 그 연대가 기원전 7세기로 확인된 것은 매우 중대한 의미를 가진다"면서 "이는 철기가 한반도에 출현한 시기를 훨씬 앞당길 수 있는 획기적 자료일 뿐만 아니라 아직까지 뚜렷한 정설이 확립되지 못한 청동기시대의 하한 연대도 결정할 수 있는 자료가 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연구소 최종모 조사3팀장과 현장책임자 김권중 연구원은 "후대에 만든 철기가 지층 변화 등으로 인해 폐기된 청동기시대 주거지에 휩쓸려 들어갔을 가능성을 두고 유적을 더욱 세밀히 검토한 결과,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으며, 주거지가 활용된 청동기시대 제품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고 강조했다.

 

이번 '철정리 유적'에서는 신석기시대 적석 유구(돌무지 흔적) 1, 청동기시대 주거지 66주구묘(周溝墓) 9지석묘 하부구조 1소형 석관묘 2, 철기시대 주거지 19, 삼국시대 석실묘 4기를 비롯한 총 230기 이상의 유구가 확인됐다.

 

이 중 청동기시대 대형 주구묘는 국내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독특한 묘제(墓制)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주구묘란 도랑처럼 땅을 파 사방으로 두른 무덤으로 이번 철정리 유적에서는 이런 주구가 평면형태 기준으로 볼 때 모두 장방형이었다.

 

이 중 2호 주구묘는 길이가 무려 43.28m에 이르지만(폭은 3.96m) 훼손된 부분을 감안하면 원래 길이는 45m 가량으로 추정된다고 조사단은 말했다.

 

이 외에도 철정리 유적에서는 한강 유역 한반도 중부지방 철기시대 문화층에서만 독특하게 출현하는 평면 자형과 자형인 주거지가 다수 발견되고, 그 중 일부는 벽체 시설과 부엌 아궁이를 비롯한 내부 구조가 완벽하게 남아 있어 당시 가옥 구조 해명에 결정적인 자료가 될 전망이다. 김태식 기자

(출처;

http://news.media.daum.net/culture/art/200710/21/yonhap/v18547566.html?_RIGHT_COMM=R3)

 

5.24 평창 하리 무덤유적; 2600년 전~2500년 전

연합뉴스 2016 98일 기사 평창 고분서 2500년 전 인골·비파형동검 동시 출토

 

『"청동기시대 인골 보존 사례 드물어..지역사회 유력자 무덤 추정"

 

 

 

평창 하리 무덤 유적에서 나온 인골과 비파형동검. [문화재청 제공]

 

강원도 평창의 청동기시대 중기 무덤 유적에서 국내 최초로 피장자의 인골과 비파형동검이 동시에 출토됐다.

 

문화재청은 강원고고문화연구원이 강원도 평창군 평창읍 하리 240-4번지의 개인주택 신축 대지에서 발굴조사를 진행해 길이 2.04m의 대형 석관묘에서 신전장(伸展葬, 시신을 곧게 펴 매장하는 방법)으로 묻힌 인골과 비파형동검을 함께 찾아냈다고 8일 밝혔다.

 

비파형동검은 청동기시대 무기나 제기(祭器), 무덤이나 집터 등지에서 출토된다. 그러나 청동기시대의 인골이 남아 있는 경우가 드물어 두 유물이 함께 발견된 적은 없다.

 

이에 대해 윤석인 강원고고문화연구원 기획연구실장은 "이번에 발굴된 인골은 보존 상태가 양호해 추가 연구를 통해 피장자의 키, 성별, 나이 등을 알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화장하지 않았기 때문에 DNA 분석도 가능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평창 하리 유적의 비파형동검. [문화재청 제공]

 

윤 실장은 "인골이 썩지 않고 비파형동검도 녹슬지 않은 이유는 무덤을 조성할 때 사용한 석회암 때문으로 추정된다" "피장자는 지역사회의 유력자였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인골과 함께 나온 비파형동검은 길이 26.3, 최대 폭 3.8 크기다. 매장 당시 부러뜨려 묻은 것으로 짐작되며, 형태상 비파형동검에서 세형동검으로 변해 가는 과정의 과도기적 특징이 엿보인다고 연구원은 설명했다.

 

이번에 조사가 이뤄진 평창 하리 유적에서는 석관묘 14기가 나왔으며, 그중 9기에서 매장부가 확인됐다. 인골과 비파형동검이 출토된 무덤 유적을 제외하면 모두 규모가 작은 편이며, 이들 무덤에서는 발형 토기와 마제석검, 관옥, 토기 조각 등이 발견됐다.

 

윤 실장은 "출토 유물을 보면 하리 유적이 조성된 시기는 기원전 500년 무렵으로 판단된다" "청동기시대 시신의 매장방법과 장례 풍습을 유추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라고 평가했다.

문화재청은 9일 오후 2시 설명회를 통해 발굴 현장을 공개할 계획이다. 박상현 기자

 

 

 

하리 무덤 유적 전경. [문화재청 제공]

(출처; http://v.media.daum.net/v/20160908104423235

 

동아일보 2018 2 14일 기사 평창 청동기시대 무덤 속 비파형동검 주인은 20대 여성이었다

 

강원 평창군 하리 유적 인골 분석

 

 

 

2016년 강원 평창군 하리 발굴 현장의 석관묘 내부에서 발견된 사람 뼈와 비파형동검의 모습. 한반도 청동기시대 무덤에서 두 유적이 함께 나온 최초의 발굴이었다. 2년간의 분석 결과 유골 주인이 여성인 것으로 확인돼 학계의 새로운 연구 영역으로 떠올랐다. 문화재청 제공

 

선사시대부터 고대 국가까지 사회를 이끈 리더는 으레 남성이었을 것이라는 게 상식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최근 이 같은 통념을 뒤집는 청동기시대 문화재가 출토됐다. 여성이 부족을 이끈 제사장이나 정치체제 수장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인골(人骨)이 국내 처음으로 확인됐다.

 

강원대 중앙박물관은 “2016년 강원 평창군 하리 발굴 현장에서 비파형동검과 함께 출토된 인골을 분석한 결과 인골의 성별이 여성으로 확인됐다 13일 밝혔다. 청동기시대 여성 인골이 한반도에서 출토된 적은 있으나 당시 지배층의 전유물인 동검과 함께 발견된 것은 사상 최초다. 고고학계와 고대사학계에선 청동기시대의 정치체제에 대한 재접근이 필요할 만큼 획기적인 성과로 평가하고 있다.

 

 

 

강원 평창군 하리 유적에서 출토된 청동기시대 비파형동검. 문화재청 제공

 

이 인골은 강원고고문화연구원이 진행한 2016년 발견 당시부터 학계의 비상한 관심이 모아졌다. 비파형동검과 함께 출토됐기 때문이다. 이전까지 청동기시대 무덤에서 인골과 동검이 따로 발견된 적은 있으나 한반도에서 두 유적이 함께 나온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

 

2년 동안의 분석 결과는 예상을 뛰어넘었다. 김재현 동아대 고고미술학과 교수팀이 대퇴골 크기와 근육, 치아 등을 면밀히 분석한 결과 인골의 성별이 여성인 것으로 확인됐다. 여성의 나이는 20대 초반, 신장은 160.4cm로 추정됐다. 초기 철기시대 여성으로 알려진 경남 사천시 늑도 유골보다 10cm 이상 월등히 클 정도로 신체 조건이 좋았다.

 

청동기시대에 동검과 함께 매장하는 건 아무나 누릴 수 있는 권한이 아니다. 동검은 제례 의식을 지낼 때 이용되는 제기(祭器)로 제사장이나 정치적 지도자의 무덤 등지에서만 출토된다. 이번에 발견된 비파형동검은 길이 26.3cm,  3.8cm로 두 동강 난 채로 석관 동쪽 측면에 묻혀 있었다. 출토 동검의 양식은 비파형동검에서 세형동검으로 넘어가는 과도기 단계의 특징을 지녀 기원전 6세기기원전 5세기경 인물로 추정된다.

 

 

 

발굴 현장에서 석관묘의 덮개돌을 열기 전 모습. 강원고고문화연구원 제공

 

지금까지 한국 선사·고대사에서 여성이 제사장이나 정치 지도자였던 기록은 신라 2대 왕인 남해차차웅의 여동생 아로공주(阿老公主)가 가장 빨랐다. 김창석 강원대 중앙박물관장(강원대 역사교육과 교수) 삼국시대 초기 여성이 제사를 주관했다는 극히 적은 기록이 있지만 이보다 앞선 선사시대엔 여성 제사장이나 지도자에 대한 기록은 전혀 없다 고대 여성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시사하는 발견이라고 말했다.

 

이번 여성 인골은 한국에서 일본으로 전래한 청동기문화의 양상을 새롭게 검토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의견도 나왔다. 일본에선 청동기시대였던 야요이(彌生)시대(기원전 3세기기원후 3세기)에 여성 제사장이었던 히미코가 왕에 올랐다는 기록이 있다. 김재현 교수는 그동안 한반도의 비파형동검 등 물질 중심으로 청동기문화가 일본에 전래됐다는 것은 많이 알려진 사실이라며 이번 발견을 통해 여성의 사회 참여 등 사회·정치적인 제도 역시 일본으로 전해졌을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고 밝혔다.

 

강원대 중앙박물관은 이 같은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20일부터 평창 하리 일대에서 발굴한 석관묘와 인골, 관옥과 토기 등을 복원한 모습으로 전시한다. 김 관장은 “2018 평창 겨울올림픽을 맞아 강원도의 유구한 역사와 고대 문화를 널리 알리고 관련 연구를 촉진하는 데 크게 기여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유원모 기자

(출처;

http://news.donga.com/3/all/20180214/88668326/1#csidx38e9eebcacc0dea8d025a123cdee633)

 

5.25 요녕성 타완촌유적; 2500년 전(BC 6C)

2019 12 6일 한겨레, 강인욱의 테라 인코그니타 (16) 고조선인은 어떻게 생겼을까-

청동기에 새겨진 고조선인은 상투를 틀고 있었다

 

중국 랴오닝성 타완촌에서 발굴된 고조선 청동기 거푸집 뒷면에 새겨진 얼굴

부여 수도였던 지린시에서도 광대뼈 얼굴 출토..조상 외모 미화 반성해야

 

 

 

왼쪽부터 타완촌 출토 청동기 거푸집의 얼굴, 마오얼산 출토 부여의 금동제 얼굴, 둥퇀산 출토 부여의 금동제 얼굴. 모두 광대뼈가 튀어나와 있고 상투를 틀었다. 강인욱 교수 제공

 

조상에 대한 이미지는 사람마다 천차만별이다. 세계사의 첫 페이지는 돌도끼를 든 무식한 원시인이 장식하지만, 자기 나라의 역사는 아름다운 에덴동산으로 시작한다.

 

고대 사람들도 자신들은 신의 자식으로 표현하고 주변 사람들은 중국의 산해경에 나오는 것처럼 괴수나 짐승으로 묘사하기도 했다. 우리도 크게 다르지 않다. 고조선을 설명할 때는 산신령 같은 모습의 단군을 등장시킨다. 하지만 이는 근대에 만들어낸 상상도일 뿐이다.

 

진짜 고조선인의 얼굴은 어떻게 생겼을까. 최근 중국 랴오닝 지역에서는 고조선 사람의 얼굴로 추정되는 자료가 나왔다. 광대뼈가 나오고 작은 눈에 상투를 튼 모습은 지금의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또한, 사마천의 사기에 기록된 위만의 모습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고조선의 얼굴이 새겨진 유물은 벽화나 예술품이 아니라 당시로서는 첨단 기술의 상징이었던 청동기의 거푸집이었다. 청동을 만드는 기술자, 그리고 그들이 만든 청동기를 무기로 사용한 전사와 제사를 지내던 제사장들이 있었다. 고고학이 전하는 우리 조상의 모습은 기대와 달리 너무나 평범하다. 어쩌면 당연하다. 고조선이라는 국가를 만든 사람들은 하늘에서 떨어진 게 아니라 우리와 똑같은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상투 틀고 고조선으로 넘어온 위만

고조선 사람들의 생김새에 대한 기록은 사마천이 쓴 <사기> 조선열전에 있다. 한나라 제후 노관의 부장이었던 위만이 고조선으로 투항할 때의 기록이다. 노관은 한나라 개국공신으로 한고조 유방과 같은 마을에서 같은 날 태어난 죽마고우였다. 하지만 토사구팽이라는 한자성어처럼 한나라 통일 이후 한고조는 가신들에 대한 탄압을 시작했고, 결국 노관도 흉노로 도망쳤다. 이에 그의 부장이었던 위만은 상투를 튼 머리에 오랑캐의 옷을 입고 고조선으로 귀순해서 장군이 되었다. 이후 빠르게 자신의 세력을 규합한 위만은 쿠데타를 일으켜 고조선의 왕이 되었다. 연나라에서 활동하다가 고조선 왕이 됐던 위만의 경력 때문에 한동안 위만의 국적을 두고 중국설과 고조선설이 대립했었다.

 

물론, 당시는 진시황이 최초로 중국을 통일한 지 얼마 안 된 시점이니 중국인이라는 개념조차 없었다. 그러니 연나라에서 활동한 사람이라는 표현이 더 정확한데, 현재 베이징 일대에 있었던 연나라에는 만리장성을 중심으로 다양한 사람이 섞여 살았다. 심지어는 중앙아시아 유럽계 사람들도 살던 곳이니 혈연적인 계통에 대한 논쟁은 의미가 없다. 위만의 정체성을 엿볼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그의 상투머리와 오랑캐 옷이었다. 문맥상 상투머리와 오랑캐 옷은 곧 고조선의 풍습이라는 설이 많지만 일부에서는 상투머리가 중국 서남지역 윈난의 풍습이라는 반론도 있었다. 물론, 연나라 장수를 지낸 위만이 고조선으로 오면서 엉뚱하게 윈난 지역의 상투를 틀 리는 없다. 이렇듯 고조선의 얼굴에 대한 실물 자료가 없기 때문에 추측만 난무하던 차에 드디어 상투머리를 튼 고조선의 얼굴이 발굴되었다.

 

 

 

고조선의 대표적인 귀족 무덤인 정자와쯔 6512호 무덤. 이 무덤의 주인공이 제사를 담당했던 증거가 많이 발견됐다. 강인욱 교수 제공

 

청동기 만들던 기술자의 초상화

1990년 고조선과 고인돌의 중심지였던 중국 랴오닝성 랴오양시 타완촌이라는 곳에서 농민이 밭을 갈다가 파괴된 옛 무덤에서 비파형동검과 함께 여러 청동기와 청동기를 만드는 거푸집을 발견했다. 무덤에서 청동기와 함께 거푸집이 발견되는 이유는 이 무덤의 주인이 청동기 제련 기술을 독점했던 높은 계급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청동기는 무기와 제사에 필요한 최첨단의 기술이 집약된 기술 복합체의 결과물이었다. 타완촌 발견 이전에도 고조선과 한반도의 세형동검을 사용한 삼한 지역의 옛 무덤에서 거푸집은 자주 발견되었다. 청동 기술은 바로 그들의 강력한 권력을 상징했다.

 

그런데 타완촌에서 출토된 손바닥 남짓한 크기의 작은 도끼 거푸집에는 이제까지 발견된 거푸집과는 달리 놀라운 코드가 숨어 있었다. 바로 거푸집 뒷면에 도드라지게 새겨진 상투를 튼 2명의 얼굴이다. 그 얼굴 형태를 보면 머리카락을 말아 올려 상투를 틀었고 광대뼈가 튀어나왔으며, 코는 낮고 눈이 작았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자화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단군의 초상화 같은 뭔가 근사한 모습을 기대했다면 실망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거푸집에 새겨진 고조선 인물상은 예사롭지 않다. 돌로 만든 거푸집에 도드라지게 얼굴을 새겼다. 얼굴 부분을 제외하고 주변을 다 파내야 하는 세심한 작업을 거친 것이다. 이 거푸집 인물상은 우연히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청동 제련 기술을 관장하던 사람들이 그들의 조상이나 신을 섬기고 청동을 주조하는 의식에 사용한 것이다. 살아생전에 청동을 주조하던 사람들이 의식에 사용하고 그 주인공이 죽자 무덤에 같이 묻은 것이다.

 

타완촌 유적과 멀지 않은 선양시에는 대표적인 고조선 귀족 무덤인 정자와쯔(정가와자)가 있는데, 비파형동검을 비롯한 여러 청동기 유물은 타완촌 유물과 거의 똑같다. 같은 시대에 만들어졌다는 뜻이다. 학자들은 그 연대를 대체로 약 2500년 전으로 본다. 타완촌 유물은 1990년대에 발견됐지만 20여년간 유물 창고에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전혀 그 실체를 알 수 없었다. 다행히 2010년 새로 개관한 랴오양시 박물관의 진열실 한 귀퉁이에 진열되어 있는 것을 찾아낼 수 있었다. 고조선이 세력을 키워가던 기원전 6세기 사람들의 생생한 모습이 드디어 드러난 것이다. 진열실에는 고조선이라는 설명은 전혀 없이, 전쟁을 한 연나라 장수 진개의 거대한 동상이 있었기 때문에 내가 소개하기 전까지는 큰 주목을 받지 못했던 것 같다.

 

타완촌의 얼굴과 비슷한 모습은 내몽고 츠펑 지역에서도 발견된다. 츠펑 지역은 동아시아로 들어온 초원의 청동기가 전해진 교차로로 꼽힌다. 고조선은 당시 첨단 기술을 받아들여서 무기를 만들고 국가를 이루었음이 그들이 남긴 인물상으로도 증명된다. 그들이 만들어낸 청동기 무기를 소지한 전사 집단, 그리고 청동거울로 제사를 지내던 제사장들이 있었으니, 상투머리의 이 인물은 바로 고조선을 대표하는 사람들의 모습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상투 튼 머리, 부여로 이어지다

광대뼈가 튀어나오고 상투를 튼 사람의 모습은 고조선의 뒤를 이어 송화강 유역에서 나라를 건국한 부여인의 얼굴에서도 보인다. 부여의 수도였던 지린성 지린시의 마오얼산과 둥퇀산 출토의 인면상은 이빨을 드러낸 다소 험악한 모습이지만, 타완촌에서 발견된 고조선의 얼굴과 너무나도 흡사하다. 지금의 만주와 극동 일대에서 흔히 마주치는 사람들의 모습이기도 하다. 다소 험상궂고 무서운 얼굴인 것은 아마도 나쁜 기운을 쫓기 위한 벽사(辟邪)의 의미인 것 같다.

 

고조선의 청동 기술은 남쪽으로 전해져 남한에서도 제사를 지내기 위한 청동기들이 종종 발견된다. 전북 완주 상림리와 경북 청도 예전동 등 청동기 유적들에서는 거의 사용한 흔적이 없는 동검들이 한데 묶여서 발견된 적이 있다. 청동기를 만드는 장인들이 제사를 지내고 묻은 것이다. 얼핏 평범해 보이는 상투머리를 한 고조선인은 바로 청동기 주조 기술을 보유하고 고조선은 물론 주변의 여러 나라에도 영향을 주던, 당시 사회를 선도하던 테크노크라트였던 셈이다.

 

타완촌에서 시작해서 부여로 이어지는 인물들의 특징은 바로 고조선 사람들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던 자신들의 모습이었다. 위만이 고조선으로 귀순할 때 상투를 질끈 매고 옷을 갈아입은 것은 바로 그러한 고조선의 전통적인 모습으로 넘어온 것을 의미한다.

 

세상 모든 사람은 자신들의 조상에 관심이 많다. 그리고 자기들의 소망을 조상들의 모습을 변형시켜서 표현했다. 그런 외모에 대한 집착은 20세기에 절정을 이루어서 키, 외모, 머리 색깔로 인종의 우월함을 과시하고 심지어 죄 없는 사람들을 집단으로 죽이기까지 했다. 바로 외모의 특징으로 자신들의 우월함을 광고했던 나치들의 이야기다. 동양에서는 일본이 대표적이다. 메이지유신 이후 서양인이 되고 싶었던 일본인들은 사진을 조작해서라도 자신들의 외모가 유럽과 비슷하게 보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일본인의 조상은 유럽인이라는 주장을 하고, 그것을 근거로 한국과 중국을 차별하려는 주장이 자주 등장한다. 한국도 우리의 조상을 지나치게 미화해서 표현해온 것은 아닌지 곰곰이 생각해보아야 한다. 고고학은 언제나 우리의 조상들도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았음을 증명할 뿐이다.

 

문명을 유지하고 번성하는 데 필요한 관건은 외모의 차이가 아니라 그들이 가지고 있는 기술력과 환경에 대한 적응력이었다. 소박해 보이는 타완촌에서 발견된 고조선의 얼굴이 우리에게 주는 시사점이다.

(출처; https://news.v.daum.net/v/201912060506085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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