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와 한반도 12,000년 전~ 2,000년 전 년대기》

5.26 회령 오동유적(會寧五洞遺蹟); 2500년 전~2300년 전(BC 6CBC 4C)

북한 함경북도 회령군 회령읍에 있는 청동기시대 토기류·석기류·골각기 등이 출토된 집터.

이 지역에는 오동 유적 외에도 같은 읍내에서 성동(城東봉의(鳳儀검은개봉[黑狗峰금생(金生매지허리[沙乙峴] 등지의 유적이 알려져 있다.

 

두만강 중류 오른쪽 연안 평야지대에 있는 오동 유적은 그 중에서도 중심을 이루는 유적으로 수만 평에 달한다. 유물포함층은 선사시대층에서 역사시대층까지 형성되어 있다.

 

이 유적의 존재는 이미 일제강점기 때부터 알려져 왔으나 정식발굴은 1954년에 처음으로 시작되었고 1955년에 2차 발굴이 실시되었다.  70여 일 동안에 400 범위로 실시된 두 차례의 발굴 결과, 6기의 집터[住居址]와 작업장이 발견되었고, 유물은 토기·석기·골각기·인골(人骨)  5,000여 점이 출토되었다.

 

집터는 모두 장방형이며, 내부시설로는 기둥구멍[柱孔]과 노지(爐址석기제작장이 확인되었다. 벽재(壁材)로 쓰인 갈대와 싸리나무로 엮은 진흙덩이가 발견되었다. 집터의 크기는 확인된 것의 경우, 5.8m×4.1m, 5.2m×4.5m, 9.6m×4.5m, 8.4m×6.5m이다.

 

출토유물은 흑요석기(黑曜石器돌도끼[石斧돌끌[石鑿공이[敲石반달돌칼[半月石刀돌가락바퀴[石製紡錘車숫돌[砥石골검(骨劍뼈살촉[骨鏃골제시문구(骨製施文具뿔괭이·치아제장식품(齒牙制裝飾品) 등의 석기·골각기와 다량의 토기류이다.

 

특히, 토기는 갈색토기·갈색간토기[褐色磨硏土器적색간토기·흑색간토기·젖꼭지손잡이토기[乳頭把手土器] 등 다양하다. 갈색간토기적색간토기흑색간토기젖꼭지손잡이토기의 순서로 시기의 차이를 보인다.

이 밖에 주거지 안에서 불에 탄 사지골(四肢骨지골(指骨치아 등의 인골이 발견되었다. 또한 표토층에서는 주조한 투겁도끼[鑄造銎斧]가 채집되었다.

 

의의와 평가

이 유적은 청동기는 발견되지 않았으나 토기·주거지·석기 등의 형식으로 보아, 서기전 6세기서기전 4세기에 걸치는 장기간의 청동기시대 취락의 성격을 띠며, 이어진 철기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평가된다. 집필(1997) 노혁진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Contents/SearchNavi?keyword=%ED%95%A8%EB%B6%81%ED%9A%8C%EB%A0%B9%EC%98%A4%EB%8F%99&ridx=0&tot=140)

 

5.27 부여 송국리 유적; 2500년 전~2400년 전(BC 6C ~ BC 5C)

충청남도 부여군 초촌면에 있는 청동기시대 집터와 돌널무덤·목책시설 관련 마을터. 취락유적. 사적.

1976 12 31일에 사적 제249호로 지정되었다. 1975년 국립중앙박물관의 발굴조사에서 그 존재가 알려져 이후 1997년까지 여러 차례의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지표조사에서 나타난 결과를 토대로 45에 걸치는 넓은 지역에 분포되어 있는 대규모 취락유적임이 비파형동검(琵琶形銅劍)이 출토된 돌널무덤(石棺墓)과 함께 확인되었다. 유적의 입지 조건은 들판을 내려다 볼 수 있는 구릉지역으로 적어도 100여 기 이상의 집자리(住居址)와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마을을 둘러싼 환호(環濠)와 목책시설(木柵施設)이 확인되고 있다. 이 외에 송국리 유적에서는 백제·고려·조선시대에 이르는 다수의 유적과 유물이 확인되었다. 이때에는 처음으로 출현한 원형주거지와 송국리식토기 등으로 인하여 청동기시대 주거지에 많은 관심이 집중되어 있었다. 따라서 보고서도 청동기시대의 주거지 유적에 대한 것만이 발간되었으며, 백제시대 유적에 대한 현상은 기록되지 못하여 대개 청동기시대의 유적지로서만 알려져 있다.

 

발굴에서 확인된 집자리 평면은 원형(圓形)과 장방형(長方形) 2가지가 있으며 원형이 많은 편이다. 원형 평면의 집자리는 화강암 석비레층을 깊이 파고 지었으며 장방형 평면의 집자리는 깊이가 얕은 편이다. 원형 집자리 안에서는 바닥의 가운데 부분에 길이 1.0m 안팎으로 타원형(橢圓形)의 구덩이를 파고 기둥구멍(柱孔) 2개 만들어 놓았고 저장구덩이(貯藏穴)로 생각되는 구덩이가 있다. 화덕자리(爐址)를 따로 만들지는 않았다. 집터 안에서 나온 유물들을 보면 토기, 석기 등에서 다양한 모습을 보인다. 토기는 흔히 송국리식토기(松菊里式土器)’라고 부르는 민무늬토기(無文土器)들과 붉은간토기(紅陶), 검은간토기(黑陶) 등이 있다. 석기는 반달돌칼(半月形石刀), 돌화살촉(石鏃), 돌검(石劍), 가락바퀴(紡錘車), 돌도끼(石斧) 등이 있다. 특히 반달돌칼은 종류가 매우 다양하게 출토되었다. 이와 함께 불탄 쌀(炭化米)이 나와 청동기시대 쌀농사와 관련된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유적의 연대는 B.C. 65세기경으로 추정하고 있다.

 

원형 집자리는 대체로 지름 350530의 크기이며, 장방형보다 깊다. 내부에 타원형구덩이만 있는 것, 타원형구덩이 양끝에 2개의 기둥구멍柱穴이 있는 것, 그리고 타원형구덩이를 중심으로 주변에 4개의 기둥구멍이 있는 것으로 구분된다. 유물은 토기·석기 등 다양한 편이며, 특히 송국리식토기(松菊里式土器)로 분류되는 구연이 외반되고 동체부가 밖으로 둥글게 부풀다가 바닥에 이르러서 축약되어 저부에 연결된 민무늬토기無文土器가 많다. 붉은간토기丹塗磨硏土器, 검은간토기黑色磨硏土器 등도 있다. 석기는 삼각형돌칼三角形石刀, 홈자귀有溝石斧, 돌화살촉石鏃, 간돌검磨製石劍, 가락바퀴紡錘車, 돌도끼石斧 등이 있다. 이 외에 부채모양청동도끼扇形銅斧의 거푸집鎔范도 출토되었다.

 

돌널무덤은 한반도에서 비파형동검(琵琶形銅劍)이 출토된 무덤의 구조가 정식 조사된 최초의 유적으로 중요하다. 돌널무덤은 풍화암반(風化巖盤)을 파서 만들었는데, 지표아래 20정도에 길이, 너비, 두께가 2.6×1.2×0.2m 정도의 장타원형(圓形) 판돌(板石)을 덮고, 그 아래에는 35˚정도 서쪽으로 치우친 남북 방향으로 돌널이 있었다. 돌널(石棺)은 머리쪽이 넓고, 발치가 좁은 두광족협식(頭廣足狹式)으로 길이, 너비가 2.05×1.0m의 장방형(長方形)을 하고 있다. 바닥에는 널의 폭보다 좁은 판돌 3매를 가로로 깔고, 그 사이를 작은 판돌로 덮었다. 네 벽은 판돌로 세워 조립(組立)하였는데, 높이는 0.8×0.9m 정도이다. ·서벽은 45, ·북벽은 각각 12매로 구성되어 있다. 널의 내부에는 가는 모래와 자갈돌로 채웠으며, 유물은 바닥면에서 발견되었는데, 피장자(被葬者)의 왼쪽 발에 해당하는 부분에서 비파형동검과 돌화살촉, 대롱옥(管玉), 장식옥(飾玉)이 집중적으로 발견되었다. 동검의 위치로 미루어 피장자의 머리방향頭向은 북쪽으로 추정된다.

 

출토된 동검을 보면 봉부(鋒部)에서 꼬다리(莖部) 끝까지의 길이가 33.4, 등날이 봉부의 선단(先端)까지 발달하고, 등대의 중간에 돌기부(突起部)가 뚜렷하다. 날의 돌기도 크고, 하반부 양측의 날이 둥글게 팽창하여 기부 가까이에서 최대폭을 갖는다. 꼬다리 끝 한쪽에 홈이 파 있는 전형적인 비파형동검으로 비교적 이른 형식이다. 간돌검 1점은 혈암제(頁巖製)로 등날이 선단부터 자루 끝까지 이어지므로, 검신(劍身)과 자루의 단면이 모두 마름모꼴인 일단병식(一段柄式)이다. 전체 길이 34.1, 직선에 가까운 날 곳곳에 마멸된 흔적이 있다. 돌화살촉은 11점 출토되었는데, 모두 몸의 단면이 마름모꼴인 유경식(有莖式)으로 슴베 단면은 육각형이고, 기단부(基端部)가 뾰족하다. 날의 중간쯤에서 양날이 살짝 각이 지면서 아래 단으로 평행하게 다듬어진 것이 특징으로, 전체길이가 10.319.9 정도로 긴 편이어서 비실용적이다이밖에 대롱옥은 17점 출토되었는데, 벽옥제(碧玉製)로 표면이 잘 마연되었고, 굽은옥은 2점으로 천하석제(天河石製)이다.

 

송국리 유적의 집자리에서는 부채꼴 모양의 도끼(扇形銅斧) 거푸집(鎔范)이 확인되었는데, 이 형식의 도끼와 비파형동검이 공반 출토된 예가 요하유역에 있다. 따라서 비파형동검이 출토된 돌널무덤과 송국리식민무늬토기가 출토되는 집자리는 같은 시기의 동일 주민집단의 소산으로 인정된다.

 

백제시대의 고분으로는 독널무덤(甕棺墓)과 움무덤(土壙墓)이 있다. 독널무덤은 40·56·68지구에서 각각 1기씩 발굴되었다. 이 중 40지구의 것에서는 정확한 유구는 확인되지 않았다. 따라서 구체적인 매장방법은 확인할 수 없었으나, 다만 포탄형의 토기 3, 자배기 1점이 확인되어 이것이 독널무덤에 사용된 토기로 추정되고 있을 따름이다. 56지구의 것은 이음식(合口式)독널무덤으로 일상생활에 이용하던 2점의 독을 전용한 것인데 그 중에서 1점의 독은 독널로 전용하기 전에 이미 바닥 부분이 깨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전용하면서 다른 독의 파편으로 이 깨진 부분을 막았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68지구의 독널은 3점의 토기를 이용하여 독널을 구성하고 있다. 동체의 대칭되는 부분을 미리 깨뜨린 자배기를 바닥을 위로 향한 채 뒤집어 놓은 후 2점의 독은 횡치하여 자배기의 깨진 부분에 구연부를 삽입한 형태의 독널무덤이다. 아울러 절반 가량이 파손된 2점의 자배기를 이용하여 공간이 생긴 부분을 덮고 있다.

 

송국리 유적에서 확인된 움무덤 중 개괄적이나마 그 내용을 알 수 있는 것은 71지구에서 발견된 2기이다. 2기 모두 나무널(木棺)의 존재여부는 확인 할 수 없으나, 무덤구덩이 내부의 매장 주체로서 나무널이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중에서 1호 움무덤은 움의 중심부에 2점의 토기와 1점의 쇠손칼(鐵刀子)이 부장되어 있었는데, 피장자의 머리나 발쪽이 아니라 가슴이나 허리 부분에 부장품이 매납되어 있다는 점이 특이하다. 2호 움무덤의 경우는 부장된 큰독이 지금까지 일반적으로 알려진 움무덤의 부장품과는 다르다는 점에서는 움무덤이 아니라 독널무덤일 가능성도 있다. 즉 무덤구덩이를 파고, 큰독을 널로 횡치하였던 것이 후대의 지형 삭평이나 교란으로 인하여 큰독의 윗부분이 없어지고, 바닥 쪽의 파편만이 남아서 발굴당시에는 움무덤의 부장품으로 오인되었을 가능성도 전혀 부인 할 수 없다. 아니면 큰독이 나무널을 고정시키기 위한 시설로 이용되었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에 앞으로의 연구가 기대되고 있다.

 

목책시설은 맨 땅에 기둥을 박을 수 있도록 구덩이를 판 것으로 총 길이 430정도가 확인되었지만 원래는 마을 전체를 에워싼 것으로, 전체 둘레 약 2.5 정도일 것으로 추정된다. 이 목책시설은 환호에 의해 파괴되어 있기도 하다. 환호는 단면 ‘U’자형태로 조성한 것인데 너비가 270380이나 넓은 곳은 420에 이르기도 하며, 깊이 110정도이다.

 

특징

송국리 유적은 타원형구덩이를 갖춘 집자리에 외반된 구연을 가진 토기, 그리고 석기 등 독자적 특징을 갖는 유적이다. 이 유적으로 말미암아 청동기시대의 송국리형문화의 중심지가 금강유역임을 알 수 있기도 하다. 특히 불에 탄 쌀炭化米도 수습되어 있는데, 생업경제가 농경이면서 논농사까지 영위하였음을 알게 한다. 집필(1996) 강인구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Contents/SearchNavi?keyword=%EB%B6%80%EC%97%AC%EC%86%A1%EA%B5%AD%EB%A6%AC%EC%84%A0%EC%82%AC%EC%B7%A8%EB%9D%BD%EC%A7%80&ridx=0&tot=3202&ids=)

 

 

5.28 제원 황석리유적(堤原黃石里遺蹟); 2450년 전(2450BP)

 

 

충청북도 제천시 청풍면에 있었던 석기시대 이후 고인돌·무늬토기·돌덧널무덤 등이 출토된 복합유적.

유적은 남한강 상류의 침식측면에 만들어진 충적토 위에 있다.

 

1962년 국립중앙박물관이 두 차례에 걸쳐 18기의 고인돌[支石墓]을 발굴해 그 성격을 발표함으로써 학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 뒤 1982년과 1983년에 충주댐 수몰지구 유적발굴조사로 토기층과 무늬[有文]토기층선돌고인돌삼국시대무덤 등이 있는 복합유적임이 확인되었다.

 

민무늬토기층에서는 민무늬토기시대의 전형적인 유물과 같이 굼토기덧띠무늬토기민무늬토기 등이 나왔다. 이들은 바라진 입술 옆모양, 그릇 밑모양 등으로 보면 전형적인 민무늬토기이나, 비짐으로 보면 모래알의 굵기가 가는 것부터 굵은 것까지 고루 포함되어 있다.

 

덧띠무늬토기는 민무늬토기층의 가장 아랫부분에서 나왔다. 모래비짐의 크기가 다른 민무늬토기에 비해 조금 작으며, 함경북도 서포항이나 회령오동, 압록강유역의 심귀리공귀리신암리에서 나오는 덧띠토기와 비교할 수 있다.

 

무늬토기층에서 나온 토기무늬는 암사동토기계통의 점선열문이 많고, 그 밖에 사단선문(斜短線文)이나 생선뼈무늬도 있다. 베푼 방법이 매우 이른 시기에 속하는 것이 층위로 발굴되었다.

 

2기의 선돌은 모두 남한강을 바라보고 있다. 1호 선돌(크기 80×80×25)은 윗면이 편편해 외형적인 특징으로 보아 여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되고, 2호 선돌(크기 139×65×28)은 끝이 뽀족해 남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특히, 1호 선돌은 얼굴모습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려한 점이 주목된다.

 

선돌 옆에는 표력만한 크기의 돌들이 편편한 면을 위로 향하게 해 11개가 타원형을 이루면서 놓여 있었다. 선돌과 둘레돌들로 보아 매가리트성소(聖所)와 연관되는 것으로 해석된다. 또한 제12호 선돌 옆에서는 거꾸로 엎어놓은 백제토기의 두드림무늬[打印文]가 있는 단지가 발견되었다. 이러한 것은 큰돌숭배의 한 행위표현으로 해석된다.

 

고인돌은 남한강 상류에 만들어진 낮은 충적대지 위의 강가에 약 1,300m의 범위로 46기가 두 줄로 분포되어 있었다. 1962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18기를 발굴하였고, 1982년과 1983년에 충북대학교에서 8기를 발굴하였다.

 

고인돌의 발굴시 나타난 홈[有溝]은 독특해 충6(‘이란 충북대학교의 머리글자)의 홈은 시체매장부의 주위에 일정한 사이를 두고 보호벽을 세웠다. 이것이 곧 굄돌의 구실을 같이하고 있었다.

 

1317호는 홈의 긴 벽인 남북벽에 각각 1장의 판석을 세우지 않고 뉘어놓아 홈을 보다 견고하게 구축하였다. 이러한 형식은 시대적인 변화, 지역적인 특징으로 보이며, 지금까지 발견된 예가 없는 독특한 것이다.

1962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발굴한 13호 고인돌에서는 남자의 완전한 뼈가 출토되어 당시 사회의 매장풍습을 알려주는 자료로서 관심을 끌었다. 또한 연대가 2,450 B.P.로 나타나 고인돌문화의 연대에 대한 하나의 기준을 세웠다.

 

또한 충북대학교에서 발굴한 충671317호 고인돌에서도 사람뼈가 출토되었다. 이 중 묻기성별나이 등을 알 수 있는 것은 충6717호이며, 13호에서는 3점의 조각으로 나왔다.

 

한편, 유구와 묻힌 사람의 머리 방향은 사람뼈가 출토됨으로써 보다 자세히 알 수 있었다. 이들은 머리가 모두 동쪽으로 있었으며, 또한 강물의 상류쪽으로 두어 물의 흐름방향과 일치하고 있었다. 고인돌이 강가에 있는 경우 강물의 흐름과 나란히 방향을 하고 있으며, 유구의 방향도 강물이 흐르는 방향과 일치하고 있는 점은 주목된다.

 

부장품으로는 소뼈사슴뼈돼지뼈달팽이가 출토되어 붉은 흙과 함께 당시 사회의 장례의식과 복원에 관한 문제를 해석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붉은간토기와 함께 둥근밑편평밑긴목항아리대접보시기 등 다양한 형식의 민무늬토기가 출토되었고, 둥근밑과 편평밑을 가진 토기가 고인돌 유적에서 함께 출토된 것이 특징이다.

 

목항아리는 높이가 27로 지금까지 고인돌 유적에서 이처럼 큰 붉은간토기가 출토된 예는 없었다. 따라서 황석리 고인돌문화는 붉은간토기가 특히 발달된 문화를 가지고 있던 사람들의 무덤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고인돌 유적에서는 사람뼈와 함께 출토된 유물을 중심으로 성별 해석을 할 수 있었다. 남자무덤에서는 돌칼돌도끼, 여자무덤에서는 장식품(특히 충7호에서는 목걸이)이 부장되어 있었다. 동물뼈는 남녀공동으로 부장되어 있었다.

 

황석리 들판의 민무늬토기 사람들이 살았던 약간 높은 대지 위에서 연도와 함께 주실인 현실에서 2개의 무덤자리가 발견되었다. 여기에 묻힌 사람은 50대 초반의 남자와 60대 이상의 여자이며, 무덤은 토기와 무덤형식으로 보아 3, 4세기경 백제계통으로 밝혀졌다. 출토유물로는 청동으로 된 3점의 허리띠 장식품이 나왔다.

 

또한 돌덧널무덤 옆에는 판돌을 세워서 만든 어린아이의 무덤이 있었다. []나 머리뼈의 이음새로 보아 9, 10세 정도 되는 것으로 해석된다. 목걸이와 곱은 옥이 출토되어서 당시의 장례습속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이 유적의 전체 문화성격은 신석기시대에서부터 백제시대까지 시대를 달리하며 발달한 각기 다른 유구를 가지고 있으며, 특히 무덤이 많이 발달되었다고 할 수 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Contents/SearchNavi?keyword=%EC%A0%9C%EC%B2%9C%ED%99%A9%EC%84%9D%EB%A6%AC%EC%9C%A0%EC%A0%81&ridx=0&tot=1328)

 

5.29 창원 진동리 유적(昌原 鎭東里 遺蹟); 2400년 전(BC 400)

경상남도 창원시 진동면에 있는 청동기시대 고인돌과 돌널무덤 등이 발굴된 무덤군. 사적.

창원 진동리유적은 1980년에 경상남도가 실시한 자동차면허시험장 건설을 위한 축대공사 중 발견된 것으로, 경남문화재연구원 역사문화센터에서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창원진동리유적에서 발굴된 무덤은 지표 하 150 지점에서 석관(石棺)이 확인된 뒤 수습형식의 조사가 실시되었다. 조사 당시 내부 석관은 이미 파괴되었고, 석관 주위의 괴석(塊石)과 석관 하부의 형태만 남아 있는 상태에서 수습조사가 실시되었다. 따라서 정확한 유구의 성격을 파악할 수 없었고 윤곽만 확인되었을 뿐이다.

 

석관 유구는 현 지표 하 150cm 지점에서 생토면을 50 정도 파고, 길이 182.2, 너비 56.5 크기의 석관을 설치하고, 그 주위에 괴석으로 된 석곽을 머리부위를 제외한 나머지 부분에 돌렸다.

 

석관 내에는 손잡이가 달린 간돌검(一段柄式磨製石劍) 1, 비파형동검 1점과 머리가 놓였던 곳으로 보이는 지점에 붉은간토기가 부장되어 있었다. 그 위에는 돌과 흙으로 1m 정도를 덮어 당시 지표면에 맞추어 평탄하게 하였다. 이것은 석관 위에 상석을 올리기 위한 보강책이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혼토층 사이에서 꼬다리가 달린 화살촉이 출토되었다.

 

지상에서는 어떤 봉분의 표지도 확인되지 않았지만, 이는 단순한 석관묘라기보다는 상석(上石)이 제거된 기반식(碁盤式) 고인돌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이 지역이 원래 칠성뜰이라 불리던 곳으로, 주변에서 고인돌과 고인돌의 상석이 확인되고 있으며, 또 이처럼 석관 밖에 석곽을 두르고 관 외부에 토기를 부장하는 형태의 고인돌이 밀양군 남전리에서 확인된 데에 기인한다.

 

유적의 연대는 간돌검이 손잡이 달린 형식(一段柄式)이고, 출토된 단도마연토기(丹塗磨硏土器)의 형태가 창원 외동과 김해 회현리에서 출토된 유물들과 유사하며, 또 비파형동검이 변형된 양식을 보이고 있는 점 등으로 미뤄볼 때, 무덤의 조성 시기는 서기전 4세기 전후로 추정되고 있다.

 

창원진동리유적은 고인돌과 석관묘로 구성된 유적이다. 이 가운데 고인돌은 규모와 형태, 구조와 특징 등에서 경상남도 창원 일대에서의 한국 청동기시대 말기 초기국가의 발생과정과 집단의 지위 및 혈연관계를 알 수 있고, 또한 출토유물에서 중국 동북지방의 청동기시대 출토품들과 유사하여 향후 비교 연구를 통한 문화의 원류를 찾는데 있어서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Contents/SearchNavi?keyword=%EC%B0%BD%EC%9B%90%EC%A7%84%EB%8F%99%EB%A6%AC%EC%9C%A0%EC%A0%81&ridx=0&tot=3156)

 

 

5.30 요령 정가와자유적(遼寧鄭家窪子遺蹟); 2400년 전~2300년 전(BC 5세기-BC 4세기)

중국 요령성 심양시(瀋陽市) 정가와자에 있는 청동기시대 청동단검·쌍뉴경 등이 출토된 널무덤. 토광묘.

요령정가와자유적은 정씨 성을 가진 사람이 오래 전부터 살았다고 하여 붙여진 정가와자 마을에 위치한다. 이 유적에는 박물관이 자리 잡고 있으며 현재 폐쇄된 상태로 외부인의 출입이 차단되어 있다.

 

심양 남서쪽 혼하(渾河) 북쪽 3에 있으며, 이곳은 지세가 낮고 소택이 많은 곳이다. 1958년에 27점의 청동기가 발견되고, 1963년에 또 1점의 단검이 발견되었다. 또한, 1965년에는 제2지점 남서쪽 500m에서 같은 유형의 분묘 14기가 발굴되었다. 보고된 것은 소형 토광묘로 이루어진 북구의 제659호와 대형 목곽묘로 된 남구의 제6512호이다. 그 밖에 정가와자에서는 1965년 조공가 유적(肇工街遺蹟)으로부터 남쪽 1,500m 지점에서 토광묘 2기와 옹관묘 1기가 발굴되었다.

 

6512호묘는 묘광의 크기가 5m×3m이며, 황토를 파고 만든 것으로 불규칙한 장방형의 구조이다. 지면에서 1.4m 밑에 있는 묘바닥에는 목곽(3.2m×1.6m)과 목관(2m×0.7m)이 놓이고, 곽과 묘벽의 사이는 흙으로 채웠다.

 

관과 곽 사이 그리고 관 내에는 총 42 797점의 부장품이 있었다. 그 중에서 중요한 것은 청동기이다. 무기류는 청동단검(3화살촉 및 화살과 그 주머니 등이 있고, 장식품에는 경형식(鏡形飾), 칼과 그 주머니, 동포(銅泡쌍뉴경(雙鈕鏡) 등이 있다. 마구로는 표((나팔형장식 등이 있다.

 

무덤 규모나 출토 유물로 보아 무덤의 주인공은 선양 일대 요양 평원 지역을 관할하던 고조선의 최고지배자 또는 예맥계 정치집단 지배층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로 문헌에서는 당시 요동지역에서 성장한 세력에 대해 조선후국(朝鮮侯國)’이라 표현하고, 이들이 성장하여 ()을 칭하는 등 교만하고 사납다고 기록하고 있다.

 

659호묘도 묘광(1.75m×0.5m)이 불규칙한 장방형 토광묘이다. 노년의 남자인골, 도호(陶壺), 뼈로 된 칼, 고리 등이 발견되었다. 십이대영자의 청동동검·다뉴경·나팔형식옥·반월형식옥·원개형동기(圓蓋形銅器) 등은 대전 괴정동, 아산 남성리, 예산 동서리 등지의 석곽묘에서도 출토되어 주목된다.

 

한편 정가와자유적과 관련하여 중요한 것은 비파형 동검이라 할 수 있다. 이 시기 비파형 동검문화는 크게 남동구 유형과 정가와자 유형으로 나누는데, 남동구 유형은 객좌중심으로 북방계 유물군이 다량으로 공반하며, 정가와자 유형은 심양중심으로 토착적 전통을 유지하고 있다. 남동구 유형은 동호(東胡)’가 남긴 것으로 보고 있다.

 

정가와자 유형은 요동지방에서 타 문화에 대해 상위교섭관계를 가지는 주도적인 문화로 발전하게 되며, 비파형 동검뿐 아니라 고인돌 분포지역과 겹치고 있고, 서북한 지역의 세형동검문화와 강한 연계성을 보이고 있기 때문에, 고조선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적극적으로 해석하는 입장이다.

 

다만, 요하 하구-대릉하하구에 이르는 지역은 동호의 무덤이 분포하고 있지 않아 동호와 관련이 없는 것으로 추정된다. 기자족(箕子族)이 대릉하 하구쪽에 모여 살았을 가능성 까지는 인정하지만, 그것이 국가라고 인정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닐 것이다.

 

또한 은·(殷周) 계열의 유물이 고조선의 영역 내 출토물이 없고, 또 기록을 통해 기자는 동진한 것이 아니라, 산동반도쪽으로 이주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따라서, 기자와 중국계 유민이 조선으로 들어와 지배계급이 되었다는 기자조선설(箕子朝鮮說)’은 남북한 학계에서 모두 부인되며, 이는 중국의 동북공정을 배격하는 주요 논거로 사용된다.

 

의의와 평가

정가와자 유적에 속한 사회는 농경을 주로 하고, 어로와 수렵이 보조가 되는 생활을 하였고, 그 주인공은 동호족(東胡族)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기록에 보이는 동호족의 거주지역과 요령식 동검의 생성배경 등을 고려한다면, 동호족과 같은 유목민족보다는 한 지역에 오래 머무르면서 여러 문화요소를 융합할 수 있는 농경민족(예맥·숙신 등)의 것으로 이해함이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집필(1996) 강인구, 개정(2009) 강성봉(성균관대학교)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Contents/SearchNavi?keyword=%EC%8B%AC%EC%96%91%EC%A0%95%EA%B0%80%EC%99%80%EC%9E%90&ridx=0&tot=72)

 

이 유적은 정가와자촌 벽돌공장의 채토장구역 안에 있다. 기원전 5세기-기원전 4세기의 것으로는 추정되는 움무덤 2기가 드러났다. 여기서 주의를 끄는 것은 2호 움무덤에서 나온 좁은놋단검을 비롯한 여러 가지 유물들이다. 청동단검은 끝부분이 부러졌으나 날부분이 윤가촌 12호 무덤에서 나온 것과 비슷한 것으로서 비파형단검으로부터 좁은 놋단검으로의 변천과정을 보여 준다. 쇠돌로 된 검자루맞추개(검파두식) 2 개를 합쳐서 쓰게 한 맞춤식의 것이다. 이 유적에서 좁은놋단검과 함께 맞춤식의 검자루맞추개가 나옴으로써 그것이 좁은놋단검의 것임을 알 수 있게 하였다. 질그릇은 목이 있는 갈색 단지로서 비파형단검시기의 전통적인 질그릇이다. 이 유적의 유물 갖춤새는 초기 좁은놋단검 관계 문화의 모습을 잘 보여 준다. 기원전 5세기-기원전 4세기에 해당한다.

(출처; 조선유적유물도감,

http://portal.nrich.go.kr/kor/northView.do?menuIdx=64&cpsno=68)

 

5.31 대전 괴정동유적(大田槐亭洞遺蹟); 2300년 전~2200년 전(BC 4C~BC 3C)

대전광역시 서구에 있는 청동기시대 한국식동검·거울 등이 출토된 돌널무덤. 석관묘.

 

 

 

검은간토기

 

낮은 구릉지대에 위치한다. 밭을 경작하다가 우연히 발견되어 1967년 국립박물관에 의해 유구(遺構) 확인을 위한 재발굴이 실시되었다.

 

지하에 깊이 2.7m, 너비 73, 길이 2.5m 정도의 구덩이를 남북방향으로 파고 그 안에 돌널을 구축하였다. 돌널은 두께 약 10 정도의 막돌을 한 겹으로 쌓아 네 벽을 구성하였다. 규모는 너비 0.5m, 길이 2.2m 정도이다. 파괴된 것이라 깊이는 확실하지 않지만 약 1m 정도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바닥에는 돌을 깔지 않았으며 상부에는 뚜껑돌없이 돌널 내부에 그대로 무너진 돌덩이[石塊]들로 메워져 있었다. 바닥에 얇게 깔린 부식된 목질부분이 검출된 것으로 보아 나무널이 설치된 돌덧널무덤[石槨墓]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유물은 돌널의 북쪽부분에서 토기와 청동제 의기(儀器), 서쪽 중간부에서 동검이, 남쪽에서는 식옥(飾玉)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출토상태로 보아 두향(頭向)을 남으로 한 남침(南枕)이었음이 분명하다.

 

유물 중 청동기로는 한국식동검[細形銅劍거울[多鈕鏡동탁(銅鐸방패형동기(防牌形銅器원개형동기(圓蓋形銅器검파형동기(劍把形銅器)가 있다. 토기로는 아가리[口緣部]에 둥근 점토띠를 붙인 이른바 덧띠토기[粘土帶土器]와 흑도장경호(黑陶長頸壺)가 있다. 그 밖에 마제석촉과 옥이 출토되었다.

 

의의와 평가

이 중 동검은 한국식 동검형식 중 가장 이른 시기에 속하며, 거울도 고식(古式)인 조문경(粗文鏡)의 범주에 들어, 한국식동검 유적으로는 가장 이른 시기의 것으로 보고 있다.

같은 계통의 유적으로는 아산 남성리 유적과 예산 동서리 유적을 들 수 있다. 모두 중국 동북지방인 요령지방의 동검문화와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믿어진다. 연대에 대해서는 이설이 많으나 서기전 4~3세기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 집필(1996) 이건무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Contents/SearchNavi?keyword=%EB%8C%80%EC%A0%84%EA%B4%B4%EC%A0%95%EB%8F%99%EC%9C%A0%EC%A0%81&ridx=0&tot=2884)

 

5.32 화순 대곡리 석곽묘; 2300년 전(BC 4C)

화순군 능주면 사무소에서 나주로 향하는 지방도로를 따라 약 2.5km 정도 가면 길의 우측에 중대곡 마을이 있는데 유적은 이 마을에서 제일 높은 위치에 있는 도곡면 대곡리 198번지 구재천씨 집 북쪽 담장 바깥에 위치하고 있다. 풍화된 암반을 최고 깊이 130cm까지 파내고 길이 210cm,  80cm, 깊이 53cm의 묘실을 마련한 다음 이 묘실 네벽에 15cm 미만의 범위를 따라 막돌을 23단 쌓아 올려 곽을 만들고 바닥에는 두꺼운 목판을 깔고 시신과 유물을 안치했던 것으로 보인다. 출토 유물로는 세문경1, 세형동검 3점과 장신구 등이 출토되었으며 일괄유물이 국보 제143호로 지정되었다.

(출처; 문화유산 연구지식포털.

http://portal.nrich.go.kr/kor/overviewUsrView.do?menuIdx=572&mcidx=40230)

 

2008 6 20일자 경향신문 기사 [고고학자 조유전과 떠나는 한국사 여행](1) 전남 화순 대곡리 출토 청동예기

이 대곡리 유적은 적석목관묘로 확인되었다. 한반도에서는 적석목관묘가 BC 4~BC 3세기쯤 출현, 기원 전 후까지 축조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시기 적석목관묘에서 출토되는 대표유물은 한국형 세형동검이다.

 

 볼수록 신비로운 국보 13

한국형 세형동검의 선조는 BC 9세기쯤부터 발해연안, 즉 난산건(南山根) 유적을 필두로 차오양(朝陽젠핑(建平진시(錦西푸순(撫順칭위안(淸原뤼다(旅大) 등에서 쏟아진 발해연안식 청동단검(비파형 청동단검)이다. 이 청동단검의 전통이 한반도로 이어져 BC 4세기 무렵부터 한국형 세형동검이라는 독특한 청동기 문화가 창조되는 것이다.

 

 

 

대곡리 팔주령. 새겨넣은 기하학 문양은 지금도 재현할 수 없을 정도로 정교하다. 제정일치의 수장이 흔들어 하늘신과 조상신을 불렀을 것이다. <국립광주박물관 제공>

 

 

 

두차례에 걸쳐 대곡리에서 출토된 청동예기들. 한꺼번에 국보로 지정될 만큼 중요한 자료이다.

 

대곡리 청동기 가운데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청동거울과 청동방울이다. 2400년 전 제정일치 시대의 왕은 제사장을 겸했다. 그는 양손에 든 청동방울을 흔들며 신()을 부르고, 가슴팍에 단 청동거울로 태양의 신비로운 빛을 백성들에게 비추었을 것이다. 빛은 하늘과 사람을 연결하는 매개체인 동시에 사람과 왕 사이를 구분하는 절지천통(絶地天通)의 도구였을 것이다.

 

청동방울, 특히 팔주령과 쌍두령은 비슷한 시기의 중국에서나 일본에서는 출토되지 않은 한반도 특유의 청동유물로 알려져 있다. 팔주령은 방사상의 여덟 개 가지 끝에 방울을 만든 형태이다. 오목한 불가사리 모양의 판에 방사상의 돌기가 달리고 그 끝에 각각 둥근 방울이 하나씩 붙어있다. 방울 안에는 청동구슬이 삽입돼 있어 흔들면 딸랑딸랑 거린다. 쌍두령은 양끝에 방울이 있고, 그 안에 구슬을 넣었다.

 

“8개라는 게 의미심장합니다. 정문경(청동거울)에도 동심원이 8개 그려져 있고, 8개의 방울이 있는 팔주령에도 태양을 상징하는 일광문이 보입니다. 8이라는 숫자는 일본에서 풍요’ ‘많음을 뜻합니다. 결국 청동거울과 팔주령 등은 당대 샤먼이 풍요로움을 기원하는 도구가 아니었을까요.”(이건무 문화재청장)

 

물론 여기서 말하는 샤먼은 지금의 무당이 아니라 제정일치 시대의 왕, 즉 수장이었을 것이다.

 

지금도 청동거울이나 팔주령 표면에 새겨진 정교한 기하학 문양을 재현하기 힘들 정도입니다. 수수께끼의 제작기법이죠.(이건무 청장)

 

엿장수 마음대로라는 말이 떠오른다. 엿이나 바꿔 주고 끝났으면 고물 신세로 끝났을 터였다. 하지만 고철은 사려 깊은 엿장수의 마음대로 신고가 되었고 마침내 11점의 국보로 거듭났다. 이름 없이 사라져버린 엿장수의 이야기는 요즘 문화유산을 전봇대쯤으로 아는 사람들에게 소중한 교훈을 던지고 있다. 이기환 선임기자

(출처;

http://news.khan.co.kr/section/khan_art_view.html?mode=view&artid=200806201749535&code=900305)

 

5.33 연해주 아누치노 지역의 옥저 유적; 2300년 전(BC 4C)

2017 8 16일자 동아일보 기사 고조선 청동투겁창, 러시아 연해주서 첫 발견

옥저에서 처음 발견된 청동투겁창 기원전 4세기 고조선 유물로 추정

모피 무역 중심지였던 고조선 연해주와의 교역 보여주는 증거

고립된 부족국가로 알려졌던 옥저 부여와 교류한 개방 사회였음을 확인

 

 

 

러시아 연해주 아누치노 지역의 옥저 유적에서 발견된 고조선 청동투겁창. 길이 21, 최대 폭 3.9로 한반도에서 출토된 청동투겁창보다 큰 편이다. 강인욱 교수 제공

 

기원전 43세기 고조선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청동투겁창(·동모)이 러시아 연해주의 옥저 유적에서 처음 발견됐다. 옥저가 모피 등을 매개로 요동지역의 고조선과 원거리 교역을 한 사실을 보여주는 유물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2(현지 시간) 동아일보와 강인욱 경희대 교수(북방 고고학), 국립문화재연구소로 구성된 취재팀은 연해주 아누치노 유적에서 출토된 청동투겁창 1점을 현지에서 확인했다. 해당 유물은 한 러시아 주민에 의해 기원전 41세기 크로우놉카(옥저) 문화층에서 발견됐다.

 

길이 21cm,  3.9cm의 청동투겁창은 보존 상태가 비교적 양호해 날 끝이 여전히 날카로웠다. 특히 숫돌로 등날을 갈아 움푹 파인 흔적이 투겁창 표면에 남아 있었다. 등날을 간 흔적이 많지 않은 걸 감안할 때 몇 번만 사용한 뒤 무덤에 매장한 것으로 보인다. 강 교수는 자루를 투겁창에 고정하기 위해 등날에 구멍을 뚫었는데 이는 중국 지린(吉林) 지역 청동기에서 흔히 발견되는 특징이라고 설명했다.

 

특히 강 교수는 투겁창의 형태가 위아래로 가늘게 떨어지고 한반도 출토품보다 대형인 점 등이 후기 고조선의 세형동검 양식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그는 새로 발견된 유물은 요동 지역의 후기 고조선 문화가 지린성 중부를 거쳐 연해주로 유입되는 과정을 잘 보여 준다고 말했다.

 

 

 

 

고조선 청동투겁창의 역사적 맥락과 관련해 강 교수는 고조선이 압록강 일대와 중원을 잇는 모피무역의 중심지였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있다. 동물 뼈와 고대 화폐 명도전의 출토지역을 감안할 때 고조선은 압록강 중상류 일대에서 모피를 생산해 중원에 판매한 것으로 보인다. 이번에 발견된 유물은 고조선의 원거리 모피무역 루트에 옥저도 포함됐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옥저가 자리 잡은 연해주는 예부터 모피와 약초 산지로 유명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연해주 콕샤롭카 유적에서 발견된 대형 건물터도 발해가 토착민들로부터 모피나 약초를 얻기 위해 세운 것이라는 분석이 있다.

 

이와 관련해 지난해 연해주 니콜라옙카 성터에서 발견된 기원전 43세기 부여계 안테나식(촉각식) 동검(銅劍)이 주목된다. 당시 이 동검은 비슷한 시기에 통용된 중국 위나라 화폐 칠원일근과 함께 발견됐다. 강 교수는 고조선 청동투겁창과 부여 동검은 중원과 요동지역, 연해주로 이어지는 고대 모피무역 과정에서 옥저로 넘어온 유물로 추정된다 옥저가 고립된 부족국가라기보다 멀리 고조선, 부여와 교류한 개방 사회였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말했다.

 

한편 연해주 미하일롭카 지역에서도 니콜라옙카 출토품과 비슷한 안테나식 동검이 출토된 것으로 확인됐다. 해당 동검 근처에서는 중국 화폐인 반량전(半兩錢)과 오수전(五銖錢)도 발견됐다.

 

강 교수는 연해주는 이미 기원전부터 옥저로 대표되는 한민족 고대사의 한 축을 이뤘다 이후 발해가 연해주로 진출한 건 우연이 아니었다고 덧붙였다. 김상운 기자

(출처;

http://news.donga.com/3/all/20170816/85838183/1#csidx06e86874d37225d8590d733d2bc1aaa)

 

5.34 고령 양전동 바위그림(高靈 良田洞 岩刻畵); 2200년 전~2000년 전(BC 3~1세기경)

경북 고령군 고령읍 개진면 양전리 알터 부락에 있는 바위그림 유적이다. 이곳은 성주쪽에서 흘러 내려와 고령읍의 동쪽으로 흐르는 대가천과 합천에서 남쪽으로 굽이쳐 고령읍쪽으로 흘러드는 안림천이 합류하는 지점이다. 유적은 이 합수(合水) 지점의 동쪽 금산재 산자락 아래에 있다.

 

바위그림은 기본적으로 동심원과 방패모양 그림으로 구성돼 있다. 동심원은 모두 3중이며 중앙 상단에 1, 상단 왼쪽에 1, 왼쪽 하단에 1, 오른쪽 하단에 1개 등 4개가 확인되었다. 방패형 그림은 29개 정도가 새겨져 있는데, 기본적인 형태는 위가 넓고, 아래가 좁으며, 양 측면이 만곡(彎曲)하는 윤곽선이 그려져 있다.

 

그 안쪽은 가로줄로 2~3구로 구분하였는데, 각 구에는 2~3개의 알구멍(性穴)이 있다. 상부의 중앙은 ??U??자형으로 오목하게 패어 있고, 둘레의 위쪽 또는 양 측면의 외곽에는 깃털과 같은 선을 새겼다. 내부에는 세로 구획이 없는 것이 일반적이며 맨 위쪽 구획의 안쪽 좌우에는 윤곽의 좌우측 선과 나란하게 선을 그었다.

이 유적의 주변에서 초기철기시대에 속하는 점토띠토기(粘土帶土器)와 굽다리접시모양토기(高杯形土器)와 합인유견돌도끼(合刃有肩石斧), 편평장방형돌도끼(扁平長方形石斧)가 다량 채집된 바 있다. 이들 유물들이 바위그림 유적과 관계가 있다고 하면, 이 유적은 B.C. 3~1세기경의 초기철기시대에 속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출처; 한국고고학사전(2001),

http://portal.nrich.go.kr/kor/archeologyUsrView.do?menuIdx=792&idx=10843)

 

5.35 광주 신창동 유적(光州 新昌洞 遺蹟); 2100년 전~1900년 전(BC 100~AD 100)

광주시 광산구 신창동에 위치하고 있는 사적 제375호로 지정된 철기시대 초기 유적이다. 1963년 서울대학교 발굴조사단이 조사를 실시해 4×28m의 범위에서 총 53기의 독널무덤(甕棺墓)을 확인했고, 국립광주박물관에서는 1992년 이래로 여러 차례 조사를 통해 토기가마, 환호(環濠), , 주거지, 저습지 등 철기시대의 생산 및 생활분묘 유구를 확인하였다. 이 유적은 극락강(極樂江) 쪽으로 뻗은 해발 약 200m의 산 중 서쪽의 산 북측 완경사면에 위치하는 해발 25~30m 정도의 저평한 3갈래의 구릉과 크고 작은 이 구릉 사이에 위치한 곡간충적지에 형성되어 있으며, 유적의 크기는 최대 너비 400m, 길이 800m 정도이다. 이 일대의 토질은 적갈색점토이며 표토 밑에 황갈색층이 있고, 그 밑은 단단한 적갈색층으로 되어 있는데, 독널은 적갈색 점토층에서 노출되었다. 그 깊이는 지표 아래에서 약 20~30 정도로 매우 얕다.

 

독널의 크기는 15~72이며 대부분 30~50가 주를 이루고 있다. 2기를 제외하고는 모두 이음식(合口式)인데 1기는 외독식(單甕式)이고, 다른 1기는 3개의 독널을 연결하여 매장한 세독식이다. 독널 자체를 보면 적갈색, 황갈색, 백갈색 등으로 양질의 점토에 석립이 많이 섞여서 거칠어 보이고 소성도는 낮아서 단단하지 못하며 물레를 사용하지 않았고, 기벽의 두께는 0.7 정도이다.

 

독널은 독()과 항아리(?)로 나뉘는데, 독은 유경, 무경으로 구분되며 곡경과 직경이 있다. 독 중에는 좁고 돌출된 바닥을 가진 것이 있고, 좁은 바닥에 배가 부른 난형(卵形)이거나, 입술 외부에 단면삼각형의 점토띠(粘土帶)가 돌려 있는 것이 특징이다. 독널의 방향은 기본적으로 동~서로 되어 있으며, 큰독이 대부분 동쪽에 놓여 있는 것으로 미루어 침향은 동침임을 알 수 있다. 여러 크기의 독널을 2, 3개를 붙여서 사용한 것으로 보아 독널의 크기가 작기는 하지만 이들 독널을 세골장(洗骨葬)이나 화장(火葬)과 관련된 뼈항아리(骨壺)로 보기는 힘들며, 소아나 유아를 신전장(伸展葬)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머리가 놓여졌던 것으로 보이는 큰독쪽을 약간 높이고 있는 점, 독널의 너비가 좁아 어른을 굴장(屈葬) 하기가 어렵다는 점에서 이러한 추정은 더욱 명확해 진다.

 

유물에는 부장품이 철편 1, 편평력(扁平礫) 1점뿐이고, 외부에서 소형토기 수 점, 돌도끼(石斧) 1, 돌화살촉(石鏃) 1, 숫돌(砥石) 1, 철편 2점 등과 동제검파두식(銅製劍把頭飾) 1점이 발견되었다. 신창리 유적의 독널은 무문토기의 전통을 이어 받은 것으로 소형의 독널이 대부분이었다. 이와 같은 독널은 후에 삼천포 늑도, 경주 조양동 및 창원 다호리 유적에서도 발견되었다.

 

저습지에서는 각종 칠기류·무구류·농공구류·칠용기·현악기·베틀부속구 등 다량의 목제유물과 민물패류, 인골을 비롯해서 선사시대 생활문화와 관계된 여러 자료, 그리고 벼껍질·탄화미·보리 등 곡물류, 오이씨·박씨 등 채소류가 출토되었다.

 

유적의 층위는 16개 이상으로 세분되며, 유물의 출토상에 따라 크게 3개 층으로 구분된다. 기층은 흑갈색 유기물부식토층으로 맨 밑바닥은 뻘층(silt)으로 이루어졌다. 이 층위의 최대특징은 벼껍질 압착층의 존재이며 그 사이에 나무와 나뭇잎·각종 씨앗류·칠기를 비롯한 다양한 목제유물과 토기류가 출토되었다. 신창동 유적의 토양샘플 및 탄화미, 그리고 벼의 줄기에 대한 분석결과 본 유적에서 재배된 벼의 품종은 단립형(短粒型)으로 밝혀졌다. 기층은 홍수퇴적물과 목탄 및 불탄흙 등 토기제작의 부산물이 함유된 점성이 강한 진흙층이 중심을 이루며, 그 사이에 황갈색 사질경화층과 갈색층, 회백색 재층, 그리고 검정 목탄재층이 겹겹이 얇게 삽입되어 있다. 출토유물은 두()를 비롯한 점토띠토기가 주종을 이루며 탄화미?씨앗 등도 발견된다. 기층은 유적의 최상부에 위치하며 퇴적토와 일부 경작시 이루어진 지형변경으로 교란된 층이다. 출토된 유물은 무문토기류와 함께 옹기·자기·와편 등 조선시대 후기의 유물도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토기가마는 기존에 존재했던 환호(環濠)의 경사면을 이용한 것으로 가마의 내부에서는 다량의 무문토기와 방추차, 숫돌(砥石) 등이 출토되었다. 토기류는 고배(高杯)와 옹(), (), 시루 등 B.C. 1세기대 점토띠토기 단계의 전 기종(器種)이 발견되었다. 또한 저습지에서는 중앙 내에 위치한 3개소의 수로, 그리고 수로의 서쪽 구릉에서 직경 25 안팎의 대형 나무기둥으로 이루어진 추정 공방지가 확인되었다. 수로변에서는 직경 5~10정도의 소형 말뚝열이 집중적으로 드러났다. 대형수로 양편에 말뚝이 위치하고 그 사이에 걸림목(橫木)이 놓여 있었는데 이것은 물을 이용하기 위한 시설로 추정되었다.

 

신창동 유적에서는 당시의 생활문화를 해명할 수 있는 고고학적 자료가 다량으로 출토되어 당시 이 지역을 중심으로 한 농경문화의 실체를 보다 구체적으로 규명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유적의 연대는 B.C. 100~A.D. 100년간에 해당되며, 전남지역에서 철기시대 초기를 대표하는 유적이다.

(출처; 한국고고학사전(2001),

portal.nrich.go.kr/kor/archeologyUsrView.do?menuIdx=792&idx=10839)

 

2015 10 28일자 중앙일보 기사 신창동 유적서 초기 철기시대 밭 국내 첫 확인

 

 

 

27일 광주광역시 광산구 신창동 유적 발굴 현장에서 이영철 대한문화재연구원장(왼쪽)이 초기 철기시대 생활유물들을 설명하고 있다. [프리랜서 오종찬]

 

광주광역시 광산구 신창동 유적(사적 375)에서 초기 철기시대에 조성된 밭 경작지가 국내 최초로 확인됐다.

 

BC 3세기~AD 1세기 개간

국내서 가장 오래된 경작지

대규모 농경복합 유적지 증명

농업사 공백 메울 소중한 정보

 

광주시와 대한문화재연구원은 27 신창동 유적에 대한 16차 발굴조사 결과 BC 3세기~AD 1세기 초기 철기시대에 개간된 밭 경작지를 확인했다고 밝혔다. 삼국시대인 AD 5세기쯤 만들어진 밭이 신창동에서 발견된 적은 있지만 초기 철기시대의 경작지가 확인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이 밭은 완만한 경사의 구릉 하단에 조성됐다. 고랑과 이랑의 수가 10줄로 구성돼 초기 철기시대의 경작 형태와 규모·입지 등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이처럼 신창동에서 고대에 조성된 밭이 발견되면서 대규모 농경복합 유적이라는 사실이 다시 한 번 증명됐다. 1963년 시작된 발굴 작업을 통해 고대인들의 분묘와 주거지·가마·저습지 등에 이어 경작지까지 확인됐다. 광주시는 국내 농업사 연구의 시대적 공백을 메우는 소중한 정보를 확보했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성과라고 밝혔다.

 

신창동은 우리나라 선사시대의 생활문화상을 살필 수 있는 유물들이 대량 출토돼 고대사의 타임캡슐로 불린다. 농경문화를 기반으로 한 토기나 공구류·무기류·직물류·발화류·옻칠기술 등 초기 철기시대부터 삼국시대에 걸친 삶의 흔적이 남아 있다.

 

신창동에서는 1992년부터 저습지와 토기가마·구상유구·주거지 등 고대인들의 생활상이 잇따라 발견됐다. 농경의 기본인 씨앗과 수리시설·목기 등도 발굴돼 선사시대 생활상을 모아놓은 중요 유적지임이 확인됐다. 우리나라 기후 여건상 좀처럼 발굴되지 않았던 목제검과 칼집·활 등 무기류와 괭이··도끼자루 등 농구류가 출토된 점도 관심을 끈다. 유물 대부분이 청동기에서 철기로 바뀌는 시대의 생활유물들이다.

 

이곳에선 청동방울과 현악기·북 등의 악기, 신발골 같은 삼한시대 유물들도 다수 출토됐다. 1997년에는 국내에서 발견된 비단 중 가장 오래된 BC 1세기의 천 조각이 발견되기도 했다. 지난해 10월에는 BC 1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칼집 장식품과 AD 5세기에 경작된 밭 유적이 확인됐다. 당시 발굴에서는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개간된 경작지와 관련된 3개의 문화층이 발견돼 시대별 농경생활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박물관에서 살펴보는 신창동 고대 문화=신창동 주변에 살았던 고대인들의 삶은 국립광주박물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불의 역사와 선사시대의 발화 기술을 조명하는 불을 찾아서라는 테마전을 통해서다. 1995년 신창동 유적에서 출토된 우리나라 최초의 발화구를 다음달 22일까지 전시한다. 발화봉과 발화대 세트로 구성된 발화 도구들을 통해 불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다. 참나무 발화봉을 느릅나무로 만든 발화대에서 양손으로 비벼 불을 일으키는 회전식 발화 방식을 소개한다.

 

신창동에서 출토된 발화봉을 보관하는 방화봉집과 불을 보관하고 이동하기 위한 관솔도 볼거리다. 소나무 가지인 관솔에는 송진이 많이 묻어 있어 불이 잘 붙고 오랫동안 탈 수 있도록 고안됐다. 선사시대의 불씨부터 화약·전기·화력·원자력으로 이어지는 발화 기술의 역사도 보여준다. 최경호 기자

(출처;

http://news.joins.com/article/18949619?cloc=joongang|article|tagnews)

 

2016 6 30일자 동아일보 기사 [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11> 광주 신창동 유적 발굴한 조현종  광주박물관장

 

 

 

27일 조현종 전 국립광주박물관장이 광주 신창동 유적에서 출토된 목제 괭이자루를 살펴보고 있다. 이곳에서는 기원전 1세기 원삼국시대 유물 2000여 점이 무더기로 출토됐다. 광주=박영철 기자 skyblue@donga.com

 

자연의 타임캡슐 저습지 수천 년 전 유기물까지 원형 그대로

 고고학자들에게 저습지(低濕地) 유적은 대박으로 통한다. 마치 타임캡슐처럼 저습지에서는 수천 년 전 유물이 원형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심지어 썩기 쉬운 나무나 풀, 씨앗 등 온갖 유기물도 그대로 남아 있다. 이런 보존은 유물이 포함된 연못이나 우물과 같은 습지 위에 흙이 뒤덮여 외부 공기를 완벽하게 차단해주기 때문에 가능하다. 27일 조현종 전 국립광주박물관장(60)과 둘러본 광주 신창동 유적은 한국 저습지 발굴을 태동시킨 역사적인 장소다. 1992년부터 20년 넘게 발굴이 이어지고 있는 이 유적에서는 기원전 1세기 원삼국시대 유물이 총 2000여 점이나 출토됐다. 당시 사람들이 먹고 버린 벼 껍질부터 현악기, 베틀, 문짝, 칠기(漆器), 목제 농기구, 비단 조각, 심지어 그들이 배설한 기생충 알까지 나왔다. 이쯤 되면 미시생활사 복원의 종합선물세트와 다름없다. 조 전 관장은 고속도로와 국도 1호선 사이의 발굴 현장에서 고고학자로서 운이 참 좋았다며 오래전 기억을 더듬었다. 

 

 국도 방향을 바꾼 역사적 발굴

 

 

 

광주 신창유적에서 1997년 출토된 수레바퀴 유물들(위 사진). 바퀴축과 바퀴살, 가로걸이대가 보인다. 아래 사진은 베틀 유물로, 방추차와 바디 등 부속품들이 한꺼번에 출토됐다. 국립광주박물관 제공

 

1992 5월 광주 신창동 국도 1호선 직선화 공사 현장. 도로 포장을 위한 건설 중장비로 부산한 현장에 조현종(당시 국립광주박물관 학예연구사)이 황급히 흙을 퍼 담았다. 그는 연구실에 돌아오자마자 서둘러 흙을 채질한 뒤 물을 부었다. 물에 뜨거나 가라앉은 물질을 확인하다 점토대토기(粘土帶土器) 조각과 볍씨들이 눈에 확 들어왔다. 점토대토기는 초기철기시대의 대표적인 토기 양식. 오랫동안 품어온 의문이 확신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오래전부터 농경 유적을 찾고 싶었습니다. 그때까지 출토된 건 고작 불에 탄 쌀 몇 알이 전부였거든요. 영산강 유역 어딘가에 농경 유적이 있으리라는 짐작이 현실로 들어맞은 겁니다.”

 

 

 

광주 신창동 유적에서 출토된 현악기 등 각종 농경의례 유물들.

 

그해 6월 공사는 전면 중단됐다. 국도 1호선은 유적을 피해 우회도로가 만들어졌다. 공사 중 발견된 유적으로 인해 국도 방향이 바뀐 것은 처음이었다. 당시 문화재위원이던 김원룡 서울대 교수와 한병삼 국립중앙박물관장, 김기웅 경희대 교수가 진가를 알아보고 당국에 유적 보호를 강력히 요청한 결과였다. 김원룡은 한발 더 나아갔다. 당시 지건길 국립광주박물관장에게 발굴을 즉각 중단하고 먼저 저습지 발굴기술부터 배워 오라고 했다. 그때 한국 고고학계는 저습지 발굴 경험이 거의 전무한 상태였다. 조현종의 회고.

 

 

 

괭이, 따비 등 나무로 만든 각종 농사 도구들.

 

발굴 중이던 유적을 중간에 덮는 건 처음이었습니다. 하지만 흠 없이 잘해야겠다는 생각에 곧 수긍했습니다. 유적을 위해서도 저 개인을 위해서도 훌륭한 판단이었죠.” 조현종은 그해 12월 일본 나라문화재연구소로 떠나 저습지 발굴을 배운 뒤 1995 5월 신창동 유적 발굴을 재개했다.

 

 

 

신창동 유적에서 발견된 나무로 만든 문짝. 고상가옥에 쓰인 것으로 보인다.

 

 삼한 최고(最古)의 수레를 발견하다

남한에서 가장 오래된 수레바퀴였군요!”

1990년대 당시 신창동 발굴 현장. 부식되기 쉬운 목기와 칠기 등이 다수 출토됐다.

2000년 말 구라쿠 요시유키(工樂善通) 사야마이케(狹山池) 박물관장을 만난 조현종은 그가 그린 스케치 한 장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해 중국 쓰촨(四川) 성에서 출토된 수레바퀴 유물을 묘사한 그림은 3년 전 신창동에서 나온 목기(木器) 형태와 흡사했다. 발굴팀은 해당 유물에 대한 정밀조사에 들어갔다. 당초 의례용 기물로 알았던 유물은 바퀴살과 바퀴축, 고삐를 고정하는 가로걸이대(車衡·거형)로 각각 밝혀졌다. 앞서 평양 낙랑고분에서 기원전 2세기의 수레 유물이 발견됐을 뿐, 삼한지역에서 최초로 출토된 기원전 1세기 수레 유물이었다. 학계는 흥분했다.

 

 

 

1990년대 당시 신창동 발굴 현장. 부식되기 쉬운 목기와 칠기 등이 다수 출토됐다.

 

마한 사람들은 소나 말을 탈 줄 모른다(不知乘牛馬)’는 삼국지 위서 동이전의 기록을 토대로 당시 첨단의 수레 제조기술을 익힌 고조선 유이민(流離民) 집단이 삼한으로 이주한 게 아니냐는 분석이 나왔다. 한반도 고대사 해석의 큰 흐름을 바꿀 수 있는 대발견이었다.

 

1990년대 당시 신창동 발굴 현장. 부식되기 쉬운 목기와 칠기 등이 다수 출토됐다.

저습지 특유의 지난한 발굴 작업 끝에 나온 값진 결과물이었다. 땅속에서 수천 년 묵은 유기물이 밖으로 나왔을 때 급작스러운 부식을 막으려면 약품 처리와 습기 유지 등 꼼꼼한 준비가 필수. 워낙 조심스럽게 발굴이 진행되다 보니 신창동 유적에서는 가로 25m, 세로 25m 넓이의 유구를 3m 깊이까지 파는 데 3년이나 걸렸다. 저습지가 아닌 일반 발굴 현장에선 같은 면적의 작업에 통상 2개월 정도가 걸린다.

 

 

 

1990년대 당시 신창동 발굴 현장. 부식되기 쉬운 목기와 칠기 등이 다수 출토됐다.

 

최근 국립광주박물관장에서 정년퇴직한 그에게 남은 과제를 물었다. “신창동에서 야자수 열매를 꼭 닮은 나무 그릇이 나왔습니다. 나는 이게 삼한이 멀리 동남아시아와 교류한 흔적이라고 믿어요. 동북아시아에만 국한하지 않고 시야를 넓혀서 연구해 보고 싶습니다.” 김상운 기자

(출처;

http://news.donga.com/List/Series_70040100000214/3/70040100000214/20160630/78939936/1##csidxa64fdc13b98e9698cb8b4ffe46bdefa)

 

 

5.36 진주 대평리 유적; 청동기시대 전기~ 중기

진주대평리유적은 1967년 진양댐을 건설한 후, 경지정리공사 등으로 유적의 일부가 파괴되면서 많은 유물이 노출되어 학계에 알려졌다. 19751980 4차례에 걸쳐 국립문화재연구소가 발굴하여 고인돌돌널무덤 등의 청동기시대 무덤과 집터를 조사하였다. 이 후 1995~1999년에 진양댐의 수위를 높이는 공사를 하는 과정에서, 국립창원문화재연구소 외 6개 기관이 연합으로 9구역의 옥방지구와 2구역의 어은지구를 발굴하였다.

 

옥방1지구는 옥방유적의 동남쪽에 위치하며, 환호집자리경작지무덤고상건물지 등이 조사되었다. 2지구는 옥방유적의 남쪽에 위치하며, 30여 기의 집자리와 무덤 31기와 함께 대규모의 밭을 조사하였다. 3지구는 옥방의 서남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10여 기의 집자리와 도랑 등을 발굴하였다. 4지구는 옥방유적의 서쪽에 위치하며, 환호와 60여 기의 집자리무덤밭 등을 조사하였다. 5지구는 4지구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500여 기의 집자리와 밭무덤 등을 조사하였다. 6지구는 4지구의 남쪽에 위치하며, 청동기시대부터 근대시기까지의 경작지가 중첩되어 있었다. 7지구는 1지구의 남쪽에 위치하며, 20여 기의 집자리이중환호무덤 등을 조사하였다. 8지구는 집자리야외노지무덤 등을 조사하였다. 9지구는 2지구와 3지구 사이에 위치하며, 10여 기의 집자리와 청동기시대 이후부터 4개 층의 중첩된 경작지를 조사하였다.

 

어은1지구는 16,000평을 조사하였는데, 신석기시대 노지 6, 청동기시대 집자리 120, 돌무지유구 25, 구덩유구 27, 무덤 17, 야외노지 38,  4,000여 평을 조사하였다. 어은2지구는 약 8,000여 평에 해당하는 대지로 남강댐 수몰지역내 대평지구 중에서 제일 북쪽에 위치하며, 청동기시대의 집자리 50기과 구덩유규 32, 돌무지 42, 야외노지 33, 돌넘무덤 8, 고인돌 2, 그리고 밭터를 조사하였다.

 

발굴조사 결과, 대평리유적은 청동기시대 전기와 중기에 걸쳐 형성된 대규모 취락유적으로 밝혀졌다. 특히 주거지로 구성된 단순한 취락유적이 아닌 복합적인 취락 유적으로서 계급적인 분화를 보여주는 무덤군, 생산유적인 대규모 경작지, 다중환호(多重環濠)와 같은 거대한 공공시설물 등이 동시에 조사되었다.

 

청동기시대 전기에 해당하는 주거지는 평면형태가 대체로 장방형과 방형을 띠고 있다. 이들 주거지에서는 대개 노지가 한 두 개씩 발견되는 경우도 있고 없는 경우도 있으며, 타원형의 작업공을 가진 주거지도 있다. 이 가운데 길이 12m 이상 되는 대형 장방형 주거지들은 노지를 2개 이상 갖는 경우도 있다. 이들은 일반주거용이라기보다는 공공집회소나 공동작업장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취락의 내부구조를 살필 수 있는 유적으로는 어은1지구에서는 당시의 자연제방상에 타원형으로 주거지가 배치되는 양상을 보여주며, 어은2지구에서는 청동기시대 전기의 주거지들이 2열로 나란히 배치되는 모습이 드러나기도 하였다. 이들 청동기시대 전기의 주거지에서 출토되는 토기는 구멍무늬토기孔列土器나 겹아가리二重口緣에 단사선(短斜線)이 들어간 옹형토기들이 주류를 이룬다. 주거지의 평면형태는 전기의 장방형이나 방형에서 말각방형을 거쳐 중기가 되면 원형이나 타원형의 형태로 변하였다. 따라서 청동기시대 중기의 주거지에서는 대형 장방형 주거지가 자취를 감추고 중앙에 타원형의 작업공이 있는 소위 휴암리형(休岩里型) 혹은 송국리형(松菊里型) 주거지라 불리는 말각 방형이나 원형 주거지들이 주류를 이룬다. 타원형의 작업공에서는 숫돌, 미완성의 석기나 석재·박편 등이 자주 발견되어 석기의 제작이나 가공과 관련된 시설물로 추정하고 있다.

 

청동기시대 중기에 들어서면 기둥구멍의 배치도 규칙적으로 나타난다. 대부분의 주거지에서 기둥구멍은 타원형의 작업공 양끝에 깊게 설치되어 있다. 중기의 집터에서는 송국리형의 무문토기와 함께 홈자귀有溝石斧나 삼각형석도(三角形石刀) 등 중기 단계의 대표적 유물들이 출토된다. 특정시설물이나 공간 등의 주위에 깊은 도랑를 파서 포위하는 환호는 옥방 4지구에서 조사되었다. 이곳 환호는 강변으로부터 2줄이 나란히 충적대지 안쪽으로 굴착된 이중환호(二重環濠)이다. 동쪽편의 취락을 포위하는 듯 약간 휘어지면서 북동쪽을 향해 뻗어 있으며, 길이 120m 정도까지 확인하였다. 내외 환호 사이의 간격은 25m 가량 된다. 두 환호 모두 단면은 ‘V’자형이며,  23m, 깊이 150 정도 된다. 옥방1지구에서는 모두 3줄의 환호를 발견하였다.

 

대평리유적의 두 지점에서 발견한 이중환호는 방어시설로서의 역할을 보여주는 규모와 구조를 가지고 있다. 특히 환호취락 내부에 취락의 공동저장시설로 추측되는 타원형부정형 저장구덩이를 따로 구획하기 위해 방형의 도랑()을 따로 굴착한 것이 발견되었다. 이것은 도랑을 파서 구획하는 행위가 여러 가지 목적과 의미를 가졌을 것으로 짐작하게 한다.

 

대평리유적의 각 구역에서 발굴된 취락 안에서는 주거지 이외에 공동취사시설로 추정되는 야외노지(野外爐址)와 페기물을 버리기 위한 구덩이들, 돌무지유구積石遺構들을 조사하였다. 그 중 돌무지유구는 구덩이를 파고 돌을 쌓은 것도 있지만, 돌무지만 남아 있는 것도 발견된다. 이들 돌무지에서는 석기를 제작하기 위해 운반되어온 석재라든가 미완성 석기들이 많이 나오고 있어 일종에 공동석기제작소로 추측한다.

 

대평리유적에서 청동기시대의 경작지로서 밭이 조사되었는데, 밭은 당시의 자연제방 안쪽에 침식으로부터 보호되는 배후지(背後地)에서 주로 확인된다. 오랜 세월이 경과했는데도 밭의 고랑과 이랑이 교란되지 않고 잘 보존되어 있다. 어은1지구에서 하천의 흐름과는 직교하게 고랑과 이랑이 파여져 있는 밭이 처음으로 조사되었다. 밭과 밭의 경계가 확인되지 않은 채 매우 길쭉한 범위에서 노출하였다. 고랑과 이랑은 각이 없이 물결모양으로 이어지며, 고랑의 폭은 35cm 내외, 이랑의 폭은 50cm 내외이다. 밭의 가장자리를 따라 도랑을 파놓은 흔적이 있다. 경작지 이곳저곳에서는 구멍무늬토기를 비롯한 무문토기와 석부, 석도들만 출토되고 있기 때문에 청동기시대 경작지임이 분명하다. 옥방지구에서도 넓은 면적에서 청동기시대 밭이 확인되었다. 대평리유적에서 발견된 곡물들은 여러 종류로 구분된다. 가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쌀, 기장과 함께 콩과식물도 채집하였다.

 

대평리유적에서는 무덤이 취락의 주변에서 발견되기도 하고, 약간 떨어진 곳에 무리를 이루고 있기도 하다. 무덤의 형식은 돌널무덤과 고인돌로 나뉜다. 돌널무덤은 판자돌을 세워 네 벽을 만들고 바닥에도 판자돌을 깔고 뚜껑을 덮기도 한다. 돌널무덤은 고인돌에 비해 유물이 적거나 없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리고 대부분 소형이기 때문에 성인을 펴서 묻는 경우는 적었을 것이다. 돌널무덤은 고인돌 주변에서도 발견되지만, 취락의 주변이나 경작지 근처에서도 드물게 존재한다. 고인돌은 지하 구덩이에 냇돌을 층층이 쌓아 돌널을 만들고, 다시 일정한 범위에 냇돌을 몇 겹 깔아 무덤구역을 만든 뒤에 상석을 얹어 놓았다. 간혹 돌덧널에 뚜껑돌을 나란히 덮은 것도 있지만, 상석 자체가 뚜껑돌 역할을 하는 형식이 대부분이다. 돌덧널안에서는 보통 벽옥제관옥(璧玉製管玉)마제석검돌화살촉가락바퀴홍도 등을 출토하였다. 돌무지시설에서도 무문토기나 석기들이 군데군데 발견되었다. 돌무지로 구획된 무덤구역에 가까이에서 작은 돌널무덤이 발견된 예가 많다.

 

옥방 17지구에서는 도랑으로 구획된 특이한 건물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환호 역시 특정 지구에 한정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으므로, 전체 유적 내에서 중심과 주변이 존재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5지구의 장방형 또는 세장방형 집자리는 그보다 북쪽인 어은 1지구와 연결되는 것으로 매우 지역적인 한정성을 보인다. 그러나 대평리유적에서는 집자리 외에 밭, 구덩유구, 무덤 등이 전 지구에서 거의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유구들로 보아 이 유적은 당시의 도시에 해당될 만한 규모였을 것이다. 한편 대평리유적에서 조사된 고인돌의 특징은 대부분이 매장시설인 돌널이나 돌덧널 주위에 방형(方形)이나 원형(圓形)에 가까운 돌무지시설을 갖는다는 점이다. 그리고 돌널무덤의 경우에는 생활공간과 사후공간을 뚜렷이 구분하지 않는 편이다. 고인돌은 돌널무덤보다 규모를 크게 축조하고, 고인돌 주변에 딸린무덤의 형태로 돌널무덤이 발견되기 때문에 고인돌이 상위의 형식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돌널무덤은 고인돌의 하부구조로도 나타나기 때문에 상호관계는 일률적이지 않다.

 

진주대평리유적은 신석기 시대에서 삼국 시대 까지의 시기의 유적들이며, 신석기시대의 주거지옹관묘 등을 포함하여 청동기시대 주거지고인돌돌널무덤환호밭유적, 그리고 조선시대 밭유적까지 확인되어 고대 사회의 생활상 중 여러 부분이 밝혀졌다. 특히, 진주대평리유적은 강안대지를 따라 광범위하게 노출된 대규모의 청동기시대 농경지환호취락고인돌돌널무덤 등은 한국 청동기시대의 사회사를 연구할 수 있는 충분한 자료가 얻어졌다.

 

5.37 해남 군곡리 유적; 2100년 전~1800년 전(BC 2세기~AD 3세기)

2008 8 1일자 경향신문 기사 [고고학자 조유전과 떠나는 한국사 여행](7) 2000년 전의 무역항 해남 군곡리

1983 3월 어느 날.

황도훈이라는 해남의 향토사학자가 있었다. 해남문화원장을 지내면서 고향 땅을 답사하는 것을 여생의 일로 삼고 있었던 사람이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군곡리 마을을 지나던 황씨의 눈길이 멈췄다. 무슨 옹관 같은 유물이 눈에 띈 것이었다. 게다가 불에 탄 흔적도 있었다.

 

 2300년 전 음식물 쓰레기장

 

 

 

해남 군곡리에서 확인된 뼈로 만든 연모.

 

이건 야철지 아닌가.’

 

독학으로 고고학을 배우던 그의 눈엔 호기심이 가득했다. 그는 행장을 꾸려 서울로 올라가 서울신문사를 찾았다.

 

회사 논설위원 중에 해남 사람이 있었는데, 황도훈씨와 친구였지. 그 인연으로 우리 신문을 찾아온 거지요.”(황규호 전 서울신문 기자)

 

황 기자는 즉시 황도훈과 함께 해남으로 내려갔다. 최성락 목포대 교수와도 연락이 닿아 함께 군곡리 현장으로 달려갔다.

 

야트막한 구릉이 온통 마늘밭이었어요. 그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는데, 일제시대 때 간척사업으로 땅이 됐다더군요.”(황 기자)

 

야철지라든가 가마터라는 것은 제가 고증할 수는 없었고, 다만 패총이라는 것은 확실했어요.”(최성락 교수)

서울신문은 목포대 연구팀과 최성락 교수의 이름을 달아 군곡리 유적 기사를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그날 아침, 학교에 간 최 교수는 급히 오라는 오창환 당시 학장의 부름을 받는다.

 

최 교수, 최 교수. 우리 학교 경사났어! 중앙지 1면에 이렇게 우리 대학(목포대) 기사가 나오다니.”

 

그럴 만했다. 목포대가 사범학교~초급대를 거쳐 1979 4년제 국립대로 승격한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학장님이 그러더군요. ‘뭐 해줄까. 원하는 대로 해줄 테니 말해봐하고.”

 

최 교수는 100만원이라는 거금을 지원금으로 받아 이름뿐이었던 (목포대)박물관을 키우는 데 썼다.

 

 준왕의 망명과 해상교역로의 탄생

흔히 조개무지라 하는 패총(貝塚)은 선사시대 사람들이 먹고 버린 조개·굴 등의 껍데기가 쌓여 마치 무덤 같다 하여 명명됐다.

 

 

 

 

한마디로 선사시대 음식물 쓰레기장이죠. 쓰레기장이 뭐가 그리 중요하냐고요? 조개껍데기가 지닌 석회질(石灰質) 때문에 그 안에 버려진 토기(土器)와 석기, 그리고 사람과 짐승의 뼈가 잘 보존돼요.”(조 관장)

 

한반도 남부의 패총 유적은 1907년 일본 학자들이 김해패총을 조사한 게 처음이었다. 그런데 일본학자들은 김해패총에서 석기와 철기가 함께 출토되는 것을 중시하여 이른바 금석병용기(金石倂用期)라는 개념을 만들어낸다. 한마디로 한반도에는 청동기시대가 없었고, 석기와 철기가 공존한 금석병용기가 있었을 뿐이라는 주장이었다.

 

참으로 헛된 식민학자들의 주장이었지. 해방 이후 한반도에서 청동기가 잇달아 발굴되면서 이 금석병용기라는 정체불명의 개념은 사라지고 말지.’(조 관장)

 

어쨌든 최 교수가 이끄는 목포대 박물관의 3차례 조사 결과 군곡리 패총은 BC 2세기~AD 3세기 사이, 즉 약 400~500년이라는 장구한 세월동안 사용된 음식물 쓰레기장이라는 결론을 얻었다. 현장에서는 철편과 철도자(), 철부(철도끼) 등 철기류와, 석촉·숫돌 등 석기류와 각종 동물뼈 등이 쏟아졌다. 특히 점을 친 흔적인 복골(卜骨)과 중국화폐인 화천(貨泉)은 문화교류와 공유의 측면에서 의미심장한 유물들이다. 군곡리 패총은 철기문화의 유입과, BC 2세기부터 중국대륙-한반도~일본열도를 넘나드는 해상을 통한 동방교역의 루트를 그릴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유적이다.

 

당초 한반도 남부의 철기문화는 낙랑(BC 108년 설치) 이후 평양-한강-낙동강 등 강의 수로를 통해 유입되었다는 설이 지배적이었어요. 하지만 저는 한반도 남부의 철기문화가 연안항로를 통해 유입된 시기를 위만조선 시기(BC 194~BC 108) BC 2세기 무렵으로 보고 있어요.”(최성락 교수)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나온 기자조선(箕子朝鮮)의 준왕 기사를 유의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겠네.”(조 관장)

. 삼국지를 보면 (BC 194) 위만에게 패한 조선왕 준()이 신하들을 이끌고 바다로 들어가 한()의 땅에서 살았다는 표현이 있습니다. 이것은 해로를 통한 철기문화 유입이 최소한 위만조선 때부터라는 것을 시사해줍니다.”(최 교수)

 

 동방교역로의 중심지

준왕이 망명한 종착지와 관련해서는 온갖 설이 난무한다. 하지만 망명지로 추정되는 충청도와 전북 지역에서 확인되는 BC 2세기 무렵(위만조선 시기)의 철기유물들이 의미심장한 실마리를 던진다. 그리고 이 시기의 유적들이 대부분 서해안 인근에 자리잡고 있다는 점도 해로를 통한 철기문화의 유입설을 뒷받침한다는 게 최 교수의 설명이다. 군곡리에서 확인된 중국화폐인 화천은 기원 전 후 동방교역로가 존재했음을 알려주는 결정적인 자료다.

 

 

 

중국화폐 화천

 

연대가 확실하고 단기간에 주조·통용된 화천은 고고학 자료에서 굉장히 중요한 유물이에요. 왕망(王莽)의 신나라(·AD 8~AD 23) 때 주조된 경화인데, AD 12~40년까지 통용된 화폐였어요. 28년간 주조된 화폐였기에 고고학 연대를 추정하기에 안성맞춤이지.”(조 관장)

 

화천과 함께 진(()대에 통용된 반량전(半兩錢), BC 118년부터 주조된 오수전(五銖錢) 등도 교류의 증거다.

 

우선 사천 늑도에서 확인된 유물들은 군곡리 것과 거의 같다. 또한 고흥 거문도에서는 오수전, 제주도 산지항 유적에서는 오수전·화천, 창원 성산패총에서는 오수전, 김해패총에서는 화천이 각각 확인되었다.

 

물론 발해연안에서 출발, ()~부여~한반도~왜 등 발해문명권에서 널리 확인되는 복골(卜骨)의 존재 역시 문화교류와 공유의 흔적이기도 하다. 근거를 대라고?

 

“(왜로 가는 길은) 한반도 서해안에 연한 물길로 한국을 경유하여 혹은 남으로, 혹은 동으로 나아가면 왜의 북쪽에 있는 김해(구야한국·狗邪韓國)에 닿는다. 여기까지가 7000리이다. ~바다를 건너 천여리에 대마도(對馬島)가 있다. ~ 또 남으로 한해(澣海)를 건너면 큰 나라가 있는데(이키시마·壹岐島)~또 바다를 건너 천여리에 말로국(末盧國·규슈)이 있다.”(삼국지 위지 왜인조)

 

삼국지에 이토록 자세한 기록이 남아있는 것이 신기롭기만 하다. 고고학적인 자료와 삼국지 기록을 토대로 한반도 중부~서해안~남해안~왜로 이어지는 항로를 그릴 수 있다.

 

한반도 서해안~군곡리~늑도~김해~대마도~이키시마(壹岐島)~규슈를 잇는 동방교역로가 기원 전부터 존재했다는 얘기입니다.”(최 교수)

 

조현종 국립광주박물관장은 이키시마의 하라노스지 유적에서 선착장 유구와 함께 하역장 시설이 확인된 바 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이 동방교역로에서 군곡리의 위치는?

 

영산강을 통해 내륙으로 연결되는 관문유적의 기능도 있었을 겁니다. 영산강 유역에 존재하는 나주 수문패총과 낭동 패총, 광주 신창동 등이 이를 증명하지요.”(조현종 관장)

 

서해안에서 남해안으로 돌아가는 길목에 있었던 중간 기착지이기도 했겠죠. 서해안의 긴 항로가 남해안으로 꺾어지는 길목이니까. 군곡리에서 사람들은 다시 늑도~김해~대마도~이키시마~규슈 등으로 이어지는 긴 여정을 준비했겠죠.”(최 교수)

 

그러니까 동방교역로의 중간기착지이면서 영산강을 따라 한반도 내륙으로 물품을 수출입하는 국제무역항 기능을 담당했다는 얘기지.”(조유전 관장)

 

기자는 2000년 전 선진문물의 도입창구로 번성했던 국제무역항의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동북아를 강타한 한랭기후

그런데 최성락 교수는 한가지 재미있는 현상을 발견했다.

조개무지와 함께 발견된 토기류.

 

한반도 내륙에서는 청동기 시대(BC 3세기까지) AD 4세기 무렵부터의 유적이 선후관계를 이루는 예가 많은데, 이상하게도 BC 2~AD 2세기까지의 유적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겁니다.”(최성락)

 

그렇다면 내륙에서는 BC 2~AD 2세기가 공백기라는 얘기인데.”(조유전 관장)

 

. 그 공백기 사람들이 내륙에서 농사를 지은 게 아니라 해안가에서 어업이나 무역업에 종사했다고 보는 겁니다.”(최성락)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청동기시대부터 벼농사가 시작된다. BC 5세기 무렵 중국대륙에 약육강식의 시대인 전국시대가 개막되면서 성행하는 철기문화가 한반도로 파급된다. 준왕의 해로를 통한 망명(BC 194)에서 보듯 철기문화는 서해안을 따라 급속도로 파급된다. 군곡리와 늑도 등 주요 해상거점에 사람이 모여들고 무역거점이 건설된다. 서해안 해상루트를 통한 동방교역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그러다 AD 100~AD 250년 사이에 동북아시아는 한랭기에 접어듭니다. 냉해가 극심해지고, 곡물생산량이 급감하게 됩니다. 내륙에서 농사를 짓던 사람들은 해안으로 터전을 옮기며 식량문제로 약탈과 전쟁이 일어나게 됩니다.”(최 교수)

 

최 교수는 그 근거로 삼국사기와 삼국지 등 역사서를 들춘다.

조유전 토지박물관장(오른쪽)과 최성락 교수가 호박밭으로 변한 군곡리 현장에서 토기편을 수습하고 있다.

고기후를 연구한 자료를 보면 AD 100~250년 사이가 한랭기였음을 보여준다. 184년 일어난 황건적의 난, 191~194년 사이 원소와 원술의 기병에는 사람을 서로 잡아먹는 등의 극심한 기아가 배경에 깔려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였다.

“170 7월 서리와 우박이 내려 곡식이 큰 피해를 입었다. ~192 4월 서울에 눈이 3척이나 내렸다. 193년 왜인 천여명이 큰 기근으로 먹을 것이 없어 우리에게 구하니~. 194 7월 서리가 내려 곡식이 죽어 백성들이 굶주리니~.”(삼국사기)

 

음력 4월과 7월인데도 서리가 내리고 눈이 내리는 등 이상 한랭기후가 극에 달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남해안 지역 집자리 유적을 살펴보면 불에 탄 곳들이 많아요. 또 패총도 해발 100m 이상 되는 고지에 자리잡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극심한 기근 상태에서 식량자원 확보를 위한 부족간 전쟁이 일어났고, 패총도 전쟁을 피하기 위해 고지로 올라간 거죠.” 이기환 선임기자

(출처;

http://news.khan.co.kr/section/khan_art_view.html?mode=view&artid=200808011650055&code=900305)

 

5.38 창원 다호리유적; 2100년 전(BC 1C)

2016 3 16일자 동아일보 기사 [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 <4> 다호리 발굴한 이건무 도광문화포럼 대표

2000년 전 붓과 삭도 한반도 문자문명 시대를 알리다

 

이 연구관, 창원 다호리 유적에 도굴이 심하다는데 직접 가서 조사해 보시오.”

 

1988 1월 정양모 당시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실장(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이 이건무 학예연구관(전 국립중앙박물관장·현 도광문화포럼 대표)에게 현장조사를 지시했다. 경남 창원시 다호리 고분군은 도굴꾼들 사이에서 실습장으로 통할 정도로 유물 도난이 빈번했다. 1980년대 국가 사적 발굴을 주도한 박물관이 묵과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이건무는 이영훈(현 국립중앙박물관장), 윤광진(국립문화재연구소 보존과학연구실장), 신대곤(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 학예연구사와 함께 다호리로 향했다.

 

현장은 처참했다. 야트막한 구릉 곳곳에 원삼국시대 고분을 파헤친 도굴갱 4050개가 줄지어 있었다. 생각보다 극심한 도굴 피해에 이건무는 다급해졌다. 한겨울 대기에 노출된 유구는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급격한 손상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팀원들과 하루 내내 전체 고분에 대한 현황 파악을 마친 뒤 이 중 구덩이가 제법 큰 1호분 발굴에 그달 21일 착수했다. ‘뭔가 있어 보인다는 그의 직감은 곧 월척으로 이어졌다.

 

도굴꾼이 깔아놓은 볏단을 치우자 약 2m 깊이의 도굴갱 아래로 너비 0.8m, 길이 2.4m의 통나무 목관 상판이 드러나 있었다. 목관 내 유물을 빼내기 위해 도굴꾼들이 상판 일부를 깨뜨려 놓았지만 거의 원형에 가까운 상태였다. 발굴팀은 목관을 빨리 수습하기로 하고 주변 흙을 파내기 시작했다. 구덩이 안에서 물이 계속 흘러나와 진흙탕이 돼 바가지로 물을 퍼내야 했다. 겨울에 물을 퍼내는 게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지만 이것은 축복이었음이 곧 드러났다.

 

어어, 목관 밑에 뭔가 있다!”

 

목관에 체인을 감아 도르래로 들어올리자 바닥에 박혀 있던 동경(銅鏡) 조각이 햇빛에 반짝거렸다. 발굴팀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일제히 아래를 내려다봤다. 거기 대나무 바구니가 박힌 조그마한 구덩이가 있었다. 부장품을 따로 묻은 구덩이 요갱(腰坑)’이었다. 요갱 안에는 철검, 꺾창, 쇠도끼, 낫 등 철기와 칼집, , 화살, (), 부채, 붓 등 칠기(漆器) 동검, 동경 등 청동기 등이 거의 온전한 형태로 남아 있었다. 기원전 1세기 무렵 원삼국시대 변한의 목관과 칠기가 부식되지 않고 2000년 넘게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은 물 덕분이었다. 매장 직후 물이 뒤섞인 진흙이 목관을 덮어 외부 공기를 차단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경남 창원시 다호리의 진흙 구덩이에 묻혀 있던 통나무 목관(맨위 사진). 목관을 도르래로 꺼내(두 번째) 연구실에서 세척을 마친 뒤(세 번째) 보존 처리에 들어갔다. 목관 밑 구덩이에서는 2000년 전 붓(네 번째)이 발견됐다. 이건무 대표 제공

 

이건무가 꼽는 다호리 유적 최고의 유물은 뭘까. 그는 주저 없이 붓과 삭도(削刀·목간에 잘못 쓴 글씨를 깎아내는 지우개)를 들었다. 완형으로 처음 출토된 통나무형 목관도 학술적 의미가 상당하지만, 부장된 붓과 삭도의 상징성이 매우 크다는 얘기다. 고고학계는 다호리 유적의 붓과 삭도를 기원전 1세기경 한반도에서 문자가 쓰였음을 보여주는 강력한 증거라고 본다. 이건무의 회고. “당시 한 일본학자가 옻칠용 붓이라며 의미를 깎아내리려 했습니다. 하지만 중국 쪽 자료를 검토해 보니 다호리와 마찬가지로 붓과 삭도, 천평(天枰·저울)이 한 세트로 출토된 사실이 확인됐어요. 마치 지금의 영수증처럼 천평으로 물건을 단 뒤 매매 기록을 죽간(竹簡)에 붓으로 기록한 흔적인 겁니다.”

 

이와 관련해 다호리 1호분에서는 무덤 주인의 사회적 신분을 과시하는 대표적 위세품인 한나라 오수전(五銖錢)이 함께 나왔다. 기원전 1세기 변한의 풍부한 철기를 매개로 중국, 왜와 교역을 벌여 부를 쌓은 이 지역 수장이 묻혔을 것이라는 가설이 제시됐다. 김상운 기자

(출처;

http://news.donga.com/List/Series_70040100000214/3/70040100000214/20160316/770189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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