력사를 찾아서
《만주와 한반도 12,000년 전~ 2,000년 전 년대기》 5.8 상(은) 본문
《만주와 한반도 12,000년 전~ 2,000년 전 년대기》 5.8 상(은)
대야발 2024. 2. 9. 15:38《만주와 한반도 12,000년 전~ 2,000년 전 년대기》
5.8 상(은); 3600년 전~3046년 전(BC 1600년~BC 1046년)
안정애 《중국사 다이제스트 100》 〈상나라의 건국〉
『갑골의 파편으로 상나라의 수도 은의 유적을 발굴하다
1899년의 어느 날, 갑골의 파편이 한 학자의 집에 찾아들면서 3,000년이 넘도록 땅 속에 감추어져 있던 상(商)나라의 실체가 밝혀지게 되었다. 상나라의 후기 도읍지인 은(殷)의 유적, 즉 은허가 발굴되었던 것이다. 상나라는 역사적으로도 아주 오랫동안 마지막 도읍지 은의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
은허 상나라의 수도.
그 학자는 왕의영. 그는 당시 국자감의 제주, 오늘날의 국립대학 총장이었는데, 금석학 등에 조예가 깊어서 그의 문하에는 많은 젊은이들이 모여 있었다. 그중 유철운이 갑골문을 발견하는 행운을 얻었다. 왕의영은 말라리아에 걸려서 특효약으로 소문난 용골을 갈아 먹게 되었다. 용골이 막 빻아져 약재로 변하려는 순간, 때마침 그곳을 지나던 유철운이 문득 범상치 않은 글자의 흔적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는 4년 후에 《철운장귀(鐵雲藏龜)》라는 책을 발간함으로써 갑골문자의 존재를 세상에 널리 알리게 되었다.
상나라 영역 역사적으로 검증된 최초의 중국 왕조 상나라의 영역.
전설 속 상나라의 실재를 확인하다
그러던 중 하남성 안양현 소둔촌에서 하천이 범람하면서 갑골의 파편이 대량으로 발굴되었다. 이 지역은 1928년부터 약 10년간 본격적인 발굴이 진행되어 대량의 갑골 파편, 궁전과 거주 유적, 훌륭한 청동기와 도자기뿐 아니라 이를 만든 장인의 공장, 엄청난 순장자와 정교한 청동제 보물이 함께 매장된 순장묘 등이 발굴되었다. 특히 짐승문양을 새긴 청동 주물들은 매우 출중한 작품으로 꼽힌다. 이곳은 기원전 1300년부터 기원전 1046년까지 상나라의 후기 도읍이었던 은의 유적이었다.
20세기 초까지도 사람들은 상나라의 실재를 의심하고 있었다. 상나라는 전설 속에서나 존재하는 나라일 뿐이었다. 그러나 갑골문자가 안내해 준 은허의 세계는 상당히 높은 수준에 도달한 청동문물이었다. 《사기》에 기록된 은 왕실의 세계표는 거의 오차가 없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사기》의 〈은본기〉에 의하면, 상나라는 탕왕(湯王)에 이르러 하나라의 걸왕(桀王)을 쓰러뜨리고 주변국 위에 군림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지위는 불안정하여 수도를 다섯 번이나 옮긴 후에야 비로소 은에 정착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에는 도읍을 옮기지 않고 273년 동안 유지되었으니 세력이 안정되고 농업이 발달했던 것으로 보인다. 1950년 이후 상에 대한 본격적인 발굴이 다시 진행되면서, 각지에 상(商)왕조 시대 유적이 드러났다. 그 중 하남성 정주의 상성 유적은 가장 큰 도읍 유적으로, 기원전 1600년 상나라 건국 당시의 유적으로 알려져 있다. 정주의 청동기 유물은 은의 청동기에 비해 상당히 원시적인 것이 포함되어 있다.
한자의 원형, 갑골문자가 발굴되다
은의 유적에서 가장 중요한 발굴은 역시 수만 편에 달하는 갑골편에 새겨진 문자이다. 갑골은 점에 사용되던 귀갑과 수골을 줄인 말로, 실제로 귀갑은 거북의 등껍질보다 배 껍질이, 수골은 소의 어깨뼈가 많이 사용되었다. 이제 겨우 한자를 배우기 시작한 초보자의 눈으로도 갑골문 몇 자는 확인할 수 있다. 갑골문자는 한자의 원형이며 문장의 구조도 오늘날의 중국어와 같다. 세계의 고대문명 중에서 중국처럼 일관된 문화를 유지해 온 나라는 드물다. 그 동력으로 한자라는 공동의 문자를 꼽는 데 주저하는 사람은 없다. 한자는 표의 문자라서 언어가 다른 여러 민족들과 광대한 영역을 하나로 통합할 수 있었던 중국의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갑골 위에 점괘를 기록하다
갑골문에 '상(商)'이라고 새겨진 선명한 글자가 확인되었다. 상의 왕은 국가의 중요한 일을 결정할 때 항상 점을 쳐서 길흉을 판단하였다. 즉, '신의 뜻'을 묻는 것이다.
갑골의 뒷면에 구멍을 내어 단상에 올려놓고 제사를 지낸 다음, 이곳을 불로 지지면 균열이 생기게 된다. 이때 균열의 형태나 수, 주변의 색깔 등으로 신의 뜻을 판단했다. 정인(貞人)이라고 불렸던 점술사는 점을 친 후, 언제 누가 무엇에 대해 점을 쳤으며 그 결과는 어떠했는지를 갑골 위에 기록했다. 이것이 바로 갑골문이다.
갑골문 귀갑 갑골문자가 적힌 귀갑. 은허 유적 출토품.
그런데 당시 국가의 중대사란 기상이나 자연현상, 농사의 풍흉, 자연재해, 제사, 전쟁, 수렵, 임신, 질병 등 온갖 것이 다 포함된다. 나라의 크고 작은 일들이 신의 뜻을 묻는 형식을 통해 결정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갑골은 일회용으로 사용된 것이기 때문에 은허의 한 갱에서는 한꺼번에 1만 7,700편의 귀갑이 출토되기도 했다. 말하자면 당시의 쓰레기 처리장이 오늘날의 가장 중요한 유적이 된 셈이다. 현재 점괘를 기록해 놓은 복사(卜辭)는 총 16만 개 이상이 남아 있다.
강력한 제정일치의 신권정치가 행해지다
상나라에서는 왕에 의한 강력한 제정일치의 신권정치가 행해졌다. 정치적 권력을 장악한 왕은 자신만이 하늘과 소통할 수 있는 신비한 능력을 지녔다고 자처하면서 장엄한 제사 의식을 통해 이를 증명하고자 했다. 이러한 신권정치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자연의 위대한 힘 앞에서 끝없이 무력감을 느껴야 했던 초기국가의 일반적인 정치형태다.
상나라 사람들은 10개의 태양이 땅 속에 있다가 매일 하나씩 교대로 천상에 나타난다고 믿었기 때문에, 열흘 간격으로 다음 태양이 떠오르는 밤마다 일상적으로 점을 쳤다. 그 열 개 태양의 이름이 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 즉 십간(十干)이다. 하늘 신과 땅의 신, 그리고 조상신을 숭배했다. 특히 사망한 선왕이 천신의 뜻을 전달해 인간세계에 복이나 화를 내린다고 믿었기 때문에 선왕에 대한 장례와 조상에 대한 제사를 매우 성대하게 치렀다. 제사를 게을리 하지 않는 것은 왕의 가장 중요한 업무의 하나였다.
은의 갑골 복사 1의 뼈 왼쪽 각자는 유(酉)의 제사에 소를 써도 좋은지의 여부, 2는 참수의 의례, 3은 행이라는 사람의 길흉을 점친 것이다.
왕은 수천 명의 귀족 전사와 함께 대규모 원정을 수없이 감행했는데, 상나라에 복속된 연맹부족들은 공물을 바치고 유사시에 병력을 제공하는 한편, 은의 제사를 공동을 받들었다. 즉, 당시의 제전은 은의 지배력을 확인하는 유일한 의식 절차로서 의미가 있었다.
세계 최고 수준의 청동기가 발굴되다
은허에서 갑골문 다음으로 찬탄의 대상이 되는 것은 세계 최고 수준의 청동기들이다. 그 제작기술은 흔히 서양의 르네상스기에 비견되는데, 특히 청동제기의 정교함과 세련미는 따라갈 것이 없다. 제기는 반드시 하나씩만 만들어졌으니, 제사에 바친 그들의 정성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청동기는 왕과 왕족, 그리고 귀족들, 즉 지배층의 독점물이었고 그들에 의해 무기나 제기로만 사용되었다. 그들은 청동무기로 무장하고 지배력을 주변지역으로 확대해나갔으며, 신의 후예임을 자처하면서 화려한 제사의식으로 백성들 위에 군림했다.
은대 말기의 도철기룡문 격정 괴수의 얼굴을 새긴 도철문은 은 · 주 시대에 유행한 문양으로 무서운 짐승의 얼굴을 통해 악령을 퇴치하려는 주술적 성격을 띤 것으로 보인다.
사회적 부를 빼앗긴 중인과 신체의 자유를 박탈당한 전쟁 포로
생산 활동은 '중인(衆人)'으로 불렸던 하층 계급이 왕과 귀족에 예속되어 사회적 부를 창출했다. 생산기술에는 커다란 진전이 없었다. 그들은 청동문명의 혜택에서 소외되어 여전히 토기나 목기, 석기를 사용하고 있었고, 반지하식 움집에서 기거하고 있었다. 그러나 왕은 살아서는 회랑으로 둘러싸이고 다시 토성으로 둘러싸인 거대한 궁궐에서 화려한 생활을 하고, 죽어서는 청동기 · 옥기 등이 대량으로 부장된 화려한 무덤에 매장되었으니 이는 백성들에 대한 가혹한 수탈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었다. 최하위 계층은 전쟁 포로였다. 그들은 귀족의 노예로서 신체의 자유를 박탈당한 채 사고팔리거나 죽임을 당했다. 주인이 죽은 뒤 순장되거나 제물로 바쳐졌다.
백성 통제를 위해 야만적으로 다스리다
왕은 백성들을 통제하기 위해 감옥을 짓고 잔인한 형벌로 공포감을 주어 야만적으로 다스렸다. 목을 베거나 배를 가르고, 코나 발꿈치를 자르며, 살을 베어내 잘게 다지는 등의 온갖 잔혹한 형벌이 자행되었다.
특히 충격을 주는 것은 대규모 순장의 풍습이다. 대형 묘에는 한꺼번에 수백 명의 사람들이 왕의 사후 생활의 편의를 위해 생매장되기도 했다. 가까운 신하와 처첩, 호위병, 하인들이 매장되었다. 이러한 풍습은 귀족 계층에도 확산되었다.
갑골문의 저주, 갑골문 연구를 집대성한 학자들이 비극을 맞다
갑골문의 연구는 왕의영, 유철운, 그리고 나진옥과 그의 제자 왕국유에 의해 집대성되었다. 그런데 이들의 삶이 모두 비극으로 끝나게 되어 사람들은 이를 '갑골문의 저주'라고 부르기도 했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상나라의 건국,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832967&cid=62059&categoryId=62059)
2008년 2월 15일자 경향신문 기사 〈[코리안루트를 찾아서](19)상나라와 한민족(上)〉
『상나라 귀족묘 출토 인골…한족 아닌 백의민족 모습
“(시조인) 설 현왕이 아들 소명(설로부터 2대)을 낳고 지석(砥石)에 거주했다.”(순자·성상편)
중국 문헌은 동이족인 상족(商族)이 중원으로 내려와 하나라를 멸할 때까지의 역사와 활동무대, 즉 시조 설부터 성탕의 상나라 건국(BC1600년)까지 상황을 짐작할 수 있는 단서를 던져놓았다. 중국 학계는 이 문헌기록을 토대로 다각적인 분석에 들어간다.
안양 인쉬에서 발굴한 상(은)나라 무덤. 노예로 추정되는 대량의 인골이 나란히 묻혀 있다. 순장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부여의 습속과 같다.
옌산에서 백두산·헤이룽강까지
처음에 인용한 ‘순자 성상(荀子 成相)’편의 기록을 검토해보자.
“요(遼·랴오허를 뜻함)는 지석에서 나온다”는 내용이 ‘회남자(淮南子) 추형훈(墜形訓)’편에 나온다. 이 내용을 주석한 가오유(高誘)는 “지석은 산의 이름이며 변방의 바깥에 있고, 요수(遼水·랴오허)가 그곳에서 나와 남쪽으로 흘러 바다에 이른다”고 했다.
즉 시조 설은 랴오허의 발원지인 지석에 살았으며, 지금의 네이멍구(內蒙古) 자치구 츠펑(赤峰)시 커스커텅치(克什克藤旗) 부근이라는 것이다. 물론 ‘남쪽바다’는 발해이다.
또한 ‘여씨춘추 유시(有始)’편에는 “하늘에는 9개의 들이 있는데, 북방을 일컬어 현천(玄天)이라 한다”고 했다. 따라서 진징팡(김경방·金景芳)은 이 모든 문헌을 근거로 “설, 즉 현왕은 북방의 왕”이라 단정했다.
“상토(설로부터 3대)가 맹렬하게 퍼져, 해외에서 끊어졌다(相土烈烈 海外有截)”(시경·상송)는 내용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상토는 시조 설의 손자. 중국 학계는 이 기록을 토대로 상토 때 상족의 활동무대를 발해 연안으로 보고 있다. 상토는 무공이 매우 뛰어났으며, 마차를 발명하여 세력을 떨친 이다. 시조 설로부터 7~8대인 왕해(王亥)와 상갑미(上甲微) 때는 “하백(河伯)의 군사를 빌려 유역족(有易族)을 쳐 멸망시켰다”고 한다. 그런데 유역족은 이수이(역수·易水)에서 그 이름을 빌려왔으며, 지금의 허베이성(河北省) 이셴(역현·易縣) 일대이다. 상족이 초기에 이미 허베이성 이셴까지 세력을 떨쳤다는 것이다.
고고학자 쑤빙치(소병기·蘇秉琦)는 “은(상)의 조상은 남으로는 옌산(연산·燕山)에서 북으로는 백산흑수(백두산과 헤이룽강)까지 이른다”고 단언했다.
또한 그 유명한 안양 인쉬(殷墟) 유적 발굴을 총지휘했던 푸쓰녠(부사년·傅斯年)은 일찍이 “상나라는 동북쪽에서 와서 흥했으며, 상이 망하자 동북으로 갔다”고 단정했다. 중국 학계도 이런 쑤빙치와 푸쓰녠의 관점이 가장 정확한 것이라고 인정하고 있다.
누누이 강조하지만 1970년대 이후 발해 연안에서 쏟아지기 시작한 발굴 성과가 이 같은 학설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인쉬(은허) 인골의 비밀
상나라 사람들과 발해 연안의 친연관계는 인종학의 지지까지 받고 있다. 인골전문가인 판지펑(반기풍·潘其風)은 인쉬(은허) 유적에서 출토된 인골들을 분석했는데 아주 의미심장한 결과를 얻어냈다.
“인쉬 유적에서는 상나라 귀족들의 묘가 발견되었는데, 발굴된 대다수의 시신들이 동북방 인종의 특징을 갖추고 있었어요. 인골들의 정수리를 검토해보니 북아시아와 동아시아인이 서로 혼합된 형태가 나타난 거지. 이것은 황허 중하류의 토착세력, 즉 한족(漢族)의 특징과는 판이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됐어요.”
또하나, 인쉬(은허) 발굴자들이 인정했듯 상나라 사람들이 동북방의 신앙을 존숭했다는 것이다. 즉 상나라 왕실에서 고위층 귀족들에 이르기까지 동북방향을 받들었는데, 이는 고향에 대한 짙은 향수와 숭배를 나타난 것이라는 해석이다.
결국 이 모든 중국 문헌과 고고학적인 발굴 성과로 미루어 보면 BC 6000년(차하이·싱룽와 문화)부터 시작된 발해문명의 창조자들이 그 유명한 훙산문화(BC 4500~BC 3000년)를 거쳐 샤자뎬(夏家店) 하층문화(BC 2000년 무렵~BC 1500년·즉 고조선 시기)를 이뤘다.
그리고 상나라의 시조 설은 차하이·싱룽와 문화-훙산문화의 맥을 이은 발해문명의 계승자로서, 샤자뎬 하층문화의 주인공이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설과 그의 손자 상토, 그리고 7~8대인 왕해와 상갑미 대를 거치면서 발해문명의 계승자들은 남으로 뻗어갔으며, 급기야 BC 1600년 무렵 중원의 하나라를 대파하고 천하를 통일했다.
쑤빙치가 “하나라 시대에 이미 중국 동북방 발해 연안에는 하나라를 방불케 하는 강력한 방국(方國), 즉 왕국이 존재하고 있었다”고 단언한 이유다. 물론 중국 문헌에는 다링허·랴오허 유역, 즉 발해 연안을 풍미한 발해문명의 주인공들이 과연 누구인지 적혀있지 않다.
그런 이유로 중국 학계는 단순히 상나라의 선조가 동북민족과 관련이 깊다고 인정하면서도 그냥 ‘연나라의 옛 땅’이라는 군색한 표현으로 정리하고 있다. 하지만 누누이 강조했듯 상나라를 이룬 동이족, 그 가운데서도 고조선·부여·고구려·백제 등 우리의 역사를 이룬 우리 민족과는 강한 친연성을 갖고 있다.
의미심장한 부여
이제부터는 상나라와 동이, 그 가운데서도 우리 민족과의 친연성을 차근차근 다져보자. 먼저 시조설화.
“(목욕을 갔던) 간적이 제비알을 삼켜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이가 설(契·상나라의 시조)이다.”(사기 은본기)
“북이(北夷)의 탁리국(탁리國) 왕이 출행했는데, 왕의 시녀가 후에 임신했다. 왕이 시녀를 죽이려 하자 시녀는 ‘전에 하늘 위에 기를 보았는데, 큰 계란 같았다.’(혹은 닭처럼 생긴 것이 하늘에서 내려와 임신시켰다) 이 왕이 시녀를 가두었는데, 뒤에 남자아이를 낳았다.~ 그 이름을 ‘동명’이라 했다. ~동명은 ‘부여’에 이르러 왕노릇을 했다. 곧 부여의 시조이다.”(후한서 동이전 부여조·논형 길험편 등)
“옛날 시조 추모왕이 창업의 기초를 열었다. 추모왕은 북부여 천제의 아들이요, 어머니는 하백의 딸이었다. 알에서 태어나 세상에 나오니 성덕이 깊었다. 이는 곧 고구려의 시조이다.”(광개토대왕릉비)
재미있는 신화의 공통점이다. 상(은)나라의 시조신화와 부여·고구려 등 동이족의 신화가 어쩌면 이렇게 비슷한지 모르겠다. 중국학계도 “새알을 삼켜 탄생하는 이른바 난생신화는 (중원이 아니라) 동북아 민족의 공통분모”(궈다순 랴오닝성 문물연구소 연구원)라고 인정한다.
“하늘이 현조(玄鳥·제비)에 명령해 상나라 조상을 낳아 넓디넓은 은땅에 살게 했다”(시경 상송 현조·詩經 商頌 玄鳥)는 기록은 상나라와 새의 깊은 관계를 웅변해준다.
고조선과 발해문명의 관계가 심상치 않다는 것은 이미 밝힌 바 있으므로(경향신문 1월26일자 ‘고조선과 청동기’ 참조) 생략한다.
이형구 선문대 교수는 고구려와 백제의 ‘조상’인 부여를 의미심장하게 바라보고 있다. 고조선과 달리 중국측 문헌자료도 풍부하기에 논란의 여지는 적어 보인다.
아닌 게 아니라 부여에 관한 중국사서와 우리측 문헌인 삼국사기·삼국유사를 보면 아주 재미있는 장면을 목격할 수 있다.
우선 중국 위·촉·오 등 삼국시대의 정사인 삼국지 위서 동이전 부여조와 중국 후한의 정사를 기록한 후한서 동이전 부여조(유송의 범엽이 5세기 무렵 저술), 그리고 당태종의 지시로 편찬된 진서(晋書) 동이전 등 중국측 사료를 종합해보자.
“(부여의 땅은) 동이의 땅 가운데 가장 좋은 곳이다.~사람들은 거칠고, 씩씩하고 용맹스러우며 근실하고 인후해서 도둑질이나 노략질을 하지 않는다. 활과 화살, 창, 칼로 무기를 삼으며~음식을 먹는 데 조두(俎豆·제기)를 썼고, 모일 때에는 벼슬이 높은 이에게 절하고 잔을 씻어 술을 권했다. 또한 읍을 하고 사양하면서 오르내린다. 은(상)나라의 정월에는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데(以殷正月祭天) 나라의 큰 모임이다. 연일 음식과 가무를 하는데(連日飮食歌舞), 이를 영고(迎鼓)라 한다. 흰색을 숭상하고 해외에 나갈 때는 비단옷 입기를 숭상한다. 밤낮 길을 가며 노인과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노래를 부르니 종일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군사를 일으킬 때는 하늘에 제사를 지내니 소를 잡아 그 굽을 보아 길흉을 점쳤다.(소굽이 갈라지면 흉하고 모이면 길하다) 사람을 죽여 순장을 하는데 숫자가 많을 때는 100명이 되었다. 남녀 모두 하얀 옷을 입고 부인은 베옷을 입고 목걸이와 패물을 떼어놓으니 이는 대체적으로 중국과 비슷한 면이 있다.(大體與中國相彷彿也)”
글귀마다 숨어있는 뜻이 굉장히 의미심장하므로 다소 장황하게 인용했다. 상나라의 그것과 너무도 비슷하기 때문이다.
은나라 역법을 쓴 이유는
“부여가 은(상)나라 달력을 써서 은의 정월에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은 많은 것을 시사해주는 대목이지. 역법(曆法)이라는 것은 왕권국가의 상징이에요. 새로운 왕조가 들어서면 어김없이 역법을 바꾸어 새 왕조가 천운에 따랐음을 나타냈어요.”(이형구 교수)
역법이 왕권과 국가의 상징일진대 부여가 하·주·진의 역법이 아니라 상나라의 역법을 썼다는 것은 범상치 않은 일이다.(이형구의 ‘발해연안에서 찾은 한국고대문화의 비밀’ 김영사 참조)
하나라를 멸하고 천하를 통일한(BC 1600년) 상나라 성탕은 바로 상나라의 역법을 새로 만든 것 외에도 옷색깔(복색)을 바꿔 흰색을 숭상했다.
“하나라는 흑색을 숭상하여 군사행동 때는 흑마를 탔고, 제사 때는 흑생 희생물을 바친다. 은나라는 백색을 숭상하여 군사행동 때는 백마를, 제사 때는 흰색을 바친다. 주나라는 적색을 숭상했는데~.”(예기 단궁상·禮記 檀弓上)
이것은 앞서 언급한 부여의 습속, 즉 “부여가 ‘흰색’을 숭상했다”는 사료와 일치한다. 이뿐이 아니다.
상나라 마지막 왕 주(紂)왕은 온갖 악행으로 폭군의 대명사가 되었다. 그랬다면 물론 나쁜 짓이지만, 한번쯤 곱씹어봐야 할 대목이 있다. “주왕은 수많은 악공들과 광대들을 불러놓고 술로 연못을 만들고 고기를 숲처럼 매달아놓고는 벌거벗은 남녀들이 그 안에서 서로 쫓아다니게 하면서 밤새도록 술을 마시며 놀았다.”(사기 은본기)
이 대목에서 “(부여에서는) 음식과 가무를 즐기고, 노인과 아이 할 것 없이 하루종일 노랫소리가 끊이지 않았다”는 사료가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이기환 선임기자』
(출처;
2008년 2월 22일자 경향신문 기사 〈[코리안루트를 찾아서](20)상나라와 한민족 中〉
『은·부여는 ‘君子의 후예’ 풍류 즐기고 禮 중시
은(상) 마지막 왕 주(紂)의 악행에 대해 변명할 필요는 없다.
충신의 심장을 갈랐고, 육포를 뜨고 젓을 담가 맛보게 했으며, 녹대(鹿台)를 만들어 세금으로 거둔 돈을 가득 채웠으니까. 폭군은 더 나아가 수많은 악공과 광대들을 불러놓고 주지육림의 난행을 펼쳤다. 벌거벗은 남녀들이 그 안에서 서로 쫓아다니게 하면서 밤새도록 술판을 벌인 것으로도 악명을 떨쳤다.(사기 ‘은본기’)
안양 인쉬 거마갱(車馬坑)에서 발굴된 마차유적. 은(상)의 위용을 짐작할 수 있는 자료다.
-주(紂)왕을 위한 변명-
주왕의 악행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지만 “악공과 광대를 불러놓고 밤새도록 술판을 벌인 일”에 대해서는 다소간 할 말이 있다. 바로 음주가무야말로 상나라 풍습의 영향을 받은 우리 민족의 ‘전매특허’가 아닌가.
“(은나라 정월에) 하늘에 제사 지내고 음식과 가무를 즐겼다(連日飮食歌舞). 밤낮으로 길을 가다가 노인 아이 할 것 없이 하루종일 음악소리가 끊이지 않는다”(삼국지 위지 동이전 부여조)는 부여 풍습이 대표적이다. 마한도 그랬다.
“(5월이면) 파종을 마치고 신령께 굿을 올린 뒤 무리가 모여 노래하고 춤추며 술을 마시는데 밤낮으로 쉼이 없다.(群醉歌舞飮酒 晝夜無休).”(삼국지 위지 동이전 마한조)
이는 왜 현재 우리나라 전국에 4만여곳의 노래방이 성업 중인지를 설명해주는 근거가 될지도 모른다.
그런데 우리 민족이 아무런 생각 없이 음주가무를 즐겼던 것일까.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서 보듯 우리 민족은 무절제한 음주가무가 아니라 하늘에 제사를 지낸 뒤 며칠씩 밤낮으로 술을 마시며 놀았다.
그것은 천·지·인이 만나 한바탕 신명을 떨친 축제였다. 천지신명과 조상에게 만물의 소생을 기원하고 추수감사를 드리는 전통축제였던 셈이다. 조흥윤 한양대 교수는 “하늘에 제사를 올리고 축제를 벌인 것이 바로 굿이고, 그것이 오늘날까지 이어진 것”이라고 말한다.
고조선 시기 순장무덤인 랴오둥반도 강상무덤.
“삼국시대 화랑도·풍류도와 고려시대 연등회·팔관회 등은 종교행사 형식이었지만, 내용면에서는 음주가무를 포함한 옛 제천의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무(巫)와 불교를 억압한 조선 때 크게 위축되었지만 신명과 음주가무라는 한국인의 민중문화는 면면히 이어졌다.”(조흥윤의 ‘한국문화론’ 동문선)
그렇다면 주왕의 난행은 어찌된 것인가. 동이족의 나라 은(상)을 멸망시키고 주나라를 세운 한족은 의도적으로 은나라와 주왕을 무도한 나라, 그리고 천하를 난도질한 망나니로 폄훼했다. 사마천의 사기는 한족이 기록한 ‘승자의 역사’인 셈이다.
일례로 축제 때 젊은 남녀들을 ‘풀어놓아’ 짝을 짓게 만드는 풍습은 지금도 동남아와 아프리카 등을 조사한 민족지 연구에서 심심치 않게 보이는 자료이다. 고대사회에서 이런 정도의 축제는 흉볼 ‘깜’도 안되는 자연스러운 풍습이다.
-동이는 군자의 나라, 불사의 나라-
그리고 은(상)나라가 무도하다고? 천만의 말씀이다. 탐사단이 추적해왔듯 이른바 동이족의 본향인 발해연안은 BC 6000년 전부터 문명의 씨앗이 뿌려진 곳이다. 발해문명의 창조자들은 이미 훙산문화(홍산문화·紅山文化·BC 4500~ 3000년) 때 하늘신과 조상신에게 제사를 드렸다.
지난해 7월 말 뉴허량 유적에 선 이형구 선문대 교수의 말은 의미심장했다.
“이미 이곳 둥산쭈이(동산취·東山嘴)의 제사유적과 뉴허량(우하량·牛河梁)의 여신묘와 적석총에서 봤잖아요. 하늘신, 지모신에게 제사지내고, 그리고 적석총에 마련된 제단에서 조상을 기린 그런 모습들을 그릴 수 있잖아요. 웅녀의 원형이 뉴허량 여신묘에 그대로 나타나잖아요. 그리고 적석총 제단은 지금으로 따지면 조상에 대한 시제를 올리는 성스러운 장소라고 봐야 합니다.”
이교수는 “발해문명 창조자의 일파가 서쪽으로 남하해서 건국한 상나라에서는 제천(祭天), 즉 하늘에 대한 제사와 조상에 대한 제사(祭祖)가 확립된 시기였다”고 말한다. 중국학자들도 훙산문화 시기에 벌써 신권과 왕권이 합쳐진 제정일치 시대가 개막되었다고 본다.
청동으로 만들어진 부여인의 얼굴.
그런 점에서 동이족의 나라 은(상)을 극악무도한 나라로 폄훼하는 것은 억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후한서’ 동이열전(5세기 유송의 범엽이 저술)과 ‘설문해자’(說文解字·후한 때 허신·許愼이 펴낸 최고의 자전)를 종합해 보자.
“동방은 이(夷)이며, 이는 근본이다. 만물이 땅에서 나오는 근본이다. 동이의 풍속은 어질다. 천성이 유순하다. 군자의 나라요, 불사의 나라이다. (天性柔順 易以道御 至有君子 不死之國焉) 때문에 공자는 ‘중국에 도가 행해지지 않으니 나는 군자불사의 나라인 구이(九夷)에 거하고 싶다’(故孔子欲居九夷)고 말했다.”
‘후한서’ 동 이전과 ‘삼국지’ 위지 동이전은 동이의 역사를 나열하기 전 ‘서론’ 형식으로 쓴 전언(前言)에서 이렇게 칭찬하고 있다.
“동이는 모든 토착민을 인솔하여 즐겁게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며 그릇은 조두(俎豆·제기)를 쓴다. 중국에서 예를 잃어버리면 사이(四夷)에서 구한다는 것은 믿을 만 한 일이다. (중국) 천자가 본보기를 잃으니 이것을 사이에서 구했다.”
“난 은나라 사람이다.”(공자의 고백)
동이가 예(禮)의 민족임을 중국사료도 인정한 것이다. 그뿐이랴. 만고의 성인인 공자도 동이족의 후예였음을 고백했다.
“천하에 도가 없어진 지 오래다. ~장사를 치를 때 하나라 사람들은 동쪽 계단에, 주나라 사람들은 서쪽 계단에 모셨지만 은(상)나라 사람들은 두 기둥 사이에 모셨다. 어젯밤 나는 두 기둥 사이에 놓여져 사람들의 제사를 받는 꿈을 꾸었다. 나는 원래 은나라 사람이었다.(予始殷人也)”(사기 공자세가)
죽음을 앞둔 공자의 생생한 육성유언이었다. “주나라가 하나라와 은나라의 제도를 귀감으로 삼았기에 나는 주나라를 따르겠다”고 선언했던 공자. 하지만 그런 공자도 군자의 나라이자 불사의 나라인 동이로 가고 싶다고 했다. 결국 죽음에 이르러 “나는 원래 은나라 사람”이었음을 세상에 알린 것이다. 은나라 주왕 때 세 명의 성인이 있었다.
바로 훗날 기자조선을 세운 기자(箕子)와 송나라를 세운 미자(微子), 그리고 주왕에게 심장을 도륙당한 비간(比干) 등이다. 미자는 주왕의 서형(庶兄)이었다.
은을 멸한 주나라는 미자에게 은(상)의 제사를 모시게 했다. 미자는 ‘미자지명(微子之命)’을 지어 뜻을 알리고는 송나라를 건국했다. 그런데 공자는 바로 그 송나라 귀족의 후손이었다. 공자는 동이족의 후예답게 어릴 때부터 타고난 듯 예법을 따랐다.
“소꿉장난을 할 때 늘 제기(祭器)인 조두(俎豆)를 펼쳐놓고 예를 올렸다.”(사기 공자세가)
‘조두’에서 조(俎)는 제사지낼 때 편육을 진설하는 도마처럼 생긴 제기이고, 두(豆)는 대나무·청동·도자기 등으로 만든 제사지낼 때 음식을 담는 그릇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조두라 하면 제기를 뜻한다. 공자는 만능 뮤지션이었다. 동이의 후예다웠다.
때는 바야흐로 춘추시대 말기. 세상이 어지러워져 자신의 숭고한 뜻을 알아주지 않자 거문고를 뜯고, 경(磬·돌 혹은 옥으로 만든 타악기)을 치고 노래를 부르며 안타까워했다. 음악에 대한 공자의 철학은 심오했다.
“감정이 소리에 나타나 그 소리가 율려(律呂)를 이루면 그것을 가락이라 한다. 세상의 가락이 편안하고 즐거우면 화평하지만 어지러운 세상의 가락은 슬프고 그 백성은 고달프다.”
우리 민족의 무용·문학·음악 등 예술의 바탕에 공자의 음악철학이 깔려있다면 지나친 해석일까.
-순장제도의 실상-
목 없는 순장자들의 유골.
중국학계는 또한 은나라의 습속인 순장(殉葬)제도를 야만성과 연결짓기도 한다. 은(상)의 말기 도읍지인 안양(安陽) 인쉬(은허·殷墟)의 제1001호 대묘에서 확인된 360명의 순인(殉人)의 예를 들면서….
중국의 황잔웨(황전악·黃展岳)는 “순장과 같은 야만적인 습속은 은나라 통치세력권에서 성행한 것으로 은의 동방 회이와 동이 지역에서 널리 유행했다”고 비난했다.
그도 그럴 것이 1963~65년 랴오둥 반도 강상(崗上)·러우상(樓上)유적에서는 100여명, 수십명을 순장한 고조선시기의 순장무덤이 발굴된 바 있다. 그리고 “부여에서는 사람을 죽여 순장했는데 많을 때는 100여명이 된다”(삼국지 위지 동이전)고 했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동천왕조를 보면 “248년 왕이 죽자 순사하는 자가 많아 이를 금지하도록 했지만, 그래도 속출했다”는 기록도 있다. 또 신라는 지증왕 3년, 즉 502년에 비로소 순장제도를 금지했다.
하지만 중국에서도 춘추전국시대 진(秦)나라 목공이 죽었을 때 무려 177명을 순장시킨 기록도 있다. 순장은 고대사회에서 유행한 장례풍습이었다. 진시황이 죽었을 때는 1만여명을 생매장했으며, 명나라 성조가 죽자 무려 3000여명의 비빈이 순장됐다.
이형구 교수는 “순장제도는 전제적인 지위와 통치권을 갖춘 통치자의 존재를 의미하는 것”이라면서 “동이의 습속이 야만적이냐 아니냐는 단순논리로 순장제도를 해석하면 안될 것”이라고 말했다.
-부여와 은(상)의 끈질긴 인연-
중국사서를 들춰보면 눈에 띄는 점이 나오는데, 그것은 ‘부여’를 늘 맨 처음에 올려놓고는 돋보이게 기술한다는 점이다.
진서(晋書·당태종 때 지은 진왕조의 정사)를 보면 “부여 사람들은 강하고 용감하며 모임에서 서로 절하고 사양의 예로 대하는데 중국과 같은 것이 있다(會同揖讓有似中國)”면서 중국과의 친연성을 강조한다.
“오랑캐의 나라지만 조두(俎豆)를 사용하여 음식을 먹고~, 풍습이 대체로 중국과 비슷하다(大體中國如相彿也)”(삼국지 위지 동이전)는 기록도 무시할 수 없다. 조두는 바로 공자가 어릴 때 소꿉장난을 했던 제기가 아닌가.
물론 중국측 기록으로 따져 봐도 부여가 BC 3세기쯤부터 494년 고구려에 병합될 때까지 700년이나 이어진 강력한 왕국이었기에 비중있게 다뤘을 것이다. 하지만 중국과의 친연성을 유난히 강조하는 것을 보면 은(상)으로부터 이어진 끈질긴 인연의 끈이 작용한 게 아닐까. 부여, 즉 우리 민족과 은(상)의 수수께끼를 풀어줄 단서가 또 있으니 바로 점복신앙, 즉 갑골문화이다. 이기환기자』
(출처;
2008년 3월 7일자 경향신문 기사 〈[코리안루트를 찾아서](21)상나라와 한민족 下〉
『‘갑골문화’ 동이족이 창조 한자는 발해 문자였을까
이형구 선문대 교수가 빛바랜 논문 한 편을 꺼냈다. 1981년 국립 대만대 유학 시절 작성한 중국어 논문(‘渤海沿岸 早期無字卜骨之硏究’)이었다. 그는 논문 뒤편에 쓴 후기(後記)를 보여주며 추억에 잠겼다.
“여기 후기에 ‘내가 병중에 초고를 완성했다(病中完成草稿)’고 했어요. 이 논문을 쓰기 시작할 무렵 대장암 진단을 받았거든. 의사가 수술을 빨리 받아야 한다고 했는데, 나는 죽기 전에 이 논문을 끝내야 한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어요. 그래 수술 날짜도 받지 않고 한 달 동안 밤을 새워가며 신들린 듯 논문을 완성했지. 그리곤 곧바로 다른 병원으로 달려가 재진찰을 받았는데, 아 글쎄 오진이라잖아요. 얼마나 기가 막혔는지….”
갑골문화는 동이의 지표
안양 샤오툰춘에서 나온 갑골과 갑골문자. 갑골문화는 발해문명권의 독특한 문화였다.
27년 전에 쓴 사연 많은 논문은 갑골문화와 우리나라 갑골문화의 관계를 처음으로 다룬 것이다. 논문은 대만 국립고궁박물원이 발행하는 ‘고궁계간’(81~82년)에 3회 연재되었다. 우리의 국사편찬위원회격인 대만 국립편역관이 펴낸 갑골학의 교과서인 ‘갑골문과 갑골학’(張秉權·장빙취엔)도 이 교수의 논문을 갑골의 기원을 가장 잘 논증한 논문으로 평가했다.
“그때까지 갑골문화라 함은 은(상)나라만의 독특한 문화로만 여겼거든. 내 은사이자 안양 인쉬(은허·殷墟) 유적을 발굴한 스장루(石璋如)·리지(李濟) 선생은 물론, 대륙의 후허우쉬안(胡厚宣) 선생 등도 모두 갑골문화의 원형을 황화 중류와 산둥반도에서 찾았어요.”
하지만 이형구 교수는 달랐다. 유학 초기부터 발해문명에 깊이 연구해왔던 이 교수가 아니던가.
“갑골문화의 분포지를 유심히 살피니 발해연안, 즉 동이족의 영역에 집중되고 있더군요.”
이 교수의 말마따나 “갑골문화는 동이족의 문화를 단적으로 나타내주는 지표”라 할 수 있다.
갑골(甲骨)은 복골(卜骨)이라고도 하는데 귀갑(龜甲·거북의 배 부분)이나 동물의 견갑골(어깨뼈)로 점을 치는 행위(占卜)를 말한다. 즉 거북이나 짐승뼈를 불로 지지면 뒷면이 열에 못이겨 좌우로 터지는데, 그 터지는 문양(兆紋)을 보고 길흉을 판단한다. 한자의 ‘卜’은 갈라지는 모양을 표현한 상형문자이다. 또한 발음이 ‘복’(한국발음), 혹은 ‘부(중국 발음)’인 것도 터질 때 나는 소리일 수도 있다.
그리고 이 점복은 왕이 주관했으며 길흉을 점친 것을 판정하는 사람을 정인(貞人)이라 했다. 은말(제을~주왕·BC 1101~BC 1046년)에는 왕이 직접 정인의 역할을 하기도 했다.
“貞자를 잘 뜯어봐요. 맨 위에 卜자가 있고 그 밑에 눈 目자, 맨 밑에 사람 人 등 세 부분으로 되어 있잖아요. 이것은 점(卜)을 보는(目) 사람(人)이라는 뜻입니다.”
점을 친 뒤에는 질문 내용과 점괘, 그리고 실제 상황과 맞아 떨어졌는지를 기록한다. 가장 오래된 월식사실을 기록한 은(상)의 무정(武丁·BC 1250~BC 1192년) 때의 갑골을 보자.
“癸未卜爭貞 旬無禍 三日乙酉夕 月有食 聞 八月(계미일에 정인 쟁이 묻습니다. (왕실에) 열흘간 화가 없겠습니까? 3일 뒤인 을유년 저녁에 달이 먹히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여덟번째 달에).”(김경일 교수의 ‘갑골문 이야기’, 바다출판사)
이렇게 점을 친 뒤 갑골판에 구멍을 뚫어 끈으로 꿰어놓는데, 이것이 바로 최초의 책(冊)이 아닌가. “오로지 은(殷)의 선인들만 전(典)과 책(冊)이 있다”는 “상서(尙書) 다사(多士)”편은 옳은 기록이다.
점복의 나라, 예법·효의 나라
이렇게 은(상) 사람들은 하늘신과 조상신, 산천·일월·성신 등 자연신을 대상으로 점을 쳤다. 국가대사에서 통치자의 일상 사생활까지, 예컨대 제사·정벌·천기·화복·전렵(田獵)·질병·생육까지….
“점복 활동과 관계된 기록을 복사(卜辭) 또는 갑골문이라 하는데 이것이 바로 역사입니다. 그리고 이 갑골문화야말로 발해문명, 즉 동이족이 창조한 문명의 상징이지. 갑골문을 보면 ‘선왕선고(先王先考)’, 즉 조상에게 제사 지냈다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결국 동방의 예법과 효 사상은 발해문명 창조자인 동이가 세운 전통이라 보면 됩니다.”(이형구 교수)
사실 하늘신과 조상신에 대한 끔찍한 사랑은 동이족만의 특징이었다. 훙산문화(홍산문화·紅山文化)에서 보이는 신전과 적석총, 제단 등 3위 일체 유적은 바로 하늘신·지모신·조상신에 대한 사랑을 표시한 예법의 탄생이자, 제정일치 사회의 개막을 상징한다.
그리고 점복신앙과 갑골문화 역시 마찬가지다. 이형구 교수가 갑골문화의 기원을 발해연안에서 찾은 이유다.
“군사를 일으킬 때 소를 잡아 제사 지내고, 소의 굽으로 출진 여부를 결정했다. 그 굽이 벌어져 있으면 흉하고, 붙어 있으면 길하다.(有軍事亦祭天 殺牛觀蹄 以占吉凶 蹄解者爲凶 合者爲吉).”(삼국지 위지 동이전 부여조)
부여·고구려의 점복기사는 삼국지 위지뿐 아니라 후한서와 진서(晋書) 등 중국사서에 차고 넘친다. 신라의 경우엔 아예 왕과 무(巫)가 동일시되기도 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남해차차웅조 기록을 보자.
“(2대) 남해 차차웅(次次雄)은 자충(慈充)이라고도 하는데, (김대문이 말하길) 방언에 이르길 무(巫)라 일컬었다. 세인들이 귀신(조상을 뜻함)을 섬기고 제사를 숭상하므로 이를 두터이 공경하고, 존장자를 칭하여 자충(慈充)이라 했다.”
그런데 ‘차차웅’ 혹은 ‘자충’을 방언으로 ‘무(巫)’라 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월식사실이 기록된 은(상) 무정(BC 1250~BC 1192년)시기의 갑골내용. 점을 친 정인의 이름과 점복내용, 실제 일어난 일 들이 기록됐다. | 김경일 교수의 ‘갑골문 이야기’에서
“한자음으로는 차차웅(츠츠슝)이나 자충(츠충)이 매우 비슷하다. 또 점복의 목적과 결과를 말하는 ‘길흉(吉凶·지슝)’과도 유사하다. 길흉의 한자음을 표음해서 차차웅 또는 자충이라 하지 않았을까.”(이형구 교수 ‘문헌자료상으로 본 우리나라 갑골문화’ 논문 중에서)
그럴듯한 해석이다. 점복신앙의 단서는 삼국유사 가락국기 시조설화에서도 엿보인다.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밀어라. 내밀지 않으면 구워먹겠다.(龜何 龜何 首其現也 若不現也 燔灼而喫也).”
유명한 내용인데, 이 교수는 “끽(喫)자는 구워먹겠다는 뜻이 아니라 점복에서 불로 지지는 행위를 뜻하는 계(契)자가 와전됐거나 가차(假借)된 것일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불변을 뜻하는 계(契)자는 갑골에 새긴 문자 혹은 불로 지져 터진 곳을 뜻하기도 한다. 그런데 문헌만 있고, 증거가 없으면 모든 소용인가. 고고학 자료를 보자.
갑골의 원류는 발해
우선 발해 연안. 1962년 시라무룬(西拉木倫) 강 유역인 네이멍구 자치구 바린쭤치(巴林左旗) 푸허거우먼(富河溝門) 유적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갑골이 나왔다. 그런데 이 유적에서는 갑골 외에도 동이족의 대표 유물인 지(之)자형 빗살무늬 토기가 공반되었다. 연대는 BC 3500~BC 3000년이었다. 이 연대는 중국·대만학계가 갑골문화의 원조로 보고 있던 허베이(河北)·허난(河南)·산둥(山東)반도의 룽산문화(龍山文化·BC 2500~BC 2000년)보다 1000년 이르다. 또한 고조선 문화에 해당하는 발해연안의 샤자뎬(夏家店) 하층문화 유적에서도 갑골이 흔히 발견된다. 츠펑 즈주산(蜘蛛山)·야오왕먀오(藥王廟) 유적, 닝청(寧城) 난산건(南山根) 유적, 베이뱌오펑샤(北票豊下) 유적 등에서도 다량의 갑골이 나왔다. 물론 이 유적들의 연대는 상나라 초기 갑골이 출토된 유적보다 이르다. 갑골의 재료도 거북이가 아니라 사슴과 돼지 같은 짐승뼈를 사용했다.
갑골문화는 은(상)의 중기~말기, 즉 무정왕~주왕(BC 1250~BC 1046년) 사이에 극성했다. 글자가 있는 갑골, 즉 유자갑골(有字甲骨)도 이때부터 유행하기 시작했다. 그 이전에는 모두 글자 없는 갑골, 즉 무자갑골(無字甲骨)이었다. 대부분 발해 연안에서 나타난다.
“또 하나 갑골의 분포도를 보면 재미있어요. 발해 연안에서 갑골 재료로 주로 쓴 것은 사슴과 양이었는데, 시대가 흐르고, 또한 남으로 내려오면서 소가 많아지거든. 이것은 시대와 사회가 농경사회로 급속하게 변했음을 알려주는 거지. 또 하나 발해문명 사람들이 기후가 온화한 중원으로 갑골문화를 대동하고 남천(南遷)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고….”
그런데 발해 연안에서 태동한 갑골문화가 중원으로만 확산된 게 아니었다. 1959년 두만강 유역 함북 무산 호곡동에서도 확인되었다.
하지만 이형구 교수가 81년 처음 논문을 쓸 때 풀 수 없는 수수께끼가 있었다.
갑골문화와 한반도
“왜 한반도에는 갑골이 보이지 않는지 정말 궁금했어요. 갑골문화는 일본 야오이(彌生)시대와 고훈(古墳)시대에도 보이는 현상인데 왜 한반도에는 없을까. 같은 동이족의 발해문명문화권인데….”
그런데 ‘병중 논문’의 초고를 완성, ‘고궁계간’에 송고한 뒤, 81년 가을 귀국하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로 재직 중이던 이 교수에게 한 편의 보고서가 전달됐다.
“이 교수가 좋아할 대목이 이 보고서에 있어요.”
당시 동아대 정중환 교수가 건넨 것은 ‘김해 부원동 유적’ 보고서였다. 이교수는 기쁨에 겨워 어쩔 줄 몰라했다.
“아! 학문을 한다는 게 얼마나 보람있는 일인지 실감한 순간이었지. 그 보고서에 바로 내가 그토록 찾던 복골의 존재가 있었거든. AD 1~3세기에 한반도에서도 갑골문화가 있었던 것을 확인했으니….”
이후 봇물이 터졌다. 김해 봉황동 유적과 사천 늑도, 전남 해남 군곡리 패총, 경북 경산 임당 저습지와 전북 군산 여방동 남전패총 등에서 갑골이 속출했다. 수 천 년 전부터 점복과 굿을 좋아했던 사람들. 지금도 20만명에 이르는 무당과, 30만 명에 달하는 역술인들이 성업 중인 ‘별난’ 나라, ‘별난’ 민족의 전통은 이토록 뿌리깊은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 그렇다면 동이족이 한자를 창조했다는 말인가.
“발해문명 창조자인 은(상) 시대에 갑골문자가 창조되었으니 그렇게 생각할 만하지. 하지만 아직 연산산맥 동쪽이나 한반도에서는 문자가 있는 갑골이 나오지 않았으니 조심스럽게 접근해야죠. 발해문명 창조자들인 동이족이 남으로 내려가 중원문화와 어울려 함께 한자를 창조했다고 정리하면 되지 않을까….” 이기환 기자』
(출처;
'지음 > 《만주와 한반도 12,000년 전~ 2,000년 전 년대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만주와 한반도 12,000년 전~ 2,000년 전 년대기》 5.16 하가점(샤쟈덴)상층문화~5.25 요녕성 타완촌유적 (2) | 2024.02.09 |
---|---|
《만주와 한반도 12,000년 전~ 2,000년 전 년대기》 5.9 민무늬토기 문화~5.15 여주 흔암리유적 (1) | 2024.02.09 |
《만주와 한반도 12,000년 전~ 2,000년 전 년대기》 5.4 하가점(샤자덴)하층문화~5.7 통영 욕지도유적 (1) | 2024.02.09 |
《만주와 한반도 12,000년 전~ 2,000년 전 년대기》 5.3 조선(2) (1) | 2024.02.09 |
《만주와 한반도 12,000년 전~ 2,000년 전 년대기》 5. 4,500년 전~2,000년 전 5.1 흑룡강 앙앙계유적~5.3 조선(1) (1) | 2024.02.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