력사를 찾아서
《만주와 한반도 12,000년 전~ 2,000년 전 년대기》 5.3 조선(2) 본문
《만주와 한반도 12,000년 전~ 2,000년 전 년대기》 5.3 조선(2)
대야발 2024. 2. 9. 15:26《만주와 한반도 12,000년 전~ 2,000년 전 년대기》
5.3 조선(2)
〈 [차근차근 한국미술사 21] 다뉴세문경 무늬는 천문과 삼각형 구름과 비〉
2019년 4월 8일 오마이뉴스
▲ 〈사진159〉 세모형 빗살무늬토기. 서울 암사동. 높이 36.8cm.
ⓒ 국립중앙박물관
『청동거울 무늬의 기원은 암사동 신석기 토기
'사진160-161' 중국 칠성각 거울을 보기에 앞서 서울 암사동 빗살무늬토기 문양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암사동 토기 문양에 중국 청동거울 문양을 풀 수 있는 실마리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사진159'는 서울 암사동 신석기시대 빗살무늬토기 아가리 부분이다. 가장 위쪽에 하늘 속 물(水) 층을 6층으로 새겼다.
왼쪽과 중간을 보면 무늬를 새기다 만 부분이 있는데, 이것은 하늘 속 통로, 즉 천문(天門)이다. 이 천문을 통해 삼각형 구름 또는 원(타원)형 구름이 나온다. 그리고 이 구름에서 비(雨)가 내린다('암사동 신석기인이 그린 서울 하늘 뭉게구름' 참조 바람). 이 그릇 무늬는 y축에서 본 하늘 속 물과 천문, 하늘, 구름, 비라 할 수 있다. 그에 견주어 '사진160-161'은 x축에서 본 비와 구름과 천문이다. '사진160-161' 다자인은 '사진159〉에서 아래 노란 수평선까지이다.
▲ 〈사진160〉 중국 치지아문화(濟家文化 기원전 2000년) 청해타마대 M25호 무덤. 칠성각(七星角) 기하문단뉴동경. 기원전 12-11세기. ‘칠성각’은 세모꼴 각이 일곱 개인 별 무늬란 말이고, ‘단뉴’는 뉴(고리)가 하나라는 뜻이다. 〈사진161〉 칠성각(七星角) 기하문단뉴동경에서 테두리를 지운 도상이다. 중국 청동기 장인이 생각한 실제 도상은 여기까지다. 테두리는 그의 디자인에서 염두에 두지 않은 것이다. ⓒ 김찬곤
별(星)이 아니라 삼각형 구름
중국 청동거울은 기원전 20세기까지 올라가나 '사진160' '칠성각 거울'(12-11세기)을 드는 까닭은 문양이 선명하고, 또 이 문양이 그전과 그 뒤 한중일 청동거울 문양을 풀 수 있는 기본 문양이기 때문이다. 중국 학계뿐만 아니라 한·일 학계에서도 이 문양을 '별문양(星文)'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고대 중국과 한반도 사람들은 별을 그릴 때 이렇게 세모꼴로 각이 지게 그리지 않았다. 고구려 벽화나 일본 기토라 천문도를 보더라도 큰 별은 좀 큰 '동그라미'로, 작은 별은 좀 작은 동그라미로만 구별했을 뿐이다. 이는 조선의 천문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문양을 별로 보는 것은 지극히 근대적인 관점이다.
'사진160'에서 바깥 테두리 선은 청동기 장인이 염두에 두지 않은 부분이다. 그래서 이것을 지우고 색을 더해 '사진161'처럼 그려 보았다. 가운데 천문에서 삼각형 구름이 나오고, 그 구름에서 비가 내리는 모양이다('한반도 빗살무늬토기의 무늬 종류' 참조바람). 이 디자인은 그 뒤 한중일 청동거울의 기본 디자인이 된다. 한반도 다뉴세문경 무늬도 이와 본질적으로 같다. 다만 무늬가 세밀하고 복잡할 뿐이다.
▲ 〈사진162〉 평안남도 맹산에서 나온 청동거울 거푸집으로 만든 청동거울 재현품. 유리건판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사진163〉 평안남도 맹산 청동거울 그림. ⓒ 국립중앙박물관
국보 제141호 다뉴세문경 무늬를 풀 수 있는 실마리 몇 가지
'사진162'는 평안남도 맹산 출토 거푸집으로 만든 청동거울이다. 맹산에서 나온 거푸집은 연대를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국보 제141호 다뉴세문경보다 이른 시기의 것일 가능성이 높다. 이 거울 무늬에는 국보 제141호 다뉴세문경 무늬를 풀 수 있는 실마리 몇 가지가 담겨 있다.
'사진163'을 보면 가운데에 팔각형 천문을 두었다. 이는 팔방(八方) 세계관이라 할 수 있다. 동서남북과 동북·서북·동남·서남 방향, 이렇게 팔방 세계관을 표현했다. 팔면에 붙은 삼각형 구름-①은 천문에서 여덟 방향으로 나오는 구름이다. 구름 안의 빗금은 비(雨)나 수분(水)을 뜻한다. 그러니까 구름 속에 물(水)을 머금고 있는 것이다. 삼각형 구름-②에서 주황빛 빗금을 보면 일부러 팔각형 면에 수평으로 그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삼각형 구름-③을 보면 구름-②의 규칙성에서 벗어나 있다. 이는 구름-①의 ㉮, ㉯에서도 볼 수 있다.
이렇게 규칙성에서 벗어나 있는 것은 디자인에 대한 구상이 완벽하지 않아서이다. 그래도 팔각형 천문과 거기에서 나오는 삼각형 구름, 이 구름에서 내리는 비만큼은 규칙성을 지켰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국보 제141호 다뉴세문경에서도 그대로 지켜진다. 다만 팔각형 천문은 둥근 원으로 바뀔 뿐이다.
'사진162'에서 ㉰, ㉱, ㉲는 삼각형 구름인데, 국보 제141호 다뉴세문경에서는 '구름'을 새길 때 이처럼 삼각형 한 변에 수평으로만 그린다. 이것은 빗금 비(雨)와 구별하기 위해서다. 우리 학계에서는 ㉰, ㉱, ㉲, ㉳를 삼각형 안에 선(線)이 모여(集) 있다 해서 '삼각집선문'이라 하고 있다. 그런데 ㉳처럼 삼각형 한쪽 면이 터진 집선문을 볼 수 있다. 사실 이것은 삼각형과는 관계가 없고, 삼각형 구름에서 나오는 비(雨)를 새겼다고 볼 수 있다. 삼각형 구름 사이에 빗금이 그려져 있어 잘못 읽은 것이다. 이는 '사진161' 칠성각 청동거울 도상을 봐도 확인할 수 있다.
비와 구름과 바람(風)
한국과 중국 미술사에서 바람(風)은 청동기시대 말 철기시대부터 문양이 보이기 시작한다. 신석기 세계관이 응축되어 있는 중국 한자 갑골에서는 단 한 자만 보이고, 육서통에 이르러서야 24자를 확인할 수 있다.
우리 기록에서 바람(風)은 <삼국유사> '고조선' 편에서 찾아볼 수 있다. 아마 이 기록이 가장 이른 시기의 기록일 것이다. 환웅은 이 땅에 내려올 때 풍백(風伯), 우사(雨師), 운사(雲師)를 거느리고 오는데, 여기서 풍백은 우사와 운사의 '맏이'(우두머리)이고, 비와 구름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자다. 청동기시대 군주(제사장)는 스스로 풍백을 자처했고, 자신들만이 비구름을 몰고 올 수 있다고 했을 것이다.
단군신화의 이 대목은 당시 백성들의 비구름 세계관을 독점하려 했던 청동기 지배자들의 욕망과 그간의 사정을 말해 주는 구절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그 뒤 청동기와 철기시대 지배자들이 남긴 유물을 봤을 때 그 욕망은 성공한 듯싶다. 청동기시대 그릇에서 비구름 무늬가 사라지는 것, 무늬가 사라지고 민무늬토기만 빚은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한반도 고대미술에서 바람(風)은 결코 간단한 주제가 아니다. 이는 다음 연재글 '팔주령의 비밀' 편에서 소리(音), 파문형 동기와 바람개비 수막새를 다루면서 아주 자세하게 밝힐 것이다.』
(출처;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525835)
〈신용하의 인류 5대 ‘古朝鮮문명’- ④ 발달된 기술의 금문화와 철기문화〉
동아시아 金문화의 원류… 三國금관 기원은 스키타이 아닌 고조선
2019년 7월 17일 문화일보
『BC 25세기에 이미 도금기술 청동·금 활용 金銅장식 제조 金 양산하며 순금장식도 발전
고조선 상징물 태양·새깃털 삼국 금관에도 그대로 계승 스키타이 기원설 틀렸단 증거
BC 12세기엔 철기시대 열어 철검·철거울·쇠뇌 잇단 출토 BC 7세기엔 ‘강철’까지 진화
고조선은 당대최고 금속기술 같은 문명권인 부여의 철 장검 日 전파돼 일본刀 원형 된 듯
고조선문명은 동아시아에서 최초로 ‘금(金)’ 문화를 창조해 발전시킨 문명이었다. 고조선문명의 금 문화는 BC 25세기에 금을 청동기에 도금한 금동기로 시작됐다. 평양시 강동군 순창리 글바위 5호무덤에서 출토된 BC 25세기(bp 4425년·bp는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법에 의거해 1950년을 기준으로 역산한 고고학의 연대)의 금동 귀걸이, 강동군 송석리 문성당 8호무덤에서 출토된 BC 24세기(bp 4384년)의 금동 귀걸이, 강동군 순창리 글바위 2호무덤에서 출토된 BC 24세기(bp 4376년)의 금동 귀걸이 등이 이러한 금동 장식물이었다.
고조선의 수도 지역에서는 적어도 BC 25∼BC 24세기에는 왕족과 귀족들에 의해 금동 귀걸이가 제조돼 사용됐음을 확인할 수 있다. 금동은 청동과 순금을 전제로 하고 후에 도금하는 것이므로 청동과 순금 기술보다 한 단계 더 높은 과학 기술을 요했다. 고조선문명에서 금은 매우 일찍 발견돼 사용됐으나 순금은 매우 귀중하고 소량이어서, BC 25세기에 이르러 도금기술이 발명되자 청동기에 금을 도금한 ‘금동’(金銅) 장식품 형태로 금 문화가 시작됐다.
자연과학자들이 주목한 대로, 글바위 5호 무덤에서 나온 금동 귀걸이는 과학기술상 아말감법으로 순동에 금을 도금한 것이었고, 글바위 2호 무덤에서 나온 금동 귀걸이는 판금법으로 순동에 순금박판을 씌운 것으로서, 이러한 금속공예 기술이 이미 BC 25∼BC 24세기 고조선에서 사용됐다. 한반도의 강들, 특히 고조선 수도 아사달이 위치한 대동강 유역에는 사금이 매우 많았으며, 운산 금광 부존에서 볼 수 있듯이 금광이 풍부했다. 고조선이 건국된 한반도 자체가 금이 많이 나는 지역으로 고대 중국인에게도 알려졌었다. 이미 신석기시대 사람들까지도 강가에서 사금 채집과 판금 제작을 시작했다고 추정된다. 강동군 강동읍에는 한말∼일제강점기 초기까지 ‘생금동’(生金洞·금이 나는 고을)이라는 이름을 가진 큰 마을이 남아 있었다.
‘순금’의 경우를 보면, 고조선 수도지역에서 BC 12세기의 ‘순금’으로 제조한 장식 패물들로 순금 귀걸이와 순금 목걸이도 출토됐다. 이것은 순금 장식품이 이때 처음 제조된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기술적으로 순금 장식물 제조가 금동 장식물 제조보다 쉽기 때문에, 금동 귀걸이를 제조한 BC 25∼BC 24세기에 순금 귀걸이, 순금 목걸이도 동시에 제조할 수 있었지만, 아직 발굴되지 않았을 수도 있고, 순금이 매우 값비싼 것이어서 재료를 절약하기 위해 순금 장식물을 제작했다가도 녹여서 금동 장식물에 재활용했을 수도 있다. 순금 패물이 BC 12세기경부터 다수 나오는 배경은 이 시기부터 금광 채굴에 의한 금의 대량생산이 가능했던 데 있는 것으로 보인다.
고조선문명의 이른 시기의 금 문화는 고조선 후국 부여를 비롯해 전 문명권에 전파됐다. 부여의 풍속에 대해 ‘삼국지’ 위서 부여전은 “부여에서는 아름다운 구슬이 산출되는데 크기가 대추만 하다”고 했고, “나라 밖에 나갈 때는 비단
옷·수놓은 옷·모직 옷을 즐겨 입고, 대인(大人)은 그 위에다 여우·살쾡이·원숭이·희거나 검은 담비 가죽으로 만든 갓옷을 입으며, 또 금·은으로 모자를 장식했다”고 서술, 모자의 금·은 장식이 관습이었음을 기록했다. 이 기록을 증명하는 유적·유물이 1985년에 발굴됐다. 부여족 유적인 길림성 유수노하심(楡樹老河深) 묘지 유적에서 화려한 마노 구슬 목걸이와 금귀걸이 장식이 출토된 것이다. 목걸이는 마노 구슬 266개를 줄에 꿰고, 6돈의 금으로 만든 네모 모양의 장식을 달아 길이가 98㎝나 되는 화려한 것이었다. 금귀걸이도 <사진 2>에서처럼 장식 금잎을 많이 붙인, 매우 화려한 것이었다. 부여에서는 금 문화와 함께 금동 문화도 발전했다. 널리 알려진, 길림 동단산(東團山)에서 출토된 부여인의 청동 가면도 금도금한 금동 가면이었다.
부여·고구려·백제·신라·가야의 찬란한 금 문화와 금동 문화는 멀리 스키타이 금 문화와의 교류 훨씬 이전에 이미 고조선에서 먼저 계승·발전된 것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고조선의 이러한 금·금동 문화를 직접 계승해 고구려·백제·신라·가야에서는 금관(金冠) 문화가 초기부터 발전했다. 고구려에서는 초대 동명왕(재위 BC 37∼BC 19년) 때부터 금관을 사용했다. 지금의 평양에 있는 고구려 동명왕릉은 일제강점기인 1940년에 일본인들이 도굴, 부장품들을 반출해 갔다. 광복 후 북한 고고학자들이 발굴조사를 한 결과 ‘금제관식(金製冠飾)’들이 109점이나 출토됐다. 그 다수가 금관에 매다는 금 및 금동제 날개 장식들이어서, 동명왕이 금관을 의례용으로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 금관은 최근 몇 개의 실재가 보고됐다. 신라 금관과 백제·가야 금관은 이미 잘 알려져서 더 설명이 필요치 않다.
필자가 여기서 구태여 고구려·백제·신라·가야의 금관까지 거론한 것은 이 금관들의 원류가 고조선문명의 금 문화임을 알지 못하고, 학계 일부에서 스키타이 기원설 또는 시베리아 기원설을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금관은 왕권의 상징이기 때문에 반드시 ‘사상’이 상징화돼 있다. 고조선문명에서는 태양과 단군(하느님)을 숭배했고, 하늘을 나는 새를 토템으로 상징화했다. 그러므로 고조선 사람들은 평민까지도 모자에 새 깃털을 꽂았었다. (농경문 청동기 참조)
고구려·백제·신라·가야의 금관들이 공통적으로 고조선문명의 금 문화·금관을 직접 계승한 자생적인 것임을 증명하는 요소는 다수 있다. 예컨대 ①금관의 양 옆면에는 고조선의 도안 모형인 새 깃털을 불꽃 등과 함께 다양하게 조합·변형하면서 표시했다는 점 ②금관의 앞면 꼭지 또는 중앙 정면에 넣은 태양을 상징하는 도안 ③금관의 테 둘레에 있는 몇 줄의 점선 ④고조선의 새 깃털과 불꽃 문양을 한 세움 장식 ⑤금관에 동반된 금귀걸이가 고조선의 금동 귀걸이를 직접 계승한 점 ⑥금관의 곡옥 달개가 고조선의 곡옥을 직접 계승한 점 등이 주목된다.
필자는 고조선문명 후예들의 이러한 금관들의 자생성과 특징은 특히 ①정면 중앙 또는 상단의 각종 원형 해(태양) 상징과 ② 옆면(귀 위)의 각종 새(鳥) 깃털 도안과 불꽃에 명백하게 표현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고조선문명의 태양숭배와 새 토템의 발전된 사상을 왕관에 표현한 것이라고 본다. 이것은 고조선 전통이지 스키타이나 시베리아와는 상관이 없다. 학계 일부에서 한국 고대 왕관의 북방기원설을 제시하면서 왕관 앞·옆면의 도안을 기원후 5세기 스키타이 금 문화와의 교류 과정에서 얻은 나무와 나뭇가지에서 구했다는 시베리아 기원설을 주장하는 것은 ‘국왕이 사용하는 귀중한 금관’의 사상성과 전통 계승성을 파악하지 못한 빗나간 견해라고 본다. 고구려·백제·신라·가야의 금관은 스키타이 금 문화와 교류하기 훨씬 이전에 고조선문명 금 문화를 직접 계승한 것이다.
이런 찬란한 금관은 고조선문명의 후예들만이 썼다. 막강한 권력과 권위를 가졌던 이웃 중국의 역대 왕과 황제들도 이런 금관을 쓰지 못했다. 일본의 어떤 역대 왕들도 이런 금관을 쓰지 못했다. 오직 고조선문명의 후예들만이 이런 금관을 썼다.
또한 고조선문명은 동방에서 가장 앞서서 BC 12세기에 철기시대를 열기 시작했다.
고조선문명권은 두만강 유역 함경북도 무산(茂山) 지역과 만주 무순(撫順) 지역에 세계 최대 철광산 중 하나가 부존돼 있을 뿐 아니라, 한반도 만주지역 도처에 철광석이 부존돼 있는, 혜택받은 지역이었다. 특히 무순 지역엔 노천철광(露天鐵鑛)도 있어서, 이미 BC 70∼BC 49세기 ‘예’족의 신석기시대 신락(新樂) 문화 유적에서는 족장의 집 자리에서 석탄 정제품과 함께 모아놓은 적철광석(赤鐵鑛石)들이 출토되기도 했다.
현재 철기 발굴의 초기 단계에서는 우선 고조선 수도권 지역에서 주목되는 철기 출토품으로서 평양시 강동군 송석리 1호 석관무덤에서 철거울(鐵鏡)이 인골과 함께 출토됐는데, 인골의 연대가 BC 12세기로 측정됐다. 또 강동군 향목리 1호 고인돌에서 철창과 쇠줄, 철촉이 출토됐는데 BC 7세기로 측정됐다. 이 지역에서는 연속되는 그 후 편년의 철검(鐵劍·쇠장검), 철칼, 철제 기계활인 쇠뇌(鐵弩·석궁)들이 출토됐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송석리의 BC 12세기 철거울이 순도가 높고 단조해 제작한 쇠거울이라는 사실이다. 이것은 철기 생산이 이미 시작됐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향목리의 BC 7세기 철창·쇠줄·철촉은 ‘선철’ 단계를 넘어 이미 ‘강철’ 단계로 들어서기 시작한 순도의 것이어서, 제철기술이 제강기술 단계에 이르렀음을 알려준다. BC 7세기에 강철이 생산됐다는 사실은, 해면철과 선철 생산은 훨씬 전에 이뤄졌으며 늦어도 BC 7세기에는 철제 무기와 농구 생산이 가능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한편 만주 무순 부근 지역 유수노하심 중층유적의 고분 129좌에서 무려 540여 점의 철기가 출토됐는데, BC 331년경의 것으로 측정됐다. 한편 태래평양(泰來平洋) 묘지의 철기는 BC 412년경, 조동동팔리(肇東東八裏) 묘지의 철기는 교정치가 BC 481년의 것으로 보고됐다. 또 무산 철광산을 배경으로 한 함경북도 무산군 범의구석에서 출토된 쇠도끼 2개 가운데 1개는 BC 7∼BC 5세기 것이었고, 다른 1개는 BC 4∼BC 3세기 것이었다. 평안북도 영변군 세죽리 출토 쇠도끼·쇠과·쇠끌·쇠칼·쇠낫 등의 측정연대는 BC 4∼BC 3세기였다. 평양시 토성동 목곽무덤에서도 장검·쇠칼·극·활촉 등 철기가 세형동검·세형동과 등과 함께 출토됐는데, BC 3세기경의 것으로 측정됐다.
고조선문명은 종래의 청동 무기를 철제 무기로 바꾸기 시작했다. 철제 장검과 단검, 비수, 철창, 철제 화살촉과 쇠뇌, 철제 갑옷이 출현해 발전하기 시작했다. 고조선문명의 철기 문화에서 철검이 출현해 세형동검과 함께 사용됐다. 고조선문명의 부여 철검이 길림성 유수노하심 유적에서 다수 발굴됐는데(<사진 4> 참조), 우수한 ‘장검’이었다. 부여식 장검은 충북 청주시 오송읍 정방리 토광묘에서도 1개 출토됐는데, 칼은 철이고 자루는 동으로 제작해 조립한 ‘동병철검’(銅柄鐵劒)이었다. 제주 용담리 유적에서도 85㎝의 부여식 장검 2자루가 출토됐다.
부여식 철제 장검은 부여족 무사 집단의 이동에 따라 가야·탐라 지역에 전파됐으며, 말과 함께 일본 열도에도 전파된 것으로 해석된다. 필자는 부여 장검이 일본에 건너가 초기에는 왕과 장수의 신분재와 ‘쓰루기’라는 제사용 철검으로 사용되다가, 무사의 ‘일본도’로 발전하게 된 것이라고 본다. 즉, 일본도의 기원은 부여 장검이라고 본다.
이상의 철기 출토품과 고조선문명권 각지에 산재한 철기 출토품을 종합해 볼 때, 고조선의 철기시대는 약 BC 12세기부터 세형동검 출현 직후에 동반해 시작됐다고 볼 수 있다. 또한, 강철제 농구와 무기 생산은 약 7세기부터 시작된 것으로 관찰된다.
일본 학계와 한국 학계 일부에서는 과거 일제 식민주의 사관의 설명과 유사하게 BC 3세기 초엽 연(燕)의 진개(秦開)가 고조선을 침공해 1000여 리의 고조선 영토를 빼앗은 후 철이 고조선에 도입된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연의 철기 문화에 고조선이 패전한 것으로 추측한 것이었다. 그러나 BC 12∼BC 3세기의 고조선문명권 안에서 자생적으로 제조된 각종 우수한 철기들이 다수 출토됐으므로, 연의 철기 문화에서 고조선의 철이 전파돼 들어왔다는 가설은 허구에 불과했음이 증명됐다.
일찍이 단재 신채호 선생은 반대로 연의 진개가 고조선 후국 동호(신조선)에 인질로 오자 동호왕이 진개를 과신해 군사기밀까지 모두 알게 해 주었기 때문에, 진개가 고조선의 철기·철제 무기를 포함한 선진문물을 배우고 군사상태를 잘 파악해 귀국한 다음 고조선(동호 지역)을 기습해 패전시킨 것으로 설명했다. (‘고조선상고문화사’) 고대 중국인들은 동북(만주) 지역 철물이 중원 지역보다 더 발전해서, 동북에서 중원으로 들어왔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고조선문명의 큰 특징 중 하나는 청동·금동·금·철기를 망라해 당시 최고 수준의 찬란한 금속기술과 금속문화에 있었다. 이것은 고조선문명의 후예에게 계승돼 중앙아시아에 들어가 지배한 투르크족, 유럽에 들어가 라인강 양안을 거의 200년 동안이나 통치한 아발(大檀)족 모두 원래 우수한 ‘대장장이’들이었다. 본토에 남은 고조선문명의 후예들도 고조선·고구려·신라의 쇠뇌, 부여의 철장검, 신라의 금관과 종, 백제의 금동대향로, 가야의 갑옷·투구·장검, 고려의 금속활자 등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세계 최고, 최선진 금속문화의 전통을 계승했다.』
(출처;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19071701032812000001)
〈 [코리안루트를 찾아서](17)고조선과 청동기〉
2008년 1월 25일 경향신문
『“기원전 2000년경에 중국의 요령(랴오닝), 러시아의 아무르강과 연해주 지역에서 들어온 덧띠새김무늬 토기문화가 앞선 빗살무늬 토기 문화와 약 500년간 공존하다가 점차 청동기 시대로 넘어간다. 이때가 기원전 2000년경에서 기원전 1500년경으로, 한반도 청동기 시대가 본격화된다. 삼국유사와 동국통감에 따르면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건국하였다.(기원전 2333년)”(고교 국사교과서)
이형구 선문대교수가 뉴허량의 좐싼쯔 금자탑(피라미드) 유적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청동기를 제작할 때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도가니 잔편이 확인되었다. 그 연대는 BC 3000년까지 올라갈 수 있다는 평가다. <뉴허량|김문석기자>
지난해 2월, 교육인적자원부가 2007년판 국사교과서를 공개하자 학계가 한바탕 요동쳤다. 새 교과서가 한반도 청동기 시대의 개막을 기존 교과서 내용(BC 10세기)보다 500~1000년 앞당겼기 때문이었다. 또한 “고조선을 건국하였다고 한다”는 애매한 인용문이 “고조선을 건국하였다”고 확정지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뒤늦은 감이 있다”는 환영론이 나왔지만, 학계 일각은 “올려도 너무 올렸다”고 아우성쳤다.
#한반도를 벗어나라
기자는 논쟁의 출발점이 잘못되었다고 본다. 근대 국민국가의 산물이자 발명품이라는 ‘국사’라는 개념과 학문을 없애지(국사 해체론자들의 주장처럼) 않는 한, 우리 역사의 영역을 ‘한반도’에서 ‘발해연안’까지 넓혀봐야 한다는 것이다. 청동기의 기원을 ‘한반도에만 국한시키면’ 논란은 끊임없이 이어질 것이다.
이제 ‘눈을 들어’, 그 옛날 이른바 동이족이 다른 족속과 어울려 발해문명을 창조해낸 발해연안을 바라보라. 그러면 논쟁 또한 눈 녹듯 사라질 것이다. 운을 떼면 동북아 청동기 시대의 기원은 발해연안이며, 그 연대는 BC 3000년(훙산문화 시대)까지 올라갈 가능성이 있다. 또한 샤자뎬(夏家店) 하층문화(BC 2000~BC 1500년) 시기에는 석성을 쌓고 청동기를 만들었으며, 고대 왕국의 기틀을 쌓은(고조선) 발해연안 사람(동이족)들이 중원으로 내려와 상나라(商·BC 1600~BC 1046년)를 건국했다는 점까지.
#청동꺾창의 비밀
1986년 3월, 랴오닝성 진저우(금주·錦州)에서 의미심장한 유물이 발견되었다. 청동꺾창(銅戈)이었다. 유물이 출토된 곳은 진셴(錦縣) 수이서우잉쯔(수수영자·水手營子) 마을이었다. 발해만에서 북쪽으로 10㎞ 정도 떨어진 곳이며, 고구려를 침략한 당나라 군사들이 죽어갔다는, 유명한 요택(遼澤)을 끼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청동꺾창은 상나라 초기의 특징을 그대로 안고 있었다. 고고학적으로 샤자뎬 하층문화에 속하지만 고조선과 연관성이 매우 깊은 지역이다.
그때까지 발견된 청동꺾창은 대부분 자루(柄)부분이 목재여서 썩어 없어진 상태였다. 그런데 이 꺾창은 몸 전체를 청동으로 주조한 게 특징이었다. 청동꺾창의 무게는 1.105㎏에 달했고, 전체 길이는 80.2㎝였다. 연대는 BC 1500년으로 평가됐다.
이 청동꺾창은 중원의 허난성(河南省) 중부 옌스셴(偃師縣) 얼리터우(이리두·二里頭) 유적에서 확인된 청동꺾창(연대는 BC 1500년 추정)과 매우 흡사한 느낌을 준다. 이것은 둘 다 상나라 초기, 즉 가장 이른 시기의 청동꺾창이라는 뜻이며, 상나라의 전통이 발해연안에서도 숨쉬고 있었다는 얘기이다.
“그런데 이 청동꺾창은 선사시대에서는 농사용, 즉 수확용 돌낫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유력해요. 그리고 직접적인 단서는 바로 발해연안에서 나왔고….”(이형구 선문대 교수)
이교수가 말하는 유물은 랴오둥(요동·遼東) 반도 남단 양터우와(양두와·羊頭窪)에서 확인된 돌꺾창(石戈)를 가리킨다. 리지(李濟)는 “양터우와 문화의 연대는 하(夏·BC 2070~BC 1600년) 연대와 비슷하다”면서 “이 돌창이 수이서우잉쯔 출토 청동꺾창의 모델이 되었을 것”이라고 해석했다.
#고조선 수장의 권장(權杖)
발해만 연안에서 확인된 청동꺽창. 실상용 무기라기보다는 예제용 청동기로 보이며 고조선 시대 수장의 권장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런데 수이서우잉쯔 출토 청동꺾창은 청동기 기원뿐 아니라 고대국가(고조선) 형성과 관련해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원래 과(戈·꺾창)를 자전에서 찾으면 ‘한두 개의 가지가 있는 창’이라는 풀이와 함께, 두 번째 뜻으로 ‘전쟁을 뜻하는 말’이라고도 나온다. 고대사회에서는 과가 오늘날의 총 같은 대표적인 무기였던 셈이다. 그러나 수이서우잉쯔에서 나온 청동꺾창을 살펴보라. 비실용적이라는 냄새가 물씬 풍긴다. 과는 원래 무기다. 때문에 창날(戈) 부분은 무게 있는 청동으로 만들어 날을 세우고, 자루부분은 가벼운 나무를 사용한다. 그래야 적을 제압할 수 있다. 하지만 수이서우잉쯔 청동꺾창은 창날과 자루를 모두 미끈한 청동으로 만들었다. 가벼워야 할 자루(柄)는 무겁고 두껍다. 반면 과는 얇고 가볍다. 또한 자루 양면은 정교한 문양을 주조했고, 녹송석(綠松石)으로 요철식 상감을 해놓았다. 이래가지고서야 무기라 할 수 없다.
“그러니 살상무기가 아니라 의례(儀禮)용 병기로 볼 수밖에. 이른바 권장(權杖), 즉 권력를 상징하는 지팡이의 기능으로 설명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리고 중요한 것 또 하나. 청동꺾창이 나온 수이서우잉쯔는 랴오둥 반도와 인접한 곳에 있어요.”(이교수)
여기서 기자는 이교수의 강조점을 듣고 깊은 상념에 빠졌다. 수이서우잉쯔. 이곳이 바로 우리 역사의 출발점, 즉 고조선의 터전이고, 청동꺾창은 바로 고조선의 수장(왕)이 지녔던 권장이 아닌가. 기자는 “기자(箕子·상이 망한 뒤 기자조선을 건국했다는 상나라 귀족)가 조선에 봉해졌다”는 상서(尙書)의 기록을 떠올렸다. “기자(箕子)가 조선을 건국했다”가 아니라 “기자가 조선‘에’ 봉해졌다”는 뜻이니, 기록상으로도 이미 발해연안에 조선이 존재했다는 의미 아닌가. 또 하나, 경향신문 탐사단이 처음 공개했던 싼줘뎬(삼좌점·三座店)·청쯔산(성자산·城子山)의 거대한 석성 역시 고조선의 유적으로 추정해볼 수 있다.(경향신문 2007년 10월13일 ‘고조선 추정 싼줘뎬·청쯔산 유적’ 참조)
#청동기 시대의 개막은 BC 3000년
좐싼쯔에서 확인된 도가니편들. 동북아 청동기 문화의 기원논쟁에 핵심적인 자료가 되고 있다.
수이서우잉쯔 출토 청동꺾창은 병기의 예제화(禮制化)를 뜻하는, 가장 이른 시기의 유물인 셈이다. 벌써 BC 1500년 무렵에 이토록 예제의 완벽한 모습까지 갖춘 청동기를 창조한 것이다. 그러면 과연 청동기의 기원은 언제란 말인가. 기자는 다시 뉴허량(牛河梁) 13지점에서 보았던 이른바 좐산쯔(전산자·轉山子) 유적의 진쯔타(금자탑·金字塔·피라미드)를 주목했다.(경향신문 12월1일자 ’뉴허량의 적석총들’ 참조)
“BC 3500~BC 3000년에 쌓은 것으로 보이는 이 피라미드 정상부에서 야동감과(冶銅감鍋), 즉 청동기를 주물한 흔적으로 보이는 토제 도가니의 잔편이 있는 층위를 발견했거든. 청동주물을 떠서 옮기는 그릇과 함께….”(이교수)
이는 매우 중대한 뜻을 담고 있다. 맞다면 기존 중국 청동기 시대의 개막연대(BC 2000년)보다 1000년을 앞당긴 중국고고학사의 쾌거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베이징 과기대 야금연구실 한루빈(韓汝) 교수는 1993년 베이징대 국제학술대회에서 이 같은 성과를 발표했다. 하지만 지층이 교란되었다는 점이 제기되어 여전히 세계학계의 공인을 받지 못했다. 한낱 해프닝으로 끝날 수도 있었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중국학계는 실마리를 놓치 않았다.
“피라미드 도가니 지층에서 확인된 고풍관(鼓風管·높은 열을 내려고 바람을 불어 넣는 관)의 구멍을 보라. 그것은 마치 고대 이집트인들의 벽화에 표현된 청동기 제작 과정과 완전히 똑같다.”(궈다순 랴오닝성 문물연구소 연구원)
이뿐이라면 또 “‘초’를 치는군”하면서 중국인 특유의 ‘허풍’으로 폄훼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제단·신전·적석총이 확인된 뉴허량 제2지점 4호 적석총 내부에서 나온 청동제 환식(環飾·고리 장식)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조사단이 분석해보니 홍동질(紅銅質), 즉 원시청동인 순동이었다.
증좌가 또 있다. 1987년 우한치(敖漢旗) 시타이쯔(西台子) 유적, 즉 훙산문화(홍산문화·BC 4500~BC 3000년) 문화층에서 출토된 다량의 도범(거푸집)이다. 도범의 속에는 낚시바늘 형태의 틈새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이것은 청동낚시바늘을 만들기 위한 주형(鑄型)이 분명했다. 결국 이 모든 발굴 성과를 토대로 추측하면 중국의 청동기 시대, 아니 동북아 청동기 시대의 시작은 BC 3000년 이상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는 얘기다. 적어도 그런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연구해야 할 때란 얘기다. 그런데 이런 훙산문화의 전통은 이른바 샤자뎬(하가점) 하층문화를 거쳐 상나라로 그대로 넘어온다.
#훙산문화→고조선→상나라
“수이서우잉쯔에서 나온 청동꺾창(BC 1500년)도 중요하지만, BC 1600년 유적으로 평가되는 다뎬쯔(大甸子) 유적도 훙산문화-샤자뎬 하층문화-상나라 문화를 연결해주는 상징적인 유적이죠.”(이교수)
1973년 다링허(大凌河) 유역 우한치 다뎬쯔에서는 모두 1683건의 도기(陶器)가 확인됐다. 도기 가운데는 400점에 달하는 완전한 채회도기들이 쏟아졌다. 그런데 도기의 모양이라든가, 문양의 모티브가 훗날 상나라의 그것과 완전히 같았다.
특히 솥과 잔, 사발, 시루, 단지에 나타난 도철(괴수의 얼굴)·운뇌문(雲雷·구름과 번개)·목뇌(目雷·눈과 번개)·기룡(夔龍·추상화한 용) 문양 등은 상나라의 청동기 문양과 똑같다. 그리고 싼줘뎬·청쯔산의 거대한 석성 역시….
결국 이 모든 것을 정리해보자.
지금으로부터 5000년 전인 훙산문화 시기에 청동기 문화의 맹아가 텄다. 그리고 훙산문화부터 시작된 등급사회와 예제가 갈수록 발전했고, 청동기와 석성, 적석총의 전통이 샤자뎬 하층문화 시기에 꽃을 피웠다. 쑤빙치(蘇秉琦)의 말처럼 발해연안에는 중원의 하나라(BC 2070~BC 1600년)와 같은 반열의 강력한 방국(方國·왕국의 의미)이 존재했다. 쑤빙치는 그 방국이 어디인지 말하지 못했다. 그런데 방국은 고조선일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이 발해문명 창조자 가운데 일부 지파가 무슨 이유인지 몰라도 중원으로 내려와 상나라(BC 1600~BC 1046년)를 건국한다.
이 모든 해석은 중국학계가 인정하는 것이다. ‘고조선 부분’만 빼고…. 쑤빙치를 비롯한 중국 고고학자들이 (훗날 중원을 제패한) 상나라 문화의 기원은 발해만에 있었다(先商文化在渤海灣)이라고 인정한 것이다. 이기환 선임기자』
(출처;
〈인하대 융합고고학팀, 조개화폐 사실성 입증 27일 발표〉
2014년 6월 24일 중부일보
▲ 하남성 이리두 유적과 언사상성박물관의 조개화폐.
『단군세기 창작설을 뒤집을 인하대학교의 논문이 오는 27일 서울역사박물관에서 발족하는 ‘세계환단학회 창립회의’에서 발표된다.
이번 논문은 천문현상 기록의 정확성·조개화폐 기록의 사실성 통해 강화도의 역사 가치를 재조명하는 것으로 국내 고고학계의 큰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23일 인하대 융합고고학팀에 따르면 이번 논문을 통해 천문현상 기록의 정확성과 조개화폐 기록의 사실성을 입증함에 따라 ‘단군세기’를 근거없이 창착물로 단정하기 어렵다는 견해가 학계에서 다시 대두될 것으로 보인다.
‘단군세기’가 고조선 역사의 실체를 담고 있다고 인정되면 기존의 교과서에 고조선 관련 기술을 채워 넣을 풍부한 검증대상이 확보된다. 또 고구려사를 자국의 역사로 주장하는 중국의 동북공정에 쐐기를 박는 유력한 근거도 된다.
인하대 융합고고학팀은 “단군세기의 5세 오사구단군 재위 시(BC 2133) 주조한 원공화폐 기록은 흥미롭게도 최근의 고고학 발굴 성과와 일치하고 있다”며 “개오지로도 알려진 카우리 조개가 이미 하나라 때부터 화폐로 쓰였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 1987년 이후인데 1911년에 간행된 단군세기에서는 이 사실을 명확히 서술하고 있다”고 밝혔다.
조개화폐에 둥근 구멍을 뚫어 사용한 사실 역시 하남시 정주 이리두 유적과 내몽고 하가점유적 발굴 이후에 알게 되었는데 단군세기에는 이미 그 내용이 기술되어 있다. 요서지방 대전자(大甸子) 유적에서 납으로 주조한 조개모양 화폐가 발견돼 단군세기의 금속 조개화폐 주조 기록의 사료적 가치를 시사한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 이관홍 인하대 해양학과 교수는 “카우리 조개는 쿠로시오 난류대에 서식하는 아열대성 종으로서 한류가 남하하는 중국 동남해안에서는 채집하기 어려운 것”이라 설명하며 “중국 본토가 아닌 외부로부터 유입된 것이라면 발해만과 한반도 지역을 주 무대로 하는 해륙문화세력이 이 고대통화를 유통시킨 주체”라고 주장했다.
김연성 인하대 고조선연구소장은 “발굴 분포와 조개화폐의 출토량을 종합 고찰할 때 명도전이 그렇듯이 이 조개화폐도 고조선의 것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며 “중국 고고학계에서도 하가점하층의 조개화폐 사용이 중원에 비해 시기적으로 앞선 것을 근거로 북방세력의 초기화폐문화로서 인정하고 있다”고 말했다.
복기대 인하대 고고학 교수는 “‘단군세기’와 ‘규원사화’의 기록 모두가 창작이라는 기존 학계의 입장은 그 기록이 모두 진실이라고 보는 관점과 마찬가지로 극단적이고 경솔한 감이 없지 않다”며 “인하대 고조선연구소는 정밀한 검증작업을 통해 ‘단군세기’ 기록 중 의미 있는 사실 기록을 추출해 내는 노력을 지속할 것”이라고 했다.
한편, 이달 27일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출범식을 갖는 세계환단학회는 40가지의 각기 다른 전공분야 교수 70여명이 발기인으로 참여하며 국내 최초의 융합학회로 등록될 전망이다. 라다솜 기자』
(출처 : 중부일보(http://www.joongboo.com),
http://www.joongboo.com/news/articleView.html?idxno=930109)
〈명도전은 조선(단군)의 화폐다! 〉
조선(단군)의 강역에서 절대적으로 많이 출토되...
2016년 5월 17일 코리아히스토리타임스
『조선(단군)의 경제력을 가늠할 수 있는 조선의 화폐, 명도전...
고조선은 아득한 옛날 우리민족이 최초로 세운 나라다. 주류역사학계는 고조선은 신화에 불과하다고 보고 있다. 일반인들은 고조선이 짐승들을 사냥하고 열매를 채집하고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입은 미개한 시대였을 것으로 상상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우리의 옛 역사책인 『삼국유사』와 『동국통감』 등에는 기원전 2333년에 단군이 고조선을 건국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고조선 건국 시기를 주류 역사학계는 기원전 10세기로 보고 있다. 그러나 윤내현은 『고조선 연구』에서 우리 옛 사서의 기록이 타당하다고 논증하였다. 고조선이 얼마나 큰 나라인가에 대해서도 주류사학계는 지금 평양을 중심으로 한 조그마한 나라였다고 본다. 그러나 민족사학자들과 윤내현 등은 서쪽으로는 북경 동북쪽에 있는 난하부터, 동북쪽으로는 만주 북쪽의 아르군 강과 흑룡강 이남, 남쪽으로는 한반도 전부를 아우르는 큰 나라였다고 밝혔다. 학문적 정치성에 비추어 윤내현의 논증이 사실에 부합하는 것으로 보인다.
고조선의 실상을 명확하게 알기 위해서는 당시 경제를 연구를 연구해보는 것이 좋은 방법일 수 있다. 왜냐하면 고조선 사람들이 어디에 살고, 무엇을 먹고, 무엇을 입고, 어떻게 살았는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고조선에 화폐가 통용되고 있었다면 그 경제발전 수준이 매우 높았다고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국가체제도 확립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한서(漢書)』 지리지에 의하면 고조선의 범금8조(犯禁八條) 중에 “도적질한 자는 노예로 삼는데, 죄를 면하고자 하는 자는 50만을 내야한다”는 조항이 있다. 50만은 화폐단위라는 것이 학자들의 일치된 견해다. 가치는 알 수 없지만 고조선에 화폐가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고조선 화폐에 관한 자료가 드물지만 그래도 남아 있는 몇몇 자료에서 그 실상을 유추해 볼 수 있다. 가장 오래된 자료는 중국의 저명한 역사학자 낙빈기(駱賓基)가 1987년에 발표한 금문신고(金文新攷)이다. 금문은 청동기에 쓰여 있는 글자인데 한자의 초기 형태이다. 낙빈기는 다음 사진에서 보는 청동기가 호미처럼 생긴 화폐인 조패(鉏貝)라고 보았다. 이 조패가 중국 전설 시대 첫째 임금인 신농(神農) 시기에 제작되었다고 논증했다. 신농의 재위기간이 기원전 2517-기원전 2474년이니 기원전 25세기에 만들어진 청동화폐이다. 이 시대에 비단으로 옷을 만들어 입었다는 기록이 있으니 화폐가 없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 조패와 모양이 비슷한 청동화폐인 첨족포(尖足布) 등은 주(周)나라에서도 사용되었다.
▲ 조패, 김대성의 『금문의 비밀』 50쪽
신농과 고조선의 관계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자료는 없다. 그러나 중국의 고대 여러 역사서와 우리의 환단고기(桓檀古記)에 의하면 고조선과 중국 고대왕조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음은 부정할 수 없다. 중국의 고대 왕조 중에서 은(殷)나라까지는 우리 민족인 동이족의 나라였다는 것이 정설이다. 이 조패는 인류역사에서 우리 민족이 최초로 만든 화폐일 것이다.
고조선에 화폐가 있었다는 자료는 환단고기에도 실려 있다. 제4대 오사구단군 재위 5년(기원전 2133년)에 “가운데 구멍이 뚫린 조개 모양의 돈을 주조”하였다. 이 기록과 조패는 약 400년 시차가 있으나 같은 동이족 나라에 화폐가 있었다는 가장 오래된 기록들이다. 당시 청동 제조 기술이 있었는지 의심할 수도 있지만 최근 고고학 발굴 성과에 의하면 기원전 24세기까지 청동기 제조 상한이 올라가니 무시할 수 있는 기록이 아니다.
▲ 원절식 명도전과 방절식 명도전
은나라 중흥군주인 무정(武丁, 재위 기원전 1250-기원전 1192년)의 왕비인 부호(婦好)의 묘가 하남성 안양에서 1976년에 발견되었다. 부호는 무정의 왕비이면서 군사령관으로 직접 군대를 지휘하여 대승을 거둔 여걸이었다. 2013년에 중국 산서성과 하남성을 답사하는 여행에서 필자는 부호의 묘를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안내문에는 부호를 동이여장군으로 표기하고 있다. 묘 앞에 무기를 손에 든 예쁜 부호 동상이 세워져 있었다.
묘의 부장품으로 전시된 유물 중에서 필자의 관심을 끈 것이 하얀 바탕에 까만 점이 있는 무당벌레처럼 생긴 작은 조개껍질 화폐였다. 부호 묘에서 6,800여 개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이 조개는 인도양에서 서식하는 귀한 마노조개 껍질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마노조개 껍질은 오늘날에도 가공하여 목걸이 등을 만드는 소재다. 돈을 의미하는 한자가 조개 패(貝)인데, 이 글자의 기원이 조개를 본뜬 상형문자이다. 기원전 15세기 동이족의 나라 은에 화폐가 있었던 것이다.
중국학자들에 의하면 은나라 다음 주나라 시기 후대인 춘추전국 시대에 중국에서는 금속화폐의 사용이 정착되었다. 이 시기 각 나라 지역에서 발굴된 청동화폐는 조패와 비슷하거나 칼처럼 생긴 도전(刀錢)이다. 도전은 주로 연(燕), 제(齊), 진(晉)나라와 융적(戎狄)과 산융(山戎)에서 사용했다. 연과 제는 고조선과 국경을 맞대고 있었다. 융적과 산융은 중국의 동북쪽에 거주한 이민족이다. 이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나라를 건설했는지 중국 역사서는 밝히지 않는다. 당시 중국 동북쪽에서 국경을 맞대고 있던 나라는 고조선 밖에 없기 때문에 산융은 고조선이 틀림없다, 오늘날에도 중국학자들은 고조선이라고 표기하지 않고 산융 또는 동호(東胡)로 쓴다.
▲산융의 명도전
(자료: 유비연과 단경고의 『동주전폐』(2012) 58쪽)
▲ 일반적인 모습의 명도전
(자료: 유비연과 단경고의 『동주전폐』(2012) 56쪽)
각국의 도전은 비슷하지만 조금씩 차이가 있다. 연나라 도전이 명도전(明刀錢)인데 이는 도전에 새겨진 글자가 아래 왼쪽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明(명)자와 비슷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정확하게 무슨 글자인지는 아직 확실히 모른다. 명도전은 중국 요령성, 길림성, 흑룡강성, 하북성, 내몽고자치구, 한반도 등에서 출토된다. 이 지역들은 고조선과 연나라 강역이었다. 그래서 고조선은 연나라 돈인 명도전을 사용했다는 게 정설이었다.
그런데 명도전이 연나라 지역인 하북성에서는 소량이 출토되었지만 고조선 강역에서는 대량으로 출토되었다. 북한학자 손량구의 연구에 의하면 고조선 지역에서 22,265개, 연나라 지 역에서는 7,368개의 명도전이 출토되었다. 박선미 교수의 연구에 의하면 명도전 출토지역은 고조선 지역임을 나타내는 표지유물인 비파형동검과 고인돌의 분포지역과 일치한다. 연나라보다는 고조선에서 대량으로 유통되었으니 손량구는 명도전이 연나라 화폐라기보다는 고조선 화폐라고 주장했다.
주나라 무왕이 동생 소공(召公) 석(奭)을 기원전 1122년 제후로 봉한 곳이 연나라인 데 오늘날 북경을 중심으로 한 지역이다. 기원전 323년 왕을 칭하고 제후국에서 왕국이 되었다. 진개(秦開)의 고조선 침략과 격퇴 등 연나라와 고조선은 여러 차례 전쟁을 치른 적국이었다. 연나라는 110년 간 존속하다 기원전 221년 진시황에 의해서 멸망되었다. 장구한 기간 동안 존속한 고조선이 겨우 100여 년 존속한 적국의 화폐를 자국의 화폐로 사용했다는 종래의 주장은 상식적으로 의문이 든다.
명도전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아래 사진에서 보듯이 몸체가 곡선인 원절식(圓折式)과 직선인 방절식(方折式)이 있다. 이 중 원절식 명도전이 고조선의 화폐라고 중국 길림대학 장박천(張博泉) 교수가 주장했다. 고조선 지역에서 출토되는 명도전의 다수가 원절식이다. 같은 원절식이라도 끝이 뾰족한 명도전도 있다. 앞의 사진에서 명도전과 산융의 도전을 비교해보면 몸체가 곡선이라는 점에서 원절식 명도전과 산융의 도전은 유사하다. 산융이 고조선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고조선이 이 화폐를 언제부터 사용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청동기로 조패를 만든 시기가 기원전 25세기임을 생각해보면 아득한 옛날부터 사용해 왔음을 부정하기 어렵다. 고조선은 신화 속의 미개한 국가가 아니었다. 고조선은 강역이 넓고 화폐를 사용하는 발전된 경제체제를 유지한 국가였다. 허성관(前 행정자치부 장관)』
(출처; 코리아히스토리타임스,
http://www.koreahiti.com/news/articleView.html?idxno=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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