력사를 찾아서
《만주와 한반도 12,000년 전~ 2,000년 전 년대기》 4.22 용산문화~4.26 울진 후포리유적 본문
《만주와 한반도 12,000년 전~ 2,000년 전 년대기》 4.22 용산문화~4.26 울진 후포리유적
대야발 2024. 2. 9. 12:31《만주와 한반도 12,000년 전~ 2,000년 전 년대기》
4.22 용산문화(龍山文化); 4900년 전~4000년 전(BC 2900~2000년)
『중국 산동성(山東城) 장구현(章丘縣) 용산진(龍山鎭)에 위치하는 성자애(城子厓)유적에서 처음 발견되면서 용산문화란 명칭으로 불리게 된 신석기시대 만기(晩期) 문화이다. 1928년 처음 확인되었고, 1930년에 발굴이 이루어졌다. 용산문화는 산동 용산문화(山東 龍山文化), 묘저구2기문화(廟底溝2期文化), 후강2기문화(後崗2期文化), 객성장2기문화(客省庄2期文化)의 4가지 계통으로 구분된다.
이 중 가장 전형(前型)을 띠는 것이 산동 용산문화로 방사성탄소 보정연대로는 기원전 2500∼2000년에 해당하며, 이전의 대문구문화(大汶口文化)의 계통을 잇고 악석문화(岳石文化)로 이어진다. 묘저구2기문화는 예서(豫西)지방을 중심으로 분포하며 방사성탄소보정연대는 기원전 2900∼2800년 사이이다. 앙소문화(仰韶文化)를 계승하는 한편 중원지구의 조기 용산문화로 이어진다.
후강2기문화(後崗2期文化)는 예북(豫北), 예동(豫東) 등에 주로 분포하며 방사성탄소보정연대는 기원전 2600∼2000년이다. 묘저구2기문화를 계승하면서 이리두문화(二里頭文化)로 발전한다. 객성장2기문화(客省莊2期文化)는 섬서성(陝西省) 경수(涇水)와 위수(渭水)유역을 중심으로 분포하며 방사성탄소 보정연대는 기원전 2300∼2000년 사이이다.
토기는 점토질(泥質)과 사질의 회도(灰陶) 위주이며 흑도(黑陶), 홍도(紅陶) 및 백도(白陶)가 일부 포함되어 있다. 기형은 정(鼎), 력(?), 심복관(深腹罐), 배(杯), 분(盆), 완(?), 가(?), 규(規) 등 매우 다양하며 토기 제작에 물레를 사용하였고 소성온도도 높은 편이다. 토기 표면에는 승문(繩文), 람문(藍文), 격자문(格字文), 융기문(隆起文) 등이 시문되어 있다.
사회경제는 농업위주이며 생산도구 가운데 타제석기보다는 마제석기의 비율이 많다. 주요 도구로는 돌삽, 돌낫[石鎌], 돌칼[石刀], 조개낫 등이 있으며, 가축사육도 발달하였는데 주거유적에서는 돼지의 이빨, 무덤에서는 돼지의 머리뼈가 주로 출토되고 있다. 돼지뼈는 사유재산이 많고 적음을 알려주는 표지유물로 평가되어, 신분, 지위에 차이가 나타나고 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주거지는 반수혈식과 지상식의 2가지 형태가 있는데 거주면은 모두 백회(白灰)를 발랐다. 공동묘지도 발굴되었는데 규모가 큰 무덤의 경우 도기, 목기, 옥기, 석기, 골각기 등 200여 가지나 될 정도로 수량이 풍부하며 질도 뛰어난 편이다.
산동 용산문화는 성자애유적에서는 판축기법으로 만든 성곽시설이 확인되었는데, 벽 윗부분의 평균너비 9m, 높이 약 6m로 추정하고 있다. 최초의 방어시설인 성곽의 등장을 통하여 이 문화가 최초의 정착과정에서부터 비교적 발달된 복합사회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주거지에서는 일반적으로 바닥시설과 저장공이 발견되며, 무덤도 다수 출토되었다. 일부 주거지는 직경이 약 4.5∼5m의 반지하식이지만 동해곡(東海谷) 같은 다른 유적의 경우 주거지 한 변이 약 6m이고, 얇고, 견고한 층으로 구성된 낮은 평면에 지어진 장방형이다. 무덤에서는 새로운 사회질서가 반영되는데, 부장품으로 보아 대문구식(大汶口式)의 사회분화가 심화된 것으로 보인다.
1976∼1977년 정자(呈子)유적의 용산문화층에서 87기의 매장유구가 발굴되었는데, 남동향의 두침(頭枕)을 가진 장방형 묘광의 단장(單葬)으로 확인되었다. 구조 형태와 부장품에 따라서 4개 형식으로 구분된다.
첫째, 대형묘광, 2단의 선반, 목관, 얇고 높은 굽을 가진 잔과 돼지 아래턱뼈가 중심인 다량의 부장품을 가진 형식으로 5기가 출토되었다.
둘째는 작은 묘광, 2단의 선반, 몇 개의 관, 때때로 높은 굽을 가진 얇은 잔과 돼지 아래턱뼈를 포함한 어느 정도 수의 부장품을 가진 형식으로 11기가 출토된다.
셋째는 상대적으로 더 작은 묘광에 2단의 선반이나 관을 가지지 않고 극소수의 유물을 가진 형식으로 17기가 이에 해당된다.
넷째는 시신이 겨우 놓이는 매우 좁은 묘광을 가지며 부장품과 관이 없는 형식으로 54기가 출토되어 다수를 차지한다. 매장유구는 34개의 무덤에 밀집되어 분포한다. 각 무덤에서는 이상의 4형식의 무덤이 동일하게 나타나며, 이것은 고대 중국의 부족사회의 계층과 관계된 최초 매장형태의 예이다.
도구는 석제와 골제, 패제품이 있다. 석창과 석촉의 수가 매우 많은데, 정자유적에서 출토된 116점의 석기 중 28점이 석촉으로 분류되었다. 또한 53점의 골각기 중에서 29점이 화살촉이다. 요관장(姚官莊)유적에서 수집된 194점 석기 중에서 64점이 화살촉이고 7점이 석창이다. 또한 50점의 골기와 녹각도구 중에서 23점이 녹각제 화살촉이다. 이러한 유물들은 사냥도구만이 아니라 무기로서도 사용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삼리하(三里河)유적에서는 최초의 청동제 송곳 2점이 발굴되었는데, 납과 주석, 아연이 합금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대문구, 앙소 문화와는 대조적으로 용산문화 토기는 대부분 회색과 검정색을 띄고 있으며, 갈색, 적색, 백색을 띄는 토기 비율이 적다. 토기는 물레로 제작되었고 경질에 가깝다. 무문(無文)을 바탕으로 각문(刻文)이나 조각 같은 장식들이 나타나고 있다. 형태는 정(鼎), 규(規), 손잡이 달린 잔(杯), 두(豆), 뚜껑이 달린 그릇이 포함된다.
용산문화기 토기의 특징적인 유물은 매우 얇고 흑색을 띠며, 광택있는 컵, 상자, 그리고 항아리로 대표되는데 그것은 아마도 의례용기일 것이다. 복골(卜骨)을 비롯하여 사슴이나 다른 포유류의 견갑골, 옥도끼와 흑도 등에서 보이는 동물문양은 의례행위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묘저구2기문화는 섬현(陝縣) 묘저구유적 상층 퇴적층에서 발견되었다. 앙소문화에서 용산문화로 발전해가는 과도기로서 ‘용산초기문화(龍山初期文化)’라고도 한다.
묘저구2기문화는 앙소문화 뿐만 아니라 하남 용산문화의 특징을 갖고 있어 과도기적 성격으로 판단된다. 즉, 홍도의 수량은 앙소문화보다 적으며, 채도(彩陶)는 간단한 능형대상문(菱形帶狀文) 위주의 문양이 시문되면서 그 수도 급격히 사라져간다는 것이다. 기형은 소구첨저병(小口尖底甁)과 관류처럼 앙소문화와 같은 기종을 이은 것이 분명하고, 용산문화의 기원적인 특징도 분명하게 보인다.
토기는 회도(灰陶) 위주이고, 소량의 흑도(黑陶)와 홍도(紅陶)도 있다. 주요 기형은 정(鼎), 각종의 관(罐), 쌍이분(雙耳盆), 배(杯), 첨저병(尖底甁) 등이 있으며, 부분적으로 채색된 것도 있다. 연대는 기원전 2780년경으로 추정하고 있다.
후강2기문화는 안양 후강의 중층에서 처음으로 발견되었으며, 하남 용산문화(河南 龍山文化)라고도 한다. 토기는 회도 위주이며, 소량의 흑도도 출토되는데 그 중에는 단각흑도(蛋殼黑陶)가 있다. 전형적인 기형은 정(鼎), 력(?), 가(?), 쌍복분(雙腹盆), 대이배(帶耳杯), 규(規), 옹(瓮) 등이다. 그 중에는 관형심복정(罐形深腹鼎), 쌍복분, 고경소평저옹(高頸小平底瓮) 등이 가장 대표적이며, 채도는 보이지 않는다. 시문은 박인(拍印)한 승문(繩文), 바구니문, 방격문(方格文) 위주이고 부가퇴문 등도 있다.
후강2기문화는 지역적 차이가 뚜렷하다. 대체로 예서, 예남, 예동, 예북과 기남으로 구분하는데, 각 지역을 서로 다른 문화유형으로 나누기도 한다. 예서에는 삼리교(三里橋)·왕만(王灣)유형, 예동에는 왕유방(王油坊)유형, 예남에는 하왕강(下王崗)유형, 예북과 기남에는 후강유형이 그것이다. 이들 유형은 기종과 기형, 시문 특징상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다. 삼리교유형은 하남 용산문화의 특징과 산서 용산문화의 특징이 모두 나타나고 있다. 하왕강유형에서는 굴가령문화의 특징과 하남 용산문화의 특징이 함께 보인다. 예서의 왕만 유형에서는 단각흑도가 드물게 나타나며 ‘언(?)’은 출토되지 않는다. 예동의 왕유방유형과 예북의 후강유형은 단각흑도와 ‘언’, ‘규’ 등의 기형이 출토되며 산동 용산문화의 특징을 비교적 많이 갖고 있다.
후강2기문화의 뒤를 이은 것은 언사(偃師)-이리두(二里頭)문화로, 이는 청동기시대의 문화이다. 하남(河南) 임여(臨汝)-매산(煤山)에서 후강2기문화와 이리두문화의 관계를 알려주는 지층을 발견하였다. 상층은 이리두 1·2기의 문화이고, 하층은 후강2기문화에 속한다. 매산유적의 문화성격은 후강2기와 이리두1·2기의 문화특징을 모두 지닌다. 즉 매산유적은 후강2기의 말기이며 이리두문화로의 과도기 단계이다.
객성장2기문화는 안서 객성장에서 처음 발견되었으며, 섬서 용산문화(陝西 龍山文化)라고도 한다. 토기는 회도 위주이고 흑도도 일부 보인다. 람문(藍文)과 승문(繩文)이 주로 시문되며, 방격문(方格文)도 일부 확인된다. 주요 기종은 력(?), 정(鼎), 규(規), 분(盆), 가(?), 관(罐), 완(碗) 등이 있다. 그 중에서 ‘력’은 대이(帶耳), ‘가’는 관형심복(罐形深腹), ‘규’는 수장체단류(瘦長體短流)가 많다. 이들 기형은 하남·산동 용산문화나 후강2기문화와 모두 다른데, 특히 절견소평저옹(折肩小平底瓮)이 가장 대표적인 기종이다. 객성장2기문화에는 또 쌍이(雙耳)가 많이 보이는데 이것은 제가문화(齊家文化)에 가깝다. 연대는 기원전 2300∼2000년이다.
산서 용산문화(山西 龍山文化)는 비교적 최근에 산서성 양분현(襄汾縣) 도사촌(陶寺村)에서 발견한 용산기의 한 문화로 도사문화(陶寺文化)라고도 한다. 문화성격은 하남, 산서, 산동의 용산문화와 모두 다르다. 전기와 후기로 대별되며, 전기의 기종은 묘저구2기와 후강2기 문화의 성격에 가깝고, 후기는 삼리교(三里橋)유형의 특징과 비슷하다.
전기의 도기색깔은 복잡해서 회색, 갈색, 흑색 등이 있다. 부(釜)와 ‘소’가 이어진 취기, 편족정(扁足鼎), 관형과 분형의 ‘가(?)’, 직구통형관(直口筒形罐), 절복분(折腹盆)과 편호(扁壺) 등이 보인다. 후기 도기는 대부분 회도 위주이다. 대대족(大袋足) ‘력(?)’, 절복(折腹) ‘가(?)’, 단이배(單耳杯), 절연편호(折沿扁壺) 등이 출토되나, 부나 소, 정은 보이지 않는다. 주로 승문, 람문이 시문되며, 방격문은 상대적으로 적다. 방사성탄소연대측정의 수륜보정치에 의하면 연대는 기원전 2500∼1900년경이다. 주로 분하(汾河) 하류와 회하(澮河)유역에 분포한다.』
(출처; 한국고고학 전문사전(신석기시대편),
portal.nrich.go.kr/kor/archeologyUsrView.do?menuIdx=795&idx=1128)
2008년 10월 22일 중앙일보 기사 〈갑골문자보다 1000년 앞선 골각문자 발견〉
『중국 최초의 문자로 알려진 갑골(甲骨)문자보다 1000년이나 오래된 것으로 보이는 새로운 문자가 발견됐다.
4000 ~ 4500년 전 추정 … 동이족 문자 가능성
갑골문자는 중국 고대 상(商·BC 1600~1046년)나라의 수도인 은허(殷墟·허난성 안양현)에서 1899년 처음 발견된 이후 중국 최초의 문자로 인정받아 왔다.
산둥(山東)대 고고미술학연구소 류펑쥔(劉鳳君) 소장이 최근 중국 고고학 관계자들을 초청한 세미나에서 갑골문자 이전에 다른 형태의 골각(骨刻)문자가 산둥성 창러(昌樂)현 지역에 존재했다는 사실을 밝혔다고 홍콩 문회보(文匯報)가 21일 보도했다. 류 소장은 중국 고고미술학의 창시자로 학계의 명망이 깊은 학자다. 이 자리에 참석한 사회과학원 왕위신(王宇信) 교수 등 은상문화협회(殷商文化協會) 관계자 5명은 모두 류 소장의 학설에 동의했다고 이 신문은 전했다. 세미나에서 이 문자는 ‘창러골각문’으로 이름 붙여졌다.
산둥성에서 발견된 신석기 시대 유물로 추정되는 골각문자(左), 중국 최초의 문자로 알려진 갑골문자(右).
류 소장은 산둥성 민간 소장가인 샤오광더(肖廣德)가 2004년부터 최근까지 창러현 지역 주변에서 수집한 수백 개의 골각문자를 연구한 결과 이 같은 결론을 내렸다고 설명했다. 류 소장에 따르면 이들 도안은 소의 어깨뼈와 사슴·코끼리뼈에 새겨져 있었다.
도안의 형태는 다양했다. 뼈 한 곳에 100여 개의 서로 다른 도안이 새겨진 것도 있고, 1~2개의 도안만 새겨진 뼈도 있다. 여러 개의 도안은 세로로 정렬돼 있어 특정 사안을 기록한 문자로 봐야 한다는 게 류 소장의 주장이다. 단순한 그림일 경우 이처럼 정렬된 형태로 나타날 수 없다는 것이다. 점복(占卜)기록인 갑골문자와 달리 골각문자에선 점복의 흔적이 나타나지 않았다.
류 소장은 “뼈의 색깔과 석화(石化) 상태를 판단해 볼 때 문자를 새긴 연대는 4000~4500년 전으로 보이며, 이는 중국 산둥성의 룽산(龍山) 신석기 시대에 해당된다.”고 말했다. 함께 출토된 뼈로 만든 칼과 송곳은 전형적인 룽산 중·후기 시대의 도구들이었다.
중국 고고학자들은 당시 산둥 지역은 한민족을 포함한 동이(東夷)족들이 집단으로 거주했기 때문에 이 골각문자는 동이문자로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류 소장은 “문자의 모양도 고대 상형문자인 동이문자 계열에 속한다.”고 지적했다. 류 소장은 이어 “안양(安陽)을 중심으로 한 은허 지역에서 발견됐던 갑골문자도 동이족의 골각문자가 발전한 형태일 가능성이 크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20세기 중국 고고학에서 가장 중요한 발견이 갑골문자 발견이었다면 이번 골각문자 발견은 중국 역사를 지금보다 1000년 이전으로 돌리는 21세기 중국 고고학의 역사적 사건”이라고 평가했다. 홍콩=최형규 특파원』
(출처; https://news.joins.com/article/3346996)
2008년 1월 11일 경향신문 기사 〈[코리안루트를 찾아서](15)훙산·량주문화 중원을 향해 달리다〉
『“헌원(황제)의 시대에 신농씨의 세력이 쇠약해지는 시기였다. ~헌원이 곰(熊), 큰 곰, 비·휴·범과 비슷한 동물. 비는 수컷, 휴는 암컷), 추(·큰 살쾡이), 호랑이(虎) 등 사나운 짐승들을 길들여 판천(阪泉)의 들에서 염제와 싸웠는데 여러 번 싸운 끝에 뜻을 이뤘다.”
“치우가 또다시 난을 일으켜 헌원의 명을 듣지 않아 헌원이 제후들로부터 군대를 징집하여 탁록의 들판에서 싸워 결국 치우를 사로잡아 죽였다. 제후들이 모두 헌원을 천자로 삼아 신농씨(염제)를 대신하였으니 그가 바로 황제다.”
중국 역사서 사기 오제본기 첫머리에 나오는 이야기다. 우리는 이 이야기에 담긴 함의와 선후관계를 떠올리면서 이 글을 풀어야 할 것 같다.
#깨지는 중화사상
주지하다시피 중국 역사계는 중원중심, 한족(漢族)중심, 왕조중심의 중화사상을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중국인들이 왜 춘추전국 시대부터 만리장성을 쌓았겠습니까. 그것은 장성이북, 옌산(연산·燕山)이북은 본래 오랑캐의 소굴이고 단지 중원문화의 수혜를 받은 문화열등지역이라고 폄훼했기 때문입니다.”(이형구 선문대 교수)
중국은 예로부터 사방의 오랑캐들을 사이(四夷)라 했는데 동이(東夷), 서융(西戎), 남만(南蠻), 북적(北狄)이라 했다. 얼마나 천대하고 괄시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1970년대 말부터 중국학계는 당황하기 시작한다. 훙산문화(홍산문화·紅山文化 BC 4500~BC 3000년) 유적의 출현 때문이었다. 물론 1930~40년대에도 장성이북과 이남의 문화가 융합되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당시 발해유역에서 동북문화 특징인 지(之)자문 빗살무늬 토기(통형관)와 중원 양사오(앙소·仰韶)문화의 특징인 홍도 및 채도가 공존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당시는 우월한 중원의 양사오 문화가 열등한 훙산문화에 영향을 준 결과라고 치부해버렸다.
그러나 그 오랑캐의 소굴인 동북방 뉴허량(우하량·牛河梁)과 둥산쭈이(동산취·東山嘴)에서 제단(壇)과 신전(廟), 그리고 무덤(塚) 등 엄청난 제사유적이 3위 일체로 확인된 것이다. 이뿐인가. 다링허(대릉하·大凌河) 유역인 차하이(사해·査海)에서 중국 용신앙의 기원으로 일컬어지는 용형 돌무더기가, 차하이-싱룽와(흥륭와·興隆窪·BC 6000년)에서 옥기의 원형과 빗살무늬 토기, 덧무늬 토기 등이 쏟아졌다. 중국학계는 기절초풍했다.
량주 문화의 본산인 량주 판산 무덤. 한 개의 무덤에서 수많은 옥벽(둥근 옥)이 쏟아졌다. 훙산 옥문화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휘황찬란한 량주문화
비단 이것만이 아니었다. 역시 남만(南蠻)의 소굴이었던 장강(양쯔강) 유역에서 탄생한 이른바 량주(양저·良渚)문화도 난공불락의 중화주의에 결정타를 안겨주었다. 훙산문화보다 약간 늦은 량주문화의 찬란한 옥기와, 흙으로 쌓은 엄청난 규모의 고분군, 그리고 궁전터와 제사유적 등.
예컨대 량주문화의 대표격인 량주 유적은 30㎢의 면적에 50곳이 넘는 건축지와 거주지, 고분군을 자랑한다. 특히 판산(반산·反山) 12호는 중심대표인데, 그곳에서 나온 옥월(玉鉞·옥으로 만든 도끼)과 옥종(玉琮·구멍 뚫린 팔각형 모양의 옥그릇) 등 옥문화는 휘황찬란 그 자체다.
“훙산문화의 옥과 비교하면 약간 차이가 있죠. 량주보다는 이른 시기인 훙산옥은 사실적이고 조형적인 반면 량주의 옥문화는 굉장히 추상적이고 정교합니다. 옥에 세밀화를 그린 듯한 1㎜의 세공기술은 지금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정밀하죠.”(이교수)
량주 유적에서 확인된 옥종(예기). 훙산옥이 조형적인 반면 량주 옥문화는 세밀화를 그린듯 정교함을 뽐낸다.
옥월과 옥종은 예기이자 위세품이다. 옥종이 의식에 사용됐다면 옥월을 포함한 각종 부월(도끼)은 군권을 뜻한다. 이 판산 고분의 주인공은 바로 신권과 군권을 한꺼번에 차지했다는 뜻이다.
또한 판산 인근의 모자오산(막각산·莫角山) 유적군은 량주문화 유적군의 중심점이다. 동서 길이 670m, 남북 폭 450m로 전체면적이 30만㎡에 달한다. 높이 10m의 인공토축을 쌓았고, 그 위에 작은 좌대를 3개 조성했다. 유적에는 좌우로 나란히 배열된 직경 50㎝가 넘는 나무기둥들이 있고, 20m가 넘는 초목탄층과 홍토 퇴적층이 보인다. 이것들은 모두 이곳이 궁전터이자 제사를 지낸 곳임을 방증해준다. 야오산(요산·瑤山) 유적에서는 홍색, 회색, 황색 등 3색으로 조성된 대형제단과 묘지가 확인되었다. 량주 유적 조사단은 한마디로 “이곳에는 궁전과 제사기능을 갖춘 대형건축물 혹은 도성이 존재했을 것”이라고 보았다.
# 古國(훙산)과 方國(량주)
문제는 훙산문화와 량주문화의 관계였다.
“량주문화 초기의 옥기를 보면 규범화한 짐승얼굴 도안이 대량 활용되었는데, 이는 훙산문화 옥기 가운데 용형 옥기의 원형을 연상시키거든. 이는 량주문화가 훙산문화의 영향을 또 받았다는 거지.”(이교수)
오랑캐의 본거지에서 잇달아 중원을 능가하는 문화가 터지자 중국학계는 궈다순(郭大順) 랴오닝성 문물연구소 연구원의 표현대로 “통고적(痛苦的), 즉 쓰라린 아픔을 겪으며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더 이상 황하 중류(중원)는 중국문명의 중원(中原)이 아니었음을….
중국고고학의 태두 쑤빙치(蘇秉琦)는 “훙산문화와 량주문화는 차례로 중원으로 몰려와 중화대지에서 4000~5000년 문명을 일으키는데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인정했다. 후에 들어서는 중국 최초의 나라인 하나라와 상나라를 형성·발전시키는데 초석을 놓았다고 덧붙였다.
“쑤빙치는 그러면서 중화문명론이라는 것을 개진했지. 즉 3부곡(部曲)이라 해서 고국(古國)-방국(方國)-제국(帝國)의 3단계론을…. 그러면서 훙산문화를 중국 최초의 원시국가단계인 고국, 량주문화를 그 다음 단계, 즉 제후국의 형태인 방국으로 규정한 것이지.”
쑤빙치는 두 문화에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최고위층, 즉 왕의 신분임을 입증해주는 유적이 확인된 점에 주목했다.
“취락이 있다해서 다 국가단계가 되는 건 아니지. 일반취락과 중심취락, 그리고 중심취락을 초월하는 최고위층의 공간을 갖춰야 국가단계라고 할 수 있거든.”
이미 살펴봤듯 뉴허량은 단·묘·총 등 3위일체의 조합이 엄격하게 구분된 훙산인들의 성지이며, 특수신분인 제정일치시대의 왕이 하늘과 소통하는 곳이었다. 또한 종교제사 중심인 이곳은 1개 씨족이 아니라 여러 씨족의 문화공동체가 모셨던 곳이었다.
훙산문화(BC 4500~BC 3000년)보다 시기가 다소 늦은 량주문화(BC 3200~BC 2200년)는 훙산문화에 비해 취락분화의 층위가 더욱 뚜렷하다. 모든 유적이 정남북의 정교한 배열을 이루고 있으며, 옥기문화 또한 훨씬 정교했다. 쑤빙치는 이런 량주문화를 ‘방국’의 전형으로 표현했다.
#중원을 향해 달려라
그러면서 ‘량주훙산 축록중원(良渚紅山 逐鹿中原)’이란 말로 정리했다. 사슴을 쫓는다는 뜻의 ‘축록’은 사마천의 사기에 “유방과 항우가 중원을 향해 다투어 진출한다”는 뜻으로 쓰였다. 사기에서 딴 이 ‘량주훙산 축록중원’이란 말은 량주문화와 훙산문화가 중원으로 중원으로 질주했다는 뜻이다.
그럼 ‘축록’의 증거들을 살펴보자.
중원 양사오 문화의 본거지인 타오쓰 유적에서 확인된 반용문 토기. 용(龍)의 본향인 훙산문화의 영향을 그대로 받았다.
우선 동북의 훙산문화와 중원의 양사오 문화의 접촉. ‘오랑캐의 문화’를 ‘통고’의 과정 끝에 ‘중국문명의 시원’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중국학계가 주목한 곳은 허베이성(河北省) 서북부였다. 1970년대 말, 쌍간허(桑幹河) 유역인 위센(蔚縣) 싼관(三關) 유적에서 훙산문화의 대표적인 문양인 용무늬 채도관과, 양사오 문화의 대표선수인 장미문양의 채도(이른바 묘저구·廟底溝 유형이라 한다)가 나란히 나온 것이다.
최근에는 쌍간허 인근 신석기 유적에서 훙산문화 말기에 해당되는 옥조룡(용 조각 옥기)이 출토되었다. 중원인 진남(晋南) 타오쓰(도사·陶寺)유적에서 출토된 주칠을 한 반용문(아직 승천하지 못한 용) 토기그릇과 외방내원(外方內圓)의 옥벽은 훙산문화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
쑤빙치의 결론은 이랬다.
“관중 분지(중원)에서 자생한 장미문양의 채도(양사오 문화)와, 옌산 이북·다링허 유역에서 자란 용인문(龍鱗紋·용과 비늘모양 무늬) 채도 및 빗금토기 옹관(훙산문화)이 북으로, 남으로 향했다. 두 문화는 결국 허베이성 서북부에서 조우했다. 이곳에서 융합된 두 문화는 다시 동북으로 건너가 훙산문화의 꽃인 제단(단)과 신전(묘), 무덤(총)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했다.”
학계는 이른바 그렇게 창조된 중국문명의 질긴 끈을 베이징 천단(天壇)에서 찾는다. 뉴허량 제단의 앞부분 형태는 천단의 환구이고, 뒷부분은 베이징 천단의 기년전(祈年殿·천자가 하늘에 제사 지낸 곳)과 비슷하다는 것이다. 또한 무덤의 구조와 후대 제왕릉의 구조가 흡사하다는 점을 꼽는다.
그런데 훙산문화만이 이렇게 중원으로, 남으로 퍼진 것은 아니다.
훙산보다 늦은 량주문화의 ‘축록중원’을 살펴보자. 요순시대 유적으로 꼽히는 진남(晋南)의 타오쓰 유적에는 량주식 토기와 옥기들이 즐비하게 나온다.
또한 산둥반도 남쪽인 쑤베이(蘇北) 화팅(花廳) 유적은 이른바 다원커우(대문구·大汶口) 문화 유적으로 꼽히는데, 이곳에서도 량주문화의 전형적인 정(鼎·솥)과 호(壺·항아리), 옥(玉) 등이 나왔다. 이는 량주문화가 중원은 물론 산둥반도까지 진출했다는 소리다. 저명한 고고학자인 옌원밍(嚴文明)은 이를 두고 “량주문화가 다원커우 문화를 정복했다”고까지 선언했다.
“중국학계는 수레바퀴통으로 문화의 접변과 교류를 설명했어요. 5000년전 중국문명은 여러 부족들의 문화가 상호 영향을 주고받아 중원으로 모였다고…. 먼저 북(훙산문화)이 중원(양사오 문화)과 교류를 시작하였고, 이어 동남(량주문화·다원커우 문화)과 중원이 교류하고, 북과 동남이 관계를 맺고…. 뭐 이런 식으로 정리했죠.”
중국학계는 모든 문명은 중원에서 나왔다는 ‘일원일체’의 역사관이 훙산·량주 등 여러 문명이 모여 지금의 중화문명을 이뤘다는 ‘다원일체’의 역사관으로 바꾸었다. 그러면서 고대 전설을 이 고고학적인 성과에 끼워 맞추기 시작한다. 즉 사기 등 역사서에서 전설로 등장하는 황제와 염제, 황제와 치우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아전인수로 끌어들인다. 절로 혀를 내두르게 하는 중국학계의 견강부회를 한번 풀어보자. 이기환 선임기자』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801111716481&code=210000)
<신동아> 2003년11월호 〈동아시아 고대사의 열쇠 ‘치우천왕’ 논쟁 “치우를 잃으면 고조선 역사도 사라진다.”〉
●‘붉은악마’와 함께 부활한 군신 치우는 역사인가 신화인가
● 동아시아판 트로이 전쟁 ‘탁록대전’
● 염·황·치의 자손임을 강조하는 중국의 속내
● 치우는 동아시아 공동의 조상이다
『중국이 지난해부터 5년에 걸쳐 200억 위안(약 3조원)을 투입해 고구려를 그들의 역사 속으로 편입시키는 ‘동북공정(東北工程)’ 프로젝트를 추진중이라고 한다. 중국 공산당을 대변하는 ‘광명일보’는 아예 ‘고구려는 중국 역사의 일부분’이라고 못 박았다.(자세한 내용은 ‘신동아’ 2003년 9월호 ‘중국은 왜 고구려사를 삼키려 하는가’ 참조) 이 소식을 접한 한국인들은 왜 갑자기 중국이 남의 나라 역사를 훔쳐가려 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는 반응이다.
그러나 이 프로젝트는 어느 날 갑자기 시작된 것이 아니다. 단순히 중국의 국경문제나 동북지역 소수민족의 동요를 차단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며, 따라서 고구려사 왜곡에 그치지 않을 것이다. 그 속에는 중화사상이라고 하는 오래된 중국의 패권주의 역사가 자리 잡고 있다.
고구려를 중국의 역사로 편입한 동북공정의 다음 목표는 치우천왕(蚩尤天王)이 될 것이다. 치우를 중국 역사로 편입함으로써 기자조선, 위만조선, 한사군(이 부분은 이미 그들의 역사가 됐다)을 포함한 고조선 전체의 역사를 가져갈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치우천왕의 존재는 2002년 월드컵 대회를 통해 널리 알려졌다. ‘붉은악마’의 상징물로 활용된 귀면(鬼面)의 주인공이 바로 치우천왕이다. 기원전 28∼26세기에 존재했던 치우는 금속을 제련하여 무기를 만들고 이를 바탕으로 각종 전투에서 엄청난 위력을 발휘해 황제 헌원을 위협했다. 그래서 훗날 사람들은 그를 전쟁신·군신·수호신으로 받들었다.
치우천왕은 누구인가
치우에 대한 기록은 ‘사기’를 비롯해 40여 종의 중국 사서에 등장하지만 불행하게도 한국의 정사에는 남아 있지 않다. 다만 ‘환단고기’나 ‘규원사화’처럼 위서(僞書)로 치부되는 책에 자세히 기록돼 있을 뿐이다. 먼저 ‘사기’를 비롯한 중국 역사서에 나오는 치우 관련 기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치우는 구려의 임금이었으며, 고대 천자의 이름이다.
▲ 구리 머리에 철 이마(銅頭鐵額)를 하고 모래를 먹었으며, 금속을 제련해서 다섯 가지 병기를 만들었다(청동기 유적 발굴로 입증되고 있음).
▲ 난을 일으키기 좋아하고 난폭하여 황제에 굽히지 않다가 잡혀 죽었다.
▲ 그의 묘는 산동성 수장현에 있고, 매년 10월에 제사를 올리는데 붉은 연기가 솟아올랐다.
▲ 군(軍)의 우두머리는 모두 그에게 제사를 올렸는데, 특히 유방은 통일을 위한 마지막 풍패전투에 나가기 전에 치우사당에 참배하고 승리한 후 서안에 그의 사당을 짓고 높이 받들었다.
한국의 사서에 나오는 치우에 대한 기록으로는 ‘삼국사기’와 ‘동사강목’에 ‘치우기’라는 혜성이 나타났다는 내용이 유일하며, ‘연려실기술’ ‘대동야승’ ‘청장관전서’ 등에서는 중국의 기록을 인용해놓았을 뿐이다. ‘성호사설’에는 우리의 민속을 설명하면서 치우를 수호신으로 모시고 제사(이순신의 ‘난중일기’에도 치우사당에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세 차례 나온다)를 지냈다는 내용이 언급돼 있다.
그러나 ‘환단고기’와 ‘규원사화’에는 치우천왕이 배달나라 14대 임금(재위 109년, 기원전 2707∼2599)이며 황제와 치우가 패권다툼을 벌이게 된 경위, 치우가 만들었다는 무기의 종류와 전투방법, 10년간 73회나 치렀다는 주요전투의 내용, 염제 휘하의 한 군장이었다가 난을 평정하는 과정에서 염제로 등극하는 과정, 쇠를 캐 제련하는 과정 등이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
지금까지의 기록을 종합해보면 치우는 바로 ‘고구려’의 전신인 ‘구려(九黎=九麗·九夷·句麗)의 임금이었으며, 치우가 수도를 청구로 옮겼다고 했으니 구려의 영역은 태백산 신단수가 있던 만주지역에서 청구가 있는 산동반도까지 이어졌던 것 같다. 기마족의 이동폭이 넓었음을 인정하면 이해할 수 있다.
오늘날 중국의 역사학자들은 상고시대 동북아시아에는 화하족(華夏族 또는 漢族), 동이족(東夷族), 묘만족(苗蠻) 등 3개의 부족집단이 있었다고 본다. 분포지역을 보면 화하족은 섬서(陝西)성 황토고원을 발상지로 황하 양안을 따라 중국의 서방과 중부 일부지역을 포함했고, 황제가 대표적 인물이었다.
동이족은 산동(山東)성 남부를 기점으로 산동성 북부와 하북(河北)성, 만주지역, 한반도, 일본까지 이르고, 서쪽으로는 하남(河南)성 동부, 남쪽으로는 안휘(安徽)성 중부에 이르며, 동으로는 바다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에 거주했다. 동이족을 대표하는 인물로는 소호·태호·염제·치우 등이 있다. 묘만족은 호북(湖北)성과 호남(湖南)성을 중심으로 거주했고, 삼묘·구려·형만·요족 등 30여 개의 지파가 있으며 치우는 그들의 공통 조상이다. 여기서 치우는 동이의 대표적 인물이면서 묘족의 조상이기도 하니, 구려가 동이의 부락이었다가 남쪽으로 이동하여 묘족연맹을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트로이전쟁 못지않은 탁록대전
치우시기에 이르러 동이연맹(고을사회로 볼 때)을 다스리던 염제(왕호, 사람 이름이 아니라 여러 명의 염제가 있음) 유망이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여 기강이 문란해지면서, 같은 동이연맹 군장의 아들이던 황제 등이 제위를 탐하므로 이를 바로잡기 위해 구려족 임금인 치우가 일어났다. 그러나 어리석은 염제 유망이 제위를 찬탈하려는 줄 알고 황제와 손을 잡고 치우와 대적한다(이에 앞서 염제는 황제와의 싸움에서 졌다). 하지만 황염동맹은 치우에게 대패하고 치우는 공상에서 동이족연맹의 임금인 염제가 되니 마지막 염제였다.
같은 동이족 연맹의 일원이던 치우와 황제 헌원은 10년간 73회나 싸웠으나 황제는 늘 패했고, 그러면 여성들에게 쫓아가 도움을 청하여 그 군대를 이끌고 다시 도전했다가 또 패하곤 했다. 여기서 여성의 도움을 받았다는 기록에 대해 ‘여성들이 황제를 좋아했다’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지만, 당시는 모권사회였으므로 각 부락의 실질 지도자가 여성이었음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보아야 한다. 치우가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무기인 금속무기를 만들어 사용했으며, 안개를 일으키고 비와 바람을 부르는 등의 도술을 행했다고 하니 승리는 당연했을 것이다.
그 후 그들의 마지막 싸움이자 동양 역사기록상 첫 대전인 ‘탁록대전’이 현재의 베이징 서북쪽에 있는 탁록(?鹿)에서 벌어진다. 이 대전은 기마족이 내려와 농경족과 섞인 동이족 가운데서, 부계사회를 지향하는 기마족 문화의 치우와 모계사회 지향의 농경문화의 황제 간의 충돌이었다. 한신대 김상일 교수는 동쪽의 정신문화와 서쪽의 물질문화의 충돌이라고 설명한다.
이 전쟁으로 중국에서는 치우가 죽었다 하고, 우리쪽 기록에 따르면 치우군의 부장인 치우비가 죽었다고 한다. 그러나 전투 후 치우는 묘족의 시조가 됐고, 무덤이 산동반도 서남쪽에 있으며 군신으로 추앙받았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탁록에서 죽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상당한 설득력을 갖는다.
최근 중국의 탁록중화삼조문화연구회(?鹿中華三祖文化硏究會)는 탁록지역에서 4개의 치우 무덤을 찾아내고, 그 중 1개가 진짜 치우 무덤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치우가 탁록에서 죽었다는 기록을 뒷받침하려는 의도다. 그러나 산동성에서는 ‘한서’의 기록을 인정하여 지역 내에 있는 3개의 무덤 중 문상현 남왕진의 무덤을 진짜 무덤으로 보고 작년부터 복원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어쨌든 탁록전투로 인해 동북아시아에서 동·서 문명의 특성이 구분되어 뚜렷하게 다른 문화집단이 형성되었으며, 그 두 문화집단(모권·물질 대 부권·정신)의 갈등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순임금이 부권사회를 지향하다가 자기 딸들에게 독살당한다는 금문학자들의 주장을 보더라도 역사적으로 모권과 부권의 경쟁이 얼마나 치열했는지 알 수 있다.
치우에 집착하는 중국
이렇듯 의미가 깊은 치우천왕의 역사지만, 그의 활동영역이 대부분 현재의 중국 땅인 데다 국내 문헌사료의 부족 등을 이유로 국내 학계는 치우 연구를 소홀히했고, 아예 중국 고대의 신화인물로 치부하고 있다. 반면 중국측은 몇 년 전부터 “치우는 묘족의 선조일 뿐 아니라 황제, 염제와 더불어 중화민족 역사의 3대 인문시조(人文始祖)”라고 주장하고 치우 복원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치우가 중국의 조상이라면 그가 다스린 ‘구려’와 그 후신인 고구려는 자연스럽게 중국 역사에 편입되고, 치우의 영역과 법통을 이어받은 고조선 역사마저 중국에 귀속될 것이다.
전통적으로 중국인들은 삼황오제(三皇五帝)를 신화적 존재로 보았고, 하우(夏禹)부터 실존 역사로 취급했다. 황제의 자손인 하우를 그들의 조상으로 받들면서 스스로를 화하족이라 불렀다. 그 외에 염제의 후손인 동이족과치우의 후손인 묘만족은 오랑캐라며 야만족 취급을 했다.
1997년 4월 호남성 이안링(炎陵縣)현에 있는 염제 신농의 무덤을 찾아갔다가 높은 산 위에 ‘염황지자손(炎黃之子孫)’이라는 큰 간판이 세워져 있는 것을 보았다. 중국인들이 황제의 자손(子孫)일 뿐 아니라 염제의 자손이기도 하다는 것을 강조한 문구였다. 그동안 중국에서는 유적유물의 발굴작업이 진행될수록 황하문명을 비롯해 선진(先秦) 문명의 주인공이 그동안 오랑캐라 비하하던 동이족임이 드러나고 있었다. 한자를 비롯해 우수하다고 알려진 많은 중국문화가 한족의 문화가 아니라는 연구도 속속 나옴에 따라 황제의 자손인 것만 강조해서는 더 이상 정통성을 인정받기 어려운 상태가 된 것이다.
여기에 1988년 덩샤오핑(鄧小平)이 ‘염황자손(炎黃子孫)’이라는 휘호를 앞세워 ‘소수민족 끌어안기’를 강조함에 따라, 중국 내에서는 동이족의 시조 염제(炎帝 神農)를 자기들의 시조에 포함시키려는 운동이 벌어졌다. 정치적 목적의 ‘동화정책’에 따라 한 민족이 두 조상을 갖게 된 것이다.
1999년 6월 필자는 ‘한배달’ 치우학회 회원들과 함께 동이족의 역사현장을 답사하기 위해 산동반도와 탁록지역을 찾았다. 베이징의 서북쪽에 있는 탁록에는 탁록중화삼조문화연구회가 주축이 되어 1995년에 세운 귀근원(歸根苑)이라는 사원이 있고, 그 가운데 ‘삼조당(三祖堂)’에 염제·황제·치우제 세 사람의 좌상을 안치하고 참배를 하고 있었다. 이미 치우가 중국의 역사에 편입되었음을 실감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치우를 ‘난폭하고 난을 일으키기 좋아하는’ 야만족으로 취급하고, 염제와 황제의 가장 큰 업적이 치우의 정벌이라 자랑하던 중국인들이 이제는 치우를 황제·염제와 같은 반열에 올려 스스로 ‘염·황·치(炎·黃·蚩)의 자손’이라 주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조상이 셋이 된 이상 황제의 자손이라는 화하족만으로는 이를 설명할 수 없으므로 화하족(황제의 후손)과 동이족(염제의 후손) 및 묘족(치우의 후손)을 합쳐 ‘중화족’이라는 새로운 민족 명칭을 만들어냈다. ‘중국은 한족(漢族)과 55개 소수민족으로 구성된 다민족 국가’라는 말은 이제 옛말이 되었고, 이로써 중국은 동이의 역사, 묘족의 역사를 모두 ‘중화족’의 역사에 포함시킬 수 있는 근거를 갖게 됐다.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중국에서는 ‘염·황·치’ 삼조를 모시려는 움직임이 본격화되기 시작하여, 1993년 10월 탁록중화삼조문화연구회 런창허(任昌和) 회장이 ‘염·황·치 삼조문화의 관점’이라는 논문을 발표하면서 공식화되기에 이른다. 이어 탁록삼황삼조문화학술토론회가 열리고, 1995년에 귀근원을 만들면서 삼조문화가 전국적으로 퍼져나갔으며, 후속 연구도 활발했다. 한마디로 정부의 지원 아래 대대적인 치우 끌어안기 사업이 진행된 것이다.
2001년 산동반도의 치우무덤을 찾았을 때 주민들 대부분이 그 위치조차 알지 못했으나, 2002년 봄 명지대학 진태하 교수 일행이 그곳을 다시 찾았을 때는 산동성의 치우 무덤을 복원 중이었다. 또 호남성에 치우의 동상을 세우고 1993년부터 ‘간추절(�秋節)’ 행사를 개시하여 묘족의 독특한 문화전통을 살리면서 경제발전의 중요한 창구로 사용하기도 하고, 세계 치우학술대회를 열어 치우에 대한 연구범위를 세계로 확대하고 있다. 이는 치우와 관련한 문화의 흔적이 미국 오대호지방과 남아메리카, 북유럽까지 연결되어 있다는 중국학자 왕대유의 주장에 따른 것이다. 이처럼 중국인들은 1980년대까지 자신들의 조상인 황제에 대항했다 해서 미워하던 치우를 공동조상으로 받들면서 세계적인 공인을 얻으려 하고 있다.
치우 무덤과 유적복원 활발
2001년 옌볜대학에서 열린 치우학술대회에서 중국측으로는 유일하게 치우에 대해 발표한 짜오위다(趙育大)씨는 “치우의 문화가 한족의 문화에도 깊은 영향을 미쳤다” “황제와 치우 중 누가 정통이고 누가 비정통이라는 차별을 두어서는 안 된다”는 점에서 우리측과 비슷한 주장을 하기도 했으나, “중화민족은 황염동맹을 핵심으로 한다” “치우는 묘족의 시조”라고만 하고 동이의 수장이었음은 간과했다. 또 “중화문명사에서 전환적인 의미를 띄는 인문시조”라고 하여 당시 동서문명충돌론이 아니라 중화문화라고 하는 문화집단만을 강조했다. 한편 “치우가 탁록에서 죽었으므로 그 무덤도 당연히 탁록에 있어야 한다”면서 산동성에 있다는 ‘한서’의 기록을 무시하는 등 치우라는 걸출한 인물을 인정하면서도 중화문화라고 하는 카테고리 속에서만 보려고 해 ‘동서 문화충돌론’을 주장한 한신대 김상일 교수와 상당한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김교수는 “두 문화집단이 있어 충돌이 생기는 것이므로 중화문화 하나만 강조해서는 안 된다”는 중화주의를 강하게 비판했다. 그리고 필자가 “공동시조로서 함께 연구하자”고 제안해 앞으로 연구 교류하기로 합의했다. 이 학술대회를 통해 옌볜대학 교수들에게 ‘치우는 우리 조상’이라는 점을 알려줌으로써 “우리도 연구를 시작하겠다”는 반응을 얻어내기도 했다. 그러나 중국정부가 과연 조선족에게 그런 연구를 허락할지 미지수다.
이렇게 중국이 치우에 집착하는 이유에 대해 단순하게 소수민족을 끌어안는 동화정책의 일환이며, 한반도의 남북통일시 생길 수 있는 국경문제에 대비하고, 문화유적의 관광자원화를 통한 경제발전을 추구하는 실리적 목적이라고 짐작할 수도 있다. 그러나 좀더 깊이 들여다보면 고구려는 물론 고조선을 포함하는 동이·묘족과 관련된 모든 역사를 하나의 중국사로 끌어가려는 논리로서, 패권주의인 중화사상의 부활을 예고하는 것이라 하겠다.
삶 깊숙이 자리 잡은 치우의 흔적
이처럼 중국이 일방적으로 치우 연구를 진행하면서 모든 치우의 후예들을 ‘중국인화’하는 것을 경계하려면 국내에서도 치우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져야 한다. 사실 치우를 한(漢)족의 시조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이미 ‘중화족’ 속에 포함된 동이와 묘족의 조상인 것은 분명하다. 즉 치우는 우리의 조상이기도 하지만 그들의 조상이기도 한 것이다. 결국 누가 더 많은 연구를 하고 어느 지역에 그 흔적이 원형대로 많이 남아 있느냐, 또 그 유산을 누가 더 현대화하느냐에 따라 치우의 역사가 중국의 것이 되거나 우리의 것이 될 수 있고, 또는 둘 다의 것이 될 수도 있다.
현재 한국사회에서 치우에 대한 정서와 평가는 일반 대중과 학계에서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지난 월드컵 이후 국민들은 치우를 당연히 우리 역사로 인식하고 있는 반면, 학계는 ‘치우가 우리의 조상이라는 것을 뒷받침할 실증적 자료가 없다’며 여전히 ‘중국 고대의 신화적 인물’로 보고 있다. 앞서 밝혔듯이 그나마 치우에 대한 기록이 있는 책들은 모두 위서(僞書)로 취급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일상생활 곳곳에서 치우의 흔적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장승의 모습으로, 혹은 주요 건물 입구에 서 있는 해치(또는 해태, 사천왕)의 모습으로 치우는 우리 생활 깊숙이 들어와 있다. 착한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는 친밀한 홍소로, 나쁜 마음을 품은 사람에게는 무서운 포효로 보이는 표정을 통해 악귀로부터 마을의 재액을 막아주고 있는 것이다. 또 기와집 치미나 막새기와(귀면와)에 위치하여 집을 화재와 재액으로부터 보호해주고, 동짓날에는 붉은 팥죽이 되어 병마와 액운을 막아준다. 또한 단오절 적령부(赤靈符)라는 붉은 부적을 통해 개인과 집안을 보호해주기도 하고, 군사들의 방패와 무기와 군기(軍旗), 투구 등에 새겨져 승리를 일궈내는 군신으로 작용을 하며, 잡귀를 막아주고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 붉은 도깨비로 항상 우리 곁에 머물렀다.
도깨비 연구가인 조자용 박사나 윤열규씨에 의하면 도깨비는 중국과 일본에도 있지만 한국의 도깨비만이 소뿔이나 자신감에 넘치는 홍소 같은 치우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고 한다. 중국에서는 소뿔 투구를 쓰고 경기를 하는 치우희, 고구려 벽화에서는 각저희라고 했던 씨름은 현재 우리 민속의 대표적인 놀이가 되어 있으며, 소뿔 대신 황소를 상으로 준다.
상고사 연구는 어디로
사실 한국 상고사 연구자들은 정사로 인정할 만한 단군 이전의 민족사 기술이 거의 없어 발을 구른다. 단군도 신화적 인물로밖에는 취급할 수 없는 상황이니 그 이전의 역사는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재미있는 것은 우리가 흔히 사용하고 있는 한민족, 배달민족이라는 말의 출처가 바로 ‘환단고기’라는 것이다. 책 자체는 위서로 의심받고 있지만 이 책에서만 볼 수 있는 한민족, 배달민족이라는 말이 널리 쓰이고 있는 것은 아이러니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인류학의 보편적인 이론에 따르면 인간은 1만년 전후 중석기 내지 신석기 시대가 되면서 떠돌이 생활을 마감하고 정착생활을 시작하는데, 이때 작은 부락 단위로 생활했기 때문에 부락사회 또는 마을사회(단국대 윤내현 교수의 주장) 시대라 한다. 그러다 약 6000년을 전후하여 인구가 급격히 늘면서 식량이 부족해지자 전쟁이 일어나고 자기 보호를 위해 서로 연맹을 시도한 부락연맹사회 또는 고을사회(윤내현)가 형성된다. 그 후 청동기가 사용되기 시작한 4500년 전후 고대국가가 탄생했다. 기록이 있는 것은 바로 국가사회부터다. 그 이전의 역사는 창세신화를 비롯한 다양한 신화와 전설의 형태로 전해졌다.
화재와 재액으로부터 집을 보호하기 위해 기와집 치미와 막새기와에 새기는 도깨비의 모습은 바로 치우의 흔적이다.
그렇다면 우리 역사에도 고조선이라는 국가 이전에 마을이나 고을사회 단계가 있었을 것이며, 이와 관련한 신화나 전설이 구전이나 무가(巫歌) 형태, 또는 야사로 남아 전해졌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학계는 단군 이전 시대를 역사화하는 데 관심이 없었으며 아예 역사에서 지워버림으로써 그 속에 포함된 치우의 역사도 당연히 함께 사라지고 말았다.
중국 역사책에 ‘치우가 동이족이며, 구려의 임금’이라고 적혀 있는 만큼, 만약 그 때를 우리의 고을사회 역사로 해석해 ‘환단고기’나 ‘규원사화’의 내용으로 이를 보완한다면 훌륭한 단군 이전사가 만들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시도도 해보지 않고 우리 스스로 한민족의 역사를 한반도 안으로 가져왔다.
예를 들어 만주지역에 있던 요·금·원·청은 고조선과 고구려의 영토에서 일어났으며, 중국 고대사에서 동이로 분류되던 민족이 세운 나라들이다. 따라서 우리 겨레의 역사에 포함시킬 수도 있으나 우리는 말갈, 여진, 만주족이라며 오랑캐로 몰았고 우리의 역사에서 제외시켰다. 대신 중국은 “지배를 받았지만 문화로 흡수했다”는 논리로 자국 역사에 포함시키고 있다.
대조영이 세운 나라 또한 처음에는 ‘진’이었으나 당나라가 멋대로 ‘발해국왕’에 봉하자 나라 이름도 발해로 바꾸었고, 지금도 우리가 스스로 부른 이름 ‘진’보다는 ‘발해’라고 부르고 있으니, 중국은 이를 근거로 ‘발해가 당의 지방정권’이라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현재 우리나라 중·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 실린 지도를 보면 난하 동쪽, 청천강 이북까지만 고조선 영역으로 표시하고, 그 남쪽을 삼한이라고 해놓았다. 그리고 많은 국내 학자들이 한민족의 형성을 신라통일이나 고려의 재통일 이후로 보고 있다. 바로 ‘광명일보’의 주장처럼 ‘고씨 고려(고구려)와 왕씨 고려는 다르므로 고구려는 중국, 고려는 삼한의 후예인 한민족’이라는 주장이 나올 수 있는 빌미를 우리 스스로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고조선이 중국의 역사라고 주장할 날도 멀지 않은 것으로 보여진다.
또 국내 학자들은 한반도 밖의 한민족 청동기 문화를 인정하지 않는다. 신용하 교수 등 일부 학자들이 고조선 영토로 거론하기도 하는 산동반도와 만주 요녕성의 경우 기원전 25세기까지의 청동기 유물이 나오고 있으나 우리의 문화로 인정받지 못했다. 북한이 주장하는 대동강 유역의 기원전 30세기 청동기 유물이나, 양수리에서 출토된 기원전 24세기 청동기 시대 유물들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이렇듯 민족의 형성기라고도 볼 수 있는 우리의 청동기 시기가 기원전 10세기 설에 묶여 있으니, 그 이전 인물인 치우는 물론 단군조차 역사적 인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한 중국학자가 “한자는 한(漢)족의 언어체계와 맞지 않으므로 한족이 만든 글자가 아니라 동이족의 글자다”라고 주장해도 동이족의 핵심이라는 우리는 한자가 우리 겨레의 글자일 가능성조차 무시해버린다.
이처럼 우리 사학계가 만주를 포기하는 동안 국민들은 의분에 젖어 백두산 관광길에 올라 ‘만주는 우리땅!’이라는 현수막을 걸어놓고 애국가를 부르는 등 대책 없이 중국측을 자극하는 행위를 서슴지 않고 있다. 이로 인해 중국정부가 한국의 국무총리에게 항의서신을 보내는 등의 해프닝이 발생하는 것도, 알고 보면 한국 고대사에 대한 논리적, 학문적 연구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나마 치우에 대한 연구는 재야에서 진행되고 있다. 겨레얼 바로찾기 운동단체인 사단법인 한배달은 1999년부터 중국의 치우연구 현황을 파악하는 한편, 그 해 12월말 치우학회를 설립해 국내외의 치우 관련 사료를 모으기 시작했다. 2000년과 2001년에는 한국과 중국(옌볜대학)에서 각각 치우학술대회를 열고, 치우자료집과 학회지를 발간하기도 했다. 경기대 법정대 고준환 교수가 ‘치우천황’이라는 책을, 소설가 이우혁이 ‘치우천왕기’라는 소설을 발표했지만, 학계의 반응은 냉담하기만 했다.
우리 스스로 포기한 역사
중국 ‘중화삼조당’에 모신 치우상.
2001년 옌볜대학에서 열린 제2회 치우학술대회(주제 ‘고대동아시아 종족과 한민족’)에서 확인한 바는 옌볜대학을 비롯한 중국내 조선족들에게 고구려 이전 역사연구가 금기시되어 있다는 것이다. 중국은 동이족, 묘만족, 화하족을 합쳐 ‘중화족’이라고 하면서도 우리 민족이 세운 나라임이 분명하고 선후를 이은 관계인 고구려, 발해에 대해서도 고구려족, 발해족 등 나라마다 민족의 이름을 붙여 같은 민족임을 부정하려는 의도가 엿보였다. 소수민족을 우대한다고 하지만 결국 소수민족을 더욱 작은 단위로 나누어 자체연대나 단결의 가능성을 차단하려는 의도로 보였다. 이런 큰 그림 속에서 고구려사를 중국 역사에 포함시키는 ‘동북공정’이 계획되고 진행되는 것이다.
2003년 봄 동북아 경제포럼이 열린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흥미로운 사실을 깨달았다. 이 지역은 본래 아시아인들이 살던 곳이지만 지금은 백인들이 주인이다. 1860년대 러시아가 부동항을 얻기 위해 극동함대를 앞세워 백인들을 이곳에 이주시키고 대신 아시아인(특히 고려인들)들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킨 결과다. 블라디보스토크 역사관은 1860년 이전의 역사를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불과 150년 만에 인구의 구성과 역사의 주도세력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미국 역시 200여 년 만에 원주민인 인디언의 역사는 사라졌다.
이렇게 지역의 역사와 종족의 역사는 시대적 상황에 따라, 서술자의 관점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만약 ‘만주지역과 산동반도 지역은 수천 년 전에도 중국 땅이었고, 한족이 거주하고 있었다’는 오랜 고정관념을 버리면 우리 고대사는 다시 쓰여져야 할 것이다.
현재 거주하고 있는 사람의 시각에서 쓰면 처음부터 자신들의 영역이었던 것처럼 쓰거나, 그 이전의 역사는 빼버릴 가능성이 높다. 마치 미국과 블라디보스토크의 역사에서 원주민들의 역사가 지워진 것과 같다. 반대로 과거 거주했던 종족(원주민)의 시각에서 쓰면 미국은 인디언의 역사, 블라디보스토크는 발해인들의 역사가 될 것이다.
주도권 싸움 대신 공동연구를
현실적으로 보면 둘 다 옳다. 그리고 둘 다 사실이다. 그러나 이 둘이 조화돼야 완전해진다. 양국의 공통 조상인 치우 문화라는 공통점이 한국과 중국의 연대를 쉽고 강하게 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치우의 역사가 종족간 다툼의 빌미가 아니라 협력과 화합의 근거가 돼야 한다. 치우의 종족적인 계보로 따지면 중국의 만주-산동반도-남서지역, 한반도, 일본, 대만, 동남아 지역까지 동이와 묘족의 거주영역이 모두 해당한다. 그들이 각자의 관점에서 치우를 연구하고 발전시키며, 상호 교류를 통해 문화의 공통점을 찾아낸다면 아시아 공동체를 만드는 데 큰 힘이 될 수 있다.
고구려도 마찬가지다. 만주지역은 배달나라 시대를 빼더라도 고조선-고구려-진(발해)까지 약 3300년 동안 한민족이 나라를 세우고 거주했던 지역이다. 그러니 여기서 ‘지배층은 고구려족, 피지배층은 말갈족’이었다고 이해하는 것은 옳지 않다. 어떻게 3300여 년 동안 하나의 집단을 이루고 살면서 민족이 다를 수 있겠는가. 말갈, 여진, 몽골, 만주족은 한민족 내지 배달민족(중국에서는 동이족)의 지류라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우리와 일본의 조상이기도 하고 중국 동이족이나 묘족의 조상이기도 한 치우천왕. 각자가 자기 민족의 선조로 기록하고 있고, 양쪽이 다 옳다면 결론은 이렇다. 당시 동아시아에 큰 문화집단이 있었고, 그 지도자가 치우와 황제였으며, 그들 간에 충돌이 있어 각자의 문화 독창성이 더 강화되거나 상호교류를 통해 새로운 문화가 싹트기도 했을 것이다. 김상일 교수는 이를 동서문화의 충돌로 보았다. 종족의 이동과 문화의 이동도 있었을 것이다. 그 과정을 추적하여 동아시아의 상고사를 재정립하는 것이 오늘날 동아시아 국가들에게 남겨진 과제다.
중국이나 중화만이 중심이어서도 안 되며, 한민족만이 중심이라고 해서도 안 된다. 각국이 보유한 역사기록과 전설, 신화, 민속 자료들을 최대한 수집하여, 너와 나를 버리고 양쪽의 공동 조상, ‘우리’의 조상인 치우를 연구하는 열린 자세가 필요하다. 글: 박정학 치우학회 회장』
(출처: https://shindonga.donga.com/3/all/13/102913/1)
4.26 울진 후포리유적(蔚珍 厚浦里遺蹟) -신석기시대 후기
『후포리 선사유적은 후포3리의 바다쪽으로 돌출한 해안단구 상면인 해발 45m의 등기산[속칭 등대산] 정상부에 위치한다. 정상부의 동쪽과 남쪽은 해안 절벽이다. 이곳에서 사방을 바라보면 동북쪽과 동남쪽에는 동해가 펼쳐져 있고, 뒤쪽에는 후포항과 시가지가 내려다보인다. 이러한 입지는 바다와 관계가 깊은 삶을 영위했던 사람들이 이용하기에 적합한 곳으로 보인다.
1983년 길을 내는 공사 중에 유물이 노출됨에 따라 4~5월에 걸쳐 발굴이 실시되었다. 10~20㎝ 정도의 표토 아래 부식토층에서 인골과 부장품이 나온 유구가 확인되었다. 이 층은 지점에 따라 흑갈색·적갈색·황갈색을 띠는 단단한 찰흙이 있으며, 여기에 조가비와 목탄이 섞여 있고, 그 아래는 생토층이다.
매장 형태는 인위적으로 구덩이를 판 것 같지는 않고, 주위에 흩어져 있는 큰 바위를 그대로 둔 채 인골과 돌도끼 등을 겹쳐 묻은 것으로 보인다. 노출된 지름 4m 내외의 구덩이에서 간돌도끼[磨製石斧] 130여 점을 비롯해서 대롱옥, 구두주걱 모양의 장신구 등 모두 170여 점의 석기와 다수의 인골이 출토되었다.
인골은 구덩이 중앙부를 중심으로 놓인 것 같다고 한다. 인골의 뼈는 무질서하나, 간돌도끼가 비교적 가지런히 놓여 있는 점을 근거로 세골장(洗骨葬)으로 묻힌 것으로 보았다. 이 유적에는 남녀 비슷한 비율로 최소 40인 이상이 묻혔으며, 그들은 주로 20대 젊은 층으로 판명되었다.
유물은 길이가 5㎝ 미만 되는 작은 도끼도 상당수 있으나, 대부분 길이가 20~30㎝ 정도 되는 긴 도끼류가 많으며, 50㎝ 이상의 긴 도끼도 출토되었다. 이러한 긴 도끼들은 함경도 지방과 춘천 교동 동굴유적에서 출토된 것과 비슷하다. 도끼들은 모두 잘 마연된 상태로 폭이 좁고 두께가 두꺼운 것과 폭이 넓고 두께가 얇은 것으로 나뉜다. 도끼의 날은 끌날과 조갯날이 있다. 이 유물들은 시신을 덮을 때 썼던 것으로 나타났다.
돌로 만든 장신구 2점은 유선형의 평면형으로 구두주걱 같이 한쪽 면이 약간 오목하게 들어가 있고, 뒷면은 볼록하게 갈았으며, 구멍이 뚫려 있다. 그 밖에 대롱구슬[管玉] 2점과 구멍을 뚫을 때 썼을 듯한 작은 돌막대[石捧]도 있다. 토기는 한 점도 출토되지 않았다.
후포리 선사유적에서 발굴된 유물들은 현재 국립대구박물관에 보관 및 전시 중이다.
후포리 선사유적은 울진 지역에서 최초로 발견하여 발굴한 신석기시대 유적이다. 보고서에서는 인골·대롱구슬·긴간돌도끼들이 출토된 춘천 교동 유적을 신석기시대 늦은 시기로 편년한 것에 근거하여 후포리 선사유적의 연대를 신석기시대 늦은 시기로 추정하였다.
춘천 교동 유적의 토기는 평저이고 고리가 붙은 토기[有孔把手]가 있으며, 종행단사선문(縱行短斜線文)·자돌문(刺突文)·죽관문(竹管文) 등을 구연부에만 시문한 점, 점토질 바탕흙에 표면을 매끄럽게 마연 처리한 점 등이 모두 양양 오산리식 평저토기와 일치한다. 석찬(石鑽)으로 보고된 석기도 오산리의 특징적인 결합식 낚시 바늘[釣針軸]과 동일한 형식이다. 이것으로 보면 교동 유적은 오산리 유적과 관련되는 것이 분명하다.
강원도 영동 지역의 신석기 토기 문화는 오산리 유적에 대한 조사와 연구를 통해 덧무늬토기-오산리식 평저토기-빗살무늬토기의 순으로 전개되는 것으로 밝혀졌다. 교동 유적을 오산리식 평저토기 단계로 볼 수 있으므로 후포리 선사유적도 빗살무늬토기 문화보다 이른 시기의 유적으로 설정할 수 있다.
후포리 선사유적은 인골과 돌도끼를 함께 묻은 집단 매장 유적으로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드문 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신석기시대의 매장 유적은 동굴 안을 무덤으로 이용한 춘천 교동 동굴 유적과 조개무지[貝塚] 하층에 타원형에 가까운 무덤 구덩이를 파고 토기, 석기와 함께 시신을 펴묻기[伸展葬]한 통영 연대도 유적 등이 있다.
후포리 선사유적은 우리나라 중부 및 동해안 지역, 남해안 지역과의 신석기 문화 교류와 전파 연구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예를 들어 후포리 선사유적에서 출토된 긴간돌도끼는 교동 유적과 비교되며, 교동 유적은 오산리 유적의 평저토기 문화와도 비교된다. 따라서 양양 오산리 유적, 고성 문암리 유적 등 영동 지방에서 확인되는 오산리 유형 문화의 분포 범위가 영서 지방의 춘천과 울진 지역까지 포함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오산리형 결합식 낚시 바늘은 그 분포 지역이 오산리 유적을 북한계(北限界)로 하여 남해안 지방에 집중되어 있어 남부 지방과의 관련성이 밝혀졌다. 이와 같이 신석기 문화 연구에서 후포리 선사유적의 중간적 위치가 의미하는 바는 크다.
후포리 선사유적이 매장 유적이라는 점도 신석기인들의 의식 구조 파악에 중요한 자료이다.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산 정상에서 발견·조사된 산상(山上) 유적들은 어로 활동의 안전과 생업의 풍요를 기원하는 의례 장소일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어 후포리 선사유적의 해석에 도움이 된다. 또한 후포리 선사유적의 석기에서 석기를 만드는 과정인 찰절기법(擦切技法)[돌감을 마찰하여 홈을 만들어 원하는 형태의 크기로 잘라내는 기법]이 보이는 점도 주목된다.
후포리 선사유적은 신석기시대의 무덤이 드문 우리나라에서 형질인류학적 연구 자료를 제공하였다. 그러나 앞으로 더 연구해야 할 과제로는 자연 지형을 이용한 무덤에 석기와 인골이 무더기로 뒤섞여 있고 세골장으로 처리된 점, 특별한 연령층의 젊은 남녀가 집단으로 묻힌 점, 이들의 생업, 특별히 긴간돌도끼가 부장 유물의 중심을 이룬 점, 유적의 정확한 연대와 성격 등이 남아 있다.』
(출처; 디지털울진문화대전,
http://uljin.grandculture.net/Contents?local=uljin&dataType=01&contents_id=GC018004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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