력사를 찾아서
《만주와 한반도 12,000년 전~ 2,000년 전 년대기》 4.14 배달국 본문
《만주와 한반도 12,000년 전~ 2,000년 전 년대기》 4.14 배달국
대야발 2024. 2. 9. 12:14《만주와 한반도 12,000년 전~ 2,000년 전 년대기》
4.14 배달국; 5919년 전~4354년 전(BC 3898~BC 2333년)
신시배달국
『《삼성기》의 〈신시역대기〉와 《태백일사》〈신시본기〉에서는 신시배달국에 대해 기술하고 있는데, 단군이 세운 고조선 이전의 만주와 한반도를 중심으로 자리 잡았던 한민족의 고대 국가라고 한다. 환웅이 다스린 국가로 18대 1565년의 역년이며, 중국 신화에 등장하는 치우 또한 배달국의 한 임금으로 기록되어 있다.
(기원전 3898년): 거발한(居發桓)환웅, 재위 94년, 120세
(기원전 3804년): 거불리(居佛理)환웅, 재위 86년, 102세
(기원전 3718년): 우야고(右耶古)환웅, 재위 99년, 135세
(기원전 3619년): 모사라(慕士羅)환웅, 재위 107년, 129세
(기원전 3512년): 태우의(太虞儀)환웅, 재위 93년, 115세
(기원전 3419년): 다의발(多儀發)환웅, 재위 98년, 110세
(기원전 3321년): 거련(居連)환웅, 재위 81년, 140세
(기원전 3240년): 안부련(安夫連)환웅, 재위 73년, 94세
(기원전 3167년): 양운(養雲)환웅, 재위 93년, 139세
(기원전 3071년): 갈고(葛古)환웅 또는 독로한환웅 재위 100년, 125세
(기원전 2971년): 거야발(居耶發)환웅, 재위 92년, 149세
(기원전 2897년): 주무신(州武愼)환웅, 재위 105년, 123세
(기원전 2774년): 사와라(斯瓦羅)환웅, 재위 67년, 100세
(기원전 2707년): 자오지(慈烏支)환웅, 치우천왕이라고도 하며, 청구국으로 도읍을 옮겨서 재위 109년, 151세
(기원전 2598년): 치액특(蚩額特)환웅, 재위 89년, 118세
(기원전 2509년): 축다리(祝多利)환웅, 재위 56년, 99세
(기원전 2453년): 혁다세(赫多世)환웅, 재위 72년, 97세
(기원전 2381년): 거불단(居弗壇)환웅 혹은 단웅(壇雄), 재위 48년, 82세
제5대 환웅인 태우의 환웅의 열두 아들 중 막내가 태호 복희이며, 그의 후손이 현재의 산시성(山西省, 산서성)에 살았다고 한다. 환단고기에서는 태호 복희씨가 팔괘의 시초임을 밝히고 있다.』
(출처; 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wiki/%ED%99%98%EB%8B%A8%EA%B3%A0%EA%B8%B0)
〈오성취각으로 배달국을 증거하다!〉
박석재 한국천문연구원 연구위원
2015년 11월 11일 브레인미디어
국학원 148회 국민강좌에서 밝혀
『단군조선 이전의 역사가 천문기록으로 확인됐다. 박석재 한국천문연구원 연구위원은 지난 10일 서울시 종로구 대한출판문화협회에서 국학원 주최로 열린 제148회 국민강좌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국가는 배달국”이라며 “배달국의 오성결집 기록이 천문류초에서 발견됐다”라고 말했다.
이날 박 위원은 ‘천문으로 개천을 말하다’라는 주제로 강연했다.
박 위원이 밝힌 ‘천문류초(天文類抄)’는 세종의 명에 의해 천문학자 이순지(李純之, 1406∼1465)가 옛 기록들을 모아 편찬한 것이다. 수성·금성·화성·목성·토성이 한 곳에 모이는 오성결집(五星結集) 기록은 중국 삼황오제의 전욱 고양씨(顓頊 高陽氏, BC 2513 - BC 2436)에서 확인할 수 있다.
갑인년 (BC 2467)
해의 이름이 갑인일 때, 갑자월 초하루 아침인 동짓날 한밤중에 해와 달 및 오성이 자방에 합하였다.
“한국아마추어학회에서 오성결집현상을 30개 이상 발견했다고 합니다. 4500년 전의 천문기록을 제가 맞춰보는 거에요. 천문소프트웨어를 돌리려니 제 손이 벌벌 떨렸습니다.”
▲ 제148회 국민강좌가 열리는 가운데 박석재 한국천문연구원 연구위원이 강연하고 있다(사진=윤한주 기자)
BC 2467년보다 3년 전인 BC 2470년 9월 새벽 ‘오성취각(五星聚角)’이 있었다. 오성이 28수 각(角) 별자리 주위에 모여서 취각이라고 한 것. 오천년 전의 기록에서 3년의 오차는 큰 의미가 없다.
그렇다면 오성취각의 발견은 어떠한 의미가 있는가? 박 위원은 삼황오제의 시대가 전설이 아니었다고 강조했다. 천문기록을 통해 관측하는 천문대가 있었고 이를 통치하는 국가가 있다고 추정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는 비슷한 시기 배달국의 역사 또한 허구가 아니라는 점으로 연결된다.
박 위원은 중국에서 발견한 동이족 유적을 사진으로 보여줬다. 요하문명의 우하량 유적의 적석총, 상투를 튼 고대인의 무덤, 곰토템 여신상 등이다. 특히 옥으로 상투를 틀었다는 점에서 동이족이 분명하다고 했다. 이는 배달국으로 추정할 수 있는 자료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문헌은 있는가? 현재는 <환단고기>가 유일하다. 1911년 독립운동가 계연수가 <삼성기>, <단군세기>, <북부여기>, <태백일사>를 모은 책이다. 일부 학자들의 위서론에 대해서도 박 위원은 “환단고기도 가필이 있습니다. 그런데 가필이 없는 역사가 어디 있습니까?”라고 되물었다.
“위화도회군 이후 조선왕조는 명을 큰집으로 모셨습니다. 그러니 작은집에서 제사(천제)를 지낼 수가 없었죠. 대륙을 통치한 단군의 역사서도 수거했습니다.”
세조실록에 기록된 안함로와 원동중의 삼성기(三聖記)가 대표적이다. 이는 <환단고기>에 담긴 책명과 같다. 이는 조선왕조의 수거령에 불구하고 단군사서가 후대로 전승됐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단군세기> 오성취루 현상은 1993년 박창범 교수와 라대일 박사의 〈단군조선시대 천문현상기록의 과학적 검증> 논문으로 밝혀졌다.
박 위원은 오성취루 현상보다 앞선 오성취각의 발견으로 배달국이 우리나라 최초의 국가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5가지로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첫 번째는 개천이다. 단군왕검이 아사달에 조선을 세운 것이 아니라 BC 3,897년 거발환 환웅이 태백산 신시에 풍백, 우사, 운사와 함께 배달국을 세운 것이 개천이라고 했다. 이어 삼국유사에 나오는 환인은 환국의 장자국을 상징한다. 환국에 대해서는 이마니시 류가 삼국유사에서 환국을 환인으로 변조한 사례를 들었다. 환국은 존재했다는 것을 반증한다.
또 조선 이전부터 구전된 민족의 경전인 천부경은 시작도 끝도 없는 우주론이라며 현대의 CC (Continuous Creation) 우주론, 정상우주론 (定常宇宙論)과 같은 개념과 비슷하다고 했다. 2002년 한일월드컵 붉은악마를 상징하는 치우천황은 배달국 14대 자오지 환웅이고 태호복희는 배달국 5대 태우의 환웅의 막내아들이다.
박 위원은 직접 작사한 개천가라는 노래를 들려주면서 “대한민국은 개천사상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라고 말했다. 윤한주 기자』
(출처; 브레인미디어,
〈“홍산문화는 배달국 문화이자, 한국 선도문화”〉
정경희 교수
2016년 11월 14일 브레인미디어
『한국 상고사 부정하는 동북공정 논리의 오류와 위험성 지적
지난 12일 부산 해운대구 문화복합센터에서 ‘제9회 한국선도의 역사와 문화 학술대회’가 열렸다.
이날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 정경희 교수는 ‘중국의 동북공정과 동아시아의 마고문화’를 주제로 발표했다. 정경희 교수는 동북공정의 핵심논리가 지닌 오류와 위험성을 지적했다.
정 교수는 “동북공정 논리에 따르면 한국은 은나라의 해외속지(점령지)인 기자조선으로 출발하여, 위만조선, 한사군을 거쳐 오늘날에 이르렀으며, 한국에는 고유문화가 없고 중국 은나라 예제문화를 전달받아 발전했다는 것이다. 단군조선의 역사를 비롯한 한국 상고사를 부정하는 논리를 내포하고 있다.”고 했다.
동북공정은 중국이 자국 내 소수민족의 이탈을 방지하고자 만든 정치적 목적의 통일적 다민족국가론을 바탕으로 한다. 중국이 그동안 자국문화에서 배제했던 동북 요서에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선진 상고문화인 홍산문화가 발굴되자, 이를 통해 자국을 세계 최고의 상고문화를 가진 문화대국으로 역사관을 재정립하는 국책사업으로 진행했다. 중국은 2015년 동북공정을 마무리하였으며, 2016년부터 전 세계를 대상으로 수많은 연구논문을 쏟아내며 선전공정에 들어갔다.
정경희 교수는 이에 대응하여 홍산문화가 배달국문화이며, 한국의 선도문화임을 입증하여 중국 동북공정의 오류를 바로 잡아가는 논리를 제시했다. 홍산문화 여신묘에서 발굴된 반가부좌 선도수행 형태의 7개의 여신상과 한국 선도사서 <부도지>에 나타난 마고 7여신(마고, 궁희, 소희, 4천녀)의 연계성을 밝혔다. 또한 홍산문화의 각종 유물에서 한민족의 기철학적 세계관인 삼원오행론의 형태를 찾아냈다.
정 교수는 이어 선도 제천문화를 계승한 해운대 장산문화제와 해운대 ‘최치원 유적’에 나타난 선도문화를 조명했다. 정 교수는 최치원 선생이 활동하던 시대상황과 행적, 기록 등을 다양하게 조명하여 선도의 맥을 이은 선가仙家였음을 밝히고, 천부경과 연관된 기록들을 살폈다. 그리고 후대에 유학자로 채색되어 선도적 면모가 숨겨진 정황을 설명했다.
정 교수는 "한 예로 경남 하동 운암영당의 최치원 진영(1793)을 X-레이로 촬영한 결과 최치원 선생 좌우에 쌓인 책들은 본래 동자들이 서 있었다. 유교가 강성하던 시기에는 도교적 또는 선가적 면모를 유학자로 채색한 것이다. 그러다 유교세력이 쇠약해진 1925년 <단전요의>, 1927년 <고운선생문집> 등에는 한국 선도의 최고 경전인 '천부경'과 연계할 기록들이 나타난다."고 했다.
정 교수는 “한류 원조로 최치원을 부각한 것은 2015년 중국 시진핑 주석의 제안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중국은 최치원 선생을 도당유학생으로서 당나라에서 도교와 유학을 배운 중국문화 전파자로 알리고 있다. 그러나 최치원 선생은 우리 고유 선도인 풍류를 중심기반으로 유‧불‧도를 수용한 세계주의자라는 것을 우리가 먼저 알아야 한다.”며 “단지 동상, 기념관만 세우면 중국의 논리를 그대로 수용하게 된다. 시민 스스로 지역 문화유산에 대해 적극적으로 정체성을 알릴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끝으로 정 교수는 “선도문화는 동북공정을 대응할 논리이기도 하지만, 생명을 중시하고 모두가 하나라는 조화와 홍익철학으로 세계평화를 이끌 지구인정신의 뿌리”라고 했다. 강나리 기자 』
(출처; http://www.brainmedia.co.kr/brainWorldMedia/ContentView.aspx?contIdx=18841)
(출처; https://blog.naver.com/greatcorea10/220060911441)
〈만주 요하문명이 고조선 문명인 까닭<1>홍산문화 유물에 보이는 인장의 기원과 고조선문화〉
박선희 상명대 교수
2012년 10월 3일 브레이크뉴스 기사
『이 글은 홍산문화유적에서 출토된 옥으로 만든 도장이 중국학자들의 견해처럼 ‘중화민족제일인“이 아니라 고조선문화와 관련이 있음을 밝히는 것이 목적이다. 이 옥도장이 환웅의 신시문화 유산임을 다음의 내용들을 통해 명확히 밝히게 될 것이다. 글 차례는 1장. 홍산문화의 성격과 옥인장 출현 2장. 홍산문화 출토 옥인장의 주체 검토 3장. 홍산문화가 지속된 고조선문화(1절. 옥으로 만든 복식유물과 고조선 2절. 채색기법의 성격과 고조선문화 3절. 석경의 기원과 고조선문화) 4장. 옥인장은 환웅의 ‘신시’문화 유산으로 한다.
최근 중국에서는 홍산문화를 포함한 만주의 고대문화를 총칭하여 하나의 강 이름으로 포괄하여 ‘요하문명’이라 부르며 이를 중국의 황제문화로 포함시키려 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요하문명’이라는 용어를 그대로 사용한다면 중국학계의 단순한 설명을 용납하고 동북공정을 따르는 것이나 다름없게 된다. 우리는 이 문화를 반드시‘고조선문명’이라 불러야 할 것이다. 이 글에서는 옥도장의 주체해명을 통해 그 까닭을 밝히게 될 것이다. 홍산 옥인장의 주체가 ‘중화민족제일인’이 아니라 환웅천왕 ‘신시’문화의 상징물로 올바르게 제자리를 찾아가게 되길 기대한다. <필자 주>
1장. 홍산문화의 성격과 옥인장 출현
홍산문화에 속하는 내몽고 나만기유적에서 두 개의 옥인장이 출토되었다. 중국학자들은 이 옥인장에 모두 구멍이 뚫려있어 끈을 사용했던 것으로 보고 양식에 따라 동물형 옥인장(그림 1)과 쌍두조형 옥인장(그림 2)으로 분류하였다. 이 옥인장에 끈을 꿰어 의복에 차고 다녔을 것으로 보고 있다. 또한 옥인장이 홍산문화의 특징인 옥으로 만든 용과 새 등의 유물들과 함께 출토되어 만들어진 시기를 홍산문화시기(서기전 4500〜서기전 3000)로 추정하며 ‘(中華民族第一印)’이라 명명했다.
그러나 필자가 연구한 바로는 홍산문화유적에서 패대에 사용되었을 다양한 복식품들이 출토되었는데 중국이나 북방지역의 것과 달리 고조선문화의 특징적 요소들을 나타내고 있어 중국학자들이 옥인장을 ‘중화민족제일인’으로 분류하는 것에 동의하기 어렵다. 따라서 이 연구는 홍산문화의 다양한 유물성격을 근거로 옥인장의 주체를 올바르게 해명하는 목적을 가진다.
홍산문화는 내몽고 동남부와 요령성의 서부 적봉, 조양, 능원, 건평 등을 중심으로 하며, 하북성 북부, 노합하상류, 대릉하 상류와 중류로 유적지가 넓게 분포되어있는데 고조선 질그릇의 특징인 새김무늬 질그릇들이 출토되는 것이 공통점이다. 홍산문화는 주로 복식품으로 사용되었을 옥기뿐만이 아니라 적석총, 제단, 성곽과 취락유적들이 함께 두드러진 문화이다. 그리고 이곳에서 사용되었을 악기와 도구 등의 유물에서 보여 지는 문화적인 의미와 상징적 가치 역시 뛰어나다. 특히 홍산문화 후기(서기전 3500〜서기전 3000년)의 우하량유적은 제단과 여신묘, 적석총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규모의 유적으로 상당히 수준 높은 사회발전의 단계를 이루고 있다.
▲ 옥인장의 인면 ©브레이크뉴스
홍산문화에서 보여 지는 이러한 문화현상들은 중국문화와 확연히 구별되고, 고조선문화와 이후의 여러 나라 시대 문화 특징에 지속적인 발달 양상을 보여준다. 따라서 홍산문화에서 출토된 옥인장을 ‘중화민족제일인’으로 해석하는 중국학자들의 견해는 중화주의에 따른 헛된 집착일 뿐이다.
중국학자들은 어떠한 유물을 분석할 때, 대상유물과 동반유물의 기원과 양식 및 문화적 상징성 등에 관한 변천사적인 연구가 선행되고 그 토대 위에서 새로운 유물에 대한 합리적인 해석이 내려져야하는 마땅한 수순을 생략하는 경우가 많다. 또한 중국학자들은 아주 단순히 오늘날 만주가 그들의 영토이기 때문에 그곳에 대한 고대의 연고권을 주장하는 의도적인 경향이 많다. 홍산 옥인장에 대한 해석도 마찬가지이다. 옥인장이 출토된 나만기유적은 홍산문화에 속한다. 일반적으로 신석기시대에서 청동기시대로 가는 과정에서 보이는 여러 가지 사회변화의 요소로 고고학자료에 나타나는 돌무지무덤, 성터의 출현, 옥기의 사용 등을 든다. 신석기시대에서 동석병용시대 속하는 홍산문화(서기전 4,500년〜서기전 3,000년)는 이러한 요소들을 골고루 갖추고 있는데 옥인장을 비롯하여 복식유물로 보이는 곡옥을 비롯한 다양한 양식의 옥기가 많은 량 출토되었다. 중국학자와 일본학자들은 중국이 동아시아에서 곡옥을 가장 이른 시기에 사용했던 것으로 보고 있지만, 옥기의 사용은 중국보다 한반도와 만주지역이 훨씬 이르며 곡옥의 사용도 마찬가지이다.
내몽고자치구 동부의 규모가 크고 오래된 신석기 집단 거주지인 흥륭와유적(서기전 6,200년∼서기전 5,200년)에서는 동아시아 최초의 옥귀걸이(그림 3)와 함께 옥도끼 등 지금까지 약 100여점의 옥기가 출토되었다. 중국의 옥전문가들은 흥륭와유적에서 출토된 옥귀걸이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라고 밝혔다. 이들 옥기의 재료는 분석결과 요령성 수암현에서 생산되는 옥으로 밝혀졌다. 흥륭와유적에서는 옥기와 함께 동북 지역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만들어진 새김무늬 질그릇이 출토되었다.
▲ 흥륭와유적출토 옥 귀걸이 ©브레이크뉴스
한반도에서는 흉륭와유적과 거의 같은 시기에 속하거나 보다 이른 시기일 것으로 추정되는 강원도 고성군 문암리 선사유적에서 수암옥으로 만든 것과 같은 모양의 옥귀걸이가(그림 4) 출토되었다. 또한 전남 여수시 남면 안도리 패총유적(서기전 4,000∼서기전 3,000년경)에서도 문암리와 거의 같은 유형의 귀걸이가 발굴되었다. 이후 한반도지역의 여러 유적에서는 옥기가 계속 출토되어지는데 매우 정교하고 다양한 발달 양상을 보여준다.
흥륭와문화는 이후 요하지역의 주요 신석기문화인 부하문화(서기전 5,200년∼서기전 5,000년)로 이어지고 대체로 같은 분포지역에 있는 조보구문화(서기전 5,000년∼서기전 4,400년)와 병존하면서 발전해 나아가 동석병용시대인 홍산문화로 이어진다. 흥륭와문화는 홍산문화와 서로 계승관계에 있어 우리 민족의 선사시대를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문화라고 하겠다.
두 문화는 분포지역이 거의 같고 계승관계를 나타내는 유물은 옥기뿐만 아니라 질그릇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만주의 흥륭와유적을 비롯하여 한반도에서 옥기가 출토된 문암리 등의 여러 유적에서는 한민족 특징의 새김무늬 질그릇이 함께 출토되어져 신석기시대 초기부터 한반도와 만주지역이 같은 문화권이었음을 밝혀준다. 아울러 한반도와 만주지역은 수공업 생산기술의 교류와 상품 교역이 활발했음도 알 수 있다. 나만기유적에서 출토된 옥인장은 이러한 교역에서 필요한 정치적 구조물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인장의 출현은 사회발전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게 마련이다. 농업과 함께 정착생활을 하게 되면서 집단취락지가 형성된다. 집단취락지의 형성은 정치적 지도자를 출현시키며 통치체계를 갖추게 된다. 아울러 그와 관련된 구조물과 상징물들이 마련된다. 그 예로 신석기후기에 속하는 우하량유적에서 보이는 돌무지무덤과 규모가 큰 건축물 및 정교한 옥기의 생산은 많은 인력이 동원되어야 하는 일이다. 우하량유적은 여러 부족이 연맹을 이루어 정치적 지도자가 출현했던 상황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사회적 신분과 빈부의 차이가 발생하고 전문 수공업자가 출현했으며 전쟁의 발생과 함께 종교의 권위자가 존재하였을 것이다. 이 지역에서 다량의 방직도구와 재봉도구가 출토되어지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 라고 생각된다. 앞에서 신석기시대에서 청동기시대로 가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주요한 사회변화의 요소로 돌무지무덤, 성터의 출현, 옥기 사용 등을 들었으나, 복식자료로부터 본다면 방직도구와 재봉도구의 급격한 증가도 중요한 요소가 될 것이다.
옥인장이 출토된 나만기의 유적들에서도 흙으로 만들어진 성벽이 발견되었다. 성벽 안에서는 많은 량의 채색 질그릇을 비롯한 다양한 양식의 질그릇과 옥기, 뼈와 뿔 및 돌로 만든 생산도구와 방직도구, 재봉도구 등이 출토되었다. 성곽유적은 정치적 지도자가 무리를 통치하며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는 공동체의 자취를 보여주는 정치적 구조물이다. 이들은 공동체에서 생산한 옥기를 비롯한 수공업품과 농업품 등으로 큰 규모의 교역을 진행하였을 것이고 이 과정에서 인장이 쓰여졌을 가능성을 생각하게 한다. 인장은 정치지도자가 직권을 행사하는 상징물이며 공구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특히 나만기의 여러 유적들에서는 한민족 문화의 특징인 새김무늬와 기하학문양의 질그릇이 출토되었다.
따라서 이 글은 고고학의 발굴보고서 등을 중심으로 이웃나라와의 비교를 통해 홍산문화로부터 비롯된 우리 옥기문화를 실증적으로 해석하고자 한다. 이를 토대로 홍산문화에서 출토된 옥인장의 주체가 고조선 이전 환웅의 ‘신시’문화였음을 밝히게 될 것이다. 아울러 홍산 옥문화를 고스란히 이어받은 고조선 문화가 이후 삼국시대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보여주는 지속성의 실체와 정체도 함께 해석하고자 한다. 박선희. 상명대 교수』
(출처;http://www.breaknews.com/sub_read.html?uid=231631§ion=sc5)
〈만주 요하문명이 고조선 문명인 까닭<2>머리스타일과 옥 절풍의 고유성〉
2012년 11월 13일 브레이크뉴스
『첫 번째로 옥으로 만든 복식유물 가운데 속발(束髮)과 관련이 있을 옥 절풍의 고유양식이 고조선 문화와 여러나라시대를 거쳐 삼국시대로 까지 지속되었음을 분석해 보기로 한다. 홍산문화유적의 우하량 1호 적석총 M4와 M15유적에서 옥고가 한 개씩 출토되었다. 발굴자들은 옥고의 출토위치가 두개골 아래 혹은 정수리 아래쪽 일 것이라고 밝히며 머리를 틀어 묶고 이를 덮어씌우는 것으로 쓰였을 것으로 추정했다. 옥고는 속이 비스듬히 드러나 보이는 원통형으로 윗부분이 아래 부분보다 약간 넓으며, 아래 부분의 양쪽에는 각기 1개의 작은 둥근 구멍이 있어 머리꽂이를 꽂는 것이 가능하다. 발굴자들은 머리를 정수리에서 묶고 옥고가 이를 덮었을 것인데 무게로 인해 미끄러지므로 머리꽂이로 고정시켰을 것이라 설명했다. 또한 이 옥장식이 머리 장식품일 뿐만 아니라 신분을 나타내는 상징물의 구실도 했을 것으로 보았다.
▲ 가면 ©브레이크뉴스
실제로 홍산문화에서 출토된 조개껍질로 만든 인형의 머리양식은 틀어 올려 진 상투머리양식이고 맨상투 위에 옥고와 유사한 것을 덮어씌워 매무새를 갖춘 두발 모양이다. 이러한 머리양식은 같은 시대 북방지역 석인상들이 긴 머리를 틀어 올리지 않고 그대로 늘어뜨린 것과 구별된다.
신석기시대 한반도와 만주의 유적들에서는 머리를 틀어 올리면서 꽂았을 머리꽂이가 골고루 출토되어진다. 신석기시대의 머리꽂이는 주로 새의 뼈와 뿔 등 가벼운 재료로 만들었고, 옥이나 돌, 토기조각으로도 만들었다. 머리꽂이는 주로 문양이 없이 밋밋한 것이 대부분인데, 간혹 장식적 효과를 나타내기 위해 점 또는 선을 누르거나 그어서 문양을 새긴 것들이 있다. 이러한 문양은 신석기시대 한반도와 만주지역에서 출토된 질그릇이나 가락바퀴 등에 보이는 문양과 같은 양식으로 이후 고조선으로 지속된다.
틀어 올린 머리양식은 옥인장이 출토된 나만기유적과 가깝게 위치한 적봉시 오한기 흥륭구 홍산문화유적에서 출토된 조소품인 남신상에서도 보인다. 발굴자들은 이 인물상이 서기전 3,300년 무렵에 속하다고 했다.
▲ 남인상 ©브레이크뉴스
남신상의 틀어 올린 머리양식은 매우 특징적인데, 머리 뒤에서 땋아 세 번 돌리면서 정수리로 올려서 끝자락을 이마 바로 위 머리까지 내려 장식으로 마무리하였다. 당시 옥문화가 발달하고 머리 장식이 출토되었던 예로 보아 땋은 머리자락을 마무리한 장식은 옥장식일 가능성이 크다. 이로보아 당시 틀어 올린 머리양식이 정형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당시에 이러한 머리를 덮어씌웠을 옥고가 출현한 것으로 보아 머리를 틀어 올려 위의 인물상처럼 끝부분을 옥장식으로 마무리하거나, 또는 옥고를 씌우는 머리양식이 유행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머리양식은 한민족의 고유한 습속으로 중국에서 보이지 않는다. 한민족의 고유한 습속은 남신상의 다리를 접고 앉아있는 자세에서도 찾아진다.
이러한 사실로 부터 고조선 이전시기 한반도와 만주에서 거주하던 사람들이 머리꽂이를 사용해 일정한 머리양식을 갖추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머리꽂이는 틀어 올리는 머리양식 때문이기도 하지만 틀어 올린 머리를 덮는 고조선과 고구려에서 널리 사용된 변이나 절풍과 같은 모자를 고정시키는 역할을 했을 것이다.
홍산문화기에 속하는 우하량유적에서는 작은 크기의 절풍 모양 옥 장식품이 출토되었다. 이 옥 장식품이 절풍을 조각한 것이라면, 절풍은 고조선보다 앞선 시기부터 사용되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홍산문화에서 출토된 옥고는 고조선시대에 널리 사용되던 절풍의 초기형태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들은 고조선시대의 틀어 올린 머리와 관모양식이 신석기시대부터 형성되어진 것임을 알게 한다.
실제로 ?후한서(後漢書)?와 ?삼국지(三國志)? 및 ?진서(晋書)? 등에는 고대 한민족이 머리를 틀어 올렸음을 설명하고 있다. 이 기록들은 고조선이 붕괴된 후의 한(韓)에 관한 것이지만, 이러한 머리양식은 고조선으로부터 계승되어졌을 것이다.
고조선시대에는 머리꽂이를 금속으로 만들기도 하는데, 춘추후기에 속하는 요령성 금서 사과둔유적에서는 금으로 만든 18쎈티미터 길이의 머리꽂이가 출토되기도 했다. 이처럼 서열이 높은 금속인 금으로 머리꽂이를 만들어 사용했던 것은 당시 틀어 올린 머리양식이 복식양식에서 큰 의미를 가졌다고 생각된다. 같은 춘추시대에 속하는 고조선의 유적인 오한기 초보산 제사유적에서 출토된 남자상은 머리를 정수리 위에 틀어 올리고 그 위에 절풍과 같은 상투만을 덮는 모자를 쓴 모양이다.
중국의 선사시대 유적에서는 머리꽂이가 출토되지만 한반도와 만주지역에서 처럼 모든 유적에서 골고루 출토되지 않는다. 중국에서 머리꽂이는 주로 황하중류 유역에서 출토되어진다. 하북성 자산유적에서 뼈로 만든 머리꽂이가 출토되었고, 서안 반파유적에서 돌과 뼈등으로 만든 머리꽂이가 많이 출토되었다. 이 같이 황하중류유역에서 주로 머리꽂이가 출토되어지는 것은 그 지역의 머리양식으로부터 설명되어질 수 있을 것이다. 좋은 예로 감숙성 태안대지만에서 출토된 신석기시대 채색질그릇에 보이는 머리양식은 이마를 덮은 단발머리이다. 감숙성 임조에서 출토된 채색질그릇에 보이는 머리모양은 정수리에서부터 S자모양으로 땋아 내려뜨린 모양이다. 청해성 대통현 상손가색에서 출토된 채색질그릇에 보이는 그림의 사람들은 모두 짧은 묶은 머리를 하였다. 이처럼 이마를 덮은 단발머리와 땋은 머리모양은 머리꽂이를 사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후 황하중류유역에 위치했던 상왕조의 유적인 안양 은허 5호무덤에서는 묘주인 부호의 옥으로 만든 머리꽂이 20여개와 뼈로 만든 머리꽂이 490여개가 출토되어 머리양식이 무척 호화로웠을 것으로 생각된다. 고고학의 출토자료로 보면, 상왕조시대의 남자들은 머리를 정수리에서 짧게 땋아 내려뜨리거나 머리 전체를 말아 올렸는데, 그 실제모습이 부호묘에서 출토된 옥과 돌로 만든 사람 조소품에서 보인다. 돌로 만든 사람의 머리양식은 모자 안으로 머리를 말아 올려야 하므로 머리꽂이를 여러 개 사용해야 했을 것이다.
이러한 머리꽂이의 사용방식은 한민족의 머리양식처럼 상투를 찌는 데 사용하는 것이 아니고 부분적으로 틀어 올리는 머리양식이다. 이러한 사실들은 한반도와 만주 대부분의 선사유적에서 머리꽂이가 출토되는 것과 달리 중국의 선사시대유적에서는 주로 황하중류유역을 중심으로 머리꽂이가 출토되어지는 요인이 될 것이다.
고조선시대 한반도와 만주지역에서 변이나 절풍과 같이 상투머리만을 덮는 폭이 좁고 높이가 있는 모자를 썼던 것은 홍산문화시대로부터 형성되어져 널리 정형화된 머리양식이다. 고조선 붕괴 이후 여러나라시대와 삼국시대로 오면서 부여와 고구려, 신라, 백제, 가야 등에서 상투머리에 변이나 절풍을 많이 썼음이 고분벽화에 보이는 관모와 출토되어진 유물들로부터 확인 된다. 실제로 부여사람들의 틀어 올린 머리양식에서 지속성을 보이는데, 길림시 모아산유적에서 출토된 청동으로 만든 사람에게서 나타난다. 이 같은 머리양식은 홍산문화에서 출토된 조개껍질로 만든 인형의 것과 유사하다.
같은 머리양식이 유금이나 청동으로 만들어진 부여와 고구려의 가면에서도 보인다. 길림시 동단산에서 출토된 유금으로 만들어진 입체감 있게 만들어진 가면은 머리 부분이 훼손되었는데, 발굴자들이 정수리부분을 그림에서와 같이 점선으로 나타낸 것으로 보면 상투머리 양식이다. 또한 고구려의 유금으로 만든 가면 역시 윗부분이 손상되었으나 정수리부분이 올라간 같은 양식이다.
신라초기 토우들의 머리모양도 모두 크고 작은 머리꽂이를 사용하여 틀어 올린 맨머리를 변이나 절풍으로 씌워 아름답게 꾸몄다. 경주 황남리에서 출토된 남자 토우들이 대부분 고깔 모습을 한 관을 쓰고 있어 고조선을 이어 변을 썼음을 알 수 있다. 백제에서도 변을 사용했음이 부여에서 출토된 토기편에 보이는 변의 모습에서 확인되는데 양쪽에서 纓을 내려 턱밑에서 묶었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의 경우도 백성들은 변을 많이 썼는데, 그 실제 모습이 집안에 위치한 우산 2110호 무덤에서 출토된 청동인형에서 보인다.
이상의 내용으로부터 고조선 이전시기 한반도와 만주에 거주하던 사람들은 머리꽂이를 사용해 틀어 올린 상투머리를 하였고, 홍산문화시기에는 상투위에 옥고 등을 씌워 우아한 머리양식을 갖추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고조선시기로 오면 일반적으로 옥고 대신 상투머리를 덮을 수 있도록 폭이 넓지 않고 높이가 있는 변이나 절풍과 같은 모자가 발달하게 되었다. 변이나 절풍은 주로 가죽과 자작나무껍질 또는 누에 천을 사용했으나, 이후 금과 은, 금동 등으로 만들어 신분을 상징하기도 했다.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썼던 관 전체를 금으로 만든 금관의 한부분인 금절풍이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이후 고구려의 영향을 받은 백제와 신라, 가야에서 만들어진 금관과 금동관 등도 모두 고조선시대부터 오랫동안 지속된 상투머리와 그 위에 썼던 절풍을 기본형으로 하고 있다. 우리나라 금관의 기본양식은 홍산문화로 부터 비롯된 고조선문화의 전통에서 그 실체와 정체성을 재인식할 수 있다. 박선희. 상명대 교수.』
(출처; http://www.breaknews.com/sub_read.html?uid=238192§ion=sc5)
〈만주 요하문명이 고조선문명인 까닭<3>옥단추와 달개장식의 다양성〉
2012년 11월 15일 브레이크뉴스
『홍산문화 후기의 우하량유적에서는 정교하게 만들어진 장식품으로 사용되었을 옥기가 다량 출토되었다. 출토된 옥기는 주로 달개장식으로 쓰였을 장식품과 치레거리들이 많다. 즉 비실용성 생산공구류와 인물, 동물, 식물, 곤충형상을 사실적으로 조각한 것 또는 추상적인 동물형상을 조각한 것, 신발의 모양을 나타낸 것 등으로 매우 다양한데, 대부분 구멍이 뚫려있어 의복에 달거나 걸어 장식했을 것이다. 신발모양의 장식품은 지금의 버선형태와 유사하다.
요령성 심양의 북쪽 지역에서 발견된 신석기시대유적인 신락문화유적(서기전 6,000년대 후기)에서도 새김무늬 질그릇과 함께 옥기가 출토되었는데, 발굴자들은 일부 장식물을 옥단추로 구분했다. 이처럼 홍산문화유적에서는 다량의 방직도구와 재봉도구, 옥으로 만든 복식 장식품이 출토되어지는 것으로 보아 전문 수공업자들의 역할이 컸을 것으로 추론된다. 이러한 경제력의 발전은 복식분야에서 장식단추와 달개장식의 양식을 보다 다양하게 정형화시켜 나갔을 것이다.
실제로 장식단추의 발전양상은 한반도와 만주지역의 신석기시대 이른 시기부터 보편적으로 나타나 직물생산이 발달하면서 다양한 장식기법의 복식문화를 이루어 나갔다. 이 같은 발전양상은 중국 황하유역의 신석기문화유적들에서 장식단추가 드물게 발견되는 것과 대조적이다.
한반도의 신석기시대 초기유적인 궁산유적(서기전 6,000년~서기전 5,000년)에서는 뼈구슬과 둥근모양의 토기단추가 출토되어 실제로 바늘과 실을 사용해 의복에 단추와 구슬을 달거나 꿰어 걸었던 사실을 확인시켜준다. 신석기중기의 후와유적(서기전 4,000년)에서는 둥근모양의 돌단추와 함께 방직도구와 재봉도구가 다량으로 출토되었다. 곽가촌유적(서기전 3,780∼서기전 3,530년)에서는 뼈북과 함께 둥근모양의 토기단추와 가락바퀴 등의 방직과 재봉에 사용된 도구들이 돌과 뼈로 만든 구슬들과 함께 출토되었다. 이후 신석기후기의 좌가산유적과 서포항유적 4기층(서기전 3,000년)에서는 곡옥과 뼈, 돌로 만든 나뭇잎모양의 달개장식과 조개껍질로 만든 구슬, 팔찌 등이 많이 출토되어 의복장식이 이전보다 화려하고 다양한 조형미를 추구해나간 모습이다.
신석기중기부터 장식구슬의 출토량이 증가한 것은 전문 기능인 수공업자의 출현과 함께 달개장식품의 생산 규모가 커졌음을 말해준다. 아울러 의복에 장식단추를 사용하고 구슬로 장식하거나 달개장식을 달아 복식에서 공간을 꾸몄던 조형적 전통기법이 정착되어갔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상황은 만주지역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만주지역에서는 서기전 4,000년경에 속하는 심양 신락유적의 하층유적에서 출토된 유물들이 특징적이다. 이 유적에서는 최근에 만든 것처럼 검은색 광택이 나는 흑옥으로 만든 장식품이 출토되었다. 발굴자들은 이 같은 흑옥 장식품이 중국의 신석기시대유적에서 아직까지 발견된 적이 없어 신락유적의 것이 가장 이르다고 분석하며 보기 드문 진귀품으로 평가했다.
요령성 매전지질감탐공사 과학기술소에서 감정한 내용에 의하면, 이 흑옥의 원료는 무순 매전 서부 본층의 것으로 밝혀졌다. 심양에서 무순까지는 약 100리의 거리인데 당시 교통수단으로 신락사람들이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 매정을 가져다 정교한 장식품을 만들었다고 하겠다. 신락유적에서 출토된 흑옥 장식품은 전체 유물의 10분의 1이나 차지한다. 발굴자들은 유물이 차지하는 큰 비중으로 부터 흑옥 장식품이 당시 사람들의 사회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했다.
홍산문화유적에서는 허리띠를 장식했을 네모난 크고 작은 옥장식들이 출토되었다. 발굴자들은 가죽허리띠에 달아 옥대를 만들었을 것으로 분석했다. 그리고 이 옥대가 중국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했다. 그러나 이러한 양식의 허리띠는 중국보다 앞서 고조선과 부여, 고구려 등의 초기유적에서 보여 지며 삼국으로 이어진다.
이와 같이 만주의 신석기시대 여러 지역에서는 지역마다 특색을 달리하는 재료를 융통성 있게 사용해 단추와 달개장식 및 장신구를 만들어 의복위에 자유로운 조합의지와 다양성을 추구한 장식기법을 발전시켜 나갔다고 하겠다.
이처럼 신석기초기부터 시작된 장식단추와 달개장식의 복식기법은 홍산문화에서 옥을 재료로 독창적이고 입체적인 양식들을 표현하면서 크게 발전한다. 한반도와 만주지역에서 의복에 장식하던 토기단추와 돌단추, 뼈와 뿔, 조개껍질로 만든 구슬, 옥장식 등은 홍산문화를 지나 고조선시대로 오면 옥과 청동, 철을 재료로 한 것들로 적극 대체되어 보다 화려해졌다. 옥은 다양한 장신구의 재료가 되었고, 청동과 철은 둥근 모양과 나뭇잎모양의 장식단추로 만들어져 의복위에 달아 여밈새를 처리하거나 달개장식으로 사용되어 다시 고조선문화로 이어져 한층 화려하고 현대적인 조형미의 지속성을 보인다.
고조선시대에 오면 직물의 발달과 함께 장식양식이 보다 화려해져, 뼈나 뿔, 조개껍질 등으로 만들어진 것보다 옥과 청동, 철을 재료로 하여 만들어진 것들이 적극적으로 사용되었다. 뼈와 뿔, 조개껍질, 옥은 다양한 장신구의 재료가 되었고, 청동과 철은 주로 둥근 모양과 나뭇잎모양의 장식단추로 만들어져 의복 위에 달아매어 화려하게 장식했다. 또한 다양한 종류의 직물 발달은 의복에 다는 장식단추와 장식품의 사용도 직물의 성격과 아울리게 변화시키는 구실을 하였다. 자연히 종래의 장식단추에 새로운 장식기법이 더해져 대담하고 역동적인 양식으로 발전하였다.
청동기시대에는 직물생산량이 크게 늘어나고 옷 만드는 일이 많아지면서 장식단추의 사용량도 크게 늘어난다. 고조선유적에서 출토되는 청동장식단추는 그 양식이 주로 원형과 나뭇잎모양으로 나타난다.
▲청동장식단추 ©브레이크뉴스
그 형태는 윗면이 도드라진 원형인 것과 편편한 원형으로 꼭지가 달린 것, 도드라진 원형으로 단추구멍이 있는 것, 가운데 구멍이 있는 구슬모양의 것, 단추 구멍 2개가 나란히 있는 것, 정사각형 가운데 원형의 구멍이 있고 4변 주위에 문양이 있으며 뒷면에 단추꼭지가 있는 것, 원형으로 둘레에 작은 구멍이 있고 뒷면에 단추꼭지가 있는 것, 반원형 등으로 매우 다양하다. 또한 청동장식단추는 표면에 문양을 나타내는 경우와 문양이 없는 소면 상태의 두 종류로 크게 구분된다. 표현된 문양은 대부분 신석기시대의 문양양식을 그대로 계승하여 새김무늬질그릇이나 가락바퀴 등에 보이는 양식과 같다.
고조선 사람들은 장식단추를 의복뿐만 아니라 모자나 신발 또는 활집 등 복식의 여러 부분에 자유롭게 사용했다. 한민족의 여러나라에서는 모자에 새깃을 꽂는 것 이외에 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등에서 금과 은, 옥 등으로 모자를 장식했다. 이러한 고급 장식재료는 중국이나 북방지역에서 볼 수 없는 것으로서 고조선의 전통을 계승한 화려하고 높은 수준의 관모 양식을 이루게 만들었다.
고조선에서는 청동장식단추를 일반 복식에서 뿐만 아니라 특수복식인 갑옷과 영성필사영자유적출토 고조선 청동투구 청동투구에도 사용했다. 고조선에서는 일반인들이 평상복에서 청동으로 화려한 장식을 했기 때문에 청동장식단추가 자연스럽게 갑옷에 응용되었을 것이다. 또한 청동을 사용하면서부터 종래의 돌이나 뼈 등으로 만들던 공구나 무기를 청동으로 만들어나갔기 때문에 가죽이나 뼈로 만들던 갑옷재료도 청동으로 대체되었을 것이다.
고조선사람들이 의복에 장식했던 장식단추의 양식은 고조선이 붕괴된 이후 여러나라시대로 이어져 나라마다 조금씩 특색을 달리하여 발전해 나간다. 예에서 일반적으로 남자들이 입는 곡령에 약 5센티미터 이상 되는 은화를 꿰매어 장식했다. 부여사람들은 금과 은으로 화려하게 장식한 모자를 썼다.
▲ 백제사신의 옷 ©브레이크뉴스
고구려 사람들도 청동장식단추로 화려하게 장식했다. 마한 사람들은 북방지역에서 청동장식단추를 많이 사용한 것과 달리 의복에 주로 구슬을 장식했다. 이러한 내용들은 일반인의 의복에서도 화려한 장식이 가능했던 한민족 복식의 특징으로 중국이나 북방지역과의 차이점이다. 고구려 사람들은 금(錦)으로 만든 옷을 입고 금과 은으로 장식 했다. 고구려는 고조선을 계승했으므로 이러한 고구려의 풍속도 예와 마찬가지로 고조선의 것을 이었을 것인데 그 실제 모습이 안악3호 고분벽화와 왕회도, 마조총 수렵도 등에서 확인된다.
고구려에서는 의복뿐만 아니라 금관과 관장식에 일정하게 장식단추모양의 원형과 나뭇잎모양의 장식을 달았다. 원형과 나뭇잎모양의 장식단추를 달아 만든 보다 발달 된 고구려 관식과 장식품이 서기 3세기∼서기 4세기에 걸쳐 고구려 영역의 여러 지역에서 출토되었다. 대표적인 유적은 원태자 무덤과 북표현 방신촌 진무 덤, 조양현 왕자분산무덤이다. 신라와 백제, 가야의 금동관과 금관 등에서 보이는 관식과 절풍, 원형과 나뭇잎모양의 장식 등은 고조선을 계승한 고구려의 금관양식의 영향이었다. 이 같은 고구려의 금관식은 신라와 백제, 가야뿐만 아니라 주변민족들에게도 영향을 크게 주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요녕성 북표현 서관영자에 위치한 북연 풍소불무덤에서 출토된 금관식과 내몽고자치구 달무기에서 출토된 금관식이다.
이처럼 장식단추의 양식은 홍산문화로부터 시작되어 고조선 이전시기부터 복식에 장식물로서 다양하게 사용되어져 고조선 붕괴 이후 여러나라로 이어지고 다시 삼국시대로 이어져 한민족의 중요한 장식양식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따라서 고대 한민족 복식에 보이는 장식단추에 대한 비교 분석과 통시적 전승을 검토한 결과, 한민족 복식의 원형을 중국이나 북방 호복계통으로부터 오거나 영향을 받았다는 종래의 견해를 수정할 수 있게 하는 근거를 마련하게 되었다. 특히 원형과 나뭇잎모 양의 장식단추는 생명력 있는 조형의지와 역동적이며 생동하는 한민족의 정서를 줄곧 표현해 온 고유한 문화 인소로서 그 정체성이 올바르게 자리매김 되어야 할 것이다.아울러 홍산문화를 고스란히 이어받은 고조선복식문화가 이후 삼국시대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보여주는 지속성의 실체와 정체로 부터도 우리는 홍산문화를 반드시 고조선문명이라 불러야 할 것이다. 박선희. 상명대 교수.』
(출처;http://www.breaknews.com/sub_read.html?uid=238564§ion=sc5)
〈만주 요하문명이 고조선문명인 까닭<4>홍산문화 채색기법의 성격과 발달〉
2012년 11월 15일 브레이크뉴스
『한반도와 만주지역에서는 장식기법 뿐만 아니라 염색기법에서도 과학적인 수준을 이루었다.
신석기시대부터 풀, 꽃, 흙, 열매, 뿌리, 곤충, 돌 등의 자연의 재료로부터 염료를 채취하여 질그릇에 채색을 하거나 벽화를 그리고 의복에 물감을 들이는 등 채색과 염색을 생활화하였다. 그 실제 예들이 암화와 벽화, 채회도, 채도, 칠기 등에서 보인다.
신석기시대 다양한 색상의 염료를 사용하기 시작했던 사실은 적봉시 오한기에 위치한 조보구유적(서기전 5000년〜서기전 4400년)에서 출토된 그림이 그려진 채색질그릇에서 처음 보인다.
황하유역의 앙소문화(서기전 4512〜서기전 2460년)에서 보이는 채색질그릇보다 이른 시기이다.
요령성 심양 부근의 신락유적(서기전 5000년경)에서는 채색질그릇과 함께 붉은색과 검은색 염료가 출토되었다. 붉은색 철광석과 석묵을 사용한 흔적이 있고, 연마기가 출토되어, 당시 사람들이 연마기를 사용해 염색재료를 만들었음을 알게 한다.
흑룡강성 목단강 해림현에 있는 자하향암화에는 적색과 자색의 광물성 안료가 사용된 것으로 밝혀졌다.
▲조보구유적출토채색질그릇 ©브레이크뉴스
홍산문화의 우하량유적(서기전 3500년경) 여신묘 벽화에는 붉은색과 황백색이 채색된 화려한 기하학문양이 보인다. 벽면에는 적색과 홍색사이에 황백색을 교차하여 삼각문양으로 채색한 기하문양을 표현했고, 소하연문화에서는 흰옷위에 흑색과 홍색 등을 사용했다. 이 두 내용은 서로 다른 것을 그렸지만 소하연 채도의 부호문양과 여러 종류의 색채가 함께 장식된 특징으로 본다면 연원이 같은 공통의 요소를 가진다. 여신묘 벽면에 보이는 적홍색 기하문양과 소하연문화의 뢰문 또는 기회자형으로 불리우는 문양과 유사하다.
소조달맹의 석붕산유적에서 출토되는 질그릇에서도 같은 문양이 나타난다. 이 문양은 질그 릇에 연결되어 문양을 이루기도 하지만, 다른 부호와 함께 연속하거나 단독으로 그려져 원시글자 혹은 도화자로 인식되며 ‘뢰’ 혹은 ‘신’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주로 홍산문화의 제사유적들에서 이 부호가 나타나고 있어 제사와 관련된 의미를 내포했을 가능성을 생각하게 한다.
홍산문화 유적에서는 신석기시대 유적들에서 나타나는 피리와 같은 관악기 등 어떠한 악기도 발견되지 않았다. 그런데 홍산문화의 객좌 동산취유적과 우하량유적, 릉원 삼관전자유적, 부신 호두구유적에서는 모두 밑바닥이 없는 채색질그릇이 출토되었다. 발굴자들은 이처럼 밑바닥이 없는 직통형의 채색질그릇을 당시 사람들이 가죽을 씌워 북으로 사용했을 것으로 추론한다. 우하량유적 제16지점 하층 적석총에서 출토된 통형 채색질그릇의 입구 부분에 테둘레가 있어 북면의 가죽을 편리하게 묶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채색질그릇은 주로 큰무덤과 주무덤의 외부를 둘러싸며 세워져 있어 특정한 제사형식을 갖추었을 것으로 생각되고, 아울러 제사의식과 채색은 연관성을 가질 것으로 생각되어진다.
▲우하량유적출토 통형질그릇 ©브레이크뉴스
여신묘벽화의 채색은 소하연문화(서기전 3000〜서기전 2000년)의 흑색과 홍색 등의 채색 문양으로 계승되어지고 다시 하가점 하층문화(서기전 2000〜서기전 1500년)로 이어진다. 이러한 염료의 사용은 화려한 흑색 바탕위에 홍색과 백색이 어우러진 채색질그릇을 만들어낸 오한기에 위치한 대전자유적에서 잘 나타난다.
대전자유적에서는 아름다운 문양의 질그릇과 함께 대전자유적에서 출토된 붉은색 안료가 담긴 돌그릇과 채색질그릇 부분 붉은색 안료가 담긴 정교하게 만들어진 돌그릇이 출토되어 채색이 활발히 이루어졌음을 알게 한다. 그 외에 고형의 칠기도 출토되어 칠기의 역사가 이른 시기부터 진행되었음과 다양한 채색기법이 발전해갔음을 알게 한다.
신석기시대부터 자연의 재료로부터 염료를 채취하여 질그릇에 채색을 하거나 벽화를 그리고 의복에 물감을 들이는 등 채색과 염색을 생활화 한 모습은 고조선시기로 오면 보다 과학적인 발달을 이룬다. 고조선 사람들은 복식에서 장식기법과 직조기법 뿐만 아니라 염색기법에서도 독창성을 보인다.
?삼국지?의 「오환선비동이전」 부여전에서 “(부여 사람들은) 국내에 있을 때의 옷은 무늬가 없는 것을 숭상했으며, 무늬 없는 포로 만든 큰 소매의 겉옷과 바지를 입고 가죽신을 신었다고 했다. 동부여는 고조선을 이은 나라였으므로 그들의 복식은 고조선의 것을 계승했을 것이다. 고조선 시대의 청동기 문화층에서 출토된 흙으로 만든 남자 인형들은 모두가 서 있는 형태로 아래 폭이 넓게 퍼져 있거나, 긴 길이의 겉옷을 입고 있는 모습으로 부여에서 입었던 큰 소매 달린 겉옷의 원형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동부여의 넓은 폭과 긴 길이의 겉옷을 입었던 모습은 길림시 모아산에서 출토된 도용에서 확인된다. 위의 ?삼국지? 동부여에 관한 서술내용에서 ‘尙白’과 ‘白布’가 보인다. 白은 일반적으로 흰색으로 번역하여, 부여사람들이 흰색 천을 숭상한 것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이러한 내용과 달리 실제로 고조선시대부터 줄곧 많은 생산량을 가지며 복식재료로 즐겨 쓰여 졌던 실크의 경우 색상과 문양이 화려한 상태로 출토되어진다. 평양 낙랑구역 무덤들에서는 해방 이전과 이후 고조선과 최리 낙랑국이 생산한 많은 량의 다양한 종류의 사직물이 출토되었다. 이 천들은 모두 염색한 것이었고, 바탕색과 다른 색으로 문양을 직조하여 넣은 것도 있으며, 일부러 색상을 내기위해 탈색 한 것도 있었다. 따라서 고조선에서 이처럼 염색과 탈색기술이 발달한 것으로 본다면 부여에서 겉옷을 만들었던 천들은 염색을 통해 문양이 두드러지지 않게 단아한 색감을 냈을 것이다.
실크는 정련공정에서 약간의 세리신을 남겨두는 것이 탄성을 부여하는데 더 좋으며, 세리신이 섬유표면에 0.5퍼센트 남아있는 경우에 완전히 정련된 경우에 비하여 염색이 최고 1.6배나 진하게 된다. 특기할 것은 평양 낙랑구역에서 출토된 천들이 성분분석 결과 이 같은 과학적인 염색 조건을 모두 충족하고 있는 점이다.
평양 낙랑유적에서 출토된 고조선의 실크들은 모두 염색을 거친 직물로서 주로 밤색과 자주색을 띠며 문양이 없는 것과 문양이 있는 것, 또는 넝쿨문양을 수놓은 것, 붓으로 문양을 그려 넣은 것 등 다양한 기법을 표현한 염색직물이다. 신석기시대부터 발달되어진 천연염료의 생산과 발달은 고조선시대에 오면 복식에 더욱 적극적으로 사용되어, 의복에 문양을 그려 넣거나 실이나 천을 염색하여 문양을 직조하여 그 위에 색실로 수를 더하는 등 고유한 기법으로 화려한 복식문화의 갖춤새를 정형화 시킨다.
고조선을 이은 고구려 복식에도 고분벽화 등에는 흰색의 옷은 보이지 않고 다양한 색상과 화려한 문양이 있는 의복이 대부분이다. 특히 고구려는 금(錦)으로 상징될 만큼 금(錦)을 즐겨 입었다. 금(錦)은 누에 실을 여러 색으로 물들이고 이를 섞어 화려한 문양으로 짠 것이다. 따라서 ?삼국지? 「오환선비동이전」 등에서 이야기하는 ‘白衣’는 흰옷을 의미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백의’는 단색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무늬가 같은 계통의 색상으로 표현되어 옷의 바탕색과 무늬가 서로 크게 이색지지 않고 단아한 조화를 이룬 것을 표현한 것으로 생각된다.
고조선의 복식은 고구려로 오면서 색실로 짜 넣는 직조기술과 염색기술에서 더욱 발전양상을 보이는데, 고구려 고분벽화에 보이는 복식에는 특히 기하학문양이 많이 표현되었다. 문양은 주로 둥근 문양과 네모문양, 마름모문양 등으로 다양하며 직선과 곡선으로 이루어진 추상적인 문양도 있다. 이러한 고구려 사람들이 복식에서 나타낸 문양들은 주로 염색기법과 직조기법, 자수기법 등이 혼합되어 만들어진 것이다.
고구려 복식에 나타나는 색상은 고조선의 염색기술을 이어 색실로 직조한 것이거나,
▲동암리고분벽화의 고구려사람들 ©브레이크뉴스
직조한 직물을 침염법으로 염색한 것으로 기하학문양을 나타내는 염색법에는 홀치기염과 납힐기법, 채회기법, 협힐기법 등이 있다.
고구려 사람들은 염색기법과 자수기법을 혼용하면서도 그 위에 장식기법을 더하여, 우아하고 화려한 복식문화를 발달시켜 나갔다.
고구려의 장식기법은 기학학문양의 또 다른 표현 양식으로 홍산문화의 전통을 이은 고조선의 것이 지속된 것이다.
또한 고구려 사람들은 같은 양식의 문양이라도 크기와 양식의 차이 및 기하학적인 선의 방향을 달리하여 개성 있는 복식문화를 이루었는데, 이러한 독창적인 색상과 문양을 나타내는 복식기법은 홍산문화로부터 비롯된 채색기법 위에 고조선의 전통기법을 발전적으로 지속해 나갔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박선희. 상명대 교수.』
(출처; http://www.breaknews.com/sub_read.html?uid=238727§ion=sc5)
〈만주 요하문명이 고조선문명인 까닭<5>석경의 기원과 고조선〉
2012년 11월 15일 브레이크뉴스
『환웅의 신시시대는 마을 연맹체를 형성하여 정치권이 형성된 시기로 유적과 유물들은 종교의식을 반영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이것은 고대사회를 지배하는 중요한 수단이 종교와 무력이었지만 종교가 정치보다 우위에 있어 사회를 지배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러한 현상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유적이 홍산문화의 우하량유적으로 신상과 거대한 제단유적이다. 이 제단은 원형과 방형의 적석제단이고 제단의 돌돌림 울타리는 3중 원형을 이룬다. 이러한 유적과 유물들은 이 시기에 종교가 일정한 권위를 가지고 군림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우하량유적 이외에도 요령성 서부와 내몽골지역을 중심으로 발달된 홍산문화 유적인 요령성 객좌현 동산취유적, 부신현 호두구유적에서는 제단의 기능을 했을 것으로 여겨지는 원형의 돌무지를 비롯해 제사를 지냈던 건물터, 돌무지 안에 돌널무덤이 있는 유구 등이 발굴되었다.
이러한 특징의 제단 유적들은 중국이나 북방 유목문화지역에서 보이지 않는 반면 한반도의 북한지역에서 발굴되고 있다. 지금까지 한반도에서는 방형과 원형의 돌돌림 제단유적이 2곳에서 모두 5기가 발견되었다. 황북 연탄군 오덕리의 송신동유적과 평양시 용성구역 화성동의 당모루유적이 대표적이다. 이 유적들은 고조선시기에 고인돌을 축조하면서 제의를 행하였던 제단이었을 가능성이 많은 것으로, 그 기원은 요서지역의 홍산문화에서 보이는 제단시설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들은 홍산문화의 제단 규모와 양식, 유물 등을 환웅시대의 신시문화 유적으로 해석하게 하며, 이곳에서 형성된 제단유적이 고조선시기에 한반도와 만주일대에 널리 전승되었다고 하겠다.
▲요령성 평강유적에서 출토된 고구려 초기 금장식 ©브레이크뉴스
환웅천왕의 신시문화에 이어 고조선시대의 이러한 종교 유적들이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단군사화에 보이는 종교의식의 반영으로부터 볼 수 있다. 단군사화에 등장하는 환웅과 곰, 호랑이의 상징성이 바로 고대인들의 종교의식으로 반영된 것이다. 고조선은 하느님을 수호신으로 했던 환웅족과 곰을 수호신으로 했던 곰족, 호랑이를 수호신으로 했던 호랑이족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고조선의 단군은 바로 이 여러 종족들을 다스리는 종교적 통치자인 동시에 정치적 통치자였다.
이러한 고조선시기의 종교의식을 담은 상징적 유물들은 삼국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다양한 양식을 나타내며 발전되어갔다. 좋은 예로 요령성 평강지구유적에서 출토된 고구려초기의 금으로 만들어진 장식품에는 단군사화의 내용이 사실적으로 표현되어있다.
고조선의 단군이 정치적 통치자이고 종교지도자였음을 다음의 기록으로부터 살펴볼 수 있다. 『후한서』의 「한전」에는 “여러 국읍에는 각각 한 사람으로써 천신(天神)에 대한 제사를 주재하도록 하였는데, 이름 하여 천군(天君)이라 했다”는 내용이 보인다. 단군은 몽골어에서 하늘을 뜻하는 텡그리(tengri)와 그 뜻이 통하는 것으로 하느님 또는 天君으로서 종교의 최고 지도자에 대한 호칭이었다.
위의 기록으로 보아 한에서는 국읍에서 하늘에 제사를 주재하는 종교지도자가 있었는데 그를 천군이라 불렀던 것이다. 고조선에 속해있던 대부분의 나라들이 고조선시기 요서지역에 위치했던 것과 달리 한은 원래부터 한반도에 위치해 있어 그 통치체제나 통치조직에서 고조선의 것을 큰 변화 없이 계승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한(韓)은 고조선을 그대로 이어 종교를 주관하는 종교지도자와 종교 성지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한 내용을 알려주는 것으로 『후한서』「동이열전」한전에는 “또 소도를 만들고, 그곳에 큰 나무를 세워 방울과 북을 매달아 놓고 귀신을 섬긴다”고 하여 한나라에는 종교지도자인 천군 뿐만이 아니라 소도라는 종교적 성지인 별읍이 있었음을 알려준다.
▲ 홍산문화유적 출토 석경 ©브레이크뉴스
소도의 나무에 매달았던 방울은 고조선의 대부분의 유적에서 고루 출토되어진다. 청동방울은 고조선의 특징적 유물 가운데 하나로 가지방울과 팔수형방울을 비롯하여 다양한 양식의 것들이 만들어졌다. 고조선시대의 북은 아직 출토된 것이 없지만 홍산문화의 여러 유적에서 질그릇에 가죽을 씌워 북으로 사용했을 밑바닥이 없는 직통형의 채색질그릇이 다수 출토되었다. 고조선에서는 악기가 크게 발달하여 관악기와 타악기, 현악기가 모두 사용되었다.
홍산문화시기에서는 종교의식에 사용되었을 타악기의 한 종류인 석경이 출토되어지며, 만주의 여러 유적에서도 발전된 모습의 석경들이 나타나고 이후 고조선문화로 지속되어진다. 중국에서 석경은 가장 이른 시기의 것이 이리두문화에서 발견된 것이다. 이리두 문화시기는 21세기 무렵에서 17세기 무렵으로, 홍산문화유적에서 출토된 석경 보다 2,000년에서 1,800년 정도 늦게 나타나기 때문에 석경의 발달사에서도 홍산문화는 한민족의 문화였음이 밝혀진다. 석경의 대하여 상세히 알아보기로 한다.
홍산문화유적에서는 두 개의 석경이 출토되었는데 하나는 길이 44쎈티미터, 넓이 26쎈티미터, 두께 5쎈티미터이다. 다른 하나는 길이 58쎈티미터, 넓이 20쎈티미터, 두께 2쎈티미터이다. 중국학자들은 앞에 설명한 석경은 낮고 묵직한 음이 나며, 또 다른 하나는 청동종의 소리와 유사하다고 밝혔다.
▲水泉유적출토 ©브레이크뉴스
고조선시대의 석경으로 요령성 조양 수천유적 하가점하층문화층에서 온전한 모습의 석경이 출토되었다. 요령성 건평현의 이도만자 동남구유적에서도 석경이 발견되었다. 떨어져 나간 부분을 복원하면 대략 1미터 정도의 큰 석경이다. 석경의 몸체 윗부분에 직경 0.6쎈티미터 정도의 구멍을 뚫어 끈으로 매달도록 했다. 대략 서기전 2,000년 무렵의 것이다.
요령성 부신시 고대산유형의 물관지유적에서과 요령성 건평현 동북부에 위치한 객라심 하동유적에서도 석경이 출토되었다. 이 유적들의 연대는 서기전 2,100년경으로 고조선 초기에 해당된다.
중국 중원지역에서 발견되는 가장 이른 시기의 석경으로는 이리두 문화유적인 산서성 양분현 도사유적과 하현 동하풍유적에서 출토된 석경이다. 이리두 문화시기는 대개 서기전 1,900년 내지 1,600년 무렵으로, 만주지역의 석경 보다 훨씬 늦은 시기에 만들어진 것이다. 서기전 14세기 무렵에 해당하는 은나라 무정의 왕비무덤인 부호묘에서 출토된 석경은 다듬어지기 이전의 형태를 보이고 있다. 그 외에 서기전 14세기에서 서기전 11세기 무렵에 속하는 중국 하남성 안양시 무관촌 은나라의 대묘에서 출토된 석경이 있다. 이러한 내용으로 보면 중국의 석경은 고조선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만들어졌다고 하겠다.
이러한 악기들은 종교의식은 물론 일상생활에서도 사용되었을 것이다. 『후한서』「동이열전」 부여전에, ‘행인들은 밤낮없이 노래 부르기를 좋아하며 노래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고 하였고, 『후한서』「동이열전」 고구려전에는 “밤에는 남녀가 떼지어 노래를 부른다”하였으며, 『후한서』「동이열전」 한전에도, “그들의 풍속은 노래하고 춤추며 술 마시고 북치고 비파 뜯기를 좋아한다” 고 하였는데, 이와 비슷한 내용이 『삼국지』「오환선비동이전」에도 보인다. 이 기록들은 고대에 한반도와 만주지역 거주민들이 음악과 춤을 매우 즐겼음을 알게 해 주는데, 이러한 풍속은 고조선으로부터 전해 내려왔을 것이다.
이상의 내용으로부터 중국의 이리두 문화시기에 만들어진 석경은 홍산문화유적에서 출토된 것 보다 2000년에서 1800년 정도 늦은 것을 알 수 있다. 홍산문화시기에서 이미 타악기의 한 종류인 석경이 보이고 이후 고조선의 여러 유적에서 이를 계승하여 발전시킨 형태의 석경들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석경의 발달사에서도 홍산문화는 한민족의 문화였음이 밝혀진다.
이처럼 홍산문화의 종교적인 예술품들에 관한 연구는 홍산문화의 성격이 중국이나 북방지역의 것과 크게 구별되고, 고조선과 여러나라시대에 그 특징적 요소들이 그대로 지속되고 있음을 말해준다. 홍산문화의 성격이 중국이나 북방지역의 것과 크게 구별되고, 고조선과 여러나라시대 문화에 그 특징적 요소들이 그대로 지속되고 있음을 밝히게 되어 그 실체와 정체를 한민족 문화의 원형으로 귀속시켜야 할 것이다.
홍산문화의 모든 내용들이 고조선문화의 원형임을 입증해 주고 있는 상황에서 최근 중국에서 홍산문화를 포함한 만주의 고대문화를 총칭하여 하나의 강 이름으로 포괄하여 ‘요하문명’이라 부르는 것에 동의해서는 안될 것이다. 우리가 ‘요하문명’이라는 용어를 그대로 사용한다면 중국학계의 단순한 설명을 용납하고 이 문화를 중국의 황제문화로 포함시키려 하는 동북공정을 따르는 것이나 다름없게 된다. 우리는 이 문화를 반드시‘고조선문명’이라 불러야 할 것이다. 박선희. 상명대 교수.』
(출처;http://www.breaknews.com/sub_read.html?uid=239033§ion=sc5)
〈단군 넘어 한웅, 중국요서 우하량에 있다?〉
이찬구박사
2018년 7월 9일 코리아히스토리타임즈
『홍산문화지로 알려진 요서 내몽골 우하량은 조이족 땅이었다.
중국 하북성 근처에 신시시대 한웅흔적 발견
새를 숭배하는 동이족 터전으로 판명
여신묘, 곰발조소, 수행하는 여신상 등
조선(단군)이전 흔적도 보여
▲ 서기2018.06.28. 서울 종로3가 태화빌딩에서 한뿌리사랑세계모임(한뿌리, 회장 박계옥)이 주최한 시민강좌가 있었다. 이날 강사로 나선 이찬구 박사는 조이족이 한웅족이라고 설명했다.
우리는 학교에서 역사를 배운다. 그렇다면 우리 국사교과서가 역사로 인정하는 시기는 어디까지 갈까. 서기전2333년에 개국한 조선(단군)을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이 국사 부분을 담당하고 있는 한국고대사학회는 단군을 역사로 인정하지 않는다. 신화라고 한다.
지난 서기2016년에서부터 2017년 까지 한국고대사회가 주도한 시민강좌 총 50여회를 취재한 결과 이런 결론에 도달했다. 이들은 단군은 커녕 한참 뒤의 역사인 고구려, 백제, 신라조차도 <삼국사기>에 나온 데로 다 인정하지 않는다.
조선총독부 식민사관에 따라 서기4세경에서야 사실상 백제, 신라가 들어섰다고 가르친다. 고구려는 조금 이르지만 서기 이후에나 세워진 것으로 보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다. 그러나 <삼국사기>는 엄연히 서기 1세기경에 모두 개국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이런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 관점으로 지금 대학원에서 석사니 박사니 하며 후학들이 배우고 있고 붕어빵 찍어 내듯이 끊임없이 생산되고 있다.
그럼 어떻게 단군 조선이 서기전2333년에 개국했다는 기록이 들어가 가게 되었을까. 이는 서기1970년대 민족사학계에서 1차 사료를 가지고 투쟁한 결과다. ‘국사찾기협의회’를 만들어 당시 안호상, 임승국, 이유립, 김정권 등 학자들의 눈물겨운 투쟁 결실이다.
당시 국회에 청문회까지 열게 하여 우리 국사책이 조선총독부 식민사관에 따라 만들어졌다고 증명했다. 국내 사료를 근거로 밝혀냈다. 이를 강단식민사학계에서는 국사교과서 ‘파동’이라고 치부한다. 마치 정상 국사교과서가 불순한 세력에 의해 침탈당했다는 듯이 다루고 있다. 이 투쟁 결과 단군이 역사로 들어가게 된 것이다.
또 이와 대척점에 서 있는 중국 한나라 식민기관 낙랑군 등이 사라지게 되었다. 그러나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 때는 정식으로 상당부분 할애해서 수록해 놓은 체제였다. 그러나 이후 대놓고 수록은 안했어도 간접 방식을 통해서 유지하고 있다. 여전히 우리 역사는 중국 식민지에서부터 사실상 시작했다는 태도를 현행 검인정 모든 국사교과서들도 취하고 있다.
그러면 우리 국사는 사실상 어디서부터 시작하는 것일까. 일연 <삼국유사>를 고조선기를 보면 단군 이전에 한웅의 신시시대가 있다고 분명히 증언하고 있다. 한웅, 천부인 3개 태백산, 신시, 인간360여사를 다루고 있고 풍백, 우사, 운사라는 관직도 나온다. 너무 오래된 역사여서 이렇게 아주 압축해서 전해지고 있다. 이는 문헌이 신시시대가 존재했음을 나타내는 가장 오래된 기록이다.
그렇다면 실제로 고고학 상으로도 밝혀낼 수 있을까. 서기2018.06.28. 서울 종로3가 태화빌딩에서 한뿌리세계모임(한사모, 회장 박계옥)이 주최한 시민강좌가 열렸다. 이날 강사로 나선 이찬구 박사가 이에 대하여 의미심장한 발표를 했다.
흔히 알려진 홍산문화지역을 중심으로 한웅 신시시대를 조명했다. 중국 내몽골 요서에 위치한 특히 우하량 지역에서 나온 유물과 유적을 집중 분석했다. 그는 먼저 우하량 유적을 남긴 사람들이 누구인지 그동안 다투어진 주장들을 전했다. 북한에서는 리지린이 맥부족이라고 했다고 한다. 또 북한 전대준은 박달족이라고 했다. 남한에서는 한영우가 아사달족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중국은 북적北狄으로 보았다.
그런데 우리를 한편으로는 놀라게 한편으로는 슬프게 한 사실도 등장했다. 이런 여러 주장이 나오기 이미 수십 년 전인 서기1938년에 일제가 발굴하고 있었다. 일제 만몽학술단은 이 문화 주인공을 동호東胡라고 주장했다. 여기서 우리 강단주류사학계는 어떻게 보는 지 궁금하다.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에서 부역한 친일사학자, 이병도 학파가 있다. 일제가 조선총독부를 통해서 식민지 통치 보조기관으로 만든 경성제국대학이 있다. 이 대학이 현재 서울대학이다. 식민지 체제 그대로 이어받아 이름만 경성제국대학에서 서울대학으로 바꾼 것뿐이라고 이 분야 학자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이병도->김철준->노태돈->송호정 등으로 서울대 국사학파 맥이 이어지고 있다. 이 서울대 국사학파가 우리나라 역사학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 다 알려진 사실이다. 친일식민사학자, 이병도 학풍을 이어오고 있다. 이병도는 일제식민사학을 체화한 친일사학자다.
이 사람의 학문 고손자벌인 송호정 한국교원대학교 교수는 당시 요서지역 주인공이 동호라고 한다. 그 서쪽은 산융족이 지배했다고 한다. 앞서 서기1938년에 발표한 일제 만몽학술단의 견해와 일치한다. 우리와 상관없는 북방 어느족 역사라는 뜻이다.
이는 조선총독부 식민사관이 우리 안에 살아있음을 말한다. 우리는 해방된 지 73년이 되어가고 있으나 역사는 여전히 일제식민통치를 받고 있다.
이날 이찬구 박사는 중국학자 이민의 견해를 끌어들여 홍산문화 우하량 주인공을 조이족鳥夷族으로 설명해 나갔다. 시기상으로도 서기전 2천년 이전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 지역에서 새가 새겨진 조작유물 특히 부엉이 조각, 옥으로 된 새 조각 등을 근거로 이 지역을 새를 숭배하는 족이 지배한 것으로 판단했다. 또 갑골문을 제시하여 이족이 존재했음을 덧붙였다.
▲ 만주 요령성 평강지구에서 발견된 금동새조각상. 독수리, 곰, 범, 이리가 새겨져 있다. 이를 한웅의 신시시대가 존재했다는 근거로 내세우고 있다.
이어 조이족이 우리 땅 원주민이었을 것이라고 북한학자 리지린의 견해를 소개했다. 또 그는 문헌증거로 <삼국유사> 고조선기, <규원사화> 등을 제시했다. 또한 이암이 쓴 <단군세기>에 등장하는 국선소도와 큰 나무를 상징하는 웅상雄常도 하나의 근거로 보았다. <산해경>에 이와 닮은 기록이 있음도 상기시켰다.
계속해서 그는 우하량에서 곰발소조와 새 조소품들이 나온 것을 근거로 한웅족과 곰족의 결합을 추정했다. 또 요령지방에서 나온 이른바 금동새조각품을 근거로 한웅시대가 존재했음을 밝혔다. 이 금동새조각품에는 독수리가 날개를 활짝 펴고 곰을 가운데 두고 왼쪽에는 범, 오른쪽 구석에는 이리를 새겨놓고 있다.
이 박사는 한웅을 신화라고 하지만 사실은 역사라는 사실을 서양 학자들의 발언을 끌어와 설명했다. 미르치아 엘리아데는 “신화는 거룩한 역사, 곧 시간 시발점에서 태초에 일어난 원초적이 사건”이라고 했다. 프레이저는 “의식은 사라지지만 신화는 남는다”라고 했다. 이는 살아있는 신화를 통해서 사라진 의식을 되찾는다는 것인데 역사를 복원하는 작업을 뜻한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신화는 재현되고 이 신화는 다시 역사를 드러낸다고 강조했다. 그 한 사례로 올해 2월에 강원도 평창에서 열린 평창동계올림픽에 개막식에서 등장한 얼굴이 사람이고 몸은 새인 인면조를 들었다. 이러한 재현은 우리 무의식에 새겨진 신화가 역사로 살아나는 것으로 풀이된다. 오종홍 기자』
(출처; http://www.koreahiti.com/news/articleView.html?idxno=3078)
신용하, 《고조선 문명의 사회사》
신용하는 《고조선 문명의 사회사》에서 환웅의 배달국을 군장국가로 보았다.
『신석기시대 말기에서 고대국가 형성기에 고한반도 ‘한’족의 분포지역에서 대군장들이 소군장국가들을 통합하여 고대국가 건국을 지향하는 동태적 큰 변화가 자료들에서 관찰된다. 고조선 개국설화에서 나오는 환웅은 ‘한’족 군장국가들의 대군장들 가운데서 강동, 성천, 상원, 순안, 개천 일대를 통합해 나가면서 신석기말기 이 지역에 상당히 발전된 ‘한’족의 군장국가(환웅국)를 형성했던 대군장으로 해석된다. 환웅은 BC3000년경 ‘맥’족과 ‘예’족에게 접경하게 되자, 선진 농업과 우세한 무력으로 ‘맥’족을 평화적으로 포용하고 연맹하여 고대국가 형성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고 추정된다. ‘한’은 차용 한자 표기로 ‘桓’으로 표기되는 경우가 자주 있으며, ‘雄’은 군장이 남성이라는 뜻을 포함하고 있다. ‘환웅’은 ‘한’족 군장들 가운데 북방 변경에서 영역이 여러 고을에 걸친 상당히 큰 규모 군장국가의 군장으로서 거의 고대국가의 왕이나 다름없는 지위에 있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출처; 신용하, 고조선 문명의 사회사, 87쪽)
〈신용하의 인류 5대 ‘古朝鮮문명’ - ⑥ 고조선 태동시킨 ‘환웅의 군장국가’〉
환웅, 예·맥족 포용… 부족공동체→고대국가 발전 터 닦았다
2019년 8월 28일 문화일보
■ 신용하의 인류 5대 ‘古朝鮮문명’ - ⑥ 고조선 태동시킨 ‘환웅의 군장국가’
『고대국가 형성前 準국가형태 과도기적 정치체제가 군장國 군장(chief)이 여러 고을 통치
‘최고의 예술품’ 무계리 석검 ‘제사용 술잔’ 조동리 간토기 당시 군장들 권력·삶 보여줘
6000~7000년前 대동강 유역 한족 ‘환웅 군장국가’가 지배 기후변화로 예·맥 이동·유입
강대했던 환웅, 홍익인간 실천 예·맥족 제압 않고 정착 도와 곰 토템 맥족과 혼인동맹까지
고조선 국가는 선행한 ‘환웅’족의 군장국가(君長國家·chiefdom)를 한 단계 더 지양·발전시킨 고대국가였다. 여기서 군장국가란 스펜서와 서비스 등 진화론적 사회학자·문화인류학자들이 정립한 개념인데, 고대국가 형성 직전에 군장들(chief)이 자기 고을에 일종의 준국가(準國家)로 볼 수 있는 통치조직과 질서를 만들어서 고을과 주변 일대를 통치하는 정치체를 의미한다. 군장국가는 부족공동체로부터 고대국가로 가는 과정의 과도적 정치체다. 군장국가의 특징은 동일한 큰 부족 안에서도 크고 작은 다수의 군장국가가 출현해, 처음에는 상호 대등한 관계에서 협동 또는 경쟁하면서 자기의 통치세력을 점차 더 확대해 가는 데 있었다.
한반도에서 ‘한’(韓)의 군장국가 실태를 보면, ‘삼국지’ 위서 ‘한’조에 주로 한강 이남 진(辰)국 지역의 이름만 나온다. 마한에 속하게 된 것이 월지국(月支國) 등 54국, 진한에 사로국(斯盧國) 등 12개국, 변한에 미오야마국(彌烏耶馬國) 등 12개국이 있다.
고고유물로는 ‘한’족 무덤양식인 고인돌의 크기가 비교적 크고, 부장품 중에서 생산용구와는 별개의 전투용 또는 위신용 석검(石劍·특히 손목 방패 장치가 있는 전투용 석검)과 제천(祭天)용 특수 토기들의 출토는 군장국가 존재의 증거가 될 수 있다. 예컨대 전북 진안군 모정리의 경우, 상당히 큰 A-1 고인돌 1기에서 ‘붉은 간토기’(磨硏紅陶)와 함께 10개의 석검이 출토됐다. 같은 지역 모정리 망덕 고인돌에서는 붉은 간토기와 함께 역시 7개의 석검과 다수의 돌화살촉이 출토됐다(③, ④ 참조). 붉은 간토기는 태양(하늘)에 제사하는 용구이고, ‘검은 간토기’(磨硏黑陶)는 지신(地神)과 강물(水)에 제사하는 용구다. 이 지역을 통치하는 ‘한’족의 ‘군장국가’가 형성됐음을 추론할 수 있다.
충북 충주 조동리 부근 군장국가의 군장의 제사용 붉은 간토기(약 6200년 전) 등을 보면(② 참조), 오늘날의 술잔에 비해서도 손색이 없다. 경남 김해 무계리 군장국가의 군장의 석검은 그 시대 세계 최고의 예술적 석검이다.(① 참조) 한강 이남 군장급 고인돌 무덤 출토품들의 편년이 대부분 6000년 전~7000년 전임을 보면, 고한반도에서는 적어도 약 6000년 전~7000년 전에 다수 ‘군장국가’들이 출현했다고 필자는 보고 있다.
‘한’족 대군장들 가운데서 ‘환웅국’은 고한반도 가장 북변에 위치한 군장국가로서, 역시 적어도 약 6000년 전~7000년 전에 지금의 대동강·청천강 유역에 형성돼 발전되고 있던 군장국가였다고 본다. ‘삼국유사’와 ‘제왕운기’의 ‘단군설화’에서 보면, 단군왕검에 의한 조선(고조선) 개국 과정을 설명하면서 분량의 거의 4분의 3을 ‘환웅’ 이야기에 배정하고 있다.
인류 모든 역사에서 고대 개국시조의 역사는 ‘신화’ 또는 ‘설화’로 돼 있다. 시조 신성화를 위해 신(神)·하느님(天)을 빌린 것이다. 그러므로 과학적 역사는 개국신화 속에서 신화적 요소와 사실적 요소를 구별해 내어 사실만으로 역사를 정립해야 한다. 그런데 ‘단군설화’에는 신화적 요소는 ‘환인(=하느님)’ 설명의 단 한 번이고, 모두 사실 이야기로 돼 있다. 단군 ‘신화’(神話)가 아니라, 단군 ‘설화’(說話)이고 ‘사화’(史話)이다. 단군설화의 ‘곰’과 ‘범’도 진화론적 사회학·인류학의 토템이론이 잘 설명해 주는 것처럼, 신석기시대 부족명칭이다. 그러므로 ‘단군설화’를 신화라고 버리는 것은 이 시대 유일한 문헌사료를 버리는 어리석은 일이다. 단군설화에서 ‘사실’의 줄거리를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1)“환인(하느님)의 여러 아들 가운데 환웅(桓雄)이 항상 지상에 내려와 인간 세상을 다스리고자 하는 뜻이 강하므로, 환인(하느님, 아버지)은 지상의 삼위(三危)산과 태백(太伯)산을 내려다보니, 태백산이 가히 홍익인간(弘益人間)하기 적합하므로 아들 환웅을 천부인(天符印:하느님이 붙인 징표) 3개를 주고 무리 3000명을 이끌고 지상에 내려가게 했다.”
여기서 ‘삼위산’은 중국 감숙성 돈황(敦煌) 부근의 산이고, 태백산은 고한반도에 있는 산이다. 환인(하느님)은 고‘한반도 태백산’을 선택해 아들을 내려 보낸 것이다. 하느님이 선택한 땅 고한반도 ‘태백산’의 신성성이 함축돼 있다.
(2)초대 “환웅은 무리 3000을 이끌고 태백산(太白山)의 신단수(神壇樹) 아래 내려와 여기를 신시(神市)라고 말하니, 이 분이 환웅천왕(桓雄天王)이라는 분이다.”
여기서 ‘태백산’ ‘신단수’ ‘신시’에 대한 여러 가지 해석과 학설이 제시돼 있다. 필자는 인류의 하늘에서 내려온 신화(및 설화)의 서술양식에 따라, 이들을 모두 ‘건국 부족 거주 지역’에 연결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태백산’은 ‘밝’족의 제천하는 신성한 ‘큰 밝달’이다. 즉 ‘밝’족 거주지역인 고한반도의 제천하는 산이다. ‘신단수’는 태백산(‘밝’족 거주 지역) 내의 신성한 숲이 있는 한정된 지역을 가리킨다. ‘神市’는 ‘(신성한) 왕검의 도읍지’의 한자 뜻 표기로서, ‘왕검성’과 같은 뜻이다.
(3)환웅이 처음 3000명을 이끌고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것은 또한 환웅은 고한반도 북변에서 자생한 족속이 아니라 하늘(실제 역사에서는 고한반도 중부)에서 이동해 들어온 족속이 수립한 군장국가의 군장이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4)환웅의 하강(이동) 후의 치세의 목표에 하느님(환인)으로부터 받은 홍익인간(인간을 널리 이롭게 함)과 재세이화(在世理化·세상을 이치로 교화시킴)의 설화가 기록돼 있는 것은 환웅 군장국가의 통치이념이 정립돼 있었음을 시사한다.
고한반도 각지에서 군장국가들이 형성·발전돼 고대국가 형성 직전에 있던 약 5000년 전에 요서 지역에, 갑자기 기후변화가 일어나서 강우량이 급감하고 장기간 기후 건조화가 진행됐다. 요서지방 대릉하와 시라무렌강 유역에서 홍산문화를 만든 농경부족인 ‘맥’족은 더 이상 이곳에서 농경을 지속하기 어려워 남방 이동을 감행하게 됐다. 우하량 유적지를 중심으로 ‘홍산문화’ 유적을 남긴 ‘맥’족은 약 5000년 전에 여족장의 지휘 아래 남방으로 부족 대이동을 감행했다. 홍산문화 출토 유적·유물이 5000년 전에 갑자기 뚝 그치고, 그 대신 요동반도 압록강 유역, 요서의 하가점 하층문화유적 지역에서 홍산문화를 계승한 ‘맥’족의 유적·유물이 발견·발굴된 데서 이를 알 수 있다. 당시 ‘맥’족의 이동은 4갈래로 나누어졌다.
첫째 갈래는 여족장(우하량 지역)의 지휘 아래 압도적 다수가 동남쪽 요동반도와 압록강을 건너 한반도 북부로 이동했다. ‘맥’족의 원래 기원은 ‘고한반도 밝족’이었으므로 고한반도의 온난한 기후와 강우량을 아는 맥족은 기원지인 역사적 고향 방향으로 진로를 택했다고 볼 수 있다. 또 요동반도와 한반도는 농업경작에 적합한 토지가 있는 지역이기 때문이었다.
둘째 갈래는 어떠한 사정으로 ‘맥’부족 내의 소수 일부 씨족이 주류에서 이탈해 바로 남방의 발해만 연안 해안으로 내려와 새 정착지를 개척한 경우다. 발해만 연안은 해수면이 낮아져서 해안선은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다. ‘맥’족 이동의 이 갈래가 서요하 발해만 연안지역에 정착 후 고조선 건국 후에 통합돼 남긴 유적이 ‘하가점 하층문화’다.
셋째 갈래는 어떠한 사정으로 ‘맥’부족 내의 극소수 씨족이 서남방으로 이동해 중국 동해안에 정착한 경우다. 당시 중국 동해안은 해수면이 약간 내려가서 주인 없는 새 간척지가 조성되고 있었다. 그들은 중국 동해안 새 간척지에 정착해서 고대 중국인들이 말한 ‘동이’(東夷)의 일부가 됐다.
넷째는 기후 건조화 후에도 이동하지 않고 요하 상류 양안과 시라무렌 강·노합하 유역에 남아서 후에 조성된 수초지·목초지에서, 목축으로 생업을 바꾸어 유목민이 된 경우다.
필자는 동북아시아 유목민은 약 4000년 전~5000년 전 건조기에 부족 이동을 감행하지 않고, 그대로 예족과 맥족 지역의 거의 말라 가는 강가에 남아서 수초지·목초지를 따라 유목생활을 시작한 원 실위(室韋)족과 원 산융(山戎)족에서 기원한다고 보며, 그들도 원래 ‘밝’족의 후예들이었고, 맥족·예족의 남겨진 갈래였다고 본다. 필자는 이 동아시아 유목민 기원의 발견을 매우 중시한다. 그들은 유목민이 되자 ‘이리(늑대)’를 토템으로 정해 자기 정체성을 구별했다.
‘맥’족뿐만 아니라 ‘예’족 중에서도 농경씨족들의 일부는 기후 건조화시기에 씨족이동을 감행해 농경에 적합한 남방으로 이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남방 이동 ‘예’족은 ‘맥’족보다는 소규모였다고 추정된다. 왜냐하면 ‘예’족의 다른 일부는 삼림지대와 큰 강·호수지역 환경에 잘 적응해 수렵과 어로를 농경과 균형적으로 발전시키면서 정착했기 때문에, 농경이 어려워져도 수렵·어렵 등 다른 생존수단이 여전히 일부 남아있었기 때문이었다. ‘예’족은 요동반도와 압록강·두만강 양안 및 청천강 이북의 고한반도에도 이미 분포해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북상해 정착했던 ‘예’족 일부의 남하는 이 지역의 인구밀집에만 작용했지 큰 교란을 일으키지는 않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같은 시기 ‘맥’족 주류의 큰 규모의 동남방 이동은 이 지역에 상당히 큰 충격과 영향을 주었다. 약 5000년 전 이제 요동반도는 ‘예’족 지역에 새로 ‘맥’족이 들어와서 ‘예’족과 ‘맥’족이 섞여서 거주하는 지역이 됐다. ‘맥’족이 고한반도에 이동해 들어오자 이번에는 청천강 일대까지 군장국가를 형성하고 있던 ‘한’족의 ‘환웅’ 군장국과 접변하게 됐다.
인류 초기역사에서 취약한 부족집단이 찾아와 복속하면 강대한 부족은 대개 전쟁과 폭력으로 노예화시키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런데 환웅 군장국가의 마지막 군장 ‘환웅’은 그렇게 하지 않고, 찾아온 곰 토템 맥족과 범 토템 예족을 자기 영토에 정착시켜 선진농경을 가르쳐 주고 도와줬다. 곰 토템 맥족의 여족장이 한족 환웅군장국의 마지막 군장 ‘환웅’에게 ‘혼인동맹’을 요청하자 ‘환웅’ 군장은 이것도 수용해 ‘한’족(환웅국)과 ‘맥’족의 혼인동맹에 의한 두 부족의 결합이 이루어졌다. 필자는 환웅국의 마지막 군장 ‘환웅’은 ‘홍익인간, 재세이화’의 통치 이념을 잘 실천한 큰 시야를 가진 군장이었다고 생각한다.
환웅이 무력을 사용하지 않고 평화적으로 ‘맥’족을 포용해 정착시키고 혼인동맹으로 한·맥 2부족의 결합을 성취했기 때문에 환웅의 군장국가는 그 자리에서 즉각 매우 강대하게 됐다. 이것만이 아니다. ‘맥’족이 ‘한’족 환웅국가의 왕비를 내는 부족으로 대우받게 됐음을 알게 된 제2갈래의 발해만 연안 ‘맥’족과, 중국 동해안 간척지에 들어간 제3갈래의 ‘맥’족과 옛터에 잔존해서 유목민이 돼 가는 ‘맥’족 등 광범위한 지역에 흩어진 모든 ‘맥’족들이 모두 환웅의 군장국가 정치체에 순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출처;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19082801032812000001)
〈신용하의 인류 5대 ‘古朝鮮문명’ - ⑩ 中에 세운 고조선 분국〉
고조선 이주민, 5800년 전 산동반도 개척… 古중국에 선진문명 전수
2019년 12월 4일 문화일보
▲ 고조선 첫 이주민 태호족의 족장 ( 왕 ) 복희와 여와의 상징 벽화 .
『- 한민족 문명학
해수면 낮아져 생긴 동쪽 해안 간척지에 정착… 東에서 온 큰 활 가진 ‘동이’족이라 불려
결혼·화식·선진농경법 등 가르쳐… 고조선 상징 ‘아사달 문양’ 토기도 곳곳서 출토
중국 산동반도와 황하 및 회수 하류 유역 등 중국 동해안에는 약 5800년 전부터 2400년 전까지 고조선 이주민들과 그 후예들이 들어가 세운 다수의 자치적 소분국(小分國)들이 형성돼 고조선 문명권의 서남부 일대를 이루면서 발전하고 있었다. 신채호 선생은 이들을 고조선 ‘식민지’라고 표현했는데, 필자는 ‘分國’이라고 바꾼다.
고조선 사람들의 이 시기 이주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지역의 환경변화를 먼저 알 필요가 있다. 중국의 장광직 교수가 1986년경부터 아날학파의 방법론을 적용해 그린 산동반도와 중국 동해안의 지형적 환경 변화를 보면, 고조선 사람들의 산동반도와 중국 동해안에의 연속적 대폭 이주 정착의 배경을 알 수 있다.
최후의 빙기가 끝나고 지구온난화가 진행돼, 약 1만2000년 전의 지구 기후가 대략 오늘날처럼 된 후, 온난화가 최고로 진전된 약 7500년에는 해수면이 올라가서 산동반도는 대륙에서 분리된 ‘2개의 섬’이 돼 있었다. 후에 고조선 이주민이 이주해 들어가 거주한 박(박)·상구(商邱)·개봉(開封) 지역은 바닷물에 잠겨 있는 해수면 아래의 대륙붕이었다. 약 3300년 전에는 해수면이 다시 내려가서 산동의 2개 섬은 대륙과 연륙돼 산동반도가 됐다. 그 결과 이전 바닷물에 잠겼던 지대는 새로운 저지대 간척지가 됐다. 산동과 황하 하류 늪지대도 완전히 평원이 돼 오늘날과 같은 지형이 됐다. 중국 동해안에도 해수면이 내려가서 긴 줄의 간척지가 자연적으로 조성됐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산동반도와 황하 하류에서 회수유역 및 양자강 하류유역에 이르는 중국 동해안의 새로 조성된 직선 띠는 새로운 해안 ‘간척지’로서 토착인의 연고 점유권과 소유권이 없는 주인 없는 개척 가능한 새 땅이었다는 사실이다.
필자는 상대적 과잉인구에 시달리던 고(古)한반도 ‘밝’족과 ‘한’족, 그리고 한발을 만나 남하하던 ‘맥’족 일부와 고조선 건국 후 고조선 이주민들은 이 주인 없는 산동반도와 중국 동해안의 주인 없는 새 간척지를 농토로 개척하면서 고조선 이주민의 자치적 ‘마을공동체들’을 형성했고, 이들이 결합해 고조선 이주민의 자치적 소분국들을 형성했다고 본다.
산동반도 및 중국 동해안의 간척지 분포와 고조선 이주민의 정착지 및 분국의 분포는 거의 완전히 일치하고 있다. 그들은 이주할 때 ‘큰 활’을 갖고 들어왔으며, 토착인들은 이 특징을 보고 후에 고조선 이주민들은 ‘동이’(東夷: 동쪽에서 온 큰 활을 가진 사람들)족이라고 표현하게 된 것이라고 해석된다. 고조선 계통 이주민 중에서 가장 먼저 이 지역에 이주해 들어온 씨족은 고조선의 ‘태호’(太호)족이었다. 이들은 古한반도의 ‘밝’족의 한 씨족이었다.
‘태평어람’(太平御覽)과 ‘예기정의’(禮記正義)에 인용된 ‘제왕세기’(帝王世紀)에서는 ‘태호’는 동방(東方)의 ‘진’(震)에서 나왔고 밝은 태양을 상징으로 삼기 때문에 태호(太호)라 한다고 기록했다. 호(호)자는 좌변과 상단에 ‘白’(‘밝’의 뜻)자를 2개나 쓰고 하단에 ‘本’자를 붙여 그들이 ‘본래 밝족’임을 표시했다. 太(태)자는 맨 처음의 뜻이다. 중국 고문헌은 태호족을 ‘복희’(伏羲)씨 또는 ‘포희’(포犧)씨라고도 기록했는데, ‘伏’ ‘포’는 모두 ‘밝’의 한자 차음표기라고 필자는 해석한다. 또한 여기서 震(진)은 방향과 지역을 모두 가리키는데, 중국 고문헌이 쓰인 시기의 관용대로 古한반도 진국(震國, 辰國) 지역을 가리킨 것이다.
중국학자들은 태호족이 동이족의 선두로서 중국에 들어온 시기를 5800년 전~4800년 전으로 보고 있다. 그렇다면 고조선 건국 무렵에 고(古)한반도에서 밝족(고한반도 초기 신석기인 유형)의 한 씨족이 선진 농경문화를 갖고 산동반도 지역에 이주해 들어간 것으로 볼 수 있다. 태호족은 농경에 적합한 진(陳·지금의 하남성 회양현) 지역에 정착해 농경생활에 들어갔다.
고조선 건국과 고조선 문명 형성기에 이주한 태호족은 선진 고조선 문명을 고중국에 전수해 줬다. 필자의 설명보다 근대 중국 석학 부사년(傅斯年)의 ‘이하동서설’(夷夏東西說)에서 지적한 태호족이 당시 고중국에 전수한 다음의 선진문명 항목을 들면 더 설득력이 있을 것이다. 여기에는 태호족이 △결혼(가취·嫁娶)제도 △화식(火食) 방법 △태호족 신농(神農)씨는 보습과 가래를 만들고 농경(農耕)을 가르침 △태호족 포희씨는 새끼의 매듭에 의한 의사소통법(결승·結繩)과 그물 짜는 법을 만들어 가르침 △포희씨는 비파(거문고의 일종) 36줄을 만듦 △포희씨는 역(易)의 8괘(卦)를 만들어 만물의 이치를 알게 했고, 신농(神農)이 이를 제곱해 64괘(卦)를 만듦 등이 기록돼 있다.
▲ <그림 3> 고조선 두 번째 이주민 소호족의 산동반도에서 출토된 ‘아사달’ 문양의 토기. <그림 5> 양저문화 유적 출토 옥기에 새겨진 ‘아사달’ 문양과 소호족 상징인 ‘새’.
신농씨는 고대부터 중국인들이 염제(炎帝), 적제(赤帝) 등으로 높여 부르면서 사마천이 ‘사기’(史記) 삼황본기(三皇本紀)에서 3황의 하나로 넣었던 씨족이었다. 사마천은 신농씨가 “나무를 쪼개어 보습을 만들고 나무를 휘어서 보습자루를 만들어, 보습과 가래의 사용법을 만민에게 보여서 비로소 농경을 가르쳤다. 그래서 신농씨라 했다”고 기록했다. 즉 고대 중국에 농경을 전파한 부족을 고대 중국에서는 고조선(동이족) 신농씨로 보아온 것이다. 선진 농경뿐만 아니라 악기 ‘비파’와 주역 8괘, 그리고 현재도 중국인들이 토템으로 사용하는 ‘용’(龍)도 고조선의 ‘태호’족이 중국에 가져가 전파한 태호족의 토템이었다. 즉 태호족이 이주할 때 갖고 간 선진 고조선 문명의 전수가 고중국 문명의 기원의 하나가 된 것이었다.
태호족에 뒤이어 약 5000년 전~4000년 전에 산동반도의 간척지에 이주해 들어간 고조선 이주민은 ‘소호’(少호, 少昊)족이었다. 그들도 선진 농업경작과 태양숭배와 새 토템을 갖고 들어가서 산동반도의 곡부(曲阜)지방에 정착했다.
소호족의 산동반도 대문구(大文口)문화 유적 상층에서는 약 5000년 전~4400년 전의 고조선족임을 밝혀 ‘아사달 문양’을 새긴 고조선식 뾰족밑 팽이형 토기 술잔이 11개(파손품 포함)나 출토됐다.
태호족과 소호족의 이주 이후 연달아 고조선 이주민들이 산동 반도와 중국 동해안에 정착해 간척지를 새 농토로 개척하면서 고조선에서 간직해 온 농경생활을 시작했다. 그들은 정착지에 자치적 마을공동체를 만들었다가, 마을공동체들이 연합해 자치적 소분국들을 형성하고, 고조선어를 사용하면서 고조선 문화를 갖고 생활했다.
그 결과 산동반도와 중국 동해안의 이전 간척지대는 양자강 하류 남안까지 이주해 들어온 고조선 사람들과 그 후예들의 크고 작은 ‘분국들’의 생활 터전이 됐고 고조선 문명권의 일부가 됐다. 중국인들이 후에 관내의 동이(東夷)라고 부른 진(秦)나라 이전의 선진동이(先秦東夷)는 바로 고조선 이주민들이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산동(山東), 산서(山西), 하북(河北) 발해안, 하남(河南)성 동부, 강소(江蘇)성 북부, 안휘(安徽)성 동북각 지방의 이른바 동이족은 조선족(朝鮮族)이라고 보았으며, 기원전(BC) 1000~BC 600년경까지 고조선족이 매우 강성했음을 지적했다. 신채호 선생은 ‘조선상고문화사’에서 독립된 장으로, 서국을 고조선 이주민의 식민부락 가운데 하나인 소국으로 출발해 한 시기 주(周)와 어깨를 나란히 겨루면서 주나라에 매우 관대했던 고조선 식민지 국가였다가, 주의 선왕(宣王)의 공격을 받고 패망했다고 설명했다.
산동반도와 중국 동해안 지역 동이족의 기원이 고조선 이주민인가의 끊임없는 질문에 대해, 청동기 유물도 있지만, 여기서는 고조선 이주민들의 무덤인 ‘고인돌’로 증명해 보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운반불능인 고인돌 무덤이 이주민의 사실을 명료히 증명해주기 때문이다.
산동성 등주(登州)의 치박(淄博)에는 1930년대까지 대형 개석식 고인돌과 탁자식 고인돌이 남아 있었다. 산동반도와 회수 유역의 ‘동이’지역에는 이 밖에도 다수의 고인돌 무덤이 있었는데, 지금은 유적으로 보존돼 있는 것이 별로 없다.
▲ 중국 산동성 치박(淄博)에 남아 있는 탁자식 고인돌 사진.(캐나다 고고학자 하가 시메이즈, 1936년 촬영)
그러나 고조선식 고인돌의 중국 호칭인 석붕(石棚) 이름을 가진 지명은 아직도 다수 남아 있어서 고조선 이주민 공동체 분국들과 고인돌 무덤이 존재했던 사실을 증명해 주고 있다.
필자는 동이족의 하나인 우족(우族)이 고조선으로부터 청동기를 처음으로 고중국 지역에 가져와 전파했음을 이미 밝힌 바 있다. 양자강 하류 북안에 중국 고고학자들이 양저문화(良渚文化) 유적이라고 호칭하는 고대 유적이 있는데, 그 상층유적(BC 2300년경)은 ‘동이문화’ 유적이라고 해석되고 있다. 양저문화 상층유적 출토 옥기들 가운데 고조선의 상징인 ‘아사달’ 문양과 그 문양 위에 고조선 이주민 ‘소호’족의 상징인 ‘새’를 새긴 (그림 5)와 같은 옥기가 출토됐다.
또한 양자강 하류 절강성 일대에는 고조선 이주민 무덤인 고조선식 고인돌이 지금도 50여 기가 남아 있다. 이들 고인돌의 축성 연대는 청동기 시대인 BC 11세기~BC 400년경(중국 편년 상말 주초~춘추 말기)으로 편년되고 있다. 이것은 고조선 시대에 해당한다. 주목할 것은 중국 양자강 하류 남안의 고인돌들의 형태 및 축성 구조가 고조선·진국 지역(전라남도 지역) 고인돌들의 형태 및 축성 구조와 거의 동일하다는 사실이다.
산동반도 등에 이주한 고조선 사람들은 회수 유역부터 산동반도 이북 해안 지역에 걸쳐서 자치적 소분국을 세워 활동했다. 그들은 고조선 중앙정부의 통치를 받지 않았고, 또한 물론 고중국 계열 어느 소왕국의 통치도 받지 않았다. 그들은 이주할 때 가지고 간 고조선 문화 양식을 변용·발전시키면서 자치생활을 했다. 중국인 학자 장광직(張光直) 교수가 상(商)시대 중국에 대한 정밀한 연구 끝에 동이족의 분포 지역을 지도로 그린 것이 있는데, 동이족의 영역을 객관적으로 알아볼 수 있다.
산동반도와 중국 동해안의 고조선 이주민 분국들은 진시황이 BC 221년경 북으로는 만리장성을 수축해 고조선 기마부대와 고조선 이주민의 월경을 차단하고, 동으로는 ‘동이족’을 고중국인들과 섞여 살도록 강제이주 정책을 실시해 급속히 해체돼갔다. 그러나 고조선 이주민이 갖고 들어간 선진 고조선 문명이 그 후 고중국 문명의 기원과 형성에 끼친 영향과 도움은 실로 막대했다. 중국 상(商)나라도 고조선 이주민이 세운 나라였으며, 고중국 문명의 중핵인 상(商)문명도 바로 선행 고조선 문명을 고중국 지역에서 계승한 문명이었다.』
(출처;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191204010314120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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