력사를 찾아서
《만주와 한반도 12,000년 전~ 2,000년 전 년대기》 4.1 홍산문화(2) 본문
《만주와 한반도 12,000년 전~ 2,000년 전 년대기》 4.1 홍산문화(2)
대야발 2024. 2. 9. 11:40《만주와 한반도 12,000년 전~ 2,000년 전 년대기》
4.1 홍산문화(2)
2007년 12월 14일 경향신문 기사 〈코리안 루트를 찾아서](11)뉴허량의 옥기묘〉
『“옥기 쥔 巫人은 神과 소통한 왕”
1989년 가을. 뉴허량(우하량·牛河梁) 제2지점 1호 적석총을 발굴 중이던 조사단은 기이한 모습에 꿈을 꾸는 듯했다.
21호묘에서 무려 20점의 옥기가 쏟아진 것이다. 이것은 훙산문화(홍산문화·紅山文化) 무덤 한 곳에서 나온 가장 많은 옥기였다. 무덤에는 옥기로 도배하다시피한 성인 남성이 누워 있었다. 입을 활짝 벌린 채 반듯이 누워 있는 인골은 짐승 얼굴 모양의 옥패(玉牌), 옥거북이, 옥베개 등으로 잔뜩 치장했다.
-옥으로 도배한 인골-
뉴허량 제1지점 중심대묘에서 확인된 인골. 양손에 옥거북이를 쥐고 있는 것을 비롯, 7점의 옥기만 부장돼 있다. 일인독존의 무인(巫人)으로 추정된다. 뉴허량·선양/김문석기자
희한했다. 다른 부장품들은 하나도 보이지 않은 것이다. 선사시대 무덤에서 흔히 보이는 토기와 석기 같은 것들은 단 한 점도 없었다. 중국학계는 이런 기이한 장례 풍습을 두고 ‘유옥위장(唯玉爲葬)’, 즉 옥으로만 장례를 치렀다고 정리했다. 뉴허량 유적군에서 정식 발굴을 끝낸 적석총은 모두 4곳에 이른다. 탐사단이 서 있는 이곳 제2지점과, 3지점, 5지점, 16지점이다.
“뉴허량 유적군에서 발굴을 끝낸 묘장은 모두 61기인데, 그 가운데 부장묘(副葬墓)는 31기이다. 그런데 이 31기 중 옥기만 넣은 묘는 26기에 이른다.”(궈다순 랴오닝성 문물연구소 연구원)
부장묘의 83.9%가 ‘유옥위장’의 훙산문화 전통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서 있는 제2지점만 보죠. 26기의 석관묘가 묻힌 1호 적석총의 경우 옥기로만 장례를 지낸 것이 14기에 이릅니다. 부장품이 없는 묘가 11기이니 부장묘=옥기묘라는 등식이 성립하는 거죠.”(이형구 선문대 교수)
비단 뉴허량의 옥기묘뿐만 아니다. 이곳에서 200㎞ 동쪽으로 떨어진 후터우거우(胡頭溝·랴오닝성 후신) 유적과, 바이인창한(白音長漢·네이멍구 린시), 난타이쯔(南台子·네이멍구 커스커텅치)에서도 비슷한 양상의 옥기묘가 출현했다. 예컨대 후터우거우 적석총에서는 10점의 옥기가 출토되었고 토기는 없었다. 이 후터우거우 유적 훙산문화 문화층의 바로 위에서 한반도 및 발해 연안에서 전형적으로 보이는 비파형청동단검이 나왔다는 것은 이미 언급한 바 있다.
-양손에 꼭 쥔 옥거북이-
뉴허량 옥기묘의 모습을 다시 재현해보자. 탐사단이 서있는 제2지점에는 앞서 살펴본 1호 적석총 21호묘 말고도 4호묘에도 성인 남성이 묻혀 있었다. 역시 3점의 옥기가 부장돼 있었다. 말발굽형 베개 1점이 머리 위에 놓여 있었고, 가슴팍에는 옥룡이 있었다. 묘 주인은 뭔가 특별한 인물이었을 것이다.
제5지점과 16지점에서 확인된 인골과 옥기를 보면 굉장히 의미심장하다. 제5지점의 중심대묘에서는 노년 남성 1구의 인골과 7점의 옥기가 출토됐다. 양 귀에 옥벽(玉璧), 즉 둥근 옥이 양 귀 밑에 가지런히 놓여 있고, 가슴팍엔 구름형 옥장식이 놓여 있다. 또한 그 아래 말발굽형 옥기가 있으며, 오른팔엔 옥팔찌가 놓여 있다. 무엇보다 양손에 옥거북이가 쥐어져 있다는 게 재미있다. 조사단은 이 무덤의 주인공을 ‘무인(巫人·요즘의 무당과는 다른 차원이다)’이라고 추정했다.
뉴허량 유적군에서 가장 서쪽에 있는 제16지점의 중심대묘에도 성인 남성이 묻혀 있었다. 이 묘의 주인공도 5지점 중심대묘와 마찬가지로 신(神)과 소통할 권리를 독점한 무인(巫人)일 것 같다. 특히 이곳에서는 옥으로 만든 무인인형과 봉황이 특징적이다.
나중에 랴오닝성 박물관을 들른 기자는 잘 복원하여 전시해놓은 뉴허량 무덤들을 보며 흐르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이미 죽었는 데도 영생불멸의 상징인 옥으로 거북이까지 만들어 양손에 꼬옥 쥐고 있는 모습이라니 참…. 애처롭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재미있기도 해서…. 더군다나 묘의 주인공은 하늘과 인간을 연결해주는 무인이라지 않는가. 하기야 죽어서도 죽지 않으려는 사람의 욕심은 예나 지금이나 같은 것이려니….
-신과 소통하는 도구-
왜 옥인가. 훙산문화의 주인공들은 왜 그토록 옥에 집착했을까.
“갑골문자의 ‘예(禮)’자는 본디 제기를 뜻하는 ‘두(豆)’자 위에 두 개의 옥을 올려 놓은 것을 묘사한 것이다.(禮자 가운데 오른쪽 豊자를 보라.) 그것은 곧 신을 섬기는 일이었다.”
저명한 고증학자인 왕궈웨이(왕국유·王國維·1877~1927년)의 말이다. 옥이 범상치 않은 신물(神物)임을 잘 파악한 것이다.
뉴허량에서 확인된 다양한 옥기들. 봉황과 쌍가락지·구름형·짐승얼굴형 옥장신구와 옥기는 물론 하늘과 인간의 소통을 독점한 무인(巫人)을 상징한 옥기가 쏟아졌다. (위로부터)
예로부터 중국은 옥을 숭상하는 나라였다. ‘예기(禮記)’는 “자고로 군자는 반드시 패옥을 찬다”고 기록했다. 선사인들은 하늘 운행의 궤적에 있는 태양을 관찰하고 둥근 옥벽(玉璧)을 만들었다. 이것으로 하늘과 태양을 숭배했다. 또한 땅을 사각형으로 생각하고 옥종(玉琮·사각형 형태의 옥)을 만들어 땅에 제사를 지냈다. 중요한 것은 석기와 토기 같은 것들은 생활용품들이지만 옥기는 관념 형태의 창작물이었다는 점이다.
이들은 생명은 하늘이 부여하는 것이며, 신령한 동물과 산수, 토지 등은 서로 영물처럼 치환된다고 보았다. 그로 인해 사람들은 제기에 신비로운 문양과 부호, 상형문자 등을 깎아넣은 것이다. 씨족부락은 각종 동물 옥장식으로 제사에 쓰이는 신기(神器)와 그들이 숭배하는 토템을 만들었고, 씨족사회의 번성과 풍성한 수확을 바랐다. 훙산인들은 정신문화 범주에 속하는 옥을 무덤에 도배하는 장례 풍속으로 물질문화를 배척하고, 정신문화를 중시하는 사유관념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巫人과 옥과 하늘-
여기서 (뉴허량의 무덤에서 보이는 것 같은) 무인(巫人)이 등장한다. 한나라 때 자전인 ‘설문(說文)’이 ‘옥(玉)자’를 설명한 내용을 보자.
“영(靈)자는 밑의 무(巫)가 옥으로(가운데 입 口자 3개) 신과 소통한다(以玉通神)는 뜻이다.”
머우융캉(牟永抗)·우루쭤(吳汝祚) 등 중국학자들은 “무(巫)는 인간과 신의 왕래자”라고 해석했다. 인간의 대표이면서 신의 의지를 체현(體現)하는 사람, 바로 그 사람이 무인인 것이다. 여기서 옥은 무인이 신에게 헌납하는 예물이다.
“금은 변하지만 옥은 변하지 않죠. 그런 뜻에서 옥은 영생불멸과 영원한 사랑을 뜻합니다. 여인들이 왜 옥을 그리 귀하게 여겼겠어요.”(이형구 교수)
무인은 신과 소통을 통해 옥을 독점하고, 또 옥을 통해 스스로가 신적인 존재임을 만천하에 알린다. 결국 무인(巫人)과 하늘(神)과 옥(玉)은 삼위일체인 셈이다.
그런데 무인은 옥을 제작하는 기술을 독점함으로써 천지신에게 제사 지내는 특권을 농단하고 천지를 관통하는 능력을 보였으며, 하늘과 땅의 경지를 아는 지자(智者)로 우뚝 섰다. ‘옥으로 신에게 보인다(以玉示神)’는 옛말이 바로 그것이며, 그 주인공은 바로 무인이라는 말이다.
뉴허량 등 훙산문화 본거지에서 보이는 ‘옥 도배 무덤’을 다시 보자. 많은 적석총 가운데서도 우뚝 서 있는 중심대묘의 옥기는 수량과 질의 측면에서도 다른 무덤들과 엄청난 차이를 보인다. 앞서 기자는 옥거북이를 양손에 쥐고 있는 인골을 두고 “죽어서도 영원히 살려는 모습이 다소 애처롭다”고 비아냥댔는데, 그것은 아주 천박한 해석일지 모른다. 궈다순 등 중국 학자들의 해석은 사뭇 진지하다.
“고인은 신령스러운 거북이가 신과 통하는 권력임을 체현하고 있다. 고인이 묻힌 중심대묘는 중소형 무덤들의 호위를 받고 있으며, 거대한 방형 혹은 원형의 적석총으로 돼 있다. 옥거북이를 쥔 주인공인 일인독존(一人獨尊)의 위상을 나타내주고 있다.”
즉 이 중심대묘의 주인공은 신과 통하는 독점자로서 교주이면서, 왕(王)의 신분임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제정일치 시대의 단적인 모습이다.
-옥으로 덕을 견준다-
이것이 바로 중국고고학계의 태두 쑤빙치가 장고 끝에 “훙산문화 시대에 이미 고국(古國), 즉 원시국가 단계에 돌입했다”고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던 까닭이다. 그런데 훙산문화, 즉 발해문명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옥 문화는 문명의 단계에서도 의미 있는 획을 그었다.
보통 중국 상고사를 (구·신)석기-청동기-철기 등 3단계로 구분한다. 그런데 여기에 옥(玉)의 시대를 넣어 석기-옥기-청동기-철기 등 4단계로 바꿔야 한다는 주장이 이미 2000년 전부터 나왔다. 후한 때 원강이 지었다는 월절서(越絶書·춘추전국시대 월국의 흥망을 기록한 책)에 따르면…. 풍호자(風胡子)라는 사람이 초나라 왕에게 치국의 도를 이야기 하면서 옥기시대를 언급했다.
“헌원·신농·혁서의 시대인 돌을 병기로 삼았고(석기), 황제의 시대엔 옥(玉)으로 병기와 신주(神主)를 삼았다. 우임금 때는 청동기를, 그 이후엔 철기를 썼다.”
훙산인들은 ‘옥=인간·자연의 조화’ 관념을 지녔는데, 이 전통은 후대 유학자들의 심금을 사로잡았다.
특히 공자는 ‘군자는 옥으로 덕을 견준다(以玉比德)’(‘예기’ 빙의·聘義편 )고 강조했다. 공자는 재질과 광택, 구조, 소리 등 옥의 자연적인 특성을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의 도덕적 가치에 부여한 것이다.
“옥(玉)이 온유한 것은 인(仁)과 같고, 치밀한 것은 지(知)와 같고, 곧아서 남을 해치지 않은 것은 의(義)이며, 정연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은 예(禮)를 닮았다. 소리가 청아하고 여운이 끝이지 않는 것은 악(樂)이고, 옥의 티와 좋은 마음을 감출 수 없으니 충(忠)이다. ‘시경’에 이르기를 군자는 온유하고 마치 옥과 같이 생겼으니 그래서 군자가 귀한 것이다.”(예기)
적석총과 제단과 여신묘. 그리고 찬란한 옥기 시대. 이형구 교수가 한마디 했다.
“옥기의 출현·제작은 엄청난 의미가 있어요. 옥기를 독점하고 제작하는 과정에서 신분계급이 생기고, 전문화·분업화가 이뤄지고…. 하늘과 소통하는 독점자가 고국을 통치하는 이른바 제정일치 사회의 개막을 뜻합니다. 그걸 동이족이 창조해낸 겁니다.”
그런데 이쯤해서 소름 돋는 한 가지. 뉴허량 등 훙산문화에서 출현한 곰(熊) 모양의 옥과 곰의 뼈다. 과연 이 수수께끼는 무엇인가. 이기환 선임기자』
(출처;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712141811071&code=210100)
2007년 12월 21일 경향신문 기사 〈[코리안루트를 찾아서](12)훙산 곰의 정체〉
『단군신화까지 훔쳐가려는 중국
“이 옥기에는 참 많은 뜻이 담겨 있어요.”
지난 7월30일 랴오닝성 박물관. 이른바 ‘랴오허(遼河) 문명’ 특별전을 지켜보던 이형구 선문대 교수가 기자를 붙든다. 뉴허량(牛河梁) 16지점 3호 무덤에서 확인된 짐승머리형 옥기를 가리킨 것이다. 짐승머리 형태로 3개의 구멍이 뚫린 희한한 모양이다.
뉴허량 16지점에서 확인된 곰형 옥기. 곰 두마리가 양쪽 끝에 원조(圓雕) 기법으로 조각됐다. 훙산문화 옥기예술의 정수라는 평이다. 뉴허량·선양/김문석기자
“이기자가 보기엔 무슨 동물 같아요?”
“쌍웅수삼공기(雙熊首三孔器)라고 했으니 응당 두마리의 곰과 3개의 구멍이 뚫린 옥기라는 뜻이겠죠.”
유물 설명에 나온 대로 대답할 수밖에.
“그동안엔 돼지머리로 보아 저수삼공기(猪首三孔器)라 했거든. 그런데 최근들어 해석이 바뀐거지. 돼지에서 곰으로….”
곰의 정체는?
뉴허량에서 출토된 진흙으로 만든 곰 발 조소상.
자세히 보았다. 매우 사실적인 기법이다. 짧지만 둥근 귀와 눈, 모가 났으면서도 둥근 이마, 뾰족하면서도 둥근 입, 얇고 벌어진 아랫입술…. 그러고보니 영락없는 곰의 모습이다. 기자는 순간 심상치 않은 냄새를 맡았다. 곰(熊)이라. 훙산문화(홍산문화·紅山文化·BC 4500~BC 3000년)의 본거지에서 곰이 출현했다는 것이다. 곰은 바로 단군신화의 주인공이 아닌가.
“이뿐이 아니라, 발해문명의 영역에서 곰 관련 옥기와 곰뼈가 잇달아 쏟아졌어요. 그러니 중국학계가 비상한 관심을 쏟을 수밖에….”
원래 곰은 중국학계의 관심 밖이었다. ‘용의 자손’이라는 믿음 때문에 용(하늘과 물을 상징)이 추앙되었고, 또한 농경생활과 관계가 깊은 돼지가 의미 있는 동물로 여겨졌다. 따라서 훙산문화 영역에서 확인된 옥룡들의 원형은 돼지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게 그럴듯한 학설이었다.
사실 옥으로 만든 용 조각품을 본다면 그 형태를 대략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C자형과 결형(한쪽이 트인 고리모양의 패옥)이다. C자형 가운데는 네이멍구 싼싱타라(三星他拉)에서 출토된 크기 26㎝ 짜리 옥룡이 가장 유명하다. 이 C자형 옥룡이 정말 용이 맞는지 그조차 의심스럽다는 주장도 나오고, 머리와 등 뒤의 장식이 돼지가 아니라 사슴뿔이라는 설도 난무하는 등 복잡하다.
그러나 요즘엔 이 C자형 옥룡의 원형은 돼지 혹은 사슴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어가고, ‘결형 옥’은 그 원형이 곰(熊)이라는 설이 지배적인 상황이다. 시리즈를 계속 읽어온 독자 여러분이라면 간파할 수 있으리라. 즉 이 결형 옥이 훙산문화의 전신인 차하이(사해·査海)-싱룽와(흥륭와·興隆窪·BC 6000년전)에서 확인된 옥결을 계승하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최근 한반도 강원도 고성 문암리에서도 차하이-싱룽와와 같은 시대(BC 6000년전)의 옥결이 출토되었음을….
여하튼 중국학계는 뉴허량에서 나온 결형 옥의 원형을 예전에는 돼지로 보았지만, 요즘엔 곰으로 보고 있다. 뉴허량 적석총에서 잇달아 출토된 곰뼈가 이를 뒷받침해준다. 즉, 뉴허량 2지점 4호총 적석총에서는 완벽한 형태의 곰아래턱 뼈가 나왔다. 이뿐이 아니다. 후술하겠지만 뉴허량 여신묘에서 나온 진흙으로 만든 동물 가운데는 두 개체의 짐승류가 확인됐다. 발굴단은 처음엔 이 동물이 으레 돼지이겠거니 했다. 출토 사실을 보도한 기사를 보면 알 수 있다.
“돼지 주둥이는 두 개의 타원형 콧구멍이 있고~ 상하 턱 사이에는 입술 밖으로 긴 이가 노출돼있고, 앞니 역시 있었다.”
하지만 자세히 봤다면 돼지가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 두 마리의 동물은 비교적 긴 아래턱과 길면서 구부러진 이빨을 갖고 있었는데, 이는 곰의 특성에 가까웠다.”(궈다순의 회고)
특히나 여신묘의 주실(主室)에서 확인된 동물의 양발은 영락없는 곰의 발이었다. 네 발톱이 이렇게 노출된 동물은 곰이 유일하다는 것이다. 결국 뉴허량 여신묘에서 확인된 두 마리 짐승은 모두 곰이었던 것이다. 뉴허량 적석총에서 확인된 쌍웅수삼공기와 곰뼈, 그리고 바로 곁 여신묘에서 확인된 진흙으로 만든 곰 형상….
곰을 숭배한 훙산인
이것은 무엇을 말해주는고 하니 훙산인들이 곰으로 제사를 지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곰 숭배 전통은 훙산문화를 이은 샤오허옌 문화(小河沿文化·BC 3000~BC 2500년) 유적에서도 확인된다. 네이멍구 우한치(敖漢旗) 바이스랑 잉쯔(白斯郞 營子) 유적에서 발견된 ‘곰머리 채도(熊首彩陶)’가 대표적이다.
애초엔 ‘개머리 장식’이라고 보고되었지만, 넓은 이마와 뾰족한 주둥이, 짧은 두 귀, 그리고 머리에 비해 굉장히 넓은 목 부분은 전형적인 곰의 머리이다. 또 하나의 예는 츠펑현에서 수집된 곰머리형 채도단지인데, 몸체엔 곰머리와 툭 튀어나온 주둥이 형상이 붙어있다. 이 모두 곰의 특징이며, 곰 모양의 제기(熊尊)라 일컬어진다.
“이렇듯 옥으로 조각한 웅룡(熊龍)은 훙산문화 옥기 가운데 가장 많은데 한 20여건이라고 보고됐어요. 웅룡은 말굽형 베개, 구름형 옥패, 방원형 옥벽(玉璧) 등과 함께 훙산문화 옥기의 4대 유형 중 하나로 꼽혀요.”(이형구 교수)
웅룡은 뉴허량뿐 아니라 츠펑 우한치, 시라무륜(西拉木倫) 강 이북의 바린여우치(巴林右旗)와 바린쭤치(巴林左旗), 허베이성(河北省)의 웨이창(圍場)현 등 폭넓은 지역에서 확인되고 있다. 특히 웅룡은 죽은 자의 가슴팍에 주로 놓여 있었는데(뉴허량 제2지점 1호총에서 보듯), 가슴팍에는 가장 등급이 높은 옥기가 놓인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이것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일종의 신물(神物)이었던 것이다. 이 옥으로 만든 웅룡은 후대에까지 폭넓게 퍼졌는데, 허베이성 양위안(陽原)현 장자량(姜家梁)과 허난성 상춘링(上村嶺)의 괵국(서주 후기의 소국) 묘지에서도 웅룡 옥조각이 나온다. 또한 량저우(良渚)문화 옥기에서 보이는 신인(神人)의 발톱도 곰의 발톱으로 밝혀졌다.
훙산인의 후예가 분명한 상나라에도 훙산문화 옥조각 웅룡의 전통은 당연히 이어졌다. 상나라 유적인 안양(安陽) 인쉬(殷墟)에서도 훙산문화와 유사한 결형 옥이 확인된다는 게 중국학계의 해석이다. 이처럼 뉴허량 등지에서 확인되는 심상치 않은 곰의 흔적을 어떻게 볼 수 있을까. 궈다순의 해석을 보자.
“훙산인이 숭배한 동물신은 여러 신(神) 가운데 으뜸인 주신(主神)이었을 것이고, 훙산인은 바로 곰을 숭배한 족속이었다.”
곰이 황제라고?
이렇듯 뜻밖에 출현하는 곰의 모습에 관심을 기울인 것은 리스(李實)였다. 그는 훙산문화 영역에서 확인되는 곰의 흔적을 보고, “훙산인들은 곰을 숭배했고, (중국인의 조상인) 황제(黃帝)는 중국 고대사에 기록된 ‘유웅씨(有熊氏)’”라고 주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중국학계는 리스의 주장에 주목하여 훙산문화의 곰을 황제와 본격적으로 연결시켰다.
“만리장성 이북, 즉 오랑캐의 소굴이라고 치부하던 발해연안에서 곰의 흔적이 쏟아지니 중국학계는 어쩔 수 없었어요. 견강부회할 수밖에….”(이교수)
‘황제가 곰(熊)족’이라는 기록은 사실 궁색하기 이를 때 없다. 사마천의 ‘사기’에는 “황제를 유웅씨라 불렀다(又號有熊氏)”는 기록이 있고, 서진(西晋·AD 265~316년) 때 학자 황보밀이 쓴 제왕세기(帝王世紀)에는 “황제는 유웅이다(黃帝爲有熊)”라고 표현돼 있을 뿐이다. 또 하나의 관련 기록은 사기 오제본기에 나왔다.
“황제가 염제와의 싸움에 곰(熊), 큰곰, 비·휴(범과 비슷한 동물. 비는 수컷, 휴는 암컷), 추( ·큰 살쾡이), 호랑이(虎) 등 사나운 짐승들을 훈련시켜 염제와 싸웠다.”
중국학자들은 황제가 이런 짐승들을 토템으로 삼고 있는 족속들을 이끌었다고 해석하고 있다. 그러면서 “이런 기록으로 볼 때 북방민족과 수렵민족의 색채가 짙다”(궈다순)고까지 표현한다. 더 나아가 저명한 고고학자 쑤빙치(蘇秉琦)는 “황제시대의 활동중심은 훙산문화의 시공과 상응한다”고까지 했다. 이 말은 ‘황제가 훙산인의 왕이었다’는 소리다.
단군신화의 원형
동이의 본향 차하이에서 확인된 옥결.
하지만 억지춘향도 유분수지. 곰 숭배는 중국보다는 동북아시아 종족이 갖고 있는 보편적인 신앙이다. 그 중의 대표격인 나라가 바로 고조선이었다. 중국 역사서에서 황제와 곰의 기록은 빈약하기 이를 때 없지만 고조선의 건국신화를 기록한 삼국유사를 보라.
“환인의 서자 환웅이 무리 3000을 이끌고 태백산 신단수 밑에 내려왔다. 풍백과 우사, 운사를 거느리고~ 모든 인간의 360여가지 일을 주관하여 세상을 다스리고 교화했다. 이때 범과 곰이 한마리씩 같이 살고 있었는데, 환웅에게 빌어 사람이 되기를 원했다. ~환웅이 쑥 한 줌과 마늘 20개를 주면서 ‘너희는 이걸 먹고 백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곧 사람이 될 것’이라 했다. 곰과 범은 삼칠일간(21일간) 조심했으나 곰은 여자의 몸으로 변했지만, 범은 조심을 잘못해서 사람으로 변하지 못했다. ~(사람이 된) 웅녀(熊女)가~ 단수(壇樹) 밑에서 임신을 빌었더니 환웅이 잠시 거짓 변하여 혼인해서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바로 단군왕검이다.”
차하이와 싱룽와, 그리고 한반도 고성 문암리에서 확인된 옥결이 훙산시대엔 이렇게 곰형 옥으로 발전했다.
이 얼마나 완벽한 스토리 구조인가. 신화학자인 양민종 부산대 교수의 말처럼 “몇 자 안되는 단편의 기록(중국측)과, 기·승·전·결이 완벽하고 제국의 흥망성쇠가 담겨있는 단군신화”를 비교할 수 있을까. 그런데도 ‘황제=곰 숭배=훙산문화의 주인공’이라 단정하려는 중국학계의 몸부림이 얼마나 헛된 것인지를 보여준다.
기자의 상상력은 한도 끝도 없다. 그렇다면 인근 적석총에서 곰뼈와 옥웅·옥룡이 나왔고, 진흙으로 만든 곰형상이 확인된 뉴허량의 여신묘 정체는 무엇일까. 그리고 또…. 여신묘에서 확인된 여신상은 과연 누구일까. 혹 단군신화에 나오는 웅녀(熊女)의 원형은 아닐까. 이기환 선임기자』
(출처;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712211701321&code=210000)
2007년 12월 28일 경향신문 기사 〈[코리안루트를 찾아서](13)훙산인의 어머니〉
『“이제 우리 여신(女神)님 보러 가야지.”
7월30일. 뉴허량(우하량·牛河梁) 적석총 및 제단(제2지점)을 탐사하던 이형구 선문대 교수가 농을 건다. 여신묘(뉴허량 제1지점)를 ‘친견’할 시간이다. 유적 바로 곁을 지나는 베이징~차오양 간 공도(公道)를 무단횡단해서 북쪽 산길로 향했다. 여신묘로 향하는 길은 몸단장이 한창이다. 길가엔 도로용 석재들이 쌓여 있고, 인부들이 그 석재를 깔아 길을 만들고 있다.
#동방의 비너스
“왜, 중국에는 선사시대 인물조각상이 없을까.”
동방의 여신상이 출토된 뉴허량 제1지점 여신묘. 여신상과 함께 지(之)자문 빗살무늬 토기와 곰(熊)뼈 등이 출토되어 우리 민족과 강한 친연성을 감지할 수 있다. 뉴허량/김문석기자
30년 전까지만 해도 중국학자들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중국학계가 곤혹스럽게 생각하는 의문점이었다. 서양에서는 찬란한 인물 조각 예술이 꽃을 피웠는데, 왜 중국에서는 비너스와 같은 조각품이 보이지 않을까. 그렇다면 중국의 인체 조각 예술은 모두 외래 요소만을 담은 것일까.
그런데 1979년 중국학계가 오매불망 기다리던 ‘기화(奇貨)’가 발견됐다. 다링허(대릉하·大凌河) 유역인 랴오닝성 카줘(喀左)현 둥산쭈이(동산취·東山嘴)에서 드디어 인체조각상 조각편을 발견한 것이다. 유적의 남쪽은 원형, 북쪽은 방형이었으며 양 날개의 형태로 조성되었다.
이곳에서 함께 확인된 유물들은 지(之)자형 빗살무늬토기 채도통형관(밑이 없는 토기)과 삼족소배(三足小杯·세발 달린 작은 잔) 등이었다. 이 유물들은 한결같이 생활용기가 아니었다.
결정적인 것은 원형 석축지에서 나온 인물조각상과 임신부 모습의 소조상이다.
두 점의 ‘도소잉부상(陶塑孕婦像)’은 머리부분과 왼쪽 어깨가 이미 없어진 채 발견됐지만, 다리는 남아있었고, 몸의 형태는 확실했다. 하나는 잔존 높이가 7.9㎝였고 몸은 긴 편이었으며, 나머지 한 점은 잔존 높이가 5.8㎝였고 좀 뚱뚱했다.
발굴직후 속살을 드러낸 여신묘 조사현장.
이 임신부 인형 말고도 다른 인체 조각상이 확인되었는데, 인체의 상부와 대퇴부 등의 남아 있는 높이는 18㎝, 두께는 22㎝였다. 남은 조각들을 끼워 맞추니 실제 사람의 3분의 1 정도 되었다. 잉부상은 나체였으며, 비록 목 부분은 없어졌지만 당대 조각예술의 높은 수준을 웅변해주었다. 소조 수법이라든지 손과 발 등 세부의 처리가 간단하지만 형체의 동작이 매우 자연스럽고 인체 비례가 완벽하다.
“굉장히 육감적이죠. 소아시아에서 출토된 소형 임신부상은 여성적인 특징만 강조하고 다른 부분은 간략하게 추상화했는데, 둥산쭈이 출토 잉부(孕婦)상은 사실성이 강한 작품입니다.”(이형구 교수)
뉴허량에서 가까운 둥산쭈이 제사유적에서 나온 임신한 여인의 조각상. 동방의 비너스라 일컬어진다.
학자들은 “중국의 비너스(維納斯)”라고 치켜세웠다. 중국학계는 “훙산시대는 문화교류가 빈번했고, 사회가 격렬한 변혁기였다”면서 “잉부상은 모계사회 출현의 단적인 예이며, 5000년 전 원시문명의 증거”라고 해석했다. 둥산쭈이 유적연대의 탄소연대 측정 결과는 지금부터 5485±110년이었다.
4년 뒤인 1983년 7월, 내로라하는 중국학자들이 차오양(朝陽)에 속속 모습을 드러낸다. 둥산쭈이 조사 성과에 대한 모종의 결론을 내리기 위함이었다.
“학자들이 내린 결론은 둥산쭈이가 중국 최초의 제사유적이라는 것이었어요. 이곳에서 불에 탄 흙(홍소토)의 잔존덩어리가 확인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신(神)이 살았던 곳이라는 추정도 함께 했고….”
#동방의 여신
그러나 이것은 서막에 불과했다. 1년3개월 뒤인 1984년 10월31일 오전. 둥산쭈이에서 멀지 않은 뉴허량 제1지점에서 5500~5000년 전 여신의 자태가 홀연히 나타난 것이다. 당시 발굴단의 일원이었던 궈다순(郭大順) 랴오닝성 문물연구소 연구원은 비디오 카메라를 돌려보듯 당시의 벅찬 감격을 풀어헤친다.
“뉴허량 유적(제1지점) 발굴 현장은 폭풍전야 같았다. 발굴단의 꽃삽소리만 사각사각 났다. 모두 발굴이 이어질수록 ‘뭔가 큰 것이 걸리겠구나’하는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긴장감에 휩싸여 입을 떼는 이들이 없었다. 그런데….”
주실(主室)의 서측, 바로 그곳에서 중국고고학사에 빛나는 발견이 일어난 것이다.
뉴허량에서 확인된 동방의 여신. 혹 단군신화에 나오는 웅녀의 원형은 아닐까.
“한 덩어리의 진흙덩어리가 떨어졌는데, 거기서 사람 머리의 윤곽이 보이기 시작했다. 흙을 살살 지워보니 마치 살아 움직이는 것 같은 이마와 눈이 노출되었다.”
마침내 여신이 현현(顯現)한 것이다. 난리가 났다. 일순 사람들이 쏟아져오고, 촬영기사가 미친 듯 그 발굴 현장을 찍어대기 시작했다. 5000년 이상 긴 잠에 빠져 있던 여신이 마침내 부끄러운 듯 기지개를 켠 것이다. 머리상의 잔존 크기는 높이 22.5㎝, 폭(귀에서 귀) 23.5㎝, 미간의 넓이 3㎝, 코 길이 4.5㎝, 귀의 길이 7.5㎝, 입 4.5㎝ 였다.
“영락없는 여인의 자태였어요. 왼쪽 귀를 뚫은 흔적이 있고, 입술엔 붉은 칠(朱漆)이 남아있고, 가슴과 궁둥이, 팔, 다리 등을 조합해보니….”(이형구 교수)
귀가 작고 섬세하며 얼굴 표면이 둥근데다 자르르 윤기가 흐르고 머리 위에 테를 두른 모습하고는…. 조각기법 또한 빼어났다. 가장 어렵다는 원조(圓雕)기법을 사용했다. 아마도 당대 최고의 장인이 작품을 만들었을 것이다.
제작은 크게 4단계를 거쳤다. 먼저 나무로 골격을 세우고 풀 같은 식물로 둘러싸맸다. 둘째, 재료는 깨끗하고 치밀하며 점성이 크고 붉은 진흙을 사용했으며, 셋째 조형단계는 처음엔 거친 흙을 골조 위에 붙인 뒤 광택을 냈다. 그림을 그리고 상감하는 작업은 돌출 부위를 강조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눈을 청록색 보석으로 박아놓았다는 게 특이했다. 문제는 여신의 인종을 확정하는 것. 학계는 여러가지 특징으로 미루어 ‘몽골 인종’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얼굴이 방원(方圓)형의 형태로 납작하고 광대뼈가 나왔고, 눈은 비스듬히 섰고, 콧잔등은 낮고 짧고, 콧날과 콧날개는 원두형(圓頭型)이고…. 전형적인 몽골 인종의 특징을 갖추고 있었어요.”(이형구 교수)
여기서 반드시 알아두어야 할 오해 한 가지. 몽골 인종에 관한 이야기다. 고대 몽골 인종이라 함은 지금의 몽골인을 지칭하는 게 아니다. 넓은 의미의 ‘동양인’을 뜻한다는 것이다. 인종학상으로 몽골 인종(Mongoloid)란 말은 마르코폴로가 1271~1295년 사이 원나라에서 체류하고 돌아간 뒤 구술한 ‘동방견문록’에서 처음 나왔다. 마르코폴로는 그때 황인종, 즉 동양의 모든 인종을 몽골 인종이라 했다. 지금의 몽골인을 콕 찍어 지칭한 건 절대 아니라는 뜻이다.
그런데 뉴허량 여신은 한 분이 아니었다. 여신의 머리상이 발견되기 전까지도 67점의 진흙조각편이 쏟아져 나왔다. 조사단은 당시 대략 3가지 종류로 분류할 수 있었다. 먼저 주실의 중앙에서 확인된 코의 잔해와 큰 귀 등을 검토한 결과 이 여신의 크기는 사람의 3배에 달했다. 또한 서측실의 손목과 다리를 분석한 결과 사람의 2배 크기였으며, 주실에서 발견된 어깨, 유방, 왼쪽 손등을 검토하니 등신대의 형태였다.
그런 가운데 바로 사람의 크기와 비슷한 여신의 머리상이 출토되면서 등신대의 여신이 어느 정도 조립된 것이다. 결국 이 여신묘에는 ‘사람 크기의 3배, 2배, 등신대’라는 최소한 세 사람의 여신을 모셨다는 얘기가 된다. 그러나 ‘최소한’ 3명이란 말을 쓸 수밖에 없다. 흩어진 잔해로 봐서는 더 많은 여신들을 모셨을 수 있다. 이것은 여신도 최소한 3개 등급, 아니 그 이상으로도 나눌 수 있다는 얘기다.
중앙부의 여신(사람 크기 3배)은 주신(主神)이며, 다른 여신들(사람 크기의 2배, 등신대, 그리고 나머지)은 그 주신을 모시는 군신(群神)의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웅녀의 환생?
여신묘에서는 여신상 말고도 제사유적임을 나타내는 다른 유구와 유물들이 쏟아졌다. 유적의 총 규모는 총 4만㎡에 이른다. 특히 여신묘 주변에 있는 저장용 구덩이에서는 지(之)자문 빗살무늬토기 통형관(밑 없는 토기)과 소구관(小口罐·입이 작은 토기), 주발 등 다양한 토기와 사슴·양뼈 등 많은 동물뼈가 나왔다.
또한 다른 구덩이에서는 100점 이상의 통형관이 쏟아졌다. 이뿐이 아니다. 여신묘의 벽체 파편에는 회(回)자 무늬 도안이 그려져 있는데, 이것은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벽화 가운데 하나로 평가된다. 또한 대형 향로뚜껑을 비롯한 각종 제사용기들도 심상치 않은 여신묘의 위상을 전해준다.
또 하나, 이미 언급했듯(경향신문 12월22일자) 진흙으로 만든 동물상도 잇달아 확인되었는데, 중국학계가 면밀하게 관찰한 결과 주실과 곰(熊)이라고 단정했다.
원래는 용머리(龍頭)로 판단됐지만, 납작하고 둥근형의 입, 두 개의 타원형 콧구멍, 발가락 4개 등 종합적으로 볼 때 곰이 틀림없다는 것이다. 이는 곧 웅녀의 환생 아닌가. 과연 5000년 이상 잠자던 여신의 부활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인근에 집중된 적석총과 제단, 그리고 이곳 여신묘가 주는 함축적인 의미는 무엇인가. 우리 민족과는 무슨 상관이 있을까. 이기환 선임기자』
(출처;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712281725021&code=210000)
2008년 01월 04일 경향신문 기사 〈[코리안루트를 찾아서] (14)훙산인의 성지〉
『우리의 孝와 닮은 꼴…훙산인의 여신 숭배
뉴허량(우하량·牛河梁) 여신묘가 왜 그렇게 중요한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중국 학계가 ‘여신은 훙산인(홍산인·紅山人)의 조상이며, 뉴허량은 훙산인의 신전이자 성지’라고 해석하기 때문이다. 중국 학계는 아예 훙산인을 중국인의 ‘공동’ 조상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훙산인은 동이족의 조상이라는 사실은 중국 학계도 인정하는 바다. 그러니 뉴허량은 ‘동이족의 신전이자 성지’라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 입장에서도 비상한 곳일 수밖에 없다.
#한반도에도 여신이…
하나하나 따져보자. 우선 여신상 같은 소조상은 지금의 만주 일대와 한반도에서도 심심치 않게 나타난다. 함북 청진시 농포동과 웅기군 서포항 유적에서도 소조인물상이 나왔다.
“특히 1956년 출토된 농포동 인물상은 허리를 잘록하게 좁힌 다음 그 아래는 다시 퍼지게 만드는 등 ‘여신’의 인상을 지울 수 없어요. 둥산쭈이(東山嘴)의 임산부상을 연상시킵니다. 서포항 것은 가슴을 희화적으로 표현한 게 매우 인상적이고….”(이형구 선문대 교수)
랴오둥 반도 궈자춘(郭家村)에서 나온 소조상의 치켜진 눈과 광대뼈는 뉴허량 여신상 및 츠펑 시수이취안(西水泉) 유적에서 출토된 소조 여인상과 일맥상통한다. 옌볜 자치주 샤오잉쯔춘(小營子村)에서 출토된 뼈로 만든 인물상도 치켜올라간 눈매와 광대뼈 등 뉴허량 여신상과 비교할 수 있겠다. 과연 5500~5000년 전 여신의 존재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숭배의 대상은?
뉴허량의 여신묘에서 출토된 조각상과 자료를 토대로 복원한 ‘여신상’.
콕 집어 단정을 내릴 수 없다. 뉴허량의 여신 조각상을 보자. 놀라울 정도로 사실적이다. 이것은 인간을 신화한 것이다. 한마디로 인격화한 신(神)이라 할 수 있다. 중국 학계는 이 사실적인 인물 조상이 조상 숭배의 우상이라고 해석했다. 또 하나 뉴허량 여신묘에서는 사람 크기의 3배, 2배, 등신대 등 ‘최소한’ 세 명의 여신상이 있었던 것으로 정리됐다. 여신의 지위가 최소한 3등급은 되었다는 것을 시사해준다.
“중국 학계는 ‘사람 크기 3배의 여신’이 주신(主神)이며, 이 주신을 다른 여신들이 호위하고 있는 형태라고 봐요. 이것은 조상 숭배의 대상도 굉장히 고차원적인 단계로 넘어갔음을 알려주는 대목이죠.”
하지만 조상 숭배만이냐.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뉴허량 유적군은 이른바 제단·신전·무덤 등 이른바 단(壇)·묘(廟)·총(塚) 등이 3위 일체로 구성됐다. 제단과 무덤이 한꺼번에 조성된 적석총(제2지점)에서뿐 아니라 그곳에서 900m 떨어진 여신묘에서도 제사를 지냈다는 뜻이다.
“‘적석총+제단(2지점)’에서는 그곳에 묻힌 씨족의 조상에게 주로 참배하고, 여신묘에서는 요즘의 시제 같은 큰 제사를 지낸 것으로 해석할 수 있어요. 여신묘에서는 여러 씨족의 공동 조상 한 분을 모셨을 수 있죠.”(이교수)
이교수는 “제단과 여신묘를 보면 훙산인들의 조상 숭배가 얼마나 지극한지를 알 수 있는데, 이것은 효(孝)사상의 원형이며 우리 민족의 특성이라 할 수 있다”고 말한다. 또 하나 추측할 수 있는 것은 지모신에 대한 신앙이다. 제사유적인 둥산쭈이에서 나온 잉부(孕婦)상과 뉴허량 여신 모두 여성임을 잊지 말자.
“고대사회에서는 여성이 생육과 대지를 상징합니다. 지모신에게 제사를 지냄으로써 풍년과 다산(농사를 지을 노동력을 상징)을 기원했어요. 이것은 농경 및 정착생활로 접어든 신석기인들로서는 그 무엇보다 중요한 신앙의 대상이었을 겁니다.”
여기서 우리에게 핵심적인 요소는 뉴허량 여신묘와 적석총에서 나온 곰뼈와 곰형 옥기 등의 존재이다. 누누이 강조하지만 단군신화에 등장하는 웅녀(熊女)를 상징하는 것이 아닐까. 웅녀는 바로 훙산인들이 모셨던 지모신의 원형일 가능성이 짙다는 점이다.
#하늘과 땅의 통로를 이은 이는?
또 하나 간과할 수 없는 대목은 여신묘에서 조상과 하늘을 함께 모셨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장광즈(張光直)의 말을 들어보자.
“훗날 상나라(商·훙산인들의 후예) 때는 왕이 큰 일을 행할 때 무인(巫人)이 하늘과 교통하면서 복점을 쳐서 조상의 하명을 받았다.”
이것은 조상숭배와 하늘숭배가 서로 깊은 연관을 맺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대목이다. 쑤빙치(蘇秉琦)도 “뉴허량 유적군의 단·묘·총의 결합으로 볼 때 고대의 제왕들이 거행했던 교(郊:야외에서 지내는 제사)·료(燎·하늘신에게 제사), 그리고 체(조상신에게 제사)가 함께 이뤄졌을 것”이라고 보았다.
여기서 또 하나 여신묘에 숨겨진 비밀을 들춰보면…. 바로 여신묘가 상당히 좁다는 것이다. 궈다순(郭大順)은 “여신묘의 총 면적이 100㎡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 좁디좁은 면적에 몇 명의 여신들이 모셔져 있었고, 곰이빨 같은 것이 상징하는 동물신들이 포함돼 있다. 좁은 면적에 비해 너무도 풍부하고 방대한 유물의 진용을 갖추고 있었다.”
엄청난 함의를 품고 있다. 이 좁고 폐쇄적인 공간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극히 일부의 특권층이었을 것이고, 심지어는 단 한사람일 수도 있지 않을까.
“여신묘에서 혼자 들어가 제사를 지낸 이는 하늘과 인간을 이어주는 제정일치 사회의 왕(王)일 수도 있지요.”(이교수)
옛날 황제(黃帝)의 뒤를 이은 전욱이 신하 중여(重黎)를 시켜 ‘하늘과 땅의 통로를 끊어버렸다(絶地天通)’는 기록이 있다. 그전까지는 누구나 하늘과의 통로로 왕래했는데, 황제 때 치우가 통로를 통해 황제에게 도전했다는 것. 그러자 황제의 후계자 전욱이 신과 인간의 영역을 확실하게 구분지었다는 것이다. 중국 학계는 바로 이런 고사(故事)가 뉴허량 여신묘와 훙산문화 영역에서 쏟아지는 다량의 옥기와 부합되는 기록으로 보고 있다. 그렇다면 끊어진 하늘과 땅의 통로는 누가 잇는가. 그것은 바로 천지를 농단한 전욱과 같은 왕의 고유권한이라는 뜻이다.
#종묘의 원형
훙산인의 성지인 뉴허량 여신묘의 상상도.1m가량 땅을 파 조성한 반지하식 구조로 신석기시대의 취락구조와 비슷하다.
뉴허량 여신묘는 지상 건축물이 아니라 90㎝~1m가량 땅을 파고 조성한 반지하식 건축구조로 돼 있다. 이것은 당대(신석기시대) 취락구조와 기본적으로 같다는 뜻이다. 인간이 살았던 주거지와 사당(신묘)의 구조가 같다는 것은 인간이 살았던 곳이, 바로 ‘신이 살았던 곳(神居之所)’이라는 뜻이다.
“이 역시 신의 인격화라 할까. 여신의 사실성을 극명하게 보여준 것이죠.”
그러나 주거지의 기본 구조는 같을지언정 건축물의 배치구조는 사뭇 다르다는 점은 간과해서는 안된다. 주실이 있고 측실이 있고 전후실이 있는 등 나름대로는 주부(主副) 관계가 뚜렷하고, 좌우 대칭, 전후 호응의 치밀한 구조를 갖추고 있다.
“중국 학계가 바로 이것을 후대 종묘(宗廟)의 원형이라 판단하는 겁니다. 일반 주거지와는 다른 후대의 전당(殿堂)과 종묘 배치의 물꼬를 튼 것으로 본거지.”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자전(字典)인 ‘이아(爾雅)’의 ‘석궁(釋宮)’편은 “신묘(사당)는 동서방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고 해놓았는데, 바로 뉴허량의 여신묘 구조와 부합된다. 종묘(宗廟)는 정권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부계 씨족사회에서 계급사회로 넘어가는 단계에서 시작되었으리라.
#훙산인의 성도(聖都)
기자는 여신묘의 비밀을 한 꺼풀씩 벗기면 벗길수록 점점 빠져들었다. 이형구 교수가 한가지 수수께끼를 냈다.
“왜, 이 뉴허량 인근에서는 훙산인들이 살았던 주거지가 보이지 않는 것일까.”
듣고보니 그랬다.
“무덤과 제단, 신전 등 단·묘·총 3위 일체로 갖춰졌는데 뉴허량 유적군을 기준으로 100만㎡ 이내에서 어떤 주거지 유적도 확인하지 못했거든.”
중국 학계는 고민 끝에 해답을 풀었다. 즉 뉴허량은 명실상부한 종묘의 원형이며, 주거지에서 멀리 떨어진 제사의 중심지였다는 것. 이는 한 씨족과 부락 단위를 넘어선 단계라는 것. 즉 이 뉴허량은 훙산문화 공동체가 더불어 사용했으며, 그들이 함께 숭배한 선조들의 성지였다는 것이다.
“훙산문화 공동체가 신성시했던 곳이니 그 주변에 주거지를 세우지 못했겠지. 생각해보면 아주 상식적인 답이죠.”
장광즈는 “상나라 때는 종묘가 중심이 된 성도(聖都)와 사람들이 살았던 속도(俗都)의 구별이 있었다”고 해석했다. “훙산문화 시대에 이미 고국(古國)의 단계에 접어들었다”는 게 쑤빙치의 견해이고 보면, 뉴허량은 곧 훙산인들의 성도(聖都)였던 것이다.
결국 쑤빙치를 중심으로 한 중국 학계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뉴허량 여신은 5500년 전 훙산인들이 진짜 사람을 토대로 만든 신상이지, 후세 사람들이 상상해서 창조한 신이 아니다. 그리고 ‘그 여인’은 훙산인의 여자 조상이며, 중화민족의 공동 조상이다.”(중국문물보·1989년 5월12일자)
그러나 쑤빙치 스스로도 인정했듯 발해문명을 꽃피운 훙산문화는 동이의 문화이다. 기자가 만난 쉬쯔펑(徐子峰) 츠펑대 교수의 말이 이를 뒷받침해준다.
“황허문명은 농업 중심의 왕권국가였고, 랴오허 문명(발해문명)은 복합적인 신권국가였던 것 같다. 차하이·싱룽와 문화(BC 6000년 전)에서 훙산문화(BC 4500~BC 3000년)에 이르기까지…. 용형 돌무더기와 옥결이 출현하고(차하이·싱룽와) 곰과 용, 새를 형상화한 옥문화가 꽃피고, 신전과 제단, 적석총 등 제사유적이 출현하고(훙산문화)…. 신권 중심의 문화였다.”
쉬쯔펑은 이어 “황허문명과 랴오허 문명은 훗날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치우와 황제의 싸움은 바로 양대 문명의 충돌이자 습합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단정했다. 이형구 교수의 한 마디.
“발해문명의 창시자인 동이의 족적은 엄청납니다. 이 훙산문화는 사방으로 퍼져 발해문명을 꽃피웠고, 남으로는 중원의 황허문명과 만나 드디어 새로운 역사를 창조합니다. 그것이 훗날 상나라가 되는 거고….” 이기환 선임기자』
(출처;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801041721411&code=2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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