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와 한반도 12,000년 전~ 2,000년 전 년대기》
3.8 의주 미송리 유적(義州 美松里 遺蹟); 8000년 전~2600년 전(BC 6000년~ BC 8~7세기)
『평안북도 의주군 의주읍 미송리에 있는 석회암지대의 동굴에서 나온 선사시대 유적으로 석회암 광산에서 암석을 채취하는 과정 중 동굴이 확인됐고 동굴 안에 사람 뼈를 비롯한 토기, 석기 등이 발견되어, 1959년에 과학원 고고학 및 민속학연구소에서 발굴하였다.
동굴 내부의 퇴적층은 위로부터 표토층과 진흙층(두께 1.0~1.3m)이 있고 그 아래 검은 부식토층의 선사시대 유물층이 있다. 그 위에 쌓여 있는 지층에서는 근대시기의 그릇 조각, 짐승 뼈 등이 흩어져 나왔다. 선사시대 문화층은 2개로 나누어 아래 문화층과 위 문화층으로 부르고 있는데 아래, 위 문화층사이에 15~20㎝의 간층(間層)을 두고 있다.
아래 문화층에서는 빗살무늬토기(櫛文土器)를 비롯한 신석기시대 유물들이 나왔고 위 문화층에서는 청동기시대 늦은 시기에 해당하는 유물들이 나왔다. 신석기문화층에서 나온 유물의 종류 및 양은 많지 않아서 동굴 안팎에서 질그릇 조각과 뼈 부스러기 및 약간의 석기가 나왔다. 빗살무늬토기 조각들은 유적의 연대를 가늠하는 자료로, 그리고 서포항문화로 대표되는 동북지방과의 연관성을 증거하는 자료로 활용되었다.
발굴보고에서 제시된 토기조각은 모두 10점인데 이 가운데 8점은 가장 흔한 생선뼈무늬(魚骨文) 계통이다. 2점은 이른바 꼬불무늬인데(북한에서는 이들을 가리켜 짧은이음구불무늬라고 부른다), 폭은 넓고 사이는 좁게 연속적인 꼬불무늬를 베풀었다. 전체적인 복원이 불가능한 파편임에도 불구하고 한반도에서 최초로 보고된 꼬불무늬 때문에 한국 신석기문화 연구에서 큰 의미를 갖게 되었다.
보고자들은 내몽고 자치구 林西縣의 몇 유적에서 꼬불무늬가 나온 예를 들어 그곳과 미송리 유적의 연관성을 추정하였으며, 그 연대는 신석기 늦은 시기에 해당된다고 보았다. 그러나 1990년대에 들어와 중국 동북지방에서 신석기시대 유적 발굴이 매우 활발히 진행되었고, 특히 요하를 중심으로 하여 꼬불무늬토기들이 대량으로 출토되었다.
이들의 방사성탄소연대 값이 B.C. 6000년을 넘어서서 중국 동북지방에서도 중원지방과 공시성(共時性)을 갖는 신석기문화가 성립되고 있었음을 널리 알리게 되었다. 북한에서는 단동 대련지구를 중심으로 요동지방의 後窪, 上馬石, 小珠山, 新樂 유적 등에서 출토되는 꼬불무늬와 미송리의 것이 같다고 보아 동일한 문화권을 설정하였다. 이들 문화 유형을 시아오쮸산-미송리유형이라고 한다.
미송리 유적의 신석기시대는 新樂 유적의 방사성탄소연대를 참고하여 B.C. 6000년 기에 해당된다고 편년 되었다. 이것은 신석기시대 상한을 B.C. 5000년으로 보던 종래의 주장에서 1000년을 올린 것이며, 북한의 시기구분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에 속하는 것이다. 그리고 1980년대 중반까지 신석기 후기(B.C. 3000년 기 후반기)에 해당된다고 여겨지던 미송리 유적이 한국에서 가장 이른 신석기 유적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결국 미송리 유적에 대한 관점을 바꾸면서 한국 신석기문화의 개시연대가 상향조정되고 3개의 문화 유형이 설정되는 대대적인 개편이 있게 된 것이다.
위 문화층은 압록강 송화강 유역의 청동기시대 말기의 유적과 유사하며, 먼저 토기에서 특징 있는 것들이 보인다. 토기는 17점 나왔는데 그 가운데 표주박의 위아래를 잘라놓은 듯한 생김새를 갖고 있는 단지들을 이후 미송리형토기(美松里型土器)로 부르게 되었다. 단지 몸체에 고리형 가로 손잡이나 젖꼭지형 손잡이를 대칭으로 1쌍씩 달고 그 사이에는 입술 모양의 장식을 붙인 것도 있다. 가로줄 무늬의 차이 등에 따라 생김새가 다양하다. 미송리형토기는 이후 한반도 북부를 비롯해 요동지역에 까지 널리 분포하는 것으로 밝혀져 고조선 시기를 대표하는 유물이 되었다.
그밖에 청동도끼(銅斧), 돌화살촉(石鏃), 가락바퀴(紡錘車), 뼈바늘, 송곳, 대롱옥(管玉) 등이 나왔으며, 사람 뼈도 여러 명 분이 나왔다. 청동도끼는 날이 넓게 퍼진 부채날도끼(扇形銅斧)이다. 부채날도끼는 비파형동검(琵琶形銅劍) 문화에서 보이는 특징있는 유물 가운데 하나로 강상(崗上) 무덤에서 나온 도끼 거푸집에 새겨진 것과 유사하다. 유적의 연대는 B.C. 8~7세기, 고조선시기에 들어간다.』
(출처; 한국고고학사전(2001),
http://portal.nrich.go.kr/kor/archeologyUsrView.do?menuIdx=792&idx=10662)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선사시대 한민족은 어디서 살고 있었나?/신석기시대, 〈미송리 유적은 왜 중요한가!〉 (2018.05.01.)
『미송리 유적이 위치한 곳은 압록강 유역의 의주시이고 동굴유적이다. 이 유적의 시공간적 위치가 중요한 것은 몇 가지가 있다.
그림 1. 압록강 유역의 유적(1: 신암리, 2: 쌍학리, 3: 반궁리, 4: 도봉리, 5: 용연리, 미송리)
그림 2. 미송리 유적 하층 출토품(3,4번이 지자문토기로 볼 수 있다)
1. 언제 인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압록강 유역에서 가장 이른 유적이다.
먼 소리? 사실 현재 북한의 선사시대 유적은 몇 개가 알려져 있지 않다. 몇 개 되지 않은 것도 1950~60년대 발굴한 유적이 대부분이어서 연대 측정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물론 보고서를 낼 당시에는 나름의 연대추정치가 있다. 미송리 유적의 하층 기원전 6000년 기로 북한에서는 보았다. 근거는 중국의 유적과 비교해서다. 물론 중국에도 그 연대에 대한 개념이 시원치 않을 때이니 당연히 맞지 않다. 그리고 최근에 중국의 연대는 아주 많이 변했다.
잘 모른다면서 어떻게 빠르다는 것은 아는 것인가?
왜냐하면 之자문 토기가 출토되는데, 이건 요동지역에서는 소주산 하층문화(그림 3), 후와 하층 유적등 이른 시기에 확인되는 문양시문방법이기 때문이다. 압록강 유적의 다른 유적에서는 출토되지 않는다. 즉 이 유적보다 늦다. 그리고 이미 신암리 유적과 같은 압록강 유역의 유적은 필자가 정리하여서 대부분 연대는 가늠할 수 있다.
그림 3. 소주산 하층문화의 토기(요동반도 남부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토기 중에 하나이다.)
2. 압록강 유역은 요동지역과 한반도를 연결하는 길목이다.
동북아시아 전체의 역사적 흐름을 판단하는 곳이 몇 군데가 있는데, 요동지역과의 연관성은 압록강 유역이다. 아무리 그 이남에서 요동과 관련성 유물이 나온다 해도 이곳이 해결되지 못하면 소용없다. 동북아시아 전체의 역사적 흐름을 꿸 수 있는 곳이다.
그래서 이 유적의 연대는 한반도 압록강 유역의 문화적 범위 및 시간적 연대흐름을 알 수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그럼 미송리 유적 하층의 연대를 어떻게 하면 되지 않느냐! 고 질문할 수 있다. 미송리 유적의 하층은 신석기시대 유물이 10점 보고되었다(전부 토기편이다, 그림 2). 이 점이 너무나 아쉽다. 근거가 많이 희박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지자문토기가 나오는 것은 엄연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임으로, 너무 한정적이며 절대적인 기준은 아니지만, 모두가 수긍할 수 있는 비교가 중요하다.
현재 이 부분이 필자의 연구 중에는 빠져 있고, 이 부분을 해결하면, 환단고기 역주본에서 말하는 한국 신석기문화가 요서지역과 관련이 있는지 없는지, 홍산문화가 한반도와 관련이 있는 지의 단초가 될 수 있다.』
(출처; https://eastsearoad.tistory.com/164?category=749380)
3.9 라선특별시 굴포리 서포항유적(羅先 西浦項遺蹟); 8000년 전~청동기시대(BC 6000년~청동기시대)
『나선특별시 굴포리 서포항동에 위치한다. 유적은 서포항동 마을 동북쪽 해발 5∼7m에 걸치는 얕은 산비탈에 수 만㎡에 걸쳐 펼쳐져 있다. 유적 언저리는 조산만이 감싸고 앞에는 석호가 발달해 있으며 뒤로는 산을 등지고 있어 신석기시대의 살림살이에 알맞은 곳이다. 유적은 1960∼64년 사이에 발굴되었다. 구석기시대의 2개 문화층(이때는 굴포리서포항유적이라고 한다), 신석기시대의 5개 문화층, 청동기시대의 2개 문화층을 합하여 모두 9개 문화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신석기시대 1기층에서 나온 9호 주거지는 평면형태는 말각장방형이며 크기 12×6m, 깊이 1m로 매우 큰 편이다. 바닥은 굴껍데기를 깔고 강자갈과 흙을 섞어 다진 다음, 불을 피워 구웠다. 화덕자리는 5개가 있는데 양쪽 끝의 2개는 강돌을 둘러 만든 것이며 가운데 3개는 돌을 깔아놓은 것이다. 유물은 괭이, 마제석촉, 긁개, 그물추, 숫돌 등 다양하다. 뼈도구는 사슴뿔로 만든 창끝과 작살, 삿바늘, 찔개살, 송곳 등과 치레걸이가 있다. 토기는 모두 입술 가까이에 찍은 무늬를 돌린 것이다. 2기층에서는 3·17·19·23호, 4기의 주거지가 확인되었다. 주거지는 대개 원형이며 원추형의 고깔지붕으로 복원된다(3호). 움의 깊이는 0.6∼0.7m이며 기둥자리들이 있고 계단식으로 된 출입문이 있다. 석기는 1기층과 같은 종류이며 수량이 많다. 뼈로 만든 치레걸이나 조각품은 양이 많지 않은 한국 신석기시대의 예술품으로서 가치가 크다. 2기층의 토기는 완형만 20여 개체가 되는데 주로 심발형토기이나 입술이 바라진 그릇, 목단지, 작은 컵 등도 있다.
3기층에서는 8·12·13·20·26·30호 등 9개의 주거지가 드러났다. 주거지는 방형으로 바뀌며 크기가 작아져 한 변이 3∼4m 정도이며 바닥처리법, 기둥구멍, 화덕자리 등은 이전과 같다. 석기는 새로이 삽, 갈돌, 갈판, 창끝, 자귀, 끌 등 간석기류가 더해지며 흑요석 석기도 새로 출현한다. 토기는 그릇 종류가 다양해져 항아리, 단지, 보시기, 컵, 목단지 등 여러 형태가 만들어졌다. 새김무늬와 덧무늬 및 곡선무늬인 타래무늬가 등장한다. 대개 작은 그릇에는 무늬가 없다. 가락바퀴도 처음 나타나는데 원추형과 주판알 모양의 2가지가 있다. 그 밖에 뼈로 만든 예술품과 치레걸이가 있다.
4기층에서는 11·15·18·21·22호, 5기의 주거지가 확인되었다. 석기 가운데 곰배괭이가 나와 주목을 끄는데 이는 3기층의 삽과 함께 신석기 중기 이후 서포항에서 농사를 지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 뼈도구는 이전과 같으며 조각품이나 치레걸이는 매우 다양하다. 토기는 여전히 새김무늬가 주류이나 아래 문화기에 비해 무늬 없는 그릇들이 늘어나며 번개무늬그릇[雷文土器]이 등장하는 점이 주목된다. 이 무늬는 청천강 이북의 서북지방과 동북지방에 걸쳐 신석기시대 늦은 시기에 나타나기 때문에 늦은 시기의 지표유물로 보고 있다.
5기층에서는 7·16호 2기의 주거지가 나왔다. 아래 문화기에서 보이던 석기들과 함께 대패날이 나온다. 뼈도구에는 바늘이 들어있는 뼈바늘통과 함께 뿔괭이 등이 새로 나오는 종류이다. 토기무늬에는 덧무늬의 비중이 크나 무문토기의 양보다는 적다. 신석기시대 말기로 가면서 무늬 없는 토기의 비중이 늘어나고 있다. 무늬가 적어지는 대신 토기의 겉면을 반질반질하게 가는 마연수법이 늘어나 마침내 간토기가 출현하는 것으로 풀이하는 것이 북한의 관점이다.
서포항유적의 연대는 1기층을 기원전 5000년으로 잡아 한반도에서 가장 이른 신석기를 보여준다는 것이 북한의 전통적인 관점이었으나 의주 미송리 동굴유적의 연대를 상향조정하면서 동시에 재편되어 기원전 6000년으로 편년되었으며 1·2기층은 신석기 전기, 3기층은 신석기 중기, 4·5기층은 신석기 후기로 보고 있다.
서포항유적의 연대를 주변에 있는 러시아 연해주 및 아무르의 유적, 한카호 주변의 유적들과 대비하여 새로이 편년하는 움직임도 최근에 대두되고 있다. 이에 따르면 서포항 신석기문화는 가장 이른 1기가 기원전 4000년대 전반의 보이스만(Boisman) 5기, 2기부터는 모두 신석기시대 후기로 추정되어, 북한의 편년과는 매우 달라지고 있다.(신숙정)』
(출처; 한국고고학 전문사전(신석기시대편),
http://portal.nrich.go.kr/kor/archeologyUsrView.do?menuIdx=795&idx=887)
▲①농포동 여인상(함경북도 농포동) 높이 5.6cm. ②사람 얼굴 치레거리(함경북도 선봉군 굴포리). ③사람 얼굴(함경북도 선봉군 굴포리). ④서포항 여인상(함경북도 서포항) 높이 7.7cm. ⑤신암리 여인상(울산시 울주군 서생면 신암리) 높이 3.6cm. ⑥일본 조몬 흙인형. ⑦조가비 치레거리(부산 동삼동). ⑧중국 우하량 여인상(대릉하 우하량) 높이 22.5cm.ⓒ 김찬곤
굴포리 서포항 유적 출토 뼈피리
북한준국보. 청동기시대. 길이17.2cm/지름1.4cm
『조류의 다리뼈를 잘라서 만든 피리로, 현재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최고(最古)의 악기이다.
세장한 원통형으로, 가운데가 완전히 관통되어 있고 동체면에 한 줄로 일정한 간격을 두고 13개의 구멍이 뚫려져 있다.
구멍 사이의 간격은 대체로 1cm 내외다. 양끝의 한쪽은 제대로 남아 있고, 다른 한쪽은 좀 파손된 상태로 출토되었다.
함경북도 라선직할시(과거에는 웅기군, 선봉군으로 불렸음) 굴포리 서포항동에서 1961년 발굴되었다.
서포항유적은 1960부터 1964년까지 5차에 걸쳐 실시된 발굴조사에서
구석기시대의 2개 문화층과 신석기시대의 5개 문화층, 그리고 청동기시대의 2개의 문화층 등 시기를 달리하는 9개의 문화층이 확인되었다.
뼈피리는 1호 무덤에서 북쪽으로 3m지점의 청동기시대 제1기층에서 출토되었다. 대체로 기원전 2000년 기 후반으로 편년된다.
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북녘의 문화유산-평양에서 온 국보들』
두만강 유역에서 발견된 뼈 피리[위]와 『악학궤범(樂學軌範)』의 젓대 삽도[아래]함경북도 선봉군 굴포리 서포항 초기 청동시대 유적에서 출토된 새의 다리뼈로 만든 피리. 길이 18cm. 13개의 소릿구멍이 나 있어 피리의 형태를 닮았는데, 조선시대의 『악학궤범』에 보이는 젓대[대금(大琴)]의 소릿구멍의 개수와 일치하여 매우 흥미롭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동방의 예악 (한국 고대문화의 비밀, 2012. 12. 27., 이형구)
3.10 양양 오산리유적; 8000년 전~3500년 전(BC 6000년~1510년)
『강원도 양양군 손양면에 있는 석기시대 신석기의 석기와 토기조각이 출토된 집터. 시도기념물.
1977년 봄에 이곳의 흙을 파다가 호수를 매몰, 농지로 전용하기 위한 작업 중 다량의 석기·토기편이 출토됨으로써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 뒤 1980년까지 서울대학교 고고인류학과 조사팀이 모두 6차에 걸친 지표 조사를 실시했고, 1981년부터 1985년까지 서울대학교 고고인류학과에서 본격적인 발굴 조사를 실시하여 모두 3권의 발굴보고서가 출판되었다.
유적지는 동해안에서 내륙 쪽으로 200m 정도 떨어진 쌍호라고 불리는 자연 호숫가의 사구(砂丘) 위에 형성되어 있다. 이 사구는 쌍호의 북동 모서리 부분의 제방이기도 하다. 유적의 범위는 약 6,000㎡로 추정되는데, 이제까지 600㎡를 발굴하였다.
현재의 지표면으로부터 생토면까지의 깊이는 약 4.5m로, 모두 6개의 자연 층위가 나타났다. Ⅰ층은 청동기시대의 적갈색 무문토기·점토대토기·우각형손잡이, Ⅱ층은 첨저형 빗살무늬토기, Ⅲ층은 평저형 유문·무문양토기, Ⅳ층은 유물무포함층, Ⅴ층은 평저형 토기·융기선문토기, Ⅵ층은 유물무포함층이었다. 그런데 유적의 극히 일부에만 있는 Ⅰ층의 청동기시대층을 제외한 나머지는(Ⅳ층과 Ⅵ층은 유물무포함층) 신석기시대에 해당한다.
청동기시대인 Ⅰ층은 암황갈색 점토층으로 두께는 약 40㎝이다. 이 층은 전체 유적 중 극히 일부 지역에만 국한되어 있는데, 유기물이 많이 섞여 있다. 적갈색 무문토기, 점토대토기 및 우각형손잡이가 출토되었다. 이들과 함께 채집된 목탄시료를 방사성탄소 연대측정법으로 측정한 결과 서기전 2070∼1510년(수륜보정)의 연대가 나왔다.
신석기시대 상층인 Ⅱ층은 암갈색 사질층으로 두께는 20∼65㎝이다. Ⅰ층이 남아 있지 않은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Ⅱ층이 표토로 노출되어 있다. 이런 관계로 후세에 교란된 곳이 많다. 여기서는 서해안 지역 신석기시대의 특징적인 토기 형태인 첨저형(尖底形)이 출토된다. 토기 표면에는 구연부 및 기복부에 시문한 것이 많은데, 양 부위에 서로 다른 문양요소로 시문한 것과 같은 문양으로 시문한 것이 있다.
전자의 구연부에는 평행밀집사단선문·사격자문·조대문(組帶文) 등으로 시문하고 그 밑의 기복부에는 어골문으로 시문한 것이 많다. 후자는 구연부에서 기복부까지 어골문으로 시문한 것이 주체를 이룬다. 태토(胎土)에는 수적으로는 적으나, 석면(石綿)을 혼입한 것도 있다. 반출 석기 중에는 납작한 강자갈의 양단을 쪼아내어 만든 어망추가 있다. 이렇듯 토기·석기의 여러 특징에는 서해안과 공통점이 있다.
신석기시대 중층인 Ⅲ층은 암갈색 사질층으로 두께는 약 30㎝이다. Ⅱ층과는 두께 약 5㎝의 흑색 사질의 간층(間層)을 사이에 두고 그 아래에 있다. 토기의 기형은 예외 없이 평저형인데, 저부에는 나뭇잎 모양이 찍혀 있는 것이 많다. 이들 토기에는 유문양토기와 전혀 문양이 새겨져 있지 않은 무문양토기의 두 종류가 있으나 후자가 수적으로 많다. 유문양토기편 중에는 동부지역 토기류와 유사한 것이 있으며, 이러한 유문양토기와 함께 점토제 안면상(顔面像) 한 개가 채집되었다.
신석기시대 하층인 Ⅴ층은 다시 7개의 소층(小層)으로 세분된다. 여기서는 6기의 주거지가 확인되었다. 지름 6m 정도의 원형 주거지 안에는 70×70㎝ 크기의 사각형 노지(爐址)가 한두 개씩 있고, 다수의 평저형토기 및 소량의 융기선문토기, 그리고 돌로 만든 생활 도구류가 출토되었다.
토기의 기형은 모두 평형을 기본으로 한다. 좁은 저부에 비해 몸체 부분이 넓은 발형토기(鉢形土器)가 대부분이며, 옹형(甕形) 또는 호형(壺形)의 토기도 있다. 시문은 구연부위에 국한하였다. 문양의 시문수법은 세 가지로 구분된다. 압날문(押捺文)의 경우 점문(點文)이, 음각문(陰刻文)의 경우 종위평행단선문(縱位平行短線文)이, 압날문과 음각문이 혼합된 경우 이들 두 문양 요소의 결합 형태가 각각 주체를 이룬다. 토기의 표면은 마연에 의한 조정으로 광택이 난다. 석기로는 결합식조침(結合式釣針)·톱·사각형석도·흑요석인기(刃器) 등이 출토되었다. 특히, 어업 관련 도구들이 다수 출토된 점으로 보아 어업에 커다란 비중을 둔 생활을 영위했음을 알 수 있다.
Ⅴ층의 각 소층에서 채집한 목탄시료 7개를 방사성탄소 연대측정법으로 측정한 결과 서기전 6000∼5000년 사이로 나와 이제껏 알려진 신석기시대 유적 중 가장 오랜 연대를 보인다. 한편, 이곳에서 출토된 흑요석기를 형광 Ⅹ선 분석 결과 그 원석(原石)의 산지가 백두산으로 밝혀져 그 곳과의 문화적 관련성을 시사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이와 같은 층서관계·출토유물·방사성연대 측정결과 등을 통해 오산리 신석기하층(Ⅴ층)은 한국에서 비교적 이른 시기에 속하는 신석기 문화 단계임이 밝혀졌으며, 동한 평저형 토기문화가 서한 첨저형 토기문화에 선행했음이 확인되었다. 또한 지리적으로 서포항유적과 남해안의 신석기시대 문화를 잇는 중간지대에 위치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나라 신석기문화의 기원 해명 및 주변지역과의 문화적 상관관계를 파악하는 데에도 유력한 단서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집필 (1996년) 임효재|강성봉』
양양 오산리 유적 출토 얼굴 모양 토기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14년 10월 15일 국민일보기사 〈'동북아 最古' 7000년 前 팥 흔적 발견.. 신석기 시대 농사지었을 가능성 시사〉
『동북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7000년 전의 팥 흔적이 국내에서 발견됐다.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는 "강원도 양양군 오산리 출토 토기 압흔(壓痕·눌린 흔적) 조사에서 신석기 시대의 팥 흔적이 발견됐다"며 "지금까지 한국, 중국, 일본에서 팥을 재배한 시기로는 5000년 전이 가장 이른 것으로 추정됐는데, 이번 조사 결과로 이보다 2000년 더 이른 시기에 팥이 재배됐을 가능성이 확인됐다"고 14일 밝혔다.
발견된 팥 압흔은 2점이며 팥 압흔이 있는 토기 표면의 탄화유기물을 미국 베타연구소에 보내 연대 측정한 결과 7314∼7189년 전으로 나왔다. 팥 압흔의 크기는 각각 2.2㎜, 2.8㎜ 정도로 현재의 팥(4∼8㎜)보다 작다.
연구소는 또 강원도 양양군 손양면 송전리에서 발견된 점토 덩어리에서 신석기 중기에 해당하는 곤충의 압흔을 확인했다. 이 곤충은 농업 해충으로 알려진 노린재목에 속하는 것으로 선사시대 유물에서 발견된 것은 처음이다. 송전리 출토 토기에서는 다량의 조, 기장, 들깨 압흔도 발견됐다. 이는 신석기 중기에 와서 조, 기장 등의 잡곡과 들깨까지 직접 재배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조미순 연구사는 "지금까지는 신석기는 채집사회였으며 농경은 청동기에 시작된 것으로 추정됐다"며 "신석기 유물에서 기장이나 조, 들깨 등의 흔적이 다량 발견됨에 따라 신석기 시대에도 경작이나 농경이 있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게 됐다"고 의미를 설명했다. 김남중 기자』
(출처; http://v.media.daum.net/v/20141015025004217)
김찬곤은 《내 마음대로 쓰는 한국미술사》에서 양양 오산리유적의 덧무늬토기에 새겨진 삼각형 모양이 양양 앞바다의 구름을 그린 것으로 보았다.
▲ 덧무늬토기1(양양 오산리, 27cm), 덧무늬토기2(양양 오산리, 26.1cm), 백자 철화포도문호(국보 제107호. 18세기 초. 높이 53.8cm. 입 지름 19.4cm. 밑 지름 19.1cm) ⓒ 오산리선사유적박물관·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양양 오산리선사유적박물관에 전시하고 있는 그릇 가운데 눈에 띄는 항아리 두 점이 있다. 나는 두 항아리를 보고 깜짝 놀랐다. 이 항아리 모양과 같은 그릇은 다른 신석기 유적에서는 볼 수 없고, 삼국·통일신라·고려 시대를 거쳐 조선에 와서야 비로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세계 신석기시대 그릇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아주 똑같지는 않지만 그 기본 모양은 조선 항아리와 같다. 7200년이 지나서야 볼 수 있는 그릇을 신석기시대 오산리에서 빚은 것이다. 더구나 덧무늬토기 그릇 무늬는 오늘날 디자인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을 정도로 아주 현대적이다.
위 세 항아리 모양은 여성의 몸을 닮았다. 특히 세 번째 백자 철화포도문 항아리(국보 제107호)는 여성의 배꼽부터 시작해 골반과 다리까지, 그것의 형상화라 할 수 있다. 내가 '남성의 눈'으로 그릇을 보는 것이 아니라 원래 그릇은 여성, 여신(女神), 비구름·비·물(만물생성의 기원), 만병(滿甁 찰만·항아리병, 마찬가지로 만물생성의 기원), 어머니, 들판 같은 상징성을 기본 베이스로 한다.
신석기시대 그릇을 빚었던 장인이 여자였는지 남자였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릇이 지금의 냉장고처럼 생활필수품이었던 만큼 편리성이 아주 중요한데, 그 편리성의 발전 속도가 아주 더딘 것 또한 사실이다.
그릇에 손잡이를 다는 것이나 물그릇에 귀때나 부리를 붙이는 것, 이런 것이 수백에서 수천 년에 걸쳐 이루어진다. 이런 것을 생각해 보면 당시 그릇을 빚었던 장인은 그릇을 늘 쓰는 여자였다기보다는 바깥일을 주로 했던 남자였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
오산리는 바다에서 200미터 남짓 떨어진 곳이다. 그렇다면 틀림없이 성난 파도와 물결을 표현했을 것이라는 확신까지 들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아래 그릇은 아프리카, 유럽, 아시아, 아메리카 신석기인이 빚었던 그릇이다. 모두 다 삼각형 무늬가 있다. 과연 이 삼각형은 무엇을 뜻할까.
신석기인은 이 삼각형을 무슨 뜻으로 새겼을까. 아직 세계 고고학계에서는 이것을 풀지 못한 것 같다. 세계 여러 나라의 박물관 설명글을 읽어 보면 거의 다 '기하학적·비유적·추상적인 삼각형'이라 할 뿐이다. 한마디로 '알 수 없다'는 말이다. 물론 우리나라 사학계에서도 〈사진 3-6〉 같은 삼각형 무늬를 '기하학적 추상무늬' 또는 삼각집선문(三角集線文)이라 말하고 있다.
▲ 세계 신석기인의 구름무늬 삼각형 1. 나이지리아 신석기 항아리 2. 이집트 신석기 항아리(기원전 3800년, 높이 16cm) 3. 스페인 발렌시아 물그릇(높이 12.4cm, 발렌시아선사시대박물관) 4. 영국 비커(높이 13.8cm, 대영박물관) 5. 러시아 얌나야(Yamnaya) 물병. 6. 초기 아시리아, 시리아 샤가르 바자르 신석기 그릇(기원전 1900-1700, 높이 22.8cm, 대영박물관) 7. 중국 양사오 물병(기원전 5000년) 8. 과테말라 마야 토기 복제품. 9. 미국 애리조나 호피족(Hopi) 그릇 ⓒ 김찬곤
이 삼각형과 빗금무늬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 모든 신석기 문화에서 볼 수 있고, 무늬의 시작이자 중심이다. 더구나 이 무늬는 신석기에 그치지 않고 청동기와 철기시대까지 이어진다. 우리나라는 청동기와 철기를 넘어 조선시대까지 이어지고 있다.
원래 삼각형 무늬의 기원은 반타원이고, 이것의 각진 형태가 삼각형이다(삼각형 구름'에 대해서는 앞 글, 관련기사: 부산 영선동 '토기 융기문 발' 무늬는 무엇을 새긴 것일까)을 참고하길 바란다).
반타원은 뭉게구름 '뭉게뭉게(뭉실뭉실)'의 한 부분 '뭉게'를 1차원 평면에 새긴 것이다. 여기서 반타원은 비(雨 또는 수분(水))을 안고 있는 '비구름'이다. 비는 보통 삼각형 안에 빗금을 긋거나 점을 찍어 표현한다. 〈사진1-9〉 그릇은 세계 신석기 그릇에서 볼 수 있는 '삼각형 구름'이다.
7500년 전 신석기인이 그린 강원 양양 앞바다 구름 그림
그릇을 볼 때는 아가리 쪽을 '하늘'로 봐야 한다. 그래서 하늘에 떠 있는 구름은 보통 아가리에 가깝게 그린다. 〈사진3〉 스페인 발렌시아 그릇은 몸통에 수평으로 선을 몇 겹으로 그려 하늘과 그 아래를 구분 짓고, 하늘 속(파란 하늘 너머)을 그들의 세계관에 따라 표현했다고 볼 수 있다.
▲ 신석기인의 구름무늬 ‘삼각형’ 세계 신석기인이 구름을 왜 삼각형으로 그렸는지는 두 측면에서 짐작할 수 있다. 하나는 어떤 구상(삼각형 꼴의 움집, 빗물에 젖은 나뭇잎)에서 왔을 것이다. 그들은 구름을 비(雨·水)를 품고 있는 집으로 보았다. 또 하나는 디자인 측면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전체적으로 원에 가까운 그릇에 다시 타원형 구름을 새기는 것은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각진 삼각형 꼴 구름무늬를 새겼다고 볼 수 있다. ⓒ 오산리선사유적박물관
〈사진6〉 시리아 샤가르 바자르 유적에서 나온 신석기 항아리는 본질적으로 양양 오산리 덧무늬토기2와 도상이 똑같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삼각형 속 비(雨)를 빗금을 엇갈려 표현했을 뿐이다. 그리고 오산리 덧무기토기1 또한 〈사진4〉 영국 신석기 비커처럼 삼각형 구름을 엇갈려서 표현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오산리 덧무늬토기 두 점은 구름을 아가리 쪽에 새기지 않고 몸통 전체에 표현했다. 나는 이것을 양양 앞바다 수평선 위로 떠 있는 구름으로 읽고 싶다. 양양 오산리 신석기 유적은 기원전 5500년까지 내려 잡고 있다. 그렇다면 이 덧무늬토기 두 점에 그린 구름은 지금으로부터 7500년 전 신석기인이 그린 양양 앞바다 구름인 셈이다.』
(출처; 오마이뉴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474264)
3.11 고성 문암리유적 ; 8,000년 전~5000년 전(BC 6000년~3000년)
『강원도 고성군 죽왕면 문암리에서 조사된 신석기시대의 유적.
사적 제426호. 이 유적은 국립문화재연구소가 1991년부터 추진한 『군사보호구역 내 문화유적 지표조사』 사업의 일환으로 1997년도에 실시한 고성군 지역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처음 발견되었다. 동해안에서 내륙 쪽으로 약 400m 떨어진 구릉 지대 남쪽사면의 사구(沙丘) 지대에 위치한다. 유적을 중심으로 북으로는 동해안에 면해 있는 해발 41.9m의 야산에 의하여 둘러싸여 있고, 남·서쪽으로는 넓은 평야와 문암천(文岩川)이 동해로 흘러 들어간다. 동으로는 약 400m 거리에 동해안이 펼쳐져 있어 예로부터 선사인들의 생활 근거지로서 알맞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
발굴조사는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3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다. 1차 조사는 1998년 12월 2일부터 1999년 3월 31일까지 유적의 정확한 성격과 분포범위, 층위와 형성과정 등을 확인하기 위하여 실시하였다. 1차 조사에서는 5개의 유물포함층과 3개의 신석기시대 문화층(서기전 6,000~3,000년)이 퇴적되어 있음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3기의 주거지와 야외노지(野外爐址) 등 다양한 유구도 발견되었다.
2차 조사는 2002년 10월 28일부터 12월 28일까지 이루어졌다. 2차 조사에서는 신석기시대 주거지(住居址) 3기(基), 매장유구(埋葬遺構) 1기 등 8기의 유구(遺構)와 무문양토기(無文樣土器), 덧무늬토기(隆起文土器), 결상이식(玦狀耳飾) 등 다양한 유물이 확인되었다.
3차 조사는 『고성 문암리 선사유적 종합정비계획』의 일환으로 2010년 4월 28일부터 8월 2일까지 실시되었고, 추가 정밀발굴조사가 2011년 7월 14일부터 2012년 7월 31년까지 진행되었다. 3차 조사에서는 신석기시대 주거지 5기, 야외노지 13기 등의 유구와 함께 경작유구(耕作遺構)인 ‘밭’이 확인되었는데, 이중 ‘밭 유구’는 ‘동아시아 최초로 확인된 신석기시대의 농경유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밭과 함께 경작과 관련된 유물도 다량 출토되었다. 석기로는 돌괭이·뒤지개·보습·갈판·갈돌 등이 있고, 탄화곡물로는 조와 기장이 있다.
연대
토기와 석기 등 다량의 유물들이 수습되었는데, 토기는 안정된 층위에서 뚜렷한 층서를 갖고 출토되었다. 그동안 층위상의 문제를 안고 있었던 오산리유적의 연대와 토기 편년(編年)을 보완할 수 있는 등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이 유적은 크게 신석기시대 전기(前期)와 중기(中期)로 구분된다. 이 가운데 신석기시대 전기는 다시 융기문토기(隆起文土器)와 전형적인 오산리식토기(鰲山里式土器)가 중심을 이루고 있는 문화층(Ⅷ층~Ⅵ층)과 무문양토기(無文樣土器) 혹은 원시무문양토기(原始無文樣土器)만 출토되는 문화층(Ⅹ층과 Ⅸ층)으로 나누어진다. 각 문화층에서 출토된 토기를 중심으로 하여, 이 유적의 시기는 3단계로 설정할 수 있다.
1단계는 순수무문양토기 혹은 원시무문양토기만 출토되는 단계이다. 기형(器形)는 발형(鉢形)이다. 내·외면은 긁기와 물손질로 정면처리하였고, 태토(胎土)는 석영과 장석이 다량 함유된 사질토를 사용하였다. 이런 토기는 청도 오진리의 바위그늘 유적과 제주도 고산리유적에서도 출토된 바 있다. 제작기법으로 보아 융기문토기보다 앞서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2단계는 융기문토기와 오산리식토기가 출현하여 그 수가 급격하게 증가하는 단계이다. 융기문토기는 Ⅷ층~Ⅵ층에서 집중적으로 출토되었다. 기형은 발형이며, 구연(口緣)은 직립하고, 바닥은 평평하다. 점토띠를 수평 방식으로 붙여 쌓아 올렸다. 문양은 횡융기문(橫隆起文), 횡융기문+삼각융기문(三角隆起文), 횡융기문+종융기문(縱隆起文), 종융기문 등 다양하다. 이와 함께 오산리식토기도 Ⅷ층에서부터 전 층에 걸쳐 고루 출토되었다. 기형은 발형·옹형·접시형 등 다양하고, 바닥은 평평하다.
3단계는 융기문토기와 오산리식토기는 줄어들고, 침선문토기(沈線文土器)가 출현하는 단계이다. 문양은 단사선문(短斜線文)+횡주어골문(橫走魚骨文)·능문(菱文)·삼각문(三角文)·횡주어골문·격자문(格子文) 등 다양하다. 이런 토기는 동해안지역에서 문암리유적 외에도 오산리유적, 지경리유적, 가평리유적 등에서도 출토된 바가 있다.
이런 토기의 변화단계로 보아 양양 오산리유적의 연대와 유사하거나 좀 더 이를 것으로 여겨진다. 오산리식토기 보다 이른 시기의 순수무문양토기 문화층이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오산리유적은 층위상의 문제가 제기되고 있으나 1호 집터 등 제1문화층에서 채집한 숯의 방사성탄소연대(放射性炭素年代) 측정결과, 대부분이 서기전 5,000년~4,000년경으로 확인되었다.
따라서 이 유적의 상한 연대는 서기전 5,000년을 상회할 것으로 판단되어 한반도 최고의 신석기시대 유적 중 하나로 볼 수 있다. 이와 관련한 유물로 매장유구에서 출토된 결상이식(玦狀耳飾)이 가장 주목된다. 결상이식은 청도 사촌리유적과 동삼동 패총에서 발견된 바가 있었으나 발굴 조사된 유물로는 최초라는 점에서 그 학술적 가치가 높다. 시기상으로는 기원전 5,000년경에 해당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 최근에 발견된 경작유구인 밭의 하층에서 채취한 토양(모래)에 대한 OSL(광자극 루미네선스측정) 연대측정 결과가 약 5,000년 전(5,000±700 B.P.)이라는 연대가 검출되었다.
이 유적은 지금까지 동해안에서 발견된 신석기시대의 유적 중 가장 북쪽에 위치하며, 우리나라 신석기시대 문화상을 규명함에 있어 매우 중요한 유적으로 여겨지고 있다. 최근까지 발굴조사에서 5개의 유물포함층과 당시의 생활면을 비롯한 3개의 문화층을 비롯하여 주거지 3기, 야외노지 3기, 목탄 및 소토유구 2기, 경작유구 등이 확인되었다.
주거지(住居址)의 평면 형태는 원형·말각장방형·장타원형 등 다양한 편이다. 규모도 다양한데, 크기가 대체로 4m 내외이다. 이 중에서 02-7호 주거지의 규모는 길이가 770㎝, 너비가 450㎝를 하고 있다. 평면 형태는 장타원형으로 오산리 등 주변 지역에서도 발견된 예가 없는 독특한 형태이다. 주거지의 바닥은 점토를 깔고 불다짐한 경우(98-1호, 02-1호·5호·7호)와 모래바닥을 그대로 이용한 것(98-2호) 등으로 구분된다. 특히 주거지의 중앙에 자리잡은 노지는 바닥면을 얕게 파고 주위를 할석으로 돌려 만들었고, 내부에는 목탄층이 퇴적되었다. 노지의 평면 형태는 원형 혹은 장방형이고, 노지의 지름은 1m 내외이다. 또한 주거지 외부에서도 야외노지 6기가 발견되었는데, 이 중 4기는 돌을 돌린 형식이고, 2기는 아무런 시설없는 무시설식으로 재만 남아 있다.
주거지 주변에서는 원형·부정형·말각방형 등 다양한 형태의 수혈(竪穴)이 다수 확인되었다. 수혈의 깊이는 얕고, 유물이 거의 출토되지 않아 그 기능을 제대로 알 수 없었다. 다만 02-8호 수혈의 규모는 길이 174㎝, 너비 92㎝, 깊이 14㎝를 하고 있었고, 내부에서 석부(石斧) 7점과 석영제 박편(薄片)과 함께 결합식 낚시바늘이 37점이 출토되어 석기 저장공으로 추정된다.
매장유구는 추정 길이가 150㎝이고, 너비는 84㎝이며, 깊이는 12㎝인 말각장방형 토광묘(土壙墓)로 추정된다. 부장품으로 귀에 착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결상이식 1쌍을 포함하여 양 어깨 위치에 놓인 석부 2점과 머리맡의 소형 발형토기 1점이 출토되었다.
2012년도 제3차 발굴조사에서는 경작(耕作) 유구인 ‘밭’이 상·하 2개 층에서 확인되었다. 상층 밭은 전형적인 이랑 밭의 형태를 띠고 있다. 다만 청동기시대 밭의 형태와 비교할 때 두둑과 고랑의 너비가 일정하지 않고 이랑이 나란하게 이어지지 않는 고식적(古式的) 형태를 하고 있다. 이랑의 규모는 평균 길이는 970㎝, 두둑 너비는 38~82cm, 고랑 너비는 40~90cm, 고랑 높이는 15~17cm이다. 하층 밭은 상층 밭과 다르게 복합구획 밭의 형태로 원시적인 모습을 띠고 있었다.
밭의 일부를 파고 조성된 주거지가 발견되었다. 이 주거지 내부에서는 신석기시대 중기(서기전 3,600년~서기전 3,000년)의 짧은 빗금무늬토기편ㆍ돌화살촉이 출토되었다. 따라서 밭의 조성 시기는 신석기시대 중기로 추정된다. 기존에 우리나라에서 확인된 밭 유적 중 가장 이른 시기에 해당된다. 그간 한반도의 신석기시대 유적에서 농경과 관련된 유물(돌괭이, 뒤지개, 보습, 갈판, 갈돌 등)과 탄화곡물(조, 기장)이 발견되기는 하였으나 구체적인 농경의 증거인 ‘밭’이 확인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문암리유적은 중부 동해안지역의 신석기시대 문화상 연구에 매우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는 유적으로 평가된다. 지금까지 신석기시대 주거지 5기, 야외노지 5기, 매장유구 1기, 경작유구(밭) 등의 유구가 확인되었고, 신석기시대 전기의 순수무문양토기, 융기문토기, 침선문토기, 결합식낚시어구, 결상이식(옥 귀걸이) 등 다수 유물도 출토되었다. 신석기시대 밭은 석기(돌괭이, 뒤지개, 보습, 갈판, 갈돌 등), 탄화곡물(조, 기장) 그리고 곡물 토기압흔으로만 추정할 수 있었던 신석기시대의 농경에 대한 보다 명확한 증거를 찾아낸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의의
문암리유적은 기존에 동해안에서 가장 오래된 신석기유적으로 알려진 오산리유적과 비슷하거나 더 이른 시기일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토기의 바닥면의 형태와 문양으로 보아 남해안 지역뿐만 아니라 한반도 동북지방과 중국의 동북 3성 지방, 러시아의 아무르강 연안을 포괄하는 동북아시아 토기제작 전통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동북아시아 신석기 문화와 한반도 선사인의 원류 및 이동경로, 당시의 문화계통과 전파정도 등을 밝히는데 있어 매우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한반도에서 발굴된 밭유구는 청동기시대의 것이 가장 이른 시기의 것으로 알려졌으나 문암리에서 조사된 신석기시대 밭유적은 아직까지 중국, 일본에서도 확인된 바 없으며, 동아시아에서는 최초로 발굴된 신석기시대의 밭으로 추정된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70958)
2012년 6월 27일 중앙일보 기사 〈고성 문암리유적서 東亞최초 신석기시대 '밭' 발굴〉
『강원도 고성 문암리 유적에서 동아시아 최초로 신석기시대 경작유구(밭)으로 추정되는 유적지가 발굴돼 고고학계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한반도의 신석기시대 농경에 대해서는 석기(돌괭이, 뒤지개, 보습, 갈판, 갈돌 등)와 탄화곡물(조, 기장)을 근거로 그 존재 가능성을 추정해 왔으나 구체적인 농경의 증거인 '밭'이 확인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현재 문화재연구소는 농경과 관련된 보다 많은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유적퇴적환경분석, 규산체분석, 토양미세형태학적분석 등 다양한 과학적 분석을 추진하고 있다.
앞으로 물체질(water-sieving, water-floatation) 방법 등으로 당시 재배 식물 종류의 확인은 물론 보다 정확한 연대 결정을 위해 AMS(방사성탄소연대측정)와 OSL(광자극 루미네선스측정) 등 다양한 분석을 시행할 계획이다. 박희송 기자』
(출처;https://news.joins.com/article/8584429)
3.12 창녕 비봉리 유적; 8000년 전~청동기시대(BC 6,000년~청동기시대)
『경상남도 창녕군 부곡면에 있는 석기시대 빗살무늬토기 등이 출토된 조개더미. 소토유구|야외노지|주거지|도토리 저장공. 사적.
청동기시대 문화층에서는 태선침선문토기ㆍ이중구연토기 등과 함께 무문토기가 출토되었다.
이 유적은 신석기시대 조기에서 전기(7,700 B.P. ~ 3,500 B.P.), 신석기시대 중기와 후·만기, 그리고 청동기시대까지 지속적으로 조성되었다.
2007년 7월 6일자 연합뉴스 기사〈最古 배 출토 창녕 비봉리 사적예고〉
『한반도 최고(最古) 배를 비롯해 신석기시대 다양한 문화상을 엿볼 수 있는 유물이 대량 출토된 경남 창녕군 부곡면 비봉리 패총(飛鳳里貝塚)이 국가사적으로 지정된다.
문화재청은 한반도에서는 처음으로 확인된 신석기시대 저습지 유적인 비봉리 43번지 일원 2필지 4천183㎡를 사적 지정 예고했다고 6일 밝혔다.
해수면 변동에 의해 형성된 습지 유적인 비봉리 패총에서는 국립김해박물관 발굴조사 결과, 도토리와 같은 열매류, 망태기와 목기, 사람이나 동물의 배설물인 분석(糞石), 멧돼지와 같은 동물을 형상화한 토기, 소나무로 만든 기원전 6천 년 전 무렵 환목주(丸木舟.통나무 배)를 비롯해 신석기시대 생활상을 복원할 수 있는 유물이 다량으로 확인됐다.
나아가 이곳에서는 조기ㆍ전기ㆍ중기ㆍ후기ㆍ만기로 구분하는 신석기시대 각 문화층에 걸쳐 고른 유물, 특히 각종 토기 자료가 출토됨으로써 신석기시대 남해안 지역 토기문화가 융기문→ 압인문→태선침선문→이중구연토기 순서로 변모해 간 사실도 드러났다.
비봉리 유적은 앞으로 30일간 지정예고를 거쳐 사적 지정 여부가 최종 결정난다. 사적 지정예고 문화유산 중 사적으로 지정되지 않은 사례는 없다. 김태식 기자』
(출처: http://media.daum.net/culture/art/view.html?cateid=1021&newsid=20070706134310301&p=yonhap)
2008년 9월 18일 연합뉴스 기사 〈"8천 년 전 신석기시대 배 1척 더 있다"〉
『2004년부터 경남 창녕군 부곡면 비봉리 44번지 일대 신석기시대 저습지 유적을 발굴 조사하던 국립김해박물관은 이듬해 9월5일 놀라운 성과를 내놓았다. 8천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신석기시대 나무 배 1척을 발굴했다는 내용이었다.
이로부터 3년 정도가 흘러 더 놀라운 사실이 추가로 공개됐다. 당시 조사에서 건져낸 신석기시대 통나무배는 1척이 아니라 2척이라는 것이다.
현재 남은 규모는 길이 64.0㎝, 너비 22.0㎝, 두께 1.2~1.7㎝.
재질이나 모양 등의 여러 모로 보아 1호 배와 흡사했을 것으로 추정됐다.
경북대 임산공학과 박상진 교수에게 1호 배 목재 분석을 의뢰한 결과 수령 200년가량 되는 소나무임이 밝혀졌다.
이런 성과에 힘입어 애초 홍수 예방을 위해 양배수장이 들어설 예정이던 비봉리 유적은 지난해 8월, 국가 사적 486호로 지정돼 보존되기에 이르렀다.
한편 이번 '비봉리' 발굴보고서는 판에 박힌 보고서 형식에서 탈피해, 발굴 및 유물 정리 과정 등에서 일어난 각종 일화까지 아울러 수록하는 파격을 시도했다. 김태식 기자』(출처;
http://media.daum.net/society/nation/gyeongsang/view.html?cateid=100008&newsid=20080918101305152&p=yonhap&RIGHT_TOPIC=R1)
2016년 10월 19일 동아일보 〈[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18> 경남 창녕군 비봉리 유적 발굴한 임학종 국립김해박물관장〉
『기묘한 꿈 덕분인가… 논바닥에서 8000년 전 배가 떠올랐다
“저 논바닥 보이죠? 이곳이 8000년 전에는 바다였습니다.”
비봉리 유적에서 출토된 신석기시대 ‘나무배’. 기원전 6000년경 만들어졌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배다. 국립김해박물관 제공
비봉리 유적에서 발견된 ‘도토리 저장 구덩이’(위쪽사진)와 ‘똥 화석’.
3.13 부산 동삼동패총; 8000년 전~4000년 전(BC 6000년~BC 2000년)
『부산광역시 영도구에 있는 석기시대 신석기의 빗살무늬토기 등이 출토된 조개더미. 생활유적. 사적.
출토유물로는 토기·석기·골각기(骨角器)·패기(貝器) 등이 비교적 풍부하게 있으며, 유구(遺構)는 노지(爐址)와 분묘로 보이는 적석시설이 발견되었다.
이 변형빗살무늬토기, 겹아가리의 민무늬토기, 태선돋을무늬토기 등은 모두 신석기시대 후기에 속하는 것으로 동삼동 후기 신석기문화의 특징적인 토기가 되고 있다.
골각기는 골침·골촉·조침(釣針)·시문구(施文具) 등이 출토되었다. 패기로는 패천(貝釧)·패도(貝刀)·패면(貝面) 등이 있다.
2008년 10월 31일 경향신문 〈[고고학자 조유전과 떠나는 한국사 여행](19) 부산 영도 동삼동패총 유적 下〉
대체 동삼동 패총(貝塚)이 무엇인데 이렇게 호들갑을 떠는가.
동삼동 팔찌공장에서 대량생산된 조개팔찌(패천). 한반도산 조개팔찌와 열도산 흑요석이 교역의 주대상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출토 유물 가운데 재미있고 의미 있는 몇 가지를 소개하자면…. 우선 종교의례와 관련된 유물들.
또 하나 재미있는 유물의 탄생비화. 2003년 어느 날, 당시 하인수 복천박물관 조사보존실장(현 복천박물관장)은 동삼동 패총에서 쏟아진 유물정리에 눈코 뜰 새가 없었다.
일일이 칫솔로 토기편을 씻어내던 하인수의 손이 떨렸다.
“그것은 사슴그림이 분명했어요. 얼마나 흥분했는지….”
하지만 동삼동 패총에서 보인 사슴그림은 반구대 암각화 사슴과 미술사적으로 동일한 양식이었다.
그것은 신석기 시대에 이미 고래사냥이 성행했음을 웅변하고 있었다.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하인수가 또 주목한 것은 1999년 조사에서 확인된 1500여 점에 이르는 조개팔찌(패천·貝釧)와, 발굴조사 때마다 보이는 일본산 흑요석이었다.
그렇다면 수입품은? 하인수는 그것을 일본산 흑요석이라 본다.
동삼동 ‘팔찌공장’에서 제작된 조개팔찌(패천)와의 교역품일 가능성이 큰 일본산 흑요석.
“그런데 수입된 흑요석의 경우엔 완제품도 있었겠지만 원석도 있지?”(조 관장)
사슴그림이 새겨져 있는 토기편(왼쪽). → 세부모양은 과감하게 생략했고, 사슴의 특징만을 따서 시원시원하게 그렸다.
사실 한반도와 일본열도, 그리고 제주도 간 교역은 이미 구석기말~신석기 초부터 시작됐는데, 동삼동에서 제주 북촌리식 토기와 규슈산 승문토기 등이 보이는 이유이다.
예컨대 규슈해안~한반도 남해안에 닿으려면 대마도 남서해안에서 북서방향으로 진행하면서 대한해류를 타고 항해할 경우 동남해안인 부산까지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이기환 선임기자』
'우리겨레력사와 문화 > 《만주와 한반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만주와 한반도 12,000년 전~ 2,000년 전 년대기》3.22 부하문화~3.28 통영 상노대도패총 (1) | 2024.02.08 |
---|---|
《만주와 한반도 12,000년 전~ 2,000년 전 년대기》3.14 여수 안도패총~3.21 이사코보문화 (1) | 2024.02.08 |
《만주와 한반도 12,000년 전~ 2,000년 전 년대기》3.7 빗살무늬토기문화 (0) | 2024.02.08 |
《만주와 한반도 12,000년 전~ 2,000년 전 년대기》3.3 흥륭와(싱룽와)문화~3.6 보이스만 문화 (0) | 2024.02.08 |
《만주와 한반도 12,000년 전~ 2,000년 전 년대기》3. 9,000년 전~ 6,000년 전 3.1 루드나야문화~3.2 요하문명(발해문명) (3) | 2024.02.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