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와 한반도 12,000년 전~ 2,000년 전 년대기》

3.8 의주 미송리 유적(義州 美松里 遺蹟); 8000년 전~2600년 전(BC 6000년~ BC 8~7세기)

『평안북도 의주군 의주읍 미송리에 있는 석회암지대의 동굴에서 나온 선사시대 유적으로 석회암 광산에서 암석을 채취하는 과정 중 동굴이 확인됐고 동굴 안에 사람 뼈를 비롯한 토기, 석기 등이 발견되어, 1959년에 과학원 고고학 및 민속학연구소에서 발굴하였다.

 

동굴 내부의 퇴적층은 위로부터 표토층과 진흙층(두께 1.0~1.3m)이 있고 그 아래 검은 부식토층의 선사시대 유물층이 있다. 그 위에 쌓여 있는 지층에서는 근대시기의 그릇 조각, 짐승 뼈 등이 흩어져 나왔다. 선사시대 문화층은 2개로 나누어 아래 문화층과 위 문화층으로 부르고 있는데 아래, 위 문화층사이에 15~20㎝의 간층(間層)을 두고 있다.

 

아래 문화층에서는 빗살무늬토기(櫛文土器)를 비롯한 신석기시대 유물들이 나왔고 위 문화층에서는 청동기시대 늦은 시기에 해당하는 유물들이 나왔다. 신석기문화층에서 나온 유물의 종류 및 양은 많지 않아서 동굴 안팎에서 질그릇 조각과 뼈 부스러기 및 약간의 석기가 나왔다. 빗살무늬토기 조각들은 유적의 연대를 가늠하는 자료로, 그리고 서포항문화로 대표되는 동북지방과의 연관성을 증거하는 자료로 활용되었다.

 

발굴보고에서 제시된 토기조각은 모두 10점인데 이 가운데 8점은 가장 흔한 생선뼈무늬(魚骨文) 계통이다. 2점은 이른바 꼬불무늬인데(북한에서는 이들을 가리켜 짧은이음구불무늬라고 부른다), 폭은 넓고 사이는 좁게 연속적인 꼬불무늬를 베풀었다. 전체적인 복원이 불가능한 파편임에도 불구하고 한반도에서 최초로 보고된 꼬불무늬 때문에 한국 신석기문화 연구에서 큰 의미를 갖게 되었다.

 

보고자들은 내몽고 자치구 林西縣의 몇 유적에서 꼬불무늬가 나온 예를 들어 그곳과 미송리 유적의 연관성을 추정하였으며, 그 연대는 신석기 늦은 시기에 해당된다고 보았다. 그러나 1990년대에 들어와 중국 동북지방에서 신석기시대 유적 발굴이 매우 활발히 진행되었고, 특히 요하를 중심으로 하여 꼬불무늬토기들이 대량으로 출토되었다.

 

이들의 방사성탄소연대 값이 B.C. 6000년을 넘어서서 중국 동북지방에서도 중원지방과 공시성(共時性)을 갖는 신석기문화가 성립되고 있었음을 널리 알리게 되었다. 북한에서는 단동 대련지구를 중심으로 요동지방의 後窪, 上馬石, 小珠山, 新樂 유적 등에서 출토되는 꼬불무늬와 미송리의 것이 같다고 보아 동일한 문화권을 설정하였다. 이들 문화 유형을 시아오쮸산-미송리유형이라고 한다.

 

미송리 유적의 신석기시대는 新樂 유적의 방사성탄소연대를 참고하여 B.C. 6000년 기에 해당된다고 편년 되었다. 이것은 신석기시대 상한을 B.C. 5000년으로 보던 종래의 주장에서 1000년을 올린 것이며, 북한의 시기구분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에 속하는 것이다. 그리고 1980년대 중반까지 신석기 후기(B.C. 3000년 기 후반기)에 해당된다고 여겨지던 미송리 유적이 한국에서 가장 이른 신석기 유적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결국 미송리 유적에 대한 관점을 바꾸면서 한국 신석기문화의 개시연대가 상향조정되고 3개의 문화 유형이 설정되는 대대적인 개편이 있게 된 것이다.

 

위 문화층은 압록강 송화강 유역의 청동기시대 말기의 유적과 유사하며, 먼저 토기에서 특징 있는 것들이 보인다. 토기는 17점 나왔는데 그 가운데 표주박의 위아래를 잘라놓은 듯한 생김새를 갖고 있는 단지들을 이후 미송리형토기(美松里型土器)로 부르게 되었다. 단지 몸체에 고리형 가로 손잡이나 젖꼭지형 손잡이를 대칭으로 1쌍씩 달고 그 사이에는 입술 모양의 장식을 붙인 것도 있다. 가로줄 무늬의 차이 등에 따라 생김새가 다양하다. 미송리형토기는 이후 한반도 북부를 비롯해 요동지역에 까지 널리 분포하는 것으로 밝혀져 고조선 시기를 대표하는 유물이 되었다.

 

그밖에 청동도끼(銅斧), 돌화살촉(石鏃), 가락바퀴(紡錘車), 뼈바늘, 송곳, 대롱옥(管玉) 등이 나왔으며, 사람 뼈도 여러 명 분이 나왔다. 청동도끼는 날이 넓게 퍼진 부채날도끼(扇形銅斧)이다. 부채날도끼는 비파형동검(琵琶形銅劍) 문화에서 보이는 특징있는 유물 가운데 하나로 강상(崗上) 무덤에서 나온 도끼 거푸집에 새겨진 것과 유사하다. 유적의 연대는 B.C. 8~7세기, 고조선시기에 들어간다.』

(출처; 한국고고학사전(2001),

http://portal.nrich.go.kr/kor/archeologyUsrView.do?menuIdx=792&idx=10662)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선사시대 한민족은 어디서 살고 있었나?/신석기시대, 〈미송리 유적은 왜 중요한가!〉 (2018.05.01.)

 

『미송리 유적이 위치한 곳은 압록강 유역의 의주시이고 동굴유적이다. 이 유적의 시공간적 위치가 중요한 것은 몇 가지가 있다.

 

 

 

그림 1. 압록강 유역의 유적(1: 신암리, 2: 쌍학리, 3: 반궁리, 4: 도봉리, 5: 용연리, 미송리)

 

 

 

 

그림 2. 미송리 유적 하층 출토품(3,4번이 지자문토기로 볼 수 있다)

 

1. 언제 인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압록강 유역에서 가장 이른 유적이다.

먼 소리? 사실 현재 북한의 선사시대 유적은 몇 개가 알려져 있지 않다. 몇 개 되지 않은 것도 1950~60년대 발굴한 유적이 대부분이어서 연대 측정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물론 보고서를 낼 당시에는 나름의 연대추정치가 있다. 미송리 유적의 하층 기원전 6000년 기로 북한에서는 보았다. 근거는 중국의 유적과 비교해서다. 물론 중국에도 그 연대에 대한 개념이 시원치 않을 때이니 당연히 맞지 않다. 그리고 최근에 중국의 연대는 아주 많이 변했다.

 

잘 모른다면서 어떻게 빠르다는 것은 아는 것인가?

왜냐하면 之자문 토기가 출토되는데, 이건 요동지역에서는 소주산 하층문화(그림 3), 후와 하층 유적등 이른 시기에 확인되는 문양시문방법이기 때문이다. 압록강 유적의 다른 유적에서는 출토되지 않는다. 즉 이 유적보다 늦다. 그리고 이미 신암리 유적과 같은 압록강 유역의 유적은 필자가 정리하여서 대부분 연대는 가늠할 수 있다.

 

 

 

그림 3. 소주산 하층문화의 토기(요동반도 남부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토기 중에 하나이다.)

 

2. 압록강 유역은 요동지역과 한반도를 연결하는 길목이다.

동북아시아 전체의 역사적 흐름을 판단하는 곳이 몇 군데가 있는데, 요동지역과의 연관성은 압록강 유역이다. 아무리 그 이남에서 요동과 관련성 유물이 나온다 해도 이곳이 해결되지 못하면 소용없다. 동북아시아 전체의 역사적 흐름을 꿸 수 있는 곳이다.

 

그래서 이 유적의 연대는 한반도 압록강 유역의 문화적 범위 및 시간적 연대흐름을 알 수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그럼 미송리 유적 하층의 연대를 어떻게 하면 되지 않느냐! 고 질문할 수 있다. 미송리 유적의 하층은 신석기시대 유물이 10점 보고되었다(전부 토기편이다, 그림 2). 이 점이 너무나 아쉽다. 근거가 많이 희박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지자문토기가 나오는 것은 엄연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임으로, 너무 한정적이며 절대적인 기준은 아니지만, 모두가 수긍할 수 있는 비교가 중요하다.

현재 이 부분이 필자의 연구 중에는 빠져 있고, 이 부분을 해결하면, 환단고기 역주본에서 말하는 한국 신석기문화가 요서지역과 관련이 있는지 없는지, 홍산문화가 한반도와 관련이 있는 지의 단초가 될 수 있다.』

(출처; https://eastsearoad.tistory.com/164?category=749380)

 

3.9 라선특별시 굴포리 서포항유적(羅先 西浦項遺蹟); 8000년 전~청동기시대(BC 6000년~청동기시대)

『나선특별시 굴포리 서포항동에 위치한다. 유적은 서포항동 마을 동북쪽 해발 5∼7m에 걸치는 얕은 산비탈에 수 만㎡에 걸쳐 펼쳐져 있다. 유적 언저리는 조산만이 감싸고 앞에는 석호가 발달해 있으며 뒤로는 산을 등지고 있어 신석기시대의 살림살이에 알맞은 곳이다. 유적은 1960∼64년 사이에 발굴되었다. 구석기시대의 2개 문화층(이때는 굴포리서포항유적이라고 한다), 신석기시대의 5개 문화층, 청동기시대의 2개 문화층을 합하여 모두 9개 문화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신석기시대 1기층에서 나온 9호 주거지는 평면형태는 말각장방형이며 크기 12×6m, 깊이 1m로 매우 큰 편이다. 바닥은 굴껍데기를 깔고 강자갈과 흙을 섞어 다진 다음, 불을 피워 구웠다. 화덕자리는 5개가 있는데 양쪽 끝의 2개는 강돌을 둘러 만든 것이며 가운데 3개는 돌을 깔아놓은 것이다. 유물은 괭이, 마제석촉, 긁개, 그물추, 숫돌 등 다양하다. 뼈도구는 사슴뿔로 만든 창끝과 작살, 삿바늘, 찔개살, 송곳 등과 치레걸이가 있다. 토기는 모두 입술 가까이에 찍은 무늬를 돌린 것이다. 2기층에서는 3·17·19·23호, 4기의 주거지가 확인되었다. 주거지는 대개 원형이며 원추형의 고깔지붕으로 복원된다(3호). 움의 깊이는 0.6∼0.7m이며 기둥자리들이 있고 계단식으로 된 출입문이 있다. 석기는 1기층과 같은 종류이며 수량이 많다. 뼈로 만든 치레걸이나 조각품은 양이 많지 않은 한국 신석기시대의 예술품으로서 가치가 크다. 2기층의 토기는 완형만 20여 개체가 되는데 주로 심발형토기이나 입술이 바라진 그릇, 목단지, 작은 컵 등도 있다.

 

3기층에서는 8·12·13·20·26·30호 등 9개의 주거지가 드러났다. 주거지는 방형으로 바뀌며 크기가 작아져 한 변이 3∼4m 정도이며 바닥처리법, 기둥구멍, 화덕자리 등은 이전과 같다. 석기는 새로이 삽, 갈돌, 갈판, 창끝, 자귀, 끌 등 간석기류가 더해지며 흑요석 석기도 새로 출현한다. 토기는 그릇 종류가 다양해져 항아리, 단지, 보시기, 컵, 목단지 등 여러 형태가 만들어졌다. 새김무늬와 덧무늬 및 곡선무늬인 타래무늬가 등장한다. 대개 작은 그릇에는 무늬가 없다. 가락바퀴도 처음 나타나는데 원추형과 주판알 모양의 2가지가 있다. 그 밖에 뼈로 만든 예술품과 치레걸이가 있다.

 

4기층에서는 11·15·18·21·22호, 5기의 주거지가 확인되었다. 석기 가운데 곰배괭이가 나와 주목을 끄는데 이는 3기층의 삽과 함께 신석기 중기 이후 서포항에서 농사를 지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 뼈도구는 이전과 같으며 조각품이나 치레걸이는 매우 다양하다. 토기는 여전히 새김무늬가 주류이나 아래 문화기에 비해 무늬 없는 그릇들이 늘어나며 번개무늬그릇[雷文土器]이 등장하는 점이 주목된다. 이 무늬는 청천강 이북의 서북지방과 동북지방에 걸쳐 신석기시대 늦은 시기에 나타나기 때문에 늦은 시기의 지표유물로 보고 있다.

 

5기층에서는 7·16호 2기의 주거지가 나왔다. 아래 문화기에서 보이던 석기들과 함께 대패날이 나온다. 뼈도구에는 바늘이 들어있는 뼈바늘통과 함께 뿔괭이 등이 새로 나오는 종류이다. 토기무늬에는 덧무늬의 비중이 크나 무문토기의 양보다는 적다. 신석기시대 말기로 가면서 무늬 없는 토기의 비중이 늘어나고 있다. 무늬가 적어지는 대신 토기의 겉면을 반질반질하게 가는 마연수법이 늘어나 마침내 간토기가 출현하는 것으로 풀이하는 것이 북한의 관점이다.

 

서포항유적의 연대는 1기층을 기원전 5000년으로 잡아 한반도에서 가장 이른 신석기를 보여준다는 것이 북한의 전통적인 관점이었으나 의주 미송리 동굴유적의 연대를 상향조정하면서 동시에 재편되어 기원전 6000년으로 편년되었으며 1·2기층은 신석기 전기, 3기층은 신석기 중기, 4·5기층은 신석기 후기로 보고 있다.

 

서포항유적의 연대를 주변에 있는 러시아 연해주 및 아무르의 유적, 한카호 주변의 유적들과 대비하여 새로이 편년하는 움직임도 최근에 대두되고 있다. 이에 따르면 서포항 신석기문화는 가장 이른 1기가 기원전 4000년대 전반의 보이스만(Boisman) 5기, 2기부터는 모두 신석기시대 후기로 추정되어, 북한의 편년과는 매우 달라지고 있다.(신숙정)』

(출처; 한국고고학 전문사전(신석기시대편),

http://portal.nrich.go.kr/kor/archeologyUsrView.do?menuIdx=795&idx=887)

 

 

 

▲①농포동 여인상(함경북도 농포동) 높이 5.6cm. ②사람 얼굴 치레거리(함경북도 선봉군 굴포리). ③사람 얼굴(함경북도 선봉군 굴포리). ④서포항 여인상(함경북도 서포항) 높이 7.7cm. ⑤신암리 여인상(울산시 울주군 서생면 신암리) 높이 3.6cm. ⑥일본 조몬 흙인형. ⑦조가비 치레거리(부산 동삼동). ⑧중국 우하량 여인상(대릉하 우하량) 높이 22.5cm.ⓒ 김찬곤

 

 

 

 

 

굴포리 서포항 유적 출토 뼈피리

 

 

 

북한준국보. 청동기시대. 길이17.2cm/지름1.4cm

 

『조류의 다리뼈를 잘라서 만든 피리로, 현재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최고(最古)의 악기이다.

세장한 원통형으로, 가운데가 완전히 관통되어 있고 동체면에 한 줄로 일정한 간격을 두고 13개의 구멍이 뚫려져 있다.

구멍 사이의 간격은 대체로 1cm 내외다. 양끝의 한쪽은 제대로 남아 있고, 다른 한쪽은 좀 파손된 상태로 출토되었다.

 

함경북도 라선직할시(과거에는 웅기군, 선봉군으로 불렸음) 굴포리 서포항동에서 1961년 발굴되었다.

서포항유적은 1960부터 1964년까지 5차에 걸쳐 실시된 발굴조사에서

구석기시대의 2개 문화층과 신석기시대의 5개 문화층, 그리고 청동기시대의 2개의 문화층 등 시기를 달리하는 9개의 문화층이 확인되었다.

 

뼈피리는 1호 무덤에서 북쪽으로 3m지점의 청동기시대 제1기층에서 출토되었다. 대체로 기원전 2000년 기 후반으로 편년된다.

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북녘의 문화유산-평양에서 온 국보들』

 

 

 

두만강 유역에서 발견된 뼈 피리[위]와 『악학궤범(樂學軌範)』의 젓대 삽도[아래]함경북도 선봉군 굴포리 서포항 초기 청동시대 유적에서 출토된 새의 다리뼈로 만든 피리. 길이 18cm. 13개의 소릿구멍이 나 있어 피리의 형태를 닮았는데, 조선시대의 『악학궤범』에 보이는 젓대[대금(大琴)]의 소릿구멍의 개수와 일치하여 매우 흥미롭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동방의 예악 (한국 고대문화의 비밀, 2012. 12. 27., 이형구)

 

 

3.10 양양 오산리유적; 8000년 전~3500년 전(BC 6000년~1510년)

『강원도 양양군 손양면에 있는 석기시대 신석기의 석기와 토기조각이 출토된 집터. 시도기념물.

1977년 봄에 이곳의 흙을 파다가 호수를 매몰, 농지로 전용하기 위한 작업 중 다량의 석기·토기편이 출토됨으로써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 뒤 1980년까지 서울대학교 고고인류학과 조사팀이 모두 6차에 걸친 지표 조사를 실시했고, 1981년부터 1985년까지 서울대학교 고고인류학과에서 본격적인 발굴 조사를 실시하여 모두 3권의 발굴보고서가 출판되었다.

 

유적지는 동해안에서 내륙 쪽으로 200m 정도 떨어진 쌍호라고 불리는 자연 호숫가의 사구(砂丘) 위에 형성되어 있다. 이 사구는 쌍호의 북동 모서리 부분의 제방이기도 하다. 유적의 범위는 약 6,000㎡로 추정되는데, 이제까지 600㎡를 발굴하였다.

 

현재의 지표면으로부터 생토면까지의 깊이는 약 4.5m로, 모두 6개의 자연 층위가 나타났다. Ⅰ층은 청동기시대의 적갈색 무문토기·점토대토기·우각형손잡이, Ⅱ층은 첨저형 빗살무늬토기, Ⅲ층은 평저형 유문·무문양토기, Ⅳ층은 유물무포함층, Ⅴ층은 평저형 토기·융기선문토기, Ⅵ층은 유물무포함층이었다. 그런데 유적의 극히 일부에만 있는 Ⅰ층의 청동기시대층을 제외한 나머지는(Ⅳ층과 Ⅵ층은 유물무포함층) 신석기시대에 해당한다.

 

청동기시대인 Ⅰ층은 암황갈색 점토층으로 두께는 약 40㎝이다. 이 층은 전체 유적 중 극히 일부 지역에만 국한되어 있는데, 유기물이 많이 섞여 있다. 적갈색 무문토기, 점토대토기 및 우각형손잡이가 출토되었다. 이들과 함께 채집된 목탄시료를 방사성탄소 연대측정법으로 측정한 결과 서기전 2070∼1510년(수륜보정)의 연대가 나왔다.

 

신석기시대 상층인 Ⅱ층은 암갈색 사질층으로 두께는 20∼65㎝이다. Ⅰ층이 남아 있지 않은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Ⅱ층이 표토로 노출되어 있다. 이런 관계로 후세에 교란된 곳이 많다. 여기서는 서해안 지역 신석기시대의 특징적인 토기 형태인 첨저형(尖底形)이 출토된다. 토기 표면에는 구연부 및 기복부에 시문한 것이 많은데, 양 부위에 서로 다른 문양요소로 시문한 것과 같은 문양으로 시문한 것이 있다.

 

전자의 구연부에는 평행밀집사단선문·사격자문·조대문(組帶文) 등으로 시문하고 그 밑의 기복부에는 어골문으로 시문한 것이 많다. 후자는 구연부에서 기복부까지 어골문으로 시문한 것이 주체를 이룬다. 태토(胎土)에는 수적으로는 적으나, 석면(石綿)을 혼입한 것도 있다. 반출 석기 중에는 납작한 강자갈의 양단을 쪼아내어 만든 어망추가 있다. 이렇듯 토기·석기의 여러 특징에는 서해안과 공통점이 있다.

 

신석기시대 중층인 Ⅲ층은 암갈색 사질층으로 두께는 약 30㎝이다. Ⅱ층과는 두께 약 5㎝의 흑색 사질의 간층(間層)을 사이에 두고 그 아래에 있다. 토기의 기형은 예외 없이 평저형인데, 저부에는 나뭇잎 모양이 찍혀 있는 것이 많다. 이들 토기에는 유문양토기와 전혀 문양이 새겨져 있지 않은 무문양토기의 두 종류가 있으나 후자가 수적으로 많다. 유문양토기편 중에는 동부지역 토기류와 유사한 것이 있으며, 이러한 유문양토기와 함께 점토제 안면상(顔面像) 한 개가 채집되었다.

 

신석기시대 하층인 Ⅴ층은 다시 7개의 소층(小層)으로 세분된다. 여기서는 6기의 주거지가 확인되었다. 지름 6m 정도의 원형 주거지 안에는 70×70㎝ 크기의 사각형 노지(爐址)가 한두 개씩 있고, 다수의 평저형토기 및 소량의 융기선문토기, 그리고 돌로 만든 생활 도구류가 출토되었다.

 

토기의 기형은 모두 평형을 기본으로 한다. 좁은 저부에 비해 몸체 부분이 넓은 발형토기(鉢形土器)가 대부분이며, 옹형(甕形) 또는 호형(壺形)의 토기도 있다. 시문은 구연부위에 국한하였다. 문양의 시문수법은 세 가지로 구분된다. 압날문(押捺文)의 경우 점문(點文)이, 음각문(陰刻文)의 경우 종위평행단선문(縱位平行短線文)이, 압날문과 음각문이 혼합된 경우 이들 두 문양 요소의 결합 형태가 각각 주체를 이룬다. 토기의 표면은 마연에 의한 조정으로 광택이 난다. 석기로는 결합식조침(結合式釣針)·톱·사각형석도·흑요석인기(刃器) 등이 출토되었다. 특히, 어업 관련 도구들이 다수 출토된 점으로 보아 어업에 커다란 비중을 둔 생활을 영위했음을 알 수 있다.

 

Ⅴ층의 각 소층에서 채집한 목탄시료 7개를 방사성탄소 연대측정법으로 측정한 결과 서기전 6000∼5000년 사이로 나와 이제껏 알려진 신석기시대 유적 중 가장 오랜 연대를 보인다. 한편, 이곳에서 출토된 흑요석기를 형광 Ⅹ선 분석 결과 그 원석(原石)의 산지가 백두산으로 밝혀져 그 곳과의 문화적 관련성을 시사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이와 같은 층서관계·출토유물·방사성연대 측정결과 등을 통해 오산리 신석기하층(Ⅴ층)은 한국에서 비교적 이른 시기에 속하는 신석기 문화 단계임이 밝혀졌으며, 동한 평저형 토기문화가 서한 첨저형 토기문화에 선행했음이 확인되었다. 또한 지리적으로 서포항유적과 남해안의 신석기시대 문화를 잇는 중간지대에 위치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나라 신석기문화의 기원 해명 및 주변지역과의 문화적 상관관계를 파악하는 데에도 유력한 단서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집필 (1996년) 임효재|강성봉』

 

 

 

양양 오산리 유적 출토 얼굴 모양 토기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Contents/SearchNavi?keyword=%EC%96%91%EC%96%91%EC%98%A4%EC%82%B0%EB%A6%AC%EC%9C%A0%EC%A0%81&ridx=0&tot=3129)

 

2014년 10월 15일 국민일보기사 〈'동북아 最古' 7000년 前 팥 흔적 발견.. 신석기 시대 농사지었을 가능성 시사〉 

 

 

 

『동북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7000년 전의 팥 흔적이 국내에서 발견됐다.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는 "강원도 양양군 오산리 출토 토기 압흔(壓痕·눌린 흔적) 조사에서 신석기 시대의 팥 흔적이 발견됐다"며 "지금까지 한국, 중국, 일본에서 팥을 재배한 시기로는 5000년 전이 가장 이른 것으로 추정됐는데, 이번 조사 결과로 이보다 2000년 더 이른 시기에 팥이 재배됐을 가능성이 확인됐다"고 14일 밝혔다.

 

발견된 팥 압흔은 2점이며 팥 압흔이 있는 토기 표면의 탄화유기물을 미국 베타연구소에 보내 연대 측정한 결과 7314∼7189년 전으로 나왔다. 팥 압흔의 크기는 각각 2.2㎜, 2.8㎜ 정도로 현재의 팥(4∼8㎜)보다 작다.

연구소는 또 강원도 양양군 손양면 송전리에서 발견된 점토 덩어리에서 신석기 중기에 해당하는 곤충의 압흔을 확인했다. 이 곤충은 농업 해충으로 알려진 노린재목에 속하는 것으로 선사시대 유물에서 발견된 것은 처음이다. 송전리 출토 토기에서는 다량의 조, 기장, 들깨 압흔도 발견됐다. 이는 신석기 중기에 와서 조, 기장 등의 잡곡과 들깨까지 직접 재배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조미순 연구사는 "지금까지는 신석기는 채집사회였으며 농경은 청동기에 시작된 것으로 추정됐다"며 "신석기 유물에서 기장이나 조, 들깨 등의 흔적이 다량 발견됨에 따라 신석기 시대에도 경작이나 농경이 있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게 됐다"고 의미를 설명했다. 김남중 기자』

(출처; http://v.media.daum.net/v/20141015025004217)

 

김찬곤은 《내 마음대로 쓰는 한국미술사》에서 양양 오산리유적의 덧무늬토기에 새겨진 삼각형 모양이 양양 앞바다의 구름을 그린 것으로 보았다.

 

 

▲ 덧무늬토기1(양양 오산리, 27cm), 덧무늬토기2(양양 오산리, 26.1cm), 백자 철화포도문호(국보 제107호. 18세기 초. 높이 53.8cm. 입 지름 19.4cm. 밑 지름 19.1cm) ⓒ 오산리선사유적박물관·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양양 오산리선사유적박물관에 전시하고 있는 그릇 가운데 눈에 띄는 항아리 두 점이 있다. 나는 두 항아리를 보고 깜짝 놀랐다. 이 항아리 모양과 같은 그릇은 다른 신석기 유적에서는 볼 수 없고, 삼국·통일신라·고려 시대를 거쳐 조선에 와서야 비로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세계 신석기시대 그릇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아주 똑같지는 않지만 그 기본 모양은 조선 항아리와 같다. 7200년이 지나서야 볼 수 있는 그릇을 신석기시대 오산리에서 빚은 것이다. 더구나 덧무늬토기 그릇 무늬는 오늘날 디자인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을 정도로 아주 현대적이다.

 

위 세 항아리 모양은 여성의 몸을 닮았다. 특히 세 번째 백자 철화포도문 항아리(국보 제107호)는 여성의 배꼽부터 시작해 골반과 다리까지, 그것의 형상화라 할 수 있다. 내가 '남성의 눈'으로 그릇을 보는 것이 아니라 원래 그릇은 여성, 여신(女神), 비구름·비·물(만물생성의 기원), 만병(滿甁 찰만·항아리병, 마찬가지로 만물생성의 기원), 어머니, 들판 같은 상징성을 기본 베이스로 한다.

 

신석기시대 그릇을 빚었던 장인이 여자였는지 남자였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릇이 지금의 냉장고처럼 생활필수품이었던 만큼 편리성이 아주 중요한데, 그 편리성의 발전 속도가 아주 더딘 것 또한 사실이다.

 

그릇에 손잡이를 다는 것이나 물그릇에 귀때나 부리를 붙이는 것, 이런 것이 수백에서 수천 년에 걸쳐 이루어진다. 이런 것을 생각해 보면 당시 그릇을 빚었던 장인은 그릇을 늘 쓰는 여자였다기보다는 바깥일을 주로 했던 남자였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

 

오산리는 바다에서 200미터 남짓 떨어진 곳이다. 그렇다면 틀림없이 성난 파도와 물결을 표현했을 것이라는 확신까지 들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아래 그릇은 아프리카, 유럽, 아시아, 아메리카 신석기인이 빚었던 그릇이다. 모두 다 삼각형 무늬가 있다. 과연 이 삼각형은 무엇을 뜻할까.


신석기인은 이 삼각형을 무슨 뜻으로 새겼을까. 아직 세계 고고학계에서는 이것을 풀지 못한 것 같다. 세계 여러 나라의 박물관 설명글을 읽어 보면 거의 다 '기하학적·비유적·추상적인 삼각형'이라 할 뿐이다. 한마디로 '알 수 없다'는 말이다. 물론 우리나라 사학계에서도 〈사진 3-6〉 같은 삼각형 무늬를 '기하학적 추상무늬' 또는 삼각집선문(三角集線文)이라 말하고 있다.

 

 

▲ 세계 신석기인의 구름무늬 삼각형 1. 나이지리아 신석기 항아리 2. 이집트 신석기 항아리(기원전 3800년, 높이 16cm) 3. 스페인 발렌시아 물그릇(높이 12.4cm, 발렌시아선사시대박물관) 4. 영국 비커(높이 13.8cm, 대영박물관) 5. 러시아 얌나야(Yamnaya) 물병. 6. 초기 아시리아, 시리아 샤가르 바자르 신석기 그릇(기원전 1900-1700, 높이 22.8cm, 대영박물관) 7. 중국 양사오 물병(기원전 5000년) 8. 과테말라 마야 토기 복제품. 9. 미국 애리조나 호피족(Hopi) 그릇 ⓒ 김찬곤

 

이 삼각형과 빗금무늬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 모든 신석기 문화에서 볼 수 있고, 무늬의 시작이자 중심이다. 더구나 이 무늬는 신석기에 그치지 않고 청동기와 철기시대까지 이어진다. 우리나라는 청동기와 철기를 넘어 조선시대까지 이어지고 있다.

 

원래 삼각형 무늬의 기원은 반타원이고, 이것의 각진 형태가 삼각형이다(삼각형 구름'에 대해서는 앞 글, 관련기사: 부산 영선동 '토기 융기문 발무늬는 무엇을 새긴 것일까)을 참고하길 바란다). 


반타원은 뭉게구름 '뭉게뭉게(뭉실뭉실)'의 한 부분 '뭉게'를 1차원 평면에 새긴 것이다. 여기서 반타원은 비(雨 또는 수분(水))을 안고 있는 '비구름'이다. 비는 보통 삼각형 안에 빗금을 긋거나 점을 찍어 표현한다. 〈사진1-9〉 그릇은 세계 신석기 그릇에서 볼 수 있는 '삼각형 구름'이다.


7500년 전 신석기인이 그린 강원 양양 앞바다 구름 그림


그릇을 볼 때는 아가리 쪽을 '하늘'로 봐야 한다. 그래서 하늘에 떠 있는 구름은 보통 아가리에 가깝게 그린다. 〈사진3〉 스페인 발렌시아 그릇은 몸통에 수평으로 선을 몇 겹으로 그려 하늘과 그 아래를 구분 짓고, 하늘 속(파란 하늘 너머)을 그들의 세계관에 따라 표현했다고 볼 수 있다.

 

 

▲ 신석기인의 구름무늬 ‘삼각형’ 세계 신석기인이 구름을 왜 삼각형으로 그렸는지는 두 측면에서 짐작할 수 있다. 하나는 어떤 구상(삼각형 꼴의 움집, 빗물에 젖은 나뭇잎)에서 왔을 것이다. 그들은 구름을 비(雨·水)를 품고 있는 집으로 보았다. 또 하나는 디자인 측면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전체적으로 원에 가까운 그릇에 다시 타원형 구름을 새기는 것은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각진 삼각형 꼴 구름무늬를 새겼다고 볼 수 있다. ⓒ 오산리선사유적박물관

 

〈사진6〉 시리아 샤가르 바자르 유적에서 나온 신석기 항아리는 본질적으로 양양 오산리 덧무늬토기2와 도상이 똑같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삼각형 속 비(雨)를 빗금을 엇갈려 표현했을 뿐이다. 그리고 오산리 덧무기토기1 또한 〈사진4〉 영국 신석기 비커처럼 삼각형 구름을 엇갈려서 표현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오산리 덧무늬토기 두 점은 구름을 아가리 쪽에 새기지 않고 몸통 전체에 표현했다. 나는 이것을 양양 앞바다 수평선 위로 떠 있는 구름으로 읽고 싶다. 양양 오산리 신석기 유적은 기원전 5500년까지 내려 잡고 있다. 그렇다면 이 덧무늬토기 두 점에 그린 구름은 지금으로부터 7500년 전 신석기인이 그린 양양 앞바다 구름인 셈이다.』

(출처; 오마이뉴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474264)

 

3.11 고성 문암리유적 ; 8,000년 전~5000년 전(BC 6000년~3000년)

『강원도 고성군 죽왕면 문암리에서 조사된 신석기시대의 유적.

사적 제426호. 이 유적은 국립문화재연구소가 1991년부터 추진한 『군사보호구역 내 문화유적 지표조사』 사업의 일환으로 1997년도에 실시한 고성군 지역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처음 발견되었다. 동해안에서 내륙 쪽으로 약 400m 떨어진 구릉 지대 남쪽사면의 사구(沙丘) 지대에 위치한다. 유적을 중심으로 북으로는 동해안에 면해 있는 해발 41.9m의 야산에 의하여 둘러싸여 있고, 남·서쪽으로는 넓은 평야와 문암천(文岩川)이 동해로 흘러 들어간다. 동으로는 약 400m 거리에 동해안이 펼쳐져 있어 예로부터 선사인들의 생활 근거지로서 알맞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

 

발굴조사는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3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다. 1차 조사는 1998년 12월 2일부터 1999년 3월 31일까지 유적의 정확한 성격과 분포범위, 층위와 형성과정 등을 확인하기 위하여 실시하였다. 1차 조사에서는 5개의 유물포함층과 3개의 신석기시대 문화층(서기전 6,000~3,000년)이 퇴적되어 있음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3기의 주거지와 야외노지(野外爐址) 등 다양한 유구도 발견되었다.

 

2차 조사는 2002년 10월 28일부터 12월 28일까지 이루어졌다. 2차 조사에서는 신석기시대 주거지(住居址) 3기(基), 매장유구(埋葬遺構) 1기 등 8기의 유구(遺構)와 무문양토기(無文樣土器), 덧무늬토기(隆起文土器), 결상이식(玦狀耳飾) 등 다양한 유물이 확인되었다.

 

3차 조사는 『고성 문암리 선사유적 종합정비계획』의 일환으로 2010년 4월 28일부터 8월 2일까지 실시되었고, 추가 정밀발굴조사가 2011년 7월 14일부터 2012년 7월 31년까지 진행되었다. 3차 조사에서는 신석기시대 주거지 5기, 야외노지 13기 등의 유구와 함께 경작유구(耕作遺構)인 ‘밭’이 확인되었는데, 이중 ‘밭 유구’는 ‘동아시아 최초로 확인된 신석기시대의 농경유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밭과 함께 경작과 관련된 유물도 다량 출토되었다. 석기로는 돌괭이·뒤지개·보습·갈판·갈돌 등이 있고, 탄화곡물로는 조와 기장이 있다.

 

연대

토기와 석기 등 다량의 유물들이 수습되었는데, 토기는 안정된 층위에서 뚜렷한 층서를 갖고 출토되었다. 그동안 층위상의 문제를 안고 있었던 오산리유적의 연대와 토기 편년(編年)을 보완할 수 있는 등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이 유적은 크게 신석기시대 전기(前期)와 중기(中期)로 구분된다. 이 가운데 신석기시대 전기는 다시 융기문토기(隆起文土器)와 전형적인 오산리식토기(鰲山里式土器)가 중심을 이루고 있는 문화층(Ⅷ층~Ⅵ층)과 무문양토기(無文樣土器) 혹은 원시무문양토기(原始無文樣土器)만 출토되는 문화층(Ⅹ층과 Ⅸ층)으로 나누어진다. 각 문화층에서 출토된 토기를 중심으로 하여, 이 유적의 시기는 3단계로 설정할 수 있다.

 

1단계는 순수무문양토기 혹은 원시무문양토기만 출토되는 단계이다. 기형(器形)는 발형(鉢形)이다. 내·외면은 긁기와 물손질로 정면처리하였고, 태토(胎土)는 석영과 장석이 다량 함유된 사질토를 사용하였다. 이런 토기는 청도 오진리의 바위그늘 유적과 제주도 고산리유적에서도 출토된 바 있다. 제작기법으로 보아 융기문토기보다 앞서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2단계는 융기문토기와 오산리식토기가 출현하여 그 수가 급격하게 증가하는 단계이다. 융기문토기는 Ⅷ층~Ⅵ층에서 집중적으로 출토되었다. 기형은 발형이며, 구연(口緣)은 직립하고, 바닥은 평평하다. 점토띠를 수평 방식으로 붙여 쌓아 올렸다. 문양은 횡융기문(橫隆起文), 횡융기문+삼각융기문(三角隆起文), 횡융기문+종융기문(縱隆起文), 종융기문 등 다양하다. 이와 함께 오산리식토기도 Ⅷ층에서부터 전 층에 걸쳐 고루 출토되었다. 기형은 발형·옹형·접시형 등 다양하고, 바닥은 평평하다.

 

3단계는 융기문토기와 오산리식토기는 줄어들고, 침선문토기(沈線文土器)가 출현하는 단계이다. 문양은 단사선문(短斜線文)+횡주어골문(橫走魚骨文)·능문(菱文)·삼각문(三角文)·횡주어골문·격자문(格子文) 등 다양하다. 이런 토기는 동해안지역에서 문암리유적 외에도 오산리유적, 지경리유적, 가평리유적 등에서도 출토된 바가 있다.

 

이런 토기의 변화단계로 보아 양양 오산리유적의 연대와 유사하거나 좀 더 이를 것으로 여겨진다. 오산리식토기 보다 이른 시기의 순수무문양토기 문화층이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오산리유적은 층위상의 문제가 제기되고 있으나 1호 집터 등 제1문화층에서 채집한 숯의 방사성탄소연대(放射性炭素年代) 측정결과, 대부분이 서기전 5,000년~4,000년경으로 확인되었다.

 

따라서 이 유적의 상한 연대는 서기전 5,000년을 상회할 것으로 판단되어 한반도 최고의 신석기시대 유적 중 하나로 볼 수 있다. 이와 관련한 유물로 매장유구에서 출토된 결상이식(玦狀耳飾)이 가장 주목된다. 결상이식은 청도 사촌리유적과 동삼동 패총에서 발견된 바가 있었으나 발굴 조사된 유물로는 최초라는 점에서 그 학술적 가치가 높다. 시기상으로는 기원전 5,000년경에 해당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 최근에 발견된 경작유구인 밭의 하층에서 채취한 토양(모래)에 대한 OSL(광자극 루미네선스측정) 연대측정 결과가 약 5,000년 전(5,000±700 B.P.)이라는 연대가 검출되었다.

 

이 유적은 지금까지 동해안에서 발견된 신석기시대의 유적 중 가장 북쪽에 위치하며, 우리나라 신석기시대 문화상을 규명함에 있어 매우 중요한 유적으로 여겨지고 있다. 최근까지 발굴조사에서 5개의 유물포함층과 당시의 생활면을 비롯한 3개의 문화층을 비롯하여 주거지 3기, 야외노지 3기, 목탄 및 소토유구 2기, 경작유구 등이 확인되었다.

 

주거지(住居址)의 평면 형태는 원형·말각장방형·장타원형 등 다양한 편이다. 규모도 다양한데, 크기가 대체로 4m 내외이다. 이 중에서 02-7호 주거지의 규모는 길이가 770㎝, 너비가 450㎝를 하고 있다. 평면 형태는 장타원형으로 오산리 등 주변 지역에서도 발견된 예가 없는 독특한 형태이다. 주거지의 바닥은 점토를 깔고 불다짐한 경우(98-1호, 02-1호·5호·7호)와 모래바닥을 그대로 이용한 것(98-2호) 등으로 구분된다. 특히 주거지의 중앙에 자리잡은 노지는 바닥면을 얕게 파고 주위를 할석으로 돌려 만들었고, 내부에는 목탄층이 퇴적되었다. 노지의 평면 형태는 원형 혹은 장방형이고, 노지의 지름은 1m 내외이다. 또한 주거지 외부에서도 야외노지 6기가 발견되었는데, 이 중 4기는 돌을 돌린 형식이고, 2기는 아무런 시설없는 무시설식으로 재만 남아 있다.

 

주거지 주변에서는 원형·부정형·말각방형 등 다양한 형태의 수혈(竪穴)이 다수 확인되었다. 수혈의 깊이는 얕고, 유물이 거의 출토되지 않아 그 기능을 제대로 알 수 없었다. 다만 02-8호 수혈의 규모는 길이 174㎝, 너비 92㎝, 깊이 14㎝를 하고 있었고, 내부에서 석부(石斧) 7점과 석영제 박편(薄片)과 함께 결합식 낚시바늘이 37점이 출토되어 석기 저장공으로 추정된다.

 

매장유구는 추정 길이가 150㎝이고, 너비는 84㎝이며, 깊이는 12㎝인 말각장방형 토광묘(土壙墓)로 추정된다. 부장품으로 귀에 착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결상이식 1쌍을 포함하여 양 어깨 위치에 놓인 석부 2점과 머리맡의 소형 발형토기 1점이 출토되었다.

 

2012년도 제3차 발굴조사에서는 경작(耕作) 유구인 ‘밭’이 상·하 2개 층에서 확인되었다. 상층 밭은 전형적인 이랑 밭의 형태를 띠고 있다. 다만 청동기시대 밭의 형태와 비교할 때 두둑과 고랑의 너비가 일정하지 않고 이랑이 나란하게 이어지지 않는 고식적(古式的) 형태를 하고 있다. 이랑의 규모는 평균 길이는 970㎝, 두둑 너비는 38~82cm, 고랑 너비는 40~90cm, 고랑 높이는 15~17cm이다. 하층 밭은 상층 밭과 다르게 복합구획 밭의 형태로 원시적인 모습을 띠고 있었다.

 

밭의 일부를 파고 조성된 주거지가 발견되었다. 이 주거지 내부에서는 신석기시대 중기(서기전 3,600년~서기전 3,000년)의 짧은 빗금무늬토기편ㆍ돌화살촉이 출토되었다. 따라서 밭의 조성 시기는 신석기시대 중기로 추정된다. 기존에 우리나라에서 확인된 밭 유적 중 가장 이른 시기에 해당된다. 그간 한반도의 신석기시대 유적에서 농경과 관련된 유물(돌괭이, 뒤지개, 보습, 갈판, 갈돌 등)과 탄화곡물(조, 기장)이 발견되기는 하였으나 구체적인 농경의 증거인 ‘밭’이 확인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문암리유적은 중부 동해안지역의 신석기시대 문화상 연구에 매우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는 유적으로 평가된다. 지금까지 신석기시대 주거지 5기, 야외노지 5기, 매장유구 1기, 경작유구(밭) 등의 유구가 확인되었고, 신석기시대 전기의 순수무문양토기, 융기문토기, 침선문토기, 결합식낚시어구, 결상이식(옥 귀걸이) 등 다수 유물도 출토되었다. 신석기시대 밭은 석기(돌괭이, 뒤지개, 보습, 갈판, 갈돌 등), 탄화곡물(조, 기장) 그리고 곡물 토기압흔으로만 추정할 수 있었던 신석기시대의 농경에 대한 보다 명확한 증거를 찾아낸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의의

문암리유적은 기존에 동해안에서 가장 오래된 신석기유적으로 알려진 오산리유적과 비슷하거나 더 이른 시기일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토기의 바닥면의 형태와 문양으로 보아 남해안 지역뿐만 아니라 한반도 동북지방과 중국의 동북 3성 지방, 러시아의 아무르강 연안을 포괄하는 동북아시아 토기제작 전통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동북아시아 신석기 문화와 한반도 선사인의 원류 및 이동경로, 당시의 문화계통과 전파정도 등을 밝히는데 있어 매우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한반도에서 발굴된 밭유구는 청동기시대의 것이 가장 이른 시기의 것으로 알려졌으나 문암리에서 조사된 신석기시대 밭유적은 아직까지 중국, 일본에서도 확인된 바 없으며, 동아시아에서는 최초로 발굴된 신석기시대의 밭으로 추정된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70958)

 

2012년 6월 27일 중앙일보 기사 〈고성 문암리유적서 東亞최초 신석기시대 '밭' 발굴〉

『강원도 고성 문암리 유적에서 동아시아 최초로 신석기시대 경작유구(밭)으로 추정되는 유적지가 발굴돼 고고학계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소장 김영원)는 강원도 고성군 죽왕면 '고성 문암리 유적'(사적 제426호) 발굴 현장에서 신석기시대 경작(耕作) 유구인 '밭'을 발굴했다고 27일 밝혔다.
문화재연구소에 따르면 이번에 '고성 문암리 유적'에서 발굴된 신석기시대 밭 유적은 중국, 일본에서도 발견된 예가 없는 동아시아 최초의 신석기시대 밭 유적으로 추정된다. 
2010년부터 고성 문암리 선사유적 종합정비사업의 하나로 발굴조사 중인 이 유적에서 발굴된 밭은 크게 상·하 2개 층으로 구분된다. 
상층 밭은 전형적인 이랑(갈아 놓은 밭의 한 두둑과 한 고랑을 이름) 밭의 형태를 띠지만 청동기시대 밭의 형태와 비교할 때 두둑과 고랑의 너비가 일정하지 않고 이랑이 나란하게 이어지지 않는 고식적(古式的) 형태이다. 
하층 밭은 상층 밭과 다르게 복합구획 밭의 형태로 원시적인 모습을 띤다. 
특히 신석기시대 중기(기원전 3600년~기원전 3000년)의 토기편(짧은빗금무늬토기), 돌화살촉과 함께 그 층을 파고 조성한 신석기시대 집자리 1기가 확인돼 신석기시대 중기의 밭 유적으로 추정된다.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 확인된 밭 유적 중 가장 빠른 시기의 것은 청동기시대(기원전 1500년~기원전 400년)이다. 

한반도의 신석기시대 농경에 대해서는 석기(돌괭이, 뒤지개, 보습, 갈판, 갈돌 등)와 탄화곡물(조, 기장)을 근거로 그 존재 가능성을 추정해 왔으나 구체적인 농경의 증거인 '밭'이 확인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현재 문화재연구소는 농경과 관련된 보다 많은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유적퇴적환경분석, 규산체분석, 토양미세형태학적분석 등 다양한 과학적 분석을 추진하고 있다. 
앞으로 물체질(water-sieving, water-floatation) 방법 등으로 당시 재배 식물 종류의 확인은 물론 보다 정확한 연대 결정을 위해 AMS(방사성탄소연대측정)와 OSL(광자극 루미네선스측정) 등 다양한 분석을 시행할 계획이다. 박희송 기자』
(출처;
https://news.joins.com/article/8584429)

 

3.12 창녕 비봉리 유적; 8000년 전~청동기시대(BC 6,000년~청동기시대)

『경상남도 창녕군 부곡면에 있는 석기시대 빗살무늬토기 등이 출토된 조개더미. 소토유구|야외노지|주거지|도토리 저장공. 사적.

2007년 8월 28일 사적 제486호로 지정되었고, 보호구역은 4,183㎡이며, 창녕군이 소유 및 관리한다. 이 유적은 2004년에 양배수장부지 신축공사 시행 중 저습지에서 패각층과 함께 빗살무늬토기(櫛文土器)·무문토기(無文土器)·각종 유기물 등이 출토되면서 알려졌다. 이 유적은 밀양시 청도면에서 발원한 청도천과 낙동강과 합류하는 넓은 습지에 위치하고 있다. 뒤쪽으로는 월봉산(해발 401.2m)이 자리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남동쪽으로 뻗어 내린 경사면에는 작은 골짜기가 형성되어 있다. 이 유적은 국립김해박물관에 의하여 2차례에 걸쳐 발굴조사가 이루어지면서 유적의 성격이 밝혀지게 되었다. 1차 조사는 2004년 6월 30일부터 8월 4일까지 실시되었고, 2차 조사는 2004년 11월 30일부터 2005년 8월 23일까지 진행되었다. 2차례에 걸친 발굴조사에서 신석기시대의 소토유구(燒土遺構) 7개소, 야외노지(野外爐址) 6개소, 주거지 2개소, 도토리 저장공 16개소가 포함된 문화층과 재첩류를 중심으로 하는 다섯층의 패각층(貝殼層)이 중복되어 있었다.

 

신석기시대 출토유물로는 서기전 6000년경으로 추정되는 환목주(丸木舟)와 망태기를 비롯하여 다양한 토기류 및 석기류와 동물유체(사슴뼈·재첩·굴·꼬막·멧돼지뼈·개뼈·잉어 등), 식물유체(도토리·가래·솔방울·조·각종 씨앗류 등) 등이 있다. 이외에 청동기시대 유물로는 무문토기, 적색마연토기(赤色磨硏土器), 토제 어망추가 있다.

 

비봉리 패총은 발굴조사에서 7개 지점을 조사하였는데, 모두 45개의 층위가 확인되었다. 산지 쪽에서는 기저력층과 암반이 노출되었다. 1~10층은 근대의 경작층과 청동기시대 이후의 호소성 퇴적층, 11~18층은 자갈이 다량으로 포함된 역석층, 19층에서부터 45층까지는 실트와 모래층이 두텁게 퇴적된 토층이다. 이중에서 31층은 제2패각층과 제2부석층에 해당되는 층으로 신석기시대 조기에 형성되었다.

 

비봉리패총에서 조사된 저장공은 모두 18개소가 발견되었다. 저장공은 길이는 52~216cm로 상당히 다양한 반면, 단면 형태는 U자형이거나 플라스크형을 하고 있다. 저장공(貯藏孔)은 도토리를 저장하던 시설로 판단된다. 이 유적에서는 해수면 변동에 의하여 습지화된 환경에서 나무ㆍ풀 등을 포함한 유기물(동물뼈, 식물유체, 씨앗류 등) 등이 다량으로 수습되었는데, 특히 시기를 달리하는 도토리 저장시설은 등고선 방향과 나란하게 열을 이루고 있다. 도토리 저장시설은 단순하게 도토리를 저장하기 위한 공간뿐만 아니라 도토리의 타닌을 제거하는 용도로도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저장시설 내부에서 갈돌과 갈판이 출토되어 도토리를 가공하는 기능도 한 것으로 보인다. 도토리 이외에 가래, 솔방울, 조개에 대한 채집, 바다생물·잉어에 대한 어로, 사슴·멧돼지에 대한 사냥, 개에 대한 가축 사육의 구체적인 증거들도 검출되었다. 이외에도 망태기, 검형 목제품(劍形 木製品), 분석(糞石), 동물그림, 배 등을 들 수 있다. 망태기는 두 가닥의 날줄로 씨줄을 꼬는 '꼬아뜨기 기법'으로 만든 것으로 신석기시대의 편물기술(編物技術)을 알려주는 자료이다. 검형 목제품은 신부(身部)만 잔존하고 있는데, 전면을 잘 다듬어 제작한 목기이다. 분석(糞石)은 당시 신석기인들의 먹을거리는 물론 기생충까지도 확인할 수 있는 고고학적 시료이다.

 

신석기시대 조기에 해당하는 제2부석층에서 출토된 토기편에는 동물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동물 형태는 물고기에 가까우나 등 부분에 돌기가 나 있고, 두 개의 다리가 표현되어 네 발 짐승인 멧돼지로 추정된다. 특히 머리 쪽에는 눈 혹은 코를 나타낸 것으로 보이는 두 점이 찍혀 있고, 몸체에는 엷은 문살무늬가 채워져 있다. 그리고 소나무를 단면 U자형으로 파내어 만든 환목주(丸木舟)가 제2 피트 제5패층 아래에서 출토되었다.

 

남해안의 신석기문화는 조기·전기·중기·후기·만기로 구분하는데, 비봉리패총은 신석기 모든 기간의 패총이 온전하게 잘 남아 있다. 각 층에서 출토된 토기를 중심으로 하여 유적의 연대를 설정할 수 있다. 남해안 신석기시대 토기는 ‘무문양토기(無文樣土器)·주칠토기(朱漆土器)→융기문토기(隆起文土器)→압인문토기(押印文土器)→태선침선문토기(太線沈線文土器)→이중구연토기(二重口緣土器)’로 변화되는데, 이런 양상은 비봉리패총의 5개 패각 층위의 양상에서 잘 드러난다. 이는 패총에 포함된 목탄, 도토리, 목재, 패각, 가래에서 채취한 시료에 대한 AMS(가속질량분석기) 측정 결과도 서기전 5,700~1,890년으로 검출되었다.

 

신석기시대 조기(전반)는 제3~5패층인 Ⅵ~Ⅹ 문화층으로 주칠토기와 말각평저(抹角平底)의 발형토기(鉢形土器)와 호형토기, 평행융기대문(平行隆起帶文)·융기선문토기(隆起線文土器), 구순각목점열문토기(口脣刻目點列文土器)가 출토되었다. 신석기시대 전기(후반)는 제1패층이 포함된 Ⅲ~Ⅴ문화층으로 압인문토기·단사선문토기(短斜線文土器)가 성행하였고, 중·소형의 호형토기와 대형 원저(圓底) 발형토기도 제작되기 시작하였으며, 인부타제편인석부(刃部打製偏人石斧) 등 다양한 형태의 석부가 제작되었다. 신석기시대 중기 이후는 Ⅱ문화층으로 태선침선문토기와 이중구연토기가 주로 출토되었다.

 

청동기시대 문화층에서는 태선침선문토기ㆍ이중구연토기 등과 함께 무문토기가 출토되었다.

이 유적은 신석기시대 조기에서 전기(7,700 B.P. ~ 3,500 B.P.), 신석기시대 중기와 후·만기, 그리고 청동기시대까지 지속적으로 조성되었다.

 

특징

비봉리패총은 신석기문화가 토기와 석기 중심으로 연구되던 관행에서 벗어나 유기물을 통한 생업이나 고환경, 생태계의 연구와 복원을 추구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던 유적이다. 비봉리패총은 모두 10개의 문화층이 확인되었고, 신석기시대 조기와 전기의 각 문화층 사이에는 상대적 서열을 분명하게 구분해 주는 간층(間層)이 존재하였다. 따라서 층위의 역전 현상으로 시기를 달리하는 문화층이 혼재되어 편년에 어려움을 겪었던 다른 패총유적의 편년을 검토하고 남해안 일대 신석기시대 유적 편년의 표준으로 삼을 수 있다. 또한 규조분석 결과와 도토리 저장공의 위치 등을 통하여 후빙기(Holocene)의 어느 시점이나 적어도 신석기시대에는 낙동강 중·하류 혹은 그 지류인 현재의 창녕, 밀양 지역까지 바닷물의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은 것을 확인하여 신석기시대 해면 변동을 알 수 있는 정보를 제공해준다.

 

의의

비봉리패총은 내륙 지방에서 발견된 최초의 신석기시대 패총 유적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선사시대 배와 신석기시대 편물기술을 보여주는 망태기를 비롯하여 대규모 도토리 저장시설 등이 확인되어 신석기시대의 식생과 생활상의 연구에 중요한 고고학적 자료로 평가된다.』

(출처; 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Contents/SearchNavi?keyword=%EB%B9%84%EB%B4%89%EB%A6%AC%EC%9C%A0%EC%A0%81&ridx=0&tot=1212)

 

2007년 7월 6일자 연합뉴스 기사〈最古 배 출토 창녕 비봉리 사적예고〉

『한반도 최고(最古) 배를 비롯해 신석기시대 다양한 문화상을 엿볼 수 있는 유물이 대량 출토된 경남 창녕군 부곡면 비봉리 패총(飛鳳里貝塚)이 국가사적으로 지정된다. 


문화재청은 한반도에서는 처음으로 확인된 신석기시대 저습지 유적인 비봉리 43번지 일원 2필지 4천183㎡를 사적 지정 예고했다고 6일 밝혔다. 

 

 

해수면 변동에 의해 형성된 습지 유적인 비봉리 패총에서는 국립김해박물관 발굴조사 결과, 도토리와 같은 열매류, 망태기와 목기, 사람이나 동물의 배설물인 분석(糞石), 멧돼지와 같은 동물을 형상화한 토기, 소나무로 만든 기원전 6천 년 전 무렵 환목주(丸木舟.통나무 배)를 비롯해 신석기시대 생활상을 복원할 수 있는 유물이 다량으로 확인됐다. 


나아가 이곳에서는 조기ㆍ전기ㆍ중기ㆍ후기ㆍ만기로 구분하는 신석기시대 각 문화층에 걸쳐 고른 유물, 특히 각종 토기 자료가 출토됨으로써 신석기시대 남해안 지역 토기문화가 융기문→ 압인문→태선침선문→이중구연토기 순서로 변모해 간 사실도 드러났다. 


비봉리 유적은 앞으로 30일간 지정예고를 거쳐 사적 지정 여부가 최종 결정난다. 사적 지정예고 문화유산 중 사적으로 지정되지 않은 사례는 없다. 김태식 기자』
(출처:  http://media.daum.net/culture/art/view.html?cateid=1021&newsid=20070706134310301&p=yonhap)

 

2008년 9월 18일 연합뉴스 기사 〈"8천 년 전 신석기시대 배 1척 더 있다"〉

『2004년부터 경남 창녕군 부곡면 비봉리 44번지 일대 신석기시대 저습지 유적을 발굴 조사하던 국립김해박물관은 이듬해 9월5일 놀라운 성과를 내놓았다. 8천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신석기시대 나무 배 1척을 발굴했다는 내용이었다. 


이로부터 3년 정도가 흘러 더 놀라운 사실이 추가로 공개됐다. 당시 조사에서 건져낸 신석기시대 통나무배는 1척이 아니라 2척이라는 것이다. 

 

발굴조사 완료 이후 그 유물 정리를 해온 김해박물관(관장 임학종)이 2004년 6월30일 이후 8월4일까지 진행된 시굴조사와 그 해 11월30일에 시작해 이듬해 8월23일에 끝낸 비봉리 유적 발굴성과를 정리한 정식 보고서 '비봉리'(飛鳳里)를 18일 발간했다. 

 

이를 통해 기존에 공개한 Ⅱ지구 제2 피트 제5 패층(貝層. 조개무지가 쌓인 층) 아래에서 출토된 목선 외에도 또 1척의 소나무를 가공해 만든 신석기시대 배 1척이 있다는 사실을 공개했다. 


2호 배로 명명한 이 배는 1호 배와 마찬가지로 수령이 많은 소나무를 단면 U자형으로 속을 파낸 이른바 통나무형 선박(환목주 <丸木舟 >)인 것으로 드러났다. 그 내부와 외부에는 돌도끼로 가공한 흔적이 발견되며, 배를 만드는 과정에서 생긴 것으로 추정되는 초흔(焦痕)이라는 불에 그을린 흔적이 곳곳에서 확인됐다. 


현재 남은 규모는 길이 64.0㎝, 너비 22.0㎝, 두께 1.2~1.7㎝. 
재질이나 모양 등의 여러 모로 보아 1호 배와 흡사했을 것으로 추정됐다. 


상대적으로 보존 상태가 양호한 1호 배는 최대 길이 310㎝, 최대 폭 62㎝, 두께 2.0-5.0㎝로 역시 통나무(소나무) 속을 파내 만들었으며, 원래 길이는 400㎝를 넘었을 것으로 보인다. 


금속기가 발견되기 전 선사시대 사람들은 통나무를 가공할 때 그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군데군데 목재를 불에 태우거나 그을린 다음, 석기로 깎아내고 다시 돌로 표면을 매끈하게 처리하는 방식을 구사했다. 


경북대 임산공학과 박상진 교수에게 1호 배 목재 분석을 의뢰한 결과 수령 200년가량 되는 소나무임이 밝혀졌다. 


임학종 관장은 "이는 현재 한반도에서 확인된 가장 오래된 배이며, 100여 척이 넘는 일본 조몬시대 목주(木舟.나무배) 보다 시기적으로 앞서는 것으로서, 8천 년 전으로 추정하는 중국 저장성 콰후차오(跨湖橋) 유적 출토 나무배와 더불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배로 기록된다."고 말했다. 


이번 보고서는 비봉리 유적 발굴 성과로 ▲국내 최초로 신석기시대 저습지 유적을 확인했고 ▲후빙기 어느 시점에는 지금의 창녕과 밀양 지역까지 바닷물의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았다는 해수면 변동 자료를 확보했으며 ▲신석기시대 생계방식을 구체적으로 복원할 수 있는 물질자료를 얻었다는 점 등을 꼽았다. 


비봉리 유적은 배외에도 망태기, 칼 모양 목기, 똥이 화석처럼 굳어 생긴 분석(糞石), 멧돼지로 추정할 수 있는 동물 그림 등 국내 최고(最古), 최초로 기록되는 유물을 다량으로 쏟아냈다. 


이런 성과에 힘입어 애초 홍수 예방을 위해 양배수장이 들어설 예정이던 비봉리 유적은 지난해 8월, 국가 사적 486호로 지정돼 보존되기에 이르렀다. 


한편 이번 '비봉리' 발굴보고서는 판에 박힌 보고서 형식에서 탈피해, 발굴 및 유물 정리 과정 등에서 일어난 각종 일화까지 아울러 수록하는 파격을 시도했다. 김태식 기자』(출처;
http://media.daum.net/society/nation/gyeongsang/view.html?cateid=100008&newsid=20080918101305152&p=yonhap&RIGHT_TOPIC=R1)

 

2016년 10월 19일 동아일보 〈[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18> 경남 창녕군 비봉리 유적 발굴한 임학종 국립김해박물관장〉

『기묘한 꿈 덕분인가… 논바닥에서 8000년 전 배가 떠올랐다

 

“저 논바닥 보이죠? 이곳이 8000년 전에는 바다였습니다.”

 

14일 경남 창녕군 비봉리 유적 전시관 앞. 임학종 국립김해박물관장이 11년 전 발굴 현장을 내려다보며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이곳은 우리나라 최초의 신석기시대 나무배를 비롯해 첫 ‘똥 화석(분석·糞石)’, 멧돼지가 그려진 토기 등이 출토된 대표적인 선사 유적지다. 특히 여기서 출토된 나무배(비봉리 1호)는 기원전 6000년경 만들어진 것으로, 일본 조몬 시대 목선에 비해 2000년 이상 앞선다.

 

발굴의 ‘구루’들에게는 상서로운 꿈자리가 따르는 걸까. 백제 금동대향로 발굴 직전 아내가 용꿈을 꾼 신광섭 울산박물관장(본 시리즈 2회)처럼 2005년 발굴 당시 김해박물관 학예연구실장이던 임학종 역시 기묘한 꿈을 꿨다.

 

○ 우리나라 최고(最古) 나무배

 

 

비봉리 유적에서 출토된 신석기시대 ‘나무배’. 기원전 6000년경 만들어졌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배다. 국립김해박물관 제공

 

“발굴을 위해 십자형으로 둑처럼 쌓은 곳에 돼지꼬리 모양의 끈이 달려 있는 꿈을 꿨어요. 느낌이 심상치 않으니까 뭔가 납작한 판이 나오면 발굴을 즉각 중단하고 내게 보고해 주시오.”

 

2005년 6월 초순 임학종은 김해박물관 조사원들에게 느닷없이 꿈 얘기를 꺼냈다. 그는 꿈에서 본 끈을 배를 접안시킬 때 사용하는 밧줄로 해석했다. 주변에서 온갖 물고기 뼈와 조개, 대형 어망추 등이 출토된 정황으로 미뤄볼 때 이곳은 수천 년 전 바닷가였다는 게 그의 판단이었다. ‘그렇다면 배도 나올 수 있는 거 아닌가.’ 그때까지 일본에서는 조몬 시대 나무배가 130척이나 출토됐지만 국내에서는 신석기시대 배가 나온 적이 없었다. 조사원들은 ‘더위를 드셨나…’ 하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

 

하지만 그의 예감은 적중했다. 그달 24일 오후 3시 유적 북쪽 끝 개흙. 지표로부터 6m, 땅속의 가장 아래 패각층까지 드러난 지점에서 굴착기 기사가 “그만 파자”고 했지만, 임학종은 “혹시 모르니 한 번만 더 긁어 보자”고 채근했다. 삽날로 지면을 살짝 긁는 순간, 노란 선이 그의 눈에 확 들어왔다. 윤곽선의 형태가 예사롭지 않아 작업을 중단시키고 뛰어 내려갔다. 가까이에서 보니 나무판이 분명했다. “처음에는 활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개흙 속으로 손가락을 깊숙이 쑤셔 넣고 쭉 훑어봤는데 한참 미끄러져 내려가는 거야. 이 정도 크기의 나무판이라면 100% 배가 맞다고 확신했습니다. 순간 몸에서 전율이 일어납디다.”

 

발굴단이 1시간에 걸쳐 개흙에서 파낸 나무배는 길이 310cm, 너비 62cm 크기였다. 발굴단은 햇빛을 차단하기 위해 유적 위에 천막을 치고 나무배 전체에 중성지를 덮었다. 변조와 부식이 순식간에 일어나는 나무 특성상 현장에서의 보존이 관건이었다. 배에서 조그만 조각을 떼어냈다. 이 조각을 박성진 경북대 교수(임학)에게 자문한 결과 수령이 약 200년 된 소나무로 판명이 났다.

 

발굴단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급파된 목재 보존 전문가 2명과 함께 주변 개흙과 한꺼번에 퍼낸 나무배를 특수 제작된 나무상자 안에 넣고 무진동 특수차량에 실어 중앙박물관으로 옮겼다. 이 배는 올해로 12년째 보존 처리가 진행 중이다.

 

○ 첫 ‘똥 화석’ 찾아내려 지극정성

 

 

비봉리 유적에서 발견된 ‘도토리 저장 구덩이’(위쪽사진)와 ‘똥 화석’.

 

온전한 형태의 ‘도토리 저장 구덩이’ 87개를 무더기로 발굴해 낸 것도 큰 성과다. 이전에 발굴된 것들은 수도 적고 형태도 온전치 않아 정확한 기능을 규명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임학종은 이른바 ‘어깨선’(유적 조성 당시의 지층)을 찾는 데 성공해 저장 구덩이의 본래 크기를 밝힐 수 있었다.

 

신석기인들은 채집한 도토리의 떫은맛(타닌 성분)을 없애기 위해 소금기가 있는 바닷물에 일정 기간 보관한 뒤 먹었다. 바닷물이 드나드는 해안가에 구덩이를 판 이유다. 따라서 도토리 저장 구덩이의 개별 위치를 파악하면 신석기시대 당시의 해안선을 그릴 수 있다. 비봉리 일대 내륙이 신석기시대 바다였다는 사실은 자연과학 연구로도 입증됐다. 바다에서만 서식하는 규조(硅藻)류가 비봉리 토층에서 검출됐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처음 출토된 똥 화석도 의미가 작지 않다. 이른바 ‘화장실 고고학’이 발전한 일본에서는 똥 화석을 선사인의 영양 상태와 당시 식생을 파악하는 자료로 활용하고 있다. 임학종은 “우리나라는 왜 일본처럼 똥 화석이 나오지 않을까라는 궁금증이 늘 있었다”며 “비봉리 발굴 현장에서 퍼낸 모든 흙을 삼중(三重) 채로 일일이 걸러 똥 화석을 찾아냈다”고 말했다. 김상운 기자』

(출처;

http://news.donga.com/List/Series_70040100000214/3/70040100000214/20161019/80859809/1#csidxffc1fdbd657f27baee3248cc969b651)

 

 

3.13 부산 동삼동패총; 8000년 전~4000년 전(BC 6000년~BC 2000년)

『부산광역시 영도구에 있는 석기시대 신석기의 빗살무늬토기 등이 출토된 조개더미. 생활유적. 사적.

사적 제266호. 유적은 영도 동남부 하리마을에 있으며, 한국해양대학교로 들어가는 갈림길의 동남쪽일대이다. 1930년 일본인 요코야마[橫山將三郎]·오이카와[及川民次郎] 등에 의해 부분적으로 발굴되었다. 1963∼1964년 미국 위스콘신대학의 모어(Mohr, A.) 및 샘플(Sample, L.L.)에 의해 시굴이 행해졌다. 본격적인 발굴조사는 1969∼1971년까지 3년간에 걸쳐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실시했으며, 2004년과 2005년에 1차와 2차 발굴보고서가 발간되었다.

 

이 유적의 층위는 발굴자에 따라 3∼5개층으로 형성되어 있다고 하는데, 가장 최근에 조사한 국립박물관의 발굴조사에는 표토 아래에 ①갈색 토층, ②흑색토층(貝殼層·흑색토층), ③흑색토층(貝殼層), ④흑색토층, ⑤갈색점토층(기반토층). ⑥礫石層 등 6개층이 있고, 이들 가운데 ②흑색토층(貝殼層·흑색토층), ③흑색토층(貝殼層), ④흑색토층에는 각각 시기를 달리한 선사시대 유물이 포함되어 있다.

 

출토유물로는 토기·석기·골각기(骨角器)·패기(貝器) 등이 비교적 풍부하게 있으며, 유구(遺構)는 노지(爐址)와 분묘로 보이는 적석시설이 발견되었다.

 

토기는 둥근바닥[圓底]·납작바닥[平底]의 원시민무늬토기·세선돋을무늬토기[細線隆起文土器]·압날문토기(押捺文土器), 전형적인 빗살무늬토기[櫛文土器]·붉은간토기[丹塗磨硏土器], 겹아가리[二重口緣]의 민무늬토기, 태선돋을무늬토기[太線隆起文土器], 변형빗살무늬토기 등 특징적인 것이 많이 출토되었다. 이 중 둥근바닥 및 납작바닥의 민무늬토기·세선돋을무늬토기·압날문토기는 가장 이른 시기인 신석기시대 전기에 편년되는 토기이다.

 

전형적인 빗살무늬토기는 뾰족바닥[尖底] 또는 둥근바닥에 홑아가리를 가진 V자형 또는 U자형의 심발형토기(深鉢形土器)이다. 이 토기의 아가리부분에는 평행사단선문(平行斜短線文)이 있고, 복부에는 굵은 침선(針線)을 한 줄씩 그은 태선횡주생선뼈무늬[太線橫走魚骨文]가 있어 이 유적에서는 가장 대표적인 토기 중의 하나이다. 이 전형적인 빗살무늬토기의 시기는 신석기시대 중기에 편년되며, 이 시기 토기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변형빗살무늬토기는 아가리 주위에만 2, 3열 정도의 조잡한 선문(線文)을 두른 것이다. 전형적인 빗살무늬토기와 비교해볼 때, 시문(施文)한 부위도 좁아지고 위치도 아가리 주위에만 한정해 놓은 것 등 문양에 있어서도 큰 변화가 나타난다.

 

이 변형빗살무늬토기, 겹아가리의 민무늬토기, 태선돋을무늬토기 등은 모두 신석기시대 후기에 속하는 것으로 동삼동 후기 신석기문화의 특징적인 토기가 되고 있다.

 

석기는 규질암제(硅質岩製) 반간돌도끼[半磨製石斧]·삼각형 석설(三角形石銛), 역석(礫石)의 박편(剝片)으로 만든 스크레이퍼(scraper), 간삼각형돌살촉, 흑요석제(黑曜石製) 석거(石鋸)·인기(刃器) 등이 출토되었다. 시기적으로는 신석기시대 후기가 되면 흑요석제 석기가 성행하는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골각기는 골침·골촉·조침(釣針)·시문구(施文具) 등이 출토되었다. 패기로는 패천(貝釧)·패도(貝刀)·패면(貝面) 등이 있다.

 

이 유적의 연대는 앞서 토기의 특징에 따라 그 시기의 대강을 말한 바와 같이, 우리나라 신석기시대 거의 전기간에 걸쳐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방사성탄소연대측정을 통해 최하층은 서기전 3230년, 서기전 2995년, 서기전 2930년, 상층은 서기전 1450년이라는 절대연대를 얻은 바 있다. 그리고 1999년 부산박물관 조사에서는 BC 6000년~BC 2000년 사이에 형성된 것으로 밝혀 졌다.

 

패총인들의 생활상은 그들이 남긴 인공유물 외에도 각종의 자연유물에서도 나타난다. 이 동삼동패총에서도 생활상을 반영하는 각종의 자연유물이 출토되었다. 조개류 31종, 도미 등 각종 생선뼈, 고래·사슴 등의 짐승뼈가 그것이다.

 

고래뼈의 존재는 실제로 이 동삼동패총인들이 원양에서 포경활동을 한 것인지, 아니면 해안에 들어온 고래를 포획한 것인지 확실치 않다. 그러나 큰 굴껍질은 깊은 바다에서의 잠수활동을 말해주고 있다.

 

일본의 승문토기(繩文土器)는 바다를 통한 생활이 주생업인 어로활동 외에 일본과의 교역도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이 승문토기는 바다를 통한 원격지에로의 교역 내지는 고대의 문화교류활동 등을 알려주는 좋은 증거가 되고 있다.

 

의의와 평가

동삼동 조개무지유적은 여러 차례의 조사를 거쳐 성격이 규명된 신석기시대유적이다. 한반도 남해안 일대 신석기시대의 조개더미로서는 규모가 가장 크고 또 여러 문화층이 겹쳐 있음이 밝혀졌으며, 우리나라 남해안지방의 신석기시대 문화를 연구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유적으로 간주되고 있다. 집필 (1996년) 임효택|강성봉』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Contents/SearchNavi?keyword=%EB%8F%99%EC%82%BC%EB%8F%99%ED%8C%A8%EC%B4%9D&ridx=0&tot=75)

 

2008년 10월 31일 경향신문 〈[고고학자 조유전과 떠나는 한국사 여행](19) 부산 영도 동삼동패총 유적 下〉

『신석기문화 위용 드러낸 ‘동삼동 팔찌 수출단지’

최고급 장신구 ‘투박조개 팔찌’ 유물 무더기로 출토

일본 흑요석 수입해 석기제작 왕성한 교역거점 추정

조개가면·토우 등도 발견… 한국 고고학계 산실로

대체 동삼동 패총(貝塚)이 무엇인데 이렇게 호들갑을 떠는가.

 

흔히 ‘조개무지’라 하는 패총은 사람들이 먹고 버린 조개껍데기가 오랜 기간 쌓여 만들어진 유적이다. 한마디로 ‘선사시대 음식물 쓰레기장’인 셈이다. 약 1만 년 전 신석기시대에 들어오면서 바닷가에 모여 살던 사람들이 남긴 생생한 삶의 흔적이다. 원래 우리나라의 땅은 산성(酸性)이 많이 함유된 특징 때문에 동물이나 물고기뼈를 비롯한 유구와 유물이 남아있는 경우가 드물다.

 

 

동삼동 팔찌공장에서 대량생산된 조개팔찌(패천). 한반도산 조개팔찌와 열도산 흑요석이 교역의 주대상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백골이 진토(塵土)된다”는 말이 딱 맞다. 하지만 석회질로 된 조개껍데기는 토양을 알칼리성으로 바꾸기 때문에 패총 안에 들어있는 유구와 유물들이 잘 썩지 않고 지금까지 보존되는 경우가 많다.

 

토기와 석기, 뼈연모, 토제품 등 생활도구는 물론 무덤과 집자리, 화덕시설까지 발견되는 경우가 많다. 만약 선사시대 사람들이 지금처럼 ‘유난을 떨며’ 쓰레기 분리수거를 했다면? 우리는 선사시대가 남긴 숱한 삶의 정보를 잃어버렸을 것이다. 아! 현명한 우리의 선사인들이여!

 

곰 신앙의 정체

“특히 동삼동 패총은 선석기 초기인 BC 6000년부터 말기인 BC 2000년까지 4000년 동안 신석기인들의 삶이 고스란히 묻혀있어요. 각종 토기류와 석기, 골각기, 패(貝)제품, 토제품, 의례품을 포함해 그때의 자연환경과 일상생활의 모습을 보여주는 유물들이 포함돼있어요. 그러니 신석기시대의 전 과정을 속속들이 들여다볼 수 있는 거지.”(조유전 토지박물관장)

 

찬찬히 뜯어보자. 먼저 이곳에서 숱하게 출토된 덧띠무늬(융기문) 토기들은 연대 측정결과 유적 조성연대가 BC 6000년임을 알려준다. 울산 세죽유적과 강원 고성 문암리 출토 덧띠무늬 토기와 같은 시기임이 판명되었다.

 

“강원 고성 문암리라든가, 중국 동북방 발해연안 ‘차하이(査海)-싱룽와(興隆窪) 유적’ 등 BC 6000년 유적과 같은 시대임을 알 수 있어요. 또 다양한 문양의 빗살무늬 토기류가 쏟아졌는데, 토기에 이렇듯 갖가지 문양을 새기면서 예술적 감각을 발휘한 사람들이라 할 수 있지.”(조 관장)

 

출토 유물 가운데 재미있고 의미 있는 몇 가지를 소개하자면…. 우선 종교의례와 관련된 유물들.

 

 

동삼동에서 확인된 사람 얼굴 모양의 조개가면.

 

조개가면은 크기가 12.9㎝, 11.8㎝ 정도인데, 국자 가리비에 사람의 눈과 입 모양으로 구멍을 뚫은 형상이다. 집단의 공동체 의식이나 축제 때 사용했거나 혹은 벽사의 의미를 담은 주술구로 활용됐을 가능성이 크다.

 

 

 

동삼동에서 확인된 곰형 토우(土偶).

 

흙으로 만든 곰(熊) 모양의 토우(土偶)도 의미심장하다. 이 유물은 BC 4500~BC 3500년 문화층에서 확인됐다. 기자는 이 토우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바로 훙산문화(紅山文化·BC 4500~BC 3000년) 유적지인 중국 뉴허량(牛河梁) 유적에서 발굴된 곰이빨과 흙으로 만든 곰 소조상, 곰 모양 옥기(玉器)를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훙산문화 시대는 동이족이 창조한 발해문명이 꽃을 피우기 시작한 때.

 

뉴허량 유적은 제단(壇)·신전(廟)·무덤(塚·적석총)이 결합된 제사유적. 그런데 바로 여신을 모셨던 신전과 조상에게 제사를 지냈던 제단·적석총 등에서 유물들이 나온 것이다. 중국학계는 “이로써 훙산인들의 곰 숭배 사상을 엿볼 수 있다”고 결론을 내린 바 있다.

 

기자의 시선을 더욱 붙잡은 것은 동삼동 출토 곰 토우의 연대가 훙산문화와 같은 시기라는 점이다. 이것은 역시 지금의 중국 동북방과 한반도 최동남단은 같은 문화권이었음을 증거해 주는 단서이다.

 

사슴그림의 비밀

또 하나 재미있는 유물의 탄생비화. 2003년 어느 날, 당시 하인수 복천박물관 조사보존실장(현 복천박물관장)은 동삼동 패총에서 쏟아진 유물정리에 눈코 뜰 새가 없었다.

 

“1999년 동삼동 패총을 발굴할 기회가 있었는데요. 그런데 출토된 토기가 편을 합해 유물상자로 300상자가 됐어요. 그야말로 ‘흙 반 유물 반’이라는 우스갯소리가 나왔어요. 그걸 스폰지나 칫솔 같은 도구로 토기에 묻은 흙을 씻어내느라 죽을힘을 다했는데….”

 

기형과 문양별로 토기를 분류·정리해야 무문토기인지, 덧띠무늬 토기인지, 빗살무늬인지 알 수 있고, 빗살무늬라도 세부 문양이 어떤지를 파악해야 문화양상과 시대구분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작업이 막바지에 접어들었는데 어느 토기편(길이 8.7㎝, 너비 12.9㎝)에 눈이 한 번 더 갔어요. 뭔가 선각(線刻)한 듯한 문양이 있는데, 왠지 단순한 문양이 아닌 것 같았어요.”

 

일일이 칫솔로 토기편을 씻어내던 하인수의 손이 떨렸다.

 

“그것은 사슴그림이 분명했어요. 얼마나 흥분했는지….”

 

사슴 그림은 뼈나 대칼 같은 도구로 폭 2~3㎜의 선각으로 그렸다. 세밀한 형상은 과감하게 생략하고 그 특징만 잡아 추출 묘사함으로써 대상물의 이미지를 간결하고 단순하게 형상화했다.

 

“처음 길게 그은 선의 3분의 1 지점에 수직으로 선을 내려 사슴의 목과 몸체를 구분하고, 몸체는 사다리꼴 모양으로 묘사했어요. 이 그림은 걸어가고 있는 사슴의 형상이 분명합니다. 신석기인이 이토록 첨단의 미술기법을 발휘하다니….”

 

반면 경주 출토로 알려진 견갑(肩甲)형 청동기와 아산 남성리 석관묘 출토 검파(劍把·칼자루)형 청동기 등에 보이는 청동기시대 회화는 굉장히 사실적이다. 곧 정신을 차린 하인수는 울산 반구대 암각화를 주목했다.

“반구대 암각화는 청동기 시대 것이라는 설이 지배적이었어요. 암각화 제작에 고래 사냥에 표현된 작살의 형태가 청동기일 것이라는 추정을 토대로…. 따라서 반구대 암각화에 나오는 전문적인 고래사냥 또한 청동기 시대 때 일어난 일이라고 보았고….”

 

하지만 동삼동 패총에서 보인 사슴그림은 반구대 암각화 사슴과 미술사적으로 동일한 양식이었다.

“이런 측면에서 또 하나 유의해야 할 것은 바로 고래사냥입니다. 지금까지는 신석기 시대에는 고래사냥이 불가능했다는 주장이 정설이었는데요. 문제는 동삼동 패총의 전 문화층에서 고래뼈가 다량으로 출토됐다는 것입니다. 다른 남해안 유적에서도 고래 유존체와 함께 대형석제 작살이 출토되고 있다는 것은 무얼 말합니까.”

그것은 신석기 시대에 이미 고래사냥이 성행했음을 웅변하고 있었다.

 

수출용 팔찌를 생산한 산업단지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하인수가 또 주목한 것은 1999년 조사에서 확인된 1500여 점에 이르는 조개팔찌(패천·貝釧)와, 발굴조사 때마다 보이는 일본산 흑요석이었다.

 

“이상하게 생각했어요. 발굴된 1500여점을 유심히 보면 완제품은 물론 파손된 제품과 아직 제작되지 않은 제품 등이 섞여 있어요. 출토 팔찌의 70~80%는 중간단계에서 파손됐고, 일부는 마연 및 마무리 단계에서 깨졌어요. 조개팔찌를 만드는 작업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런 현상을 종합하면 동삼동에는 대규모 ‘팔찌공장’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얘기다. 문제는 팔찌의 재료가 밤색무늬조개과에 속하는 투박조개(90%)라는 점. 이 투박조개는 수심 5~20m 사이의 모래밭에서 서식하는데, 바위가 많은 일본 대마도에서는 볼 수 없다. 하인수는 투박조개가 서식한다는 동해안 죽변과 부산 광안리 해수욕장을 수시로 답사했다.

 

“투박조개가 어떻게 서식하고 잡히는지 직접 잠수복도 입지 않고 바다에 뛰어들어 채집까지 해봤어요. 그래서 결론을 얻었습니다. 이 동삼동 패총의 조개팔찌는 광안리산 투박조개였다는 것을….”

 

그리고 또 하나. 투박조개는 매끌매끌하고 워낙 단단해서 떨어뜨려도 깨지지 않을 정도지만 그만큼 가공하기 어렵다는 사실도 알았다. 그러니 조개팔찌를 만드는 사람들은 당대 최고의 기술자였던 셈이다. 덧붙이면 실패율이 그렇게 높았어도 투박조개만 고집한 것은 투박조개 팔찌가 최고급 장신구였음을 시사해준다. 재미있는 사실은 일본 규슈 사가(佐賀) 패총에서 출토된 조개팔찌 113점 가운데 투박조개 팔찌가 84%(95점)나 된다는 점. 대마도에서는 나지 않는 투박조개 팔찌가 왜 대마도에서 다량으로 나오는가. 그리고 일본산 팔찌의 제작방법과 형태, 속성이 동삼동 것과 완전히 일치했다. 이것은 ‘동삼동산 조개팔찌’가 대마도와 일본 규슈로 대량 수출됐다는 이야기다.

 

일본산 흑요석의 의미

그렇다면 수입품은? 하인수는 그것을 일본산 흑요석이라 본다.  

“석기를 제작하는 데 쓰이는 흑요석은 한반도에서는 백두산 정도에서만 나옵니다. 그런데 동삼동 패총을 비롯, 남해안 패총 유적 18곳에서 출토되는 흑요석은 대부분 일본 규슈 고시다게(요악·腰岳)산입니다.”

 

 

 

동삼동 ‘팔찌공장’에서 제작된 조개팔찌(패천)와의 교역품일 가능성이 큰 일본산 흑요석.

 

또하나, 하인수는 대마도에서 확인된 고시다카(越高) 유적을 주목했다. 이곳에서는 한반도산 융기문 토기가 2600여점 쏟아진 반면, 일본계 유물인 승문(繩文·새끼줄 문양)토기는 단 7점에 불과했다.

 

“곧 대마도에는 동삼동 등 한반도에서 건너가 중개무역을 담당했던 집단이 존재했을 수도 있었다는 얘기가 됩니다. 한반도인들은 대마도에 둥지를 틀고 동삼동산 최고급 조개팔찌와 일본산 흑요석을 물물교환이나 아니면 다른 교역의 형태로 거래한 것입니다.”(하인수)

 

“그런데 수입된 흑요석의 경우엔 완제품도 있었겠지만 원석도 있지?”(조 관장)

 

“예. 통영 연대도 패총에서는 전혀 가공되지 않은 길이 4.8㎝, 너비 3.3㎝, 두께 2.5㎝, 무게 43.6g의 흑요석 원석이 확인됐어요. 그것은 한반도 사람들이 원석을 가져다 정교한 석기를 제작했다는 얘기입니다.”(하인수)

결국 동삼동은 당대 최대의 수출용 팔찌를 제작한 ‘산업단지’였음을 알 수 있다. 이밖에도 흑요석이 집중 출토된 부산 범방패총, 통영 욕지도·연대도 패총 등은 수입된 흑요석으로 석기를 제작한 거점지역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사슴그림이 새겨져 있는 토기편(왼쪽). → 세부모양은 과감하게 생략했고, 사슴의 특징만을 따서 시원시원하게 그렸다.

 

사실 한반도와 일본열도, 그리고 제주도 간 교역은 이미 구석기말~신석기 초부터 시작됐는데, 동삼동에서 제주 북촌리식 토기와 규슈산 승문토기 등이 보이는 이유이다.

 

“한반도 동남부와 일본열도 서북 사이는 200㎞ 정도 떨어져 있는데, 어떻게 8000년 전부터 이런 교역이 이뤄졌냐고요? 해양학을 전공한 윤명철 교수(동국대)의 연구에 따르면 항해도구와 항해술이 발달하지 않았던 선사시대에도 기본적인 항해수단만 있으면 자연조건을 이용해서 바다를 건널 수 있다고 해요.”

 

예컨대 규슈해안~한반도 남해안에 닿으려면 대마도 남서해안에서 북서방향으로 진행하면서 대한해류를 타고 항해할 경우 동남해안인 부산까지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이기환 선임기자』

(출처;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mode=view&artid=200810311728155&code=900305#csidx8d34feb9a6c4a329d7f3c34a11a80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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