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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야발 2015. 12. 14. 2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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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성욱

 

 

 

말갈과 한민족 국가 간의 관계

K스피릿 입력 2021.07.07 09:02 기자명민성욱 박사 

[칼럼] 민성욱 박사

 

말갈은 실체가 있었기 때문에 동일한 시대, 동일한 지역에 존재했던 많은 국가 또는 집단과는 일정한 관계를 유지해 왔다. 그래서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발해 등 만주지역에서 비롯되었던 한민족의 여러 국가들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우선 기록상으로 『삼국사기』 에 등장하는 수많은 말갈 관련 기록과 중국 정사 중 「동이열전」에 등장하는 말갈계 종족들의 기록들, 『수서』이후에 등장하는 말갈은 독립된 열전으로 처음에는 「동이열전」에서 시작해서 「북적열전」으로 이어지는 관련 기록이 많아 남아 있다. 일본사서에는 『속일본기』,『유취국사』 등에 말갈 관련 기록이 등장한다. 말갈은 스스로 역사기록을 남겨 놓지 않아 그 실체 규명이 쉽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말갈 관련 관계 기록 많이 남아 있고 그 기록들 중에는 그냥 넘길 수 없는 기록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최근에는 러시아가 연해주 지역 등 옛 말갈 또는 발해지역 터에서 적극적으로 유적지 발굴조사를 하여, 중국과는 전혀 다르고 고구려나 발해 유적도 아닌 유적이 발굴되는데, 그 유적을 말갈 유적으로 보고 있다.


 

옛 역사에서 자연환경에 적응하면서 고유한 그들의 문화를 유지 및 발전시켜 왔던 말갈인들의 흔적이 밝혀짐으로써 그 실체가 확인되고 있다.

 

말갈의 후예를 자처하는 소수 민족

그런가 하면 중국 흑룡강성 및 러시아 연해주 지역에 말갈의 후예를 자처하는 소수 민족들이 있다. 그 대표적인 집단이 우데게인과 나나이족이다. 우데게에서 우드는 숲이라는 뜻을 갖고 있어 우데게인은 숲 속에 사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나나이인의 명칭은 땅이라는 뜻의 ‘나’와 사람이라는 뜻의 ‘나이’가 합쳐져 ‘이 땅의 사람들’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나나이인은 중국과의 교류가 빈번하여 중국 문화와도 유사한 면을 지니고 있다. 한편 국내 유명의 아이돌 그룹 슈퍼주니어의 중국인 멤버였던 한경은 중국에 거주하는 나나이인으로 알려져 있다. 우데게인은 기원후 2세기 무렵까지 바이칼 동부지역에서 아무르 강 상류로, 그 후 다시 만주 남부와 연해주로 이주한 고대 퉁구스족 일파인 ‘읍루’라는 수렵 종족의 후손이다. 우데게인은 기본적으로 세 가지 계통의 종족들, 즉 고아시아계 원주민, 서해와 동중국해 해안을 거쳐 연해주 지역으로 이주한 오스트로네시아계 종족, 바이칼 동부에서 이주한 읍루족을 비롯한 퉁구스계 수렵 종족을 기반으로 형성됐다. 따라서 우데게인 북부 그룹은 일부 고아시아적 요소를 포함하고 있으며, 남부 그룹은 고조선, 발해, 튀르크, 퉁구스, 만주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우데게인의 조상은 발해 건국에 참여했으며, 발해가 거란에 의해 멸망한 이후에도 그 땅을 떠나지 않고 주변 소수민족과 끊임없이 교류하며 현재에 이르고 있다.

 

말갈의 새로운 의미

 

그렇다면 말갈의 종족 명칭은 어떤 의미를 갖고 있을까? 한자 뜻대로 하면 오랑캐 중 오랑캐다. 중국은 중화주의에 입각하여 주변 나라들과 종족들을 폄하 또는 비하하는 습성이 있다. 어떤 종족이든 그들의 종족 이름을 지을 때는 최고의 의미를 부여하고자 했을 것이다. 그것에 착안하여 말갈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새롭게 부여해 보았다.

첫 번째, 말 = 크다(大), 갈 = 칼 혹은 활, 말갈은 큰 칼 또는 큰 활을 차고 만주벌판을 말달렸던 사람들 또는 집단을 의미한다.

두 번째, 말 = 많다(多), 갈 = 고을(邑), 말갈은 만주 및 한반도 북부 전역에 많이 분포하고 있는 집단을 의미한다.

세 번째, 말 = 물(水), 갈 = 고을(邑), 말갈은 물가(강가나 해안가)에 사는 사람들 또는 집단을 의미한다.

네 번째, 말 = 말(馬), 갈 = 고을(邑), 말갈은 말을 잘 타는 사람들 또는 집단을 의미한다.

다섯 번째, 말 = 한, 갈 = 고을(邑), 말갈은 크게 밝고 환한 종족 또는 집단을 의미한다. 이렇게 말갈을 다섯 가지로 새롭게 의미를 부여해 보았는데, 이때 말갈은 우리 민족을 뜻하는 ‘동이’나 ‘한민족’과 유사한 뜻으로 쓰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것에 대한 확실한 근거는 없지만 가능성을 열고 말갈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한 시도라고 할 수 있다.

 

한국고대사 인식 체계의 변화

그 동안 전통적인 한국 고대사 인식 체계에 따라 『삼국사기』 초기기록을 부정하고 중국사서의 기록만 맹신함으로써 말갈의 실체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는 오류가 발생하였다. 특히 중국학계의 경우 연구 자체가 동북공정과 연결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고, 일본은 과거 만선사관과 일선동조론에 입각한 연구 결과이므로 현재는 그 설득력을 잃은 상태이다. 반면 한국학계는 『삼국사기』 초기기록에 등장하는 말갈을 동예 등으로 보는 “위말갈설”이 지배적인 인식이었다. 기존 연구를 종합적으로 판단해 본 결과 말갈은 역사에 등장하는 시기별로 다르게 인식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초기에는 말갈을 만주 및 한반도 북부일대에 분포하고 있었던 예맥계통으로 보아야 하고, 고구려 남하정책 이후에는 고구려에 복속되어 고구려의 변방주민을 일컫는 범칭이 되었다가 후기에는 예맥계와 숙신계의 융합 형태로서 고구려를 구성하는 종족으로, 또는 발해 건국의 주체와 기층민으로 각각 참여하게 된다.

최근 사료의 기록에 대한 재해석과 고고학적 발굴 성과를 바탕으로 말갈의 실체가 밝혀지고 있는 상황에서 관계사 연구가 필요하다. 개인도 관계를 맺으면서 성장해 나가는 것처럼 집단도 서로 관계를 통해 영향을 미치며 발전해 나간다. 고대국가 성립기에서도 일정한 관계를 갖고 상호 경쟁하면서 국가체제를 확립해 나갔을 것이다. 특히 백제는 건국 이후 최초 대외정책이 말갈과의 전쟁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삼국 중에서 가장 늦게 출발했지만 이렇게 말갈과의 전쟁 준비를 하는 과정에서 국가체제를 조기에 갖추게 되었고, 고구려나 신라보다 빠른 시기에 최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렇듯 말갈은 실체적 관계 속에서 정치, 경제, 문화 등의 발전을 이루었고 이것은 향후 발해 건국에 참여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어 주었다. 한국사의 구성원들 간의 관계를 통해 우리 역사 구성원으로서의 편입 여부를 가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말갈과 숙신의 관계

말갈은 대체로 그 뿌리를 숙신으로 보고 있는데, 일반적으로 한국의 학자들은 숙신과 조선이 같은 집단을 지칭하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숙신에서 비롯된 것이 조선이고, 숙신이 동쪽으로 이동 한 후 비롯된 것이 읍루, 물길, 말갈 등 만주지역의 제 종족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진서』의 숙신은 읍루라고도 한다. 『북사』의 물길은 말갈이라고도 한다. 『신당서』의 “흑수말갈은 읍루라고도 불렀으며 물길로도 불렀다”를 종합해 보면 숙신 = 읍루 = 물길 = 말갈(흑수말갈)이 되는데, 이들 중 숙신이 가장 이른 시기부터 문헌에 등장하므로 기원 종족으로 추정된다. 아무르강 연안 및 연해주에는 이들과 계통이 다른 고아시아족, 알타이계 튀르크족과 몽골족, 한민족 등의 출입이 빈번했고, 그들과의 교류로 인해 숙신의 분화가 발생하였다.

그 과정에서 읍루 – 물길 – 말갈이 출현했고, 숙신은 이들의 연맹체였던 것으로 보인다. 후한 이후 말갈이 강성해지고 다른 세력들을 압도하면서 중국사에 등장한 563년 이전에는 세력의 역학 관계에 따라 때로는 숙신이, 때로는 읍루가, 때로는 물길이 그 연맹체를 주도하면서 문헌에 계승관계에 있는 듯 기록된 된 것으로 보인다.

중국 한족과는 역사와 문화적 경계가 확실하게 구분되는 고대 숙신과 조선 그리고 그러한 체제가 붕괴된 이후 여러 나라로 흩어질 때부터 등장하는 말갈, 그들 간에는 일정한 관계가 있음을 추정할 수 있다. 동일한 지역에서 유래되었고 동일한 정치적 체제 하에 있었다고 한다면 동일한 정신문화를 공유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발해 건국 후 말갈계 고구려인, 대조영은 전대의 역사인 고구려 역사가 아닌 단군조선의 역사인 『단기고사』를 간행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말갈과 부여의 관계

고조선부터 한민족의 뿌리로 보는 모든 국가들은 한반도에 한번쯤은 영토가 있었던 이력이 있었으나 부여는 한반도에 영토를 가진 적이 없었다. 하지만 한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이후 발생하는 국가인 고구려와 백제 모두 부여를 정신적으로 계승한 국가이다. 특히 백제는 왕실의 성을 부여씨로 했고, 국호를 남부여로 바꾸는 등 부여의 정통성을 상당히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삼국 성립 전의 만주지역의 패권을 쥐고 있었던 나라가 부여다. 만주지역의 여러 종족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며 부여의 문화를 정착시켰을 것이다. 그래서 말갈 7부중 속말말갈과 백산말갈은 대표적인 예맥계 말갈로 부여계 말갈이라고도 한다. 이러한 부여계 말갈은 같은 부여계인 고구려에 자연스럽게 흡수되어 고구려인이 되었다.

 

말갈과 고구려의 관계

고구려는 건국 초기부터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말갈을 제압할 수 있었고, 그러한 말갈을 부용세력처럼 활용하였다. 신라나 요서지역을 공격할 때 말갈의 군사들을 거느리고 전쟁을 수행하였다. 그리고 말갈은 분포지역에 따라 다른 형태의 말갈이 존재하였고, 예맥계 말갈인 속말말갈과 백산말갈은 자연스럽게 고구려에 동화되거나 복속되었고, 속말말갈 출신인 대조영은 고구려 멸망 후 고구려의 정통성을 계승하기 위하여 고구려 유민들과 말갈인들을 주축으로 해서 발해를 건국하였다.

 

말갈과 백제의 관계

백제는 낙랑과 말갈의 인접 지역에서 건국하였고, 건국 초기부터 낙랑과 말갈로부터 침략을 받았다. 말갈과의 전쟁을 통해 고대국가로서의 체제를 갖추어 나갔으며, 고이왕계에 이르면 말갈과 백제 간의 평화관계가 유지되는 데, 이것은 고이왕계가 말갈계인 진씨왕통이었기 때문이다. 다시 온조왕계인 근초고왕이 왕위에 오르자 백제와 말갈은 다시 전쟁이 시작되었고, 고구려의 영향권에 있었던 말갈은 고구려와 백제와 연합해서 신라를 공격하였으며, 신라의 30여 성을 함락시키기도 하였다. 백제가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하자 신라, 발해 등과 같이 분할 통치하기도 하였다.

 

말갈과 신라의 관계

신라 일성이사금 때 이찬 웅선은 말갈 정벌이 불가함을 아뢰었고 왕은 그것을 받아 들여 말갈을 정벌하지 않았다. 이것은 물론 다른 이유도 있겠지만 신라와 말갈 간의 특별한 관계가 있음을 유추해 볼 수 있다. 말갈은 삼국 성립기 이전에 이미 만주 및 한반도 지역에 분포하고 있었고, 삼국이 성립된 이후에는 일정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결과적으로는 삼국의 발전을 도왔다고 할 수 있다. 말갈의 뿌리가 숙신에 있고 그 숙신이 단군조선과 관련이 있다면 말갈의 위상은 달라지는 것이다. 그래서 신문왕 때 통일 이후 중앙군사조직(구서당)에 말갈국민으로 조직한 ‘흑금서당’을 편성한 것은 당시 고대 신라인들의 말갈관을 반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말갈과 발해의 관계

만주에는 발해라는 옛 고대국가가 있었다. 현재 만주에는 만주족이 살고 있고 그 만주족의 전신인 말갈족이 살았던 곳이다. 말갈, 발해, 여진은 한국인들의 관념 속에서는 순차적인 관계로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러시아 학계의 의견은 한국과는 다르다. 말갈 다음에 발해가 존속하는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말갈과 발해가 모든 지역에서 순차적인 관계를 보이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말갈을 발해와 병행적인 관계로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시대별로 정확하게 나눌 수는 없어도 분명 동시대에 발해와 말갈은 공존했었고, 문화적으로 영향을 받으며 상대적으로 우수한 발해문화를 공유하면서 결국 발해에 복속되었을 것이다. 예로부터 말갈과 한민족은 만나왔고, 말갈과 한민족은 함께 발해를 이루었고 서로 협력하고 교류하였다. 말갈과 한민족은 하나로서 발해의 주인이었다.

 

말갈과 옥저의 관계

옥저는 기원전 4~3세기경부터 지금의 함경도 지역에 정착하면서 동해안을 따라 연해주로 이어지는 환동해 지역에 살았던 집단이다. 옥저의 북쪽에 있던 집단인 읍루는 더욱 알려지지 않은 존재이다. 읍루인은 옥저인이 살고 있는 곳에 내려와서 자연스럽게 섞여 살았고, 나중에 고구려와 백산말갈을 형성하였다. 속말말갈이 부여계 말갈이라면 백산말갈은 옥저계 말갈이다.

고고학 자료들은 옥저와 읍루를 변방의 작은 오랑캐 집단으로 보는 것을 거부한다. 그들은 동해안의 독특한 지리환경에서 고유한 문화를 발달시킨 사람들이고 문화적 저력이 매우 컸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들 북방지역 연구를 통해 남한이라는 좁은 틀에서 벗어나 유라시아 대륙과 끊임없이 영향을 주고받았던 한민족의 역사를 다시 조명해야 할 필요가 있다.

 

말갈은 한국고대사의 인식체계를 바꿀  핵심 키워드

이제부터라도 말갈을 한국고대사의 인식체계를 바꿀 수 있는 핵심 키워드 중 하나라고 인식할 필요가 있다. 그 동안 한국사에서 말갈을 어떻게 인식해 왔는지, 국내사서인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등을 면밀히 검토하였고, 후대의 기록인 『고려사』나 『조선왕조실록』 등에도 말갈(여진)관련 기록이 나오고 있음도 확인하였다. 또한 중국25사나 일본사서인 『일본서기』나 『속일본기』 등에도 말갈(발해)관련 기록들이 나오고 있음도 확인하였다. 역사 문화적으로나 종족계통으로 보아도 우리나라와는 그 친연성이 많았고, 연관성이 많았던 말갈은 분명 한국사에서 일정한 지분을 갖고 있었다고 할 수 있으며, 나아가 현재 대한민국을 구성하는 여러 집단 중 하나이므로 한민족의 한 갈래로 볼 수 있다. 그렇게 인식해야만 발해사를 온전하게 한국사로 편입할 수 있을 것이다.

 

말갈과 한민족의 관계는 불가분의 관계

말갈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났다가 사라진 종족이 아니다. 동일한 시간적, 공간적 배경을 갖고 보면 우리 이웃으로 존재하기도 하였고, 우리 역사의 일부로서 존재하기도 하였다. 만주지역에서 광범위하게 살면서 그들은 때때로 고구려나 발해에 복속되기도 하며 점차 선진문명을 흡수하면서 발전하였다. 말갈은 많은 사서에 등장하지만 독립된 국가체제를 갖추지 못하였고 자체 기록으로 남겨진 역사서가 없기 때문에 그 실체를 규명하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몇 몇 사서에 보면 그냥 넘겨버릴 수 없는 내용들이 나온다. 이렇듯 한ㆍ중ㆍ일 사서에 직ㆍ간접적으로 말갈기록이 많이 남아 있다는 것은 말갈이 존재했던 그 시대만큼은 말갈이 동아시아 국가 내에서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감을 갖고 있었다는 증거일 것이다. 말갈은 자신들의 문화를 유지하면서 동시에 고구려인에 이어 발해인으로 살았다.

중국이 북방사를 중국사로 편입하고자 할 때 우리가 고구려(기원전 37년 ~ 668년)와 발해(698년 ~ 926년)에만 집중하는 것은 고구려와 발해를 제외한 시기에는 우리 민족의 역사 공간이 아님을 시인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말갈은 실체가 없는 것이 아니라 그 동안 제대로 연구를 안 했을 뿐이다. 지금부터라도 잘못된 선입견이나 왜곡된 관점을 버리고 말갈을 온전하게 바라본다면 고조선 이후로 말갈과 한민족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의 만주 역사에 대한 관심은 고구려와 발해에 편중되어 있다. 이렇게 편중된 관심과 연구만으로는 한국의 고대 역사와 문화의 규명이라는 커다란 연구 흐름을 이어 나가기 힘들다.

말갈 같은 북방계통의 집단은 현대인들이 생각하는 혈연적인 민족이나 국가의 개념이 아니라 자신들의 환경에 적응해 왔고,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각자 다른 생활방식을 발전시켜 왔다. 그리고 시대를 거치며 그 범위가 확대되기도 하고 작아지기도 하였다.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은 한반도 중에서도 남한이다. 우리 역사의 공간적 배경은 여기에 한정되지 않는다. 우리 민족이었던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발해, 옥저, 동예 등의 무대가 북한과 만주지역이기 때문이다. 북방으로 올라가면 이름만 알려져 있고, 자세한 생활상은 잘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의 역사가 많이 숨어 있다.

고구려와 발해의 기층민이었던 말갈과 같은 집단들은 한국 고고학과 고대사의 일부 임에도 불구하고 거의 다루어지지 못한 채 잊혀졌다. 우리가 알고 있는 고대 역사는 얼마 되지 않는 역사 기록을 중심으로 구성된 것이다. 문헌자료가 부족한 여러 민족들의 역사는 변방사, 또는 주변 역사로 취급되어졌고, 한국사에서도 이에 대한 연구는 소외되거나 배제되어 왔다.

다행히 고고학 연구 덕분에 만주지역의 다양한 유적과 유물들이 발굴되었고, 막연했던 북방민족의 역사에 관한 새로운 사실들이 알려지고 있다. 문헌 자료가 부족한 만주지역의 역사인 말갈의 역사를 통해 고조선 이후 만주에 살았던 우리 민족의 역사 공백을 채워줄 수 있을 것이다. 기록은 기억을 지배한다. 그 기억은 다시 의식에 영향을 미친다. 역사의 중요성이 여기에 있다. 잘못된 역사인식은 개인의 의식뿐만 아니라 집단의 의식에도 악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왜곡된 역사는 반드시 바로 잡아야 되는 것이다.(1)

 

 

 

우리 역사에서 '말갈' 연구가 필요한 이유

K스피릿 입력 2021.02.04 11:49 업데이트 2021.02.05 18:44 기자명민성욱 박사

 

[칼럼] 민성욱 박사

 

한국 고대사의 실마리를 풀 수 있는 키워드 중 하나가 말갈이다. 그것은 바로 만주사에 대한 이해 때문이다. 한반도에 갇힌 역사가 아닌 민족의 원류가 북방으로부터 시작되었고 한반도로 귀착되기 전에 만주가 주된 역사 공간이었다.

현재 만주는 역사연구적으로 보면 비어있는 공간이다. 역사의 주체가 누구인지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중국은 동북공정으로 시간의 흐름을 무시한 채 강제로 현재 기준으로 만주를 비롯 동북아지역에 존재했던 민족의 역사를 중국역사로 탈바꿈시켰다.


 

그 만주지역에는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발해 등의 역사가 그 이전부터 오랜 기간 존재했고 그들의 역사와 문화가 지금의 중국을 만든 한족의 역사와 문화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이것은 분명 역사왜곡이고 옛 역사터전을 잃고 한반도에 갇혀 그것도 남과 북으로 분단된 한민족의 실상으로 볼 때 안보의 문제이기도 하다. ‘만주(滿洲)’ 라는 말은 ‘물가’라는 의미의 만주어에서 유래된 것으로, 대체로 요하 동쪽의 지역을 가리키는데, 대체로 중국의 동북삼성(요녕성, 길림성, 흑룡강성) 지역에 해당된다. 만주지역의 대표 종족으로는 우리 민족인 예맥족과 숙신ㆍ읍루ㆍ물길ㆍ말갈ㆍ여진 등 시대의 변천에 따라 여러 이름으로 불리던 말갈족과 요하의 지류인 시라무렌강 유역의 거란족 등이 있다.

 

우리 역사에서 말갈인식은 우리 역사를 주체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준다

이 중에서 말갈(靺鞨)은 만주지역의 대표종족이자 고조선 이후로 우리 역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특히 고구려와 발해시대에는 어떠한 종족보다도 화려하게 역사무대에 등장했다가 많은 영향을 미치고 홀연히 사라진다. 그러한 말갈에 대한 역사인식이 조선후기 실학파가 등장하면서 달라진다. 당시 국제질서의 변화에 따른 실학파 등의 역사인식이 주체적으로 바뀐다. 단군조선으로부터 출발하여 부여-고구려를 계승한 발해를 강조함으로써 한국사 강역의 범위를 만주로 확대하여 한반도 중심의 고대사 인식체계를 극복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대한민국 상해 임시정부의 역사관으로 계승되었고, 대일항쟁기의 신채호, 박은식, 장도빈, 권덕규 등과 같은 민족주의 사학자들과 그들에게 영향을 미친 무원 김교헌은 대일항쟁운동과 민족의식 고취를 위해 민족사 연구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 결과 말갈을 한민족을 구성하는 여러 본류 중의 하나로 인식하였다. 현재의 역사인식과는 사뭇 다르다. 우리 고대사의 공간적 배경이 분명 만주와 한반도 지역이라고 할 때 만주의 대표적인 종족인 말갈과의 관계를 분명히 해야 될 필요가 있다. 또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역사관을 계승하여 한반도에 갇힌 역사관을 극복하고 진정한 역사 광복을 이루려면 만주지역의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고 정립하여야 한다. 오랜 기간 만주지역에 존재했고, 고조선 이후부터 우리 역사와 함께 했으며, 고구려와 발해 시대에는 그 존재감을 확실하게 보여 주었던 말갈인데 그 동안 연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주로 일본과 중국이 주도하였던 말갈연구를 우리 역사관점에서 새롭게 접근할 필요가 있으며, 그 결과에 따라 우리 역사를 주체적으로 수용하고 이해할 수 있는 인식체계가 마련될 수 있을 것이다.

 

말갈의 실체는 여러 국가(민족)들과 관계사를 통해 밝혀질 수 있다

 
 

말갈은 실체가 있었기 때문에 여러 국가(민족)들과의 관계사가 남아 있다. 이러한 관계사적 고찰을 통하여 민족적 특성과 함께 역사 귀속의 문제도 밝혀질 수 있다. 중국 입장에서 한낱 중국 동북지방의 역사이지만 한국은 그 근원이 되면서 주된 역사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사의 첫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고조선의 역사가 그러하고 그 이후 부여가 있었고, 고구려 때에 오면 다물이라고 하여 고조선의 옛 영토를 회복하고자 하였다. 결국 고조선의 정통성을 계승한 고구려가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 고구려를 계승하고자 했던 발해의 대조영은 동생 대야발에게 단군조선의 역사서인 『단기고사』를 쓰게 하였다. 이것은 고구려도, 발해도 모두 그 뿌리는 단군조선에 있음을 잘 알 수 있는 내용이다. 발해를 건국한 주체의 성격도 규정이 가능하고 대조영의 출자 관계도 정리할 수 있다. 이렇듯 말갈이 한민족의 한 갈래이고 오늘날 대한민국을 구성하는 한 일원이라면 우리 역사가 외면하면 안 되는 존재인 것이다.

위와 같이 고구려사와 발해사가 그러했고 그 뿌리가 되는 고조선의 역사가 동북아시아의 중심이었다. 한반도를 비롯하여 만주지역과 요동ㆍ요서지역을 모두를 아우르는 지역은 동북아시아를 주도하는 민족과 국가들과 관련이 많다. 따라서 그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만주 전역에서 그 생활터전을 갖고 있었고 유목민족으로서 이동을 반복하면서 여러 민족을 만났고 그들과의 관계를 통해 그 지역의 새로운 역사를 써 왔던 말갈. 비록 스스로 역사서를 남겨 놓지는 않았지만 관계사적 측면에서 말갈과 여러 국가(민족) 간의 관계에 대한 연구를 통해 한국사를 비롯하여 동북아시아의 역사를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데, 그 세부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 고구려와의 관계에서 고구려가 성립되기 전에 이미 말갈집단이 존재했으므로 그들은 어떤 존재인지와 백제와 신라와는 다르게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때로는 고구려를 위해 목숨 걸고 싸웠고 고구려 멸망 후에는 고구려 부흥 운동을 전개하는 말갈은 고구려의 피지배계층인지 아니면 고구려 변방 주민들에 대한 비칭 혹은 범칭인지를 알 필요가 있다. 이것은 고구려사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후대인 발해사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두 번째, 백제와의 관계에서 백제 건국 초기부터 말갈은 백제를 괴롭혔고 온조왕은 건국 초기 가장 집중했던 것이 말갈과의 대외관계였다. 어떻게 보면 말갈과의 전쟁 수행을 통해 고대국가로서의 기틀을 다졌고 그래서 삼국 중에서 백제가 가장 빨리 최전성기를 맞이할 수 있었다. 그런데 고이왕 때가 되면 말갈과 이상한 평화 관계가 유지가 된다. 그래서 제기가 되는 것이 고이왕의 친말갈 정책은 고이왕이 말갈계가 아닌가 하는 추정을 가능케 한다. 만약 고이왕이 말갈계라면 이것은 한국고대사를 다시 써야 될 지도 모를 일이다. 왜냐하면 백제는 고이왕 때 고대국가로의 기틀을 잡았고 좌평과 같은 관등제도도 이때 나왔기 때문이다.

세 번째, 『삼국사기』「백제본기」온조왕조 기록를 보면 ‘국가 동유낙랑 북유말갈’이라고 해서 백제의 동쪽에는 낙랑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이 있다고 되어 있다. 이것은 말갈의 위치를 알려 주는 내용이고, 여기서 낙랑은 요서지역에 있었던 한사군 중 하나인 낙랑군이다. 즉 한사군이 한반도가 아니라 요서지역에 있었다는 것을 알려 주는 내용으로 백제의 초기 건국지가 한반도가 아니라 요서지역이었다는 사실 또한 알려주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말갈과 낙랑은 서로 인접해 있었고 관계 또한 우호적이었으며, 특히 낙랑의 요청으로 백제를 공격하는 행태도 보인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말갈과 낙랑이 동일한 종족 계통이거나 서로 이해관계가 부합이 되었기 때문에 함께 동맹을 맺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고조선 붕괴 이후 열국시대에 즈음하여 열국을 크게 두 가지 계통인 부여계와 진계로 나눌 수 있다고 했을 때 같은 진계로 상당한 친연성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네 번째, 신라와의 관계이다. 신라와 말갈의 접촉은 고구려와 백제보다는 상당히 늦은 시기에 이루어진다. 이것은 초기신라와 말갈은 서로 만날 수 없었던 위치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특히 말갈의 침략에 왕이 반격을 지시하지만 이것이 불가하다는 여론이 있었다. 당연히 말갈의 침탈로 백성들이 곤경에 빠져 있었다면 말갈에 맞서 반격을 해야 하는데, 그렇게 할 수 없었던 사정이나 이유가 무엇인지 안다면 말갈의 정체를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다섯 번째, 신라가 백제를 병합하고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소위 말하는 통일 신라 시기에 고구려와 백제 유민들을 회유할 목적으로 중앙군의 군사편제를 9개의 서당, 즉 구서당으로 구성하는데 구서당의 구성이 의미심장하다. 신라계 3개, 고구려계 3개, 백제계 2개, 말갈계 1개로 구성된 구서당은 특히 제 6서당이 ‘흑금서당’으로 그 구성원이 ‘말갈국민’이었다. 즉 삼국시대 이후 후기신라시기에 중앙군으로 왕의 친위부대인 구서당을 구성할 때 그 여섯 번째 서당을 오로지 ‘말갈국민’으로 구성하였다고 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은 규모만 달랐을 뿐 고구려, 백제, 신라와 동등하게 말갈을 취급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7세기 신라인들의 세계관으로 보면 삼국시대가 아니라 말갈을 포함하는 사국시대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여섯 번째, 신라와 당 연합군에 의해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하고 당나라는 신라와의 동맹을 무시하고 신라까지 병합하려고 하였다. 그래서 나당 전쟁이 일어났고 이제 한민족의 운명이 걸린 한판 승부가 벌어지는데, 매소성 전투에서 신라군이 승리를 거두면서 결국 당나라 군대를 축출할 수 있었다. 그런데 당나라 군대에는 이상한 집단이 섞여 있었다. 그들은 말갈병과 거란병이었다. 당군은 고구려가 멸망한 후 흩어진 말갈족과 거란족을 흡수하여 당군으로 결성하여 신라전에 투입한 것이다. 당나라는 고구려와 전쟁에서 고구려군 선봉에서 싸웠던 말갈군들을 전쟁이후 잔인하게 생매장하였다. 이것은 그만큼 미웠던 대상이었다. 그런데 신라와 전쟁에 버젓이 그들을 데리고 나온 것이다. 말갈인도 마찬가지다. 고구려와 당나라 간의 전쟁에서 고구려를 위해 목숨 걸고 선봉에서 열심히 싸웠던 그들이 이제는 당나라편이 되어 신라군을 공격한다는 것이다. 이때 등장하는 말갈은 그 전의 말갈과는 다른 존재인지 알 필요가 있겠다.

일곱 번째, 고구려 멸망 후 고구려 지역 곳곳에서 고구려 복국운동이 일어났다. 고구려의 왕족이나 귀족 등 핵심집단들은 당나라의 산개정책에 따라 뿔뿔이 흩어졌다. 그나마 주거지역에 남아 있었던 말갈계 고구려인들이 고구려 복국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었고 그들 중심으로 발해가 건국이 되었다. 그래서 당나라에서는 처음에 말갈국이라고 불렀고, 신라도 발해 말갈 혹은 말갈이라고 불렀다. 그러다가 최치원 때 와서 발해를 ‘북국’이라고 표현한다. 이것은 ‘사불허북국거상표(謝不許北國居上表)’ 에 나오는 말로 바로 발해에서 스스로 강대국을 자처하면서 신라보다 윗자리에 앉아야 된다고 당나라에게 정식으로 요청하였지만 당나라는 발해의 요청을 거절하였고, 이에 최치원은 너무나 감읍한 나머지 ‘사불허북국거상표(謝不許北國居上表)’라는 표문을 지어 당나라 황제에게 올리게 된다. 즉 이것은 발해가 위에 있도록 허락하지 않은 당나라 황제에게 감사하는 표문이다. 당시 당나라인과 신라인들은 발해인들을 말갈인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신라인들은 발해를 북국이라고 표현하면서 신라와 발해를 남ㆍ북국으로 인식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발해가 곧 말갈이며, 말갈이 곧 발해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여덟 번째, 발해왕은 일본왕에게 국서를 보내면서 고려국왕으로 표현하여 고구려를 계승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또한 일본은 8세기 초 발해를 지칭하는 말로 말갈국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그런가하면 762년 일본열도의 동북변경에서 건립된 일본 미야기현의 다가죠비에는 ‘말갈국’이라는 표현이 있다. 이것이 발해국을 의미하는 지는 명확하지는 않다. 다만 정황으로 볼 때 발해국을 지칭할 수도 있고 아니면 말갈족 전체를 지칭하는 표현일 수도 있다, 여기서 일본의 말갈(발해)인식을 통해 일본과 말갈 간의 관계를 추정할 수 있다.

아홉 번째, 고구려가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하자 많은 고구려 유민과 말갈인이 신라로 귀순한다. 그런가 하면 발해가 거란족에 의해 멸망하자 많은 발해 유민과 말갈인은 고려로 귀순하게 되는데, 여기서 일정한 관계가 성립됨을 알 수 있다. 그 관계를 헤아려 보면 말갈에 대한 역사 귀속의 문제와 민족의 특성을 추정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열 번째, 말갈과 동시대에 같은 공간인 만주지역에 있었던 종족이 거란족이다. 동일한 시대, 동일한 만주지역에 존재했었던 거란과 말갈의 관계를 통해 만주지역 유목민족들의 특성과 고구려와 발해 등과 어떤 친연성이 있는지 살펴 볼 수 있을 것이다.

 

말갈을 통해 만주사를 정리함으로써 우리 역사의 기원과 원류를 이해할 수 있다

이렇듯 단편적이거나 특정 사관에 입각한 지극히 제한적인 말갈 연구가 아니라 한국사의 범위를 확장시키고 나아가 동북아시아의 역사적 갈등을 해소하여 동북아시아 지역의 화해 분위기를 조성하면 한국을 비롯한 동북아시아를 중심으로 인류평화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말갈족이 광범위하게 분포하고 있었다는 만주는 한국사에서는 특별하다. 한국의 고대 및 근대의 역사가 살아 숨 쉬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만주는 한국사와 많이 연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말갈사를 비롯한 만주사를 제대로 정리할 필요가 있다. 말갈의 전신이라고 하는 숙신, 예맥, 동호 등에 대한 연구와 후대의 제 종족들과의 연관성 그리고 북방유목민족들 간의 상호 연관성과 그들의 움직임이 갖는 세계사적 의의를 살펴봄으로써 한민족의 기원과 원류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2)

 

 

 

 

신용하 

 

 

헝가리 세운 ‘마자르족’ 조상은 부여계 기마민족
중앙선데이
입력 2021.04.03 00:21 업데이트 2021.04.03 00:59 [출처:중앙일보] https://www.joongang.co.kr/article/24026923

유럽으로 간 고조선 문명 〈끝〉

아르파드의 지휘 아래 마자르족이 카르파티아 분지로 이동하는 모습을 그린 헝가리 기록화. 기병대는 부여·고구려·말갈족처럼 새 깃털을 꽂은 관(鳥羽冠)을 쓰고, 일반 백성은 고깔모자를 쓰고 있다. [위키피디아]

 

현대 헝가리의 직접 조상은 멀리 동방에서 출발하여 AD 895년 카르파티아 분지(판노니아 평원)에 영구히 정착해서 헝가리 왕국을 세운 고조선·부여 후예 ‘마자르’(Magyars)족이었다.

고조선과 고중국의 국경이 지금의 베이징 부근 영정하(永定河)와 간하(干河) 일대였을 때, 고조선의 간하 일대를 지키던 기마민족이 산융(훈족)과 ‘불도하’였고, 영정하 일대를 지키던 기마민족이 ‘불리지’와 ‘고죽’이었다. 산융은 매우 강대한 데 비하여 불도하는 강소했기 때문에, 불도하는 지금의 탁록(涿鹿)현에 맞닿은 간하 동쪽만 지키고, 광활한 서쪽은 산융이 지키면서 형제처럼 잘 협동하고 있었다.

 

헝가리 교과서에 개국 설화 실려

마자르 전통 흰옷과 붉은 댕기를 단 소녀들의 민속춤. 강강술래를 닮았다. [위키피디아]

 

불도하는 머리 명칭 ‘불’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부여족 일파였다. 부여는 처음 ‘예’족이 건국했다가 후기에 왕조가 ‘맥’족으로 교체되어, ‘예맥족’ 국가가 되었다. 고조선은 용감한 예족 기병부대를 훈족(산융)에 붙여서 서변 요충지 간하 방어에 배치했었다. BC 108년 고조선 해체 후 불도하는 농경민만 남고 유목 기마부대족은 훈족을 따라 이동하다가 결국 중앙아시아에 들어갔다.

 

현재 헝가리의 교과서에도 실려 있는 마자르족의 개국 설화에는 한 나라 임금에게 두 아들 훈오르(Hunor)와 마고르(Magor)가 있었는데, 사냥 나갔다가 불가사의한 수사슴을 만나 뒤쫓았더니 두 사냥꾼을 깊은 숲속으로 유인하고는 사라져 버렸다고 한다. 실망한 두 사냥꾼에게 즐겁게 웃고 노래하는 소리가 들려 가보니, ‘둘’(Dul) 왕의 아름다운 두 딸이 호수에서 물을 튀기며 놀고 있었다. 두 아들은 두 공주를 각각 말에 태우고 돌아와서 혼인하여 아내로 삼으니, 훈오르가 낳은 자손이 훈족(Huns)이 되고, 마고르가 낳은 자손이 마자르족(Magyars)이 되었다고 기록돼 있다. 이 설화는 훈족과 마자르족이 국왕을 같이한 형제 관계이며, 훈족이 형이고 마자르족이 아우임을 알려주고 있다.

 

여기서 ‘훈오르’는 ‘훈+오르’로, ‘마고르’는 ‘마ㄱ+오르’로 분절된다. 이어 ‘마가르’가 ‘마자르’로 변음되었음을 알 수 있다. 부여는 대장군이나 장관을 ‘가’(ga, gar)로 호칭하고, 말·소·양·개 등의 가축 이름을 붙였는데, ‘말가(르)’가 ‘마자르’로 변음된 것으로 해석된다. 마자르족 개국설화는 고조선 시기 훈족과 불도하의 형제 관계와 관련이 있다고 필자는 본다. 이 설화는  동일 국왕 아래서 살다가 이동하여 각각 훈족과 마자르족을 형성했음을 시사하고 있다.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불도하의 족장 말가(르) 지휘 하의 기마부대족은 2~4세기경 훈족의 뒤를 따라 우랄산맥의 동쪽 토볼강 유역에 정착했다. 이 시기부터 부족 이름이 마자르(마가르)로 부르게 된 것으로 보인다. 훈족이 4세기에 더 서방으로 이동하여 판노니아 평원으로 들어가자, 마자르족은 우랄산맥 서쪽 카마강과 볼가강 사이의 이전 훈족의 첫 정착지 자리로 이동했다.

이곳에서 마자르족은 목축과 농경에 힘쓰며 상당히 성장하여, 헝가리 학자들이 ‘대(大)헝가리아’(Magna Hungaria)로 호칭하는 시기를 맞았다. 그러다 마자르족은 5~7세기 돈(Don)강과 드니에프르(Dniepre)강 하류 사이의 레베디아 지방으로 이동했다가 강대한 불가르 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헝가리 왕국을 건국한 마자르족장 아르파드 동상. 부다페스트 광장. [위키피디아]

 

마자르족은 7세기 말~8세기 전기에 막강한 힘을 배양했다. 그 요인이 동방으로부터 찾아온 유목민의 충원을 받은 것이라면, 필자는 그것을 속말말갈(粟末靺鞨)족으로 본다. 원래 말갈족의 본거지는 부여의 통치 아래서 요동지방 동만주에 분포된 7개 부족으로 구성돼 있었다. 고구려 건국 후 영토 확장 과정에서 ‘제2 송화강’ 부근의 ‘속말말갈’이 영토를 지키려고 581~600년 고구려와 전쟁에서 패했다. 대부분 고구려에 항복해 고구려 신민이 되었으나, 궐계부(厥稽部)의 ‘만돌’과 그의 동생 ‘돌지계’는 항복을 거부하고 수나라로 피신했다. 수나라는 이들을 요서의 대릉하 부근에 두었는데, 동생 ‘돌지계’는 수나라의 신하가 되었고, 형 ‘만돌’과 그 기마부대는 탈출하여 중국 역사에서 사라졌다. 이것이 요서 지방으로 이동한 유일한 말갈족 기병부대이다(『隋書』, 『太平寰宇記』, 『北史』). 이들이 중앙아시아의 동일 예족인 마자르족을 찾아가 합류한 것으로 추정된다.

 

 

마자르족은 8~9세기에 드니에프르 강과 드니에스테르(Dnyester)강 사이의 흑해 위 서편 카자르 제국 영토인 에텔쾌즈(Etelkoez) 지방으로 민족이동을 감행해 정착하며 독립을 선언했다. 그러나 카자르 제국은 마자르족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고 889년 마자르족을 공격했다.

 

말갈족 기병부대 합류한 뒤 강성

마자르족은 다시 895~900년 카르파티아 분지(판노니아 평원) 안으로 민족이동을 감행했다. 이곳은 동로마의 영지였으나 로마인은 많지 않았고 약 20만 명의 슬라브족이 살고 있었다.

마자르족은 이 민족이동 때 7개 기마 부족장이 모여 혈맹의 뜻으로 피를 나누어 마시고 아르파드(Arpad)를 왕으로 지명함과 동시에 그의 남자 후손을 세습 군주로 봉대할 것을 서약했다.

아르파드가 지휘하는 약 2만 명의 정예 기병부대는 895년 카르파티아 산맥을 넘어 분지 안으로 진입해서 슬라브 농민들을 신속하게 정복했다. 아르파드는 뒤따라온 약 40만 명의 마자르족을 정착시키고, 마침내 카르파티아 분지에 마자르족의 헝가리 왕국을 건국하였다. 이것이 현대 헝가리 마자르족 국가의 시작이다.

말, 투룰(Turul·신성한 새) 등을 새긴 마자르족의 토템 장식(왼쪽부터). [위키피디아]

 

마자르족의 동방 기원 이해를 위해 부여족·말갈족·고구려족과 흡사한 몇 가지 전통 민속을 예로 들면 다음과 같다.

① 부여 왕족 토템은 ‘사슴’이고, 주민 토템은 ‘새’였다. 마자르족 건국 설화에 사슴과 투룰(Turul, 독수리)이라는 새가 나오는데, 연관성이 현저하다. 국민들 사이에서는 말이 애호되었다.

② 마자르족의 반수혈(半竪穴) 가옥은 부여의 수혈 주거와 매우 유사하다.

③ 마자르족 주민의 7부족(Hétmagyar) 구성은 부여의 ‘예’계 말갈족의 7개 부족 구성과 같다.

④ 마자르족의 남·녀 복식과 고깔모자는 부여족의 복식과 고깔모자와 매우 유사하다.

⑤ 형이 사망하면 아우가 형수를 취하는 마자르족의 제도는 구려·고구려와 동일하다.

⑥ 마자르족의 민족음악 5음계는, 부여족 등 고조선 후예들의 민족음악 5음계와 동일하다.

⑦ 마자르족 언어는 아발족(우구르족) 언어와 가까운 친족 관계이다. 이것은 고조선 언어가 부여·아발어·말갈어·마자르어의 조어(祖語)이기 때문이다.

⑧ 마자르족의 장수들과 아르파드 족장의 군모에 새 깃털〔鳥羽〕을 꽂는 양식은 부여·고구려의 깃털 모자와 동일하다.

⑨ 마자르족의 전통 종교는 텡그리즘(Tengrism)으로 단군 신앙이다.

⑩ 마자르족의 신앙에 단군과 함께 태양과 불〔火〕에 이어 달을 숭배하는 전통은 부여족의 태양·달·불 숭배와 동일하다.

※고조선 문명의 후예들이 유럽에 들어가서 수행한 활동을 되돌아본 이 연재를 이번 회로 종료합니다. 인류의 편견 없는 소통과 교류를 위한 연구와 토론이 이어지길 기원합니다.

 

서울대 사회학과 명예교수. 대한민국학술원 회원. 서울대 교수(1965~2003) 정년퇴임. 한양대·이화여대·울산대 석좌교수(2003~2018) 역임. 저서 『독립협회 연구』 『한국독립운동사 연구』 『3·1운동과 독립운동의 사회사』 『한국 민족의 기원과 형성』 『고조선 문명의 사회사』 등 다수.(3)

 

 

 

 

 

강인욱 

 

 

우리 고대사의 변방, 말갈인을 찾아서

2019. 8. 16. 06:06

 

[책과 생각] 강인욱의 테라 인코그니타
⑫두만강 유역 말갈인

삼국시대엔 강원도 지역 사람들을 말갈이라고도, 예맥이라고도 했다. 강원도 지역을 말갈로 불렀던 이유도 그들이 오랑캐라서가 아니다. 우리 역사 안에서 전통적인 농사보다는 사냥과 무력에 의지해서 백두대간의 산악지역에 살던 사람들을 통칭하는 것에서 유래했다. 이렇듯 우리가 말갈이라는 사람들을 ‘한국사’ 대 ‘오랑캐 역사’라는 이분법적 잣대로 보는 것은 변방에 대한 편견이 작용한 것이다.

1989년 두만강에서 2000㎞ 떨어진 중국 산시성 시안. 건물 공사 현장에서 우연히 당나라 시기 무덤의 묘지명이 발견되었다. 현지 고고학자들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이 유물에 흥분한 이들은 한국의 고대사학자들이었다. 이 묘지의 주인이 당나라 관리로 살았던 고구려 유민이었기 때문이다. 묘비에 적혀 있는 이름은 ‘이타인’(李他仁·609~675). 흥미로운 점은 이타인이란 이름이 그동안 중국에서 발견되었던 고구려 유민의 성씨와는 달랐다는 점이다. 이제까지 11명의 고구려인 묘지가 나왔는데, 모두 왕족인 ‘고’씨와 ‘천’씨였다. 이씨 성의 고구려인은 이타인이 처음이었다.
이타인의 고향은 ‘책주’(柵州), 즉 지금의 훈춘을 중심으로 하는 두만강 유역이라는 점이 곧이어 밝혀졌다. 최초의 두만강 출신 고구려인이 발견되면서 고대사학계에서는 이타인이 고구려인인지 말갈인인지를 두고 논쟁이 벌어졌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혈연적인 계통이 아니다. 바로 이타인이 고향에서 2000㎞ 떨어진 시안에 묻히면서까지도 ‘두만강 출신의 고구려인’임을 자랑스러워했다는 점이다.
최근 중국과 역사 분쟁으로 발해와 고구려가 우리의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발해와 고구려에 쏠린 관심은 한편으로는 우리 역사의 한 부분이었던 말갈과 여진에 대한 평가를 더욱 소외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한국 쪽이 발해와 고구려사를 지키는 주요한 논리로 ‘발해의 상층부는 고구려를 계승했기 때문에 기층인 말갈인과는 달랐다’는 논리를 폈기 때문이다. 그 결과 말갈은 한국사와 완전히 관계가 없는 이방인이라는 오해마저 주었다. 말갈이나 여진 같은 북방사는 한국사도 중국사도 아닌 회색지대에 놓여 있고, 국내엔 제대로 된 전공자도 없다. 그사이 중국이 말갈과 여진을 일방적으로 자기들 역사로 편입한 상황이다. 한국과 중국의 정치적 역사 해석으로 인해 우리 역사의 일부였던 말갈은 이방인이 되었다.
고고학이 전하는 말갈의 실체는 다르다. 최근 러시아와 연변 일대에서 발굴된 고고학 자료로 말갈이 백두대간을 따라 연해주와 강원도 일대에서 살던 우리의 일부였음이 밝혀지고 있다. 말갈인이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던 두만강 유역은 한국과 북방사를 이어주던 역동적인 역사의 공간이었다.

말갈의 후예인 우데게인. 강인욱 제공

 

고구려인으로 산 두만강 말갈인

말갈 7부족은 만주 일대의 각 강을 끼고 농사보다는 사냥, 채집에 기반을 둔 호전적인 사람들이었다. 말갈이 중국에 알려진 것은 서기 6세기다. 말갈이 고구려로부터 독립해서 만주 일대 곳곳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만들고 난 이후다. 그 뒤 말갈은 발해에 포함되었다가 발해 멸망 뒤엔 여진으로 성장해서 동아시아를 호령하는 거대한 제국으로 이어졌다. ‘퉁구스족’이라고 불리는 만주 일대의 원주민들이 바로 말갈의 후예이다. 워낙 남아 있는 자료가 적다 보니 연구자가 거의 없었고, 대신에 소련 시절에 동아시아를 조사하던 러시아 학자들이 연구의 맥을 이어왔다.

 

다행히 최근에 두만강 유역을 중심으로 말갈에 대한 연구가 다시 시작되고 있다. 두만강 유역은 고조선 시기부터 옥저인들이 살다가 고구려에 복속되었다. 이후 이 지역에서는 말갈의 일부인 백산말갈이 등장했다. 고구려에 옥저나 말갈인이 복속된 것인데, 문제는 고고학 자료였다. 아무리 발굴을 해도 이 지역에서 제대로 된 고구려 유적은 거의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에 이타인의 무덤이 발굴된 것이다. 제대로 된 고구려 유물은 찾아볼 수 없는 두만강 유역 출신임에도 이타인은 자신을 고구려 사람으로 자처했다. 즉, 이타인을 비롯한 두만강 유역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문화를 유지하며 동시에 고구려인으로 살아갔음을 의미한다. 두만강 유역은 옥저와 말갈의 터전인 동시에 고구려의 땅이었다. 말갈이라면 무조건 오랑캐이며 다른 혈연적인 사람이라는 우리의 선입견이 틀린 것이다. 고구려는 일찌감치 두만강 유역을 간접 지배했으며, 두만강 유역의 사람들은 자기의 삶을 살았음을 의미한다.

한국외대 여호규 교수의 논문에 수록된 이타인 묘지의 탁본. 강인욱 제공

 

처음에 두만강 유역에서 살던 사람들은 고구려와 언어, 생활풍습이 비슷했던 옥저였다. 하지만 서기 4세기를 기점으로 그들은 주로 산속에서 살며 사냥을 하는 말갈로 바뀌었다. 이렇게 주민이 바뀐 데에는 두만강 유역의 지리적 환경에 원인이 있다. 두만강 유역은 동쪽으로는 동해, 서쪽으로는 가파른 백두대간이 가로막고 있고, 그 사이에 좁은 평야가 발달한 지형이다. 게다가 기후마저 한랭하다. 그러니 농사에만 의존할 수 없고, 사냥이나 채집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때에 따라 강가에 마을을 만들어 농사를 짓던 옥저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강력한 군사력으로 주변 지역을 호령하던 말갈이 되기도 했다.

 

동해안을 따라서 두만강 유역과 이어지는 강원도도 마찬가지다. 삼국시대엔 강원도 지역 사람들을 말갈 또는 예맥이라고도 했다. 백제, 고구려, 신라가 차례로 이 지역을 점령했지만, 고고학 발굴을 해보면 정작 강원도 지역의 기층문화는 거의 바뀌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강원도 지역을 말갈로 불렀던 이유도 그들이 오랑캐라서가 아니다. 우리 역사 안에서 전통적인 농사보다는 사냥과 무력에 의지해서 백두대간의 산악지역에 살던 사람들을 통칭하는 것에서 유래했다. 이렇듯 우리가 말갈이라는 사람들을 ‘한국사’ 대 ‘오랑캐 역사’라는 이분법적 잣대로 보는 것은 변방에 대한 편견이 작용한 것이다.

말갈의 샤먼들이 썼던 허리띠. 강인욱 제공
중국 지린성박물원에 전시된 말갈인들이 쓰던 그릇들. 강인욱 제공
중국 연해주박물관에 전시된 말갈의 발달한 철제 무기 칼. 강인욱 제공

 

고구려 이후 만주 일대로 영역을 넓혀나간 말갈은 점진적으로 한국사에서 멀어지며 자신의 역사를 만들어갔다. 서기 6세기께부터 만주 북쪽의 말갈은 고구려의 세력에서 벗어나서 독자적으로 중국에 사신을 파견하기 시작했다. 이후 말갈은 발해의 기층민으로 다시 편입되었다가 발해가 멸망하자 여진으로 거듭나며 강력한 국가를 만들기 시작했다. 잘 알려진 것처럼 말갈의 후예인 여진은 금나라와 청나라를 세워서 대륙을 지배했다.

 

모든 여진이 중원으로 진출한 것은 아니었다. 한국사로 편입된 여진의 세력도 적지 않았다. 여진의 일파는 함경도에 있었고, 그들은 조선이 건국되며 한국사에 자연스럽게 편입되었다. 조선의 건국에 기여한 이지란이 있고, 함경도에는 여진 시대의 무덤이 많이 남아 있다. 말갈에서 여진으로 이어진 사람들은 고려와 조선시대에 산악지역에서 주로 가죽을 가공하고 사냥을 하던 사람들로 이어졌다. 고려시대 양수척, 수척, 화척 등을 거쳐서 조선시대의 백정으로 계승되었던 배경이 있다. 조선시대 후기에 등장한 발달한 소고기 가공 및 다양한 가죽과 모피의 가공 등 전통적인 농경사회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가죽과 관련된 선진적인 기술은 말갈 이후로 한반도 산악지역의 사람들을 통해 계승된 것이다.

 

한편, 한국과 중국사로 편입되지 못한 말갈의 후예들은 만주와 연해주 일대에서 소수민족으로 여전히 남아 있다. 수많은 말갈 계통의 부족들은 18세기 이후 청나라와 러시아의 진출 과정에서 사라졌지만, 지금도 남아 있는 대표적인 말갈의 후예가 바로 나나이족(중국에서는 혁철족이라 불림)과 우데게인이다. 나나이족은 우수리강과 흑룡강 유역에서 여름에 회유하는 연어를 잡는 사람들이고, 우데게인은 험한 산속에서 사냥을 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중국이나 러시아 사람들과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았기 때문에 소멸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다. 소련 시절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국민가수였던 콜라 벨디, ‘슈퍼주니어’ 출신 배우 한경이 바로 나나이족 출신이다. 비록 그들은 중국과 러시아라는 나라로 갈라져서 다른 모습으로 살고 있지만, 말갈의 문화와 사람들은 이렇게 우리 주변에 숨어 있다.

러시아의 국민가수인 말갈인의 후손 콜라 벨디. 강인욱 제공
 
말갈, 오랑캐에서 유라시아로

 

말갈에 대한 우리의 오해는 사실 두만강 유역에서 만주로 이어지는 북방사 인식이 얼마나 편협한지 잘 보여준다. 한국, 만주, 유라시아 역사의 교차점인 두만강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너무나 좁았다. 이제까지 우리의 북방사 인식은 ‘한국사인가 아닌가’를 두고 벌이는 소모적인 논쟁만을 되풀이했기 때문이다. 현대인의 정치적인 시각으로 과거 사람들의 역사를 섣불리 일개 국가의 역사로 판단하는 것은 오히려 오해만을 초래할 뿐이다. 제대로 된 연구도 없이 ‘한국사인지 아닌지’를 잣대로 결론을 내버리는 것은 ‘모든 아시아 역사는 중국사’라고 선험적으로 규정하고 재단하는 중국의 역사관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최근 남북한의 화해 무드와 유라시아 신북방정책에 대한 기대로 시베리아 열차와 이어지는 두만강 유역이 주목받고 있다. 경제적인 효과와 통일을 이야기하기 전에 우리 안의 변방이었던 두만강 유역과 그 지역의 역사를 재평가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우리 역사 속의 변방인 말갈에 대한 재평가야말로 한국과 북방 유라시아사를 잇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4)

 

 

 

 

김운회

 

 

 

쥬신의 실제 뿌리, 물길과 말갈

김운회의 '대쥬신을 찾아서' <11>

김운회 동양대 교수  |  기사입력 2005.06.07. 17:10:00
 
***유리(羑里)에 가서 불탄다**

노태맹

이제 유리에서 푸른 강의 은유는 끝났네.
물고기 산중에 매달려있고
아침이면 가장 높은 곳으로부터
마른 북 울리며 늙은 소 물 마른 강가로 내려오네.
불길한 괘처럼 태양 속에 별이 뜨고
우리 딱딱한 혀는 얼마나 오래 유리의 은유를 견디는지.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적인 유리 나무들 제 마른 팔 부러뜨리고
붉은 새 안간 힘으로 둥근 유리의 시간 빠져 나가네.
그러나 여기 유리에는 외부는 없네.
마른 북 울리며 늙은 소 가장 높은 곳으로 올라가고
물 마른 강가 저녁 얼굴 가리고
부러진 나무속에 갇혀 우리 불타네, 우우
유리에 가서 우리 불타네.

- 노태맹 시집. 『유리에 가서 불탄다』(세계사 : 1995) -

‘유리(羑里)’란 삼천백여 년 전 은(殷)의 폭군 주왕(紂王)이 문왕(文王)을 가둔 감옥입니다. 문왕은 주(周)를 건국한 무왕(武王)의 아버지로 유리에서 복희(伏羲)씨가 그린 ‘팔괘(八卦)’를 처음으로 연역(演易)‘하였는데 이것이 주역(周易)의 시작이라고 합니다.

무왕은 은나라를 멸하고 주나라를 세웠습니다. 무왕과 그의 후예들은 쥬신의 손발을 묶어 빠져나올 길이 없는 유리에 가두었습니다. 그로부터 수천 년 동안 쥬신은 유리(羑里)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1) 숲의 사람**

우리는 때로 고정관념의 틀에서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조금만이라도 그 관념의 틀을 벗어나 보면 금방 알게 되는 것들도 그 관념 속에서 헤매다가 그 관념 속에 함몰당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른 경우도 많지만 우리 역사에서 대표적인 경우는 물길(勿吉), 또는 말갈(靺鞨)이라는 민족에 대한 것입니다.

말갈과 관련하여 몇 가지 먼저 알아둘 사항이 있습니다. 말갈은 고구려나 발해와도 깊은 관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중국에서의 “고구려·발해는 소수민족 지방정권”이라고 하여 한국사와는 무관한 중국사의 일부로 보고 있습니다. 즉 발해는 ‘말갈족을 주체로 한 민족 정권인 동시에 당나라 중앙 정권의 책봉을 받아 당 왕조에 예속된 지방 정권’, 혹은 ‘소수민족이 세운 지방 정권’이라는 것입니다. 중국 정부의 공식입장을 대변하는 중국의 국정교과서에는 “발해는 당현종(唐玄宗)이 발해군왕(渤海郡王)으로 임명한 속말부(粟末部)의 수령(首領) 대조영(大祚榮)이 세운 속말말갈(粟末靺鞨)의 지방 정권’(『중국역사, 초급중학교과서』).”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뒷받침하는 중국학자들의 연구로 “고구려인은 여진족과 동일하다”라는 주장[왕건군(王健群),「고구려족속탐원(高句麗族屬探源)」『學習與探索』53 : 1987-6]도 있습니다. 즉 고구려는 부여(夫餘)에서 왔고 부여는 숙신(肅愼) 계통의 퉁구스족, 즉 후대의 여진족이므로 고구려인도 여진족과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발해도 ‘고구려족(高句麗族)의 별종(別種)도 아니고 고구려의 후예도 아닌 중국 동북지방에 예로부터 생활해 온 숙신족(肅愼族)의 후예인 속말말갈족(粟末靺鞨族)’이라는 연구(김향, 「발해국의 일부 민족문제에 대하여」)가 있습니다.

제가 보기엔 위에 나타난 내용만으로 보면 왕건군이나 김향의 주장은 크게 틀린 것이 없습니다. 문제는 이런 당연한 이야기를 스스로 받아들일 수 없는 한국사학계의 고질적인 ‘새끼 중국인’ 근성입니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숙신, 물길이나 말갈은 우리와는 다른 미개한 오랑캐로 고구려나 부여의 지배를 받은 민족이라고 생각해왔습니다. 그러다 보니 동북공정에서 주장하는 바와 같이 고구려도 숙신, 즉 후대의 여진족의 국가라고 하니 꼼짝없이 당하게 된 것입니다.

앞에서 보았듯이 숙신(물길ㆍ말갈)은 중국의 산서지방에서 흑룡강 연해주 등지에 걸쳐서 거주한 민족의 범칭(일반적으로 두루 부르는 이름)으로 불리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앞에서 본 대로 말갈이나 물길이란 만주어로 밀림, 또는 삼림의 뜻인 ‘웨지’[窩集 (Weji)], 또는 ‘와지’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즉 ‘산골 사람’, 또는 ‘숲의 사람’이라는 의미로 특정한 권역을 가리키고 있지는 않지요. 그리고 이 말이 ‘해 뜨는 곳(日本)’을 의미하여 쥬신의 일반적인 명칭을 따른 것을 알 수 있지요.

일부에서는 물길이 부여나 고구려 계열과는 전혀 다른 종족이라는 근거로 『위서(魏書)』[북위(北魏)의 역사서 - 『삼국지』의 위나라가 아님] 「물길전」의 “물길의 말이 다른 동이의 그것과는 다르다.”라는 기록을 들고 있습니다. 이것은 『위서』「물길전」의 기록이 아이누(좀 더 엄밀하게는 아이누의 선조, 또는 길랴크 같은 고아시아족), 또는 아이누와 교류하는 일부 숙신인들을 지칭하면서 아이누의 언어와 숙신 즉 물길의 언어를 혼동하여 생긴 일로 보입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읍루 지역(아이누나 고아시아족의 영역)에 살고 있던 숙신을 아예 읍루처럼 불렀던 것 같습니다(‘읍루의 함정, 그리고 카멜레온 숙신’ 참고).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냐고요? 바로 물길의 위치 때문이지요. 『위서』에 따르면 물길의 대체적인 위치는 북류 송화강변이었습니다(『魏書』卷100「勿吉傳」). 이 지역은 현재의 하얼빈 동쪽 송화강이 북류하는 지역으로 하바로프스크에서 콤소몰스크(Komsomolsk)에 이르는 지역으로 추정됩니다.

그런데 앞 장에서 물길은 발해 때 숙신의 한 갈래가 막힐부(鄚頡部)를 중심으로 먼저 물길을 칭하였다는 말씀을 드린 바 있죠[북한사회과학원『발해국과 말갈족』(중심 : 2001) 107쪽]. 구체적으로 보면, 5세기 경 물길이라는 이름을 가진 종족이 사서에 나타납니다. 그렇지만 현재까지 정확히 언제 이 물길이라는 명칭이 나타났는지 알 수는 없습니다. 다만 연흥 5년(475년) 물길의 을력지(乙力支)가 북위(北魏)에 사신으로 간 것이 기록되어 있으므로 그 이전의 시기로 볼 수는 있겠지요. 그리고 물길이 조공을 보낸 마지막 기록은 북제의 무평 3년(572년)입니다. 물론 이것은 기록상의 이야기이고 실제로 물길이 이 기간에만 존속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고 다만 이 마지막 조공 후에도 일정하게 그 이름은 있었겠지요,

문제는 물길을 가장 먼저 칭한 막힐부의 위치가 현재 랴오닝성(遼寧省) 창튜현(昌圖縣)으로 추정된다는 것이죠. 이 막힐부는 고구려가 설치하였고 발해가 이를 계승한 곳이었죠. 이 곳은 과거 고조선의 영역이자 동호의 영역인 지역입니다.

그러면 『위서』「물길전」의 기록은 분명히 이상합니다. [그림 ①]에서 보면 랴오닝성 창튜현의 위치는 요하(遼河) 북쪽입니다. 만주 서쪽 경계 가까이에서도 물길이 존재하고 동쪽 끝부분에서도 또 물길이 나온다는 말이지요? 그렇다면 만주 지역 전체에 해당되겠군요. 손오공처럼 동쪽 끝과 서쪽 끝을 구름을 타고 날아다닐 일은 없었을 테니 말입니다. 결국 물길의 영역은 요하에서 하바로프스크가 위치한 연해주 일대에 분포한 것이 되어 결국 숙신의 영역과 다를 바가 없지요. 차라리 범쥬신의 영역이라는 편이 나을 듯 한데요. 이것을 [그림 ①]로 확인해 보세요.

[그림 ①] 물길의 영역

그래서 『위서』「물길전」의 기록은 잘못된 것이고 이 책 역시 그 동안 고질적인 문제인 숙신(물길)과 아이누를 혼동하여 보고 있죠. 그 동안 이런 유의 기록을 한국이나 중국의 사학자들이 앵무새처럼 다시 반복하여 왔습니다. 그러니 숙신이나 물길의 실체가 보일 리 있나요? 다시 말씀드리면, 숙신의 일부가 읍루(아이누)와 접촉한 것을 두고 『위서』「물길전」은 숙신(물길)을 마치 읍루(아이누를 포함한 고아시아족)처럼 묘사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와 같이 중국의 사서(史書)에서는 쥬신의 종족에 대해서 아무렇게나 기록하다보니 하나의 민족이 여기저기서 서로 다르게 나타나게 됩니다. 여기에다 ‘새끼중국인[小中華人]’을 자처하는 한국의 사가(史家)들이 이것을 지속적으로 비판 없이 받아들여 사용하다보니 쥬신의 역사가 자꾸 안개 속으로 밀려들어가게 된 것이죠.

일단 물길에 대한 사료들을 간단히 보고 넘어갑시다.

물길인들은 문화적으로는 뒤떨어져 있었으나 군사적으로는 매우 강대하여 부여를 멸망시킨 것으로 되어있습니다(『魏書』卷100「勿吉傳」). 대부분의 사서에서 국가를 제대로 구성하지 못하고 만주일대를 살아가는 쥬신들은 강한 전투력을 가진 것으로 묘사됩니다. 따라서 이들 부족들을 지배하기란 매우 어려웠을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들은 수많은 경제적 수탈과 정치적 압제 속에서 강한 전투력을 유지하고 그 한계상황에서는 과감히 도전하고 그들의 정치적 지배를 물리친 경우가 많습니다.

전체 물길인들 가운데 국가구성에 동참하지 않은 물길인들은 전쟁이 벌어지면 부족들을 중심으로 전쟁에 임했으며 전쟁이 끝나면 다시 원래로 돌아가 유목생활을 하였습니다. 각 부족들은 우두머리가 있었지만 전체를 통솔하는 큰 우두머리는 없었습니다(邑落各自有長 不相總一 :『魏書』卷100「勿吉傳」). 그것은 자연환경과 유목과 수렵이라는 경제적 배경에 원인이 있겠지요.

물길은 정착생활을 하기 힘든 상황이기 때문에 중국과는 달리 국가의 영역에 포함되는 사람들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많은 것이죠. 그렇다고 하여 이들이 숙신(물길)이 아닌 것은 아니죠. 우리가 모든 것을 단지 한족(漢族)의 농경민의 시각에서만 보니 이상한 것이죠. 위의 설명[邑落各自有長 不相總一]에서 보듯이 한족(漢族)과 같은 강력한 중앙집권적 지배체제 안에 속해있지 않다고 해서 다른 민족으로 파악해서는 안 되죠[참고로 한족(漢族)의 통치제도는 정착민을 바탕으로 한 철저한 수탈과 착취의 경제구조를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한족(漢族) 왕조들은 지나친 수탈과 사치로 패망합니다].

그러다보니 쥬신을 부르는 이름도 일관성이 없고 대충 부르게 된 것입니다. 한족(漢族)의 입장에서는 국가체제를 구성한 부족은 따로 분리하려 들었고 나머지 사람들은 비칭(卑稱 : 욕)으로 동북방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일반적으로 숙신 또는 물길(말갈)등으로 통칭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이것은 만주 지역의 문화적ㆍ지리적 특성과도 무관하지는 않겠죠. 인구가 극히 희박하고 부족의 단계에 머물러 수많은 씨족 또는 원시적 형태의 부족국가가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족(漢族) 사가(史家)로서는 판단하기에 어려웠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관심도 없었겠죠.

예를 들면 북위의 역사서인 『위서』(「물길전」)에 의하면 물길의 주변에는 대막루국(大莫婁國 : 부여국이라고도 함), 복종국(覆鍾國), 막다회국(莫多回國), 고루국(庫婁國), 소화국(素和國), 구불복국(具佛伏國), 필려이국(匹黎尒國), 발대하국(拔大何國), 욱우릉국(郁羽陵國), 고복진국(庫伏眞國), 로루국(魯婁國), 우진국(羽眞國) 등의 12개국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들은 고대국가 체제가 아니라 부족, 또는 원시적 부족국가 정도의 단계로 생각됩니다. 그런데 이런 부족국가들을 모두 서로 다른 민족으로 분류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림 ②] 북위(北魏 : 386~535)

쉽게 말하면 쥬신은 주로 부족연맹·부족연합국가 등의 특성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을 중앙집권적 구조의 중국인의 사고로는 이해될 리가 없죠. 이런 특성은 부여ㆍ고구려ㆍ백제ㆍ신라ㆍ몽골ㆍ금ㆍ후금(청)ㆍ일본 등에까지 지속적으로 나타납니다. 이런 전통은 일부 지역에서는 이미 농경생활이 정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쉽게 사라지지 않았던 쥬신의 주요 특성입니다[제가 『삼국지 바로읽기』(34장 삼국지와 고구려)에서 쥬신의 특성을 볼복스(Volvox)에 비유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지요].

***(2) 지배층만 고구려인이라니?**

숙신은 남북조 시대를 거치면서 물길과 말갈로 불립니다. 그 동안 우리가 배우고 가르친 대로 동북방의 대표적 오랑캐지요. 지금까지 배운 대로 한다면, 이들은 발해의 피지배계층이라고 합니다. 쉽게 말해서 발해의 지배층은 고구려인이고 피지배층인 민중은 말갈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이 물길과 말갈 역시 안개 속에 있는 민족입니다. 마치 쥬신의 역사가 안개 속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요. 그 동안 요동과 만주 지역의 민족에 대한 연구는 북한(北韓)에서 많이 이뤄졌습니다.

북한의 연구는 발해가 고구려 유민과 대부분 고구려의 전주민(前住民)에 의해 건국된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즉 북한 학자들은 발해주민을 일률적으로 말갈로 부르는 것은 타당하지 않고 대부분이 고구려(高句麗)의 유민(遺民)으로 보아야 한다고 보고 있습니다[북한 사회과학원 『발해국과 말갈족』(중심 : 2001) 120쪽]. 따라서 고구려인들이 발해를 건국했거나 일부의 고구려인이 건국하고 다수의 말갈을 지배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죠. 그리고 통일신라 때 최치원은 발해가 갈족의 한 갈래인 앙갈(鞅鞨)에 의해 건국된 것으로 봅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는 둘 다 잘못되었습니다. 말갈과 고구려 주민을 분리하는 것은 보다 정치적이고 문화적인 문제이지 민족적 특성으로 보기는 어렵지요. 예를 들어 봅시다. 한국의 수많은 씨족 가운데 한 성씨인 전주(全州) 이씨(李氏)가 조선왕조를 건설했다고 해서 그들이 전체 대다수 한국인들과 다른 집단이라고 볼 수 있나요?

발해는 고구려의 유민들을 바탕으로 하여 만주 일대에 광범위하게 존재했던 포괄적인 말갈인(만주쥬신)에 의해 건국된 나라라고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최치원은 중국에 조기유학한데다 중국에 너무 오래 살아서 그런지 발해와 말갈에 대해서는 비하하는 정도가 한족(漢族)의 사가와 유사하고(그래서 여러 망발을 서슴지 않고 있습니다), 북한의 연구는 지나치게 편협해[『력사과학』(1962) 1호 「발해사 연구를 위하여」, 『발해사연구론문집』(1992) 「발해의 주민구성」] 그에 반하는 사료들이 많이 나타나기 때문이죠.

예를 들면 『유취국사(類聚國史)』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발해국은 고구려의 옛 땅이다. … 주현과 관역이 없고 곳곳에 마을이 있는데 모두 말갈인의 부락이다. 백성들은 말갈인이 많고 원주민(土人)들은 적다. 모두 원주민으로 촌장을 삼는다. 큰 마을은 도독, 그 보다 작은 규모는 자사ㆍ수령으로 부른다. 날씨가 극히 추워 수전 농사가 안 된다.(渤海國者 高麗之故地 … 無州縣舘驛 處處有村里 皆靺鞨 其百姓靺鞨多 土人少 皆以土人爲村長 大村曰都督 次曰刺史 其下百姓 皆曰 首領 土地極寒 不宜水田 : 『類聚國史』卷193)”

위의 글은 8세기 당나라에 유학했던 영충(永忠) 스님이 보고한 것을 토대로 작성한 것이라고 하는데 “백성들은 말갈인이 많고 원주민(土人)들은 적다.”고 하고 있죠? 오히려 말갈인과 토인(土人 : 원주민)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같은 시대 사람이 같은 시대의 사정을 그린 것이고 비행기를 타고 다닌 것도 아닌데다 여러 지역을 직접 통과하면서 적은 기록이니 비교적 정확한 기록으로 봐야 합니다.

그런데 북한의 학자들은 영충이 발해의 변두리를 보고 온데서 이 같은 말을 했다고 봅니다(북한 사회과학원, 앞의 책. 143쪽). 하지만 영충스님 글의 전체적인 서술 내용으로 보면 특정한 지역에 대한 이야기라고 보기는 어렵고 발해의 전반적인 상황으로 봐야할 것입니다. 즉 “백성들은 말갈인들이 많다”라고 하는 것은 일반론적인 서술로 볼 수가 있기 때문이죠. 오히려 전체 주민이 말갈이고 일부가 그 지역 사정을 잘 아는 그 지역 토착민(정착민)으로 보고 있는 것이죠.

영충 스님의 글로 보면 고구려인이라는 말은 어디로 가고 말갈과 토인만이 있어서 고구려인이라고 별도로 분리한다는 것은 무의미해 보입니다. 오히려 말갈이 고구려인과 동일하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북한 학자들의 연구방식도 결국은 ‘소중화의식’, 즉 ‘새끼중국인’의 사고방식에 깊이 물들어져 있음을 알 수 있죠.

하기야 한국 지식인들의 ‘새끼중국인’ 근성이 어디로 가겠습니까? 이런 식이니 과거 세종대왕께서 친히 민중을 위해 한글을 창제하시는데도 사리사욕(계급적 이익)을 위해 반대할 수가 있는 것이죠. 세종대왕께서는 집현전 학사들의 간섭을 피해 왕자·공주들과 비밀리에 한글을 만들어 기습적으로 반포하셨다고 합니다(그래서 우리는 오늘날 세계 문화유산이자 세계에서 가장 과학적이고 디지털 시대에 가장 적합한 아름다운 문자를 사용하고 있지요). 이런 자들을 어떻게 말리겠습니까? 한마디로 수천 년을 유리(羑里)에 빠져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아직도 미망(迷妄)에서 헤어 나오지 못합니다.

아무리 갈 길이 멀어도 한 가지만 짚고 넘어갑시다. 이제 자가당착적인 ‘소중화의식(小中華意識)’, 즉 ‘새끼중국인’ 근성은 그만 버리자는 겁니다. 몽골ㆍ만주족과 우리의 뿌리가 같은데도 남북한 학자들 모두 이들을 오랑캐 취급을 하고 민족사의 범주에서 제외시키려는 일들을 이제는 그만두어야 합니다. 그 과정에서 진실이 어둠 속에 갇히고 1900년대 후반기부터 시작된 중국의 동북공정(東北工程 : 요동 만주 지역 쥬신역사 말살정책)도 자초하고 만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해결책은 제대로 제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중국의 논리를 도와주고 있을 뿐입니다.

숙신ㆍ물길ㆍ여진 등이 실제로는 고구려ㆍ발해와 같은 뿌리임에도 불구하고 시라토리 구라키치(白鳥庫吉)의 논문(1933)이 발표된 이후 “발해(渤海)의 지배층은 고구려의 유민”이라는 해괴한 논리로 역사를 해석하는 것이 유행하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시라토리 구라키치가 만주사(滿洲史)의 대부(代父)격이라 해도 비판할 것은 비판하고 봐야하는데 남북한의 사학자들이 아직도 이 사고 범주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시라토리 구라키치가 식민사학[植民史學 : 만선사관(滿鮮史觀)]의 대부(代父)라고 핏대를 높인 사람들도 남북한의 사학자들입니다.

발해의 지배층만이 고구려 유민이라니 그것은 말이 안 되지요. 말갈이라는 명칭 자체가 중국인들이 중국의 동북방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부른 소리인데 ‘말갈인 = 고구려인 = 발해인’인 상태에서 누가 지배층이 되고 누가 피지배층이 된다는 말입니까? 도대체 누가 누구를 지배한다는 소린지 알 수가 없군요.

영충스님의 기록을 보세요. 그가 다녀간 곳은 과거 고구려 지역이죠? 그리고 그 지역이 이제는 발해가 되었고 그 대부분 백성이 이전에는 고구려백성이었던 말갈이고 나머지는 소수의 토착민이라는 것이죠.

고구려나 발해는 위ㆍ오ㆍ촉과 같은 정치적인 국가명칭이고 말갈은 중국인들이 만주 일대에 거주하는 종족을 부른 이름이 아닙니까? 실제로 발해의 피지배층으로 알려지고 있는 말갈계 족장들도 수동적으로 지배를 받은 존재들이 아니지요. 이들은 국제무역은 물론이고 외교에 있어서는 독자적으로 참여하고 있습니다[李成市, 「 발해사 연구에서의 국가와 민족」『만들어진 고대』(삼인 : 2001) - 참고로 말씀드리지만 이 책 자체는 비밀이 많은 일본에서 살아가야 하는 사학자 특유의 현학적 횡설수설이 많지만 발해 관계부분만은 비교적 객관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말갈인들은 7개의 부로 나눠져 있었다고 합니다.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 일부 말갈들은 당나라로 들어가고 일부는 세력이 미약하여 흩어지고 나머지는 발해로 들어갔는데 오직 흑수지역의 말갈, 즉 흑수말갈만이 강력하였다고 합니다(『신당서(新唐書)』권 219 「말갈전」).

이같은 분석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사가들이 말갈인들과 고구려 유민이라는 것에 아직도 집착한다면 다시 분석을 해봅시다.

만약 발해를 구성한 주민들을 고구려의 유민과 말갈인으로 본다면 이 들 사이의 종족적 문화적 차이는 있을까를 냉정히 물어봅시다.

발해에 있어서는 말갈인들을 위한 2원체제가 구성되어 있지는 않았습니다. 이것은 말갈인들과 고구려 유민들 사이의 차이가 거의 없었다는 것을 보여주죠. 제가 보기엔 그 차이라는 게 도시민과 지방민 정도의 차이가 아닐까 합니다. 그리고 발해의 백성이 된 말갈인과 편입되지 못한 말갈인은 정착 - 비정착 단계의 차이 정도가 아니었을까 합니다[참고로 말씀드린다면,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만 해도 산골에는 화전민(火田民)이 있었습니다. 당시 저는 학교에서 화전민은 산(山)을 망치는 매우 나쁜 사람들로 배워서 그런지 이들이 제게는 매우 이질적으로 느껴졌습니다. 그들은 실제의 한국 정부의 통제 밖의 존재로 보였습니다. 그러면서도 이런 생각을 하는 저 자신에 대해 놀라기도 했습니다. 같은 한국인끼리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말입니다].

즉 발해의 지방통치제도는 5경 15부 62주가 있었을 뿐 이민족(異民族)을 다스리는 별도의 부서나 제도가 없었다는 것은 고구려의 유민과 말갈과의 문화적 차이가 거의 없다는 말이죠. 북한의 학자들은 이에 대하여 “말갈인이 없었기 때문에 이원적 통치구조가 없었다[북한 사회과학원 『발해국과 말갈족』(중심 : 2001) 153쪽].”고 하는데 이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여러 사서에 발해 민족의 대부분이 말갈이라고 지적하고 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사실은 발해에는 (대부분) 말갈인만 있었기 때문에 이원적 통치구조가 필요 없었다는 것이 더 맞는 말입니다.

이상의 기록들을 종합해 본다면 한규철 교수의 지적과 같이 “말갈이란 어느 특정의 종족명이 아닌 넓은 지역 이민족을 통칭하여 부르는 범칭(한규철,『발해의 대외관계사』)” 으로서 일종의 욕설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코쟁이·짱꼴라 등으로 외국인들을 묘사하듯이 한 말이라는 것이죠. 그렇다면 이 범칭으로 부르는 말갈은 과연 어떤 공간적 범위를 차지하고 있을까요?

기본적으로 말갈의 영역은 지나치게 광대하여 지금껏 말씀드린 범쥬신 영역을 대부분 포괄하고 있습니다. 6세기말 수ㆍ당 시대 이후 많은 학자들은 발해의 영역의 주민들을 말갈로 통칭하였고 그래서 시라토리 쿠라키치도 “말갈이란 이름은 넓은 동북 지방의 여진 민족을 총칭하는” 것이라고 합니다(白鳥庫吉, 「塞外民族」『東洋思潮』12, 1935 ; 『白鳥庫吉全集』卷4 ).

다시 말해서 어느 정도의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만주에서 한반도 북부에 이르는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일반적으로 부르는 말이 바로 물길, 또는 말갈이라는 것이죠. 그런데 이 말이 옥저는 물론이고 일본에까지 영향을 미칩니다.

쉽게 말하면 물길, 또는 말갈은 쥬신족을 불렀던 명칭이라는 말입니다. 즉 과거에 숙신이라고 하다가 나중(수나라ㆍ당나라)에는 요동ㆍ만주에 사는 주민들을 모두 물길, 또는 말갈족으로 불렀다는 것이죠. 이 점은 쥬신족의 실체에 대한 것이므로 좀 더 구체적으로 봅시다.

말갈에는 크게 7부가 있는데 이들에 대한 견해가 다소 복잡하고 논쟁도 심하지만 결국 이들이 예맥계(濊貊系)냐, 숙신계(肅愼系)냐 하는데 국한되어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이 논쟁은 지금까지 보아온 대로 아무런 쓸모가 없습니다.

[그림 ③] 말갈의 7부

왜냐하면 숙신계와 예맥계의 차이가 궁극적으로 없지 않습니까? 예맥계든, 숙신계든간에 이들은 모두 말갈의 7부에 속한 민족입니다. 그러면 말갈로 부르면 되지, 왜 무슨 근거로 이들을 나눕니까? 중국인들은 이들을 포괄하여 그저 ‘말갈’로 부른 것이지요. 중국인이 입장에서는 “그놈들이 그놈”이라고 생각하여 ‘재수 없는 놈’이라고 하여 물길(勿吉)로 한 것 아닙니까?

더구나 중요한 것은 예맥이라는 말은 말갈이 등장할 즈음에는 자취를 감추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 많은 예맥이 한순간에 증발했겠습니까? 뿐만 아니라 말갈계니, 읍루계니 하는 말들이 얼마나 단기적이고 일관성이 없는 용어인가 말이죠. 다 따지고 보면 숙신(숙신=예맥=동호)이라는 민족 그 자체는 그대로 있고 그것을 부르는 방식이 이리저리 바뀌고 있을 뿐인데 말입니다.

흔히 말하기를 고조선과 고구려는 예맥계이고 발해의 주민은 말갈이라는 말을 합니다. 그러면 예맥과 숙신이 분명히 다르다는 말이죠? 그런데 지금까지 본 대로 도대체 무엇이 다른지 그 근거를 알 수가 없네요.

러시아 학자 엘 에르 꼰체비찌는 ① 고대 조선족과 숙신(물길ㆍ말갈의 선민족)의 인구분포가 사료와 지리상으로 일치하고 ② 이들의 종족 형성 과정이 유사하며 토템이 공통적으로 새[鳥]라는 점, 종족 발상지가 백두산(白頭山)이라는 점, ③ 그리고 이들을 묘사하는 말이 비슷하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사실상 동일 종족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그리고 안호상 선생은 예맥ㆍ숙신ㆍ동호를 하나의 범주로 봅니다. 중국인 학자 슈이 이푸는 『삼국지』와 『후한서』를 분석한 후 중국 대륙의 동부에 거주했던 모든 민족은 동일한 기원을 갖고 있다고 결론지었습니다[유엠뿌진, 『고조선』(소나무 : 1997)]. 앞서 본대로 숙신ㆍ조선ㆍ변한도 하나의 범주로 보는 것은 고려시대까지는 일반적인 관행들 가운데 하나로 볼 수도 있죠.

***(3) 물길과 말갈, 고향과 형제의 이름**

이상한 기록이 있습니다. 『삼국사기』에는 신라나 백제가 고구려와 접경지에서 말갈의 침입을 받았다는 말들이 자주 나옵니다. 그런데 고구려가 침입하지 않고 왜 말갈이 침입하냐는 거죠? 이것을 좀 더 구체적으로 볼까요?

『삼국사기』「백제본기」의 무녕왕조에 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502년 백제의 무녕왕은 고구려의 남쪽 경계를 공략하였고 다음해(무녕왕 3년) 5천명의 군대로 마수책(馬首柵)을 불태우고 고목성(高木城)으로 침입해오는 말갈군대를 쳐서 물리쳤다고 합니다(三年秋九月, 靺鞨燒馬首柵, 進攻高木城. 王遣兵五千, 擊退之. 冬無氷). 506년 다시 말갈이 침입하여 고목성을 파괴하고 6백여 명의 주민을 죽입니다(六年秋七月 靺鞨來侵, 破高木城, 殺虜六百餘人). 507년에는 말갈군대의 침입에 대비하여 고목성 남쪽에 목책을 세우는 동시에 장령성을 축조합니다(七年夏五月 立二柵於高木城南, 又築長嶺城, 以備靺鞨). 그러자 그해 겨울 고구려의 장수가 말갈과 함께 한성을 공격하기위해 횡악에 주둔하자 왕이 군대를 보내 이들을 격퇴하였다고 합니다(冬十月 高句麗將高老與靺鞨謀, 欲攻漢城, 進屯於橫岳下, 王出師, 戰退之).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말갈의 영역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죠? 그 동안 배운 역사에서는 말갈은 현재의 흑룡강변이나 하바로프스크에 있어야지 함경도나 평안도 남부에는 왜 나타나느냐 말이죠.

그래서 정약용 선생은 이를 두고 말갈이 아닌데 말갈로 잘못 사용했다고 하였습니다. 즉 동예(東濊)를 말갈로 착각하여 기록했다는 말이죠. 현대의 사학자들도 이런 견해를 수용하거나 아니면 말갈이 고구려의 속민 또는 식민지(부용국)이니 백제나 신라의 정벌에 말갈이 등장하는 것은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더 이상한 것은 고구려가 백제ㆍ신라와의 한창 전쟁 중이던 거의 1백여 년간 말갈에 대한 기록이 『삼국사기』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죠. 말갈병의 전투력이 대단하므로 이 때가 오히려 더 많은 말갈병이 필요할 터인데 나오지를 않고 있으니 더욱 이상하지 않겠습니까? 마치 말갈병들이 몽땅 증발한 듯이 말입니다. 도대체 왜 그럴까요?

이 분야의 전문가로 알려진 한규철 교수는 말갈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고구려의 변경 피지배 주민들에 대한 인식의 변화에서 나타난 현상이라고 설명합니다. 즉 초기에는 단순히 피지배계층(통치의 대상)으로만 보던 말갈을 후기에 갈수록 하나의 동일한 국가구성원으로 보기 시작했다는 것이죠. 한규철 교수의 글을 직접 보시죠.

“고구려지배층들은 평소에는 변경의 피지배 주민들을 ‘촌사람’의 뜻을 갖는 ‘말갈’로 생각하다가, 삼국 항쟁의 위기 아래에서는 ‘고구려국인(高句麗國人)’에 그들을 포함하여 편제하였다는 것이다. … 고구려는 지방에 대한 통치력을 많이 상실하게 되어 지방 세력가의 발생을 초래하게 되었으며, 이들은 대외적으로는 당과의 관계에 있어 반독립적인 활동을 전개하여 ‘말갈’이라는 이름을 남기었고, 대내적으로는 도시의 지배층으로부터 다시금 ‘말갈’의 변방 사람으로 존재하게 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삼국사기』 편찬자는 598년부터 고구려 피지배 주민의 비칭이자 범칭인 ‘말갈’을 『수서』, 『구당서』등에서 다시 차용하여 썼다고 생각한다.[한규철, 『발해의 대외관계사』(신서원 : 1994) 제1장]”

즉 말갈이라는 것이 고구려의 주류 민족과 다른 민족이 아니라 고구려의 지방민들을 두루 일컬었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오래 전에는 역사 서술이 왕조 중심적이고 도시 중심적으로 기록했기 때문에, 또 도시 사람과 시골(지방) 사람 및 지배자와 피지배자를 차별하였기 때문에 고구려의 지방민을 그저 ‘말갈’로 불렀다는 얘깁니다. 몇 가지를 제외하면 상당히 타당한 지적이죠?

이같은 현상은 비단 고구려에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죠. 『남사(南史)』에 따르면, “신라는 그 풍속에 성을‘건모라’라 하고, 읍은 안쪽에 있는 것을 ‘탁평’이라 하고, 밖에 있는 것을 ‘읍륵’이라 하는데, 역시 중국의 말로 군현이라는 것이다. 나라에는 6탁평과 52읍륵이 있다.(其俗呼城曰健牟羅, 其邑在內曰啄評, 在外曰邑勒, 亦中國之言郡縣也. 國有六啄評·五十二邑勒. :『南史』「列傳」)”고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성이란 신라어로는 잔머라[健牟羅(jianmuluo)]이고 그 성안을 쥬핀(啄評[zhuoping])으로 불렀으며 성 밖의 사람들을 일러서 이루(邑勒[yile])라고 하는데 이 말은 바로 읍루(挹婁)와 거의 같은 발음이 나타나고 있지요. 아직까지 정확한 의미를 고증하기는 어렵지만 분명한 것은 중앙민과는 달리 지방민을 비하한 표현으로 ‘읍루(아이누)같은 촌놈’ 정도로 생각됩니다.

이런 경우는 흔히 나타납니다. 즉 신라가 경주의 다른 이름으로 쓰이는 것이나 발해의 경우에도 국인(國人 : 나라사람들)이란 지배층을 의미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결국 우리는 흔히 발해인의 구성인 대부분이 말갈인이었다고 하는데 발해인들이 그 스스로를 말갈로 불렀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는 얘기죠.

다시 봅시다. 한국의 사학계가 흔히 “발해의 지배층은 고구려인이고, 피지배층은 말갈인”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위의 논리대로 하면 결국은 ‘발해 = 고구려’라는 의미가 되지 않습니까? 발해의 지배층은 또 발해의 수도에 살겠지요? 그 수도에 사는 사람이 고구려인이죠? 그 나머지는 고구려 시대에나 발해시대에는 역시 말갈인이죠? 그래서 저는 발해라고 하지 말고 대고구려(대고려), 또는 후고구려(후고려)라고 해야 한다는 것이죠.

사실 과거로 갈수록 관존민비(官尊民卑)뿐만 아니라 왕경(王京 : 수도), 즉 중앙과 지방의 격차는 매우 심각했을 것입니다. 결국 도시(都市), 즉 왕경을 중심으로 국가가 운영되겠죠? 가령 고구려(또는 발해)에서 평양(상경)을 중심으로 할 터이고 그러면 평양(상경) 이외의 지역은 ‘고구려’, 또는 다른 종류의 범칭(凡稱)이 필요하니 이것을 중국인들은 다소 욕설에 가까운 “버선발과 가죽신 입은 놈[말갈(靺鞨)]”이나 “기분 나쁜 놈[물길(勿吉)]”으로 불렀다는 말입니다. 이 말이 가지는 뉘앙스는 한규철 교수의 지적대로 ‘(재수 더러운) 촌놈’에 가장 가까웠을 것입니다. 단 이러한 말들은 고구려(또는 발해)의 입장이 아니라 중국의 입장이라는 것이죠.

그러나 한규철 교수가 간과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 물길이라는 말 자체가 ‘촌놈’을 의미하는 말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물길이니 말갈이라는 말은 아무렇게나 나온 말은 아니고 범쥬신 지역 사람들이 자주 사용하던 말, 즉 ‘와지’라는 말에서 나왔다는 것이죠.

이 ‘와지’라는 말은 숲이나 삼림, 또는 ‘해 뜨는 곳[日出地]’이라는 쥬신에게는 다소 성스러운 삶의 터전, 또는 그 민족을 가리키는 말인데 한족(漢族 : 중국인)이 이것을 ‘재수 더러운 놈[勿吉]’이라는 욕설로 만든 것입니다. 기가 찰 일입니다. 여기에 부화뇌동하는 ‘새끼중국인’들이 더욱 가증스럽죠. 결국 물길(勿吉)이라는 말은 우리가 사용하는 ‘짱꼴라’, 또는 ‘코쟁이’ 와는 비교할 수 없는 정도의 심한 욕설입니다.

중국의 입장에서 봅시다. 중국인들에게는 설령 고구려라는 거대 국가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 정책과 의사결정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결국은 왕경(수도)이라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근대적 국가와는 달리 수도 지역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민, 즉 지방민이란 통치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에 불과했던 것이니까요. 따라서 실제로 중국인들과 이해관계가 얽히고설킨 사람들은 왕경인들이라고 봐야합니다. 그러면 나머지 사람들은 어떤 말로 대충 부르게 됩니다. 그래서 한족(漢族)들은 고구려의 평양을 중심으로 하는 사람들을 고구려인으로 판단하고 그들을 고구려인으로 부르지만 나머지 사람들을 대충 ‘말갈’로 비하하여 불렀다는 얘기죠.

그렇다면 이상하게 보였던 『삼국사기』에 나타나는 ‘말갈’이라는 표현이 잘못되지 않았을 수가 있다는 말이 됩니다. 즉 말갈이 침입했다는 말은 고구려의 지방군이 공격했다는 말이 된다는 말이죠. 결국 고구려군이 침입을 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이후에는 말갈병이 침입한 것이 아니라 고구려군이 침입한 것이니 기록에 남을 리가 없는 것이죠. 한규철 교수의 지적처럼 중앙과 지방민의 인식변화라기보다는 아마도 통일전쟁이 가속화되고 치열해짐으로써 중앙과 지방 사이의 군사적 협력과 연계가 강화되었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으로 생각됩니다. 그 결과 중앙과 지방민의 인식도 바뀐 것이겠죠. 즉 순서가 틀렸단 말입니다.

그리고 정약용 선생의 경우도 말갈을 너무 천한 오랑캐라는 편견을 가지고 이 문제를 분석했기 때문에 말갈이 백제를 침입했다는 것이 이상하게 보였던 것뿐입니다. 그렇군요. 천하의 석학(碩學)이라도 수천 년 동안 지나친 관념의 유리(羑里) 속에 갇히게 되면 어쩔 수가 없나 봅니다.

이것은 단순히 국호(國號)에만 나타나는 것만은 아닙니다. 과거에 노비(奴婢)도 그렇지요. 노비는 성(姓)이 없었고 이름도 단지 구별을 위한 것입니다. 요즘의 예를 들면 드라마 작가가 시나리오를 쓸 때 ‘행인 1’, ‘행인 2’, ‘포졸 1’, ‘포졸 2’ 등으로 엑스트라들은 그저 구별을 위한 말만 필요한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큰눈이·분이· 끝딸이·분통이·섭섭이·점순이·돌이 등등이 그 예입니다. 근대 시대에 들어오기 전까지 일반인들은 성(姓)이 없이 살았던 것도 이와 같은 맥락입니다.

현대도 마찬가지입니다. 봉건 왕조체제와 유사한 북한을 보세요. 북한의 수도인 평양(平壤)은 아무나 거주할 수 없는 곳이 아닙니까? 그 뿐인가요? 남한도 서울(Seoul) 지역의 사람들은 은연중에 지방인들을 깔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서울에서는 인구 4백만이 넘는 국제항구 부산(釜山)도 시골이라고 합니다(부산 사람들 들으면 사흘 정도는 밥을 먹지 못할 일이죠). 이것은 비단 우리나라만의 이야기가 아니죠. 프랑스도 파리사람을 부르는 별칭이 있고 일본도 마찬가지지요.

***(4) 발해는 후고구려**

저는 앞에서 ‘발해 = 고구려’이니 발해라고 하지 말고 대고구려(대고려), 또는 후고구려(후고려)라고 해야 한다고 말씀드린바 있습니다. 이 점을 좀 더 구체적으로 다시 봅시다.

숙신은 한나라 때에 이르면 ‘읍루’라는 이름으로 나타나는데 진수의 『삼국지』에서는 “사람의 모습은 부여와 비슷한데 언어는 고구려나 부여와는 다르다.”고 하고 있습니다. 중국의 삼국시대 말기의 기록에는 읍루가 또다시 숙신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三國志』「魏書」상도향공기). 이것은 앞에서 본대로 숙신이 읍루(아이누·길랴크 같은 고아시아족)라는 말이 아니라 읍루와 교류를 하는 극소수의 숙신(또는 옛 읍루지역에 사는 숙신들)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북위시대에 숙신은 물길(또는 말갈)이라는 이름으로 중국과 교섭하고 있습니다(『魏書』「孝文帝紀」). 『신당서(新唐書)』에는 발해가 강성해지자 말갈은 다시 발해에 종속된다고 합니다(『新唐書』「黑水靺鞨傳」). 이 때는 흑수말갈만이 따로 떨어져 존재합니다. 그러다가 다시 이들도 발해에 속하게 됩니다(『金史』本紀 1). 그런데 대부분의 중국 사서에는 발해는 말갈의 국가라고 하고 있죠.

제가 같거나 비슷한 말을 여러 번 반복하고 있는 듯이 보이는 것은 많은 사서들이 같은 민족을 이리저리 부르고 있기 때문이죠. 간단히 보면 물길ㆍ말갈ㆍ숙신은 같은 민족의 다른 표현이며 이들이 고구려와 발해의 국민이었다는 말입니다. 한 마디로 ‘발해 = 고구려’를 좀 복잡하게 표현한 것뿐이죠. 사실 뻔한 얘기인데 사학자들이 무슨 이유인지 너무 복잡하게 꼬아놓아서 일반인들의 접근을 못하게 한 것으로 생각되기도 합니다.

표현이 복잡하든 말든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것은 ① 정치적 계승의식과 통치 영역의 면, ② 인적 구성의 면, ③ 문화적인 일체감 등에서 보더라도 분명히 알 수 있는 일입니다. 따라서 발해는 후고구려로 보는 편이 적당할 것입니다.

중국의 사서(史書)에도 도처에 “발해는 국토가 고구려와 일치하며 산물(産物)들도 고구려와 일치(『오대사(五代史) 』74 「고려전」)”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발해의 국왕이 스스로 “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하고 부여의 풍습을 그대로 간직했다”고 하고 (『속일본기(續日本記)』10 聖武天皇 新龜四年), “발해는 부여의 별종”이라고도 하고 있습니다(『武經總要』 前16 下).

『구당서(舊唐書)』나 『신당서(新唐書)』에서도 “발해의 풍속은 고구려와 거란과 같다”고 하고 있습니다(『신당서(新唐書)』219 「발해전」, 『구당서(舊唐書)』199 「발해말갈전」).『속일본기(續日本記)』에서는 발해왕이 일본에 보낸 국서에 스스로를 고려국왕(高麗國王)이라고 칭하면서 “고구려의 옛 땅을 수복하고 부여의 유속을 유지한다(復高麗之舊居 有夫餘遺俗 : 續日本紀 권10)”라고 하여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임을 분명히 합니다. 일본에서도 그를 고려국왕으로 칭하는 것으로 보아 ‘발해 = 고구려’라고 보는데 하등의 이론이 있기 어렵습니다. 뿐만 아니라 발해의 시조 대조영은 고구려의 구장(新羅古記云 高麗舊將 祚榮姓大氏 : 『三國遺事』)이라는 기록이 있죠.

그리고 발해왕이 천손사상을 가지고 있었으니[『속일본기(續日本記)』권23]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발해는 그 스스로 고려라고 칭했을 뿐만 아니라 중국 측에서나 일본 측에서도 ‘발해 = 고구려’라고 인식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발해가 정치 경제는 물론이고 그 문화나 사회전반에 걸친 이데올로기까지도 고구려를 완벽히 계승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중국과 대등하게 발해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고 국왕의 묘호를 제정하였다는 점에서 쥬신의 역사에 큰 중요성을 가졌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발해를 발해로 부르기보다는 후고구려(후고려, 또는 대고려)라고 부르는 편이 더욱 타당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림 ④] 발해

그리고 발해는 아예 ‘발해 말갈’로도 지칭이 되는 나라입니다[『구오대사(舊五代史)』,『오대회요(五代會要)』,『구당서(舊唐書)』,『삼국사기(三國史記)』]. 또 “발해는 본래 말갈(靺鞨)이라고 불렀는데 고려(高麗 : 고구려)의 별종(『五代史』74 「高麗傳」)”, “발해 말갈은 본래 고려종(高麗種)(『五代會要』30 「渤海」)”, “고려의 별종인 대조영(大祚榮)(『자치통감(資治通鑑)』210)”이라고 합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 여러분은 기존 한국 사학계의 여러 저명한 선생님들처럼 고구려인과 말갈인이 제대로 구별이 됩니까?

제 머리로는 도저히 이들을 구별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정통(正統) 사학도(史學徒)가 못 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여러 사료를 종합해보아도 그 민족이 그 민족입니다. 즉 예맥 - 조선 - 숙신 - 물길 - 말갈 - 고구려 - 발해 - 거란 등의 민족들이 모두 하나의 범주로 포괄할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당시의 발해에 대하여 북적(北狄)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우리는 중국인들이 사방의 오랑캐를 부를 때 동이(東夷)와 북적(北狄)은 완전히 다른 듯이 말하곤 했지요. 그러나 『삼국사기(三國史記)』나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는 발해를 북적(北狄), 또는 적국인(狄國人)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자기들도 동쪽 오랑캐인 주제에 참으로 딱하기도 합니다만.

『삼국사기(三國史記)』나 『삼국유사(三國遺事)』의 저자들이 임의로 쓴 말은 아닐 것이니 북적과 고구려․부여․읍루 등을 지칭하는 동이(東夷)와의 차이를 찾기가 어려울 듯합니다. 쉽게 말해서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동이(東夷)를 북적(北狄)으로 같이 부르고 있으니 그것이 구별이 되겠는가 말입니다.

참고로 한 마디만 더 합시다. 중국에서는 발해를 자기의 지방정권으로 중국사의 일부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아니지요. 당시의 사정으로 보면 발해 - 통일신라사이에는 하나의 민족으로 보는 정신적 흐름이 분명히 발견됩니다. 통일신라(統一新羅)는 발해를 북조(北朝), 또는 북국(北國)이라고 명백히 지칭하고 있습니다(『삼국사기』권 10 「신라본기」; 권37 지리지). 아마 이 당시까지만 해도 상당한 공통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통일신라가 발해에 대하여 북조(北朝)라는 말을 사용한 것은 우리가 한반도 북쪽을 북한(北韓)이라고 부르는 것과도 다르지 않습니다. 즉 통일신라는 발해와 현재는 대립하고 있지만 결국은 통일이 되어야할 동족(同族) 전체의 일부라는 의식이 있다는 말이죠.

이상의 분석을 토대로 보면 숙신과 그의 다른 이름인 물길과 말갈은 만주 지역에 광범위하게 거주했던 사람들의 총칭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이전에 있었던 예맥이라는 말이 없어진 자리에 숙신ㆍ물길ㆍ말갈 등의 명칭들이 대신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것은 예맥은 소멸하고 물길이나 말갈이 성장한 것이 아니라 그 민족이 그 민족이라는 것이지요.

따라서 예맥과 숙신ㆍ동호는 무관한 것이 아니라 이들은 요동ㆍ만주지역을 중심으로 끝없이 뭉치고 흩어진 하나의 역사 공동체이자 문화공동체라는 말이지요.

지금까지 우리는 쥬신의 뿌리를 찾아서 긴 여행을 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 예맥 - 동호 - 숙신 등에 이르는 민족에 대한 분석을 마쳤습니다. 쉽게 말하면 쥬신의 뿌리에 대한 총론(總論)을 마친 셈이지요. 동아시아 고대사의 영역 가운데 가장 어렵고 지루한 부분이 마무리된 것이지요. 필자의 입장에서는 내용 자체가 워낙 복잡하기 때문에 아무리 재미있게 쓰려고 해도 안 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다음 장부터는 쥬신의 보다 재미있고 역동적이면서 구체적인 모습들을 찾아갑니다. 즉 쥬신의 신화(神話)와 고구려ㆍ백제ㆍ신라ㆍ몽골ㆍ금ㆍ일본 등 구체적인 나라들이 쥬신의 역사에서 어떻게 표현되고 있는가 하는 점들을 살펴봅니다. 여기서는 고구려는 물론, 백제와 일본의 건국과정, 몽골과 금의 건국과 역사를 쥬신의 관점에서 살펴볼 것입니다.(5)

 

 

 

 

<주>

 

 

(1) 말갈과 한민족 국가 간의 관계  - K스피릿 (ikoreanspirit.com)2021.07.07 

 

 

(2) 우리 역사에서 '말갈' 연구가 필요한 이유  - K스피릿 (ikoreanspirit.com)2021.02.04

 

 

(3) 헝가리 세운 ‘마자르족’ 조상은 부여계 기마민족 | 중앙일보 (joongang.co.kr) 중앙선데이 입력 2021.04.03 

 

 

(4) 우리 고대사의 변방, 말갈인을 찾아서 (daum.net) 2019. 8. 16. 

 

 

 

 

 

 

 

<참고자료>

 

 

 


말갈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말갈박사의 말갈이야기 | 민성욱 교수

https://youtu.be/c6ElM5UHQ3g?list=PLkrB780eo1BsIKMx1JIijnloaMGRwp5p3

 

 

 

말갈과 고조선, 부여, 고구려의 관계 | 말갈박사의 말갈이야기 2부 | 민성욱 교수

https://youtu.be/l4wdCP6xFu0?list=PLkrB780eo1BsIKMx1JIijnloaMGRwp5p3

 

 

 

말갈과 백제, 신라, 발해, 옥저와의 관계 | 말갈박사의 말갈이야기 3부

https://youtu.be/4DdL5Y1QsrA?list=PLkrB780eo1BsIKMx1JIijnloaMGRwp5p3

 

 

 

헝가리를 세운 민족은 말갈족이었다 | 민성욱 말갈 박사의 말갈 이야기 4부

https://youtu.be/9h3HQAuLVE4?list=PLkrB780eo1BsIKMx1JIijnloaMGRwp5p3

 

 

 

말갈족 그들은 누구인가 | 민성욱 말갈 박사의 말갈 이야기 5부

https://youtu.be/49X8IxwpSmk?list=PLkrB780eo1BsIKMx1JIijnloaMGRwp5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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