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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갈(靺鞨; 중국어: 靺鞨, 병음: Mòhé, 모허)은 여진족과 동류(同類), 전신(前身)이며 이전 여진을 부르던 명칭이다. 발해 멸망 이후 거란은 말갈을 통틀어 여진이라고 불렀다. 말갈은 만주와 한반도 북부 그리고 한반도 남부 강원도에 살던 퉁구스계 민족으로 초기부터 고구려 한민족에 정복되어 오랜 시기 한민족에 동화되었다. 주나라 때에는 주로 숙신이라는 명칭으로 불렸으며 한나라 때에는 읍루라 불렸다. 본래 송화강 (松花江) 유역은 말갈과 같은 어원인 물길(고대 중국어: Miut Kit)이 지배하였으나 물길의 세력이 약화되자 각 물길 부족들이 자립하였고, 이들을 총칭하여 말갈(중세 중국어: Muat ɣat)이라 불렸다. 이후 말갈은 고구려에 완전히 복속되었고 고구려ㆍ백제와 연합하여 신라를 공격하기도 했다. 속말수말갈과 흑수말갈은 고구려 유민들과 함께 발해를 세우는데 큰 기여를 하기도 했다.

말갈의 최초 조상은 진나라 이전 기록에 나오는 숙신이다. 숙신은 진나라 이전부터 불리던 명칭이고 이들이 한나라에는 읍루로 불렸으며 남북조 후위 시대에는 물길 그리고 이후 말갈이라고 불렸다. 발해가 멸망하고 나서 거란은 말갈이라는 명칭으로 부르지 않고 여진이라고 불렀다. 이들 종족명의 공통점은 모두 기록자 중심으로, 스스로 부른 종족명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즉 거란한테는 여진으로 불렸지만 고구려민으로 살던 말갈임을 인지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으며 말갈인들에게 여진은 비(卑)칭이였을 가능성 또한 배제할 수 없다. 《삼국사기》에는 1세기 무렵부터ㆍ 말갈이 신라백제와 교전한 기록이 있는데, 이에 대해 다산 정약용은 이들 국가와 교전한 "말갈"은 (濊, 동예)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았다. 즉 강원도 지역에도 말갈이 다수 존재했다. 퉁구스계 말갈이 읍루, 숙신 등으로 불려왔던 것을 볼 때 말갈이라는 명칭이 옮겨갔을 것을 보기도 한다. 쑹화강, 흑룡강에 살던 말갈과 여진족은 대규모 이주하여 대부분이 평안북도나 함경도에 살고 있었으며 대부분의 경우가 고려, 조선 초기까지 말갈의 후손인 여진족들이 평안북도와 함경도에 터를 잡고 살아왔으나 4군 6진 개척 이후 이 곳의 대부분의 말갈, 여진족들은 한민족에 동화되었고 일부는 압록강, 두만강 북쪽으로 도망쳐서 살다가 금나라와 청나라를 건국했다.

말갈의 7부족[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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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갈(靺鞨) 7부 중에 불열부(불열말갈), 백돌부(백돌말갈), 호실부(호실말갈), 안거골부(안거골말갈), 흑수부(흑수말갈)는 퉁구스(숙신계)계 부족이며, 옛 부여와 북옥저 지역에 있는 속말부(속말말갈), 백산부(백산말갈)는 예맥계인 부여와 옥저에 숙신계가 혼합 되어 있었고, 점차 고구려화된 부족이다. 고구려가 성장하면서 대부분의 말갈부족은 고구려의 오랜 지배로 동화되게 된다. 이외에 사모말갈(思慕靺鞨), 군리말갈(郡利靺鞨), 굴열말갈(窟說靺鞨), 막예개말갈(莫曳皆靺鞨) 등도 있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말갈

[  ]

이칭별칭유형시대
이칭 Mohe
개념
고대/삼국

요약

말갈은 6세기~10세기경 만주 동북부 지역에 거주하였던 주민 집단이다. 북제() 무성제() 하청() 2년(563년)에 조공한 것으로 처음 등장하여 요() 태종() 회동() 원년(938년)까지 기록이 보인다. 거주 지역과 풍속의 유사성 등을 근거로 숙신-읍루-물길의 후예이자 여진의 선조로 언급되기도 한다.

정의

6세기~10세기경 만주 동북부 지역에 거주하였던 주민 집단.

계통과 명칭

말갈의 계통에 대해서는 숙신 · 읍루 · 물길 · 말갈 · 여진으로 이어지는 퉁구스계 종족이라는 일원적 계통론과 말갈로 통칭되는 집단 속에 예맥계()와 숙신계()가 섞여 있다는 다원적 계통론으로 대별할 수 있다.

일원적 계통론은 혈연적 동질성에, 다원적 계통론은 문화적 동질성에 초점을 두며, 수 · 당 시기 중국인이 동북아시아 이종족을 낮추어 불렀던 비칭()이란 견해와 고구려의 일부 피지배 주민을 가리키는 종족명이었다는 설이 있다. 말갈의 의미로는 원음()이 Moxo, 또는 Moho로서 여진어의 물[]을 뜻하는 Muke와 연결하는 견해가 대표적이며, 이 경우 ‘말갈은 물가에 사는 사람들’의 뜻이다.

이 밖에 만주 동북지방에서 나는 붉은 보석[]의 이름이 말갈인데, 이것이 종족 명칭으로 확대되었다거나, 흑룡강 유역의 골리드족, 오로친족이 흑룡강을 Mangu라 부른다는 것과 연결해 말갈[Mat-hat], 물길[Mat-kat]이 Magu의 음역이라는 주장, 옥저() · 읍루() · 부여()와 물길 · 말갈, 명대()의 올자() 등이 모두 만주어로 삼림을 뜻하는 wō[]에서 나왔다는 견해도 있어 정설이 없는 상태이다.

내부 구조 및 거주 지역

말갈에 관한 기록과 정보를 모아 별도의 열전으로 구성한 것은 『수서()』가 처음이고, 이후 『구당서()』에는 말갈열전이, 『신당서()』에는 흑수말갈열전이 수록되었다. 『구오대사()』와 『신오대사()』에는 흑수말갈열전이 있다. 따라서 『수서』 말갈열전에서 전하는 정보가 말갈 연구의 기초가 된다.

『수서』 말갈열전에 따르면 속말부(), 백돌부(), 안거골부(), 불열부(), 호실부(), 흑수부(), 백산부()의 7개 부()로 나뉘어 있다고 하는데, 『태평환우기()』에 인용된 북번풍속기()에는 수나라 때 속말부의 거수() 돌지계가 자신의 부인 궐계부()를 비롯하여 홀사래부(), 굴돌시부(), 열계몽부(

), 월우부(), 보호뢰부(), 파해부(), 보보괄리부() 등을 이끌고 수에 귀부했다고 하였다.

『신당서』 흑수말갈열전에는 흑수부 주변에 사모부(), 군리부(), 굴설부(), 막과예부() 등이 있고, 또 불열() · 우루() · 월희() · 철리() 등의 부락이 있었다고 한다.

이 중 불열부, 철리부, 월희부는 8세기에 당나라에 자기 부의 이름으로 조공을 하였다. 이런 점을 볼 때 『수서』의 말갈 7부는 당시에 알려진 대표적인 부였고, 각 부 아래에는 다시 작은 부들이 속해 있었으며, 당나라 때가 되면 일부 세력은 소멸 또는 주변부에 흡수되어 새로운 부명으로 알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말갈의 거주 지역은 만주 동북부의 송화강과 목단강, 흑룡강 일대에 넓게 분포하였는데, 속말부를 기준으로 할 때 백돌부는 속말부의 북쪽, 안거골부는 백돌부의 동북쪽, 불열부는 백돌부의 동쪽, 호실부는 불열부의 동쪽, 흑수부는 안거골부의 동북쪽, 백산부는 속말부의 동남쪽에 있었다고 한다.

주요 풍속

『수서』 말갈열전에 따르면 읍락마다 우두머리가 따로 있어 통일되어 있지 않으며, 땅이 낮고 습한 곳에서 흙을 둑처럼 쌓고 출입구를 위로 낸 구덩이를 파고 사다리로 드나든다. 돼지가 많으며 쌀을 씹어 술을 만들고, 부인은 베를 입고 남자는 돼지나 개 가죽을 입는다고 한다. 이런 풍속은 『위서()』 물길열전의 내용과 거의 같아 물길과 말갈의 연결 관계를 상정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고구려, 발해와의 관계

『수서』 말갈열전에는 속말부가 정예로운 병사가 수천 명으로 늘 고구려를 침략한다고 하였고, 『구당서』 말갈열전에는 백산부가 본래 고구려에 부용되었다고 했으며, 실제로 수나라 말에 속말부 소속의 돌지계가 고구려와의 싸움에서 이기지 못하자 자신의 부와 주변 부락을 이끌고 수나라에 귀부한 사실이 있다.

고구려는 598년에 영양왕이 말갈병을 거느리고 요서 지방을 침입하였으며, 645년 당 태종의 침입 시 안시성 전투에 말갈병을 동원하였는데 3천여 명이 당군의 포로가 되어 생매장당한 일이 있다.

이로 보아 고구려는 일부 말갈에 대해 강한 영향력과 통제력을 갖고 있었으며, 그들의 자치를 허용하며 간접적으로 지배했다고 생각된다. 다만 645년 안시성 전투에는 당군으로 참전한 말갈병도 있어 고구려가 말갈 전체를 지배한 것은 아니며, 말갈 부락이 자신들의 이해 관계에 따라 고구려와 중국 왕조를 선택하여 살아갔던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 멸망 이후 말갈의 일부 세력은 고구려 유민과 함께 발해 건국에 참여하였으며, 『신당서』 말갈열전에는 발해 건국자 대조영()이 속말부 출신이란 기록도 있다.

일본의 『유취국사()』에는 학승() 영충()의 전언을 바탕으로 발해 촌리()가 모두 말갈부락이고 백성은 말갈이 많고 토인()이 적다고 하였는데, 발해 전체가 그렇지는 않다 하더라도 말갈이 발해 주민의 주요 구성 부분의 하나였음은 인정된다.

[네이버 지식백과] 말갈 [靺鞨]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우리 고대사의 변방, 말갈인을 찾아서 (daum.net)

[책과 생각] 강인욱의 테라 인코그니타
⑫두만강 유역 말갈인

삼국시대엔 강원도 지역 사람들을 말갈이라고도, 예맥이라고도 했다. 강원도 지역을 말갈로 불렀던 이유도 그들이 오랑캐라서가 아니다. 우리 역사 안에서 전통적인 농사보다는 사냥과 무력에 의지해서 백두대간의 산악지역에 살던 사람들을 통칭하는 것에서 유래했다. 이렇듯 우리가 말갈이라는 사람들을 ‘한국사’ 대 ‘오랑캐 역사’라는 이분법적 잣대로 보는 것은 변방에 대한 편견이 작용한 것이다.

  • 수정 2019-10-19 20:29
  • 등록 2019-08-16 06:01

1989년 두만강에서 2000㎞ 떨어진 중국 산시성 시안. 건물 공사 현장에서 우연히 당나라 시기 무덤의 묘지명이 발견되었다. 현지 고고학자들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이 유물에 흥분한 이들은 한국의 고대사학자들이었다. 이 묘지의 주인이 당나라 관리로 살았던 고구려 유민이었기 때문이다. 묘비에 적혀 있는 이름은 ‘이타인’(李他仁·609~675). 흥미로운 점은 이타인이란 이름이 그동안 중국에서 발견되었던 고구려 유민의 성씨와는 달랐다는 점이다. 이제까지 11명의 고구려인 묘지가 나왔는데, 모두 왕족인 ‘고’씨와 ‘천’씨였다. 이씨 성의 고구려인은 이타인이 처음이었다.
이타인의 고향은 ‘책주’(柵州), 즉 지금의 훈춘을 중심으로 하는 두만강 유역이라는 점이 곧이어 밝혀졌다. 최초의 두만강 출신 고구려인이 발견되면서 고대사학계에서는 이타인이 고구려인인지 말갈인인지를 두고 논쟁이 벌어졌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혈연적인 계통이 아니다. 바로 이타인이 고향에서 2000㎞ 떨어진 시안에 묻히면서까지도 ‘두만강 출신의 고구려인’임을 자랑스러워했다는 점이다.
최근 중국과 역사 분쟁으로 발해와 고구려가 우리의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발해와 고구려에 쏠린 관심은 한편으로는 우리 역사의 한 부분이었던 말갈과 여진에 대한 평가를 더욱 소외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한국 쪽이 발해와 고구려사를 지키는 주요한 논리로 ‘발해의 상층부는 고구려를 계승했기 때문에 기층인 말갈인과는 달랐다’는 논리를 폈기 때문이다. 그 결과 말갈은 한국사와 완전히 관계가 없는 이방인이라는 오해마저 주었다. 말갈이나 여진 같은 북방사는 한국사도 중국사도 아닌 회색지대에 놓여 있고, 국내엔 제대로 된 전공자도 없다. 그사이 중국이 말갈과 여진을 일방적으로 자기들 역사로 편입한 상황이다. 한국과 중국의 정치적 역사 해석으로 인해 우리 역사의 일부였던 말갈은 이방인이 되었다.
고고학이 전하는 말갈의 실체는 다르다. 최근 러시아와 연변 일대에서 발굴된 고고학 자료로 말갈이 백두대간을 따라 연해주와 강원도 일대에서 살던 우리의 일부였음이 밝혀지고 있다. 말갈인이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던 두만강 유역은 한국과 북방사를 이어주던 역동적인 역사의 공간이었다.

말갈의 후예인 우데게인. 강인욱 제공

 

고구려인으로 산 두만강 말갈인

말갈 7부족은 만주 일대의 각 강을 끼고 농사보다는 사냥, 채집에 기반을 둔 호전적인 사람들이었다. 말갈이 중국에 알려진 것은 서기 6세기다. 말갈이 고구려로부터 독립해서 만주 일대 곳곳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만들고 난 이후다. 그 뒤 말갈은 발해에 포함되었다가 발해 멸망 뒤엔 여진으로 성장해서 동아시아를 호령하는 거대한 제국으로 이어졌다. ‘퉁구스족’이라고 불리는 만주 일대의 원주민들이 바로 말갈의 후예이다. 워낙 남아 있는 자료가 적다 보니 연구자가 거의 없었고, 대신에 소련 시절에 동아시아를 조사하던 러시아 학자들이 연구의 맥을 이어왔다.

 

다행히 최근에 두만강 유역을 중심으로 말갈에 대한 연구가 다시 시작되고 있다. 두만강 유역은 고조선 시기부터 옥저인들이 살다가 고구려에 복속되었다. 이후 이 지역에서는 말갈의 일부인 백산말갈이 등장했다. 고구려에 옥저나 말갈인이 복속된 것인데, 문제는 고고학 자료였다. 아무리 발굴을 해도 이 지역에서 제대로 된 고구려 유적은 거의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에 이타인의 무덤이 발굴된 것이다. 제대로 된 고구려 유물은 찾아볼 수 없는 두만강 유역 출신임에도 이타인은 자신을 고구려 사람으로 자처했다. 즉, 이타인을 비롯한 두만강 유역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문화를 유지하며 동시에 고구려인으로 살아갔음을 의미한다. 두만강 유역은 옥저와 말갈의 터전인 동시에 고구려의 땅이었다. 말갈이라면 무조건 오랑캐이며 다른 혈연적인 사람이라는 우리의 선입견이 틀린 것이다. 고구려는 일찌감치 두만강 유역을 간접 지배했으며, 두만강 유역의 사람들은 자기의 삶을 살았음을 의미한다.

한국외대 여호규 교수의 논문에 수록된 이타인 묘지의 탁본. 강인욱 제공

 

처음에 두만강 유역에서 살던 사람들은 고구려와 언어, 생활풍습이 비슷했던 옥저였다. 하지만 서기 4세기를 기점으로 그들은 주로 산속에서 살며 사냥을 하는 말갈로 바뀌었다. 이렇게 주민이 바뀐 데에는 두만강 유역의 지리적 환경에 원인이 있다. 두만강 유역은 동쪽으로는 동해, 서쪽으로는 가파른 백두대간이 가로막고 있고, 그 사이에 좁은 평야가 발달한 지형이다. 게다가 기후마저 한랭하다. 그러니 농사에만 의존할 수 없고, 사냥이나 채집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때에 따라 강가에 마을을 만들어 농사를 짓던 옥저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강력한 군사력으로 주변 지역을 호령하던 말갈이 되기도 했다.

 

동해안을 따라서 두만강 유역과 이어지는 강원도도 마찬가지다. 삼국시대엔 강원도 지역 사람들을 말갈 또는 예맥이라고도 했다. 백제, 고구려, 신라가 차례로 이 지역을 점령했지만, 고고학 발굴을 해보면 정작 강원도 지역의 기층문화는 거의 바뀌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강원도 지역을 말갈로 불렀던 이유도 그들이 오랑캐라서가 아니다. 우리 역사 안에서 전통적인 농사보다는 사냥과 무력에 의지해서 백두대간의 산악지역에 살던 사람들을 통칭하는 것에서 유래했다. 이렇듯 우리가 말갈이라는 사람들을 ‘한국사’ 대 ‘오랑캐 역사’라는 이분법적 잣대로 보는 것은 변방에 대한 편견이 작용한 것이다.

말갈의 샤먼들이 썼던 허리띠. 강인욱 제공
중국 지린성박물원에 전시된 말갈인들이 쓰던 그릇들. 강인욱 제공
중국 연해주박물관에 전시된 말갈의 발달한 철제 무기 칼. 강인욱 제공

 

고구려 이후 만주 일대로 영역을 넓혀나간 말갈은 점진적으로 한국사에서 멀어지며 자신의 역사를 만들어갔다. 서기 6세기께부터 만주 북쪽의 말갈은 고구려의 세력에서 벗어나서 독자적으로 중국에 사신을 파견하기 시작했다. 이후 말갈은 발해의 기층민으로 다시 편입되었다가 발해가 멸망하자 여진으로 거듭나며 강력한 국가를 만들기 시작했다. 잘 알려진 것처럼 말갈의 후예인 여진은 금나라와 청나라를 세워서 대륙을 지배했다.

 

모든 여진이 중원으로 진출한 것은 아니었다. 한국사로 편입된 여진의 세력도 적지 않았다. 여진의 일파는 함경도에 있었고, 그들은 조선이 건국되며 한국사에 자연스럽게 편입되었다. 조선의 건국에 기여한 이지란이 있고, 함경도에는 여진 시대의 무덤이 많이 남아 있다. 말갈에서 여진으로 이어진 사람들은 고려와 조선시대에 산악지역에서 주로 가죽을 가공하고 사냥을 하던 사람들로 이어졌다. 고려시대 양수척, 수척, 화척 등을 거쳐서 조선시대의 백정으로 계승되었던 배경이 있다. 조선시대 후기에 등장한 발달한 소고기 가공 및 다양한 가죽과 모피의 가공 등 전통적인 농경사회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가죽과 관련된 선진적인 기술은 말갈 이후로 한반도 산악지역의 사람들을 통해 계승된 것이다.

 

한편, 한국과 중국사로 편입되지 못한 말갈의 후예들은 만주와 연해주 일대에서 소수민족으로 여전히 남아 있다. 수많은 말갈 계통의 부족들은 18세기 이후 청나라와 러시아의 진출 과정에서 사라졌지만, 지금도 남아 있는 대표적인 말갈의 후예가 바로 나나이족(중국에서는 혁철족이라 불림)과 우데게인이다. 나나이족은 우수리강과 흑룡강 유역에서 여름에 회유하는 연어를 잡는 사람들이고, 우데게인은 험한 산속에서 사냥을 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중국이나 러시아 사람들과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았기 때문에 소멸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다. 소련 시절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국민가수였던 콜라 벨디, ‘슈퍼주니어’ 출신 배우 한경이 바로 나나이족 출신이다. 비록 그들은 중국과 러시아라는 나라로 갈라져서 다른 모습으로 살고 있지만, 말갈의 문화와 사람들은 이렇게 우리 주변에 숨어 있다.

러시아의 국민가수인 말갈인의 후손 콜라 벨디. 강인욱 제공
 
말갈, 오랑캐에서 유라시아로

 

말갈에 대한 우리의 오해는 사실 두만강 유역에서 만주로 이어지는 북방사 인식이 얼마나 편협한지 잘 보여준다. 한국, 만주, 유라시아 역사의 교차점인 두만강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너무나 좁았다. 이제까지 우리의 북방사 인식은 ‘한국사인가 아닌가’를 두고 벌이는 소모적인 논쟁만을 되풀이했기 때문이다. 현대인의 정치적인 시각으로 과거 사람들의 역사를 섣불리 일개 국가의 역사로 판단하는 것은 오히려 오해만을 초래할 뿐이다. 제대로 된 연구도 없이 ‘한국사인지 아닌지’를 잣대로 결론을 내버리는 것은 ‘모든 아시아 역사는 중국사’라고 선험적으로 규정하고 재단하는 중국의 역사관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최근 남북한의 화해 무드와 유라시아 신북방정책에 대한 기대로 시베리아 열차와 이어지는 두만강 유역이 주목받고 있다. 경제적인 효과와 통일을 이야기하기 전에 우리 안의 변방이었던 두만강 유역과 그 지역의 역사를 재평가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우리 역사 속의 변방인 말갈에 대한 재평가야말로 한국과 북방 유라시아사를 잇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

경희대 사학과 교수

 

 

중앙선데이 입력 2021.04.03 00:21 업데이트 2021.04.03 00:59

헝가리 세운 ‘마자르족’ 조상은 부여계 기마민족 | 중앙일보 (joongang.co.kr)

유럽으로 간 고조선 문명 〈끝〉

아르파드의 지휘 아래 마자르족이 카르파티아 분지로 이동하는 모습을 그린 헝가리 기록화. 기병대는 부여·고구려·말갈족처럼 새 깃털을 꽂은 관(鳥羽冠)을 쓰고, 일반 백성은 고깔모자를 쓰고 있다. [위키피디아]

 

현대 헝가리의 직접 조상은 멀리 동방에서 출발하여 AD 895년 카르파티아 분지(판노니아 평원)에 영구히 정착해서 헝가리 왕국을 세운 고조선·부여 후예 ‘마자르’(Magyars)족이었다.

고조선과 고중국의 국경이 지금의 베이징 부근 영정하(永定河)와 간하(干河) 일대였을 때, 고조선의 간하 일대를 지키던 기마민족이 산융(훈족)과 ‘불도하’였고, 영정하 일대를 지키던 기마민족이 ‘불리지’와 ‘고죽’이었다. 산융은 매우 강대한 데 비하여 불도하는 강소했기 때문에, 불도하는 지금의 탁록(涿鹿)현에 맞닿은 간하 동쪽만 지키고, 광활한 서쪽은 산융이 지키면서 형제처럼 잘 협동하고 있었다.

 

헝가리 교과서에 개국 설화 실려

마자르 전통 흰옷과 붉은 댕기를 단 소녀들의 민속춤. 강강술래를 닮았다. [위키피디아]

 

불도하는 머리 명칭 ‘불’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부여족 일파였다. 부여는 처음 ‘예’족이 건국했다가 후기에 왕조가 ‘맥’족으로 교체되어, ‘예맥족’ 국가가 되었다. 고조선은 용감한 예족 기병부대를 훈족(산융)에 붙여서 서변 요충지 간하 방어에 배치했었다. BC 108년 고조선 해체 후 불도하는 농경민만 남고 유목 기마부대족은 훈족을 따라 이동하다가 결국 중앙아시아에 들어갔다.

 

현재 헝가리의 교과서에도 실려 있는 마자르족의 개국 설화에는 한 나라 임금에게 두 아들 훈오르(Hunor)와 마고르(Magor)가 있었는데, 사냥 나갔다가 불가사의한 수사슴을 만나 뒤쫓았더니 두 사냥꾼을 깊은 숲속으로 유인하고는 사라져 버렸다고 한다. 실망한 두 사냥꾼에게 즐겁게 웃고 노래하는 소리가 들려 가보니, ‘둘’(Dul) 왕의 아름다운 두 딸이 호수에서 물을 튀기며 놀고 있었다. 두 아들은 두 공주를 각각 말에 태우고 돌아와서 혼인하여 아내로 삼으니, 훈오르가 낳은 자손이 훈족(Huns)이 되고, 마고르가 낳은 자손이 마자르족(Magyars)이 되었다고 기록돼 있다. 이 설화는 훈족과 마자르족이 국왕을 같이한 형제 관계이며, 훈족이 형이고 마자르족이 아우임을 알려주고 있다.

 

여기서 ‘훈오르’는 ‘훈+오르’로, ‘마고르’는 ‘마ㄱ+오르’로 분절된다. 이어 ‘마가르’가 ‘마자르’로 변음되었음을 알 수 있다. 부여는 대장군이나 장관을 ‘가’(ga, gar)로 호칭하고, 말·소·양·개 등의 가축 이름을 붙였는데, ‘말가(르)’가 ‘마자르’로 변음된 것으로 해석된다. 마자르족 개국설화는 고조선 시기 훈족과 불도하의 형제 관계와 관련이 있다고 필자는 본다. 이 설화는  동일 국왕 아래서 살다가 이동하여 각각 훈족과 마자르족을 형성했음을 시사하고 있다.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불도하의 족장 말가(르) 지휘 하의 기마부대족은 2~4세기경 훈족의 뒤를 따라 우랄산맥의 동쪽 토볼강 유역에 정착했다. 이 시기부터 부족 이름이 마자르(마가르)로 부르게 된 것으로 보인다. 훈족이 4세기에 더 서방으로 이동하여 판노니아 평원으로 들어가자, 마자르족은 우랄산맥 서쪽 카마강과 볼가강 사이의 이전 훈족의 첫 정착지 자리로 이동했다.

이곳에서 마자르족은 목축과 농경에 힘쓰며 상당히 성장하여, 헝가리 학자들이 ‘대(大)헝가리아’(Magna Hungaria)로 호칭하는 시기를 맞았다. 그러다 마자르족은 5~7세기 돈(Don)강과 드니에프르(Dniepre)강 하류 사이의 레베디아 지방으로 이동했다가 강대한 불가르 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헝가리 왕국을 건국한 마자르족장 아르파드 동상. 부다페스트 광장. [위키피디아]

 

마자르족은 7세기 말~8세기 전기에 막강한 힘을 배양했다. 그 요인이 동방으로부터 찾아온 유목민의 충원을 받은 것이라면, 필자는 그것을 속말말갈(粟末靺鞨)족으로 본다. 원래 말갈족의 본거지는 부여의 통치 아래서 요동지방 동만주에 분포된 7개 부족으로 구성돼 있었다. 고구려 건국 후 영토 확장 과정에서 ‘제2 송화강’ 부근의 ‘속말말갈’이 영토를 지키려고 581~600년 고구려와 전쟁에서 패했다. 대부분 고구려에 항복해 고구려 신민이 되었으나, 궐계부(厥稽部)의 ‘만돌’과 그의 동생 ‘돌지계’는 항복을 거부하고 수나라로 피신했다. 수나라는 이들을 요서의 대릉하 부근에 두었는데, 동생 ‘돌지계’는 수나라의 신하가 되었고, 형 ‘만돌’과 그 기마부대는 탈출하여 중국 역사에서 사라졌다. 이것이 요서 지방으로 이동한 유일한 말갈족 기병부대이다(『隋書』, 『太平寰宇記』, 『北史』). 이들이 중앙아시아의 동일 예족인 마자르족을 찾아가 합류한 것으로 추정된다.

 

 

마자르족은 8~9세기에 드니에프르 강과 드니에스테르(Dnyester)강 사이의 흑해 위 서편 카자르 제국 영토인 에텔쾌즈(Etelkoez) 지방으로 민족이동을 감행해 정착하며 독립을 선언했다. 그러나 카자르 제국은 마자르족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고 889년 마자르족을 공격했다.

 

말갈족 기병부대 합류한 뒤 강성

마자르족은 다시 895~900년 카르파티아 분지(판노니아 평원) 안으로 민족이동을 감행했다. 이곳은 동로마의 영지였으나 로마인은 많지 않았고 약 20만 명의 슬라브족이 살고 있었다.

마자르족은 이 민족이동 때 7개 기마 부족장이 모여 혈맹의 뜻으로 피를 나누어 마시고 아르파드(Arpad)를 왕으로 지명함과 동시에 그의 남자 후손을 세습 군주로 봉대할 것을 서약했다.

아르파드가 지휘하는 약 2만 명의 정예 기병부대는 895년 카르파티아 산맥을 넘어 분지 안으로 진입해서 슬라브 농민들을 신속하게 정복했다. 아르파드는 뒤따라온 약 40만 명의 마자르족을 정착시키고, 마침내 카르파티아 분지에 마자르족의 헝가리 왕국을 건국하였다. 이것이 현대 헝가리 마자르족 국가의 시작이다.

말, 투룰(Turul·신성한 새) 등을 새긴 마자르족의 토템 장식(왼쪽부터). [위키피디아]

 

마자르족의 동방 기원 이해를 위해 부여족·말갈족·고구려족과 흡사한 몇 가지 전통 민속을 예로 들면 다음과 같다.

① 부여 왕족 토템은 ‘사슴’이고, 주민 토템은 ‘새’였다. 마자르족 건국 설화에 사슴과 투룰(Turul, 독수리)이라는 새가 나오는데, 연관성이 현저하다. 국민들 사이에서는 말이 애호되었다.

② 마자르족의 반수혈(半竪穴) 가옥은 부여의 수혈 주거와 매우 유사하다.

③ 마자르족 주민의 7부족(Hétmagyar) 구성은 부여의 ‘예’계 말갈족의 7개 부족 구성과 같다.

④ 마자르족의 남·녀 복식과 고깔모자는 부여족의 복식과 고깔모자와 매우 유사하다.

⑤ 형이 사망하면 아우가 형수를 취하는 마자르족의 제도는 구려·고구려와 동일하다.

⑥ 마자르족의 민족음악 5음계는, 부여족 등 고조선 후예들의 민족음악 5음계와 동일하다.

⑦ 마자르족 언어는 아발족(우구르족) 언어와 가까운 친족 관계이다. 이것은 고조선 언어가 부여·아발어·말갈어·마자르어의 조어(祖語)이기 때문이다.

⑧ 마자르족의 장수들과 아르파드 족장의 군모에 새 깃털〔鳥羽〕을 꽂는 양식은 부여·고구려의 깃털 모자와 동일하다.

⑨ 마자르족의 전통 종교는 텡그리즘(Tengrism)으로 단군 신앙이다.

⑩ 마자르족의 신앙에 단군과 함께 태양과 불〔火〕에 이어 달을 숭배하는 전통은 부여족의 태양·달·불 숭배와 동일하다.

※고조선 문명의 후예들이 유럽에 들어가서 수행한 활동을 되돌아본 이 연재를 이번 회로 종료합니다. 인류의 편견 없는 소통과 교류를 위한 연구와 토론이 이어지길 기원합니다.

신용하 서울대 명예교수
서울대 사회학과 명예교수. 대한민국학술원 회원. 서울대 교수(1965~2003) 정년퇴임. 한양대·이화여대·울산대 석좌교수(2003~2018) 역임. 저서 『독립협회 연구』 『한국독립운동사 연구』 『3·1운동과 독립운동의 사회사』 『한국 민족의 기원과 형성』 『고조선 문명의 사회사』 등 다수.

 

 

 

[칼럼] 민성욱 박사

 

말갈은 실체가 있었기 때문에 동일한 시대, 동일한 지역에 존재했던 많은 국가 또는 집단과는 일정한 관계를 유지해 왔다. 그래서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발해 등 만주지역에서 비롯되었던 한민족의 여러 국가들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우선 기록상으로 『삼국사기』 에 등장하는 수많은 말갈 관련 기록과 중국 정사 중 「동이열전」에 등장하는 말갈계 종족들의 기록들, 『수서』이후에 등장하는 말갈은 독립된 열전으로 처음에는 「동이열전」에서 시작해서 「북적열전」으로 이어지는 관련 기록이 많아 남아 있다. 일본사서에는 『속일본기』,『유취국사』 등에 말갈 관련 기록이 등장한다. 말갈은 스스로 역사기록을 남겨 놓지 않아 그 실체 규명이 쉽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말갈 관련 관계 기록 많이 남아 있고 그 기록들 중에는 그냥 넘길 수 없는 기록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최근에는 러시아가 연해주 지역 등 옛 말갈 또는 발해지역 터에서 적극적으로 유적지 발굴조사를 하여, 중국과는 전혀 다르고 고구려나 발해 유적도 아닌 유적이 발굴되는데, 그 유적을 말갈 유적으로 보고 있다.

민성욱 박사

 

옛 역사에서 자연환경에 적응하면서 고유한 그들의 문화를 유지 및 발전시켜 왔던 말갈인들의 흔적이 밝혀짐으로써 그 실체가 확인되고 있다.

 

말갈의 후예를 자처하는 소수 민족

그런가 하면 중국 흑룡강성 및 러시아 연해주 지역에 말갈의 후예를 자처하는 소수 민족들이 있다. 그 대표적인 집단이 우데게인과 나나이족이다. 우데게에서 우드는 숲이라는 뜻을 갖고 있어 우데게인은 숲 속에 사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나나이인의 명칭은 땅이라는 뜻의 ‘나’와 사람이라는 뜻의 ‘나이’가 합쳐져 ‘이 땅의 사람들’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나나이인은 중국과의 교류가 빈번하여 중국 문화와도 유사한 면을 지니고 있다. 한편 국내 유명의 아이돌 그룹 슈퍼주니어의 중국인 멤버였던 한경은 중국에 거주하는 나나이인으로 알려져 있다. 우데게인은 기원후 2세기 무렵까지 바이칼 동부지역에서 아무르 강 상류로, 그 후 다시 만주 남부와 연해주로 이주한 고대 퉁구스족 일파인 ‘읍루’라는 수렵 종족의 후손이다. 우데게인은 기본적으로 세 가지 계통의 종족들, 즉 고아시아계 원주민, 서해와 동중국해 해안을 거쳐 연해주 지역으로 이주한 오스트로네시아계 종족, 바이칼 동부에서 이주한 읍루족을 비롯한 퉁구스계 수렵 종족을 기반으로 형성됐다. 따라서 우데게인 북부 그룹은 일부 고아시아적 요소를 포함하고 있으며, 남부 그룹은 고조선, 발해, 튀르크, 퉁구스, 만주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우데게인의 조상은 발해 건국에 참여했으며, 발해가 거란에 의해 멸망한 이후에도 그 땅을 떠나지 않고 주변 소수민족과 끊임없이 교류하며 현재에 이르고 있다.

 

말갈의 새로운 의미

 

그렇다면 말갈의 종족 명칭은 어떤 의미를 갖고 있을까? 한자 뜻대로 하면 오랑캐 중 오랑캐다. 중국은 중화주의에 입각하여 주변 나라들과 종족들을 폄하 또는 비하하는 습성이 있다. 어떤 종족이든 그들의 종족 이름을 지을 때는 최고의 의미를 부여하고자 했을 것이다. 그것에 착안하여 말갈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새롭게 부여해 보았다.

첫 번째, 말 = 크다(大), 갈 = 칼 혹은 활, 말갈은 큰 칼 또는 큰 활을 차고 만주벌판을 말달렸던 사람들 또는 집단을 의미한다.

두 번째, 말 = 많다(多), 갈 = 고을(邑), 말갈은 만주 및 한반도 북부 전역에 많이 분포하고 있는 집단을 의미한다.

세 번째, 말 = 물(水), 갈 = 고을(邑), 말갈은 물가(강가나 해안가)에 사는 사람들 또는 집단을 의미한다.

네 번째, 말 = 말(馬), 갈 = 고을(邑), 말갈은 말을 잘 타는 사람들 또는 집단을 의미한다.

다섯 번째, 말 = 한, 갈 = 고을(邑), 말갈은 크게 밝고 환한 종족 또는 집단을 의미한다. 이렇게 말갈을 다섯 가지로 새롭게 의미를 부여해 보았는데, 이때 말갈은 우리 민족을 뜻하는 ‘동이’나 ‘한민족’과 유사한 뜻으로 쓰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것에 대한 확실한 근거는 없지만 가능성을 열고 말갈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한 시도라고 할 수 있다.

 

한국고대사 인식 체계의 변화

그 동안 전통적인 한국 고대사 인식 체계에 따라 『삼국사기』 초기기록을 부정하고 중국사서의 기록만 맹신함으로써 말갈의 실체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는 오류가 발생하였다. 특히 중국학계의 경우 연구 자체가 동북공정과 연결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고, 일본은 과거 만선사관과 일선동조론에 입각한 연구 결과이므로 현재는 그 설득력을 잃은 상태이다. 반면 한국학계는 『삼국사기』 초기기록에 등장하는 말갈을 동예 등으로 보는 “위말갈설”이 지배적인 인식이었다. 기존 연구를 종합적으로 판단해 본 결과 말갈은 역사에 등장하는 시기별로 다르게 인식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초기에는 말갈을 만주 및 한반도 북부일대에 분포하고 있었던 예맥계통으로 보아야 하고, 고구려 남하정책 이후에는 고구려에 복속되어 고구려의 변방주민을 일컫는 범칭이 되었다가 후기에는 예맥계와 숙신계의 융합 형태로서 고구려를 구성하는 종족으로, 또는 발해 건국의 주체와 기층민으로 각각 참여하게 된다.

최근 사료의 기록에 대한 재해석과 고고학적 발굴 성과를 바탕으로 말갈의 실체가 밝혀지고 있는 상황에서 관계사 연구가 필요하다. 개인도 관계를 맺으면서 성장해 나가는 것처럼 집단도 서로 관계를 통해 영향을 미치며 발전해 나간다. 고대국가 성립기에서도 일정한 관계를 갖고 상호 경쟁하면서 국가체제를 확립해 나갔을 것이다. 특히 백제는 건국 이후 최초 대외정책이 말갈과의 전쟁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삼국 중에서 가장 늦게 출발했지만 이렇게 말갈과의 전쟁 준비를 하는 과정에서 국가체제를 조기에 갖추게 되었고, 고구려나 신라보다 빠른 시기에 최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렇듯 말갈은 실체적 관계 속에서 정치, 경제, 문화 등의 발전을 이루었고 이것은 향후 발해 건국에 참여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어 주었다. 한국사의 구성원들 간의 관계를 통해 우리 역사 구성원으로서의 편입 여부를 가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말갈과 숙신의 관계

말갈은 대체로 그 뿌리를 숙신으로 보고 있는데, 일반적으로 한국의 학자들은 숙신과 조선이 같은 집단을 지칭하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숙신에서 비롯된 것이 조선이고, 숙신이 동쪽으로 이동 한 후 비롯된 것이 읍루, 물길, 말갈 등 만주지역의 제 종족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진서』의 숙신은 읍루라고도 한다. 『북사』의 물길은 말갈이라고도 한다. 『신당서』의 “흑수말갈은 읍루라고도 불렀으며 물길로도 불렀다”를 종합해 보면 숙신 = 읍루 = 물길 = 말갈(흑수말갈)이 되는데, 이들 중 숙신이 가장 이른 시기부터 문헌에 등장하므로 기원 종족으로 추정된다. 아무르강 연안 및 연해주에는 이들과 계통이 다른 고아시아족, 알타이계 튀르크족과 몽골족, 한민족 등의 출입이 빈번했고, 그들과의 교류로 인해 숙신의 분화가 발생하였다.

그 과정에서 읍루 – 물길 – 말갈이 출현했고, 숙신은 이들의 연맹체였던 것으로 보인다. 후한 이후 말갈이 강성해지고 다른 세력들을 압도하면서 중국사에 등장한 563년 이전에는 세력의 역학 관계에 따라 때로는 숙신이, 때로는 읍루가, 때로는 물길이 그 연맹체를 주도하면서 문헌에 계승관계에 있는 듯 기록된 된 것으로 보인다.

중국 한족과는 역사와 문화적 경계가 확실하게 구분되는 고대 숙신과 조선 그리고 그러한 체제가 붕괴된 이후 여러 나라로 흩어질 때부터 등장하는 말갈, 그들 간에는 일정한 관계가 있음을 추정할 수 있다. 동일한 지역에서 유래되었고 동일한 정치적 체제 하에 있었다고 한다면 동일한 정신문화를 공유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발해 건국 후 말갈계 고구려인, 대조영은 전대의 역사인 고구려 역사가 아닌 단군조선의 역사인 『단기고사』를 간행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말갈과 부여의 관계

고조선부터 한민족의 뿌리로 보는 모든 국가들은 한반도에 한번쯤은 영토가 있었던 이력이 있었으나 부여는 한반도에 영토를 가진 적이 없었다. 하지만 한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이후 발생하는 국가인 고구려와 백제 모두 부여를 정신적으로 계승한 국가이다. 특히 백제는 왕실의 성을 부여씨로 했고, 국호를 남부여로 바꾸는 등 부여의 정통성을 상당히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삼국 성립 전의 만주지역의 패권을 쥐고 있었던 나라가 부여다. 만주지역의 여러 종족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며 부여의 문화를 정착시켰을 것이다. 그래서 말갈 7부중 속말말갈과 백산말갈은 대표적인 예맥계 말갈로 부여계 말갈이라고도 한다. 이러한 부여계 말갈은 같은 부여계인 고구려에 자연스럽게 흡수되어 고구려인이 되었다.

 

말갈과 고구려의 관계

고구려는 건국 초기부터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말갈을 제압할 수 있었고, 그러한 말갈을 부용세력처럼 활용하였다. 신라나 요서지역을 공격할 때 말갈의 군사들을 거느리고 전쟁을 수행하였다. 그리고 말갈은 분포지역에 따라 다른 형태의 말갈이 존재하였고, 예맥계 말갈인 속말말갈과 백산말갈은 자연스럽게 고구려에 동화되거나 복속되었고, 속말말갈 출신인 대조영은 고구려 멸망 후 고구려의 정통성을 계승하기 위하여 고구려 유민들과 말갈인들을 주축으로 해서 발해를 건국하였다.

 

말갈과 백제의 관계

백제는 낙랑과 말갈의 인접 지역에서 건국하였고, 건국 초기부터 낙랑과 말갈로부터 침략을 받았다. 말갈과의 전쟁을 통해 고대국가로서의 체제를 갖추어 나갔으며, 고이왕계에 이르면 말갈과 백제 간의 평화관계가 유지되는 데, 이것은 고이왕계가 말갈계인 진씨왕통이었기 때문이다. 다시 온조왕계인 근초고왕이 왕위에 오르자 백제와 말갈은 다시 전쟁이 시작되었고, 고구려의 영향권에 있었던 말갈은 고구려와 백제와 연합해서 신라를 공격하였으며, 신라의 30여 성을 함락시키기도 하였다. 백제가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하자 신라, 발해 등과 같이 분할 통치하기도 하였다.

 

말갈과 신라의 관계

신라 일성이사금 때 이찬 웅선은 말갈 정벌이 불가함을 아뢰었고 왕은 그것을 받아 들여 말갈을 정벌하지 않았다. 이것은 물론 다른 이유도 있겠지만 신라와 말갈 간의 특별한 관계가 있음을 유추해 볼 수 있다. 말갈은 삼국 성립기 이전에 이미 만주 및 한반도 지역에 분포하고 있었고, 삼국이 성립된 이후에는 일정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결과적으로는 삼국의 발전을 도왔다고 할 수 있다. 말갈의 뿌리가 숙신에 있고 그 숙신이 단군조선과 관련이 있다면 말갈의 위상은 달라지는 것이다. 그래서 신문왕 때 통일 이후 중앙군사조직(구서당)에 말갈국민으로 조직한 ‘흑금서당’을 편성한 것은 당시 고대 신라인들의 말갈관을 반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말갈과 발해의 관계

만주에는 발해라는 옛 고대국가가 있었다. 현재 만주에는 만주족이 살고 있고 그 만주족의 전신인 말갈족이 살았던 곳이다. 말갈, 발해, 여진은 한국인들의 관념 속에서는 순차적인 관계로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러시아 학계의 의견은 한국과는 다르다. 말갈 다음에 발해가 존속하는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말갈과 발해가 모든 지역에서 순차적인 관계를 보이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말갈을 발해와 병행적인 관계로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시대별로 정확하게 나눌 수는 없어도 분명 동시대에 발해와 말갈은 공존했었고, 문화적으로 영향을 받으며 상대적으로 우수한 발해문화를 공유하면서 결국 발해에 복속되었을 것이다. 예로부터 말갈과 한민족은 만나왔고, 말갈과 한민족은 함께 발해를 이루었고 서로 협력하고 교류하였다. 말갈과 한민족은 하나로서 발해의 주인이었다.

 

말갈과 옥저의 관계

옥저는 기원전 4~3세기경부터 지금의 함경도 지역에 정착하면서 동해안을 따라 연해주로 이어지는 환동해 지역에 살았던 집단이다. 옥저의 북쪽에 있던 집단인 읍루는 더욱 알려지지 않은 존재이다. 읍루인은 옥저인이 살고 있는 곳에 내려와서 자연스럽게 섞여 살았고, 나중에 고구려와 백산말갈을 형성하였다. 속말말갈이 부여계 말갈이라면 백산말갈은 옥저계 말갈이다.

고고학 자료들은 옥저와 읍루를 변방의 작은 오랑캐 집단으로 보는 것을 거부한다. 그들은 동해안의 독특한 지리환경에서 고유한 문화를 발달시킨 사람들이고 문화적 저력이 매우 컸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들 북방지역 연구를 통해 남한이라는 좁은 틀에서 벗어나 유라시아 대륙과 끊임없이 영향을 주고받았던 한민족의 역사를 다시 조명해야 할 필요가 있다.

 

말갈은 한국고대사의 인식체계를 바꿀  핵심 키워드

이제부터라도 말갈을 한국고대사의 인식체계를 바꿀 수 있는 핵심 키워드 중 하나라고 인식할 필요가 있다. 그 동안 한국사에서 말갈을 어떻게 인식해 왔는지, 국내사서인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등을 면밀히 검토하였고, 후대의 기록인 『고려사』나 『조선왕조실록』 등에도 말갈(여진)관련 기록이 나오고 있음도 확인하였다. 또한 중국25사나 일본사서인 『일본서기』나 『속일본기』 등에도 말갈(발해)관련 기록들이 나오고 있음도 확인하였다. 역사 문화적으로나 종족계통으로 보아도 우리나라와는 그 친연성이 많았고, 연관성이 많았던 말갈은 분명 한국사에서 일정한 지분을 갖고 있었다고 할 수 있으며, 나아가 현재 대한민국을 구성하는 여러 집단 중 하나이므로 한민족의 한 갈래로 볼 수 있다. 그렇게 인식해야만 발해사를 온전하게 한국사로 편입할 수 있을 것이다.

 

말갈과 한민족의 관계는 불가분의 관계

말갈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났다가 사라진 종족이 아니다. 동일한 시간적, 공간적 배경을 갖고 보면 우리 이웃으로 존재하기도 하였고, 우리 역사의 일부로서 존재하기도 하였다. 만주지역에서 광범위하게 살면서 그들은 때때로 고구려나 발해에 복속되기도 하며 점차 선진문명을 흡수하면서 발전하였다. 말갈은 많은 사서에 등장하지만 독립된 국가체제를 갖추지 못하였고 자체 기록으로 남겨진 역사서가 없기 때문에 그 실체를 규명하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몇 몇 사서에 보면 그냥 넘겨버릴 수 없는 내용들이 나온다. 이렇듯 한ㆍ중ㆍ일 사서에 직ㆍ간접적으로 말갈기록이 많이 남아 있다는 것은 말갈이 존재했던 그 시대만큼은 말갈이 동아시아 국가 내에서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감을 갖고 있었다는 증거일 것이다. 말갈은 자신들의 문화를 유지하면서 동시에 고구려인에 이어 발해인으로 살았다.

중국이 북방사를 중국사로 편입하고자 할 때 우리가 고구려(기원전 37년 ~ 668년)와 발해(698년 ~ 926년)에만 집중하는 것은 고구려와 발해를 제외한 시기에는 우리 민족의 역사 공간이 아님을 시인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말갈은 실체가 없는 것이 아니라 그 동안 제대로 연구를 안 했을 뿐이다. 지금부터라도 잘못된 선입견이나 왜곡된 관점을 버리고 말갈을 온전하게 바라본다면 고조선 이후로 말갈과 한민족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의 만주 역사에 대한 관심은 고구려와 발해에 편중되어 있다. 이렇게 편중된 관심과 연구만으로는 한국의 고대 역사와 문화의 규명이라는 커다란 연구 흐름을 이어 나가기 힘들다.

말갈 같은 북방계통의 집단은 현대인들이 생각하는 혈연적인 민족이나 국가의 개념이 아니라 자신들의 환경에 적응해 왔고,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각자 다른 생활방식을 발전시켜 왔다. 그리고 시대를 거치며 그 범위가 확대되기도 하고 작아지기도 하였다.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은 한반도 중에서도 남한이다. 우리 역사의 공간적 배경은 여기에 한정되지 않는다. 우리 민족이었던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발해, 옥저, 동예 등의 무대가 북한과 만주지역이기 때문이다. 북방으로 올라가면 이름만 알려져 있고, 자세한 생활상은 잘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의 역사가 많이 숨어 있다.

고구려와 발해의 기층민이었던 말갈과 같은 집단들은 한국 고고학과 고대사의 일부 임에도 불구하고 거의 다루어지지 못한 채 잊혀졌다. 우리가 알고 있는 고대 역사는 얼마 되지 않는 역사 기록을 중심으로 구성된 것이다. 문헌자료가 부족한 여러 민족들의 역사는 변방사, 또는 주변 역사로 취급되어졌고, 한국사에서도 이에 대한 연구는 소외되거나 배제되어 왔다.

다행히 고고학 연구 덕분에 만주지역의 다양한 유적과 유물들이 발굴되었고, 막연했던 북방민족의 역사에 관한 새로운 사실들이 알려지고 있다. 문헌 자료가 부족한 만주지역의 역사인 말갈의 역사를 통해 고조선 이후 만주에 살았던 우리 민족의 역사 공백을 채워줄 수 있을 것이다. 기록은 기억을 지배한다. 그 기억은 다시 의식에 영향을 미친다. 역사의 중요성이 여기에 있다. 잘못된 역사인식은 개인의 의식뿐만 아니라 집단의 의식에도 악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왜곡된 역사는 반드시 바로 잡아야 되는 것이다.

 

 

6세기 말 7세기 초 고구려와 말갈의 관계 - 수서 말갈전을 중심으로 - :: 기초학문자료센터 (krm.or.kr)

6세기 말 7세기 초 고구려와 말갈의 관계 - 수서 말갈전을 중심으로 -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사업명 학문후속세대양성_시간강사& #40;인문사회& #41; [지원년도 신청 요강 보기   ]
연구과제번호 2011-35C-A00025
선정년도 2011 년
연구기간 1 년 (2011년 09월 01일 ~ 2012년 08월 31일)
연구책임자 박노석  [ NRF 인문사회 연구책임 7회 수행 / 공동연구 1회 수행 / 학술논문 16편 게재 / 총 피인용 54회 ] 
연구수행기관 전북대학교
과제진행현황 종료
과제신청시 연구개요
  • 연구목표
  • 본 연구는 수서 말갈전의 내용을 토대로 하여 6세기말 7세기 초 고구려와 말갈의 관계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다. 고구려 후기 말갈은 고구려와 함께 백제와 신라를 공격하였으며, 수나 당을 공격할 때에도 같이 참여하였다. 말갈 중 일부는 오히려 수나 당에 귀부하여 오히려 고구려나 주변민족을 공격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말갈은 고구려 혹은 중국내 국가에 복속되어 전쟁에 참여하였다.
    말갈이라는 명칭으로 처음 중국정사에 기록된 것은 수서 말갈전이다. 수서의 열전에서 가장 먼저인 열전 46권에는 동이를 다루고 있는데, 고구려(高麗라고 표기)를 가장 먼저 기록하였다. 이것은 당시 당에서 가장 껄끄럽게 여기고 있던 대상이 고구려였음을 의미한다. 실제 󰡔수서󰡕가 완성된 뒤 8년 후인 644년에 당 태종은 고구려를 침입하였다.
    그러므로 당 태종은 수서를 작성하는 과정에서 주변국들에 대한 정보를 취합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취합된 정보는 당의 입장에 맞게, 당에 유리하게 윤색되어져 수서에 반영되었을 것이다. 사실 당태종은 자기에게 불리한 기록은 일체 남기지 않은 것으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수서를 작성하는 과정에서 말갈에 대한 정보는 북제서를 편찬하는 과정에서 이백약이 수나라 사관이었던 아버지 이덕림의 기록을 참조하였듯이, 수의 기록을 이용하였을 것이지만, 여기에 돌지계(?~정관초)를 통해서 획득한 정보를 이용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수서 말갈전의 내용은 말갈이 속말부, 백돌부, 백산부, 불열부, 흑수부, 안거골부, 호실부의 7개의 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들의 상대적인 위치와 병력수, 민족적 특징 등에 대해서도 기록하고 있다.
    말갈은 고구려에 인접하고 있었는데, 거주지로 추정되는 지역이 고구려의 영역과 많은 부분에서 중첩된다. 이 문제를 제대로 해결해야만 고구려의 영역을 명확히 파악할 수 있게 된다. 삼국사기에 고구려가 말갈(숙신)을 점령한 기사는 서천왕 1년의 기록밖에는 없다. 하지만 광개토대왕릉비문에는 광개토왕 군사를 파견하여 직신(숙신, 말갈)의 영역을 돌아보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고구려에서 말갈의 영역을 점령하였고 계속 지배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지배는 언제까지 지속되었을까 하는 점과, 어떤 방식으로 지배하고 있었는가 하는 점을 밝히고자 한다.
    고구려 후기 고구려와 수․당이 전쟁을 치루는 과정에서 등장하는 말갈에 대해서 명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다음의 사항을 밝히고자 한다.
    첫째, 말갈의 영역과 고구려의 영역이 많은 부분에서 중복된다. 이것이 말갈이 고구려를 정복하고 거주하다가 말기에 고구려에서 되찾은 것인지, 아니면 고구려의 영역 내에 말갈이 거주하고 있었던 것인가 하는 점이다.
    둘째, 고구려의 영역 내에 거주하던 말갈이 한반도에 있던 말갈과 같이 예맥계말갈인지, 아니면 숙신계 말갈인지 하는 점이 밝혀져야 한다. 또 왜 예맥을 말갈이라 기록하였는지 하는 것이다.
    셋째, 예맥계 말갈이라면 말갈 7부가 모두 예맥계인지 아니면 일부는 숙신계인지 하는 점이 밝혀져야 한다. 일부만이 예맥계라면 말갈 7부 중 어느 것이 예맥계이고, 어느 것이 숙신계인지 하는 점을 파악하고자 한다.
    넷째, 전체가 숙신계라면 이들 숙신계 말갈이 어떻게 고구려 영역에 거주하게 된 것인지 하는 점이 밝히고자 한다.
    다섯째, 숙신계 말갈이 고구려의 영역 내에 거주하게 되었는가 하는 점이 밝혀져야 한다.
    여섯째, 고구려에서는 고구려의 영역 내에 거주하고 있던 이민족인 말갈인들을 어떻게 지배하였는가 하는 점을 파악하려고 한다.
    일곱째, 고구려의 영역 밖에 거주하고 있던 말갈인들과 고구려의 관계는 어떠하였으며, 고구려에서는 이들을 어떻게 관리하였는가 하는 점을 밝히고자 한다.
    이러한 연구가 진행되었을 때 고구려 후기 이민족에 대한 지배 방식과 영역내의 이민족의 지배 방식이 밝혀질 것이다. 또한 발해의 건국자인 대조영의 출자에 대한 의문점도 밝혀지리라 생각된다.
  • 기대효과
  • 󰡔수서󰡕 말갈전에 대한 연구는 다음과 같은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첫째, 󰡔수서󰡕 말갈전에 대한 연구는 6세기 말, 7세기 초 고구려와 수·당의 관계와 말갈의 관계에 대해서 명확하게 알 수 있게 해 준다. 수양제의 고구려 침공시 말갈을 비롯한 주변세력의 동향뿐만 아니라, 당 태종의 고구려 침공시에도 말갈과 고구려의 관계에 대해서 명확하게 알 수 있게 해 준다.
    둘째, 말갈이라고 하는 측면에서 발해의 건국자인 대조영에 관한 많은 궁금점이나, 발해의 주민 구성에 대한 여러 가지 측면들도 검토해 볼 수 있게 해 준다. 이 점은 우리민족의 구성이 어떻게 이루어지게 되는가 하는 점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를 고민할 수 있게 해 준다.
    셋째, 고구려의 주민구성을 알 수 있게 해 준다. 고구려는 주변의 여러 나라들을 점령 복속시켰으며, 점령지 주민 중 일부는 사민을 시켜 고구려 내부에서 살게 하였다. 말갈의 존속 양태를 보았을 때 이러한 고구려의 주민 구성에 대해서 알 수 있게 해 준다.
    넷째, 고구려의 지방통치구조를 이해할 수 있게 한다. 고구려는 영역을 확장하면서 초기부터 점령지를 성읍 또는 군현으로 편제하여 중앙에서 직접 지배하였다. 그러나 사민된 이민족에 대해서는 자치적인 성격을 띠게 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내에 거주하고 있던 말갈세력의 양태를 통해서 이러한 통치 구조를 이해할 수 있게 해 준다.
    다섯째, 현행 우리 민족의 형성에 대한 한 단초를 열 수 있다. 현재 우리 민족은 한족(韓族)으로써, 이 한족은 고래로부터 이어져 오던 예족과 맥족, 한족이 삼국시대, 남북국시대, 고려시대로 이어지면서 융합되어져 한족을 형성하게 되었다.
    여섯째, 중국에서는 10여 년 전부터 역사속지주의(歷史屬地主義)에 입각하여 이른바 동북공정을 실시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 우리나라에서는 역사속민주의(歷史屬民主義)의 입장에서 이를 반박하고 있다. 고구려의 주민구성을 통해서 역사속민주의의 입장에서 중국의 동북공정에 반박할 수 있다.
    일곱째, 고구려의 말갈족 점령과 이들에 대한 지배를 확인할 수 있게 된다. 부여는 진․한교체기부터 읍루(숙신, 말갈)를 복속시키고 있었으나, 이들은 중국 삼국시대에 부여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이후 고구려에서는 서천왕 11년(280)에 숙신(말갈)을 점령하기 시작하였다. 비록 기록에는 나와 있지는 않지만 이후에도 계속해서 말갈지역을 점령하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고구려의 말갈족 지배 점령과 지배방식을 󰡔수서󰡕 말갈전을 통해서 간접적이나 확인할 수 있게 된다.
    여덟째, 발해의 주민 구성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공할 수 있게 된다. 발해의 건국자인 대조영에 대해서 우리나라에서는 대조영은 ‘고구려의 별종’이라는 기록에 의하여 고구려인의 후손으로 보고 있으며, 발해의 주민은 비록 소수이기는 하지만 고구려인이 지배계층을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역사로 인식해야 한다고 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대조영을 ‘고구려의 별종’이라는 이론을 보강할 필요가 있다. 또한 발해의 주민구성에서 과연 고구려인이 소수였을까 하는 점에 대해서도 재고의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점은 본 연구를 통해서 어느 정도 해결될 것으로 보인다.
  • 연구요약
  • 본 연구는 수서 말갈전의 내용을 토대로 하여 6세기말 7세기 초 고구려와 말갈의 관계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다. 기존의 이에 대한 연구는 한중일 삼국에서 이루어졌으나, 말갈 7부의 위치문제에 치중된 측면이 많다. 말갈 7부 중 4부는 이전의 숙신지역에 거주하지만, 3부는 고구려의 영역내에서 거주하고 있었던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이 점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 고구려의 영역내에 거주하던 3개부의 말갈은 본래 예맥족이었으나 말갈이라고 기록하였다고도 한다. 그렇다면 왜 예맥족과 말갈을 혼용하였는가 하는 점이 설명이 없다. 그리고 수서 말갈전은 속말말갈 출신의 돌지계가 제공한 정보로 작성되었는데 과연 그가 예맥족이었는가 하는 점이 밝혀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발해를 건국한 대조영을 속말말갈인 혹은 고구려의 별종이라고 하고 있는데 이 문제에 대해서도 여러가지 설이 있다.
    이에 본 연구는 이러한 점에 촛점을 두고서 6세기 말에서 7세기 초 고구려와 말갈의 관계를 수서 동이전을 통해서 밝혀보고자 하는 것이다. 본 연구를 통해서는 다음과 같은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첫째, 수서 말갈전에 대한 연구는 6세기 말, 7세기 초 고구려와 수·당의 관계와 말갈의 관계에 대해서 명확하게 알 수 있게 해 준다. 둘째, 말갈이라고 하는 측면에서 발해의 건국자인 대조영에 관한 많은 궁금점이나, 발해의 주민 구성에 대한 여러 가지 측면들도 검토해 볼 수 있게 해 준다. 셋째, 고구려의 주민구성을 알 수 있게 해 준다. 넷째, 고구려의 지방통치구조를 이해할 수 있게 한다. 다섯째, 현행 우리 민족의 형성에 대한 한 단초를 열 수 있다. 여섯째, 고구려의 주민구성을 통해서 역사속민주의의 입장에서 중국의 동북공정에 반박할 수 있다. 일곱째, 고구려의 말갈족 점령과 이들에 대한 지배를 확인할 수 있게 된다. 여덟째, 발해의 주민 구성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공할 수 있게 된다.
    이를 통해서 교육적으로 다음과 같은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첫째, 고구려사에 대한 연구를 진작시켜 민족정신을 일깨운다. 둘째,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응할 수 있는 논리를 제공한다. 셋째, 고구려와 수·당의 전쟁과정에서 말갈의 역할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넷째, 고구려의 이민족 지배 방식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다섯째, 발해를 건국한 대조영의 출자에 대한 명확한 해명을 제공한다. 이러한 점은 본 연구를 통해서 어느 정도 해결될 것으로 보인다.
    이를 위해서 본 연구에서는 수서 말갈전과 기존의 연구성과들을 면밀히 분석하여 고구려와 말갈의 관계뿐만 아니라 기존 연구의 한계점에 대해서 필자 나름대로의 견해를 피력하고자 한다.
  • 한글키워드
  • 고구려,발해,수서 말갈전,말갈 7부,대조영
  • 영문키워드
  • Tae Jo-Young,SuSeo Malgaljeon,Koguryo,Malgal seven tribes,Balhae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본 연구는 수서 말갈전의 내용을 토대로 하여 6세기말 7세기 초 고구려와 말갈의 관계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다. 기존의 이에 대한 연구는 한중일 삼국에서 이루어졌으나, 말갈 7부의 위치문제에 치중된 측면이 많다. 아울러서 이 지역의 넓은 부분이 고구려의 영역과 중복되는데 이 점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 일부에서는 이 말갈이 예맥족을 말갈이라고 기록하였다고 하였는데, 과연 예맥족을 말갈이라고 하였는가 하는 점과 돌지계가 예맥족이었는가 하는 점이 밝혀져야 할 것이다.
    본 연구를 통해서는 다음과 같은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첫째, 󰡔수서󰡕 말갈전에 대한 연구는 6세기 말, 7세기 초 고구려와 수·당의 관계와 말갈의 관계에 대해서 명확하게 알 수 있게 해 준다. 둘째, 말갈이라고 하는 측면에서 발해의 건국자인 대조영에 관한 많은 궁금점이나, 발해의 주민 구성에 대한 여러 가지 측면들도 검토해 볼 수 있게 해 준다. 셋째, 고구려의 주민구성을 알 수 있게 해 준다.
    넷째, 고구려의 지방통치구조를 이해할 수 있게 한다. 다섯째, 현행 우리 민족의 형성에 대한 한 단초를 열 수 있다. 여섯째, 고구려의 주민구성을 통해서 역사속민주의의 입장에서 중국의 동북공정에 반박할 수 있다. 일곱째, 고구려의 말갈족 점령과 이들에 대한 지배를 확인할 수 있게 된다. 여덟째, 발해의 주민 구성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공할 수 있게 된다.
  • 영문
  • The purpose of this study, " Sui Shu " based on the contents of the Malgaljeon six century, the beginning of the 7th century, Goguryeo and Malgal relationship to examine. Existing done a lot of research about this, but many aspects focused on the location of the problem Malgal 7bu. Along with it, a large part of the region area and duplication of Goguryeo, which mention at this point without. Some Malgal Yemaek record ever had was called Yemaek to Malgal did that it will be revealed.
    In this study, the following effects can be obtained.
    First, " Sui Shu " Malgaljeon for research end of the sixth century, the beginning of the 7th century, Goguryeo and Shi Tang 's relationship with Malgal relationship, clearly gives. Called to Malgal in terms of many curious points Daejoyoung on residents about the configuration of the Balhai several aspects of the founders of the Balhai review gives. Third, Goguryeo 's residents configuration which can be easily
    Goguryeo 's local governance, should be able to understand. Fifth, the current open clues about the formation of our nation. Sixth through the configuration of the inhabitants of Goguryeo, Northeast China 's history from the standpoint of democratic processes can refute Seventh Goguryeo Malgal occupied and ruled on these will be able to see. Eighth, for the inhabitants of the configuration Balhai are able to offer a new perspective.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한국고대사에서 풀리지 않는 점 중의 하나가 말갈에 관한 것이다. 말갈로 불리는 민족은 한반도 남부에서부터 러시아의 연해주와 중국의 송화강유역까지 분포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말갈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에서는 '고구려본기'에서는 동명왕 즉위년부터 등장하기 시작하여 '백제본기'와 '신라라본기'에도 자주 등장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사에서는 숙신, 읍루, 물길 등은 보이고 있으나, 말갈이라는 기록은 "수서"에서부터 나타나기 시작한다.
    국내 기록의 말갈에 대해서는 예맥에 대한 별칭으로 알려져 있으나, 중국 측 기록의 말갈은 통상 숙신의 후신으로 알려져 있다. 말갈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에는 서기전 28년부터 등장하고 있으나, 중국 측 기록에서 말갈이 가장 먼저 등장하는 "수서"에는 말갈이 고구려와 인접한 속말말갈을 비롯한 7개의 부로 나뉘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7개의 부의 위치에 대해서는 대체로 지금의 백두산을 기점으로 하여 북쪽에 분포하고 있었다고 한다.
    만약 그렇다면 수 때에 고구려는 백두산과 그 북쪽지역을 말갈에게 빼앗기고 영토가 축소된 것인가, 아니면 고구려의 영역내에 말갈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던 것인가 하는 점이 논의 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고구려의 영역내에 말갈인이 거주하였다면 이들 말갈인들은 처음부터 이곳에 거주하다가 고구려에 복속된 것인지, 아니면 본래는 고구려의 영역이었으나 말갈인들에게 빼앗긴 것인지, 또는 고구려가 말갈인들을 점령하고 이들 중 일부를 이 지역으로 사민한 것인지 하는 것이 밝혀져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 본고에서는 "수서" 「말갈전」의 기록과 다른 관련 기록을 비교하여 말갈 7부에 대해서 다시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서 2절에서는 "수서" 「말갈전」을 중심으로 하여 다른 관련 기록을 비교하여 말갈 7부의 위치와 거주형태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이어서 3절에서는 이들 7부에 거주하고 있던 말갈인과 고구려의 관계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서 고구려와 말갈의 관계와 고구려 영역내에 거주하고 있던 말갈인들의 양상에 대해서 밝히고자 한다. 이러한 일련의 작업을 통해서 한국 고대사의 한 수수께끼인 말갈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공하고자 한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연구 결과의 기대효과 및 활용방안
    "수서" 말갈전에 대한 연구는 다음과 같은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첫째, "수서" 말갈전에 대한 연구는 6세기 말, 7세기 초 고구려와 수·당의 관계와 말갈의 관계에 대해서 명확하게 알 수 있게 해 준다. 수양제의 고구려 침공시 말갈을 비롯한 주변세력의 동향뿐만 아니라, 당 태종의 고구려 침공시에도 말갈과 고구려의 관계에 대해서 명확하게 알 수 있게 해 준다.
    둘째, 말갈이라고 하는 측면에서 발해의 건국자인 대조영에 관한 많은 궁금점이나, 발해의 주민 구성에 대한 여러 가지 측면들도 검토해 볼 수 있게 해 준다. 이 점은 우리민족의 구성이 어떻게 이루어지게 되는가 하는 점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를 고민할 수 있게 해 준다.
    셋째, 고구려의 주민구성을 알 수 있게 해 준다. 고구려는 주변의 여러 나라들을 점령 복속시켰으며, 점령지 주민 중 일부는 사민을 시켜 고구려 내부에서 살게 하였다. 말갈의 존속 양태를 보았을 때 이러한 고구려의 주민 구성에 대해서 알 수 있게 해 준다.
    넷째, 고구려의 지방통치구조를 이해할 수 있게 한다. 고구려는 영역을 확장하면서 초기부터 점령지를 성읍 또는 군현으로 편제하여 중앙에서 직접 지배하였다. 그러나 사민된 이민족에 대해서는 자치적인 성격을 띠게 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내에 거주하고 있던 말갈세력의 양태를 통해서 이러한 통치 구조를 이해할 수 있게 해 준다.
    다섯째, 현행 우리 민족의 형성에 대한 한 단초를 열 수 있다. 현재 우리 민족은 한족(韓族)으로써, 이 한족은 고래로부터 이어져 오던 예족과 맥족, 한족이 삼국시대, 남북국시대, 고려시대로 이어지면서 융합되어져 한족을 형성하게 되었다.
    여섯째, 중국에서는 10여 년 전부터 역사속지주의(歷史屬地主義)에 입각하여 이른바 동북공정을 실시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 우리나라에서는 역사속민주의(歷史屬民主義)의 입장에서 이를 반박하고 있다. 고구려의 주민구성을 통해서 역사속민주의의 입장에서 중국의 동북공정에 반박할 수 있다.

 

 [칼럼] 민성욱 박사

 

한국 고대사의 실마리를 풀 수 있는 키워드 중 하나가 말갈이다. 그것은 바로 만주사에 대한 이해 때문이다. 한반도에 갇힌 역사가 아닌 민족의 원류가 북방으로부터 시작되었고 한반도로 귀착되기 전에 만주가 주된 역사 공간이었다.

현재 만주는 역사연구적으로 보면 비어있는 공간이다. 역사의 주체가 누구인지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중국은 동북공정으로 시간의 흐름을 무시한 채 강제로 현재 기준으로 만주를 비롯 동북아지역에 존재했던 민족의 역사를 중국역사로 탈바꿈시켰다.

민성욱 박사

 

그 만주지역에는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발해 등의 역사가 그 이전부터 오랜 기간 존재했고 그들의 역사와 문화가 지금의 중국을 만든 한족의 역사와 문화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이것은 분명 역사왜곡이고 옛 역사터전을 잃고 한반도에 갇혀 그것도 남과 북으로 분단된 한민족의 실상으로 볼 때 안보의 문제이기도 하다. ‘만주(滿洲)’ 라는 말은 ‘물가’라는 의미의 만주어에서 유래된 것으로, 대체로 요하 동쪽의 지역을 가리키는데, 대체로 중국의 동북삼성(요녕성, 길림성, 흑룡강성) 지역에 해당된다. 만주지역의 대표 종족으로는 우리 민족인 예맥족과 숙신ㆍ읍루ㆍ물길ㆍ말갈ㆍ여진 등 시대의 변천에 따라 여러 이름으로 불리던 말갈족과 요하의 지류인 시라무렌강 유역의 거란족 등이 있다.

 

우리 역사에서 말갈인식은 우리 역사를 주체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준다

이 중에서 말갈(靺鞨)은 만주지역의 대표종족이자 고조선 이후로 우리 역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특히 고구려와 발해시대에는 어떠한 종족보다도 화려하게 역사무대에 등장했다가 많은 영향을 미치고 홀연히 사라진다. 그러한 말갈에 대한 역사인식이 조선후기 실학파가 등장하면서 달라진다. 당시 국제질서의 변화에 따른 실학파 등의 역사인식이 주체적으로 바뀐다. 단군조선으로부터 출발하여 부여-고구려를 계승한 발해를 강조함으로써 한국사 강역의 범위를 만주로 확대하여 한반도 중심의 고대사 인식체계를 극복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대한민국 상해 임시정부의 역사관으로 계승되었고, 대일항쟁기의 신채호, 박은식, 장도빈, 권덕규 등과 같은 민족주의 사학자들과 그들에게 영향을 미친 무원 김교헌은 대일항쟁운동과 민족의식 고취를 위해 민족사 연구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 결과 말갈을 한민족을 구성하는 여러 본류 중의 하나로 인식하였다. 현재의 역사인식과는 사뭇 다르다. 우리 고대사의 공간적 배경이 분명 만주와 한반도 지역이라고 할 때 만주의 대표적인 종족인 말갈과의 관계를 분명히 해야 될 필요가 있다. 또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역사관을 계승하여 한반도에 갇힌 역사관을 극복하고 진정한 역사 광복을 이루려면 만주지역의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고 정립하여야 한다. 오랜 기간 만주지역에 존재했고, 고조선 이후부터 우리 역사와 함께 했으며, 고구려와 발해 시대에는 그 존재감을 확실하게 보여 주었던 말갈인데 그 동안 연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주로 일본과 중국이 주도하였던 말갈연구를 우리 역사관점에서 새롭게 접근할 필요가 있으며, 그 결과에 따라 우리 역사를 주체적으로 수용하고 이해할 수 있는 인식체계가 마련될 수 있을 것이다.

 

말갈의 실체는 여러 국가(민족)들과 관계사를 통해 밝혀질 수 있다

 
 

말갈은 실체가 있었기 때문에 여러 국가(민족)들과의 관계사가 남아 있다. 이러한 관계사적 고찰을 통하여 민족적 특성과 함께 역사 귀속의 문제도 밝혀질 수 있다. 중국 입장에서 한낱 중국 동북지방의 역사이지만 한국은 그 근원이 되면서 주된 역사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사의 첫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고조선의 역사가 그러하고 그 이후 부여가 있었고, 고구려 때에 오면 다물이라고 하여 고조선의 옛 영토를 회복하고자 하였다. 결국 고조선의 정통성을 계승한 고구려가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 고구려를 계승하고자 했던 발해의 대조영은 동생 대야발에게 단군조선의 역사서인 『단기고사』를 쓰게 하였다. 이것은 고구려도, 발해도 모두 그 뿌리는 단군조선에 있음을 잘 알 수 있는 내용이다. 발해를 건국한 주체의 성격도 규정이 가능하고 대조영의 출자 관계도 정리할 수 있다. 이렇듯 말갈이 한민족의 한 갈래이고 오늘날 대한민국을 구성하는 한 일원이라면 우리 역사가 외면하면 안 되는 존재인 것이다.

위와 같이 고구려사와 발해사가 그러했고 그 뿌리가 되는 고조선의 역사가 동북아시아의 중심이었다. 한반도를 비롯하여 만주지역과 요동ㆍ요서지역을 모두를 아우르는 지역은 동북아시아를 주도하는 민족과 국가들과 관련이 많다. 따라서 그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만주 전역에서 그 생활터전을 갖고 있었고 유목민족으로서 이동을 반복하면서 여러 민족을 만났고 그들과의 관계를 통해 그 지역의 새로운 역사를 써 왔던 말갈. 비록 스스로 역사서를 남겨 놓지는 않았지만 관계사적 측면에서 말갈과 여러 국가(민족) 간의 관계에 대한 연구를 통해 한국사를 비롯하여 동북아시아의 역사를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데, 그 세부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 고구려와의 관계에서 고구려가 성립되기 전에 이미 말갈집단이 존재했으므로 그들은 어떤 존재인지와 백제와 신라와는 다르게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때로는 고구려를 위해 목숨 걸고 싸웠고 고구려 멸망 후에는 고구려 부흥 운동을 전개하는 말갈은 고구려의 피지배계층인지 아니면 고구려 변방 주민들에 대한 비칭 혹은 범칭인지를 알 필요가 있다. 이것은 고구려사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후대인 발해사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두 번째, 백제와의 관계에서 백제 건국 초기부터 말갈은 백제를 괴롭혔고 온조왕은 건국 초기 가장 집중했던 것이 말갈과의 대외관계였다. 어떻게 보면 말갈과의 전쟁 수행을 통해 고대국가로서의 기틀을 다졌고 그래서 삼국 중에서 백제가 가장 빨리 최전성기를 맞이할 수 있었다. 그런데 고이왕 때가 되면 말갈과 이상한 평화 관계가 유지가 된다. 그래서 제기가 되는 것이 고이왕의 친말갈 정책은 고이왕이 말갈계가 아닌가 하는 추정을 가능케 한다. 만약 고이왕이 말갈계라면 이것은 한국고대사를 다시 써야 될 지도 모를 일이다. 왜냐하면 백제는 고이왕 때 고대국가로의 기틀을 잡았고 좌평과 같은 관등제도도 이때 나왔기 때문이다.

세 번째, 『삼국사기』「백제본기」온조왕조 기록를 보면 ‘국가 동유낙랑 북유말갈’이라고 해서 백제의 동쪽에는 낙랑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이 있다고 되어 있다. 이것은 말갈의 위치를 알려 주는 내용이고, 여기서 낙랑은 요서지역에 있었던 한사군 중 하나인 낙랑군이다. 즉 한사군이 한반도가 아니라 요서지역에 있었다는 것을 알려 주는 내용으로 백제의 초기 건국지가 한반도가 아니라 요서지역이었다는 사실 또한 알려주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말갈과 낙랑은 서로 인접해 있었고 관계 또한 우호적이었으며, 특히 낙랑의 요청으로 백제를 공격하는 행태도 보인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말갈과 낙랑이 동일한 종족 계통이거나 서로 이해관계가 부합이 되었기 때문에 함께 동맹을 맺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고조선 붕괴 이후 열국시대에 즈음하여 열국을 크게 두 가지 계통인 부여계와 진계로 나눌 수 있다고 했을 때 같은 진계로 상당한 친연성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네 번째, 신라와의 관계이다. 신라와 말갈의 접촉은 고구려와 백제보다는 상당히 늦은 시기에 이루어진다. 이것은 초기신라와 말갈은 서로 만날 수 없었던 위치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특히 말갈의 침략에 왕이 반격을 지시하지만 이것이 불가하다는 여론이 있었다. 당연히 말갈의 침탈로 백성들이 곤경에 빠져 있었다면 말갈에 맞서 반격을 해야 하는데, 그렇게 할 수 없었던 사정이나 이유가 무엇인지 안다면 말갈의 정체를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다섯 번째, 신라가 백제를 병합하고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소위 말하는 통일 신라 시기에 고구려와 백제 유민들을 회유할 목적으로 중앙군의 군사편제를 9개의 서당, 즉 구서당으로 구성하는데 구서당의 구성이 의미심장하다. 신라계 3개, 고구려계 3개, 백제계 2개, 말갈계 1개로 구성된 구서당은 특히 제 6서당이 ‘흑금서당’으로 그 구성원이 ‘말갈국민’이었다. 즉 삼국시대 이후 후기신라시기에 중앙군으로 왕의 친위부대인 구서당을 구성할 때 그 여섯 번째 서당을 오로지 ‘말갈국민’으로 구성하였다고 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은 규모만 달랐을 뿐 고구려, 백제, 신라와 동등하게 말갈을 취급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7세기 신라인들의 세계관으로 보면 삼국시대가 아니라 말갈을 포함하는 사국시대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여섯 번째, 신라와 당 연합군에 의해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하고 당나라는 신라와의 동맹을 무시하고 신라까지 병합하려고 하였다. 그래서 나당 전쟁이 일어났고 이제 한민족의 운명이 걸린 한판 승부가 벌어지는데, 매소성 전투에서 신라군이 승리를 거두면서 결국 당나라 군대를 축출할 수 있었다. 그런데 당나라 군대에는 이상한 집단이 섞여 있었다. 그들은 말갈병과 거란병이었다. 당군은 고구려가 멸망한 후 흩어진 말갈족과 거란족을 흡수하여 당군으로 결성하여 신라전에 투입한 것이다. 당나라는 고구려와 전쟁에서 고구려군 선봉에서 싸웠던 말갈군들을 전쟁이후 잔인하게 생매장하였다. 이것은 그만큼 미웠던 대상이었다. 그런데 신라와 전쟁에 버젓이 그들을 데리고 나온 것이다. 말갈인도 마찬가지다. 고구려와 당나라 간의 전쟁에서 고구려를 위해 목숨 걸고 선봉에서 열심히 싸웠던 그들이 이제는 당나라편이 되어 신라군을 공격한다는 것이다. 이때 등장하는 말갈은 그 전의 말갈과는 다른 존재인지 알 필요가 있겠다.

일곱 번째, 고구려 멸망 후 고구려 지역 곳곳에서 고구려 복국운동이 일어났다. 고구려의 왕족이나 귀족 등 핵심집단들은 당나라의 산개정책에 따라 뿔뿔이 흩어졌다. 그나마 주거지역에 남아 있었던 말갈계 고구려인들이 고구려 복국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었고 그들 중심으로 발해가 건국이 되었다. 그래서 당나라에서는 처음에 말갈국이라고 불렀고, 신라도 발해 말갈 혹은 말갈이라고 불렀다. 그러다가 최치원 때 와서 발해를 ‘북국’이라고 표현한다. 이것은 ‘사불허북국거상표(謝不許北國居上表)’ 에 나오는 말로 바로 발해에서 스스로 강대국을 자처하면서 신라보다 윗자리에 앉아야 된다고 당나라에게 정식으로 요청하였지만 당나라는 발해의 요청을 거절하였고, 이에 최치원은 너무나 감읍한 나머지 ‘사불허북국거상표(謝不許北國居上表)’라는 표문을 지어 당나라 황제에게 올리게 된다. 즉 이것은 발해가 위에 있도록 허락하지 않은 당나라 황제에게 감사하는 표문이다. 당시 당나라인과 신라인들은 발해인들을 말갈인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신라인들은 발해를 북국이라고 표현하면서 신라와 발해를 남ㆍ북국으로 인식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발해가 곧 말갈이며, 말갈이 곧 발해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여덟 번째, 발해왕은 일본왕에게 국서를 보내면서 고려국왕으로 표현하여 고구려를 계승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또한 일본은 8세기 초 발해를 지칭하는 말로 말갈국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그런가하면 762년 일본열도의 동북변경에서 건립된 일본 미야기현의 다가죠비에는 ‘말갈국’이라는 표현이 있다. 이것이 발해국을 의미하는 지는 명확하지는 않다. 다만 정황으로 볼 때 발해국을 지칭할 수도 있고 아니면 말갈족 전체를 지칭하는 표현일 수도 있다, 여기서 일본의 말갈(발해)인식을 통해 일본과 말갈 간의 관계를 추정할 수 있다.

아홉 번째, 고구려가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하자 많은 고구려 유민과 말갈인이 신라로 귀순한다. 그런가 하면 발해가 거란족에 의해 멸망하자 많은 발해 유민과 말갈인은 고려로 귀순하게 되는데, 여기서 일정한 관계가 성립됨을 알 수 있다. 그 관계를 헤아려 보면 말갈에 대한 역사 귀속의 문제와 민족의 특성을 추정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열 번째, 말갈과 동시대에 같은 공간인 만주지역에 있었던 종족이 거란족이다. 동일한 시대, 동일한 만주지역에 존재했었던 거란과 말갈의 관계를 통해 만주지역 유목민족들의 특성과 고구려와 발해 등과 어떤 친연성이 있는지 살펴 볼 수 있을 것이다.

 

말갈을 통해 만주사를 정리함으로써 우리 역사의 기원과 원류를 이해할 수 있다

이렇듯 단편적이거나 특정 사관에 입각한 지극히 제한적인 말갈 연구가 아니라 한국사의 범위를 확장시키고 나아가 동북아시아의 역사적 갈등을 해소하여 동북아시아 지역의 화해 분위기를 조성하면 한국을 비롯한 동북아시아를 중심으로 인류평화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말갈족이 광범위하게 분포하고 있었다는 만주는 한국사에서는 특별하다. 한국의 고대 및 근대의 역사가 살아 숨 쉬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만주는 한국사와 많이 연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말갈사를 비롯한 만주사를 제대로 정리할 필요가 있다. 말갈의 전신이라고 하는 숙신, 예맥, 동호 등에 대한 연구와 후대의 제 종족들과의 연관성 그리고 북방유목민족들 간의 상호 연관성과 그들의 움직임이 갖는 세계사적 의의를 살펴봄으로써 한민족의 기원과 원류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말갈박사의 말갈이야기 | 민성욱 교수

https://youtu.be/c6ElM5UHQ3g?list=PLkrB780eo1BsIKMx1JIijnloaMGRwp5p3

 

 

말갈과 고조선, 부여, 고구려의 관계 | 말갈박사의 말갈이야기 2부 | 민성욱 교수

https://youtu.be/l4wdCP6xFu0?list=PLkrB780eo1BsIKMx1JIijnloaMGRwp5p3

 

 

 

말갈과 백제, 신라, 발해, 옥저와의 관계 | 말갈박사의 말갈이야기 3부

https://youtu.be/4DdL5Y1QsrA?list=PLkrB780eo1BsIKMx1JIijnloaMGRwp5p3

 

 

 

헝가리를 세운 민족은 말갈족이었다 | 민성욱 말갈 박사의 말갈 이야기 4부

https://youtu.be/9h3HQAuLVE4?list=PLkrB780eo1BsIKMx1JIijnloaMGRwp5p3

 

 

말갈족 그들은 누구인가 | 민성욱 말갈 박사의 말갈 이야기 5부

https://youtu.be/49X8IxwpSmk?list=PLkrB780eo1BsIKMx1JIijnloaMGRwp5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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