력사를 찾아서
만주 / 티베트 / 위구르 / 내몽고 본문
中지도부 소수민족 간부 10년만 최저…"민족 동화책 강화" | 연합뉴스 (yna.co.kr) 2022-12-12
205명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4.39%…"시진핑, 소수민족 우대정책 깨"
[WORLD&INSIDE] 신장·티베트·네이멍구… 들끓는 中 소수민족들 (chosun.com) : 2013.10.11
-신장 위구르, 이슬람 독립운동
중앙정부에 뿌리 깊은 증오심… 넉달간 유혈충돌 100명 숨져
-티베트, 120여명 분신자살
국경절에 중국국기 게양 강요, 비무장 시위대에 발포까지
-네이멍구, 대규모 對테러 훈련
한족·몽골족 석탄 놓고 갈등
소수민족 분리독립 요구 ‘中 분열 뇌관’으로 - 경향신문 (khan.co.kr) 2008년 08월 05일
ㆍ위구르·티베트·몽골족 反정부 목소리
ㆍ전통문화 압살·한족화 반발 계속 확산
소수민족 中정계 약진 ‘눈에 띄네~’ : 네이트 뉴스 (nate.com) 헤럴드경제 2007년 10월 10일
건국초기 1만명서 현재 290만명급증
6자회담 주도역할 다이빙궈도 토가족 출신
중국 정계에 소수민족 출신의 지도자가 증가하고 있다.
[만주]
[조선족자치주 70년] ①인구 줄고 해외로 떠나며 '정체성 위기' | 연합뉴스 (yna.co.kr) 2022-09-02
동북 3성 집중됐던 조선족, 中내륙과 한국 등으로 떠나
중국어 우선 표기 정책 등에 한족화 우려도 커져
조선족 학교·학생 수 급감 등으로 민족교육도 위기
편집자 주 = 9월 3일은 중국 옌볜조선족자치주 창립 70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전통적으로 동북 3성에 밀집해 거주하던 조선족은 개혁개방의 흐름을 타고 중국 내륙과 한국, 일본 등으로 진출했습니다. 하지만 이로 인해 인구 감소와 차세대의 한족화 등 정체성 위기도 겪고 있습니다. 자치주 창립 70주년을 맞아 조선족 사회의 변화를 짚어보고, 자치주로서 연변의 정체성 유지, 발전 전망 등을 다루는 기획기사를 송고합니다.
중국 지린성 옌볜조선족자치주 주도인 옌지의 한 건물 전체를 뒤덮은 한글 간판들.[연합뉴스 자료사진]
(서울=연합뉴스) 강성철 기자 = 19세기부터 한반도에서 이주해 동북 3성에 밀집해 거주하던 조선족들은 대륙에 불어닥친 개혁개방의 흐름을 타고 중국 내륙도시와 한국, 일본 등 해외로 활발하게 진출했다.
이로 인해 조선족의 활동 무대는 크게 넓어졌지만, 초창기 자치주 내 70%를 차지하던 조선족 비중이 지금은 30%로 떨어져 공동화(空洞化) 현상이 심해지고 있다.
조선족 정규학교도 급격히 줄어들면서 차세대의 한족(漢族)화도 심해져 옌볜(延邊)조선족자치주의 존속과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고조하고 있다.
◇ 조선족, 동북3성에서 내륙과 해외로 뻗어나가
중국의 행정구역은 4개 직할시, 5개 자치구, 22개 성, 2 개 특별행정구로 이뤄졌다. 자치주는 성의 하급 단위로, 중국 전역에는 30개의 자치주가 있다.
중국 지린(吉林)성 내 자치주인 '옌볜조선족자치주'는 중국, 러시아, 북한의 교차 지점에 자리하고 있다. 면적은 4만3천509km²로 경상남북도와 전라남도를 합친 것보다 크다.
중국 조선족은 옌볜조선족자치주를 중심으로 헤이룽장(黑龍江)성, 랴오닝(遼寧)성 등 주로 동북 3성에 거주해왔다.
조선족의 형성은 고조선, 고구려, 발해의 후손들로 보는 견해에서부터 명·청 교체기인 17세기에 국경을 넘은 것으로 보는 시각 등 여러 설이 있다.
하지만 19세기 이전 이주자는 이미 중국에 동화돼 역사적 흔적을 찾기 어렵다. 일반적으로는 추적이 가능한 19세기 구한말부터 조선족 이주가 본격화한 것으로 보고 있다.
1860년대부터 기근과 수탈을 피해 한반도에서 중국으로 이주하는 사람이 늘었고, 일제강점기에는 그 규모가 더욱 커졌다.
이주 초기에는 국경 인근의 벼농사가 유리한 지역으로 이주가 시작됐다. 국경을 바로 넘을 수 있는 평안·함경도 출신이 건너와 옌볜 등에 자리 잡았다. 이후 경상·전라도 등에서 온 이들은 더 북쪽으로 올라가 헤이룽장(黑龍江)성 등으로 이주했다.
1907년 7만여 명이었던 조선족 규모는 1945년 216만여 명으로 늘었다. 해방 후에는 절반가량 한반도로 귀향하면서 112만여 명으로 줄었다.
이후 다시 꾸준히 증가해 2000년에 192만여 명으로 정점을 찍었지만, 이후 줄곧 감소해 중국 내 조선족 규모는 현재 170만 명 수준이다.
중국 정부는 1952년 9월 3일 옌볜 지역을 '조선족자치주'로 지정하고 고유의 언어와 풍습을 허용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조선족 사회는 1970년대까지는 농촌 등 마을에 기반을 둔 '밀집형 지역공동체'였다.
하지만 개혁개방과 한중수교를 계기로 탈농촌과 도시화, 내륙 도시 및 해외 진출 등의 추세에 속도가 붙으면서 '네트워크 공동체'로 바뀌고 있다.
현재 170만 조선족의 중국 내 분포를 보면 베이징 등 수도권 8만, 칭다오(靑島) 등 산둥(山東)성 20만, 상하이 5만, 광둥(廣東)성 4만 등 동북 3성을 제외한 지역에 37만 명이 산다.
해외로도 대거 빠져나가 한국에 70만여 명, 일본에 8만여 명, 미국과 유럽 등 기타 지역에 5만여 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내륙도시나 해외로 이주하더라도 고향에 가족 일부가 남아 있으면 주소지를 그대로 두는 경우가 많아 정확한 인구를 파악하기는 쉽지 않은 게 현실이다.
분명한 것은 옌볜조선족자치주 등 전통적 집거지인 동북 3성을 벗어나 사는 인구가 훨씬 많아졌다는 점이다.
◇ 조선족 이탈에 자치주 지위마저 '흔들'
2020년 기준으로 옌볜조선족자치주 인구 194만 명 가운데 조선족은 59만7천여 명으로, 비중이 30%가량에 불과하다.
자치주 성립 초기인 1953년에는 70%가량 차지했던 조선족 비중이 70년 동안 절반 이하로 줄어든 것이다. 반면에 30%가 안 됐던 한족 비중은 66%까지 늘었다.
조선족 비중이 줄어든 가장 큰 원인은 한국으로의 이주다. 현재 재한 조선족은 70만 명을 넘어섰다. 옌볜자치주 내 조선족보다 더 큰 규모다.
조선족 비중이 30%를 밑돌면서 자치주 지정이 해제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마저 나온다.
중국 정부가 1993년 발표한 조례에 따르면 소수민족이 전체 인구의 30%를 넘어야만 '민족향(鄕)' 설립을 신청할 수 있다는 규정이 있다. 향은 자치주보다 작은 단위로, 현재 자치주 관련 규정은 없다.
다만 자치주보다 윗급인 자치구를 보면 네이멍구(內蒙古) 자치구의 경우 몽골족 비중이 17.66%에 불과하지만, 아직 자치구 폐지 논의는 나오지 않고 있다.
현재 조선족의 최대 거주지는 옌볜조선족자치주가 아닌 대한민국이다. 조선족이 가장 많이 거주하는 서울 영등포구 대림동 중앙시장 일대 풍경. [연합뉴스 자료사진]
옌볜조선족자치주 정부는 지난 7월 25일 '조선 언어문자 공작 조례 실시세칙'을 공포하고 시행에 들어갔다.
이 세칙은 국가기관·기업·사회단체·자영업자들이 문자를 표기할 때 중국어와 한글을 병기하되, 중국어가 앞에 나오도록 했다.
이전에 제작돼 세칙에 부합하지 않는 현판과 광고 등 모든 표지판은 교체해야 한다.
이에 한글이 앞쪽에 쓰인 간판 일색이던 자치주 주도 옌지(延吉)가 점점 조선족 특유의 모습을 잃어가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중국동포타운신문의 김정룡 대표는 "조선족자치주의 상징 중 하나였던 한글 표기가 뒤로 밀린 것은 자치주의 위상이 약화한 탓도 있지만, 중국 정부가 국가 통합을 강조하는 분위기도 작용했다"고 분석했다.
다만 자치주 해제라는 최악의 상황까지 가지는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표성룡 중국조선족기업가협회 회장은 "조선족은 중국 55개 소수민족 가운데 고유 언어와 문화를 가장 잘 지켜왔고, 문맹률도 가장 낮고, 대학 진학률은 제일 높아 어디에 살아도 자부심을 느끼고 살아왔다"며 "조선족자치주의 존재는 조선족을 하나로 묶는 강력한 구심점이기에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다만 제도적으로 자치주 지위가 유지되더라도, 지금과 같은 인구 감소 속도를 보면 자치주로서 실질적 역할을 계속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 인구 감소·중화주의 대두에 민족교육도 '위기'
조선족 주말학교인 중국 베이징 정음우리말학교(좌측)의 수료식과 일본 도쿄 샘물학교의 민족예절 수업. [연합뉴스 자료사진]
이러한 조선족 공동화 현상으로 조선족 학교가 80% 이상 줄면서 민족교육도 위기에 처했다. 인구 감소와 이주 탓에 학생 수도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옌볜조선족자치주의 학생신문인 조선족중학생보에 따르면 1990년대 초만 해도 동북 3성에 1천500여 개 조선족 중고등학교와 40만 명의 학생이 있었으나, 2015년에는 학생 수가 2만3천여 명으로 급감했다.
더구나 근래에 중국 내 소수민족의 자치권보다 중화 민족주의와 국가통합이 강조되는 분위기가 조성되면서 민족교육은 더욱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됐다.
2020년부터 중국 교육 당국은 일선 학교에 중국어, 도덕과 법치, 역사 과목 등의 교과서를 단계적으로 '국가 통일편찬 서적'으로 바꾸고, 수업도 중국 표준어로 하도록 했다.
옌볜자치주를 비롯해 동북 3성 조선족 학교는 수업을 조선어로 해왔는데, 조선족 학생이 줄고 한족 학생 비율이 높아지면서 중국어 수업 과목이 늘어나고 있다.
조선족중학생보 등에 따르면 조선족 학교 교재도 자치주가 발행한 조선어 교재가 아닌, 중국어 교재로 바뀌고 있다고 한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지난해 8월 중앙민족공작회의를 열어 "중화민족 공동체 의식을 확고히 수립하고, 국가통일과 민족단결을 지키는 사상적 만리장성을 구축해야 한다"며 "민족 분열의 독소를 숙청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문민 재한조선족교사협회장은 "한족 학생이 더 많은 상황이라 자연스럽게 민족교육이 위축되고 있다"며 "더구나 조선족 부모들이 교육 환경이 더 좋은 한족 학교에 자녀를 보내는 사례도 늘어나고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언어 사라지는 中 소수민족…설 곳 잃는 조선족 | KBS 뉴스 2021.04.24
[주간조선] 100만 인구가 1억 한족 정복해 280년간 중국을 지배한 민족 (chosun.com) 2009.09.13
지금부터 100년 전인 1909년. 중국 대륙의 주인은 한족이 아닌 만주족(滿洲族)이었다. 중국의 최고 권력자는 앞머리를 '빡빡' 밀고 변발을 늘어뜨린 만주족 황제였다. 각 지방의 성(省)은 대개 한족 관료들이 다스렸지만 군사권은 만주족 수중에 있었다. 만주족 장군들은 한족의 소요사태를 군대를 동원해 무력으로 진압했다.
한족 공산당 간부가 군사권과 인사권을 틀어쥐고 소수민족 엘리트가 행정실무를 담당하는 현재 상황과 정반대의 상황이 연출됐다. 2년 뒤인 1911년에야 한족은 ‘멸만흥한(滅滿興漢·만주족을 멸하고 한족을 부흥시킨다)’을 부르짖으며 신해혁명을 일으켰다.
신해혁명의 성공으로 한족은 중국 대륙을 다시 탈환했고 만주족 황제를 베이징의 자금성에 감금했다. 만주족을 쫓아낸 한족은 만주족의 이름을 '만주(滿族·만족)'로 바꿔버렸다. 부르기 어렵다는 이유에서였다. 그 후 한때 중국 대륙을 지배했던 인구 1068만명의 만주족은 성(省)급 자치구도 하나 없는 소수민족 가운데 하나로 전락했다.
읍루·물길·숙신·말갈·여진 등 다양하게 불려
1636년 청 세우면서 ‘만주족’으로 명칭 통일
만주족은 본래 △읍루 △물길 △숙신 △말갈 △여진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 1636년 청나라를 건국하면서 중구난방으로 불리던 명칭을 ‘만주족’으로 통일했다. ‘만주’라는 이름은 ‘문수사리’를 일컫는 산스크리스트어(범어) ‘만주슈리’에서 나온 말로 알려졌다. 불교 용어 ‘만주슈리’는 ‘대단히 좋은 행운’을 뜻한다.
만주족과 한족은 외관상 큰 차이가 없다. 광범위한 혼혈이 진행됐기 때문이다. 다만 좁은 미간과 곧은 콧날, 밝은 피부색, 사각형의 얼굴은 전형적인 만주족의 생김새로 여겨진다. 혈액형 가운데 B형이 전체의 40%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것도 한 가지 특징이다.
하지만 성(姓)을 보면 만주족과 한족을 대개 구분할 수 있다. 만주족 가운데는 △퉁( ·동) △관(關·관) △마(馬·마) △쑤어(索·제) △치(齊·제) △푸(富·부) △나(那·나) △랑(郞·랑) 8개 성씨가 비교적 많다. 이들 8개 성은 한족 가운데는 드문 성씨로 2자 이상의 만주족 복성(複姓)을 단성(單姓)화한 것이다. 예컨대 ‘루바얜(如巴顔)’이란 만주식 성은 비슷한 의미의 ‘푸(富·부)’씨로, 만주족 황실(皇室)의 성인 ‘아이신줴뤄(愛新覺羅)’는 ‘진(金·김)’씨로 바꾼 것이다. 때문에 김씨 성을 가진 우리나라 사람은 중국에서 종종 만주족 황족의 후예로 오인 받기도 한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성씨인 김씨는 900여개가 넘는 한족들 성씨 가운데 희귀한 성이다.
한때 중국 전역을 지배했던 민족이라 교육수준은 소수민족 가운데 가장 높다는 평가다. 지난 1990년에 실시한 한 조사에서 만주족 1만명당 대졸 이상의 학력을 가진 사람은 1652명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소수민족을 포함한 중국 전체 평균(139명)보다 거의 10배 이상 높은 숫자다. 심지어 한족(143명)보다도 훨씬 높은 수준이다. 또 15세 이상을 대상으로 한 ‘문맹 및 반(半)문맹 실태조사’에서도 만주족 가운데 1.41%가량만 문맹 혹은 반문맹인 것으로 드러났다. 이는 전체 평균 22%보다 거의 20%포인트 이상 낮은 수준으로 역시 한족(21%)보다도 낮다.
높은 교육수준을 바탕으로 만주족은 예술 쪽에 두각을 나타냈다. 문화대혁명 때 투신자살한 중국의 인민소설가 라오서(老舍)를 비롯해 홍콩 영화 ‘황비홍’ ‘동방불패’ 등에 출연하며 청순한 외모로 큰 인기를 끌었던 영화배우 관즈린(關之琳·관지림), 현재 중국에서 가장 몸값이 높은 남자 배우 중 하나인 후쥔(胡軍)도 만주족 출신이다. 또 2008년 베이징올림픽 개막식에서 피아노 연주를 선보인 중국의 천재 피아니스트 랑랑(郞朗·27)도 랴오닝성 선양에서 태어난 만주족이다. 지난 1995년 차이코프스키 국제 영재 콩쿠르에서 우승하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랑랑은 세계에서 가장 돈을 많이 버는 음악가 중 한 사람이다. 지난해 수입만 9100만위안(약 180억원)에 이르렀다.
베이징과 가까운 랴오닝성에 10% 거주
선양엔 황궁과 황제들 무덤 보존돼 있어
이들 만주족이 주로 거주하는 곳은 동북 3성(랴오닝성·지린성·헤이룽장성) 일대다. 만주는 동북 3성을 통칭하는 지명이기도 하다. 그중 베이징과 가까운 랴오닝성에는 만주족 전체 인구의 10%에 달하는 100만명가량이 살고 있다. 랴오닝성 번시(本溪)와 환런(桓仁) 등에는 만주족이 모여 사는 만주족 자치현(縣)이 6개나 설치돼 있다.
1644년 만주족이 만리장성 동쪽 끝에 있는 산해관(山海關)을 돌파해 중국을 정복했을 때 처음 수도로 삼으려고 했던 곳도 베이징이 아닌 랴오닝성 선양이다. 당시 만주족 강경파들은 “베이징에 있는 한족을 몰살시키고 선양에 수도를 정하자”고 주장했다.
하지만 만주족은 대륙 전체를 지배하는 보다 큰 그림을 그리기 위해 선양을 버리고 베이징으로 남하했다. 때문에 지금도 동북 3성 최대 도시인 선양에는 만주족 황제들의 무덤은 물론 베이징에 입성하기 전까지 살았던 만주족 황궁이 그대로 보존돼 있다. 선양의 만주 황궁은 베이징에 있는 고궁(자금성)과 함께 중국의 2대 황궁으로 꼽힌다. 오히려 보존상태는 고궁보다 더 뛰어나다는 말도 나온다.
베이징으로 내려간 뒤 만주족은 자신의 고향인 동북 3성 일대를 성역화했다. 특히 랴오닝성과 지린성의 경계에는 975㎞에 달하는 버드나무 경계를 세우고 한족과 몽골족이 출입하는 것을 엄금했다. ‘유조변’으로 불리는 버드나무 경계는 지금도 일부 남아있다. 한족들이 만리장성을 쌓아 이민족과 자신을 분리한 것처럼 만주족 역시 버드나무를 세워 이민족과 경계를 삼은 것이다. 대륙에서 한족에게 쫓겨날 경우를 대비해 돌아갈 땅을 마련한 것이기도 하다. 만주족이 대거 거주한 선양은 ‘버드나무 도시’란 뜻에서 ‘무크덴’으로 불리기도 한다.
만주족이 남하해 텅 빈 땅에는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간 조선족이 하나둘 자리를 잡았다. 만주와 한반도의 경계에 있는 백두산을 신성시하는 것은 조선족과 만주족의 공통점이다. 조선족과 만주족은 동북 3성 일대에 함께 섞여 살고 있다. 이들 두 민족은 외형상으론 구분하기 힘들지만 개고기 식용 여부로 쉽게 구분할 수 있다. 개고기를 즐겨먹는 조선족과 달리 만주족은 개고기를 먹지 않는다. 심지어 만주벌판의 겨울철 삭풍에도 불구하고 개털로 만든 모피는 절대 입지 않는다. 만주족의 선조라고 할 수 있는 누르하치가 한족에게 쫓기던 중 누렁이(黃狗)의 도움으로 목숨을 부지한 이야기가 만주족 사이에 전해지기 때문이다.
중국 전통의상인 치파오는 만주족이 입던 옷
만주 황실요리인 ‘만한전석’도 최고 요리로
중국 전문가들은 “오늘날 중국인들은 만주족에 감사해야 한다”고 말한다. 오늘날 중국 영토의 윤곽을 만든 것은 한족이 아닌 만주족이기 때문이다. 만주족이 중국을 정복하기 전 한족들의 영토는 대략 지금의 2분의 1 정도에 불과했다. 최근 국제 문제로 부상한 △신장(新疆)위구르자치구 △시짱(西藏)티베트자치구 △네이멍구(內蒙古)자치구 등은 모두 만주족이 정복하고 확장한 지역이다. 심지어 만주족은 지금은 독립국으로 남아있는 몽골(외몽골)까지 영토에 포함하고 있었다.
하지만 신해혁명으로 만주족이 쫓겨나자 이들 지역도 연달아 독립을 선포했다. 오늘날 중국 내 소수민족 문제의 직접적인 단초를 제공한 것이다. 1949년 신중국 건국 이후 대부분의 소수민족 자치구는 재점령했지만 외몽골은 아직도 수복하지 못한 상태다. 때문에 일부 한족들은 “외몽골도 다시 찾아와야 한다”고 주장한다.
중국 국영방송인 CCTV에서 가장 많이 방영하는 역사 드라마도 만주족을 소재로 한 드라마다. 비교적 가까운 시대의 이야깃거리라서 자료가 풍부하고 고증이 쉽기 때문이다. 지금도 수도 베이징 곳곳에는 만주족 황족과 귀족들이 살던 저택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특히 청나라의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 3명의 황제에 관한 이야기는 각각 △강희왕조(2001년) △옹정왕조(1997년) △건륭왕조(2002년)와 같은 CCTV 대하드라마로 제작돼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다.
한족 시청자들은 드라마를 보면서 만주족 황제가 변방으로 군대를 이끌고 나가 소수민족을 정벌하는 장면에 열광한다. 물론 TV 드라마에서 만주족 황제 역을 맡는 배우들은 대개 한족 배우다. 또 드라마 속의 만주족 황제는 만주 전통복장에 변발을 하고 있지만 만주어가 아닌 한어를 구사한다. 만주족은 한어와 다른 언어와 문자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지금은 거의 만주어를 읽고 해석할 수 있는 사람이 없는 것으로 알려져 중국 학계의 고민거리로 떠오르고 있다. 이들 만주족을 소재로 한 드라마는 우리나라에도 케이블과 위성TV 등을 통해 방영된 바 있다.
신장·시짱·네이멍구 등 정복, 영토 확장
현재 국경도 한족 아닌 만주족이 만든 것
만주족의 영향은 이뿐만 아니다. 중국에서 귀빈을 대접할 때 내놓는 청나라 황실요리 ‘만한전석(滿漢全席)’도 만주족 요리와 한족 요리로 구성돼 있다. ‘차이니즈 드레스’로 불리는 ‘치파오(旗袍)’도 한족이 아닌 만주족의 전통복장이다. 만주 ‘기인(旗人·만주족 군사·행정 편제에 속한 사람)’들이 입는 옷이란 의미의 ‘치파오’는 본래 남녀 구분이 없었으나 현재는 여성이 입는 옷으로 의미가 줄어들었다. 오른쪽 어깨부터 겨드랑이 사이를 끈 단추로 여미는 치파오는 옷깃은 높고 소매가 좁은 것이 특징이다. 또 치마 옆이 길게 트이고 몸에 쫙 달라붙는 옷의 형태 때문에 세계에서 가장 관능적인 옷이란 말도 듣는다. 1972년 미·중 수교 때 방중(訪中)한 미국 닉슨 대통령의 영부인 패트(pat) 여사가 치파오를 입은 중국 여성을 보고 “중국의 인구가 왜 세계 제일인 줄 알았다”는 말을 남겼다는 일화도 있다.
당초 한족들은 치파오를 오랑캐의 옷이란 뜻에서 ‘호복(胡服)’으로 불렀다. 청나라 사람들의 옷이란 의미에서 ‘칭좡(淸裝)’으로 부르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한족의 문화로 완전히 흡수해 한족의 전통복장으로 변화시켰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 때 메달 시상 도우미가 입었던 옷도 개량 치파오다. 결혼식 때 중국 신부들이 하얀 웨딩드레스와 함께 입는 옷도 대개 붉은색 치파오다. 한때 여대생들 사이에 ‘치파오’를 입고 졸업사진을 찍는 것이 유행하기도 했다. 상하이탕(上海灘)과 같은 홍콩 브랜드는 1930년대 상하이풍 치파오 디자인 콘셉트로 의류와 패션 소품을 출시해 세계적인 명품의 반열에 올랐다.
하지만 최근에는 만주족의 치파오 대신 한족 전통의 옷인 ‘탕좡(唐裝)’이 상대적으로 각광 받고 있다. 당나라 옷이란 뜻의 ‘탕좡’은 치파오와 달리 넓은 소매와 펑퍼짐한 치마가 특징이다. 농경 정착민족인 한족은 소매 폭이 넓고 펑퍼짐한 옷을 선호했다. 지난 2001년 상하이에서 열린 APEC 정상회의에서 각국 정상들이 입었던 중국 전통의상도 ‘탕좡’이다. 한족 민족주의로 무장한 장이머우(張藝謀) 같은 5세대 영화감독들은 영화 속에서 치파오 대신 한족 전통 의상인 ‘탕좡’을 선호한다. 장이머우가 총감독한 2008년 베이징올림픽 개막식 때도 ‘치파오’가 아닌 ‘탕좡’을 입은 배우들이 개막식 공연에 대거 출연했다.
‘마지막 황제’ 푸이 내세워 만주국 건립
독립 부추긴 일제의 패망과 함께 물거품
지금은 사실상 한족과 동화됐지만 한때 만주족도 독립을 꿈꿨다. 과거 일제는 만주족이 처한 상황을 이용해 이들의 독립을 부추기기도 했다.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아이신줴뤄 푸이(선통제)를 내세워 동북 3성과 네이멍구 일대를 근거지로 하는 만주국을 세운 것이다. 푸이도 이에 흔쾌히 동의하고 지금의 지린(吉林)성 창춘(長春)을 수도로 하는 만주국의 황제(강덕제)로 등극했다. 당시 창춘은 베이징(北京)을 대신하는 ‘새로운 수도’라는 뜻으로 신징(新京)으로 불렀다. 백두산을 끼고 있는 지린성 일대는 만주족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현재도 창춘에는 만주국 초대 황제 푸이가 살았던 황궁과 정부청사에 해당하는 국무원 건물이 그대로 남아있다. 하지만 일본의 패망과 함께 마지막 만주족 황제 푸이는 정치범으로 붙잡혔다. 이후 약 9년 동안 감옥에서 복역하다 한족 마오쩌둥의 특별사면으로 출소한 뒤 베이징 식물원의 정원사로 전락했다. 1967년에 암으로 사망한 푸이는 28년이 지난 1995년에야 비로소 만주족 황릉에 안장됐다. 푸이의 일대기는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의 영화 ‘마지막 황제’로 잘 알려져 있다. 현재 푸이가 살던 창춘의 황궁은 ‘외세에 의한 민족분열’을 경고하는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오늘날 만주족이 독립하거나 다시 한족을 정복하는 것은 꿈 같은 얘기”라고 단언한다. 100여년 전 중국 전역을 지배하면서 전국 31개 성(省)과 자치구로 만주족이 흩어져 버린 것도 독립의 가능성을 낮게 만드는 요인이다. 중국 대륙 각지에 퍼져있는 만주족들은 과거 만주족 팔기군(만주족의 주력군단)의 후예들이다. 만주족들이 집중적으로 거주하는 동북 3성을 비롯한 허베이(河北)성과 네이멍구 자치구 등이 수도 베이징과 너무 가깝다는 점도 독립 움직임을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다. 반면 가장 활발한 소수민족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있는 신장 위구르자치구나 시짱 티베트자치구는 베이징과 수천㎞ 이상 떨어져 있다.
☞ weekly chosun 바로가기
"중국인들은 모든 정복자를 정복할 강인한 민족"
문화대혁명과 개방 사이에 낀 중국의 80년
[티베트]
티베트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달라이라마 "中, 티베트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 비난 (daum.net) 뉴시스 | 2009.03.10
"티베트는 '80년 광주'..자유를 허하라" (daum.net) 한겨레 | 2009.03.10
[한겨레] "자유, 자유, 자유! 티베트인을 죽이지 말라"
한국 망명 스님 등, 중국대사관 앞 항의 회견
시민단체도 동참…'사랑의 장미'도 거부당해
"중국 올림픽기간 중 티베트 시위대에 발포" - 머니투데이 (mt.co.kr) 2008.08.22
달라이 라마, 티베트 역사 처음 말하다 (hani.co.kr) 한겨레 2008.5.10
아시아 전문기자와 3년간의 대화록공산당에 맞섰지만 마르크스주의 옹호원래 이름은 ‘붓다 존재’뜻하는 퀸뒨
< World focus >중국, 올림픽 7차례나 불참 :: 문화일보 munhwa 2008-04-29
“중국 티베트 시위대에 발포 8명 사망” (hani.co.kr) 2008-04-05
라싸 ‘통제된 취재’…“자유를 달라” 승려들 기습시위 (hani.co.kr) 한겨레 2008.3.27
중국 안내원이 끌어내…주민 인터뷰도 엄격통제외신기자들에 방화·약탈 담긴 비디오 시청하게
부시, 후진타오에 전화…티베트 사태 놓고 설전 (hani.co.kr) 한겨레 2008.3.27
“달라이 라마와 대화를”…후 주석 “질서파괴 안돼”부시 “베이징올림픽은 참석”
중, 외국언론에 라싸 공개…티베트 보도 ‘역공’ (hani.co.kr) 한겨레 2008.3.26
‘왜곡보도’ 모은 사이트도 등장…검열 비판은 없어
티베트 독립시위 ‘꺼지지 않는 불씨’ (hani.co.kr) 한겨레 2008.3.26
쓰촨성 수백명 시위…더타임스 “시위대 2명 사망”중국 “공안 1명 사망”…올림픽 거부운동도 본격화
펠로시, 달라이 라마 면담…중 유혈진압 규탄 촉구 (hani.co.kr) 한겨레 2008.3.22
소요사태 발생 원인 규명 위한 국제적 조사 제안
미국이 티베트 소요사태에 대한 개입을 본격화하는 양상이다.
라싸에 추가병력 투입…“군용차 400여대 움직여” (hani.co.kr) 한겨레 2008.3.20
신화통신 “시위 확산” 인정 첫 보도 /미·EU지도자들, 망명정부 방문 계획
‘인권보다 실리’…냉혹한 국제사회 (hani.co.kr) 한겨레 2008.3.20
티베트 독립시위 왜 힘 못 얻나‘올림픽 보이콧’ 말 바꾸거나 중 비판수위 낮춰라싸 인구 절반이 한족…투쟁동력 잃고 ‘고립’
티베트 망명정부 “명백한 학살 증거 있다” | KBS 뉴스 2008.3.19
중국대사관 앞 “티베트 죽이지 말라!” (hani.co.kr) 한겨레 2008.3.18
시민단체.이주민들 합동 집회
티베트 학생들 베이징서 첫 동조시위 (hani.co.kr) 한겨레 2008.3.18
3% 한족이 모든 걸 장악했다 (hani.co.kr) 한겨레 2008.3.18
티베트, 민간인도 공격한 까닭은
라싸, 투쟁-투항 ‘칼날 적막’…밖으론 시위 확산 (hani.co.kr) 한겨레 2008.3.18
중 “투항하면 용서” 시한 임박…승려 대화도 통제
올림픽 성화 봉송 2주앞…중 지도부 ‘티베트 딜레마’ : : 한겨레 (hani.co.kr) 2008.3.17
고민 깊어가는 달라이라마 : 중국 : : 한겨레 (hani.co.kr) 2008.3.17
여전히 “나는 분리독립 원하지 않아” 고수청년 강경파와 갈등…중국은 “배후” 지목
무장봉쇄 라싸 ‘조용’…국외선 항의시위 ‘시끌’ (hani.co.kr)2008-03-16
“도심엔 군인들만”…인도 등 수천명 유혈진압 성토중-티베트, 서로 비난…유엔·앰네스티 중재 나서
자원의 보고·국방의 보루 (hani.co.kr) 2008-03-16
중, 티베트 못버리는 이유
독립항쟁-무력진압 ‘58년간 반복’ (hani.co.kr)2008-03-16
중-티베트, 긴장의 역사51년 ‘외교권 접수’가 서막
후진타오, 1989년 티베트 서기때 철모쓰고 거리나가 직접 유혈진압 (hani.co.kr)2008-03-16
그 덕분에 덩샤오핑 눈에 들어 ‘출세 길’
中 언론 티베트 유혈 시위사태에 '침묵' | 연합뉴스 (yna.co.kr) 2008.03.15
피로 물든 티베트 독립시위…최악으로 치닫나 (sbs.co.kr) 2008-03-15
‘베이징올림픽 테러 경보’ 곤두선 중국 (hani.co.kr) 한겨레 2008.3.10
여객기 납치기도 적발…위구르 독립단체 “날조된 사건” 반발
중국은 티베트를 어떻게 '역사 살해'했나 (pressian.com) 2004년 08월 09일 프레시안
[특별기고] "다음은 한국 차례" "우리도 '학문 북벌(北伐)' 단행해야"
[위구르]
"中, 5년간 위구르족 등 소수민족 10만명에 강제 불임수술" (daum.net) 2021. 02. 04.
중절도 43만건..피임구 장착 여성은 312만명 달해
美 "신장 집단학살" 공식언급에..中 "세번 말한다, 말살 없다" (daum.net)2021. 01. 29.
블링컨 신임 국무장관 "신장서 무슬림 집단학살 자행"
CNN "미 정부 판단, 베이징 올림픽 참여국에 압력 작용"
中 외교부 "민족 말살은 없다" 세번 반복하며 강력 반박
신장위구르서 한족 탈출러시...300년 한화정책 실패로 돌아서나 - 아시아경제 (asiae.co.kr) 2019.12.06
위구르 무슬림 가정에서 함께 살아야하는 '일가친' 정책 피로도 높아
분쟁지역화에 따른 신변위험 우려도 커져... 한족인구 40%>36%
中, 신장자치구 역사문제 백서 발간.."신장은 고유영토" (daum.net) 2019.07.21.
中 신장위구르에서 수 만명 실종…공포의 경찰국가로 변모 :: 공감언론 뉴시스통신사 :: (newsis.com) 2017-12-17
중국의 ‘화약고’ 신장웨이우얼|주간동아 (donga.com) 2017.03.151079호 (p66~67)
잇단 테러 경고 '예고된 시한폭탄' 터졌다 (daum.net) 경향신문 | 2008.08.04
中 신장위구르 테러공격 무장경찰 16명 사망
신장 테러 어떤 단체…“투르키스탄 분리” 과격 독립파 추정 - 경향신문 (khan.co.kr) 2008년 08월 04일
[내몽고]
'온누리력사 > 중국' 카테고리의 다른 글
중국 (1) | 2021.07.05 |
---|---|
[한 글자로 본 중국] [중국사 다이제스트 100] [차이나 프리즘] (0) | 2018.06.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