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소련처럼 망할 수도".. 극심한 "해체 공포증"
입력 2004.10.18. 03:14 수정 2004.10.18. 03:14 댓글 0개
https://news.v.daum.net/v/20041018031440122?f=o
만리장성은 '?' 다 '장성, 중국사를 말하다'
이왕구기자 fab4@hk.co.kr
입력시간 : 2007/07/20 18:06:28수정시간 : 2007/07/20 18:17:43
중국의 화신… 방패 아닌 칼… 강제노동수용소… 중화의 감옥
줄리아 로벨 지음·김병화 옮김
웅진지식하우스발행·524쪽·1만8,000원
http://news.hankooki.com/lpage/culture/200707/h2007072018062584210.htm
중국 ‘黃帝 민족주의’ 띄운다
입력 2008-04-05 02:55수정 2009-09-25 08:33
출처; http://www.donga.com/fbin/output?n=200804050081
[인문사회]중국지리 확장사… ‘중국지리 오디세이’
입력 2007-11-10 03:01수정 2009-09-26 05:41
http://www.donga.com/fbin/output?n=200711100061
중국 황제들에게 ‘천하대권의 길’ 묻다
한겨레신문 2007년 10월 20일
한광덕 기자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244390.html
"최전선에 나를 묻어라"..明 영락제, '베이징'을 중국화하다
베이징=최수문 특파원 입력 2021. 04. 30. 17:21 수정 2021. 05. 28. 19:29 댓글 2개
[최수문의 중국문화유산이야기] <14> '황제의 무덤' 명13릉
원나라에게서 베이징 빼앗은 明 3대 황제
'영토 지켜라' 의도로 자신의 무덤 만들어
왕국 몰락때까지 사수..황제 13명 안장
1km 남짓 길따라 18쌍 거대 동물석상에
장릉 능은전 너비만 66m 절대권력 과시
만력제 정릉엔 '金冠' 안치된 지하궁전도
출처; "최전선에 나를 묻어라"..明 영락제, '베이징'을 중국화하다 (daum.net)
'땅만 파면 유물' 中시안서 공항 확장하다 고분 3천기 발견
차병섭 입력 2021. 02. 17. 10:53 수정 2021. 02. 17. 13:19 댓글 99개
news.v.daum.net/v/20210217105304048
"중국서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5천여년 전 비단 확인"
입력 2019.12.05. 13:12 수정 2019.12.05. 18:16 댓글 604개
https://news.v.daum.net/v/20191205131239503
中 무덤서 2500년 전 '송화단' 추정 달걀 무더기 발견
권윤희 입력 2019.03.27. 16:56 댓글 43개
https://news.v.daum.net/v/20190327165604503?rcmd=rn
조조 무덤서 나온 항아리는 '백자'…역사 300년 이상 소급
송고시간 | 2019-02-20 10:30
도쿄국립박물관 연구팀 확인…표면에 유약·고온에 구워 '유리질'로 변화 등 백자 특징 갖춰
https://www.yna.co.kr/view/AKR20190220051400073?input=1179m
황제들의 저승 궁전 '明13릉' 세상 밖으로
입력 : 2018.01.30 03:04
복원 착수… 주민 1만5000명 이주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1/30/2018013000136.html
[중국 공산당]
시진핑에 '마피아 보스'라던 中 망명 교수 "공산당 붕괴 대비" 경고
석경민 입력 2021. 06. 30. 12:15 수정 2021. 06. 30. 13:54 댓글 57개
미국 망명한 공산당 중앙당교 전 교수
공산당 창당 100주년 맞춰 비판 논문 발표
출처; https://news.v.daum.net/v/20210630121545864
한글과 한자 등 8개 언어로 된 투표용지 든 시진핑 주석
[중앙일보] 입력 2018.03.12 00:05
http://news.joins.com/article/22431602
美 역사학자, 시진핑 현 상황 장제스와 닮아
편집부 | 2016-06-08 11:34:44
http://soundofhope.kr/m/bbs/board_view.php?bbs_code=bbsIdx2&num=28135&page=4&keycode=&keyword
[포스트 후진타오 6龍] 1. 시진핑 국가 부주석
입력 2009. 12. 15. 21:57 수정 2009. 12. 16. 00:43 댓글 0개
[포스트 후진타오 6龍] 1. 시진핑 국가 부주석 (daum.net)
중국 근현대 격랑 헤쳐나간 학자의 양심
한겨레 2008.2.23
김규원 기자
출처;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271470.html
중 ‘포위망 친다고 갇힐쏘냐’, 미국 주도 아시아 동맹 ‘균열’
한겨레 2008.2.14
유강문 기자
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international_general/269422.html
중국 폭설, 재앙으로…이재민 1억명 ‘신음’
한겨레 2008.2.2
피해액 43조원 생활고 가중지도부, 사태 복구 동분서주추가폭설 예고돼 ‘설상가상’
유강문 기자
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china/267243.html
후진타오 “부동의 원칙” 선언…中 3차 사상해방 ?
입력 2008-01-21 02:58수정 2009-09-25 19:52
http://www.donga.com/fbin/output?n=200801210103
“中 민주개혁 모태될 정치특구 만들어야”
입력 2007-11-26 03:03수정 2009-09-26 03:28
http://www.donga.com/fbin/output?n=200711260167
[특파원 칼럼] 中, 美는 겁나고 獨은 우습다?
/이지운 베이징 특파원
서울신문 기사일자 : 2007-11-24 30 면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071124030002
중견국 뺨치는 중국 ‘지방대국’ 속속 출현
산둥성 등 9곳 연간 GDP 1조위안 넘어…대부분 동남부 개혁개방지대 몰려
기사등록 : 2007-11-14 오후 06:52:34
기사수정 : 2007-11-14 오후 07:16:11
유강문 기자
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globaleconomy/250114.html
[씨줄날줄] 중국정치의 진화/구본영 논설위원
서울신문기사일자 : 2007-10-24 31 면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071024031012&code=seoul&keyword
시진핑, 한국과 깊은 인연
서울신문 기사일자 : 2007-10-24 16 면
|베이징 이지운특파원|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071024016010&code=seoul&keyword
민주화는 립서비스?
후진타오“민주주의 확대하겠다”
‘공산당 영도’도 강조… 독재옹호
동아일보 2007년 10월 20일
http://www.donga.com/fbin/output?rellink=1&code=f__&n=200710200013
“후진타오, 1人체제 구축 실패한 듯”
동아일보 입력 2007-10-16 02:59수정 2016-01-22 14:08
“개혁-개방 겸비한 중국식 사회주의” 강조
홍콩언론 “리커창만 상무위원… 당 장악못해”
http://www.donga.com/fbin/output?n=200710160079
공산당 지도부에 ‘민주화 촉구’ 中 농민-노동자 1만명 서한
동아일보 2007년 10월 11일
출처; http://www.donga.com/fbin/output?n=200710110047
후진타오 절대권력 시대 열리나
입력 2007-07-31 02:59수정 2009-09-26 20:35
중진들 물러나고 ‘제5세대 지도자’ 전진배치 될듯
‘과학발전관-조화사회론’ 당 지도사상 공인도 추진
http://www.donga.com/fbin/output?sfrm=1&n=200707310048
중국 '일대일로', 곳곳에서 파열음 왜?
등록 2018-08-19 05:00:00
말레이시아 등에서 일대일로 협력 폐기 또는 재검토
참여국들, 빚더미에 올라 앉으면서 반중정서 고조
무디스, 78개 참여국 평균 신용등급을 정크본드 수준으로 평가
http://www.newsis.com/view/?id=NISX20180815_0000391500&cID=10101&pID=10100
중국 농민공 2억8600만명..80년 이후 출생자 50% 넘어
이재준 입력 2018.05.05. 22:59 댓글 17개
중국 농민공 2억8600만명...80년 이후 출생자 50% 넘어 :: 공감언론 뉴시스통신사 :: (newsis.com)
[경제]
[이슈 & 이슈]
일대일로 참여로 빚만 떠안은 저개발국… 中자본이 되레 경제 발목 잡는 독약으로
http://news.hankyung.com/article/2018031636451
2018 중국경제, ‘질식사냐, 얼어 죽을 것이냐’의 게임?
[중앙일보] 입력 2018.01.01 14:43 수정 2018.01.03 09:48
http://news.joins.com/article/22249866
"빚으로 쌓아올린 제국…中부채폭탄 곧 터진다"
입력시간 | 2016.05.12 14:29 | 장순원 기자 crew@
부채 급증속도 너무 빨라…숨겨진 부실도 심각
지도부도 심각성 인식‥대책 놓고 갈팡질팡 우려도
http://www.edaily.co.kr/news/NewsRead.edy?SCD=JH21&newsid=03040566612648264&DCD=A00802&OutLnkChk=Y
사드 반대하던 중국의 돌변, 비밀코드는 일대일로(一帶一路)
[중앙일보] 입력 2017.11.07 06:00 수정 2017.11.07 14:49
사드 반대하던 중국의 돌변, 비밀코드는 일대일로(一帶一路) (daum.net)
[월드이슈] 중국 경제 어디로
서울신문 기사일자 : 2007-11-15 17 면
“2007년은 중국의 거시경제 조정이 실질적 효과를 낼 수 있을지를 결정짓는 중요한 해다.” 올해 1월4일자 서울신문 월드포커스는, 중국 국가정보센터 예측부 판젠핑(范劍平) 주임의 이런 말로 시작했다. 그런데 11월 현재 중국은 과열 논쟁이 한창이다. 거시 조정 효과에 강력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과도한 투자와 무역흑자 등으로 과잉 유동성 문제가 대두된 지 오래며 인플레이션의 장기화가 우려된다.2008년 베이징올림픽 이후 경제위기론마저 새삼 거론되고 있는 상황이다.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071115017005&code=seoul&keyword
<기후변화 최전선을 가다>‘10년전 작은 모래밭’이 北京 코앞까지 진격
8.중국(하)-‘천도론’ 불러온 베이징 인근 사막화
문화일보 기사 게재 일자 2007-10-09
허민기자 minski@munhwa.com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07100901032932310002
<기후변화 최전선을 가다>10년전 경작지가 죽음의 모래땅으로
7. 중국(상)-동진하는 사막화 최전선 쿠부치를 가다
기사 게재 일자 2007-10-01
허민기자 minski@munhwa.com
출처;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07100101033232310002
[문화]
中, '철부지 어른의 나라-중국' 금서 지정…온·오프 판매중단
송고시간 | 2017/03/08 13:10
작가 우즈훙 "중국인, 광적으로 남을 제압하기 즐긴다" 비판
"자기 중심기제하에서 피해망상에 시달리고 무력감, 불안감 느껴"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7/03/08/0200000000AKR20170308102100089.HTML?input=1179m
중국 전통명절의 부활
첫 청명절 휴일 성묘객 1천만명…단오·중추절도 휴일로
유강문 기자
한겨레 2008.4.5
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china/280018.html
고원에 자리잡은 오아시스의 도시, 인촨과 카스
내일신문 2007-07-09 오후 2:26:39 게재
출처; http://www.naeil.com/News/politics/ViewNews.asp?sid=E&tid=3&nnum=347426
발로 뛰고 눈으로 쓴 현대 중국학…‘아연중국연구총서’
입력 2007-09-29 03:03수정 2009-09-26 12:05
http://www.donga.com/fbin/output?n=200709290050
‘한-중 문화전쟁’ 불붙이는 중 언론
특파원리포트
한겨레 2007.12.24
유강문 기자
출처; 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china/258753.html
[BOOK책갈피] 요순이 성군 ? 태평성대 ?
[중앙일보] 입력 2007.05.04 18:22 수정 2008.07.30 10:14 | 종합 19면 지면보기
http://article.joins.com/article/article.asp?Total_ID=2717573
< 특별기고 > 中國이 한국을 ‘봉’으로 보는 이유
서상문|고려대 한국전쟁 아카이브 연구교수 suhbeing@korea.com
황제·관료체제 이은 공산주의 사상교육… 시민의식은 실종
● ‘사드’ 충돌엔 관제 데모… 다른 목소리 못 내
● 한국을 ‘속국’으로 무시하는 우월의식
● ‘미국 추종’엔 적대감, 대륙 큰 시장은 자신감
● 인권, 평화, 다양성… 中 민주화 조성 노력
입력 2017-05-18 16:40:09
출처; 신동아2017년 06월 호
http://shindonga.donga.com/3/all/13/927371/4
출처; 중화인민공화국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중화인민공화국(중국어 간체자: 中华人民共和国, 정체자: 中華人民共和國, 병음: Zhōnghuá Rénmín Gònghéguó 중화런민궁허궈[*]) (
듣기 (도움말·정보))은 동아시아에 위치한 국가이다. 줄여서 중국(중국어 간체자: 中国, 정체자: 中國, 병음: Zhōngguó 중궈[*])이라고도 한다.
수도는 베이징시이며, 최대 도시는 상하이시이다. 이 밖의 주요 도시로는 광저우시, 난징시, 시안시, 푸저우시, 칭다오시, 충칭시, 홍콩 등이 있다.
근대 중국에서는 1911년 국민당 정부가 들어섰으나, 정치적 혼란이 이어지면서 각지에서 군벌정부가 권력을 휘두르는 군벌 시대로 돌입하게 되었다. 이후 소련의 지원을 받으며 5·4 운동의 반제국주의 강령을 중심으로 창당된 중국공산당은 1920년 이후 세력을 급격히 키웠고, 국민정부과 계속해서 내전을 벌였다. 중일 전쟁 이후 중국 대륙의 주도권을 두고 1946년 제2차 국공 내전이 발발하였고, 그 결과 타이완 등 일부 지역을 제외한 영역이 공산당 측으로 넘어가 1949년 마오쩌둥을 초대 국가주석으로 하여 베이징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이 선포되었다.
소련의 막대한 영향력을 받는 중국공산당은 마오쩌둥으로 대약진 운동을 펼쳤고, 문화 대혁명도 실시하며 사회주의 국가의 틀을 굳히려 하였다. 다만 대약진 운동도 경제 성장으로 이어지지 못해 실패하였고, 문화 대혁명도 수많은 국가적, 문화적 피해와 민간인 피해를 남겼다. 이 과정에서 공산당은 사회주의의 한계를 실감하게 되었고, 이후 소련의 영향력이 낮아지면서 덩샤오핑의 지도로 개혁·개방을 시행하면서 시장경제체제가 도입되어 자본주의 경제 체제를 받아들였다. 덩샤오핑은 흑묘백묘론을 내세우며 광활한 영토와 막대한 인구를 바탕으로 급격한 경제성장을 이루어냈고, 화평굴기를 외교 기조로 삼아 평화로운 공존 및 팽창 정책을 추구하였다.[3][4][5][6] 이에 중국과 미국은 투키디데스의 함정 상황에 놓여있다는 평가가 있다.[7][8]
국명[편집]
국명의 약칭은 중국(中国)이고 중화(中华)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 밖에도 국외에서는 중공(中共)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중공은 본래 중국공산당의 약칭이지만, 중화인민공화국 헌법에서 중국공산당을 중화인민공화국의 집권 정당이라고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중국공산당 정부의 의미로도 사용한다.
건국 초기에는 1949년 이전의 시대를 구중국,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를 신중국으로 구분해 부르기도 하였다. 1949년 국공 내전 이후 중화인민공화국은 분단국가로서 하나의 중국 원칙에 따라 중국의 합법 정부는 자국임을 표방하므로, 중화민국의 독립적 지위를 인정하지 않는다.
기원[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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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라[편집]
황하
고고학계는 대략 224만 년에서 25만 년 전 사이부터[9] 중국에 사람이 거주하기 시작하였다고 추측하며, 베이징에서는 불을 사용한 호모 에렉투스의 유골이 발견되어 베이징 원인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중국 고전에 의하면 중국의 첫 왕조는 기원전 2100년에 등장한 하나라이다. 하나라는 처음으로 중국에서 세습 군주제를 정립하였으며 이후 몇 천년간 이어내려 가는 왕조제의 기틀을 잡았다. 다만 하나라의 존재 자체는 중국 역사학계에 의하여 주장될 뿐, 실제로 하나라의 실존 여부를 증명할 역사적인 사료는 제대로 발굴된 바가 없다. 현재까지 고고학적으로 완벽하게 입증된 첫 중국 왕조는 하나라의 뒤를 이은 상나라이다.[10] 상나라는 기원전 17세기부터 11세기까지 황하 유역을 다스렸다. 그들이 남긴 갑골문은 지금의 한자의 원형으로 일컬어진다.[11] 상나라는 그 뒤를 이은 주나라에 의하여 멸망 당했고, 주나라는 11세기부터 5세기까지 지속하였다. 다만 이때 중국은 중앙집권체제가 아니라 봉건 제후들의 힘이 강해졌으며, 강력한 몇몇 제후들은 아예 주나라의 통치를 거부하고 300여 년 동안 춘추전국시대를 일으키며 천하의 패권을 다투었다. 5세기와 3세기 동안 춘추전국시대가 끝날 즈음에 이르자, 중국에는 가장 강력한 7개국만이 남아있었다.
전국시대와 청나라[편집]
춘추전국시대는 진나라가 나머지 6개국을 양첸이통합하며 천하를 통일하며 끝났다. 진나라의 군주였던 영정은 자신을 진나라의 시황제로 불렀고, 법치주의에 입각한 개혁을 진행하여 도량형, 문자, 도로, 통화 등을 통일하였다. 다만 15년 밖에 지속하지 못하였고, 시황제가 죽은 이후에는 곳곳에서 진나라의 가혹한 통치에 대항하여 반란이 일어나 멸망하고 말았다.[12]
진나라가 힘을 잃자 전역에서 내전이 벌어졌고, 이 내전에서 초나라 출신 유방이 패권을 얻어 한나라를 세웠다.[13] 한나라는 진나라에 비하여 지방분권적인 제도를 실시하고 법가를 공자가 개창한 유가로 바꾸었으나, 진나라의 법과 제도들은 대부분 한나라와 그 후계 왕조들 에게까지 전해 내려갔다.[14]
한나라 말기, 위나라,촉나라, 오나라로 삼국이 나뉘어 졌다.[15] 삼국 시대의 끝에는 결국 위나라가 승기를 잡았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진나라에 의하여 멸망 당했다. 다만 진나라도 얼마 지나지 못하고 황제의 폭정으로 멸망하였고, 이후 오호가 북부에서 중국으로 침략해 들어와 16국을 세웠다. 이후 이민족이 통합되어 화북을 점령하여 북위를 세웠고 더, 한편 한족들은 밀려내려가 남부에서는 송나라가 세워졌다. 이 나라들은 이후에도 흥망을 거듭하며 건국되고 멸망하기를 반복하는데, 이시기를 남북조 시대라고 한다. 이민족인 북주와 북제는 남조를 자주 침략하였고 이후 북주에서 581년에 수나라로 이어져 남조를 멸망시켰다. 농업을 장려하였고 대운하를 파 무역을 촉진하였다. 수나라는 지나치게 많은 공공 공사를 추진하여 결국 국민들의 불만이 쌓이며 반란이 일어나 멸망하였다.[16][17][18][19] 거란족 등 이민족의 침입을 받아 시달리다 당나라는 8세기에 일어난 안사의 난으로 크게 약화되었고, 결국 절도사들이 분열되어 약화되었고 후량에 당나라를 선양하게 된다. 하지만 당나라와 후량은 907년에는 거란족에 의해 멸망하였다. 거란족에 의해 남쪽으로 밀려난 한족은 송나라를 건국하였다. 하지만 요나라에 의해 송나라는 지속적으로 침략을 받아 조공하게 되었고 이후 금나라에 의해 북송이 멸망하게 되었다.[20]
10세기와 11세기 사이 송나라는 유교를 장려했으며 철학과 예술, 도자기 기술 등을 크게 진흥하였다.[21] 허나 지나치게 문치에 입각한 송나라의 정책은 군대의 약화를 불러왔고, 결국 북부에서 기회를 엿보던 여진족의 금나라에게 공격을 받고 말았다. 1127년, 송나라 휘종과 수도 변경이 금나라에 함락되어 잡혀갔고, 송나라의 유신들은 남쪽으로 후퇴하여 남송을 세웠다.
13세기에는 몽골족들이 크게 발흥하여 중국을 침입하였다. 1271년, 몽골의 쿠빌라이 칸이 원나라를 세웠고, 1279년에는 송나라의 잔재를 모두 부수었다. 몽골 침략 이전에 많았던 송나라의 인구는 학살로 인해 급격히 줄어 들었으나 경제, 군사적으로 황금기를 맞았다.[22] 그러나 원나라는 지나친 인종주의와 차별 정책으로 한족의 반발이 심했다, 1368년에 주원장이 명나라를 세웠다. 하지만 남왜북로에 의해 남쪽에는 왜구의 침략이 심하였고 북쪽에서는 이민족의 침략이 심하였다.[23] 명나라 초에 난징에서 베이징으로 수도를 천도하기도 하였다. 왕양명과 같은 유학자들은 정통 유학을 비판하고 개인주의와 실용주의와 같은 가치들을 도입하고자 하였다. 후기에는 황제들이 국정을 방만하게 운영하자 신료들이 힘을 얻어 관료제적 요소가 강해지기도 하였다. 다만 명나라는 임진왜란에 군대를 파병하고 만주족들이 침입해오며 점차 무너지기 시작하였다.[24]
1644년에 베이징은 이자성이 이끄는 반란군에 점령당했고, 만주족이 후금을 일으켜 이자성을 죽이고 베이징을 점령하자 명의 마지막 황제인 숭정제는 자금성 경산에서 목을 매어 자살하였다. 이후 수백년간 만주족이 중국을 식민 지배하였다. 청나라는 1644년부터 1912년까지 지속하였으며, 중국의 마지막 왕조 국가였다. 청나라 초기에 명나라의 잔재들을 정복하였고, 명나라의 2500만 명의 한족들을 학살하였다. 마지막 남명까지 멸망시키고 중국을 통일시킨다. 변발 등 만주족의 문화를 한족들에게 강요하였고 한족들의 반청 감정을 완화하기 위하여 상업을 장려하고 농업을 촉진, 중앙집권화를 추진하였다. 청나라는 문자의 옥을 일으켜 자신들의 입맛에 맞지 않는 문학들을 불태우거나 탄압하였는데, 이 때문에 기술과 문학의 발전이 정체되기도 하였다.[25][26] 19세기 중반부터 청나라는 아편 전쟁을 통하여 프랑스와 영국 등 서구 열강들과 갈등을 겪었다. 이 때문에 치외법권, 홍콩 통치권 등을 임대할 수 밖에 없었으며 불평등 조약들을 연이어 맺으며 국력을 깎아 나갔다. 게다가 청일전쟁에서 청나라는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잃었으며, 일본에게 타이완섬을 주어야만 하였다.[27] 청나라는 점차 불안정해졌고, 수 천만 명의 사람들이 특히 백련교의 난으로 인하여 목숨을 잃었다. 게다가 1850년대에는 태평천국의 난이 일어나며 중국 남부에 대대적인 소요가 일어났고, 결국 청나라도 1860년대에 자강변법 운동을 통하여 개혁을 실시하였으나 결국 1880년대와 90년대에 군사적인 패배를 겪으며 실패로 드러나고 말았다.
19세기, 1876년에 대기근이 발생하며 청나라는 점차 멸망의 길로 빠져들었다. 대략 9백만 명에서 1300만 명의 사람들이 죽은 것으로 전해진다.[28] 광서제는 입헌군주정을 만들기 위한 개혁정책을 실시하였으나, 보수적인 서태후의 반대로 실패하여 유폐되었고 게다가 의화단이 일어나며 청나라의 국력은 갈수록 약화되었다. 서태후도 나중에서야 상황의 심각성을 깨닫고 개혁을 실시하려 하였으나, 1911년에 신해혁명이 발발하며 결국 청나라도 멸망하게 되었다.
공화국[편집]
청나라는 서양 열강들에 의해 반식민지로 전락했었고 멸망하였다. 1912년 1월 1일에 쑨원의 주도로 중화민국이 건국되었고, 국민당은 중국 대륙의 임시 정부를 선포하였다. 하지만 중화민국 또한 서양 열강들의 반식민지에서 벋어나지 못하였다. 또한 일본 침략의 위협을 받고 있었다.[29] 그러나 이후 중화민국의 주권은 옛 청나라의 장군이었던 위안스카이에게 넘어갔고, 위안스카이는 중화제국을 세우며 야심을 드러내었다. 그러나 국민들 사이에서 원망이 들끓고, 그의 세력 기반이었던 북양함대에서조차 반대 의견이 강해지자 결국 퇴위하였고 공화정을 재창립하였다.
1916년에 위안스카이가 죽은 이후, 중국은 정치적으로 갈래갈래 나뉘었다. 베이징에 수도를 둔 중화민국은 국제적으로는 정당한 합법정부로 인정받았으나, 실제로는 유명무실한 상태였고 군벌들이 각지에서 주권을 행사하고 있었다. 또한 서양 열강들의 반식민지가 된 중국에서 군벌들은 서양 열강들과 서로 협조하여 중국 인민들을 더욱 파탄에 몰아갔다. 이렇게 혼란과 소요가 지속되던 중, 1920년대 후반에 장제스의 지휘 하의 중국국민당이 북벌을 실시하여 중국을 재통일하였다. 국민당은 수도를 베이징에서 난징으로 옮겼고, 쑨원의 삼민주의에 근거한 개혁을 실시하여 중국을 현대적인 민주공화국으로 만들고자 하였다.[30][31] 그러나 소련의 도움을 받은 공산당들이 산악 지역에서 힘을 키우며 준동하기 시작하였고, 1927년부터는 본격적인 내전이 터져 국민당과 공산당이 대대적으로 충돌하였다. 초기에는 국민당이 승기를 잡았고, 중국공산당은 대장정을 통하여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허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 제국이 중국 본토를 침략하였고 장제스는 이에 맞서기 위하여 국공합작을 벌여 공산당과 손을 잡았다.
제2차 중일전쟁은 국민당과 공산당 사이에 불안정한 연합을 구성하게 내몰았다. 이 전쟁에서 일본 군대는 수많은 전쟁 범죄들을 저질렀으며, 총 2천만명에 달하는 민간인들을 무차별적으로 살상하는 등 인간으로서 할 수 없는 참극을 벌였다.[32] 특히 난징 대학살 때에 일본군은 4만 명에서 30만 명에 달하는 민간인들을 학살하는 피바다를 만들기도 하였다.[33] 1945년에 일본이 패망한 이후 중국은 일본의 식민지에서 해방되었으며 또한 서양 열강들의 반식민지에서도 해방되었다. 또한 타이완섬 등이 중국에게 되돌아왔으나 홍콩과 마카오 등은 아직도 서양 열강의 식민지로 남았었다. 중국은 명목상 승전국이었으나 오랜 전쟁과 내분으로 피폐해진 상태였고, 게다가 국민당과 공산당 사이의 곪은 불화가 일본이라는 공적이 사라지자 드디어 폭발하며 본격적인 내전이 다시 시작되었다. 국민당 주도의 중화민국은 1947년에 헌법을 제정하였으나, 워낙 사태가 불안정하여 헌법 규정 대다수가 중국 본토에서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였다.
역사[편집]
제2차 국공 합작 이후 국민당은 고질적인 부정부패, 비효율적인 전술 등으로 인하여 공산당을 상대로 패색이 만연해졌고, 공산당은 곧 중국 본토 전역을 장악하였다. 국민당 주도의 중화민국은 결국 국부천대를 통하여 본토를 버리고 타이완성, 푸젠성 진먼도로 파천하였다. 마오쩌둥은 서양열강에서 패배하기만 하던 이전 중국에서 탈피하고 공산주의를 이념으로 하는 신(新)중국을 구상하였다. 당시 중화인민공화국에선 만주족과 몽골족 그리고 한족의 인구가 비슷하였다. 인구 80% 이상이 아무런 족보에도 해당되지 않는 백성이였다. 공산당은 아무런 "족"에도 포함되지 않는 인구 80%를 한족으로 편입시켰기 때문에 현재는 한족이 인구에 가장 많다. 1949년 10월 1일 베이징의 톈안먼 광장에서 마오쩌둥은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을 공식 선언하였다.[34] 이 날을 중화인민공화국 국경절이라고 한다. 1950년에는 국민당이 차지하고 있던 하이난섬을 점령했으며 중국 본토 대부분을 장악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그해 마오쩌둥은 “5억 중국 인민이 분연히 일어나 혁명을 이룬 만큼 국가 건설의 과제를 달성하는 데 매진해야 한다”라고 선언하였다. 그러나 혁명에 성공한 마오쩌둥은 이른 시일 내에 온전한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는 조급증에 시달리게 된다. 중국공산당은 거의 1백만~2백만 명의 지주들의 땅을 몰수하고[35] 그 토지들을 농민들에게 나누어주며 큰 호응을 얻었으며 독자적인 산업 정책을 펴고 핵무기도 개발하기 시작하였다.[36] 이 때문에 중국의 인구는 1950년대에 5억 5천만 명이었던 데에서 1974년에는 9억 명에 이르렀다. 마오쩌둥 시대의 중국은 공산주의 사회 건설을 추진하면서 인민공사와 전국적인 대약진 운동을 실시하였는데, 중국의 현실을 무시하고 무리하게 진행된 급진적이고 무모한 대진 운동은 농촌부의 황폐화로 인해 식량난과 3천 5백만 명에 달하는 대량의 아사자를 발생시키며 결국 실패로 끝났다.[37]
그 후 경제를 재건할 방법으로 마오쩌둥과 류사오치가 대립하였고, 마오쩌둥은 권력 탈환을 위해 문화 대혁명을 일으켰다. 혁명 중 마오쩌둥으로부터 반혁명파로 규정된 많은 사람이 탄압당하거나 학살되어, 국내는 일시 내란 상태가 되었다. 또 중국 각지의 귀중한 전통 문화재도 반혁명적인 존재로 간주되고 파괴되었다. 문화 대혁명은 1976년에 마오쩌둥의 죽음과 함께 종결되었다. 한편 1971년 10월에는 공산당의 중화인민공화국이 본래의 국민당 주도의 중화민국을 밀어내고 국제연합에서 중국의 대표권을 찾아갔으며, 상임이사국 지위도 함께 획득하였다.[38] 마오쩌둥이 죽은 직후, 4인방이 마오쩌둥 대신 문화대혁명의 책임을 지고 체포되었고, 화궈펑이 그의 뒤를 이었다. 화궈펑 이후에는 덩샤오핑이 1978년에 권력을 잡았고, 대대적인 경제 개방, 개혁 정책을 실시하였다.
시진핑 중국 주석
덩샤오핑의 개혁 정책과 함께, 소련의 붕괴 이후부터 중화인민공화국은 더욱 자유롭게 미국과 서방 세력에 개방적인 정책을 펼 수 있었다. 덩샤오핑 시대의 중국은 중국공산당의 일당 독재 체제를 견지함과 동시에, 혼합경제를 도입하는 등 경제 개방 정책을 실시하여 중국의 현대화를 진행했고 이를 계기로 중화인민공화국은 경제와 국방이 빠르게 발전했다. 다만 경제의 민주화와 함께 정치의 민주화에 대한 목소리도 함께 높아졌는데, 1989년, 중국은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학생들과 시민들의 시위를 억압하며 천안문 사건을 일으켰고, 이로 인하여 세계 각국의 지탄을 받았다.[39]
장쩌민, 리펑, 주룽지 등의 지도자들이 1990년대 중국을 이끌었다. 중국은 이 시기에 눈부신 경제 성장을 보여 1억 5천만 명에 달하는 빈민들을 가난에서 구제하였으며, 매년 11.2%에 달하는 기록적인 경제 성장률을 보였다.[40] 2001년에는 세계무역기구에 가입하였으며, 2000년대에도 후진타오 주석과 원자바오 주석의 영도 하에 높은 경제 성장률을 유지하였다. 허나 지나치게 빠른 성장은 자원과 환경을 심각하게 고갈시켰고, 사회적 빈부격차와 불안정과 같은 부작용들도 함께 불러왔다. 중화인민공화국은 2010년에 일본을 제치고 세계 2위 경제대국으로 올라섰고,[41] 1인당 GDP는 4,000달러를 넘기는 데에 성공하며 기존의 계획보다 10년보다 앞당긴 시점에 목표를 이룩하였다.[42]
현재의 지도자인 시진핑 주석은 2012년부터 집권하고 있다. 시진핑은 주석의 3연임을 금지하는 헌법을 폐기하며 장기 집권의 길을 열었으며,[43] 집권 초기부터 실시한 반부패 운동을 통하여 정적들을 숙청하고 1인 독재의 지위를 굳히고 있다는 평가를 대외적으로 듣고 있다.[44] 한편 시진핑 시대 해외 중국 외교관들의 무례한 언행과[45][46] 공격적인 태도는 타국에게 ‘전랑 외교’ 또는 ‘늑대 외교’라고 불리며 타국민들의 비판을 사고 있다.[47]
2019년 12월,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코로나19, COVID-19)가 후베이성 우한시에서 발원하였고,[48] 중국의 다른 지방으로 확산되었다. 결국에는 전세계로 대대적으로 번지며 코로나19 범유행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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