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천 해인사 대장경판’은 고려 고종때인 1236~1251년 사이에 제작됐습니다. 대장경판은 부처님의 힘을 빌려 몽골의 침입을 물리치고자 대장경을 새긴 목판(경판·대장경판)입니다. 대장경은 불교의 성전인 삼장(三藏)을 중심으로 부처의 가르침과 관련된 기록을 총칭하는 용어입니다.
‘팔만대장경’으로 불리는 ‘합천 해인사 대장경판’(국보, 세계기록유산)이 디지털 자료화돼 열람과 활용이 쉬워진다. 사진은 해인사 장경판전에 보관된 대장경판들의 모습. 문화재청 제공
‘합천 해인사 대장경판’의 각 경판은 극히 세밀한 돋을새김으로 만들어졌다. 문화재청 제공
삼장은 부처의 가르침을 담은 경장(經藏), 스님 등 제자들이 지켜야 할 윤리·도적적 규범인 계율을 담은 율장(律藏), 경장과 율장을 포함해 부처의 가르침에 대한 제자들의 논설을 모은 논장(論藏)을 말한다. 여기서 ‘장(藏)’은 ‘그릇’ ‘광주리’란 의미다. 즉 해인사 팔만대장경은 부처의 가르침과 한국 불교사의 고갱이를 집대성해 담아 놓은 그릇이다.
현재 8만1000여 장의 경판은 해인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인 ‘장경판전’(藏經板殿) 안에 보관돼 있다. 각 경판의 크기는 가로 70㎝ 내외, 세로 24㎝ 내외, 두께는 2.6~4㎝, 무게는 3~4㎏이다.국보로 지정된 대장경판과 장경판전 건물은 그 가치를 국제적으로도 인정받아 각각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세계문화유산이기도 하다.
해인사의 팔만대장경은 흔히 ‘다시 조성한 대장경’이란 의미에서 ‘재조대장경’이라고도 한다. 원래는 200여년 앞서 대장경이 먼저 제작됐다. 최근 막을 내린 드라마 <고려거란전쟁>의 무대인 고려 현종 임금 당시다. 거란의 침입에 따라 1011년 등 두차례에 걸쳐 대장경이 조성됐는데, 당시의 대장경을 ‘처음으로 새긴 대장경’이라 뜻의 ‘초조대장경’이라 한다. 하지만 초조대장경은 1232년 몽골군의 침입 때 불에 타 없어졌다. 현재 전해지는 인쇄본도 극히 희귀해 대부분 국보, 보물로 지정돼 있다.
지금의 팔만대장경은 ‘초조대장경’과 송나라·요나라(거란)의 대장경 등을 비교·검토해 제작됐다. 13세기 동아시아 불교의 정수를 집대성한 것이다. 송나라, 요나라 대장경들은 현재 대부분 사라져 팔만대장경은 온전히 남아 있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대장경이다. 목판 인쇄사나 불교 문화사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다. 또 5200여만 자에 이르는 글자들이 경판에 하나같이 일정하게 돋을새김됐다. 특히 엄청나게 많은 분량에도 꼼꼼하게 교정까지 본 덕분에 오자·탈자도 극히 적어 국제적으로 인정받는다.
팔만대장경이 보관된 장경판전은 해인사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4동의 건물로 구성됐다. 남북 방향으로 세워진 수다라장(修多羅藏)과 법보전(法寶殿), 동서 방향인 작은 규모의 ‘동사간전’ ‘서사간전’이다.
팔만대장경을 보관하고 있는 해인사 장경판전(국보, 세계문화유산) 전경. 문화재청 제공
수다라장과 법보전에는 팔만대장경이, ‘동·서 사간전’에는 경전과 고승들의 저술 등을 새긴 고려시대 다른 목판들(국보 ‘합천 해인사 고려목판’)이 있다. 장경판전이 언제 처음 세워졌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조선 세조 때인 1457년, 성종 때인 1488년에 각각 다시 지었고, 광해군 때인 1622년과 인조 때인 1624년에 수리했다는 기록이 있다.
팔만대장경은 훼손되기 쉬운 나무로 제작됐음에도 잘 보존된 것으로 유명한 문화유산이다. 경판과 장경판전 건물에 훼손을 막기 위한 과학적 원리들이 적용됐기 때문이다.
경판은 산벚나무·돌배나무 등을 벌채해 바닷물에 1~2년 담가 놓았다가 다시 소금물에 삶은 후 건조시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병충해, 갈라지거나 비틀어지는 것을 막는다. 경판들이 서로 부딪히지 않도록 양끝에 마구리 작업도 했다. 또 보존성을 높이기 위해 옻칠을 했다. 경판들이 검은 것은 옻칠 때문이다.
수다라장과 법보전 건물의 건축적 특성에도 보존의 비밀이 있다. 경판 보존을 위해서는 원활한 통풍, 낮은 습도와 온도의 일정한 유지가 핵심인데, 이들 건물은 이를 충족시키고 있다. 건물 앞면과 뒷면 벽의 아래·위 창문 크기·형태 등을 달리함으로써 자연적인 환기 효과를 극대화시키고 있다.
특히 내부 흙 바닥 속에도 숯, 횟가루, 소금, 모래 등을 넣어 내부 습도를 조절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같은 지혜로운 보존은 유네스코 기록유산·문화유산 등재 당시 전문가들의 큰 주목을 받기도 했다. 도재기 선임기자. 2024. 3. 18. (1)
2021년 6월, 팔만대장경은 해인사에 봉안된 지 620여년 만에 일반에 공개됐습니다.
770년이 지났지만 사진에서 보듯이 대장경은 그대로입니다.
팔만대장경의 1971년(왼쪽 사진·셀수스협동조합 제공)과 2021년 (위쪽·한국저작권위원회 공유마당 제공)의 모습.
최충헌의 아들 최우가 권력을 장악하던 ‘무신정권’의 시기. 유라시아의 역사를 바꿔 놓을 정복전쟁을 시작한 몽골제국은 1231년 고려를 침공한다. 이로써 28년간 9차례 침략으로 이어지는 ‘여몽전쟁’이 발발한다. 수도 개경이 포위당한 고려 조정은 몽골에 항복하고 ‘화친’을 맺는다.
하지만 최우 정권은 강화도로 수도를 옮기고 장기 항전 태세에 돌입했고, 이에 2차 침략이 발발한다. 강화도 천도는 결사항전의 표시라고 볼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최우 무신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단행된 것이었다. 이미 군사력의 절대적 격차를 경험한 조정에서는 전란을 끝내자는 ‘현실론’이 제기됐지만 정권은 권력의 붕괴를 우려해 천도를 단행했다.
조정의 강화도 칩거 27년 동안 육지는 아수라장이었다. 곳곳에서 용감한 장수와 백성들의 대몽 항전이 있었던 반면, 지방 관리들과 농민 및 노비들은 민심을 잃은 조정에 대해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몽골군은 국토를 유린하고 인명을 살상했다. 1235년 3차 전쟁이 발발하자 조정은 주민들을 험준한 산성이나 외딴 섬으로 이주시키는 ‘입보 정책’으로 몽골에 저항토록 했지만 백성들은 반발했다. 이 와중에 조정은 대장경의 재조(再彫)를 시작했다.
11세기에 부처님의 힘으로 거란의 침입을 물리치기를 기원하는 대장경이 만들어졌는데, 이 ‘초조(初彫)대장경’이 몽골 2차 침략 때 불타버렸다. 이에 몽골의 침략을 이겨내기 위한 대장경의 복원, 즉 ‘재조대장경’ 제작을 시작한 것이다. 1251년에 마침내 완성된 목재 경판 수는 무려 8만1258장. 이리하여 ‘팔만대장경’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강화도에 있던 대장경은 1398년 해인사로 옮겨져 오늘에 이른다.
팔만대장경이 최우 정권에 의해 시작됐고, 최씨 집안의 재정적 지원에 의존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것을 정권 유지의 도구라고 폄하하거나, 전란 속에서 종교에만 의지하는 나약한 모습으로 재단하는 것은 오류다. 대장경 제작엔 승려, 관리, 평범한 백성 등 다양한 계층이 참여했다. 국가적 재난을 불심으로 단결해 극복하려 한 모든 고려인의 염원이 담긴 것이다.
2021년 6월, 팔만대장경은 해인사에 봉안된 지 620여년 만에 일반에 공개됐다. 770년이 지났지만, 사진에서 보듯이 대장경은 그대로이다. 김찬휘 녹색당 대표. 2023. 5. 26.(2)
서지학자인 유부현 대진대 교수는 학술지 '서지학연구' 제85호에 발표한 논문에서 팔만대장경 판각을 끝낸 뒤 편집자들이 작성한 '대장목록'(大藏目錄) 등을 분석해 팔만대장경에 수록된 불경은 1천530종 6천555권이라고 밝혔습니다.
팔만대장경 19일부터 일반인 공개 (합천=연합뉴스) 김동민 기자 = 해인사가 10일 팔만대장경판을 보관해온 장경판전 내부를 취재진에게 공개했다. 사진은 팔만대장경. 2021.6.10 image@yna.co.kr
'고려대장경' 혹은 '재조대장경'으로 알려진 팔만대장경에 수록된 경전 분량이 1천530종, 6천555권이라는 주장이 나왔다.
13일 학계에 따르면 서지학자인 유부현 대진대 교수는 학술지 '서지학연구' 제85호에 발표한 논문에서 팔만대장경 판각을 끝낸 뒤 편집자들이 작성한 '대장목록'(大藏目錄) 등을 분석해 이같이 밝혔다.
합천 해인사 장경판전에 보존된 팔만대장경은 11세기에 새긴 초조대장경이 몽고 침입으로 불에 타 사라지자 1237∼1248년에 다시 만든 문화유산이다. 본래 강화도에 있었으나, 조선 태조 7년인 1398년부터 해인사가 보관했다.
팔만대장경은 해인사가 최근 일반 공개를 결정하면서 관심을 끌었으나, 여전히 경판 개수와 경판에 새겨진 불경의 정확한 종수가 파악되지 않았다.
해인사 누리집에 따르면 대장목록에는 경전 1천524종, 6천569권이 존재하는 것으로 기재됐으나, 일제강점기 조사에서는 1천512종, 6천819권으로 추산됐다.
동국대 팔만대장경 영인본에는 종수로 보이는 고유 번호가 1천514번까지 있고, 북한판 팔만대장경 해제에는 1천537종으로 나와 있다.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은 국보 '합천 해인사 대장경판'이 1천496종, 6천568권이라고 소개했다.
유 교수는 논문에서 "팔만대장경 종수와 권수는 정론이 없이 중구난방인 것이 작금의 현실"이라며 "정확한 기준을 정해 공식적으로 수량을 결정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경전 이름과 권수를 모두 적은 표를 제시한 뒤 "한 권에 합쳐져 있는 경전이라도 독립된 것으로 산정하면 1천530종, 합권(合卷)된 여러 경전을 한 종으로 계산하면 1천496종"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기존의 견해는 대부분 합권된 여러 경전을 한 종으로 간주한 듯하다"며 "합권은 경전 내용이 짧아 이뤄진 것이므로, 종수를 계산할 때는 각각 개별 경전으로 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결론적으로 팔만대장경 불경 종류는 모두 1천530종이라는 것이 유 교수 주장이다.
그는 연구자마다 경전 종수와 권수에 차이가 나는 데 대해 이유를 유추할 수 있는 경우도 있지만, 상당수는 원인을 알 수 없다고 밝혔다. 박상현기자. 2021. 6. 13.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