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ice
Recent Posts
Recent Comments
Link
관리 메뉴

력사를 찾아서

2. 고려의 강역 (4) 귀주대첩이 일어난 장소는 요령성 심양시 인근 본문

남국/고려

2. 고려의 강역 (4) 귀주대첩이 일어난 장소는 요령성 심양시 인근

대야발 2025. 4. 9. 16:28

 

 

 

 

 

 

이번 연구논문들은 하나의 목표를 설정하고 이를 달성하기 위하여 낸 결론이 아니라 각자가 별도의 지역에서 연구한 결과들인데, 고려의 북계는 지금까지 인식되고 있는 압록강 하구에서 원산만이 아니라는 주장은 동일하게 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고려사>> <지리지>에 실려 있는 기록대로 북으로는 두만강 넘어 선춘령이 맞고, 서로는 고구려 땅을 모두 회복하지는 못했지만 그 중간 지역으로 추정되는 현재 중국의 요하라는 것이 확인되었다. 획기적인 성과라고 볼 수 있다.

 

 

 

■ 인하대 연구팀, 고려 서북쪽 국경선 새학설 제기 중국 요녕성 요하지역이라는 학술연구 결과 나와

인천=정창교 기자 2017. 11. 13. 20:22

 

 
 

고려의 서북쪽 국경선이 중국 요녕성의 요하지역이라는 학술연구서가 고조선연구소(소장 김연성) 연구 총서가 ‘압록(鴨淥)과 고려의 북계’라는 이름으로 최근 발간됐다.

 

 

 

 

 

 

이 총서의 내용은 기존의 정설인 압록강과 원산만을 잇는 선을 훨씬 뛰어넘는 것으로 역사지리학계의 최대 논쟁의 대상이 될 전망이다.

 

그동안 한국학계나 동북아시아 학계에서 한국 중세의 고려 국경선은 서로는 현재 압록강(鴨綠江)하구에서 시작하여 동으로는 원산만으로 이어지는 선으로 인식되어 왔다. 

 

이런 인식은 조선시대도 약간의 논쟁은 있었지만 확실하게 정해진 것은 일본이 ‘조선사’를 편찬하는 과정에서 쓰다 소우키치의 견해가 반영되면서부터다.

 

 

조선총독부 관변학자 쓰다 소우키치가 설정한 고려 국경. 국경이 지나치게 축소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인하대 제공

 

 

 

그 후 약 100년 가까운 세월동안 변함없이 이 견해는 한국사의 가장 중요한 틀로 자리 잡게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한국사는 서술되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인하대 고조선연구소 ‘조선사’ 연구팀은 기존의 견해에 반대를 하면서 조선시대 편찬된 ‘고려사’에 기록된 내용을 토대로 여러 기록들을 검증하고 기존과는 전혀 다른 결과를 제시했다.

 

 

연구팀은 쓰다가 주장한 고려의 북계는 고려를 폄하하기 위해 조작하여 만든 것이라는 것이다. 연구팀에 따르면 쓰다는 “고려 사람들은 거짓말을 잘한다. 그 중에 대표가 서희이다”라면서 서희가 요나라와 담판을 할 때 “고려가 고려의 후손이고, 이게 원래 고구려의 영토이니 지금도 우리 영토다”라고 주장을 하였는데 이것은 거짓말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쓰다는 이 거짓말을 바로 잡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고려의 북계(북쪽 국경)를 비정하였는데 그것이 오늘날 압록강 하구에서 시작하여 동으로는 원산만으로 비정했다는 것이다. 즉 쓰다는 고려 사람들이 거짓말쟁이라는 주장을 하면서 고려 사람들을 깎아 내렸던 것이다.

 

 

연구팀은 쓰다의 주장은 일본이 식민사관을 만드는 과정에서 가장 첫 번째 고려했던 반도사관을 만드는 근거를 만든 것이었다고 분석했다. 이번 연구는 고려시대 토지제도사를 연구한 한국 중세사학회 회원인 고조선연구소 윤한택 연구교수가 주도해 진행됐다. ‘압록(鴨淥)과 고려의 북계’에 실린 논문들의 내용을 간단하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윤한택은 ‘고려 서북 국경에 대하여 – 요·금 시기의 압록(鴨淥)과 압록(鴨綠)을 중심으로’라는 글에서 고려시대 압록강(鴨淥江)인 현재의 요하였고 여기가 고려의 서북계라는 것이다. 그의 주장은 압록강을 표기할 때 두 개의 압록강이 존재하는데 삼수변의 압록강(鴨淥江)실사변의 압록강(鴨綠江)을 구분하지 못하여 고려시대 국경선이 큰 혼란이 왔다는 것이다. 

 

 

그는 ‘고려사’, ‘요사’, ‘금사’ 등의 교차 검토를 통해 고려시대 압록강(鴨淥江)을 확인한 결과 현재 중국의 요하가 고려전기의 압록강이 확실하다고 주장했다. 뿐만 아니라 그동안 말로만 들었던 고려의 천리장성의 위치를 현재 중국 요녕성 중부지역에 남북으로 평균 60리 거리에서 관방형태로 존재했었다는 것이다.

 

 

이인철 교수는 ‘고려 윤관이 개척한 동북9성의 위치 연구’에서 기존 주장을 검토하고, 문헌기록을 꼼꼼히 검토하고 현지답사를 통해 윤관의 동북9성의 위치는 현재 두만강 이북에 위치했음을 확인하고 있다. 그러면서 이 윤관 9성의 거점이었던 공험진은 조선초기에도 명과의 국경선이었다는 것을 기록으로 확인하였다. 그는 앞으로 더 심도 있는 연구를 통하여 동북9성이 두만강 이북 700리에 실재했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해야 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남주성 교수는서희 개척 8주의 위치에 대한 재고찰’에서 기존 학계의 통설인 ‘강동 6주’를 군사 이동 상황과 평안도 지명과 지리를 비교하여 서로 부합되지 않음을 제시하고, 오히려 이들 지명은 요녕성 요하 상류의 남쪽 개원시 일대와 요양시 이북 일대의 지명과 상당 부분 부합돼 그 위치를 이곳으로 추정할 수 있음을 주장하고 있다.

 

 

박시현 교수는 ‘고려도경’, ‘허항종행정록’, ‘금사’에 기록된 고려의 서북계에 대한 시론에서 이 세 편의 당대 글을 참고로 하여 고려 서북계를 비정해 본 결과 고려의 서변은 현재 중국 요하 유역이었음을 확인하고, 북계는 현재 중국 흑룡강성 동남지역이나 현재 길림성 서북부 지역까지 이른 것으로 추측하였다.

 

 

복기대 교수는 과거에 발표한 ‘중국학계의 거란 東쪽 국경인식에 對하여’라는 논문을 일부 수정을 하여 실으면서 ‘요사’, ‘고려사’ 등의 문헌자료와 송나라의 지도인 ‘추리도’, 고고학 자료에 근거하여 거란의 동쪽 국경을 오늘날 중국 요녕성 중동부 지역이었다는 주장을 다시 한 번 제기했다.

 

 

윤은숙 교수는 ‘13~14세기 고려(高麗)의 요동(遼東) 인식 – 요(遼)·심(瀋) 지역을 중심으로’에서 홍복원의 고려군민만호라는 벼슬을 제수 받은 점, 충선왕이 원나라의 심양로를 분봉지로 받은 것을 비롯하여 요동 일대로 옮겨간 고려인에 대한 끊임없는 추쇄 요청, 그리고 1370년의 요동 정벌 등은 이 지역이 한반도 역사주체들의 역대 거주지이며 고려의 주권이 미치는 지역임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고 파악했다.

 

 

마지막으로 남의현 교수는 ‘명대 한·중 국경선은 어디였는가’에서 명의 만주에서의 영향력은 요동도사 지역에 한정되었고, 흑룡강· 백두산·두만강 등의 지역을 그들의 판도로 만들 수 없어 그 힘이 미치지 않는 ‘版圖外’의 지역일 수밖에 없었다고 파악했다. 따라서 명대 한국과 중국의 국경선은 기존의 압록강 대신 요양과 압록강 사이의 동팔참 지역에서 찾아야 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이번 연구논문들은 하나의 목표를 설정하고 이를 달성하기 위하여 낸 결론이 아니라 각자가 별도의 지역에서 연구한 결과들인데, 고려의 북계는 지금까지 인식되고 있는 압록강 하구에서 원산만이 아니라는 주장은 동일하게 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고려사>> <지리지>에 실려 있는 기록대로 북으로는 두만강 넘어 선춘령이 맞고, 서로는 고구려 땅을 모두 회복하지는 못했지만 그 중간 지역으로 추정되는 현재 중국의 요하라는 것이 확인되었다. 획기적인 성과라고 볼 수 있다.

 

 

앞으로 이 연구는 더 세밀한 연구를 해야지만 인하대 고조선연구소의 조선총독부 ‘조선사’ 정밀해제 팀의 연구 성과가 더 진전이 된다면 서희의 강동 6주, 강감찬의 귀주대첩을 비롯한 한국의 역사지리는 빅뱅을 가져 올 수밖에 없게 되고 이에 따라 전체 한국사도 흔들리게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제기된다.

 

 

이 연구를 주도한 윤한택 교수는 “이 새로운 주장들은 분명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학계에서 많은 논란이 일어날 것”이라며 “그렇지만 많은 학자들이 참여해 새로운 연구 성과들을 낸 만큼 연구자 입장에서 검증과 연구를 진행해야 할 것”이라는 의견을 제시했다. 연구단을 이끌고 있는 복기대 교수는 “쓰다의 서희에 대한 생각을 시작으로 일본학자들이 한국사에 대해 가지고 있던 생각을 철저히 분석하고 이에 대한 대응도 필요하다”고 역설했다.(1)

 

 

 

우리 국민들은 대학에서 우리 역사를 전공하지 않는 한 고교를 졸업한 뒤 국사를 다시 배울 기회는 사실상 없다. 고교 때까지 배운 것이 평생의 지식이 된다. 국사 교육은 왜 중요한가? 우리가 일상생활을 영위하는데 무슨 상관이 있는가 반문할 수도 있다. 하지만 역사 교육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갖는 정체성에 큰 영향을 미치며, 그러한 정체성은 우리나라의 미래 비전을 설정하는데 중요한 요소의 하나로서 작용한다. 


우리의 과거에 대해 맹목적으로 미화하거나 과장하는 것은 경계하여야 하지만 그간의 이해가 부정확하거나 잘못된 것이라는 합리적 의심이 들면 철저한 검증이 있어야 한다. 유감스럽게도 현재 우리 학계는 그러한 노력은 게을리하면서도 주류 학설에 배치되는 주장이 제기되면 토론을 거부하고 소위 '국뽕'으로 매도하는 경향이 있는데 하루바삐 시정되어야 할 태도라고 본다.

 

 

 

[기고] 한국사 수능 시험문제 유감 

수능시험 문제에까지 드리운 식민사관의 그림자

[박병환 유라시아전략연구소장/전 주러시아 공사  ]

2022. 11. 21. 09:52

 

 

지난 17일 수능시험이 있었다. 시험 후 늘 그렇듯이 분야별 출제 경향과 난이도에 대한 설명이 있었다.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 출제본부는 "교육과정에서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내용으로, 학문적으로 중요한 가치가 있거나 시사적으로 의미 있는 내용을 출제에 반영했다"다며 "교과서에서 다루고 있는 학습 내용이라도 최근 변화된 내용을 반영해 출제했다"고 밝혔다.

 

 

그런데 한국사 시험문제 2번 지문에 문제를 푸는 단서로 논란을 초래할 수 있는 설명이 들어갔다. 고려 시대 지명인 철주에 대해 '지금의 평안북도 철산군 일대이다. 강동 6주의 한 곳으로 서북면 방어의 요충지였다'라고 기술했다. 구체적으로 무엇이 문제인가? 고려 시대 문신 김구가 지은 시문을 소재로 출제하면서 시문의 구절에 대해 출제위원들이 문제가 있는 주석을 단 것이다.

 

 

시문에서 언급한 지역(철주)은 10세기 말 서희 장군이 고려에 쳐들어온 요나라(거란) 장수 소손녕과 담판하여 획득한 땅(강동 6주)의 일부로서 고려의 서북 국경을 결정하는 중요한 곳이다.

 

 

대일항쟁기에 일제는 우리 민족의 역사 강역을 축소하려는 의도에서 현재 요동반도(중국 요녕성 요하 동부지역)에 있어야 할 그 지역을 현재의 압록강 이남 평안북도에 있었다고 위치를 왜곡하였다. 

 

 

이러한 왜곡은 일제 식민사학자이자 반도사관의 기초를 잡은 '쓰다 쏘우키치'라는 일본 학자가 1913년에 시작하여 조선총독부의 <조선사>에 반영되고 1945년 해방 이후에도 아무런 검증을 받지 않고 이어져 왔다.

 

 

그런데 2017년에 인하대 고조선연구소가 조선총독부가 편찬한 <조선사>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고려사>, <요사>, <금사> 등 우리나라와 중국 사료들을 비교 분석하여 '쓰다 쏘우키치' 의 주장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밝혀냈다. 

 

 

<고려사>에 따르면 서희 장군은 "거란의 동경으로부터 우리 안북부(安北府)까지 수백 리"라고 하였는데 거란의 동경은 현재 요동반도 요양이므로 고려의 안북부는 현재 평안도 지역이 아니라 현재의 압록강 건너 요동반도 동부지역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철주를 비롯한 강동 6주는 요나라의 동쪽 경계와 고려의 서북 경계 사이에 설치된 것이므로 당연히 지금의 평안북도가 아니라 요동반도 지역에 있었다고 보는 것이 논리적이다. 사실 다른 근거를 댈 필요도 없이 서희 장군의 이 말만 갖고도 강동 6주, 나아가 강동 6주의 하나인 철주의 위치를 쉽게 추정할 수 있다. 

 

 

그런데 일본 학자는 당대의 인물인 서희 장군이 이웃 나라인 요나라와의 국경이 어디인지 모르고 거리를 잘못 말했다고 주장하였다. 한국의 학계는 일차적으로 누구의 말에 더 무게를 두고 이 문제를 탐구하는 것이 맞는가?

 

 

인하대 고조선연구소가 새로운 학설을 제시한 데 대해 한국의 주류학계는 아직 의미 있는 반론을 제시하지 못하고 침묵을 지키고 있다. 필자는 역사학 논쟁을 하자는 것은 아니다. 현재 고등학교에서 사용하는 검인정 한국사 교과서는 대부분 주류 학설을 싣고 있다. 그런데 수능본부의 설명대로 "교과서에서 다루고 있는 학습 내용이라도 최근 변화된 내용을 반영"한다면 출제위원들은 좀 더 신중하였어야 한다고 본다.

 

 

즉, 한국사 2번 문제에 논란이 될 설명은 넣지 말았어야 했다. 물론 출제위원들이 최근의 학술 논문이나 저술을 보지 못하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국가가 관리하는 시험이라면 적어도 새로운 학설은 없는지, 기존의 설명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해도 되는지 등 출제에 앞서 깊이 있는 점검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 국민들은 대학에서 우리 역사를 전공하지 않는 한 고교를 졸업한 뒤 국사를 다시 배울 기회는 사실상 없다. 고교 때까지 배운 것이 평생의 지식이 된다. 국사 교육은 왜 중요한가? 우리가 일상생활을 영위하는데 무슨 상관이 있는가 반문할 수도 있다. 하지만 역사 교육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갖는 정체성에 큰 영향을 미치며, 그러한 정체성은 우리나라의 미래 비전을 설정하는데 중요한 요소의 하나로서 작용한다. 

 

 

우리의 과거에 대해 맹목적으로 미화하거나 과장하는 것은 경계하여야 하지만 그간의 이해가 부정확하거나 잘못된 것이라는 합리적 의심이 들면 철저한 검증이 있어야 한다. 유감스럽게도 현재 우리 학계는 그러한 노력은 게을리하면서도 주류 학설에 배치되는 주장이 제기되면 토론을 거부하고 소위 '국뽕'으로 매도하는 경향이 있는데 하루바삐 시정되어야 할 태도라고 본다.(2)

 

 

 

 

이상으로 볼 때 고려의 귀주는 지금의 요령성 철령시 철령현이었음이 분명하며 귀주대첩 또한 평안북도 구성시가 아니라 사실은 요령성 철령시에서 일어났던 일인 것이다. 이곳은 심양시 북동쪽에 위치해 있는데 1233년 고려 역적 홍복원이 몽골에 갖다 바친 귀주 일대 40여 성이 심양로에 편입될 수 있었던 사실도 자연스럽게 이해된다.

 

 

 

[강동 6주를 찾아서 ④] 귀주대첩이 일어난 장소는 요령성 심양시 인근. 평안북도 구성시는 본래 귀주가 아니라 만년군

조하준 기자입력 2023.12.10 06:18수정 2023.12.13 19:29

 

 

 

국사 교과서에 표기된 여요전쟁 당시의 지도. 빨간색 선이 1018년 당시 요나라 장수 소배압이 이끌었던 10만 대군의 진격로인데 과연 이 길이 맞을까?(출처 : 네이버 이미지)

 

 

이전까지의 기사들을 통해 강동 6주의 대략적인 범위가 어디쯤인지 파악할 수 있었다. 이제는 구체적인 위치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할 것이다. 강동 6주 중에서 가장 유명한 곳을 꼽자면 아마도 제3차 여요전쟁의 마지막 전투이자 고려의 빛나는 승리로 기록된 귀주대첩(龜州大捷)이 있었던 귀주(龜州)일 것이다.



따라서 먼저 귀주대첩의 장소인 귀주의 위치부터 찾고 그 뒤를 이어 다른 5곳의 위치를 사서의 기록을 통해 찾아낼 수 있는 한 모두 찾아볼 수 있도록 해볼 것이다. 기존엔 귀주대첩이 있었던 장소를 평안북도 구성시라고 설명했지만 이미 그 설명은 틀렸음을 앞선 기사에서 확인했다.

 

 

소배압은 왜 산악지대로 퇴각했나?

 

위에 첨부된 지도는 국사 교과서에 실린 여요전쟁 당시의 지도이다. 빨간색 화살표가 1018년 제3차 여요전쟁 당시 소배압(蕭排押)이 이끌었던 10만 대군의 진격로이다. 언뜻 봐서는 문제점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바로 아래 지도는 구글 위성 지도를 통해 다시 표시한 지도이다.

 

 

『고려사』에 적힌 기록대로 소배압의 진격로를 국사학계의 일반적인 지명 비정에 따라 구글 위성 지도로 옮기면 이렇다. 이상하게 소배압의 거란군은 산악지대를 타넘으며 퇴각하고 있다.(지도 제작 : 굿모닝충청 조하준 기자)

 

 

 

 

『고려사』 지리지의 이상한 기록

 

우선 『고려사』 지리지에는 귀주에 대해 어떻게 기록하고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고려사』 권 58 지 12 지리 3 북계에 기록된 귀주의 기록은 이렇다.

 

“본래 고려의 만년군(萬年郡)이다. 성종 13년(서기 994년)에 평장사 서희에게 명하여 군사를 이끌고 여진을 공격해 쫓아내고 축성하여 귀주라 했다. 현종 9년(서기 1018년)에 방어사를 삼았다. 고종 3년(서기 1216년)에 거란의 병사가 쳐들어오자 주의 사람들이 싸움으로 막아내 참획한 자가 매우 많았다. 고종 18년(서기 1231년)에 이르러 몽골군이 쳐들어오자 병마사 박서(朴犀)가 힘을 다해 막아내고 끝까지 항복하지 않았으므로 그 공으로 정원대도호부로 승격시켰다. 후에 도호부라 했다가 또 정주목(定州牧)으로 고쳤다.”

 

 

이 기록을 보면 뭔가 이상한 점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앞서도 말했듯이 이 기록은 『고려사』에 적힌 기록인데 “본래 고려의 만년군이다”는 기록은 뭘로 봐도 어색하다. 또한 이 귀주란 곳은 분명히 994년에 서희가 여진을 내쫓고 축성한 곳이라고 했다. 즉, 994년 이전까지 귀주라는 곳은 여진의 영토였다는 뜻이다. 그런데 “본래 고려의 만년군이다”는 기록은 뭔가 어색할 수밖에 없다.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지리지에도 평안도 의주목 정주목 편에 “본래 고려의 만년군(萬年郡)인데, 현종(顯宗) 9년 무오에 귀주방어사(龜州防禦使)를 두었다”고 하며 『고려사』 지리지와 같은 기록이 실려 있다. 즉, 『고려사』 지리지와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지리지의 기록이 같다는 것인데 그 이유는 왜일까?

 

 

이런 이상한 기록이 남게된 이유는 지금 우리가 보는 『고려사』와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지리지가 비슷한 시기에 편찬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두 책은 서로 연관성을 주고 받고 있다. 그래서 분명히 고려 왕조의 영토 지리를 기록하는데 “본래 고려의 〇〇군이다”는 이상한 기록이 첨가된 것이다.

 

 

그리고 귀주의 기록을 보면 1231년 이후의 기록이 부실한데 그 이유는 왜일까? 이런 점을 볼 때 1231년 이전 귀주는 다른 곳에 있었는데 후에 평안북도 구성시였던 만년군에 옮겨 설치한 것이 아닌지 의심이 드는 대목이다. 이렇게 기존의 행정구역을 다른 지역에 옮겨 설치한 것을 교치(僑治)라고 한다.

 

 

다시 말해 평안북도 구성시는 본래 귀주가 아니라 만년군이었고 몽골의 침략 이후부터 이곳에 귀주를 옮겨 설치하면서 귀주라고 불리게 됐을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다. 그럼 실제 귀주의 위치가 어디인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원나라 심양로에 편입됐던 귀주

 

『고려사』 지리지에 적힌 귀주의 연혁을 보면 1231년 이후의 기록이 부실한 것을 볼 수 있는데 그 이유를 『원사』, 『신원사』 지리지를 통해 알아볼 수 있다. 두 사서의 지리지에 적힌 기록을 살펴보면 1233년에 고려 역적 홍복원(洪福源)이 귀주를 포함한 서경도호 예하의 40여 성을 몽골에 갖다 바쳤는데 몽골은 그 지역을 심양로(瀋陽路)에 편입시켰다고 한다.

 

 

심양에서 평안북도 구성시까지 거리를 구글 지도로 측정해 보면 직선거리로만 무려 256.6km라고 나온다. 그리고 두 곳 사이에는 천산산맥, 강남산맥, 적유령산맥 등 산악지대들이 있어 그 당시 도로 체계를 고려하면 족히 1,000리는 넘는 먼 거리이다. 귀주를 제외하고 홍복원이 몽골에 갖다 바친 40여 성이 구체적으로 어디인지는 자세히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지금의 평안북도 지역을 심양로에 편입시켰다고 보는 것은 너무 무리한 주장이 아닐까?

 

 

그리고 『원사』, 『신원사』 지리지에 적힌 심양로의 연혁을 살펴보면 심양로가 심양로 → 안무고려군민총관부 → 심주등로안무고려군민총관부로 명칭이 바뀌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분명히 몽골의 행정구역일진대 왜 유독 ‘고려’를 강조한 것일까? 심지어 고려 26대 국왕인 충선왕(忠宣王)은 고려 국왕과 심양왕(瀋陽王)을 겸직하기도 했다. 심양왕은 말 그대로 심양 지역을 다스리는 왕이란 뜻이다.

 

 

충선왕 때부터 원나라가 망할 때까지 약 60년 동안 심양왕은 오직 고려 왕족들만 차지했다. 왜 그럴까? 백과사전에서는 고려 국왕이 심양왕을 겸직하게 된 이유에 대해 “당시 선양(瀋陽)을 중심으로 한 랴오닝성(遼寧省)에는 고려의 전쟁포로 · 항속민(降屬民) · 유민(流民) 등의 집단이 많아 고려의 영토와 같은 특수지역”이기 때문이란 식으로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고려의 유민들이 어째서 심양까지 흘러들어간 것인가? 주류 강단사학자들 말대로라면 심양 지역은 1232년 당시엔 금나라나 동진국(東眞國)의 땅이었다. 그러므로 심양 지역엔 금나라나 동진국 유민들이 더 많을 것 아닌가? 숫자로 보면 고려인들보다 금나라 사람들이 더 많아야 자연스럽지 않은가?

 

 

귀주를 비롯한 40여 성이 원나라 심양로에 편입되었다면 심양 지역에 있었다는 고려인들은 압록강 이북으로 건너간 사람들이 아니라 본래 그 땅에 살고 있던 고려인들이었던 건 아니었을까? 즉, 본래 고려의 영토가 심양 일대까지 뻗어 있었는데 그 땅을 역적 홍복원이 몽골에 갖다 바쳤다고 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몽골이 그 지역에 본래 살고 있었던 고려인들을 위무하기 위해 심양로를 안무고려군민총관부, 심주등로안무고려군민총관부로 고쳤고 그마저도 신통치 않아 고려 국왕에게 심양왕을 겸직하도록 했다고 보는 게 더 자연스럽다. 실제로 고려는 자국의 영토가 요양, 심양 지역까지 이어져 있었다는 걸 여러 차례 주장한 바 있고 『고려사』에 그 기록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귀주대첩 기록에 나온 다하(茶河)와 타하(陀河)

『고려사』는 강감찬이 이끄는 고려군과 소배압이 이끄는 거란군이 마지막으로 맞붙었던 장소를 귀주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요사』는 귀주의 위치가 다하(茶河)와 타하(陀河)라는 두 강 사이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국사학계는 다하를 삼교천, 타하를 청천강이라고 주장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들의 일방적 주장일 뿐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



『요사』 권 38 지 8 지리지 2를 보면 동경도(東京道) 귀덕주(貴德州)의 기록에 타하라는 강이 언급된다. 그 기록을 보도록 하자.



“귀덕주 영원군(寧遠軍)은 하등주이며 절도사를 두었다. 본래 한나라 양평현이다. 한나라 공손도(孫度所)가 점거하였다. 태종 때에 찰할(察割)이 포로로 잡은 한족 백성들을 살게 하여 설치했다. 후에 반역죄로 주살되면서 몰수되었다. 성종이 귀덕군을 세우고 후에 이름을 고쳤다. 타하(陀河)가 있고 대보산(大寶山)이 있으며 숭덕궁(崇德宮)에 예속시켰고 군사 업무는 동경도부서사(東京都部署司)에 예속시켰다.”



다하나 타하라는 강은 모두 요나라에서 부른 이름이지 우리나라에서 부른 이름이 아니다. 귀덕주에 있다는 타하와 귀주에 있는 타하가 과연 서로 다른 강이었을까? 마침 『요사』는 귀주(龜州)를 ‘貴州’라고 기록하고 있다. 귀덕주의 위치를 『중국고금지명대사전』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요나라가 귀덕주 영원군을 설치했다. 또 귀덕현을 설치해 주의 치소로 삼았다. 금나라가 폐지했으나 영원군은 존속시켰다. 원나라가 폐지했다. 옛 성은 오늘날 봉천성 철령현 동남쪽에 있다.”



귀덕주는 요령성 철령시 동남쪽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타하라는 강 또한 이 일대에 있어야 할 것이다. 청나라 때 편찬된 『성경강역고(盛京疆域考)』 권 4 요(遼) 편은 귀덕주의 위치를 오늘날 요령성 철령시라고 하면서도 주석으로 이런 의문을 덧붙였다. 그 기록을 한 번 살펴보도록 하자.



“『요사』엔 ‘성종(聖宗) 통화(统和) 28년(서기 1010년)에 친히 고려를 정벌했고 11월 압록강을 건너 그 병사들을 패배시키고 마침내 개경을 불지르며 청강(清江)에 이르렀다. 다음 해 군사를 물리고 돌아올 때 귀덕주에 이르러 비를 만나 비가 개기를 기다린 뒤 건넜다. 기축일에 압록강을 건넜다.’고 했다. 살피건대 이 귀덕주는 마땅히 압록강 동안에 있어야 한다. 그러나 『금사』 《지리지》의 귀덕주 연혁을 고찰해 보면 확실하게 철령, 승덕 2현의 경계 안에 있었다. 혹자는 압록강 밖의 고려에도 또 귀덕주가 있었다고 한다. 『요사』가 본래 오류가 많고 믿기엔 증거가 부족하다. 금나라의 귀덕주를 참고해 보도록 하라.”



청나라 학자들이 이런 의문을 남긴 이유는 그들 또한 고려와 요나라 간 전쟁이 일어난 곳을 오늘날 압록강 일대로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사람이 편견을 가지게 되면 진실을 보는 눈이 가려진다는 걸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요사』 본기와 《이국외기》 고려 조에는 철수하던 요나라 군대가 귀주(貴州) 남령곡(南嶺谷)이란 곳에서 큰 비를 만나 비가 그칠 때까지 기다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실제 귀주대첩이 있었던 장소는 사서의 기록을 검토했을 때 평안북도 구성시가 아니라 만주 요령성 철령시 철령현 일대로 판단된다.(지도 제작 : 굿모닝충청 조하준 기자)

 

 

 

결국 요나라의 귀덕주와 고려의 귀주는 서로 같은 곳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앞서 귀주를 비롯한 서경도호 예하의 40여 성이 고려 역적 홍복원에 의해 심양로에 편입되었다고 했고 또 귀주의 위치가 다하와 타하 두 강 사이라고 했는데 귀덕주에 타하란 강이 있지 않던가? 앞서 압록강(鴨淥江)이 요하라고 했으니 기록에 나온 압록강을 요하로 보고 해석하면 전혀 해석에 문제가 없다.



또 『고려사』 권 94 열전 7 《양규열전》에는 1011년에 야율융서가 이끄는 거란군이 퇴각할 때 양규(楊規)와 김숙흥(金叔興)이 거란군을 상대로 큰 승리를 거두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성경강역고』 권 5의 기록을 보면 금나라 귀덕주의 귀덕현에 범하(范河)라는 강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즉, 요나라 귀덕주의 타하가 금나라 귀덕주의 범하로 표기된 것이다.



즉, 타하라는 강은 지금의 요령성 범하를 말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다하라는 강은 범하의 북쪽에 있는 시하(柴河)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귀주는 그 두 강 사이에 위치해 있어야 하는데 범하와 시하 사이에 위치한 곳은 오늘날 요령성 철령(鐵嶺)시이다. 앞서 귀덕주의 위치는 요령성 철령시 동남쪽에 있다고 했는데 현재의 철령시는 12,966km2에 달하는 광활한 면적을 자랑하고 있다.



귀주대첩 당시 기록을 『고려사』 권 94 열전 7 《강감찬전》을 통해 살펴보면 당시 강감찬이 이끄는 고려군은 귀주 동쪽 교외에서 소배압의 거란군을 공격했다고 한다. 그리고 앞서 말했듯이 소배압이 이끄는 거란군은 다하와 타하 즉, 시하와 범하 두 강 사이에 진을 치고 있었다.



그리고 전투 중에 남풍이 갑자기 불어서 고려군이 더욱 힘을 내 거란군을 물리쳤다고 하는데 이로 보아 고려군이 남쪽에 거란군이 북쪽에 진을 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로 볼 때 귀주대첩은 오늘날 요령시 철령시 은주(銀州)구 일대에서 일어났던 것으로 판단되며 귀주 역시 이 부근에 있었던 것으로 봐야할 것이다.



『고려사』와 『요사』 두 사서의 기록을 참고해 볼 때 귀주성은 철령시 철령현 이천호향(李千戶鄕) 일대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거란군은 그 동쪽을 지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고려군이 귀주성 동쪽 교외로 나아가 거란군을 추격했다. 그 후 거란군은 범하와 시하 두 강 사이에 배수진을 쳤는데 아마 이곳은 지금의 철령시 은주구 용산향(龍山鄕) 일대로 판단된다.



이상으로 볼 때 고려의 귀주는 지금의 요령성 철령시 철령현이었음이 분명하며 귀주대첩 또한 평안북도 구성시가 아니라 사실은 요령성 철령시에서 일어났던 일인 것이다. 이곳은 심양시 북동쪽에 위치해 있는데 1233년 고려 역적 홍복원이 몽골에 갖다 바친 귀주 일대 40여 성이 심양로에 편입될 수 있었던 사실도 자연스럽게 이해된다.

귀주의 위치가 요령성 철령시 일대임이 확인됐으니 서희가 개척한 강동 6주의 나머지 지역도 이 일대에서 찾아야 할 것이라 생각한다.(3)

 

 

 

 

 

 

<자료출처>

 

 

(1) https://v.daum.net/v/20171113202247651 국민일보 2017. 11. 13.

 

 

(2) https://v.daum.net/v/20221121095232631 프레시안 2022. 11. 21.

 

 

(3) [강동 6주를 찾아서 ④] 귀주대첩이 일어난 장소는 요령성 심양시 인근 - 굿모닝충청 (goodmorningcc.com) 2023.12.10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