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코리아시대 (139)
력사를 찾아서

주목할 것은 제헌국회는 조선공산당 등 좌파는 말할 것도 없고 중도좌파적인 여운형, 우파인 김구도 단독정부 수립이 분단을 영속화한다는 이유로 선거에 참가하지 않아 '친일지주(친일경찰 정도의 친일은 아니라고 하더라도)'들이 다수였던 한민당과 일부 소장파 의원들만으로 구성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조차도 친일 청산은 거부할 수 없는 민족적 과제라고 생각해 반민법을 제정한 것이다. ■ 수난의 반민특위, 표시석도 찬밥 신세 [손호철의 발자국] 54. 서울 명동 : 이승만에 의해 좌절된 친일 청산의 꿈손호철 서강대학교 명예교수 | 기사입력 2021.07.12. 06:16:59 최종수정 2021.07.12. 09:55:29 '저승사자'. 김근태 의원을 고문을 해서 감옥살이를 했던 고문기술자..

최근 공개된 여러 문서들에 따르면, 1945년 8월 10일 일본이 항복 의사를 밝히면서 이미 한반도 국경에 도착한 소련이 한반도 전역을 점령할 가능성이 매우 커지자, 미국의 딘 러스크 국무부 정책과장보가 찰스 본스틸 전쟁부 정책과장과 함께 서울과 인천을 미국의 통제 하에 두기 위해 군사경계선으로 38선을 긋자는 미국의 제의를 소련이 받아들임으로써 분단이 됐다는 것이 정설이다. ■ 분단의 상징 '38선'은 누가, 어떻게 그었나?[손호철의 발자국] 42. 경기도 연천 : 38선에서 분단과 남침, 북진을 생각한다손호철 서강대학교 명예교수 | 기사입력 2021.06.11. 06:19:22 "잘못된 장소에서, 잘못된 시간에, 잘못된 적과의 잘못된 전쟁." 1951년 오마 브래들리 합참의장이 미 의회에서 ..

1919년 3·1 운동 이후 같은 해 만들어진 상해 임시정부에선 일제로부터의 독립을 위한 정부의 활동상과 국민 계몽 등을 위해 같은 제호의 ‘독립신문’을 발간했다. 임시정부가 만들어진 1919년 8월부터 1926년 11월까지, 무려 7년 동안 207호가 간행됐다. 조선 독립의 의지가 꺾이지 않도록 매 호마다 관련 소식들을 부지런히 게재했다. 때때로 상해판 독립신문을 받아본 경기도내 독립운동가들이 항일의 불꽃을 태우게끔 하는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최초의 신문인 독립신문만큼이나 상해판 독립신문 역시 국민의 알 권리를 충족하고 사회를 보다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언론 본연의 기능에 충실했던 신문이었다는 평이다. ■ 100년 전 지역 항일운동 불 지폈던 ‘상해판 독립신문’ [항일의 기억, 광복의 ..

100년 전 중국 상하이에서 수립한 대한민국임시정부 입법부인 임시의정원이 사용한 관용 도장이 문화재가 됐다.문화재청은 현재까지 공개된 유일한 임시의정원 관인(官印)인 '대한민국임시의정원인'을 문화재로 등록했다고 2019년 12월 30일 밝혔다. 이 도장은 1925년 '임시의정원 잠행조례안 통과 고함'과 1943년 '원비 결산서 제출에 관한 건' 등에 사용됐으며, 임시의정원 의장을 네 차례 지낸 홍진이 1945년 12월 1일 환국할 때 지참했다. 이듬해 홍진이 세상을 떠난 뒤 유족들이 보관하다 올해 국회도서관에 기증했다. 크기는 가로·세로가 5㎝ 정도이며, 높이는 6.3㎝다. ■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의정원 관용 도장, 문화재 됐다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2019. 12. 30. 11:32 보화각도 등록..김천..

■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주년 특별전 개최KTV 곽동화기자 영상취재: 민경철, 김명현 / 영상편집: 양세형2019. 2. 19. 10:02 https://tv.kakao.com/v/395779918 유용화 앵커>3·1 운동과 대한 민국 임시 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념하는 특별 전시회가 내일부터 열립니다.이번 특별전에서는 이육사 시인의 친필 원고 등 항일 독립문화 유산을 만날 수 있습니다.곽동화 기자입니다. 곽동화 기자> ‘겨우 송나라의 윤곡처럼 자결할 뿐이니 당시 진동처럼 의병을 일으키지 못해 부끄럽네’ 경술국치 직후 매천 황현 선생이 순절하며 남긴 절명시입니다.지식인의 책임을 절절히 느끼고 역사 앞에 스스로 죽음을 택한 선비의 굳은 절개를 느낄 수 있습니다.황현 선생의 친필이 담긴 대월헌절필첩..
‘도산 안창호 일기(등록문화재 제721호)는 도산 안창호(1878∼1938년)가 1919년 3·1운동 이후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상해임시정부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대리 등으로 역임하던 시기의 활동을 기록한 일기다. 1920년 1월14일부터 8월20일까지, 1921년 2월3일부터 3월2일까지 약 8개월의 기록이다. 임시정부에서 사용하던 것과 같은 용지에 썼으며 3책으로 되어있다.임시정부에서 활동한 인물이 기록한 당시의 일기 중에서 공개된 것으로는 유일하다. 안창호가 직접 쓰지는 않은 것으로 보이나 임시정부 초창기의 활동과 조직운영, 참여 인사들의 면모 등을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사료로 평가받는다. 이번에 등록하는 일기는 안창호의 유족들이 보관하고 있다가 1985년 독립기념관에 기증했다. 정부는 안창호의 ..

일제강점기 유럽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서영해(1902~?·사진)의 행적이 담긴 자료들이 국가등록문화유산이 된다.국가유산청은 ‘독립운동가 서영해 관련 자료’를 국가등록문화유산으로 등록 예고했다고 2025년 4월 17일 밝혔다. 서영해는 유럽에서 작가, 언론인, 교육인으로 독립운동을 펼쳤다. 그는 1929년 프랑스 파리에서 고려통신사를 설립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외교 특파원으로 활동하며 유럽에서 일제의 침략상을 알리는 일을 했다. 고려통신사는 임시정부 외무부 소속의 외교기관 역할을 했다.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됐다. ■ 임시정부 파리 특파원, 서영해 활동 자료…‘국가등록문화유산’ 등재 눈앞에경향신문 윤승민 기자 2025. 4. 17. 20:31 ‘수운교 삼천대천세계도’ 공식 등록 독립운동가..
등록문화재 제740호 '대한민국임시정부 건국강령 초안'은 독립운동가이자 임시정부의 대표적인 사상가 조소앙(본명 조용은, 1887~1958)이 '삼균주의'(三均主義)에 입각해 독립운동과 건국의 방침 등을 정리한 국한문 혼용의 친필문서이다. 삼균주의는 개인간·민족간·국가간 균등과 정치적·경제적·교육적 균등을 근간으로 해 조소앙이 제창한 정치사회사상이다. 조소앙이 기초한 건국강령은 1941년 11월28일 임시정부 국무회의에서 약간의 수정을 거쳐 통과됐으며 1948년 제헌헌법의 기본 바탕이 됐다. 조소앙은 광복 후 국회의원 등으로 활약하다 6.25전쟁 중 납북됐으며 1989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됐다. ■ 대한민국임시정부 건국강령 초안·경희대 본관 문화재 됐다 뉴스1 여태경 기자 2019. 1. 2...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이후 독립의 열망을 담은 전단지가 문화유산이 됐다. 국가유산청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성립 축하문과 선언서’를 국가등록문화유산으로 등록했다고 2024년 9월 12일 밝혔다. ■ 1919년 독립 열망 담은 임시정부 전단지, 문화유산 등록이데일리 장병호기자 2024. 9. 12. 10:28 '대한민국임시정부 성립 축하문과 선언서'3·1운동 이후 독립운동 전개 양상 보여줘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이후 독립의 열망을 담은 전단지가 문화유산이 됐다. 국가유산청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성립 축하문과 선언서’를 국가등록문화유산으로 등록했다고 12일 밝혔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성립 축하문. (사진=국가유산청) ‘대한민국임시정부 성립 축하문과 선언서’는 1919년 3·1 만세운동..
■ 24人의 독립투사들, 남북이 함께 기린다중앙선데이특별취재단 강영진·이철희·정용수 기자 사진=김형수 기자중앙일보 통일문화연구소 자문위원=유영구·정창현입력 2007.07.29 01:51 평양 대성산 주작봉 정상에 조성된 혁명 열사릉 전경. 김일성과 함께 항일무장투쟁을 했던 인물 중 간부급 160명이 묻혀 있다. 북한은 일제시기독립운동사를 김일성의 활동을 중심으로 서술하고 있다. 혁명 열사릉은 그 같은 주장을 뒷받침하는 대표적 상징조작물이다. 평양=김형수 기자 양세봉 열사는 남북한이 공동으로 독립유공자로 기리는 대표적 인물이다. 1920년대와 34년 순국 때까지 남만주 지역의 항일 무장투쟁을 이끌었다. 특히 32년부터는 조선혁명군 총사령으로 활동하며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남한에서는 62년 독립장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