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력사를 찾아서

■서대문 형무소에서 다시 외친 '대한독립 만세'[3·1운동 100년, 임시정부 100년][우리가 잘 몰랐던 이야기] [7] 유관순의 두 번째 3·1운동 조선일보 김성현 문화전문기자 입력 2019.02.18. 03:00 "전 괜찮아요. 일부러 그런 거예요. 만세 1주년 되는 날인데 빨래나 하고 있을 순 없잖아요." 영화 '항거: 유관순 이야기'(각본·감독 조민호)에서 유관순(고아성)은 1920년 서대문 형무소의 세탁실에서 노역을 하다가 짐짓 쓰러지는 시늉을 한 뒤 동료 수인(囚人)들이 기다리는 8호실로 돌아온다. 3·1 운동 1주년을 앞두고 옥중 항거를 계획한 것이다. 10㎡(3평) 남짓 좁은 감방에는 20여 명이 갇혀 있다. 1920년 3월 1일 오후 2시를 알리는 괘종 소리가 울리자 유관순은 ..
1919년 1월 21일 새벽 고종황제가 덕수궁 함녕전에서 갑자기 승하하셨습니다. 당시 68세였던 고종은 평소 지병이 없고 건강했기 때문에 일제에 의한 독살설 등 그의 죽음을 둘러싸고 여러 소문들이 퍼져나갔습니다. ■ 그의 죽음이… '만세운동'과 '민주공화정'의 기폭제 됐다[3·1운동, 임시정부 100년 - 1부] [우리가 잘 몰랐던 이야기] [4] 고종 승하 미스터리조선일보 유석재 기자입력 2019.01.21. 03:00업데이트 2019.01.21. 19:20 1919년 1월 21일 새벽 1시, 경술국치 이후 이왕(李王)으로 강등된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순종이 거처하던 창덕궁에 전화벨이 가늘게 울렸다. 수화기를 든 순종은 안색이 백지장처럼 변했다. "부왕(父王)이 위독하다"는 소식이었다. 황급히..

■ '대한독립여자선언서'를 아시나요?정책브리핑 2017. 8. 10. 17:05 “슬프고 억울하다. 우리 대한 동포시여”로 시작해 “동포, 동포시여. 대한독립만세!”로 끝나는 ‘대한독립여자선언서’를 들어보셨습니까? ‘대한독립여자선언서’는 여성 주도로 작성하고 인쇄 배포한 최초의 독립선언서입니다. 또한, 애국부인회(김인종 외 8인)는 ‘대한독립여자선언서’를 국내외 각지로 반포하여 여성의 독립운동 참여를 독려했습니다. 이는 민족지도자 33명이 3·1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기 이전의 일이며, 여성들이 제국주의에 맞서 독립선언문을 발표한 세계사적으로도 큰 사건입니다. 선언서는 당시의 부녀자에게 독립운동에 적극 동참할 것을 요구하며, 이는 국민으로서 당연한 권리이자 의무라고 밝혔습니다. 다른 독립선..
■ 문 대통령 "2.8독립선언 실행한 열한 분의 이름 기억하겠다"오마이뉴스 구영식기자 2019. 2. 8. 10:33 페이스북에 '2.8독립선언 100주년' 메시지 올려 문재인 대통령이 8일 '2.8독립선언' 100주년을 맞이해 "독립선언을 실행한 분들의 이름을 하나 하나 기억하겠다"라는 메시지를 내놓았다. 문 대통령은 이날 오전 자신의 페이스북 등에 올린 메시지에서 "100년 전 오늘, 600여 명의 조선유학생들이 함박눈이 내리는 도쿄 조선YMCA회관에 모여 독립만세를 외쳤다"라며 "이날 유학생들이 낭독한 '조선청년독립선언서'는 우리 독립운동의 화톳불을 밝히는 '불쏘시개'가 되었다"라고 역사적 의미를 부여했다. 문 대통령은 "'2.8독립선언서'는 학생들에 의해 작성되었고 3.1독립운동에 직접적인 영향..

1919년 2월 1일, 중국 길림에서 발표된 무오독립선언은 일제강점기에 대한의 독립을 세계에 천명한 역사적인 사건이다. 3.1운동의 기폭제가 된 이 선언은 자주독립국가 건설을 향한 민족의 염원을 담아냈다. 무오독립선언은 총 39인이 참여했다. 주요 인사로는 무오독립선언서의 기초자인 조소앙을 비롯해, 대한독립의군부 총재 김교헌,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인 김규식, 청산리대첩의 영웅 김좌진, 독립운동가이자 초대 대통령 이승만, 독립운동가이자 역사가 박은식,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 안창호 등이 있다. ■ 자주독립의 횃불을 올린 한국 최초의 독립선언 [역사&오늘]뉴스1 김정한 기자 2025. 2. 1. 06:00 2월 1일, 무오독립선언 무오독립선언서. (출처: Jo So-ang (1887–1958), Public..

1918년 11월 28일 중국 상해에서 여운형·장덕수·김철·선우혁·한진교·조동호 등 20~30대 독립운동가들이 만든 신한청년당은 1차 세계대전 마무리를 위해 열린 파리 평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했고, 국내·일본·만주·연해주에 밀사를 보내 독립 만세 시위를 유도했으며, 3·1운동이 일어난 뒤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출범을 주도했다. 신한청년당은 소수 정예주의를 채택해 '20~40세, 기성 당원 2명 이상의 추천'으로 자격을 제한했다. 김규식·조소앙·이광수·김구·신석우·서병호·송병조·이유필 등 50명가량이 당원이었고, 외교·교육 활동과 기관지 '신한청년' 발간 등 활발히 움직이다 1922년 말 해산됐다. ■ 3·1운동의 숨은 주역 '신한청년당'을 아시나요이선민 선임기자2018. 11. 28. 03:05 191..

한민족 독립운동사 논의와 연구에서 상하이(上海)·하와이·북미주가 중심무대로 정설화돼 있지만 사실 그 발원지와 핵심 활동 지역은 러시아 연해주였다. 특히 1910년을 전후해 무장독립운동의 활동 기지는 이곳이었다. 이 지역은 20세기 초반 20만명이 넘는 재외 한민족의 최대 거주 지역이자 민족사회가 형성된 곳이었다. 만주 군벌들이 한국의 독립운동을 금지하고 있었지만 러시아 당국이 한국 독립운동을 묵인하고 있었기 때문에 국내외 독립운동 세력들이 모여들었다. ■ 연해주는 무장독립투쟁의 기지아시아투데이 최영재 기자 2014. 08. 13. 07:11 안중근 장군, 연해주 '동의회' 소속으로 단원 12명과 왼손 무명지 끊고 결의 한민족 독립운동사 논의와 연구에서 상하이(上海)·하와이·북미주가 중심무대로..

■ [단독]1910년 '성명회 선언서' 탄생한 이상설 선생 거주지 찾았다동아일보 유원모 기자2019. 4. 22. 03:00 '더채널' 김광만 PD, 당시 러 경찰 비밀보고서에서 확인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 인근 위치.. 연해주 독립운동 세력 중심지 역할한인 8624명 서명 성명회 창립.. 일제 방해공작으로 한달만에 해체이후 권업회-대한광복군정부 거쳐 1919년 임시정부 한축으로 발전 1910년 8월 23일 한일 강제병합 소식을 들은 직후 러시아 연해주에 거주하던 한인 8624명이 서명한 ‘성명회 선언서’(왼쪽). 일제강점기 최초의 독립선언서로 평가받는 이 선언서가 작성된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시의 이상설 거주지가 처음 확인됐다. 러시아 국립극동문서보관소에서 찾아낸 당시 러시아 경찰의 보고서에는 “항일조직을..

■ [1919 한겨레] 각지 독립운동가는 왜 연해주에 모였나한겨레 최하얀기자 2019. 2. 26. 07:16 의병·지사 대거 망명한 최대 한인 거주지경술년, 만국에 「병합 무효 선포」 주도경제조합 변장한 「권업회」로 독립운동「대한광복군」 망명 정부도 만들었지만로서아 정부, 건건이 탄압 의병장 유인석과 홍범도. 올해는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입니다. 역사적인 해를 맞아 는 독자 여러분을 100년 전인 기미년(1919)의 오늘로 초대하려 합니다. 살아 숨 쉬는 독립운동가, 우리를 닮은 장삼이사들을 함께 만나고 오늘의 역사를 닮은 어제의 역사를 함께 써나가려 합니다. 와 함께 기미년 1919년으로 시간여행을 떠날 준비, 되셨습니까? 각지 독립운동 대표자들이 로서아(러시아) 원동..

■ 연해주 독립운동 대부…그의 집에서 안중근 단지동맹 맺어2024. 4. 13. 01:05 ━김석동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인물 탐구 ③ 최재형연해주는 헤이룽강, 우수리강, 동해로 둘러싸인 땅이다. 러시아 85개 연방지역의 하나로 우리나라 1.6배 크기다. 북방민족이 세운 금·원·청이 차례로 지배했고, 1860년 러시아가 베이징조약으로 차지했다. 한민족과도 뗄 수 없는 역사가 전개된 곳으로 고조선을 이은 고구려·발해 그리고 이와 연결된 북방민족국가의 영역이었다. 1863년 이래 두만강 건너 한인 이주가 계속되면서 집단거주지 ‘한인촌’이 세워졌고, 1910년 전후로는 애국지사의 망명과 이주가 줄을 이으면서 만주와 함께 조직적인 항일운동의 거점이 됐다. 최재형 선생은 바로 이곳에서 항일독립운동의 대부로서 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