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력사를 찾아서

김구(1876~1949)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광복군을 국내에 진입시키려고 했다. 영국에서 망명정부를 이끌던 프랑스 샤를 드골(1890~1970)이 레지스탕스 부대를 이끌고 파리에 입성했듯 임정도 광복군을 모아 서울로 들어가려고 했다. 미국 OSS와 한반도 진공을 추진하는 동시에 중국 산시성 옌안에 있던 김두봉(1889~1961)의 조선의용군, 소련 연해주 지역에서 활동하던 김일성(1912~1994)의 항일유격대 등과 손잡고 압록강을 넘어가려고도 했다. 임정이 실제로 미국, 중·소 한인부대와 연계해 대일전쟁을 수행했다면 대한민국의 역사는 지금과는 달라졌을 수도 있다. ■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 임정 군사작전 5일 앞두고 日 패망..물거품 된 '자주독립의 꿈'서울신문 류지영기자 2019. 2. ..

1919년 4월 11일 임정 수립 이후 21년만에 광복군 창군일제 패망 직전 서울 진공 작전 추진..항복으로 실행은 못 해미 군정에 정식 정부 인정 못 받고 광복군도 1946년 해체장제스에게 "한국 독립 주장 지지해 달라" 외교전 펼쳐라디오 방송 선전전, 교포·일본군 탈출 청년들 모아 군사훈련"피 흘리며 싸운 독립운동 역사, 가볍게 평가해선 안 돼" ■ '국군의 뿌리' 광복군 80주년 "조국과 더불어 영원할 것"CBS노컷뉴스 김형준·김광일 기자2020. 9. 17. 17:21 1940년 8월 17일 중국 충칭에서 열린 한국광복군 성립 전례식(사진=독립기념관 제공) 1940년 중국 충칭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군으로 만들어진 한국광복군이 17일 창군 80주년을 맞았다. 대한민국 국군은 광복군..

■ 나치박물관에서 만나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44명의 눈빛쾰른/글·사진 장예지 특파원 2025. 3. 10. 16:30 쾰른 나치기록박물관 7일 사진전 시작 독일 쾰른의 나치기록박물관에서 지난 7일부터 열리고 있는 기획 전시 ‘2차 세계대전 시기의 제3세계’에 전시된 인도네시아 ‘위안부’ 피해자들의 초상화. 인도계 네덜란드인인 얀 배닝 작가의 작품으로, 독일에서는 처음 전시됐다. 장예지 특파원 penj@hani.co.kr 김순옥, 박두리, 문필기, 길원옥, 강덕경, 이용수, 이옥선, 김순덕, 김군자, 심달연, 박옥련, 송신도, 김용숙(북한), 곽금례(북한), 이상옥(북한), 박용심(북한). 독일 쾰른의 나치기록박물관에서 지난 7일부터 열리고 있는 기획 전시 ‘2차 세계대전 시기의 제3세계’..

일제 실인원 200만명, 연인원으론 780만 강제동원 추산죽창 들고 강제동원에 저항도..탄광·공사장이 가장 열악정부 보상 2차례 실시, 액수 적고 못 받은 피해자도 많아2012년 첫 대법 판결 뒤 6년 동안 정부 뒷짐만 지고 방관정부 책임감 갖고 나서서 일본의 태도 변화 이끌어내야문희상 '1+1+α'는 한-일 갈등 막자는 미봉책..해법 안돼 ■ "강제동원 진상규명부터 제대로 해 '피해자성' 회복해야"한겨레 박병수 2019. 12. 10. 18:16 [박병수 논설위원의 직격인터뷰] 강제동원 전문가 정혜경 박사 지난해 10월 대법원 판결 이후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 배상 문제가 한-일 갈등의 핵심 현안으로 떠올랐다. 문제 해결을 위해 문희상 국회의장은 한·일 기업과 일반인의 자발적 기금으로 위로금을 ..

일제는 1938년부터 1943년까지 육군특별지원병제를 실시하여 1만 7,664명,해군특별지원병 2만 1,316명을 동원했으며,1938~1945년까지 육·해군 군속으로 각각 7만 7,652명과 7만 7,915명을 별도로 동원하였다.이와는 별도로 1934년부터 패전 직전까지 노무자·여성위안부·징용 등으로 총 731만 6,234명을 강제 동원했으며,이 중 612만 6,163명은 일본내 탄광, 광산촌 등과 동남아 각지와 남양군도 등지에 끌려갔다. 1944년 1월 19일~20일에 학병 적격자 7,200여 명 가운데 한국내 학생 959명(적격자 1,000명), 귀성중인 일본 유학생 1,431명(적격자1,529명), 일본에 남아있는 유학생 719명(적격자 1,524명), 취업중인 졸업생(적격자 약 700명) 등 총..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충칭에 머무는 5년 동안(40년 9월~45년 8월) 전열을 재정비, 한국혁명여성동맹을 창립하고, 다당 합작을 기초로 하는 내부 개편을 진행하였다. 일본군의 공습과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삼균주의(三均主義)'를 반영한 '임시헌장'을 개정하였고, '대한민국 건국 강령'을 반포했으며, 군대를 조직하여 다양한 항일 투쟁을 전개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 임정, 中 국민당 도움받아 충칭 정착..中 공산당, 조선의용대 탈영 부추겨 팔로군 편입서울신문 류지영기자 2019. 2. 14. 03:36 광복의 여명 : 충칭 시기 ① 좌우합작정부 구성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1938년 7~9월 중국 광둥성 광저우에서 청사로 사용한 동산구 휼고원로 12호 ‘동산백원’. 당초 우리 학..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충칭 인근의 치장에 도착한 직후인 1939년 8월 좌우익 진영의 7개 정당 및 단체가 단일당을 결성하자는 목표 아래 7당 통일 회의를 개최하였다. 그러나 통일의 방법과 정치적 이념의 차이를 좁히지 못한 채 결렬되고 말았다. 민족주의 세력은 1930년대 중반 이래 김구를 중심으로 한 한국국민당, 조소앙과 홍진이 주도하던 재건한국독립당, 이청천을 비롯하여 만주에서 이동하여 온 독립군 출신들이 주축이 된 조선혁명당으로 나뉘어 있었다. 이 3당은 정치적 이념이 크게 다르지 않았고, 임시정부를 옹호·유지하여야 한다는 입장도 같았다. 이 3당은 1940년 5월 8일 공동 명의로 3당 해체 선언을 하고 한국독립당을 창당하였다.” ■ 좌우가 함께 싸운 임시정부의 역사한겨레 2017. 6. 2..
■ 일제수뇌폭살한 한인애국단원 윤봉길[김삼웅의 인물열전 - 자주독립 의열사 열전 36] 자신의 몸을 던져 우리 나라의 독립운동을 이끈 선구자오마이뉴스 김삼웅기자 2024.12.22 17:38 ▲윤봉길 의사 처형장면 기록 사진 (CG 부분 수정). 일본 육군의 비밀보고서인 만밀대일기에 수록되어 있다. ⓒ 대전MBC관련사진보기 25세의 대한 청년이 1932년 4월 29일 상하이 홍커우공원(현 뤼순공원)에서 열린 이른바 천장절 겸 전승 축하 기념식장에 폭탄을 던져 시라카와 대장을 비롯 일제 고위 장성 등 여럿이 폭사하거나 부상 당했다.의거의 주인공은 바로 윤봉길의사이다. 이 의거는 독립운동가들은 물론 우리 국민에게 커다란 용기와 희망을 주고, 특히 중국 정부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을 지..

국내는 물론 만주·중국·러시아에서 각종 의열투쟁이 전개되어 혁혁한 전공을 세웠으나 적도 한복판에서 일왕에게 폭탄을 던진 것은 이봉창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1923년 박열이 일왕 부자를 폭살시키려는 거사를 일본에서 준비하다가 검거되어 미수에 그치고 말았다. ■ 일왕마차에 폭탄 던진 한인애국단원 이봉창오마이뉴스 김삼웅기자 2024. 12. 21. 18:48 [김삼웅의 인물열전 - 자주독립 의열사 열전 35] 비록 실패하기는 했으나 한민족으로서는 대단한 쾌거가 아닐 수 없었다 ▲ 독립운동가들은 그들이 져야 했던 역사의 무게 때문에 항상 갈등할 수밖에 없었던 존재이기도 했다. 대표적인 예가 이봉창 의사이다ⓒ 국가보훈처 한인애국단원 이봉창(李奉昌) 의사는 1932년 1월 8일 오전 11시 44분경, ..

■ [[김삼웅의 인물열전] 성재 이시영선생 평전] 한국국민당 창당에 앞장서김삼웅2020. 8. 10. 17:54 [34회] 이시영의 개인사는 임시정부의 역사와 중첩된다 이시영의 개인사는 임시정부의 역사와 중첩된다. 고통의 길이고 고난의 여정이었다. 대륙의 정세는 크게 변하고 있었다. 일제가 1931년 9월 만주를 침략한 데 이어 상하이를 점령하고, 이듬해 3월 만주괴뢰국을 수립하였다. 그리고 1933년 10월에는 국제연맹을 탈퇴했다. 같은 해 1월 히틀러가 독일의 수상이 되었다. 중국 대륙은 일본군의 전쟁놀이터로 변해갔다. 비록 철도와 해안을 중심으로 하는 거점도시가 차례로 장악되었지만, 침략의 최종 목표인 심장부를 향하고 있었다. 여기에 중국은 장개석의 국민당군과 모택동의 공산당군이 왜적 앞에서 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