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력사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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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조각 한쪽 한쪽 맞추자…‘신라의 미켈란젤로’ 걸작이 생생경주 사천왕사터 발굴 20일 경북 경주시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에서 최장미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 윤형원 국립부여박물관장, 윤근일 전 경기문화재연구원장(왼쪽부터)이 사천왕사 녹유신장벽전을 배경으로 발굴 당시를 회고하고 있다. 경주=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경주 낭산(狼山)은 예부터 신들이 노닌다는 신유림(神遊林)이 있던 상서로운 곳이다. 20일 문무왕 화장터로 알려진 능지탑을 거쳐 선덕왕릉에 다다르자, 낭산 아래로 울창한 소나무 숲이 펼쳐졌다. 숲길을 10분쯤 내려갔을까. 철길을 사이에 두고 건너편에 폐사지 한 곳이 보였다. 통일신라시대 으뜸가는 호국사찰이던 사천왕사(四天王寺) 터다.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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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는 나당전쟁에서 승리했는가? (1)임기환2021. 12. 9. 15:33 [고구려사 명장면-137] 한반도에서 한성고구려국을 중심으로 하는 고구려 부흥세력은 670~673년 4년 동안 당군과 치열한 전투를 치렀으나, 끝내는 평양 이남의 세력 기반을 모두 상실하고 임진강을 건너 신라로 투항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에는 임진강을 당군 남하의 최후 저지선으로 설정하고, 평양 이남 고구려 영역을 영유하려는 애초의 목표를 포기함으로써 당을 자극하지 않으려는 신라의 전략 변화가 배경이 되었다.이렇듯 고구려 부흥운동은 결국 신라와 당 사이 전쟁에서 종속적인 변수라는 한계를 벗어날 수 없었다. 게다가 나당전쟁의 결과가 결국 보덕국 고구려유민들의 존재 방식까지 규정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고구려 부흥운동을 좌절케 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