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력사를 찾아서

‘삼국유사’는 ‘구당서’를 인용하여 ‘백제는 부여의 별종인데…왕의 거처로 동, 서 두 성이 있다’고 했다. ‘북사(北史)’의 백제국에 대한 설명 가운데는 ‘백제의 왕은 동, 서 두 성에서 사는데 하나는 거발성(居拔城)이고 다른 하나는 고마성(古麻城)이다’라고 되어 있다. 청나라 때 편찬된 ‘흠정만주원류고’에서는 이런 고기록을 근거로 ‘백제의 국도는 요서에 있었다(國都在遼西)’고 잘라 말했다. 그런데 한국사학계는 그동안 이 ‘치’를 도성이 아닌 통치로 해석하는 오류를 범했다. 백제의 수도가 있었다는 요서 진평군은 과연 중국의 어느 지역일까. 마단림(馬端臨)이 지은 ‘통고(通考)’에는 그 지역을 ‘당나라 때 유성과 북평의 중간지점’이라 했는데 ‘흠정만주원류고’에서는 다시 마단림의 견해를 기초로 이곳을 청나..

동성대왕 이후 백제의 부흥 신위례성이 파괴되어 외환이 심하던 상황에서, 백제는 잦은 내란마저 겪어야 했다.그러자 문주왕은 곰나루(웅진)로 천도했다. 문주왕이 재위 4년(《삼국사기》 〈연표〉에서는 3년)에 반역자 해구에게 죽임을 당하자, 장자인 왕근왕(〈백제 본기〉에서는 삼근(三斤)이라고 했지만, 임걸(壬乞)이라고도 한 걸 보면 삼근의 三은 王의 오자일 것이다)이 13세의 어린아이로 즉위했다.왕근왕은 이듬해에 좌평 진남과 덕솔 진로 등과 모의하여 해구를 죽였다. 왕근왕은 이 정도로 영명했지만, 왕이 된 지 3년째 되는 해에 15세의 어린 나이로 죽었다.그해 즉 서기 479년에 동성대왕이 즉위했다. 대왕의 이름은 마모대(摩牟大)다. 기존 역사서에서 마모(摩牟)라고 쓴 것은 끝의 한 글자를 뺀 것이고, 모대(..

필자는 지금까지 백제의 건국시조와 왕실의 혈통, 건국 연대와 건국지, 건국 뒤의 발전과정 등을 살펴보았다. 그 결과 얻어진 바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백제의 건국시조는 비류왕이었으며 그의 혈통은 부여계였다. 비류와 온조의 아버지는 북부여 왕 해부루의 후손인 우태였고 어머니는 졸본부여의 여인 소서노였다. 그러했기 때문에 백제 왕실은 성을 부여씨라 했던 것이다. 그러한 비류와 온조가 고구려 건국시조인 추모왕의 아들로 전해온 것은 추모왕이 비류와 온조의 계부였기 때문이었다. 백제는 처음 비류가 건국하였지만, 그는 건국 뒤 5개월 만에 후사를 두지 못하고 사망하여 그의 동생 온조가 왕위를 잇고 그 후손들이 대대로 게승하게 되었다. 그 결과 백제의 건국시조가 온조였던 것으로 전해지게 되었다. 《삼국사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