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력사를 찾아서
■ 후삼국 통일전쟁 뛰어든 후백제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재발견](37) 후백제의 발전과 해양활동 능력후백제 상선이 표류했던 대마도 북쪽 해안. 사진=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우즈베키스탄 국립 사마르칸트대 교수 남북이 분단되고 전쟁을 벌였다. 아직도 적대적인 관계를 청산하지 못했다. 통일은 실제로 필요한 것일까. 우리는 역사적으로 통일을 지향해 왔을까? 고대를 돌아보면 신라가 주도한 소위 ‘삼국통일’은 몇 가지 한계가 있다. 외세를 지나치게 끌어들였고, 발해의 부활로 남북으로 재분단된 불완전한 통일이었다. 또한 그 폐해가 역사적으로 계승돼 지역갈등이라는 또 다른 분열을 재생산하는 구실을 줬다. 신라의 분열과 해양세력들의 등장 신라는 9세기에 들어서면서 중앙정부의 행정력이 떨어지고, 지방을 통제하는..
■ 무신정권 1170년(의종 24년) 6월 보현원의 무신정변을 시작으로, 1270년(원종 11년) 5월 임유무의 숙청을 끝으로 한다. 딱 100년.[7] 당연히 무신정권의 영향력이 완전히 사라진지 한참 이후에야, 고려 말기의 각종 인재와 영웅들이 마구 출현한다. 즉 고려는 여전히 잠재력이 남아있는 국가였으나, 무신정권이 새로운 고인 물이 되어서 100년 동안 열심히 고려의 인재 출현을 막았던 셈이다. 본인들이 문신들의 차별 때문에 국가를 점령했다는 프로파간다를 생각해 본다면, 오히려 기존의 문신들보다 더욱 원칙 없고 지독하게 친목질을 통하여 권력을 독점하는 앞뒤 논리도 안 맞는 옹졸한 방식이었다.무신정권은 기존의 쿠데타 정권과는 다르다. 일개 무인이 권력을 잠시 잡는 일시적인 사례로 끝나지 않고 무신들..
후삼국 시대의 도래와 동아시아의 대분열 통일 신라는 9세기 후반에 이르러 권력쟁탈전과 경제 실패, 지방 호족들의 반란 등으로 이미 붕괴 중이었다. 마침내 900년에 경상도 산골 출신인 견훤이 후백제를 선포했고, 901년에는 신라의 왕족이며 미륵불이라고 자처한 궁예가 후고구려를 세웠다. 이렇게 후삼국 시대가 도래했고, 통일전쟁이 전 국토를 황폐하게 했다. 전쟁은 신라의 삼국통일 이전 국가 구조와 지역 갈등을 확대 재생산했다는 퇴행적인 측면이 있었다. 그러나 왕족과 수도 중심의 질서를 벗어나 호족과 지방의 성장, 신불교의 등장이라는 혁신적이고 발전적인 측면도 있다. 국제 환경은 왕건에게 좋은 방향으로 작용했다. 후삼국이라는 분열 시대에 중국 지역과 북방 지역에 강력한 통일국가가 있었다면 대규모 침공이나 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