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력사를 찾아서
1979년 향토연구모임인 '예성동호회'가 발견한 '충주고구려비'와 1997년에 발국한 고구려 아차산 보루를 알아봅니다. 1979년 2월 24일 향토연구모임인 예성동호회원들은 충북 중원군(현 충주시) 가금면 용전리 입석마을에 우뚝 서있던 비석에서 예사롭지 않은 명문을 읽어냅니다. 40여 일 뒤 ‘충주 고구려비’로 명명된 ‘국보 중 국보’ 명문비석을 발견한 겁니다. 이것이 바로 한반도에서 처음 발견된 고구려비석의 역사적인 발견 순간이었습니다. 조사단을 이끈 정영호 단국대박물관장은 “이 비는 장수왕의 남진정책을 기념하기 위해 고구려의 국원성이었던 충주에 세운 고구려의 비석”이라고 발표했습니다. 그런데 ‘광개토대왕 재위 시절까지’ 소급해볼 수도 있겠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충주고구려비는 한반도에서..
왕호시대는 서기 514년 법흥왕 때부터였다. 신라가 이렇게 늦게 중국식의 왕호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고구려나 백제보다 한민족의 고유문화를 지키려고 노력했던 사회였음을 알게 해주는 것이다. 법흥왕은 군사행정을 정돈하여 병부를 설치하였고 율령을 반포하여 문무백관들의 공식 복장에 차등과 서열을 두는 제도를 제정하였다.대외관계에도 노력을 기울여 중국 남조에 사신을 보냈고 가야와는 혼인동맹을 맺었다.그리고 불교를 공인하였고 제방들을 수리하여 농업생산 증대에 만전을 기하도록 하였다.재상에 해당하는 상대등 제도를 실시하였고 건원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여 동아시아의 다른 왕조들과 대등한 국가임을 천명하였다. 신라에서 불교가 공인되기까지는 100여 년이라는 긴 세월이 걸렸고 신하들은 왕명을 거역하면서까지 불..
마립간시대는 서기 356년부터 서기 513년까지로서, 내물마립간이 즉위하면서 통치자의 이름이 이사금에서 마립간으로 바뀌었는데, 마립간은 이사금보다 훨씬 더 권위를 갖는 이름이었다. 내물마립간 이전에는 박씨 · 석씨 · 김씨 세 성이 왕위를 맡았으나 내물마립간 때부터는 김씨가 왕위를 세습하였는데, 이것도 왕권이 강화되었음을 알게 해주는 것이다. 내물마립간은 안으로는 덕치를 베풀면서 밖으로는 백제 · 고구려 · 전진 등과 우호적인 외교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너무 크게 팽창한 고구려의 압력을 감당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고구려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실성과 복호를 볼모로 보내는 등 고구려에 신속된 상태가 되었다. 그런데 서기 427년에 고구려가 지금의 평양으로 도읍을 옮기고 본격적으로 남진정책을 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