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력사를 찾아서

이익은, 단군조선은 요와 같은 시기에 나라를 세웠으나 독자적인 문화가 아니라 순(舜)의 통치권 내에 들어가 중국 문화 영향을 받은 지 오래되었다(“然則檀君亦必在虞廷風化之內 而東邦之變夷爲夏久矣”, 『성호사설』)고 보았다. 이익이 하(夏)문화 영향을 받은 것이 분명하다고 본 편발개수(編髮蓋首)는 이암의 『단군세기』와 『정조실록』과, 홍만종의 『동국역대총목』, 이종휘의 『東史』에도 실려 있다. 다른 사서에서는 모두 단군이 제정한 제도(『단군세기』에는 2세 단군 부루)라고 인식하고 있는데도, 오로지 이익만은 하(夏)의 예(禮)가 분명하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1000여 년 동안 원시적이고 개척되지 못했던 문화는 기자 시대가 되어서야 암흑이 걷혔다는 인식(“檀君之世鴻濛未判 歴千有餘年 至箕子東封天荒始破”, 『성호사..

한치윤은 조선후기 『해동역사』 등을 저술한 학자이다. 1765년(영조 41)에 태어나 1814년(순조 14)에 사망했다. 1789년 진사시에 입격하였으나 남인으로 출세하기 어려웠기에 문과에 응시하지 않았다. 1799년 서장관으로 파견된 한치응을 수행하여 북경에 다녀왔다. 말년에 한국사 서술에 몰두하여 70여 권에 이르는 『해동역사』를 편찬하였다. 당색을 초월하여 김정희, 홍명주, 심영석 등과 교유하였다.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에 새로운 학문 분야를 개척하여 색다른 성과를 거두었다는 점에서 문화사적으로 중요하게 평가되고 있다.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대연(大淵), 호는 옥유당(玉蕤堂). 서울 출신. 할아버지는 헌납(獻納) 한덕량(韓德良)이고, 아버지는 통덕랑 한원도(韓元道)이며, 어..

유득공(1748년(영조 24)~1807년(순조 7))은 1774년(영조 50) 사마시에 합격해 생원이 되고, 시문에 뛰어난 재질이 인정되어 1779년(정조 3) 규장각검서(奎章閣檢書)로 들어가 활약이 컸다. 그 뒤 제천·포천·양근 등의 군수를 거쳐 말년에는 풍천부사를 지냈다. “고려시대의 역사가들이 통일신라를 남조로, 발해를 북조로 하는 국사 체계를 세우지 않았던 것이 영원히 옛 땅을 되찾는 명분을 잃게 하였다.”고 주장해 민족주체의식의 일면을 보여주고 있다. 본관은 문화(文化). 자는 혜보(惠甫)·혜풍(惠風), 호는 영재(泠齋)·영암(泠庵)·고운당(古芸堂). 아버지는 사인(士人) 유춘(柳瑃)이다. 저서로는 『경도잡지(京都雜志)』·『영재집(泠齋集)』·『고운당필기(古芸堂筆記)』·『앙엽기(盎葉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