력사를 찾아서
대한민국 (8) 1987년 6월 항쟁 본문
제6공화국 : 노태우정부(1988년 2월 25일 ~ 1993년 2월 24일)
한국현대사를 딱 한군데만 나눈다면 그것은 당연히 1987년일 것입니다.
그 이전, 즉 1948년 정부수립 이후 이때까지는 (1960년 4‧19혁명 이후 짧은 민주화 시기가 있었다고 하지만) '독재시대'였고, 그 이후는 '민주화 시대'입니다.
이 같은 결정적인 분기점을 만든 것은 1987년 6월에 벌어진 6월 항쟁이고, 그 기폭제가 된 것이 바로 이 박종철 고문치사와 은폐 사건입니다.
"책상을 탁 하고 치니 억하고 죽었다."
대통령을 체육관이 아니라 국민들이 직접 뽑는 직선제 개헌을 해야 한다는 국민적 요구가 거세게 분출되던 1987년 1월 16일, 치안본부장은 경찰에서 조사를 받던 서울 대학생 박종철의 죽음에 대해 이같이 설명했다. 한국 경찰사에 두고두고 남을 기이하고 망신스러운 사망경위 설명이다.
한국현대사를 딱 한군데만 나눈다면 그것은 당연히 1987년일 것이다. 그 이전, 즉 1948년 정부수립 이후 이때까지는 (1960년 4‧19혁명 이후 짧은 민주화 시기가 있었다고 하지만) '독재시대'였고, 그 이후는 '민주화 시대'다. 이 같은 결정적인 분기점을 만든 것은 1987년 6월에 벌어진 6월 항쟁이고, 그 기폭제가 된 것이 바로 이 박종철 고문치사와 은폐 사건이다.
숙대입구역에서 삼각지 방향으로 조금 내려가다 보면 숙명여대로 들어가는 지하도로를 지나자마자 오른쪽 골목 안에 회색 건물이 나타난다. 지금은 민주인권기념관이란 팻말이 붙어있지만, 악명 높았던 치안본부 대공분실이다. 고 김근태 의원이 악명 높은 고문기술자 이근안에게 전기고문을 당하면서 너무나 심한 고통에 '살아 있음을 원망'했던 곳이 바로 이곳이다. 이곳에 올라가면 박종철군이 물고문을 받다가 질식사한 욕조 등 509호 조사실을 보존해 놓았다.
당시 전두환 정권은 야당인 신한민주당(신민당)과 재야의 직선제개헌 요구를 무력화시키기 위해 공안탄압을 준비하고 있었다. 1986년 10월 터져 나온 건대 항쟁을 북한의 금강산댐 수공이라는 여론조작을 통해 잘 진압한 전두환 정권(이에 대해서는 '손호철의 발자국' 27. 화천 : 평화의 댐, <프레시안> 2021년 5월 7일자 참조)은 여론조작을 위한 공안사건 조작을 위해 박종철을 체포해 수배중인 박종운의 소재를 대라고 추궁하다가 그를 죽인 것이다(역설적으로 박종철의 목숨을 걸고 보호했던 박종운은 이후 한나라당 국회의원으로 세 번 출마해 다 떨어지고 박근혜를 지지했다). 박종철의 죽음이 알려지자 경찰은 '턱, 억'이라는 코미디 같은 설명으로 사건을 은폐하려다가 여론의 역풍을 받고 6월 항쟁의 기폭제가 됐다.
또 다른 기폭제는 연세대생 이한열 열사 사망사건이다. 신민당과 재야민주화운동 세력은 6월 10일 박종철 고문살인 은폐조작 규탄 및 민주헌법쟁취 국민대회를 열기로 했다. 연세대 학생들은 그 전날 출정식을 열었고 학교 밖으로 나가 시위를 벌였다.
이한열은 시위에 참여했다가 경찰에 쫓겨 교내로 도망가는 과정에서 경찰이 규정을 어기고 직격탄으로 쏜 최루탄을 맞았다. 일면식도 없던 다른 학생이 그를 안고 학내로 들어왔고 그를 가까운 세브란스병원으로 옮겼지만 그는 숨을 거두었다. 연세대 교정에 설치되어 있는 이 유명한 장면을 보고 있자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졌다.
두 사건이 기폭제가 됐지만, 6월 항쟁은 우리의 오랜 민주화운동이 축적된 결과이다. 박정희는 4‧19혁명으로 이룬 민주정권을 쿠데타로 전복하고 권력을 장악했다. 민주화운동은 침묵하지 않았다.
민주화운동은 이명박도 학생운동 지도자로 참가했던 한일회담 반대 투쟁을 시작으로 1969년 3선 개헌 반대투쟁, 1971년 군사교육 반대투쟁, 1974년 유신반대 민청학련 사건을 거쳐 1979년 YH 여자노동자 투쟁과 부마항쟁을 통해 박정희 정권을 무너트렸다.
그러나 서울의 봄은 양김의 분열과 낙관론에 기초한 '시위 자제론', 서울역 회군이라는 학생운동 지도자들의 전략적 판단의 오류 등으로 5‧18의 비극을 통해 전두환의 집권이라는 민주화운동의 패배를 가져왔다(이에 대해서는 '손호철의 발자국' 20. 광주 5‧18, <한국일보> 2020년 12월 21일자 참조).
우리의 민주화운동은 광주의 피를 먹고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한국전쟁과 함께 사라졌던 진보운동이 복원됐고, 반미운동이 나타났다. 특히 국민적 요구의 핵심은 유신과 함께 생겨난 체육관 선거의 철폐와 대통령 직선제의 복원이었다. 특히 1980년 전두환이 정치권에서 몰아냈던 김영삼·김대중 세력이 신민당을 만들어 1985년 2.12 총선에서 좋은 성과를 거두면서 직선제개헌투쟁은 급물살을 탔다. 민주화운동 세력은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를 만들어 투쟁에 들어갔고 신민당은 1000만 개헌서명에 들어갔다.
전두환은 1987년 유신 헌법을 이어받은 5공 헌법을 사수하겠다는 4.13 호헌 성명으로 대응했다. 주목할 것은 전경련 등 경제단체들 그리고 한국노총의 반응이다. 경제단체들만이 아니라 노동자를 대표하는 조직인 한국노총까지도 이에 대한 지지성명을 발표한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중산층 등 일반시민들의 반응이었다. 80년 봄의 경우 박정희의 죽음으로 정국이 불안해지며 수출이 줄고 외채 도입이 끊기고 경제가 어려워지자 중산층 등 일반시민은 시위에 참여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상당수는 강한 지도자가 나와 시위를 진압해기를 바랬다.
87년에는 달랐다. 그동안 시민들의 의식이 성장했고 경제도 호황이라 경제위기를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학생들만이 아니라 시민들도 거리로 달려 나왔다. 특히 시위 현장인 명동과 시청이 가까운 사무직 노동자들, 즉 넥타이부대가 점심시간 등에 거리로 뛰어나왔다.
6월 10일 집권 민정당은 전당대회를 열고 노태우를 대통령후보로 선출했다. 그 시간에 경찰은 '박종철 고문살인 은폐조작 규탄 및 민주헌법쟁취 국민대회'를 열기로 한 명동성당을 봉쇄했다. 당황하는 국민운동본부에게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이 사제관을 장소로 제공해줬다. 덕수궁 옆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에 가면 한옥이 나타난다. 사제관으로 그 앞에 있는 '6월항쟁 진원지'라는 표시석이 이 같은 역사를 중언하고 있다.
6월 항쟁은 이렇게 막을 올렸고 시위대는 신세계 앞 로터리를 점령했다. 하지만 경찰에 밀려 명동으로 이동해 명동성당으로 들어갔다. 공권력이 마음대로 진입할 수 없었던 명동성당은 600여 명의 시위대의 피신처, 안식처였다. 1주일간 계속된 명동성당 투쟁이 시작됐다. 명동성당 투쟁이 계속되며 명동 일대에서 대학생들의 시위가 벌어졌고 근처의 사무직 노동자들이 시위에 가담하기 시작했다.
6월 18일 평화대행진에 전국적으로 1백 만 명이 참여했고 시위가 학생 항쟁에서 본격적인 '시민항쟁'으로 발전했다. 저항은 과격해져 파출소와 경찰서 그리고 민정당사가 불탔다. 6월 항쟁에 화이트칼라가 대거 참여했다는 '화이트칼라 신화'가 있지만 이는 과장된 것이다.
사무직과 달리 공장을 떠나기 힘든 육체노동자들도 시위의 중심지인 명동 등에 참여할 수 없었지만 공단지역을 중심으로, 그리고 퇴근 후 시위에 참여했다. 이 같은 시위에 모두 500만 명이 참여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처럼 시위가 시민항쟁으로 발전하자, 전두환은 6월 29일 직선제 개헌 수용과 김대중 사면·복권을 골자로 한 6.29선언을 발표했다.
6월 항쟁이 성공한 또 다른 원인은 미국이다. 80년 봄 군 작전권을 쥐고 있던 미국은 신군부의 왜곡에 넘어가 5‧18을 '공산주의 폭도'로 간주하고 진압을 승인했다. 이는 반미의 불모지였던 이 땅에 미문화원 방화 등 걷잡을 수 없는 반미운동을 가져왔다. 또 다시 군을 지지했다가는 반미운동이 더욱 강해질 것이라고 우려한 미국은 전두환 정권의 강경대응을 자제시켰다.
당시 한국에 근무했던 한 한국계 CIA요원은 전두환이 6월 29일부로 계엄령을 선포하기로 하고 군의 동원령을 내렸으나 미군이 탱크로 한국군부대 정문을 봉쇄해 출동을 저지했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릴리 주한미국대사 역시 회고록에서 전두환의 계엄령 지시 후 레이건의 친서를 들고 전두환을 면담했고 그 후 전두환이 계엄령을 철회했다고 회고했다. 6.29 선언 역시 미대사관이 한 검사에게 정국수습을 위해 필요한 조치를 적어 달라고 해서 전두환과 노태우를 설득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6월 항쟁은 그리던 직선제 개헌과 민주화를 가져왔지만 행복한 결과만 가져온 것은 아니다. 그것은 김대중·김영삼 양김의 분열로 대통령선거에서 노태우가 승리함으로써 민주적 정권교체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김영삼의 텃밭이었던 부산 중심가인 광복동 가톨릭센터 앞에는 6월 항쟁 당시 농성 투쟁을 기념하는 기념조각이 세워져 있다. 이를 보고 있자, 김대중의 텃밭인 광주 금남로 공원에 있는 6월항쟁기념물이 떠오르며 양김의 분열이 가져온 심각한 부작용들이 생각났다.
첫째, 민주화를 최소 5년, 길게는 10년 지연시켰다. 둘째, 양김의 분열은 둘만의 분열로 그친 것이 아니라 민주화운동 진영 전체가 분열해 서로 적대하게 됐다. 셋째, 1987년 이후 역사는 양김이 서로 협조해 군사독재의 후예들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양김이 군사독재 세력과 손을 잡고 다른 한 김을 죽이는 방향으로 흘러가면서 김종필 같은 군사독재 세력이 캐스팅 보드를 쥐게 만들었다. 김영삼의 3당 통합, 이어진 김대중의 DJP연합이 그것이다. 넷째, 국민적 허무주의다. 피를 흘려 얻어낸 직선제개헌의 성과를 양김이 '대통령병' 때문에 노태우에게 상납하는 것을 보면서 국민들은 허무주의에 빠졌다.
마지막으로, 지역주의가 전면화됐다. 물론 지역주의는 박정희와 전두환 군사독재가 조장한 것이지만, 주목할 것은 전두환 시대인 1985년 총선에서 대구에서 야당 득표율이 민정당 득표율을 능가했으며('손호철의 발자국', 28. 대구의 보수화, <한국일보>2021년 2월 15일자 참조), 6월 항쟁 당시는 지역주의가 없었고 대구를 포함하여 전국에서 일제히 직선제 개헌을 외쳤다는 것이다.
이미 소개한 광주 중심가 금남로공원과 부산 광복동 가톨릭센터 앞뿐만이 아니라, 목포 평화광장, 울산 성남동 뉴코아 앞, 경남 마산 중심가와 진주 경상대, 대전 중앙로역 앞과 천안 신부공원, 청주 성안길, 강원도 원주 보건소 앞, 인천 부평역 앞, 경기도 성남 숯골문화광장, 제주도 서귀포 중앙로, 가장 중요하게 전두환, 노태우의 고향인 대구의 중심가인 동성로 대구백화점 앞 광장에 설치된 6월 항쟁 기념물은 지역주의를 넘어 전국적으로 일어났던 시민들의 함성을 증언하고 있다.
만일 양김이 손을 잡았다면 87년 대선은 지역 간 대결이 아니라 반민주(노태우)대 민주(김대중과 김영삼)의 대결로 치러졌을 것이다. 그러나 양김이 분열하며 노태우의 대구경북 대 호남(김대중), 대구경북 대 부산경남(김영삼)만이 아니라 민주화운동의 두 기반인 호남 대 부산경남의 대결로 지역주의가 전면화하고 말았다. 양김의 분열에 의한 '반쪽짜리 승리'의 슬픈 역사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을 가슴에 안고 나는 부산 가톨릭센터를 떠났다.(1)
<자료출처>
(1)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1080822053778945
<참고자료>
[시론] 6월항쟁과 역사의 시행착오 / 안병욱 (hani.co.kr) 한겨레 2008.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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