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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세계기록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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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도 소장 참고사항
훈민정음(해례본) | 1997 | 대한민국 간송미술관 | |
조선왕조실록 [朝鮮王朝實錄] | 1997 | 정족산본, 오대산본·상편 : 서울대학교 규장각 ,태백산본 : 국가기록원 |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2001 | 서울대학교 규장각 | |
『불조직지심체요절』 하권-佛祖直指心體要節 (下卷) | 2001 | 프랑스 국립도서관(Bibliothèque nationale de France) | |
조선왕조 『의궤(儀軌)』 | 2007 | 규장각(奎章閣), 장서각 | |
고려대장경판 및 제경판(高麗大藏經板-諸經板) | 2007 | 해인사(海印寺) | |
동의보감(東醫寶鑑) | 2009 | 국립중앙도서관장 등 4곳 | |
일성록(日省錄) | 2011 | 서울대학교 규장각 | |
5·18 광주 민주화운동 기록물 | 2011 | 국가기록원, 광주광역시, 육군본부, 5·18기념재단, 국회도서관, 미국 국무성, 국방부국가기관이 생산한 5·18민주화운동 자료:국가기록원, 광주광역시 소장군사법기관재판자료, 김대중내란음모사건자료:육군본부 소장 시민들이 생산한 성명서, 선언문, 취재수첩, 일기:광주광역시 소장 흑백필름, 사진:광주광역시, 5·18기념재단 소장 시민들의 기록과 증언:5·18기념재단 소장 피해자들의 병원치료기록:광주광역시 소장 국회의 5·18광주민주화운동 진상규명회의록:국회도서관 소장 국가의 피해자 보상자료:광주광역시 소장 미국의 5·18 관련 비밀해제 문서:미국 국무성, 국방부 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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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중일기(亂中日記)』: 이순신 장군의 진중일기(陣中日記) | 2013 | 현충사(顯忠祠) | |
새마을운동 기록물 | 2013 | 국가기록원(國家記錄院), 새마을운동중앙회 | |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 2015 | KBS | |
한국의 유교책판(儒敎冊版) | 2015 | 한국국학진흥원(韓國國學振興院) | |
조선통신사에 관한 기록 – 17세기~19세기 한일 간 평화구축과 문화교류의 역사 | 2017 |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국립중앙도서관, 국사편찬위원회 외 25곳 | |
조선왕실 어보와 어책 | 2017 | 국립고궁박물관 | |
국채보상운동 기록물 | 2017 | 한국금융사박물관, 국사편찬위원회, 국가기록원, 독립기념관, 국립고궁박물관,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한국연구원,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고려대도서관, 연세대 학술정보원 등 | |
4·19혁명기록물 | 2023 | ||
동학농민혁명기록물 | 2023 |
훈민정음
국보 제70호, 조선시대 1446년(세종 28년) 간행, 목판본 1책, 책의 크기 29.3㎝ * 20.1㎝, 반곽 22.6㎝ * 16.1㎝(본문 4장 앞면 기준), 간송미술관(澗松美術館) 소장
이 책의 서명은『훈민정음』이라고 부르는 것보다는『훈민정음(해례본)』이라고 부르는 것이 좋다. 1443년(세종 25년) 겨울에 세종이 창제한 문자 '훈민정음'과 구별할 수 있기 때문이다.
『훈민정음(해례본)』은 1446년 음력 9월에 간행된 1책의 목판본으로, 새로 만든 문자 '훈민정음'의 창제 목적과 이 문자의 음가 및 운용법, 그리고 이들에 대한 해설과 용례를 붙인 책이다. 세종이 직접 작성한 ‘예의(例義)’ 부분과 정인지(鄭麟趾)를 비롯하여 신숙주(申叔舟)·성삼문(成三問)·최항(崔恒)·박팽년(朴彭年)·강희안(姜希顔)·이개(李塏)·이선로(李善老) 등 집현전 8명의 학자들이 만든 ‘해례(解例)’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동안 이 책의 서명을 문자 이름인 훈민정음과 똑같이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고 부르거나, 또 해례가 붙어 있고 『훈민정음(언해본)』과 구분하기 위해서 ‘훈민정음 해례본’ 또는 ‘훈민정음 원본’ 등으로 명명해 온 것이다.
국보 제70호로 지정되어 있는 『훈민정음(해례본)』은 국보 제71호로 지정되어 있는 『동국정운』권1, 6과 함께 경상북도 안동시 와룡면 주촌의 이한걸(李漢杰) 씨 댁에 전래되던 것이다. 1940년에 발견될 당시 원 표지와 첫 두 장이 떨어져 나가고 없었는데 그 후 보충하여 끼워 넣는 과정에서 실수가 있었다. 세종 서문의 마지막 글자 ‘이(耳)’가 ‘의(矣)’로 잘못 씌어지고, 구두점과 권성이 잘못되었거나 빠진 것도 있다. 이 책에는 구점(句點; 右圈點)과, 두점(讀點; 中圈點) 및 파음자(破音字)의 성조를 표시하는 권성(圈聲)도 정확하게 표시한 책이다. 구두점과 권성을 다 표시한 것은 『성리대전(性理大全』(1415년)의 체재와도 일치한다. 최근에 이 책 외에 또, 다른 『훈민정음(해례본)』 한 책이 경북 상주에서 발견된 바 있다.
『훈민정음(해례본)』은 목판본으로 1책이다. 전체 장수는 33장이다. 그 가운데 예의 부분이 4장이고, 해례 부분은 29장으로 되어 있다. 실제로 이 책을 자세하게 살펴보면 예의 부분과 해례 부분의 장차 표시가 각각 제1장부터 4장까지 그리고 해례는 다시 제1장부터 29장까지 장차를 따로 매기고, 판심제(版心題)도 달리 새겨 놓은 것을 알 수 있다. 예의 부분의 판심제는 ‘正音’이고, 해례 부분의 판심제는 ‘正音解例’이다. 예의가 4장 앞면에서 끝나고 4장의 뒷면이 공백으로 되어 있는 이유와, 해례가 시작할 때 제1장 앞면 맨 앞에 ‘훈민정음해례(訓民正音解例)’라는 내제명(內題名)을 다시 갖추고 있는 이유가 분명히 드러나게 된다. 이 책은 체재상 예의 부분과 해례가 독립되어 있기 때문이다. 본문의 글자도 크기를 달리 하여, 임금이 작성한 부분은 큰 글자로, 신하들이 작성한 부분은 작은 글자로 판을 새겼다. 예의는 1면이 7행에 매 행(每行) 11자로 되어 있고, 해례 부분은 1면 8행에 매 행 13자이다. 정인지의 서문은 다시 한 글자를 낮추어 적고 있다. 이러한 『훈민정음(해례본)』의 체재는 본문과 해설을 짝지어 놓은 체재라고도 할 수 있다. 세종이 쓴 예의를 큰 글씨의 본문으로 하고, 신하들이 쓴 해례 부분을 작은 글씨로 하여 그에 대한 해설로 짝지어 놓은 체재로 되어 있는 것이다. 책의 체재나 내용상으로 볼 때, 정인지의 서문은 해례에 대한 서문인 것으로 파악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정인지의 서문은 해례의 용자례(用字例) 다음에 한 행의 공백도 없이 계속될 뿐 아니라, 장차도 이어서 매겨져 있고 판심제도 동일하게 ‘정음해례(正音解例)’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목판본의 밑바탕이 되는 판하본(板下本) 원고의 글씨를 쓴 사람은 세종의 셋째아들인 당대의 명필 안평대군(安平大君) 용(瑢)이다. 따라서 이 책은 서예학의 측면에서도 아주 중요하고 의미가 있는 것이다.
- ◎ 예의(例義)
- 세종의 훈민정음 서문
- 새 문자 훈민정음의 음가 및 그 운용법 등
- ◎ 해례(解例)
- 제자해(制字解), 초성해(初聲解), 중성해(中聲解), 종성해(終聲解), 합자해(合字解)
- 용자례(用字例)
- 정인지 서문
예의(例義)는 세종의 훈민정음 서문과, 새로 만든 문자 훈민정음의 음가 및 그 운용법에 대한 간략한 설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예의’라는 말은 정인지의 해례 서문에 나온다. “계해년(세종 25년, 1443년) 겨울에 우리 전하께서 정음 28자를 창제하시어 간략히 예와 뜻(例義)을 들어 보이시고서 이름 하시기를, ‘훈민정음’이라고 하셨다.(癸亥冬. 我殿下創制正音二十八字, 略揭例義以示之, 名曰訓民正音.)” 하는 데에 들어 있다. 세종의 서문에서는 새 문자 훈민정음을 만든 목적과 취지를 밝혔다. 이 서문은 54자로 되어 있다. 그 뒤를 이어, 초성자와 중성자의 음가를 밝혔다. 초성자는 아(牙)·설(舌)·순(脣)·치(齒)·후(喉) 음의 순서로, 그 각각은 원칙적으로 전청(全淸)· 차청(次淸)· 불청불탁(不淸不濁) 자의 순서로 17자를 배열하되, 병서(竝書)를 할 수 있는 글자 뒤에 전탁자 6자(ㄲ ㄸ ㅃ ㅉ ㅆ )의 내용을 추가하여 배열해 놓았다.
해례는 제자해, 초성해(初聲解), 중성해(中聲解), 종성해(終聲解), 합자해(合字解)의 5해(解)와 용자례(用字例)의 1례(例) 및 정인지의 해례 서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문자 훈민정음을 만든 원리에 대해 해설하고 설명하는 부분이 제자해(制字解)이다. 그 다음으로 초성해와 중성해, 종성해의 순서로 해설하고, 초성·중성·종성의 세 글자를 합쳐 쓰는 방법을 해설한 합자해의 순서로 5해를 구성하고서, 마지막으로 합자법에 의해 올바르게 구성된 단어에 대한 실례를 용자례에서 실제 단어 123개의 용례를 들어 보인 것이다. 자못 논리적인 순서로 배열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각 해가 끝난 뒤에는 ‘訣曰’(“비결에 이르기를”)이라 하고서 운문(韻文)으로 그 해의 내용을 압축하여 설명하고 있다. 훈민정음의 제자 원리는 "성음(聲音)을 바탕으로 하여 그 이치를 다하였다(但因其聲音而極其理而已)고 하면서 정음(正音) 28자는 상형을 기본으로 하여 만들었다고 천명하고 있다. 즉, 초성의 기본자 ㄱ(아음), ㄴ(설음), ㅁ(순음), ㅅ(치음), ㅇ(후음) 등은 발음기관을 상형하여 만들었다고 설명하고, 그 외의 글자들은 소리의 세기[稍?]에 따라 획을 가하여 만들었다. 다만, ㄹ와 ㅿ는 각각 혀와 이의 꼴을 본떴으되 몸이 달라 가획의 의미가 없다고 하였다. 중성의 세 기본자 ㆍㅡㅣ는 천·지·인을 상형하여 만들었다고 한다. 합자해에서는 초성·중성·종성의 세 소리가 합쳐 글자를 이루는[成字] 방법을 설명하고 있다. 정인지의 해례 서문은 전통적인 언어관인 풍토설(風土說)에 입각하여 풍토에 따라 말과 소리가 다름을 지적하고, 우리나라에서 한자를 빌려 썼으나 우리 문자가 아니므로 우리말에 맞지 않으며 신라 설총이 비로소 만들었다는 이두도 한자를 빌려 쓴 것이라서 한자 못지않게 불편하여 훈민정음을 새로 만들게 되었다는 경위를 설명하고 있다. 또한 훈민정음 28자가 아주 교묘하여 어리석은 사람도 열흘 안에는 깨우칠 수 있는 문자라고 하면서, 이 새로운 문자를 가지고 첫째, 한문을 풀이하여 뜻을 쉽게 알 수 있고, 둘째, 송사(訟事)를 들어 그 사정을 알 수 있으며, 셋째, 자운(字韻)의 경우 청탁을 잘 구분할 수 있고, 넷째, 악가(樂歌)의 경우 율려(律呂)를 극히 조화롭게 할 수 있는 등의 우수성이 있다고 하면서, 모든 소리를 다 적을 수 있다
조선을 건국한 이후 세종 때에 와서는 국가의 기틀이 확고하게 안정되면서 여러 분야에 걸쳐 우리 것을 존중하고 문명과 문화를 발전시키려는 기운이 충만하였다. 이러한 기운이 우리말을 표현할 수 있는 새로운 문자를 만드는 일 즉, 훈민정음을 창제하는 데까지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다른 나라들에서도 자기 언어를 표현하기 위한 새 글자를 제정한 일은 있지만, 구체적으로 그 문자를 만든 창제자가 누구인지를 밝히고 있는 경우는 없다. 더구나 새로 만든 문자의 창제 원리와 그 음가와 운용법을 밝히고 그것을 해설한 책을 간행한 일은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일이다. 훈민정음(즉, 한글)은 매우 독창적이고 과학적인 문자 체계이다. 바로 이 새로운 문자 훈민정음을 다루고 있는 『훈민정음』(해례본)도 그에 못지않게 독창적이고 과학적인 저작물이다. 따라서 이 책은 학술사적으로나 문화사적인 면에서도 중요한 가치와 의의를 가지는 것이다. [출처: 문화재대관-국보-전적2]
훈민정음은 1997년 10월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은 조선왕조의 시조인 태조로부터 철종까지 25대 472년간(1392~1863)의 역사를 연월일 순서에 따라 편년체로 기록한 책으로 총 1,893권 888책으로 되어 있는 오래되고 방대한 양의 역사서이다. 조선왕조실록은 조선시대의 정치, 외교, 군사, 제도, 법률, 경제, 산업, 교통, 통신, 사회, 풍속, 미술, 공예, 종교 등 각 방면의 역사적 사실을 망라하고 있어 세계적으로 그 유례가 없는 귀중한 역사 기록물이다. 또한 조선왕조실록은 그 역사기술에 있어 매우 진실성과 신빙성이 높은 역사기록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조선왕조실록의 기초자료 작성에서 실제 편술까지의 편수 간행작업을 직접하였던 사관은 관직으로서의 독립성과 기술에 대한 비밀성을 제도적으로 보장받았다. 실록의 편찬은 다음 국왕 즉위한 후 실록청을 개설하고 관계관을 배치하여 편찬하였으며 사초는 군주라해도 함부로 열람할 수 없도록 비밀을 보장함으로써 이 실록의 진실성과 신빙성을 확보하였다.
실록이 완성된 후에는 특별히 설치한 사고(史庫)에 각각 1부씩 보관하였는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사고의 실록들이 병화에 소실되기도 하였으나 그때마다 재출간하거나 보수하여 20세기초까지 정족산, 태백산, 적상산, 오대산의 4사고에 각각 1부씩 전하여 내려왔다.
정족산, 태백산 사고의 실록은 1910년 일제가 당시 경성제국대학으로 이관하였다가 광복 후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그대로 소장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오대산 사고의 실록은 일본으로 반출하여 갔다가 관동대지진으로 소실되어 현재 27책만 남아 있다. 적상산본은 구황궁 장서각에 소장되어 있다가 1950년 한국전쟁 당시 북한이 가져가 현재 김일성종합대학에 소장되어 있다. 1984년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함께 보관되어 있는 조선왕조실록 정족산본 및 태백산본을 분리하여 안전하게 보관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은 정족산본 1,181책, 태백산본 848책, 오대산본 27책, 기타 산엽본 21책을 포함해서 총 2,077책이 일괄적으로 국보 제 15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1997년 10월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실록편찬시 이용되는 자료는정부 기관에서의 보고 문서 등을 정리해 둔 춘추관시정기, 전왕 재위시의 사관들이 작성해 둔 사초(史草), 승정원일기, 의정부등재, 일성록 등 정부 주요기관의 기록과 개인의 문집 등이었다.
특히 사초는 사관들이 국가의 모든 회의에 빠짐없이 참가하여 왕과 신하들이 국사를 논의, 처리하는 것을 사실대로 기록하는 동시에 그 잘잘못 및 인물에 대한 비평, 그리고 기밀사무 등을 직필(直筆)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사법(史法)이 매우 엄하여 사관이외에는 아무도 볼수가 없었으며, 기록의 진실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왕까지도 보지 못하게 하였다.
조선왕조실록의 세계적 기록유산으로서의 가치
- 첫째, 조선왕조실록은 25대 군주의 실록이며, 472년간의 역사를 수록한 것이기에 한 왕조의 역사적 기록으로 세계에서도 장구한 세월에 걸친 실록이다.일본의 삼대실록(三代實錄)은 빈약한 것이고, 남원조(南院朝)의 대남실록(大南實錄)은 548권으로 편성되었다. 중국의 황명실록(皇明實錄)은 2,964권으로 된 대질이나 권수만 많을 뿐이지 기록내용은 소략하다. 조선왕조실록이 총 6,400만 자인데 대해 황명실록은 총 1,600만자에 불과하다.
- 둘째, 조선왕조실록은 풍부한 내용을 담은 세계적인 역사서이다.세계적으로 알려진 중국의 대청역조실록(大淸歷朝實錄)도 296년간에 걸친 실록에 불과하다.
- 셋째로, 조선왕조실록은 내용이 다양하여 가히 백과전서적 실록이라고 이해되고 있다.조선왕조실록은 조선시대의 정치, 외교, 사회, 경제, 학예, 종교 생활로부터 천문, 지리, 음악, 과학적 사실이나 자연재해나 천문현상과 동북아시아의 외교적 관계가 수록되어 있는 종합사서요, 국왕에서 서민에 이르기까지의 생활기록이 담겨져 있는 민족문화서인 것이다.
- 넷째, 조선왕조실록은 그 역사기술에 있어 매우 진실성과 신빙성이 높은 역사 기록물이다.조선왕조 실록의 기초자료 작성에서 편술까지 담당했던 사관은 관직으로서의 독립성과 기술(記述)에 대한 비밀성을 보장받던 전문관료였다. 사관의 기록은 군주라해도 함부로 열람할 수 없었고, 비밀이 보장되는 제도가 이 실록의 진실성과 신빙성을 보장하였다.
- 다섯째로, 활자로 인쇄 간행된 조선왕조실록은 한국 인쇄문화의 전통과 높은 문화수준을 보여주는 역사서인 것이다.조선은 세계적으로 금속활자를 가장 앞서 실용한 고려시대의 전통을 이어, 활자개량에 힘쓰고, 각종 도서를 간행해 온 전통이 있었다.
- 여섯째, 조선말기까지 이들 실록이 완전하게 보존되어온 것도 세계적으로 유례를 보기 힘든 일이다.선왕의 실록편찬사업이 끝나면 최종원고 4부를 인쇄하여 서울의 춘추관과 불의의 사고에 대비하기 위해 각지 깊은 산중에 소재하던 사고(史庫)에 보관하여 왔다.
- 끝으로, 조선왕조실록은 일본, 중국, 몽고 등 동아시아 제국의 역사연구, 관계사 연구에도 귀중한 기본자료이기도 하다.
직지심체요절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이하 불조직지심체요절이라 함)은 백운화상이 75세였던 고려 공민왕 21년(1372)에 노안을 무릅쓰고 선도(禪徒)들에게 선도(禪道)와 선관(禪觀)의 안목을 자각(自覺)케 하고자 함은 물론, 선풍(禪風)을 전등(傳燈)하여 법맥(法脈)을 계승케 하고자 저술한 것으로서, 그 제자 석찬과 달담이 비구니 묘덕의 시주를 받아 청주 흥덕사에서 1377년 7월에 금속활자로 인쇄하였다.
「불조직지심체요절」은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 「선문염송집(禪門拈頌集)」등의 사전부(史傳部)의 여러 불서(佛書)를 섭렵하고 역대의 여러 불조사(諸佛祖師)의 게(偈), 송(頌), 찬(讚), 가(歌), 명(銘), 서(書), 법어(法語), 문답(問答) 중에서 선(禪)의 요체(要諦)를 깨닫는데 필요한 것만을 초록(抄錄)하여 찬술(撰述)한 것이 그 주된 내용이다.
「불조직지심체요절」의 ‘직지심체’는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 見性成佛)” 이라는 수신오도(修身悟道)의 명귀에서 채록한 것으로 ‘참선하여 사람의 마음을 직시(直視)하면, 그 심성이 곧 부처님의 마음임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본서는 우리나라의 학승(學僧)들이 대교과(大敎科)를 마치고 수의과(隨意科)에서 공부하는데 사용되는 대표적인 학습서인 것이다.
「불조직지심체요절」의 찬자(撰者)인 백운화상(白雲和尙)은 백운이 그의 호이며, 법명(法名)은 경한(景閑)이다.고려 충렬왕 24년(1298)에 전라도 고부(古阜)에서 출생하여, 공민왕 23년(1374)에 여주(驪州)의 취암사(鷲巖寺)에서 77세를 일기로 입적(入寂)하신 분이다.
화상은 어려서 출가하여 불학(佛學)을 익히고 수도하는 데에만 전념하였다. 후에 백운화상은 중국 호주(湖州) 하무산(霞霧山) 천호암(天湖庵)의 석옥청공(石屋淸珙)화상으로부터 직접 심법(心法)을 전수 받았으며, 인도의 지공(指空) 화상에서도 직접 법(法)을 물어 도(道)를 깨달았던 것이다. 귀국한 뒤에는 태고 보우국사(太古普愚國師, 1301∼1382)나 혜근 나옹화상(惠勤懶翁和尙, 1320∼1376)과 더불어 대선사(大禪師)로서 어깨를 나란히 하였다. 뿐만 아니라 황해도 해주(海州)의 안국사(安國寺)에서 11년 동안이나 선림(禪林)의 정업(精業)에 전력하였고, 뒤에는 해주의 신광사(神光寺)에서 후학들을 계도(啓導)하였다.
「불조직지심체요절」이 해외로 유출된 경위는 조선시대 고종때 주한 불란서대리공사로 서울에서 근무한바 있는 꼴랭 드 쁠랑시(Collin de Plancy)가 수집해간 장서에 포함되어 있던 것이 그후 골동품수집가였던 앙리베베르(Henry Vever)에게 넘어갔으며 그가 1950년에 사망하자 유언에 따라 프랑스국립도서관으로 이관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책은 상·하 2권으로 되어 있으나, 현재 하권만이 유일하게 프랑스에 소장되어 있다. 하권은 39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첫째장은 없고 2장부터 39장까지 총 38장만이 보존되고 있다.
흥덕사(興德寺)의 창건년대와 규모는 알수 없으나, 「불조직지심체요절」하권 간기에 고려 우왕 3년(1377)에 청주 흥덕사에서 금속활자로 책을 인쇄하였음을 명기(宣光七年丁巳七月 日 淸州牧外興德寺鑄字印施)하고 있는데, 이것은 독일의 구텐베르그보다 70여년이나 앞선 것으로 1972년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 도서의 해"에 출품되어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본으로 공인된 것이다.
그러나 흥덕사지의 위치를 확인할수 없던 중 발굴조사 결과 출토된 청동으로 만든 북[靑銅禁口]과 청동불발(靑銅佛鉢)에 "西原府 興德寺(서원부 흥덕사;서원은 신라때 청주의 이름)"라는 글자(名文)가 음각되어 있어 이곳이 바로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을 간행한 흥덕사임을 입증하게 되었다.
이 책은 금속활자를 이용하여 인쇄하였는데, 인쇄술을 보다 편리하고 경제적이며 교정을 쉽게 하여 주었고 이 모든 것은 책의 신속한 생산에 공헌하였다. 또한 활자 인쇄술에 적합한 먹, 즉 기름먹을 발명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한국이 혁신한 실용적인 활판 인쇄술은 동양 인쇄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고, 유럽등지로 전파된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은 이러한 가치를 인정받아 2001년 9월 유네스코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승정원일기
「승정원」은 조선 정종대에 창설된 기관으로서 국가의 모든 기밀을 취급하던 국왕의 비서실이라 할 수 있는 곳으로, 1623년(인조1) 3월부터 1894년(고종31) 6월까지 272년간 승정원에서 처리한 국정 기록과 승선원, 궁내부, 비서감, 규장각으로 명칭이 바뀌면서 1910년(융희 4)까지 총 3,243책의 기록이 남아 있다.
「승정원일기」는 조선왕조 최대의 기밀 기록인 동시에 사료적 가치에 있어서 조선왕조실록, 일성록, 비변사등록과 같이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세계에 자랑할 만한 자료이며, 또한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조선왕조실록」을 편찬할 때 기본 자료로 이용하였기 때문에 실록보다 오히려 가치있는 자료로 평가되고 있음은 물론, 원본 1부밖에 없는 귀중한 자료로 국보 제303호(1999.4.9)로 지정되어 있다. 이는 세계 최대 및 1차 사료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아 2001년 9월 유네스코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내용을 보면 국정 전반에 걸친 광범위한 사실의 기록으로 계품(啓稟), 전지(傳旨), 청패(請牌), 청추(請推), 정사(呈辭), 상소(上疏), 선유(宣諭), 전교(傳敎) 등에 관한 것이다. 이 책의 기재 방식을 보면 한 달을 기준으로 책머리에 월간 경연상황, 내전(內殿)의 동향을 기록하고 다음으로 승정원의 관리 및 당직자의 표시와 출근실태를 표시하고 마지막에 승정원의 업무현황, 왕 및 내전의 문안, 승정원의 인사관계(人事關係) 등의 내용을 실었다.
「승정원일기」는 일기식으로 한달에 1책씩 작성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으나 후기로 올수록 내용이 많아져 한 달에 2책 이상이 되는 경우도 있다. 또한 조선 건국 초부터 정리되었으나 조선전기분(朝鮮前期分)은 임진왜란 등의 병화(兵火)로 대부분 소실되었고 현재는 3,243책만이 남아 있으며, 국사(國史)연구뿐만 아니라 한국의 정치, 경제, 사회, 외교, 문화, 군사 등 모든 학문 연구에 필수적인 자료이다.
그 사료적 가치는 중국의 「중국 25사」(3,386책, 약 4,000만자) 및 우리나라 「조선왕조실록」(888책, 5,400만자)보다 더 방대한 세계 최대의 연대 기록물(총 3,243책, 글자수 2억4천250만자)이며, 「조선왕조실록」이 국왕 사후 사관들에 의해 편집된 2차 자료라면「승정원 일기」는 당시의 정치·경제·국방·사회·문화등에 대한 생생한 역사를 그대로 기록한 조선시대 1차 사료인 것이다. 고종 31년 갑오경장 이후의 일기 내용은 일제에 의한 내정 간섭기 궁중기록이므로 조선왕(황제)의 결제를 요하는 사건과 기타 궁중의 비화를 기록한 것이므로 근대사 연구의 1차 기본 사료가 된다.
또한 17세기부터 20세기초까지 일기로 300년간의 국문학의 변천과정을 확인할 수 있는 국문학적 가치가 인정되고 있으며, 288년간 매일의 날짜 정보를 기록한 것으로서 특히「조선왕조실록」의 날짜는 60갑자로만 표기되어 있어 오늘날 우리가 쓰는 태양력으로 환산하는 데 많은 혼란을 겪고 있으나 「승정원 일기」는 60갑자와 수시력역법의 일자를 동시에 표기하고 있어 역사의 기초자료가 되고 있다. 또한 전통적인 유교사회 내부로부터 자생적인 천주교 수용이 민중들 사이에 어떻게 전개되었으며 이에 대한 정치권의 대응 등을 자세히 살필 수 있다.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는 「승정원일기」 원본은 보존을 위하여 공개하지 않고 있으나, 「영인본 승정원일기」(국사편찬위원회 1961∼1977 간행)와 정신문화연구원에서 철종2년(1851)부터 순종융희4년(1910)까지의 일기 필사본은 인터넷으로 제공하고 있으며, 향후 국사편찬위원회에서는 영인본 전체를 디지털화하여 인터넷으로 일부 제공하고있다.
*2003.5月 현재 탈초영인본 141책중 1~28책 : 인조원년 3월~숙종 46년 6월
조선왕조 의궤(儀軌)
-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 연구원에 소장된 546종 2,940책의 각종 의궤
- 한국학 중앙연구원 장서각(藏書閣)에 소장된 287종 490책의 각종 의궤
의궤는 조선왕조에서 유교적 원리에 입각한 국가 의례를 중심으로 국가의 중요 행사를 행사 진행 시점에서 당시 사용된 문서를 정해진 격식에 의해 정리하여 작성한 기록물이다. 같은 유교문화군에 속하는 중국, 일본, 베트남 등에서는 의궤의 체계적인 편찬이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의궤는 조선시대 600여년에 걸쳐 (1392-1910) 왕실의 주요 행사, 즉 결혼식, 장례식, 연회, 사신영접 등 뿐 아니라, 건축물·왕릉의 조성과 왕실문화활동 등에 대한 기록이 그림으로 남아져 있어 600여년의 생활상을 시각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희소성을 가지고 있다.
총 3,895 여권의 방대한 분량에 이르는 의궤는 왕실의 주요한 의식이 시기별, 주제별로 정리되어 있어서, 조선왕조 의식의 변화 뿐 아니라 동아시아 지역의 문화를 비교연구, 이해하는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다. 특히 반차도, 도설 등 행사모습을 묘사한 시각 콘텐츠는 오늘날의 영상자료처럼 당시의 모습을 입체적으로 생동감 있게 보여준다. 예컨대 정조의 능행도(陵幸圖)는 전 여정을 15.4m에 걸쳐 표현하고 있다. 이런 형태(시각중심 visual-oriented)의 기록유산은 뛰어난 미술장인과 사관의 공동작업을 통해서만 만들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독특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한 마디로 의궤는 장기간에 걸쳐 조선왕조의 주요 의식을 방대한 양의 그림과 글로 체계적으로 담고 있으며 이러한 유형은 동서양 전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다는 점에서 매우 뛰어난 기록유산의 가치(outstanding value of documentary heritage)를 지니고 있다.
세계사 맥락에서 유교의 중요성이 저평가되고 있는 면이 없지 않다. 유교는 세계의 조그만 한쪽 구석에 존재했던 문화가 아니다. 유교가 지배했던 영토는 그 면적으로 볼 때 서유럽보다도 몇 배나 컸으며 인구 수에 있어서도 유럽, 서남아시아 및 중동을 초과하는 큰 규모였다. 유교권은 최소 14세기까지 전세계를 2~3개 권역으로 분할하던 주요 문화권 중 하나였다.
그러나 중국의 경우 수차례에 걸친 야만족의 침입과 이들에 의한 점령으로 인해 시간이 경과하며 전통 의식은 원형을 점차 잃어갔다. 특히 몽골 침입 기간 동안 유교 의식을 수록한 문헌 상당수가 소멸됐다. 이에 반해 한국은 그러한 침입을 경험하지 않았기에 전통 유산을 원형 그대로 보존하며 천 년 동안 진정성을 훼손하지 않고 유교 의식을 봉행하는 전통을 이어갈 수 있었다.
의궤는 대부분의 유교사회에서 잊혀진 과거 유산을 보존하고 있는 기록이다. 또한, 의궤는 조그마한 군주국가의 기록이 아니라, 한때 세계의 상당 부분을 차지했던 유교 전통의 핵심을 대표하는 기록이다.
조선왕조 의궤는 2007년 6월 제8차 유네스코 기록유산 국제자문위원회(6.13∼15, 남아공 프레토리아)에서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해인사 대장경판 및 제(諸)경판
- 고려대장경판 81,258판
- 그외 1098년부터 1958년까지 불교 경전과 불교 역사, 불교 계율, 불교 연구논문, 고승의 문집, 계율판, 불교 판화 등 5,987판
고려대장경판(팔만대장경)의 제작은 한국이 13세기에 일구어낸 위대한 문화적 업적으로 학계에서 받아들여지고 있다. 고려대장경판은 81,258 목판에 새긴 대장경판으로 아시아 전역에서는 유일하게 완벽한 형태로 현존하는 판본자료다.
고려대장경판은 현재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정확하고 가장 완벽한 불교 대장경판으로 산스크리트어에서 한역된 불교대장경의 원본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고려대장경판은 인도 및 중앙아시아 언어로 된 경전, 계율, 논서, 교리 및 불교와 관련된 역사적 기록물을 집대성하여 한역한 내용과 더불어 중국어가 원문인 일부 문헌을 선정하여 수록하고 있다. 그 엄청난 규모로 볼 때 이러한 대장경판의 제작은 상당한 국고 및 인력의 투입을 필요로 했을 것으로 보인다.
해인사에 소장되고 있는 고려대장경판과 제 경판 87,000여장의 목판은 1098년부터 1958년까지의 오래 시간에 걸쳐 완성된 경판들로써 국가제작판과 사찰제작판으로 나뉜다. 국가제작판은 고려대장경으로 81,258판 5,200여 만자에 달하고, 사찰제작판은 5,987판이다.
고려대장경판은 이미 사라진 초기 목판제작술의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는 한편, 고려시대의 정치, 문화, 사상의 흐름과 면모를 엿볼 수 있는 역사기록물이기도 하다. 경판 표면에는 옻칠을 하여 글자의 새김이 760년이 지나도록 생생한 상태로 남아 현재까지 인쇄할 수 있을 정도이다.
※ 대장경(大藏經)은 불교의 교조 석가모니가 일생동안 설법한 경전과 계율, 그리고 그 내용들에 대해 후대의 사람들이 첨부한 논서, 주석서, 이론서들을 집대성한 불교경전(佛敎經典)의 총서(叢書)를 가리키는 말이다.
세계적 의미, 독창성, 비대체성
고려대장경은 당시까지 동아시아 지역에 존재하던 모든 불교 경전의 내용을 집대성한 가장 방대한 문헌으로 동아시아 지역 당대 최고의 경전이라 할 수 있다. 송나라 대장경을 비롯하여 고려대장경 이전에 중국 및 일본에서 제작된 경전과 비교해 볼 때 고려대장경의 학술적 내용 및 품질 관리에 투입된 심오한 노력은 오늘날과 비교해도 놀라운 수준이다.
수기스님 등이 초조대장경과 송나라 대장경과 거란 대장경의 내용을 비교하면서 철저하게 교정하여 가장 완벽한 대장경으로 만들었다. 그리하여 고려대장경은 아시아 각국 대장경의 원본으로서 역할을 했을 정도로 비교할 대상이 없다. 불교 대장경 가운데 가장 정확한 대장경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1247년 완성된 이 고려대장경의 교정 기록을 30권 분량에 담고 있는 고려국신조대장교정별록은 고대 동아시아 학자들이 수천 권에 달하는 경전의 내용을 어떻게 대조 및 편집하여 한 권의 경전을 탄생시켰는지를 자세하게 보여주는 현존하는 유일한 기록이다. 수기대사의 교정 과정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이 기록은 그가 2세기 후에 본문비평학이라는 서양 학문을 창시한 에라스무스(1466-1536)보다도 훨씬 더 예리한 통찰력을 소유한 인물로 어려운 내용을 유창하고 평이하게 풀어쓰는 능력이 뛰어났음을 잘 보여준다.
고려대장경판은 1237-1248년에 제작된 것이지만 훌륭하게 보존되고 있으며 현재도 인쇄할 수 있다. 소장하고 있는 목판의 수량도 87,000여 장이 된다. 고려대장경보다 먼저 제작된 북송대장경과 고려 초조대장경 그리고 거란본대장경은 거의 전래되지 않고 있다. 그리고 법원주림(法苑珠林), 일체경음의(一切徑音義)와 내전 수함음소(內典隨函音疎) 등은 고려대장경에만 수록되어 있고 다른 목록에는 보이지 않았다.
해인사는 11세기 초기부터 900년간 출판인쇄 문화를 선도하면서 한국의 불교문화를 이끌었던 곳이다. 현재 해인사에서 소장하고 있는 경판은 그 다양한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이곳의 경판은 중국에까지 그 천재성이 알려진 원효의 저술 등 한국의 위대한 고승들의 저술 등이 있고, 경전의 내용을 그림으로 표현한 판화가 각 시대별로 갖추어져 있는 등 세계에서 유일하고 희귀한 가치를 지니는 경판이 대부분이다.
해인사 고려대장경판과 제경판은 2007년 6월 제8차 유네스코 기록유산 국제자문위원회(6.13∼15, 남아공 프레토리아)에서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 관련사진 제공 : 해인사
동의보감
- 국립중앙도서관,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 초판 완질 동의보감(25권 25책)
- 동의보감은 1610년 허준이 집필하였고, 1613년 왕실의료기관(내의원)에서 나무 활자의 형식으로 간행한 백과사전식 의서(醫書)
『동의보감』은 선조 30년(1597) 임금의 병과 건강을 돌보는 어의 허준(1539∼1615) 선생이 선조의 명을 받아 중국과 우리나라의 의학 서적을 하나로 모아 편집에 착수하여 광해군 2년(1610)에 완성하고 광해군 5년(1613)에 간행한 의학 서적이다. 이는 총 25권 25책으로 나무활자로 발행하였다.
허준은 선조 7년(1574) 의과에 급제하여 이듬해 내의원의 의관이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을 모시고 의주까지 피난을 갔으며, 그 공을 인정받아 공신으로 추대되었으나 중인신분에 과하다는 여론이 일자 취소되었다.
『동의보감』은 그가 관직에서 물러난 뒤 16년간의 연구 끝에 완성한 한의학의 백과사전격인 책이며, 허준 선생은 이외에도 중국의 의학서적을 번역하는 데에도 많은 업적을 남겼다.
『동의보감』은 모두 23편으로 내과학인 『내경편』, 『외형편』 4편, 유행병· 곽란·부인병·소아병 관계의 『자편』11편, 『탕액편』3편, 『침구편』1편과 이외에 목록 2편으로 되어 있고, 각 병마다 처방을 풀이한 체계가 정연한 서적이다.
우리 실정에 맞는 의서라 하여『동의보감』이라 이름 하였으며, 훈련도감자본으로 발행되었다. 이 책은 중국과 일본에도 소개되었고, 현재까지 우리나라 최고의 한방의서로 인정받고 있다.
제9차 유네스코 기록유산 국제자문위원회(2009.7월 / 바베이도스)에서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09.7.31)
일성록(日省錄)
국보 제153호, 1760년(영조 36년)에서 1910년(융희 4년)까지 편찬, 서울대 규장각 소장
이 책은 1760년(영조 36)에서 1910년(융희 4)까지 151년 동안의 국정 운영 내용을 매일매일 일기체로 정리한 국왕의 일기(*국왕을 3인칭인 ‘상(上)’이 아닌 1인칭 용어인 ‘여(予: 나)’로 표기)이다. 임금의 입장에서 펴낸 일기의 형식을 갖추고 있으나 실질적으로는 정부의 공식적인 기록물이다. 필사본으로 한 질만 편찬된 유일본이며 총 2,329책으로 구성되어 있고 모두 전하고 있으나 21개월분이 빠져있다.
[일성록]의 모태가 된 것은 정조가 세손 시절부터 쓴 존현각일기(尊賢閣日記)이다.
정조는 [논어(論語)]에서 증자(曾子)가 말한 ‘오일삼성오신(吾日三省吾身: 나는 날마다 세 가지 기준을 가지고 스스로에 대해 반성한다)’에 깊은 감명을 받아 일찍부터 자신을 반성하는 자료로 삼기 위해 일기를 작성하였다고 함
이후, 정조가 왕위에 오른 후에는 규장각 관원들에게 명령하여 매일매일 일기를 작성한 다음 5일마다 일기를 정서하여 이를 국왕에게 올려 결재를 받도록 하였다. 정조는 [일성록]이 자기 시대의 정치 사회적 상황을 확인하고 반성하는 근거 자료가 되기를 원했으며, 이를 위해 기존의 [승정원일기]와는 다른 방식으로 [일성록]을 편찬하도록 지시하였다.
"옛날을 보는 것은 지금을 살피는 것만 못하고, 남에게서 구하는 것은 자신에게서 반추하는 것만 못하다." [일성록 서문]
이에 따라 [일성록]은 국정의 주요 현안들을 강(綱: 표제)과 목(目: 세부 사실)으로 나누어 기록하여 국정 운영에 참고할 내용들을 일목요연하게 찾을 수 있는 체재로 편찬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일성록]은 정조의 개인 일기에서 공식적인 국정 일기로 전환하게 되었다. 책의 제목은 증자의 말을 인용하여 ‘일성록(日省錄)’ 으로 했다.
[일성록]은 18~20세기 동·서양의 정치·문화적 교류의 구체적 실상과 세계사의 보편적 흐름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조선이라는 한 나라의 역사 기록물을 넘어서는 세계사적 중요성과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인정받아 2011년 5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5.18 민주화운동기록물
5.18민주화운동 관련 기록물은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대한민국 광주를 중심으로 전개된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민들의 일련의 활동과 이후에 이 사건의 책임자처벌, 피해자 보상과 관련하여 기록되고 생산된 문건, 사진, 영상 등의 자료를 총칭한다. 주요 소장처는 국가기록원, 육군본부, 국회도서관, 5.18기념재단 등이 있다.
5.18민주화운동은 한국의 민주화에 큰 전기가 되었을 뿐 아니라, 1980년대 이후 동아시아 국가들의 냉전 체제를 해체하고 민주화를 이루는데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여겨져 왔고, 그런 세계사적 중요성을 인정받아 2011년 5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 되었다.
난중일기
- 이충무공 친필본 『난중일기』 1건 7책(국보 제76호)
『난중일기』는 이순신이 1592년 1월 1일부터 1598년 11월 17일까지 7년간의 군중 생활을 직접 기록한 친필일기이다.
『난중일기』는 원래 임진일기(1592년), 계사일기(1593년), 갑오일기(1594년), 을미일기(1595년), 병신일기(1596년), 정유일기(1597년), 속정유일기(1597년), 무술일기(1598년)로 구성되어 있었으나 현재는 1595년의 을미일기를 뺀 총7책이 보존되어 전해오고 있다.
『난중일기』는 이순신(1545~1598) 해군사령관이 임진왜란(1592~1598) 기간 중 군중(軍中)에서 직접 쓴 친필 일기이다. 모두 8권의 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임진왜란 발발(1592년 1월) 이후부터 이순신이 1598년 11월, 노량해전에서 전사하기 직전까지 7년의 기간을 망라하여 기록하고 있다.
일기의 역사적 배경이었던 임진왜란은 외형적으로는 조선과 일본 사이에 치러진 전쟁이었지만 일본의 동아시아 세력확보를 위해 일으킨 전쟁이었다는 세계사적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특히 일본과 명(중국)은 모두 서양에서 전래된 각종 총포 등의 무기를 대량생산하여 이 전쟁에서 사용하였으며, 조선은 세계최초로 알려진 장갑선을 개발하여 전장에 투입하였다. 또한 동남아시아 여러 국가와 유럽의 용병이 참전한 사례도 발견되고 있다.
『난중일기』는 개인의 일기 형식의 기록이지만, 전쟁 기간 중 해군의 최고 지휘관이 직접 매일 매일의 전투 상황과 개인적 소회를 현장감 있게 다루었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나 세계사적으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기록물이다. 또한 전투상황에 대한 상세한 기록뿐 아니라 당시의 기후나 지형, 일반 서민들의 삶에 대한 기록도 전하고 있어 과거의 자연지형 및 환경, 서민의 생활상을 연구하는 중요한 자료로도 활용되고 있다. 문장이 간결하면서도 유려하며, 현재까지도 대한민국 국민이 애송하는 시(詩)도 다수 포함되어 있어 문학사적 가치도 매우 높다.
2013년 6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국제자문위원회(6.18-21, 대한민국 광주)에서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새마을운동기록물
새마을운동 기록물은 대한민국 정부와 국민들이 1970년부터 1979년까지 추진한 새마을운동 과정에서 생산된 대통령의 연설문과 결재문서, 행정부처의 새마을 사업 공문, 마을단위의 사업서류, 새마을지도자들의 성공사례 원고와 편지, 시민들의 편지, 새마을교재, 관련 사진과 영상 등 약 22,000 여건의 자료를 총칭한다.
대한민국은 일본 식민지배와 한국전쟁에도 불구하고 괄목할 만한 경제성장과 민주화를 동시에 이룬 세계 유일의 국가로, 아프리카 등 많은 개발도상국들이 한국식 발전 모델을 학습하고 있다. UN에서도 인정한 농촌개발과 빈곤퇴치의 모범 사례인 ‘새마을 운동’에 관한 역사적 기록물이다.
새마을운동기록물은 2013년 6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국제자문위원회(6.18-21, 대한민국 광주)에서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한국의 유교책판
유교책판은 조선시대 유학자들의 저작물을 간행하기 위해 판각한 책판으로, 305개 문중·서원 등에서 기탁한 718종 64,226장이다. 현재는 한국국학진흥원에서 보존, 관리하고 있다. 유교책판은 선학과 후학이 책을 통하여 서로 소통하는 'Text Communication'의 원형으로, 국가주도로 제작되어 종교적인 목적을 담은 한국의 기록유산인 팔만대장경과는 달리 유교책판은 국가가 아닌 각 지역의 지식인 집단들이 시대를 달리하여 만든 것이다. 수록 내용도 문학을 비롯하여 정치, 경제, 사회, 대인관계 등 다양한 분야를 다루고 있지만 모든 분야의 내용은 궁극적으로 유교의 인륜공동체를 실현하기 위한 공통성을 지니고 있다.
진정성
유교책판은 저자의 직계 후손들이 길게는 550년, 짧게는 60년 이상을 보존해 온 기록물로, 모두가 출처가 분명한 진본이다. 유교책판의 일부는 이미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한국의 조선왕조실록, 일성록, 승정원일기 등에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이 나오며, 국가에서 만든 각종 ‘책판 목록집’에도 대다수 유교책판의 존재가 기록되는 등, 국가의 공식 기록물을 통해서도 그 진정성을 확인할 수 있다. 유교책판은 인쇄문화사에서 드물게 <공론> 에 의해 제작이 허용되었기 때문에 제작과정에서 수차례 교열이 이루어져 내용에 허위나 오류가 수록될 여지는 처음부터 없었으며, 공론을 통해 인정된 매우 정제된 내용만 수록되어 내용상의 진정성도 확보되고 있다. 이러한 과정은 책판 제작 과정의 모든 것을 담은 기록물인 『간역시일기刊役時日記』등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세계적 중요성, 대체 불가능성
한국의 유교책판은 책을 인쇄하기 위한 매체로서 제작된 것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유교책판은 단순한 인쇄매체의 기능을 넘어 선현의 학문을 상징하는 존재로 인식되어 후학들에 의해 보관 전승된 것이다.
첫째, 유교책판은 모두 <공론> 에 의해 제작되었다. 지역사회의 지식인 집단의 여론을 공론이라 하는데, 당대의 지식인 계층이 공론을 주도하였으며, 공론에 어긋나는 내용이 담긴 책판의 전부 또는 일부분은 인출에서는 제한되었다. 인출이 제한된 책판은 없애지 않고 그대로 남겨 후대의 판단으로 다시 출간여부를 결정하도록 하였다. 이는 한국의 기록문화가 가진 큰 특징 중의 하나이다.
둘째, 유교책판은 <공동체 출판> 의 형태로 책이 출간되었다. 공론의 주도자들은 지역사회에서 문중-학맥-서원-지역사회로 연계되는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이들의 주도로 유교책판의 판각 계획부터 판각할 내용의 선정, 판각의 완성, 책의 인출, 배포까지 모든 과정을 담당하였다. 유교책판의 제작에는 개인이나 문중이 독자적으로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많은 비용이 필요한데, 이 비용까지 네트워크의 구성원들이 서로 분배, 담당하였다. 유교책판의 일관된 주제가 유교 공동체 사회의 구현에 있으며, 이 내용을 담은 유교책판도 공동체 출판이란 방식으로 진행된 것은 세계사에서 찾아보기 힘든 예이다.
셋째, 유교책판에 담긴 학문적 성과는 500여 년간 지속된 <집단지성> 이 이룩한 성과이다. 별개의 저자들이 시대를 달리하여 자신의 학문적 성과를 출간하였는데, 스승의 학문성과를 책판에 담아 제자가 이어받고, 다시 그 제자가 이를 이어받되, 맹목적인 전승이 아닌 토론과 비판을 통해 보다 진전된 내용을 책판에 수록하여 전승하였다. 이에 유교책판에 수록된 인간답게 살기 위한 인륜 공동체의 건설이라는 일관된 주제가 시대에 따라 발전되고 구체화될 수 있었다. 유교책판을 통해 구현하고자 하였던 이러한 가치관은 세계사에서 추구하고자 했던 인류 보편의 가치와 동질의 것이다.
넷째, 등재를 신청한 유교책판은 서책의 유일한 원형이다. 유교책판은 멀게는 550년 전, 가깝게는 60년 전에 제작된 것으로, 각각 단 한질만 제작되어 현재까지 전해진 ‘유일한 원본’이다. 활자본과 달리 후대에 새로 제작한 번각본도 거의 없는 것으로, 절대적으로 대체 불가능한 것이며, 이에 유교책판이 훼손되면 550년간 지속된 학문의 연결고리가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
KBS특별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기록물
<KBS특별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기록물은 KBS가 1983년 6월 30일 밤 10시 15분부터 11월 14일 새벽 4시까지 방송기간 138일, 방송시간 453시간 45분 동안 생방송한 비디오 녹화원본 테이프 463개와, 담당 프로듀서 업무수첩, 이산가족이 직접 작성한 신청서, 일일 방송진행표, 큐시트, 기념음반, 사진 등 20,522건의 기록물을 총칭한다.
진정성
KBS는 1TV를 통해 1983년 6월 30일 밤 10시 15분부터 11월 14일 새벽 4시까지 방송기간 138일, 방송시간 453시간 45분 동안 <KBS특별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를 생방송하였으며 이를 전량 녹화하였다. 녹화원본 테이프 463개와 방송과정에서 생산된 사연판, 큐시트, TV편성표, 라디오 녹음자료, 사진 등은 사실 그대로를 고증하는 1차 자료이자 원본이며, 생산된 이래 KBS아카이브에서 계속 보존되어 왔다. 중앙정부 및 지방 자치단체가 생산한 기록물은 대부분 국가기록원에 보존되어 있다.
세계적 중요성
- TV, 전쟁과 분단의 참상을 세계에 알리다.
<KBS특별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기록물은 전쟁의 참상을 전 세계에 고발하고 인권과 보편적 인류애를 고취시킨 생생한 기록이다. 이산가족을 찾겠다는 인파가 계속되는 여의도 광장과 KBS 주변은 세계인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하비에르 페레스 데 게야르(Javier Pérez de Cuéllar) UN사무총장은 김경원 UN주재한국대사와의 회담(1983.7.21.)을 통해 이산가족의 비극에 대해 깊은 동정과 이해를 표했고, 제70차 IPU(Inter-Parliamentary Union] 서울총회에 참석한 7개국 17명의 위원과 국제인권연맹 이사 일행이 현장을 방문하기도 하였다. 뉴질랜드 오클랜드 시에서 개최된 ABU(Asian Pacific Broadcasting Union)] 총회(1983.10)에서는 이산가족을 주제로 한 30분짜리 영어판 다큐멘터리가 상영되었다. KBS 본관 중앙홀에서 마련된 기자실에서 전세계 25개국의 기자들이 상주하면서 상봉소식을 실시간으로 전달하였다. 미국 ABC는 "나이트라인(Night Line)"을 통해 생중계하기도 했다.
조선왕실 어보와 어책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신청 대상은 금⦁은⦁옥에 아름다운 명칭을 새긴 어보, 오색 비단에 책임을 다할 것을 훈계하고 깨우쳐주는 글을 쓴 교명, 옥이나 대나무에 책봉하거나 아름다운 명칭을 수여하는 글을 새긴 옥책과 죽책, 금동판에 책봉하는 내용을 새긴 금책 등이다.
이런 책보(冊寶)는 조선조 건국 초부터 근대까지 570여 년 동안 지속적으로 제작되고 봉헌되었다. 1392년부터 1966년까지 570여 년이라는 장기간에 걸쳐 지속적으로 책보를 제작하여 봉헌한 사례는 한국이 유일무이하다.
조선왕조의 왕위는 세습이었다. 국왕의 자리를 이을 아들이나 손자 등(또는 왕실의 승계자)은 국본(國本)으로서 왕위에 오르기 전에 왕세자나 왕세손에 책봉되는 전례(典禮)를 거쳐야 했다. 어보와 어책은 일차적으로 이와 같은 봉작(封爵) 전례의 예물로 제작했다. 이에는 통치자로서 알아야할 덕목을 함축적으로 표현한 문구가 들어있다. 왕세자나 왕세손에 책봉되면 그 징표로 국왕에게서 옥인(玉印), 죽책(竹冊), 교명(敎命)을 받음으로써 왕권의 계승자로서 정통성을 인정받았다. 이들이 성혼한 경우에는 이들의 빈(嬪)도 같은 과정을 거쳤다. 왕세자나 왕세손이 국왕에 즉위하면 즉위식에서 왕비도 금보(金寶), 옥책(玉冊), 교명(敎命)을 받았다. 왕과 왕비가 죽은 뒤에는 묘호(廟號)와 시호(諡號)가 정해지면 시보(諡寶)와 시책(諡冊)을 받았다. 왕과 왕비가 일생에 걸쳐 받은 책보는 신주와 함께 종묘에 봉안되었다. 살아서는 왕조의 영속성을 상징하고 죽어서도 죽은 자의 권위를 보장하는 신물이었다.
책보는 그 용도가 의례용으로 제작되었지만 거기에 쓰인 보문과 문구의 내용, 작자, 문장의 형식, 글씨체, 재료와 장식물 등은 매우 다양하여 당대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 등의 시대적 변천상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한국의 책보만이 지닐 수 있는 매우 독특한 세계기록유산으로서의 가치는 지대하다.
왕조의 영원한 지속성을 상징하는 어보와 그것을 주석(annotation)한 어책은 현재의 왕에게는 정통성을, 사후에는 권위를 보장하는 신성성을 부여함으로서 성물(聖物)로 숭배되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책보는 왕실의 정치적 안정성을 확립하는데 크게 기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인류문화사에서 볼 때 매우 독특한(unique) 문화양상을 표출하였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매우 높은 기록문화 유산이라 할 수 있다.
국채보상운동기록물
한국의 국채보상운동 기록물은 국가가 진 빚을 국민이 갚기 위해 1907년부터 1910년까지 일어난 국채보상운동의 전 과정을 보여주는 기록물이다.
19세기 말부터 제국주의 열강은 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 등 모든 대륙에서 식민지적 팽창을 하면서 대부분의 피식민지국가에게 엄청난 규모의 빚을 지우고 그것을 빌미로 지배력을 강화하는 방식을 동원하였다. 아시아 동북쪽의 작은 나라였던 한국도 마찬가지로 일본의 외채로 망국의 위기에 처해 있었다. 당시 한국인들은 이미 베트남, 인도, 폴란드, 이집트, 오키나와 등의 국가들도 외채로 나라를 잃은 역사적 사실을 주목하고 있었다. 한국 국민은 외채로 인한 망국의 위기를 극복하고자 국채보상운동을 일으킨 것이다.
한국의 남성은 술과 담배를 끊고, 여성은 반지와 비녀를 내어놓았고, 기생과 걸인, 심지어 도적까지도 의연금을 내는 등 전 국민의 약 25%가 이 운동에 자발적으로 참여하였다. 한국 사람들은 전국민적 기부운동을 통해 국가가 진 외채를 갚음으로써 국민으로서의 책임을 다 하려 하였다.
한국의 국채보상운동은 영국 언론인이 한국에서 발행하는 영어신문에 의해도 서방세계로 알려지게 되었으며, 해외 유학생 및 해외 이주민이 외국에서 발행하는 신문을 통해서도 해외로 알려지게 되었다. 심지어 1907년 네델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서 한국의 국채보상운동을 알림으로써 전세계에 알려지게 되어, 외채로 시달리는 다른 피식민지국에 큰 자극이 되었다.
그 후 중국(1909년), 맥시코(1938년), 베트남(1945년)등 제국주의 침략을 받은 여러 국가에서도 한국과 거의 유사한 방식으로 국채보상운동이 연이어 일어났다. 다만 한국의 국채보상운동은 이후에 일어난 운동과 비교하여 시기적으로 가장 앞섰으며 가장 긴 기간 동안 전 국민이 참여하는 국민적 기부운동이었다는 점에서 기념비적이며 당시의 역사적 기록물이 유일하게 온전히 보존되어 있다는 점에서도 역사적 가치가 크다.
그로부터 90년 후 1997년 동아시아 외환위기가 발생했을 당시, 한국에는 ‘금모으기 운동’이라고 하는 제2의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났다. 당시 국가 부도의 위기상황에서 한국 국민은 집에 보관하던 금반지를 기부하는 국민적 운동을 전개함으로써 국채보상운동을 재현하였다. 나아가 한국의 금모으기운동이 타이, 몽고로 파급되어 외환위기를 조기에 극복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고, 2008년 미국발 유럽 금융위기로 경제위기에 직면한 그리스, 스페인 포르투갈과 이탈리아에서도 경제회복모델로 주목받았다.
이런 점에서 한국의 국채보상운동 기록물은 국가적 위기에 자발적으로 대응하는 시민적「책임」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역사적 기록물이다. 뿐만 아니라 라틴아메리카, 동아시아, 그리고 유럽 등의 외환 위기에서 보듯 세계경제가 직면하고 있는 누적적 부채 위기를 극복함에 있어서, 국채보상운동이 국민적 연대와 책임의식에 기초한 경제모델로 주목받고 있다.
조선통신사기록물
조선통신사에 관한 기록은 1607년부터 1811년까지, 일본 에도막부의 초청으로 12회에 걸쳐, 조선국에서 일본국으로 파견되었던 외교사절단에 관한 자료를 총칭하는 것이다. 이 자료는 역사적인 경위로 인해 한국과 일본에 소재하고 있다.
조선통신사는 16세기 말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국을 침략한 이후 단절된 국교를 회복하고, 양국의 평화적인 관계구축 및 유지에 크게 공헌했다. 조선통신사에 관한 기록은 외교기록, 여정기록, 문화교류의 기록으로 구성된 종합자산이며, 조선통신사의 왕래로 두 나라의 국민은 증오와 오해를 풀고 상호이해를 넓혀, 외교뿐만 아니라 학술, 예술, 산업, 문화 등의 다양한 분야에 있어서 활발한 교류의 성과를 낼 수 있었다.
이 기록에는 비참한 전쟁을 경험한 양국이 평화로운 시대를 구축하고 유지해 가는 방법과 지혜가 응축되어 있으며, 「성신교린」을 공통의 교류 이념으로 대등한 입장에서 상대를 존중하는 이민족간의 교류가 구현되어 있다. 그 결과, 양국은 물론 동아시아지역에도 정치적 안정이 이루어졌고, 안정적인 교역루트도 장기간 확보할 수 있었다.
따라서, 이 기록은 양국의 역사적 경험으로 증명된 평화적․지적 유산으로, 항구적인 평화공존관계와 이문화 존중을 지향해야 할 인류공통의 과제를 해결하는데 있어서 현저하고 보편적인 가치를 가진다.
4.19혁명기록물
4·19혁명 기록물은 1960년 4월 19일 한국에서 학생이 중심이 되어 일어난 시민혁명 자료를 말한다. 1960년 2·28 대구 학생시위부터 3·15 부정선거에 항의하여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4·19혁명까지의 전후 과정과 관련된 일체의 기록물이다.
4·19혁명은 식민지에서 해방 된 지 15년, 냉전이 빚은 한국전쟁 종료 이후 7년밖에 안 된 분단국가인 한국에서 아래로부터 일어나 성공한 혁명이었다. 독재정권에 발맞춘 경찰의 발포로 무고한 학생과 시민 186명이 사망했고 6,026명이 부상을 당했다. 그러나 고등학생부터 대학생 그리고 시민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끝까지 싸워서 독재정권을 무너뜨리고 민주정부를 수립했다.
한국은 2차 대전 이후 식민지에서 독립했다. 그러나 미·소 분할점령으로 불가피하게 남북이 분단되었고, 1950년 세계적 규모의 비극적인 한국전쟁을 3년 동안 치렀다. 전쟁의 결과는 참혹했다. 약 450만의 사상자와 45%의 산업시설이 파괴되었고 분단은 계속되었다. 냉전 반공독재가 민주주의를 압살했다. 1952년 <더 타임스>에 실린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바라 것은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을 구하는 것과 같다”라는 문장이 세계 일반의 시각이었다. 하지만 한국은 4·19혁명으로 세계의 일반 시각이 틀렸음을 증명했다.
4·19혁명 기록물은 민주주의가 불가능하다는 역사적 조건에서 10살 안팎의 아이부터 70대 노인에 이르기까지 자발적으로 독재에 맞서 비폭력으로 민주주의를 이루면서 제3세계에서 최초로 성공한 비폭력 시민혁명인 동시에 유럽의 1968년 혁명, 미국의 반전운동, 일본의 안보투쟁 등 1960년대 세계 학생운동에 영향을 미친 기록유산으로서 세계사적 중요성을 인정받았다.
<사진출처 : 4.19혁명 유엔유네스코 등재 및 기념사업회추진위원회>
동학농민혁명기록물
「동학농민혁명기록물」은 1894년~1895년 조선에서 발발한 동학농민혁명과 관련된 기록물이다. 동학농민혁명은 부패한 지도층과 외세의 침략에 저항하며 평등하고 공정한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민중이 봉기한 사건이다.
한국이 번영된 민주주의로 나아가는 발판을 놓았으며, 유사한 외국의 반제국주의, 민족주의, 근대주의 운동에 영향을 주었다. 또한 그 과정에서 동학농민군은 전라도 각 고을 관아에 치안과 행정을 담당하는 민·관 협력(거버넌스) 기구인 ‘집강소’를 설치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동학농민혁명 기록물에는 동학농민군이 작성한 문서, 정부 보고서, 개인 일기와 문집, 각종 임명장 등이 포함된다. 이러한 자료들을 통해 다양한 관점에서 농민운동의 진행과정과 그 의미를 찾아볼 수 있다. 특히 시간과 장소를 초월하여 인간의 권리와 평등, 식민주의에 대한 반대 등을 다양한 시각에서 종합적으로 보여주는 기록물로서 희귀성이 있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통해 「동학농민혁명기록물」은 조선 백성들이 주체가 되어 자유, 평등, 인권의 보편적 가치를 지향했던 기억의 저장소로서 세계사적 중요성을 인정받았다.
<사진출처 :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참고자료>
유네스코도 인정한 한국의 기록문화유산 - 천지일보 (newscj.com) 2017.05.28
[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 바람을 쐬다..전주서 '포쇄' 행사 재현 (daum.net)2017.06.03.
[오늘의 조선왕조실록] 황희의 자식들이 도둑질을 하다 (daum.net)CBS노컷뉴스 2015.11.23
[승정원일기]
100년 걸릴 승정원일기 한글 번역… AI 투입 2년 만에 ‘탄력’ | 세계일보 (segye.com)2019-09-16
[조선통신사 기록]
[단독]조선시대 '마지막 통신사' 행렬도 국내서 처음 나왔다 - 노컷뉴스 (nocutnews.co.kr)CBS노컷뉴스 김태헌 기자2020-05-10
조선통신사 기록물은 200여년간 이어진 한일 교류의 상징 (daum.net)2017.10.31.
“18세기 조선통신사들, 일본사상 변화의 흐름 놓쳐” (chosun.com)유석재 기자2007.07.30
연세대 구지현 연구원 학술지 ‘동방학지’에서 주장
교토 민단-총련 ‘조선통신사 400돌’ 합동 행사 (hani.co.kr)2007-11-04
[조선왕실 어보와 어책]
왕가의 정통성과 권위 담은 성물..조선왕실의 어보와 어책 (daum.net)2017.10.31.
[단독] 덕종어보, 알고보니 친일파가 제작한 짝퉁 (daum.net)CBS노컷뉴스 송영훈‧김명지 기자 2017.08.18.
이완용 차남이 만든 모조품..문화재청 쉬쉬하며 특별 전시
미국에서 돌아오는 문정왕후 어보와 현종 어보 (daum.net)2017.06.09.
[조선왕조 의궤]
프랑스인이 120년전 필사한 조선왕조의궤 2종 발견 | 연합뉴스 (yna.co.kr)2020-03-23 박상현 기자
국외소재문화재재단, 佛 기메동양박물관서 확인
'화성성역의궤' 불어판 펴낸 앙리 슈발리에 제작
조선왕실의궤마다 ‘강탈’ 자인하는 총독부 붉은 도장 (hani.co.kr)노형석 기자 :2010-08-10
'의궤인도운동' 펼친 혜문스님 인터뷰 (daum.net)노형석 기자 2010. 08. 10.
세계문화유산 등재 기념 ‘조선 의궤’ 전시회 (hani.co.kr)한겨레신문 2007.10.31
[국채보상운동 기록물]
국난 극복 열망 국내외에 알린 국채보상운동 기록물 | 연합뉴스 (yna.co.kr)2017.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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