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대 민족문화상징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100대 민족문화상징 목록

민족 상징 (2개)강역 및 자연 상징 (19개)역사 상징 (17개)사회 및 생활 상징 (34개)신앙 및 사고 상징 (9개)언어 및 예술 상징 (19개)

민족 상징 (2개) 1   태극기 태극기는 대한민국의 국기이며 태극기 자체가 문화적 상징 직관물이다.
2   무궁화 무궁화는 대한민국의 국화이며 근역(槿域)이라는 용어에 역사적 함의를 담고 있다.
강역 (6개) 3   독도 대한민국과 일본 간의 영유권 분쟁 지역인 독도는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야 하는 필요성이 거론되는 곳이다. 또한 한반도 해양 강역의 최고 상징이기도 하다.
4   백두대간 백두대간은 한반도의 등뼈 역할을 하는 생태적 주축이다. 또한 한민족의 문화 경관을 형성한 공간이기도 하다.
5   백두산 백두산은 한반도에서 가장 높은 산이자 한민족의 성산이다.
6   금강산 금강산은 일만이천봉이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한반도에서 가장 빼어나고 아름다운 산으로 여겨졌다.
7   동해 동해는 세계 각지에서 제작된 지도에서 일본해라고 표기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세계적으로 동해라는 명칭을 알려야 할 필요성이 거론된다.
8   대동여지도 조선 시대의 지리학자인 김정호가 제작한 대동여지도는 한반도를 정확하게 그려낸 지도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경관 (3개) 9   황토 황토는 흙에 대한 한국인의 정서가 압축되어 있다.
10   갯벌 한국의 갯벌은 세계 5대 갯벌 가운데 하나로서 한국의 생태 문화 상징 가운데 최고봉으로 여겨진다.
11   풍수 풍수는 한국의 전통적인 환경 사상이자 조상들의 삶의 지혜가 응축된 자연 생태학이다.
동식물 (4개) 12   소나무 소나무는 한반도에서 가장 넓은 분포 면적을 갖고 있으며 한국을 대표하는 나무이기도 하다.
13   진돗개 진돗개는 한국에 서식하는 토종개이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어 보호 가치가 높다.
14   호랑이 호랑이는 한국의 민화, 설화, 신앙에 등장할 정도로 한민족을 대표하는 동물로 여겨졌다.
15   한우 한우는 한국의 역사에서 오랜 사랑을 받은 가축이며 농가 재산 목록 1호로 여겨졌다. 또한 여러 잔치와 축제에서 풍성함을 평가하는 기준으로 여겨졌고 현대에는 신토불이(身土不二) 음식의 대표 주자로 여겨지고 있다.
과학 기술 (6개) 16   천상열차분야지도 조선 시대에 제작된 천문도인 천상열차분야지도는 고구려 이래로 이어져 온 천문학, 우주에 대한 한국인의 관점을 표현하고 있다. 또한 동양에서 2번째로 오랜 역사를 가진 한국의 독자적인 천문도이기도 하다.
17   거북선 임진왜란 시기에 활약한 조선의 철갑 군함인 거북선은 해양 강국이었던 조선의 이미지를 표현하고 있다.
18   측우기 조선 시대에 발명된 측우기는 세계에서 최초로 개발된 강우량 측정 기구이다.
19
물시계와 해시계
(자격루와 앙부일구)
자격루는 조선 세종 시대에 발명된 물시계로써 자동으로 시간을 알리는 장치가 설치된 것이 특징이다. 앙부일구는 조선 세종 시대에 발명된 오목한 해시계로써 시각과 계절을 나타내는 선이 표시된 것이 특징이다.
20   수원 화성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수원 화성은 조선 시대의 실학자인 정약용에 의해 설계된 과학 구조물이기도 하다.
21   대한민국의 정보 통신
(정보 통신(IT))
대한민국은 높은 인터넷 보급률, 휴대 전화, 반도체 산업을 통해 정보 통신 강국으로 평가받고 있다.
선사 시대 (2개) 22   고인돌 고인돌은 청동기 시대에 만들어진 거대한 무덤이자 거석 구조물이다. 전 세계의 고인돌 유적 가운데 절반 이상이 한반도에 존재한다.
23   빗살무늬토기 빗살무늬토기는 신석기 시대에 한반도에서 만들어져 사용된 질그릇이다. 빗살무늬토기에 그려진 다양한 기하학 무늬는 미술사에서 높은 가치를 갖고 있다. 또한 동북아시아의 선사 시대 문화와의 연계성을 나타내는 상징이기도 하다.
도읍 (3개) 24   서울 서울은 대한민국의 수도이자 조선의 도읍인 한성부가 위치했던 곳이다. 또한 대한민국의 정치, 행정, 경제, 문화의 중심 도시이기도 하다.
25   경주
(경주(서라벌))
경주는 천년의 역사를 가진 신라의 도읍인 서라벌이 위치했던 곳이다.
26   평양
(평양(아사달))
평양은 고조선 시대에 아사달이라는 도읍이 세워졌다고 전해지는 곳이며 427년부터 668년까지 고구려의 도읍이었던 곳이다. 또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의 수도이기도 하다.
인물 (9개) 27   단군 단군은 한민족의 시조로 여겨지는 신화 속 인물이다. 또한 한민족의 역사적, 신화적, 종교적 원형이기도 하다.
28   광개토대왕 광개토대왕은 한국의 역사에서 가장 넓었던 영토를 확장한 고구려의 국왕이다.
29   원효 원효는 한국의 불교 문화의 진수를 확립한 신라의 승려이다.
30   세종
(세종대왕)
세종대왕은 한글 창제, 과학 기술 발전을 비롯한 조선의 문화 발전에 기여한 국왕이다.
31   이황
(퇴계(이황))
이황은 한국의 유교 역사에서 중대한 업적을 남긴 학자이며 세계 각지에서 연구의 대상으로 주목받고 있다.
32   이순신 이순신은 임진왜란 시기에 조선 수군을 지휘하여 세계 해전 역사에 큰 공헌을 했다.
33   정약용 정약용은 조선 시대의 실학 사상을 집대성한 인물이다.
34   안중근 안중근은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의 시대'였던 20세기 초반에 동양 평화를 위해 헌신한 상징적인 인물이다.
35   유관순 유관순은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대표적인 한국의 여성 독립운동가이자 학생 독립 운동의 선구자이기도 하다.
사찰 (1개) 36   석굴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석굴암은 한국의 불교 문화를 대표하는 문화재이기도 하다.
현대사 (2개) 37   한반도 비무장 지대
(비무장 지대)
한반도 비무장 지대는 남북한 분단의 상징이자 평화·화해가 넘치는 미래를 담고 있는 공간이다. 한반도 비무장 지대는 일반인들의 활동이 엄격히 금지되어 있어 생태 환경이 보존된 곳이기도 하다.
38   길거리 응원 길거리 응원은 대한민국과 일본에서 공동 개최된 2002년 FIFA 월드컵을 통해 대한민국에 새롭게 형성된 역동적인 응원 문화이자 광장 문화이다.
경제 (2개) 39   오일장(장날) 오일장은 조선 시대부터 오늘날까지 이어져 온 한국의 전통 시장이다.
40   해녀(잠녀) 해녀는 제주도의 바다 속에서 어떠한 장치도 착용하지 않고 잠수복을 입은 채로 해산물을 채취하는 여자를 가리킨다. 해녀는 한국의 잠수 문화, 제주도의 여자들의 강인함, 제주도의 독특한 문화에 대한 상징이기도 하다.
마을 생활 (6개) 41   강릉 단오제 한국의 4대 명절 가운데 하나인 단오에 열리는 강릉 단오제는 유네스코에서 인류 구전 및 무형 유산 걸작으로 선정되었다.
42   영산줄다리기 성 주변을 동쪽과 서쪽으로 나눠서 싸우는 영산줄다리기는 한민족의 대표적인 민속 놀이 가운데 하나로 여겨진다.
43
솟대와 장승 솟대는 마을의 풍요와 안녕을 기원하고 수호신 역할을 하기 위하여 마을 입구에 설치한 장대이다. 장승은 마을 간의 경계를 표시하는 이정표, 귀신을 쫓는 수호신 역할을 하기 위하여 마을 입구에 설치한 기둥이다. 이처럼 솟대와 장승은 마을 신앙을 상징한다.
44   두레 두레는 한국의 농촌에서 서로 도와가며 살아가던 공동체 문화를 상징한다.
45   정자나무 정자나무는 한여름의 더위를 피하기 위해 휴식하는 공간, 마을의 평화와 안녕을 염원하는 공간, 자신의 소원을 비는 공간, 마을의 중대한 사안에 관한 회의를 진행하는 공간으로 여겨졌다.
46   돌하르방 돌하르방은 제주도를 상징하는 석조물이다.
의생활 (3개) 47   한복 한복은 한국 고유의 전통 의상이다.
48   색동 색동은 보다 넓고 다양한 한국의 색채 문화를 상징한다.
49   다듬이질 다듬이질 소리는 한국을 상징하는 여러 소리들 가운데 하나로 여겨진다.
식생활 (11개) 50   김치 김치는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한국의 대표적인 발효 음식이다.
51   한국의 쌀 문화를 상징하는 떡은 서양의 밀 문화를 상징하는 빵에 필적한다.
52   전주비빔밥 다양한 영양가를 띠는 전주비빔밥은 한국인 뿐만 아니라 세계인이 찾을 수 있을 정도로 세계화가 가능한 음식으로 여겨진다.
53   고추장 매운 맛을 내는 고추장은 한국의 장류 문화의 상징이기도 하다.
54
된장과 청국장 된장과 청국장은 식물성 단백질 문화의 최고봉이자 발효 식품의 대표 주자이다.
55   삼계탕 닭, 인삼, 마늘, 대추를 넣고 만드는 삼계탕은 한국의 대표적인 여름철 보양 음식으로 여겨진다.
56   옹기 사람의 눈에는 잘 보이지 않는 작은 구멍을 통해 숨을 쉬는 항아리인 옹기는 한국의 그릇 문화를 상징한다.
57   불고기 불고기는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한국의 대표적인 고기 요리이다.
58
소주와 막걸리 소주와 막걸리는 한국인들이 즐겨 마시는 술이자 한국의 서민 문화의 상징이다.
59   냉면 냉면은 한국의 대표적인 찬국수 요리이며 시원하고 새콤달콤한 맛이 특징이다.
60   짜장면 짜장면은 원래 중국에서 유래된 음식이나 한국에 전래되면서 독창적인 음식으로 발전했다. 누구나 즐겨찾는 대표적인 외식 메뉴가 되었고 세계화가 가능한 음식으로 여겨진다.
주생활 (4개) 61   한옥 한옥은 한민족의 전통적인 주거 양식이다.
62   온돌 방 바닥을 따뜻하게 하는 온돌은 한국 특유의 난방 문화를 상징한다.
63   제주도 돌담 삼다도(三多島)로 유명한 화산섬인 제주도 돌담은 자연과 인간이 만든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또한 화산섬인 제주도 특유의 돌 문화에 관한 상징으로 여겨진다.
64   초가 초가는 한국의 살림집 문화의 최고봉으로 여겨진다.
건강·체육 (6개) 65   동의보감 조선의 의학자인 허준이 집필한 《동의보감》은 오늘날에도 인용되고 있는 한의학의 대표 서적이다.
66   인삼 고려 시대에 아라비아반도의 상인들이 인삼 무역을 하면서 한국이 외국에서 처음으로 '코리아'(Korea)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처럼 한국의 인삼은 세계에서 건강의 상징으로 여겨지고 있다.
67   태권도 한국의 전통 무술인 태권도는 세계 각지에 전파되어 하계 올림픽 정식 종목으로 채택된 스포츠이기도 하다.
68   씨름 삼국 시대부터 이어져 온 한국의 씨름은 한민족의 대표적인 민속 놀이 가운데 하나로 여겨진다.
69   한국의 전통적인 활인 국궁, 국제 스포츠계에서 명성이 높은 대한민국의 양궁은 한국의 활 문화를 대표한다.
70   윷놀이 윷놀이는 옛부터 누구나 즐길 수 있는 한국의 전통 오락으로 여겨졌다.
교육 (2개) 71   서당 삼국 시대부터 조선 시대까지 향촌에서 기초 교육을 담당하던 기관인 서당은 한국인의 교육열에 관한 상징으로 여겨진다.
72   한석봉과 어머니 조선 시대의 대표적인 서예가 가운데 한 사람인 한석봉과 어머니에 관한 일화는 중국의 맹모삼천지교와 맞먹는 한국의 전통적인 교육관을 상징한다.
불교 (2개) 73   한국의 선불교
(선(禪))
선은 한국의 불교에서 활용되는 명상 문화이자 대표적인 수행 방식이다.
74   미륵 미륵은 불교에서 다음 세상의 부처가 될 것이라고 여겨지는 보살이다. 이처럼 한국의 불교에서는 미륵이 미래와 희망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유교 (3개) 75   (孝) 부모를 섬기는 효는 근본적인 덕행으로 여겨진다.
76   선비 선비는 유교 문화에 기반한 조선 사회에서 학식과 예의가 있고 의리와 원칙을 소중히 여기면서 관직과 재물에 대한 욕망을 거부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77
종묘와 종묘 제례
(종묘와 종묘 대제)
종묘는 조선 왕조의 역대 국왕들과 왕후들의 신주가 봉인된 사당이고 종묘 제례는 말 그대로 종묘에서 지내는 제사를 의미한다. 종묘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었고 종묘 제례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무속 (4개) 78   굿 굿은 한국의 무속 신앙에서 무당이 신에게 제물을 바치고 춤과 노래로 인간의 길흉화복 운명을 비는 의식을 가리킨다.
79   성황당(서낭당) 성황당(서낭당)은 마을을 수호하는 서낭신을 모시는 돌무더기로 마을 입구나 고갯길에 형성되었다.
80   도깨비 도깨비는 한국의 예술 작품, 민담에서 등장하는 상상의 존재로서 악귀를 쫓아내는 문화에 관한 상징으로 여겨진다.
81   금줄 금줄은 신성한 공간과 일상 공간을 구별하고 부정한 것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설치한 줄이다. 또한 신생아가 태어난 집에서는 외부인의 출입을 금지하기 위하여 설치하는 줄로 활용되었다.
언어 (1개) 82   한글(훈민정음) 조선 세종대왕 시대에 창제된 《훈민정음》은 한국의 글자인 한글의 원형이기도 하다.
기록 (4개) 83   한지 닥나무 등의 나무 껍질로 만든 한국의 전통 종이인 한지는 천년이 넘는 보존 능력을 갖고 있다.
84   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은 조선 태조부터 철종에 이르기까지 25대에 걸친 역사를 담은 역사서이다.
85   팔만대장경 《팔만대장경》은 고려가 몽골의 침공을 불교의 힘으로 막아내기 위하여 제작한 불교 경전이다.
86   직지심체요절 고려 시대에 제작된 《직지심체요절》은 현존하는 금속 활자 인쇄본이다.
미술 (7개) 87   고구려 고분 벽화 고구려의 고분 벽화는 고구려 시대의 생활, 문화 수준을 표현하고 있다.
88   반가사유상 반가사유상은 삼국 시대에 제작된 대표적인 불상이다.
89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
(백제의 미소(서산마애삼존불))
일명 '백제의 미소'라고 부르는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은 백제인의 예술과 미적 감각을 표현하고 있으며 한국 불교 미술사의 대표작으로 여겨진다.
90   고려청자 고려청자는 한국의 화려한 미적 감각을 표현한 문화유산이다.
91   백자 한국의 백자는 조선 시대에 전성기를 이루었다.
92   분청사기 고려 말기부터 조선 전기인 16세기 사이에 제작된 분청사기는 한국 특유의 도자 문화이다.
93   막사발 막사발은 원래 서민들 사이에서 생활용품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만든 그릇이다. 그러나 16세기에 임진왜란을 계기로 조선의 도공들이 일본으로 건너가면서 저평가되었기 때문에 재평가가 필요하다고 여겨진다.
연희 (2개) 94   풍물놀이
(풍물굿(농악))
풍물놀이는 농촌에서 함께 노동을 하는 농민들의 애환을 달래주는 음악과 춤이다.
95   탈춤 탈을 쓰고 벌이는 한국의 전통적인 가면극인 탈춤은 한국인의 또다른 얼굴로 여겨진다.
음악 (4개) 96   판소리 판소리는 서사적인 양식을 띤 한국의 전통 음악 양식이자 일종의 솔로 오페라이다.
97   아리랑 《아리랑》은 한국을 대표하는 민요이자 한민족 사이에서 널리 불려진 노래이다.
98   거문고 거문고는 옛부터 모든 악기의 으뜸을 뜻하는 '백악지장'(百樂之丈)이라고 불렀다. 또한 한국의 전통 악기 가운데 가장 넓은 3옥타브에 가까운 음역을 갖고 있다.
99   대금 한국의 전통적인 관악기인 대금은 전통 음악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으며 맑고 고운 음색이 특징이다.
문학 (1개) 100   춘향전 성춘향과 이몽룡의 사랑을 주제로 한 한국의 고전 소설인 《춘향전》은 한국의 대표적인 고전 문학 작품이기도 하다.

 

출처; 100대 민족문화상징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List of Korean inventions and discoveries - W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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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This is a list of Korean inventions and discoveries; Koreans have made contributions to science and technology from ancient to modern times. In the present, South Korea plays an active role in the ongoing Digital Rev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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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pottery and porcelain - Wikipedia

 

Korean pottery and porcelain - Wikipedia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A celadon incense burner in Goryeo ware with kingfisher glaze. National Treasure No. 95 of South Korea. Korean ceramic history begins with the oldest earthenware from around 8000 BC. Throughout the history, the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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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정 2019-10-20 17:20 등록 2006-11-30 18:30

주작 현무… 벽화를 뛰쳐나온 ‘아! 고구려’ (hani.co.kr)

한겨레원형질 민족문화상징100 (18)미술과 사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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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동반가사유상 / 석굴암 본존불


고구려 고분벽화와 분청사기

고구려 고분벽화에 대한 총체적 느낌을 우리는 흔히 “웅혼한 기운”, “박력”, “신비한 기운” 등으로 표현한다. 모두 기운, 즉 생동감의 형용구다. 예술 작품이 그 시대 문화와 정신의 진수를 응축해 표현한 것이라면, 민족의 영원한 영웅 광개토대왕의 활동기를 포함한 5~7세기 조성된 고구려 고분벽화는 분명 고구려인의 높은 기상을 예술로 승화시킨 결과라 할 수 있다. 걸작 중의 걸작은 6세기의 남포 강서대묘· 강서중묘와 평양의 진파리고분, 집안의 오회분 벽화다. 이 벽화들의 사신도나 비천 등 신수신인 표현은 중국의 동일 주제가 지닌 도안적 한계를 넘어 초월적 신성과 기운을 형태의 거침없는 재해석과 원숙한 묘사력을 통해 완벽하게 표현해 내고 있다. 수목 등 자연을 사실적 기법으로 표현한 진파리 벽화의 경우에도 흔들리는 듯한 수목 사이로 신수와 운문과 화문이 공간을 빙글빙글 돌면서 신비한 우주적 기운을 발산하고 있다. 율동하는 형태들과 화려한 광물성 색채의 원숙한 조합이 빚어내는 회화적 위대함은 고구려 고분 벽화가 세계미술사의 한 장을 차지하는 데 부족함이 없다는 점을 웅변해준다.

막사발 / 분청사기 / 연화문표주박모양주전자


남포 강서대묘·평양 진파리고분…중국 영향 벗고 독창적 예술경지

 

그러나 실상은 다르다. 북한 고구려 고분군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최근까지도 국제 사회는 존재와 가치를 알지 못했다. 그 예술성도 아직도 세계미술사에는 제대로 기록되지 못하고 있다. 흥미롭게도 세계에 처음 알려진 고구려 고분벽화는 진파리 벽화다. 감식안의 미술사가 로런스 시크먼의 주목을 받아 그의 저서 〈중국 미술과 건축〉에서 중국 육조시대 미술의 대외적 영향과 성과로서 1965년 단편적으로 소개되었다. 일제시대 고분을 발굴하고 조사한 일본 학자들은 고구려 고분벽화의 세계적 업적을 일본 밖으로 알리려는 노력이 없었으며, 해방 뒤 국내의 학술적 성과도 한국과 일본 외의 다른 지역, 심지어는 중국 학계까지도 거의 알리지 못했다. 미국·영국을 포함한 영어권내 대학 교과서로 널리 사용된 셔먼 리의 명저 〈동양미술사〉(A History of Far Eastern Art: 다섯 번째 개정판이 나와 있음)에도 고구려 고분벽화는 언급조차 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공산권 국가인 중국과 북한에 있는 고분벽화의 실견과 직접 연구가 힘들기도 했지만, 사진과 모사도를 통해서라도 국제 사회와 학계에 고구려 고분벽화의 역사적, 미술사적 가치를 알리는 영문 논문과 저서 출판이 활발하지 못한 까닭이기도 하다고 본다. 필자를 포함한 한국 학자들의 책임을 통감하지 않을 수 없다.

외국인들은 한국인, 한국 문화를 “다이내믹”하다고 표현하곤 한다. 정부도 “다이내믹 코리아”를 표방한다. 특히 2002년 월드컵을 계기로 한국인들은 민족수난기를 거치고 서양 문화에 동화하면서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던 활달한 기상이 민족에게서 떼어낼 수 없는 일부로 잠재해 있었고 언제든지 어떤 형태로 분출할 수 있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고구려 벽화 걸작에 나타나는 웅혼한 기운과 생동감은 벽화예술이 고대부터 현대까지 이어지는 한민족의 기상과 자신감을 가장 탁월하게 상징하는 예술적 업적 중 하나임을 말해 준다.

김홍남 국립중앙박물관장


탈정형적 붓질의 분청사기는 현대 추상표현주의의 ‘젖줄’

고구려 고분벽화 외에도 중국 문화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독창적 예술적 경지에 도달한 분야로는 삼국·통일신라 시대의 조각예술인 김유신 묘의 12지상, 국보 78, 83호 반가사유상과 석굴암을 비롯해 고려 청자와 불화, 조선시대 분청사기와 백자 등을 들 수 있다.

 

내세불인 미륵 신앙 소산인 반가사유상은 완성미와 심오한 종교성으로 세계인을 감동시키고 있다. 통일신라의 웅혼한 기운과 자신감은 석굴암의 건축과 조각에 여실히 드러난다. 불교건축과 조각의 정점에 도달한 동양의 보물이다.

기교와 예술성에서 고려청자와 고려불화는 동시대 전 세계 예술의 정점에 도달해 있다. 새 왕조의 탄생으로 문화의 극적 변화를 가져온 조선시대를 대변하는 분청사기와 막사발, 백자에서 보이는 취향의 역전은 흥미진진하고 감동적이다. 이 중 분청사기는 조선시대의 질박한 미의식을 표방하면서 15세기를 풍미하였고 일본 도자예술과 차 문화에도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귀족적인 고려청자 특유의 섬세하고 화려한 기법과 조형적 틀을 깨고, 생동감 넘치는 자유분방한 붓질과 즉흥적이고 탈정형적인 문양과 그림을 구사한 것이다. 여기에 회색빛과 잿빛, 재청색 색채 층들의 충돌과 조화를 통해 분청사기는 형식과 관습에 구애받지 않는 탈속적인 선의 경지로 다가간다. 따라서 불교사찰들이 즐겨 사용하는 다기가 분청사기라는 사실은 놀랄 만한 일은 아니다. 분청의 모습은 백자의 유행으로 15세기 말을 기해 조선시대에는 볼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결국 위대한 예술은 영원히 사라질 수 없는 운명을 타고나는 것 같다. 그 질박한 미완의 미와 추상표현주의적 효과는 현대 한국인의 미감에도 만족감을 줄 뿐 아니라, 현대 도예가들의 창의력을 자극하는 도자예술로 다시 태어나도록 돕는 모티브가 된다. 분청사기의 이러한 동시대적 가치는 분청이 문화상품 개발의 주요한 품목으로 등장하고, 현대 한국인의 일상생활의 다양한 용기로 애용된다는 점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전승공예와 달리 문화콘텐츠 개발은 현대 한국인의 생활과 미의식에 맞는 문화이미지와 상품을 창안하는 데 전통문화유산을 적극 활용한다는 게 뼈대다. 일반적으로 문화콘텐츠 개발 하면 전통문양의 차용, 전통색채로 각인된 오방색이나 단청의 단순한 활용에만 치중하는 것을 흔히 본다. ‘한류’는 전통의 모방에서가 아니라 창조적 재해석으로 현대 한국인 스스로 즐기기 위해 나온 수준 높은 문화 산물이다. 외국에 가보면 한국의 문화경쟁력은 계속 뒤처진다는 느낌이 든다. 한국의 역사와 문화, 한류의 지속, 문화이미지의 개선을 위해서는 전문적 홍보가 필요하다. 엄청난 예산을 국제교류와 외국인 관람객 유치, 대외 문화사업에 쏟아 붓고 있지만, 중국이나 일본과 달리 정작 국제적 수준의 홍보는 현행 정부 제도로는 불가능하게 되어 있다. 대상 국가의 홍보 컨설팅과 홍보 인력 채용은 물론이고 홍보 회사도 고용할 수 없는 예산체제여서 정작 그 나라의 현실을 잘 모르는 국내 사업체나 한국대사관, 문화원의 아마추어리즘에 기대버리고 만다. 해외 문화관광사업 총예산의 10퍼센트 정도는 과감히 전문적인 국제홍보에 투자해야 하며, 문화를 알리는 해외 출판에도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이다.

김홍남 국립중앙박물관장

 

 
2016년 11월 09일 (수) 21:00
 
“무지개 색깔은 몇 개 입니까?”

8일 오후 7시 서울 종로구 인사동 태화빌딩 대강당에서 열린 국학원 제160회 국민강좌에 초청된 우실하 한국항공대학교 인문자연학부 교양학과 교수는 이렇게 물었다. 누군가 대답한다. 
“일곱 빛깔 무지개, 일곱 개입니다.”
“정말 확실합니까?”
이런 문답을 한 우 교수는 무지개색은 문화권마다 다르다고 이야기했다. 서양에서 시기마다 그리스시대 크세노폰은 3색, 아리스토텔레스는 4색으로, 로마시대 세네카는 5색으로 보았다. 7색으로 본 사람은 뉴턴이었다. 뉴턴은 왜 일곱 색으로 분류했을까.

 

우실하 항공대 교수, 국학원 '제160회 국민강좌서 '우리 문화와 사상의 원류 '3수 분화의 세계관' 강연

 

“유럽의 경우에는  수메르지역에서 기원한 성수(聖數) 7의 문화가 뉴턴 당시에는 이미 북유럽의 샤머니즘적 사유체계를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우 교수는 설명했다. 중국의 성수는 8이어서 북경올림픽을 2008년 8월8일 저녁 8시8분8초에 개막했다.

▲ 우실하 한국항공대 교양학과 교수가 8일 오후 7시 서울 종로구 인사동 태화빌딩 대강당에서 열린 국학원 제160회 국민강좌에서 강연을 했다.

우 교수에 따르면 서구에서 뉴턴으로부터 일반화되기 시작한 일곱 색깔 무지개라는 관념은 불과 100여 년 전 개항기에 서구와의 만남을 계기로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 전에 우리는 오색(五色) 찬란한 무지개였다. 이는 음양오행론에서 나온 것이다. 선도(仙道)에서는 9, 아홉 색깔 무지개로 보는데 이는 북방 샤머니즘의 고유한 사유체계인 ‘3수 분화의 세계관(1·3·9·81)에서 비롯된 것이다.
우 교수는 이날 한국 문화와 사상의 원류 '3수 분화의 세계관'을 주제로 강연을 했다.

우 교수는 20년 가까이 연구를 지속한 결과, ‘3수 분화의 세계관’이 고대 북방 샤머니즘을 공유하고 있던 동북아시아뿐만이 아니라 중앙아시아를 거쳐 북유럽 지역의 기층문화에도 폭넓게 존재한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고 밝혔다. 이런 까닭에 그는 현재는 ‘3수 분화의 세계관’을 ‘동북아 모태문화’라는 범위를 넘어 ‘북방 유라시아 모태문화’라고 부른다.
 ‘3수 분화의 세계관’은 중원 쪽에서는 황노학(黃老學), 도가나 도교, 신선사상 등에 체계화된다. 우리나라에서는 삼신사상(三神思想), 선도, 풍류도, 대종교 등에 체계화된다.

▲ 8일 열린 국학원 제160회 국민강좌에서 참석자들이 우실하 교수의 강연을 듣고 있다.


 우 교수는 “(1) ‘하나이면서 셋이고 셋이면서 하나’인 3.1(Three in One)관념을 바탕으로 한 3.1철학을 ‘본체론적인 논리’를 지니고, (2) 하나에서 둘을 거치지 않고 셋으로 지속적으로 분화되는 ‘3수 분화의 프랙탈(fractal) 구조’에 기초한 ‘우주론적 자기 전개의 논리’를 지니며, (3) 이 과정에서 탄생하는 3, 9(3×3), 81(9×9)이 특별한 상징성을 지닌 성수로 사용되는 북방 샤머니즘의 일련의 사유체계가 ‘3수 분화의 세계관’이라고 설명했다.

우 교수에 따르면 팔괘가 아래 위로 쌓이면서 64괘를 형성, 64괘에 관한 풀이가 주역(周易)인데 주역은 음양(陰陽)이라는 ‘2수 분화의 세계관’을 체계화한 철학이다. 양웅(揚雄, B.C. 53~A.D. 18)의 ‘태현경(太玄經)’은 유가의 ‘주역’과 쌍벽을 이루는 것으로 ‘도가의 역’이라고 불린다. 우 교수는 ‘태현경’에서는 ‘주역’의 음양론에 따른 ‘2수 분화’와는 전혀 다른 ‘3수 분화’의 논리를 보여준다고 강조했다.

성스런 수 3·9·81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우 교수는 3은 ‘변화의 계기수’라고 설명한다. 우리 속담에도 ‘좋은 말도 3번 하면 듣기 싫다’ ‘셋째 딸은 보지도 않고 데려간다’ 등이 그 증거이고 몽골에서는 오보를 3바퀴 돌면서 기원을 하고 고시래도 3번 한다는 데서 이를 알 수 있다.

9(3×3)는 변화의 완성수이다. ‘시집살이는 벙어리 3년, 봉사 3년, 귀머거리 3년이다’는 속담은 9년이면 시집살이가 끝난다는 것이니 변화의 완성이다. 꼬리가 9개 달린 구미호(九尾狐)를 보면  구미호도 재주를 3번 넘어야 변화가 시작되고 완성된다. 우 교수는  81(9×9)은 ‘우주적 완성수’ 완벽한 완성을 의미한다고 설명한다. 몽골 나담축제에서 씨름, 활쏘기, 말달리기 3종 경기가 열리고, 최종 우승자에게 81종의 선물을 주었던 것도 81을 ‘우주적 완성수’로 보기 때문이다. 우 교수는 몽골의 천막집인 ‘겔’에는 우리나라의 서까래에 해당하는 우니(Uni)가 대부분 81개라고 사진을 보여주었다.

우 교수는 ‘3수 분화의 세계관’이 후대에 논리화, 철학화된 것이 도가(道家)나 신선사상, 선도 계통에 잘 정리된 소위 ‘3.1철학’이라며 ‘3.1철학’에서는 ‘하나이면서 셋이고, 셋이면서 하나’임을 강조하고 논리전개의 출발점으로 삼는다고 말했다.
그러면 ‘3수 분화의 세계관’은 어디에서 왔을까. 우 교수는 ‘환일(幻日) 현상’으로 설명했다. 공기 중의 얼음입자에 태양빛이 반사되어 태양의 좌우 22도 각도에서 각각 가짜 태양이 뜨는 현상을 환일 현상이라 한다. 우리말로는 ‘여러 개의 해’를 의미하는 ‘무리해’,  한자어로는 ‘가짜 태양’이라는 의미의 환일(幻日), 과학용어로는 파히리온(Parhelion)이라 한다.
▲ 우실하 교수


우 교수는 환일현상과 ‘3수 분화의 세계관’을 이렇게 설명했다.  “고대인들에게 태양은 신=태양신이었다. 몇년만에 한 번씩 환일 현상이 일어난다면, 고대인들에게는 형용하기 어려운 충격이었을 것이다. 환일이 일어난 다음날 다시 1개의 태양이 뜨면, 고대인들에게는 ‘저 1개의 태양 안에는 3개의 태양이 내재되어 있다’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1개의 태양 안에 3개의 태양이 내재되어 있다’는 고대인들의 믿음은 몇 년을 단위로 반복해서 나타나는 환일현상을 통해 확신이 되었다. 이러한 1=3이라는 삼일관념, 삼일신 개념은 후대에 체계화 논리화된다. 1이 지속적으로 3으로 분화되는 사유체계는 북방샤머니즘의 고유한 사유체계인 ‘3수 분화의 세계관(1-3-9-81)’로 정착되게 된다.”


우 교수는 연구를 거듭한 결과 ‘3수 분화의 세계관’이 매우 넓게 확산되었다고 주장한다. 이는 북방 샤머니즘 지역에서 기원하여 홍산문화 후기(B.C. 3,500~ B.C. 3,000)에 최초로 체계화되어 북방 샤머니즘 안에 잘 보존되어 있다. 북방 초원 루트를 통한 민족과 문화의 이동, 교류, 전파를 통해서 중앙아시아 샤머니즘과 북유럽신화, 고대 켈트족의 드루이드교 등을 통해 기층문화에 전승되고 있다. 몽골리안 루트를 따라 간헐적으로 이동이 이루어진 남북 아메리카지역에서도 전승되고 있다. 기원전 2,000~1,500년 고대 아리안족의 대대적인 남방 이동으로 이들이 점령한 인더스 문명지역에도 일부 전승되고 있다.


우 교수는 “‘3수 분화의 세계관’이 한반도 쪽으로 내려오면서 선도와 풍류도, 그리고 각종 민족종교에 전승되고 있다. 중원 쪽으로 남하하면서 신선사상, 도가, 황노학, 도교 등에 전승되고 있다.” 고 강조하고 강연을 마무리했다.


우실하 교수는 연세대 사회학과를 졸업하였고 중국 요녕대 한국학과와 적봉대 홍산문화연구원 교수를 역임하였다. 현재 한국항공대학교 인문자연학부 교양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요 저서로는 ‘3수 분화의 세계관 : 동북아 모태문화(2012)’, ‘고조선의 강역과 요하문명(2007)’, ‘동북공정 너머 요하문명론(2007)’, ‘한국 전통 문화의 구성 원리(1998)’ 등이 있다.

글/사진. 정유철 기자 npns@naver.com

 

 

  • 수정 2019-10-20 17:20 등록 2007-10-05 20:50

전통문화에 숨어 있는 ‘3’의 비밀 엿보기

읽어보아요 / <숫자 3의 비밀>

김종대 글·이부록 그림/사파리(옛 언어세상)·1만1000원

 

어린이 지식정보책을 만드는 일은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전달되는 내용도 정확해야 하지만, 무엇보다도 독자의 관심과 호기심을 생생하게 일깨울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많은 지식과 정보를 싣고 있어도 자유로운 상상력을 억누르는 책이라면, 차라리 만들지 않는 편이 낫다.

 

〈숫자 3의 비밀〉은 우리 문화와 의식에 깊이 스며들어 있는 ‘3’이라는 숫자의 의미를 찾아 떠나는 여행이다. 여행은 건국신화인 단군 이야기에서 시작된다. 하느님의 아들 환웅이 하늘의 보물 셋과 세 신, 삼천 명의 부하를 이끌고 세상으로 내려온다. 곰은 쑥과 마늘을 먹으며 동굴 안에서 삼칠일을 견딘 다음, 여인이 되어 환웅과 결혼하고 단군을 낳는다.

 

우리 조상들은 아기를 낳으면 밥과 미역국과 물을 세 그릇씩 차려 놓고 세 번에 걸쳐 삼신할머니에게 기도를 올렸다. 강원도에서는 풍년과 안녕을 비는 제사 때 성황지신, 토지지신, 여역지신을 한자리에 모셨다. 옛이야기나 생활 속에서도 3이라는 숫자는 의미심장하다. 까치는 자기 몸을 던져 종을 세 번 울려서 새끼를 살려준 사람에게 은혜를 갚고, 여우에게 홀린 선비를 구한 삼족구는 다리가 셋 달린 개다. 아들이나 딸이 여럿일 경우 주인공은 으레 셋째이며, 장례 풍습도 3이라는 숫자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조상들이 그토록 3을 중요시한 것은, 이것이 남자를 뜻하는 수 1과 여자를 뜻하는 수 2를 합한 완전한 수여서이다. 세상의 이치를 음양의 원리로 이해한 셈이다.

 

만만찮은 내용을 참 다양하고 재미있게 꾸렸다. 구수한 입말 투로 들려주는 이야기도 감칠맛 나지만, 상징적인 의미를 해학적으로 풀어낸 그림도 일품이다. 이에 못지않게 마음을 끄는 것은 책의 편집이다. 표지와 본문, 심지어 면지에 이르기까지 세심한 정성과 주의가 느껴진다.

오석균/도서출판 산하 주간 mitbach@hanmail.com

 

 

2014년 07월 27일 (일) 12:34

중국ㆍ일본에 빼앗긴 제천의례, 원구단에서 ‘부활’ (brainmedia.co.kr)

[단군문화기획 4편] 서울 남산제례문화원과 원구단

 
▲ 2013년 '원구단 개천축제'에서 인사말하는 신복동 남산제례문화원장(제공=매일종교신문)


서울 남산타워에 가본 적이 있는가? 다음에 케이블카를 타면 내려올 때 오른쪽 창가 밑을 보라! 대형 태극기와 단군상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곳이 원구단에서 개천절을 지내는 남산제례문화원이다. 문화원은 남산케이블카 입구에서 충무로로 내려오는 길 왼편 돈가스 식당가 뒤편에 있다.

2층으로 올라가니 환웅(桓雄)을 모신 천진궁, 마고(麻姑)를 모신 조상궁이 모습을 드러냈다. 옥상은 케이블카에서 본 단군이다. 이곳을 천단이라고 한다.

신복동 남산제례문화원장(72)은 2010년도에 박영록 범민족화합통일운동본부 총재를 만나 ‘원구단 개천 축제’를 열고 있다.

그렇다면 원구단은 어떠한 곳인가? 고려 성종2년(983) 정월에 “왕이 원구에서 기곡 祈穀할 새 태조로서 배향하였다”라는 기록이 보인다.

조선 태종 때 변계량(卞季良)은 우리나라는 중국 천자의 분봉국(分封國)이 아니고 ‘단군이 하늘에서 내려와 개국하였기 때문에’ 임금이 천제를 지낼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1464년에 천자가 아닌 왕이 하늘에 제를 올리지 못한다는 강압 때문에 원구제는 중단되고 만다.

433년이 지난 후 고종은 원구단을 세우고 대한제국을 선포한다. 황제 즉위식과 함께 제천의식을 지냈다. 하지만 1913년 일제에 의해 원구단은 헐리고 그 자리에 총독의 철도호텔(현 조선호텔)이 들어서는 비운을 맞는다.

중국과 일본에 짓밟힌 제천의례는 지난 2008년 전주이씨대동종약원에서 100여 년 만에 환구대제라는 이름으로 복원됐다. 이어 2009년부터 민족단체에서 10월 3일 개천절 장소로 부활했다.

박영록 총재는 “개천절은 한민족이 한 뿌리 한 형제자매임을 되새기고 미래를 어떻게 개척해나갈 것인가를 다짐하기 위해 모인 자리”라고 말했다.

장영주 국학원장(대행)은 “사직 제157호 원구단에서 봉행하는 천제를 통해 배금주의와 개인주의가 만연한 우리 사회에 조상의 뿌리를 알게 하고 충효의 정신을 새롭게 정립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했다.


▲ 서울 남산타워에서 케이블을 타고 내려가면 남산제례문화원 대형태극기와 단군상을 볼 수 있다.(사진=윤한주 기자)


신 원장은 개천절 행사에 참석한 시민들에게 고마움을 나타냈다.

“음력 개천절을 지낼 때가 (날씨가) 추워요. 그 추운데 그 사람들이 절 보고 오겠어요? 우리 조상님, 국조 할아버지 개천절 행사를 기억해서 지방에서 오는데 얼마나 감사해요. 일일이 차비는 못 해줘도 달력과 수건 하나, 떡을 봉투에 담아서 드려요.”

신 원장은 원구단 천제에 만족하지 않는다. 많은 관광객이 천제를 봐야하기 때문에 제대로 준비하겠다고 밝혔다.

현재 남산제례문화원은 ‘천부경 강해’, ‘풍수지리’, ‘태극기와 건강생활’, ‘정체 치유법’ 등을 주제로 대중강의를 무료로 열고 있다.(문의 02-774-6950)

글. 윤한주 기자 kaebin@lycos.co.kr

 

 

수정 : 1970-01-02 00:00  

솔밭공원서 ‘삼성제례’ 재현

 

 

3일 삼각산 축제 열려

다음달 3일 개천절을 맞아 강북구 우이동 솔밭공원에서는 제11회 ‘삼각산 축제’가 열린다.

삼각산은 예부터 나라의 중요한 제사를 지내던 제례터다. 삼각산 축제는 강북문화원 주최로 1997년부터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되찾기 위해 환인·환웅·단군 등 민족의 세 조상에게 제와 예를 올리는 ‘삼성제례(三聖祭禮)’를 재현하고 있다. 삼성제례는 조선시대에도 꾸준히 진행되다 일제가 우리 민족문화를 말살하기 위해 황해남도 은율군 삼성당을 파괴하면서 중단됐다.

이날 오전 10시 축제 개회식에 앞서 ‘삼각산’ 백운봉에서 채화식을 갖는다. 채화단과 풍물패는 백운봉부터 솔밭공원까지 길놀이를 하면서 채화봉을 옮긴다. 김현풍 강북구청장이 제단에 점화를 하면 선녀춤이 시작된다. 이어지는 단군제례는 3성(환인·환웅·단군)을 부르는 강신례,3성 위패의 문을 여는 개문례,3성에게 향을 올리는 분향례 등 순으로 진행된다.‘천부경’을 낭독하고,3성에게 차와 폐백(비단과 구슬)도 올린다.

공연 행사에서는 삼양초등학교 어린이들이 사물놀이를, 봄꽃빛 어린이합창단이 전래동요 합창을 한다. 또 국악인 유창·이기옥·김필홍씨 등이 경기민요 한마당을 펼친다. 구경나온 주민들을 흥겹게 하기 위해 플라멩코·삼바·캉캉 등 세계 민족춤 공연도 무대에 선다. 동춘서커스단의 퍼포먼스도 즐거운 분위기를 연출할 것으로 기대된다. 한편에서는 무료 가훈써주기, 천연비누 만들기 등 체험학습, 가족사진 무료촬영 등이 열리고, 먹거리 장터도 펼쳐진다.

김 구청장은 “삼각산 축제는 단순히 즐기는 축제가 아니라 우리 민족의 뿌리를 찾아 떠나는 여행”이라고 말했다.

김경운기자 kkwoon@seoul.co.kr

 

한민족역사문화공원 개천절에 개원 (daum.net)

입력 2008. 9. 26. 14:31수정 2008. 9. 26. 14:31
 

(서울=연합뉴스) 왕길환 기자 = 충남 천안시의 흑성산 자락에 '한민족 역사문화공원'이 생긴다.

26일 사단법인 국학원(설립자 일지 이승헌)에 따르면 공원 개원식은 개천절인 다음 달 3일 미국과 일본, 캐나다, 독일 등 8개국 1천여 명의 축하사절단 등 1만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릴 예정이다.

개원식은 개천절 기념식과 개천 천제, 문화공연, 세계지구인 축제 등으로 진행된다.

특별행사로 한민족의 역사와 문화를 알려주는 '국혼사진전', '개천축하 길놀이', 단군, 웅녀 등 역사인물 복장을 갖춘 세계국학원청년단의 '단군 의상연출', 개인과 민족과 인류의 꿈을 적어 신단수에 다는 '소망나무 신단수 열매달기', 한민족의 새로운 탄생과 지구경영의 시대를 기원하는 '풍등 날리기' 등 다양한 이벤트도 펼쳐진다.

 

6만여 평의 대지에 개원하는 이 공원은 개국의 역사마당, 역사위인마당, 광복의 역사마당, 선도의 역사마당 등 주제별로 조성됐고, 각 나라의 개국 시조상과 한민족의 역사를 지켜 온 위인상 등이 세워져 우리 민족의 건국이념과 정신문화를 직접 보고 체험할 수 있는 장이 될 것으로 보인다.

1단계가 완료된 역사공원은 국학회원을 비롯한 각계각층의 국민과 국외 성금 25억 원으로 만들어졌다. 재외성금은 3억3천만 원으로 일본과 미국, 캐나다와 독일 등 국학원 해외지부 회원과 세계지구인연합회 각국 회원으로부터 답지했다.

이 공원에는 앞으로 2010년과 2012년까지 2, 3단계로 교육관, 전시관, 국궁장, 민속체험관, 선도체험마을 등이 건립될 계획이다.

국학원은 한민족의 정신과 문화의 뿌리를 연구하고, 국민에게 알리는 역할을 하는 민간 교육기관이다.

ghwang@yna.co.kr

 

 

 

입력 :2008-03-28 00:00ㅣ 수정 : 2008-03-28 00:00 

한국문학에 나타난 외국의 의미/존 프랭클 지음

 

한국은 ‘은자의 나라’가 아니었다

 

미국의 동양학자 윌리엄 엘리엇 그리피스가 ‘은자의 나라, 한국(Corea-The Hermit Nation)’을 펴낸 것은 1882년이다.‘은자의 나라’란 당시 외부 세계에서 한국을 바라보는 일반적인 시각을 반영한 결과였을 것이다. 한국이 역사를 이어온 대부분의 시간 동안 문호 개방을 완강히 거부했다는 통념이다. 이 책은 이후 한국을 은둔의 이미지로 고착화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하지만 존 프랭클 연세대 UIC(언더우드 인터내셔널 칼리지) 교수는 “이는 사실의 엄청난 왜곡이자, 별다른 생각 없이 한국 역사를 저평가해 버린 경솔한 행위였다.”고 비판한다. 역사 및 문학상의 기록들은 오히려 한국이 고립 정책을 폈던 시기는 단기간에 불과했고, 그리 흔한 사례도 아니었음을 증명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피스의 시각은 한국을 저평가

프랭클 교수는 ‘한국문학에 나타난 외국의 의미’(소명출판 펴냄)에서 두 가지 질문을 더 던진다. 한국과 외부와의 관계가 과연 전적으로 적대적이었으며, 과연 한국인은 순종성을 가진 단일민족이냐는 것이다. 그는 ‘은자의 나라’가 허구이듯 이 두 가지도 사실과는 거리가 멀다고 설명한다. 지은이는 미국 캘리포니아 버클리대학 동앙언어과를 졸업하고 연세대 국문과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뒤 하버드대학 ‘동양언어와 문명’학과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제목처럼 우리 문학에 나타나는 외국의 의미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조건을 갖춘 셈이다.

지은이는 독자들을 설득하고자 허균(1569∼1618)의 ‘홍길동전’과 이인직의 ‘혈의 누’(1906), 이광수의 ‘무정’(1917), 주요섭의 ‘구름을 잡으려고’(1936)라는 네 편의 소설을 꺼내 들었다.

지은이는 ‘홍길동전’에 세상으로부터 분리된, 폐쇄적인 ‘은자의 나라’라는 개념은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적대적인 외부 세계로부터 분리되어 대립한다는 오늘날의 세계관과 유사한 개념은 찾을 수 없는 것이다.

‘혈의 누’에서부터 ‘외부 세계’ 혹은 ‘외국’의 범위는 미국이라는 구체적인 국가로 좁혀진다.‘혈의 누’에 나오는 주인공에게 미국은 목표이며 꿈이기는 하나, 최종적인 목적지가 아니라 필요한 수단을 획득하기 위해 갔다가 다시 떠나올 장소이다. 하지만 1910년의 한일합방으로 ‘유학에서 돌아와 공부한 것을 쓸 수 있는 나라’는 사라지고 만다.‘무정’의 주인공들은 여전히 한국인이었지만, 한국은 더 이상은 나라가 아니다. 정치적 국가를 상실한 한국인들은 점차 민족의 중요성에 집착하게 되었고, 돌아올 나라가 없어지자 유학한 사람들은 미국에 정착하는 쪽을 택했다.

홍길동전 등 문학작품 통해 고찰

‘구름을 잡으려고’는 미국에 대한 새로운 시선을 제공한다. 윌슨 미국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에 희망을 얻었던 한국은 3·1운동으로 궐기했으나 미국정부는 한국인의 편에 서기를 거부했다. 이에 따른 미국인에 대한 한국인의 환멸은 한국과 미국의 관계에 대한 재평가를 요구했다는 것이다.

‘구름을 잡으려고’는 그 결과에 해당한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한국의 하류층 출신으로 부자가 되겠다는 꿈을 가지고 미국으로 간다. 하지만 농장 노동자로 살아가는 참담한 현실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 지은이는 ‘구름을 잡으려고’가 미국을 부정적으로 묘사한 한국 최초의 소설로 규정했다.

지은이는 “19세기 후반부터 호전성을 더해가는 바깥세상으로부터 자문화를 수호하고자 한국은 자구책을 취했고, 이에 일본과 서양은 한국에 완고한 은자라는 꼬리표를 달았다.”면서 “결국 무력에서 밀린 한국은 바깥세상과 관계를 재정의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것이 오랜 세월 외부 세계와 호혜적 바탕에서 이루었던 한국의 교린 관계를 오늘날에도 타의적 강압의 역사로 보는 근원이 되었다는 것이다.1만 8000원.

서동철 문화전문기자 dcsuh@seoul.co.kr
 
 

 

입력 2007.10.17 04:44 업데이트 2007.10.17 07:04

'문화 우수성'은 폐쇄적 … 있는 그대로 알리자 | 중앙일보 (joongang.co.kr)

중앙일보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은 16일 한국학의 국제 허브 역할을 할 '국제한국학센터'가 다음달 문을 연다고 밝혔다. 센터장에는 조은수(철학) 교수가 내정됐다. 국제한국학센터는 한국학 연구기관을 두고 있는 하버드.스탠퍼드.예일.컬럼비아.UC버클리.UCLA.워싱턴(이상 미국).브리티시 컬럼비아(캐나다).빈(오스트리아) 등 해외 유명 9개 대학과 네트워크를 결성하기로 합의했다. 이를 바탕으로 한국학의 세계적 교류와 보급에 본격적으로 나선다는 계획이다.

센터 개관을 앞두고 '한국학의 1세대'로 불리는 마르티나 도이힐러(72.여.스위스) 전 런던대 교수를 비롯해 런던대 출신 셈 베르메르스(39.벨기에) 연구원, 독일 보쿰대에서 한국학을 전공한 안드레아스 뮐러(33.독일) 연구원, 재미동포 출신 유진박(39.한국) UC어바인 교수(사학과) 등 현재 규장각에서 연구 중인 '2세대' 한국학자 3명이 자리를 함께했다. 이들은 유창한 한국말로 "국가 위상에 비해 한국학과 한국어 브랜드 가치가 너무 작다"며 "정부가 전략적으로 지원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한국학의 현주소에 대해 말해 달라.

 

(도이힐러)"1967년, 하버드에서 학위를 받은 뒤 미국에 자리가 없어 연구를 위해 한국으로 건너온 경험이 있다. 70년대 하버드에서 한국학으로 박사학위를 딴 학자가 12명이었지만, 단 한 명도 한국학계에 남지 못했다. 아쉬운 부분이다. 그러나 80년대 후반부터 한국학에 대한 수요가 늘고 있다. 경제.정치적으로 한국의 중요성이 부각됐기 때문이다."

(유진박)"한국학은 작은 시장이다. 그러나 올해 미국 전임 조교수 채용 공고가 난 대학이 7~8개 된다."

(베르메르스)"도이힐러 선생님은 우리 세 명 모두가 태어나기 전에 학위를 받으셨다.(웃음) 미국은 사정이 좋아지고 있지만, 유럽에서는 여전히 공부하기 어렵다. 그러나 유럽이 통합되고, 세계화가 진행되면서 지역 연구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한국학도 좋아질 것이다."

(뮐러)"유럽에서 한국학이 가장 활발한 곳이 독일이다. 3개 대학(베를린.함부르크.보쿰)이 전임 교수를 두고 있다."

 

-한국학 연구의 의미는 무엇인가.

(도이힐러)"한국학은 하나가 아니다. 역사.문화.언어.사회.경제 등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들이 있다. 한국을 연구하는 이들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한국에 대한 국제적 관심이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학 연구자를 중심으로 세계적 네트워크가 형성되면, 결국 한국의 국제화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유진박)"여러 학문이 있는데 그걸 합쳐 '한국학'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다분히 서양 중심적 시각이다. 그러나 한국학은 여전히 성장 단계에 있고, 그런 면에서 '한국학'은 한국을 알리고 발전시키는 데 유용한 도구다."

 

-한국학이 발전하는 데 걸림돌은 무엇인가.

(베르메르스)"가장 중요한 것은 언어다. 런던에서 한국어를 공부하기 위해 '한국어 시험'을 찾아봤지만 없었다. 유럽 어디서든 '일본어 능력시험'과 '중국어 수준별 시험'을 볼 수 있다. 지역 연구의 출발은 언어다. 이 문제는 한국 정부 차원에서 고민해 봐야 할 문제다. 한국학을 전공한 이후에 갈 곳이 없다는 것도 문제다. 만약 친한 사람이 한국학을 하겠다고 물어 온다면 '20년은 기다려야 교수 자리가 날지 모르니 하지 말라'는 현실적인 답변을 줄지도 모르겠다."

(뮐러)"우리 모두 동양학이나 중국학을 공부하다, 전공을 한국학으로 돌린 학자들이다. 학부생들은 한국학을 접할 기회가 적다. 일본과 중국은 오래전부터 다양한 지원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물론 서양에서 일본과 중국에 대한 관심이 크기 때문에 그럴 수 있지만, 한국도 이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하버드에는 '하버드옌칭 라이브러리'가 있어, 중국학 연구자들이 중국에 직접 가지 않아도 고문을 보고 연구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있다.)

(도이힐러 교수, 대담 중 갑자기 일어서더니 서가에서 책 한 권을 꺼내 펼쳐들었다. 조선시대 선비 문화에 대한 자료를 정리한 책이었다. 책의 뒷부분에는 영문 소개가 쓰여져 있었다. 그는 흥분된 어조로 말했다.)"이것 좀 읽어 보라. 이런 엉터리 번역이 어디 있나. 한국학을 연구하려는 학생들에게는 영어로 된 자료가 중요하다. 그들에게 이런 번역문을 보여줄 것인가. 한국 기관과 정부는 반성해야 한다. 이것은 정부의 의지 문제다. 일본과 중국은 이런 번역문을 내는 데 많은 공을 들인다."

 

-이런 문제들을 어떻게 풀 수 있을까.

(베르메르스)"최근 규장각과 UC 버클리가 한국학 서적의 공동 출판을 위해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네트워크를 통한 공동작업은 한국학 연구에 대단히 중요하다. 권위 있는 기관이 번역하고, 명문대가 책임지고 출판하는 것이다. 이런 작업이 한국학의 위상을 높여줄 것이다."

(유진박)"학생들은 공부할 때 미래에 대한 전망을 본다. 나는 원래 '중세 유럽 역사'에 관심이 있었지만 지도교수가 '지역 연구가 유망하다'고 조언해 진로를 바꾸었다. 정부나 서울대 같은 큰 대학은 한국학을 하나의 브랜드로 생각해야 한다. 앞서 지적했지만, 한국어 브랜드는 지나치게 평가절하돼 있다. 경제발전으로 인해 국가의 위상은 높아졌지만, 한국에 관한 학문, 한국에 대한 문헌은 찾아보기 힘들다. 한국 정부나 기관들은 '브랜딩'에 좀 더 신경을 쓸 필요가 있다."

(뮐러)"한국학 기관에 대한 지원이 필요하다. 특히 학생들에 대한 장학금 지원은 매우 중요하다."

 

-한국에서 받은 인상과 바라는 점은.

(도이힐러)"매년 한국에 올 때마다 이곳저곳 돌아본다. 한국은 급격한 성장을 이뤘지만, 더불어 전통과의 단절은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한국의 고유성은 사라지고 있다. 정작 한국의 젊은이들이 한국에 관심이 없는 것 같아 아쉽다."

(베르메르스)"한국인은 따뜻하다. 늘 환대해 준다. 한국학 기관들이 좀 더 협력해 연구하길 바란다. "

(뮐러)"제일 놀라운 것은 속도다. 역동적이고 빠르다. 외국과의 학술 교류도 역동적으로 이뤄져야 한다."

(유진박)"한국에 오면 지역 곳곳에서 '우리 문화 우수성 알리기' 행사를 한다. '문화 우수성'이라는 말은 폐쇄적으로 들릴 수 있다. 민족주의는 생존을 위해 필요하지만, 한국은 그런 단계를 이미 지났다. 이젠 좀 더 열린 자세로 한국의 문화를 있는 그대로 세계에 알렸으면 좋겠다."

글=강인식, 사진=김성룡 기자

☞◆한국학=영어로는 'Korean Studies'로 표기한다. 역사.문학.언어.사회.경제.정치 등 한국에 대한 모든 학문을 포괄해서 지칭하는 말이다. 지역학에서 중국학.일본학이라는 말은 예전부터 사용돼 왔다. 한국 관련 학문이 다양해지자 서양에서도 '한국학' 분야가 자리 잡기 시작했다. 미국 하버드대에서는 1950년대부터 한국학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마르티나 도이힐러=1935년 스위스 취리히에서 태어났다. 네덜란드 라이덴대에서 동양학과를 졸업한 뒤 67년 하버드대에서 한국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취리히대(75년)와 영국 런던대(85년) 교수를 역임했다. 유럽한국학회의 창립 멤버인 그는 에드워드 와그너(전 하버드대 교수, 2001년 사망), 제임스 팔레(전 워싱턴대 교수, 2006년 사망)와 함께 서양의 3대 한국 사학자로 꼽힌다. 92년 그의 한국학 연구를 결산한 '한국의 유교적 변환'(하버드대 출판부)을 발간했다. 런던대 정년퇴임 후 취리히에서 조선사 연구를 진행 중이다.

 

 

  • 문화일보 입력 2007-03-17 08:07

 

16일 오후 7시, 서울 경복궁 전철역내 서울메트로 미술관에서 만난 시민 유연주(56)씨는 연방 감탄을 터트렸다. “이 전시회의 그림들을 보니, 그동안 내가 우리 역사를 너무 모르고 있었다는 생각이 절로 드네요. 단군 역사에 대해서 막연히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 그림으로 보니 뚜렷하게 각인이 됩니다.”


유씨가 퇴근 길에 우연히 들렀다가 한 시간째 감상을 하고 있다는 전시회는 ‘만몽 김산호 역사 회화전’. 김산호(67) 화백은 1958년에 한국 최초의 공상과학(SF)만화 ‘라이파이’를 발표한 이후 한국과 미국에서 500여편의 만화작품을 발표한, 바로 그 사람이다.

전시회장에서 그를 만나 명함을 받아보니 직함이 ‘민족 사학자/화가’다. 이번 전시회를 주관한 출판사 다물넷 측에 따르면, 김 화백은 지난 15년간 한국 고대사를 복원하는 그림작업에 정진해왔다.

지난 11일부터 열리고 있는 이번 전시회는 오는 30일까지 일반 시민에게 무료로 공개된다. 환웅이 나라를 연 ‘배달한국시대’부터 발해에 이르기까지 주요 역사적 인물과 사건들을 그린 50여점의 대형(500~600호) 작품이 걸려 있다.

김 화백은 “중국이 동북공정 등을 통해 한국 고대사를 자국의 역사에 편입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는데, 그것이 얼마나 허구인가를 보여주기 위한 전시회”라고 말했다. 한국화나 동양화로 그리지 않고 유화 기법으로 그린 것에 대해 그는 “우리 역사가 이렇게 유구하다는 것을 서양인들에게도 인정받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전시회 입구에는 ‘배달한국’으로부터 시작하는 우리 고대사를 간략히 설명하는 전시판이 있고, 각 그림들 옆에는 우리 역사를 설명하는 안내문이 붙어있다. 예를 들어, ‘치우천황’ 그림의 안내문은 치우가 신시(神市) 배달한국의 제 14대 천황으로서 우리 역사서에 ‘자오지 천황’으로 기록돼 있다고 적고 있다. ‘탁록대전’그림은 치우천황이 중국 헌원황제의 연합군을 토벌하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그림 중에 특별히 눈길을 끄는 것은 ‘단군의 탄생’. 배달한국의 제 18대 천황 ‘커붉단 환웅’과 ‘웅녀(熊女)황비’가 단군을 안고 있는 장면이다. 김 화백은 “서양의 나라들은 시조 탄생의 그림을 다 가지고 있는데, 유구한 역사를 지닌 우리가 없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며 “이 단군이 훗날 백두산 천지에서 천제를 올리고 대쥬신제국(大朝鮮帝國)을 연다”고 설명했다. ‘하늘못 대천제’는 1세 단군의 개천 장면을 그린 것이다.

최근 드라마 ‘주몽’을 통해 일반인들에게 새롭게 인식된 ‘소서노’ 그림도 눈길을 끈다. 김 화백은 “소서노는 고구려를 건국한 추모왕을 만나기 이전에 이미 우이국의 여왕이었고, 뒤에 아들 비류가 백제를 건국하는 데 공을 세우니, 세 나라의 건국에 참여한 여걸이었다”고 말했다.

김 화백에게 “재야 사학자들의 대륙 사관을 믿는 것이냐”고 묻자, “민족 사학자라고 말해달라”고 정색을 했다. 그는 우리 역사 공부를 위해 만주와 시베리아, 바이칼호 등을 직접 찾았고, 수많은 역사 책을 읽었다. 이번 전시회장에 함께 내놓은 그림역사책 ‘치우천황’ ‘단군조선’ ‘부여사’ ‘부여백제’ 등은 그의 역사 공부가 얼마나 방대한 것이었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참고 문헌 목록엔 국내 역사 문헌뿐만 아니라 중국 측의 역사서도 많이 포함돼 있다. 그는 “중국 헤이룽장(黑龍江)성의 향토사 문헌을 통해 백제가 처음부터 남쪽에 자리잡은 게 아니라 현재 헤이룽장성 지역인 ‘치치알’에 자리잡았다는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다”고 주장했다. 전시회장의 양편에선 그의 역사 강의를 동영상으로 들려주고 있다. 이날도 많은 관람객들이 그의 동영상 강의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김 화백은 유명 만화가이자 미국에서 한때 13개 계열사를 거느린 ‘산호그룹’의 대표였다. 그랬던 그가 역사 회화에 생애를 걸기로 한 것은 ‘중국이 동북공정 작업을 은밀하게 진행하고 있는 동안에 우리 정부와 학계가 손을 놓고 있는 모습이 너무 안타까웠기 때문’이다. 그는 “선진국일수록 자국의 위대한 역사를 강조하는 그림들을 수없이 만들어서 역사 미술관에 내걸고, 자국민의 사기를 고취시키는 데 투자를 아끼지 않는다”며 “화가이자 역사가로서 우리 역사를 복원하는 데 생애를 걸었다”고 말했다.

그는 “광주시가 다행히 내 뜻을 알아주어 ‘쥬신(朝鮮)역사 박물관’을 짓고 있다”고 전하며, “나이가 더 들어 손이 떨리면 더 이상 그림을 그릴 수 없기 때문에 부지런히 그리겠다”고 다짐했다.

장재선기자 jeijei@munhwa.com

 

 

입력 2007-09-12 03:01업데이트 2009-09-26 14:16

김광언 교수 “한반도 사냥법 동아시아서 가장 정교”

현대인에게 사냥은 취미일 뿐이다. 덫 함정 올가미를 이용한 사냥법도 잊혀진 옛 전통일 뿐이다. 그러나 선사시대 이후 사냥은 생업의 모든 것이었고 농경시대와 근대에도 삶의 중요 부분을 차지한 ‘문화’였다.

민속학자 김광언(문화재위원회 민속문화재분과위원장·사진) 인하대 명예교수는 11일 “사냥은 우리 민족의 기층문화를 파악할 수 있는 원형”이라고 말했다. 그는 최근 국내 최초로 동아시아 수렵문화사를 집대성한 ‘한·일·동시베리아의 사냥’(민속원)을 펴냈다.

“우리 사냥문화사의 계보를 세워 세계 수렵문화사의 족보에 올린 것이 성과라면 성과일까요. 문화사 연구는 동아시아에서 우리 문화가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지 비교 분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지만 사냥사를 다른 문화와 비교하기는커녕 우리 것을 제대로 정리한 연구도 없더군요.”


▲ 촬영 : 동아일보 문화부 윤완준 기자

 

[화보]한반도 사냥법 그린 그림들

김 교수는 1950년대 북한 학자가 낸 서너 쪽짜리 ‘묘향산 수렵도구’ 이후 출간된 연구나 책은 사냥터와 사냥감 분포 지역을 정리한 ‘수렵 가이드’ 수준이 대부분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일본의 사냥 문화는 조선에서 왔는데 조선 자료가 부족해 장애가 된다”는 일본 학자의 글을 읽고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기도 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번에 조선왕조실록 고려사 삼국사기 등 정사뿐 아니라 삼국유사를 비롯한 야사, 조선 전기 수필집인 ‘용재총화’ 같은 개인문집, ‘동사강목’ 등 개인이 펴낸 역사책을 모두 뒤졌다. 그의 말대로 “사냥과 관련해 더 나올 게 없을 정도”였다. 방방곡곡 산골의 노인들을 만나 옛 사냥법을 듣는 현지 조사도 함께 했다.

“우리 민족의 뿌리가 시베리아와 몽골에 있으니 한국 일본 동시베리아의 사냥문화도 한 줄기로 이어져 있을 것이라 예상했죠. 수렵문화 사냥법 제의 등을 다각도로 분석해 이를 실증했습니다.”

김 교수는 연구 과정에서 ‘서로 만나지 못하는 고고학과 역사학의 한계’를 뼈저리게 깨달았다. 그는 “고고학자는 땅에서 나온 유물에만, 역사학자는 문헌에만 관심이 있다”고 지적하며 그 사례로 선사시대의 함정(사냥을 하기 위한 위장 구덩이) 유적을 들었다.

일본은 20년 동안 함정 유적 수십만 개를 발굴했다. 우리는 2000년대 이후 고작 200여 개를 발견했다. 한반도에 함정 유적이 적기 때문이 아니라 사냥사에 무심한 고고학자들이 그냥 지나친 탓이다.

그는 동아시아 사냥문화의 공통점과 차이를 가장 잘 나타내는 사냥법으로 덫사냥을 들었다. 한국의 ‘양틀’은 울을 만든 뒤 그 위에 통나무를 올려놓아 미끼를 건드린 동물을 덮치도록 고안됐고, ‘외양틀’은 덮목으로 쓰이는 통나무를 한쪽만 들어올린 것이다. 일본의 ‘아키비라’와 동시베리아의 ‘도우이’가 외양틀과 흡사하다.

“도우이는 덮목을 한쪽만 들어올려 양틀보다 성능이 떨어지고 일본의 아키비라는 양틀보다 복잡해 설치가 번거롭습니다. 한반도의 사냥법이 동아시아에서 가장 정교했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하죠.”

김 교수는 디딜방아 지게 등 농기구와 전통놀이의 문화사를 동아시아 지역 전체 속에서 조망하는 연구를 계속해 왔다. 앞으로 쟁기와 맷돌의 문화사도 천착할 계획이다. 그는 “문화의 전파와 이동을 무시한 채 우리 것만 연구해서는 한계에 부닥친다”고 말했다.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화보]한반도 사냥법 그린 그림들

 

 

 

  • 문화일보 입력 2007-07-24 14:28

고구려 삼실총 벽화의 완함 연주 장면. 지식산업사 제공


중국 돈황 막고굴 220굴의 호선무 장면 부분도.


“공자도 동이에서 살고 싶어했다(故孔子欲居九夷也).”

‘후한서(後漢書)’ 동이열전에 나오는 말이다. 원문에서 ‘구이(九夷)’는 동이의 여러 세력을 포괄하는 말. 후한서에선 또 동이사람들은 “천성이 유순해 도리로서 다스리기 쉽기 때문에 군자국(君子國)과 불사국(不死國)이 있다”고 밝히고 있다. 나아가 중국이 “예를 잃으면 동이에서 구했다”는 구절도 있다.

이처럼 고대 동이족, 곧 한민족은 중국 등 주변 국가에서 ‘벤치마킹’했던 선진 문화인이었던 것이다. 고대 한민족의 문화전파 사례를 모은 책 ‘고대에도 한류가 있었다’(지식산업사)가 최근 출간됐다. 지난해말 같은 주제로 치렀던 학술대회에서 발표된 내용들을 당시 가해졌던 비판들을 수용, 다시 가다듬어 책으로 펴낸 것이다.

◆한국은 고대, 중국은 중세, 일본은 근대 = 임재해 안동대 교수는 우선, “지금의 우리 문화가 한류라는 자기문화의 독자성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고대 문화에서부터 고유한 개성을 지니며 상대적으로 이웃나라보다 앞섰다는 것. 따라서 “우리 고대 문화의 선진성을 근거로 고대사 연구의 주체성을 확보하는 것이 긴요하다”고 임 교수는 강조했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에는 전세계 고인돌의 40%가 분포돼 있을 정도로 고인돌 문화가 가장 풍부하고 다양했다. 또한 비파형 동검으로 대표되는 청동기 문화는 중국 황하 유역보다 시대적으로 앞설 뿐만 아니라 합금기술에서도 뛰어났다. 철기 문화 역시 중국이 기원전 8~6세기 경으로 추정되는 데 비해 고조선의 철기문화는 기원전 12세기로 밝혀졌다고 임 교수는 밝혔다.

하지만 중세와 근대로 넘어오면서 문화적 주도권을 중국과 일본에 빼앗겼다고 임 교수는 분석했다. 한국은 고대 문화, 중국은 중세 문화, 일본은 근대 문화가 상대적으로 뛰어났다는 것. 중세와 근대에는 중국과 일본이 각각 우리보다 문화적으로 앞섰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임 교수는 밝혔다.

◆고대 갑옷은 고조선 문화에서 확산 = 박선희 상명대 교수는 수록문 ‘고대 한국 갑옷의 원류와 동아시아에 미친 영향’에서 고조선이 뼈갑옷·가죽갑옷·청동갑옷·철갑옷을 동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독자적으로 생산한 나라임을 밝혔다. 박 교수는 “고조선의 복식 분야는 높은 수준을 이뤄 이웃나라에 영향을 미쳤다”면서 “특히 갑옷은 여러 모로 우수하고 기술적으로 앞섰을 뿐만 아니라 지속적으로 이어져 고대 우리 민족 갑옷의 전형을 이뤘다”고 강조했다.

특히 갑옷만을 주목하더라도 고조선 시기의 한민족은 독자적 성격의 문화권을 형성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는 것. 수록문에서 고조선의 갑옷 양식을 세밀하게 고찰한 박 교수는 “(고조선의 갑옷은) 중국과 북방 지역은 물론 일본의 갑옷 생산에 크게 영향을 주었다”며 “한마디로 고대 갑옷은 모두 고조선 문화에서 확산된 것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주장했다.

◆고대의 한류 ‘공연 예술’ = 전경욱 고려대 교수는 수록문 ‘고대의 한류로서 우리 공연 예술이 동아시아에 미친 영향’에서 “이미 삼국시대에도 중국과 일본에서 인기를 끌었던 한류가 있었다”고 강조했다. 전 교수는 “고대로부터 우리의 공연 예술은 주변 여러 나라와 교류를 통해 항상 그 독자성과 우수성을 갖춰 왔다”면서 “우리는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외래 연희를 수용해 공연 예술을 풍부하게 영위하면서, 그것을 우리의 취향에 맞게 개작화해 한국화함으로써 새로운 공연 예술을 창출해왔던 것”이라고 밝혔다.

우리의 새로운 공연 예술을 성립시킬 수 있었던 뿌리는 부여의 영고, 고구려의 동맹, 예의 무천 같은 제천의식 또는 마한의 농경의식 같은 자생적·토착적 공연예술이었다는 것. 전 교수는 보다 구체적으로 “고대 한류로는 수·당의 칠부악·구부악·십부악 가운데 고구려기인 호선무(胡旋舞)와 광수무(廣袖舞), 중국에서 유명했던 고구려 인형극 등을 들 수 있으며, 일본에서 인기 있었던 고대 한류로는 일본의 무악(舞樂) 가운데 우방악인 고구려악 24곡을 꼽을 수 있다”고 분석했다.

김영번기자 zerokim@munhwa.com

 

 

  • 입력 2018.04.02 19:58 수정 2018.04.20 00:09
  • 기자명오종홍 기자  
 
삼태극춤은 우리가 온 곳으로 되돌려 준다

 

중국이 자랑하는 당나라,

당나라 혼을 고구려 호선무가 빼앗다

호선무=삼태극춤, 배달 겨레 또 하나의 원형이다

소용돌이, 회오리 춤 속에서 안팍 경계가 사라진다

 

▲이슬람 신비주의 수행 단체, 수피들이 세마춤을 추고 있다. 한쪽으로 만 끊임없이 돌아가는 일종의 회오리 춤이다. 일체 교리와 경전, 종교이론을 배격하고 오직 춤 속에서 신과 하나되기를 바란다. 고구려 호선무와 닮아 있다. 그러나 시기를 보면 고구려 호선무가 더 오래된 것으로 평가된다.

 

1. 총설

지금부터 9년 전, 서기2009.11.19. 저녁 7시에 '백산소도' 대법당에서 펼쳐진 '삼태극춤'에 대하여 말씀 드립니다. 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이 춤은 말은 춤이라고 하지만 한쪽방향으로 끝없이 도는 소용돌이 회전동작입니다. 일반 춤과는 달리 화려한 동작이나 손짓 몸짓은 거의 없습니다. 보는 사람은 자칫 지루할 만큼 일정한 자세를 취한 상태로 끝없이 돌아가기만 합니다.

저는 이 춤을 인도를 여행하면서 배웠습니다. 어느 명상단체에서 행하는 것을 보고 너무나 황홀경에 사로잡혀 바로 배웠지요. 처음에는 어지럽고 구역질나서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몸에 힘을 빼고 '넘어져도 좋다'는 자세로 '다 내려놓는다'는 마음이 되니 어느새 감미로운 음악과 함께 계속 돌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나중에는 나는 가만히 있는데 세상이 돌고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세상의 중심, 우주의 중심이라는 느낌으로 푹 빠져 들어갔습니다.

이 후에는 아예 눈을 감아 버리고 음악에 몸이 빨려 들어가도록 내 맡기게 되었습니다. 이 때 만큼은 세상의 모든 근심, 걱정, 잡념이 사라지고 아주 맑은 정적 속으로 들어가기도 하고, 황홀경으로 빠져들기도 하였습니다.

처음 돌기 시작한 후 약 30분 정도까지는 땀으로 흠뻑 젖습니다. 생활속에서 알게 모르게 쌓인 긴장과 독이 빠져 나가는 과정입니다. 굳어진 몸이 이 시간동안 완전히 풀리는 것이라고 봅니다. 이 후에는 너무나 편안하게 내 의지와는 크게 상관없이 몸이 알아서 돌아가는 단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부러 의식적으로 멈추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하루고 이틀이고 계속 돌아갈 것 입니다.

저는 이 소용돌이 '삼태극춤'이 처음에는 '이슬람교의 신비주의 수행단체, 수피에서 온 수피춤(세마춤)'인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참역사를 발굴 연구하면서 이미 우리에게 있었던 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미 고구려에 호선무胡旋舞라는 이름으로 당시에 국제적으로 한류문화로써 대 유행을 했다는 것입니다.

▲한대륙(차이나) 감숙성의 돈황막고굴 220호분에 그려져 있는 '호선무' .

 

2. 문헌과 유물 근거

고구려벽화에는 다리를 꼬는 춤동작이 그려진 무희가 나오고 있지만, 한대륙(차이나) 감숙성의 돈황막고굴 220호분에서 발견되는 그림이 호선무로 알려졌더군요.

호선무에 대한 기록은 수(隋)나라에서는 칠부기(七部伎, 후에 九部伎로 확충), 당(唐)나라에서는 십부기(十部伎)라는 문헌기록에서 발견됩니다. 이 호선무는 당시에 대단한 인기를 얻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지금 차이나인들이 한류에 푹 빠져 있듯이 특히 한국가수들의 노래와 춤에 열광하듯이 당시에도 고구려 호선무 등 예악에 미쳐 있었던 모양입니다.

호선무는 당시 차이나에서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공연할 정도로 대단히 성행 하였으며, 당나라 현종(玄宗)도 호선무를 아주 좋아했고 그가 푹 빠진 양귀비와 안록산도 모두 이러한 춤을 잘 추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호선무는 차이나 왕실 귀족들이 추기 시작하면서 그 당시의 풍조가 되었고, 궁중뿐만 아니라 고관대작들도 모두 즐겼다고 합니다.

 

3. 나는 왜 이 춤을 삼태극춤이라고 명명하는가

이 호선무胡旋舞라는 명칭에는 다분히 '오랑캐의 빙글빙글 도는 춤'이라는 어감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삼태극문양에 착안을 하여 명칭을 바꿨습니다. 삼태극사상과 삼태극문양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깨어있는 푸른역사 삼태극(http://cafe.daum.net/mookto/GWmS/30 )' 에 상세히 나와 있습니다.

다시 한 번 정리하면 삼태극문양을 보면 여러 방향으로 돌아가는 것이 있지만 우리 참역사동아리 삼태극에서는 왼쪽으로 돌아가는 것을 택하고 있습니다. 우리민족의 웅비와 국운 상승의 때를 맞이하여 확산하다는 의미를 부여하여 왼쪽으로 돌때 풀려 나가기 때문입니다. 나사를 왼쪽으로 돌릴 때 풀린다는 것에 착안을 하였습니다. 또 이 삼태극은 우리조상님께서 우주의 별구름을 보고 그린 것으로 판단하였습니다.

▲한국방송1티비 '세계역사기행-제1편 인도에서 고구려를 만나다'

 

하늘자손이라는 말 속에서도 유추 할 수 있듯이 우리 조상님들은 끝임없이 당신들의 고향, 하늘을 관찰하였고 그 결과 천문학이 세계최고로 발전하였으며 그 결과물로 우주의 본질을 형상화 하는 삼태극 문양이 나왔다고 봅니다. 또한 지구상에서 발생하는 태풍의 회전방향이 대부분 왼쪽입니다. 결국 우주의 별구름의 소용돌이 은하나, 태풍의 중심에는 회전하는 소용돌이가 없고 고요한 정적의 원 형태를 띠고 있다는 점에서 이 호선무는 삼태극과 닮아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호선무를 '삼태극춤'이라고 이름 지었습니다.

▲한국방송1티비 '세계역사기행-제1편 인도에서 고구려를 만나다' 인도에서도 고구려 벽화에 그려져 있는 춤을 추는 문화가 있음이 밝혀졌다.

 

4. 삼태극춤 배워보기

먼저 이 춤을 추기 전에 식사를 한지 보통 3시간이 지난 때에 하는 것이 좋습니다. 즉 속이 비어 있는 상태에서 하는 것이 제일 좋다는 말씀입니다. 이 삼태극춤(호선무)은 차렷 자세에서 오른팔을 길게 펴고 손바닥이 하늘로 가게 하고, 왼팔도 길게 펴고 손등이 위로 가게한 후 보통 왼쪽발을 중심축 삼아 왼쪽방향으로 돕니다. 보통 처음 15분 정도는 천천히 돌며 이 후에는 가속을 붙여 빠르게 돕니다. 다 합쳐서 보통 약1시간 정도 돈 다음 바닥에 양팔 양다리를 펴고 배를 바닥에 대고 편안하게 눕습니다.

이것은 대지를 어머니 품으로 여기고 편안하게 안겨 쉰다는 개념입니다. 오른손 바닥을 위로, 왼손바닥은 아래로, 왼쪽으로 도는 이유는 보통 오른손잡이가 많다는 것에서도 볼 수 있듯이 그 반대방향을 취함으로써 균형을 잡겠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또한 이미 설명드렸듯이 태풍의 회전방향이 왼쪽이고 또한 이 춤은 한국의 전통문양 '삼태극'문양에서 유래한 것으로 봅니다.

삼태극문양은 우주 별들의 소용돌이를 형상화 한 것으로 보며 나선형으로 왼쪽으로 끝없이 돌아가는 형상을 하고 있습니다. 고여 있어 죽은 의미가 아닌 늘 꿈틀거리며 움직이는 살아있는 상징을 하고 있죠. 또한 이 춤은 도는 자는 태풍의 눈과 같이 고요한 정적 속에서 중심잡고 있지만 주변 즉 세상 우주만물은 나를 중심으로 휘몰아치며 돌아가고 있습니다.

이 삼태극 춤은 춤속으로 깊이 빠지도록 도움을 주는 음악이 거의 필수적으로 이용됩니다. 보통 잔잔하면서도 약간 슬픔이 깃들어 있는 명상음악이 동원됩니다. 또는 실제 악사들이 동원되어 직접 생음악을 연주하여 이 가락에 따라 합일되어 돌아가기도 합니다.

아래 주소 본 기사에 나오는 동영상은 현재 중동의 터키 일대에서 관광상품으로 행해지는 '수피-세마춤' 입니다. 삼태극춤(호선무)이 바로 이 것입니다. 이슬람교 신비주의 수피단체에서 어떻게 이 춤을 알게 되었는지 자세한 내력은 파악이 되지 않지만, 이 춤을 처음 추기 시작한 사람은 '마블레나 루미'라는 아프카니스탄 출신의 한 남자였다고 합니다.

서기13세기 초에 그는 친구를 잃고 상심 속에 있었는데 어느날 대장장이의 망치두드리는 소리에 맞추어 빙글빙글 돌았다고 하는데 여기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그 후 터어키 근처 '코니아'라는 곳에 이슬람교의 신비주의 단체 수피를 만들었고 이 때 부터 이 수피-세마춤(sufi-sema dance)이 수행의 한 방편으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전형적인 소용돌이 은하로 파악되고 있는 ‘M51’. 지구에서 약 3천광년 떨어져 있으며, 지구에서 볼 때 가장 밝은 소용돌이 은하에 속한다. 이 사진에서는 더욱 삼태극 형상을 유추해 낼 수 있다고 본다.

 

5. 이 춤의 효과

제가 경험하는 바로는 이 춤은 복잡하고 열 받는 현대인의 생활에 신선한 활력소를 줍니다. 무한경쟁의 피말리는 생활 속에서 처음에는 잠시, 나중에는 좀더 길게, 궁극적으로 영원히 평안과 안락을 주는 최고의 방편이라고 봅니다. 또한 이 삼태극 춤은 황홀경속으로 몰아넣어 비슷한 황홀경으로 빠지게 하는 인위적인 마약류 예를 들어 술. 담배, 성, 마약 같은 방편보다 후유증도 없고 오히려 건강과 만수무강에 도움을 주는 강력한 방편이라고 봅니다.

각종 종교에서 '깨달음'이나, 천국, 극락을 얘기하며 서로 자기 종교가 좋다고 오라고 하며 유혹을 하지만 이 것만큼 강력하게 안락과 평안으로 인도하는 길도 없다고 봅니다. 각종 종교가 각종 수행방법으로 수십 년간 도를 닦아도 얻지 못하는 '그것'을 이 삼태극춤은 단 '1시간' 만에 그 모든 것을 맛보게 할 것입니다.

▲인디한대륙의 플로리다 반도로 접근하는 태풍, 태풍의 중심인 눈에는 아무런 소용돌이가 없이 고요한 공간만이 눈에 띈다.

 

6. 삼태극 춤의 영성과 상징

관념적으로 정의를 내리면 이 삼태극춤은 '신인합일'로 인도하는 지금까지 발견한 가장 강력한 방편이며, 마고성시대의 '해혹복본'을 내안에서 체험하는 내 안의 움직이는 소도(부도)라고 할 것입니다. 이 삼태극 춤을 마친 직후에는 어떠한 가치판단도 없으며 선악 등의 관념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마고성시대의 마고어머니가 희노喜怒의 감정이 없다고 하였는데 바로 그러한 상태라고 할 것입니다. 이는 다른 말로 ' 맑고 깨끗한 고요한 정적' 의 차원에 놓인 것을 말합니다.

어떠한 갈등과 분열, 망상도 없는 전체로서 하나 된 상태입니다. 또한 이 춤을 막 마치고 나면 걸음걸이가 너무나 가벼워 마치 공중에 붕붕 떠다니는 느낌을 받습니다. 이는 마고성시대 '땅에서 나는 젖(지유地乳)'를 먹고 사는 신인들의 걸음이라고 봅니다. 이 삼태극춤은 혼자서 스스로 하는 진정한 의미의 '계불의식(자기정화의식)'이며 계불의식을 바라보는 관객이 아닌, 스스로 참여하여 주체가 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계불의식'은 부도지에 나오며 황궁씨의 직계자손 '유인씨' 때부터 행하던 우리 한겨레의 최초의 '굿' 흔적이 나오는 가장 오래 된 문헌 기록입니다. 또한 이 삼태극춤은 마고성시대로 돌아가는 '직행버스' 라고 봅니다. '해혹복본解惑復本본'의 강력한 방편이죠.

이 춤으로 생겨나는 '지극히 맑고 깨끗한 고요한 정적'은 곧 '天地本音=天音'을 듣는 상태라고 정의합니다. 우주의 깊은 침묵의 소리를 듣게 되는 것이죠. 이 침묵 속에서 또한 천지신명과 하나가 되어 무당문화식으로 말하면 '공수' 도 나오고 '원하는 채널링'을 할 수 있다고 봅니다. 샤먼의 굿, 무당사제의 권능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우리 조상님들은 춤 하나에도 하늘자손의 심성을 회복할 수 있는 깊은 령적인 의미를 심어 놨으며 이러한 춤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하늘자손 모습으로 돌아 오도록 인도하고 있다고 봅니다.

* 본 기사 삼태극춤 게시글 동영상 :

http://cafe.daum.net/mookto/GXtu/245

 

참고 및 인용의 주요출처

-신당서/례악禮樂편

-사고전서 동이사료중 신당서 부분

-한국방송1티비'세계역사기행-제1부 인도에서 고구려를 만나다'

-부도지(김은수 역주/한문화사 2002.)

- http://sonicscape.tistory.com/

-기타 누리집 게시판

 

 

"지금의 일본 젊은이들에게 한글은 귀엽고 세련된 존재"

(도쿄=연합뉴스) 박세진 특파원 = 지금 세대의 일본 젊은이들에게 한글은 귀엽고(사랑스럽고) 세련된 존재로 인식되고 있다고 일본 전문가가 분석했다.

시즈오카(靜岡)현에 소재한 사립대학인 도코하(常葉)대의 후쿠시마 미노리 준교수는 16일 아사히신문 인터뷰를 통해 한일 관계가 징용공과 위안부 문제로 악화한 상황에서도 일본에서 한국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이 인기를 끌고 방탄소년단(BTS)을 비롯한 케이팝(K-POP)과 화장품, 음식문화의 인기도 식지 않는 '언밸런스'(불균형) 현상을 진단했다.

한일 양국의 젊은 층 문화에 정통한 사회학자로 알려진 후쿠시마 교수는 "일본 대학에서 한국어를 배우는 학생이 늘고 있다"며 중고생 때부터 유튜브에서 한국 아이돌 가수들을 보아온 터라 입학 전에 이미 한글을 읽고 쓸 수 있는 학생도 많아졌다고 전했다.

2019년 7월 6일 일본 오사카(大阪) '얀마 스타디움 나가이'에서 열린 BTS 공연을 보러온 한 여성 팬이 BTS 멤버 현수막을 붙잡고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그는 자신이 대학을 다니던 1990년대에는 같은 학년인 80명 중 한국어를 공부하는 학생은 3명뿐이었고 한국어를 배운다고 하면 주변 사람들로부터 '왜?'라는 반응이 있었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지금의 일본 젊은이들에게 한글은 귀엽고 세련된 존재가 됐다"며 "좋아하는 아이돌이 우연히 한국인이고, 그래서 말도 알고 싶어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후쿠시마 교수는 이런 흐름에서 뒤처진 것이 일본의 중·노년층 남성이었다고 분석했다.

 

그는 일본에선 딸의 한국 유학에 반대하는 사람이 대개는 아버지였다며 한때 "일본의 동생뻘이라고 생각했던 한국이 경제와 기술에서 우위에 서고 당당하게 주장을 펴는 상황이 되면서 얼떨떨해졌을 것"이라고 그 이유를 추정했다.

그는 "그런 (아버지 세대의) 남자들도 '사랑의 불시착'에 빠져 버렸다"며 한류의 힘에 새삼 놀랐다고 말했다.

실제로 한국과의 주요 외교 현안을 놓고 강경 발언을 쏟아내는 모테기 도시미쓰(茂木敏充) 외무상도 지난해 즐겨 봤다고 말할 정도로 '사랑의 불시착' 등 한국 드라마가 중장년 남성층에서도 인기를 끌어 일본 언론에서 기사로 다뤄졌다.

지난 1월 8일 도쿄 시부야구 JR하라주쿠역 인근 '징'(jing)에서 막을 올린 '사랑의 불시착' 전시회에서 한 관람객이 무릎 꿇은 채로 현빈 모습을 스마트폰에 담고 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올해 65세인 모테기 외무상은 작년 10월 몽골 출장 중에는 트위터에 "인기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이 이곳 울란바토르에서 촬영했다고 한다"는 취지의 글을 올리기도 했다.

한일 간 우호 증진에 힘을 다하고 싶다는 후쿠시마 교수는 "이런 흐름을 긍정적으로 보고 있지만 무조건 기뻐하지 않는다"며 그 이유로 일본에서의 역사 교육 부재를 들었다.

그는 "일본의 고교까지 교육 과정에선 근현대사가 소홀히 다뤄져 (대학) 신입생은 일본이 한반도를 식민지 지배한 역사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동경(憧憬)의 대상이던 한국 연예인이 조금이라도 일본에 비판적 발언을 하면 '반일'(反日)로 받아들여 순식간에 좋아하던 감정을 악감정으로 바꿀 위험성이 있다는 것이다.

후쿠시마 교수는 일본 젊은이들이 그 수준에서 한발 더 나아가 자유로운 입장에서 사고하는 힘을 키웠으면 좋겠다며 그런 마음가짐으로 젊은 학생들을 대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도쿄=연합뉴스) 일본 도코하대학의 후쿠시마 미노리 준교수 인터뷰 기사가 게재된 아사히신문 웹사이트. 후쿠시마 교수는 지금의 일본 젊은이들에게 한글은 귀엽고 세련된 존재라고 말했다.

parksj@yna.co.kr

 

 

[국악]

 

한문 단편 '송경운전'에 비친 그의 삶

[서울신문]조선 전기만 해도 전문 연주자가 수반되는 음악의 수요층은 왕실과 양반사대부에 한정됐다. 하지만 조선 후기가 되면 부를 축적한 중인이 중요한 음악 소비자로 떠오르고, 서민들도 가세하면서 음악시장이 넓어진다. 상업화의 진전으로 예술에 아낌없이 돈을 쓰는 분위기가 조성되자 뛰어난 기량을 가진 음악가가 줄지어 나타났다. 비파연주자 송경운도 당대 ‘스타 플레이어’의 한 사람이었다.

김홍도(1745~?)의 ‘단원도’. 자신의 초가집에서 친구들과 즐겁게 보냈던 한때를 회상한 작품이다.
‘단원도’ 부분. 거문고를 타는 단원의 뒷벽에 비파가 걸려 있다. 비파가 거문고만큼이나 크게 유행한 악기였음을 알 수 있다.

오늘은 송경운을 다룬 문학 작품 한 편을 소개한다. 그는 ‘지나칠 정도로’ 음률에 밝았는데, 아홉 살에 시작한 비파가 크게 노력하지 않아도 경지에 이르러 열두세 살 무렵에는 벌써 이름이 경향에 널리 알려졌다. 연주 솜씨뿐 아니라 ‘키가 훤칠하게 크고, 얼굴은 풍만하면서 희며, 눈은 가늘면서도 별처럼 밝고, 수염은 아름다우며, 말도 잘했으니 참으로 호남아’라는 것도 인기의 요인이었을 것이다.

●조선 후기 음악시장 확대로 ‘스타 플레이어’ 등장

 

송경운이 17세기 후반을 대표하는 음악가로 우리 앞에 모습을 보이고는 있지만 출생 연대도, 사망 연대도 알려지지 않는다. 생몰 연대는 고사하고, 도대체 실존인물인지조차 불분명하다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문학적 관심은 크게 불러일으킨 인물이지만 정사(正史)에는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문으로 쓰인 단편 ‘송경운전’의 지은이는 서귀 이기발(1602~1662)이다. 그는 문과에 급제해 벼슬을 살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아 남한산성으로 진격했으나, 청나라와 화약이 이루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 전북 전주로 돌아가 평생을 은거한 인물이다. ‘송경운전’은 이기발의 후손들이 유고를 모아 책으로 꾸민 ‘서귀집’(西歸集)에 실렸다. 서귀는 송경운이 당대 얼마나 명성을 떨친 인물이었는지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예술인들의 지극한 경지를 칭찬할 때 ‘어째 송경운의 비파 같네’라고 했고, 초동이나 목동의 무리가 모여 놀 때도 누가 재미있는 말을 하면 ‘어째 송경운의 비파 같네’라고 했으며, 말을 배우는 두어 살짜리 아이가 자기와 관계없는 것을 가리키며 물어도 ‘어째 송경운의 비파 같네’라고 했다. 송경운이라는 이름이 알려진 게 대개 이러했다.’

한마디로 ‘송경운’이란 희한하거나 지극한 것의 대명사였고, 그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는 뜻이다. 그런데 서귀가 서울에서 크게 명성을 떨치던 인물의 전기를 쓴 것은 송경운 또한 정묘호란 이후 전주에 자리를 잡았기 때문이다. 학계는 송경운이 피란지에 눌러앉은 것을 두고, 장악원에 예속된 신분이었음에도 복귀를 거부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서울에서 부와 인기를 누리는 노비로 살기보다 시골에서 자유로운 삶을 원했다는 것이다.

송경운은 전주 완산성 서쪽에 살았는데, 그의 집은 언제나 북적였다. 손님이 오면 송경운은 성심성의껏 연주하여 만족할 때까지 그치지 않았다. 신분이 높은 사람뿐 아니라 하인들에게도 똑같이 성심껏 연주했다. 20년동안 한결같았으니 전주사람들은 감복하여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는 것이다. 서울에서의 명성이 그대로 전주로 이어졌음을 알 수 있다. ‘송경운전’이 돋보이는 것은 드물게 주인공의 음악관(音樂觀)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옛가락 추구하던 그의 음악, 당대 유행 곡조도 연주

‘비파는 옛가락과 요즘 가락이 다른데, 지금은 대개 요즘 가락을 숭상한다. 하지만 나는 홀로 옛가락에 뜻을 두어 왔다. 무릇 소리를 낼 때 옛가락에 의거하면 요즘 가락이 끼어들지 못하고, 내 마음도 흡족하여 가히 음악답다고 여겨진다. …그런데 나의 연주를 듣는 이들은 평범한 사람들인지라 이런 음악에 즐거워하지 않더라. 음악을 듣고도 즐거워하지 않는다면…무슨 유익함이 있겠는가 싶다. 이 때문에 특별히 곡조를 변화시켜 요즘 가락을 간간이 섞어서 사람들이 기뻐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송경운의 음악적 이상은 옛가락에 바탕한 느리고 고상한 음악이었지만, 별다른 음악적 교양이 없는 전주의 보통사람들은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송경운은 자신의 음악관만 고집하지 않았다. 많은 사람이 즐거워하는, 아마도 당대 유행하던 빠른 템포의 새로운 음악도 레퍼토리에 포함시켰음을 짐작게 한다.

자칫 흔적도 없이 사라질 뻔한 비파 명인의 존재를 후세에 알려준 것만으로도 ‘송경운전’의 가치는 작지 않다. 나아가 조선시대 음악가들도 오늘날의 음악가들 만큼이나 순수성과 대중성 사이에서 고심했음을 알게 한다. ‘송경운전’은 음악가의 전기이지만, 동시에 한 시대의 음악론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송경운도 송경운이지만 서귀가 일구어낸 예술적 성과 역시 높이 평가하고 싶다.

dcsuh@seoul.co.kr

 

 

  • 수정 2019-10-19 11:23 등록 2008-05-08 18:16

가야금 명인 황병기 “국악은 청량음료 아닌 생수” (hani.co.kr)

국악 대중화 ‘기획자’로 나선 가야금 명인 황병기

기자이정아
거실에도

끊어질 듯, 이어질 듯 가야금 줄이 팽팽하게 울었다. 마지막 소리가 물결처럼 잦아들자 300석짜리 작은 공연장에 박수가 울려퍼졌다. 북을 잡고 있던 황병기(72·국립국악관현악단 예술감독) 선생이 일어나자 박수 소리는 더욱 커졌다. ‘황병기 명인의 산조이야기’라는 부제가 붙은 <가야금산조 여덟바탕전>이 끝나는 날이었다.

해설 곁들인 ‘엄마와…’ ‘사랑방 음악회’ 호응
20대 위한 양악-국악 섞인 뮤지컬 공연 작업중

“1시간 넘는 산조를 함께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황 감독의 말에 객석에서 웃음이 터져나왔다. 정남희제 황병기류 산조는 존재하는 가야금 산조 중에서도 연주시간이 가장 길어 1시간10분이나 된다. 그가 산조의 유래와 특징을 구수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동네 할아버지가 손자들에게 설명하듯 편안한 설명이 이어지는 동안 객석에선 엄마 손을 잡고 온 어린이들이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이화여대 한국음악과 교수를 퇴임한 뒤 그는 오히려 더욱 바쁘게 나날을 보내고 있다. 무대에 오르는 시간도 훨씬 늘었다. 자기 연주 때문이냐면 그렇지도 않다. 요즘은 해설자로 더욱 이름을 날린다. 지난 4월23일 막을 내린 서울 남산국악당의 ‘가야금 산조 여덟바탕전’을 직접 해설했고, 올해 국립국악관현악단이 시작한 ‘사랑방 음악회’에서도 정기적으로 관객들을 만나고 있다.

 

2006년 국립국악관현악단 예술감독을 맡은 뒤 그는 ‘국악 전도사’를 자임하고 있다. “어려서부터 국악을 들어야 즐길 수 있다”는 생각으로 ‘엄마와 함께하는 국악보따리’를 올해 전면 개편해 대성공을 거두었고, 지난해 시범사업이었던 사랑방 음악회는 올해 상설공연으로 자리 잡았다. 당대의 거장이 직접 해설자로 나선다는 점은 당연히 관객들에겐 귀가 솔깃한 소식. 국립극장 별오름 극장에서 매달 열리는 사랑방 음악회는 늘 만원이다.

방에도 어디를 가나 가야금이 있었다. 서울 서대문구 황병기 선생의 자택에는 수십개의 가야금에 온갖 전통악기들과 책들이 빼곡했다. 황 선생은 “백남준 선생 댁은 우리집보다 더 정신이 없어서 소파에도 앉을 자리가 없더라”며 웃었다.

그는 서양 오케스트라 지휘를 하는 김홍재 울산시향 지휘자에게 국악관현악단 지휘를 맡기고, 첼리스트 장한나와 함께 로비 음악회를 개최하는 등 새로운 변화에도 팔을 걷어붙였다. 기량이 뛰어난 관현악단원들은 독주와 중주를 중심으로 하는 사랑방 음악회 등을 통해 따로 선보여 단원들의 사기도 충천했다.

 

다가가는 만큼 나오는 호응에 힘입어 그는 또다른 야심찬 계획도 세웠다. 뮤지컬 형식으로 양악과 국악이 뒤섞인 “완전히 새로운 연주회”다. 연주자들이 앉아서 연주하는 것이 아니라 연기하면서 연주도 하는, 한판 뮤직비디오 같은 그런 공연을 지향한다. 장영규, 김만석 등 쟁쟁한 작곡가들이 11월 공연을 목표로 참여하고 있다.

그는 대중과의 교류 속에서 훌륭한 전통이 만들어진다고 확신한다. “결국은 전통이 창작이고, 창작이 전통이 됩니다. 아악곡 중 가장 방대한 ‘여민락’만 해도 <세종실록>에 실린 것과 국립국악원이 연주하는 것이 전혀 달라요. 수백년을 통해서 계속 달라져온 거지요. 전통 그냥 그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새로운 음악을 하려는 것이고 우리 사회가 요구하고 있는 것도 그런 음악이에요.”

 

최초의 가야금 창작곡 작곡자, 전통과 전위를 결합한 현대 예술가, 가야금 명인, 그리고 교육자, 이제는 기획자까지…. 그의 모습 중 어느 것이 가장 자신과 가까운지 물었다. “결과적으로는 음악계에 보탬이 된 것은 작곡이 아닐까 싶어요.” 그는 고심 끝에 대답했다.

<미궁> 같은 전위적 작품들을 선보였기 때문에 그는 전통보다는 퓨전에 가깝다는 오해를 받는다. 그러나 그는 흔히 알려진 퓨전, 크로스오버 음악과 자신의 음악은 별개라고 말한다. “퓨전, 크로스오버, 물론 좋은 현상이라고 봅니다. 하지만 나로서는 결과적으로 편곡적인 면에서 변화를 준 것이지 퓨전 가야금 곡을 쓰려 한 것은 별로 없어요. 국악의 세계화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국악은 원래 세계인이 국경을 초월해서 좋아하는 것이거든요.”

그 예로 1974년 작곡한 <침향무>를 유럽 각국에서 연주했을 때의 이야기를 꺼냈다. 세계와 통할 음악을 만들려는 생각이 아니라 한국적이면서 크게는 범아시아적인 곡을 만들고 싶어 지은 것이 <침향무>였는데 예상밖으로 세계 각지에서 엄청난 사랑을 받았다는 것이다. 파리 공연 마지막날 소설 <25시>의 작가인 게오르규가 공연이 끝나고 찾아와 <침향무>에 너무나 감동했다고 전해주고 갔을 정도였다.

그가 생각하는 국악 대중화의 의미를 물었다. “여러 음료수 회사들이 대중들이 좋아할 만한 맛을 개발하잖아요? 하지만 사람들은 그냥 물을 더 많이 마시고 찾습니다. 우리에겐 우리 국악이 그런 맛이라고 봐요. 나는 순수한 물을 더욱 많이 마실 수 있게 해 주고 싶은 거고요.” 그는 그런 음악이 나오면 대중들은 분명 알아보고 사랑해줄 것이라고 강조했다. “오히려 대중들이 저보다 더 높은지도 모르겠어요. ‘어떤 음악을 대중들이 좋아할 것 같다’고 휘말리지 말고, 자신만의 예술적 경지를 추구하다 보면 자연히 사랑받는 것 같습니다.” 글 정유경 기자 edge@hani.co.kr

사진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입력 :2008-03-15 00:00ㅣ 수정 : 2008-03-15 00:00 

대중 곁으로…국악관현악&교향악축제 | 서울신문 (seoul.co.kr)

 
20일 국립극장서 ‘국악관현악 명곡전Ⅲ´

작곡가 이건용의 ‘산곡(山曲)’은 1992년 서울대 국악과 정기연주회를 위하여 위촉된 작품이다. 우리나라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산의 이미지를 담으려 했다는 ‘산곡’은 이달에만 두 차례 연주된다.

20일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펼쳐지는 국립국악관현악단의 ‘국악관현악 명곡전Ⅲ-춘무(春舞)에서 산맞이까지’와 27일 국립국악원 예악당에서 열리는 국립국악원 창작악단의 ‘명곡으로의 초대-네번째 이야기’가 그 마당이 된다. 창작 국악관현악 작품이 이렇게 일주일 간격으로 다른 단체에 의해 잇따라 연주되는 것은 이례적이다.

국악기를 서양음악의 오케스트라를 모델로 다시 편성한 국악관현악은 전통음악을 바탕으로 하고 있지만,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그동안 적지 않은 작품이 발표되었고, 지금도 속속 연주되고 있지만 좋은 평가를 받은 곡이라도 다시 연주되기란 쉽지 않다.

‘국악관현악 명곡전’과 ‘명곡으로의 초대’는 아무리 좋은 작품이라도 초연(初演)이 곧 종연(終演)이 되어 버리는 상황에 대한 안타까움에서 마련된 것이다. 훌륭한 작품을 반복하여 연주함으로써 ‘고전’으로 정착시키겠다는 뜻이 담겨 있다. 그것은 사실 대중의 사랑을 필요로 하는 국악관현악단의 ‘살길’이기도 하다.

 
국립국악관현악단은 이번에 ‘산곡’을 비롯해 김희조의 합주곡 1번과 박범훈의 ‘춘곡’, 나효신의 ‘길을 찾는 동안’, 김성국의 ‘심(心)’, 김대성의 ‘산맞이’를 연주한다. 국립국악원 창작악단도 ‘산곡’과 박동욱의 합주협주곡 ‘취타’, 원일의 ‘나비·꿈’, 최경만이 구성하고 계성원이 편곡한 ‘호적풍류’, 이준호의 ‘시선뱃노래’, 김대성의 ‘청산’을 들려준다.

김대성의 ‘산맞이’와 ‘청산’도 두 단체에 의해 선택되었음을 알 수 있다. 작곡가들에게도 자랑스럽겠지만, 어떤 음악을 골라들어야 하는지 고민스러울 수도 있는 음악 팬들에게 중요한 참고사항이 되기에 충분하다.

국립국악원 창작악단의 ‘명곡으로의 초대’는 올해로 네번째, 국립국악관현악단의 ‘국악관현악 명곡전’은 세번째이다. 한해에 한 차례만 열리니 ‘낙점’을 받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지금까지 두 단체가 모두 ‘명곡’의 반열에 올려 이 기획공연에서 연주한 작품은 이상규의 ‘대바람 소리’가 유일하다. 이건용의 ‘산곡’은 두번째 영예를 차지하는 것이다. 국립국악관현악단과 국립국악원 창작악단 연주회의 지휘자는 각각 김홍재와 노부영. 창작악단 연주회에는 호적명인 최경만과 소리꾼 김용우와 곽동현, 그리고 한국전통타악연구소 ‘판’이 협연자로 나선다. 티켓값은 국립국악관현악단(02-2280-4115)이 2만∼5만원, 국립국악원 창작악단(02-580-3300)이 8000∼1만원이다.

서동철 문화전문기자 dcsuh@seoul.co.kr

새달 1~23일 예술의 전당 전국교향악단 한자리

전국의 교향악단이 한자리에서 저마다의 색깔을 보여주고, 지역 출신 인사들도 오랜만에 친목을 다지는 ‘교향악 축제’가 새달 1일부터 23일까지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펼쳐진다.

1989년 시작되어 20회째를 맞는 올해 ‘교향악 축제’에는 전국의 20개 교향악단이 참여해 한국 교향악계의 현주소를 가늠케 할 예정이다.

지난해까지 ‘교향악 축제’에서는 304차례 연주회가 이루어졌고, 모두 436명의 협연자가 나섰다.

지휘자 박은성은 17차례, 임헌정은 16차례 참여했고, 바이올리니스트 김남윤은 11차례 협연자로 나섰다. 피아니스트 김용배와 김대진·이경숙도 각각 5차례 무대에 올랐다.

새달 1일 코리안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개막연주회에는 ‘기록보유자’인 박은성과 김남윤, 이경숙이 출연해 의미를 더한다.15일에는 김대진이 베토벤의 작품으로 수원시립교향악단을 지휘하고 피아노도 친다.

19일 경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무대에는 재미있는 볼거리가 더해진다. 프랑스의 무대미술가인 제라르 에코노모스가 라흐마니노프의 교항곡 2번이 연주되는 동안 커다란 막에 그림을 그리는 퍼포먼스를 보여주게 된다.

정일련의 ‘고요한 비’, 진규영의 관현악을 위한 ‘나의 회상’, 백승우의 대편성 관현악을 위한 ‘상반된 통일’은 이번 축제를 위하여 새로 위촉된 작품. 임지선의 ‘충돌과 화해-잃어버린 문명을 추모하며’와 신수정의 오케스트라를 위한 ‘Verkleidet’도 무대에 오른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는 오후 8시, 일요일에는 오후 5시에 시작한다.1만∼3만원.(02)580-1300.

서동철 문화전문기자 dcsuh@seoul.co.kr

 

 

입력 2008-01-22 02:59업데이트 2009-09-25 19:42

다음 달 6, 7일 사물놀이 탄생 30주년 기념 공연을 하는 남기문 김덕수 이광수 최종실 씨(왼쪽부터). 사진 제공 크레디아
 
“사물놀이는 제게 운명이었습니다. 두드리는 소리를 통해 커왔고, 두드림을 통해 삶의 가치를 깨달았습니다. 다시 태어나도 두드리며 살 겁니다.”(최종실 씨)

21일 오전 11시 서울 종로구 원서동 소극장 ‘공간사랑’. 30년 전 하얀 농민복을 입고 북과 꽹과리, 징, 장구를 두들겨대던 더벅머리 총각들이 다시 뭉쳤다. 바로 ‘사물놀이’ 원년 멤버들이다. 이광수 씨의 구성진 구음 ‘비나리’로 시작된 10여 분의 짧은 공연이었지만 원년 멤버의 솜씨는 조금도 녹슬지 않은 듯 장내를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여기도 참 많이 변했네요. 숨쉬기도 어려웠던 1970년대 후반 여기서 작은 문화운동이 시작됐죠.”(김덕수 씨) “당시 전통 예술이 문화재 지정으로 박제화되면서 아무 데서나 놀이를 못하게 했어요. 그래서 소극장에서 암암리에 활동을 시작한 거죠.”(이광수 씨)

다음 달 6, 7일 오후 8시 서울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사물놀이 탄생 30주년 기념공연이 열린다. 김덕수(장구·56) 이광수(쇠·56) 최종실(북·54) 씨와 작고한 김용배(1953∼1986년) 씨를 대신해 남기문(50·징) 씨가 함께하는 공연이다. ‘원조 드림팀’ 멤버 3명이 한무대에 선 것은 14년 만의 일이다. 이들은 전국투어와 미주, 유럽 투어도 계획하고 있다.

현재 이들은 각자 다른 길을 걷고 있다. 1984년 김용배 씨가 국립국악원으로 떠난 데 이어 최종실, 이광수 씨가 차례로 독립했다. 혼자 남은 김덕수(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씨는 사물놀이 한울림을 창단했다. 현재 최 씨는 중앙대 국악과에서 후학을 양성 중이며 이 씨는 충남 예산군에 민족음악원을 설립해 활동하고 있다.

1978년 2월 28일 소극장 공간사랑에서 처음 태동한 사물놀이는 1982년 미국 댈러스에서 개최된 ‘세계타악인대회’를 통해 세계에 알려졌다. 이후 월드뮤직 재즈 힙합 등 다른 나라의 장르와 교류해온 사물놀이는 타악 퍼포먼스 ‘난타’ ‘도깨비 스톰’의 원류가 되기도 했다. 급기야 대영백과사전에 ‘사물노리안(samulnorian·사물놀이를 즐기는 사람들)’이란 신조어가 등록되기도 했다.

이광수 씨는 “그동안 뿌린 씨앗이 ‘1세대 한류’를 만들었다. 이제는 그 씨앗이 잘 자랄 수 있도록 앞장서서 이끌어야 한다”며, 김덕수 씨는 “21세기에 맞는 새로운 풍물판제를 짜고 레퍼토리를 마련한다면 힙합, 재즈처럼 사물놀이도 ‘글로벌 음악’이 될 것”이라며 “전용극장과 연습 공간, 기념관 등을 갖춘 사물놀이 센터를 만들기 위한 기념사업회를 추진하겠다”고 말했다.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dongA.com에 동영상

 

 

입력 2008. 1. 12. 02:00수정 2008. 1. 12. 02:00

[서울신문]원각사는 지금의 서울 광화문 새문안교회 자리에서 판소리와 창극, 그리고 새로운 형태의 연극을 올린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극장이다.1902년 협률사라는 이름으로 설립되었는데,1906년 문을 닫은 뒤 1908년 7월 이인직·박정동·김상천이 건물을 빌리고 내부를 수리해 극장을 만들었다.

정동극장은 원각사의 옛 터전에서 가까운 서울 중구 정동에서 '원각사의 복원'이라는 이념으로 1995년 출범했다. 이 극장의 마당에 원각사를 중심으로 '근대 5명창의 한 사람'으로 창극 활성화에 앞장섰던 이동백의 동상이 세워진 것도 이 때문이다.

 

정동극장이 원각사 설립 100돌을 맞아 연중기획으로 대대적인 기념행사를 갖는 것은 '원각사의 적자(嫡子)'라는 정체성을 이번 기회에 확실하게 각인시키고 싶다는 의도일 것이다.

정동극장의 원각사 기념무대는 1월과 6월,10월에 집중적으로 펼쳐진다. 이달 '정동명인뎐'에 이어 6월에는 젊은 감각을 가진 새로운 시대의 전통예술인들 4명을 선정하여 예술세계를 집중적으로 소개하는 '아트 프런티어',10월에는 원각사 설립 주역의 한 사람인 이인직이 자신의 1908년작 신소설을 바탕으로 공연한 '은세계'를 무대에 올린다. 손진책이 연출을 맡아 현재 완전히 새로운 감각의 '은세계'를 창조하는 작업에 한창이다.

'정동명인뎐'은 중요무형문화재 보유자(인간문화재) 14명을 포함한 80명의 명인·명창·명무가 참여한 가운데 11일 막을 열어 26일까지 열리는 '작은 극장의 큰 무대'이다.

'창극의 탄생'을 주제로 삼은 11∼12일은 판소리 다섯마당과 입체창 '수궁가', 그리고 '흥보가'와 '심청가'의 한 대목을 인간문화재급 명창들의 소리로 즐길 수 있다.

'춘향가'와 '심청가'의 인간문화재 성우향과 성창순,'흥보가'와 '수궁가' 보유자 박송희와 남해성, 그리고 '적벽가'의 보유자인 송순섭과 보유자 후보 김일구가 이틀 동안 나누어 출연하는 초특급 무대이다. 왕기석과 유수정, 김학용, 정미정, 임향님 등 차세대를 이끌고 갈 명창도 대거 등장한다.

18∼19일은 '안팎의 우리 춤'이다. 김주홍과 노름마치의 '비나리'에 이어 고성오광대의 인간문화재 이윤석의 '덧뵈기 춤'과 '밀양백중놀이' 보유자 하용부의 '밀양북춤'이 펼쳐진다.

채상묵과 임이조, 윤미라, 김운선 등 대표적인 춤꾼들이 망라됐다.

 

'소리와 악기'를 주제로 삼은 25∼26일은 명인들의 산조와 각 지방의 토속적인 소리들이 어우러진다. 인간문화재 문재숙과 이생각, 김영재가 각각 보유하고 있는 가야금산조와 대금산조, 거문고산조를 들려준다. 서도소리 인간문화재 이은관의 '배뱅이굿'과 경기민요 보유자 이춘희의 '긴아리랑', 김영임의 강원소리, 최경만의 '호적풍류' 등도 마련된다.

피날레는 이광수와 한국민족원의 비나리가 장식한다. 오후 7시30분.2만∼3만원.(02)751-1500.

서동철 문화전문기자 dcsuh@seoul.co.kr

 

 

입력 :2007-11-15 00:00ㅣ 수정 : 2007-11-15 00:00 

국악의 變주곡 | 서울신문 (seoul.co.kr)

첼로협주·서양음악 지휘자 국악관현악단 29일 창작음악회
국립국악관현악단이 과거가 아니라 현재(contemporary)에 전력투구하고 있다. 국악의 살길은 옛 음악이 아니라 새로운 음악에 있다는 것이다. 현대음악에 바탕을 둔 새로운 작품을 잇따라 위촉하고, 초연된 신작은 현대음악제를 통하여 세계 무대에 소개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국립국악관현악단은 오는 29일 신작을 초연하는 창작음악회를 갖는다. 작곡가 임준희, 백대웅, 백병동, 이해식에게 범위에 제한을 두지 않고 작품을 위촉했더니 공교롭게도 모두 협주곡을 내놓았다.‘협주동화(協奏同和)’라는 음악회의 제목도 자연스럽게 지어졌다.

파격적인 것은 협주 악기. 임준희의 ‘혼불Ⅲ-가도 가도 내 못 가는 길’은 18현 가야금, 백대웅의 ‘만파식적의 노래’는 퉁소 협주곡으로 전통적인 악기를 썼다. 김미경과 최민이 각각 협연자로 나서게 된다.

하지만 백병동의 ‘첼로와 국악관현악을 위한 4장’과 이해식의 ‘피아노와 국악관현악을 위한 춤두레 제2번’은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첼로와 피아노를 솔로 악기로 채용했다.‘협주동화’에는 국악기와 서양악기, 국악관현악단이 음악적 동화(同和)를 만들어간다는 뜻 또한 담겨 있는 셈이다.

‘4장’의 협연자로 세계적인 첼리스트 양성원이 나서는 것도 눈길을 끈다. 국악관현악에 대한 서양음악애호가들의 관심도 높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를 모으는 대목이다.‘춤두레 제2번’은 피아니스트 이항아가 협연한다.

파격적인 대목은 또 있다. 창작음악회의 지휘자로 서양음악 지휘자인 조정수를 초빙한 것이다. 조정수는 벨기에 브뤼셀 왕립 음악원과 프랑스 파리 말메종 국립음악원에서 지휘와 관현악법을 공부한 신예 지휘자이다.

당초 지휘를 하기로 했던 김홍재가 울산시립교향악단 상임지휘자로 임명되는 바람에 새로운 지휘자를 물색할 수밖에 없었지만, 조정수를 초청한 것은 굳이 국악관현악과 서양음악관현악 사이에 경계를 둘 필요가 없다는 의지를 다시 한번 반영한 것이다.

국립국악관현악단은 이렇게 만들어진 신작을 들고 세계적인 현대음악제에도 적극 참여하겠다는 생각이다. 지난달 16∼17일 열린 ‘국가브랜드 연주회-네 줄기 강물이 바다로 흐르네’에서 초연된 신작 4곡의 연주실황이 담긴 영상 및 음향 자료는 이미 체코 프라하의 스프링뮤직페스티벌과 노르웨이의 컨템퍼러리뮤직페스티벌에 보냈다.

류상록 국립국악관현악단 프로듀서는 “‘국가브랜드 연주회’를 두고 민간전문가들로부터 평가를 받아본 결과 국립단체가 아니면 할 수 없는 기획이라는 목소리가 적지 않았다.”면서 “새로 만들어진 창작곡과 기존 레퍼토리를 적절하게 구성하여 국악관현악의 현대적인 아름다움을 국내외에서 적극 펼쳐보이는 등 앞으로도 국립단체로서의 역할을 다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서동철 문화전문기자 dcsuh@seoul.co.kr

 

 

 

  • 수정 2007-11-14 18:46 등록 2007-11-14 18:46

“후학들에게 윤이상음악 감동 전하려” (hani.co.kr)

‘윤이상 탄생 90돌’ 심포지엄 연 발타 볼프강 슈파러 회장

“윤이상은 자신의 작품이 그 자체로 하나의 존재라고 생각해 다른 음악과 비교되거나, 어떠한 맥락 속에서 평가되는 것을 싫어했지만, 윤이상이 쇤베르크 빈학파를 수용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음악사를 쓰려면 윤이상을 이러한 맥락 안에 넣고 평가하는 것이 불가피하다.”

윤이상 탄생 90주년을 맞아 그의 모교이자 그가 교수로 재직한 베를린예술대학에서 지난 8~10일 심포지엄과 음악회 등이 열렸다. 국제윤이상협회와 베를린예술대학이 공동주최한 이 행사는 ‘유럽과의 관계로 본 윤이상’이라는 주제로 진행됐다. 발터 볼프강 슈파러(사진) 국제윤이상협회장은 “지난해 통영 윤이상 국제 심포지엄에서는 그의 음악이 한국 음악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다뤘다”며 이번 심포지엄은 그 연장선에 있다고 밝혔다.

모교인 베를린예술대와 공동 주최유럽음악·다른 작곡가들 영향 다뤄“쇤베르크 빈학파 수용했다고 본다”

심포지엄의 첫번째 섹션에선 윤이상의 교향곡과 현악 4중주곡이 서양음악사의 장르 면에서 어떠한 구조와 특징을 가지고 있는지를 분석했다. 베를린 예술대학 음악학과 라이너 카덴바흐 교수는 “윤이상의 현악 4중주는 12음기법을 사용하지만 다이내믹, 아티큘레이션을 통해 한국적인 성격을 나타낸다. 음들이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돼 있어 자연과 유사성을 지니고 있다”고 평가했다. 두번째 섹션에서는 윤이상과 동년배인 1917년생으로, 윤이상 재직 시절 베를린예술대학 교수를 지냈던 다른 작곡가들과의 상호 관련성에 대해 다뤘다.

‘대화’를 주제로 한 음악회에선 윤이상 뿐만 아니라 드뷔시와 라벨 등 다른 유럽 음악가들의 작품도 연주됐다. 카덴바흐 교수는 “드뷔시나 라벨은 윤이상의 음악과 구조는 다르지만 음색이나 음악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이 비슷하다”며 “윤이상 자신도 초기 라벨의 영향을 받았다고 했다”고 설명했다.

비록 재정이 부족해 윤이상의 현악 4중주, 8중주 콘서트는 열리지 못했지만, 베를린예술대학의 로스비타 스테게 교수(플룻) 등 윤이상의 음악을 아끼는 음악가들이 8일과 10일, 이틀에 걸쳐 무료로 공연을 했다. 슈파러 협회장은 “윤이상의 음악을 연주하던 음악가들이 연로해 은퇴하고 있다”며 “지속적으로 이런 음악회와 학술행사 등을 열어 후학들에게 그의 음악을 알리고, 감동을 주고 싶다”고 말했다.

베를린/글·사진 한주연 통신원 juyeon@gmx.de

 

 

입력 :2007-10-06 00:00ㅣ 수정 : 2007-10-06 00:00 

“해금의 깊고 아름다운 소리 인상적” | 서울신문 (seoul.co.kr)

 
“브라질 대중음악의 멜로디는 이반 린스에서 시작해 이반 린스로 끝난다.”는 말이 있다.

안토니오 카를로스 조빔 이후 현존하는 브라질 최고의 작곡가로 꼽히는 이반 린스(62)가 5∼7일 원월드뮤직페스티벌 참석차 처음 내한했다. 지난 4일 서울에서 기자와 만난 그는 “이번 공연은 지난 10년간의 음악을 보여주는 하이라이트”라며 눈을 찡긋했다.
 


1970년 데뷔한 이반 린스는 브라질의 전통음악에 영미권의 재즈, 팝의 멜로디를 재현해 브라질뿐 아니라 미국에서도 인정받으며 거장의 반열에 올랐다. 퀸시 존스, 엘라 피츠제럴드, 투츠 틸레망 등 유명 음악인들과 함께 작업해온 그는 18살 늦은 나이에 피아노를 독학하면서 음악을 시작했다.

‘사람들을 유혹하려고’ 음악을 시작했다는 이반 린스. 첫발은 늦게 뗐지만 2년 뒤에는 재즈클럽에서 연주할 정도가 됐다. 이유는 가정환경 때문.

“두 살배기 아기 때부터 미국 포크송을 듣던 광적인 음악팬이었어요. 부모님이 음악으로 저를 다스렸거든요. 재울 때도, 놀게 할 때도 늘 음악을 들려주셨습니다.”

브라질 음악이 전통음악에 그치지 않고 전세계적인 공감대를 얻을 수 있었던 이유는 뭘까.

“저는 두 살 때 미국에 건너갔다가 다섯 살에 브라질로 돌아와 고국 음악을 들었습니다. 그러니 사실 제 바탕에 깔린 음악은 미국 음악일 겁니다. 그러나 원래 브라질은 인종도 다양하고 군사정권 시절 미국 등 다른 나라로 잠시 옮겨갔던 음악인들이 많아요. 그들은 원래 브라질 음악 속에 든 아프리카·포르투갈 음악의 요소과 미국의 팝 등 다양한 재료를 섞는 걸 두려워하지 않죠. 조빔의 음악이 클래식에 기초한 것처럼요. 그게 풍성하고 다양한 색이 나오는 이유입니다.”

4년 전 그는 한국의 한 음악평론가에게서 국내 한 방송국에서 발매한 ‘우리의 소리를 찾아서’ 전집을 선물 받았다. 해금 소리가 가장 인상적이었다는 그는 해금 켜는 소리를 내며 가슴을 쥐어짜는 시늉을 해보였다.

“색다른 박자 감각과 표현법이 놀라웠습니다. 깊고 아름다운 소리도 인상적이었고요. 더 연구해 한국 음악인들과 음악적인 교류도 해봤으면 합니다.”

음반시장의 침체로 음악의 미래와 후배들을 걱정하는 건 거장인 그도 마찬가지다. 세계 어디나 같은 문제를 겪는다며 그는 한숨을 길게 뱉었다.

“이젠 저도 젊었을 때처럼 힘이 없어서 뒤에서 지켜보는 상황이지만 디지털화로 인한 저작권 문제 등은 분명한 해결이 나와야 합니다. 요즘은 레코드 가게에서 음반을 사는 게 아니라 인터넷 등의 미디어로 음악을 소비합니다. 대중매체가 상업적 기호로 가니 일회성 가수와 음악은 계속 급조되죠. 그래서 진정한 음악인들이 관객들과 만날 기회는 점점 줄어들고 있어요.”

내년 암스테르담과 피츠버그를 찾을 이반 린스는 오케스트라 협연 앨범과 현대 여류 시인의 시에 곡을 붙인 새 앨범을 준비 중이다.

영화음악에 전통 삼바 음악, 요즘 세대의 음악도 하고 싶단다. 방금 전까지 “저도 여든 살까지 무대에 섰던 프랭크 시내트라처럼 해야 할까요?”하던 소리가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정서린기자 rin@seoul.co.kr

 

 

  • 수정 2019-10-19 11:23 등록 2008-04-13 22:29

[특파원리포트] 중국 달구는 원조 한류 ‘꽃파는 처녀’ (hani.co.kr)

기자유강문

“꽃 사시오, 꽃 사시오, 어여쁜 빨간 꽃. 이 꽃을 사시면, 설움 많은 가슴에도, 새 봄빛이 안겨요.”

북한의 혁명가극 <꽃파는 처녀>가 중국의 봄을 설레게 하고 있다. 15일 베이징을 시작으로 톈진·상하이·난징·칭다오 등 12개 도시를 도는 이 처녀를 보려는 중국인들의 예매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베이징 국가대극원에서 열리는 첫 공연의 일반석은 이미 보름 전에 거의 매진됐다. 한 장에 680위안(약 9만5천원)이나 하는 좋은 좌석의 입장권도 속속 팔려나가고 있다.

<꽃파는 처녀>는 북한의 김일성 전 주석이 만들고,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재창작한 작품이다. <피바다> <당의 참된 딸> <금강산의 노래> <밀림아 이야기하라>와 함께 5대 혁명가극으로 꼽힌다. 일제 강점기에 좁쌀 두 말을 빌렸다가 지주의 머슴으로 전락한 꽃분이네의 비참한 삶이 혁명으로 승화되는 과정을 그린 북한의 ‘고전’이다. 1972년 첫 공연 이후 40여개 나라에서 1400여차례나 무대에 올랐다.

이 작품은 중국에선 ‘한류’의 원조로 통한다. 1970년대 영화로 제작돼 중국에서 엄청난 관객을 끌어모았다. 문화대혁명의 이데올로기에 짓눌려 있던 중국인들에게 꽃파는 처녀의 서정성은 가히 충격이었다. 시골에서 올라와 꼬깃꼬깃 접어넣어둔 돈을 꺼내 입장권을 사는 이들의 모습은 당시 극장 앞에선 흔한 풍경이었다. 매표소 근처에선 손수건을 파는 상인들이 장사진을 치기도 했다.

<꽃파는 처녀>가 대성공을 거두자 <금희와 은희의 운명> <꽃피는 마을> <한 간호사의 이야기> 같은 북한 영화들이 물밀듯이 중국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대도시에선 북한 여성들의 머리 모양이나 옷차림을 본뜬 중국 여성들이 거리를 활보했다. 식당에선 <사과 풍년> <아름다운 내 나라> 같은 북한 노래를 흥얼거리는 중국인들이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오늘날 한류의 확산에 못지 않은 파급력을 보였다고 한다.

중국인들의 이런 향수는 <베이징만보>가 최근 공모한 ‘내 기억 속의 꽃파는 처녀’라는 감상문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35년 전 나는 서북부의 한 시골에서 살았다. 10월 어느 날이었다. 어머니가 꽃파는 처녀 입장권을 구해오셨다. 당시 어머니는 만삭의 몸이었다. 아버지는 어머니의 건강을 염려해 영화를 보러 가지 말라고 하셨다. 그러나 어머니는 평소 온유하던 모습과 달리 고집을 부려 기차를 탔다. 그날 밤 내 동생이 태어났다. 우리 가족과 꽃파는 처녀는 결코 떼어놓을 수 없다.”

<꽃파는 처녀>의 중국 순회공연은 올해 양국 문화 교류의 꽃이다. 류샤오밍 평양 주재 중국대사는 지난해 12월 최창일 북한 문화성 부상을 만난 자리에서 이번 공연을 ‘북-중 문화 교류의 일대 사건’이라고 추켜세웠다. 북한은 이번 공연에 공훈예술가와 인민예술가 칭호를 받은 배우 50여명을 파견했다. 무대에 중국어 자막기를 설치하고, 영화의 명장면도 간간이 넣어 관객의 눈과 귀를 사로잡을 계획이다.

중국은 핵문제로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북한과 혈맹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최근엔 대만과도 경제협력을 통한 관계 개선을 모색하고 있다. 북한 역시 대중 관계를 유지하며 미국과의 적대적 과거를 청산하려 하고 있다. 핵신고를 둘러싼 갈등도 최근 싱가포르 합의를 통해 진전을 본 상태다. 그러고 보니,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긴장이 감도는 남북관계가 참 유별나다.

베이징/유강문 특파원 moon@hani.co.kr

 

 

[한옥]

마루 밑 '쌍굴뚝', 이것은 파격이다 (daum.net)

김정봉입력 2019. 11. 30. 11:30
 
[오래된 마을 옛집굴뚝43] 경북 경주② 양동마을 옛집 굴뚝(1)

[오마이뉴스 김정봉 기자]

경주를 적시고 북으로 내달린 형산강은 경주 안강에 이르러 동북으로 방향을 바꿔 포항으로 흘러간다. 안강평야를 재원으로 안강에 양동마을이 들어섰다. 형산강 줄기에 들어선 제일의 조선마을이다. 하회와 더불어 우리나라 최고의 씨족마을이라는 소리를 듣는다.
  
▲ 양동마을 안골 정경 서백당이 있는 안골 정경이다. 여러 겹 능선과 골짜기에 들어선 마을이라 한눈에 다 들어오지 않는다. 골마다 다른 풍경을 선사한다.
ⓒ 김정봉
 
두 성씨의 집성마을, 양동마을
 
양동마을 생김새는 독특하다. '勿'(물)자 모양으로 뻗은 설창산 네 줄기 능선과 골짜기 따라 집들이 들어섰다. 주로 양반계급의 종가나 기와집들은 지대가 높은 곳에 들어섰고 일반 민가나 외거노비의 초가집들은 골짜기 낮은 곳에 자리 잡았다.
 
여기까지 양동마을 중에 북촌에 해당하고 설창산 앞산 성주산 줄기에 남촌이 형성되어 있다. 앞산, 뒷산, 산등성, 골짜기 가리지 않고 산주름 따라 집들이 꽉 들어찬 엄청난 마을이다. 마을을 구석구석 다 둘러볼라치면 몇날 며칠을 여기서 보내야 한다.
 
▲ 양동마을 정경 낙선당에서 수졸당뒷동산 쪽을 바라다본 정경이다. 골짜기를 비집고 초가집이, 능선을 타고 기와집들이 들어섰다.
ⓒ 김정봉
   
마을의 생성과정은 마을 생김새보다 더 복잡하다. 양동마을은 월성손씨와 여강이씨, 두 성씨의 씨족마을이다. 고려말 여강이씨 이광호가 양동에 살고 있었는데 그의 손자사위 유복하가 처가에 들어와 살게 되었다. 이어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월성손씨 손소(1433-1484)가 유복하의 딸에게 '장가들어' 처가의 재산을 물려받고 눌러앉았다.
 
다시 이광호의 5대손인 이번(1463-1500)이 손소의 딸에게 '장가들어' 양동마을에 뿌리를 내려 두 성씨가 양동마을에 세거하기 시작하였다. 조선중기까지 결혼풍습은 '시집가기'보다는 '장가들기'여서 처가마을에 정착하여 뿌리를 내리는 것은 하나 이상히 볼 필요는 없다.
 
이후 손씨집안에서는 손소의 둘째아들 우재 손중돈(1463-1529)을, 여강이씨 집안에서는 이번의 장남 회재 이언적(1491-1553)이라는 걸출한 인물을 배출하였다. 우재는 회재의 외삼촌으로 아버지를 일찍 여의인 회재에게는 스승이나 다름없었지만 인물로는 우열을 가리기 어려운 난 인물이었다. 우재와 회재 이후 두 집안의 후손들이 벌고 벌어 양동마을에서 양대 문벌을 형성하였다.
 
두 집안의 집짓기 경쟁
 
한마을에 두 집안이 몰려 살다보니 서로 협동하고 혼맥을 맺는가 하면 두 집안 사이에 라이벌의식이 있어 경쟁하기도 하였다. 이는 집짓기경쟁으로 나타났다.
손씨집안 집들로 종갓집 서백당이 있고 살림집으로 관가정과 낙선당이 있으며 정자로 수운정과 서당 안락정이 있다. 이씨집안의 주요 집들로 종갓집 무첨당, 살림집으로 향단, 수졸당고택, 이향정고택, 두곡고택, 근암고택, 상춘헌고택이 있으며 서당으로 강학당과 심수정 정자가 있다.
 
▲ 서백당  안골에 입향조 손소가 지은 월성손씨 종가다. 조선 초에 지어진 몇 안 되는 집이다. 우재와 회재가 이 집에서 태어났다. 군더더기 없는 정갈한 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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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첨당  여강이씨 종가의 큰 사랑채 격의 별당이다. 조선중기의 집으로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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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집안의 경쟁 심리는 집 짓는 시기에도 영향을 미쳤다. 먼저 손씨집안 손소는 1458년 마을 제일 깊숙한 안골 언덕에 대종가 서백당(書百堂)을 지었다. 이어 이씨집안은 서백당 구릉너머 물봉골 동쪽언덕에 무첨당(無?堂)을 지어 이씨집안의 종가로 삼았다.
 
마을에 들어오자마자 보이는 동산이 물봉동산으로 물봉동산 자락에 두 집안의 인물 우재와 회재는 관가정(觀稼亭)과 향단(香壇)을 지었다. 두 종가에 이어 지은 살림집이다. 관가정은 우재가 분가하여 살던 집이다. 향단은 1540년대에 회재가 짓고 동생 이언괄에게 물려줘 자신을 대신해 어머니를 모시게 하였다. 두 집은 양동마을 살림집의 백미로 뽑힌다.
 
건축가 김봉렬 교수는 관가정은 장식이 거의 없이 단순하면서도 정제된 아름다움이 있다며 예술적 사조로는 고전주의적 건축물이라 했고 향단은 화려하고 개성이 넘치는 낭만주의 건축물로 조선시대 살림집 중에 독창성이 가장 뛰어나다고 하였다. 아닌 게 아니라 비탈면에 들어선 향단은 만개한 연꽃처럼 화려하여 마을 어디에서나 눈에 잘 띈다.
  
▲ 향단  마을 어귀 비탈에 지어 마을 어디에서나 눈에 잘 띈다. 과시적이며 개성이 넘치고 독창적이고 화려한 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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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단을 지을 즈음 손씨집안은 1540년경 서백당 옆에 낙선당(樂善堂) 고택을 지었다. 손소의 셋째아들 손숙돈이 분가하며 지은 집이다. 천석꾼 집답지 않게 평대문에 기단을 낮게 한 겸손한 집으로 양동마을에서 제일 고졸한 맛이 난다.
 
이에 대해 이씨집안은 17, 18세기에 봇물의 물살처럼 빠르게 살림집을 선보였다. 1616년 안골서쪽 언덕에 수졸당고택을 짓고 1695년에 이향정고택, 1730년에 상춘헌고택, 1733년경에 두곡고택, 1780년경에 근암고택, 1840년 사호당고택을 차례로 지었다.
 
경쟁에서 정자도 빼놓을 수 없다. 이씨집안이 1560년경 마을에서 제일 큰 심수정을 짓자 손씨집안은 1580년 우재의 손자 손엽이 마을 북쪽 끝 으슥한 곳에 수운정을 지었다. 두 집안의 학습과 교육에 대한 열정 또한 무시할 수 없다. 성주산 자락에 손씨집안은 1776년 안락정을 짓고 이씨집안은 백년 뒤 1870년경 강학당을 지어 두 가문의 후손을 양성하였다.
 
월성손씨 집안의 절제된 굴뚝
 
손씨집안 굴뚝은 한옥조형의 근간을 이루는 은둔과 겸손, 배려의 고전적 원리가 지배한 절제된 굴뚝이 많다. 관가정 사랑채 굴뚝은 그 중 하나다. 기단을 자세히 보면 시커멓게 그을린 여러 개 구멍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아궁이와 굴뚝이다. 굴뚝 중에 아궁이와 굴뚝이 같은 쪽에 나란하게 있는 되돈고래 굴뚝이다. 청백리 집주인의 품성에 어울리는 절제된 굴뚝이다.
  
▲ 관가정굴뚝  높다란 사랑채기단에 검박한 되돈고래 굴뚝을 설치하였다. 청백리인 집주인의 검소한 성품이 엿보인다.(관가정은 공사중이어서 마을전시관사진을 재촬영한 것임)
ⓒ 김정봉
 
되돈고래 굴뚝은 수운정에도 있다. 수운정 정면 아래에 아궁이에 비해 그리 크지 않은 굴뚝이 숨은 듯 붙어 있다. 수운정은 수운청허(水雲淸虛)에서 왔다. 잡된 생각이나 욕심을 버려 마음이 맑고 깨끗하다는 뜻이다. 수운정 뒤꼍 토방에 있는 수키와 두 개를 포개 만든 굴뚝은 수운청허의 마음 그대로다.
  
▲ 수운정 굴뚝 수운정 뒤꼍은 자잘한 멋이 있다. 그 중 하나가 수키와 두 개를 포개 만든 거북머리 닮은 굴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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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백당 굴뚝 담에 딱 달라붙어 있어 굴뚝이 잘 보이지 않는다. 이집에서는 군더더기 취급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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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씨집안은 굴뚝을 감추는데도 일가견이 있다. 굴뚝을 감쪽같이 담에 붙여놓아 정말 찾기 어렵다. 집주인이 '짓궂게' 보일 정도였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서백당 집에 굴뚝은 그저 군더더기에 불과했나 보다.
 
낙선당 굴뚝은 손씨집안 굴뚝이라도 좀 다르다. 원리원칙에 순종하여 절제를 하였지만 개성이 넘친다. 눈에 거슬리지 않은 평대문 아래에 연노랑 굴뚝이 있다. 양쪽 연구(煙口)가 살짝 튀어나와 사람을 보고 눈만 깜박거릴 뿐 달려들지 않는 순한 개 모양 굴뚝이다.
  
▲ 낙선당 굴뚝 평대문에 어울리는 순한 개 모양의 굴뚝이다.
ⓒ 김정봉
 
여강이씨 집안의 독창적 굴뚝
 
여강이씨 굴뚝은 과시적이거나 독창적이다. 우선 두곡고택 마루 밑에 있는 '쌍굴뚝'은 파격이다. 향단을 지은 선조의 낭만적 사고를 이어 받았는지 집주인은 미적 감성을 발휘하여 독창적인 굴뚝을 만들었다. 여기저기 다녀보았어도 이런 종류의 굴뚝은 처음 보는 것이다.
  
▲ 두곡고택 굴뚝 마루 밑에 숨겨 놓았지만 이 고택의 굴뚝은 개성이 강한 쌍굴뚝이다. 향단을 지은 낭만적 사고가 후손으로 이어진듯하다.
ⓒ 김정봉
 
근암고택 사랑채굴뚝은 시선을 사로잡는다. 이집 사랑채는 보기 드물게 안채 담 밖에 떨어져 있다. 이는 집주인의 남녀유별 생활관이 작용된 결과로 보인다. 집주인의 두둑한 배포를 과시하며 사랑채 한가운데 곧게 서 있는 굴뚝은 이곳이 남성공간임을 세상에 밝히고 있다.
 
무첨당 굴뚝도 평범해 뵈지 않는다. 대충 마무리 하지 않고 항아리로 연가(煙家)를 만들어 멋을 냈다. 향단 굴뚝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서 있는 위치가 기가 막히다. 독창적이고 과시적이며 화려함을 추구한 향단에 어울리게 남보란 듯이 굴뚝을 향단 맨 위 후원언덕에 세웠다.
 
▲ 근암고택 사랑채굴뚝 전체적으로 집은 소박하나 사랑채굴뚝은 대단히 과시적이다.
ⓒ 김정봉
    
▲ 향단굴뚝 검박함과 거리 멀고 과시적이며 독창적인 향단에 어울리게 숨기지 않고 굴뚝을 후원 언덕에 세워놓았다.
ⓒ 김정봉
 
두 집안의 굴뚝은 남의 눈을 의식하느냐, 안 하느냐의 차이랄까, 손씨 집안은 남의 눈을 의식하여 원리원칙을 중시하고 굴뚝을 만들어도 절제하고 야단스럽지 않게 만든 반면, 이씨 집안은 대체적으로 과시적이면서 독창적이며 개성 있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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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관가정은 공사중이어서 관가정 굴뚝 사진은 마을전시관사진을 재촬영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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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인제 가옥

 

[티브이데일리 이나래 기자] 북촌의 한옥문화와 일제강점기 서울의 최상류층의 생활을 엿볼 수 있는 100년 역사의 ‘백인제 가옥’이 시민에게 개방됐다.

18일 서울역사박물관은 ‘백인제 가옥’을 일부 원형과 달라진 부분을 건축 당시 모습으로 복원하고 건축 당시 서울 상류층의 생활상을 연출 전시해 ‘역사가옥박물관’으로 조성, 시민에게 공개했다고 밝혔다.

조선시대 최고 권력가, 재력가들이 살았던 북촌 일대 대형한옥 중 당시 규모로 오늘날까지 남은 것은 ‘백인제 가옥’과 ‘윤보선 가옥’ 두 채다.

 

‘윤보선 가옥’은 현재 거주 중인 사택으로, 대형한옥이 일반 시민에게 상시 개방되는 것은 ‘백인제 가옥’이 최초다.

서울역사박물관은 바깥주인(사랑방), 안주인(안방), 할머니, 아들 내외(건넌방) 등 가옥에 거주했던 가족구성 원에 따라 각 방별로 전시 콘셉트를 달리하고 의걸이장, 이층장 등 전통 목가구와 병풍 등 소품 150여 건을 연출 전시해 현장감을 높였다고 설명했다.

조선시대 전통 목가구는 물론 당시 유행했던 수입중국가구와 축음기 등 서양 문물을 혼용해 전시했으며 소 품류의 경우 한옥에 필수적인 병풍, 보료, 발, 방장 등을 설치해 아늑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사계절의 시간성을 반영하도록 했다.

또 마지막 거주자인 백인제 박사와 관련된 사진자료와 의학자료, 골동품 수집 취미 등을 반영한 전시품 30여 점을 추가로 전시했다.

‘백인제 가옥’은 1913년 당시 한성은행 전무였던 한상룡이 북촌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2,460㎡ 대지 위에 전통방식과 일본양식을 접목해 지은 근대 한옥으로 역사적인 보존가치가 인정되어 1977년 서울특별시 민속문화재 제 22호로 지정됐다.

‘백인제 가옥’ 관람료는 무료이며 관람 시간은 평일과 주말 오전 10시~17시다.

[티브이데일리 이나래 기자 news@tvdaily.co.kr / 사진제공=서울시]

백인제 가옥

 

 

입력 : 2008-07-18 10:42:06 수정 : 2008-07-18 10:42:06

 

전주 한옥마을 고택서 '특별한 휴가'를

 

◇전주 한옥마을 학인당의 널따란 정원은 운치가 넘친다. 돌계단 아래에는 여름철 음식물을 보관했던 샘이 있다.
‘고택 숙박 체험’은 요즘 인기 있는 여행 테마 중 하나. 고풍스럽고 기품 있는 한옥은 오래된 친구처럼 편안하고 아늑하다. 한여름 대청마루에 드러누워 낮잠을 청하고, 처마 끝에 걸린 달을 보며 늦은 밤 쪽마루에서 담소를 즐기면 계곡과 해변이 없어도 무더위가 비켜가지 않겠는가. 올여름 휴가와 방학에 여행 숙박지로 고택을 택해보면 어떨까.

전국에 숙박시설로 활용되는 수많은 고택이 있지만, 규모나 시설 면에서 으뜸인 곳은 전주 한옥마을이다. 800여채의 한옥이 들어서 있으며, 8곳에서 한옥 숙박 체험을 할 수 있다.

# 대목장이 지은 백년 고택, 학인당

전주 한옥마을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고택 체험 공간은 경기전(이태조의 어진을 모신 곳) 인근의 학인당(學忍堂). 수원 백씨 인제공파 전주 문중의 100년 된 종택이다. 전주의 대부호였던 인제(忍齊) 백낙중이 경복궁 중건에 거금을 헌납한 뒤 고종으로부터 대저택의 건축을 허락받아 지었다고 한다. 궁궐 건축에 참여한 도편수와 대목장을 파견받아 1908년 2년8개월 만에 완공했다. 준공 당시 99칸(2000평)이었던 규모는 현재 7채(520평)로 줄었지만, 본채·별채(체험 숙박 객실)·사랑채(선다원 찻집)가 어우러진 모습은 여전히 근사하다. 넓다란 정원과 연못, 냉장고 대용으로 쓰였던 돌계단 아래 샘은 이 대저택을 한층 더 운치 있게 만든다.

학인당은 건축사적으로도 가치가 높다. 호박 모양 주춧돌 등 조선후기 궁궐 건축 양식과 회랑식 복도, 2층 다락방, 실내 서재와 목욕탕 등 서양·일본 건축 양식이 골고루 섞여 있다. 

◇체험숙박을 할 수 있는 학인당 별채의 내부.

학인당은 조선 후기와 일제강점기에 호남지역의 대표적인 공연장이기도 했다. 백낙중은 조선 말기 전주 대사습놀이가 중단되자, 학인당의 본채를 판소리 공연장으로 만들었다. 당시 내로라하는 명창이던 임방울, 박녹주, 박초월, 김소희 등이 수시로 이 집의 본채에서 공연을 했다. 백낙중은 이상범, 허백련, 변관식 같은 한국화가들에게도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이 같은 내력과 사연을 알고 묵으면 학인당에서의 하룻밤은 더욱 더 각별해진다.

학인당에서는 전통문화 체험도 할 수 있다. 선다원(차문화체험관)에서는 ‘국악명상 차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대금·가야금으로 연주하는 명상음악을 들으며 전남 강진 만덕산 야생차로 다도를 체험한다. 전통 춤 배우기, 매듭·부채 만들기 프로그램도 운영한다. 2인 기준 숙박료는 조식을 포함해 6만∼12만원. 체험 비용은 5000∼1만원. 체험 숙박 객실에는 모두 에어컨과 샤워 시설이 갖춰져 있다. (063)284-9929

# 승광재 등 전주의 다른 한옥체험 시설

전주 한옥마을에는 학인당 외에도 7곳의 한옥체험 시설이 있다. 이곳에서는 모두 특색 있는 전통문화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양사재’(063-282-4959)는 향교 부속 건물로, 서당 공부를 마친 청소년이 모여 생원·진사시 공부를 하던 곳. 한지 공예와 한지 편지쓰기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승광재’(063-284-2323)는 조선의 ‘마지막 황손’ 이석(67)씨가 살고 있는 곳으로, 황실 다례·황실 예법 등을 경험할 수 있다. ‘동락원’(063-287-2040)에서는 전주 비빔밥 만들기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설예원’에서는 한복체험, 다식 만들기 체험을 해 볼 수 있다. ‘아세헌’(063-287-1677)에서는 가야금 병창·판소리 등 전통 음악을 배울 수 있다. ‘풍남헌’(063-286-7673)에서는 다도예절과 녹차 만들기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한옥생활체험관’(063-287-6300)에서는 다례와 매듭 공예 등을 체험할 수 있다. 전주 한옥마을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www.hanokmaeul.or.kr에서 얻을 수 있다.

전주=글·사진 박창억 기자 daniel@segye.com

◇경북 청송 송소고택.
한옥 숙박에 대한 인기가 높아지며, 전국 곳곳에 한옥 숙박 체험을 할 수 있는 곳이 늘어나고 있다.

경북 안동시 와룡면 오천리 군자마을(www.gunjari.net/016-715-2177)은 1970년대 중반 안동댐이 건설되며 광산 김씨 예안파가 600여년 동안 살았던 외내마을의 건축물을 옮겨 조성한 유적지다. 본격적인 숙박체험은 지난해부터 이뤄졌다. 200∼500년 된 고택 5채(10실)와 최근에 지은 한옥 1채에서 묵을 수 있다. 다도, 한복만들기, 떡만들기, 식혜만들기 등의 체험을 할 수 있다. 한 채 빌리는 데 10만∼15만원.

◇경북 안동 군자마을의 동다헌. 차를 마시는 공간이다.

경북 영주시 순흥면 청구리 선비촌(www.sunbichon.net/054-638-6444)에서도 한옥 숙박이 가능하다. 2004년 소수서원 바로 옆에 개장한 선비촌에는 영주 곳곳의 고택을 그대로 복원한 기와집 7동이 들어서 있다. 초가집도 5동이 마련되어 있다. 다도, 전통예절, 전통 혼례체험 등을 할 수 있다. 기와집 4인실 숙박료는 7만∼14만원, 초가집 4인실 숙박료는 5만원.

경남 거창 황산마을(055-943-0003)은 16세기부터 조성된 거창 신씨 집성촌으로, 100∼200년 전에 지어진 한옥 50여채가 운치 있게 들어서 있다. 거창군으로부터 전통 민박촌으로 지정돼 현재 10가구에서 고택 숙박체험을 할 수 있다. 3만∼5만원. 황산마을의 돌담길은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경북 청송군 파천면 덕천리 송소고택(www.songso.co.kr/054-873-0234)은 송소 심호택이 1880년경에 지은 총 99칸의 대갓집. 10개의 방에서 숙박체험이 이뤄진다. 2인 기준 4만∼18만원. 감자캐기, 옥수수따기, 복분자 따기 등을 체험할 수 있다.

박창억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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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정 2019-10-19 11:23 등록 2008-06-17 14:00

전통창호 40년 솜씨 새긴 한옥 구경 오세요 (hani.co.kr)

소목장 심용식씨 북촌 ‘청원산방’
곷살문·달문…기법·기술도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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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옥은 대개 아련한 향수의 대상이지만 한편으론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존재이기도 하다. 꼭 한옥을 짓고 살고 싶은 이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한번쯤은 잘 지은 요즘 한옥은 어떤지 구경해보고 싶어지기 마련이다.

헌데 문제는 제대로 보기가 쉽지 않다는 것. 한옥 1번지인 서울 북촌 한옥마을에 가도 겉모습만 볼 수 있을 뿐 정작 집 안은 구경할 수 없는 노릇이다.

한옥 구경을 바라는 이들에게 기쁜 소식이 생겼다. 아예 들어와서 구경하라고 지은 집이 북촌에 문을 열었다. 가회동 동사무소 맞은편 재동초등학교 옆 골목 안에 최근 생긴 ‘청원산방’(02-715-3342)이다. 청원산방은 전시장 성격의 비주거용이 아니라 실제 살림집 그대로인 한옥이다. 누구나 무료로 들어가 구경하면서 한옥을 느낄 수 있고 사진촬영도 가능하다.

청원산방을 마련한 이는 서울시 무형문화재 소목장 심용식(56)씨다. 공방 성심예공원을 운영하고 있는 심씨는 소목 중에서도 창호(문)가 전문이다. 불타 새로 지은 낙산사 원통보전의 창호부터 창경궁 인정전과 문정전, 해인사 비로전, 영국 브리티시박물관 한국 전시장 사랑방 등 중요한 전통 건축물을 새로 짓거나 보수할 때면 으레 그가 만든 창호가 들어갔다.

청원산방은 열일곱살에 목수일을 시작해 햇수로 40년째 나무를 깎고 다듬어온 그가 평생의 꿈을 실현한 것이다. “한옥을 맘 놓고 들어가서 보고 느낄 곳이 없잖아요. 한옥으로 평생 살아왔으니 한옥을 제대로 알리는 곳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해왔어요. 한옥을 사랑하는 분이라면 누구든 환영합니다.”

어차피 자신의 창호를 전시할 공간이 필요한 터였기에 심씨는 큰 맘 먹고 북촌 한옥을 한 채 구입해 개조했다. 낡고 허름해 내놔도 안 팔리던 한옥은 장인을 만나 새 집처럼 변했다. 수리하며 뜯어낸 나무들을 한 토막도 버리지 않고 창호며 각종 장식물로 만들고, 구석구석 뜯어고쳐 완전히 새로 탄생했다.

청원산방은 창호 장인의 솜씨를 보여주는 공간인 만큼 온갖 다양한 창호들이 제일가는 볼거리다. 창호는 한옥에서 집의 이미지를 좌우하는 중요한 요소다. “집이 사람이면 창호는 얼굴이죠. 웃는 얼굴을 만드는 게 창호에요. 창호를 얼마나 섬세하고 예쁘게 짜느냐에 집의 돋보임이 달렸습니다.”

창호의 아름다움을 알리기 위해 심씨는 청원산방에 한껏 솜씨를 부렸다. 가장 흔한 세살과 용자살 문짝부터 숫대살만살문, 꽃완자문과 매화꽃살문, 소슬빗꽃살문 같은 화려한 꽃살문, 귀갑살문과 완자교살문, 서각장지문, 그리고 사각, 팔각 다양한 불발기문에 동그란 달문과 귀여운 눈꼽째기창까지 전통 창호의 온갖 다양한 아름다움을 한 자리에서 구경할 수 있다.

공구전시방도 다른 곳에선 볼 수 없는 공간이다. 심씨가 나무를 다듬는데 쓰는 공구는 무려 500여종. 그 중 상당수를 이곳에 전시해 장인들의 일터를 직접 가지 않고는 볼 수 없는 온갖 공구들을 접하게 해 준다.

“점점 책임감이 커져요. 제가 하는 것이 본이 되니까 ‘내 짐이 무겁구나’라고 절로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이 곳에 제가 아는 기술들이며 기법을 모두 전시할테니 와서 보시고 서로 연구도 하고 찍어가서 응용도 하면 좋겠어요. 건축에 대한 세미나 등을 하는 공간으로도 무상 제공할 생각입니다.” 글·사진 구본준 기자 bonbon@hani.co.kr

 
중앙일보 입력 2008.05.21 01:47 업데이트 2008.05.21 02:49

웰빙주택 … 관광자원 … 한옥의 재발견 | 중앙일보 (joongang.co.kr)

전남 장흥군 장평면 우산마을에서 슬레이트 집을 허물고 한옥을 짓고 있는 유금렬·고미옥씨 부부가 막바지 공사 중인 한옥 앞에서 활짝 웃고 있다. [사진=프리랜서 오종찬]

 
20일 오후 전남 장흥군 장평면 우산마을. 마을 안으로 들어가자 여기저기 기와 지붕의 새 한옥들이 눈에 들어온다. 대부분 마무리 공사가 한창이다. 뼈대·지붕·벽체에 목재·기와·황토를 사용할 뿐 내부는 현대식으로 짓고 있다. 거실 외에 ▶입식 주방 ▶수세식 화장실 ▶이중창을 설치해 전통적 한옥의 불편함을 없앴다. 집주인 백우산(80)씨는 “함석 집을 헐고 새로 지었는데, 며칠 후면 고래등 같은 기와집에서 살 수 있게 됐다”며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건축비가 생각보다 많이 들지 않고, 목돈은 4000만원 정도 들었다”고 말했다.

이 마을은 전체 72가구 가운데 15가구가 초봄부터 한옥을 짓고 있다. 슬레이트집을 헐고 100㎡ 짜리를 신축 중인 이장 유금렬(48)씨는 “반듯한 기와집들이 들어서면서 동네에 운치가 생겼다”며 “처음엔 외면하던 사람도 이제 한옥을 짓겠다고 조른다”고 말했다.

무안군 몽탄면 약실마을도 외지인까지 들어와 지난해 2월부터 22가구가 한옥을 짓기 시작, 15가구가 입주했다. 7가구가 공사 또는 준비중이다. 2층 137㎡짜리 한옥에서 사는 박광일(48)씨는 “콘크리트 대신 나무와 황토로 지어 집안 공기가 항상 쾌적하고 잠을 자고 나면 몸이 가뿐하다”고 말했다. 박씨는 “몇몇 집은 외지에 있는 자녀들이 돈을 대 한옥을 건축, 부모에게 효도하고 나중에는 자기들이 살려는 경우들”이라고 전했다.

약실마을은 앞으로 마을에 한의사·약초전문가·천연염색가 등을 영입해 찜질방을 갖춰 약초건강 체험마을로 특화하고, 한옥마다 한 칸씩 둔 객실을 활용해 관광객을 끌어들일 계획이다.

전남에서 ‘한옥의 재발견’이 진행 중이다. 최근 1년6개월 사이 8개 시·군 14개 마을 등에서 살림집으로 212동의 한옥이 완공되거나 현재 공사를 진행 중이다. 올해 하반기에 200동을 또 시작한다.

전남도는 2006년 12월 지원 조례까지 제정하며 최대 2000만원을 무상 보조하고, 3000만원까지 융자하는 등 한옥 건축을 장려하고 있다. 일부 시·군도 추가로 2000만원씩을 보조한다. 일부 동네에선 10가구 이상이 함께 지으면서 기술자 인건비와 자재 운송비가 줄어 건축비가 3.3㎡(1평)에 350만원 안팎으로 낮아졌다. 한옥으로선 큰 편인 100㎡ 짜리를 지어도 보조금·융자금을 빼면 현금은 4000만~5000만원만 있어도 된다.

◇민박 등도 한옥 인기=목포시가 외달도에 건립한 민박 한옥은 3채에 7개 객실이 휴일이면 모두 찰 만큼 인기다. 이를 운영하는 김재영(38)씨는 “목포항에서 배를 40분가량 타야 하는 섬인데도, 멀리 수도권이나 영남 지역 등에서 오는 손님이 많고, 한옥을 체험해 볼 수 있어 좋아한다”고 말했다. 이 같은 한옥형 민박은 2005년 이후 전남 지역에서 신축된 것만도 100곳에 이른다. 올해도 20곳이 늘어난다. 문화재로 지정되거나 이에 가까운 전통 한옥들을 고쳐 손님을 받는 고택 민박 또한 계속 증가하고 있다. 유명 관광지를 낀 곳은 수개월 전부터 예약해야 할 만큼 인기를 끌고 있다.

한옥 건축 양식은 여러 분야에 도입되고 있다. 화순군의 무등산CC는 스타트 하우스와 그늘집 세 곳을 모두 한옥으로 지었다. 전북 전주시는 한옥마을 일대에 전통 건축양식의 호텔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또 전주천에 올해 말 착공하는 남천교를 인도에 기와 지붕을 올리는 방식으로 설계 중이다.

전남도는 무안의 도청 일대에 남악신도시를 개발하면서 전망이 가장 좋은 곳 8000㎡에 한옥단지를 배치, 20필지를 한옥을 짓는 조건으로 분양 중이다. 읍·면·동사무소 건물과 마을회관·경로당 등 공공 건물을 지을 때도 한옥을 도입한다는 계획이다.

박준영 전남지사는 “한옥은 우리 고유 주거양식일 뿐 아니라 건강에 좋고, 훌륭한 관광자원이자 관광 편익시설이 될 수 있다”며 “한옥 건축을 각 부문에 적극 도입하고, 한옥 산업을 전남의 전략 산업으로 발전시키겠다”고 말했다.

이해석 기자

 

  • 수정 2019-10-19 11:23 등록 2008-03-30 20:28

가까이 다가온 한옥 구경해보실래요 (hani.co.kr)

드로잉…사진…모형… ‘건축 전시회’ 잇따라 열려
전통건축의 멋과 아울러 현대한옥의 가능성 전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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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 전시회가 대중들에게 다가간다. 올들어 일반인들이 쉽고 부담없이 건축을 즐길 수 있도록 배려하는 전시회들이 잇따라 열리고 있다. 우리 전통건축인 한옥을 소재로 삼는 것도 공통점이다.

지금까지 건축 관련 전시회들은 눈높이와 주제가 철저하게 전공자들에게 맞춰져 왔다. 설계도나 시각자료, 또는 개념적 도면을 보여주는 전시들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최근 화제가 된 전시들은 이런 경향에서 벗어나 전통 건축을 알기 쉽게 다양한 방법으로 소개하는 것이 특징이다. 건축가들이 직접 나서 한옥을 소개하는 길잡이 역할을 하는 것도 예전에 없던 새로운 흐름이다. 우리 건축계에서 ‘한옥’이 화두로 떠올랐음을 반영하는 것이며, 동시에 한옥이 아직까지도 대중들에게 친숙하지 못해 계몽적 설명이 필요하다는 점도 보여주는 것으로 풀이된다.

지난 2월18~29일 영풍문고 북갤러리에서 열린 중견 건축가 김석환씨의 ‘한국전통건축드로잉전’은 현대건축을 전공한 건축가가 바라본 우리 전통건축의 특징과 미감을 단순하고 경쾌한 드로잉으로 부담없이 소개했다. 건축가들이 답사 나가 건축물과 만나고 느낀 점을 그 자리에서 그리는 드로잉 작업을 소개해 건축가들의 세계를 보여준 점도 특징이었다.

서울 아트선재센터에서 2월21일부터 3월5일까지 열린 전통건축 전문 사진가 고 김대벽(1929~2006) 선생의 ‘한옥의 향기’도 살아생전 전통건축 사진만을 찍어온 작가의 작품세계를 뒤늦게나마 대중들에게 직접 선보인 자리로 관심을 모았다. 일반인들이 고인이 천착해온 우리 전통건축의 멋과 특징을 좀더 쉽게 알 수 있도록 사진가 주명덕씨가 김대벽 선생의 사진들 중에서 특히 ‘아름다움’ 위주로 50점을 뽑아 대중적 호응을 얻었다.

4월2일까지 서울 정동 경향갤러리에서 열리는 건축사무소 구가도시건축(소장 조정구)의 전시회 ‘삶의 형상을 찾아서’도 이런 연장선상에 있는 전시회다. 모형이란 알기 쉬운 방법으로 진화하는 현대 한옥을 소개하며, 일반인을 위한 강연 등을 따로 준비하는 등 대중들과의 소통을 최우선으로 삼았다. 한옥 모형 전시회는 뜻밖에도 그동안 건축계에서 거의 열린 적이 없었다. 서울 원서동 궁중음식연구원, 안동 군자마을 회관, 경주 한옥호텔 라궁 등을 설계한 조정구 소장은 현대건축을 한옥 전통구법으로 시도하는 젊은 건축가로, 지금 한옥 건축을 이끄는 선두주자로 평가받고 있다.

전시 모형들은 조 소장 팀이 직접 만든 것으로 그의 주요 작품과 함께 실제 지어지진 못했지만 시도한 갖가지 창의적인 현대 한옥 실험들을 망라하고 있다. 특히 가로 세로 3미터가 넘어 제작에만 수개월이 걸린 한옥호텔 ‘라궁’ 모형이 압권이다. 학생들과 골목을 답사하면서 자생적 도시건축으로 주목한 홍대앞 서교동 365번지 건물과 도심 속 저렴한 주거공간인 돈의동 쪽방 모형 등도 흥미롭다. 조정구 소장은 “많은 분들이 모형을 접하면서 건축가와 소통하고, 진화하는 현대한옥의 가능성과 한옥설계의 중요성을 이해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전시회는 무료이며 사진도 찍을 수 있다. 4월2일은 12시까지. www.guga.co.kr, (02)3789-3372.

글·사진 구본준 기자 bonbon@hani.co.kr

 

아내와 함께 서울 북촌 일대 한옥 답사에 나선 회사원 임재윤씨(35)는 한옥에서 살고 싶어하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아파트는 지겹고 갑갑하니까요. 한옥은 자연친화적이고 건강에도 좋을 것 같아요. 직장에 계속 다녀야 하니까 가능한 한 서울시내에 있는 한옥에서 살 방법을 생각하고 있어요.”

‘언젠가는 헐릴 집’처럼 여겼던 한옥을 살림집으로 삼고 싶어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 임씨처럼 한옥에 산 경험이 전혀 없는 젊은층 가운데서도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한국내셔널트러스트에서 제1회 한옥전 ‘우리 집은 한옥이다’를 열고 있는 배경도 여기에 있다. 늘어나는 수요에 맞춰 한옥 역시 21세기에 맞는 모습으로 진화해야 할 과제를 안게 됐다.

한국내셔널트러스트는 한옥의 대중화를 위해 서울에 있는 한옥 중에서 현재 살림집으로 사용되고 있는 ‘좋은 집’ 14채를 선정했다. 건축가, 미술사학자 등 13명의 전문가가 참여했다. 현대 도시에서 한옥의 품격과 생명력을 잃지 않고 살림집으로서의 역할도 훌륭히 하고 있는지 여부가 선정의 기준이었다. 선정된 한옥의 모습은 19일까지 서울 관훈동 학고재에서 사진과 영상으로 전시된다. 이후에는 서울대와 고려대에서 전시회를 갖는다. 여기에 덧붙여 한국내셔널트러스트 회원 등 60여명은 지난 13~17일 선정된 집들을 답사하며 도시속 살림집의 모습을 갖춘 한옥을 살펴보았다. 집주인들은 자부심과 책임감을 갖고 집을 공개했다.

미 대사관저인 ‘하비브 하우스’(서울 정동)의 마당에 있는 연못, 포석정을 본떠서 만들었다 |한국내셔널트러스트 제공

 

30년 된 결혼살림의 90%를 버리고 서울 가회동에 실평수 76㎡(23평 정도)의 작은 한옥집 ‘소담헌’을 지어 남편과 함께 이사온 조해경씨는 “너무 좋다”고 말한다. “그렇게 많이 버렸는데 실제로 살아보니 필요한 게 별로 없더라고요. 오기 전에는 ‘정말 한옥에서 살 수 있을까’라고 고민을 많이 했는데도요.” 그는 또 “아파트에 살 때는 몇 시간만 집에 있어도 어깨가 뻑뻑하고 눈이 피곤해졌거든요. 여기선 손님이 와서 오후 내내 얘기해도 피곤하지 않아요”라며 한옥만이 주는 장점을 전했다. 역시 가회동에 있는 ‘평행재’의 주인 최미경씨는 “한옥에 살면 불편하지 않으냐는 얘기를 많이 듣지만 불편함에 미학이 있다는 걸 직접 살면서 배웠다”고 말한다. “부지런할수록 광택이 나는 대청마루, 걸쇠를 끼워야 창문이 닫히고 손잡이를 여러번 돌려야 문이 닫히는 것이 한옥의 매력”이라고 설명했다.

높은 담으로 가려 있어 평소엔 안을 볼 수 없는 서울 정동의 미 대사관저도 안쪽은 두 채의 한옥으로 구성돼 있다. 알렉산더 버시바우 주한 미국 대사의 부인 리사 버시바우는 지난 13일 한국내셔널트러스트 답사팀에게 관저를 공개하며 가진 자리에서 한국식과 미국식이 결합된 한옥으로 관저를 소개했다. “한옥 구조를 유지하되 천장을 높게 해 공간을 크게 보이게 만들었고, 온돌을 두지 않고 미국식 냉난방 시스템을 갖췄으며, 창문을 통유리로 하고 벽난로를 설치한 것 등이 현대식으로 꾸민 것”이라고 말했다.

고유의 아름다움을 갖고 있으면서도 현대적 시설을 들여놓은 한옥을 보고 답사자들은 감탄했지만 비싼 건축 비용은 한옥 대중화의 커다란 걸림돌이었다. 가야 할 길은 멀지만 한국내셔널트러스트는 살림집뿐 아니라 상업용 한옥 등에 대해서도 관심을 넓혀나갈 계획이다. 윤상구 위원장은 “한옥에 사람이 살려면 한옥이 현대 생활에 맞게 고쳐져야 한다”면서 “21세기 한옥이 100년 전 한옥과 같아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임영주기자 minerva@kyunghyang.com〉

 

 

입력 2007. 10. 5. 18:49수정 2007. 10. 5. 18:49

'고택 스테이' / 여태동 지음 / 이지북 발행ㆍ320쪽ㆍ1만7,500원

 

"주5일제가 되면 주말마다 여행을 떠나겠다"던 기대는 이미 스러졌다. 처음에는 여기저기 나들이할 곳이 많은 것 같았는데 이제는 막상 지도를 펼쳐도 갈 만한 곳이 선뜻 떠오르지 않는다.

낮잠이나 TV 보기로 시간을 때우기 일쑤. 어디론가 떠나고는 싶은데 갈 곳을 정하지 못하겠다면 고택 체험은 어떨까. <고택 스테이>는 이런 물음에 적절한 안내가 되는 책이다.

 

책은 효령대군의 11세손인 이내번(1703~1781)이 족제비떼가 잡아준 명당에 자리를 잡고 만석꾼이 됐다는 강릉 선교장,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해 국운의 회복을 기원한 강용(1846~1934)이 지은 봉화 만산고택, '사방 백 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며 가진 자의 사회적 책임을 보여준 경주 최부자 고택 등 18곳을 소개한다.

고택을 지키는 후손들의 인터뷰를 통해 그들 집안의 꼿꼿한 지조와 넉넉한 인심도 생생하게 전해준다.

"직접 돌아본 고택 30여 곳 중 18곳을 엄선했다"는 지은이는 각 편을 고택이 지어진 내력과 명문가 인물 등 개괄적 소개로 시작한 뒤, 체험기를 붙여 독자들의 이해를 돕는다. 교통편, 숙박 정보, 안내지도, 고택 주변에 가볼 만한 곳 등도 자세하게 소개했다.

2004년 <템플 스테이>를 내기도 한 불교신문 기자인 지은이 여태동씨는 "전통 고택은 그곳에 살았던 조상의 얼과 지혜를 그대로 배울 수 있을뿐더러, 물질적 풍요 속에 오히려 궁핍해진 우리 정신도 채울 수 있는 체험학습장이 된다"면서 자녀와 떠나는 고택 체험을 권했다.

허정헌기자 xscope@hk.co.kr

 

 

[한국관광 새 길을 찾는다] 고택체험, 외국인이 더 좋아해 (daum.net)

입력 2007. 9. 10. 17:28수정 2007. 9. 10. 17:28
 

안동 지례예술촌·전주 한옥마을…

 

"한국을 '고요한 새벽의 나라(The Land of Morning Calm)'라고 이야기 한다지만 이곳만큼 평화롭게 고요한 분위기가 감도는 장소는 없을 것이다."

경북 안동의 지례예술촌을 다녀간 '시애틀 타임스' 기자가 방명록에 남긴 글이다. 임하댐 건설로 수몰 위기에 처한 종택을 인근으로 옮겨 89년 문을 연 지례예술촌은 일반인들이 하룻밤 머물며 다양한 유교문화를 체험하고 풍류한마당 등 전통 공연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이웃도 하나 없는 궁벽한 산속에 자리잡고 있지만 외국인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지례예술촌 김원길(65) 촌장은 "서울 등 대도시의 복잡함에 지쳐있다가 400년 된 고택체험을 해보고는 크게 만족해 한다"고 말했다. 옛 선비들의 풍류였던 고독을 즐기는 '한적미(閑寂美)'를 오히려 외국인이 더 잘 즐긴다는 게 김 촌장의 설명이다.

호주에서 왔던 한 손님은 "밤에 자리에 누워 지구가 자전하는 소리를 들었다"고 감탄할 정도다.

김 촌장은 "경복궁이나 덕수궁 가서는 사진이나 찍지 한국의 전통 가옥에서 잠을 잔다거나 제대로 된 한국음식을 맛보고, 한복도 입어볼 수 있는 곳은 흔치 않다"며 "1년에 10번을 지내는 제사의 모든 과정을 손님들에게 공개하는데 외국인의 관심이 훨씬 크다"고 말했다. 지난해 지례예술촌을 찾은 외국인은 600명 정도. 올해는 800명 까지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박제화되지 않은 한국 전통의 아름다움은 외국인에게 신선한 자극을 주고 이를 테마로 한 관광상품의 만족도도 일반 상품보다 훨씬 높다.

투어재팬 윤기준 대표는 "안동 하회마을에 갔을 때 새벽에 손님을 택시에 태워 부용대에 올려 보낸 뒤 하회마을을 내려다 보게 한 후 물안개 낀 강을 쪽배로 건너게 하는 프로그램을 진행했는데 반응이 아주 뜨거웠다"고 소개했다.

그는 "관광은 이미지를 심어주는 작업으로 똑같은 하회마을이라도 어떻게 새롭게 보여주느냐에 따라 만족도가 달라진다"고 말했다.

 

전북 전주시 풍남문 일대에 조성된 전주한옥마을도 외국인관광객에게 인기 있는 곳이다. 민박 등 다양한 한옥숙박체험 공간이 있고 판소리 한지공예 다도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함께 즐길 수 있다.

한옥숙박체험을 하는 '아세헌'의 주인은 "몇 년 전 독일인이 방문한다고 해 아침식사로 한정식 외에 빵과 버터, 우유 등을 준비했지만 손님들은 양식은 거들떠 보지 않고 밥과 미역국, 나물 등 반찬을 깨끗이 비웠다"며 "너무 맵거나 특이한 냄새가 나지 않는 한 한국음식은 외국인에게 경쟁력이 높다"고 말했다.

한국 전통문화 체험은 관광 연계 산업에도 영향을 미친다. 전주시 문두현 관광진흥계장은 "판소리 공연을 감상한 외국인이 한복을 유심히 쳐다보더니 다음날 한복가게에 들러 80만원을 내고 선뜻 사더라"며 "전통 체험을 통해 깊숙하게 전달된 한국의 이미지가 관광객의 구매욕구까지 유발시킨다"고 말했다.

이성원기자 sungwon@hk.co.kr허정헌기자 xscope@hk.co.kr

 

 

  • 수정 2019-10-19 20:29 등록 2008-04-11 14:09

아파트에 이식한 한옥의 유전자 (hani.co.kr)

짚풀을 섞은 황토벽에 우물마루 바닥

베란다는 약간 높여서 간이 툇마루로

“천연재료 속성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국내 최초의 한옥 아파트 탄생하다

 

현관문을 열기 전까지는 그냥 평범한 아파트입니다.

문을 여는 순간, 부드러운 나무색이 먼저 눈으로 들어옵니다. 그런데 어딘가 다른 것이 또 느껴집니다. 철제 현관문 안쪽이 다른 집들과 다릅니다. 밖에서는 쇠문인데, 집 안쪽은 나무문입니다. 나무를 덧대 전통문짝 모양을 낸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현관 안으로 보이는 바닥이 한옥 나무마루 모양입니다. 어떻게 된 집일까요?

이 독특한 아파트는 서울 중계동 이경진씨네 집입니다. 국내에서 처음으로 실내 전체를 한옥 짓는 법으로 완전히 새로 고친 아파트가 되겠습니다.

평소 한옥에 관심이 많아 한옥 공부를 열심히 해온 집주인 이경진씨는 어느날 큰 결심을 합니다. 아파트를 완전히 한옥식으로 개조하기로 한 것입니다. 평소 한옥 수업을 듣던 한옥문화원(원장 신영훈)과 함께 이 시도에 나섰습니다. 한옥문화원은 몇년 전부터 `아파트를 한옥처럼' 강좌를 해왔습니다. 그러나 정작 시공 사례가 없던 터였습니다. 첫 시공사례가 되는 이씨의 집을 이후 본보기로 삼기로 하고 유례가 없는 실험을 함께 시작했습니다. 공사는 이 바닥에서 1급으로 꼽히는 인력들이 맡았습니다.

저는 이 독특한 실험을 처음부터 끝까지 취재하기로 했습니다. 한옥이란 양식을 아파트 안에 구현하는 과정에서 어떤 변화가 생기고 어떤 어려움과 장점이 드러날지 알아보기 위해서였습니다. 모두 7차례 현장을 방문해 공사를 들여다봤습니다.

 

아파트에 황토 바르고 마루 놓지 말란 법 있는가

건강에 관심이 많은 집주인이 가장 중요하게 여긴 부분이 바로 건강친화적인 측면이었습니다. 그래서 개조의 뼈대는 첫째로 집에 황토를 바른다, 둘째로 원목 마루를 설치한다는 것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황토도 기존 첨가제를 섞어 파는 것이 아니라 따로 퍼온 것을 공사 현장에서 체로 쳐서 반죽하기로 했습니다.

공사는 황토 작업을 위해 먼저 아파트 내부를 모두 뜯어내는 것으로 시작했습니다. 지난해 11월27일이었습니다.

사진=한옥문화원 제공

 

모든 공사현장이 그렇지만 저렇게 뜯어내니 왠지 처참하지요?

황토는 옛날 방법 그대로 짚풀을 섞어서 개어 썼습니다. 섞는 작업 모습입니다.

사진=한옥문화원 제공

이렇게 갠 흙을 벽에 바르는데, 고정이 되도록 가는 나무로 지지대를 만들었습니다. 외엮기한 살대를 붙이는 장면입니다.

아파트 한옥5

 

저렇게 엮은 벽에 황토를 바릅니다. 황토 두께는 5센티미터. 상당히 두껍죠?

그러면 집이 좁아지는 것 아니냐, 생각이 드실텐데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스티로폼 등 단열재를 뜯어내고 그 대신 황토를 바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뜯어낸 단열재의 두께가 8센티미터여서 실제로는 오히려 조금 넓어진 셈이 됐습니다.

황토칠은 한번에 끝나지 않습니다. 저렇게 두껍게 벽을 칠한 다음에 표면에 다시 곱고 매끈하게 칠을 해줍니다. 초벌과 마감의 차이를 보시지요.

집 테두리가 되는 맨 가장자리 벽들은 황토를 5센티 두께로 했고, 방안 벽은 2~3센티 두께로 했습니다. 이렇게 바른 황토는 평소라면 일주일 정도면 마르는데, 저 공사는 겨울철에 하는 바람에 15일 가량 걸려 예상보다 공기가 길어졌습니다.

거의 대부분 황토를 바른 모습입니다. 왼쪽으로 벌겋게 보이는 불빛은 겨울이어서 황토가 잘 안말라 전열기를 켜놓은 것입니다. 공사 시작 3주째의 모습입니다.

중국과 일본에는 없는 우리만의 마루가 있다

이렇게 황토를 벽에 바른 것 뿐만 아니라 바닥에까지 바르기로 했습니다. 집 천장만 빼고 다 황토를 칠한 셈입니다. 바닥에는 황토와 퍼티(접착 반죽)을 섞어 칠했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 마루를 깔기 시작합니다.

아파트 자체의 층고가 낮아 마루는 최대한 얇게 깔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나온 마루 두께가 1.2센티미터였습니다.

저 마루의 디자인은 `우물마루'라는 방식입니다.

나무 마루는 크게 2가지 입니다. 하나는 가늘고 긴 나무판으로 짜는 `장마루', 그리고 긴 나무 사이에 짧은 나무판을 반대방향으로 끼우는 `우물마루'입니다. 마루 모양이 한자 우물 정(井)자를 닮아 우물마루가 되었습니다.

장마루는 지금은 훨씬 흔하지만 원래 우리 한옥에는 없는 방식입니다. 중국과 일본 전통 건축이 이 장마루 방식입니다. 반면 우물마루는 우리나라만의 마루깔기 방식입니다. 모양도 더 고급스럽습니다. 그래서 한옥 분위기가 더 잘사는 우물마루를 골랐습니다.

아파트 한옥9

 

제가 들고 있는 저 마루 널조각을 청판이라고 합니다. 마루를 한자로 청(廳)이라고 하거든요. 위로 보이는 면이 뒷면입니다. 물론 앞면은 대패질을 잘해 아주 매끄럽습니다. 가장자리에 요철을 두어 접착제를 바르고 끼워넣습니다.

왜 뒷면에 저렇게 홈이 나있는 걸까요? 나무가 습기에 따라 휘고 뒤틀리는 것을 최소화하기 위해서입니다.

원래 실제 한옥에서는 저 청판을 뒷면은 그냥 나무 껍데기가 붙어있는 채로 씁니다. 나무 안쪽일수록 이완에 따른 모양변화가 적으므로 잘 안휘는 쪽을 표면으로 하는 것입니다. 우물마루가 우리나라에서 많이 쓰이게 된 것도 계절에 따른 습도변화가 큰 우리 기후에 알맞은 것으로 검증됐기 때문입니다.

아파트 한옥 10

 

부엌쪽 마루를 까는 모습입니다. 청판을 끼운 다음에는 나무로 탁탁 쳐서 밀착시킵니다. 마루를 깔 때에는 남의 옹이 모양이 예쁜 것들을 가장 잘 보이는 쪽에 깔아줍니다. 목수들이 집주인들이 나중 마루를 보는 재미를 더해주기 위해 모양을 내주는 것입니다.

자, 이제 마루가 따 깔렸습니다. 그러나 아직 중요한 과정들이 남아 있습니다.

마루깔기가 끝아면 표면을 더욱 고르고 매끄럽게 다듬어줍니다. 그리고 다음에는 기름을 발라줍니다. 식물성 기름을 바르는데, 요즘에는 여러가지 식물 기름을 섞은 제품을 쓴다고 합니다. 바로 저 기름으로 독일제 수입기름입니다.

기름은 여러차례 바릅니다. 위생과 보존을 위한 조처입니다. 또한 기름을 바르면 나무 무늬가 더 잘 살아납니다.

모양내기의 핵심 문짝과 창살까지 달았습니다. 부엌 싱크대 공사도 마쳤습니다.

마지막 남은 것은 도배입니다. 사진으로는 다 바른 것처럼 보이지만 아직 초배입니다. 저 위에 섬유질이 섞여 모양이 있는 한지를 바르면 드디어 개조 완료. 공사 시작한 지 꼭 1달 만입니다. 그러면 완성된 집은 어떻게 생겼을까요? 이제 본격적으로 집구경을 하실 차례입니다.

한옥 속 코드의 재미, 천장

그럼 완성된 집 안을 둘러보도록 하겠습니다. 전체적으로 나무 색조로 처리되어 무척 아늑한 느낌을 줍니다.

집주인은 과감하게 마루에서 텔레비전을 없앴습니다. 대신 원목 색깔의 나무 책장을 놓아 집 분위기가 더 살아납니다. 천장도 커다란 등 하나로 달지 않고 작은 등을 줄지어 달았습니다. 천장과 마루를 한번 대비해서 보겠습니다.

천장과 마루를 묶어본 것은 단순히 위-아래여서가 아니라 두 부분의 디자인 때문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 마루는 우물마루입니다. 그런데 저 천장도 `우물천장'입니다. 역시 모양이 `우물 정'자 모양이어서 붙은 이름입니다.

저 우물천장은 살림집에서는 잘 안쓰는 디자인입니다. 주로 궁궐이나 특히 절에서 많이 쓰는데, 단청을 넣어 한껏 모양을 냅니다. 저 천장은 정식 우물천장이라고 하기는 그렇고, 우물천장형 천장이라고 할까요, 아니면 간이 우물천장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좌우지간 천장과 마루가 모두 `우물' 코드군요.

 

창살, 한옥 최고의 볼거리와 재미

가장 멋을 낸 부분은 역시 문과 창살입니다. 방과 창마다 모양이 다릅니다. 모두 같았다면 재미가 없었겠죠. 양옥이라면 통일이 맛이겠지만 한옥은 비슷함 속 변화가 맛입니다.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안방 베란다창, 마루 베란다 미닫이문, 화장실문, 안방문입니다. 맨처음 안방 창은 창살이 아자살입니다. `버금 아(亞)'자 모양이어서 아자살입니다.

마루 창문은 `쓸 용(用)'자처럼 생겨서 용자살입니다. 단순하고 소박한 것이 매력입니다. 원래 한옥 살림집에서 두짝 미닫이 영창에 용자살을 쓰는데, 이 아파트에선 이 베란다창이 영창개념이 되나보군요.

아래 가운데 화장실문은 가늘 세(細)자 세살입니다. 가장 많이 쓰는 창살입니다.

아래 왼족 안방문은 위는 세살이고 아래 팔각형부분은 불발기창처럼 보이는데 창살 모양은 빗살입니다.

이 아파트에선 한옥으로 꾸미다보니 다른 아파트에선 볼 수 없는 것들이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우선 앞에서 잠깐 보셨던 나무를 덧댄 현관입니다. 그리고 문에 맞춘 원목 신발장도 눈길을 끕니다.

신발장과 문간방 붙박이장 보시겠습니다.

각종 철물들도 괜히 한컷 더. 아주 고급은 아니군요. 아래 오른쪽 베란다문 고리가 조금 나아보입니다.

이 아파트에서만 볼 수 있는 부분으로 뺄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툇마루입니다. 보시면 베란다쪽 마루 높이가 다릅니다. 일종의 툇마루 개념입니다.

한옥의 마루는 바닥 모양에 따라 장마루와 우물마루가 있다고 했습니다. 쓸모와 구조에 따라 마루를 나누면 대청, 툇마루, 쪽마루 등이 있습니다. 대청은 말 그대로 넓은 마루죠. 우리나라 한옥에 대청이 생긴 것은 제사 때문입니다.

그러면 툇마루는 뭘까요?

툇마루는 원래 한옥에서 실외와 실내를 이어주는 공간입니다. 이 아파트에선 실내에 두었으니 그 기능은 전혀 없게 되었습니다. 대신 한옥의 정신과 분위기를 구현하는 의미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저 위에 앉아 창 밖을 구경할 수 있으니 기능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겠군요.

자, 이번에는 반대로 부엌쪽에서 마루쪽을 보시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집에서 가장 한옥 느낌 물씬 주는 재미있는 부분인 현관을 다시 보겠습니다. 나무를 붙인 현관문, 원목 전통가구형 신발장, 그리고 미닫이문이 다른 아파트와는 다른 분위기를 만들고 있습니다.

다시 종합하자면, 이 아파트는 겉으로 보이는 부분도 흥미롭지만 무엇보다도 한옥의 가장 핵심인 황토와 마루를 현대 주거형태인 아파트에 접목한 점, 보이지 않는 부분에 황토를 시공했다는 점이 의미라고 하겠습니다.

국내 최초의 아파트 한옥, 보시니 어떠십니까?

이번 시도가 앞으로 보다 많은 사람들이 아파트를 한옥의 자재와 분위기로 꾸미게 되는 계기가 될지 지켜볼 일입니다.

비용은 얼마나 들었을까?

저 아파트는 30평대 아파트, 그러니까 전용면적이 85평방미터짜리입니다.

일반 리노베이션 비용에 공통적으로 드는 철거비, 설비나 조명 설치비 등을 빼고 한옥 방식 측면에 들어간 돈만 따로 뽑으면 정확히 3800만원입니다.

황토시공 1000만원, 문과 창호 등 1500만원, 마루 등 나무 공사에 1300만원이 들었습니다.

원래 문과 창호 등이 비용이 센 편인데, 이 집은 중상급 정도로 한 것이고 고급으로 하면 저보다 더 들어가게 됩니다.

글·사진 구본준 기자 bonbon@hani.co.kr

 

  • 수정 2009-04-01 11:28 등록 2009-04-01 11:28

아파트, 한옥을 품다 (hani.co.kr)

주공, 전주·시흥에 시범 추진
의정부엔 단독주택단지 조성
ㄱ·ㄷ자 내부에 마당·대청까지
전통 특색 살린 디자인 눈길

거리로 노출된 한옥의 벽 모양을 도입한 아파트 기단부.

 

국내 아파트에 한옥 바람이 솔솔 분다. 기존의 성냥갑 아파트 문화에 신선한 파장이 예상된다.

한국주택공사는 최근 전주시 덕진구 만성지구 안 연립주택터에 저층형 100호(2011년 착공)와 경기도 시흥시 시흥목감지구 B-1 블록에 고층형 722가구(2010년 착공)에 전통한옥 디자인을 시범 적용하기로 하고 얼개를 기술한 <공동주택 한옥디자인>을 발표했다.

한옥 디자인 얼개를 보면, 한옥의 외관과 내부 살림 공간의 구조를 아파트에 적용한 것은 물론 구릉지의 특성을 그대로 살려 전통 마을의 조성 원리에 따라 단지를 배치한 것이 특징. 단지 입구에 마을 숲을 가꿔 외부 시선을 차단하고, 3개 동마다 마을 마당과 마을 사랑방을 두어 장터 또는 마을 모임을 열 수 있도록 했다.

아파트 외관은 한옥을 고무처럼 상하로 길게 늘인 모양새. 기단부에 해당하는 1~3층은 골목, 벽, 가구(架構)식으로 된 3가지 모양을 따르고 꼭대기 층에 한옥 지붕을 얹었다. 가운데층은 벽체에 한옥 창살, 또는 고가구의 문양을 박았다. 내부는 ㄱ, ㄷ 자 집을 기본으로 하여 마당과 대청을 들였다. 기왕의 베란다 또는 발코니를 마당으로, 거실은 대청마루로 바꾸어 ㄱ, 또는 ㄷ 자로 배치된 방들의 가운데에 둔 것이다. 벽, 문, 천장은 한옥의 스타일을 최대한 활용했다.

하지만 시범 한옥 아파트는 한옥보다는 아파트에 방점이 찍혔다. 집을 10~20층으로 반복해서 쌓은 콘크리트 아파트와 1층 집을 기본으로 흙과 나무로 지은 한옥은 출발부터 다르기 때문. 또 전통 마을은 공동 생활이 기본인 반면 아파트는 단위 세대별 독립 생활이 기본인 점에서도 상충한다. 이에 따라 일정한 간격으로 남향 배치된 아파트 동들과 공동체를 지향하는 마을 마당 등이 따로따로 노는 것은 불가피해 보인다. 무엇보다도 지세에 따라 집들이 자연스럽게 들어앉는 전통 마을과 달리 매뉴얼에 따른 아파트 촌은 똑같은 마을을 양산할 위험을 안고 있다.

기단

 

같은 주공이 시공하는 의정부 민락2지구 블록형 단독 주택용지의 한옥 마을은 이런 점에서 각별하다. 전주, 시흥의 사례와 달리 의정부 시범 사업은 1~2층 전통 한옥 50세대가 들어서며 처음부터 지형에 맞게 마을을 조성할 계획이다. 주공은 지난 2월말 아이디어를 공모해 전문 분야 6개 작품, 일반 분야 8개 작품을 입상작으로 뽑은 바 있다.

입상작들을 보면 단지 배치에 최우선을 둔 게 특징. 마을로 들어서는 큰길에서 골목길이 갈라지고 길의 끝에 2~3가구가 들어앉았다. 전문 분야 입상작들이 개별 가구의 독립성에 무게를 두어 모두 남향집으로 배치한 반면, 대학생들이 출품한 일반 분야 입상작들은 2~3가구가 마주보게 하고 공동의 정원과 텃밭을 둠으로써 공동체를 지향하는 동시에 공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했다.

주공은 전문 분야에 입상한 6개사를 대상으로 현상설계를 공모해 1개 사를 뽑은 뒤 내년초 실시설계를 맡기고 연말께 착공할 예정이다. 입주는 2012년 중반 이후. 비용은 대지 100평-건평 50평일 경우 땅값으로 5억, 건축비로 2억5천만원 정도를 계산하고 있다. 비용 절감을 위해 하청을 주지 않고 직접 시공한다는 방침이다.

주공의 고민은 소재. 한옥이 목조를 기본으로 하는데, 곧이곧대로 할 경우 비용을 감당하지 못하기 때문에 절반은 콘크리트 시공이 될 것으로 예상한다. 목재의 가공도 기계식을 적극 도입하고 조립 부분도 철물을 보강해 비용을 낮출 계획. 하지만 그것도 방향과 얼개일 뿐, 구체적인 부분에서는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다. 시공 책임을 맡은 주공 경관설계단의 홍기문 단장은 “경우에 따라 손해를 감수할지도 모르겠다”고 말했다.

또 한 가지. 주공의 구상을 실현할 수 있는 관련 업체와 인력이 있을지 의문이다. 건축도시공간연구소의 권영상 박사는 “최근 붐을 타고 기존 목수들, 목재 주택업체, 목재 생산업체에서 전업한 한옥 업체가 있지만, 대부분 한해 10채 이하를 짓는 영세 업체들이며 기계화·표준화와는 거리가 멀다”고 지적했다. 기초 연구를 위한 중장기 프로젝트를 추진 중인 국토해양부 건축문화팀의 김태곤 사무관도 “소재의 규격화·표준화와 건축법 등 각종 제도의 개선, 관련 인력 양성을 위해서는 5~10년의 기간이 필요할 것”이라고 말했다. 임종업 선임기자 blitz@hani.co.kr

 

 

  • 수정 2019-10-19 20:29 등록 2007-09-28 09:37

한옥의 특별한 변신…‘한옥 호텔’에 가보셨나요? (hani.co.kr)

경주 신라밀레니엄파크 내 최초의 한옥 호텔 라궁
집같은 객실에 온천시설…기계공법·도시한옥 모델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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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최초의 한옥 호텔 라궁


2007년, 한국 건축계가 가장 활발하게 논의하는 주제가 있다면 분명 ‘한옥’이다. 그렇다면 올해 등장한 새로운 한옥들 가운데 지금 건축계에서 가장 관심을 모으고 있는 건물은? 아마도 5월 경주에 문을 연 ‘라궁’일 것이다.

라궁은 국내 최초의 한옥 호텔이다. 조정구(40·구가건축 대표)씨가 설계한 라궁은 삼부토건이 운영하는 경주시 보문단지 신라밀레니엄파크 안에 들어선 고급 호텔이다. 지난 몇년 동안 건축계에 한옥 바람이 불면서 한옥 사무실에서 시작해 한옥 유치원, 한옥 동사무소, 한옥 치과 등이 생겨났지만 한옥 호텔은 처음이다.

라궁은 한옥으로 지어 공간 구성이 일반 호텔과는 전혀 다르다. 식당과 라운지가 있는 입구 건물과 16개 객실이 있는 뒷편 건물이 이어져 ‘ㅁ자’를 만드는 구조다. 단층 객실이 이어지는 긴 복도로 둘러싸인 네모꼴 안 마당은 일부러 아무런 처리를 하지 않아 공터처럼 남아 마치 서울 종묘처럼 묘한 정적과 개방감을 느끼게 한다.

건물 내부, 곧 객실의 가장 큰 특징은 각 객실이 한채 한채 방 2~3개와 마루가 있는 한옥집 구조를 이루고 중첩되는 점이다. 누마루를 넣은 누마루형, 그리고 작은 마당을 강조한 마당형, 두가지를 접목한 복합형 등 4가지 객실이 있다.

이 호텔의 기획은 ‘제대로 즐길 수 있는 전통 숙박시설’에서 출발했다. 그래서 참고한 콘셉트가 일본의 전통 숙박시설 ‘료칸’이었다. 전통 일본식 여관인 료칸은 전통 건물에서 전통 방식으로 숙박하면서 일본의 전통을 맛볼 수 있기 때문에 특급호텔이 아닌데도 특급호텔 못잖게 또는 그 이상으로 비싸다. 라궁은 ‘한옥’으로 이런 숙박시설을 지향했다. 새로운 체험을 위해 각 객실에서 노천 온천까지 즐길 수 있도록 객실마다 돌 욕조를 넣었다. 고급 컨셉트여서 숙박비는 1인당 12만~15만원(아침 저녁 식사 포함)인데, 호텔쪽은 11월 전까지는 주말 예약이 모두 찼다고 전했다.

라궁이 건축계의 주목거리인 이유는 한옥으로 호텔을 시도했다는 점 외에도 여러가지가 있다. 우선 건축적 측면에서는 전통 한옥으로 돌아간 현대 한옥건축이란 점이다.

국내 최초의 한옥 호텔 라궁

 

한국 현대건축에서 ‘한옥의 현대화’는 콘크리트 철골조 구조의 현대 건축공법으로 한옥의 모양새를 복제하는 식이었다. 법주사 팔상전이나 불국사 청운교 등의 모습을 본뜬 경복궁내 국립민속박물관이나 여러가지 전통 건축물들의 디자인을 물리적으로 조합한 전주시청 건물, 콘크리트로 한옥 모양 그대로 지어 페인트 칠한 서울 어린이회관 등이 해당한다. 그대로 본뜨기보다는 디자인 모티브를 한옥에서 따오는 것도 또다른 흐름이었는데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을 꼽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런 한옥 현대화 건물들은 건축계에서는 미학적으로 낮은 평가를 받으며 오히려 극복 대상으로 여겨져왔고, 1980년대 이후에는 시도도 끊겼다. 라궁은 이른 흐름과는 반대로 아예 전통 한옥으로 돌아갔다는 점에서 오히려 새로운 시도로 평가받는다. 분명 현대에 현대적인 용도로 지은 현대건축물이지만, 건축은 전통 구법으로 돌아간 것이다. 또한 그동안 전통 한옥건물을 현대에 지을 경우 현장 경험이 풍부한 목수가 모든 시공 과정을 총괄하는 식이었는데 설계자인 디자이너가 건축 과정을 주도한 점도 현대적인 방식을 도입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공법면에서 기계화를 추구한 점도 주목거리다. 모듈화와 부품 기계화로 공기를 줄여 라궁은 6개월만에 완공했다. 이 부분은 건축적으로는 논란의 대상이다. 대신 한옥 건축의 맛을 살려주는 손맛, 곧 건축적 디테일은 희생될 수 밖에 없는 탓이다.

미학적 측면에서도 평가가 엇갈린다. 조씨가 고른 라궁의 건축적 모델은 19세기 이전 전통 한옥이 아니라 20세기 이후 들어선 도심형 근대한옥들의 문법이다. 도시 한옥인 ‘ㄷ자형 한옥’과 ‘연립한옥’의 공간 특성을 적용했다. 조씨는 전통 문화재급 한옥보다는 이런 도시형 한옥들의 지닌 기능적, 미학적 특성을 새롭게 분석하고 높게 평가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이런 도시한옥들이 열악한 근대 도시의 주거 환경속에서 나온 것들어서 과연 건축적 질이 높으며 새로운 모델로 삼을만 하냐는 지적도 나온다.

또한 한옥에 맞지 않는 실내 디자인도 아쉬운 부분으로 지적받고 있다. 객실내 가구와 딸림 설비들의 디자인이 전체 한옥 건물 디자인과 통일성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라궁은 분명 여러가지 측면에서 극복할 거리를 남기고 있다. 그러나 한옥이 몇몇 애호가들의 살림집을 넘어 이제 대중들이 이용할 수 있는 건물에 도전한다는 점에서 분명 이 건물은 새로운 성취를 보여준다.

서울시립대 송인호 교수는 “그동안 현대적인 용도의 건물에 한옥의 구축방식으로 새로운 프로그램을 수용하려는 시도는 거의 없었다”며 “북촌 도시한옥을 건축적 모델로 고른 점은 논의할 여지가 있지만 역사적 한옥유형을 공부해 새로운 한옥유형을 제안하는 점, 한옥이 현대도시에서 현대인의 삶을 담는 호텔이란 공간으로도 가능하다는 것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라궁은 의미가 있다”고 평가했다. 경주/글·사진 구본준 기자 bonbon@hani.co.kr

국내 최초의 한옥 호텔 라궁
국내 최초의 한옥 호텔 라궁

 

설계자 조정구씨 “한옥 스스로 진화할 수 있다”

국내 최초의 한옥호텔 라궁을 설계한 조정구씨는 현대건축에서 출발해 한옥을 현대건축의 대안으로 고른 현대건축가다. 그가 한옥에 매달리기 시작한 것은 2001년부터다. 서울 ‘북촌마을’ 한옥을 리노베이션하는 작업을 맡으면서 한옥과 만났다. 이후 서민들이 살았던 20세기 도시한옥의 매력에 빠져들었고, 자신도 1960년대 지은 한옥집으로 이사가 살고 있다. 주요 작품으로는 라궁과 안동 군자마을회관 등이 있고, 리노베이션 작업으로 서울 원서동 궁중음식연구원, 인사동 누리 레스토랑과 식당 지리산 등이 있다.

-한옥이 과연 현대건축으로 가능한가.

=현대라는 시대에 맞게 한옥이 지어질 수 있다. 그게 호텔일 수도 있고 레스토랑일 수도 있다. 그렇게 스스로 한옥이 진화할 수 있다고 본다. 한옥 작업을 하기 전까지는 나도 ‘전통은 해석되어야 하는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렇게 머릿속에 주입받았던 것이다. 그런데 직접 한옥작업을 해보니까 그게 아니었다. 한옥은 스스로 건축으로, 특히 현대 건축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서울 북촌 등의 20세기 도시 한옥들은 역사적 가치는 있지만 미학적으로는 조선시대 전통 한옥에 못미치는 저가형 ‘집장수 한옥’이란 평가가 많았다. 이런 도시한옥을 주목한 이유는?

=근대화와 함께 모든 것이 바뀌던 시기 한옥도 스스로 근대를 열었다. 창덕궁 연경당이나 운현궁, 미대사관저 등이 그걸 보여준다. 그러다가 한국전쟁 등으로 이런 흐름이 끊긴 것이다. 근대한옥으로 등장한 도시한옥들은 기능과 미학 양면에서 나름 근대화된 도시의 좁은 땅에서 주어진 조건에 맞게 최적화한 생명력을 보여준다. 도시란 여건에 맞게 뽑아낸 최선이 담겨있기에 현대 한옥에 맞는 거주의 본질이 있다고 믿는다. 도시한옥은 분명 보편적 건축의 일부다.

-한옥이 보급화되려면 무엇이 필요하다고 보는가.

=한옥은 무작정 싸다고 되는 건물이 아니다. 보급화는 중요하나 수준 높은 보급화라야 오히려 가능하다고 본다. 값싼 한옥이 꼭 보급화의 중요한 방법은 아니다. 일본에는 오래전부터 전통건축을 현대화하는 ‘화풍(和風)건축’이란 장르가 있어 이 장르만 매진하는 건축가 그룹이 있다. 앞으로 우리 건축계도 이렇게 가리라고 본다. 전통 문화재 한옥은 전통대로 자기 길을 가는 것이고, 새로운 현대한옥은 현대한옥대로 가야할 길이 따로 있다. 구본준 기자

 ▶ 블로그 관련 글 : 이런 호텔 보셨나요?-한옥과 현대건축은 어떻게 만나왔나 / 구본준 기자
국내 최초의 한옥 호텔 라궁
국내 최초의 한옥 호텔 라궁 설계자 조정구씨

 

 

[한복]

박수인입력 2024. 1. 3. 12:24

공진원 제공
공진원 제공
공진원 제공

[뉴스엔 박수인 기자]

 

가수 겸 배우 수지의 한복 화보가 미국 뉴욕에서도 공개됐다.

문화체육관광부(장관 유인촌)는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원장 장동광, 이하 공진원)과 함께 지난해 12월 24일 오전 6시부터 25일 오전 2시(현지시각)까지 뉴욕 타임스퀘어 브로드웨이에 있는 전광판에 2023 한류 문화예술인 수지의 한복 화보 영상을 공개했다.

공진원은 국내 한복 중소기업과 한류 문화예술인의 협업으로 디자인한 한복을 국내외에 홍보하고 한류의 외연을 확장하기 위해 한복 분야 한류 연계 협업콘텐츠 기획개발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올해는 공모를 통해 선정된 국내 한복 중소기업 6개사가 수지를 모델로 한복 상품을 개발하였으며, 한복의 전통적인 구성과 요소를 유지하면서도 현대적인 흐름과 감각을 살린 수지 한복을 디자인했다.

개발한 한복을 착용한 수지 한복 영상은 공진원 채널에서도 볼 수 있다. 이 밖에 한복분야 한류연계 협업콘텐츠 기획개발 사업에서 개발한 총 60벌의 한복은 한복물결 누리집에서도 볼 수 있다.

공진원 장동광 원장은 한류문화 대표콘텐츠인 우리 옷 한복을 뉴욕의 중심에서 알릴 수 있어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라며 국내 한복기업과 한류 문화예술인 간의 협업을 통해 한복의 아름다움을 세계에 알릴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앞으로 한복이 한류의 주역이 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 라고 밝혔다. (사진=공진원 제공)

뉴스엔 박수인 abc159@

 

[텐아시아=최지예 기자]

배우 김유정/사진 = 어썸이엔티

‘마이 데몬’ 김유정의 한 폭의 동양화 같은 비하인드가 공개됐다.

SBS 금토드라마 ‘마이 데몬’에서 도도희(김유정 분)와 정구원(송강 분)의 전생이 공개된 가운데, 아름다운 한복 자태를 뽐내는 비하인드로 시청자들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

배우 김유정/사진 = 어썸이엔티
배우 김유정/사진 = 어썸이엔티
배우 김유정/사진 = 어썸이엔티

KBS2 ‘구르미 그린 달빛’에서 아름다운 독무로 큰 화제를 모았던 김유정은 ‘마이 데몬’에서 검무 솜씨를 뽐내며 카리스마를 발산하고 있다. 강단 있어 보이는 눈빛과 표정, 그와 상반되는 단아하고도 부드러운 춤 선에 극중 정구원의 전생이었던 이선뿐만 아니라 시청자들까지도 첫눈에 반하기 충분해 보인다.

배우 김유정/사진 = 어썸이엔티

또 다른 사진에서는 ‘사극 여신’이라고 불리는 김유정답게 다양한 색상의 한복과 머리 장식까지 찰떡같이 소화하고 있다. 카메라를 보며 환한 미소를 짓다가도, 촬영에 들어가면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앞에 슬픔을 담은 눈빛이 마음을 저릿하게 만든다. 카리스마 있게 검무 솜씨를 뽐내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랑하는 사람을 바라보는 한 여인의 아련한 분위기까지 김유정이 만들어내는 다양한 장르가 ‘마이 데몬’의 보는 재미를 더하고 있다.

배우 김유정/사진 = 어썸이엔티

지난 6일 방송된 12회에서는 도도희와 정구원의 전생 이야기가 안방극장을 눈물로 적셨다. 희망으로 가득했지만 결국 신분의 차이를 넘지 못하고 두 사람의 사랑이 죽음으로 마무리된 것. 김유정의 독보적인 사극 연기가 전혀 다른 분위기를 만들어내며 새로운 드라마를 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가 하면, 전생과 현생을 넘나들며 한층 깊어진 감정 연기가 보는 이들까지 서사에 흠뻑 빠져들게 만들었다.

최지예 텐아시아 기자 wisdomart@tenasia.co.kr

 

한복 근무복 [대구문화예술진흥원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대구=연합뉴스) 류성무 기자 = 대구문화예술진흥원은 문화관광해설사 등 관광 분야 종사자들이 착용할 한복 근무복을 개발했다고 8일 밝혔다.

전통 한복의 미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고 관광 종사자들의 근무 특성에 맞는 활동성과 계절적 기능성 등을 고려했다고 진흥원은 설명했다.

이 근무복은 문화관광해설사, 전시 및 문화예술 분야 안내원, 대구시티투어 버스 기사 등 300여명이 착용한다. 올해 봄부터 보급된다.

대구문화예술진흥원 강성길 관광본부장은 "대구를 알리는 관광 종사자의 근무복을 한복으로 대체함으로써 한류를 확산하고 글로벌 관광 도시 이미지를 높이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tjdan@yna.co.kr

 

일상에서 전통 한복 입고 제작까지 하는 고교생 엄대정씨... "남들 시선 신경쓰지 않아요"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김서현 기자]

MBC 드라마 '연인'부터 '열녀박씨'까지, 지금 우리나라는 사극의 열기가 뜨겁다. 지난달 18일 종영한 '연인'은 최고 시청률 12.9%를 기록하며 사극 돌풍을 일으켰다. 애절한 스토리와 더불어 디테일한 고증을 거친 등장인물의 의상 또한 많은 주목을 받았다. 이처럼, 우리는 주로 일상보다 화면을 통해 전통한복을 접한다. 옛 모습 그대로의 전통한복은 화면 속에서만 접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드라마가 아닌 일상에서도 전통한복을 입는 사람이 있다. 전통을 알리고 이를 계승하고자 노력하는 한복제작자 엄대정(19, 대전예고 3학년)씨 얘기다. 그는 손바느질로 한복을 제작한다. 또한 말총(말의 갈기나 꼬리털)을 직접 세탁하여, 상투 틀 때 머리카락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하는 망건을 제작하기도 한다. 그 어떤 세대보다 디지털과 가까울 듯한 19살 학생이 전통한복을 제작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지난 18일, 그를 만나 전통을 향한 집념에 대해 물었다.  
 
  한복제작자 엄대정씨의 모습
ⓒ 엄대정
환경을 위해 할 수 있는 것

대정씨에게 전통한복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무엇일까. 그는 의외로 '환경오염'을 얘기했다. 

"조선 말기 문신 윤용구의 '철릭' 유물을 보고 출토복식과 전승복식에 많은 관심을 갖게 됐어요. 때마침 환경오염 이슈를 접하고, 나는 환경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하던 찰나 한복이 떠올랐습니다. 한복은 맞춤 제작이기 때문에 수량이 남을 수 없거든요."

대정씨는 대량으로 생산되는 의류산업도 언급했다.

 

"일부 명품브랜드는 브랜드의 가치 하락을 막기 위해 재고를 소각하기도 해요.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연기는 대기오염으로 이어지고, 옷을 만드는데 필요한 에너지와 자원은 버려졌습니다. 그러나 맞춤한복에 사용되는 천은 자투리까지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고, 재봉틀 하나를 가동하는 전력만 소모돼요. 

더불어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를 갖춰야 할 때 양복 정장을 입습니다. 우리가 양복을 입을 때 옥스퍼드 구두에 중절모까지 서양예복을 모두 갖춰 입는 경우는 거의 없잖아요. 점차 복식이 간소화되는 시대에 한복으로 전통적인 예를 지킬 수 있다는 것이 또 다른 매력으로 다가왔습니다." 

"한복 TPO? 충분히 맞출 수 있어요."

대정씨는 지난해 가을부터 직접 한복을 만들기 시작했다. 쾌자, 마고자, 바지저고리 같은 현대식 한복을 시장에서 맞춰 입다가 '윤용구 철릭(조선 말기의 문신이자 서화가인 윤용구의 복식유물)' 유물을 보고, "나도 철릭을 입어야겠다" 생각했다고 한다.

그 후로 출토복식과 전승복식에 관심을 가지게 된 그는, 일상 생활에서도 한복을 입게 됐다. 고교 3학년이라 학교에선 교복을 입다보니, 그 외의 시간에만 한복을 입을 수 있었다고.

"일상에서도 전통한복을 입으려고 노력해요. 예외가 있다면 자전거 탈 때인데, 저는 반경 10km 내외는 자전거를 타고 다녀서 지내는 곳 근처에서는 한복을 거의 안 입는 거 같아요. 그래도 많이 입으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먼 곳을 갈 때는 일부러 한복만 가져가기도 하고요."
 
  손바느질로 철릭을 만드는 모습
ⓒ 엄대정
 
  완성된 철릭을 입은 한복제작자 엄대정
ⓒ 엄대정
 
일상 속에서 전통 한복을 입는다면, TPO(시간 time, 장소 place, 상황 occasion)에 맞출 수 있을까. 

"저는 다양한 종류의 한복이 TPO를 충분히 맞출 수 있다고 생각해요. 상례 때는 삼베에 두건을 쓰고, 결혼식에서는 도포나 창의를 걸치면 됩니다. 저는 외할아버지 장례식에서 삼베옷을 입었어요. 다른 분들은 저를 보고 의아해했지만, 외할머니께서는 옛 상례를 떠올리시고 격려의 말씀을 해주셨죠. 이후로 저는 할머니의 가장 아끼는 손자가 되었답니다.

또 대학 면접을 볼 때도 전통한복을 입었어요. 저는 내년 한국전통문화대 전통섬유학과 24학번으로 입학합니다. 전통에 조예가 깊은 학교 특성상 가끔씩 한복 차림으로 면접을 보는 사람이 있다고 해요. 저도 그중 한 명이랍니다.(웃음)" 

 

그는 전통한복을 입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직접 제작까지 한다. 가위로 원단을 자르고, 바늘에 실을 꿰어 한복을 만든다. 

"한복 제작을 손바느질로 맡기면 최소 150만 원이 들어요. 높은 가격으로 인해 주문제작에 부담을 느꼈죠. 주문을 맡기더라도 그 과정에서 세부적인 디테일을 확인할 수 없기 때문에 결과물이 아쉽더라고요. 또 조선시대 때는 손바느질로 한복을 만들었고, 일부는 부업으로 삼기도 했어요. 때문에 '나도 한복을 만들 수 있겠다'는 자신감으로 제작하게 됐어요."

그의 한복에 대한 열정은, 다른 사람을 설득할 수 있을 만큼의 역사 지식을 갖는 데까지 발전했다. 

"한번은 제게 '대갓은 양반이, 중갓과 소갓은 중인이 썼다'고 말씀하시는 분이 계셨어요. 저는 혜원 신윤복의 풍속화첩을 보여드렸습니다. 갓 크기는 신분에 따른 제약이 없어요. 다만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양반은 갓에 비단을 씌우고, 중인은 모시를 둘렀죠. 신윤복의 풍속화첩을 보면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과 연주를 즐기는 사람의 갓 크기가 같아요. 악공은 중인에 속하고, 연주를 즐기는 사람은 양반입니다. 이처럼 신분에 따라 갓의 재료는 다르지만, 크기는 동일하기 때문에 갓으로 신분을 구별할 수 없다고 말씀드렸어요. 그림과 함께 설명해 드리니 수긍하시더라고요."

물론, 한복을 입는 그를 향해 의아한 시선을 보내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한복을 입을수록, 시선은 신경쓰지 않게 됐다고 했다. 

"예전에 집을 나설 때는 평범하게 입을지, 한복을 입을지 고민하곤 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아요. (저를 희한하게 보는) 모르는 사람을 계속 보게 될 것도 아니고 혹여 인연이 이어진다고 해도 그분이 저를 이해해 줄 거라고 생각해요. 그렇기에 지금까지 전통을 사랑하고 실천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무언가에 집념을 갖기 위해선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봐요.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사람도, 자신이 되고 싶은 사람도 결국 똑같은 인간이에요. '나는 그 사람과 다르니까 못해'라고 생각하며 자신의 가능성을 제한하고 포기한다면, 많은 것을 놓치게 되지 않을까요?"

 

 

  • 2021-10-15 17:32

"한복의 미, 천년고도에서"…'한복문화주간 in 경주' 개막 - 노컷뉴스 (nocutnews.co.kr)

  • 포항CBS 문석준 기자 

버스투어, 신라복체험, 소품만들기, 패션쇼, 전시, 공모 열려

일부 프로그램 비대면 전환

관광객들이 경주 황리단길에서 신라복 입기 체험을 하고 있다. 경주문화재단 제공
 
경북 경주에서 열리고 있는 '한복문화주간'이 관광객들로부터 큰 인기와 관심을 끌고 있다.

경주문화재단은 지난 11일부터 17일까지 일주일간 한복문화주간을 개최하고 있다고 밝혔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주최하고 (재)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 한복진흥센터, 경상북도, 경주시, 경주문화재단이 주관하는 이번 행사의 주제는 '한복입고 경주, 온나'이다.

'온나'는 '오라'의 경상도 사투리이며 경주에 '온 나(자신)', '온전한 나'라는 의미를 함께 가진다. 한복입고 경주에 오면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한복의 소중함을 아는 온전한 내가 되어간다는 뜻을 포함하고 있다.

행사는 버스투어와 체험프로그램, 신라복 패션쇼, 한복공예공모전, 한복전시, 지역연계프로그램 등으로 다양하게 펼쳐지고 있다.

'한복입고 경주, 버스여행'은 한복을 입으면 셔틀버스에 무료로 탑승해 경주의 명소를 이동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다.
   
'한복입고 경주, 온고지신'은 '신라복 입기', '한복 옷감을 활용한 소품 만들기' 등 옛것을 경험하는 체험프로그램이다.
   
관광객들이 경주 황리단길에서 신라복 입기 체험을 하고 있다. 경주문화재단 제공
 
'신라복 입기'는 봄시즌에 전통시장 한복 장인들이 제작한 신라복을 입을 수 있는 프로그램으로, 참가자가 신라복을 입고 경주예술의전당 뿐 아니라 다양한 명소를 방문할 수 있도록 최대 8시간 동안 대여한다.

'한복입고 경주, 처용과 노닐다'는 공모전에 선정된 7명의 디자이너들의 신라복 패션쇼로, 신라복을 모티브로 한 35벌의 디자인을 선보인다.
   
패션쇼는 국립경주박물관 옥외전시장 다보탑 앞에서 오는 16일 오후 6시 30분에 경주문화재단 유튜브에서 실시간 중계한다. 역신을 물리치고 나라의 화평을 기원하는 현무용단의 처용무와 국악공연도 함께 펼쳐진다.
   
'한복입고 경주, 황금손 공모전'은 한복과 경주를 주제로 만든 한복공예품 공모전으로 선정된 28점의 작품을 경주예술의전당에서 전시되고 있다.
   
관광객들이 경주 황리단길에서 신라복 입기 체험을 하고 있다. 경주문화재단 제공
 
'한복입고 경주, 색(色)다른 선(線)'은 한복 옷감의 색과 선의 아름다움을 체험하는 전시로 무형문화재 누비장 김해자, 신라복식연구회가 참여한다.
   
'한복입고 경주, 전통체험'은 경주문화원과 함께 하는 지역연계프로그램으로 영상으로 제작해 '등만들기 키트'와 함께 배부할 예정이다.
   
'한복입고 경주, 인문학 강좌'는 국립경주박물관이 주최, 주관하는 프로그램으로 한복문화주간에 특별 강좌를 개설했다.

'한복입고 경주, 온나! 온너!'는 한복입기챌린지로 한복입은 인증사진을 개인 SNS 올리는 이벤트이다. 챌린지에 참여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기념품을 증정한다.
   
이번 행사는 강화된 방역수칙을 적용해 일부 프로그램은 비대면으로 운영하며 버스 탑승 및 체험프로그램의 경우 인원수를 제한해 사전 접수 방식으로 운영한다.
   
한복문화주간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경주문화재단 홈페이지를 통해 확인할 수 있으며 경주문화재단 문화사업팀로 문의하면 된다.
   
경주문화재단 오기현 대표이사는 "모든 프로그램에 경주의 한복 장인들이 참여해주셨다"며 "이번 한복문화주간이 지역 한복 활성화를 위한 큰 전환점이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입력 2007. 11. 4. 06:47수정 2007. 11. 4. 06:47

<인터뷰> 런던서 한복전시회 연 이리자 (daum.net)

(런던=연합뉴스) 김진형 특파원 = "한복은 몸의 결점을 가려주는 아름다운 의상입니다. 피부색에 상관없이 흑인이나 백인이나 누구에게나 잘 어울립니다."

1972년부터 시작해 세계를 일곱 바퀴 돌며 아프리카를 빼고 거의 모든 나라에서 패션쇼를 했다는 한복 디자이너 1세대 이리자(72)씨가 주영한국문화원의 초청으로 영국에서 한복전시회를 열었다.

3일부터 8일까지 런던 왕립미술학교에서 '극동의 패션:이리자의 한복'이라는 제목으로 열리는 이 전시회를 위해 이씨의 대표작 40여점이 비행기로 공수됐다. 40여년간 한복을 만들며 살아온 이씨의 삶이 농축돼 있는 작품들이다.

 

노무현 대통령 부부가 영국을 국빈 방문해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을 만났을 때 권양숙 여사가 입은 하얀 모시 한복도 있고, 1974년과 1977년 미스 유니버스 대회에서 민속의상상을 탄 색동 한복들도 있다.

이씨가 2000년 위암 말기 진단을 받은 후 "병이 이기나 내가 이기나 보자"는 각오로 7년 동안 작은 조각천을 이어붙여 만든 모자이크 장식보도 전시장 한 벽을 장식하고 있다.

이번 전시회를 위해 이씨는 특별히 조각천 수 백 개를 이어붙인 모자이크 한복과 매듭 단추를 수 백 개 장식한 매듭 한복도 만들었다.

프란체스카 여사부터 권양숙 여사까지 역대 대통령 부인의 한복을 디자인한 이씨는 "한복 맵시는 역시 육영수 여사가 최고였다"며 "해외 순방을 많이 한 권양숙 여사는 한복의 멋을 세계 곳곳에 알리는 데 일조했다"고 말했다.

전시회를 참관한 영국인들은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이씨에게 "같이 사진 찍고 싶다"고 연신 제안하며 "색상이 아름답다", "매우 편할 것 같다"고 소감을 밝혔다. 여왕과 왕실을 둔 나라인 탓인지 전통 궁중 복식에 관심을 표하는 관객들도 꽤 됐다.

"암을 앓고난 뒤 힘이 많이 빠졌지만, 아직도 바느질은 얼마든지 할 수 있다"는 이씨는 내년쯤 지금까지 만든 역대 대통령 부인의 한복들을 모아 전시회를 열 계획이다.

그리고 10년 내에 수원에 사둔 1만평 규모 부지에 이리자 한복 박물관을 세우는 것이 "평생 숙원 사업"이라고 말했다.

 

이번 전시회에는 이씨의 딸인 배화여자대학 전통의상과 황의숙(50) 교수가 동행했다. 황교수는 런던의 10대 관광명소로 꼽히는 빅토리아 앤드 앨버트 박물관에서 4일 열리는 한국 전통문화 체험 행사 '한 스타일: 한국문화 체험하기'에서 한국 전통 혼례 절차와 전통 복식에 대해 강의한다.

이번 전시회와 한복 입기 체험 행사가 끝난 후 이씨는 한국에서 가져온 한복 중 15점을 내달 중순 건물을 마련해 정식 개관하는 주영한국문화원에 기증하기로 했다.

kjh@yna.co.kr

 

[한지]

김민중 복원가 "18세기 파스텔초상화 18점..앞으로도 한지 활용"
루브르박물관 홍보동영상 갈무리© 뉴스1

(서울=뉴스1) 박정환 문화전문기자 = 프랑스 루브르박물관이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를 추진하고 있는 한지(韓紙)를 활용해 소장 문화재를 복원했다는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루브르 박불관은 복원을 완료한 소장 문화재를 지난 5월17일부터 선보이고 있다.

'미래에서 온 종이협회'는 루브르 박물관 그래픽아트 부서와 협력해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의 작품 14점과 샤를 르모니에의 작품 4점 등 총 18점을 복원했다고 밝혔다.

복원 작업에 참여한 김민중 복원가는 지난 7일 <뉴스1>과의 통화에서 "꼬박 1년을 투입해 문화재들은 완벽하게 복원했다"며 "지금도 루브르박물관의 다른 문화재를 복원하고 있지만 공개를 허락받지 못해서 구체적으로 말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이번 복원에는 문경 외발식 전통한지를 사용했다. 김민중 복원가는 "자비에 살몽 루브르박물관 그래픽아트 부장이 소장문화재의 상태를 고려해 문경 외발식 전통한지를 선택했다"고 말했다.

문경 외발식 전통한지는 색감과 질감이 규칙적이고 생동감이 있어 아름답다고 알려졌다. 김 복원가는 "습도와 치수, 화학적 변형, 착색 등에서 안정성을 인정 받아서 최고의 복원용 종이로 평가를 받았다"고 설명했다.

전통한지를 활용한 루브르박물관 문화재 복원 과정© 뉴스1

 

이번에 복원한 문화재는 부르봉가의 역사를 기록한 파스텔 초상화 18점이다. 18세기 프랑스 미술에 주로 사용된 파란색 종이 위에 그려졌다는 공통점이 있으며 '데빠쌍'이라 불리는 방식으로 표구됐다. 데빠상은 작품을 보여주는 창과 작품을 고정하는 부분으로 이루어진다.

김 복원가는 "양쪽을 고정할 수 있도록 지탱할 종이에 문경외발식 전통한지가 선택됐다"며 "로렌스 케룩스 현 복원실장과 아리안드 라 샤펠 응용연구담당관이 전통한지를 활용해 복원할 수 있도록 준비했다"며 "접착제는 루브르박물관이 개밝한 'MK40T'라고 불리는 전분 성분의 접착제를 사용했다"고 설명했다.

 

복원에 사용한 문경 외발식 전통한지는 국가무형문화재 한지장 보유자 지정을 앞둔 문경의 김삼식 한지장과 그의 후계자 김춘호 한지 전수 조교가 만들었다.

김민중 복원가는 복원 과정에서 전통한지의 배송이 가장 어려웠다고 밝혔다. 그는 "프랑스에서 전통한지를 보관할 공간이 없어서 대량주문이 불가능한 상황"이라며 "전통한지를 주문한 다음에 코로나 때문에 배송까지 너무 오래 기다려야 하는 과정이 힘들었다"고 설명했다.

마지막으로 김 복원가는 "루브르 박물관 복원팀이 전통한지로 복원한 결과에 완전한 만족감을 나타냈다"며 "앞으로도 루브르 박물관 소장품의 보존 작업에 전통한지를 사용할 계획"이라고도 말했다.

복원 문화재 전시전경© 뉴스1
복원 문화재 전시전경© 뉴스1

art@news1.kr

 

 

문화체육관광부가 올해부터 문체부 장관 명의 표창장과 상장, 방명록 등에 사용된 일반 종이를 전통한지로 대체하기로 하는 등 한지 살리기에 나선 것은, 그만큼 전통 한지가 어려움을 겪고 있어서다. 전통한지는 중국의 전통종이인 선지(宣紙), 일본의 화지(和紙)보다 뛰어난 품질을 인정받고 있는데도 정작 판로를 찾지 못하고 있다.

 

◆유럽에서 찾는 한지

전통한지는 질기고 잘 찢어지지 않으며, 냄새가 향긋하고, 지질이 부드럽다. 또 통풍이 잘되고 여러가지 무늬를 넣어 제작할 수 있으며 물감을 들이기가 쉽다. 닥나무가 주 원료다. 원료와 제조방법에 따라 토착한지, 전통한지, 개량한지, 수록한지, 반자동 기계한지, 기계한지등으로 나뉘고, 지역별로 전주한지, 원주한지, 안동한지, 괴산한지, 문경한지, 가평한지, 의령한지 등이 있다. 전통 문화상품이나 공예 외에도, 친환경 포장재나 인테리어 용품 등으로 응용 가능성이 높다.

 
우리 전통한지는 세계적으로 품질과 우수성을 이미 인정받은 종이이기도 하다. 문체부에 따르면 2017년 프랑스 루브르박물관은 화지, 선지를 제치고 ‘기록 유물 복원용 종이’로 우리 전통한지를 채택한 바 있다. 이탈리아 국립기록유산 보존복원 중앙연구소는 2016년부터 지난해까지 세 차례에 걸쳐 전통한지 5종에 대해 문화재 보수·복원 용지로 적합하다고 인증하기도 했다. 최근 가온지역발전연구원이 전라북도에 제출한 ‘한지산업 육성 및 지원 기본계획 수립용역’ 용역보고서는 “특히 유럽 등지에서 르네상스 시대 문화재 복원용으로 주로 사용되던 일본의 화지 대신 한지가 주목받고 있는데, 이는 전통한지가 화지에 비해 내구성이 뛰어나기 때문으로, ‘천년 이상을 가는 종이’인 전통한지는 전통적인 외발뜨기 방식으로 제조할 경우 더욱 우수한 품질로 평가받고 있다”고 지적했다.
 
◆전통 한지 제조업체 명맥만 유지 중

하지만 제조업체들의 현실은 딴판이다. 전북 용역보고서 보고서에 따르면, 전북은 조선시대 전국 한지의 약 40%가 생산됐던 지역으로서 전통한지의 대표성과 정통성을 갖고 있는 지역임에도 전통한지 문화가 쇠퇴하고 있다.

보고서는 “천년의 역사를 가진 전북 한지는 최근 값산 중국산 종이(선지)가 국내 시장을 장악하면서 입지를 위협받고 있다”고 지적했다. 또한 수요부족으로 수익성이 떨어지면서 전통문화로서의 한지 제조 업체들도 벼랑 끝에 선 모습이다.

보고서에 따르면 현재 전국의 한지 제조업체는 1990년대 64곳에 달했지만 2018년 기준 21곳으로 감소해 명맥만 유지하고 있다. 이마저도 동한기에 한시적으로 조업하거나 한지 제작 체험을 위한 곳을 다 포함한 것이어서, 실제 운영되는 공장은 10곳 남짓에 불과하다. 

2000년대 초반까지 한지를 찾는 이가 많아 고용인력도 수십명에서 최대 100명 가까운 곳이 여러곳이었지만 현재 수록한지 제조업체의 경우 21개 중 연매출 1억원 이하가 10개 업체, 5000만원 이하가 5개 업체로, 전체 비중이 70%를 넘는다. 그만큼 영세하다는 얘기다.
◆정부·지자체 한지 살리기 첫발

문체부는 전통한지 수요를 창출하고 한지산업의 진흥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지난해 10월 중앙정부, 지자체, 업계, 전문가가 참여하는 한지정책협의체를 열었다. 최소한의 공공 수요 창출 차원에서 문체부 장관 명의 표창장과 상장이라도 전통한지를 사용해 달라는 한지업계의 호소도 이때 나왔다.

현재 행정안전부와 전북 전주시와 경기 가평군 정도만 표창장과 상장을 전통한지로 사용하고 있다. 문체부는 전통한지 사용이 일부 기관에서 공공 부문 전체로 한층 더 확산될 수 있도록 중앙부처와 지방자치단체, 공공기관 등에서도 표창장과 상장 제작 시 전통한지를 사용해 줄 것을 협조 요청했다. 방명록, 상장 등 공공 소비물품도 전통한지로 제작해 대사관과 문화원에 보급하고, 지역 한지 축제, 체험프로그램 등 지역한지 수요 활성화 사업을 추진할 방침이다.

문체부 이진식 문화정책관은 16일 “공공 부문에서 전통한지의 쓰임새를 확산시키고 전통한지의 우수성을 널리 알려 우리의 대표 문화자원이자 전통 산업으로서 활성화 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김예진 기자 yejin@segye.com

 

 

서울신문 2007-09-17    11 면

[HAPPY KOREA] (21) 전북 완주군 소양면 대승마을 | 서울신문 (seoul.co.kr)

 

 


 

 

입력 2008-03-27 03:01업데이트 2009-09-25 10:02

미망에서 벗어나 고통없는 세상과 평화로운 삶을 기원하는 불교 예술의식 ‘영산재’의 바라춤 장면. 영산재는 3일간 200여 명이 참가하는 장엄한 의식이자 음악 무용 그림이 한데 어우러진 전통 종합예술이다. 사진 제공 봉원사
 
《영산재는 2600년 전 인도 영취산에서 석가모니 부처가 사부대중이 모인 가운데 법화경을 설법할 때의 모습인 영산회상을 재현한 불교 의식. 초대형 괘불을 내걸고 해금 북 장구 거문고 등 각종 악기를 연주하고 바라춤 나비춤 법고춤 등을 추면서 진행되는 종합불교예술이다. 또한 죽은 자의 영혼을 위로하는 제사가 거행되고 모든 대중이 열을 지어 돌면서 독경을 하는 등 산 자와 죽은 자가 모두 참여하는 불교의식이기도 하다.》

한국 불교 의식의 백미(白眉)인 중요무형문화재 50호 영산재(靈山齋)가 국내를 넘어 세계로 도약한다.

영산재를 보존 및 전승해 온 한국불교 태고종 봉원사(서울 서대문구 봉원동)가 영산재를 국내외에 널리 알려 유엔교육과학문화기구(UNESCO·유네스코) 세계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될 수 있도록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하기로 했다. 봉원사의 궁극적인 목표는 한국 불교 의식의 장엄함을 세계 종교계와 문화계에서 인정받는 것.

영산재는 3일간 200여 명의 스님과 대중이 참가한 가운데 진행된다. 봉원사는 매년 6월 6일 현충일(오전 9시∼오후 6시)에 영산재를 9시간짜리로 축약해 시연하고 있다. 부처님 오신 날엔 봉축법회와 함께 1시간짜리 약식 공연으로 선보이기도 한다. 이들 시연엔 매회 3000여 명의 불자와 관람객이 몰릴 정도로 인기가 높다.

봉원사는 영산재의 국내 인기를 해외로까지 전파하겠다는 의욕을 보이고 있다. 그 첫 행사가 28일∼4월 4일 프랑스 파리와 리옹 등에서 열리는 세계상상문화축제 참가 공연.

봉원사의 총무 운봉 스님은 “전통 무용과 음악 그림이 집대성된 종합불교예술을 우리만 알고 있기엔 너무 아깝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면서 “그러던 차에 지난해 우리 절을 찾았던 프랑스의 상상문화축제와 유네스코 관계자들이 영산재에 감동을 받고 우리를 축제에 초청했다”고 설명했다.

봉원사는 이어 10월엔 중국에서, 11월엔 벨기에에서 영산재를 공연할 계획이다. 내년부터는 6·25전쟁 참전 16개국을 매년 한 나라씩 돌면서 영산재를 공연해 6·25전쟁 참전 용사들의 넋을 기리는 동시에 영산재의 매력을 널리 알릴 생각이다.

이에 대한 운봉 스님의 말.

“이번 파리 시연을 계기로 유네스코 세계무형문화유산으로 등록될 수 있도록 널리 홍보하겠습니다. 하지만 우리 것의 홍보에만 머물지 않고 죽은 자의 영혼을 위로한다는 영산재의 본질적 의미를 알리는 데 노력할 겁니다. 16개국 참전 용사들의 넋을 기리는 것도 그런 맥락입니다.”

이와 함께 봉원사는 국내 불자와 애호가들을 위한 프로젝트도 준비하고 있다. 2010년까지 봉원사 내에 전용극장을 짓고 영산재의 3일 과정을 모두 체험할 수 있는 템플스테이 프로그램도 마련할 계획이다.

이광표 기자 kplee@donga.com

 

  • 수정 2019-10-19 11:23 등록 2008-04-17 23:18

일본에 울리는 한국인 옹이진 삶 ‘살풀이’ (hani.co.kr)

한·일 공동기획 ‘야키니쿠 드래곤’ 교차 상연
‘오장군의 발톱’ 일본인 연출가가 도쿄에 올려

기자김도형

지금 일본에서는 바야흐로 한-일 연극 교류의 무대가 활짝 열리고 있다.

고도성장의 무대 뒤켠으로 밀려난 재일동포의 애환을 처음으로 다룬 연극이 한-일 공동기획으로 무대에 오른다. 또다른 한편에선 77살 한국 원로 극작가의 작품을 무대에 올리고 싶어 84살 일본 원로 연출가가 10년만에 무대에 복귀했다.

1970년대 재일한국인의 삶을 코믹하게 다룬 연극 <야키니쿠 드래곤>이 17일부터 27일까지 도쿄 신국립극장에서 상연한다. 한국의 예술의전당과 일본 신국립극장의 공동기획 연극으로 다음달 20일부터 25일에 서울에서도 공연한다.

<야키니쿠 드래곤>은 영화 <달은 어디로 뜨는가>와 <피와 뼈> 등을 쓴 극작가 정의신씨가 각본과 연출을 맡은 작품이다. 한국쪽에선 주목받는 젊은 연출가 양정웅씨가 연출한다. 출연자도 두 나라 배우들이 함께 호흡을 맞췄고, 연극무대에서 한국말과 일본말이 교차한다.

작품 무대는 간사이 지방 도시에 있는 곱창구이집 ‘야키니쿠 드래곤’. 주인 김용길은 2차대전 때 왼팔을 잃었지만 운명을 흐르는 물처럼 담담히 받아들이는 인물이다. 그는 세 딸이 결혼해 행복하게 살기 바라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큰딸 정화는 시집 갈 생각이 없고, 갓 결혼한 둘째딸 이화는 늘 부부싸움을 해댄다. 세째 미화는 일본 남자 사이에서 아이를 낳는다. 이것도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용길에게 재개발의 파도가 밀려와 다시 한번 그의 운명을 희롱한다.

연출자 정의신은 “많은 재일 한국인·조선인이 생계를 영위한 불고기(야키니쿠)집에는 얼마만큼의 역사가 아로새겨져 있는가. 나는 작은 불고기집의 커다란 역사를 그리고 싶었다”고 말했다. 국유지에 보금자리를 튼 한국인을 일본 당국이 내쫓는 장면은 그의 실제 체험이라고 한다. “오사카의 재일한국·조선인 집단거주지를 취재하면서 당시 공기를 흡수했다. 체험, 취재, 재일동포에 대한 공부를 거듭해 작품을 만들었다.”

일본의 대표적 진보성향 극단 청년극장도 지난 11일부터 20일까지 한국 현대연극의 대표작 <오장군의 발톱>을 상연중이다.

<오장군의 발톱>은 한국전쟁 당시 엉뚱하게 배달된 영장을 받고 군에 입대한 오장군이란 순박한 시골청년이 이름 때문에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소모품처럼 사라져가는 이야기다. 1974년 발표됐으나 ‘반전적인 내용’이란 이유로 사전검열에 걸려 14년 동안 무대에 오르지 못하다가 1988년에야 공연했다. 문화계의 사전검열 폐지 운동의 상징적 작품인으로, 1991년 검열폐지라는 성과를 낳는 데 한몫을 했다.

연출자 우류는 뒤늦게 지난해 2월 한일연극교류센터가 도쿄에서 연 희곡낭독회에서 이 작품을 접했다고 한다. “이 작품에 강하게 매료된 내가 박선생에게 ‘내 연출로 청년극장에서 공연하는 것을 허락해주시겠냐고 프로포즈하자 ‘기꺼이’란 대답이 돌아왔다.” 우류는 1995년 청년극단 대표였던 우류가 연극단을 이끌고 방한했을 때 박씨와 인연을 맺었다.

일본판 <오장군의 발톱>은 애절한 오보에 선율과 발레 몸짓으로 자연 풍광을 전달하는 연출가의 장면전환 장치가 특히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다. 잔혹한 전쟁에 휘둘리는 인간 군상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데 빛을 발휘한 듯했다. 첫날 공연이 끝난 뒤 도쿄 신주쿠 기노쿠니야 극장에서 만난 연축가 우류는 “원작에 충실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도쿄/김도형 특파원 aip209@hani.co.kr

 

 

[스키종주국]

 

입력 2017.07.16 16:08

C.J. 루터의 스키 전파도.

 

‘눈 위에서 신는 신발’을 뜻하는 스키는 노르웨이가 종주국으로 알려져 있다. 노르웨이어와 영어의 skid, skip, skiff, slide 및 skate 등이 어원으로 수 천년 전부터 겨울이 길고 눈이 많은 산악 지대에서 보행, 사냥, 운반의 목적으로 쓰였고 북유럽에서는 전쟁 당시 요긴한 이동 수단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이른바 ‘노르웨이 스키’는 농민과 사냥꾼에 의해 전파됐다. 1740년경 노르웨이 군대가 스키부대를 편성한 뒤 활성화돼 스키 경기로 발전했다. 1877년 노르웨이 크리스티아니아(현재 오슬로)에 스키클럽이 생겼고, 2년 뒤 하스비힐에서 제1회 점프대회가 열렸다. 19세기 후반엔 유럽 각국에 보급됐고, 특히 오스트리아에서 마시알 즈달스키가 알프스 산악 지대에 맞는 스키 기술을 연구하는 동시에 적합한 용구를 개발함으로써 급격한 발달을 가져왔다.

이처럼 유럽에서 스키가 시작된 것으로 흔히 알고 있지만 1955년 출판된 C.J. 루터의 ‘고대 스키역사 50년’에 담긴 그림을 보면 스키(썰매)는 오히려 한국의 북동쪽 지방과 중앙 시베리아에서 전세계로 전파된 경로가 구체적으로 그려져 있다.

지도 맨 위 왼쪽에 묘사된 그림은 아이슬란드의 신화에 나오는 스키의 신(神)인 우루의 모습으로, 17세기에 랍랜드인이 그린 것으로 알려졌다. 스키를 신고 활을 쏘는 장면으로 스키의 좌우 모양과 길이가 다르게 그려져 있는데, 이는 한국의 썰매의 모양과 동일하다.

한국 북동쪽 산간지방에 예부터 고유의 썰매(스키)가 있다는 설은 여러 나라에서 알고 있었다. 반면 일본의 경우는 1911년 1월 12일, 오스트리아 육군 소령 폰 레르히로부터 스키를 전수받았다고 기록돼 있다. 일본은 그러나 한국에도 고유의 썰매가 있다는 것을 알고 찾아 나섰다.

1912년 함경남도 명천소재 농가에서 발견된 스키. 탄소연대측정으로 4세기때 제작된 것으로 밝혀졌다.
일본군 유가와 중위가 함경남도 산간 농가 창고에서 스키를 발견한뒤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실제 이듬해 당시 식민지 한국에 주둔한 일본군의 유가와 중위가 함경남도 명천소재 산간 농가의 창고에서 스키를 발견하고 탄소연대를 측정해보니 4세기 때 나무로 제작된 스키로 밝혀졌다. 특히 스키 몸통에 4개의 구멍을 뚫었고, 양쪽 스키의 길이가 약간 다르게 제작된 점이 현대 유럽에서 개발된 스키와 판박이로 닮았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최일홍 강원도개발공사 알펜시아 사업단 과장은 “현존 최고의 북유럽스키보다 우리나라 스키가 무려 1300년 가량 앞섰다는 명백한 증거”라고 말했다. 현재 이 스키는 일본 니가타 현의 다카다(현 조에쓰시)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최 과장은 이어 국제올림픽위원회(IOC)관계자들도 이 같은 설명을 들으면 사뭇 분위기가 숙연해진다고 귀띔했다.

김지섭기자 onion@hankookilbo.com

 

[단독]'고대 원형' 한반도 스키 106년 만에 돌아온다 (daum.net)

입력 2018. 1. 19. 03:02수정 2018. 1. 19. 10:04
 
길이 160cm네 구멍식 고로쇠나무 스키.. 현존 최고 5200년전 스웨덴 것과 동일
1912년 日軍이 반출.. 일시적 환국.. 21일부터 평창올림픽 기간 전시

[동아일보]

 

이 한반도스키가 ‘고대원형’으로 불리는 건 5200년 전 스키(스웨덴 발굴)와 똑같이 네 구멍을 뚫어 사용한 방식 덕분. 그래서 한반도 스키발상설과 연관지어 보는 학자들도 있다.
일본스키발상기념관에 전시중인 한반도 고대원형 스키 두 대중 이번에 환국하는 한 대. 5200년 전 스웨덴 것과 똑같이 네 구멍 식이라 스키고고학에서 극히 귀중한 유물로 간주된다. 서브원 제공사진.
일본스키발상기념관에 전시돼 온 네 구멍식 고대원형 한반도 스키. 1912년 함경남도에서 발견된 것이라 씌어 있다.
일본스키발상기념관의 전시실에 붙어 있는 한반도 고대원형 스키 설명문.
 
‘일본스키발달사’(1936년 발간)에 게재된 동서양 스키 사진. 왼쪽부터 한반도 고대원형, 오스트리아 식, 1926년경 사할린의 러시아 것, 레르히 소령이 가져온 스키다. 조에쓰시 제공사진.
1911년 일본에 스키와 기술을 전수한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데오도르 에들러 폰 레르히 소령. 일본스키발상기념관 소장 사진.
고대원형 한반도스키가 전시중인 조에쓰 시 다카다의 일본스키발상기념관. 일본에 스키를 전수해준 오스트리아의 레르히소령을 기념해 오스트리아 풍으로 지었다.
일본 스키발상기념관에 전시된 고대원형 한반도 스키 2대(사진 양쪽 끝) 모습. 이 스키는 아시아에서 현존하는 유일한 ‘네 구멍식 고대원형 스키’로 고로쇠나무를 깎아 만들었다. 조에쓰시(일본 니가타현)=조성하 전문기자 summer@donga.com
현존 최고(最古)의 5200년 전 스웨덴 고대스키와 동일한 ‘네 구멍식 스키’로 그동안 일본에서도 중요하게 전시돼온 ‘고대원형’ 한반도 스키가 평창 겨울올림픽을 맞아 106년 만에 19일 일시 귀국한다. 이 스키는 21일 스키클럽 곤지암 임경순 회장(88·국내 최초 겨울올림픽 스키선수) 등 스키 원로들에게 인계돼 LG그룹 서브원(대표 이규홍)의 곤지암스키장 내 ‘한국스키 100년관’에 전시된다. 스키는 평창 겨울올림픽 기간까지 전시된 뒤 3월 중순경 일본으로 되돌아간다. 이번 전시는 서브원이 지난해 12월부터 다섯 차례나 현지를 방문해 설득한 끝에 성사됐다.

현존하는 국내 최고의 스키이자 아시아에서도 유일한 ‘네 구멍식 고대원형 스키’는 고로쇠나무를 깎아 만들었다. 길이 160cm, 너비는 앞뒤가 6.4cm와 5.5cm, 한가운데는 7cm. 잘록한 요즘 스키와는 정반대다. 한가운데 네 구멍은 발 묶는 끈을 통과시키기 위한 것. 이걸 당시 선조들은 ‘썰매’라고 불렀다. 이 순수 우리말을 한자로는 ‘설마(雪馬)’로 표기했다.

 

고대원형 스키는 일제강점기인 1912년 한반도에 주둔했던 일본 육군 제8사단의 아부라카와 데이사쿠(油川貞策·1885∼1953) 중위가 함경남도에서 찾아내(조에쓰시립종합박물관 스키자료목록 기록) 니가타현 조에쓰시 소재 제13사단에 보냈다. 이 부대가 해체된 뒤 조에쓰 시가 시립종합박물관에 전시한 데 이어 1992년 가나야산 일본스키발상기념관(조에쓰 시립종합박물관 산하)으로 옮겨졌다.

일본스키발상기념관은 이 스키가 역사적으로 큰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설명한다. 고대 스키와 동일한 형태의 스키가 최근까지 조선반도 북쪽에서 사용돼 왔음을 추정할 수 있어서다. 특히 네 구멍식은 스키고고학에서 극히 귀중하고, 이런 스키가 한반도에서 발견됐다는 사실은 고대에 스키가 유럽부터 유라시아까지 넓게 전해졌음을 유추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 스키를 국내에선 ‘4세기 북구형 스키’(출처 ‘스키70년사’·대한스키협회 1999년 발간)로 평가하고 있다. ‘세계스키의 원형’(손경석 초대 대관령스키박물관장·1999년)이란 주장도 나온다.

일본 야마자키 시호우는 저서 ‘일본스키발달사’(1936년 발간)에서 “북유럽 서쪽의 스칸디나비아 지방에 태고로부터 전해진 스키와 똑같은 것이 1911년 함경남도에서 발견됐는데 이건 퉁구스족이 동방에 이동할 때 지니고 온 것으로 추측된다”고 밝혔다.

조에쓰시(일본 니가타현)=조성하 전문기자 summer@donga.com

 

 

“우리고전 세계에 알리려면 두 번역원 협력해야죠”

한국고전번역원-한국문학번역원 박석무·윤지관 두 원장 대담

한겨레 2008.3.10

최재봉 기자

김명진 기자

 

“우리고전 세계에 알리려면 두 번역원 협력해야죠”

한국고전번역원-한국문학번역원 박석무·윤지관 두 원장 대담

www.hani.co.kr

 

 

 

“번역도 학위논문으로 인정받아야”

동아일보 2007.11.22

 

“번역도 학위논문으로 인정받아야”

《“학술진흥재단 이사장으로 있으면서 번역도 교수들의 연구업적으로 인정받도록 만들었으니 이젠 학생들의 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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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한 번역에서 쉬운 번역으로” 국가기관 ‘고전번역원’ 15일 출범

한겨레 2007.11.15

강성만 기자

 

“정확한 번역에서 쉬운 번역으로”

국가기관 ‘고전번역원’ 15일 출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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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일상어로 번역, 대중과 소통 넓혀야”

서양고전 집담회 갖는 김남두 교수

한겨레신문 2007년 10월 18일

강성만 기자

http://www.hani.co.kr/arti/culture/religion/243750.html

 

“고전 일상어로 번역, 대중과 소통 넓혀야”

서양고전 집담회 갖는 김남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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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사떡 나누니 “웬 떡이냐”

http://www.donga.com/fbin/output?n=200711240061 

 

[어린이 책]고사떡 나누니 “웬 떡이냐”

◇세계 으뜸 우리 음식/최준식 글·김희연 그림/40쪽·9000원·마루벌(6세~초등 2년용) 우리 조상들은 귀신도 떡을 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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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새 1만원권 배경그림 ‘일월오봉도’는 금척의 상징/최홍 작가 ‘마이산 석탑군의 비밀’저자

2005년 8월 17일 (수) 09:00  서울신문

[기고] 새 1만원권 배경그림 '일월오봉도'는 금척의 상징/최홍 작가 '마이산 석탑군의 비밀'저자 (daum.net)

 

[기고] 새 1만원권 배경그림 '일월오봉도'는 금척의 상징/최홍 작가 '마이산 석탑군의 비밀'저자

[서울신문]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가 오는 2007년 상반기에 발행되는 새 1만원권의 앞면 배경 그림을 일월오봉도와 용비어천가 제2장으로 결정했다고 한다. 이런 금통위의 결정을 환영한다.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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