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를 적시고 북으로 내달린 형산강은 경주 안강에 이르러 동북으로 방향을 바꿔 포항으로 흘러간다. 안강평야를 재원으로 안강에 양동마을이 들어섰다. 형산강 줄기에 들어선 제일의 조선마을이다. 하회와 더불어 우리나라 최고의 씨족마을이라는 소리를 듣는다.
▲ 양동마을 안골 정경 서백당이 있는 안골 정경이다. 여러 겹 능선과 골짜기에 들어선 마을이라 한눈에 다 들어오지 않는다. 골마다 다른 풍경을 선사한다.
ⓒ 김정봉
두 성씨의 집성마을, 양동마을
양동마을 생김새는 독특하다. '勿'(물)자 모양으로 뻗은 설창산 네 줄기 능선과 골짜기 따라 집들이 들어섰다. 주로 양반계급의 종가나 기와집들은 지대가 높은 곳에 들어섰고 일반 민가나 외거노비의 초가집들은 골짜기 낮은 곳에 자리 잡았다.
여기까지 양동마을 중에 북촌에 해당하고 설창산 앞산 성주산 줄기에 남촌이 형성되어 있다. 앞산, 뒷산, 산등성, 골짜기 가리지 않고 산주름 따라 집들이 꽉 들어찬 엄청난 마을이다. 마을을 구석구석 다 둘러볼라치면 몇날 며칠을 여기서 보내야 한다.
▲ 양동마을 정경 낙선당에서 수졸당뒷동산 쪽을 바라다본 정경이다. 골짜기를 비집고 초가집이, 능선을 타고 기와집들이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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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의 생성과정은 마을 생김새보다 더 복잡하다. 양동마을은 월성손씨와 여강이씨, 두 성씨의 씨족마을이다. 고려말 여강이씨 이광호가 양동에 살고 있었는데 그의 손자사위 유복하가 처가에 들어와 살게 되었다. 이어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월성손씨 손소(1433-1484)가 유복하의 딸에게 '장가들어' 처가의 재산을 물려받고 눌러앉았다.
다시 이광호의 5대손인 이번(1463-1500)이 손소의 딸에게 '장가들어' 양동마을에 뿌리를 내려 두 성씨가 양동마을에 세거하기 시작하였다. 조선중기까지 결혼풍습은 '시집가기'보다는 '장가들기'여서 처가마을에 정착하여 뿌리를 내리는 것은 하나 이상히 볼 필요는 없다.
이후 손씨집안에서는 손소의 둘째아들 우재 손중돈(1463-1529)을, 여강이씨 집안에서는 이번의 장남 회재 이언적(1491-1553)이라는 걸출한 인물을 배출하였다. 우재는 회재의 외삼촌으로 아버지를 일찍 여의인 회재에게는 스승이나 다름없었지만 인물로는 우열을 가리기 어려운 난 인물이었다. 우재와 회재 이후 두 집안의 후손들이 벌고 벌어 양동마을에서 양대 문벌을 형성하였다.
두 집안의 집짓기 경쟁
한마을에 두 집안이 몰려 살다보니 서로 협동하고 혼맥을 맺는가 하면 두 집안 사이에 라이벌의식이 있어 경쟁하기도 하였다. 이는 집짓기경쟁으로 나타났다.
손씨집안 집들로 종갓집 서백당이 있고 살림집으로 관가정과 낙선당이 있으며 정자로 수운정과 서당 안락정이 있다. 이씨집안의 주요 집들로 종갓집 무첨당, 살림집으로 향단, 수졸당고택, 이향정고택, 두곡고택, 근암고택, 상춘헌고택이 있으며 서당으로 강학당과 심수정 정자가 있다.
▲ 서백당 안골에 입향조 손소가 지은 월성손씨 종가다. 조선 초에 지어진 몇 안 되는 집이다. 우재와 회재가 이 집에서 태어났다. 군더더기 없는 정갈한 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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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첨당 여강이씨 종가의 큰 사랑채 격의 별당이다. 조선중기의 집으로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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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집안의 경쟁 심리는 집 짓는 시기에도 영향을 미쳤다. 먼저 손씨집안 손소는 1458년 마을 제일 깊숙한 안골 언덕에 대종가 서백당(書百堂)을 지었다. 이어 이씨집안은 서백당 구릉너머 물봉골 동쪽언덕에 무첨당(無?堂)을 지어 이씨집안의 종가로 삼았다.
마을에 들어오자마자 보이는 동산이 물봉동산으로 물봉동산 자락에 두 집안의 인물 우재와 회재는 관가정(觀稼亭)과 향단(香壇)을 지었다. 두 종가에 이어 지은 살림집이다. 관가정은 우재가 분가하여 살던 집이다. 향단은 1540년대에 회재가 짓고 동생 이언괄에게 물려줘 자신을 대신해 어머니를 모시게 하였다. 두 집은 양동마을 살림집의 백미로 뽑힌다.
건축가 김봉렬 교수는 관가정은 장식이 거의 없이 단순하면서도 정제된 아름다움이 있다며 예술적 사조로는 고전주의적 건축물이라 했고 향단은 화려하고 개성이 넘치는 낭만주의 건축물로 조선시대 살림집 중에 독창성이 가장 뛰어나다고 하였다. 아닌 게 아니라 비탈면에 들어선 향단은 만개한 연꽃처럼 화려하여 마을 어디에서나 눈에 잘 띈다.
▲ 향단 마을 어귀 비탈에 지어 마을 어디에서나 눈에 잘 띈다. 과시적이며 개성이 넘치고 독창적이고 화려한 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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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단을 지을 즈음 손씨집안은 1540년경 서백당 옆에 낙선당(樂善堂) 고택을 지었다. 손소의 셋째아들 손숙돈이 분가하며 지은 집이다. 천석꾼 집답지 않게 평대문에 기단을 낮게 한 겸손한 집으로 양동마을에서 제일 고졸한 맛이 난다.
이에 대해 이씨집안은 17, 18세기에 봇물의 물살처럼 빠르게 살림집을 선보였다. 1616년 안골서쪽 언덕에 수졸당고택을 짓고 1695년에 이향정고택, 1730년에 상춘헌고택, 1733년경에 두곡고택, 1780년경에 근암고택, 1840년 사호당고택을 차례로 지었다.
경쟁에서 정자도 빼놓을 수 없다. 이씨집안이 1560년경 마을에서 제일 큰 심수정을 짓자 손씨집안은 1580년 우재의 손자 손엽이 마을 북쪽 끝 으슥한 곳에 수운정을 지었다. 두 집안의 학습과 교육에 대한 열정 또한 무시할 수 없다. 성주산 자락에 손씨집안은 1776년 안락정을 짓고 이씨집안은 백년 뒤 1870년경 강학당을 지어 두 가문의 후손을 양성하였다.
월성손씨 집안의 절제된 굴뚝
손씨집안 굴뚝은 한옥조형의 근간을 이루는 은둔과 겸손, 배려의 고전적 원리가 지배한 절제된 굴뚝이 많다. 관가정 사랑채 굴뚝은 그 중 하나다. 기단을 자세히 보면 시커멓게 그을린 여러 개 구멍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아궁이와 굴뚝이다. 굴뚝 중에 아궁이와 굴뚝이 같은 쪽에 나란하게 있는 되돈고래 굴뚝이다. 청백리 집주인의 품성에 어울리는 절제된 굴뚝이다.
되돈고래 굴뚝은 수운정에도 있다. 수운정 정면 아래에 아궁이에 비해 그리 크지 않은 굴뚝이 숨은 듯 붙어 있다. 수운정은 수운청허(水雲淸虛)에서 왔다. 잡된 생각이나 욕심을 버려 마음이 맑고 깨끗하다는 뜻이다. 수운정 뒤꼍 토방에 있는 수키와 두 개를 포개 만든 굴뚝은 수운청허의 마음 그대로다.
▲ 수운정 굴뚝 수운정 뒤꼍은 자잘한 멋이 있다. 그 중 하나가 수키와 두 개를 포개 만든 거북머리 닮은 굴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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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백당 굴뚝 담에 딱 달라붙어 있어 굴뚝이 잘 보이지 않는다. 이집에서는 군더더기 취급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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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씨집안은 굴뚝을 감추는데도 일가견이 있다. 굴뚝을 감쪽같이 담에 붙여놓아 정말 찾기 어렵다. 집주인이 '짓궂게' 보일 정도였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서백당 집에 굴뚝은 그저 군더더기에 불과했나 보다.
낙선당 굴뚝은 손씨집안 굴뚝이라도 좀 다르다. 원리원칙에 순종하여 절제를 하였지만 개성이 넘친다. 눈에 거슬리지 않은 평대문 아래에 연노랑 굴뚝이 있다. 양쪽 연구(煙口)가 살짝 튀어나와 사람을 보고 눈만 깜박거릴 뿐 달려들지 않는 순한 개 모양 굴뚝이다.
▲ 낙선당 굴뚝 평대문에 어울리는 순한 개 모양의 굴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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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강이씨 집안의 독창적 굴뚝
여강이씨 굴뚝은 과시적이거나 독창적이다. 우선 두곡고택 마루 밑에 있는 '쌍굴뚝'은 파격이다. 향단을 지은 선조의 낭만적 사고를 이어 받았는지 집주인은 미적 감성을 발휘하여 독창적인 굴뚝을 만들었다. 여기저기 다녀보았어도 이런 종류의 굴뚝은 처음 보는 것이다.
▲ 두곡고택 굴뚝 마루 밑에 숨겨 놓았지만 이 고택의 굴뚝은 개성이 강한 쌍굴뚝이다. 향단을 지은 낭만적 사고가 후손으로 이어진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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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암고택 사랑채굴뚝은 시선을 사로잡는다. 이집 사랑채는 보기 드물게 안채 담 밖에 떨어져 있다. 이는 집주인의 남녀유별 생활관이 작용된 결과로 보인다. 집주인의 두둑한 배포를 과시하며 사랑채 한가운데 곧게 서 있는 굴뚝은 이곳이 남성공간임을 세상에 밝히고 있다.
무첨당 굴뚝도 평범해 뵈지 않는다. 대충 마무리 하지 않고 항아리로 연가(煙家)를 만들어 멋을 냈다. 향단 굴뚝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서 있는 위치가 기가 막히다. 독창적이고 과시적이며 화려함을 추구한 향단에 어울리게 남보란 듯이 굴뚝을 향단 맨 위 후원언덕에 세웠다.
▲ 근암고택 사랑채굴뚝 전체적으로 집은 소박하나 사랑채굴뚝은 대단히 과시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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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향단굴뚝 검박함과 거리 멀고 과시적이며 독창적인 향단에 어울리게 숨기지 않고 굴뚝을 후원 언덕에 세워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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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집안의 굴뚝은 남의 눈을 의식하느냐, 안 하느냐의 차이랄까, 손씨 집안은 남의 눈을 의식하여 원리원칙을 중시하고 굴뚝을 만들어도 절제하고 야단스럽지 않게 만든 반면, 이씨 집안은 대체적으로 과시적이면서 독창적이며 개성 있게 만들었다.
[산청=뉴시스] 산청군청 제23회 산청한방약초축제 전통무명베짜기 *재판매 및 DB 금지 *재판매 및 DB 금지
[산청=뉴시스] 서희원 기자 = 경남 산청군은 제24회 산청한방약초축제 단위 행사로 전통무명베짜기 재현 공연을 개최한다고 27일 밝혔다.
㈔산청무명베짜기 보존회(대표 박동영)가 주관하는 이번 행사는 오는 10월3일 오후 4시30분 동의보감촌에 마련된 축제 메인무대에서 진행되며, 공연은 ‘베틀노래’, ‘물레노래’ 등 노동요와 목화솜으로 무명베짜기를 하는 전 과정을 재현한다.
고려 말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목화 재배에 성공한 산청군은 소중한 문화유산인 무명베짜기 직조기술을 보존하고 전승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특히 국가유산 사적지인 단성면 목면시배유지는 고려시대 학자이자 문신인 삼우당 문익점 선생이 목화 씨앗을 붓통에 넣어와 장인 정천익과 함께 우리나라에서 처음 목화를 재배한 곳이다.
[산청=뉴시스] 산청군청 제23회 산청한방약초축제 전통무명베짜기 *재판매 및 DB 금지 *재판매 및 DB 금지
권순혁 산청군 문화체육과장은 “이번 공연이 의류생활 문화에 혁신을 가져온 전통무명베짜기 과정을 복원하고 재현해 무명베짜기 기능을 보존하고 목화의 고장 산청을 널리 알리는 기회가 될 것”이라며 “사라져 가는 조상들의 지혜와 전통문화를 직접 보고 즐길 수 있는 특별한 자리에 많은 관심과 참여 바란다”고 말했다.
이번에 복원한 문화재는 부르봉가의 역사를 기록한 파스텔 초상화 18점이다. 18세기 프랑스 미술에 주로 사용된 파란색 종이 위에 그려졌다는 공통점이 있으며 '데빠쌍'이라 불리는 방식으로 표구됐다. 데빠상은 작품을 보여주는 창과 작품을 고정하는 부분으로 이루어진다.
김 복원가는 "양쪽을 고정할 수 있도록 지탱할 종이에 문경외발식 전통한지가 선택됐다"며 "로렌스 케룩스 현 복원실장과 아리안드 라 샤펠 응용연구담당관이 전통한지를 활용해 복원할 수 있도록 준비했다"며 "접착제는 루브르박물관이 개밝한 'MK40T'라고 불리는 전분 성분의 접착제를 사용했다"고 설명했다.
복원에 사용한 문경 외발식 전통한지는 국가무형문화재 한지장 보유자 지정을 앞둔 문경의 김삼식 한지장과 그의 후계자 김춘호 한지 전수 조교가 만들었다.
김민중 복원가는 복원 과정에서 전통한지의 배송이 가장 어려웠다고 밝혔다. 그는 "프랑스에서 전통한지를 보관할 공간이 없어서 대량주문이 불가능한 상황"이라며 "전통한지를 주문한 다음에 코로나 때문에 배송까지 너무 오래 기다려야 하는 과정이 힘들었다"고 설명했다.
마지막으로 김 복원가는 "루브르 박물관 복원팀이 전통한지로 복원한 결과에 완전한 만족감을 나타냈다"며 "앞으로도 루브르 박물관 소장품의 보존 작업에 전통한지를 사용할 계획"이라고도 말했다.
어린이 지식정보책을 만드는 일은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전달되는 내용도 정확해야 하지만, 무엇보다도 독자의 관심과 호기심을 생생하게 일깨울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많은 지식과 정보를 싣고 있어도 자유로운 상상력을 억누르는 책이라면, 차라리 만들지 않는 편이 낫다.
〈숫자 3의 비밀〉은 우리 문화와 의식에 깊이 스며들어 있는 '3'이라는 숫자의 의미를 찾아 떠나는 여행이다. 여행은 건국신화인 단군 이야기에서 시작된다. 하느님의 아들 환웅이 하늘의 보물 셋과 세 신, 삼천 명의 부하를 이끌고 세상으로 내려온다. 곰은 쑥과 마늘을 먹으며 동굴 안에서 삼칠일을 견딘 다음, 여인이 되어 환웅과 결혼하고 단군을 낳는다.
우리 조상들은 아기를 낳으면 밥과 미역국과 물을 세 그릇씩 차려 놓고 세 번에 걸쳐 삼신할머니에게 기도를 올렸다. 강원도에서는 풍년과 안녕을 비는 제사 때 성황지신, 토지지신, 여역지신을 한자리에 모셨다. 옛이야기나 생활 속에서도 3이라는 숫자는 의미심장하다. 까치는 자기 몸을 던져 종을 세 번 울려서 새끼를 살려준 사람에게 은혜를 갚고, 여우에게 홀린 선비를 구한 삼족구는 다리가 셋 달린 개다. 아들이나 딸이 여럿일 경우 주인공은 으레 셋째이며, 장례 풍습도 3이라는 숫자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조상들이 그토록 3을 중요시한 것은, 이것이 남자를 뜻하는 수 1과 여자를 뜻하는 수 2를 합한 완전한 수여서이다. 세상의 이치를 음양의 원리로 이해한 셈이다.
만만찮은 내용을 참 다양하고 재미있게 꾸렸다. 구수한 입말 투로 들려주는 이야기도 감칠맛 나지만, 상징적인 의미를 해학적으로 풀어낸 그림도 일품이다. 이에 못지않게 마음을 끄는 것은 책의 편집이다. 표지와 본문, 심지어 면지에 이르기까지 세심한 정성과 주의가 느껴진다.
붉은 비단에 비단실로 수놓은 팔보 문양이 화려하면서도 품위 있다. 법륜(바퀴살) 모양을 중심으로 법라(소라), 보산(양산), 보병(꽃병) 등의 보물들이 추상 기법으로 새겨져 상상력을 자극한다.
불교 의식에 사용되는 여덟 가지 길상의 상징을 전통자수로 표현한 이정숙(63) 작가의 ‘팔보문’이다. ‘팔보문’은 다음달 9일까지 서울 중구 롯데호텔갤러리에서 열리는 이 작가 개인전의 대표작이다. 고증과 도안 기획하는 데 1년, 염색하고 수놓는데 1년이 걸렸다. 이 작가는 “우리나라는 예부터 이웃나라의 문화를 우리 고유의 것으로 재창조하는 우수성을 지녔다”며 “우리 불교가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나, 팔보 문양을 어떻게 더 우리 것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고민하면서 작업했다”고 했다.
이정숙 작가의 개인전에 공개된 '팔보문'. 가운데 법륜(바퀴살) 문양을 넣고 나머지 문양들을 여의두 모양으로 새겼다. 이정숙 작가 제공
이정숙 작가 개인전에 출품된 궁중혼례용 자수보자기. 정제된 문양의 도안 위에 천연염료로 물들인 다채로운 색실을 사용해 고아한 기품이 느껴진다. 이정숙 작가 제공
이번 개인전은 내년 4월 프랑스 유네스코 본부 전시장에서 열릴 전시를 앞두고 국내에서 먼저 작품을 선보이는 자리다. 전시에는 병풍, 불교자수, 보자기, 흉배, 장신구 등 25여점이 공개된다. 박소화 롯데호텔갤러리 큐레이터는 “입구는 큰 병풍 작품으로 시선을 끌었고 이어 화려한 복식 자수를 배치해 섬세한 기법들을 보여주고자 했다”고 전했다. 왕세자, 문무백관이 입는 관복에 장식하던 표장인 흉배는 전통의 미를 유지하면서 색과 형태에 작가만의 독창적인 해석을 넣었다.
이정숙 작가의 개인전에 출품된 '웅비흉배'. 색과 형태에 작가만의 독창적인 해석이 돋보인다. 이정숙 작가 제공
삼국시대 이전부터 의복, 마구 등 생활용품의 형태로 이어지던 자수는 현대적인 감각과 결합해 국제적인 예술이 됐다. “장인의 면모에 예술성까지 두루 갖춘 행위”로 평가 받는다는 것이다. 이 작가는 “우리나라는 장인이라 하면 못 배우고 우직한 이미지로 폄하하는 경향이 있는데, 해외에서의 인식과 달라 안타까울 때가 많다”고 했다.
중국, 일본의 동양자수와 구분되는 한국 전통자수만의 우월성이 높은 평가를 받는다. 동양자수는 푼사(고치를 켠 그대로 꼬지 않은 명주실)로 사물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지만, 전통자수는 꼰사(푼사를 여러 가닥 꼬아서 만든 실)를 이용해 굵기에 따라 입체감 있게 표현하며 주로 상징적인 이미지를 묘사한다.
이 작가는 “꼰사는 500년 유지되는 푼사 작품보다 두 배 이상 수명이 길어진다”면서 “서양자수보다 기법이 많고 실생활에서도, 궁중에서도 다채롭게 쓰였던 독보적인 예술”이라고 설명했다.
이 작가는 2014년 프랑스 앙드레말로 문화협회에서 명장 칭호를 수여받았고, 독일 네덜란드 프랑스 터키 미국 등 다수의 국제 전시를 열었다. 2014년 방한한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박근혜 전 대통령이 선물한 ‘화문수 자수 보자기’를 제작한 작가로도 유명하다. 유네스코 전시 외에도 내년 독일 베를린 자유대학, 미국 샌프란시스코 동양박물관 등 국제 전시가 예정돼 있다.
이 작가는 “전통자수는 단순한 공예품이 아니라 우리의 문화유산이자 하나의 예술”이라고 말했다. 그는 “문화의 형태로 해외에 전파돼야 유산으로 남을 텐데 물려받으려는 이들이 없어 힘든 상황”이라며 “(해외 전시가) 전통자수와 보자기를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하는 데 초석이 되길 바란다”고 전했다.
문화재청은 “온돌은 혹한의 환경에 적응하고 대처해온 한국인의 창의성이 발현된 문화이면서 만주식 바닥 난방과는 구별되는 고유한 주거기술·생활을 보여준다”며 “그 가치가 높아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을 예고했다”고 16일 밝혔다.
한반도 고유의 난방 방식인 온돌문화는 그 역사가 2000여년 이상에 이르는 것으로 평가받는다.
불을 때는 아궁이에서 부터 방바닥의 난방 과정, 연기가 나오는 굴뚝에 이르기까지 온돌의 구조와 난방 원리를 표현한 이미지. 문화재청 제공.
한반도 전역에서 기원전 3세기~1세기로 추정되는 원시적 온돌 유적들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근래 온돌 문화는 청동기 시대를 거쳐 점차 부뚜막식 화덕과 연도(연기가 빠져나가는 통로)가 설치되는 원시적 형태의 난방 방식에서 기원한 것으로 보인다.
문화재청은 “서양 벽난로와 달리 온돌은 바닥 난방이 특징”이라며 “주거 공간 내부에 연기를 발생시키지 않으면서도 오랫동안 따뜻함을 쥬지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온돌문화는 한국을 대표하는 주거 요소이자 총체적인 주거문화로 오늘까지도 전승, 재창조되고 있다”고 덧붙였다.
문화재청은 ‘온돌문화’도 ‘아리랑’(129호), ‘제다’(130호), ‘씨름’(131호), ‘해녀’(132호), ‘김치 담그기’(133호) 처럼 특정 보유자나 보유단체는 인정하지 않을 방침이다. ‘온돌문화’의 국가무형문화재 지정 여부는 30일 동안의 지정 예고기간에 여론 등을 수렴하고 무형문화재위원회 심의를 거쳐 최종 확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