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세계문화유산]

대한민국의 세계유산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No. 등록명 소재지 등록년도 등록기준 유네스코
지정번호
비고
1 석굴암과 불국사 경상북도 경주시 1995년 (ⅰ), (ⅳ) 736  
2 해인사 장경판전 경상남도 합천군 1995년 (ⅳ), (ⅵ) 737  
3 종묘    서울특별시 종로구 1995년 (ⅳ) 738  
4 창덕궁  서울특별시 종로구  1997년 (ⅱ), (ⅲ), (ⅳ) 816  
5 화성 경기도 수원시 1997년 (ⅱ), (ⅲ) 817  
6 경주역사유적지구 경상북도 경주시 2000년 (ⅱ), (ⅲ) 976
7 고창 · 화순 · 강화의 고인돌 유적 전라북도 고창군
전라남도 화순군
인천광역시 강화군
2000년 (ⅲ) 977  
8 조선왕릉 서울특별시
경기도
강원특별자치도
2009년 (ⅲ), (ⅳ), (ⅵ) 1319  
9 한국의 역사마을 : 하회와 양동 경상북도 안동시
경상북도 경주시
2010년 (ⅲ), (ⅳ) 1324  
10 남한산성 경기도 광주시 2014년 (ⅱ), (ⅳ) 1439  
11 백제역사유적지구 충청남도 공주시
충청남도 부여군
전라북도 익산시
2015년 (ⅱ), (ⅲ) 1477 공주시 부여군 익산시
12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
경상남도 양산시
경상북도 영주시
경상북도 안동시
충청북도 보은군
충청남도 공주시
전라남도 순천시
전라남도 해남군
2018년 (ⅲ) 1562  
13 한국의 서원 경상북도 영주시
경상남도 함양군
경상북도 경주시
경상북도 안동시
전라남도 장성군
대구광역시 달성군
전라북도 정읍시
충청남도 논산시
2019년 (ⅲ) 1498  
14 가야고분군
경상남도 김해시
경상남도 함안군
경상남도 합천군
경상북도 고령군
경상남도 고성군
전라북도 남원시
경상남도 창녕군
2023년 (ⅲ) 1666

 

출처; 대한민국의 세계유산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창덕궁]

국가문화유산포털 | 한국의 세계유산 (heritage.go.kr)

창덕궁

 

창덕궁은 조선왕조 제3대 태종 5년(1405) 경복궁의 이궁으로 지어진 궁궐이며 창건시 창덕궁의 정전인 인정전, 편전인 선정전, 침전인 희정당, 대조전 등 중요 전각이 완성되었다. 그 뒤 태종 12년(1412)에는 돈화문이 건립 되었고 세조 9년(1463)에는 약 6만2천평이던 후원을 넓혀 15만여평의 규모로 궁의 경역을 크게 확장하였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선조 40년(1607)에 중건하기 시작하여 광해군 5년(1613)에 공사가 끝났으나 다시 1623년의 인조반정때 인정전을 제외한 대부분의 전각이 소실되었다가 인조 25년(1647)에 복구되었다. 그 후에도 여러 번 화재가 있었으며, 1917년에 대조전 과 희정당 일곽이 소실되어 1920년에 경복궁의 교태전·강녕전 등 많은 건물을 철거하여 창덕궁으로 이건하였다.

창덕궁은 1610년 광해군때 정궁으로 사용한 후 부터 1868년 고종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까지 258년 동안 역대 제왕이 정사를 보살펴 온 법궁이었다. 창덕궁 안에는 가장 오래된 궁궐 정문인 돈화문, 신하들의 하례식이나 외국사신의 접견장소로 쓰이던 인정전, 국가의 정사를 논하던 선정전 등의 치조공간이 있으며, 왕과 왕후 및 왕가 일족이 거처하는 희정당, 대조전 등의 침전공간 외에 연회, 산책, 학문을 할 수 있는 매우 넓은 공간을 후원으로 조성하였다.

정전 공간의 건축은 왕의 권위를 상징하여 높게 하였고, 침전건축은 정전보다 낮고 간결하며, 위락공간인 후원에는 자연지형을 위압하지 않도록 작은 정자각을 많이 세웠다.

건물배치에 있어 정궁인 경복궁, 행궁인 창경궁과 경희궁에서는 정문으로부터 정전, 편전, 침전 등이 일직선상에 대칭으로 배치되어 궁궐의 위엄성이 강조된 데 반하여, 창덕궁에서는 정문인 돈화문은 정남향이고, 궁안에 들어 금천교가 동향으로 진입되어 있으며 다시 북쪽으로 인정전, 선정전 등 정전이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편전과 침전은 모두 정전의 동쪽에 전개되는 등 건물배치가 여러개의 축으로 이루어져 있다.

오늘날 자연스런 산세에 따라 자연지형을 크게 변형시키지 않고 산세에 의지하여 인위적인 건물이 자연의 수림속에 포근히 자리를 잡도록한 배치는 자연과 인간이 만들어낸 완전한 건축의 표상이다. 또한, 왕들의 휴식처로 사용되던 후원은 300년이 넘은 거목과 연못, 정자 등 조원시설이 자연과 조화를 이루도록 함으로써 건축사적으로 또 조경사적 측면에서 빼놓을 수 없는 귀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후원은 태종 5년(1405) 창덕궁을 창건할 때 후원으로 조성하였으며, 창경궁과도 통하도록 하였다.

창덕궁 후원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전통 조원 시설로서 자연적인 지형에다 꽃과 나무를 심고 못을 파서 아름답고 조화있게 건물을 배치하였다.

대부분의 정자는 임진왜란때 소실되었고 지금 남아 있는 정자와 전각들은 인조 원년(1623)이후 개수·증축된 것이다. 이 곳에는 각종 희귀한 수목이 우거져 있으며, 많은 건물과 연못 등이 있어 왕과 왕비들은 이곳에서 여가를 즐기고 심신을 수양하거나 학문을 닦고 연회를 베풀었다.

창덕궁은 조선시대의 전통건축으로 자연경관을 배경으로 한 건축과 조경이 고도의 조화를 표출하고 있으며, 후원은 동양조경의 정수를 감상할 수 있는 세계적인 조형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는 특징이 있다.

창덕궁의 역사에 대한 기록은 「조선왕조실록」, 「궁궐지」, 「창덕궁조영의궤」, 「동궐도」 등에 기록되어 있다. 특히 1830년경에 그린 「동궐도(국보 제249호)」가 창덕궁의 건물배치와 건물형태를 그림으로 전하고 있으며, 궁궐사와 궁궐건축을 연구 고증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창덕궁은 사적 제122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으며 돈화문(보물 제383호), 인정문(보물 제813호), 인정전(국보 제225호), 대조전(보물 제816호), 구선원전(보물 제817호), 선정전(보물 제814호), 희정당(보물 제815호), 향나무(천연기념물 제194호), 다래나무(천연기념물 제251호)등이 지정되었다. 창덕궁은 1997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세계유산적 가치

동아시아 궁전 건축사에 있어 비정형적 조형미를 간직한 대표적 궁으로 주변 자연환경과의 완벽한 조화와 배치가 탁월하다

등재기준 : 세계문화유산기준(Ⅱ), (Ⅲ), (Ⅳ)
  • (Ⅱ) 일정한 시간에 걸쳐 혹은 세계의 한 문화권내에서 건축, 기념물조각, 정원 및 조경디자인, 관련예술 또는 인간정주 등의 결과로서 일어난 발전사항들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유산
  • (Ⅲ) 독특하거나 지극히 희귀하거나 혹은 아주 오래된 유산
  • (Ⅳ) 가장 특징적인 사례의 건축양식으로서 중요한 문화적, 사회적, 예술적, 과학적, 기술적 혹은 산업의 발전을 대표하는 양식

 

박상현 기자기자 페이지

문화재청, 11월 공개 이후 내년 3월 정식개방

순종이 앉았던 의자에 새겨진 매

(서울=연합뉴스) 홍해인 기자 = 8일 오후 서울 종로구 와룡동 창덕궁 희정당 내부에서 조선 마지막 왕 순종이 앉았던 의자에 날개를 펼친 매가 새겨져 있다. 2018.11.8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천장에 매달린 샹들리에를 보면 얼마나 공들여 만들었는지 느껴집니다. 일부 부품은 수입했어도 제작은 모두 국내에서 했습니다. 용이나 기쁠 희(喜) 문양이 그 증거입니다."

그동안 일반에 공개하지 않던 창덕궁 희정당(熙政堂) 내부가 처음으로 개방된 8일, 전각에서 가장 넓은 접견실에서 만난 신지혜 아름지기 팀장은 "희정당과 대조전 권역에 현대 조명시설 231기가 있다"며 이같이 설명했다.

보물 제815호인 희정당은 선정전(宣政殿)과 대조전(大造殿) 사이에 있는 건물로, 대조전과 함께 왕과 왕비가 생활하는 내전 영역에 속한다.

본래 명칭은 숭문당이었으나 연산군 2년(1496) '밝은 정사를 펼친다'는 의미를 지닌 희정당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용도도 왕이 잠을 자는 침전(寢殿)에서 평상시 머무는 편전(便殿)으로 변경됐다.

희정당과 대조전은 1917년 화재로 소실됐고, 경복궁 강녕전과 교태전을 각각 옮겨 1920년 재건했다. 이 과정에서 희정당에 서양 생활양식과 물품을 적용해 전통과 현대가 어우러지는 공간이 됐다.

단적인 예가 순종이 자동차를 타고 내리기 쉽도록 마련한 현관. 건물 창호는 한지가 아니라 유리창으로 마감했고, 내부에는 다양한 전등을 달았다.

창덕궁 희정당의 근대식 유리창

(서울=연합뉴스) 홍해인 기자 = 8일 오후 서울 종로구 와룡동 창덕궁 희정당에서 시민들이 내부 시범관람을 하고 있다. 2018.11.8

문화재청은 금단의 영역이던 희정당 내부를 문화재지킴이 업체인 효성, 아름지기 도움으로 일부 정비한 뒤 11월 한 달간 시범 개방하기로 했다.

신 팀장은 "희정당은 계획 단계부터 근대적 성격을 띠도록 설계했다"며 "전기, 수도, 난방, 화장실 모두 서양식"이라고 강조했다.

현관에 올라 희정당으로 이어지는 ㅁ자 회랑을 따라 시계 반대 방향으로 발걸음으로 옮기면 비서들이 근무하는 찬시실(贊侍室)이 있고, 모서리 지점에 화장실이 보인다.

창덕궁 희정당 내부의 화장실

(서울=연합뉴스) 홍해인 기자 = 8일 오후 서울 종로구 와룡동 창덕궁 희정당에서 시민들의 내부 시범관람이 실시됐다. 사진은 이날 공개된 희정당 내부 화장실 모습. 2018.11.8

 

화장실에는 수세식 변기가 있고, 세면대 옆에는 1908년 런던에서 제작한 보일러를 설치했다. 화장실 옆 작은 공간은 칸이 나뉘었는데, 칸마다 푸른색 문양이 들어간 화려한 변기가 하나씩 있다.

화장실에서 접견실로 이어지는 복도에는 대기실을 뒀는데, 창에는 커튼을 달았고 바닥은 나무를 짜 맞췄다.

접견실 옆은 순종 침실과 사무 공간이 있으나 아직 정비가 완료되지 않았다. 침실 앞 복도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뚫은 구멍이 있는데, 라디에이터를 놓았던 자리라고 신 팀장은 설명했다.

희정당 관람 백미인 접견실에는 벽면 높은 곳에 해강(海岡) 김규진(1868∼1933)이 그린 '총석정절경도'(叢石亭絶景圖)와 '금강산만물초승경도'(金剛山萬物肖勝景圖) 모사도가 걸렸다.

국립고궁박물관이 작년 12월 전시에서 공개한 두 그림은 가로 약 8.8m, 세로 약 2m인 대형 벽화로 비단에 그린 뒤 종이에 배접했다. 2015년까지 희정당에 있다가 보존처리를 위해 떼어냈다.

창덕궁 관계자는 "김규진 그림은 마지막 궁중 장식화로, 순종이 국권을 빼앗긴 상황에서도 조선인에게 그림을 그리도록 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이달 30일까지 창덕궁 희정당 내부 시범관람

(서울=연합뉴스) 홍해인 기자 = 8일 오후 서울 종로구 와룡동 창덕궁 희정당에서 시민들이 내부 시범관람을 하고 있다. 2018.11.8
hihong@yna.co.kr

 

붉은색 카펫이 깔린 접견실에는 19세기 말∼20세기 초에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서양식 가구가 지금도 있다. 노란색 의자에는 대한제국 상징인 오얏꽃 문양을 새겼고, 매로 보이는 동물 조각도 확인된다.

신 팀장은 "전등은 모두 수작업으로 세척했다"며 "전구는 대부분 1970∼1980년대 교체됐고, 대조전 샹들리에에서 1920년대 전구를 하나 찾았으나 필라멘트가 끊어져 불이 켜지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희정당 시범 개방은 30일까지 목∼토요일에 하루 두 차례 진행하며, 관람권은 매진됐다. 문화재청은 내년 3월부터 희정당 내부를 정식 개방할 방침이다.

창덕궁 관계자는 "시범 개방에서 관람객이 제시하는 의견을 참조해 차근차근 고증과 복원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창덕궁 희정당 전등과 문양

(서울=연합뉴스) 홍해인 기자 = 8일 오후 서울 종로구 와룡동 창덕궁 희정당 내부에 설치된 전등과 천장 문양. 2018.11.8
hihong@yna.co.kr

psh59@yna.co.kr

 

 

입력 :2018-04-04 23:22ㅣ 수정 : 2018-04-05 02:01

고궁의 절정… 경치를 잠시 빌리다 | 서울신문 (seoul.co.kr)

왕의 시선으로 보는 특별한 ‘고궁의 봄’

새봄이 되면 고궁마다 봄맞이 행사를 엽니다. 행사는 대개 금지된 영역의 문을 여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창덕궁 낙선재 후원의 쪽문을 열고, 경복궁 경회루로 오르는 계단의 문도 활짝 엽니다. 이런 행사들의 핵심은 왕의 눈높이에서 궁궐을 돌아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바야흐로 고궁들의 화양연화가 시작됐습니다. 다 돌아볼 수는 없더라도, 한 곳쯤은 찾아 물오른 봄 풍경을 만끽하는 건 어떨까 싶습니다.

▲ 한정당 담장에서 까치발을 하고 본 낙선재 후원 풍경. 매화와 수양 벚꽃이 흐드러진 고궁의 봄 풍경과 고풍스러운 전각들을 한눈에 담을 수 있는 특급 전망 포인트다.

▲ 낙선재의 포도 문양 손잡이.

▲ 화계 위 쪽문에서 본 낙선재 후원.

▲ 낙선재 정문인 장락문. 편액은 흥선대원군의 친필이다. 멀리 뒤의 정자는 상량정이다.

●계단식 화단·꽃담… 창덕궁 낙선재의 백미 ‘뒤란’

낙선재는 조선의 24대 임금 헌종이 1847년 서재 겸 휴식 공간으로 지은 건물이다. 후궁인 경빈 김씨를 위해 지은 석복헌과 순조의 정비인 순원왕후가 머물던 수강재도 딸려 있다. 석복헌은 단청이 없다. 소박하고 단아하다. 호리병, 포도 등 다산을 기원하는 문양도 건물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이맘때 낙선재 구역의 백미는 뒤란이다. 매화가 흐드러진 화계(계단식 화단)와 각종 무늬로 치장한 꽃담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뒤란에서 눈여겨볼 것은 괴석이다. 화강암 받침대에 특이하게 생긴 돌을 받쳐 놓았다. 받침대 중 하나엔 소영주(小瀛洲)라고 씌어 있다. 영주는 신선 세계다. 그러니 받침대의 주장은 이 공간이 곧 선경이라는 것일 터다.

뒤란의 위는 야트막한 산자락이다. 낙선재 구역에 딸린 전용 후원이다. 평소에는 출입이 금지된 영역이다. 바로 이곳에 발을 딛는 것이 특별 관람의 핵심이다. 취운정에서 작은 쪽문을 오르면 곧 한정당이다. 건물 주변엔 담장이 둘러쳐 있다. 이 담장을 그냥 지나쳐선 안 된다. 반드시 까치발을 하고 봐야 한다. 그래야 담장 너머로 펼쳐지는 완벽한 진경산수화를 눈에 담을 수 있다.
●인왕·백악·낙산·남산 한눈에 볼 수 있는 ‘상량정’

작은 쪽문을 하나 더 지나면 제법 너른 터에 육각형 정자와 긴 창고형 건물이 나온다. 정자는 ‘상량정’이라 적힌 편액을 달고 있다. 한데 편액이 매우 작다. 어른이 배냇저고리를 입은 것처럼 어색하다. 글씨를 왼쪽부터 쓴 것도 그렇다. 상량정의 옛 이름은 평원루다. 상량정 위로 오르면 인왕과 백악, 낙산, 남산 등 한양을 에워싼 4개의 산을 한눈에 담을 수 있다고 한다. 지금은 출입이 금지돼 있어 이 모습을 볼 수 없다. 아쉽기 짝이 없다. 기껏해야 열댓 개 정도의 계단만 오르면 천하의 절경을 눈에 담을 수 있는데 말이다. 상량정 옆의 묵직한 건물은 예전 장서각이다. 여기서 무수히 많은 한글소설이 발견됐다고 한다. 이를 따로 ‘낙선재본’이라 부른다.

상량정 옆 담장에 새겨진 무늬가 인상적이다. 부(富) 자와 수(壽) 자를 형상화한 문양이 반복적으로 이어진다. 담장을 지나는 문은 만월문이다. 보름달처럼 둥근 형태다. 문 자체도 예쁘지만, 안에 담기는 풍경은 더 예쁘다. 이제 막 꽃잎을 연 돌배나무와 창덕궁 전각의 기와지붕, 그리고 멀리 백악의 봉긋한 봉우리가 함께 담긴다.

▲ 창덕궁 인정전 천장에 매달린 전등. 전환기 궁궐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 인정전 유리창의 섬세한 문양들.

▲ 인정전 어좌와 천장의 봉황 조각을 한 화면에 담았다. 임금 앞에 부복한 신하의 자세라야 이 같은 압도적인 공간감을 만끽할 수 있다.

▲ 왕들이 손때가 묻어 있는 어좌 앞 조형물.

●왕이 정사 살피던 ‘인정전’ 내부 관람도 감동

인정전(국보 225호) 내부 관람도 낙선재 못지않은 감동을 준다. 인정전은 왕이 정사를 살피던 공간이다. 20분 남짓 왕이 된 기분을 낼 수 있다. 인정전에 들면 여러 시각에서 살펴보길 권한다. 왕뿐 아니라 신하, 내시 등 자리를 바꿀 때마다 사뭇 다른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인정전은 밖에서 보면 단층이지만 안에서 보면 중층 구조다. 그 압도적인 공간감은 신하의 자리에 서서 볼 때 최대치를 이룬다. 사실 가장 재미없는 것은 왕의 시선이다. 왕이 앉은 자리가 곧 풍경이기 때문이다. 화려한 어좌와 일월오봉병, 건물을 떠받치고 있는 거대한 금강송 기둥, 천장의 화려한 봉황 조각 등을 한눈에 담을 수 있는 곳은 외려 말석의 신하 자리다. 전등, 유리창, 커튼 등 근대적 요소가 가미된 전환기의 궁궐 모습도 꼼꼼하게 살펴보는 게 좋겠다.

궐내각사 특별 관람 프로그램도 진행된다. 궐내각사는 궁궐 안에서 활동하는 관리들의 활동 공간을 복원한 곳이다. 상시 개방되지만 해설사의 설명이 곁들여지면 감동이 한결 깊어진다.

●풍경을 액자처럼 보는 ‘낙양각’… 경복궁 경회루의 백미

경복궁에선 경회루 개방 행사가 준비됐다. 경회루는 연못 가운데 섬을 만들고 그 위에 지어 올린 누각이다. 경회루 2층은 바닥의 높이가 각각 다르다. 중앙부가 가장 높고, 가운데 공간이 한 뼘 남짓 낮다. 바깥 공간 역시 또 한 뼘 정도 낮다. 높이가 다른 경계 구역엔 분합문을 달았다. 문을 내리면 폐쇄된 공간이 되고 열면 터진 마루가 된다. 참고할 것 하나. ‘인증샷’ 찍은 뒤 휴대전화를 잘 챙겨야 한다. 오래된 건물이다 보니 마루 틈으로 소지품이 빠지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고 한다. 빠진 소지품은 ‘이번 생’에선 찾을 방도가 없다. 아주 먼 훗날 경회루를 중수할 때나 가능하다.

낙양각은 경회루의 백미로 꼽힌다. 기둥과 기둥 사이에 독특한 문양을 새겨 바깥 풍경이 액자처럼 보이게 했다. 옛사람들은 한옥의 창을 단순히 창으로만 보지 않았다. 풍경을 담는 액자로 봤다. 이처럼 밖의 풍경을 집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을 차경이라고 한다. 말 그대로 경치를 빌린다는 뜻이다. 소유하지 않고 잠시 빌려서 즐길 뿐이다. 이 덕에 붓질 한 번 하지 않고도 계절과 시간의 변화에 따라 수백 장의 풍경화를 내걸 수 있다.

낙양각은 네 방향 모두 절경을 품고 있다. 특히 남쪽 방향이 인상적이다. 근정전과 수정전 등의 전각들이 낙양각을 채운다. 수정전 옆은 잔디밭이다. 잔디밭은 ‘궁궐의 눈물’과 같은 것이다. 오래전 빼곡했던 궐내각사가 사라진 흔적이기 때문이다.

▲ 성정각 담장에 핀 홍매화. 무너지고 다시 세워진 주변 건물과 달리 한자리에서 400년을 살아 냈다.

 

●덕수궁 내 유일하게 단청 없는 건물 ‘석어당’

덕수궁에선 석어당 개방이 봄 행사의 백미다. 석어당은 덕수궁 안에서 유일하게 단청이 칠해져 있지 않은 건물이다. 유일한 2층 목조건물이기도 하다. 원래는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이 살던 집이었는데 임진왜란 뒤 선조가 15년을 지내면서 덕수궁의 모태가 됐다. 병에 걸린 선조를 위해 허준이 분주히 오가고, 선조가 승하하고, 대청마루에 앉은 인목대비가 뜨락에 광해군을 꿇린 채 호되게 꾸짖었던 곳이 바로 여기다.

석어당 2층에서 굽어보는 살구꽃 핀 풍경이 아름답다. 문을 열면 사방의 풍경이 쏟아져 들어온다. 곧바로 여성 참가자들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오고, 줄곧 무게만 잡던 중년 남성들의 입가에도 배시시 미소가 걸린다.

글 사진 손원천 기자 angler@seoul.co.kr

 

 

입력 2008-02-28 02:55업데이트 2009-09-25 14:09

사진실-김봉렬-윤정섭 교수 건축학적 비밀 풀어

 

“창덕궁 연경당(演慶堂)은 살림집이 아니라 치밀하게 구성된 조선시대의 대표적 왕실 전용 극장이었다.”

그동안 베일에 가려져 있던 창덕궁 연경당(1827년 창건)의 건축적 비밀이 풀렸다.

전통 공연예술사학자인 사진실 중앙대 교수, 건축사학자인 김봉렬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무대미술 연구자인 윤정섭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는 최근 ‘전통예술무대 양식화 심포지엄’에 발표한 논문 ‘순조 대(純祖 代) 연경당의 복원 연구’를 통해 연경당의 특징과 구조에 관해 새로운 연구 성과를 내놓았다. 연경당의 건축적 특징과 구조를 체계적으로 밝혀낸 것으로, 연경당의 실체를 둘러싼 논란이 마무리될 것으로 보인다.

○ 연경당에 얽힌 비밀들

연경당은 순조 때인 1827년 효명세자(1809∼1830)가 창덕궁 후원에 창건한 건물. 이듬해 어머니인 순원왕후의 생일 축하 진작(進爵·경축 행사 때 왕과 왕비에게 술잔을 올리는 의식) 행사와 각종 정재(呈才·궁중 행사용 춤과 노래) 공연이 거행됐다. 경축(慶祝)행사를 연행(演行)한다는 의미에서 연경(演慶)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19세기 각종 의식을 거행했던 곳이지만 연경당이 궁궐 건물로는 예외적으로 살림집 형식을 취하고 있다는 점에서 전문가들의 의문을 자아냈다. ‘조선시대 궁중 연회는 모두 정전(正殿)과 같은 공식 집무 공간에서 열렸는데 왜 하필 살림집에서 궁중 연회가 열렸을까’ 하는 의문이었다.

“왕과 왕비가 신하들의 생활을 체험하기 위해 사대부 주택을 모방해 지었다” “대군이나 공주의 궁궐 밖 거처를 옮겨놓은 것”이라는 추측까지 나왔다. 특히 국보 249호 ‘동궐도’(1820년대 제작된 창덕궁 창경궁 그림)에 나오는 연경당(ㄷ자형)과 지금의 연경당이 서로 달라 연구자들은 더욱 혼란스러웠다. 최근 연경당에서 궁중 연회 재현 행사가 열리기도 했지만 왜 이곳에서 연회가 열려야 하는지 등 그 실체에 대한 의문은 여전했다.

○ 연경당은 완벽한 구조의 전용 극장

사 교수 등 세 명의 연구자는 ‘동궐도’와 의궤(각종 왕실 행사를 그림으로 표현한 책) 등 19세기 자료와 현존 연경당의 구조를 검토해 연경당의 건축적 특성, 극장으로서의 구조, 무대 미술과 공간 운영의 원리를 밝혀냈다. 그 결론은 ‘ㄷ자 본채는 객석이 되고 마당은 크기 조절이 가능한 무대로 활용되는 전용 극장 건축’이라는 것. 사 교수 등은 다음과 같은 근거를 제시했다.

△동궐도 속 연경당의 ㄷ자형 구조=ㄷ자형 구조는 기(氣)가 빠져나간다 하여 전통적으로 기피했던 구조로, 살림집에 어울리지 않는다. 연경당은 살림집일 수 없다. △마당의 박석(薄石·넓적한 돌)과 단의 높이가 다른 두 개의 문=무대를 설치하기에 좋고 두 개의 문은 행사에 잘 어울리는 구조다. △남쪽의 조립식 담장=필요할 때 대규모의 행사장으로 사용할 수 있다. △ㄷ자 본채의 좌우 건물=반투명 차일과 주렴(珠簾·발)을 설치해 무대 조명으로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기능을 한다.

이런 건축적 특징으로 보면 연경당은 ‘객석(ㄷ자형 본채)이 무대(마당)를 3면에서 감싸는’ 구조로, 공연에 적합한 공간이다. 이들은 이번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창건 당시 연경당의 건물과 그곳에서 열리는 공연 장면을 영상물로 제작했다.

사 교수는 “순조 대의 연경당(동궐도 속의 연경당)은 어느 시점에서 현존 연경당으로 고쳐지면서 살림집 형태로 바뀌었다”며 “그러나 순조 대 연경당의 극장 구조가 일부 보존되어 있어 복원에 참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광표 기자 kplee@donga.com

 

[종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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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묘

 

종묘는 조선왕조 역대 왕과 왕비 및 추존된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유교사당으로서 가장 정제되고 장엄한 건축물 중의 하나이다. 종묘는 태조 3년(1394) 10월 조선 왕조가 한양으로 도읍을 옮긴 그해 12월에 착공하여 이듬해 9월에 완공하였으며, 곧이어 개성으로부터 태조의 4대조인 목조, 익조, 도조, 환조의 신주를 모셨다.

56,503평의 경내에는 종묘정전을 비롯하여 별묘인 영녕전과 전사청, 재실, 향대청 및 공신당, 칠사당 등의 건물이 있다. 정전은 처음에 태실 7칸, 좌우에 딸린 방이 2칸이었으나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때 불타버려 광해군 즉위년(1608)에 다시 고쳐 짓고, 그 후 영조 와 헌종때 증축하여 현재 태실 19칸으로 되어있다.

영녕전은 세종 3년(1421)에 창건하여 처음에는 태실 4칸, 동서에 곁방 각 1칸씩으로 6칸의 규모이었는데, 임진왜란 때 불타버려 광해군 즉위년에 10칸의 규모로 지었으며 그 후 계속 증축하여 현재 16칸으로 되어 있다.

현재 정전에는 19실에 49위, 영녕전에는 16실에 34위의 신위가 모셔져 있고, 정전 뜰앞에 있는 공신당에는 조선시대 공신 83위가 모셔져 있다.

조선시대에는 정전에서 매년 춘하추동과 섣달에 대제를 지냈고, 영녕전에는 매년 춘추와 섣달에 제향일을 따로 정하여 제례를 지냈으나 현재는 전주이씨 대동종약원에서 매년 5월 첫째 일요일을 정하여 종묘제례라는 제향의식을 거행하고 있으며 제사드릴때 연주하는 기악과 노래와 무용을 포함하는 종묘제례악이 거행되고 있다.

종묘의 주전인 정전은 건평이 1,270㎡로서 동 시대의 단일 목조 건축물로는 세계에서도 그 규모가 가장 큰 건축물로 추정되며, 종묘의 건축 양식은 궁전이나 불사의 건축이 화려하고 장식적인데 반하여 유교의 검소한 기품에 따라 건립된 특수목적용 건축물이다.

종묘는 한국의 일반 건축물과 같이 개별적으로 비대칭구조를 하고 있지만 전체적으로 대칭을 이루고 있으며 의례공간의 위계질서를 반영하여 정전과 영녕전의 기단과 처마, 지붕의 높이, 기둥의 굵기를 그 위계에 따라 달리 하였다.

중국 주나라에서 시작된 종묘제도는 7대까지 모시는 제도로 시작되어 명나라 때에 와서 9묘 제도로 확대 되었는데 중국의 태묘에서는 태실이 9실에 불과하나 한국의 종묘만은 태실이 19칸인 매우 독특한 제도를 가지고 있으며, 정면이 매우 길고 수평성이 강조된 독특한 형식의 건물모습은 종묘제도의 발생지인 중국과도 다른 건축양식으로 서양건축에서는 전혀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세계적으로 희귀한 건축유형이다.

종묘제례는 종묘인 의례공간과 함께 의례절차, 의례음식과 제기, 악기와 의장물, 의례음악과 의례무용 등이 조화되어 있으며, 1462년에 정형화된 형태를 500년이상 거의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현재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종합적 의례문화라고 할 수 있다.

종묘제례와 종묘제례악에 나타난 의례 절차, 음악, 무용 등은 중국의 고대문명을 바탕으로 형성된 하, 은, 주 시대의 의례문화에 기원을 두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동양의 고대문화의 특징과 의의를 거의 그대로 보존하고 있기 때문에 동양 고대문화를 연구하기 위한 귀중한 자료로 활용될 수 있는 문화유산 중의 하나이다.

종묘는 조선시대의 전통건물로서 일반건축이 아닌 신전건축임에도 불구하고 건축의 보편적 가치를 지니고 있어 많은 현대 건축가들의 연구대상이 되고 있으며 종묘의 뛰어난 건축적 가치는 동양의 파르테논이라 칭하여지고 있을 만큼 건축사적 가치가 크다.

종묘는 사적 제125호로 지정 보존되고 있으며 소장 문화재로 정전(국보 제227호), 영녕전(보물 제821호), 종묘제례악(국가무형문화재 제1호), 종묘제례(국가무형문화재 제56호)가 있으며,1995년 12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세계유산적 가치

종묘는 제왕을 기리는 유교사당의 표본으로서 16세기 이래로 원형이 보존되고 있으며, 세계적으로 독특한 건축양식을 지닌 의례공간이다. 종묘에서는 의례와 음악과 무용이 잘 조화된 전통의식과 행사가 이어지고 있다

등재기준 : 세계문화유산기준 (Ⅳ)
  • (Ⅳ) 가장 특징적인 사례의 건축양식으로서 중요한 문화적, 사회적, 예술적, 과학적, 기술적 혹은 산업의 발전을 대표하는 양식

 

박상현 기자기자 페이지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담장 기초현황 조사 보고서 발간

종묘에 있는 60간지 중 하나인 '정사'

[문화재청 제공]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조선 임금과 왕비 신위를 모신 국가 사당인 종묘의 외곽 담장에 새겨진 60간지와 일왕 연호는 수리 시기로 추정된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종묘 담장에 남은 60간지는 모두 73개이고, 일왕 연호는 9개로 파악됐다.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는 이 같은 내용을 담은 '종묘 외곽 담장 기초현황 자료조사' 보고서를 발간했다고 28일 밝혔다.

60간지와 일왕 연호는 종묘 북쪽을 제외하고, 동쪽·남쪽·서쪽 담장에 있다.

그중 동쪽 담장에서는 신사(辛巳) 6개, 임자(壬子) 4개, 을묘(乙卯) 4개, 정사(丁巳) 3개, 신해(辛亥) 3개 등 15가지 명문 33개가 확인됐다.

건축사사무소 강희재는 보고서에서 "확실하게 식별되는 명문이 있는 반면, 일부 글자는 마모되거나 훼손됐다"며 "표기 형식이나 위치에는 특별한 규칙이 없다"고 설명했다.

60간지를 수리 시기로 보는 근거는 승정원일기 기록이다. 승정원일기 1879년 8월 4일 기사에는 "종묘 대문의 서쪽 담장과 동영(東營) 사이에 있는 담장이 이미 완전히 축조됐으니 정식에 따라 연조(年條)를 새긴 후"라는 내용이 있다.

종묘 담장에 새겨진 일왕 연호

[문화재청 제공]

 

일왕 연호는 모두 '쇼와'(昭和)다. 서쪽에 있는 8개는 '소화 팔년 삼월 개축'(昭和 八年 三月 改築)이라고 표기했다. 쇼와 8년은 1933년이다. 동쪽에 남은 명문 1개는 쇼와 7년, 즉 1932년에 작성됐다.

보고서는 "조선시대에는 종묘 담장을 수리·보수하면서 해당 연도를 새기는 것이 법식으로 정해져 있었다"며 "현재 종묘 담장에 기재된 60간지는 조선시대 후기, 일왕 연호는 1932년 율곡로 개발 당시 창덕궁과 연결된 담장을 허물고 개축할 때 새긴 듯하다"고 추정했다.

보고서에는 60간지와 일왕 연호에 관련된 역사 기록, 승정원일기와 종묘일지에서 찾은 기록, 종묘의궤의 종묘전도, 춘관통고에 수록된 금의종묘영녕전전도, 조선고적도보에 실린 종묘 배치도와 내부 사진, 신문기사 등을 담았다.

종묘관리소는 이번 조사에서 확인한 사항을 알리기 위해 안내판을 추가로 설치하고, 해설사 안내 지침서를 수정할 방침이다.

문화재청은 보고서를 국립고궁박물관, 국회도서관 등에 배포하고, 누리집(cha.go.kr)을 통해서도 공개할 계획이다.

psh59@yna.co.kr

 

 

[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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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화성

 

화성은 조선왕조 제22대 정조대왕이 선왕인 영조의 둘째왕자로 세자에 책봉되었으나 당쟁에 휘말려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뒤주속에서 생을 마감한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침을 양주 배봉산에서 조선 최대의 명당인 수원의 화산으로 천봉하고 화산부근에 있던 읍치를 수원의 팔달산아래 지금의 위치로 옮기면서 축성되었다.

화성은 정조의 효심이 축성의 근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당쟁에 의한 당파정치 근절과 강력한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한 원대한 정치적 포부가 담긴 정치구상의 중심지로 지어진 것이며 수도 남쪽의 국방요새로 활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화성은 규장각 문신 정약용이 동서양의 기술서를 참고하여 만든 「성화주략(1793년)」을 지침서로 하여, 재상을 지낸 영중추부사 채제공의 총괄아래 조심태의 지휘로 1794년 1월에 착공에 들어가 1796년 9월에 완공하였다. 축성시에 거중기, 녹로 등 신기재를 특수하게 고안·사용하여 장대한 석재 등을 옮기며 쌓는데 이용하였다. 화성 축성과 함께 부속시설물로 화성행궁, 중포사, 내포사, 사직단 등 많은 시설물을 건립하였으나 전란으로 소멸되고 현재 화성행궁의 일부인 낙남헌만 남아있다.

화성은 축조이후 일제 강점기를 지나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성곽의 일부가 파손·손실되었으나, 축성 후 발간된 "화성성역의궤(1801년)"에 의거하여 대부분 축성 당시 모습대로 보수·복원(1975~1979년)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성의 둘레는 5,744m, 면적은 130ha로 동쪽지형은 평지를 이루고 서쪽은 팔달산에 걸쳐 있는 평산성의 형태로 성의 시설물은 문루 4, 수문 2, 공심돈 3, 장대 2, 노대 2, 포(鋪)루 5, 포(咆)루 5, 각루 4, 암문 5, 봉돈 1, 적대 4, 치성 9, 은구 2등 총 48개의 시설물로 일곽을 이루고 있으나 이 중 수해와 전란으로 7개 시설물(수문 1, 공심돈 1, 암문 1, 적대 2, 은구 2)이 소멸되고 4개 시설물이 현존하고 있다.

화성은 축성시의 성곽이 거의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을 뿐 아니라, 북수문(화홍문)을 통해 흐르던 수원천이 현재에도 그대로 흐르고 있고, 팔달문과 장안문, 화성행궁과 창룡문을 잇는 가로망이 현재에도 도시 내부 가로망 구성의 주요 골격을 유지하고 있는 등 200년전 성의 골격이 그대로 현존하고 있다. 축성의 동기가 군사적 목적보다는 정치·경제적 측면과 부모에 대한 효심으로 성곽자체가 "효"사상이라는 동양의 철학을 담고 있어 문화적 가치외에 정신적, 철학적 가치를 가지는 성으로 이와 관련된 문화재가 잘 보존되어 있다.

성곽의 전돌, 건조물의 기와 등이 독특한 방법으로 제작되어 있어 현재의 기술로 이를 재현하기 어려워 보수시 문제점으로 나타나고 있으나 계속 연구해야 할 과제로 남아 있다.

화성은 중국, 일본 등지에서 찾아볼 수 없는 평산성의 형태로 군사적 방어기능과 상업적 기능을 함께 보유하고 있으며 시설의 기능이 가장 과학적이고 합리적이며, 실용적인 구조로 되어 있는 동양 성곽의 백미라 할 수 있다.

성벽은 외측만 쌓아올리고 내측은 자연지세를 이용해 흙을 돋우어 메우는 외축내탁의 축성술로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성곽을 만들었으며, 또한 화성은 철학적 논쟁 대신에 백성의 현실생활속에서 학문의 실천과제를 찾으려고 노력한 실학사상의 영향으로 벽돌과 돌의 교축, 현안·누조의 고안, 거중기의 발명, 목재와 벽돌의 조화를 이룬 축성방법 등은 동양성곽 축성술의 결정체로서 희대의 수작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당대학자들이 충분한 연구와 치밀한 계획에 의해 동서양 축성술을 집약하여 축성하였기 때문에 그 건축사적 의의가 매우 크다.

축성 후 1801년에 발간된 「화성성역의궤」에는 축성계획, 제도, 법식뿐 아니라 동원된 인력의 인적사항, 재료의 출처 및 용도, 예산 및 임금계산, 시공기계, 재료가공법, 공사일지 등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 성곽축성 등 건축사에 큰 발자취를 남기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기록으로서의 역사적 가치가 큰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화성은 사적 제3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으며 소장 문화재로 팔달문(보물 제402호), 화서문(보물 제403호), 장안문, 공심돈 등이 있다. 화성은 1997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세계유산적 가치

18세기에 완공된 짧은 역사의 유산이지만 동서양의 군사시설이론을 잘 배합시킨 독특한 성으로서 방어적 기능이 뛰어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약 6km에 달하는 성벽안에는 4개의 성문이 있으며 모든 건조물이 각기 모양과 디자인이 다른 다양성을 지니고 있다.

등재기준 : 세계문화유산기준(Ⅱ), (Ⅲ)
  • (Ⅱ) 일정한 시간에 걸쳐 혹은 세계의 한 문화권내에서 건축, 기념물조각, 정원 및 조경디자인, 관련예술 또는 인간정주 등의 결과로서 일어난 발전사항들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한유산
  • (Ⅲ) 독특하거나 지극히 희귀하거나 혹은 아주 오래된 유산

 

[해인사 장경판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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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 장경판전

 

해인사 장경판전은 13세기에 만들어진 세계적 문화유산인 고려 대장경판 8만여 장을 보존하는 보고로서 해인사의 현존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장경판전은 정면 15칸이나 되는 큰 규모의 두 건물을 남북으로 나란히 배치하였다. 장경판전 남쪽의 건물을 수다라장, 북쪽의 건물을 법보전이라 하며 동쪽과 서쪽에 작은 규모의 동·서사간판전이 있다.

건물을 간결한 방식으로 처리하여 판전으로서 필요로 하는 기능만을 충족시켰을 뿐 장식적 의장을 하지 않았으며, 전·후면 창호의 위치와 크기가 서로 다르다. 통풍의 원활, 방습의 효과, 실내 적정 온도의 유지, 판가의 진열 장치 등이 매우 과학적이며, 합리적으로 되어 있는 점은 대장경판이 지금까지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는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라고 평가받고 있다.

장경판전의 정확한 창건연대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조선 세조 3년(1457) 어명으로 판전 40여 칸을 중창하였고 성종 19년(1488) 학조대사가 왕실의 후원으로 30칸의 대장경 경각을 중건한 뒤 보안당이라 했다는 기록이 있다. 광해군 14년(1622)에 수다라장, 인조 2년(1624)에는 법보전을 중수하였다. 장경판전은 가야산 중턱의 해인사에 위치한 관계로 서기 1488년 조선 초기에 건립된 후 한번도 화재나 전란 등의 피해를 입지 않았으며, 보존 가치가 탁월한 팔만대장경이 고스란히 간직되어 있는 것은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다. 장경판전은 세계유일의 대장경판 보관용 건물이며, 해인사의 건축기법은 조선 초기의 전통적인 목조건축 양식을 보이는데 건물 자체의 아름다움은 물론, 건물 내 적당한 환기와 온도·습도조절 등의 기능을 자연적으로 해결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이 판전에는 81,258장의 대장경판이 보관되어 있다. 글자 수는 무려 5천2백만 자로 추정되는데 이들 글자 하나하나가 오자·탈자 없이 모두 고르고 정밀하다는 점에서 그 보존가치가 매우 크며, 현존 대장경 중에서도 가장 오랜 역사와 내용의 완벽함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지니고 있는 문화재이다.

대장경판은 고려 고종 때 대장도감에서 새긴 목판이다. 대장경은 경(經)·율(律)·논(論)의 삼장(三藏)으로서 불교경전의 총서를 가리키는 말이다. 일반적으로 해인사 대장경판은 고려시대에 판각되었기 때문에 고려대장경이라 하며 또한 판수가 8만여 판에 이르고 8만4천 법문을 수록했다 하여 8만대장경이라고도 한다.

고려 현종(1009~1031) 때 새긴 초조대장경은 몽고의 침입에 불타버려 다시 새겼다하여 재조대장경이라 일컫기도 한다. 초조대장경이 불타버리자 고려 고종 19년(1232)에 몽고의 침입을 불력으로 막기위하여 강화도로 수도를 옮기고 국가적인 차원에서 대장도감을 설치하여 대장경판을 다시 조각하기 시작하였다.

대장경판은 당초 경상남도 남해에서 판각하여 강화도 대장경판당으로 옮기고 보관하였으나 고려 말 왜구의 빈번한 침범으로 조선 태조 때인 1398년 현재의 해인사 장경판전에 옮겨 보관 중이다. 이 대장경판은 개태사의 승통인 수기(守其)가 북송관판과 거란본 및 우리의 초조대장경을 대조하여 오류를 바로잡은 대장경이다.

이규보가 지은 <대장각판군신기고문>에 보면 현종 2년(1011)에 거란병의 침입 때 대장경을 새겨 거란병이 물러갔음을 상고하고, 몽고의 침입으로 이 대장경판이 불타버려 다시 새기니 몽고의 침입을 불력으로 물리치게 하여 달라는 염원을 기록하고 있다. 대장경판은 고종 24년(1237)부터 35년(1248)까지 12년 동안 판각하였는데 준비기간을 합치면 모두 16년이란 기간이 걸려 완성 된 것이다.

해인사 장경판전은 국보로 지정 관리되고 있으며, 소장 문화재로서는 대장경판 81,258판(국보), 고려각판 2,725판(국보), 고려각판 110판(보물)이 있다. 이 중 해인사 장경판전은 1995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인정받은 해인사 장경판전의 가치는 다음과 같다.

ㅇ해인사 장경판전은 15세기 건축물로서 세계 유일의 대장경판 보관용 건물이며 보관용(유물 보호각) 목조건물로서는 가장 규모가 큰 건물의 하나로, 인류 역사상 중요한 문화적·사회적·예술적·과학적·기술적 발달 등을 대표하는 특징적인 유형으로서의 가치를 지님.
- 또한 건물의 건축기법은 조선 초기의 전통적인 목조건축 양식을 보이는데, 건물 자체의 아름다움은 물론 건물 배치와 규모의 적절성, 대장경판의 보존기능에 충실하게 설계되었음. 따라서 건물 내의 환기, 온습도 조절 등 자연 기상에 적응하도록 설계되어 500년 간 깨끗하고 안전하게 경판을 보존할 수 있었음.
- 해인사 장경판전 내의 대장경판은 초조대장경이 1232년 몽고침입으로 불타자 몽고군의 격퇴를 염원하며 제작한, 세계에서 가장 완벽하고 정확한 최고(最古)의 대장경이며 그 정확성과 우수성을 널리 인정받고 있음.

ㅇ해인사 장경판전은 뛰어난 역사적 중요성과 의의를 지닌 이념·신앙·사건 등과 관련된 유산으로서, 세계의 불교국가 중 인도나 중국 등의 국가에서조차 보존하지 못한 불전(佛典)을 온전하게 보존하기 위해 거국적으로 시대를 이어 정성껏 보존한 사례임.
- 해인사 장경판전에 봉안하고 있는 대장경판은 세계에서 가장 완벽하고 정확한 경판으로 한국 불교도들은 물론 세계의 불교도 및 학자들의 유명한 순례지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연구하고 지켜오고 있는 곳으로 기능하고 있음.
- 또한 해인사 대장경판은 고려왕조의 대몽항쟁 과정에서 제작된 것으로서, 당시 고려인들의 역사와 애국심, 신앙심의 결정체임.

세계유산적 가치

해인사 팔만대장경은 오랜 역사와 내용의 완벽함, 그리고 고도로 정교한 인쇄술의 극치를 엿볼 수 있는 세계 불교경전 중 가장 중요하고 완벽한 경전이며, 장경판전은 대장경의 부식을 방지하고 온전한 보관을 위해 15세기경에 건축된 건축물로 자연환경을 최대한 이용한 보존과학 소산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등재기준 : 세계문화유산기준 (Ⅳ), (Ⅵ)
  • (Ⅳ) 가장 특징적인 사례의 건축양식으로서 중요한 문화적, 사회적, 예술적, 과학적, 기술적 혹은 산업의 발전을 대표하는 양식
  • (Ⅵ) 역사적 중요성이나 함축성이 현저한 사상이나 신념, 사진이나 인물과 가장 중요한 연관이 있는 유산

 

[남한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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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남한산성은 극동아시아 여러 지역의 영향을 바탕으로 다양한 군사 방어 기술을 종합적으로 구현하고 있는 조선왕조의 비상시 임시 수도로서, 한국의 독립성 및 한국 역사상 다양한 종교·철학이 조화롭게 공존해온 가치를 상징하는 유산이다.

동 유산은 본성(한봉성과 봉함성을 포함)과 신남성(동서돈대)으로 구성된 연속유산으로 16세기에서 18세기에 이르는 기간 동안 동아시아 국가들간 축성술과 도시 계획이 상호 교류한 증거이다.

또한 7세기부터 19세기까지 축성술의 시대별 발달 단계와 무기 체계의 변화상을 잘 보여주며 지금까지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는 살아있는 유산으로서 가치를 보유한다.

남한산성은 서울의 중심부에서 동남쪽으로 25k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으며, 지형적으로 평균 고도 해발 480m 이상의 험준한 산세를 이용하여 방어력을 극대화한 곳이다. 남한산성은 둘레 12km에 이르며 중심 도시가 입지할 수 있을만큼 넓은 분지이기 때문에 백성과 함께 왕조가 대피할 수 있는 조선 왕실의 보장처였다.

남한산성은 7세기 초에 처음 만들어져 여러 차례 재건되었으며, 특히 17세기 청의 공격에 대비해 크게 중건된 바 있다. 남한산성은 중국과 일본의 영향을 수용하면서 서양식 무기 도입에 따른 성곽축조 기술의 변화를 종합한 군사 방어기술의 개념을 집대성하고 있다.

조선은 임진왜란(1592~1598)과 연이은 정묘호란, 병자호란 등 청과의 전쟁(1627-1637)등을 겪으며 일본의 아주치-모모야마 시대, 중국의 명나라, 청나라 시대와 광범위하게 상호 교류를 하게 되었다.

그 결과 새로운 화포와 무기에 효과적으로 대항하고 장기전을 수행할 수 있도록 산성을 지속적으로 증·개축을 하게 되었고. 이를 통해 남한산성은 16세기에서 18세기에 이르는 기간 동안 동아시아 국가들간 축성술과 도시 계획술을 종합적으로 구현하게 되었다.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인정받은 남한산성의 가치는 다음과 같다.

첫째, 남한산성은 16세기와 18세에 이르는 기간 동안 동아시아의 한국과 중국 일본 간에 산성 건축술이 상호 교류한 중요한 증거이다. 남한산성은 국제 전쟁을 통해 동아시아 무기 발달과 축성술이 상호 교류한 탁월한 증거로, 조선의 자주권과 독립성을 수호하기 위해 유사시의 임시수도로서 기능할 수 있도록 계획적으로 축조된 유일한 산성 도시이다.

둘째, 남한산성은 7세기부터 19세기까지 축성술의 시대별 발달 단계와 무기 체계의 변화상을 잘 보여준다. 남한산성은 험한 지형을 활용하여 성곽과 방어시설을 구축함으로써 7세기부터 19세기에 이르는 축성술의 시대별 발달단계를 잘 나타내고 있다.

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에 위치한 남한산성은 사적 제57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국가지정 문화재 2개(성곽, 남한산성 행궁), 경기도 지정문화재 6건(수어장대, 연무관, 숭렬전, 청량당, 현절사, 침괘정) 및 경기도 기념물 2건(망월사지, 개원사지)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총 면적은 36,447㎢로 성 안쪽이 2,317㎢(6%), 성 바깥쪽이 34,130㎢(94%)를 차지한다.

세계유산적 가치등재기준 : 세계문화유산기준 (Ⅱ), (Ⅳ)
  • (Ⅱ) 오랜 시간 동안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지역 내에서 일어난 건축, 기술, 기념비적 예술, 도시 계획 또는 조경 디자인의 발전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류를 보여주어야 한다.
  • (Ⅳ) 인류 역사에 있어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여야 한다.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

국가문화유산포털 | 한국의 세계유산 (heritage.go.kr)

산사, 한국의 산지 승원

사진출처-산사세계유산등재추진위원회

산사는 한반도 남쪽 지방에 위치한 7개 불교 산지 승원-통도사, 부석사, 봉정사, 법주사, 마곡사,선암사, 대흥사-으로 이루어져 있다. 7세기에서 9세기에 창건된 이들 7개 사찰은 신앙과 영적 수행, 승려 공동체 생활의 중심지로 한국 불교의 역사적인 전개를 보여주고 있다. 한국의 다양한 불교신앙이 산사의 경내에 수용되었으며, 이는 역사적인 구조물과 전각, 유물, 문서 등에 잘 남아있다. 사찰 운영에서 나타나는 자립성과 승려 교육, 한국 선불교의 특징인 영적 수행과 교리 학습의 공존 등의 지속적인 전통에서 한국 불교의 무형적, 역사적 측면을 확인할 수 있다. 이들 산사는 조선시대 억압과 전란으로 인한 손상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 신앙과 일상적인 종교적 실천의 살아있는 중심으로 남아있는 신성한 장소이다.

 

https://tv.kakao.com/v/v3a3b888lR8haqaVLlRhGtV@my

 

【 앵커멘트 】 천 년 넘게 우리 불교 문화를 지켜온 경남 통도사와 경북 부석사 등 우리나라의 산사 7곳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습니다. 이로써 우리나라는 불국사, 석굴암과 함께 13번째 세계유산을 보유하게 됐습니다. 정수정 기자입니다.

【 기자 】 경남 양산 영취산 자락에 자리잡은 통도사.

신라 선덕여왕때 창건됐다고 알려진 통도사는 부처의 진신사리가 봉인된 사찰로 유명합니다.

한국 건축의 백미로 꼽히는 '무량수전'이 있는 영주 부석사, 우리나라 유일한 5층 목조탑인 '팔상전'이 위치한 속리산 법주사까지.

 

한국의 산사는 길게는 1천4백년 전부터 산속에 자리잡고 수행과 포교 활동을 이어온 한반도 불교의 거점이었습니다.

1년 반의 심사 끝에 한국을 대표하는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에 등재됐습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7~9세기 창건 이후 현재까지의 지속성, 한국 불교의 깊은 역사성'이 세계유산 등재 기준인 탁월한 보편적 기준에 해당한다고 평가했습니다.

이번에 등재된 7곳은 경남 양산 통도사와 경북 영주 부석사, 충북 보은 법주사, 전남 해남 대흥사, 경북 안동 봉정사, 충남 공주 마곡사, 전남 순천 선암사입니다.

등재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21개 위원국 중 17개국이 공동 서명하고, 20개 위원국이 지지발언하며 만장일치로 확정됐습니다.

문화재청은 세계유산위원회가 산사의 종합 정비 계획과 관리 방안, 관광객에 대한 대책을 마련할 것을 권고한 만큼, 관리 인프라를 확충할 예정입니다.

MBN뉴스 정수정입니다.

화면제공 : 문화재청 영상편집 : 이우주

 

 

[한국의 서원]

국가문화유산포털 | 한국의 세계유산 (heritage.go.kr)

한국의 서원

‘한국의 서원’(16세기 중반부터 17세기 건립)은 조선시대 성리학 교육기관의 유형을 대표하는 9개 서원으로 이루어진 연속유산으로, 한국의 성리학과 연관된 문화적 전통에 대한 탁월한 증거이다.

소수서원, 남계서원, 옥산서원, 도산서원, 필암서원, 도동서원, 병산서원, 무성서원, 돈암서원 등 9개 서원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한국의 중부와 남부 여러 지역에 걸쳐 위치한다.

서원은 중국에서 도입되어 한국의 모든 측면에서 근간을 이루고 있는 성리학을 널리 보급한 성리학 교육기관으로서 탁월한 증거가 되는 유산이다.

서원의 향촌 지식인들은 학습에 정진할 수 있는 교육체계와 유형적 구조를 만들어냈다. 학습과 배향, 상호교류는 서원의 핵심적인 기능이었으며 이는 건물의 배치에 잘 드러나 있다. 서원은 그 지역 지식인들인 사림이 이끌었으며, 사림의 이해관계에 따라 향촌의 중심으로 발전하고 번성했다.

서원의 위치에 가장 크게 고려되는 요소는 선현과의 연관성이다. 두 번째 요소는 경관으로, 자연감상과 심신단련을 위해 산과 물이 가까운 곳에 위치한다. 서원에서 누마루 양식의 개방적인 건물은 그러한 경관과의 연결을 더욱 원활하게 한다. 학자들은 성리학 고전과 문학작품을 공부했으며, 우주를 이해하고 이상적인 인간이 되기 위해 노력했으며, 고인이 된 조선시대 성리학자들을 배향하고 강한 학문적 계보를 형성했다. 나아가 서원에 근거한 다양한 사회정치적 활동을 통해 성리학의 원칙을 널리 보급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세계유산적 가치

[<세계유산협약 이행을 위한 운영지침>에 따른 ‘탁월한 보편적 가치’]

등재기준 : 세계문화유산기준 (iii)
  • (iii) ‘한국의 서원’은 성리학과 관련된 한국의 문화적 전통의 탁월한 증거로 그 교육과 사회적 관습은 많은 부분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다. 서원은 중국에서 들어온 성리학이 한국의 여건에 맞게 변형되고 그 결과 그 기능과 배치, 건축적인 면에서 변화를 겪고 토착화되는 역사적 과정에 대한 특출한 증거이다.

 

[앵커]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한국의 서원이 보다 체계적으로 보존, 관리될 것으로 보입니다.

또 북한을 비롯한 중국, 일본 등 해외 서원들과의 교류를 통해 서원의 가치를 국내외에 알려나갈 계획입니다.

이하늬 기자입니다.

 

[리포트]

영주 소수서원 앞에 비석이 세워졌습니다.

소수서원을 비롯한 9개 서원이 국내 열 네 번째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됐음을 알리는 비석입니다.

지난 7월 등재 이후, 각 서원들은 늘어난 방문객들을 맞느라 분주한 날들을 보내고 있습니다.

[류준희/소수서원 도감 : "두배가량 늘었고, 무한히 기쁘게 생각합니다.앞으로 인성교육의 장이 되기를 바라는..."]

'한국의 서원은' 지난해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에 이은 국내 두 번째 연속유산입니다.

각 서원이 가진 고유의 특성은 살리면서 통합보존관리를 원활하게 수행하기 위해 정부는, 올해 안에 특별법을 제정합니다.

서원이 속한 9개 자치단체는 향후 조례 개정을 통해, 통합보존관리에 필요한 인력과 예산지원의 토대를 마련합니다.

등재되지 못한 국내 나머지 30여 개 서원은 물론, 개성 숭양서원, 평양 용곡서원 등 북한 서원에 대한 공동 조사와 학술교류도 추진합니다.

또 우리 서원의 모태인 중국 서원과 일본 서원과의 협력을 통해 서원 브랜드를 국내외에 알려나갈 계획입니다.

 

[이배용/'한국의 서원 통합보존관리단' 이사장 : "모니터링하고 보존.발전시켜서 인문학 가치의 영감을 주는 교육유산이 되도록..."]

영주 소수서원은 내년 5월까지 서원 등재기념 특별전을 엽니다.

다른 서원들도, 실경뮤지컬, 세대별 체험프로그램 등 대중적 인지도를 높일 각종 교육홍보사업들을 진행합니다.

KBS 뉴스 이하늬입니다.

이하늬 기자 (hanuy@kbs.co.kr)

 

 

1541년(중종 36년) 풍기군수 주세붕이 경북 영주에 세운 백운동서원. 9년 뒤인 1550년(명종 5년) 명종 임금이 ‘소수서원’이라 이름짓고 서적, 노비까지 하사한 사액서원이 되었다. 국내 최초의 서원이다.|문화재청 제공

 

“풍기군수 주세붕(1495~1554)이 안향의 옛집터에 사우(祠宇)를 세워 봄·가을에 제사지내고 이름을 백운동 서원이라 했다.” 1543년(중종 38년) 5월 22일 <중종실록>에 사관의 평을 빌려 언급된 ‘서원의 효시’ 기사이다.

주세붕이 성리학을 처음으로 도입한 대학자 안향(1243~1306)을 기리기 위해 안향의 집터에 서원을 세웠다는 것이다. <중중실록>은 “서원 좌우에 유생들이 거처하며 배우는 학교를 세웠고, 약간의 곡식을 저축하여 밑천은 간직하고 이자를 받아 운영했고, 고을 백성 중에 준수한 자가 모여 먹고 배우게 했다”고 부연설명했다. 이뿐이 아니라 터를 닦다가 우연히 발견한 구리 300근으로 서울에서 유교 경전 뿐 아니라 정주(程朱·송나라 유학자인 정호·정이 형제와 주자를 일컬음)의 서적까지 죄다 구입해서 장서각(도서관)에 두었다.

7년 뒤인 1550년(명종 5년) 2월 11일 명종 임금은 역시 풍기군수를 지낸 퇴계 이황(1501~1570)의 상주에 따라 ‘소수서원’이라는 이름을 손수 짓고 편액(액자)과 서적, 노비까지 하사했다. ‘소수(紹修)’는 주자의 백록동서원을 계승(紹)하여 닦는다(修)는 뜻이다. 소수서원(백운동서원)처럼 ‘국가의 공인’을 받은 서원을, 임금이 액자(額)를 내린(賜) 서원이라 해서 사액서원(賜額書院)이라 한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이 된 한국 문화유산. 문화유산 13곳과 자연유산 1곳이다. |문화재청 제공

 

■서원은 중국에서 시작됐지만…

한데 서원은 주세붕이 창안한 것은 아니었다. <명종실록>은 “주세붕은 주문공의 백록동 서원을 모방해서 서원을 만든 것”이라 했다. 주문공은 남송의 유학자 주자(1130~1200)를 지칭한다. 서원은 원래 중국 남당(937∼975) 연간의 인물인 이발(李渤)이 은거했던 강서성(江西省) 여산(廬山)의 백록동이라는 곳에 학궁(백록서원)을 창건하고 스승과 생도를 가르친 데서 유래됐다. 그러나 북송 시대(960~1127)까지도 성행하지 않아 오직 4곳이 남아있었다. 그러다 남송(1127∼1279) 연간에 남강태수가 된 주자가 남송 효종(재위 1162~1189)의 사액을 받아 병란으로 폐허가 된 백록서원을 중수하고, 강학에 힘썼다. 주자는 이곳에서 성리학의 기초를 닦은 주돈이(1017~1173)를 제사 지냈다. 주세붕의 백운동 서원은 바로 주자의 백록동 서원을 벤치마킹 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 대목에서 궁금증이 든다. 6일 아제르바이잔 바쿠에서 열린 제43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왜 서원의 원조라 할 수 있는 중국의 서원이 아닌 ‘한국의 서원’을 세계유산으로 등재했을까. 그렇지않아도 지난 5월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심사하는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가 ‘한국의 서원’에 대해 ‘등재 권고’를 결정하자 일부 언론은 중국내 민감한 여론을 전하기도 했다. 즉 “서원은 중국인이 가장 익숙한 곳이라며 중국 고대의 독특한 문화교육기구였다”(환구시보)는 것이다. 환구시보는 특히 “악록·백록동·숭양·응천 서원 등 중국에는 4대 서원이 있었으며 특히 청나라 말의 증국번(曾國藩·1811~1871), 좌종당(左宗棠·1812~1885) 등이 악록서원에서 공부했으니, 중국 근대사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비중이 컸다”고 전했다. 환구시보는 “서원은 당대 중엽에서 시작해 청나라 말까지 1000여 년 동안 이어지며 중국 사대부를 키운 곳”이라고 강조했다. 지난 2005년 11월에도 강릉 단오제가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으로 등재됐을 때도 중국에서는 “한국이 중국의 단오절을 빼앗아갔다”는 식의 여론이 등장하기도 했다.

퇴계 이황을 모신 도산서원의 의례. 이황은 최초의 서원인 소수서원의 사액을 주장하면서 “서원은 성균관이나 학당, 향교와 달리 인격을 은둔선비들이 학문을 도야하는 곳”이라고 밝혔다. |문화재청 제공

 

■서원의 교육목표는 과거합격이 아니었다

물론 한국의 서원이 중국의 서원을 벤치마킹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한국의 서원은 중국과 현저한 차별성을 지닌다. 단적인 예로 중국의 서원은 기본적으로 관료양성을 위한 준비기구의 성격이 강하다.

하지만 한국의 서원은 선비들이 모여 학문을 절차탁마하는 곳인 동시에 선현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일도 겸했다. 이것을 ‘존현양사(尊賢養士)’라 한다. 학업과 과거 합격이 주목적이었던 성균관이나 학당, 향교와 달리 서원은 그곳에 배향된 선현의 정신과 뜻을 되새겨 학문을 닦고, 자신의 인격을 도야하는 장소였다.

1550년(중종 5년) 백운동 서원(소수서원)의 사액을 처음 요청한 퇴계 이황의 상소를 보면 ‘한국 서원의 의미’를 알 수 있다. 이황은 “은거하며 뜻을 구하는 선비와, 도를 강론하며 학업을 익히는 사람들은 시끄러운 세상보다 한적인 들판이나 고요한 물가에서 선왕의 도를 노래하고 천하의 의리를 살피면서 덕과 인을 쌓고 익혔기 때문에 서원에서 공부하는 것”이라 했다.

“국학(성균관·학당)이나 향교 등은 사람이 많은 곳에 있어서 법령에 구애받고 다른 한편으로는 다른 일(과거)에 마음을 빼앗깁니다. 그런 점에서 선비가 학문을 도모하고자 할 때와 어진 이를 구할 때도 서원이 국학이나 향교보다 나을 것입니다.”

서원이 입시(과거)준비나 하는 곳이 아님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또 서원에서는 향촌의 풍속을 교화하고 이끌어가는 교두보가 되었고, 지침을 마련했다. 한편으로는 시대의 아픔을 고민하고 그 해결방안을 모색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예로 면암 최익현 선생(1833~1906)과 둔헌 임병찬 선생(1851~1916)이 을사늑약 이듬해인 1906년 6월 4일 항일의병을 일으킨 곳이 바로 무성서원(전북 태인)이었다.

■유네스코가 꼽은 ‘한국 서원’의 탁월한 보편적 가치

유네스코가 ‘한국의 서원’을 평가하면서 꼽은 등재기준, 즉 ‘탁월한 보편적 가치’(OUV·Outstanding Universal Value)는 크게 두가지다. 대상 유산인 9곳의 서원은 16세기 중반부터 17세기까지 조선시대 지방 지식인들이 세운 대표적인 사립 성리학 학교이다. 등재 기준 중 첫번째로 꼽히는 ‘OUV’는 대상 서원들이 성리학 가치에 부합되는 지식인을 양성했고, 지역의 대표 성리학자를 사표로 삼아 제향(제사를 지냄)했으며, 무엇보다 지역사회의 공론을 형성했다는 것이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이와 관련, “성리학자들은 서원에서 강학을 통해 성리학적 가치관으로 세계를 이해했고, 정기적인 제향으로 학파의 결집을 도모했으며 교류를 통해 성리학에 부합한 향촌 교화활동을 주도했다”고 평가했다.

두번째 ‘OUV’는 신청유산이 한국 서원 건축 유형의 탁월한 사례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16세기 서원들이 처음 생길 때부터 정형화한 건축유형은 후대의 서원 건축에 모델이 되었다. 즉 백운동서원(소수서원)이 안향의 옛 집터에 건립됐듯 서원은 제향인물의 연고지역에 자리잡았고, 성리학자의 전인교육에 적합한 환경을 선택했다.

여기에 제향과 강학, 휴식 공간으로 나뉜다. 제향공간은 사당을 중심으로 하며, 선현들을 위한 제사가 베풀어진다. 강학공간은 학습의 전당인 강당과 동·서재(기숙사)를 포함한 구역이다. 휴식 공간은 잠시 책상을 떠나 머리를 식히고 심신을 고요히 유지하는 수신의 영역이다.

각 공간은 지형과 경관을 적극적으로 이용해서 뚜렷한 건축전형을 완성했다. 입지를 고를 때부터 무척 신경썼다. 도산·병산·옥산서원 등의 경우 앞쪽에 맑고 깨끗한 계류와 긴 여울이 감싸고, 산봉우리들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으며, 언제라도 누각에 오르거나 창문만 열어도 아름다운 산수를 감상할 수 있는 곳에 자리잡고 있다. 서원의 입지 선정에 심신 수양의 환경을 첫손으로 꼽았음을 알 수 있다.

각 서원의 기본골격은 비슷했다. 사당과 강당, 동·소재와 내·외삼문, 전사청(제수를 준비하던 곳), 장서각(도서관) 등의 부속건물로 구성됐다. 강당이나 누각, 정자, 연못, 계류의 이름도 반드시 지었다. 그러나 허투루 짓지 않았다. 강당의 경우 성(誠), 중(中), 경(敬), 의(義), 인(仁), 예(禮), 덕(德), 도(道), 교(敎) 등 성리학의 핵심개념을 표방했고, 누각이나 정자는 연(蓮)이나 매(梅) 등 옛 성현이 사랑한 꽃이름이나 풍(風), 월(月), 산(山), 수(水)자 등이 포함된 이름이 많았다. 이것은 서원이 학문과 덕성의 터전인 동시에 본성을 보존하고 정서를 함양하는 장수(藏修)의 공간임을 일러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서원은 교육과 제향 외에도 장판각을 통해 책을 펴내고, 서적을 보관하는 도서관 역할을 했으며. 각 지방의 향약을 기준으로 미풍양속을 장려하고 윤리에 어긋나게 행동한 자를 교화하는 기능도 겸했다. 향풍(鄕風)이 문란한 자에게는 ‘훼가출향(毁家黜鄕)’의 벌칙을 가하기도 했다.

■순기능만이 아니었다

하지만 순기능만 발휘된게 아니었다. 주세붕이 백운동 서원(소수서원)을 연 이후 명종 연간(1545~1567)에만 17~18곳의 서원이 등장했고, 그중 사액서원은 4곳이나 됐다. 이후 정치주도권이 사림으로 넘어간 선조 연간(1567~1608)에만 60곳 이상이 생겼고, 그 중 22곳이 사액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사림의 집권과 함께 비롯된 붕당의 당파형성은 학연이 작용할 수밖에 없었다. 서원은 바로 그런 학연의 매개체였다. 각 당파는 당세의 확장을 위해 지방별로 서원을 세워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려 했다. 향촌사림으로서도 서원을 통해 중앙관료와 연결을 맺어 입신출세를 도모하고자 했다. 양자의 이해가 맞아 떨어졌으므로 서원이 급증할 수밖에 없었다. 현종(1659~1674) 때까지 106년간 193곳이 설립되었고 숙종(1674~1720) 때는 무려 130곳이 넘는 사액서원이 등장했다. 서원철폐론이 등장한 1741년(영조 17년) 당시에는 서원과, 서원의 역할까지 한 사우 등을 합해 1000곳(정확히 909곳)에 이르게 됐다.

■1000곳이 난립한 서원

그러니 서원의 순기능은 사라지고 역기능만 부각되었다. 이익(1681~1763)의 <성호사설>은 “서원이 각각 색깔을 정해 구별하고 당파를 모으고 다른 당을 공격하는 장소로 이용되고 있으며, 부역을 회피하는 자들이 서원의 명부에 이름을 올리고 있으니 그 폐단이 이루 말 할 수 없다”고 고발하고 있다.(‘인사문·서원’)

“조금만 명성이 있는 자는 반드시 서원을 세웠다. 벼슬이 높고 자손이 번성한 자는 그 유람한 곳과 부임했던 고을마다 향사하지 않는 곳이 없었다.”

이익은 특히 “한 사람을 위해 여러 곳의 서원을 세우는 것을 금했지만 권문세가의 집은 금하지 못했다”면서 법령의 문란함을 고발했다. 단적인 예로 우암 송시열(1607~1689)을 배향하는 전국의 서원(사우 포함)이 무려 44곳에 이르렀다. 다산 정약용(1762~1836)은 “100리 쯤 되는 작은 고을에 서원(사당 포함)이 수십곳에 이른다”면서 사원의 폐해를 낱낱이 고한다.

“한 가문의 부자와 형제를 효행이라 칭송하고 나라를 위한 전쟁에서 죽었다고 창찬한다. 이에따라 서원(사당 포함) 1곳에서 제사를 지내는 인물이 12~13명에 이르기도 한다.”

1871년(고종 8년) 3월20일(음력) 흥선대원군은 “백세토록 받들어야 할 충절 대의 제현을 기리는 47개 사액서원을 제외한 나머지 서원들의 현판을 떼라”(<고종실록>)는 내용의 서원철폐령을 내렸다.|문화재청 제공

정약용은 “심지어 자손이 번창하지 않는 개국 당시의 명신(名臣)을 자기 조상이라고 위조한 뒤 자랑스럽게 그 허위 조상을 기리는 서원(사당 포함)을 세우는 일도 비일비재하다”고 한탄했다.(<목민심서> ‘예전·제사’)

이 무슨 뜻인가. 원래 서원에 배향되는 인물은 뛰어난 유학자여야 한다. 그러나 이 원칙에서 벗어나 당쟁 중에 희생된 인물이라든가, 선정을 베푼 수령이라든가, 의리있는 유생이라든가, 자손이 귀해졌다는 이유로 배향되기도 했다.

■서원철폐령의 철퇴

우후죽순 남설(濫設)된 서원은 학문과 인격 도야의 전당이 아니라 당쟁논의의 소굴이 되었고, 선현을 존숭하는 제사의 일도 가문과 학파의 성세를 자랑하는 짓에 지나지 않게 됐다. 향촌의 교화를 담당하는 곳이 아니라 민폐의 본산이 됐으며, 세금과 부역 등을 면제하는 국가의 지원은 국가재정을 악화시키는 결과를 빚었다.

그러다보니 학문의 기능은 약화됐고, 이런저런 이유로 배향된 인물을 위헤 제사지내는 사우(사당)의 기능이 주로 강조됐다. 결국 서원과 사우가 혼동되었다. 이로써 서원 본래의 취지에 벗어나기에 사회적으로 비난을 받았다.

가면갈수록 서원무용론을 넘어 서원철폐론이 대두되었다. 1741년(영조 17년) 4월8일 ‘갑오년(1714년·숙종 40년) 이후에 건립된 서원과 사우·영당 등 모든 제향 사원을 철폐하는 조치’를 내린 데 이어 급기야 1871년(고종 8년) 3월20일(음력) “백세토록 받들어야 할 충절 대의 제현을 기리는 47개 사액서원을 제외한 나머지 서원들의 현판을 떼라”(<고종실록>)는 명을 하달한다. 이것이 유명한 흥선대원군(1820~1898)의 서원철폐령이다.

■‘완전성과 진정성’을 갖춘 세계유산

물론 한국의 서원이 남긴 폐해 역시 반드시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역사이다. 그러나 서원철폐령의 된서리 속에서도 살아남은 한국의 서원은 누가 뭐라해도 조선을 지탱해온 성리학 교육기관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그 중 16세기 중반~17세기까지 설립된 9개 서원은 성리학이 만개했던 조선 성리학 교육과 사회적 확산을 주도한 교육기관이자 유무형적이고 역사적인 독특성의 탁월한 증거이다. 성리학자들은 그들이 존경하는 지역의 인물을 제향함으로써 다음 세대에게 롤모델을 제시했고, 강학을 통해 학문을 계승했다. 그들은 교육에 필요한 기능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교육시스템과 물리적 시설을 완성했다. 또한 사회교화와 정치활동 등 각종 활동의 근거지로 활용하면서 성리학이 전 사회적으로 확산되는데 기여했다.

유네스코 세계위는 “신청유산은 한국의 성리학 발전과 서원유형의 정립과정을 증명하는 가장 중요하고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지닌 서원 9개로 구성됐다”면서 “각각의 유산이 하나의 온전한 서원으로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제향·강학·유식(휴식) 및 교류 공간과 주변경관이 완전한 모습으로 남아있다는 것이다.

유네스코는 또 16~17세기 건립된 신청유산들이 지금까지 원형을 거의 훼손하지 않고 보존·계승되었음을 인정했다. 특히 서원을 거쳐간 인물들이 남긴 전적이나 문집, 기문, 목판도 잘 보호·관리되고 있고, 제향의식도 창건당시의 모습을 계승하고 있다는 점을 꼽았다. 유네스코 세계위원회는 “세계유산이 반드시 갖춰야 할 요소인 완전성(integrity)과 진정성(authenticity)에 정확히 부합되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6일 아제르바이잔 바쿠에서 열린 제43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한국의 서원’이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자 정재숙 문화재청장 비롯한 관계자들이 기뻐하고 있다.|문화재청 제공

 

■종합관리방안 마련이 필요,

‘한국의 서원’은 2015년 제출한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신청서가 심사기구인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이코모스·ICOMOS)의 반려의견으로 철회되고, 이번에 재수 끝에 등재가 결정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반려 당시의 지적사항인 ‘주변 경관’의 관리 및 보존방안은 등재결정 이후에도 가장 중요한 숙제로 부각될 전망이다. 정재숙 문화재청장은 “이번에 서원, 그 자체 뿐만이 아니라 서원을 둘러싼 자연경관도 세계유산의 가치를 인정받았다”고 밝혔다. 주변 경관의 보존없는 ‘한국의 서원’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의 가치를 상실할 수 있다는 얘기다. 또한 9곳의 서원과 관련된 지자체가 14곳에 달한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도 등재 이후 9개 서원의 통합 보존 관리방안을 마련할 것을 권고한만큼 법적인 보호를 받는 기구의 출범도 고려해야 한다.

 

[조선왕릉]

국가문화유산포털 | 한국의 세계유산 (heritage.go.kr)

조선왕릉

 

2009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조선왕릉’은 우리나라에 소재한 40기의 조선시대 왕릉으로 구성되어 있다.

조선왕조(1392~1910)는 태조에서 마지막 순종에 이르기까지 519년간 이어져 왔다. 왕위에 올랐던 27명의 왕과 그 왕비뿐 아니라 사후 추존된 왕과 왕비가 묻힌 총 42기의 왕릉이 있으며, 이 중 40기는 대한민국에, 2기는 북한에 위치해 있다.

조선시대의 왕릉은 조선시대의 국가통치 이념인 유교와 그 예법에 근거하여 시대에 따라 다양한 공간의 크기, 문인과 무인 공간의 구분, 석물의 배치, 기타 시설물의 배치 등이 특색을 띠고 있다. 특히 왕릉의 석물 중 문석인, 무석인의 규모와 조각양식 등은 예술성을 각각 달리하며 시대별로 변하는 사상과 정치사를 반영하고 있어서 역사의 흐름을 읽을 수 있는 뛰어난 문화유산에 속한다.

조선시대의 왕릉은 하나의 우주세계를 반영하도록 조영되었다. 능역의 공간은 속세의 공간인 진입공간(재실, 연못, 금천교), 제향공간(홍살문, 정자각, 수복방), 그리고 성역공간(비각, 능침공간)의 3단계로 구분되어 조성되었는데, 이는 사후의 세계관을 강조하는 것이다.

조영 당시부터 계획적으로 조성되고 엄격하게 관리된 왕릉 내부와 주변의 녹지와 산림은 당시에도 주요한 생태계로 작용하여 왔으며, 특히 도시화가 고도로 진행되고 있는 현대 한국의 대도시 서울 주변 지역의 생태적 안정성과 종 다양성을 보장하는 주요한 생태계로서 그 중요성이 더욱 부각되고 있다.

조선시대의 능원은 600여년이나 되는 오랜 기간 동안 통치한 왕조의 능원제도의 특징을 갖고 있으며, 시대적 흐름에 따른 통치철학과 정치상황을 바탕으로 능원공간 조영 형식의 변화, 관리공간 영역의 변화, 조형물 특성의 변화 등을 잘 반영하고 있는 독특한 문화유산이다.

현재 전주이씨대동종약원에서 시행하고 있는 산릉제례는 조선왕조 600여 년 동안 지속적으로 유지되어 왔는데, 이는 조선시대의 대표적 사상인 유교의 충과 효를 상징하는 예제의 집결체라고 할 수 있는 것으로서, 조선왕조가 멸망한 후 오늘날까지 왕실 후손들에 의해 계속되고 있는 한국만의 독특한 문화유산이다.

세계유산적 가치등재기준 : 세계문화유산기준 (Ⅲ), (Ⅳ), (Ⅵ)
  • (Ⅲ) 독특하거나 지극히 희귀하거나 혹은 아주 오래된 유산
  • (Ⅳ) 가장 특징적인 사례의 건축양식으로서 중요한 문화적, 사회적, 예술적, 과학적, 기술적 혹은 산업의 발전을 대표하는 양식
  • (Ⅵ) 역사적 중요성이나 함축성이 현저한 사상이나 신념, 사진이나 인물과 가장 중요한 연관이 있는 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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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인 일요일 집에만 있기는 답답하다. 주변을 검색하던 중 조선왕릉 중 하나인 의릉이 근처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가볍게 산책하는 기분으로 한번 다녀와보기로 했다.
▲ 의릉 홍살문과 정자각 의릉 안내소에서 보이는 정자각과 홍살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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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예술종합학교 별관을 따라 나오면 옆으로 의릉 공원이 펼쳐진다. 바로 들어갈 순 없고 안내소에서 표를 사야 한다. 가격은 1000원, 10인 이상 단체는 800원. 만 25세 미만과 65세 이상, 통역 안내사 등은 무료로 입장할 수 있다. 안내소 입구에서 길이 세 갈래인데 중간길에는 홍살문과 정자각, 그리고 의릉이 펼쳐져 있다.
 
▲ 가까운 곳에서 찍은 의릉의 모습 가까운 곳에서 찍은 의릉의 모습. 묘를 가까이서 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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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릉은 조선시대 경종의 묘로, 경종과 선의왕후 어씨가 잠들어 있다. 우리에게 경종은 익숙하지 않은 왕이다. 재위 기간이 4년 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역사에 남을만한 치적을 쌓기엔 부족한 시간이다. 매체에 자주 나온 장희빈의 아들로, 조선 시대 가장 오랫동안 재위를 유지했던 영조 바로 전의 왕이었다. 
 
▲ 아직 남아 있는 중앙정보부 강당 등록문화재로 남아있는 중앙정보부 강당. 이곳에서 7.4남북선언이 선언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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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구에서 오른쪽으로 올라가면 과거 중앙정보부가 사용했던 강당이 나온다. 예전에 중앙정보부 이문동 청사가 근처에 있었는데, 청사 영역에 의릉이 포함되어 있어 함부로 들어갈 수 없었다.

중앙정보부는 정자각과 홍살문 사이에 돌다리와 연못을 만들었는데, 중앙정보부가 국가안전기획부로 바뀌고 청사를 옮기면서 연못과 돌다리는 사라졌다. 그래도 남북한이 처음 공동성명을 했던 강당 건물은 문화유산으로 남아 있다.
 
▲ 천장산 산책로 들어가는 길 의릉 왼쪽으로 올라가면 천장산 산책로를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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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구에서 왼쪽으로 올라가면 산책로가 쭉 펼쳐진다. 지금은 벚꽃이 져서 바람이 불 때마다 꽃잎이 떨어지지만 대신 싱그러운 나무들이 방문객들을 반겨준다. 길을 따라 올라가면 천장산 산책로가 나온다. 의릉 뒤에 있는 천장산을 걸을 수 있으며 다 걷는데 1시간 반 정도 소요된다.
 
▲ 의릉 산책로 의릉 산책로에서 시민들이 산책을 즐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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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조선왕릉에 비해 규모가 작고 건물도 적지만 의릉은 시민들에게 더할 나위 없는 산책로이자 나들이 장소이다. 벌써 많은 시민들이 가족들과 함께 나들이를 즐기고 있었다. 봄이 와 이파리를 펼친 나무들과 하나 둘 피어나는 꽃들은 사람들의 눈길을 즐겁게 해준다.
 
▲ 의릉 옆 역사문화관 공사현장 입구 유네스코의 권고로 의릉 옆에 의릉 역사문화관이 지어지고 있다. 올해 12월 완공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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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릉 밖에선 의릉 역사 문화관 공사가 한창이다. 유네스코의 권고로 작년 말부터 짓고 있다. 의릉 역사 문화관 건립되면 의릉은 문화 유산으로서 더 많은 관심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 의릉 모습이 더 기대된다.

 

 

[한국의 역사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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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마을 : 하회와 양동

 

한국의 역사마을에는 씨족마을, 읍성마을 등의 다양한 유형이 있으나 그 중에서 씨족마을은 전체 역사마을의 약 80%를 차지하는 한국의 대표적인 역사마을 유형이다.

한국의 씨족마을은 조선시대(1392~1910) 초기에 형성되기 시작하였고 조선 후기에는 전체 마을 중 약 80%를 점하게 되며, 오늘날까지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한국에서의 씨족은 성씨와 본관을 같이 하는 부계혈연집단, 즉 조상을 같이 하는 동성동본인들과 다른 혈연집단에서 배우자로 들어온 여성들로 구성된 사회집단을 말한다. 씨족마을은 하나 혹은 소수의 씨족이 전체 주민구성의 다수를 차지하거나 마을의 의사결정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는 마을을 일컫는다.

한국의 대표적 씨족마을이면서 양반마을인 하회와 양동은 모두 조선시대(1392~1910)에 양반문화가 가장 화려하게 꽃피었던 한반도 동남부(영남지방)에 위치하고 있다. 두 마을은 한국의 대표적인 마을 입지 유형인 배산임수의 형태를 띠고 있으며, 여름에 고온다습하고 겨울에 저온건조한 기후에 적응하기 위한 건물의 형태와 유교 예법에 입각한 가옥의 구성을 지니고 있다.

하회는 하회마을과 병산서원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양동은 양동마을과 그 주변 관련 건축물인 동강서원, 옥산서원, 독락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두 마을에는 양반씨족마을의 대표적인 구성요소인 종가, 살림집, 정사와 정자, 서원과 서당, 그리고 주변의 농경지와 자연경관이 거의 완전하게 남아 있을 뿐 아니라, 이러한 유형 유산과 더불어 이들과 관련된 많은 의례, 놀이, 저작, 예술품 등 수많은 정신적 유산들을 보유하고 있다.

하회, 양동의 두 마을은 아래와 같은 이유로 한국 씨족마을을 대표한다.

첫째, 하회, 양동의 두 마을은 한국의 씨족마을 중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각각 조선 전기 씨족마을 형성기의 두 가지 전형인 개척입향과 처가입향 유형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둘째, 하회, 양동의 두 마을은 전통적인 풍수의 원칙을 잘 지키고 있으며, 각각 한국 씨족마을 입지의 두 가지 전형인 강가 입지와 산기슭 입지의 대표적이고 우수한 사례이다.

셋째, 하회, 양동의 두 마을은 생산영역, 생활영역, 의식영역으로 구성되는 한국 씨족마을의 전통적인 공간구성을 기능적이고 경관적으로 온전하게 유지하고 있는 매우 드문 사례이다.

넷째, 하회, 양동의 두 마을은 조선시대의 가장 시기가 이르고 뛰어난 살림집, 정사, 정자, 서원 등의 건축물들을 다수 보유하고 있는 유일한 사례이다.

다섯째, 하회, 양동의 두 마을은 조선시대 유학자들의 학술적, 문화적 성과물인 고문헌과 예술작품을 보관하고, 전통적인 가정의례와 특징적인 마을 행사를 오늘날까지 유지하고 있는 가장 훌륭한 사례이다.

세계유산적 가치등재기준 : 세계문화유산기준 (III), (IV)
  • (III)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가 돼야 한다.
  • (IV) 인류 역사에 있어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여야 한다.

 

[밀착카메라] 한 달째 방치..세계문화유산 '느려 터진' 복구

손광균입력 2017. 8. 14. 21:38

 

 

[앵커]

수원 화성에서 지난 달 내린 폭우로 성곽 안쪽을 지탱하는 축대 일부가 무너졌습니다. 그런데 벌써 한 달 가까이 방치돼 있습니다. 수원 화성은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이죠.

밀착카메라 손광균 기자가 현장에 다녀왔습니다.

[기자]

1700년대 말 지어진 수원 화성은 복구와 복원을 거치며 1997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습니다.

 

이 가운데 봉화대가 설치된 동남쪽 성벽은 건설 당시의 전략적 요충지로 알려졌습니다.

그런데 이곳을 찾는 방문객과 인근 주민들의 안전을 위협하는 일이 최근 발생했습니다.

성곽과 봉화대 안쪽으로는 양옆으로 주택가가 있는데요. 이 아래쪽을 보니까 방수포 여러 겹이 덮여 있습니다. 원래는 지형을 떠받치는 축대가 있었던 곳인데, 폭우로 무너져 버린 겁니다.

무거운 돌로 쌓은 담은 지난달 16일, 수원에 150mm가 넘는 비가 내리면서 붕괴됐습니다.

이면도로에 임시로 차단막을 설치했지만, 관광객과 차들은 바로 옆으로 지나다닙니다.

축대 아래쪽으로 와 봤습니다. 방수포 밑에는요, 축대에서 떨어져 나온 돌들이 튀어나와 있고요. 붕괴 당시의 상황을 잘 보여주는 사진이 한 장 있습니다. 여기를 보면요, 길가에 세워놓은 차들 위로 돌무더기들이 떨어져 큰 피해가 발생했고요.

맞은편 주민들도 자칫 피해를 입을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현재는 축대에서 떨어져 나온 돌 일부를 이쪽에 쌓아놓은 상태입니다.

한 달 가까이 복구 소식을 듣지 못한 주민들은 불안하기만 합니다.

[황학록/경기 수원시 남수동 : '이게 여기까지 허물어지면 어떡하나'하고 놀랐죠. 불안하고 그래. 잠도 잘 못 자고…]

 

주변의 다른 축대도 관리가 안 되긴 마찬가지입니다. 도로 한쪽에 무단으로 소파와 플라스틱 통을 갖다놓고 흡연 공간으로 활용하는가 하면, 쓰레기도 쌓아놨습니다.

수원시는 이르면 17일부터 공사를 시작해 이달 안으로 축대를 복구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수원시 관계자 : 시공사 선정을 8월 8일에 했고요. 착공을 17일에 할거라고요. 현장 조사하고 자문받고 설계를 했잖아요. 행정적인 절차가 열흘 정도 됐고…]

훼손된 상태로 방치된 곳은 이곳뿐만이 아닙니다.

또 다른 세계문화유산인 남한산성입니다. 저희에게 두 달 전, 이곳 성벽 곳곳이 훼손됐다는 제보가 들어왔는데요. 실제로 와서 확인을 해보니까 이렇게 공사 안내판이 앞에 세워져 있고요.

그 뒤쪽으로 무너진 성벽이 보이지 않게 방수포로 덮어놨습니다. 이 너머를 보니까, 임시 등산로로 돌무더기들이 떨어져 있습니다.

북문에서 서문까지 이어지는 성곽 곳곳이 파란색 방수포로 가려져 있습니다.

덮개 역할을 하는 돌은 등산로에 떨어져 있고, 돌과 돌 사이에 발라놓은 시멘트가 힘없이 흔들리기도 합니다.

남한산성은 문화재청의 안전점검에서 2년 연속 최하등급을 받았습니다.

[박상현/경기 성남시 태평동 : 보기 아주 흉하죠. 조화롭지도 않고 또 흉물스럽기도 하고. 사람들이 문화유적지를 느끼기 위해서 이곳에 왔는데…]

남한산성 도립공원사무소 측은 연구 용역을 마친 뒤 순차적으로 복구에 들어갔다며, 예산이 확보되는 대로 성벽 공사를 진행하겠다는 입장입니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는 것도 좋지만, 이를 제대로 보존하는 것도 중요한 과제입니다. 허술한 관리 속에 우리 문화재가 흉물로 변하는 걸 막으려면 지금보다 철저한 대책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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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자연유산]

대한민국의 세계유산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No. 사진 등록명 소재지 등록년도 등록기준 유네스코
지정번호
비고
1


한라산



용천동굴



성산일출봉
   제주 화산섬과 용암 동굴 제주특별자치도  2007년  (ⅶ), (ⅷ)  1264
2


고창 갯벌
한국의 갯벌  충청남도 서천군
전라북도 고창군
전라남도 신안군
전라남도 
보성군
전라남도 
순천시
 2021년  (ⅹ)

 

 

 

여태경 기자입력 2018. 7. 5. 09:54수정 2018. 7. 5. 10:53

'제주 화산섬·용암동굴' 세계자연유산에 거문오름동굴군 추가 (daum.net)

 
세계유산 19개 새로 등재..등재불가 권고 유산 등재 논란
사우디 '알 아사 오아시스'과 '나움부르크 성당'
세계유산 등재를 선언하는 세이카 하야 라데스 알 칼리파 의장.(문화재청 제공)

 

(서울=뉴스1) 여태경 기자 = 바레인 마나마 유네스코빌리지에서 개최된 제42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는 우리나라의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을 비롯해 문화유산 13건, 복합유산 3건, 자연유산 3건 등 총 19건의 유산이 새롭게 세계유산에 등재됐다.

하지만 몇몇 유산의 경우 자문기구의 권고를 존중하는 관례를 깨면서까지 등재해 논란을 빚기도 했다.

문화재청(청장 김종진)은 5일 지난달 24일부터 이달 4일까지 열린 제42차 세계유산위원회 결과를 발표했다.

 

이번 위원회에서 19건이 새로 등재됨에 따라 세계유산은 문화유산 845건, 자연유산 209건, 복합유산 38건으로 총 1092건이 됐다.

지난해 6월 세계자연유산에 등재된 '제주 화산섬과 용암동굴'은 유산 구역이 소폭 확장됐다. 우리나라에서 세계자연유산에 등재된 곳은 제주 화산섬과 용암동굴이 유일하다.

문화재청은 지난 1월 기존에 등재된 지역 이외에 거문오름 용암동굴계 상류동굴군, 소천굴, 수월봉 응회환, 차귀도 응회구복합체 지역을 추가하는 것으로 신청했다.

하지만 심사를 담당하는 국제자연보존연맹(IUCN)은 거문오름상류동굴군 추가만 권고했고 위원회는 이를 논의 없이 채택했다. 우리나라에서 등재된 유산의 구역 변경이 이루어진 것은 '제주 화산섬과 용암동굴'이 처음이다.

거문오름 용암동굴계 상류동굴군(웃산전굴, 북오름굴, 대림굴). 사진은 천장창 형태를 이루는 대림굴 입구. (문화재청 제공) /뉴스1

 

중국은 자연유산인 귀주성 동북쪽에 위치한 '판징샨'(범정산)이 멸종위기 종인 범정산 전나무와 들창코원숭이가 서식하고 있다는 점이 탁월한 보편적 가치로 인정받아 등재됐다.

일본은 문화유산인 '나가사키 지역의 은둔 기독교 유적'이 17~19세기 일본 기독교의 본질을 유지하고 있었다는 점이 인정받아 등재됐다.

이외에도 중국의 문화유산인 '고대 천주 역사기념물 및 유적'은 '등재불가'를 권고 받았으나 위원회에서 '보류'로 상향 조정됐으며, '반려' 권고를 받은 일본의 자연유산인 '아마미-오시마섬, 토쿠노시마 섬, 오키나와 섬의 북부, 이리오모테 섬'은 위원회 개최 전에 일본 측에서 자진 철회했다.

 

특히 제42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는 통상 자문기구의 권고사항을 그대로 채택하거나 한 단계 정도 상향하는 관례를 깨고 등재불가를 받은 유산을 사상 처음으로 등재시켜 논란을 낳았다.

문제가 된 유산은 사우디아라비아의 '알 아사 오아시스, 진화하는 문화경관'과 독일의 '나움부르크 성당'으로, 이러한 위원회의 결정에 대해 몇몇 위원국이 강력히 반발했고 사무국인 세계유산센터와 자문기구로부터도 심각한 우려가 제기됐다.

루마니아의 '로시아 몬타나 광산경관'은 당초 자문기구 심사 결과 '등재' 권고를 받았지만 광산 개발을 둘러싼 국제분쟁조정이 진행되고 있어 루마니아는 위원회에서 등재를 '보류' 해 줄 것을 요구했고 치열한 논쟁 결과 당사국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결국 내년 아제르바이잔 바쿠에서 개최하기로 결정된 제43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는 지나친 상향결정을 방지하고 자문기구의 심사 결과와 등재 결정 등에 대한 절차적 문제의 혼란을 개선하는 방안을 논의하기로 의결했다.

한편 위험에 처한 세계유산목록의 보존현황 등 논의에서는 케냐의 '투르카나 자연보호구역'이 새롭게 위험에 처한 유산 목록에 등재됐고 벨리즈의 '산호초 보호지역'은 관광객을 줄이고 보호관리를 강화한 것이 인정돼 위험에 처한 유산 목록에서 제외됐다.

 

 

 

도재기 선임기자입력 2018. 1. 19. 14:09
 

[경향신문]

북한의 국보유적이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황해남도 안악군의 고구려 벽화고분인 ‘안악 3호분’ 내부의 행렬도(부분). 고구려시대 고분의 벽화는 당시 생활문화상을 고스란히 알려주는 ‘삼국시대의 타임캡슐’로 평가받는 문화유산이다. 하지만 남북 분단으로 ‘이산 문화재’가 되면서 우리는 북한 내 고구려 고분벽화들을 접할 수 없는 실정이다.

도재기의 천년 향기

2-분단의 상처, 남북 ‘이산 문화재’

“언제쯤이나 제대로 볼 수있으려나…. 유물이든 유적이든 사진 좀 많이 찍어와요, 발굴조사하는 현장도 좋고….”

1998년 10월, 북한 방문을 앞둔 필자에게 문화유산 연구자들은 하나같이 사진을 강조했다. 북한 사회과학원의 고고학자·미술사가 이름을 구체적으로 거명하며 그들에게 확인하고픈 수십건의 질문지를 주기도 했다. 북한에 있는 문화재 관련 자료가 그만큼 절실한 것이었다. 당시 필자는 경향신문의 남북 문화재 교류추진을 위한 조사차 방북, 평양 지역 등의 유적들을 답사하고 사회과학원 등의 관계자들을 만났다.

 

“거, 백제 무령왕릉은 어때요? 경주쪽 무덤떼 발굴은 계속되나 모르겠네….”

북한의 연구자들도 ‘남조선의 민족유산’을 많이 궁금해했다. 남한의 고고학적 발굴 결과, 미술사적으로 새로운 연구 성과가 있는 지를 알고 싶어 했다. 연구자들의 학문적 열의는 남한이든 북한이든 똑같았다. 전문가로서 새로운 연구에 대한 열망은 정치체제를 뛰어넘어 뜨거웠다.

벌써 20년이 됐다. 하지만 남북한 연구자들에게 변한 것은 없다. 민족 동질성의 뿌리인 문화유산 교류는 여전히 이뤄지지 않는다. 반만년의 역사와 문화라고 자랑하면서도 정작 그것을 증언하는 문화재는 공유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분단 전까지 함께 한 이 땅의 그 많은 문화유산을 남쪽 아니면 북쪽, 그 절반 밖에 누리지 못하는 실정이다.

남북 분단은 ‘이산가족’과 더불어 ‘이산 문화재’도 낳았다. 우리는 자주 잊는다. 지금 내가 안다고 떠드는, 연구한다고 하는 문화유산이 그저 반쪽에 불과하다는 뼈아픈 사실을.

고구려 벽화고분인 ‘안악 3호분’의 내부 모습. 벽과 기둥, 천장에 벽화들이 그려져 있다.

 

■60년의 분단, 5000년의 망각

국립중앙박물관에서 2006년 열린 ‘북녘의 문화유산-평양에서 온 국보들’ 전시회는 남북 문화재 교류사에 기록되는 특별전이다. 북한이 소장하고 있는 선사~조선시대의 명품 문화재 90점이 남한을 찾았다. 소문으로 듣던, 사진으로도 볼까말까하던 북한 내 국보급 문화재들이 대거 휴전선을 넘은 것이다.

당시 특별전을 공동주최한 남북역사학자협의회의 강만길 위원장은 “분단은 불과 60년이고, 우리 민족은 5000년 역사를 함께 해왔음을 재확인하는 자리”라고 감격해했다. 이건무 중앙박물관장은 “거울같은 전시회”라고 평했다. 남북 동질성을 확인하고 통일의 당위성을 되새기게 한다는 의미다.

 

한편에서는 ‘이산 문화재’의 ‘상봉’이 관심을 끌었다. 남한에 있는 고구려 불상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국보 118호·리움 소장)은 함께 있어야 할 광배가 없다. 반면 특별전에 전시될 북한의 고구려시대 ‘금동 영강7년명 광배’(조선중앙력사박물관 소장)는 붙어 있었던 불상이 없다.

짝을 잃은 남쪽의 불상과 북쪽의 광배. 평양 평천리 절터에서 발견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 반가사유상과 북한의 광배가 한 쌍이라는 주장이 일부에서 제기된 상황이었다. 전시회에서 마침내 그 둘이 한 쌍인 지를 확인해보자는 관심이었다. 하지만 전문가들의 예측대로 그 둘은 한 쌍이 아니었다. 고구려 불상과 광배의 ‘상봉’은 그저 해프닝으로 끝났다. 그저 웃어넘길 수만은 없었다. 남북으로 헤어진 이산문화재들의 안타까움을 드러내기에 충분했기 때문이다.

고구려시대 불상으로 국보 제 118호인 ‘금동미륵보살 반가사유상’(리움 소장). 평양 평천리 절터에서 발견된 것으로 전해지는 이 불상은 광배가 있었던 흔적은 있으나 광배가 남아 있지 않다. 북한 조선중앙력사중앙박물관에는 불상이 없는 고구려시대의 ‘영강7년명 광배’가 있다. 한때 광배가 없는 남한의 불상과 불상이 없는 북한의 광배가 한 쌍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분단의 상처는 생각보다 깊고 아프게 문화유산 전반에 남아 있다. 남한 사람은 북한의 고구려 유적·유물을 볼 수 없다. 북한 사람은 남한의 신라와 백제·가야의 문화유산을 접하지 못한다. 선사시대는 물론 고려·조선 시대 문화재도 마찬가지다.

한반도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구석기시대 유적인 ‘검은모루 유적’은 늘 역사교과서의 맨 앞을 장식한다. 하지만 수십년 째 우리는 희미한 사진으로만 접한다. 한반도에 구석기문화의 존재를 처음으로 확인시킨 ‘서포항 유적’, 일제의 이른바 ‘금석병용기설’을 무력화시킨 ‘금탄 유적’ 등은 일제강점기 식민사관을 뒤엎은 유적들이지만 역시 답사조차 할 수 없다.

한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악기(기원전 2000년)인 ‘뼈피리’도, 고려시대 석탑의 백미라는 ‘보현사 팔각십삼층석탑’, 평양의 ‘보통문’과 ‘대동문’ ‘을밀대’, 개성의 ‘선죽교’, 사리원의 ‘성불사’, 단원 김홍도의 ‘선녀도’나 혜원 신윤복의 ‘소나무와 매’(소나무와 매)도 우리는 만날 수 없다. 금강산 일만이천봉, 그 사이사이 녹아든 문화의 짙은 향기도 느낄 수 없다.

심지어 중국 내 고구려 유적은 언제든지 답사할 수 있지만 북한은 그렇지 못하다. 국제적으로도 큰 주목을 받는 북한의 ‘안악3호분’같은 고구려시대 벽화고분은 그저 ‘그림의 떡’이다. 러시아의 발해 유적은 우리 손으로 발굴까지 하지만 북한 내 발해 유적은 실태조차 모른다.

이젠 한민족 생활문화를 대표하고 상징하는 아리랑, 김치마저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남북으로 쪼개져 등재됐다. 아리랑은 ‘한국 서정민요, 아리랑’(남한)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민요, 아리랑’(북한)이란 이름으로, 김치는 ‘김장, 김치를 담그고 나누는 문화’(남한)와 ‘김치 만들기 전통’(북한)이란 이름으로다. 남북한은 유네스코에 공동 등재를 추진했지만 결국은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불상은 전해지지 않는 고구려시대의 ‘영강7년명 광배’(평양 조선중앙력사중앙박물관 소장).

 

유적과 유물, 문헌기록을 제대로 접할 수 없는 역사·문화의 연구나 복원은 부실할 수밖에 없다. 기록이 없는 선사시대 연구에는 아예 치명적이다. 삼국시대 연구와 복원도 삼국의 문화유산 자료를 비교·검토할 때 더 온전하지 않겠는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도 마찬가지다. 안타깝지만 분단은 이를 막고 있다. 그러다보니 100년 전 일제 학자들의 연구 결과와 사진들이 아직도 주요 자료로 활용된다.

남북의 문화재 교류가 막히고, 북한의 관련 자료가 제대로 공개되지 않으면서 분단 60년이 5000년 역사와 문화를 망각시키고 있다. 남북으로 흩어진 이산 문화재들은 한반도의 유구한 역사와 문화 연구를 절반에 그치게 한다.

한반도에서 발굴된 가장 오래된 악기인 ‘뼈피리’. 기원전 2000년 후반에 제작된 이 뼈피리는 북한 서포항 유적에서 발굴됐다.

 

■북한의 국보와 보물, 문화재 관리는?

한반도 문화유산의 절반이 존재하는 북한도 주요 유적, 유물을 특별히 보존·관리하고 있다. 문화재청에 따르면, 북한에는 남한의 ‘문화재보호법’에 해당하는 ‘민족유산보호법’이 있다. 민족유산보호법에 따라 ‘민족유산’(남한의 ‘문화재’ 개념)을 물질유산(유형문화재 등), 비물질유산(무형문화재), 자연유산(천연기념물 등)으로 분류한다.

우리의 ‘국보’ ‘보물’ ‘사적’ ‘국가중요무형문화재’처럼 특정 문화유산을 국가가 지정하는 제도도 운영 중이다. 남한의 ‘국보’는 ‘국보유물(유적)’, ‘보물’은 ‘준국보유물(유적)’에 해당한다. 이외 ‘일반유물’도 있다. 비물질유산은 ‘국가비물질유산’ ‘지방비물질유산’으로, 자연유산은 ‘명승지’‘천연기념물’로 지정된다.

물론 가치 평가나 지정 기준에는 차이가 있다. 유물·유적이 지니는 역사적 의의나 조형예술적 가치를 따지는 것은 동일하다. 하지만 북한에는 ‘사회주의 이념’이라는 또다른 기준이 적용된다. 여기에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직접 명명한 대상물도 지정(일명 ‘교시 유산’)되는 것으로 전해진다.

고려시대의 많은 석탑들 가운데서도 걸작으로 손꼽히는 북한 묘향산의 ‘보현사 팔각십삼층석탑’. 남한 평창 오대산의 ‘월정사 팔각구층석탑’을 떠올리게 한다. 이들 석탑은 남한과 북한에서 각각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북한의 지정문화재는 국보유물(유적) 190여건 등 모두 4800여건으로 알려져 있다(2008년 현재). 평양을 수도로 삼은 고구려, 개성이 수도였던 고려시대의 유물·유적이 많다. 남한에 신라와 백제·가야시대 유물·유적이 많은 것과 같은 이치다. 고구려 고분 63기로 구성된 ‘고구려 고분군’과 개성 일대의 ‘개성역사유적지구’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기도 하다.

북한의 ‘국보유적 제1호’는 고구려 장수왕이 수도를 옮기면서 쌓은 평양 시내의 ‘평양성’이다. 2호는 고구려 왕궁터인 ‘안학궁성터’, 3호와 4호는 평양성 성문으로 처음 세워진 ‘보통문’과 ‘대동문’이다. 보통문은 고려시대에는 서경의 서문으로 사용되다가 조선 성종 때인 1473년에 새로 지어졌지만 고려시대 건축양식을 잘 간직하고 있다는 평가다. 대동문은 평양성의 6개 성문들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로 손꼽힌다. 조선 중기에 재건됐다.

북한의 국보유적으로 고구려시대 평양성 성문 터에 자리하고 있는 평양의 ‘대동문’.현재의 건물은 조선시대 중기에 재건된 것이다.

 

역시 국보유물인 고구려의 대표적 금속공예품 ‘금동맞뚫음장식(해뚫음무늬금동장식)’은 고구려를 상징하는 이미지로 우리에게 익숙하다. 조선중앙력사박물관 소장품인 이 금동장식 중앙에는 그 유명한 삼족오(세발이 있는 까마귀로 태양을 상징)가 있다. 중앙의 삼족오를 중심으로 봉황, 용을 맞뚫음(투조)기법으로 조각해 조형미가 매우 돋보인다.

‘삼국시대의 타임캡슐’로 불리는 고구려 벽화고분인 안악 1~3호분, 약수리·수산리·덕화리 고분 등과 ‘을밀대’, 평양성을 쌓을 때의 사람 이름 등 명문이 있는 ‘평양성 명문석’도 국보다. 세계적으로 유례가 드문 ‘고구려 나무다리 유적’, 온달장군과 평강공주 이야기로 유명한 ‘온달장군과 평원왕 공주의 묘’도 국보유적이다.

신라 전성기를 이끈 진흥왕 대에 세워진 비석은 남북한에서 모두 5기가 국보다. 남한에는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국보 3호) 등 3기가, 북한에는 황초령·마운령 진흥왕 순수비가 각각 국보유물 110호, 111호다.

고구려 금속공예품을 대표하는 ‘맞뚫음금동장식’(해뚫음무늬 금동장식). 중앙에 태양을 상징하는 세발 까마귀(삼족오)를 중심으로 위에 봉황, 양옆에 용이 맞뚫음(투조)기법으로 조각돼 조형미가 돋보인다. 북한의 국보유물로 조선중앙력사박물관 소장품이다.

 

개성 일대에 있는 고려시대 문화재의 상당수도 국보, 준국보로 관리된다. 고려 왕궁터인 만월대와 왕건릉은 물론 노국공주와의 애틋한 사랑으로 유명한 공민왕릉, 첨성대, 성균관, 정몽주가 희생된 선죽교 등이 대표적이다. 왕건의 청동 좌상인 ‘고려 태조상’과 ‘청자국화무늬병’ 등 많은 명품 청자들도 국보 반열에 올라 있다.

조선시대의 건축, 회화, 공예 등의 문화유산도 물론 국보가 많다. 특히 회화에서는 ‘몽유도원도’로 유명한 조선 초기 안견의 ‘운룡도’, 조선 후기 진경산수화를 개척하고 정립한 겸재 정선의 ‘옹천파도도’, 조선 후기 대표적 풍속화가인 단원 김홍도의 ‘선녀도’와 혜원 신윤복의 ‘소나무와 매’(송응도)가 국보다. 하나같이 역사와 문화 복원·연구에 없어서는 안될 귀중한 사료들이자 민족의 보물들이다.

고구려 금속공예품을 대표하는 ‘맞뚫음금동장식’(해뚫음무늬 금동장식) 중앙에 있는 삼족오(태양을 상징하는 세발 까마귀)의 세부 모습.

 

■문화재 교류, 시너지 효과를 낳는다

분단 60여년 동안 남북한 문화재 교류는 극히 드물었다. 정치 부문을 넘어서 동질성 회복차원에서라도 문화재 교류를 하자는 여론은 높았지만 번번이 무산됐다. 반면 남북이 함께 손을 잡았을 때 그 성과는 매우 컸다.

‘북녘의 문화유산-평양에서 온 국보들’ 특별전은 남북한이 한 뿌리임을, 문화유산 공유의 필요성을 단적으로 보여줬다. 이후 정기 교류전이 정착되지 못해 안타까울 뿐이다.

남북 전문가들은 개성 만월대 유적을 공동 발굴조사하기도 했다. 2007년 처음 시작한 공동 발굴은 냉온탕을 오가는 남북관계에 따라 중단과 재개를 반복해야 했다. 하지만 송악산을 배경으로 1000여년 동안 땅속에 묻혀있던 고려 궁성의 초석, 유물들을 드러내 보였다. 2015년에는 고려 금속활자 1점을 발굴했다. 국립중앙박물관, 조선중앙력사박물관에 단 1점씩만 전해지던 상황에서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 ‘직지심경’을 만든 한반도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 3점을 확보한 것이다.

북한 국보유적으로 개성에 있는 ‘선죽교’(난간이 있는 뒷편). 조선 건국 과정에서 정몽주가 피살당한 역사적 유적이다.

 

그런 점에서 ‘궁예도성’(강원도 철원)의 남북 공동발굴조사를 시도할 만하다. 후고구려(태봉국)를 세운 궁예가 1100년 전 왕건과 함께 수도를 송악(개성)에서 철원으로 옮기면서 세운 궁예도성은 현재 분단의 상징인 비무장지대(DMZ) 안에 있다. 남북 군사분계선이 가로지르는 궁예도성에는 분단 이후 지금까지 늘 긴장감만이 팽팽하게 감돌고 있다.

이 궁예도성을 남북한이 공동 조사할 경우 ‘금단의 땅’이 ‘화해의 땅’, 교류·협력의 상징적 공간이 될 수 있다. 전문가들은 십수년전 부터 궁예도성의 남북 공동 발굴조사를 외치고 있다.

남북한은 일본에서 문화재를 환수, 제자리에 세우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일본 야스쿠니신사에 방치돼 있던 ‘북관대첩비’가 2005년 시민들의 노력으로 유출 100년만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을 무찌른 기록을 새긴 전승기념비인 북관대첩비는 조선 숙종 때인 1707년 함경북도 길주군(현 함경북도 김책시 임명동)에 세워졌다.

하지만 1905년 러일전쟁 당시 자존심이 상한 일본군이 북관대첩비를 뽑아 일본으로 무단반출했다. 환수된 북관대첩비는 남북 협의에 따라 원래 자리의 받침돌 위에 다시 세워졌고, 현재 북한의 국보유물이다.

북관대첩비 환수와 제자리 찾기는 불법 유출된 해외 문화재 환수의 좋은 선례다. 남한의 시민단체와 북한 조선불교도련맹은 일본 오쿠라문화재단이 소유한 고려시대의 ‘평양 율리사지 팔각오층석탑’ 반환을 위해 공동노력을 해오고 있기도 하다. 남북이 힘을 합하면 불법유출 문화재의 파악, 환수에 큰 힘을 발휘하지 않겠는가.

조선 후기 풍속화가로 유명한 단원 김홍도의 ‘선녀도’. 북한의 국보유물이며 현재 평양의 조선미술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고고학적으로 한반도에 인류가 살기 시작한 때는 70만년 전쯤으로 본다. 기록이 남아 있는 남북 역사시대만 하더라도 5000여년에 이른다.

최근 평창 동계올림픽을 매개로 남북관계에 모처럼 훈풍이 이는 듯하다. 그래서일까, 새삼 분단이 뼈아프게 다가온다. 교류와 협력의 절실함이 더 간절하다. 볼 수 없는 반쪽의 문화유산이 그립고, ‘이산 문화재’의 상처가 더 아리다. 사진/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경향신문

조선 후기 풍속화가로 이름난 혜원 신윤복의 ‘소나무와 매’(응송도). 북한 국보유물로 평양의 조선미술박물관 소장품이다.

<도재기 선임기자 jaek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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