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와 한반도 후기 구석기시대 년대기》

1. 후기 구석기시대

강인욱은 강인욱의 테라 인코그니타 문명은 구석기시대에 시작되었다.(2018.12.14.)  라는 글에서 문명은 후기 구석기시대 현생인류가 등장하면서 천천히 걸어온 과정에서 발달한 것이라고 하면서, 터키 남부에서 발견된 대형 신전인 1 5000년 전에 만들어진 괴베클리 유적과 동아시아에서 2만 년 전에 발견된 토기가 그 좋은 증거라고 제시하였다.

 

[책과 생각] 강인욱의 테라 인코그니타
②구석기시대 문명

문명은 갑작스러운 발명품이 아니다. 후기 구석기시대 현생인류가 등장하면서 천천히 걸어온 과정에서 발달한 것이다. 마치 겨울에 뿌린 씨앗이 봄여름에 꽃을 피우듯 후기 구석기시대부터 일구어낸 인간의 진화가 이어진 것이다.

 

 

 

터키 남부에서 발견된 1 만 5000 년 전에 만들어진 대형 신전 괴베클리 유적. 사냥과 채집을 하며 떠돌던 사람들이 자신들의 조상을 기념하고 장례를 지내기 위해 정기적으로 모여서 거대한 제사터를 만든 것이다 . 출처 ; 위키피디아

 

구석기시대라고 하면 보통 우리는 미개한 원시인이 돌을 깨 돌칼이나 돌망치를 만드는 모습을 떠올린다. 문명은 토기를 사용하며 마을을 일군 신석기시대부터 시작해, 5000년 전 거대한 신전과 도시를 세우고 글자를 사용한 4대 문명에서 꽃을 피운 걸로만 생각하는 것이다.

 

최근 이런 선입견을 깨부수는 여러 후기 구석기시대 유적이 발견되고 있다. 터키 남부에서 발견된 대형 신전인 15000년 전에 만들어진 괴베클리 유적과 동아시아에서 2만 년 전에 발견된 토기가 그 좋은 증거이다. 구석기시대에서 나왔다고는 선뜻 믿기 어려운 유적이 계속 발견되면서 이제 고대 문명의 기원에 대한 인식을 바꾸고 있다.  

 

극적인 변화를 유도한 대표적인 유적은 1994년부터 지난 20여년간 조사된 괴베클리 유적이다. 이 유적은 인공적으로 쌓은 높이 15m에 너비 300m 정도의 넓은 언덕으로 구성되어 있다. 고고학자들이 이 유적을 발굴해보니 200여개 돌기둥과 돌담으로 만든 원형 제단을 발견했다. 돌기둥 각각은 고도의 석조기술을 사용하여 티(T)자형으로 세심하게 조각하여서 세운 것이었다. 돌기둥 하나가 보통 10톤 정도이며 큰 것은 50톤이 넘는다. 겉에는 황소, 여우, 새 등이 새겨졌는데, 아주 사실적이어서 유라시아 초원 일대에서 3000년 전에 유행한 동물장식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괴베클리 유적은 수십 차례에 걸쳐서 연대측정을 한 결과 1만3000년~1만년에 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현재 전체의 5% 정도만 조사되었으니 대체로 구석기시대 후기인 1만5000년 전부터 이미 사용했다고 보아도 틀림없을 것이다. 당시는 금속도 몰랐고 바퀴 같은 운송수단은커녕 제대로 된 마을도 없었던 시절이다. 사냥과 채집을 하며 떠돌던 사람들이 자신들의 조상을 기념하고 장례를 지내기 위해 정기적으로 모여서 거대한 제사터를 만든 것이다. 상식을 깬 발견을 두고 고고학자들은 회의적인 시각을 쉽게 거두지 못했다. 하지만 괴베클리에 대한 국제적인 공동연구로 다양한 인물 조각상과 해골들이 발견되었고, 그 연대도 확인됐다. 명실상부한 인류 최초의 구석기시대 신전이라는 점을 인정받아 2018년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괴베클리 유적의 돌기둥 각각은 고도의 석조기술을 사용하여 티(T)자형으로 세심하게 조각하여서 세운 것이었다. 돌기둥 하나가 보통 10톤 정도이며 큰 것은 50톤이 넘는다. 겉에는 황소, 여우, 새 등이 새겨졌는데, 아주 사실적이어서 유라시아 초원 일대에서 3000년 전에 유행한 동물장식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출처 위키피디아

 

 

유라시아의 서쪽에서 괴베클리가 나올 때 동아시아에서는 세계에서 최초로 토기를 사용했다. 토기는 빙하기가 끝나고 신석기시대가 시작되면서 사용한다고 보는 것이 상식이었다. 하지만 동아시아에서는 토기가 1960년대 일본 열도를 필두로 1990년대 러시아 극동지역, 2000년대 중국 송화강 중류에서 발견되었다발견 당시에 고고학자들의 충격은 상상을 초월했다. 토기는 신석기시대가 되어야 등장한다는 것이 고고학계의 상식이었다. 심지어 토기가 발견된 곳은 세계 문명사에서 변방으로 꼽히던 동아시아지역이었다. 러시아에서 구석기시대의 토기를 처음 보고한 메드베데프 교수는 1980년대 하바롭스크 근처의 구석기시대 유적인 가샤를 발굴할 때 구석기 유적과 함께 자꾸 토기가 출토되어서 고민했다고 한다. 고민 끝에 그 결과를 발표하자 바이칼 일대에서 발굴을 한 다른 고고학자도 구석기시대 발굴을 하다 토기를 발견했는데, 본인이 실수를 한 줄 알고 발표를 하지 않았다고 털어놨다. 이후 1990년대 러시아가 개방되어 그 연구가 알려졌고급기야 2012년에는 중국 셴런퉁 유적에서 2만 년 전 토기가 발견되었다는 연구가 <사이언스>에 실렸다이제 후기 구석기시대 토기는 상식이 되었다한국에서는 구석기시대의 지층에서 토기가 발견된 확실한 사례는 아직 없다다만제주도 고산리에서 비슷한 형태의 토기가 출토된 바가 있기 때문에 언젠가는 발견될 것으로 기대한다.

 

 

 

중국 셴런퉁 유적에서 발견된 2만년 전 토기. 강인욱 제공

 

공동체로 빙하기 극복한 구석기인

 

도대체 빙하기가 끝나지도 않은 구석기시대에 이런 문명의 여러 요소가 발달한 배경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그 답은 바로 3만년 전에 번성했던 현생인류에 있다. 3만년을 기점으로 그 전에 번성했던 네안데르탈인은 멸종했고 현생인류는 살아남았다. 네안데르탈인이 특별히 미개한 것은 아니었다. 사실 네안데르탈인의 뇌 용적은 현대인과 큰 차이가 없고 신체 구조도 비슷해서 현대인의 옷을 입히면 큰 차이가 없을 정도였다. 다만 현생인류는 인간들끼리 서로 접촉하고 소통하는 다양한 시도를 하여 사회적인 진화를 이룩했다는 차이가 있었다. 공동체를 이루어서 다양한 정보를 교환하고 협력하여 위기를 극복했던 것이다.

 

옥스퍼드대학의 로버트 던바 교수는 후기 구석기시대에 현생인류가 생존할 수 있었던 비결로 노래와 춤, 신화(스토리텔링), 종교(샤머니즘)를 꼽았다. 괴베클리 신전은 각지에 흩어져 살던 수렵민들이 한데 모여서 조상을 기억하는 신전을 만들고 축제를 벌이며 공동체를 강화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괴베클리의 돌 하나를 세우기 위해서는 최소한 500여명이 필요하다고 한다. 실제 근친혼의 위험이 없이 공동체가 유지되려면 적어도 500여명의 사람이 한 집단을 이루어야 한다는 연구와도 일치한다. 이외에도 2~3만년 전 프랑스 알타미라와 라스코 동굴벽화, 5천개의 장식이 발견된 러시아 순기리 무덤 유적 등은 구석기 사람들의 종교 및 축제 문화가 얼마나 높은 수준이었는지 보여주는 증거다. 1만5000년 전 빙하기가 끝나가며 기후가 급변할 때에 사람들은 더 공동체 의식을 강화하고 주변 사람들과 네트워크를 만들어서 빠르게 환경에 대처했다. 반면, 변화에 뒤처지고 소통하지 못했던 네안데르탈인은 멸종의 길로 접어들 수밖에 없었다.

 

동아시아 구석기시대의 토기도 사람들이 공동체를 이루고 단합을 한 증거이다. 다른 어떤 그릇보다 토기는 조리에 유리하다. 사람들은 같이 모여서 불을 사용하여 토기로 음식을 만들어 잔치하며 공동체 의식을 강화했다. 메드베데프 교수가 발굴한 토기가 발견된 가샤 유적 바로 앞에는 사카치-알리안이라는 암각화가 있다. 이 암각화엔 다양한 샤먼(주술사)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이런 동아시아의 샤머니즘 종교와 문화는 1만5000년을 전후해 베링해를 거쳐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주해간 현생인류와 함께 건너갔다. 사실, 1950년대 이래로 중국과 신대륙 마야문명의 종교와 문화에서 많은 유사성이 보인다고 지적됐는데, 그 유사성의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다.

 

 

 

샤먼(주술사)이 새겨진 사카치-알리안 암각화. 사진 강인욱

 

4대 문명론은 제국주의의 발명품이다

 

완전히 빙하기가 끝난 1만년을 기점으로 현재와 같은 따뜻한 날씨가 되면서 사람들은 마을을 만들고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초기 농사는 우리 생각과 달리 위험한 모험이었다. 초기 신석기시대 사람들은 체구도 훨씬 작아졌고, 영양 상태도 불량했다. 식량 대부분을 일부 곡식에만 의존했고 흉년에 쉽게 대처할 정도의 농사기술도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때까지 각자 떠돌며 살던 사람들이 모여서 살게 되었으니 전에 없었던 갈등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마치 조선 시대 사람들이 아파트에 모여 사는 셈이었다. 이런 어려움을 소통과 공동체 의식으로 극복해나갔다. 괴베클리 이후인 지금으로부터 약 9500년 전 터키 아나톨리아 고원에 형성된 인류 최초의 마을 차탈회위크가 그 상황을 보여준다. 서로 밀집해 집을 만들어 살았던 차탈회위크 사람들은 집 안에서 제사를 지내고 벽화를 그려서 자신들의 신화를 보존했다. 이렇게 사람들은 자신의 조상을 기억하고 공동체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지금으로부터 약 9500년 전 터키 아나톨리아 고원에 형성된 인류 최초의 마을 차탈회위크 유적. 서로 밀집해 집을 만들어 살았던 차탈회위크 사람들은 집 안에서 제사를 지내고 벽화를 그려서 자신들의 신화를 보존했다. 이렇게 사람들은 자신의 조상을 기억하고 공동체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사진 강인욱

 

문명은 갑작스러운 발명품이 아니다. 후기 구석기시대 현생인류가 등장하면서 천천히 걸어온 과정에서 발달한 것이다. 마치 겨울에 뿌린 씨앗이 봄여름에 꽃을 피우듯 후기 구석기시대부터 일구어낸 인간의 진화가 이어진 것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여전히 4대 문명만을 기억하고 있을까. 사실 4대 문명론은 20세기 초반 제국주의가 전 세계를 활보할 때 만들어진 것이다. 4대 문명으로 유명한 지역들은 공통적으로 서구 열강들이 자기 앞마당처럼 마음대로 조사하던 지역이었다. 문명은 극히 일부 지역에서만 발달했고, 나머지 지역은 여전히 미개하게 살았다는 생각은 사실 일부 발달한 선진국이 다른 후진국을 침략하여 식민지화한다는 논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최근 다양한 연구로 고대 문명은 구석기시대를 거쳐서 빙하기를 극복하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한 현생인류 공동의 자산이라는 점이 밝혀지고 있다. 그동안 변방으로만 치부되었던 세계 곳곳에서 인류 문명사를 새롭게 쓸 자료들이 우리를 기다린다는 생각에 가슴이 벅차다. 강인욱 경희대학교 사학과 교수 ⓒ 한겨레신문사

(출처; 강인욱의 테라 인코그니타, 문명은 구석기시대에 시작되었다.

https://news.v.daum.net/v/20181214060604587)

 

1. 1  세계의 후기 구석기시대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330만 년 전부터 11,650년 전까지를 구석기시대로 보고 있는데 세분하면 330만 년 전부터 30만 년 전까지를 전기 구석기시대, 30만 년 전부터 5만 년 전까지를 중기 구석기시대, 5만 년 전부터 1만 년 전까지를 후기 구석기시대로 보고 후기 구석기시대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해부학적으로 현생인류는(, 호모 사피엔스)  20만 년 전에 아프리카에서 출현한 것으로 믿어진다. 비록 이들의 생활 방식이 약 50,000년 전인 중기 구석기 시대의 고대 인류의 삶에서 거의 변하지 않았지만, 인공물의 다양성이 크게 증가했다. 이 기간에 현생인류는 아프리카에서 나와 아시아와 유라시아 전역으로 확장하였는데 네안데르탈인들은 이때에 멸종하였다.

 

후기 구석기시대에는 조직화된 정착촌의 최초라고 알려진 증거가 있는데 캠프장형태이고 어떤 것은 저장 구덩이가 있다. 동굴 벽화, 암각화, 조각 및 뼈 또는 상아판화 등 예술작품이 생겨났다. 남아프리카 블롬보스 (Blombos)동굴과 같은 장소의 인공물에서 낚시를 한 첫 번째 증거가 발견되었다. 보다 다양하고 신뢰할 수 있는 식품 공급원과 전문 도구 유형으로 뒷받침되는 보다 복잡한 사회 집단이 등장하였다. 이것은 아마도 집단 동일화나 종족성을 증가시키는데 기여했다.

 

오스트레일리아에 정착한 것은 대체로 60,000년 전에 일어난 것 같다. 유럽에는 45,000년 전에 정착되었다. 해부학적으로 현생인류는 대략 45,000년 전까지(우스트이쉼 남자) 북쪽으로 시베리아 58도선만큼 확장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후기 구석기시대는 25,000년 전부터 15,000년 전까지인 빙하기 최고점(Last Glacial Maximum, LGM)으로 나누어진다. 아메리카 정착은 이 시기에 발생했는데, 동아시아와 중앙아시아 사람들이 약 35,000년 전에 도달하고 약 15,000년 전에 아메리카 대륙으로 확장하였다. 서유라시아에서는 구석기시대는 LGM의 끝인 15,000년 전에 이른바 아()구석기 시대(Epipaleolithic) 또는 중석기시대로 완화되었다. 11,700년 전(10번째 밀레니엄 BC)에 시작된 홀로세(완신세) 빙하의 후퇴로 구세계는 아()구석기 시대(Epipaleolithic)로 바뀌고, 비옥한 초승달 지대(Nile강과 Tigris강과 페르시아만을 연결하는 고대 농업 지대)에서 초기 형태의 농업이 시작되었다

 

첫째로 고고학자들은 아프리카의 인공물 중에서 5만 년 되지 않은 것들을 포인트형 석기, 조각 도구, 칼날, 뚫기와 찌르기 도구와 같이 여러 범주로 구분하고 분류할 수 있음을 발견하였다. 이 새로운 석재 도구 유형은 서로 뚜렷하게 차별화되는 것으로 설명되었다. 각 도구는 특정 용도가 있다. 흔히 크로마뇽인이라 불리는 침략자들은 정교한 돌 도구, 조각하거나 뭔가를 새긴 뼈, 상아 및 사슴뿔, 동굴 벽화 및 비너스 작은 조각상 등을 남겼다.

 

인간 행동의 변화는 지구의 기온 강하를 포함한 기후 변화에 기인한다. 마지막 빙하기(일반적이지만 마지막 빙하시대라고 잘못 불린다.)의 이미 매서운 추위가 더욱 악화되었다. 그러한 변화로 사용 가능한 목재의 공급이 줄어 사람들은 다른 물질을 찾게 되었다. 게다가 부싯돌은 저온에서 잘 부러져서 도구로서 쓸모없게 되었을 것이다.

 

일부 학자들은 복잡하거나 추상적인 언어의 출현으로 이러한 행동 변화가 가능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인간은 40,000년 전에는 계획이나 예견 능력이 부족했는데 복합적이고 새로운 능력으로 협동적이고 일관된 의사소통을 하게 되어 문화 발전의 새로운 시대를 암시해준다.

(출처; 위키피디아, https://en.wikipedia.org/wiki/Paleolithic)

 

이홍규는 한국인의 기원에서 중기 구석기문화는 고인류의 문화이고 후기 구석기문화가 신인류의 문화라고 한다.

 

중기구석기 문화에서 후기구석기 문화로 변해 가는 과정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중기구석기 문화는 네안데르탈인의 문화였고, 후기구석기 문화는 신인류의 문화여서 두 문화의 전환 과정은 두 인류가 접촉하거나 또는 혼혈되는 과정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초기 후기구석기 문화는 동부 시베리아의 바이칼 호수 부근으로부터 중앙아시아, 흑해 연안을 지나 유럽 여러 지역에 걸쳐 연속선을 그리며 나타나고 있다.(이홍규, 한국인의 기원, 48)

 

또한 스반테 파보 연구실에서 보고된 네안데르탈인의 유전체 비교분석 결과를 따라 현생인류와 네안데르탈인 사이의 혼혈은 약 47,00065,000년 전에 일어난 사건이며, 이 시기는 후기구석기 문화의 형성시기에 해당하며, 현생인류 사이에 나타나는 네안데르탈인 유래 유전형들의 분포를 볼 때, 서부 유라시아일 것으로 추정하였다

 

카라봄 유적지는 알타이 산맥 서쪽 러시아에 있는 유명한 고고학 유적지로 우즈베키스탄과는 멀지 않은데, 전기구석기-중기구석기-후기구석기-신석기로 이어지는 유물들이 연속성을 가지고 발굴되었는데 근처에 있는 데니소바 동굴 등 여러 유적지에선 이렇게 문화가 연속성을 나타내며 발전해 가는 증거를 분명히 볼 수 있었기 때문에 데레비안코 등 구소련 고고학자들은 현생인류의 다지역 기원설을 지지했고 아직도 지지하고 있다.

 

중기구석기 문화에서 후기구석기 문화로의 전환은 현생인류의 등장과 관련해 아주 중요한 문제로 최근 큰 관심을 끌고 있는 주제이다. 카라봄에서 후기구석기 문화가 나타나는 시기는 4 3,000년 전이다. 후기 구석기문화는 현생인류의 문화이다.  4 3,000년 전에 이 지역에 아프리카를 떠난 현생인류가 도착해 살고 있었던 것이다. 테드 괴벨이 보여준 것은 이곳에서 문화가 동서로 퍼져 나갔다는 것이다.(이홍규, 한국인의 기원, 150~151)

 

 

 

테드 괴벨이 2007년 Science(315:194)에 발표한 후기구석기 문화의 분포와 초기 인류의 이동도. 최근에 보고된 바에 따르면 네안데르탈인과 현생인류와의 혼혈은 후기구석기 문화의 전파와 시기를 같이한다. (PLoS Genetics, 2012. 8(10): e1002947).

 

한편 다른 지역에 대해선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인도, 동남아시아에 신인류가 이미 도착해 살고 있었는데도 후기 구석기유적이 없다는 것은 아프리카를 빠져 나온 신인류의 문화가 전기구석기 문화와 비슷했을 것이라는 추정을 하게 한다…  양자강 부근에 살던 중국인도 초기에는 아프리카인과 유사한 흑인이었다는 이야기가 있고, 동남아시아에 살고 있는 네그리토를 보면 아직 흑인의 흔적이 상당히 남아 있다. 1 5,000년 이전까지 일본에 살던 사람들도 구석기를 사용하고 있었다. 러시아의 코스텐키 유적지에서 발굴된 후기구석기 유골을 보면 아직 아프리카인과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다. 아프리카에서 나온 초기 신인류는 피부색이 검었을 것이다. (이홍규, 한국인의 기원, 48)

 

이홍규는 후기구석기시대에 최소 3그룹 이상의 신인류문화가 동시 다발적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3그룹의 신인류문화는 유럽과 코스텐키 지역 그리고 시베리아, 만주, 한반도 지역이다.

 

유럽의 후기구석기문화는 초기(샤텔페로니안 문화), 중기(오리냐시안 문화), 후기(그라베티안 문화)로 나누는데, 초기 문화에는 네안데르탈인의 흔적(이를테면 르발루아식 석기)이 보이지만 후기로 가면 석기를 만드는 기술이 훨씬 더 발달되고 비너스상 등 예술조각품들이 많이 나와서 중기(오리냐시안)문화와 구별되고 점진적인 인류 문화의 진보로 인해 사람들이 달라져 가고 있었던 것이라고 한다.

 

러시아의 남부 돈 강 유역 코스텐키에서 발굴된 후기구석기 문화는 유럽 후기구석기 문화와 좀 다른데 돌날 도구들은 비슷하지만 유럽의 대표적 중기구석기(오리냐시안)문화에서 특징적으로 나오는 유물들, 얇은 뼈로 만든 화살촉, 용골형의 끄트머리 끌개, 조르기형 칼날 등이 나오지 않고 반대로 오리냐시안 문화에 없는 것들, 예를 들어 이면각의 정, 양면 칼, 구멍 뚫린 조개 장식 등이 발견된다고 한다. 유적을 발견한 고고학자 아니코비치는 오리냐시안 문화와 다른 별도의 문화라고 주장하였다.

 

시베리아에는 우리 문화와 연관이 있다고 하는 세형 돌날(얇은 날을 가진 돌칼날)이 나타나기 시작한다고 한다. 이 세형돌날과 그 몸돌이 시베리아서 나타나면 곧바로 극동과 한반도에서도 발견된다고 한다.(이홍규, 한국인의 기원, 52~55)

 

권중석은 유라시아와 한국어의 기원 블로그에서 후기 구석기시대에 한반도에서부터 시작하여 시베리아를 거쳐 서쪽 끝으로는 스페인에 이르기까지 거대한 툰드라벨트가 연결되는데 시베리아 툰드라벨트에서 바이칼/알타이 지역이 중심이 되어 지속적으로 툰드라벨트가 유전적분기를 하고 유지 발전했다고 한다.

 

인류가 적어도 7만 년 이전에 아프리카를 출발하여 탈출해 나오고 해안을 따라 인도를 거쳐 인도네시아의 순다대륙에 이르고 이들이 북상하여 한반도에 이른다고 주장해 왔다. 이런 주장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 유전자 분석의 태두인 카발리 스포르자가 주장하여 그 당시 이 분야의 정론이 되다시피한 견해인 중앙아시아와 북방을 거쳐 한반도에 이르렀다는 기존의 주장과는 사뭇 다른 주장이었다

 

빙하기 시대 당시에는 순다대륙에서 성장한 인류가 태평양 해안가를 따라 한반도 부근에 이르면 여기서부터는 툰드라 지역으로 진입한다. 빙하기 때 툰드라 지대는 당시에 물이 매우 귀한 타 지역과는 달리 동토 지대로 물이 풍부하여 매머드와 순록을 비롯한 거대 포유류들이 이 지역에 매우 풍부하였다. 지금의 툰드라와는 달리 빙하기 때의 툰드라 지대는 현재의 아프리카 사바나 초원처럼 동물들이 떼를 지어 노니는 곳이었다. 이런 상황은 현재 동물 뼈 등의 발굴로 이의 분포를 추정할 수 있다

 

그리고 이 툰드라에서는 거대 포유류 동물 떼를 따라 이동하므로 이동 거리가 매우 광범위하게 된다. 예컨대 매머드는 1년에 시베리아에서 알프스까지 이동하였다 한다. 이 툰드라 지역에 언제 인류가 진입하였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최근에 북경 인근의 田園洞(Tianyuan Cave)동굴에서 발견된 4만 년 전의 田園洞人의 고인골 유전자 조사에 의하면(2012 12) 모계 mtDNA검사로는 이때 이미 하플로그룹 B로 분화하였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는 이 당시에 이미 동유라시아인들과 서유라시아인들과의 유전적 분기에 이미 4만 년 전에는 일어난 상태라는 점이다

 

그리고 4 7천 년 전의 고인골이 시베리아 우스트이쉼 강가에서 발굴되고, 3 3천 년 전의 모스크바 남쪽의 코스텐키 유적에서도 고인골이 발굴되어 이 유전자의 분석으로는 적어도 5만 년 전에 이미 현생 인류의 툰드라 진입이 확인된다. 이렇게 한반도에서부터 시작하여 시베리아를 거쳐 서쪽 끝으로는 스페인에 이르기까지 거대한 툰드라벨트가 연결되는데 시베리아 툰드라벨트에서 바이칼의 2 4천 년 전의 말타부렛 유적들과 1 7천 년 전의 알타이-시안 지역의 아폰토바 유적들에서 발굴된 고인골 분석을 보면 이 바이칼/알타이 지역이 중심이 되어 지속적으로 툰드라 밸트가 유전적분기를 하고 유지 발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툰드라 지역의 진입의 첫 번째 증좌는 러시아 우랄과 알타이 사이의 이리티쉬강 지류에서 발굴된 우스트이쉼 고인골로 이는 BC45,000년경으로 추산되고 이들은 부계로 ‘K(xLT)’이고 모계는 ‘R*’이 된다. 이런 유전자는 호주원주민과 파푸아뉴기니 원주민에서 주로 발견이 된다. 참고로 호주 원주민이나 파푸아뉴기니 산악 원주민들은 고립으로 오래된 유전자를 보존하고 있는데 아마도 순다대륙인들의 직계 후손으로 여겨진다. 

(출처; 바이칼의 말타부렛 구석기문화: 유럽인과 아메리카 인디언의 유전적 고향, 

https://m.blog.naver.com/joonghyuckk/220910985724)

 

 

1. 2  만주와 한반도 후기 구석기시대

이형구는 한국 고대문화의 비밀에서 먼저 만주가 적어도 3000년 이상 우리 민족의 역사무대이었으므로 우리나라 고대사나 고고학이 만주를 주요 영역으로 서술해야 한다고 하였다.

 

한국사를 이야기할 때 어떤 이는 우리나라 고대 사회의 활동 무대를 지금의 한반도에 국한시켜서 이야기한다. 그러나 고조선시대의 우리 민족은 지금의 만주(滿洲) 지방과 한반도에서 살았고 부여국과 고구려도 만주 지방과 한반도에서 살았다. 부여국과 고구려의 경우 만주 지방을 중심으로 건국되었지만 한반도에 걸쳐서 영유되었고, 또한 고구려의 후신인 발해국도 7세기 말에 나타나 10세기 초에 망할 때까지 만주 지방과 한반도에 존재하였으므로, 우리 민족은 적어도 3000년 이상을 지금의 만주 지방과 한반도에서 생활하고 있었던 셈이다. 적어도 이 시기는 이 지역이 중국 역사와는 거리가 먼 시기이다

 

우리의 국사는 우리 민족의 역사를 대상으로 해야 하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고고학이나 고대사는 마땅히 만주 지방을 주요 영역으로 삼아 서술해야 함은 두말할 나위 없다. 그래서 인류학적으로 현생인류와 직접 연결시키는 것은 이르다 하겠지만 구석기시대의 문화영역으로서 만주 지방과 한반도를 함께 동일선상에 놓고 서술해야 하는 당위성이 여기에 있다.(출처; 이형구, 한국 고대문화의 비밀-구석기 유적의 발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는 250만 년 전부터 홍적세( 한국고고학전문사전 구석기시대편에서는 갱신세(更新世, Pleistocene)를 홍적세(洪積世, Diluvial Epoch)라고 번역하는 경우가 있는데 홍수설에서 유래된 홍적세라는 용어는 비과학적인 개념에 근거하고 있다고 한다.)에 정착생활이 시작되는 1 2천 년 전까지를 구석기시대로 보고, 대체로 마지막 빙하기가 시작되는 10만 년 전까지를 전기구석기시대로, 10만 년 전부터 후기구석기시대의 돌날(石刃)석기공작이 출현하는 3 5천 년 전까지를 중기로, 3 5천 년 전부터 1 2천 년 전까지를 후기구석기시대라고 한다. 우리 역사넷 3 5천 년 전부터 1 2천 년 전까지를 후기구석기시대라고 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3 5천 년 전부터 1 2천 년 전까지를 후기 구석기시대로 보고 돌날석기공작의 제작 · 사용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하면서 동남아시아나 중국의 남부 지역에서는 돌날석기공작이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후기구석기시대는 일반적으로 좁고 측면이 날카로운 석인을 이용한 도구제작이 이루어지는 시기이며, 한반도에는 대체로 3 5천 년 전에 현생인류의 출현과 같은 시기에 유입된 것으로 추정된다. 동아시아에 현생인류가 출현한 것은 중국 남부의 마바 유적의 경우에 적어도 6만 년 전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는데 한반도에서는 출현 시기를 단정할만한 화석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현생인류는 몇 차례의 확산을 거친 것으로 보이는데, 대체로 6만 년 전에서 4만년 전후의 시기에 전 세계 각지로 확산되었다고 믿어진다. 현생인류는 돌날석기공작의 제작·사용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데 동남아시아나 중국의 남부 지역에서는 돌날석기공작이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지역적인 환경에 대한 기술적인 적응 과정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다.(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구석기시대)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펴낸 한국고고학전문사전 구석기시대편에서도 3 5천 년 전 이후를 후기구석기시대라고 하며, 돌날석기공작이나 좀돌날석기 공작 역시 황하 이남지역에서는 보이지 않고, 중국의 북부 지역과 한반도, 연해주와 일본에서 연속되고 있어 시베리아-몽골 기원의 북방 석기 공작 기술로 본다.

 

후기구석기문화는 돌날이 출현하는 시기와 이러한 시기,  3 5천 년 전 이후의 석기공작을 말한다. 처트, 유문암이나 흑요석 등과 같이 곱고 치밀한 밀도를 가진 돌감이 돌날석기 제작에 선호되었으며, 상당히 세밀한 가공을 보이고 있다. 그런데 후기 구석기 공작은 크게 두 가지의 다른 계통으로 구분된다. 하나는 치밀한 돌감을 이용하여 제작된 돌날석기가 포함된 석기 공작과 석영이나 규암제 등의 거친 골감을 활용하여 만든 전·중기 이래의 격지석기 중심의 석기공작이다. 이러한 혼재 현상은 동아시아 지역의 후기 구석기시대에 남과 북 두 방향의 주민 이동을 반영할 가능성이 있다

 

후기 구석기시대의 대표적인 도구로서 긁개, 새기개, 부리형석기, 밀개, 슴베찌르개를 들 수 있다. 슴베찌르개는 중기 말엽부터 출현하기 시작하여 후기 말엽까지 지속적으로 나타나는데 일본의 박편첨두기의 조형으로 생각되기도 한다. 돌날몸돌로는 쐐기형몸돌이 많지만 마주보는 양끝에서 중심을 향해서 박리 작업을 한 돌날몸돌이 있어서 기술적으로 내몽골 지역과 연결되는 것을 보여준다. 후기 구석기공작은 1960년대 초에 발견된 석장리유적이 대표적이며 수양개, 밀양 고례리, 상무룡리, 순천 월평, 장흥 신북, 하화계리 유적과 북한 지역의 굴포리유적 상층 등 한반도 전역에 골고루 분포하고 있다.

 

후기 구석기시대 후반 대체로 2 4천 년 전에 이르게 되면 좀돌날석기 공작이 나타나는데 이것은 결합석기를 만드는 재료이며 전국적으로 나타난다. 몸돌로 쐐기형이 보편적으로 나타나며 원추형에 가까운 것도 보인다. 이 시기에는 결합식 석기공작 이외에도 장착용 도구인 각추상석기나 양면가공찌르개 같은 것들이 나타나며 새기개도 보여서 대형 동물의 사냥과 관련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석기 공작은 대체로 후기 구석기 유적의 상층에서 발견되는데 동해 가곡, 철원 장흥리, 상무룡리, 월평, 신북, 곡성 옥과, 화순 대전, 함평 당하산, 하화계리 사둔과 작은 솔밭, 남양주 호평동, 해운대 중동, 북한의 만달리 동굴 유적 등에서 발견된다. 좀돌날석기 공작 역시 중국의 북부 지역과 한반도, 연해주와 일본에서 연속되고 있지만 황하 이남 지역에서는 거의 보이지 않기 때문에 돌날석기 공작과 같이 시베리아-몽골 기원의 북방 석기 공작 기술로 본다. 후기 구석기시대에 이미 갈아서 도끼를 만든 것이 보이는데 장흥리나 신북 유적에서 나오는 국부 마제석부가 바로 여기에 해당된다.(출처; 한국고고학전문사전 구석기시대편, 한국의 구석기문화)

 

후기 구석기시대라고 하는 3 5천 년 전부터 1 2천 년 전까지 만주와 한반도에는 돌날석기공작의 출현이 특징인데 시베리아-몽골 기원의 북방 석기 공작 기술로 중국의 북부 지역과 한반도, 연해주와 일본에서 나타나고, 동남아시아나 중국 남부 지역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중국 북부, 만주, 연해주, 한반도, 일본까지 후기 구석기시대에 같은 구석기문화를 공유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겠다.

 

 

참고자료

 

한국고고학전문사전-구석기시대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우리역사넷

 

위키피디아, https://en.wikipedia.org/wiki/Paleolithic

 

이홍규, 한국인의 기원, 2012, 우리역사연구재단

 

이형구, 한국고대문화의 비밀, 2012, 새녘출판사

 

강인욱의 테라 인코그니타, 문명은 구석기시대에 시작되었다. 

https://news.v.daum.net/v/20181214060604587

 

네이버블로그; 유라시아와 한국어의 기원; 바이칼의 말타부렛 구석기문화-유럽인과 아메리카 인디언의 유전적 고향, 

https://m.blog.naver.com/joonghyuckk/220910985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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