력사를 찾아서
《환국-가사라국》 6. 환국과 신석기문화 (8)양양 오산리유적 본문
《환국-가사라국》
6. 환국과 신석기문화(8)
6.8 양양 오산리유적 – 8000년 전~3500년 전(BC 6000년~BC 1500년)
오산리유적에서는 6기의 주거지, 불을 피웠던 자리, 도구를 제작했을 것으로 보이는 흔적이 확인되었고, 덧무늬토기(융기문토기) 등 다양한 형태의 토기와 어로생활을 짐작케 하는 결합식 낚시(이음낚시), 그물추와 돌톱, 화살촉, 흙으로 빚은 얼굴(토제인면상), 동물과 배를 형상화한 토우, 백두산 산지 흑요석등이 출토되었다.
『강원도 양양군 손양면 오산리에 있는 신석기시대 집자리 유적으로, 남한에서 측정된 방사성탄소연대값으로는 최고치(最古値)를 나타내어 각광을 받은 유적이다. 유적은 동해안에서 내륙 쪽으로 200m 정도 떨어진 모래언덕(沙丘) 위에 있으며 바로 옆에 쌍호라고 불리는 호수가 있다. 1981년부터 서울대학교박물관에 의해 발굴되었고 3권의 보고서가 나와 있다. 호수를 메우기 위해 모래를 파서 50m 가량 되는 언덕의 가운데 부분이 없어졌기 때문에 약 6,000㎢ 범위의 유적지는 두 쪽으로 나뉘는데, 모래언덕의 동쪽부분이 오산리 A, 서쪽이 오산리 B지점이다.
오산리 유적은 6차에 걸쳐서 발굴되었으며 11기의 집터와 소할석 및 돌무지 유구 7기, 다량의 석기와 토기들이 드러났다. 퇴적층위는 6개로 구분되는데 1층은 암황갈색 찰흙층이며 청동기시대층이다. 2층은 황갈색 모래질층이며 서해안식의 빗살무늬토기가 나오나 많이 교란되었다. 3층은 암갈색 모래질층이며 이때부터 납작밑토기가 나온다. 유적의 중심이 되는 5층은 A?B지구에서 다 나타나며 7개의 색깔이 다른 층으로 세분된다.
1층은 적갈색 민토기, 덧띠토기, 결합식 쇠뿔모양 손잡이 등이 나오는 청동기시대의 층이다. 방사성탄소 연대측정으로는 3360±180 B.P.로 나온 값이 있다. 2층(제 3문화층)부터 신석기시대 층으로서 서해안의 뾰족밑 빗살무늬토기, 납작한 강자갈의 양쪽 끝을 떼어내어 만든 그물추 등이 나온다. 3층(제 2문화층)에서는 원형천막과 같은 임시시설의 굄돌로 생각되고 있는 석렬(石列) 1기가 확인되었으며, 토기?석기 등에서는 아래 5층(제 1문화층)의 출토양상과 거의 같다. 특이한 것으로는 흙으로 빚은 사람얼굴이 있다. 신석기시대에 사람 얼굴 모양을 상징한 예술품으로는 이 오산리의 것 이외에 동삼동의 국자가리비, 서포항의 뼈 조각품 등이 있을 정도로 희귀한 예이다.
제1문화층은 여러 층으로 세분되나 유물상으로나, 방사성탄소연대측정값으로나 큰 차이를 찾을 수 없어 일괄로 서술한다. 모두 11기의 집터가 드러났는데 둥근꼴이며 집안에는 사각형의 화덕자리(爐址)가 1~2개씩 있다. 집자리는 대부분의 경우 바닥만 찰흙으로 다졌을 뿐 기둥구멍이나 벽의 흔적이 전혀 없기 때문에 움집이 아니라 지상가옥이며, 맨바닥 위에 가운데로 기울어진 기둥을 세워 중앙의 받침기둥이 없이 엮어 지붕을 씌운 것이라고 보고 있다. 그러나 9호 집자리 같은 경우 찰흙으로 다진 바닥이 아니라 화덕자리가 가장자리에 환형(環形)으로 깔리고 화덕자리에서 불에 탄 흙이 많이 나오는 것이 특징이다. B-1호 집자리도 찰흙다짐이 없다. 집의 크기는 평균지름이 6m 정도이며 지름 3m 정도인 경우 저장고나 부속시설로 보고 있다. 집안의 작업공간 분할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일정한 범위에 돌을 쌓아서 만든 소할석 및 적석유구 7기가 나왔다.
제1문화층에서 나온 석기 가운데 대다수를 차지하는 것이 묶음낚시로서 70점(큰 것은 길이 10㎝정도)이 나왔으며 그밖에 그물추, 돌도끼, 돌칼, 화살촉, 돌창, 돌톱, 추모양 석기, 숫돌 그리고 돌감이 나왔다. 묶음낚시는 낚시 허리부분의 아래쪽이 급하게 휘어져 있고 이 부분에 바늘이 연결되어 낚시의 기능을 발휘하는 도구인데 동삼동, 서포항, 상노대도, 일본의 서북구주지방 등 바닷가의 조개무지(貝塚) 유적에서 많이 발견되고 있다. 묶음낚시는 흔히 큰 물고기를 잡는데 썼다고 말해지며, 하나로 연결되는 낚싯바늘에 비해 물고기가 물렸을 때 분리되어 파손되지 않으며 또 낚시의 바늘부분은 뼈나 나무 어떤 것도 가능하다는 점에서 유리하다. 이곳에서만 보이는 특징적인 추모양 석기는 윗부분에 줄을 맬 수 있도록 홈이 파이고 한쪽 면이 평평하게 다듬어져 있어 던지는 도구의 앞부분에 묶어 썼던 것이 아닐까 여겨지고 있다. 이곳에서 출토된 흑요석은 백두산 계열로 성분 분석되었는데 비교자료가 없다는 점에서는 성급한 결론이나, 적어도 신석기시대 교역연구의 실마리를 제공해주게 되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1문화층의 토기들은 대다수가 납작밑(平底) 토기이며 덧무늬토기(隆起文土器)가 조금 나왔다. 토기의 모양은 좁은 밑에 몸체가 매우 넓은 발형(鉢形)이 대부분이나, 독 또는 목단지도 있다. 무늬는 주로 입술 주위에만 베풀었는데 찍은 무늬(押捺文)가 가장 많고 새김무늬(陰刻文)일 경우에는 평행한 단선문이 베풀어지며 2가지 수법이 결합되기도 한다. 이러한 양식은 이른 시기로 편년되는 서포항 1?2기층과 통한다. 토기 겉면을 갈아서 윤이 나는 토기가 많다.
오산리 유적 발굴의 첫째 의의는 서포항 유적과 남해안지방의 신석기문화를 잇는 중간지대에서 중요한 신석기시대 유적을 찾아내었다는 점이다. 둘째로 현재까지로는 오산리 유적이 한국 신석기시대 유적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에 속한다는 점이다. 셋째로 이러한 납작밑의 찍은 무늬 위의 제3문화층에서 서해안식의 뾰족밑 빗살무늬토기들이 나와 이른바 동한식(東韓式)의 오산리토기가 서한식(西韓式)에 선행함을 알아낸 점이다. 넷째 오산리 유적의 상한을 B.C. 6000년으로 잡을 때 이는 현재 북한의 시기구분과 근접한다는 점이다. 북한에서는 1990년대 이후 신석기시대의 상한을 B.C. 6000년으로 상향조정하고 있으며 미송리 유적과 더불어 북한에서 가장 이른 시기 유적의 하나로 꼽히는 서포항과 오산리 유적과의 문화적 유사성은 진작부터 지적되어 오던 바이다.
오산리 유적은 서쪽과 남쪽에 형성되어 있는 한천산 줄기의 계곡이 갑자기 평탄해지는 낮은 개활지의 사구에 위치하고 있어 매우 강한 바람이 부는데, 이러한 입지가 오산리의 층위와 연대문제에 많은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즉 퇴적층의 기본 토양은 고운 모래(fine sand)로 이루어져 있으며, 유적에는 매우 강한 바람이 규칙적으로 불어오고 있으니 오산리의 층위는 계속 교란되거나 재퇴적되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이 견해를 따른다면 유적의 층위와 시기구분을 확신할 수 없는데, 한편 방사성탄소연대값은 현재까지 한국에서 가장 오랜 것으로 나와 논의의 소지가 크다. 이러한 문제는 유물의 편년과 절대연대측정, 자연지리적 환경에 대한 퇴적학, 지질학적 고찰 등을 아우른 종합적 연구를 통해 해결해나가면 좋을 것으로 보인다.
오산리 유적의 연대에 대해 제1문화층의 여러 층에서 채집한 숯으로 방사성탄소연대측정을 한 결과 10개의 탄소연대 값이 나와 있는데 1호 집터의 7120±700 B.P.가 가장 이른 시기의 것이며 대부분의 연대들이 7000~6000 B.P. 사이에 나오고 있다.』
(출처; 문화유산 연구지식포털, 한국고고학사전(2001), 오산리유적,
http://portal.nrich.go.kr/kor/archeologyUsrView.do?menuIdx=792&idx=10592)
결합식낚시(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pageNo=5_1_1_0&ccbaCpno=1333203940000)
덧무늬토기(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pageNo=5_1_1_0&ccbaCpno=1333203940000)
토기인면(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pageNo=5_1_1_0&ccbaCpno=1333203940000)
김찬곤은 〈[차근차근 한국미술사 8] 강원도 양양군 오산리 사람 얼굴 흙인형1-과연 이것이 신의 형상일까?〉라는 글에서 사람 얼굴 흙인형을 '신상(神像)'으로 보는 것은 너무 과한 억지 해석이며, 어린이가 빚은 것이라고 보았다.
『과연 이것이 신의 형상일까?
[차근차근 한국미술사 8] 강원도 양양군 오산리 사람 얼굴 흙인형1
▲ 사람 얼굴 흙인형 신석기 시대. 가로 4.3cm. 높이 5.1cm. 이 흙인형은 서울대학교박물관에 있었는데, 지난 2011년 10월 오산리선사유적박물관으로 옮겨 왔다.
ⓒ 서울대학교박물관
『이 흙인형은 어린이가 빚었다!
위 사진은 오산리 선사 유적지에서 나온 '흙으로 빚은 사람 얼굴'이다. 이 흙인형은 역사책에서 자주 보게 되는데, 별다른 설명이 없이 '신석기 시대에 흙으로 빚은 사람 얼굴'이라 써 놓을 때가 많다. 또 한자로 '토제인면상(土製人面像)'이라 써 놓기도 한다.
타원형 흙 반죽을 엄지손가락 끝으로 꾹꾹 눌러 빚은 얼굴상이다. 먼저 두 눈을 양쪽 엄지로 누른 뒤, 다시 양쪽 엄지로 콧날을 세우고, 마지막으로 오른쪽 엄지를 써서 입을 표현했다. (어떻게 오른쪽 엄지인지 아느냐 물을 수 있는데, 위 사진과 다른 사진에서 입 모양을 보면 오른쪽 엄지를 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이 흙인형을 '어린이'가 빚었다고 본다. 강원도 속초 상평초등학교 탁동철 선생님에게 이 흙인형 사진을 보여 줬더니, 그도 "일곱 살 아래 아이가 빚은 것"이라 했다. 나도 그미의 의견에 동의한다. 무엇보다도 어른 손가락으로는 이렇게 작은 크기에, 저렇게 깊게 또 옆으로 살짝 길게 눈과 입을 표현할 수 없다.
이게 과연 신의 형상일까?
오산리선사유적박물관 홈페이지에 들어가 이 흙인형 설명글을 찾아봤다.
둥근 점토판을 손가락으로 눌러, 사람 얼굴 모양을 표현한 것으로 크기는 가로와 세로의 폭이 각각 4.3cm와 5cm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초기 신상(神像)의 하나로 그 가치가 높게 평가된다.
-오산리선사유적박물관 홈페이지 제1전시실
원래 이 흙인형은 서울대학교박물관에 있었는데 2011년 10월 오산리선사유적박물관으로 아주 가지고 왔다. (하지만 지금도 여전히 2007년부터 전시한 복제품을 전시하고 있는 것 같다) 이 소식을 연합뉴스에서 전했는데, 이때 박물관 측 학예사가 이런 말을 한다.
이번에 전시를 시작한 토제인면상은 생산과 풍요, 재액으로부터 보호 등을 기원하고 축원하는 의미를 가진 씨족 수호의 신상(神像)으로 중국과 일본 등 동북아시아 일대에서 발견되고 출토되고 있다.
-연합뉴스, '양양 오산리 토제인면상 30년 만에 귀향', 2011. 10. 7.
참으로 어려운 해설이다. 이 흙인형이 "생산과 풍요, 재액으로부터 보호"를 기원하는 "씨족 수호의 신상(神像)"이라 하는데, 그에 대한 근거가 중국과 일본을 비롯하여 동북아시아에서 나오는 인형이라 한다. 아래 흙인형과 치레거리는 오산리선사유적박물관 '사람 얼굴 흙인형' 전시 공간에 들어가기 전 들머리 벽에 있는 것이다. 박물관 측은 이러한 흙인형과 치레거리를 근거로 들며 사람 얼굴 흙인형을 '신상(神像)' 또는 '씨족수호신상'으로 본다.
▲ ①농포동 여인상(함경북도 농포동) 높이 5.6cm. ②사람 얼굴 치레거리(함경북도 선봉군 굴포리). ③사람 얼굴(함경북도 선봉군 굴포리). ④서포항 여인상(함경북도 서포항) 높이 7.7cm. ⑤신암리 여인상(울산시 울주군 서생면 신암리) 높이 3.6cm. ⑥일본 조몬 흙인형. ⑦조가비 치레거리(부산 동삼동). ⑧중국 우하량 여인상(대릉하 우하량) 높이 22.5cm. ⓒ 김찬곤
들머리 벽에 쓰여 있는 설명글을 보면, 신암리 여인상은 "풍요와 다산을 상징하는 지모신(地母神)"이고, 서포항 여인상은 "풍요와 다산을 기원하는" 여신이고, 조가비 치레거리는 '신상'이다. 하지만 저번 글('신암리 비너스, 크지도 작지도 않은 젖가슴과 잘록한 허리')에서도 말했듯이 신암리 여인상은 신석기 아이가 빚은 여인상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고, 조가비는 조가비 입에 목걸이 줄을 건 치레거리이고, 서포항 여인상 또한 구멍에 줄을 꿰어 몸에 찬 치레거리일 가능성이 높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에 자세히 다루겠다.
일단 그 근거가 적합한지는 더 꼼꼼히 따져봐야 하겠지만, 이 흙인형을 '신상(神像)'으로 보는 것, 이것은 너무 과한 억지 해석이 아닌가 싶다. 신상의 뜻을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숭경(崇敬)의 대상이 되는 신의 화상, 초상, 또는 조각상"이라 나와 있다. 이 설명 또한 어렵기는 매한가지만 쉽게 풀어 쓰면 '높이 우러러 모시는 신의 얼굴'을 말한다. 그런데 나는 이 흙인형에서 신상의 느낌이 전혀 전해오지 않는다. 더구나 높이가 5.1센티미터밖에 안 되는 아주 작은 흙인형이다. 500원짜리 동전 두 개를 이어 놓았을 때 높이다. 이렇게 작은 얼굴에서 어떻게 신상의 느낌이 들 수 있겠는가.』
(출처; 오마이뉴스, 〈[차근차근 한국미술사 8] 강원도 양양군 오산리 사람 얼굴 흙인형1-과연 이것이 신의 형상일까?〉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458549&CMPT_CD=SEARCH)
김찬곤은 〈[차근차근 한국미술사 11] 양양 오산리 덧무늬토기 두 점에 숨어 있는 비밀-7500년 전 신석기인이 그린 강원 양양 앞바다 구름〉에서 이 덧무늬토기 두 점에 그린 구름은 지금으로부터 7500년 전 신석기인이 그린 양양 앞바다 구름이라고 보았다.
『7500년 전 신석기인이 그린 강원 양양 앞바다 구름
[차근차근 한국미술사 11] 양양 오산리 덧무늬토기 두 점에 숨어 있는 비밀
▲ 덧무늬토기1(양양 오산리, 27cm), 덧무늬토기2(양양 오산리, 26.1cm), 백자 철화포도문호(국보 제107호. 18세기 초. 높이 53.8cm. 입 지름 19.4cm. 밑 지름 19.1cm)
ⓒ 오산리선사유적박물관·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아주 현대적인 디자인
양양 오산리선사유적박물관에 전시하고 있는 그릇 가운데 눈에 띄는 항아리 두 점이 있다. 나는 두 항아리를 보고 깜짝 놀랐다. 이 항아리 모양과 같은 그릇은 다른 신석기 유적에서는 볼 수 없고, 삼국·통일신라·고려 시대를 거쳐 조선에 와서야 비로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세계 신석기시대 그릇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아주 똑같지는 않지만 그 기본 모양은 조선 항아리와 같다. 7200년이 지나서야 볼 수 있는 그릇을 신석기시대 오산리에서 빚은 것이다. 더구나 위 사진에서 덧무늬토기1 그릇 무늬는 오늘날 디자인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을 정도로 아주 현대적이다.
위 세 항아리 모양은 여성의 몸을 닮았다. 특히 세 번째 백자 철화포도문 항아리(국보 제107호)는 여성의 배꼽부터 시작해 골반과 다리까지, 그것의 형상화라 할 수 있다. 내가 '남성의 눈'으로 그릇을 보는 것이 아니라 원래 그릇은 여성, 여신(女神), 비구름·비·물(만물생성의 기원), 만병(滿甁 찰만·항아리병, 마찬가지로 만물생성의 기원), 어머니, 들판 같은 상징성을 기본 베이스로 한다.
신석기시대 그릇을 빚었던 장인이 여자였는지 남자였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릇이 지금의 냉장고처럼 생활필수품이었던 만큼 편리성이 아주 중요한데, 그 편리성의 발전 속도가 아주 더딘 것 또한 사실이다.
그릇에 손잡이를 다는 것이나 물그릇에 귀때나 부리를 붙이는 것, 이런 것이 수백에서 수천 년에 걸쳐 이루어진다. 이런 것을 생각해 보면 당시 그릇을 빚었던 장인은 그릇을 늘 쓰는 여자였다기보다는 바깥일을 주로 했던 남자였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
▲ 오산리 덧무늬토기 밑바닥 무늬 두산백과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는 ‘엽맥(葉脈 잎엽·맥맥)’ ‘나뭇잎 모양’이라 나와 있다. 위 사진에서 가장 오른쪽 평양시 남경유적에서 나온 민무늬토기 그릇 밑바닥은 나뭇잎 모양이라 할 수 있다. 그에 견주어 오산리 덧무늬토기 바닥은 나뭇잎이 아니라 ‘나뭇가지’ 모양이다. 이것은 그릇 임자를 표시한 것이다. 이렇게 무늬를 잘못 읽는 것은 유물을 자세히 보지 않고 지식이나 관념에 기대어 보기 때문이다. ⓒ 오산리선사유적박물관
편리성보다는 디자인을 고집한 조선 사기장
조선시대 사기장도 여자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거의 다 남자들이었다. 조선 이전 삼국, 신라, 고려시대에도 그릇 빚는 장인은 대개 남자였을 것이다. 이것은 확실하지 않지만 그들이 구워 냈던 그릇을 보면 여성적인 느낌이 별로 들지 않는다.
그릇을 쓰는 여자의 처지에서, 그 '편리성'을 기준으로 놓고 조선시대 백자철화 포도무늬 항아리를 보면 한마디로 불편하고 위태위태하다. 높이가 53.8cm나 되는, 그야말로 엄청나게 큰 항아리다. 그런데 바닥 밑 지름은 고작 19.1cm밖에 안 된다(남자의 손 손목 관절까지 길이가 보통 20cm 안팎이다). 살짝 건드리기라도 하면 바로 넘어질 것 같은, 그런 불안한 디자인이다.
그렇다면 사기장은 이것을 몰랐을까. 사기장도 그런 것쯤은 충분히 알았다. 하지만 밑굽을 넓게, 안정적으로 하면 예쁘지 않다는 것, 여자의 몸매에서 벗어난다는 것, 이것이 더 중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대신 오산리 덧무늬토기보다는 굽을 좀 더 넓게 했고, 골반과 엉덩이는 더 크게, 또 허리를 잘록하게 했다. 아래 두 그릇을 견주어 보면 이것을 바로 느낄 수 있다. 왼쪽 그릇 백자 철화매죽문 항아리는 굽이 넓어 안정감이 있지만 오른쪽 그릇에 견주면 경쾌하지 않고 답답하다.
▲ 백자 철화매죽문 항아리(왼쪽)와 백자 철화포도문 항아리 조선 16세기 높이 41.3cm. 국보 제166호. 철화백자란 철분이 많이 들어 있는 밤빛 흙을 이겨 무늬를 그리고 유약을 둘러 구운 백자를 말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는 왼쪽 그릇 밑굽 무늬를 ‘파도무늬’로 설명한다. 그런데 이것은 파도가 아니라 우리나라 신석기 때부터 그릇에 그린 타원형 비구름이다. 비구름에서 이 세상 만물이 태어난다는 우운화생(雨雲化生)을 표현했다고 볼 수 있다. ⓒ 국립중앙박물관
신석기인이 덧무늬를 새기는 방법
토기는 크게 그릇 겉면에 빗살무늬를 긋거나 찍어 갖가지 무늬를 새겨 넣은 빗살무늬토기, 빗살무늬토기 이전 신석기 전기에 썼던 덧무늬토기, 그리고 청동기시대의 대표 그릇 민무늬토기가 있다.
덧무늬토기는 무늬가 그릇 겉면에 약간 돋아 있어 '융기문(隆起文)토기'라고도 한다. 이 토기는 그릇 겉면에 진흙 띠를 덧붙이거나 그릇 겉면을 엄지와 검지로 맞집어 도드라지게 하여 무늬를 낸 그릇으로, 중·후기 신석기시대의 빗살무늬토기와 더불어 우리나라 신석기를 대표하는 그릇이다.
강원도 양양 오산리에서 나온 항아리 두 점 또한 덧무늬토기다. 그런데 무늬를 넣은 방법이 서로 다르다. '덧무늬토기2'는 가는 진흙 띠를 붙여 무늬를 돋보이게 했다. 반면에 '덧무늬토기1'은 동그란 막대기로 겉흙을 눌러 골을 낸 다음 엄지와 검지를 맞집어 무늬를 도드라지게 했다.
▲ 오산리 덧무늬토기1 무늬 내는 방법 먼저 동그란 막대기로 골을 낸 다음 엄지와 검지를 맞집어 덧띠를 도드라지게 했다. 가장 오른쪽 사진을 보면 맞집은 자국이 보인다. ⓒ 김찬곤
그릇에 무늬를 새기게 된 내력
빗살무늬 그릇처럼 문양을 넣는 까닭을 보통 그릇을 빚어 구울 때 불 속에서 터지는 것을 막기 위한 방편으로도 설명하는데, 이것은 썩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그전에 벌써 곱돌이나 운모를 갈아 진흙 반죽에 넣어 그릇이 터지는 것을 해결했기 때문이다. 평양시 남경유적에서 나온 빗살무늬토기는 84cm나 된다. 이렇게 큰 그릇도 불속에서 터지지 않게 구을 수 있는 신석기 장인이었다.
문양을 넣은 까닭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그릇을 쓸 때 미끄러지지 않게, 즉 '편리성'이다. 또 하나는 이 편리성과 더불어 그들의 '세계관'을 새겼다고 볼 수 있다. 글자가 없고, 당연히 종이 같은 것도 없었다. 그런데 바위는 너무 단단했다.
그와 달리 진흙은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그리고 표현할 수 있었다. 또 일단 그릇을 구워 놓으면 그릇이 깨질 때까지 그 무늬는 남아 있고 볼 수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삶보다는 자신이 보고 생각한 것, 다시 말해 세계관을 새기기 시작한다. 또 두려움과 공포도 새긴다. 그래서 신석기 그릇 무늬를 보면 그들의 세계관에 다가갈 수 있는 것이다.
▲ 가나가와 앞바다의 높은 파도 아래 19세기. 25.3×37.5cm. 일본의 목판화가 카츠시카 후쿠사이가 70년대에 새긴 《후지산 36경》 가운데 첫 번째 작품이다. 그는 파도를 바닷가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바다 한가운데에서 보고 있다. 생선 운반 배 ‘오시오쿠리’ 세 척이 파도를 헤쳐가고 있다. 그리고 저 멀리 후지산이 보인다.
ⓒ 기메 국립아시아미술관
세계 신석기인의 구름무늬 '삼각형'
나는 오산리 덧무늬토기 두 점을 보면서 일본의 목판화가 카츠시카 후쿠사이가 새긴 〈가나가와 앞바다의 높은 파도 아래〉가 떠올랐다. 특히 덧무늬토기2가 그랬다. 나는 이 토기 겉면에 붙인 삼각형 덧띠무늬를 파도로 보았다. 양양 앞바다 그 성난 파도가 잇따라 내리치는 모양을, 삼각형을 이어 붙여 보여주고 있지 않나 싶었다.
더구나 〈가나가와 앞바다의 높은 파도 아래〉에서 왼쪽 가장 큰 파도를 보면 옅은 굵은 선으로 솟아오르는 바닷물의 무서움과 힘(물기둥)을 나타냈다. 이것은 덧무늬토기2에서 삼각형 안에 친 흙띠 선처럼 보이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덧무늬토기1도 성난 파도의 물결을 표현한 것 같았다.
오산리는 바다에서 200미터 남짓 떨어진 곳이다. 그렇다면 틀림없이 성난 파도와 물결을 표현했을 것이라는 확신까지 들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아래 그릇은 아프리카, 유럽, 아시아, 아메리카 신석기인이 빚었던 그릇이다. 모두 다 삼각형 무늬가 있다. 과연 이 삼각형은 무엇을 뜻할까.
▲ 세계 신석기인의 구름무늬 삼각형 1. 나이지리아 신석기 항아리 2. 이집트 신석기 항아리(기원전 3800년, 높이 16cm) 3. 스페인 발렌시아 물그릇(높이 12.4cm, 발렌시아선사시대박물관) 4. 영국 비커(높이 13.8cm, 대영박물관) 5. 러시아 얌나야(Yamnaya) 물병. 6. 초기 아시리아, 시리아 샤가르 바자르 신석기 그릇(기원전 1900-1700, 높이 22.8cm, 대영박물관) 7. 중국 양사오 물병(기원전 5000년) 8. 과테말라 마야 토기 복제품. 9. 미국 애리조나 호피족(Hopi) 그릇 ⓒ 김찬곤
신석기인은 이 삼각형을 무슨 뜻으로 새겼을까. 아직 세계 고고학계에서는 이것을 풀지 못한 것 같다. 세계 여러 나라의 박물관 설명글을 읽어 보면 거의 다 '기하학적·비유적·추상적인 삼각형'이라 할 뿐이다. 한마디로 '알 수 없다'는 말이다. 물론 우리나라 사학계에서도 〈사진 3-6〉 같은 삼각형 무늬를 '기하학적 추상무늬' 또는 삼각집선문(三角集線文)이라 말하고 있다.
이 삼각형과 빗금무늬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 모든 신석기 문화에서 볼 수 있고, 무늬의 시작이자 중심이다. 더구나 이 무늬는 신석기에 그치지 않고 청동기와 철기시대까지 이어진다. 우리나라는 청동기와 철기를 넘어 조선시대까지 이어지고 있다.
원래 삼각형 무늬의 기원은 반타원이고, 이것의 각진 형태가 삼각형이다(삼각형 구름'에 대해서는 앞 글, 관련기사: 부산 영선동 '토기 융기문 발' 무늬는 무엇을 새긴 것일까)을 참고하길 바란다).
반타원은 뭉게구름 '뭉게뭉게(뭉실뭉실)'의 한 부분 '뭉게'를 1차원 평면에 새긴 것이다. 여기서 반타원은 비(雨 또는 수분(水))을 안고 있는 '비구름'이다. 비는 보통 삼각형 안에 빗금을 긋거나 점을 찍어 표현한다. 〈사진1-9〉 그릇은 세계 신석기 그릇에서 볼 수 있는 '삼각형 구름'이다.
▲ 신석기인의 구름무늬 ‘삼각형’ 세계 신석기인이 구름을 왜 삼각형으로 그렸는지는 두 측면에서 짐작할 수 있다. 하나는 어떤 구상(삼각형 꼴의 움집, 빗물에 젖은 나뭇잎)에서 왔을 것이다. 그들은 구름을 비(雨·水)를 품고 있는 집으로 보았다. 또 하나는 디자인 측면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전체적으로 원에 가까운 그릇에 다시 타원형 구름을 새기는 것은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각진 삼각형 꼴 구름무늬를 새겼다고 볼 수 있다. ⓒ 오산리선사유적박물관
7500년 전 신석기인이 그린 강원 양양 앞바다 구름 그림
그릇을 볼 때는 아가리 쪽을 '하늘'로 봐야 한다. 그래서 하늘에 떠 있는 구름은 보통 아가리에 가깝게 그린다. 〈사진3〉 스페인 발렌시아 그릇은 몸통에 수평으로 선을 몇 겹으로 그려 하늘과 그 아래를 구분 짓고, 하늘 속(파란 하늘 너머)을 그들의 세계관에 따라 표현했다고 볼 수 있다.
〈사진6〉 시리아 샤가르 바자르 유적에서 나온 신석기 항아리는 본질적으로 양양 오산리 덧무늬토기2와 도상이 똑같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삼각형 속 비(雨)를 빗금을 엇갈려 표현했을 뿐이다. 그리고 오산리 덧무기토기1 또한 〈사진4〉 영국 신석기 비커처럼 삼각형 구름을 엇갈려서 표현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오산리 덧무늬토기 두 점은 구름을 아가리 쪽에 새기지 않고 몸통 전체에 표현했다. 나는 이것을 양양 앞바다 수평선 위로 떠 있는 구름으로 읽고 싶다. 양양 오산리 신석기 유적은 기원전 5500년까지 내려 잡고 있다. 그렇다면 이 덧무늬토기 두 점에 그린 구름은 지금으로부터 7500년 전 신석기인이 그린 양양 앞바다 구름인 셈이다.
오산리 덧무늬토기 두 점은 우리나라 신석기 그릇 빗살(빗금)무늬의 비밀을 풀 수 있는 열쇠가 된다. 다음 글에서는 우리나라 '빗살무늬토기'의 비밀을 풀고자 한다. 이 빗살무늬의 뜻을 해석하는 일은 우리 한국미술의 기원을 찾는 일이고, 또한 그것은 청동기시대와 철기시대까지 맥을 잇는 작업이기도 하다.』
출처; 〈[차근차근 한국미술사 11] 양양 오산리 덧무늬토기 두 점에 숨어 있는 비밀-7500년 전 신석기인이 그린 강원 양양 앞바다 구름〉,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474264&CMPT_CD=SEARCH
한편 2014년 10월 15일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는 양양군 오산리 출토 토기 압흔(눌린 흔적)에서 신석기 시대인 7000년 전, 동북아에서 가장 오래된 팥 흔적이 발견됐다고 발표하였다. 강원도 양양군 손양면 송전리에서 발견된 점토 덩어리에서는 신석기중기에 해당하는 곤충의 압흔을 확인하였고, 송전리 출토 토기에서는 다량의 조, 기장 ,들깨 압흔도 발견하여 신석기 중기에 조, 기장 등의 잡곡과 들깨까지 직접 재배했을 가능성을 확인하였다.
『'동북아 最古' 7000년 前 팥 흔적 발견.. 신석기 시대 농사지었을 가능성 시사
김남중 기자 입력 2014. 10. 15. 02:50 수정 2014. 10. 15. 02:50
동북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7000년 전의 팥 흔적이 국내에서 발견됐다.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는 "강원도 양양군 오산리 출토 토기 압흔(壓痕·눌린 흔적) 조사에서 신석기 시대의 팥 흔적이 발견됐다"며 "지금까지 한국, 중국, 일본에서 팥을 재배한 시기로는 5000년 전이 가장 이른 것으로 추정됐는데, 이번 조사 결과로 이보다 2000년 더 이른 시기에 팥이 재배됐을 가능성이 확인됐다"고 14일 밝혔다.
발견된 팥 압흔은 2점이며 팥 압흔이 있는 토기 표면의 탄화유기물을 미국 베타연구소에 보내 연대 측정한 결과 7314∼7189년 전으로 나왔다. 팥 압흔의 크기는 각각 2.2㎜, 2.8㎜ 정도로 현재의 팥(4∼8㎜)보다 작다.
연구소는 또 강원도 양양군 손양면 송전리에서 발견된 점토 덩어리에서 신석기 중기에 해당하는 곤충의 압흔을 확인했다. 이 곤충은 농업 해충으로 알려진 노린재목에 속하는 것으로 선사시대 유물에서 발견된 것은 처음이다. 송전리 출토 토기에서는 다량의 조, 기장, 들깨 압흔도 발견됐다. 이는 신석기 중기에 와서 조, 기장 등의 잡곡과 들깨까지 직접 재배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조미순 연구사는 "지금까지는 신석기는 채집사회였으며 농경은 청동기에 시작된 것으로 추정됐다"며 "신석기 유물에서 기장이나 조, 들깨 등의 흔적이 다량 발견됨에 따라 신석기 시대에도 경작이나 농경이 있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게 됐다"고 의미를 설명했다. 김남중 기자 njkim@kmib.co.kr』
(출처; 국민일보, http://v.media.daum.net/v/20141015025004217)
2007년 4월 4일 예맥문화재연구원은 양양 여운포-송전간 도로 부지내 유적의 신석기층에서 수습된 수생식물이 자연 발아하였다고 발표하였다.
『신석기층 수습식물 자연발아?(종합)
입력 2007. 04. 04. 17:52 수정 2007. 04. 04. 17:52
사실이라면 세계적 사건..검증 남아
(서울=연합뉴스) 김승욱 기자 = 예맥문화재연구원은 강원 양양 여운포-송전간 도로부지 내 유적의 신석기층에서 수습한 수생식물이 자연 발아했다고 4일 발표했다.
발표대로라면 믿기지 않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중생대를 복원한 영화 '쥬라기공원'이 자칫 현실화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문제의 '발아 식물뿌리'가 출토된 지층은 중생대보다는 훨씬 시대가 뒤떨어지는 신석기시대 초기에 해당한다. 절대 연대로 환산할 때 지금으로부터 7천-8천 년 전 무렵에 해당한다.
신석기시대 문화층 '발아 뿌리'를 비상히 주목하는 까닭은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무엇보다 7천-8천년이나 된 뿌리가 과연 발아할 수 있는가 라는 원초적인 의문에서 비롯된다. 세계 고고학계에서는 이와 비슷한 사례가 서너 번 있다고 알려져 있으나, 기껏 그 연대는 2천 년 전 정도라고 한다.
예맥문화재연구원 정연우 원장은 "우리도 문제의 뿌리가 발아한 줄은 이틀 전에야 알았다"면서 "이 뿌리는 지난달 16일 개최한 오산리 유적 발굴설명회장에서도 뿌리 형태로만 공개됐던 것으로, 그날 이후 보존을 위해 증류수 안에 담가 두었는데 싹이 났다"고 전했다.
정 원장은 "증류수는 영양분도 없는데 어떻게 싹을 틔웠는지 모르겠으며, 나아가 신석기시대 식물뿌리라고 한다면, 그렇게 많은 시간을 흐른 지금에 과연 싹을 피울 수 있는지 다른 누구보다 나 자신이 궁금하기 짝이 없다"고 덧붙였다.
나아가 제 아무리 이번 발아 뿌리가 신석기시대 문화층에서 나왔다고 해서, 그 뿌리 연대 또한 그렇게 볼 수 있는가는 별개 문제가 된다. 지층의 교란 등을 통해 얼마든지 신석기시대 문화층에 뿌리나 씨앗류가 휩쓸려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대목에 대한 조사단 설명은 비교적 단호하다.
예맥문화재연구원 고동순 학예실장은 "발굴조사가 수작업으로 이뤄졌으며 그 결과 지하 4m 아래에서 1m 내외로 두텁게 퇴적된 층에서 다른 토기, 목기편 등과 함께 출토됐으므로 식물뿌리가 외부에서 들어갔다고 보기는 힘든 상태"라고 말했다.
문화재연구원에서 이 식물에 대한 분석을 의뢰받은 농촌진흥청 작물과학원 박태식 박사는 "이 식물뿌리는 습지에 많이 나는 단자엽 식물로 추정되는데 정밀분석을 위해 영양제를 넣어 키워 볼 생각"이라며 "휴면상태에서 깨어난 것으로 이해하기 힘든 신기한 일이지만 사실이라면 해외 토픽감이며 (발굴조사 당시) 외부에서 섞여 들어갔는지 등을 조사해야 할 것"이라고 조심스런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이것이 신석기시대 식물이라면 해외 토픽감을 뛰어넘어 세계적 사건이 될 수도 있다. 문제는 과연 이것이 신석기시대 식물이냐는 데 모아진다.
충분히 과학적 검증이 이뤄지지 못한 상태에서 '신석기 문화층 출토 식물뿌리 발아'라는 '주장'이 공개되자 예맥문화재연구원도 곤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정 원장은 "모 아니면 도"인 상황에 비유했다. 신석기시대에 속하는 식물이라면 이번 발굴은 그야말로 고고학사를 장식할 만한 사건이 되겠지만, 혹시라도 후대에 휩쓸려 들어간 식물로 밝혀진다면 망신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kind3@yna.co.kr』
(출처; 연합뉴스, https://news.v.daum.net/v/20070404175212526?f=o)
<참고자료>
문화유산 연구지식포털, 한국고고학사전(2001), 오산리유적,
http://portal.nrich.go.kr/kor/archeologyUsrView.do?menuIdx=792&idx=10592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pageNo=5_1_1_0&ccbaCpno=1333203940000
오마이뉴스, 〈[차근차근 한국미술사 8] 강원도 양양군 오산리 사람 얼굴 흙인형1-과연 이것이 신의 형상일까?〉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458549&CMPT_CD=SEARCH
오마이뉴스, 〈[차근차근 한국미술사 9] 강원도 양양군 오산리 사람 얼굴 흙인형2-과연 이것이 신의 형상일까 2〉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460425&SRS_CD=0000011849
국민일보, '동북아 最古' 7000년 前 팥 흔적 발견.. 신석기 시대 농사지었을 가능성 시사
https://news.v.daum.net/v/20141015025004217
연합뉴스, 신석기층 수습식물 자연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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