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환국과 신석기문화(10)

6.10 부산 동삼동패총 8000년 전~4000년 전(BC6000~BC2000)

 

사적 제266. 부산광역시 영도구 동삼동 7501 일원에 위치한다. 표주박 모양을 하고 있는 영도의 중앙에 자리 잡고 있는 봉래산과 남쪽의 태종산 사이의 중간 지점에 위치하는 고지성 산지의 동쪽 사면에 입지하며, 해안과 접하는 해발 49m 선상에 남북으로 길게 형성되어 있다. 199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민가와 경작 등으로 보존상태가 불량하였으나 현재는 유적 전체가 정비되어 보존, 관리되고 있다.

 

패총이 분포하는 영도는 해발 394.6m인 봉래산이 섬의 중간지대에 자리 잡고 있으며 이를 중심으로 동남쪽으로 약간의 거리를 두고 말단에는 해발 250.9m 태종산이, 봉래산과 태종산 사이에 봉래산에서 뻗어 나온 해발 155.8m 고지성 산지가 형성되어 있다. 유적 주변의 서남해안과 동남해안 일부지역은 경사가 급하고 암벽해안으로 이루어져 있어 주거와 생활환경으로는 적합하지 않다.

 

패총의 정면에서 동으로 1정도 떨어진 곳에 부산 조도패총, 지금은 소멸된 청학동패총과 영선동패총이 분포한다. 동삼동패총은 1929년 동래고등보통학교(현 동래고등학교) 교사였던 일본인 오이가와[及川民次郞]가 처음으로 발견하였고, 다음해인 1930년과 1932년에 요코야마[橫山將三朗]와 오이가와에 의해 3차례 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조사 결과 4개의 퇴적층이 확인되었고 빗살무늬토기를 비롯한 각종 석기, 골각기, 조개팔찌, 흑요석, 어패류, 동물뼈 등이 출토되었다.

 

이 시기의 동삼동패총 조사는 간단한 시굴조사에 불과하여 유적의 성격과 문화적 내용이 불분명한 점도 없지 않았으나 우리나라 신석기시대를 대표하는 표준 유적으로 자리 잡게 되면서 국내외적으로 주목을 받게 된다. 광복 후 19631964년에 미국 위스콘대학의 모아(Mohr, A.) 및 샘플(Sample, L.L.)에 의한 부분적인 시굴조사가 이루어졌으며, 19691971년까지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의해 3차례에 걸쳐 정식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다. 발굴 결과 한반도 신석기문화의 변천과정을 알 수 있는 전기·중기·후기의 3개 문화층이 확인되었으며, 한반도 신석기문화를 이해하는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되어 1979년에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국립중앙박물관의 조사에서는 원형의 화덕시설과 다양한 종류의 즐문토기를 비롯하여 석기, 골각기, 패제품, 일본 조몬토기, 흑요석 석기 등이 다량으로 출토되었다. 특히 신석기인의 신앙생활을 엿 볼 수 있는 조개가면과 토우, 어로문화의 실상을 파악할 수 있는 그물문토기, 배모양토기, 결합식조침, 작살 등도 출토되어 주목을 끌기도 하였다.

 

1999년 동삼동패총 조사는 유적 주변 정화사업과 패총전시관 건립과 관련하여 부산박물관(복천박물관)에서 실시하였으며, 기존의 조사에서 발견되지 않았던 주거지와 옹관묘, 1500여 점에 달하는 조개팔찌와 패제품, 불탄 조와 기장, 사슴문토기 등이 출토되어 동삼동패총 문화를 새롭게 인식할 수 있게 되었다. 부산박물관 조사에서는 5개 문화층이 확인되었으며, 여기서 다양한 종류의 자연유물과 빗살무늬토기, 석기, 골각기, 패제품, 토제품 등이 출토되었다.

 

2000년대 들어서는 동삼동패총 주변지역에 대한 각종 건설공사 구간에서 신석기시대 유물포함층과 각종 시설물 흔적이 발견됨으로써 동삼동패총을 중심으로 하는 신석기시대 생활유적지가 광범위하게 분포하고 있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경성대학교 박물관과 동아대학교 박물관에서 조사한 태종대 진입도로 확장구간에서는 주거시설과 관련한 기둥구멍과 구상유구, 적석유구와 각종 빗살무늬토기, 결합식조침, 석기, 토제품 등이 확인되었고, 동아대학교 박물관에서 실시한 해안지역의 수중조사에서는 빗살무늬토기 편들과 함께 뿌리가 박힌 채로 출토된 30,000년 전의 고대목들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동삼동패총의 층위는 조사지점에 따라 몇 개의 층들이 생략되기도 하고 새로이 형성되는 양상도 보이고 있어 전체 퇴적상태는 매우 복잡한 편이다. 그것은 동삼동패총이 단순히 패각층의 자연퇴적으로 이루어진 패총만이 아니라 시기와 시점에 따라 주거지역으로서 혹은 폐기장으로서 서로 다른 문화적 환경이 반복됨으로써 나타나는 현상에 기인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층위적 양상이 안정적이고 문화적 변화과정을 비교적 잘 보여 주는 것이 표토층을 포함 9개 층으로 구성된 부산박물관(복천박물관)의 층서이다. 동삼동패총 문화는 크게 층위적 퇴적양상과 출토 유물의 형식적 특징, 방사성탄소연대측정치를 참고할 때 5개의 문화층으로 나눌 수 있다.

 

동삼동문화층은 융기문토기가 중심을 이루며, 남해안지역 즐문토기문화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로 편년되는 조기 문화(기원전 60005000년 전후)에 속한다. 관련 유적의 분포와 생업도구의 특징으로 보아 해양을 생업무대로 전개된 문화로 추정된다. 출토된 유물은 융기문토기, 석기, 골각기, 패천 등이 있으나 토기를 제외하고 그 수량은 적은 편이다.

 

동삼동문화층은 3호주거지와 7층을 지표로, 샘플의 부산기와 국립중앙박물관의 3·4층 일부 유물을 포함한 영선동식토기가 주체를 점하는 남해안 전기 문화(기원전 45004000년 전후)이다. 출토 유물은 영선동식토기, 석기, 골각기, 패천, 패제품, 토우 등이 있다.

 

동삼동문화층은 부산박물관의 5, 1·2호주거지, 국립중앙박물관의 3층과 샘플의 두도기 일부가 포함되며, 남해안지역의 중기(기원 전 3000년 전후)의 태선침선문토기류(수가리식토기)가 중심을 이루는 시기이다. 퇴적 층서와 유구 간의 중복관계를 통해 볼 때 몇 단계로 세분이 가능하다. 출토된 유물은 토기·석기·골각기·패제품 등 그 종류와 양이 다른 문화층에 비해 월등히 많으며, 토기류가 많은 양을 차지한다. 그 밖에 각종 어패류를 비롯하여 육상과 해상의 동물유존체도 다량으로 출토되었다.

 

동삼동문화층은 3층과 4층을 지표로 국립중앙박물관 2·3층과 샘플의 두도기 일부 유물이 포함된 퇴화침선문토기(수가리식토기)와 봉계리식토기를 특징으로 하는 남해안지역 후기 문화(기원전 2500년 전후)에 속한다. 유물은 즐문토기, 조몬[繩文]토기, 석기, 골각기, 패제품, 토제품 등이 있으며, 각종 어패류를 비롯하여 육상과 해상의 동물유존체도 출토되었다.

 

동삼동문화층은 2층을 지표로 이중구연토기와 단사선문토기를 특징으로 하는 율리식토기가 중심을 이루는 시기이며, 남해안지역 신석기문화 말기(기원 2000년 전후)에 해당한다. 출토 유물은 토기, 석기, 골각기, 패제품과 일본 규슈지역의 후기 조몬토기가 있다.

 

동삼동패총과 그 주변지역에서 확인된 유구는 주거지, 수혈, 주혈군, 구상유구, 적석유구, 노지, 집석유구, 옹관묘 등이 있다. 동삼동패총에서 조사된 다양한 유구는 동삼동패총이 단순히 패총만이 아니라 주거와 무덤을 포함한 각종 생활시설이 다양하게 존재하는 복합유적임을 보여준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조사가 부분적인 조사에 불과하여 유구 간의 상호관계라든가 생활공간 내에서의 배치 및 분포 상태는 자세하지 않다. 이러한 점은 향후 조사를 기대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조사한 유구는 2차와 3차 조사구역에서 집석유구 2(석곽묘?)와 위석노지 4기이다. 집석유구는 보고서에서는 무덤인 석곽묘로 보고되어 있으나 위석노지와 인접하여 배치되어 있고 주변에서 화기 흔적이 확인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조리시설인 집석유구로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위석노지는 원형과 상형으로 구분되는데, 상형노지는 길이 0.5m, 너비 0.4m 정도이며, 납작한 역석을 세워 만든 형태이다. 원형노지는 직경 0.60.7m 정도이며, 구조는 상형노지와 같다. 집석유구는 활석을 23겹 중첩되어 있는 형태인데 크기는 0.851m 정도이다.

 

부산박물관 조사한 구역에서 드러난 유구는 8층 아래에서 유아용으로 추정되는 옹관묘 1기와 중기의 수혈주거지 3, 수혈 1, 주혈군 등이다. 주거지는 상호중복과 후대의 가옥축조로 상당부분 훼손되었지만 대략적인 구조는 파악할 수 있다.

 

주거지는 중복관계와 출토 유물 등으로 보아 312호 순으로 축조되어 있으며, 3호주거지는 전기의 영선동식토기 단계, 1·2호주거지는 중기의 수가리식토기 단계에 속한다. 주거지의 구조와 형태는 다소 불명확한 점도 없지 않으나 1호주거지는 말각방형 내지 장방형, 2호주거지는 원형의 수혈주거지로 추정된다. 3호주거지의 경우 일부만 조사하여 전체 구조는 알 수 없다. 2호주거지의 상부 퇴적층에 중복 설치된 4호수혈유구는 내부 출토 유물을 통해 볼 때 폐기구덩이로 추정된다. B·C피트와 1·2호주거지 주변에서 확인되는 주혈군은 주거시설과 관련된 것으로 추정되나 후대의 교란과 일부만 조사되어 구체적인 성격은 알 수 없다. 옹관묘의 구조는 길이 0.65m, 너비 0.5m, 잔존깊이 0.2m 정도의 묘광을 파고 옹관을 횡으로 안치한 형태로 추정된다.

 

경성대학교 박물관의 조사지역에서는 구상유구 5, 적석유구 1, 주혈군이 확인되었다. 적석유구는 상부가 파괴되어 원상을 알 수 없으나 범방유적에서 확인된 방형 적석유구와 비슷한 구조를 하고 있다. 규모는 길이 5.3m, 너비 4.6m이다. 구상유구는 길이 4.88.5m, 너비 0.352.3m, 깊이 0.20.35m 정도이다. 역시 부분적인 조사와 후대의 교란 등은 정확한 기능과 성격은 불투명하다. 이들 유구는 내부 출토 유물과 유적의 입지로 보아 신석기시대 조기의 생활 시설물로 추정된다. 동아대학교 박물관이 조사한 지점에서는 추정 주거지 1, 층위를 달리하는 주혈군, 구상유구 6기가 확인되었으며 시기는 신석기시대 조기로 추정되고 있다.

 

동삼동패총에서는 다양한 즐문토기, 각종 석제품, 골각기, 토제품, 패제품과 기타 어패류를 비롯한 각종 포유류의 유체들이 검출되었고, 이 밖에 당시 한·일 양 지역의 문화교류 실체를 보여 주는 일본 조몬[繩文]시대 규슈지역의 승문토기와 흑요석 등이 다량으로 출토되었다. 이들 유물은 기능과 성격로 본다면 수렵구, 어로구, 채집구, 장신구, 의례구, 동식물유체 등으로 구분된다.

 

즐문토기는 기왕에 알려진 것과는 큰 차이는 없으나 조기의 융기문토기류부터 전기 자돌압인문토기, 중기 태선침선문토기, 후기 퇴화침선문토기·봉계리식토기, 말기 이중구연토기·단사선문토기 등 다양한 형식의 즐문토기가 다량 출토되었다. 특히 조기 후반대의 융기문계토기와 중기의 태선침선문계토기는 문양구성과 시문수법, 기형 등에서 다양한 형식 구성을 보여주고 있다. 최하층인 9층에서 출토된 평행융대문토기는 지두로 각목한 융기문의 시문수법으로 보아 남부지방 융기문토기 중에서 가장 고식에 속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 밖에 사슴선각문토기, 그물문토기, 배모양토기, 우각형토기 등 이형토기도 출토되었다. 사슴선각문토기는 울주 반구대암각화의 제작 시기를 추정하는데, 배모양토기는 창녕 비봉리유적 출토 배와 함께 신석기시대 배 구조와 형태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석기류는 타제석부, 마제석부, 석착, 작살, 석추, 갈돌, 갈판, 고석, 박편석기, 원추형석기, 원반형석기, 지석, 유견석부, 어망추, 결합식조침, 결합식 석제 작살, 장신구 등이 출토되었다. 골각기는 용도를 달리하는 여러 종류가 출토되었는데 재질은 대부분 사슴이나 멧돼지, 고래뼈를 가공한 것도 있다. 종류는 결합식조침을 비롯하여 ‘T’자형조침, 자돌구(刺突具), 첨두기, 작살, 빗창, 수식, 뒤꽂이, 원판형골각기 등이 있는데, 자돌구류가 주류를 이룬다. 이 밖에 다양한 형식의 조개팔찌와 토제이식(土製耳飾), 곰모양 토우 등 패제품과 토제품도 출토되었다. 특히 투박조개로 만든 패천(貝釧)은 지금까지 유례를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수량이 출토되었는데, 제작공정과 패륜부의 형태적 특징에 따라 여러 형식으로 나누어진다.

 

지금까지 동삼동패총에서 출토된 일본 조몬계 유물은 여러 형식의 토기를 비롯하여 흑요석제 석촉, 서북규슈형의 석거(石鋸) 등 다양한 흑요석제 석기가 있다. 조몬토기로는 조몬 전기의 도도로키B[B]토기, 소바타식[曾畑式]토기, 중기의 후나모토[船元]토기, 아타카식[阿高式]토기, 후기의 난부쿠지식[南福寺式]토기 등이 있다. 이들 조몬계토기는 조몬 전기에서 후기에 걸치는 서북규슈지역의 토기형식이며, 시기적으로 한반도 남부의 조기에서 만기의 즐문토기와 병행관계를 갖는다.

 

조몬계석기로는 흑요석제 석촉·박편석기·석거(石鋸석섬(石銛석추(石錐) 등이 있는데 이 중에는 직접 규슈지역에서 반입된 것과 조몬석기의 영향으로 재지에서 만든 것으로 구분된다. 전자의 대표적인 것이 흑요석 원석이고, 후자의 예가 석거이다.

 

고고유물 이외 각종 어패류·포유류·식물유체 등 자연유물이 대량으로 검출되었다. 식물유체로는 탄화된 조, 기장이 중기의 1호주거지에서 확인되었는데, 신석기시대 중기에는 한반도 전역에 잡곡농경이 보급되었음을 보여준다는 점에 중요한 자료이다.

 

동삼동패총은 각 문화층의 방사성탄소연대측정 결과 기원전 60002000년 전후한 시기까지 장기간에 걸쳐 형성되었으며, 여기서 출토된 각종 토기류와 석기, 골각기, 패제품, 토제품, 의례구와 자연유물은 남해안지역 신석기문화의 특징과 변천과정을 이해하는 많은 정보를 제공해주고 있다. 패총에서 출토된 일본 규슈지역의 조몬토기와 흑요석석기 등은 동삼동패총인이 이른 시기부터 바다 건너 일본과 교류하고 있음을 증명해주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하인수)

(출처; 문화유산 연구지식포털, 한국고고학전문사전, 신석기시대편, 동삼동패총,

https://portal.nrich.go.kr/kor/archeologyUsrView.do?menuIdx=795&idx=697)

 

 

[고고학자 조유전과 떠나는 한국사 여행](19) 부산 영도 동삼동패총 유적

 

신석기문화 위용 드러낸 동삼동 팔찌 수출단지

최고급 장신구 투박조개 팔찌유물 무더기로 출토

일본 흑요석 수입해 석기제작 왕성한 교역거점 추정

조개가면·토우 등도 발견한국 고고학계 산실로

 

대체 동삼동 패총(貝塚)이 무엇인데 이렇게 호들갑을 떠는가.

 

흔히 조개무지라 하는 패총은 사람들이 먹고 버린 조개껍데기가 오랜 기간 쌓여 만들어진 유적이다. 한마디로 선사시대 음식물 쓰레기장인 셈이다. 1만 년 전 신석기시대에 들어오면서 바닷가에 모여 살던 사람들이 남긴 생생한 삶의 흔적이다. 원래 우리나라의 땅은 산성(酸性)이 많이 함유된 특징 때문에 동물이나 물고기뼈를 비롯한 유구와 유물이 남아있는 경우가 드물다.

 

 

 

동삼동 팔찌공장에서 대량생산된 조개팔찌(패천). 한반도산 조개팔찌와 열도산 흑요석이 교역의 주대상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백골이 진토(塵土)된다는 말이 딱 맞다. 하지만 석회질로 된 조개껍데기는 토양을 알칼리성으로 바꾸기 때문에 패총 안에 들어있는 유구와 유물들이 잘 썩지 않고 지금까지 보존되는 경우가 많다.

 

토기와 석기, 뼈연모, 토제품 등 생활도구는 물론 무덤과 집자리, 화덕시설까지 발견되는 경우가 많다. 만약 선사시대 사람들이 지금처럼 유난을 떨며쓰레기 분리수거를 했다면? 우리는 선사시대가 남긴 숱한 삶의 정보를 잃어버렸을 것이다. ! 현명한 우리의 선사인들이여!

 

곰 신앙의 정체

 

특히 동삼동 패총은 선석기 초기인 BC 6000년부터 말기인 BC 2000년까지 4000년 동안 신석기인들의 삶이 고스란히 묻혀있어요. 각종 토기류와 석기, 골각기, ()제품, 토제품, 의례품을 포함해 그때의 자연환경과 일상생활의 모습을 보여주는 유물들이 포함돼있어요. 그러니 신석기시대의 전 과정을 속속들이 들여다볼 수 있는 거지.”(조유전 토지박물관장)

 

찬찬히 뜯어보자. 먼저 이곳에서 숱하게 출토된 덧띠무늬(융기문) 토기들은 연대 측정결과 유적 조성연대가 BC 6000년임을 알려준다. 울산 세죽유적과 강원 고성 문암리 출토 덧띠무늬 토기와 같은 시기임이 판명되었다.

 

강원 고성 문암리라든가, 중국 동북방 발해연안 차하이(査海)-싱룽와(興隆窪) 유적BC 6000년 유적과 같은 시대임을 알 수 있어요. 또 다양한 문양의 빗살무늬 토기류가 쏟아졌는데, 토기에 이렇듯 갖가지 문양을 새기면서 예술적 감각을 발휘한 사람들이라 할 수 있지.”(조 관장)

 

출토 유물 가운데 재미있고 의미 있는 몇 가지를 소개하자면. 우선 종교의례와 관련된 유물들.

 

 

 

동삼동에서 확인된 사람 얼굴 모양의 조개가면.

 

조개가면은 크기가 12.9, 11.8정도인데, 국자 가리비에 사람의 눈과 입 모양으로 구멍을 뚫은 형상이다. 집단의 공동체 의식이나 축제 때 사용했거나 혹은 벽사의 의미를 담은 주술구로 활용됐을 가능성이 크다.

 

 

 

동삼동에서 확인된 곰형 토우(土偶).

 

흙으로 만든 곰() 모양의 토우(土偶)도 의미심장하다. 이 유물은 BC 4500~BC 3500년 문화층에서 확인됐다. 기자는 이 토우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바로 훙산문화(紅山文化·BC 4500~BC 3000) 유적지인 중국 뉴허량(牛河梁) 유적에서 발굴된 곰이빨과 흙으로 만든 곰 소조상, 곰 모양 옥기(玉器)를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훙산문화 시대는 동이족이 창조한 발해문명이 꽃을 피우기 시작한 때.

 

뉴허량 유적은 제단(신전(무덤(·적석총)이 결합된 제사유적. 그런데 바로 여신을 모셨던 신전과 조상에게 제사를 지냈던 제단·적석총 등에서 유물들이 나온 것이다. 중국학계는 이로써 훙산인들의 곰 숭배 사상을 엿볼 수 있다고 결론을 내린 바 있다.

 

기자의 시선을 더욱 붙잡은 것은 동삼동 출토 곰 토우의 연대가 훙산문화와 같은 시기라는 점이다. 이것은 역시 지금의 중국 동북방과 한반도 최동남단은 같은 문화권이었음을 증거해 주는 단서이다.

 

 

사슴그림의 비밀

 

또 하나 재미있는 유물의 탄생비화. 2003년 어느 날, 당시 하인수 복천박물관 조사보존실장(현 복천박물관장)은 동삼동 패총에서 쏟아진 유물정리에 눈코 뜰 새가 없었다.

 

“1999년 동삼동 패총을 발굴할 기회가 있었는데요. 그런데 출토된 토기가 편을 합해 유물상자로 300상자가 됐어요. 그야말로 흙 반 유물 반이라는 우스갯소리가 나왔어요. 그걸 스폰지나 칫솔 같은 도구로 토기에 묻은 흙을 씻어내느라 죽을힘을 다했는데.”

 

기형과 문양별로 토기를 분류·정리해야 무문토기인지, 덧띠무늬 토기인지, 빗살무늬인지 알 수 있고, 빗살무늬라도 세부 문양이 어떤지를 파악해야 문화양상과 시대구분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작업이 막바지에 접어들었는데 어느 토기편(길이 8.7, 너비 12.9)에 눈이 한 번 더 갔어요. 뭔가 선각(線刻)한 듯한 문양이 있는데, 왠지 단순한 문양이 아닌 것 같았어요.”

 

일일이 칫솔로 토기편을 씻어내던 하인수의 손이 떨렸다.

 

그것은 사슴그림이 분명했어요. 얼마나 흥분했는지.”

 

사슴 그림은 뼈나 대칼 같은 도구로 폭 2~3의 선각으로 그렸다. 세밀한 형상은 과감하게 생략하고 그 특징만 잡아 추출 묘사함으로써 대상물의 이미지를 간결하고 단순하게 형상화했다.

 

처음 길게 그은 선의 3분의 1 지점에 수직으로 선을 내려 사슴의 목과 몸체를 구분하고, 몸체는 사다리꼴 모양으로 묘사했어요. 이 그림은 걸어가고 있는 사슴의 형상이 분명합니다. 신석기인이 이토록 첨단의 미술기법을 발휘하다니.”

 

반면 경주 출토로 알려진 견갑(肩甲)형 청동기와 아산 남성리 석관묘 출토 검파(劍把·칼자루)형 청동기 등에 보이는 청동기시대 회화는 굉장히 사실적이다. 곧 정신을 차린 하인수는 울산 반구대 암각화를 주목했다.

 

반구대 암각화는 청동기 시대 것이라는 설이 지배적이었어요. 암각화 제작에 고래 사냥에 표현된 작살의 형태가 청동기일 것이라는 추정을 토대로. 따라서 반구대 암각화에 나오는 전문적인 고래사냥 또한 청동기 시대 때 일어난 일이라고 보았고.”

 

하지만 동삼동 패총에서 보인 사슴그림은 반구대 암각화 사슴과 미술사적으로 동일한 양식이었다.

 

이런 측면에서 또 하나 유의해야 할 것은 바로 고래사냥입니다. 지금까지는 신석기 시대에는 고래사냥이 불가능했다는 주장이 정설이었는데요. 문제는 동삼동 패총의 전 문화층에서 고래뼈가 다량으로 출토됐다는 것입니다. 다른 남해안 유적에서도 고래 유존체와 함께 대형석제 작살이 출토되고 있다는 것은 무얼 말합니까.”

 

그것은 신석기 시대에 이미 고래사냥이 성행했음을 웅변하고 있었다.

 

수출용 팔찌를 생산한 산업단지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하인수가 또 주목한 것은 1999년 조사에서 확인된 1500여 점에 이르는 조개팔찌(패천·貝釧), 발굴조사 때마다 보이는 일본산 흑요석이었다.

 

이상하게 생각했어요. 발굴된 1500여점을 유심히 보면 완제품은 물론 파손된 제품과 아직 제작되지 않은 제품 등이 섞여 있어요. 출토 팔찌의 70~80%는 중간단계에서 파손됐고, 일부는 마연 및 마무리 단계에서 깨졌어요. 조개팔찌를 만드는 작업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런 현상을 종합하면 동삼동에는 대규모 팔찌공장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얘기다. 문제는 팔찌의 재료가 밤색무늬조개과에 속하는 투박조개(90%)라는 점. 이 투박조개는 수심 5~20m 사이의 모래밭에서 서식하는데, 바위가 많은 일본 대마도에서는 볼 수 없다. 하인수는 투박조개가 서식한다는 동해안 죽변과 부산 광안리 해수욕장을 수시로 답사했다.

 

투박조개가 어떻게 서식하고 잡히는지 직접 잠수복도 입지 않고 바다에 뛰어들어 채집까지 해봤어요. 그래서 결론을 얻었습니다. 이 동삼동 패총의 조개팔찌는 광안리산 투박조개였다는 것을.”

 

그리고 또 하나. 투박조개는 매끌매끌하고 워낙 단단해서 떨어뜨려도 깨지지 않을 정도지만 그만큼 가공하기 어렵다는 사실도 알았다. 그러니 조개팔찌를 만드는 사람들은 당대 최고의 기술자였던 셈이다. 덧붙이면 실패율이 그렇게 높았어도 투박조개만 고집한 것은 투박조개 팔찌가 최고급 장신구였음을 시사해준다. 재미있는 사실은 일본 규슈 사가(佐賀) 패총에서 출토된 조개팔찌 113점 가운데 투박조개 팔찌가 84%(95)나 된다는 점. 대마도에서는 나지 않는 투박조개 팔찌가 왜 대마도에서 다량으로 나오는가. 그리고 일본산 팔찌의 제작방법과 형태, 속성이 동삼동 것과 완전히 일치했다. 이것은 동삼동산 조개팔찌가 대마도와 일본 규슈로 대량 수출됐다는 이야기다.

 

일본산 흑요석의 의미

 

그렇다면 수입품은? 하인수는 그것을 일본산 흑요석이라 본다.

 

석기를 제작하는 데 쓰이는 흑요석은 한반도에서는 백두산 정도에서만 나옵니다. 그런데 동삼동 패총을 비롯, 남해안 패총 유적 18곳에서 출토되는 흑요석은 대부분 일본 규슈 고시다게(요악·腰岳)산입니다.”

 

 

 

동삼동 팔찌공장에서 제작된 조개팔찌(패천)와의 교역품일 가능성이 큰 일본산 흑요석.

 

 

또 하나, 하인수는 대마도에서 확인된 고시다카(越高) 유적을 주목했다. 이곳에서는 한반도산 융기문 토기가 2600여점 쏟아진 반면, 일본계 유물인 승문(繩文·새끼줄 문양)토기는 단 7점에 불과했다.

 

곧 대마도에는 동삼동 등 한반도에서 건너가 중개무역을 담당했던 집단이 존재했을 수도 있었다는 얘기가 됩니다. 한반도인들은 대마도에 둥지를 틀고 동삼동산 최고급 조개팔찌와 일본산 흑요석을 물물교환이나 아니면 다른 교역의 형태로 거래한 것입니다.”(하인수)

 

그런데 수입된 흑요석의 경우엔 완제품도 있었겠지만 원석도 있지?”(조 관장)

 

. 통영 연대도 패총에서는 전혀 가공되지 않은 길이 4.8, 너비 3.3, 두께 2.5, 무게 43.6g의 흑요석 원석이 확인됐어요. 그것은 한반도 사람들이 원석을 가져다 정교한 석기를 제작했다는 얘기입니다.”(하인수)

 

결국 동삼동은 당대 최대의 수출용 팔찌를 제작한 산업단지였음을 알 수 있다. 이밖에도 흑요석이 집중 출토된 부산 범방패총, 통영 욕지도·연대도 패총 등은 수입된 흑요석으로 석기를 제작한 거점지역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사슴그림이 새겨져 있는 토기편(왼쪽). 세부모양은 과감하게 생략했고, 사슴의 특징만을 따서 시원시원하게 그렸다.

 

사실 한반도와 일본열도, 그리고 제주도 간 교역은 이미 구석기말~신석기 초부터 시작됐는데, 동삼동에서 제주 북촌리식 토기와 규슈산 승문토기 등이 보이는 이유이다.

 

한반도 동남부와 일본열도 서북 사이는 200정도 떨어져 있는데, 어떻게 8000년 전부터 이런 교역이 이뤄졌냐고요? 해양학을 전공한 윤명철 교수(동국대)의 연구에 따르면 항해도구와 항해술이 발달하지 않았던 선사시대에도 기본적인 항해수단만 있으면 자연조건을 이용해서 바다를 건널 수 있다고 해요.”

 

예컨대 규슈해안~한반도 남해안에 닿으려면 대마도 남서해안에서 북서방향으로 진행하면서 대한해류를 타고 항해할 경우 동남해안인 부산까지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이기환 선임기자

 

(출처; 경향신문, [고고학자 조유전과 떠나는 한국사 여행](19) 부산 영도 동삼동패총 유적 , 20081031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mode=view&artid=200810311728155&code=900305#csidx8d34feb9a6c4a329d7f3c34a11a80ac)

 

동아일보

반구대 암각화미스터리 푼 열쇠, 5천 년 전 토기에 새겨져 있었다.

김상운 기자

입력 2017-03-29 03:00업데이트 2017-03-29 11:59

 

[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29> 동삼동 패총의 재발견 하인수 부산근대역사관장

 

 

 

동삼동 패총 토기조각(첫 번째 사진)과 반구대 암각화(두 번째 사진)에 새겨진 사슴 그림. 사다리꼴모양의 몸통과 선으로 간략히 묘사된 뿔, 얼굴, 다리 등이 서로 유사하다. 반구대 암각화를 신석기인이 처음 그렸다는 사실을 뒷받침하는 증거다. 하인수 관장 제공

 

한적한 어항(漁港), 배를 수리하는 어부들이 보인다. 8000여 년 전에도 고래와 물고기, 조개를 잡아 올린 어부들이 여기 있었다. 시대를 초월한 데자뷔인가. 27일 부산 동삼동 패총(貝塚·조개무지) 유적에서니 코앞에 너른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선사(先史)인들이 먹고 버린 조개껍데기가 무더기를 이룰 만한 장소였다. 그러나 이곳은 단순한 음식물 쓰레기장이 아니었다. 1999년 하인수 당시 부산 복천박물관학예연구실장(57·현 부산근대역사관장)의 손을 통해 집터와 무덤(옹관)이 처음 모습을 드러낸 곳이다. 기원전 6000기원전 2000년 약 4000년에 걸쳐 신석기인들이 먹고 자고 버린 생활 흔적이 패총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반구대 암각화미스터리 풀 열쇠

 

이기 뭐꼬? 그림 아이가?”

 

20042월 초 부산박물관 연구실. 5년 전 동삼동 패총에서 손수 발굴한 토기조각들을 정리하던 하인수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토기를 종횡으로 가로지르는 음각선이 우연히 눈에 들어왔다. 게다가 토기 표면은 붉은색이 완연했다. 대충 만든 게 아니라 채색까지 할 정도로 공을 들였다는 뜻이었다.

 

철로 만든 핀으로 토기에 묻은 흙을 조심스레 긁어내자 사다리꼴을 그리던 음각선은 다시 위아래로 이어졌다. 그의 눈은 점점 커졌다. 처음 눈에 들어온 사다리꼴은 몸통, 윗선은 머리, 아랫선은 다리가 분명했다. 그것은 신석기인들이 그린 한 마리 사슴이었다. 하인수의 회고. “다른 토기에서 흔히 보이는 조잡한 선이 아니었어요. 보는 순간 조형미가 느껴졌습니다. 사슴 그림이란 걸 알고서 온몸에 전율이 흐릅디다.”

 

그때까지 신석기시대 그림은 이것이 유일했다. 선사시대 그림은 매우 희귀한 데다 선사인들의 가치관과 정신세계를 유추할 수 있는 핵심 자료라는 점에서 귀중하다. 2만여 개에 이르는 엄청난 분량의 토기조각에서 그림을 찾아낸 건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기와 같았다. 1차 조사에서 무늬가 없는 걸로 분류된 토기들을 모아 최종 확인하는 과정에서 건져낸 월척이었다.

 

무엇보다 동삼동 사슴 그림은 울산 반구대 암각화’(국보 제285) 미스터리를 풀 열쇠였다. 당시 학계는 반구대 암각화에 새겨진 고래잡이 그림 등을 근거로 청동기시대 후기 유물로 봤다. 석기로 고래를 잡는 건 불가능하다는 논리였다. 그러나 하인수의 생각은 달랐다. 암각화와 동삼동 패총 토기에 새겨진 사슴 그림은 전체적으로 간략하고 몸통을 사다리꼴로 표현했으며 몸통에서 이어진 선으로 다리를 표현하는 방식 등이 서로 유사했다. 더구나 뼈로 만든 화살촉이 박힌 고래 뼈가 울산 황성동에서 발견돼 신석기인들의 고래 사냥이 증명됐다. 이에 따라 반구대 암각화는 신석기인들이 처음 그렸다는 하인수의 주장은 통설로 받아들여졌다.

 

신석기인은 원시적편견 깨다

 

1930년대 일본 학자를 비롯해 1960, 70년대 미국 학자 A 모아와 서울대, 국립박물관이 동삼동 패총을 잇달아 발굴했지만 누구도 집터와 무덤을 찾지 못했다. 조개무지라는 선입견에 갇혀 내부에 다른 유구가 있으리라곤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인수는 속단하지 않고 토층 조사를 치밀하게 진행해 신석기시대 집터와 한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옹관을 동시에 발견했다.

 

신석기인들은 수렵·채집에만 의존했다는 편견을 버린 것도 중요한 연구 성과로 이어질 수 있었다. 패총 집터 안에서 기원전 3300년 무렵의 탄화된 조와 기장이 나왔고, 출토 토기에서 기원전 50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조의 압흔(壓痕·눌린 흔적)이 발견됐다. 하인수는 이는 이미 신석기시대 중기부터 한반도 전역에 걸쳐 조, 기장 등 밭농사가 보편화됐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말했다.

 

 

 

부산 동삼동 패총에서 출토된 조개 팔찌. 조개에 구멍을 뚫어 만든 장신구다. 부산박물관 제공

 

한발 더 나아가 동삼동 패총 신석기인들이 해외 교역까지 한 정황도 포착됐다. 조개 팔찌 1500여 점과 일본산 흑요석, 조몬(繩文) 토기가 함께 출토된 것이다. 조개에 구멍을 내 장신구로 만든 조개 팔찌는 워낙 가공이 힘들어 귀한데, 일본 규슈 사가(佐賀) 패총에서 한반도산 투박조개 팔찌가 90여 점이나 발견됐다. 동삼동 패총에서 나온 흑요석들의 성분을 분석한 결과 일본 규슈 고시다케(腰岳)가 산지(産地)인 걸로 조사됐다. 하인수의 설명.

 

동삼동 패총에선 배 모양 토기가 나왔습니다. 아마도 이곳 신석기인들은 배를 타고 일본 열도까지 건너가 조개 팔찌와 흑요석을 교환한 걸로 보입니다. 한일 교류사는 멀리 선사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셈이죠.”

(출처; 동아일보, [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29> 동삼동 패총의 재발견 하인수 부산근대역사관장,

https://www.donga.com/news/List/Series_70040100000214/article/all/20170329/83574607/1)

 

 

참고자료

 

문화유산 연구지식포털, 한국고고학전문사전, 신석기시대편, 동삼동패총,

https://portal.nrich.go.kr/kor/archeologyUsrView.do?menuIdx=795&idx=697

 

경향신문, [고고학자 조유전과 떠나는 한국사 여행](19) 부산 영도 동삼동패총 유적 , 20081031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mode=view&artid=200810311728155&code=900305#csidx8d34feb9a6c4a329d7f3c34a11a80ac

 

동아일보, [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29> 동삼동 패총의 재발견 하인수 부산근대역사관장,

https://www.donga.com/news/List/Series_70040100000214/article/all/20170329/8357460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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