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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국-가사라국》 6. 환국과 신석기문화 (7)고성 문암리유적 본문

지음/《환국-가사라국》

《환국-가사라국》 6. 환국과 신석기문화 (7)고성 문암리유적

대야발 2024. 2. 16. 11:11

 

《환국-가사라국》

 

6. 환국과 신석기문화(7)

 

6.7 고성 문암리유적 - 8,000년 전~5000년 전(BC 6000년~3000년)

 

 

 

차하이 옥결, 싱룽와 옥결, 고성 문암리 옥결(왼쪽부터)

(출처; 코리안루트를 찾아서(6) 싱룽와 신석기 유적-동이의 발상, https://www.khan.co.kr/article/200711091447501)

 

 

 

신석기시대 주거지 5기, 야외노지 5기, 매장유구 1기, 경작유구(밭) 등의 유구가 확인되었고, 신석기시대 전기의 순수 무문양토기, 융기문토기, 침선문토기, 결합식낚시어구, 결상이식(옥귀걸이) 등 다수 유물도 출토되었다. 신석기시대 밭은 석기(돌괭이, 뒤지개, 보습, 갈판, 갈돌 등), 탄화곡물(조, 기장) 그리고 곡물 토기 압흔으로만 추정할 수 있었던 신석기시대의 농경에 대한 보다 명확한 증거를 찾아낸 것으로 본다.

 

『강원도 고성군 죽왕면 문암리에서 조사된 신석기시대의 유적.

사적 제426호. 이 유적은 국립문화재연구소가 1991년부터 추진한 『군사보호구역 내 문화유적 지표조사』 사업의 일환으로 1997년도에 실시한 고성군 지역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처음 발견되었다. 동해안에서 내륙 쪽으로 약 400m 떨어진 구릉 지대 남쪽사면의 사구(沙丘) 지대에 위치한다. 유적을 중심으로 북으로는 동해안에 면해 있는 해발 41.9m의 야산에 의하여 둘러싸여 있고, 남·서쪽으로는 넓은 평야와 문암천(文岩川)이 동해로 흘러 들어간다. 동으로는 약 400m 거리에 동해안이 펼쳐져 있어 예로부터 선사인들의 생활 근거지로서 알맞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

 

발굴조사는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3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다. 1차 조사는 1998년 12월 2일부터 1999년 3월 31일까지 유적의 정확한 성격과 분포범위, 층위와 형성과정 등을 확인하기 위하여 실시하였다. 1차 조사에서는 5개의 유물포함층과 3개의 신석기시대 문화층(서기전 6,000~3,000년)이 퇴적되어 있음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3기의 주거지와 야외노지(野外爐址) 등 다양한 유구도 발견되었다.

 

2차 조사는 2002년 10월 28일부터 12월 28일까지 이루어졌다. 2차 조사에서는 신석기시대 주거지(住居址) 3기(基), 매장유구(埋葬遺構) 1기 등 8기의 유구(遺構)와 무문양토기(無文樣土器), 덧무늬토기(隆起文土器), 결상이식(玦狀耳飾) 등 다양한 유물이 확인되었다.

 

3차 조사는 『고성 문암리 선사유적 종합정비계획』의 일환으로 2010년 4월 28일부터 8월 2일까지 실시되었고, 추가 정밀발굴조사가 2011년 7월 14일부터 2012년 7월 31년까지 진행되었다. 3차 조사에서는 신석기시대 주거지 5기, 야외노지 13기 등의 유구와 함께 경작유구(耕作遺構)인 ‘밭’이 확인되었는데, 이중 ‘밭 유구’는 ‘동아시아 최초로 확인된 신석기시대의 농경유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밭과 함께 경작과 관련된 유물도 다량 출토되었다. 석기로는 돌괭이·뒤지개·보습·갈판·갈돌 등이 있고, 탄화곡물로는 조와 기장이 있다.

 

토기와 석기 등 다량의 유물들이 수습되었는데, 토기는 안정된 층위에서 뚜렷한 층서를 갖고 출토되었다. 그동안 층위상의 문제를 안고 있었던 오산리유적의 연대와 토기 편년(編年)을 보완할 수 있는 등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이 유적은 크게 신석기시대 전기(前期)와 중기(中期)로 구분된다. 이 가운데 신석기시대 전기는 다시 융기문토기(隆起文土器)와 전형적인 오산리식토기(鰲山里式土器)가 중심을 이루고 있는 문화층(Ⅷ층~Ⅵ층)과 무문양토기(無文樣土器) 혹은 원시무문양토기(原始無文樣土器)만 출토되는 문화층(Ⅹ층과 Ⅸ층)으로 나누어진다. 각 문화층에서 출토된 토기를 중심으로 하여, 이 유적의 시기는 3단계로 설정할 수 있다.

 

1단계는 순수무문양토기 혹은 원시무문양토기만 출토되는 단계이다. 기형(器形)는 발형(鉢形)이다. 내·외면은 긁기와 물손질로 정면처리하였고, 태토(胎土)는 석영과 장석이 다량 함유된 사질토를 사용하였다. 이런 토기는 청도 오진리의 바위그늘 유적과 제주도 고산리유적에서도 출토된 바 있다. 제작기법으로 보아 융기문토기보다 앞서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2단계는 융기문토기와 오산리식토기가 출현하여 그 수가 급격하게 증가하는 단계이다. 융기문토기는 Ⅷ층~Ⅵ층에서 집중적으로 출토되었다. 기형은 발형이며, 구연(口緣)은 직립하고, 바닥은 평평하다. 점토띠를 수평 방식으로 붙여 쌓아 올렸다. 문양은 횡융기문(橫隆起文), 횡융기문+삼각융기문(三角隆起文), 횡융기문+종융기문(縱隆起文), 종융기문 등 다양하다. 이와 함께 오산리식토기도 Ⅷ층에서부터 전 층에 걸쳐 고루 출토되었다. 기형은 발형·옹형·접시형 등 다양하고, 바닥은 평평하다.

 

3단계는 융기문토기와 오산리식토기는 줄어들고, 침선문토기(沈線文土器)가 출현하는 단계이다. 문양은 단사선문(短斜線文)+횡주어골문(橫走魚骨文)·능문(菱文)·삼각문(三角文)·횡주어골문·격자문(格子文) 등 다양하다. 이런 토기는 동해안지역에서 문암리유적 외에도 오산리유적, 지경리유적, 가평리유적 등에서도 출토된 바가 있다.

 

이런 토기의 변화단계로 보아 양양 오산리유적의 연대와 유사하거나 좀 더 이를 것으로 여겨진다. 오산리식토기 보다 이른 시기의 순수무문양토기 문화층이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오산리유적은 층위상의 문제가 제기되고 있으나 1호 집터 등 제1문화층에서 채집한 숯의 방사성탄소연대(放射性炭素年代) 측정결과, 대부분이 서기전 5,000년~4,000년경으로 확인되었다.

 

따라서 이 유적의 상한 연대는 서기전 5,000년을 상회할 것으로 판단되어 한반도 최고의 신석기시대 유적 중 하나로 볼 수 있다. 이와 관련한 유물로 매장유구에서 출토된 결상이식(玦狀耳飾)이 가장 주목된다. 결상이식은 청도 사촌리유적과 동삼동 패총에서 발견된 바가 있었으나 발굴 조사된 유물로는 최초라는 점에서 그 학술적 가치가 높다. 시기상으로는 기원전 5,000년경에 해당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 최근에 발견된 경작유구인 밭의 하층에서 채취한 토양(모래)에 대한 OSL(광자극 루미네선스측정) 연대측정 결과가 약 5,000년 전(5,000±700 B.P.)이라는 연대가 검출되었다.

 

이 유적은 지금까지 동해안에서 발견된 신석기시대의 유적 중 가장 북쪽에 위치하며, 우리나라 신석기시대 문화상을 규명함에 있어 매우 중요한 유적으로 여겨지고 있다. 최근까지 발굴조사에서 5개의 유물포함층과 당시의 생활면을 비롯한 3개의 문화층을 비롯하여 주거지 3기, 야외노지 3기, 목탄 및 소토유구 2기, 경작유구 등이 확인되었다.

 

주거지(住居址)의 평면 형태는 원형·말각장방형·장타원형 등 다양한 편이다. 규모도 다양한데, 크기가 대체로 4m 내외이다. 이 중에서 02-7호 주거지의 규모는 길이가 770㎝, 너비가 450㎝를 하고 있다. 평면 형태는 장타원형으로 오산리 등 주변 지역에서도 발견된 예가 없는 독특한 형태이다. 주거지의 바닥은 점토를 깔고 불다짐한 경우(98-1호, 02-1호·5호·7호)와 모래바닥을 그대로 이용한 것(98-2호) 등으로 구분된다. 특히 주거지의 중앙에 자리잡은 노지는 바닥면을 얕게 파고 주위를 할석으로 돌려 만들었고, 내부에는 목탄층이 퇴적되었다. 노지의 평면 형태는 원형 혹은 장방형이고, 노지의 지름은 1m 내외이다. 또한 주거지 외부에서도 야외노지 6기가 발견되었는데, 이 중 4기는 돌을 돌린 형식이고, 2기는 아무런 시설없는 무시설식으로 재만 남아 있다.

 

주거지 주변에서는 원형·부정형·말각방형 등 다양한 형태의 수혈(竪穴)이 다수 확인되었다. 수혈의 깊이는 얕고, 유물이 거의 출토되지 않아 그 기능을 제대로 알 수 없었다. 다만 02-8호 수혈의 규모는 길이 174㎝, 너비 92㎝, 깊이 14㎝를 하고 있었고, 내부에서 석부(石斧) 7점과 석영제 박편(薄片)과 함께 결합식 낚시바늘이 37점이 출토되어 석기 저장공으로 추정된다.

 

매장유구는 추정 길이가 150㎝이고, 너비는 84㎝이며, 깊이는 12㎝인 말각장방형 토광묘(土壙墓)로 추정된다. 부장품으로 귀에 착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결상이식 1쌍을 포함하여 양 어깨 위치에 놓인 석부 2점과 머리맡의 소형 발형토기 1점이 출토되었다.

 

2012년도 제3차 발굴조사에서는 경작(耕作) 유구인 ‘밭’이 상·하 2개 층에서 확인되었다. 상층 밭은 전형적인 이랑 밭의 형태를 띠고 있다. 다만 청동기시대 밭의 형태와 비교할 때 두둑과 고랑의 너비가 일정하지 않고 이랑이 나란하게 이어지지 않는 고식적(古式的) 형태를 하고 있다. 이랑의 규모는 평균 길이는 970㎝, 두둑 너비는 38~82cm, 고랑 너비는 40~90cm, 고랑 높이는 15~17cm이다. 하층 밭은 상층 밭과 다르게 복합구획 밭의 형태로 원시적인 모습을 띠고 있었다.

 

밭의 일부를 파고 조성된 주거지가 발견되었다. 이 주거지 내부에서는 신석기시대 중기(서기전 3,600년~서기전 3,000년)의 짧은 빗금무늬토기편ㆍ돌화살촉이 출토되었다. 따라서 밭의 조성 시기는 신석기시대 중기로 추정된다. 기존에 우리나라에서 확인된 밭 유적 중 가장 이른 시기에 해당된다. 그간 한반도의 신석기시대 유적에서 농경과 관련된 유물(돌괭이, 뒤지개, 보습, 갈판, 갈돌 등)과 탄화곡물(조, 기장)이 발견되기는 하였으나 구체적인 농경의 증거인 ‘밭’이 확인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문암리유적은 중부 동해안지역의 신석기시대 문화상 연구에 매우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는 유적으로 평가된다. 지금까지 신석기시대 주거지 5기, 야외노지 5기, 매장유구 1기, 경작유구(밭) 등의 유구가 확인되었고, 신석기시대 전기의 순수무문양토기, 융기문토기, 침선문토기, 결합식낚시어구, 결상이식(옥 귀걸이) 등 다수 유물도 출토되었다. 신석기시대 밭은 석기(돌괭이, 뒤지개, 보습, 갈판, 갈돌 등), 탄화곡물(조, 기장) 그리고 곡물 토기압흔으로만 추정할 수 있었던 신석기시대의 농경에 대한 보다 명확한 증거를 찾아낸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문암리유적은 기존에 동해안에서 가장 오래된 신석기유적으로 알려진 오산리유적과 비슷하거나 더 이른 시기일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토기의 바닥면의 형태와 문양으로 보아 남해안 지역뿐만 아니라 한반도 동북지방과 중국의 동북 3성 지방, 러시아의 아무르강 연안을 포괄하는 동북아시아 토기제작 전통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동북아시아 신석기 문화와 한반도 선사인의 원류 및 이동경로, 당시의 문화계통과 전파정도 등을 밝히는데 있어 매우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한반도에서 발굴된 밭유구는 청동기시대의 것이 가장 이른 시기의 것으로 알려졌으나 문암리에서 조사된 신석기시대 밭유적은 아직까지 중국, 일본에서도 확인된 바 없으며, 동아시아에서는 최초로 발굴된 신석기시대의 밭으로 추정된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70958)

 

 

 

 

다음은 2012년 6월 26일자 고성 문암리유적에서 東亞최초 신석기시대 '밭'을 발굴했다는 뉴스1 기사이다.

 

『강원 고성 문암리유적에서 신석기시대 경작유구(밭) 발굴

 

 

 

‘고성 문암리 유적’(사적 제426호) 발굴 현장 © News1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소장 김영원)는 26일 오전 11시 강원도 고성군 죽왕면 ‘고성 문암리 유적’(사적 제426호) 발굴 현장에서 신석기시대 경작(耕作) 유구인 ‘밭’을 발굴하고 현장설명회를 개최한다.

 

이번에 ‘고성 문암리 유적’에서 발굴된 것은 중국, 일본에서도 발견된 예가 없는 동아시아 최초의 신석기시대 밭 유적으로 추정된다.

 

2010년부터 고성 문암리 선사유적 종합정비사업의 하나로 발굴조사 중인 이 유적에서 발굴된 밭은 크게 상·하 2개 층으로 구분된다.

 

상층 밭은 전형적인 이랑(갈아 놓은 밭의 한 두둑과 한 고랑을 이름) 밭의 형태를 띠지만 청동기시대 밭의 형태와 비교할 때 두둑과 고랑의 너비가 일정하지 않고 이랑이 나란하게 이어지지 않는 고식적(古式的) 형태이다.

 

하층 밭은 상층 밭과 다르게 복합구획 밭의 형태로 원시적인 모습을 띤다. 특히, 신석기시대 중기(기원전 3600년~기원전 3000년)의 토기편(짧은빗금무늬토기), 돌화살촉과 함께 그 층을 파고 조성한 신석기시대 집자리 1기가 확인돼 신석기시대 중기의 밭 유적으로 추정된다.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 확인된 밭 유적 중 가장 빠른 시기의 것은 청동기시대(기원전 1,500년~기원전 400년)이다. 한반도의 신석기시대 농경에 대해서는 석기(돌괭이, 뒤지개, 보습, 갈판, 갈돌 등)와 탄화곡물(조, 기장)을 근거로 그 존재 가능성을 추정하여 왔으나, 구체적인 농경의 증거인 ‘밭’이 확인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현재 국립문화재연구소는 농경과 관련된 보다 많은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유적퇴적환경분석, 규산체분석, 토양미세형태학적분석 등 다양한 과학적 분석을 추진하고 있다.

 

앞으로 물체질(water-sieving, water-floatation) 방법 등으로 당시 재배 식물 종류의 확인은 물론 보다 정확한 연대 결정을 위해 AMS(방사성탄소연대측정)와 OSL(광자극 루미네선스측정) 등 다양한 분석을 시행할 계획이다. pcs4200@news1.kr

(출처; 뉴스1, 강원 고성 문암리유적에서 신석기시대 경작유구(밭) 발굴, 2012년 6월 12일, https://www.news1.kr/articles/?715710)

 

 

 

 

다음은 "고성 문암리 밭유적, 신석기시대 아닌 역사시대 흔적"이라는 2019년 6월 13일자연합뉴스 기사이다.

 

『중부고고학회, 14일 '쟁점 중부고고학' 학술대회

 

 

 

고성 문암리 밭 유적

[국립문화재연구소 제공=연합뉴스 자료사진]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국립문화재연구소가 발굴해 지난 2012년 동아시아 최초의 신석기시대 밭 유적이라고 발표한 강원도 고성 문암리 유적(사적 제426호) 경작 유구(遺構·건물의 자취)가 신석기시대보다 늦은 역사시대 흔적이라는 주장이 나왔다.

 

소상영 충청문화재연구원 실장은 중부고고학회가 14일 송파구 한성백제박물관에서 여는 '쟁점 중부고고학, 무엇이 중요한가' 학술대회에서 고성 문암리 밭 유적이 신석기시대 경작 유구라는 견해를 논박한다.

 

13일 배포된 발제문에 따르면 소 실장은 "문암리 유적에서는 2개층의 밭 유적이 조사됐는데, 상층밭과 하층밭을 사용한 시기가 각각 조선시대와 신석기시대 중기로 알려졌다"며 "하층밭을 신석기시대 중기로 판단한 근거는 출토 유물인 토기와 석촉, 토양시료 측정 결과"라고 설명했다.

 

소 실장은 연구소가 공개한 토층도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면서 "토양 시료 측정 결과는 토양이 퇴적된 시기를 알려주는 것이지 사용 시기를 가리키지는 않는다"고 강조했다.

 

이어 "상층밭이 조선시대, 하층밭이 신석기시대 중기라는 긴 시차를 보이지만, 이랑이 거의 일치하는 것은 부자연스럽다"면서 "상하층 밭 평면도와 토층도를 볼 때 하층밭은 독립적 경작층이라기보다 상층밭 하단부로 봐야 한다"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하층밭이 상층밭보다 벼 규소체의 산출량이 많다는 것도 납득하기 어려운 점"이라며 "하층밭이 수전일 가능성도 고려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소 실장은 "탄화된 재배 종자의 탄소연대 측정치가 없는 상황에서 퇴적층 형성 시기만으로 경작 시기를 추정하는 것은 받아들이기 어렵다"며 "하층밭 경작 시기는 역사시대 이후일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시각에 대해 이형원 한신대박물관 학예연구사는 토론문에서 "합리적 문제 제기"라며 "국립문화재연구소가 문암리 유적 결과를 발표한 뒤 학계에서 토론을 거의 하지 않았는데, 고고학자들이 본격적으로 논의해야 할 사안"이라고 밝혔다.

 

학술대회에서는 근현대 유적 조사 현황과 중요성을 분석한 발표도 진행된다.

 

최종규 한울문화재연구원 부원장은 일제강점기부터 1970년대까지 조성한 근현대 유적이 조선시대와 현대를 연결해주는 중요한 고고학 자료라면서 "근현대 유적은 많지 않지만, 선별 발굴조사 대상에도 포함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psh59@yna.co.kr』

(출처; 연합뉴스, "고성 문암리 밭유적, 신석기시대 아닌 역사시대 흔적", 2019년 6월 13일, https://www.yna.co.kr/view/AKR20190612161500005)

 

 

 

 

<참고자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고성 문암리유적,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70958)

 

 

 

경향신문, 코리안루트를 찾아서(6) 싱룽와 신석기 유적-동이의 발상,

https://www.khan.co.kr/article/200711091447501)

 

 

 

뉴스1, 강원 고성 문암리유적에서 신석기시대 경작유구(밭) 발굴, 2012년 6월 12일, https://www.news1.kr/articles/?715710)

 

 

 

연합뉴스, "고성 문암리 밭유적, 신석기시대 아닌 역사시대 흔적", 2019년 6월 13일, https://www.yna.co.kr/view/AKR20190612161500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