력사를 찾아서
《환국-가사라국》 6. 환국과 신석기문화 (21)울산 신암리유적 본문
《환국-가사라국》
6. 환국과 신석기문화(21)
6.21 울산 신암리유적 – 7000년 전~5000년 전(BC5000년~BC 3000년)
『울산광역시 울주군 서생면 신암리 일대에 위치한다. 유적이 위치하는 신암리부락은 울산시와 부산시의 중간 위치에 해당하는 해안부락으로 1019번 지방도를 사이에 두고 양쪽으로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유적 주변은 해발 100m 이내의 야산지대로 둘러싸여 있으며 유적의 정북향에 솟아 있는 해발 209m의 용곡산에서 발원한 산간지류가 인근마을인 용리(龍里)와 나사리(羅士里) 사이로 흘러 신암리 일대의 저평한 충적지대를 지나 바다로 유입된다. 유적 북쪽의 용동마을 주변의 평지성 구릉지대에는 30여 기의 지석묘가 분포하고 있다.
신암리유적은 1935년 일본인 학자 사이토[齋藤 忠]에 의해 즐문토기의 존재가 보고된 바 있고, 1966년에는 임효재의 시굴에 의해 즐문토기편과 함께 융기문토기의 존재가 확인되면서 유적의 중요성이 학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어 국립중앙박물관에서 1974년에 유적내의 두 지점을 선정하여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즉, 제1지구는 신암리마을 가운데 위치한 융기문토기유적이고, 제2지구는 서생초등학교 뒤편의 즐문토기유적으로 이들 양 지구는 가까이 위치하면서도 출토 유물의 성격과 양상은 다르다. 그 후 1988년 지표조사를 통해 새로이 두 곳의 유적이 추가로 확인되어 제3지구와 제4지구로 보고됨으로써 유적이 광범위하게 분포하고 있음이 밝혀졌다. 현재까지 조사성과로 보아 신암리유적은 4개지구로 구분할 수 있으며, 현재는 각종 개발 등으로 대부분 파괴 소멸되어 유적의 흔적은 남아 있지 않다.
신암리 제1지구는 신암리 마을중간에 위치하며 진하(鎭下)·서생(西生)을 잇는 1019번 지방도와 접하는 서생면 신암리 산 69일대이다. 제1지구는 융기문토기를 중심으로 하는 단일 문화층 유적으로 야산 지대가 끝나는 도로변에 있으며 이곳에서 해안까지의 거리는 200m 정도이다. 1지구에서는 생활유적으로 추정되는 석렬유구가 확인되었는데, 지표하 25∼90㎝의 깊이로 경사져 나타나며 부채꼴모양으로 휘어지는 형태이다. 대부분의 유물은 석렬구조의 내부에 채워진 부식된 흑갈색진흙층에서 출토되었으며 석렬의 바로 윗면에서도 유물이 출토되었다.
출토 유물은 토기가 대부분이며 그 밖에 토제품과 석기가 있다. 토기의 형태는 평저 혹은 원저의 발형토기 또는 심발형토기이며 문양은 융기문토기가 압도적이며 이 밖에 약간의 침선문토기와 무문토기가 있고 주칠토기편도 있다. 융기문토기는 문양대가 거의 융기대문, 융기선문이 독립 혹은 복합적인 형태로 구성되어 있으며, 여기에 침선문이 첨가되기도 한다. 석기는 박편석기와 부분적으로 마연한 석기가 있는데 돌도끼, 긁개, 격지, 몸돌, 숫돌, 공이 등이며 특히 몸돌과 격지의 출토량이 많다.
신암리 제1지구는 출토 유물의 양상으로 보아 융기문토기를 중심으로 하는 유적으로 판단되지만, 토기 가운데 일부는 침선문토기의 문양요소가 복합되고 있어 융기문토기 단계로부터 침선문토기 단계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유적으로 보인다. 융기문토기 중 일부는 일본의 조몬[繩文]토기 특히 구주지역의 도도로키식[轟式]토기와 유사한 것도 있다. 유적의 형성 시기는 융기문토기의 형식적인 특징으로 보아 신석기시대 조기 후반대인 기원전 5000년 전후로 추정된다.
신암리 제2지구는 신암리 223일대의 서생초등학교 구내에 위치하는 포함층 유적이다. 발굴조사 당시 이 학교가 서생중학교였으나 1977년 신축 이전해 가고 여기에 서생초등학교가 옮겨 왔다. 이곳은 융기문토기가 출토되는 제1지구에서 동쪽으로 불과 50m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낮은 구릉의 말단부에 위치하고 있는 제2지구는 구릉 하단부의 바닷가에 형성된 낮은 충적대지에 자리 잡고 있다. 제2지구에 대한 조사는 짧은 기간 동안 3개의 트렌치를 설정하여 조사한 것이 전부이다. 표토인 Ⅰ층은 경작층으로 4∼10㎝ 정도의 두께이고 그 아래의 Ⅱ층은 갈색사질토층이다. Ⅲ층은 회갈색 혹은 회흑색사질토층인데 10∼30㎝ 정도의 두께로 Ⅰ,Ⅱ층과 마찬가지로 순수 자연퇴적층이다. Ⅳ층은 흑색사질토층으로 신석기시대 유물포함층인데 대체로 18∼66㎝ 정도의 두께로 비교적 두텁게 퇴적되어 있다.
신석기문화층에서 출토된 토기류는 융기문토기편이 전체의 4%, 압형·압인문토기편이 6%, 침선문토기편이 39%로 가장 많고 지두문토기편이 26%, 단도마연토기편과 무문양토기가 24% 정도이다. 이와 같은 분석을 통하여 융기문토기는 거의 소멸된 단계로 파악되며 침선문과 지두문이 주류를 이루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토기의 태토분석에서 압형문이나 압인문토기의 경우 혼화재를 서로 달리하였음이 확인되었고, 지두문토기가 점차 무문양으로 변화되는 양상이 간취되었다. 그리고 침선문토기는 격자문과 단사선문도 있으나 대부분이 집선문으로서 삼각집선문, 능형집선문이 주류이고 장사선문도 있다. 이들은 전형적인 남해안식 태선침선문계의 시문기법을 보이나 다만 격자문의 경우 침선이 가늘어지고 정연성이 떨어지며 시문면적도 좁아져 퇴화된 양상을 보인다.
제2지구의 중심 연대는 출토 유물 가운데 가장 빈도가 높은 태선침선문계토기를 통해 가늠해 볼 수 있다. 신암리 제2지구의 태선침선문토기가 문양구성이나 시문기법 등이 대체로 수가리Ⅰ식토기와 동일한 것으로 보아 기원전 3000년 전후로 추정되며 일부 토기 중에는 수가리Ⅱ식토기와 일본 조몬토기인 아타카식[阿高式]토기도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 후기 단계까지 존속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제2지구는 남부지방에서는 보기 드문 단일문화층 유적으로, 출토 유물의 종류가 다양하지 못하고 유적의 성격도 단순한 편이다. 약간의 석기와 토제품을 제외하면 대부분이 즐문토기들로서 유구에 대한 조사내용이 없어 유적의 성격을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따른다.
신암리 제3지구는 신암리 274 일대에 위치하며 해안포구의 동락 구릉지에 입지한다. 유물은 해발 5m 정도의 밭으로 경작되는 곳에서 융기문토기편과 각종 석기가 집중적으로 출토되었다. 융기문토기의 문양은 구연선단으로부터 일정한 공백을 두고 횡으로 점토띠를 붙여 각목 시문한 융기대문이 많으며 세선의 사선이 집선으로 시문된 융기선문도 있다. 동체 상부에 동그라미 형태의 융기문을 시문한 조몬토기편도 출토되었다. 토기의 저부는 모두 평저이며 바닥면에 엽맥흔이 찍혀 있는 것도 있다. 이 밖에 석기는 흑요석제 석촉과 사누카이트제의 작살(石?) 및 가마자키[鎌崎]형 긁개와 유견선상석기(有肩扇狀石器), 석영암제 박편석기 등이 있으며 이들은 모두 눌러떼기기법으로 제작되었다. 그리고 다양한 형태의 결합식조침 축부가 출토되었고 조침의 축부를 만들기 위해 일차적으로 가공한 석재들도 있다. 이 밖에도 많은 양의 사누카이트 박편과 석기들이 출토되었고, 멧돼지의 이빨과 팔뼈 등 짐승뼈도 확인되었다. 제3지구 일대의 구릉상에는 적갈색 점토층이 표토를 이루고 있으며 이와 같은 유물 출토 상황을 종합해 볼 때 융기문토기인의 생활유적으로 판단되며 주거지가 존재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신암리 제4지구는 제1·2지구의 동북쪽에 위치하는 신암리 281일대이다. 용리쪽에서 발원하는 작은 개울이 흘러 신암리 마을 앞의 자그마한 포구로 유입되는 곳에 유적이 형성되어 있으며 신암리에서 가장 지대가 낮은 유적이다. 개울과 바다가 만나는 부분은 저습지를 형성하고 있는데 공사를 위해 이곳에서 퍼 올린 흙에서 많은 패각과 함께 융기문토기편과 즐문토기편을 비롯하여 각종 석기와 고래뼈 등이 채집되었다. 융기문토기편은 제3지구와 마찬가지로 점토띠를 횡으로 붙이고 각목시문한 융기대문이 많으며 즐문토기편은 전형적인 남해안식의 태선집선문이 주를 이룬다. 그리고 문양이 없는 구연부편 가운데는 이중구연토기도 있어 출토 유물로 볼 때 시기차가 많은 양상을 보인다. 가공된 흔적이 있는 패각과 지름 10㎝에 가까운 고래뼈가 함께 출토되었다. 이처럼 제4지구는 출토 유물의 연대폭이 넓고 지형적으로 바다로 유입하는 개천의 유로에 접해 있다는 점에서 볼 때 시기를 달리하는 주변의 여러 신석기시대 유적으로부터 유입되면서 재퇴적된 것으로 추정된다. 패각과 고래뼈 등의 자연유물의 출토 양상을 통해 볼 때 패총이 존재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신암리유적 일대는 신석기시대의 이른 시기로부터 늦은 시기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유적이 형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시기를 달리하는 단위유적들이 조밀하게 분포되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같이 한 곳에서 지점을 달리하며 융기문토기유적과 즐문토기유적이 서로 독립해서 존재하는 경우는 지금까지 찾아보기 어렵다. 그뿐만 아니라 지리적인 조건으로 볼 때에도 남부지방 신석기문화 연구에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신암리유적은 지리적으로 부산 동삼동패총을 비롯한 남해안지역의 제유적과 울주 우봉리유적 및 울산 세죽유적 등을 비롯한 동해안지역의 유적을 연결할 뿐만 아니라, 아울러 바다를 통한 생업과 주거, 원거리 교역 등 이와 관련된 많은 문제들을 밝힐 수 있는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된다. 특히 신암리유적에서 출토되는 도도로키식[轟式]토기와 흑요석제 석기, 가마자키[鎌崎]형긁개와 유견선상석기(有肩扇狀石器) 등은 일본열도와의 교류를 파악하는데, 석기의 재료가 되는 원석과 각종 장신구 등은 신석기시대 원거리 교역의 실상을 판명하는데 많은 정보를 제공할 것으로 보인다.(신종환)』
(출처; 문화유산 연구지식포털, 한국고고학사전, 신석기시대편, 울산 신암리유적,
http://portal.nrich.go.kr/kor/archeologyUsrView.do?menuIdx=795&idx=1015)
하인수는 〈신석기시대 패총문화의 이해〉에서 토우를 설명하는 데 여기에 울산 신암리유적도 나온다.
『토우는 흙으로 만든 인형을 의미하지만 일반적으로 사람의 형상뿐만 아니라 동물이나 사물의 모습을 본떠 만든 것을 가리킨다. 토우는 후기 구석기시대에 처음으로 출현하며, 자연계의 풍요와 다산을 기원하는 주술적·종교적인 의식물로서 성숙한 여성의 몸을 형상화한 것이 시초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신석기시대부터 만들어지며 주로 해안지역의 유적을 중심으로 출토된다. 대표적인 유적으로는 남해안의 범방, 동삼동, 수가리, 욕지도, 여서도패총과 동해안의 신암리, 세죽, 봉길리, 오산리유적, 서포항, 농포리유적 등이 있으나 출토 수량은 적은 편이다.
그림 10. 신암리유적 인물형 토우
토우는 형상물의 대상에 따라 크게 인물상과 동물상으로 구분된다. 인물상은 성별에 따라 남성과 여성으로 나누어지는데 여성상이 많다. 여성상의 대표적인 것이 신암리유적 출토품이다. 동삼동패총과 오산리C지구 유적, 욕지도, 세죽패총에서 출토된 곰, 멧돼지, 물개 모양의 동물형 토우는 수렵 및 어로 등 생업활동의 안전과 생산의 풍요를 기원하는 의미에서 제작된 주술적이고 의례적인 기물로 추정되지만, 특정 동물을 신격화하여 숭배하는 토테미즘의 표현물일 가능성도 있다. 그리고 경주 봉길리, 부산 율리, 범방패총에서는 풀토된 남녀 성기를 표현한 토제품은 풍요와 다산을 기원한 기물로 추정된다.』
(출처; 하인수, 신석기시대 패총문화의 이해, 28쪽~32쪽)
위의 글 하인수의 〈신석기시대 패총문화의 이해〉에서도 “토우는 후기 구석기시대에 처음으로 출현하며, 자연계의 풍요와 다산을 기원하는 주술적·종교적인 의식물로서 성숙한 여성의 몸을 형상화한 것이 시초이다.”라고 하였는데, 김찬곤은 〈차근차근 한국미술사 |7화 신암리 비너스, 크지도 작지도 않은 젖가슴과 잘록한 허리〉에서 “신암리 여인상의 상태를 봤을 때 이것은 처음부터 여인상을 구우려고 마음먹고 구운 것이 아니다.”라고 보았다.
『차근차근 한국미술사 |7화
신암리 비너스, 크지도 작지도 않은 젖가슴과 잘록한 허리
[차근차근 한국미술사 7] 빌렌도르프 비너스와 울산 신암리 여인상 3
18.06.29 21:27l최종 업데이트 18.11.09 10:13l김찬곤(childkls)
울산 신암리에서 나온 신석기시대 '비너스'가 있다. 보통 이 비너스를 오스트리아 빌렌도르프 비너스와 견주어 설명하고, '풍요와 다산'의 상징으로 본다. 그런데 빌렌도르프 비너스를 '풍요와 다산'의 상징으로 보는 것은 처음부터 잘못된 가설일 수 있다. 그것은 풍요와 다산을 상징한다기보다는 '구석기인의 생명관'과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 이것을 풀기 위해 빌렌도르프 비너스, 프랑스 로셀의 비너스, 러시아 코스텐키 비너스, 울산 신암리 여인상 해석을 3회에 걸쳐 싣는다. 아래 글은 그 세 번째 글이다.- [편집자 말]
▲ 여자상 흙인형(왼쪽)과 빌렌도르프 비너스 신석기시대 중기. 울산시 울주군 서생면 신암리 유적 제2지구에서 나옴. 높이 3.6cm. 고은강 시인은 그의 시 〈빌렌도르프의 비너스〉에서 “벗겨봐, 파닥파닥 발아하는 내 아름다운 각질을” 하고 노래한다. 그는 빌렌도르프 여인상에서 생명의 역동성을 본 것이다. ⓒ 국립중앙박물관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에도 선사시대 비너스 상이 있다. 신석기 중기 기원전 3500년에서 2500년에 흙으로 빚은 상이다. 위 사진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머리와 팔다리가 없다. 마치 토르소(torso) 같은 상이다. 이 여인상은 빌렌도르프 비너스하고는 그 첫 느낌부터 다르다. 우선 여자 몸의 특징을 잘 붙잡아 아주 사실적으로 빚었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젖가슴, 잘록한 허리, 어깨보다 조금 넓은 골반과 엉덩이를 보면 현대 여성의 몸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런데도 학자들은 이 여인상을 두고 빌렌도르프 비너스와 마찬가지로 다산과 풍요를 바라면서 빚은 것으로 본다.
여성 토우는 아마도 신석기시대 모계 씨족사회에서 다산과 풍요를 기원하는 의미로 만들어졌던 것으로 해석된다. 특히 가슴과 엉덩이를 과장해서 표현하고 있는 것은 오스트리아 구석기시대 빌렌도르프 비너스처럼 생식과 출산을 상징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한국미의 재발견 첫 번째 권 <선사 유물과 유적>(이건무·조현종 글, 솔) 96쪽
나는 이런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 생김새부터 판이하게 다른데 왜 이렇게 보는지 도무지 알 수 없다. 글쓴이는 "특히 가슴과 엉덩이를 과장해서 표현하고" 있다고 하는데, 맨눈으로 봐도 전혀 그렇지 않다. 과장한 것이 아니라 아주 '사실적'으로 표현했다고 하는 게 맞는 게 아닐까. 골반이 넓게 보이기는 하지만 이는 일부러 그랬다기보다는 특징을 잡아 빚다 보니 이렇게 된 것이다.
아마도 글쓴이는 빌렌도르프 비너스의 관점으로 우리나라 신석기 여인상을 보고 있는 것 같다. 또 이런 여인상은 대개 '생식과 출산을 상징'한다는, 어떤 지식(또는 관념이나 선입관)에 기대어 보고 있다. 미술 공부를 할 때 이런 태도는 좋지 않다.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안 보이고, 어떤 때는 못 보게까지 한다. 그래서 위 사례와 같이 엉뚱한 얘기를 할 때가 많다. 미술 공부를 할 때는 자기 눈을 믿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 아니라 자기 눈으로 보는 만큼, 보이는 만큼 새롭게 알아가는 것이다.
▲ 울산 신암리 비너스의 실제 크기 2006년부터 발행하여 쓰고 있는 십 원짜리 동전 지름은 18밀리미터다. 이 동전 두 개를 이어놓으면 정확히 신암리 비너스 크기다. 이렇게 작게 빚어 나뭇가지 위에 놓고 굽는다는 것도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아마 다른 그릇 속에 넣어 구웠을 것이다.ⓒ 국립중앙박물관
머리와 팔다리를 붙여 구운다 하더라도 8cm
이 여인상을 다산과 풍요를 바라면서 빚었다고 보는 것은 어쩌면 너무 단순하게, 아니 그 반대로 너무 심오하게 보는, 그런 억지 해석에 가깝다. 한 글자로 하면 "헐!"이다. 이 여인상은 3.6센티미터밖에 안 된다. 십 원짜리 동전 두 개를 붙여놓았을 때 크기다. 이렇게 작은 상에 머리와 팔다리를 붙여 구운다 하더라도 8cm를 넘지 않을 것이고, 또 팔다리가 온전히 붙은 채 나오기도 힘들다. 불 속에서 갈라지고 떨어질 가능성이 아주 높다. 어쩌면 처음부터 목과 팔다리 없이 빚었을지도 모른다. 또 어느 신석기 사기장이, 아니 사기장의 자식이 곁에 있다가 장난삼아 흙으로 쪼물딱쪼물딱 빚어 그릇을 구울 때 같이 놓지 않았을까. 사실 이 여인상은 너무 작아 어른 손가락으로 빚기 힘들다.
물론 학자들 짐작처럼 다산과 풍요를 바라면서 빚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적어도 3.6, 8센티미터보다는 더 크게 빚어야 하지 않을까. 당시 뾰족밑 빗살무늬 그릇도 40cm가 넘고, 어떤 것은 90cm도 넘게 빚었던 신석기 사기장이다. 그런 사기장이 풍요와 다산을 바라면서, 그렇게 '심오한 뜻'을 담아 여성의 몸을 빚었다면 더 크고 섬세하게 빚어야 하지 않는가 싶어서 하는 말이다.
신석기 아이가 장난삼아 빚은 여인상
이 여인상을 빚은 흙도 정밀하게 분석해 봐야 한다. 직접 눈으로 볼 수 없어 단정할 수는 없지만, 왼쪽 가슴을 보면 작은 돌을 볼 수 있다. 흙을 제대로 고르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몸도 쩍쩍 갈라져 있다.
▲ 울산 신암리 비너스 가슴 왼쪽 가슴을 보면 작은 돌을 볼 수 있다. 흙을 반죽할 때 돌을 잘 고르지 않은 것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신석기 사기장들은 그릇을 구우면서 수없이 시행착오를 거쳤다. 처음에는 찰흙으로 빚어 구웠을 것이다. (찰흙은 그릇을 빚기 수월하니까!) 먼저 찰흙 속에서 돌멩이나 나무뿌리 같은 것을 골라낸다. 그런 다음 물로 반죽하여 차지게 발로 밟아 가며 다진다. 그런데 이렇게 해도 불에 구우면 쩍쩍 갈라지는 것이 아닌가! 그러다 우연히 모래가 좀 섞인 찰흙으로 그릇을 굽게 되었다. 그랬더니 신기하게도 그릇이 갈라지지도 않고 전보다 더 단단했다.
그 뒤로 신석기 사기장들은 찰흙에 곱돌을 가루 내어 섞어 반죽했다. 그도 없으면 석면, 운모(모래에 많이 들어 있다), 돌가루, 조가비 가루, 흑연 같은 것을 조금 넣어 반죽했다. 주로 운모와 곱돌을 많이 썼다. 이렇게 하니까 더 이상 그릇이 갈라지지 않고 단단하게 나왔다. 그때는 가마에 굽지 않았다. 땅을 조금 파고 그 안에 나뭇가지나 장작을 쌓고 그 위에 그릇을 놓고 불을 땠다. 이때 불 온도는 약 600~700도(℃) 정도였다.
신암리 여인상의 상태를 봤을 때 이것은 처음부터 여인상을 구우려고 마음먹고 구운 것이 아니다. 그릇을 구울 때 불구덩이 옆에 있는 흙을 대충 반죽하여 구웠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래서 돌을 제대로 골라내지 못했고 곱돌이나 운모도 섞지 않았다. 몸이 쩍쩍 갈라진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출처; 오마이뉴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450001&SRS_CD=0000011849)
<참고자료>
문화유산 연구지식포털, 한국고고학사전, 신석기시대편, 울산 신암리유적,
http://portal.nrich.go.kr/kor/archeologyUsrView.do?menuIdx=795&idx=1015
하인수, 신석기시대 패총문화의 이해, 28쪽~32쪽
오마이뉴스, [차근차근 한국미술사 7] 빌렌도르프 비너스와 울산 신암리 여인상 3,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450001&SRS_CD=0000011849
오마이뉴스, [차근차근 한국미술사 6] 빌렌도르프 비너스와 울산 신암리 여인상2,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449033&SRS_CD=0000011849
오마이뉴스, [차근차근 한국미술사 5] 빌렌도르프 비너스와 울산 신암리 여인상1,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445722&CMPT_CD=SEA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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