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환국과 신석기문화(22)

 

6.22. 울주 대곡리 반구대암각화; 7000년전3500년 전

 

국보 제285(지정명칭은 울주 대곡리 반구대암각화). 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읍 대곡리 9991 일원에 위치한다. 유적은 울산 태화강 지류에 해당하는 대곡천변에 입지하며, 자연적으로 형성된 깎아지른 절벽에 너비 약 8m, 높이 3m의 판판한 수직 암면에 그림이 집중적으로 새겨져 있다. 주변 10곳의 암면에서도 소수의 그림이 확인되고 있다. 바위의 암질은 셰일(shale)과 혼펠스(hornfels)로 구성되어 있다. 암면의 방향은 북향으로 석양이 질 무렵에만 잠시 빛이 들어오며 윗부분이 앞으로 돌출된 바위그늘[岩陰] 구조로 되어 있다.

 

유적 발견은 천전리암각화를 발견한 이듬해인 19711225일 문명대, 이융조, 김정배가 천전리 각석을 답사하는 과정에서 지역주민의 제보를 통해 이루어졌다. 1984년 동국대학교 박물관에서 발간한 최초의 보고서에서는 191점의 그림이 소개되었으며, 2000년 울산대학교 박물관이 실시한 조사에서 100여 점이 추가로 확인되어 모두 296점의 형상이 표현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그림은 주제에 따라 크게 사람의 전신(全身)이나 얼굴을 표현한 인물상(人物象), 바다와 육지동물을 표현한 동물상(動物象), 배나 부구(浮具)와 같은 수렵이나 어로와 관련된 도구상(道具象), 그림의 주제나 형태를 명확하게 파악하기 어려운 미상(謎象)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인물상은 측면(側面)을 표현한 전신상이 많으며 활로 동물을 사냥하거나 두 손을 치켜든 모습, 악기로 보이는 긴 막대기를 불고 있는 모습 등은 사냥과 일종의 종교적 행위를 연상시키고 있다. 측면 전신상의 대부분은 다소 과장된 남근(男根)을 표현하고 있으며, 사지를 벌리고 있는 정면상이나 가면처럼 얼굴을 표현한 그림도 있다.

 

동물상들은 구체적인 종 구분이 가능할 정도로 각 동물의 형태와 생태적 특징들을 잘 표현하고 있다. 동물그림에서는 고래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며 주암면 좌측 편에 집중되어 있다. 반면 사슴과 같은 발굽동물과 호랑이와 표범, 늑대와 같은 육식동물들은 주암면 우측 편에 많이 새겨져 있다.

 

구체적인 종 구분이 가능한 동물로는 북방긴수염고래, 혹등고래, 참고래, 귀신고래, 향유고래와 같은 대형고래류와 바다거북, 물개, 물고기, 바다새와 같은 바다동물, 백두산사슴, 사향사슴, 노루, 고라니, 호랑이, 표범, 늑대, 여우, 너구리, 멧돼지 등의 육지동물이 있다. 고래는 대체로 2030정도 크기의 그림이 가장 많으며 큰 것은 80정도이고 작은 것은 10정도이다. 대부분의 고래 그림은 마치 하늘에서 내려본 듯한 조감적(鳥瞰的) 표현으로 머리를 위로 향해 무리지어 헤엄치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측면으로 새겨진 고래의 경우는 꼬리를 엇비스듬하게 새긴 비틀림 화법을 사용하여 물고기와 구별되는 고래의 수평 꼬리를 의도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이외에도 새끼를 업고 있는 어미고래나 물 위로 도약하는 모습 등 고래의 생태적 특징을 매우 생동감 있게 표현한 그림들도 있다. 몸통을 수평으로 배를 뒤집고 있는 고래 그림은 이미 죽은 것으로 표현한 것으로 판단되며 몸통에 새겨진 줄무늬는 일종의 분배(分配) 또는 해체(解體) 선으로 여겨지며 민족지 자료에서 볼 수 있는 원주민들의 고래 분배 그림과 매우 유사하다. 이와 같은 그림들은 고래와 같은 대형동물의 사냥과 분배에 관한 정보를 담고 있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육지동물들은 주암면 우측 편에 집중되어 있다. 고래와 달리 대부분 측면으로 표현되어 있으며 이는 네발 달린 육지동물의 형태를 가장 완벽하게 표현할 수 있는 화법이다. 사슴류에서 뿔을 관찰할 수 있는 종은 백두산 사슴, 우수리 사슴, 수컷 노루 등이 있으며, 이외 몸통의 형태, 털 무늬, 꼬리와 다리 길이 등을 통하여 종 구분이 가능하다. 육식동물은 몸의 무늬와 꼬리와 다리의 길이, 어깨선 등으로 판단할 수 있다. 유적에서 이런 방법을 통해 구분할 수 있는 종류는 백두산사슴, 사향사슴, 노루, 고라니 등이 있다. 고래와 사슴류는 몸통의 내부를 모두 쪼아 표현한 그림이 많으며 육식동물은 외곽선과 무늬만을 선으로 표현한 것이 많다. 이러한 차이는 그림의 중복관계를 따져 볼 때 시간적 차이를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유적에서는 고래류, 사슴류, 육식동물의 순으로 비중을 갖고 있으며 거북과 물개, 물고기, 조류 등도 소수 확인할 수 있다. 주암면 좌측 상단에 새겨진 세 마리의 거북은 마치 무리지어 헤엄치는 고래를 인도하는 장면으로 표현되어 있다. 바다거북은 산란을 위해 초봄에서 여름 사이에 해안으로 오르기 때문에 흔히 민족지에서나 고대 신화에서는 바다와 육지를 넘나드는 상징적 동물로 해석되곤 한다. 물고기는 측면으로 표현된 상어와 물 위를 뛰는 연어로 보이는 물고기 머리부분이 표현되어 있다. 바다새 그림은 항상 고래 주위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는 먹이를 사냥하는 고래 주위에 몰려든 바다새를 연상시킨다. 동물그림 중에서는 먼 바다를 회유(回遊)하는 대형고래와 육지동물 중에서는 짝짓기 하는 장면이나 털갈이와 무늬, 낙각(落角) 등을 통해 계절을 유추할 수 있는 그림들도 있으며, 주로 환절기와 번식기에 나타나는 생태적 특성을 표현한 그림들이다.

 

도구상은 사냥·어로와 관련된 것으로 배와 부구, 작살, 그물, 어살, 활 등으로 유적의 조성시기와 당시 생활상을 이해할 수 있는 정보를 제공해 주고 있다. 유적에서는 그물을 이용해 고래를 잡는 장면과 호랑이를 포획하는 장면의 그림이 있다. 아직까지 선사시대 그물이 발굴된 사례는 없지만 부산 동삼동패총에서 출토된 토기표면에 찍힌 미세한 그물망 흔적을 볼 때, 당시 어로뿐만 아니라 사냥에서도 그물이 널리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지금까지 흔히 목책(木柵)이나 울타리로 해석되어온 그림의 경우, 초기에 제작된 도면과 달리 실제 암면에서는 육지동물의 모습이 표현되어 있지 않다. 오히려 내부 형상의 윤곽선이 물고기와 유사하여 목책보다는 어살의 형태와 유사하다. 일부 연구자들은 이를 배나 무리를 지어 춤추는 사람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국내유적에서 발굴된 사례는 없지만 일본의 조몬[縄文]시대 유적에서 연어와 숭어 잡이 어살이 확인된 바 있다. 그림만으로 이를 단정하기 어렵지만, 주제가 불분명한 이 그림을 통해 목축(牧畜)을 유추하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어 보인다.

 

유적에서는 고래사냥을 매우 상세하게 표현한 장면들을 볼 수 있다. 고래 주변에 새겨진 배에는 17, 7, 5명 가량의 사람이 승선하고 있다. 배는 뱃머리와 고물이 반달처럼 휘어져 있으며, 고래 몸통에 박힌 작살과 줄에 매달린 부구와 연결되어 있다. 이는 지금까지도 행해지고 있는 원주민들의 고래사냥에서 사용되는 도구들과 거의 동일하다.

 

미상은 정확한 주제와 내용을 알 수 없는 그림으로서 그림의 상태가 양호하나 그 의미를 알 수 없는 주제미상(主題迷象)과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마모와 탈락 등으로 판독(判讀)이 어려운 형태미상(形態迷象)으로 세분할 수 있다. 이 중에는 일정한 패턴을 지닌 기호로 볼 수 있는 그림도 있겠지만, 유적에 표현된 그림만으로는 이를 구별해 내기는 어렵다. 기호는 실제 현실 속에서 볼 수 없는 관념적 표현물로 최소한의 반복적인 표현으로 일정한 패턴을 찾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암각화는 단단한 돌연모를 사용해 쪼기, 갈기, 긋기 수법으로 제작되었으며 각흔(刻痕)의 깊이와 너비, 크기, 밀도, 표현기법을 통해 크게 4가지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다. 돌연모와 금속으로 새긴 그림은 각흔의 형태를 분석하여 구분할 수 있다. 대체로 돌연모의 경우 단면의 형태가 자형이며 금속의 경우 자형 또는 자형을 띤다. 이외에도 각흔의 깊이와 너비, 균일도(均一度)에서 그 차이를 어렵지 않게 구분할 수 있다.

 

먼저 유형은 쪼기기법을 사용해 새긴 그림으로 형상의 크기가 작고 각흔의 깊이가 얕은 편이다. 전체 형상을 점쪼기로 표현하였으며 고래를 사냥하는 장면이나 작은 동물, 주제를 알 수 없는 그림들로 구성되어 있다. 암면에서 가장 먼저 새겨진 그림에 해당한다.

 

유형는 흔히 면 그림으로 분류되어온 것으로 쪼기기법을 사용해 그림의 내면을 모두 쪼아 내거나 일부는 자연면을 이용해 새끼고래나 작살 등을 양각(陽刻)으로 표현한 것도 있다. 고래에 박힌 작살처럼 외곽을 긋기로 마무리한 그림도 있다. 점 쪼기에 비해 그림의 크기가 크고 각흔의 깊이가 상대적으로 깊고 규칙적인 편이지만 각흔이 다소 거칠게 남아 있다. 이 유형으로 표현된 그림들은 주암면의 좌측 편에는 고래와 같은 바다동물, 우측 편은 사슴이나 늑대·여우와 같은 육지동물들을 주로 표현하고 있다. 바다와 육지 동물의 비중은 거의 비슷하다.

 

유형은 흔히 선 그림으로 분류되어온 그림으로 각흔의 깊이가 깊고 쪼기와 함께 갈기 수법을 사용하였다. 그림의 윤곽선이 비교적 매끈하게 마무리 되었으며, 쪼아 새긴 각흔도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이 유형에서는 바다동물이나 사슴류보다는 호랑이나 표범과 같은 육식동물의 비중이 매우 높은 편이다. 유형와 유형은 그림의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데 그림의 주제에서도 바다동물에서 육식동물이란 뚜렷한 변화를 관찰할 수 있다.

 

유형는 쪼기와 함께 갈기기법으로 이전에 새겨진 그림들을 많이 훼손하고 새긴 것으로 도약하는 고래와 새끼멧돼지 그림이 있다. 전체적으로 그림이 크고 그 수도 적다. 그림의 중복관계를 통해서 선후관계를 유추할 수 있으며 후대로 갈수록 바다동물의 비중이 감소하고 육지동물과 육식류의 비중이 증가한다. 흥미로운 점은 암각화유형의 주제 변화와 신석기시대 패총에 포함된 동물유체의 비중에서 어떤 관련성을 찾아볼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암각화에 새겨진 그림은 단순히 사냥의 대상을 그대로 표현했다기보다는 관념적 표현물로 이를 직접적으로 비교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한데에 노출된 암각화는 정확한 제작연대를 추정하기 어렵기 때문에 유적 발견 당시부터 조성연대를 두고 연구자들 간에 많은 이견이 존재하고 있다. 연구자들 사이에 견해차는 있겠지만 대체로 신석기시대 말에서 청동기시대 초기까지로 보는 견해가 많다. 그러나 전혀 다른 주제를 담고 있는 천전리암각화가 유적에서 불과 2내에 위치하고 있는 점, 우리나라 남부지방 전역에서 발견된 청동기시대 암각화에서 표현된 검, 동심원, 음문, 검파형, 이외 추상적인 기하문 등의 그림을 유적에서 전혀 볼 수 없다는 점에서 이들 유적을 모두 동시시대로 보기는 어렵다.

 

최근 고고학적 자료를 통해 조성시기를 밝히려는 보다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분석들이 시도되고 있다. 울산과 동남해안 일대의 패총에 포함된 동물유체 분석결과와 울산만 고()환경 연구 등에 따르면, 유적 조성의 중심연대는 지금으로부터 약 70003500년 전으로 추정되고 있다.

 

또한 동삼동패총 출토 사슴선각문토기, 그물문토기, 조개가면, 양양 오산리유적 출토 얼굴상, 통영 욕지도유적 출토 멧돼지 토우, 울산 신암리유적 출토 여인상, 울산 세죽유적 출토 물개 토우 등 암각화에 표현된 그림의 주제와 관련된 많은 유물들은 신석기시대 유적에서 볼 수 있다. 특히 동삼동패총 출토 사슴선각문은 양식적으로 반구대 사슴그림과 동일한 양식적인 특징을 보여준다. 이외에도 2005년 창녕 비봉리유적에서 배가 발굴된 바 있으며, 2010년 한국문물연구원이 실시한 울산 황성동유적 발굴조사에서는 고래사냥을 실증적으로 밝혀주는 작살이 박힌 고래뼈가 출토되었다. 보다 자세한 분석이 필요하겠지만, 이들 유적은 신석기시대 전기에 해당한다.

 

따라서 당시의 생업 환경, 사냥과 어로 도구, 관련 유물, 시대적 맥락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해볼 때 유적의 조성연대는 최소한 신석기시대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 것으로 판단된다. 유적이 알려지기 전까지, 인간이 바다에서 처음으로 고래를 사냥한 시기는 1011세기로 추정되고 있었다. 반구대암각화는 이 보다 수 천 년이나 앞선 그림으로 인류 최초의 포경유적일 뿐만 아니라 북태평양 연안지역의 선사시대 해양어로문화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되고 있다.(이상목)

(출처; 문화유산 연구지식포털, 한국고고학 전문사전, 신석기시대편, 반구대 암각화,

http://portal.nrich.go.kr/kor/archeologyUsrView.do?menuIdx=795&idx=773)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크리스마스 선물, 7000년 전 고래사냥의 기원을 일러준 반구대 암각화

경향신문

입력 : 2018.11.29 09:57 수정 : 2018.11.29 10:13

 

 

 

울산대 반구대암각화유적보존연구소가 최근 발표한 입체화한 반구대 암각화 실측도. 모두 353점의 그림이 확인됐다.

 

저기 무슨 그림일까.” 지금으로부터 48년 전인 1970년 크리스마스 이브인 1224, 문명대 교수가 이끄는 동국대 박물관 조사단이 울산 울주군 언양읍 일대의 불교유적을 조사하고 있었다. 조사단은 특히 천전리와 대곡리 일대의 계곡에서 원효대사가 양지의 도움을 받아 <초장관심론><안신사심론> 등을 저술했다는 반고사터를 찾고 있었다. 반고사터로 추정되는 반구대 마을에는 절터는 물론 정몽주의 유배를 기념하는 사당터도 있었다. 1965년 건설된 사연댐 때문에 마을 대부분은 물에 잠겨 있었다. 그러나 강가의 절벽엔 조선의 선비들이 시회(詩會)를 열고 그 기념으로 새긴 한시와, ‘나 여기 다녀갔소를 알린 사람의 낙서, 그리고 학과 같은 그림들이 남아 있었다.

 

 

 

반구대 암각화의 인물도. 성기를 노출한 인물상(왼쪽)과 마치 감전된 듯, 접신한 듯 사지를 좍 편 인물상이 보인다.

 

 

흑판 같은 수직 절벽에 새겨진 그림

 

그러나 조사단은 답사의 목적이었던 절터를 찾지못해 실망하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마을 어른들을 찾아 탐문조사를 계속해나갔다.

 

그때 한학에도 나름 일가견이 있던 최경환이라는 마을 노인이 희망을 던져주었다.

 

저 물길을 따라 (1) 올라가면 탑거리라는 곳이 있었지. 그곳에 탑이 있었던 흔적이 남아 있지 아마.”

 

조사단은 최노인을 앞세워 계곡을 거슬러 올라갔다. 그런데 탑거리 바로 못미치는 곳에서 최경환 노인은 바위를 겨냥했다.

 

저기 바위에도 학같은 그림이 있는데 무슨 그림인지 도통 알 수 없어요.”

 

최노인이 지목한 곳은 네모반듯한 흑판 같은 수직 절벽이었다. 절벽은 강가에 바로 붙어있었다. 조사단은 원래 목적인 탑거리를 조사하고 난 뒤 다시 문제의 잘벽 아래로 내려와 암벽을 살펴보았다. 바위를 뜯어보던 일행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고래를 잡는 듯한 형상의 그림. BBC2004년 고래잡이 역사의 시원을 암구대 암각화에서 찾았다. |임세권의 <한국의 암각화>, 대원사, 2004에서

 

 

화랑들의 명소에 새겨진 비련의 사연

 

대체 이 그림들은 무엇이란 말인가. 이끼로 뒤덮힌 바위면에는 마름모꼴과 소용돌이무늬가 보였다.

 

또한 그 위로 여기저기 글씨가 새겨져 있었는데 유독 ()’자가 많아 보였다. 문첨랑, 영랑, 법민랑. 화랑 이름이 분명했다. 법민랑이 누구인가. 삼국을 통일한 김법민, 즉 문무왕의 화랑 시절 이름이 아닌가. 이곳은 화랑들이 즐겨 찾던 명소이자 수련장이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두 문장이 흥미로웠다.

 

을사년(525)에 갈문왕이 놀러 와서 처음으로 골짜기를 보았다. 오래된 골짜기인데도 이름이 없었다. 좋은 돌을 얻어 글을 짓고 계곡을 서석곡이라 하고 글자를 새기게 했다. 함께 온 벗은 누이인, 아름다운 덕을 지닌 밝고 신묘한 어사추여랑님이다.”

 

정사년(537)에 갈문왕이 죽었다. 그 비 지소부인이 갈문왕을 사랑하고 그리워하여 기미년 73, 갈문왕과 누이가 함께 보았던 서석을 보러 계곡에 왔다. 무즉지태왕비 부걸지비(법흥왕비)와 사부지왕자(갈문왕의 아들)가 함께 왔다.”

 

 

 

반구대 암각화에는 고래그림이 가장 많다. 하늘로 치솟는 고래 떼들이 보이고, 고래잡이 배가 물 속의 고래를 공격하는 형상처럼 보인다.

 

 

명문 내용은 예사롭지 않다. 등장인물을 살펴보면 갈문왕은 법흥왕의 동생이다. 그런데 누이인 어사추여랑과 연인관계였다. 둘은 537년 천전리 계곡을 찾아 사랑을 약속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갈문왕은 어사추여랑과 백년가약을 맺지 못한다. 갈문왕은 형님의 딸(법흥왕의 딸)이자 조카인 지소부인과 혼인한다. 그런데 갈문왕은 왕위를 잇지못한채 537년 죽고 만다. 갈문왕의 부인은 죽은 남편을 기리며 생전에 남편이 어사추여랑과 천전리 계곡을 찾아와 새겨놓은 명문을 살펴보았다는 것이다.

 

 

 

마치 하늘 위로 둥실 떠가는 듯한 배의 형상.|임세권의 <한국의 암각화>에서.

 

 

산타크로스가 전해준 선물

 

신라시대 명문이 눈에 도드라지기는 했지만 암벽에 새겨진 선사시대 기하학 문양과 각종 동물상 등 또한 학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기하학 문양은 마름모꼴무늬·굽은무늬·둥근무늬·우렁무늬·십자무늬·삼각무늬 등이 홑이나 겹으로, 혹은 상···우 연속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들 기하학적 문양은 대개 직선보다 곡선이 많고 상징성을 띠는 것이 많다. 새겨진 동물 가운데는 사슴 종류가 압도적으로 많고 이름을 알 수 없는 각종 동물과 물고기·새 등이 있었다. 특히 상부에는 도안화한 얼굴의 인물과 태양을 나타낸 듯한 둥근 문양의 좌우로 4마리의 사슴이 뛰어가는 모습을 새겨놓았다. 곡식이삭이나 풀뿌리·꽃봉오리를 나타낸 한 문양도 있었다. 상부 왼편 끝에 보이는 인두수신상(人頭獸身像)도 있는데, 이 동물상은 부드러운 얼굴을 한 사람의 머리와 사슴을 닮은 몸체가 결합된 모습을 하고 있다. 이는 선사인이 믿고 숭배하던 신수(神獸)의 하나로 생각된다. 윗부분 왼편에는 상어를 나타낸 듯 꼿꼿한 지느러미가 여러 개 있는 물고기 2마리와 주둥이와 비늘까지 표현된 물고기 1마리, 붕어 모양의 물고기 1마리가 각기 새겨져 있다.

 

이 천전리 각석은 가장 먼저 발견된 한국의 암각화라는 점에서 그 학술적인 가치가 대단했다. 천전리 각석은 국보 147호로 지정됐다.

 

크리스마스에 발견된 한국의 첫 번째 선사 암각화를 두고 사람들은 크리스마스이브에 산타크로스가 전해준 선물이라 입을 모았다.

 

 

 

성기를 내놓은채 긴 나팔을 불고 있는 인물상.|임세권의 <한국의 암각화>에서

 

 

크리스마스 날의 낭보

 

그러나 이것은 서곡에 불과했다.

 

천전리 암각화를 발견한 지 꼭 1년이 되던, 이번에는 크리스마스날이던 19711225, 문명대 교수는 다시 천전리를 찾았다.

 

이번에는 연세대박물관 연구원이던 이융조 교수와 고려대 김정배 교수(사학과)가 동행했다. 마침 극심한 겨울 가뭄으로 사연댐의 수위가 5~6m 정도 내려가 있었다. 그것은 행운이었다. 낮아진 댐 수면 덕택에 이전에 조사할 수 없었던 하류 유역을 다닐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세 사람은 지난해 조사 때 마을 사람들이 해준 말을 떠올렸다. “반구대 아래쪽에 호랑이가 새겨진 절벽이 있다. ” 는 말을 확인하고 싶었다. 세 사람은 배를 빌려 타고 하류로 천천히 내려가면서 주변의 암벽을 샅샅이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반구대 마을에서 약 800m가량 내려왔을 때였다. 절벽이 이어진 오른쪽에 마치 대패로 깎은 듯 반반한 바위면이 눈에 들어왔다. 세 사람은 누가 누구랄 것도 없이 바로 저거야!”를 외쳤다. 맞았다. 배가 바위면 가까이 다가가자 각종 그림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발가벗고 성기를 앞으로 세운 남자가 춤을 추고 있고, 그 옆으로 떼지어 올라가는 고래와 거북, 호랑이 등의 동물이 보였다. 크리스마스에 발견됐다고 해서 크리스마스의 기적혹은 크리스마스의 선물이라 했다. 이때 발견된 반구대 암각화는 국보 제285호로 지정됐다. 선사시대 국보 암각화가 1년 사이 우연히도 크리스마스 이브(천전리)와 크리스마스(대곡리 반구대)에 발견된 셈이다.

 

 

 

대곡리 암각화에서 보이는 가면형상의 얼굴상.

 

 

과장된 성기를 내놓은 남자는 누구?

 

반구대 암각화는 7000년전 신석기시대부터 그려진 것으로 알려져왔다. 최근 울산대 반구대암각화유적보전연구소의 실측보고서에 따르면 새겨진 그림은 모두 353점에 이른다. 그 중 성기를 노출한 사냥꾼과 어부, 제사장 등 인물상이 16점이다.

 

암각화의 제일 위쪽에는 두 팔을 들어올리고 다리를 약간 굽혀 춤추는 모습을 한 인물이 보인다. 그런데 이 인물의 성기는 크게 과장되게 표현됐다. 이 인물뿐 아니라 바위에 새겨진 인물 대부분은 춤추는 모습에 성기를 과장한 경우가 많다.

 

왼쪽 맨 아래에는 팔과 다리를 수평으로 벌린 인물상이 있다. 이 인물은 두 팔과 다리가 거의 일직선으로 되어있고, 5개씩의 손가락과 발가락을 과장해서 표현했다. 전문가들은 인간과 신을 연결해주는 특별한 능력을 갖는 제사장과 같은 존재일 수 있다고 추정했다. ·발가락을 쫙 편 인물상은 마치 벼락을 맞은 듯 보이는데, 신들린 상태, 즉 접신의 경지에 접어든 샤먼(무당) 같기도 하다. 긴 성기를 앞세우고 선 채로 긴 나팔을 불고 있는 인물도 인상적이다. 사람의 얼굴만을 묘사한 그림이 두 개나 된다. 하나는 얼굴의 윤곽선이 역이등변 삼각형과 흡사하고 눈이나 코, 입 등도 거의 직선으로 표현됐다. 특히 이마 부분이 잘려있다. 가면을 표현한 것 같다. 혹자는 이를 두고 의 원형이 아니냐고 하기도 한다. 그림 중에는 호랑이 14점을 포함한 육지동물이 105점이 보인다.

 

 

 

대곡리 암각화 탁본. 1965년 사연댐의 축조되면서 암각화는 갈수록 훼손되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임신한 고래, 작살맞은 고래, 고래잡이 배

 

그러나 반구대 암각화의 알파와 오메가는 바로 48점에 달하는 고래그림이다. 고래 그림 중에는 새끼를 밴 것 같은 고래가 보인다. 혹자는 새끼를 업고 있는 고래라고 하고, 혹자는 고래에 기생하는 물고기라고 한다. 전체 길이가 80에 달하는 고래도 있다. 이 고래는 흰긴수염고래로 추정된다. 암각화를 그리는 집단에서도 이런 큰 고래는 경외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작살을 맞은 불행한 고래도 선명하게 보인다. 배 그림도 4곳이나 보인다. 가운데 암각화 군의 맨 위쪽에 있는 배가 가장 선명하며 길이가 19에 이른다.

 

이 배 그림은 모든 그림을 아래에 두고 하늘에 오르듯 경쾌한 모습으로 둥실 떠 있다. 중심 바위 면에 두 척의 배가 더 있다. 고래 떼 사이에 한 척이 있고, 그보다 가늘에 처리된 또 다른 배가 보인다. 이 배의 길이는 18.5이며, 배에 탄 인원만 20명가량 된다. 전문가들 은 고래잡이 배나 제사를 행하는 배, 혹은 영혼을 싣고 하늘로 가는 샤머니즘의 상징물 등으로 다양하게 해석한다.

 

중심 바위 서쪽 면에 떨어진 배는 확실히 고래잡이배로 보인다. 배 밑에 고래의 꼬리가 묘사되어 있어 물 속의 고래를 공격하는 고래잡이배로 해석된다.

 

반구대 암각화에 새겨진 고래잡이 모습은 전 세계 학계에 충격파를 던졌다.

 

2004BBC 인터넷판은 반구대암각화엔 배 위에서 작살과 낚싯줄을 사용하는 모습이 보인다면서 이것이야말로 고래사냥의 시원이라 할 수 있다고 보도했다. 노르웨이 알타 암각화 고래그림을 그린 사미족이 고래잡이의 시원이라는 기존 학설을 뒤엎었던 것이다.

 

 

 

임신한 고래와 작살 맞은 고래 형상이 그려진 반구대 암각화

 

 

물고문에 녹아내리고 떨어지는 진흙바위

 

그러나 47년 전 크리스마스 선물로 홀연히 출현한 반구대암각화는 위기에 빠져있다.

 

1965년 사연댐이 건설되면서 암각화가 침수와 노출을 반복하면서 암각화가 훼손되고 있기 때문이다.

 

우기 때 사연댐 최대높이는 66,4m에 육박하는 63.2m에 달한다. 이때는 반구대암각화 가장 윗부분(해발 55.2m)까지 물에 잠긴다. 사연댐의 상시 담수로 말미암은 수위도 60m에 이른다. 반구대암각화의 80%가량은 해마다 3~4개월 동안의 노출과 8~9개월 동안의 수몰을 반복해왔다. 최근에는 물에 잠기는 회수가 뜸해졌다지만 2014년과 2016년에도 한 달 이상씩 물에 잠겼다.

 

암각화가 새겨진 바위는 진흙이 굳어져 변성화한 이암(泥岩)으로 구성돼있다. 기본적으로 진흙 성분이다 보니 물에 취약하다. 반복적으로 물에 젖으면 암석이 녹게되고 급격한 풍화가 진행될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암벽표면이 계속적으로 탈락되었고, 암면의 전체에 커다란 균열이 생겼다. 표면이 닳아서 암각의 깊이가 얕아지고 있다. 무문별한 탁본도 훼손을 가속시켰다.

 

관광객 증가에 따라 주변환경도 급속히 훼손 오염됐다. 그 때문에 암각화는 급격히 망가지고 있다. 새겨진 그림들이 희미해지는 것이다. 건너편 전망대의 망원경으로도 고래모습을 찾아보기 힘들다. 대곡천을 직접 건너가 눈앞에서 봐도 마찬가지다.

 

옛 탁본이나 사진을 들이대고 비교해야 겨우 알 수 있을 정도다. 반구대암각화를 반복되는 물고문에서 벗어나게 하려면 현재 60m인 사연댐의 수위를 52m가량으로 낮춰야 한다.

 

하지만 이 경우 울산 시민들은 식수공급에 타격을 입는다면서 대안으로 청도 운문댐의 사용을 주장했다. 하지만 운문댐을 식수로 사용해온 대구시가 무슨 소리냐고 반대했다. 대구시는 낙동강 취수원을 상류지역인 구미산업단지 위쪽으로 옮기는 것을 전제로 운문댐의 울산시 분담 사용에 찬성했다. 그러나 이 방안은 구미시의 반대에 직면했다. 취수원이 구미 쪽으로 옮길 경우 상수원 보호구역으로 지정되고, 그렇게 되면 토지 운용에 지장을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구대암각화는 이렇게 각 지자체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제대로 된 회생방안을 찾지 못해왔다.

 

 

 

반구대암각화에서 2킬로미터 떨어진 천전리에서 확인된 암각화(국보 제147) 부분. 세로 3m, 가로 10m 바위에 신석기~신라 말기까지의 문양과 글씨가 새겨져 있다. |장석호의 <천전리 각석 시측 조사보고서>, 2003에 수록된 도면.

 

7000년의 선물, 50년 만에 망가 뜨리나

 

최근 들어 이낙연 국무총리 주도로 반구대암각화 살리기 방안이 새롭게 나왔다. 해당 지자체와 관계기관이 모여 첫 번째로 도출한 원칙은 반구대암각화와 그 주변에 인위적인 구조물의 설치 없이 사연댐의 수위를 낮춰 보존하겠다는 것과 그를 위해 청도 운문댐의 물을 울산에 공급하는 방안을 세운 것이다. 무엇보다 유적 보존의 가장 바람직한 방법이라 할 수 있는 수위조절안을 채택했다는 것도 평가해 줄만하다. 그러나 두 번째인 운문댐의 울산 분담 공급 방안이 해결되려면 각 지자체의 이해관계를 모두 충족시켜야 하는 갈 길이 먼 과정을 거쳐야 한다. 하지만 반구대암각화의 훼손은 전형적인 인재라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7000년 이상 잘 보존된 선사인들의 체취가 불과 50여 년 만에 망가뜨리는 못난 후손이 될 것인가.

(출처; 경향신문,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크리스마스 선물, 7000년 전 고래사냥의 기원을 일러준 반구대암각화,

https://www.khan.co.kr/culture/culture-general/article/201811290957001#csidxf83ba36f2c412309ceb081884c1b7c2)

 

 

암각화 인근 선사유적 연구 통해 `제작 집단' 규명해야

박희현 서울시립대 명예교수 승인 2019.06.12 22:30

울산매일-반구대포럼 공동 기획 '대한민국 인류유산 대곡천암각화군'

14. 대곡천 암각화 제작 시기·집단은?

 

황성동 골촉 박힌 고래뼈

 

암각화 제작 신석기시대까지

입암·굴화서 발굴된 함정 흔적

사냥돌 유구는 청동기시대 연관

 

수렵·어로 생산 수단 집단

대곡천 가까운 곳 생활 가능성

대곡천 선사시대 유적 조사로

암각화 제작 집단찾아내야

 

목책이 설치된 함정 유구 등이 출토된 울주군 입암리 유적 발굴 당시 모습. 함정을 활용한 고래잡이는 반구대암각화 그림에서도 확인되고 있는 만큼 청동기 시대 대곡천과 연결된 태화강 인근에서 거주하던 집단이 암각화를 그렸을 가능성도 있다.울산문화재연구원 제공

 

울산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유적을 보호하기 위한 근본적인 숙제가 조금씩 풀리고 있는 듯하다. 문화재청과 울산광역시가 사연댐의 수위를 낮추는 문제에 대하여 접점을 찾고 있고 또 실제로 댐의 수위가 많이 낮아졌다 하니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다.

 

반구대유적 보호를 위한 사연댐의 수위조절문제는 한국암각화학회를 중심으로 학계에서 이미 오래전부터 댐의 수위를 낮추자고 제기해왔던 사항이다. 그리고 그것만이 유적을 제대로 보호할 수 있는 매우 자연스러운 방안이라고 주장해왔다.

 

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국보 제285)와 함께 울주 천전리 각석’(국보 제147)이 속해 있는 대곡천 암각화군을 제대로 보호하는 일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왜냐하면 대곡천 암각화군이 갖고 있는 세계문화사적 보편성과 독창성을 파악하여 세계유산 등재를 위한 추진전략을 다시 수립하는데 절대적이기 때문이다.

 

대곡천 암각화군20101월 세계유산 등재를 위한 잠정목록에 등록되어 있는 상태이다. 2015년에는 문화재청의 지원을 받아 세계유산 등재 추진을 위한 대곡천 암각화군의 세계유산적 가치 도출(연구 책임:이혜은 교수)이라는 연구결과물이 나온 바 있다, 필자도 이 프로젝트의 연구 인력의 일원으로 참여하여 몇 개의 주제를 맡아 연구하였다.

 

여기에서는 연구내용 중 대곡천 암각화군의 제작 시기 및 제작 집단과 관련한 유적 주변의 고고학적 측면을 소개하고자 한다. 그것은 세계유산 등재기준이 되는 탁월한 보편적 가치(OUV)’ 도출을 위한 관련 자료의 한 부분이 될 것이다.

 

#신석기~청동기시대 제작 추정

 

대곡천 암각화군의 제작 시기에 대하여 지금까지 연구한 바에 의하면 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는 신석기시대 말에서 청동기시대에, ‘울주 천전리 각석은 신석기시대 말 또는 청동기시대에서 철기시대를 거쳐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하지만 대곡천 암각화군이 조성된 주된 시기는 신석기시대에서 청동기시대에 이르는 선사시대인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이제 태화강유역과 울산만 지역에 분포한 선사시대의 유적 중에서 대곡천 암각화군을 중심으로 반경 20내외의 범위에 있는 유적들을 살펴보겠다.

 

신석기시대 유적으로는 태화강유역에 궁근정리, 중산동, 약사동유적이 분포하고 있고 울산만 지역에서 부곡동, 황성동, 황성동 세죽 패총, 성암동 패총 등이 확인되었다.

 

울산만 지역의 신석기시대 패총유적에서 확인되는 동물뼈로는 사슴, 노루, 수달, 멧돼지, 고래, 상어, 다랑어 등이다. 암각화에 새겨진 동물들이 당시대의 동물상을 반영한다고 볼 때,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동물상이 대곡천 암각화군에서도 확인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반구대 암각화에서는 고래, 상어, 거북, 사슴, 멧돼지, 표범, 호랑이 등 해양동물과 육지동물이 두루 나타난다.

 

#고래 등 해양동물 대곡천 유입

 

또한 반구대 암각화에서 잘 알려진 것은 여러 종류의 고래와 고래사냥장면이 묘사된 그림이다. 그리고 신석기시대의 기후변화에 대한 연구결과에 근거하여 신석기시대 중기에 울산지역은 현재보다 해수면이 높아 태화강 중류까지 바다가 이어졌을 것이라 유추하고 있다. 신석기시대 중기에는 태화강 중류까지 바닷물이 유입되면서 해양동물의 유입도 자연스레 이루어졌을 것이다. 해양동물의 유입은 이 동물들을 사냥하기 위한 신석기인의 활동영역이 이 지역에까지 확대되었다고 판단된다.

 

그런 의미에서 황성동 세죽 패총유적에서 출토된 고래뼈는 함축하는 바가 매우 크다. 즉 황성동 세죽패총의 A구간 유물포함층 1층에서 견갑골과 경추에 골촉이 박힌 고래뼈 2점이 출토되었다. 사슴뼈로 만든 작살이 박힌 고래뼈는 신석기시대의 고래사냥 방법 중 하나를 알려주는 것이다. 반구대 암각화에서도 작살에 맞은 고래 그림이 확인되므로 작살이 박힌 고래뼈의 출토는 반구대 암각화 제작시기의 상한을 신석기시대로 보는 주요한 근거가 되고 있다.

 

울산지역은 청동기시대 유적이 매우 조밀하게 분포하고 있는 편으로 울산만 지역보다 태화강 유역을 비롯한 내륙에 주로 분포하고 있다. 유적의 성격도 수렵·어로유적, 마을유적, 농경유적, 환호유적, 매장유적, 의례유적 등 매우 다양하다. 그만큼 청동기시대에 이 지역의 인구 밀도가 높았던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대표적인 유적으로 봉계리, 활천리, 인보리 번답들, 삼정리, 서하리, 구량리, 천전리 유적(이상 대곡천), 교동리, 신화리, 입암리, 천상리, 굴화리, 야음동, 옥동, 무거동 옥현 유적(이상 태화강), 매곡동, 천곡동, 장현동, 연암동, 서동, 약사동 유적(이상 동천강), 그리고 내륙의 검단리, 방기리, 외광리 유적 등이 있다.

 

고래 사냥의 한 방법을 알려주는 황성동 유적의 작살 박힌 고래뼈'.

 

대곡천 암각화군에서 확인할 수 있는 그림의 주제는 주로 수렵·어로문화와 관련된 것이고 일부분에 대하여 농경문화와 연관된 것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그림의 주제와 쉽게 대비해 볼 수 있는 유적으로 입암리 유적과 굴화리 유적을 들 수 있다. 두 유적은 태화강과 대곡천이 합류하는 지점에서 가까운 곳에 있다는 공통점도 있다.

 

입암리 유적은 대곡천 암각화군에서 반경 5내외에 위치하고 있는 대규모의 마을유적이다. 이 유적에서 확인된 중요한 내용은 내부에 목책이 설치된 함정유구 27기와 돌도끼, 가락바퀴 등 일반적인 생활 도구와 함께 그물추가 62점으로 가장 많이 출토되었다는 점이다.

 

#입암리 함정 유구 통해 청동기시대 암각화 제작 가능성

 

함정 활용법은 반구대 암각화에서도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청동기시대의 여러 사냥 수법 중 하나이다. 이 시기의 함정은 짐승으로부터 사람의 생명과 집, 농작물을 보호하거나 짐승을 사냥하기 위한 장치이다. 입암리 유적 외에 옥동, 연암동, 상연암 유적에서도 함정유구가 확인된다. 그리고 입암리 유적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 출토된 그물추의 주거지 당 출토 빈도로서 그 비율이 47%로 인근의 천상리 유적(5%)이나 검단리 유적(9%)에 비해 매우 높은 편이다.

 

입암리 유적에서 확인된 함정유구의 수나 그물추의 출토비율은 청동기시대에 수렵·어로가 여전히 혹은 일부 집단에게 생활경제에서 중요한 생산 분야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청동기시대에 태화강유역에 살았던 집단 중 일부가 수렵·어로와 관련된 암각화를 대곡천변에 새겼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수렵·어로용 도구로 흔히 거론되는 석촉, 석창 이외에 그동안 크게 주목받지 못했던 청동기시대의 사냥돌에 대하여 검토하고자 한다. 사냥돌은 인류가 중기구석기시대부터 돌에 줄을 묶어 팔매질하여 사용해온 중요한 사냥도구이다. 울산지역의 청동기시대 마을유적에서도 사냥돌이 확인되는데 명칭은 석구, 원구, 석환, 타격구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대규모의 유적인 굴화리 유적에서 사냥돌이 다량 출토된 바 있다. 이 유적에서 출토된 사냥돌은 경도가 높은 안산암으로 만들어졌으며 크기는 대부분 지름 6cm 내외이다. 여러 점의 사냥돌이 출토하였다는 것은 청동기시대에 수렵·어로가 중요한 생산 수단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입암·굴화 유적 통해 제작시기 규명해야

 

태화강 본류에 있는 입암리 유적과 굴화리 유적은 대곡천 암각화군으로부터 가까운 곳에 있다. 반구대 암각화를 기준으로 입암리 유적은 반경 5, 굴화리 유적이 반경 10이내의 지점에 있다. 두 유적 모두 대규모의 거점유적으로 농경이 활발히 이루어진 유적으로 조사되었다.

 

그와 동시에 수렵·어로와의 관련성도 높은 유적이기도 하다. 대곡천 암각화군과 고고유적과의 상관성을 명확하게 증명할 수 없지만 적어도 이 두 유적을 통해 농경 집단이면서도 수렵·어로에 비중을 두었던 집단이 지리적으로 대곡천과 가까운 곳에서 생활하였을 가능성을 고려해볼 수 있다.

 

대곡천 암각화군과 관련하여 지금까지 발굴 조사한 선사시대의 고고학적 자료 중 일부만을 이용하여 양자 간의 연결고리를 소개하고자 하였다. 이제 우리는 대곡천 암각화군의 세계유산 등재를 위해서 인근의 선사시대 유적을 더 발굴조사하고 많은 자료를 확보하여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입증하는 것이 꼭 필요하고 실천할 일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럼으로써 대곡천 암각화군을 남긴 사람들즉 암각화의 제작 집단을 찾아야 한다.

(출처; 울산매일,

http://www.iusm.co.kr/news/articleView.html?idxno=847166)

 

 

<참고자료>

 

문화유산 연구지식포털, 한국고고학 전문사전, 신석기시대편, 반구대 암각화,

http://portal.nrich.go.kr/kor/archeologyUsrView.do?menuIdx=795&idx=773)

 

경향신문,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크리스마스 선물, 7000년 전 고래사냥의 기원을 일러준 반구대암각화,

https://www.khan.co.kr/culture/culture-general/article/201811290957001#csidxf83ba36f2c412309ceb081884c1b7c2

 

울산매일, “암각화 인근 선사 유적 연구 통해 `제작 집단' 규명해야

http://www.iusm.co.kr/news/articleView.html?idxno=847166)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