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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7) - 고구려의 수도는 어디인가?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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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7) - 고구려의 수도는 어디인가?

대야발 2024. 5. 15. 12:40

 

복기대

 

고구려 도읍지 역사 새롭게 쓰일까

‘고구려의 평양’에 대해 연구하는 복기대 교수는 고조선·고구려 유물 유적에 대한 광범위한 답사와 비교연구를 하고 있다. 중국 사서에 대한 교차 분석과 고고학적 발굴 성과를 바탕으로 새롭게 고구려사에 접근하고 있다.

남문희 대기자다른기사 보기
  • 입력 2015.03.18 08:54
  • 호수 391

 

복기대 교수는 국내 고조선 연구 권위자인 단국대 윤내현 교수의 직계 제자다. 윤 교수로부터 문헌학적 연구 기초를 배운 그는 우리 상고사의 무대였던 중국 요녕성(랴오닝성) 랴오닝 대학에서 석사를 하고 길림성(지린성) 지린 대학에서 박사를 하면서 홍산문명(황하문명보다 2000년 이상 앞선 문명)과 고조선·고구려 유물 유적에 대한 광범위한 답사와 비교연구를 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고조선 연구를 백안시해온 주류 사학계로부터 다양한 형태의 견제를 받아온 것으로 보인다. 2010년 발표한 〈고구려 도읍지 천도에 대한 재검토〉 논문은 거센 반발에 부딪혔다. 

그러나 최근에는 주류 사학계 내에서도 분위기가 많이 바뀌고 있다. 중국 사서에 대한 치밀한 교차 분석과 중국의 고고학적 발굴 성과 등을 바탕으로 한 그의 논문이 서서히 위력을 발휘하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박사 과정의 젊은 연구자들 사이에서 고구려사를 새롭게 보려는 시도가 나타나고 있다.

역사 연구 주관부서인 교육부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지난해 상반기 교육부와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진흥사업단이 ‘고구려 장수왕이 천도한 평양이 어딘가에 대해 연구해볼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고, 이 연구과제 공모에 복기대 교수팀이 참여해 앞으로 3년간 연구를 진행하기로 했다. 현재 복 교수를 중심으로 문헌 연구, 지리 연구, 고고학 전공자 등이 참여하는 연구단을 구성했다.

ⓒ시사IN남문희신채호가 투옥되었던 뤼순 감옥을 찾은 상고사 전문가 복기대 교수.

 

연구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는 미지수다. 그러나 복 교수가 주장하는 결과가 나온다면 우리 상고사 체계를 완전히 다시 써야 하는 대사건이 될 수도 있다.

당장 고려 초기의 강역부터 바꿔야 한다. 장수왕이 요양(랴오양)으로 천도한 후 계속 그곳에 머물다가 거기서 당나라에 패했다면 그 뒤로도 한민족이 만주 일대에 근거지를 가지고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즉 통일신라의 북쪽 경계선이 지금 알려진 것과 달라질 수 있다. 고려 초기 북쪽 경계가 원산만과 청천강으로 알려졌는데, 조선 초 편찬한 고려사에는 고려의 북쪽 경계가 지금의 지린성 일대인 선춘령이었고 서쪽으로는 고구려에는 못 미쳤다는 표현이 나온다. 즉 고구려처럼 넓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요동(랴오둥) 땅의 상당 부분을 고려가 가지고 있었다는 얘기다. 거란의 동쪽 경계나 여말 선초 철령위 문제를 가지고 비정해보면 대략 현재 랴오닝성 본계(번시)시까지 고려의 국경선이 뻗어 있었다는 것이 확인된다.

 

 

 

국가의 강역은 이웃 국가의 국경선, 그리고 선대의 국경선 등과 수직 수평으로 맞물려 있기 때문에 하나가 바뀌면 그에 따라 나머지도 전부 바뀌어야 한다. 따라서 향후 연구 결과에 따라 한국사를 다시 써야 하는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다.

 

"복 교수의 연구가 있기 전 고구려의 수도에 대한 학계의 통설은 1940년대 시라토리 구라키치(白鳥庫吉)가 1900년대 초부터 시작된 도리이 류조(鳥居龍藏)나 이마니시 류(今西龍) 등의 학설을 집대성해 발표한 내용이 그대로 견지돼 왔다. 즉 동명왕이 현 랴오닝성 환인에서 첫 도읍을 열었고 유리왕 때 지린성 집안(지안)에 있는 국내성으로 천도, 그다음 산상왕 때 같은 지린성 지안의 환도성으로 두 번째 천도한 후 장수왕 때 현 북한의 평양으로 마지막 천도했다는 것이다. 이 내용이 국사 교과서에서 대대로 수록돼 왔다.

 

 

그가 ‘평양’에 대해 의심하게 된 계기

복 교수 역시 그렇게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믿음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은 역설적이게도 중국에서 공부할 때였다. 1992년 랴오닝 대학에서 수학할 때 만주 지역의 지리와 역사 관련 자료를 모아놓은 〈요해총서〉라는 책을 처음 보고 혼란을 느꼈다. 국내에서 배운 한국사와 다른 얘기가 많아서다. 처음에는 그 역시 설마 하는 심정이었다. 그런데 〈요사〉와 〈금사〉 등 다른 중국 사서를 비교해보니 내용이 딱딱 맞아들어 갔다. 그러던 중 〈자치통감〉 강의를 듣던 중국인 교수로부터 “사실 수나라와 고구려 간 전쟁 때 수나라가 지금의 평양 근처에 가지도 못했다”라는 얘기를 들었고,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다시 보다 당시 랴오양을 여행하던 박지원 역시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복 교수의 논문을 읽어보면 일제 식민사학자들의 초기 연구가 엉터리로 진행됐다는 점이 드러난다. 거슬러 올라가면 김부식이 〈삼국사기〉에서 패수를 대동강으로 규정해놓고 지금의 평양이 그 위에 있으니 옛 고구려 평양이라는 식으로 단정한 것부터 잘못이었다.

 

실증사학을 표방했던 식민사학의 파탄을 보여주는 대표 사례가 바로 자신들의 의도와 맞지 않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초기 기록이나 〈요사〉 〈원사〉 등의 사서는 무시해버리는 태도다. 특히 고구려 천도 과정에 대한 그들의 설정이 잘못됐다는 것은 1990년대 이후 중국 고고학계가 해당 지역을 전부 발굴해봤는데 그 시기의 유물이 나온 게 없었다는 점에서 그대로 드러났다. 

동명왕 1년(BC 37년)에 도읍했다는 환인현 오녀산성에서는 고구려 중기에 해당하는 동천왕(247년)~고국원왕(342년)기 유물이 집중적으로 나왔다.

또 AD 3년에 해당하는 유리왕 때 왕궁 터라던 지안의 국내성 터와 200여 년 후인 AD 209년 산상왕의 환도성 터로 알려진 지안의 왕궁 터 유물·유구에 큰 차이가 없었다. 여기에다 장수왕이 옮긴 평양이 지금의 북한 평양이 아니라 랴오양이라면 식민사학에 이어 해방 후 주류 사학이 견지해온 고구려 도읍지 역사는 모두 수정이 불가피한 것이다. 

 

〈삼국사기〉를 보면 고구려가 수도를 옮긴 것이 세 번이 아니라 모두 일곱 번이었다(위 표 참조). 환도성이 두 번, 평양성이 네 번이다. 그동안의 학설은 이름이 같으면 같은 지역으로 봤는데, 이것부터가 잘못이었다. 따라서 전체 8군데의 도읍지를 처음부터 다시 찾아야 했다.

이 중 처음 세 곳인 졸본·국내성·환도는 복 교수가 2010년 논문을 쓸 때까지는 찾지 못했으나 지금은 실마리를 찾아가고 있다고 한다.

그 외에 동천왕 21년 옮긴 평양은 고구려 창건지로 잘못 알려진 환인으로 확인됐다. 문헌 기록을 교차 확인하고 오녀산성에 대한 발굴 결과에서 고구려 중기 유물이 집중적으로 확인됐다. 이곳에서 동천왕, 중천왕, 서천왕, 봉상왕, 미천왕, 고국원왕 초기까지 재임했다.

 

고국원왕 대에 전연의 모용황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환인 안에서 환도성으로 1년간 거처를 옮겼으나 모용황의 침입으로 환도성이 치명적인 타격을 입는다. 미천왕의 묘가 파헤쳐지고 고국원왕의 모친이 포로로 잡혀간다. 이 상황에서 고국원왕이 천도한 곳이 지금 광개토대왕비가 위치하고 있는 지린성 지안의 동황성(東黃城)이다. 지안은 랴오둥의 중심에서 멀찍이 벗어난 곳으로, 패전의 실의를 딛고 재충전해야 할 고구려로서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이 기간 고구려의 위대한 왕들이 등장한다. 고국원왕의 뒤를 이은 소수림왕, 고국양왕, 광개토대왕, 장수왕 등이다. 특히 광개토대왕은 동쪽으로 신라·백제, 랴오둥의 북쪽까지 광범위하게 영토를 확장했다. 더 이상 랴오둥의 구석에 머무를 필요가 없게 됐다. 따라서 장수왕 대에서 랴오둥 지역의 중심인 랴오양에 진출해 적극적인 서진정책을 추진했고, 베이징 근처 난하(롼허) 유역까지 완전히 수복함으로써 국시인 ‘다물’정신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1)

 

 

고구려의 평양, 대륙에 있었나

지난해 상반기 교육부과 한국학중앙연구원은 ‘고구려 장수왕이 천도한 평양이 어딘가에 대해 연구해볼 필요가 있다’고 판단해 관련 연구를 진행 중이다. 우리가 배워온 것과 전혀 다른 연구 결과가 나올 가능성이 있다.

남문희 대기자다른기사 보기

  • 입력 2015.03.18 08:54
  • 호수 391
 
산 정상의 백암산성으로 오르는 길은 쉽지 않았다. 해발 300~400m밖에 되지 않는 야트막한 산인데도, 막상 들어서자 발을 둘 곳이 마땅치 않았다. 등산로에는 얼음이 녹는 중이라 미끄러지기 십상이었고, 그 옆에는 눈이 수북했다. 등산로 왼편으로는 매끈하게 빠진 성곽이 정상까지 쭉 이어졌다. 박지원이 〈열하일기〉에서 ‘백암산성(白巖山城)’이 사성(蛇城·뱀성)이라는 옛 이름에서 유래했다는 전설이 있다고 밝혔는데, 아닌 게 아니라 길게 도열한 성곽 모습이 꼭 뱀의 몸뚱어리 같았다.

민간 답사팀의 강청을 못 이겨 동참하게 된 복기대 교수(인하대 융합고고학과)는 백암산성이라는 이름이 영 마뜩지 않은 눈치다. 고구려-당나라 전쟁 당시 백암산성 성주 손대흠이 항복하면서 전세가 기울었다고 하는데, 이 성은 아무리 봐도 대규모 전투를 치를 만한 곳이 아니라는 것이다. 병력을 주둔시키거나 무기와 식량을 보관할 만한 공간을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직접 정상에 올라 눈으로 확인한 게 아니기 때문에 답사팀 내부에서도 의견이 분분했다. 이렇게 천혜의 지형 위에 축성을 했는데 군사적 용도를 배제할 수 있었겠는가 하는 문제 제기도 나왔다. 고구려 산성 특유의 방어용 시설이 군데군데 설치되어 있는 것 역시 반박의 근거가 되었다.

ⓒ시사IN 남문희백암산성 정상부에 있는 정방형의 석축물. 강화도 참성단과 같은 원리다.
 
서울에서 조사한 자료의 내용은 이랬다. “백암산성:중국 랴오닝성 랴오양시 서대요향에 있는 고구려 산성. 하얀 석회암으로 쌓아 백암산성이라 불렀다. 당의 공격을 막기 위해 고구려가 10년에 걸쳐 6m 높이의 거대한 산성을 쌓았다. 성 밑에 절벽이 있고 태자하(太子河)가 흘러 난공불락의 요새다.” 그러나 정상에 올라 둘러보니 과연 군대가 주둔했을 법한 공간이 없다. 그나마 정상 부위는 공간이 더욱 좁아져 탑을 연상케 한다. 방어용 요새라고 보기 어렵다는 복 교수의 판단에 수긍이 갔다.

그렇다면 백암산성은 도대체 어떤 건축물이란 말인가? 정상에는 정방형 석축물이 있다. 고구려인들이 당대에 쌓았다. 모습이 범상치 않다. 지난해 국립 고천문연구소 선임연구원들과 함께 조사 작업을 벌인 복 교수 팀은 천문 관측용 시설이었을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있다. 사각형인 석축물의 각 모서리는, 약간의 오차가 있기는 하나, 거의 정북·정남·정동·정서 방향으로 배치되어 있다고 한다. 고대의 천문 관측에서는, 북두칠성을 바라보는 정북 방향을 기준으로 시설물을 배치하는데, 백암산성 석축물 역시 그런 원리를 따랐다는 것이다.

그런데 형상이 낯설지 않다. 요서·요동(랴오시·랴오둥) 지역의 고대 유물 전문 사진작가로 백암산성만 20여 차례 방문했다는 전성영씨는 “석축물 위아래가 전형적인 천원지방(天圓地方)의 모습을 띠고 있다. 강화도 마니산 참성단과 같은 형식으로 볼 수 있다”라고 말했다. 사각형인 석축물 아래의 기초 시설이 원형으로 조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천원지방’이란 하늘을 원으로, 땅은 네모로 보는 동양의 전통적 관념이다. 지상에 이를 구현할 때는 반대로 원형 구조물(하늘) 위에 정방형 단(땅)을 얹는다. 강화도 마니산의 참성단이나 경주 첨성대가 전형이다. 모두 천문을 관측하는 유적들이다. 고대부터 요동(랴오둥) 지역의 중심이자 전략적 요충지였던 요양(랴오양)의 고구려 산성에서 마니산의 참성단과 비슷한 유적을 보게 되다니…. 묘한 전율감을 느꼈다.

 

ⓒ시사IN 남문희백암산성 정상에서 바라본 태자하 모습. 왼쪽에서부터 흘러와 앞쪽으로 해서 발해만으로 향한다.
 
강화도와 랴오양의 고조선 문명

답사팀이 인천공항을 출발한 것은 설 연휴 마지막 날인 2월20일 오전이었다. 대련(다롄)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북쪽으로 달려 이미 캄캄해진 뒤에야 영구(잉커우) 대석붕(고인돌) 유적지를 답사할 수 있었다. 다음 날, 해성(하이청)의 석목성자(析木城子)산의 고인돌과 산 정상부 곰바위(복기대 박사 작명)에 새겨진 별자리 그림까지 봤다. 백암산성의 석축물과 석붕산·석목성자산의 고인돌 간에는 기묘한 일관성이 관찰된다. 모두 천문 관측이라는 관점에서 해석될 수 있다.

고인돌에는 크게 두 종류가 있다. 남방식과 북방식이다. 한반도의 한강 이남에서 집중적으로 관찰되는 남방식 고인돌은 주로 지석묘, 즉 매장 용도로 활용되었다. 이에 비해 북방식은 대다수가 기단 위에 탁자를 올린 형태를 띠고 있는데, 제사나 천문 관측에 관련된 구조물이라고 한다. 따라서 북방식 고인돌은 하나같이 진남북 방향, 즉 하지나 동지, 특히 동지 때 해 뜨는 쪽을 바라보고 있다. 북두칠성 방향이다. 특히 석목성자산 정상의 곰바위에는 BC 3000년대의 이곳에서 관찰된 별자리 그림이 그려져 있기도 했다.

ⓒ시사IN 남문희하이청(해성) 고인돌. 북방식 고인돌은 천문 관측과 제사를 지내기 위한 시설이었다.
 
이런 북방식 고인돌과 백암산성 석축물로 이루어진 조합은 또다시 강화도를 연상시킨다. 강화도에도 비슷한 북방식 고인돌이 있기 때문이다. 두 군데 문명이 마치 포개놓은 듯 닮았다. 바다가 가로막고 있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복 교수에 따르면, 강화도뿐 아니라 황해도나 평양, 즉 한반도 서해안에도 비슷한 유적들이 등장한다. 현재로서는 고대 대륙 문명의 주인공이었던 고조선 유민들이 두 차례의 정치적 격변(위만의 기자조선 정권 찬탈, 위만조선의 멸망과 한사군 설치)을 거치면서 한반도의 황해도나 평양 등에 진출한 결과로 해석하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주장이 나온다.

 

온갖 상념을 간직한 채 백암산성 절벽 아래 태자하를 찾았다. "복기대 교수는 2010년 발표한 논문 〈고구려 도읍지 천도에 대한 재검토〉(고구려 도읍지 역사 새롭게 쓰일까 참조)에서, ‘요양이 고구려 전성기의 수도’였다고 밝힌 바 있다. 이 주장의 핵심적 키워드가 바로 태자하다. 복 교수는 한국 상고사의 해묵은 논쟁 주제인 패수(浿水)가 태자하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패수는 상고시대 고조선과 중국의 경계를 이루었던 강이다. 패수의 위치를 어디로 보느냐에 따라 고조선의 강역이 왔다 갔다 하게 된다. 일부 조선시대 유학자나 일제시대 일본 관변 사학자, 현대의 주류 사학자들은 패수를 압록강이나 청천강으로 본다. 이에 반해 일제하에서 민족사학을 개척했던 신채호, 〈고조선 연구〉를 쓴 북한 사학자 이지린, ‘고조선사연구회’ 회장인 단국대 윤내현 교수 등은 요서(랴오시) 지역의 대릉하(다링허)나 난하(롼허)를 패수라고 주장했다.

 
ⓒ시사IN 남문희랴오양 박물관 안의 전시실 입구. 평양의 앞뒤를 바꿔 양평이라 불렀음을 보여준다(오른쪽). 랴오양 박물관에 걸려 있는 <요사> 지리지(왼쪽). 오른쪽 둘째 줄에 이곳이 옛 평양성이었다고 적혀 있다.
 
 
이 같은 ‘패수 논쟁’의 역사는 아주 오랜 옛날로 거슬러 올라간다. 중국 후한 말엽인 3세기에 나온 지리서 〈수경〉에는 ‘패수가 동남으로 흐른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200여 년 뒤인 남북조 시대 북위의 지리학자인 역도원은 이에 의문을 품고 고구려 사신에게 직접 패수의 위치를 물어보았다. 역도원의 지리서 〈수경주〉에 따르면, 고구려 사신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성(즉 수도인 평양성)이 패수의 북쪽에 있다. 패수는 서쪽으로 흘러 옛 낙랑군 조선현을 지난다.” ‘패수 논쟁’의 시발점이다.

 

그런데 중국 사서에는 패수로 불리는 강이 다수 등장한다. 〈수경주〉를 단서로 패수의 위치를 추정하려면, 저자인 역도원이 언제 고구려 사신을 만났는지 분석해야 한다. 복 교수는 그 시기를 고구려 문자명왕 때로 본다. 장수왕 바로 다음 왕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당시 고구려의 수도는 평양이다. 이 평양이 지금 북한의 수도인 그 도시라면, 〈수경주〉의 패수는 평양 남쪽 즉 대동강으로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복 교수는, 당시 고구려의 평양이 바로 이곳 랴오닝성 랴오양이었다고 주장한다. 그 근거는 중국의 여러 사서들이다. 특히 중국 역대 왕조들이 공식 편찬한 관찬 사서인 〈25사〉 중 〈요사〉와 〈원사〉에 당시 동경요양부로 불렸던 랴오양의 내력이 언급됐다는 것이다. 〈요사〉 지리지 ‘동경요양부’ 조의 다음 구절을 보자.

 

“동경요양부는 본래 조선의 땅이다. 위 태무제가 사신을 보내 그들이 거처하는 평양성에 이르게 했으니….”

위 태무제 때 고구려왕은 장수왕이다. 따라서 위 내용을 풀면 위의 태무제 때 동경요양부에는 고구려의 평양성이 있었고 장수왕이 그곳에 거처했다는 것이 된다.

 

원나라 때 역사를 밝힌 〈원사〉 지리지에도 지금 북한의 평양이 원래의 옛 평양이 아니라는 취지의 글이 들어 있다.

‘패수’를 태자하라고 추정하는 이유

 

“진나라 의희(義熙) 이후 그 왕 고련(高璉)이 처음 평양성에 살았다. 당나라가 고려(고구려)를 쳐서 평양을 점령하자 그 나라는 동쪽으로 옮겼는데 압록수의 동남으로 천여 리다. 예전의 평양이 아니다.”

 

위 내용 중 고련은 바로 장수왕의 이름이다. 거련(巨連 또는 璉)이라고도 한다. 의희는 동진(삼국을 통일한 서진이 북방민족의 발호 때문에 강남으로 달아나 세운 왕조)의 연호 중 하나로 405~418년에 사용되었다. ‘의희 이후’라면 418년 이후인데, 장수왕의 평양성 천도가 427년이다. 즉, 고구려 문자명왕 시대의 평양(장수왕이 이곳으로 천도)은 지금 북한의 평양이 아니라 〈요사〉 지리지에서 밝힌 동경요양부(지금의 랴오양)라는 것이다.

 

왜 이런 혼돈이 벌어졌을까. 고구려 도읍지를 가리키는 평양이나 환도 등의 용어는 어느 특정 지역을 가리킨 고유명사가 아니라 ‘평평하고 너른 땅’, 즉 수도를 의미하는 일반명사에 가깝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같은 평양으로 불려도 시기에 따라 그 위치가 달라진다. 고국원왕 때 거의 패망 수준으로 랴오둥의 구석인 집안(지안)현까지 쫓겨 갔던 고구려는 광개토대왕을 거치면서 장수왕 때 최전성기를 맞게 된다. 아버지 광개토대왕이 동진정책을 통해 백제와 신라를 제압하고 랴오둥의 북부로 영토를 확대했다면, 장수왕은 적극적인 서진정책으로 베이징 근처 난하(롼허) 유역까지 진출했다. 이런 나라의 수도로 지안현은 너무 외지고 협소했다. 따라서 요동벌의 중심이자 문물의 집산지인 랴오둥으로 천도할 필요가 있었던 셈이다(그때 평양은 무엇이라 불렸을까 참조).

 

그렇다면 〈수경주〉에 등장한 패수는 어디인가. 〈요사〉 지리지의 또 다른 부분에는 “당 태종이 고구려를 정벌할 당시 패수는 요양(랴오양) 근처에 있었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고구려 사신의 증언까지 종합하면, ‘랴오양 부근을 거쳐 동에서 서로 흐르는 강’이 패수다. 랴오양 근처의 강으로는 혼하와 태자하가 있다. 그런데 혼하는 랴오양의 북쪽으로 흐른다. 그래서 복 교수는, 랴오양을 통과하는 바로 저 발 밑의 태자하가 패수일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하는 것이다.

 

고구려가 망한 후 랴오양은 한반도에서 잊힌 땅이 되었다. 그러나 역사는 결코 그대로 사라지지 않는다. 명·청 시대까지도 랴오양에는 고구려 왕궁 터, 절터 등 많은 유물과 함께 고구려 유민의 후예들도 남아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명대의 조선 사신들이 랴오양에서 듣고 본 것들을 기록한 〈조천록〉, 청대의 조선 사신들이 남긴 〈연행록〉 등에 그런 내용이 간헐적으로 실리기도 했다. 박지원의 〈열하일기〉가 대표적인 경우다.

〈열하일기〉에서 박지원은 평양이나 패수가 한반도가 아닌 대륙에 시기마다 여러 군데 있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조선의 강토는 싸우지도 않고 저절로 줄어들었다”라고 통탄했다. 랴오양이 과거의 평양이었다고 단언하기도 한다. “발해(渤海)의 현덕부(顯德府)는 본시 조선 땅으로 기자를 봉한 평양성(平壤城)이던 것을, 요(遼)가 발해를 쳐부수고 ‘동경(東京)’이라 고쳤으니 이는 곧 지금의 요양현(遼陽縣·랴오양현)이다.”

지금 랴오양에는 그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 전혀 없을까. 2월22일 오전, 별 기대 없이 찾은 랴오양 박물관에서 크게 전시된 〈요사〉 지리지의 한 대목을 발견했다. “발해의 왕성인 이곳은 옛 평양성이 있던 곳으로 중경현덕부 자리이기도 하다(遼東盛國忽汗州卽故平壤城也號中京顯德府. 홀한(忽汗)에서 홀은 왕, 한은 성. 즉 왕성이란 뜻).” 평양이라는 이름이 사라진 후 오랫동안 이곳의 이름은 평양의 앞뒷말을 바꿔 ‘양평(襄平)’이라 불렸다."(2)

 

 

그때 평양은 무엇이라 불렸을까

남문희 대기자다른기사 보기

  • 입력 2015.03.18 08:53
  • 호수 391

 

"지금 북한의 평양은 고구려 때 어떤 지명으로 불렸을까? 요동·요서(랴오둥·랴오시) 지역을 주 무대로 활동한 고구려 등 북방 민족들은 지역 거점(京·경)을 여러 군데 두었다. 산이 많은 지형 때문에 이동과 연락이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발해와 거란은 오경(五京), 고구려는 삼경(三京)을 설치했다. 고구려의 삼경은 평양·국내성·한성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중 지금의 평양에서 한성이라는 명문이 찍힌 유물이 몇 차례 발견됐다고 한다. 고구려 당시 지명이 한성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평양이라는 이름은 고려 공민왕부터 사용된 것으로 전해진다. 〈원사〉 지리지에서 ‘지금의 평양은 옛 평양이 아니’라고 기록한 것과도 맞아떨어진다.

 

 

장수왕이 천도한 평양이 지금의 랴오양이라면 이후 고구려 수도는 어떻게 됐을까. 〈삼국사기〉에 따르면, 100여 년 뒤인 평원왕 때 장안성으로 다시 천도했다. 복기대 교수는 2010년 논문에서 이 장안성이 지금 북한의 평양일 것이라고 추정한 바 있다. 그러나 복 교수는 이후 연구를 통해 종전의 추정을 수정한다. 장안성 역시 랴오양에 있었을 가능성을 거론한 것이다. 마침 명나라 때 지도를 보면, 랴오양에서 서쪽으로 50㎞ 지점에 장안이라는 지명이 있다. 고구려가 당과 치른 마지막 혈전이 랴오양을 중심으로 전개되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이야기다."(3)

 

 

황순종 

 

고대사학계의 거짓말 잔치(43) 고구려의 압록수와 평양은 현 압록강과 평양 아니다!

"『삼국사기』는 동천왕이 옮긴 평양을 지금의 평양으로 보지 않았으나, 훗날 장수왕이 천도한 고구려의 마지막 도읍 평양에 대해서는 지금의 평양으로 인식하여 “평양은 서경인 것 같고 패수는 대동강이다.”라고 썼다. 그러나 고구려의 평양은 한 번도 지금의 평양에 있은 적이 없었고, 대륙에 있었다. 이를 수ㆍ당나라의 고구려 침략 기록을 통해 밝히겠다.

▲ 고구려 시기의 압록수, 살수, 평양, 사비성 위치

고구려 때의 ‘압록수’는 현 요하
중국의 수나라가 남북을 통합한 후 양제는 612년에 2백 만 대군으로 고구려에 쳐들어왔다. 수나라의 9군은 요수를 건너 요동에 이른 뒤 ‘압록수의 서쪽’에 재집결했는데 을지문덕 장군이 압록수를 건너와 거짓 항복하겠다고 속이고 다시 압록수를 건너 돌아왔다. 수나라는 뒤늦게 속은 것을 알고 압록수를 건너 추격했는데, 이때의 상황을 『삼국사기』‘영양왕’ 조에 이렇게 기록했다.

“(수나라 군대는) 동쪽으로 나아가 살수를 건너 평양성에서 3십 리 되는 곳에 산을 의지하여 진영을 펼쳤다.”

매국사학에서는 이 압록수를 당연히 지금의 압록강으로, 그리고 살수를 청천강으로 보고 있으며, 각 급 학교에서 모두 이렇게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전혀 위 기록과 맞지 않는 반도사관에 불과하다. 수나라 군사가 ‘압록수의 서쪽’에 집결했다고 했는데, 만약 압록수가 지금의 압록강이었다면 동서로 흐르는 압록강의 서쪽이 아니라 북쪽에 집결했다고 해야 된다. 또 수나라 군대가 압록수를 건너 ‘동쪽으로’ 나아가 살수를 건넜다고 했다. 살수가 만약 청천강이라면 압록강을 건넌 후 동쪽이 아니라 ‘남쪽으로’ 진격해야 이르게 됨은 삼척동자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위의 압록수는 지금의 랴오허(遼河)를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수나라 군대가 남북으로 흐르는 이 랴오허의 서쪽에 집결한 것이며, 또 이를 건너 동쪽으로 진군하여 살수에 이른 것이다. 『삼국유사』 ‘순도조려’ 조에 보이는 “요수(지금의 랴오허)는 일명 압록인데, 지금은 안민강이라 부른다.”고 한 기록에서 랴오허를 이전에 압록수라 했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의 평양은 현 북한의 평양 아니다!
그리고 또 수나라 군대가 동쪽으로 살수를 건너 평양성에서 3십 리 되는 곳에 머물렀다고 했다. 그러므로 고구려의 마지막 도읍인 이때의 평양은 살수의 동쪽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결코 청천강의 남쪽인 지금의 평양이 될 수 없음도 자명하다.

이를 증명하는 기록이 또 하나 있다. 수 양제는 거듭된 패전에도 불구하고 614년에 3차 원정에 나섰으며, 이때 수나라 수군 대장 내호아는 비사성으로 진격했는데 이에 관하여 ‘영양왕’ 조에 이렇게 기록했다.

“내호아가 비사성에 이르자 우리 군사가 맞아 싸우니 내호아는 이를 쳐 이기고 장차 평양으로 향하려고 하였다. 왕이 두려워하여 사신을 보내 항복을 청하고 ··· ”

여기의 비사성은 지금의 랴오허 동쪽, 발해의 동북쪽 모서리에 있는 하이청(海城)을 말한다. 매국사학에서는 지금의 랴오허(요하)를 옛 요수로 간주하여 그 강이 고구려와 수나라와의 경계였던 것으로 우기지만 두 나라의 국경인 옛 요수는 지금의 랴오허가 아니라 훨씬 더 서쪽인 지금의 베이징 부근을 흐르는 강이었다.

그러므로 양제가 처음베이징 부근의 국경인 요수를 건너 압록수(지금의 랴오허)까지 진격하여 군사들을 그 서쪽에 재집결시켰고, 수군대장 래호아가 랴오허 하류의 비사성(지금의 하이청)에 상륙한 것은 평양성을 공략함에 가장 가까운 곳으로 상륙했을 것이다.

따라서, 평양성은 랴오허와 살수의 멀지 않은 동쪽, 비사성으로부터도 멀지 않은 북쪽에 있어야 하는데, 최근 강원대 남의현 교수는 요양이 당시의 평양이었다고 밝혔다. 만에 하나라도 평양이 지금의 평양이었다면 내호아는 당연히 대동강으로 상륙하지 거기서 멀리 떨어진 요하 입구로 상륙할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이다. 고대사학계에서는 이렇게 명확한 것조차도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4)
 
 

이정훈

 

 

 

“수도 평양은 이북 아닌 요동에 있었다!”

‘잃어버린 땅’ 고구려 고토(古土)를 가다

  • 이정훈 편집위원 | hoon@donga.com
  • 입력2015-08-21 14:06:00




“지안엔 국내성 아닌 黃城”

고구려사를 바로 세우려면 고구려의 수도와 영토가 어디였는지부터 밝혀야 한다. 먼저 수도 문제를 살펴보자. 우리 국사 교과서는 중국 지안을 고구려의 두 번째 수도인 국내성이 있었던 곳으로 비정한다. 그러나 이는 삼국사기의 기록과 맞지 않다. 그런데도 누구도 고치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뜻있는 이들은 “한국 역사학계는 죽었다”라고까지 말한다.

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나온 고구려의 천도사(史)를 정리한 것이다. 이 표에서 주목할 것이 서기 343년 고국원왕 13년 7월에 한 5차 천도다. 이 천도는 환도성으로 도읍을 옮긴 4차 천도 1년 뒤에 일어났다. 1년 만에 다시 수도를 옮긴 것은 누란의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다. 이 위기는 뒤에서 상술하고, 5차 천도에만 집중해보자.

삼국사기는 이 천도에 대해 ‘추칠월이거평양동황성, 성재금서경동목멱산중[秋七月移居平壤東黃城, 城在今西京東木覓山中]’으로 적어놓았다. 학자들은 이 한문을 ‘가을 7월에 (왕이) 평양의 동황성으로 옮겨왔다. 동황성은 지금의 서경 목멱산 가운데에 있다’고 번역해왔다. 삼국사기는 고려 때 김부식이 중심이 돼 만들었기에 ‘지금[今]’은 삼국사기를 낸 고려 때를 의미한다. 이는 모든 학자가 동의하는 해석이다.

그런데 인하대의 복기대 교수(고고학)는 이 해석에 강력히 이의를 제기한다. 그는 이 번역은 원문 두 번째 문장에서 고딕으로 표기한 ‘동(東)’자를 해석하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그는 ‘동’을 넣어 제대로 번역하면, “이 성은 지금[삼국사기를 출간한 고려]의 서경 동쪽의 목멱산 가운데에 있다”가 된다고 설명한다. ‘서경 목멱산’이 아니라 ‘서경 동쪽의 목멱산’이라는 것이다.

‘동’자를 넣어 해석한 그는 첫 번째 문장에 나오는 동황성도 ‘동’과 ‘황성’을 띄어 읽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게 하면 전체 원문은 ‘가을 7월에 (왕이) 평양 동쪽에 있는 황성(黃城)으로 옮겨왔다. 이 성은 지금의 서경 동쪽의 목멱산 가운데에 있다’는 뜻이 된다. 과거에는 이 성을 동황성으로 보았으나 그는 황성으로 본다. 복 교수의 해석이 고구려 수도인 평양을 찾는 단서가 돼준다.

국내성 광개토왕비는 없다

광개토태왕은 고국원왕의 손자다. 고구려는 광개토태왕의 아들인 장수태왕 때 다시 평양성으로 천도(6차 천도)하니, 광개토태왕릉과 그 비석은 황성에 있어야 한다. 그런데 광개토태왕릉비는 지금 지안에 있다. 그럼 지안이 바로 황성이 되어야 한다.

삼국사기는 국내성을 2대 유리명왕부터 10대 산상왕 때까지의 수도였다고 밝혀 놓았다(참조). 그렇다면 국내성 근처에서는 19대인 광개토태왕의 능비가 발견될 수 없다. 삼국사기만 제대로 봐도 국내성에는 광개토태왕비가 발견될 수 없다는 것이 자명해지는데 국사 교과서는 광개토태왕비가 있는 지안을 국내성으로 비정하는 무지(無知)를 보인다.

지안을 국내성으로 처음 비정한 이는 일제 때 활동한 일본인 학자 도리이류조(鳥居龍臧)였다. 일제 때는 고구려사는 물론이고 역사 연구 자체가 일천했으니 정확한 역사를 추적할 수 없었다. 도리이는 제한된 자료와 자기 판단으로 지안을 국내성으로 비정했다. 그런데 광복 70년이 된 지금까지 대한민국의 역사학자들은 속절없이 이를 따른다.

에서 보듯 고구려는 95년간 평양을 수도로 삼았다가 1년간 환도성으로 천도했다. 그리고 황성에서 84년을 보내고 평양성으로 수도를 옮겼다. 고구려는 85년 만에 다시 평양성을 수도로 한 것이다. 그렇다면 85년 전의 평양성과 85년 후의 평양성은 같은 곳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런데 우리 역사학계는 서로 다른 곳으로 분석해왔다. 85년 후 옮겨간 평양성은 이북의 평양성에 있고 그전의 평양성은 어디인지 모른다는 것이 대세였다. 국사 교과서는 85년 전의 평양에 대해선 아예 거론도 하지 않는다. 고구려가 평양성(85년 전의 평양)을 처음 수도로 삼은 것은 서기 247년인 11대 동천왕 21년 2월이다.

 
동천왕이 평양성을 수도로 삼은 데는 이유가 있다. 그전의 고구려는 환도성을 수도로 삼았다. 동천왕 20년 8월 고구려는 소설 ‘삼국지’에도 나오는 조조가 세운 위나라(역사에서는 조조의 성을 따서 曹魏로 부른다)의 장수 관구검의 공격을 받아 대패했다.

이 때문에 동천왕은 “환도성은 병란을 치렀기에 다시 수도로 삼을 수 없다”며 평양성을 쌓아 백성과 종묘와 사직을 옮기게 했다(천도를 했다는 뜻). 이 사실을 전한 삼국사기는 이어 ‘평양은 본디 선인(仙人) 왕검이 살던 곳으로, 왕의 도읍터 왕검이라고도 한다[平壤者本仙人王儉之宅也 或云王之都王儉]’라고 기록했다. 왕검은 단군을 가리킨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아사달(태백산 신단수 아래 ‘신시’라고도 한다)에서 나라를 연 단군왕검은 평양성으로 도읍을 옮기면서(첫 번째 천도) 비로소 조선이라 했다고 한다. 삼국유사를 편찬한 일연은 ‘이 평양성이 지금[삼국유사를 편찬한 고려]의 서경이다’라는 주를 달아놓았다. 단군왕검이 첫 번째로 천도한 곳이 평양인데, 고구려의 동천왕은 선인 왕검이 살던 곳이 평양이라고 하면서 천도를 했으니, 고구려는 고조선을 이은 것이 분명해진다.

고조선 평양이 고구려 평양

평양성을 수도로 삼은 고구려는 95년간 번성하다, 다시 심각한 위기를 만났다. 모용황이 이끄는 전연(前燕)군의 압력을 받게 된 것. 고구려는 선비족이 세운 전연과 사이가 좋지 않아 오랫동안 싸웠는데, 그러한 전연이 모용황 시절 강성해졌다. 모용황이 침입할 것이 분명해지자 고구려는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수도인 평양성을 증축했다(고국원왕 4년). 세자를 전연에 보내 모용황을 알현하고 달래보게도 했다(고국원왕 10년).

그런데도 모용황이 침입할 의지를 굽히지 않자 고국원왕은 12년 8월 환도성으로 ‘피난성’ 천도를 했다. 그러자 그해 12월 모용황이 남로(南路)와 북로(北路)로 침공했다. 이 공격으로 모용황군은 환도성을 함락시키고 고국원왕의 부인과 어머니를 붙잡았다. 그러나 고국원왕은 단웅곡이라는 곳으로 도주해 붙잡히지 않았다. 고국원왕 생포에 실패한 모용황군은 고구려를 굴복시키기 위해 고국원왕 아버지인 미천왕 무덤을 파 시신을 끌고 갔다.

전연에 지고 백제에 죽고

처절하게 패배한 고국원왕은 환도성은 물론이고 평양성으로도 들어갈 수 없어 평양 동쪽의 목멱산 가운데에 있는 황성으로 옮겨간 것이었다. 다행인 것은 전연군이 고국원왕을 굴복만 시키려 했다는 점이다. 전연은 중국으로 쳐들어갈 뜻이 있었기에 고구려 땅을 장악하기 위한 부대는 남겨놓지 않았다.

고국원왕은 당나라에 끌려갔던 고구려의 마지막 임금 보장왕 다음으로 고단했던 임금이다. 고구려와 백제는 같은 동명성왕을 시조로 모신 이복형제 사이다. 그래서인지 고국원왕 선대에서는 한 번도 싸운 적이 없었다. 그러나 사신도 교환하지 않았다(백제와 고구려는 망할 때까지 서로 단 한 번도 사신을 보내지 않았다).

고구려를 굴복시킬 정도로 강력했던 전연은 모용황이 죽으면서 약해졌다. 서쪽에서 일어난 전진(前秦)이 맹렬하게 공격해왔기 때문이다. 전연은 중국 진출이란 꿈을 접고 방어에 급급하다 무너져갔다. 견디지 못한 전연에서는 ‘태부(太傅)’라는 높은 벼슬을 가진 모용평이 고구려로 도주해왔는데, 복수심에 불탄 고국원왕은 그를 붙잡아 전진으로 보냈다. 그해 전연은 패망했다(고국원왕 40년, 서기 370년).

고대에는 전쟁에서 승리해 약탈하는 것이 국력을 키우는 가장 빠른 길이었다. 전연이 패망하기 1년 전(369), 힘을 회복한 고국원왕은 백제 때리기에 나섰다. 2만 병력을 이끌고 남쪽으로 백제를 치러 간 것.

그런데 치양이란 곳에서 싸우다 패배했다. 전연에 패한 후 처음으로 기병한 것이 백제와의 첫 전쟁이었는데, 고구려는 또 패배한 것이다.

그러자 2년 뒤(371) 백제의 근초고왕이 복수를 해왔다. 3만 병사를 이끌고 원래 고구려의 수도였던 평양성을 공격했다. 고국원왕은 병사를 이끌고 막으러 나갔다가 조준하지 않고 쏜 화살인 ‘헛살[流矢]’에 맞아 두 달 뒤 붕어했다. 그러한 고국원왕의 손자가 광개토태왕이다. 광개토태왕은 할아버지의 원한 갚기에 나섰다.

광개토태왕비는 그의 아들 장수태왕이 세운 것이라, 당대의 일은 삼국사기보다 더 상세히 기록해놓았다. 광개토왕비는 백제에 대한 원한이 얼마나 사무쳤는지 백제를 ‘백잔(百殘)’과 ‘잔국(殘國)’으로 새겨놓았다. 이 비문에는 이러한 내용이 있다(원문은 생략. △는 비문에서 판독이 되지 않는 글자).

광개토태왕은 전연을 세운 선비족의 잔당도 토벌했다. 광개토태왕비는 선비족을 패려(稗麗)로 표현했다. 비문은 광개토태왕이 패려를 쳐서 얻은 새로운 영토를 시찰까지 했다며 이렇게 표현했다(원문 생략).



광개토왕과 장수왕의 복수

광개토태왕이 백제를 친 것은 남진정책, 선비를 두들긴 것은 서진정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국사 교과서는 고구려의 남진정책은 장수태왕 때 한 것이라고 적어놓았다. 그렇게 본 이유로 장수태왕 때 평양으로 천도한 것을 꼽는다. 국사 교과서 편찬자들은 장수태왕이 수도로 삼은 평양은 이북 평양이라는 고정 관념에 사로잡혀 그런 판단을 했다.

그러나 삼국사기를 보면 장수태왕이 천도한 곳은 85년 전 수도로 삼은 평양이다. 삼국사기 고국원왕 조는 평양 동쪽에 황성이 있다고 했으니, 평양은 황성의 서쪽에 있어야 한다. 황성은 지금의 지안이니, 평양은 지안 서쪽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북 평양은 지안의 남쪽에 있다. 따라서 ‘장수태왕이 천도한 평양은 이북 평양’이라는 국사 교과서의 주장은 삼국사기 내용과 완전 배치된다.

장수왕이 옮겨간 평양이 지안(황성)의 서쪽에 있다는 것은 요나라 역사서인 요사(遼史) 지리지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요사는 지금의 랴오닝(遼寧)성 랴오양(遼陽)시가 광개토태왕 때 고구려가 도읍을 옮긴 평양이라고 밝히고 있다. 요사는 장수태왕이 아닌 광개토태왕 때 고구려가 평양으로 천도했다고 설명한다(이에 대한 자세한 기사는 신동아 2013년 2월호 참조).

삼국사기는 고국원왕 13년 7월 조(앞에서 ‘동’을 고딕으로 표현한 부분)에서 ‘(도읍을) 평양 동쪽 황성으로 옮겼다. 이 성(황성)은 지금 서경의 동쪽 목멱산 가운데 있다’고 함으로써, 고구려의 평양은 고려의 서경이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고조선에 대한 기록을 남긴 삼국유사도 ‘(고조선이 수도로 삼은) 평양은 고려의 서경이다’라는 주를 달아놓았다.

이는 평양에 대한 현재 해석을 완전 뒤집는 중대한 발견이 아닐 수 없다. 한국 역사학계는 고려가 서경이라고 한 평양은 이북 평양이라고 고집해왔기 때문이다. ‘이북 평양이 고려와 조선의 평양이다’라는 주장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기록과 다르다.

고구려의 평양이 이북 평양이 아니라는 것은 조선시대 청나라에 사신 일행으로 갔던 이들이 써놓은 여행기에서 숱하게 나온다. 대표적인 것이 박지원의 ‘열하일기’다. 박지원은 ‘압록강을 건너 요양 근처로 가니 그곳을 평양이라고 한다. 조선에 있는 평양과 어떻게 다른가’란 의문을 남겨놓았다.

장수태왕은 南進 아닌 西進

요동에 있는 평양을 이북의 평양으로 끌고 온 것은 조선이다. 아버지 이성계를 도와 고려를 뒤집은 이방원이 명나라 황실에 ‘화녕과 조선 중에 나라 이름을 정해달라’고 하자 명 황제가 조선을 골랐다. 그때 조선은 요동을 장악하지 못했다. 요동을 수복하려는 최영을 죽이고 등극한 것이 이성계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북 평양을 평양이라 부르며 기자의 사당과 기자의 무덤을 지었다. 이 정책이 성공해 요동에 있는 평양과 별도로 이북 평양이 만들어지면서 역사 추적에 혼란이 생겼다.

장수태왕이 평양으로 다시 수도를 옮긴 것은 고구려의 국력이 회복됐다는 뜻이다. 고구려를 괴롭히다가 사라진 연나라(전연)는 그 후 다시 일어나는데, 이 연나라를 앞의 연과 구분하기 위해 후연(後燕)이라고 한다. 후연은 장수태왕의 고구려와 맞서다 세력이 약해져 황실이 바뀌는데, 이를 북연(北燕)이라고 한다. 북위(北魏)가 공격하자 북연 황제인 풍홍은 고구려로 도주해왔다.

장수태왕은 그를 2년 정도 받아줬다가 죽여 북위로 보냈다. 장수태왕은 선비족이 세운 연나라를 영원히 멸망시킨 것이다. 증조부인 고국원왕의 원수를 단단히 갚은 장수태왕은 평양으로 천도(427)하고 48년이 지난 475년(장수왕 65년) 백제의 수도인 한성(漢城)을 공격하고 백제 개로왕을 잡아 죽였다. 아버지 광개토태왕에 이어 또 고국원왕의 원수를 갚은 것이다.

고구려는 이렇게 장악한 한성을 고구려가 수도로 삼았던 평양성, 국내성과 함께 3경으로 삼았다는 것이 중국 정사인 북사(北史) 등에 있는 기록이다. 그러한 고구려는 함께 북연을 없앤 북위와 대등한 관계를 유지하며 100여 년간 싸우지 않고 잘 지냈다.

고구려는 705년 역사에서 233번 외국에 사신을 보냈는데 그중 37%에 해당하는 87회를 북위와 교환했다. 장수태왕-문자명왕-안장왕-안원왕 4명의 왕만 상대한 것이 북위인데, 이렇게 많은 사신을 보낸 것은 고구려가 북위와의 외교에 전력을 기울였다는 뜻이다. 장수태왕 때 고구려는 신라를 속국처럼 데리고 있었고 백제에는 치명적인 일격을 가했으니 남쪽은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새로 강국이 된 북위와의 관계에 전력을 기울였으니, 그때의 고구려 정책은 서진정책으로 보아야 한다.

장수태왕의 고구려가 이북 평양으로 천도했다고 명시적으로 밝힌 것은 일제 때 조선사편수회가 만든 조선사다. 조선사는 장수태왕의 고구려가 남진정책을 폈다고 써놓았다. 일제는 고구려의 힘이 제대로 알려지는 것이 싫어 이렇게 했을 수 있는데, 한국 역사학계는 이를 검토하지 않고 받아들여 앵무새처럼 그대로 사용해왔다.

의무려산이 요동 · 요서의 기준

강성기의 고구려가 랴오양시 인근에 있는 평양을 다시 수도로 삼았다면 고구려는 서진을 한 것이 분명하다. 고구려는 광개토태왕 때 이미 패려를 정벌해 새로 확보한 영토를 광개토태왕이 둘러보는 유관토경(遊觀土境)을 했고 장수태왕 때는 북연의 황제를 죽였으니 서쪽으로 영토를 넓혔을 것이 분명하다.

흔히 말하는 만주평원은 요하 좌우에 있는 드넓은 평야를 가리킨다. 지금은 요하 동쪽을 요동, 서쪽을 요하라고 하지만, 현지에 가서 보면 요동과 요서는 요하라는 물길을 통해 하나로 연결됐음을 알 수 있다. 현재 우리 역사학계는 전성기의 고구려가 요하를 지나 지금의 요서평원 어디쯤을 국경선으로 삼았을 것으로 막연히 추측한다.

우리 역사학계의 큰 오류 중 하나는 고구려는 돌성[石城]만 쌓았다는 인식이다. 우리도 토성(土城)을 쌓았다. 대표적인 것이 서울 풍납동에서 발굴된, 백제가 쌓았다고 보는 대규모 토성이다. 요하 동서에는 이렇다 할 돌산이 없어 돌성을 지을 방법이 없다. 그곳에서는 토성을 지어야 한다. 랴오닝(遼寧)성의 베이전(北鎭)시에 가면 고구려 때 쌓은 것이 확실한 토성의 흔적을 볼 수 있다.

베이전시는 요서 지역의 요하평원이 끝나고 ‘의무려산(醫巫閭山)’이라는 남북으로 긴 산맥이 시작되는 곳에 있다(중국은 산맥을 산으로 표기한다). 그러한 베이전시에는 고구려와 동시대인 북위의 양식과는 전혀 다른 마애불상이 있다. 고구려를 상징하는 돌로 만든 무덤도 발견됐다(그러나 오래전에 도굴돼 유물은 없었다). 이는 고구려가 의무려산 동쪽을 확실한 영토로 지배했다는 뜻이다.

고구려와 대륙 세력은 의무려산을 놓고 일진일퇴를 거듭했을 것이다. 그래서 일각에서는 요동·요서를 나누는 기준은 요하가 아니라 의무려산으로 보아야 한다고 지적한다. 그런데 전성기 고구려는 의무려산을 넘어 만리장성 동쪽 끝인 산해관(山海關)까지 차지했다는 증거가 있다. 산해관 동쪽에 갈석산이 있는데 중국인들은 이 산을 동쪽(왼쪽)에 있는 갈석산이라 하여 좌갈석으로 불렀다. 갈석산은 삼국지의 주역인 조조가 오른 곳으로 유명한데 지금도 그 이름으로 불린다.

만리장성 근처까지 차지

당나라 때 ‘두우’라는 중국인이 만든 책 ‘통전(通典)’에는 ‘’지금(당나라 시절) 북평군 남쪽 20여리는 고려(고구려) 땅인데 그곳에 좌갈석이 있다[今北平郡南二十餘里 則高麗中爲左碣石]’라고 해놓았다. 이는 고구려가 좌갈석산을 차지했다는 의미인데 그렇다면 고구려는 의무려산을 넘어 산해관 근처까지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 된다. 전성기의 고구려는 만리장성까지 영토를 확장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 역사학계는 의무려산도 넘어가지 못한 모양으로 고구려 최대 영토를 그린다. 고구려가 이북 평양으로 천도했다고 잘못 비정했으니, 고구려의 서쪽 경계선도 좁게 그리는 어리석음에 빠져버린 것이다. 그래서 웃는 것은 통전을 비롯해 많은 사서와 고구려의 유적과 유물이 있는 땅을 차지한 중국이다. 한국 역사학계는 언제 식민사학에서 벗어날까. 고구려의 원혼이 땅을 칠 노릇이다.(6)
 

 

 


“고구려 수도 평양은 북한땅에 없었다”

거란 역사서 ‘요사(遼史)’ 의 놀라운 증언

  • 이정훈 기자 | hoon@donga.com
  • 입력2013-01-22 17:13:00
 
  • 요령성 요양은 본래 고조선 땅이었다
  • 고구려는 광개토태왕 이후 요양이 수도
  • 패수도 요양 근처, 발해 중경도 요양에 위치
요양이 고구려 수도 평양

거란의 선조는 고구려와 혈투를 벌이고 패배해 복속됐다가 고구려가 무너진 후 세력을 형성해 고구려를 이은 발해를 멸망시켰다. 이 때문에 고구려와 발해에 좋은 감정을 가질 수 없다.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리다. 따라서 이들이 고구려와 관련해서 거론한 지리 기록만큼은 정확하다고 봐야 한다. ‘요사’ 지리지는 고구려와 선비족 간의 싸움을 소재로 고구려 수도인 평양의 위치를 거론한다.

전국시대를 통일한 진나라가 만리장성을 연결한 것은 북쪽에 있는 흉노의 공격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위만조선을 멸망시킨 한무제 이후 한나라의 여러 왕이 흉노를 토벌했다. 흉노족이 힘을 잃은 내몽골 지역에서 일어난 게 선비족이다. 선비족에서는 모용부와 우문부 탁발부 등 여섯 부족이 강력했는데, 리더는 부족 이름을 성(姓)으로 사용했다.

먼저 크게 일어난 것은 모용외-모용황 부자(父子) 때의 모용 선비족이다. 아버지 모용외가 세력을 키우자 아들 모용황은 황제에 올라 연(燕)나라를 세웠다. 사가들은 모용씨가 세운 연나라를 춘추전국시대의 연나라, 노관이 이끌었던 한나라 제후국인 연나라 등과 구분하기 위해 ‘전연(前燕)’으로 표기한다.

그때 중국에서는 유비와 조조 손권이 다투던 3국 시대가 끝나고 중국인과 북방민족이 뒤엉켜 싸우며 여러 왕조가 명멸하는 위진남북조시대, 일명 5호16국시대로 접어들고 있었다. 위진남북조시대는 춘추전국시대만큼이나 전쟁이 잦았다. 동쪽에서 팽창하던 고구려는 서쪽에서 확장하던 모용외 세력과 여러 차례 충돌했다. 고-연전(高燕戰)을 벌인 것이다.

가장 강력한 ‘고연전(高燕戰)’은 고구려 고국원왕 때인 342년 전연의 초대 황제 모용황 군의 침입으로 일어났다. 모용황은 아버지가 당한 것을 앙갚음하려는 듯 강력한 공격을 퍼부어 고구려군을 대패시키고 고국원왕의 어머니와 아내를 생포했다. 그리고 고구려가 감히 대항할 생각을 품지 못하도록 고국원왕의 아버지 미천왕의 무덤을 파헤쳐 시신을 가져갔다.

이에 고국원왕이 굴복해 신하가 되겠다고 하자 미천왕의 시신을 돌려주고 어머니도 보내주었다. 그리고 고국원왕을 ‘제후국 고구려’의 왕으로 임명했다. ‘삼국사기’는 전연의 공격을 받기 전 고구려의 수도는 평양이었는데 침공 후인 343년 고국원왕이 평양 동황성(東黃城)으로 천도했다고 적어놓았다.

지금 중국 길림성 집안의 압록강가에 가보면 고국원왕의 손자인 광개토태왕의 능을 비롯한 여러 고분과 광개토태왕비, 그리고 국내성과 환도산성이 남아 있다. 이 때문에 사가들은 전연군에 대패한 고구려가 임시 천도한 곳이 집안 일대가 아닐까 보고 있다.

광개토태왕의 ‘복수혈전’

고구려를 굴복시킨 전연은 고국원왕이 살아 있던 370년 새로 일어난 진(秦)나라의 공격을 받아 멸망했다. 고국원왕은 원수를 갚기 위해 이이제이(以夷制夷) 전술로 진나라를 부추겨 전연을 공격해 무너지게 했다. 전연을 무너뜨린 진나라는 진시황의 진나라 등과 다르다. 사가들은 이 진을 다른 진과 구분하기 위해 ‘전진(前秦)’으로 적고 있다.

전연이 전진의 공격을 받아 무너지기 전, 모용황의 동생 모용수가 전진에 투항해, 부견의 부하가 됐다. 전연이 무너진 이듬해 근초고왕이 이끄는 백제가 고구려를 공격했다. 고국원왕은 평양(평양 동황성인 듯)까지 쳐들어온 백제군과 싸우다 화살을 맞고 전사했다(371년). 기사회생을 위해 애쓰던 풍운아 고국원왕은 그렇게 스러졌다.

이로써 백제는 무너진 전연을 대신해 고구려의 새로운 원수가 되었다. 고구려는 소수림왕이 등극하면서 국력을 회복했다. 그러던 382년 전진이 동진(東晉)의 공격을 받고 무너졌다. 그러자 전진에서 부견의 부하로 있던 모용수가 독립해 384년 다시 연나라를 세웠다. 사가들은 이를 ‘후연(後燕)’으로 부른다.

후연이 출범한 해 고구려에서는 소수림왕이 죽고 동생인 고국양왕이 등극했다. 이듬해(385년) 1월 고국양왕은 후연을 공격해 승리했다. 그해 11월에는 후연이 반격해 승리했다. ‘고연전’이 재개된 것이다. 391년 고국양왕이 죽자 그의 아들 광개토태왕(391~412)이 등극했다. 396년 후연에서는 모용수가 죽고 아들 모용보가 황제가 됐다.

광개토태왕은 400, 402, 404, 407년 연거푸 공격해 후연을 멸망 직전으로 몰아넣었다. 광개토태왕 군은 지금의 내몽골과 하북성 지역까지 깊숙이 침투했다. 광개토태왕비는 선비족을 ‘비려(碑麗)’로 표현하면서 광대토태왕이 비려를 공격해 영토를 크게 확장했다고 적어놓았다. 지리지는 모용보가 이끄는 후연이 광개토태왕의 공격을 받아 고구려의 옛땅을 내주게 된 것을, ‘모용보가 고구려왕 고안(高安·광개토태왕의 이름)을 그곳(요양)에 살게 했다’고 적어놓았다.

후연은 광개토태왕 군과 함께 탁발 씨가 세운 또 다른 선비족의 나라 위(魏·북위)의 공격을 받아 그로기 상태가 됐다. 탁발 선비는 위나라를 세운 뒤 성을 원(元)씨로 바꿨다. 이 위나라를 조조가 세운 위나라 등과 구분하기 위해 ‘북위’ 또는 ‘원위’로 표기한다. ‘요사’ 지리지는 ‘원위의 태무제가 그(광개토태왕)가 살고 있는 평양성으로 사신을 보냈다’고 기록했다. 이것도 광개토태왕 때 고구려가 요양으로 재천도했음을 보여준다.

407년 ‘고연전’이 끝나자 후연에서 쿠데타가 일어나 고구려 출신인 고연이 새 왕조를 열었다. 고연은 연을 그대로 국호로 삼았는데, 사가들은 이를 ‘북연(北燕)’으로 명명했다. 광개토태왕의 복수심은 대단했다. 그는 할아버지(고국원왕)를 죽인 원수를 갚기 위해 백제를 공략해 아신왕을 생포해 항복을 받았다. 백제에 대한 원한이 얼마나 사무쳤는지 광개토태왕비는 백제를 ‘백잔(百殘)’이라 새겨놓았다.

북한도 ‘평양 수도說’ 합세

고구려와 합세해 후연을 무너지게 한 북위는 5호16국 시절 선비족이 세운 나라 가운데 가장 강력했다. 이러한 북위는 고구려와 싸우지 않고 외교 관계로 경쟁했다. 고구려와 북위가 양대 효웅이던 시절 또 다른 선비족인 거란이 등장했다. 광개토태왕은 이들을 공격해 굴복시켰다. 그 후 거란은 고구려가 약화될 때만 반기를 드는 고구려의 반(半)복속 종족이 됐다.

‘삼국사기’는 고구려가 장수태왕 때 평양으로 천도했다고 기록했다. 시차는 있지만 평양 동황성에 있던 고구려가 평양으로 돌아왔다고 밝혀놓은 것이다. 그런데 ‘삼국사기’는 지리지에서, 장수태왕 때 옮긴 평양은 서경이라는 설명을 붙여놓았다. 고려 때 서경은 지금의 북한 평양이다. 이를 근거로 우리 국사학계는 장수태왕 때 고구려가 북한 평양으로 천도했다고 보게 됐다. 북한 역사학계는 평양이 고향인 김일성 가계의 정통성을 내세우기 위해 고조선과 고구려의 수도는 평양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요사’ 지리지는 고구려는 광개토태왕 때 평양으로 불렀던 원래 수도 요양으로 재천도했다고 밝혀놓았다. 이것이 우리 역사학계의 가장 큰 혼란이다. 고구려와 싸운 거란이 요양을 고구려의 수도라고 해놓았는데, 우리 역사학계는 이를 부정하고 있다. 고구려의 수도인 평양은 북한의 평양인가, 중국의 요양인가.

고구려 말기인 영양왕 때 수나라가 대군을 보내 공격했다가 살수(薩水)에서 을지문덕 군에게 대패했다. 내호아가 이끈 수나라 수군은 패수(浿水)를 따라 들어가 평양을 공격하려다 고건무가 이끄는 고구려 수군에게 일격을 당했다. 우리는 고구려의 수도를 평양으로 보기에 패수를 대동강으로, 살수는 청천강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중국 사서들의 기록은 다르다. 살수에 대해 거론한 중국 사서는 거의 없지만, 패수를 거론한 사서는 많다. 중국 사서들은 패수가 요령성에 있었던 것으로 서술해놓았다. ‘요사’ 지리지가 요양 인근의 강 이름을 거론하는 중에 패수가 있다. 패수가 요양 인근에 있다면 수나라와 싸울 때의 고구려 수도는 평양이 아니라 원래부터의 수도인 요양이라는 얘기다.

‘삼국사기’를 비롯한 사서들은 고구려를 무너뜨린 당나라가 고구려 수도인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뒀다고 했다. ‘요사’ 지리지도 마찬가지인데 안동도호부는 요양에 있었다고 밝혀놓았다. 고구려가 지금의 북한 평양이 아닌 요양을 수도인 평양으로 삼고 있을 때 당나라에 패망했다고 밝힌 것이다.

요양이 광개토태왕 이후 고구려의 수도였다면 고구려의 서쪽 경계선은 지금 요하를 건너 훨씬 서쪽이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그때는 그곳을 요동으로 불렀으니 전방 성들은 그곳에 있고, 고구려는 지금 요하 혼하 태자하 등을 해자(垓字)로 삼아 수도인 요양을 보호했을 것이다.

발해 중경 현덕부 위치가 다르다

<지도2>는 사회과부도에 표시된 발해의 5경. ‘요사’대로라면 발해의 중경은 지금의 위치에서 서쪽으로 1000여 km 떨어진 요양에 있어야 한다. 요양이 발해의 중경이라면 발해의 서쪽 국경선은 요하를 건너 당(중국) 쪽으로 훨씬 서쪽에 그어져야 한다.

 
고구려에 복속한 종족 중 가장 충성한 것은 말갈족이다. 말갈족은 고구려가 수, 당과 전쟁할 때 적극 참전했다. 대(大)씨 성을 쓰는 말갈족이 고구려의 귀족이 됐다. 이 때문에 고구려가 무너지자 대씨 집안의 대조영이 일어나 ‘대진국(大震國)’을 세웠다. 중국 사서들은 대진국을 ‘발해’로 표기했다.

대진국은 과거보다 세력을 키운 거란을 지배했다. 대진국은 당나라와 통일신라가 스러질 무렵 위기에 처하는데, 그때 야율(耶律)씨가 이끄는 거란족이 일어나 대진국을 무너뜨렸다. 그 후 요나라를 세우고 북중국 전체를 지배하는 강국이 됐다. 요나라와 남중국의 송나라, 그리고 고려는 위-촉-오가 다툰 중국의 삼국시대처럼 삼각체제를 형성하며 부딪쳤다.

황제를 자칭한 나라들은 3경이나 5경 제도를 택했다. 발해는 대이진(大彛震)이 이끌 때 5경 제도를 택하고 황제국을 선포했다. 지금 우리 역사학계는 조선 실학자들의 추정을 근거로 중경 현덕부가 중국 길림성 서고성자(西古城子)에 있었던 것으로 본다. 는 우리 교과서의 발해 강역과 5경의 위치다. 그러나 발해를 무너뜨린 거란은 전혀 다른 기록을 남겼다.

요사 지리지는 ‘당은 고구려의 수도였던 평양(요양)을 홀한주로 바꾸게 했다.…대이진 때 옛 평양인 홀한주를 중경 현덕부로 불렀다’고 적었다. 요양이 발해의 중경이라면 우리는 중경 현덕부를 서쪽으로 1000여 km 옮긴 새로운 발해 지도를 만들어야 한다. 중경이 요양에 있었다면 서경은 중경 서쪽에 있을 테니, 발해의 서쪽 국경선은 지금의 요하 건너 훨씬 서쪽에 그어져야 한다.

우리 역사학계는 우리와 다툰 인접 국가 사료에 기록된 것보다 작은 영토선을 그려놓았다. 이는 겸손이 아니라 어리석음에 가깝다. 이렇게 하니 중국은 “얼씨구나” 하며 동북공정을 밀고 들어온다.

고조선과 고구려의 수도가 지금의 북한 평양이었다고 고집하는 것은 한민족이 한반도에서만 살았다는 전형적인 반도사관이다. 반도사관은 소중화를 자처한 조선 때 생겼다. 우리가 정사(正史)로 인정하는 ‘삼국사기’는 고려 때 만든 것이 아니라 조선 중종 때 인쇄된 것이 전해진다. 중종 이전 ‘삼국사기’는 여러 번 개수(改修)됐으니 여기에도 소중화 사관이 반영됐을 것이다.

그 연장선에서 조선 후기의 실학자들이 고구려와 발해사를 또 축소했다. 조선을 지배하게 된 일제는 이를 적극 전파해 식민사관을 만들었다. 대한민국은 그것에 짓눌려 대륙사관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중국은 산해관에서 끝나는 만리장성을 동쪽으로, 동쪽으로 자꾸 확장하고 있는데.(6)
 
 
 
 
 

오종홍

 

부여는 만리장성 북쪽에 있었다

기자명오종홍 기자 입력 2018.05.30 23:55수정 2018.06.18 23:54

 

 

▲중국 요령성 조양시 원대자 고분군에서 발견된 벽화다. 묘 주인이 고구려 태왕을 상징하는 백라관을 쓰고 있다. 백라관은 중국 <구당서>, <신당서>에 따르면 고구려 태왕이 쓰는 관이라고 나온다. 똑 같은 벽화가 북한 안악3호분 고구려 벽화묘에서도 발견된다. 벽화에서 주인공이 검은색 모자를 쓰고 있고 그 위 주변에 다시 선으로 투명색 관이 하나 더 쓰여 있다. 이것이 백라관이다.

 

4.고구려 발상지 졸본은 어디인가

부여에서 고구려가 나왔다. 그렇다면 고구려가 일어나 첫 번째 도읍지는 어디일까. 먼저 앞서 언급한 중학교 국사책을 보자. 33쪽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고구려는 삼국 중에서 가장 먼저 나라의 모습을 갖추었다. 고구려의 지배 세력은 부여 계통의 이주민이었으며, 압록강 지류인 동가강 유역의 토착민들과 힘을 합하여 나라를 세웠다(기원전37)”

 

이번에는 앞서 언급한 고등학교 국사책을 보자. 47쪽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삼국 중에서 가장 먼저 국가 체제를 정비한 것은 고구려였다. 졸본성에서 국내성으로 도읍을 옮긴 고구려는 1세기 후반 태조왕 때에 이르러 정복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또 같은 책 37쪽에는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고구려는 압록강의 지류인 동가강 유역인 졸본(환인) 지방에 자리 잡았다. 이 지역은 대부분 큰 산과 깊은 계곡으로 된 산악지대였기 때문에 농토가 부족하여 힘써 일을 하여도 양식이 부족하였다.”

 

모두 고구려 발상지를 압록강 근처로 비정하고 있다. 고등학교 국사책은 이곳을 졸본성이라고 한다. 중요한 것은 졸본성이 압록강 인근이라고 한 점이다. 고구려가 이 언저리에서 일어났다는 것이다. 보다 자세히 말하면 현재 만주 환인현이라고 적시하고 있다.

 

그러나 과연 졸본성이 이곳에 있었을까. 졸본은 다른 말로 흘승골성이라고도 한다. <삼국사기> 지리지에 의하면 현재 요하 서쪽 조양시 인근 의무려산 일대로 나온다. 여기가 고구려 중심지라는 소리다. <삼국사기> 지리지를 보자.

 

"<통전>에 의하면 주몽이 한나라 건소2년경에 북부여에서 동남으로 가서 보술수를 건너 홀승골성에 살았다. 나라 이름을 구려라고 하고 고를 씨로 삼았다. <고기>에 이르길, 주몽이 부여에서 도망 나와 졸본에 이르렀는데 곧 홀승골성이다. 졸본과 비슷한 곳이다."

"옛날에 대요가 망하지 않았을 때 요나라 황제가 연경에 있었는데 우리 조빙자들이 동경을 지나 요수를 건너 하루 이틀에 걸쳐 ‘의주醫州(의무려산이 있는 주)에 이르렀다. 이어 연나라 계로 향했다. 이러한 이유로 (졸본=홀승골성이 의무려산이라는)그 사연을 알게 되었다. 주몽이 홀승골성을 도읍으로 했다."

"按通典云: “朱蒙以漢建昭二年, 自北扶餘東南行, 渡普述水, 至紇升骨城居焉. 號曰句麗, 以高爲氏.” 古記云: “朱蒙自扶餘逃難, 至卒本.” 則紇升骨城卒本, 似一處也. 昔大遼未亡時, 遼帝在燕景=燕京, 則吾人朝聘者, 過東京涉遼水, 一兩日行至醫州, 以向燕薊, 故知其然也. 自朱蒙立都紇升骨城삼국사기/지리지."

 

이 <삼국사기> 기록이 진실하다는 것은 앞서 중국 1차사료에 나오는 부여위치를 볼 때 확인된다. 앞서 부여위치가 중국 진나라 만리장성 북쪽에 있었음을 확인했다. 이것이 진실하다는 것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모본태왕과 태조태왕 때 일어난 사건으로도 증명된다. 모본태왕은 중국 산서성 태원까지 진격하여 한나라를 정벌한다. 그리고 다음 왕 때 요서에 10개성을 쌓는다.

 

“고구려본기2 모본왕 2년, 봄, 군대를 보내 한나라 북평, 어양, 상곡, 태원을 습격했다高句麗本紀2-慕本王-2年 二年, 春, 遣將襲漢北平漁陽上谷太原삼국사기/고구려본기)”

“고구려본기2 태조대왕3년, 봄2월 요서에 10개성을 쌓아 한나라 병력에 대비했다(高句麗本紀3-大祖大王-3年, 三年, 春二月, 築遼西十城, 以備漢兵 삼국사기/고구려본기)”

 

지금으로 말하면 난하 동쪽 하북성 까지 고구려 강역이었다는 소리다. 그러니 고구려 중심지는 당연히 요하를 중심으로 전개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 조양시 부근에서 안악3호분과 같은 양식의 무덤이 발굴되기도 했다. 벽화도 고구려 태왕들 모습을 하고 있다.

▲북한에 있는 고구려 안악3호분 벽화다. 주인공이 검은색 모자를 쓰고 있고 그 주위에 선으로 그려진 관을 하나 더 쓰고 있다. 이것이 요하 서쪽 조양시 원대자묘에서 발견된 벽화묘의 주인공 백라관과 같은 것이다. 고구려 판도를 가늠하는 중요한 직접 1차 사료다. 현재 요하 건너 서쪽, 조양시 동쪽에 위치한 의무려산 일대가 고구려 발상지 졸본으로 나온다. 왜 이 서쪽에서 고구려 태왕 묘로 보이는 원대자 유적이 나왔는지 알 수 있다. 사료와 고고유적이 맞아 떨어지는 드문 경우라고 할 수 있다.

 

5. 서안평은 어디인가

서안평은 우리 고대사에서 주요한 지명이다. 서안평이 어디냐에 따라 고구려 판도가 그려지기 때문이다. 식민사관에서는 서안평이 현재 압록강 하구 건너편 중국 단동일대라고 한다. 서안평이 여기라고 한다면 고구려는 이 서안평을 두고 중국 한나라와 전쟁을 벌인다. 고구려 땅이 여기에도 못 미친다는 얘기가 된다.

그러나 중국 내몽골자치주라고 파림좌기라고 한다면 그 동쪽은 고구려 땅이 된다. 서안평을 어디로 보느냐에 따라 이렇게 크게 달라진다. 서안평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태조태왕조, 동천왕조에 등장한다. 태조태왕조에는 서기146년 "가을 8월에 왕이 장군을 파견하여 한나라 요동서안평현을 습격하여 대방령을 죽이고 낙랑태수처자를 약탈하여 얻었다(秋八月 王遣將 襲漢遼東西安平縣 殺帶方令 掠得樂浪太守妻子)." 고 한다.

이 얘기는 중국 <후한서> 동이열전에도 나온다(質,桓之閒, 復犯遼東西安平, 殺帶方令, 掠得樂浪太守妻子). 양쪽 사료가 교차 검증이 되니 역사사실로 믿어도 될 것이다.

또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동천왕조에도 서기242년에 서안평을 왕이 장군을 파견하여 요동서안평을 파괴했다고 한다(王遣將 襲破遼東西安平). 이 기록들은 하나 같이 '요동서안평'이라고 한다. 서안평이 요동이라고 한다. 압록강 하구 단동이 요동이라는 소리는 들어 보지 못했다. 지금 따져 보아도 요동은 현재 요하 동쪽 언저리를 나타낸다.

이 기록들을 볼 때 서안평을 기준으로 당시 고구려와 한나라가 국경을 형성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서안평은 <요사>지리지, 상경부편에 의하면 임황부에 있다고 하는데 이곳은 현재의 내몽골 자치주로 나온다. “상경도상경 임황부는 본래 한나라 요동군 서안평 땅이었다. 신나라 왕망이 북안평이라고 했다(上京道上京臨潢府, 本漢遼東郡西安平之地. 新莽曰北安平.요사/지리지/상경부).

위 기록을 종합해 보면 고구려 당시 요동은 현재 요하를 건너 현재 내몽골 자치주 파림좌기 언저리라는 얘기다. 이렇게 기록 조각들을 하나씩 맞춰 가면 고구려 윤곽이 나온다. 판도가 그려진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머릿속에 고구려 판도를 현재 요하 이동 만주지역으로 그리고 있다. 이러한 지리비정은 모두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 일제 식민사학자들이 만들어낸 것이다. 일제 조선총독부가 펴낸 <조선반도사>나 <조선사> 및 일제 식민사학자들이 내놓은 책이나 논문이 다 이런 관점을 유지하고 있다. 이 식민사관을 현재 우리나라 거의 모든 학자들이 따르고 있다. 시중에 나와 있는 거의 모든 역사관련 책들이 이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7)

 

 

 

 

성훈

 

 

 

 

고대의 '평양'은 과연 지금의 평양인가?

국호 朝鮮의 유래. 남북정상회담 이후 NLL 공방으로 달구어 지고...

성훈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07/10/13 [10:24]

 

노무현 대통령과 한나라당 간의 NLL 공방이 뜨겁다. 대통령은 헌법 제3조까지 인용했다. 그 헌법 제3조란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 도서로 한다”이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 조상들의 주 활동 무대였던 위대한 역사의 영토는 다 잃어 버려도 좋다는 한심한 헌법 조항인 것이다. 필자는 이 헌법 제3조가 분명 잘못 되었으니 당연히 바꾸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즉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 도서는 물론, 우리 민족의 역사적인 영토까지를 대한민국의 영토로 한다”로 해야 할 것이며, 애국가 또한 “무궁화 삼천리~~”라 할 것이 아니라 “무궁화 일만리~~”라 해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이 평양(平壤)에서 열려 향후 우리 민족의 앞날을 밝게 해 줄 여러 합의를 도출해냈다. 이로서 평양(平壤)은 다시금 민족의 역사적인 장소가 되었다.

 
독자들은 무슨 얘기인가 의아할 것이다. ‘다시금 역사적인 장소’라니?

국사교과서나 중앙박물관에 가보면 고조선의 수도는 平壤이고, 한사군의 하나였던 낙랑군이 있던 곳도 平壤이고, 장수왕의 남하정책으로 천도한 곳도 平壤, 고려의 서경도 平壤이라고 쓰여 있다. 그래서 역사에 잘 모르는 일반인들은 이 平壤들이 전부 같은 것으로 알고 있다. 그리고 일제에 의해 침탈당한 우리 역사는 모두 다 같은 平壤(대동강)이라고 청소년들에게 가르치고 있다. 이것은 분명 뭔가 잘못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럼 “古代의 平壤은 지금의 平壤과 다른 것인가?”라는 의문에 봉착하게 된다. 정답을 먼저 말하자면 “다르다”이다. 그럼 古代의 平壤은 어디인가?

우리 조상들은 平壤이라는 성스러운 지명을 곳곳에 이주시켜 배달국과 단군 조선으로 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민족의 정통성으로 이어갔던 것이다.

平壤이란 의미는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서울 ‘京’의 의미와 같다고 본다. 즉 古代시절에는 나라의 도읍을 일컫는 대명사이지, 단순하게 한 지방의 지명을 가르키는 고유명사가 아닌 것을 우선 알아야 한다. 그러다 보니 古代 歷史書에 平壤城이 여러 곳에 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이다.

1. 환웅의 神市

 

우리는 환웅이 太白山에 내려와 神市를 열어 배달국을 연 것으로 알고 있다. 이 태백산은 현재 중국 섬서성(陝西省) 서남쪽에 있는 해발 3,767m의 산이며, 최초 도읍(평양)인 신시는 중국의 고대 도시 西安인 것이다. 14대 환웅 치우천왕의 능이 중국 산동성 동평군에서 발견되어 주 활동 무대는 하북성, 산동성, 안휘성, 강소성으로 보인다.

2. 단군조선의 왕험성

1) 배달국에 이어 조선을 개국한 분이 우리의 국조 단군이시다. <규원사화>의 단군기에 ‘최초 도읍(평양)을 태백산 서남쪽 우수하 언덕에 정하고 王儉城이라 했다’고 적혀있다.

그럼 국호 조선朝鮮은 어디에서 유래했을까?


단군은 아버지인 배달국의 마지막 환웅인 거불단 환웅의 유업을 이어받아, 백성들의 생업을 육성함과 아울러 麻姑城과 같은 符都를 건설하기 위해, 태백산에 天符壇을 짓고 사방에 保壇을 지어 神市(지금의 서안)에 백성들을 이주시켰다. 그리고 매년 10월에 朝祭를 행하니 사해의 제족들이 지방 토산물을 바치며 교역하니 이를 <朝鮮祭>라 하였다 한다. 국호 朝鮮은 여기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이며, 초기 단군조선의 도읍(평양)은 神市였던 섬서성 西安이었다.

2) 朝鮮은 최초 중국의 중원을 전부 지배하다 점차 漢族에 밀려 동북쪽으로 밀려나게 된다. 고조선의 마지막 도읍(평양)인 王險城은 河北省 진황도시 창려 지역인 것이다. 분명 한 번에 그 멀리까지 밀리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중간에 도읍을 했다는 어떤 역사의 기록도 없으니 필자의 추정은 단지 추정일 뿐이다. 그러나 여러 가지 심증은 있다. 
 
* <단기고사>의 기록에는 장당경과 영고탑으로 도읍을 옮겼다고 되어 있으나 정확한 현재의 지명은 기록이 없어 모른다.

* 중국의 삼성오제의 1인인 舜임금이 동이인이고, 중국 최초 왕조인 夏나라의 영역이 섬서성 일대로 한정되니 나머지 영토는 전부 고조선 영토였으며, 하나라에 이은 殷나라는 동이족의 나라로 산동성, 하북성, 산서성 부근이고 당시 북쪽에 숙신이라는 나라는 고조선으로 보인다. (사기를 지은 사마천은 동이족(고조선)의 역사인 은나라를 한족의 역사로 편입시킨다.)

고조선의 제후국이었던 孤竹國(중국 사서에는 고구려의 전신이라고 함)의 두 왕자 백이와 숙제가 중국의 주나라의 곡식을 먹지 않겠다 하며 고사리를 캐먹다가 굶어 죽은 곳이 首陽山(해발 2,720m)으로 현재 중국 섬서성 서안 서남쪽 태백산 바로 동쪽에 있다.

또는 山西省 蒲州의 首山이 수양산이라고도 하며, 백이ㆍ숙제의 묘는 河南省 옌스현의 首戴山에 있고, 甘肅省 룽시현에 首陽山이 있다는 기록이 있듯이 중원 도처에 백이ㆍ숙제의 흔적이 있다. 현재 백이ㆍ숙제의 묘는 하북성 진황도시에 있으며 그곳 陽山에 고죽국의 유적을 만들어 놓았으나, 그것은 고조선이 하북성 진황도시 창려 지역으로 옮겨 오면서 모셔온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중국에서는 春秋.戰國 시대가 약 500년간 지속되다가 B.C 221년 秦나라에 의해 통일이 되는데 그 혼란한 춘추전국시대에도 중원의 패자였던 고조선이 중원으로 나오지 못하고 중원의 동북방 골짜기인 하북성 창려에 있었다는 것은 잘 이해가 가지 않는 대목이다. 물론 만주와 중국 북부는 고조선이 지배하고 있었다. 그러나 역사적 기록이 없으니 어찌하랴!!! 그러나 필자는 분명 춘추전국 시대의 나라 중 일부는 동이족(고조선)의 나라일 것이라고 본다.

중국의 역사서 <사기>,  <한서>,  <후한서>에 등장하는 험독(險瀆,왕험성ㆍ왕검성ㆍ평양)은 요동군으로 나타나며, 낙랑군 수성현 (하북성 진황도시 창려)에 있다고 적혀있다 (험독=왕험성=왕검성=평양성). 이후의 기록인 <요사지리지> 등등에서는 요녕성의 요양/개주/반산/북녕 등지에 조선의 험독(평양)이 있었다고 말하나 후대의 기록인지라 고구려/발해와 혼돈이 되었다고 보여 신빙성이 떨어지고, 설사 그랬더라도 하북성 진황도시 창려 지방에서 다시금 옮겨 간 것이 아닌가 한다.

3. 고구려의 평양성
 

 

平壤城이 본격적으로 '사서'에 등장하는 것은 고구려 때부터이다. 그럼 최초의 고구려 平壤城은 어디일까? 舊唐書 列傳 第一百四十九 東夷편을 보면
高麗者,出自扶余之別種也。其國都於平壤城,即漢樂浪郡之故地,在京師東五千一百裡。

해설을 하면 다음과 같다
“고(구)려는 부여로부터 나온 별종이다. 그 나라는 평양성(平壤城)에 도읍하고 있었는데, 곧 한나라 낙랑군의 옛 땅으로서 경사의 동쪽 5천 1백 리에 있다“

이는 고구려의 平壤城이 한나라 낙랑군의 옛 땅에 있다 했으니 하북성 북부 지역 즉 북경 근방이다는 확실한 증거라 할 수 있다.

실제로 고구려는 여러 번 수도인 平壤城을 옮긴다.


1) 고구려를 건국한 추모대왕(주몽)이 최초 도읍한 곳은 비류곡에 홀본서성(忽本西城)을 쌓고 건국했다고 광개토태왕 비문에 써 있다. 이 홀본성은 현재 吉林省 공주령시로 추정된다.

2) 고구려 2대왕인 유리왕은 고구려 서부인 연나부 國內城으로 천도하였다가, 유리왕 31년 신나라 왕망의 공격으로 비류수로 다시 도읍을 옮긴다. 이 國內城의 위치가 어디인가에 대해 학계에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요녕성 개원시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고, 아래의 사실에 기인해 지금의 北京이나 承德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2대 왕인 유리왕의 흔적이 북경 부근에 많이 남아 있다. 유리묘가 북경 북방에 있고, 북경의 인사동이라 할 수 있는 고미술거리인 유리창이 북경 시내 한복판에 있고, 유리하라는 하천이 북경 남서쪽에 있다.
 
그리고 북경시 동북방 순의구에 高麗營진이란 지명이 있다. 이러한 것으로 미루어 보건데 최초 고구려의 平壤城은 북경이나 승덕으로 보는 학자들도 있다.

필자는 이러한 지명이 주는 사실과 위의 구당서의 기록으로 보아 북경 부근이 國內城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그리고 결정적인 근거로는 1976년 북한 평안남도 덕흥리에서 고구려 고분이 발견되었다.
 
이 고분의 주인공은 소수림왕/고국양왕/광개토태왕 시절에 유주자사 벼슬을 지낸 진으로 그당시 유주는 현재 북경 부근을 가르키는 지명이다. 아마 지금의 경기도지사 정도인 것으로 보인다. 유주자사 진의 고향이 덕흥리였다.
 


3) 삼국사기에는 고구려 5대왕 모본왕 2년(49년)에는 어양, 북평, 상곡, 태원을 습격하여 고구려의 영토로 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도시들은 지금의 중국 산서성과 산동성, 하북성이다.이 기록은 고구려의 수도인 平壤城이 그리 멀지 않은 곳 북경/승덕에 있었음을 알려 주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4) 고국원왕 13년(343년) 7월에 “왕이 平壤을 東黃城으로 옮겼다”라는 역사 기록이 있다. 동황성은 지금의 山東省 安國市이다. 안국시에는 아직도 東黃城鄕이란 지명이 남아 있다.
즉 북경에서 산동성 안국시로 천도한 것으로 보인다.


5) 고구려 장수왕의 平壤城은 요녕성 遼陽시에 분명 있었다. <후한서>, <요사지리지>, <원사지리지>에 平壤城은 요양이라는 기록이 있으며, 고구려가 망한 후 安東都護府가 요양에 세워졌던 것도 고구려의 平壤城이 요양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연개소문의 큰아들 연남생의 묘지명에서도 남생의 출생지가 遼東郡平壤城이라고 되어 있다.
 
그렇다면 일제가 우리 사학계에 국내성이라고 만들어준 압록강변 집안은 어떤 도시일까?
집안은 평원왕이 만든 장안성으로, 한 나라의 수도가 될 수 없는 고원지대라 많은 인구가 있을 수 없고, 대신 역대 선왕들의 능을 조용히 모실 수 있는 곳이다. 이 산성에 고구려는 역대 종묘사직과 귀족들의 조상묘를 후방 안정한 곳으로 옮겨 놓은 곳이다. 이 사실은 산성내의 가지런한 고분들이 마치 계획 분묘한 것처럼 가지런하게 놓여 있다는 것이 이를 증명해 준다. 고구려는 이전에 서천왕능과 미천왕능이 외적들에게 파헤쳐졌기 때문이다.

이런 현재 서울의 망우리와 같은 집안에서 고구려의 유물이 많이 나왔다는 이유로 고구려의 수도인 국내성으로 보는 것은 언어도단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일제의 행위에 대해 민족의 자존심이 상하지도 않는가!!!

역사적 사실이 이러함에도 아직도 매국사학자들은 고구려의 수도 平壤城이 현 북한의 대동강 평양이라고 자라나는 청소년들을 교육하고 있다. 그리고 국립중앙박물관에도 대동강 평양이 고구려의 수도라고 적혀 있으니 이 무슨 해괴한 일이란 말인가!

4. 고구려의 한성漢城이었던 지금의 평양(대동강)
 
지금의 대동강 평양은 광개토태왕 비문에는 ‘下平壤’으로 나오고, 환단고기에는 “南平壤‘으로 나온다.

그리고 북한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평양성벽글씨”에는 고구려의 ‘漢城’으로 기록되어 있다.

연개소문의 3남 남산의 묘지명에는 ‘漢城(대동강평양)을 지키지 못하니 왕이 활을 들고 항복하였다’라고 쓰여 있다.

漢城(대동강 평양)은 고구려가 멸망 직전 수도인 遼東 平壤城(요양)이 함락되자, 마지막으로 저항 세력이 옮겨 간 마지막 임시 수도로 漢城平壤이라고 했다. 漢城平壤마저 함락 당하자 고구려는 당나라에게 항복한 것이 확실하다.

平壤城은 고구려의 수도를 말하는 것으로 중경, 동경, 서경, 남경, 북경 식으로 여러 곳에 평양을 두었다. 광개토태왕 비문의 하평양, 남평양이 고구려 때 있었다는 것이 이를 말해준다. 그러한 하평양ㆍ남평양이었던 漢城(대동강평양)을 일제는 고구려의 평양이었다는 반도사관(식민사관)을 만들어 조선의 식민사학자들을 세뇌 했고, 세뇌된 매국사학자들은 대동강 평양을 고구려의 수도인 平壤城이라고 국민들과 학생들에게 교육했던 것이다.

정부는 이제부터는 위대했던 고구려의 수도인 平壤城은 대동강 평양이 아니라, 초기 평양성은 현 중국의 수도 북경 지역이었음을 밝히고, 나중 평양성은 만주 땅 요녕성 요양이었다고 떳떳이 알려야 한다.

이제는 이러한 일제의 반도사관(식민사관)의 잔재를 과감하게 그리고 말끔하게 털어내야 한다. 그것을 털어내지 않고는 민족의 내일이 없기 때문이다.(8)

 

 

 

 

 
<주>
 
 
 
 
 
 
 
 
 
 
 
 
 
 
 
 
 
 
 
 
 
 
 
<참고자료>
 
 
 
 
 
 
 

인하대, "통일신라 국경선은 지금의 중국 연변 용정시 부근"2022.03.22

https://v.daum.net/v/20220322120557553

 

 

 

일본이 조작한 우리 국경사 바로 잡아야”... 2022.05.11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469/0000674442?sid=102

 

 

 

고구려 평양의 진실 - 복기대 교수 (인하대학교 융합고고학과) [히스토피아]

https://youtu.be/GyI17ysO4uk?list=PLRAmvpNm4pmknMclNbv8SQ0DcEnzu63dn

 
 
 
 

평양천도의 진실? 진짜 평양의 위치

https://youtu.be/MB-fdwxKCPw?list=PLRAmvpNm4pmknMclNbv8SQ0DcEnzu63dn

 
 
 
 

KBS HD역사스페셜 – 장수왕의 승부수, 고구려 남진 프로젝트

https://youtu.be/k0pf6oc3pqs

 
 
 

 

 

 

 

고구려 장수왕의 평양 천도…'악수'였나 '신의 한 수'였나 - 노컷뉴스 (nocutnews.co.kr)2015-09-19 

 

 

 

 

장수왕의 남진정책은 어디가 목표인가?:플러스 코리아(Plus Korea)2008/07/06

 

 

 

 

우리역사문화연구모임(역사문) | 갈석산은 고구려의 역사를 알고 있다(제7회) <고구려 수도의 변천사> - Daum 카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