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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5) - 고구려는 제국인가? 본문

여러나라시대/고구려(고려,고리)

고구려(5) - 고구려는 제국인가?

대야발 2023. 11. 16. 15:21

 

 

 

성훈

 

 

"고구려와 대진국은 왕국인가 제국인가?"

'환단고기'를 정사서로 인정하는 길 만이 민족사를 바로 세울 수 있다

성훈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08/02/12 [19:54] 

 

<삼국사기>에는 김부식이 고의로 고구려가 건원칭제한 기록을 적지 않았으나, <환단고기 고구려국본기>에는 건원칭제한 고구려의 왕들이 아래와 같이 나온다. (  )는 환단고기에 나오는 연호, 제황명)

 

1대 동명성왕(?) (다물, 고주몽 성제) 책봉기록 없음
6대 대조대왕 (강무, 태조 무열제) 책봉기록 없음
19대 광개토왕 (영락, 광개토경호태열제) 책봉기록 없음
20대 장수왕 (건흥, 장수홍제호태열제)
(진) 고구려왕낙안군공 (위) 요동군개국공고구려왕 (송) 거기대장군개부의동삼사
(남제) 표기대장군
21대 문자명왕 (명치, 문자호태열제)
(위) 요동군개국공고구려왕    (남제) 거기장군  (양) 무군대장군개부의동삼사
25대 평원왕 (대덕, 평강상호태열제)
(북제) 요동군공고구려왕 (진) 영동장군 (주) 요동군개국공고구려왕 (수) 대장군요동군공
26대 영왕왕 (홍무, 영양무원호태열제)
(수) 개부의동삼사 요동군공
28대 보장왕 (개화, 보장제)
(당) 상주국요동군공고구려왕

게다가 김부식은 신라가 삼국통일했다는 위업을 강조하기 위해 하대(下代) 신라와 남북으로 대치하고 있던 대진국(발해)의 역사를 전혀 언급 안한다. 대진국 역시 건원칭제한 국가였다는 것이 <환단고기>에 아래와 같이 적혀 있다. 참고로 고구려의 정통성을 계승한 대진국은 중국식으로 시호와 묘호와 연호를 사용한다. (  )는 사용 연호.

1. 세조 진국열황제(대중상, 중광)---> 2. 태조 성무고황제(대조영, 천통)---> 3. 광종 무황제(대무예, 인안)---> 4. 세종 광성문황제(대흠무, 대흥)---> 5. 인종 성황제(중흥)---> 6. 목종 강황제(정력)---> 7. 의종 정황제(영덕)---> 8. 강종 희황제(주작)---> 9. 철종 간황제(태시)---> 10. 성종 선황제(건흥)--->11.장종 화황제(함화)---> 12. 순종 안황제(대정)---> 13. 명종 경황제(천복)---> 14.애제(청태)  *(청색 9개 연호는 중국 사서에도 나와 있는 연호임)

혹자들은 “우리나라 최고이며 불후의 역사서인 <삼국사기>에 나와 있지도 않은 고구려의 건원칭제 사실을 어떻게 믿으란 말이냐? 사학계에서 위서(僞書)로 판정한 <환단고기>의 기록이 잘못된 것이다. 고구려는 건원칭제를 한 사실이 없고, 단지 민족적 감성으로 그렇게 되고 싶었다는 희망사항을 적었을 뿐이다.”라고 말할 수도 있다. 과연 그럴까?

두 사서의 기록이 서로 다를 때에는 정오(正誤)를 판별하기 가장 좋은 방법은 유물이 있으면 된다. 만일 유물이 없으면 주변국의 사서를 참조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고구려와 발해가 건원칭제한 사실은 유물과 주변국의 사서 두 가지로 다 입증할 수 있다. 

1. 주변국 사서의 기록
중국 25사의 하나인 <수서(隋書)>에 보면 “位宮玄孫之子 曰昭烈帝 (위궁(산상왕)의 현손의 아들을 소열제라 말한다)”라고 고구려 16대 고국원왕을 소열제(昭烈帝)라고 적어 놓았다. 중국에서 고구려의 임금(왕)을 자기네 방식으로 황제라고 적은 것이다. 고구려 임금 중에서 유독 고국원왕만 황제였을까?

그런데 <삼국사기>에는 <수서>에서 소열제라 칭한 고국원왕에 대하여 왜곡된 기록이 있다.
* 13년 왕은 아우를 시켜 연나라에 들어가 칭신(稱臣)하고 진귀한 보물을 바쳤다.
* 25년 연나라는 왕을 정동대장군영주자사로 삼고, 낙랑공왕(樂浪公王)으로 봉하였다.

<수서>에는 황제로 쓰여 있는 고국원왕이 연나라에게는 신하로 칭하며 어떻게 왕을 책봉 받은 것일까? 김부식이 <수서>를 참조 안했을 리가 없는데, 소열제(고국원왕) 부분에서는 사대주의 모화사상 때문에 눈을 감은 것으로 보인다. 

대진국(발해)이 독자 연호를 쓴 사실은 <신당서 발해전>에도 나와 있다. 신당서에는 발해의 건국을 대조영부터로 보고 있으며, 광종의 ‘인안’부터 장종의 ‘함화‘까지 9명 황제의 연호가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고구려를 계승한 대진국(발해)만 독자 연호를 썼을까?

무릇 연호란 황제만이 쓸 수 있는 것으로 고구려/발해가 독자적인 황제국이었음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자기네 사서에 고구려/발해가 버젓이 독자 연호를 쓴 황제국이라고 적어놓고도, 고구려/발해는 자기네 지방정권이란 터무니없는 동북공정의 주장은 이 대목에서 거짓임이 명백하게 밝혀지고 있는 것이다.

2. 유물

▲불상 뒷면에 장수제의;건흥5년이라 쓰여있다.

 

현 집안에 있는 고구려 19대왕인 광개토태왕 비문에 보면 “옛날에 시조인 추모왕이 나라를 건립할 때에 그의 부친은 북부여 천제의 아들이고, (생략) 이어 17세(世)를 전하여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에 이르렀다. 18세에 즉위하여 존호를 영락태왕이라 했다.(이하 생략).”

비문에 나와 있듯이 광개토태왕은 ‘영락’이란 존호(연호)를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연호는 황제국만이 사용할 수 있다. 그리고 천제의 후손으로 17세를 전함은 당연히 황제를 나타내는 것이고, 중국에서 쓰는 황제라는 용어 대신에, 광개토왕은 ‘태왕’이란 우리만의 용어도 썼음을 알 수 있다.

1979년 발견된 중원고구려비와 근처 사찰에서 발견된 불상(명금동석가삼존불광배)에서 ‘고려대왕(高麗大王: 장수열제)’의 연호가 ‘건흥’이라는 것이 발견되었다. 장수왕에게는 우리만의 용어인 ‘대왕(大王)’이라는 존칭을 붙였다.

▲&nbsp;&nbsp;&nbsp;정효공주의 묘지석. 문왕의 연호와 황상이란 글이 적혀있다.

 

1949년 길림성 돈화현에서 발견된 4대 광종 세종문황제 대흠무의 2녀 정혜공주의 묘비와  1980년에 발견된 4녀 정효공주의 묘비에는 문왕의 연호가 ‘대흥(大興)’과 ‘보력(寶曆)’이었다는 사실이 적혀있고, 광종을 ‘황상(皇上)’으로 적은 것이 발견되었다. 비문에 적혀 있기를 “(이전생략) 황상(皇上)은 조회를 파하고 크게 슬퍼하여 정침(正寢)에 들어가 자지 않고 음악도 중지시켰다.(이하생략)" 

이러한 유물들로 인해 <환단고기>의 사료적 가치가 입증되었다고 할 수 있다. 고구려의 광개토태왕 비문의 발견은 계연수선생이 <환단고기>를 내기 전이니 그렇다고 치더라도, 대진국 세종문황제의 연호가 ‘대흥’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지기는 이것이 처음이었다. <환단고기 태백일사>를 저술한 이맥선생과 계연수선생이 이 무덤 안에 미리 들어가 보고 또 중원고구려비와 불상이 발견될 것을 미리 예측하고 <태백일사>를 썼을까?

본시 북부여와 고구려는 한나라로 보아야 하나 편의상 고구려만 따로 떼어 보면, b.c 58년  건국되어 a.d 668년 망했으니 그 존속 기간이 726년간이다. 그 사이에 중국에서의 왕조 변화를 보면 아래와 같이 9왕조가 고구려와 만나게 된다.

b.c206 전한(前漢)--->a.d5 신--->25년 후한(後漢)--->220년 3국시대--->265년 서진--->317년 동진과 5호16국시대--->439년 남북조시대--->581년 수--->618년 당(唐)

중원의 통일국가 중 300년가량 된 국가는 당나라(290년) 뿐이며, 200년가량 된 나라도 전한(211년)과 후한(195년) 뿐이고, 신과 서진과 수나라는 단명으로 그친다. 나머지는 삼국/5호16국/남북조시대로 찢겨 갈기갈기 분열되어 있었다. 게다가 수나라와 당나라도 고조선의 후예인 선비족이 세운 나라이다.

어떻게 이런 나라들이 700년이 넘는 사직의 대국 고구려를 일개 제후국(지방정권)으로 둘 수 있단 말인가! 이 세상에 종주국보다 더 오래되고 더 강한 지방정권이 있는가? 그리고 그 지방정권은 종주국이 없어지더라도 대물림이 되었단 말인가? 그리고 지방정권(제후국)이 어떻게 감히 건원칭제를 함부로 할 수 있단 말인가? 여기서 중국의 동북공정은 어거지이고 허구라는 것이 명백히 드러나는 것이다.

<삼국사기>에는 중국 각국에서 삼국의 왕을 봉했으며, 삼국은 수시로 여러 나라에 조공을 올렸다고 적어 놓았다. 고구려 전성기인 장수왕/문자명왕 시대에도 온통 “사신을 x나라로 보내  조공했다.”는 기록이 즐비하다. 중원에서 자기들끼리 싸우느라 정신이 없는 나라들에게 삼국이 왕으로 책봉 받고 조공을 올렸다는 기록을 믿어야 할까? 또 과연 그럴 필요가 있었을까?

원래 중국에서는 다른 나라에 왕으로 책봉한다는 교지를 내림으로서 스스로 자국이 황제국임을 나타내기 위한 방편이었고 또 일방적인 자기네의 습성이었다. 즉 책봉은 서로의 문화 차이로 이해해야 하며, 조공은 외교사절의 파견으로 봐야지 그걸 액면(글자) 그대로 보고 역사를 해석하면 곤란하다.

▲고구려제국의 역사의 진실. 주변국들을 연방으로 또는 직속으로 편입했다.

 

황제로 칭한 대국(고구려)이 뭐가 아쉬워 중국의 일개 작은 나라에게 왕의 책봉을 받을 필요가 있었고 조공을 수도 없이 올렸겠는가? 아마 중국이 보낸 책봉조서를 보고 고구려의 황제들은 가소롭다고 웃고는 문화의 차이 때문에 대꾸도 안했음에 틀림없을 것이다.

<환단고기>에 보면 고구려의 위 황제들은 중국과 상대로 전쟁을 해 고구려의 강역을 넓혔다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의 내용대로 책봉을 받고 조공을 올린 제후국이 종주국을 상대로 전쟁을 해 영토를 넓혔다는 <환단고기>의 기록은 서로 정반대라 할 수 있다. 어느 기록이 옳을까?

위에서 보았다시피 유물과 다른 사서의 기록으로 입증된 <환단고기>의 내용은 거짓이 아니다. 오히려 <삼국사기>가 역사의 진실을 숨기고 은폐하려 했다. 그럼에도 이 나라의 강단사학계는 자신들의 자리지킴 때문에 <환단고기>를 위서(僞書)로 몰아붙이고 있다.

분명한 것은 <삼국사기>는 일제의 분서갱유에도 살아남은 책이다. 왜 살아남았을까? 이유는 일제가 조선을 식민지배하기 위해서는 조선인의 민족정기를 빼야 하는데 <삼국사기>라는 사서가 자기들에게 필요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삼국사기>는 반도사관의 빌미를 일제에게 제공하여 악용되기도 한다.

지금이라도 <환단고기>를 우리 상고사(上古史)의 정사서(正史書)로 인정하는 길만이 중국의 동북공정을 여지없이 무너뜨리고 일본의 황국사관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자신들의 자리지킴 때문에 민족의 역사를 왜곡한다면 조상과 민족에 씻을 수 없는 큰 죄를 짓는 것이다. 민족의 위대한 역사를 제대로 밝히는 길만이 국가와 민족을 진정으로 위하는 길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1)

 

 

 

 

신완순

 

 

 

중국 북제는 고구려 속국이었다.

기자명신완순 입력 2016.04.02 11:01수정 2018.12.01 04:49

중국 동북공정 끼여 들 틈없어...

중국 5호16국 시대의 북조정권은 사실상 모두 우리 역사다...

 

▲ 중국 사회과학원에서 발간한 중국역사지도집 중의 ‘진ㆍ제ㆍ주 시기전도’ - <속후한서>에서 북제 강역의 서쪽은 요동과 접하고 있다 하였으니 요동은 지금의 섬서성과 황하 부근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북제는 고구려 별부(別部)... 발해왕(渤海王)이 통치

공자의 <춘추>와 사마천의 <사기> 또한 마찬가지 의도에서 비롯되었다. 진수(陳壽)의 <삼국지>가 위(魏)나라 중심으로 편찬된 사서인 반면, 유비의 촉한(蜀漢)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사서가 <속후한서(續後漢書)>이다. <속후한서>는 두 가지 종류가 있는데 일반적으로 송(宋)나라 때 소상(蕭常)이 편찬한 <속후한서>를 <소씨속후한서(蕭氏續後漢書)>라하고 원(元)나라 때 학경(郝經)이 편찬한 <속후한서>를 <학씨속후한서(郝氏續後漢書)>라 부른다. <속후한서>는 유방이 세운 한(漢, 보통 전한 또는 서한이라 부른다)과 유수(劉秀)가 세운 후한(後漢, 동한이라고도 한다)에 이어 유비가 세운 촉(蜀)을 촉한이라 하여 앞선 두 왕조를 잇는 정통왕조로 보는 한족 중심의 역사관을 세우기 위해 편찬된 사서들이다. 얼핏 보면 그게 그거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지만 엄청난 시각의 차이가 있다.

 

<삼국지>는 유비를 황제가 아닌 ‘선주(先主)’로, 그 아들 유선을 ‘후주(後主)’라 칭하고 역사를 기술하고 있다. 반면 <속후한서>는 유비를 ‘소열황제(昭烈皇帝)’라 하고 유선을 ‘소제(少帝)’ 또는 ‘말제(末帝)’라 하여 황제로 칭하고 정통성을 이은 역사로 기술하고 있다. 이는 한족 중심의 역사로 끌고 가려는 처절한 몸부림 속에 철저히 계산되어 ‘만들어진 역사(a made-up history)’이다. 이러한 역사인식이 송(宋)나라와 명(明)나라로 이어져 <삼국지연의>와 <초한지> 등의 소설을 만들어냈고, 이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 조선시대의 소중화 사상에 물든 일부 잘못된 선비들에 의해 발전되었으며 현대의 우리들도 여기에 열광하고 있는 것이다.<소씨속후한서>에는 흔히 말하는 사이(四夷) 즉 우리 역사에 관한 기술이 빠져 있으나 <학씨속후한서>에서는 동이(東夷)에 관한 역사 기술이 우리의 눈을 확 잡아끈다.

 

원래 <학씨속후한서>는 90권으로 된 원(元)나라 때 학경(郝經)이 편찬한 사서이다. 편찬자 학경의 자는 백상(伯常)이며 능천(陵川)사람이다. 벼슬이 한림시독학사(翰林侍讀學士)에 이르렀고 소문관대학사 영록대부(昭文館大學士榮祿大夫)에 추증되었으며 죽은 뒤에는 기국공(冀國公)으로 추봉, 시호는 문충(文忠)이었다. <학씨속후한서>는 위(魏)나라를 정통으로 하는 진수(陳壽)의 <삼국지>를 개편하고, 송나라의 배송지가 주해한 <삼국지>와 사마광의 <자치통감>을 비교하여 뺄 것은 빼고 취할 것은 취하여 교간된 것이다. 이 중에서 동이(東夷)에 관련된 사항은 <속후한서>권81 열전 제78편에 부여, 고구려, 발해 등 11개의 나라에 관하여 기술된 부분이다. 어떠한 연유에서인지 <속후한서 동이열전>중에 동옥저, 읍루, 삼한 등 나머지 7전은 전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이전 고구려조에 우리 학계에 일반화된 기존의 역사 인식을 흔드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남북조 시대의 <북제(北齊)>에 관한 기술이며 다음과 같다. “고구려의 별부(別部)는 발해이다. 그 땅의 동쪽은 바다에 닿아있고 서쪽은 요동과 접하고 있다. 풍속이 점차 중국과 같아졌으며 수인(蓚人) 고환(高歡)에 이르러 위(魏)나라 효무제(孝武帝)를 축출하고 그 아들 고양(高洋)이 마침내 동위(東魏)를 빼앗아 제왕을 칭하고 나라 이름을 제(齊)라 하였다. 고위(高緯)에 이르러 주(周)나라 무제(武帝)에게 멸망하였다.(句麗別部曰渤海其東際海西接遼東俗漸同中國至蓚人高歡逐魏孝武帝其子洋遂簒東魏稱尊號國號齊至緯爲周武帝所滅)”

 

요수는 황하... 요동지역은 황하 유역

북제(北齊)는 남북조 시대 550년에 건국되어 577년 북주(北周)에 의해 멸망한 나라이다. 선비족인 탁발씨에 의해 386년에 세워진 북위(北魏)가 6진의 난으로 인하여 534년 동위(東魏)와 서위(西魏)로 나누어졌는데 동위는 북제가 되고 서위는 북주가 된다. 동위는 실질적으로 발해왕(渤海王) 고환(高歡)이 통치하였으며 그의 아들 고양이 나라 이름을 북제라 한 것이다.

이러한 북제가 고구려의 별부인 발해로서, 바로 고구려의 연방에 속한 속국이라는 것을 밝히고 있는 점에서 매우 귀중한 사료라 할 수 있다. 비록 51자의 짧은 기록이지만 남북조 시대의 고구려의 역사를 밝힐 핵심적 요소를 담고 있다 할 것이다. 중화 사관에 의해 중국 사회과학원에서 발간된 ‘중국역사지도집’의 ‘진(陳)·제(齊)·주(周) 시기 전도’- (그림1)를 보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학경의 <속후한서>의 내용과 지도를 중심으로 보면 다음과 같은 것을 유추할 수 있다.

먼저 요동의 위치문제이다. 지도에서 북제의 강역을 보면 서쪽 경계는 위쪽으로는 황하 동쪽과 아래쪽으로는 낙양(洛陽)과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남쪽은 양자강 북쪽을 표시하고 있다. ‘동쪽으로 바다에 닿아있고 서쪽은 요동과 접하고 있다’는 구절에서 서쪽의 요동은 현 중국의 섬서성을 가리키는 것이며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황하가 그 경계를 이루고 있음을 보여준다.

요동이라는 개념은 요동과 요서를 나누어서 분류가 되지만 일반적으로 요동은 요동과 요서를 합한 개념으로 사서에서 많이 쓰이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또한 요동이 그냥 고구려를 가리킬 때도 많다. 예를 들면 당태종이 고구려를 정벌하러 가는 것을 ‘요동정벌’이라 하였다. 따라서 북제의 강역으로 보는 요동은 현재의 요녕성이나 하북성 지역이 아닌 황하 인근 유역이며 황하가 자연스럽게 요수(遼水)였음을 밝혀준다.따라서 ‘요동은 현 요녕성에 있는 요하의 동쪽이었다.’는 기존의 지명 비정은 마땅히 재고되어야 하며 현 요하 동쪽으로 고구려의 강역을 표시하는 역사인식 또한 바뀌어야 할 것이다.

▲ 북제가 고구려의 별부인 발해였다는 것을 담고 있는 학경의 <속후한서>, 청나라 건륭제 때 국책사업으로 편찬된 사고전서에 실려있다.

 

또한 송나라 악사(樂史)가 편찬한 <태평환우기(太平寰宇記)> 권 172 하 동이편에 보면 “동이의 땅은 흉산(胸山)으로부터 동쪽이다. 그 북쪽은 낙랑(樂浪)·조선(朝鮮)·요동(遼東)이며 그 남쪽은 민(閩)·월(越)·진안(晉安)의 동쪽 모두가 그 지역이다.”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흉산(胸山)은 현재의 중국 하남성에 있는 숭산(嵩山)으로 보인다. 태산(泰山), 항산(恒山), 형산(衡山), 화산(華山)과 함께 중국의 5악으로 불리는 숭산은 5악 중의 한 가운데에 위치하고 있다. 숭산은 인체의 심장 부근에 해당되는 산이며 의미상으로 흉산(胸山)이며 이 흉산은 발음은 숭산과 유사하다.

따라서 <태평환우기>에서 말하는 동이의 강역은 하남성 낙양 부근 숭산의 동쪽에 해당되며 황해 연안을 따라 현 하북성에서 복건성까지 이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동이는 동쪽 지역에 있는 유(幽)·영(營)·청(靑)·서(徐)·양(揚) 지역이며 이 지역에 살고 있는 모든 이(夷)를 가리킨다는 것을 앞서 학경의 <속후한서> 동이전의 맨 첫머리에 싣고 있어 <태평환우기>의 기사에 신뢰감을 더해주고 있다.

 

고구려 2대 유리왕, 북제와 북위의 전신 선비 정벌

북제의 전신이 되는 북위는 선비족이 세운 나라였다. 북위와 고구려가 전쟁을 하지 않고 평화스럽게 잘 지낸 것을 사학자들은 고구려의 외교력 덕분이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선비족은 고구려 2대 임금임 유리명왕 때 이미 정벌하여 속국으로 삼았으며 이러한 관계가 후대까지 이어졌기 때문에 별 갈등이 없었던 것이다. 북위에서 동위로 또한 동위가 북제로 변천하는 과정에는 항상 고구려의 입김이 작용한 것이며 이들은 실질적인 고구려의 전위부대 성격의 국가였던 것이다. 북제가 고구려의 연방에 속한 속국이었다는 것을 몰랐던 것처럼 우리의 역사에서 이들 고구려의 연방에 대한 국가들을 지워버림으로써 중국의 한족들은 속으로는 오랑캐라 경멸하면서도 선비족의 역사까지 그들의 역사에 포함시키고 있는 것이다.

고구려의 역사는 고구려 연방의 일원이었던 선비 등의 역사까지 포함하여야 한다. 분열과 통합을 거듭해온 대륙의 역사는 동이가 나설 때 정리가 되고 안정이 되었다는 것을 많은 사서에서 읽을 수 있다. 그들은 항우를 노래한 시처럼 언젠가 동이가 중원 땅을 차지하기 위해 다시 올 것이라는 공포를 항상 안고 살고 있다. 우리는 항우의 권토중래, 아니 고구려의 다물을 잊지 말고 살아가야 할 것이다.(2)

 

 

 

 

 

<주>

 

 

(1)  ˝고구려와 대진국은 왕국인가 제국인가?˝ (breaknews.com)2008/02/12

 

 

 

(2) 중국 북제는 고구려 속국이었다.  - 코리아 히스토리 타임스 (koreahiti.com)신완순.2016.04.02

 

 

 

 

 

 

<참고자료>

 

 

 

 

'아시아의 대제국 고구려..' 사실인가?:플러스 코리아(Plus Korea)2008/01/28

 

 

 

한민족역사정책연구소 | 고구려가 장안을 점령한 것은 장수태왕초기이다 - Daum 카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