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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7) - 서울역사박물관 본문

남국/조선

조선(7) - 서울역사박물관

대야발 2024. 11. 16.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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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사박물관 상설전시실은

'조선시대의 서울'(상설전시 1존),

'개항, 대한제국기의 서울'(상설전시 2존),

'일제 강점기의 서울'(상설전시 3존),

'대한민국 수도 서울'(상설전시 4존),

'도시모형 영상관'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조선시대의 서울'(상설전시 1존)은

'조선의 건국과 수도 한양',

'한양의 변화',

'한양의 번영',

'한양도성 안 마을'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조선전기 문신 김사형·이무·이회가 아시아·유럽·아프리카를 포함하여 1402년에 제작한 세계지도.

현전하는 동양 최고의 세계지도이고 당시로서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가장 훌륭한 세계지도라고 평가되고 있다. 

 

 

 

 

천상열차분야지도

한국 천문학 최고의 자랑거리인 문화재로, 현재까지 발견된 천문도 중 관측연대 기준 세계 최초[2]로 만들어진 전천(全天) 천문도이자 고경도 석판 위에 새겨진 전천 천문도다. 현재 석각본, 모사본(석각본 탁본), 필사본이 모두 무사히 존재하며, 태조 때 만들어진 원본은 1985년 국보 제228호로 지정됐다.

때는 조선 태조(이성계)가 고려를 멸하고 갓 조선을 건국하고 정통성 살리기에 고심하던 차에, 평양 대동강 물에 빠져 사라졌던 천문도의 인본(영인본)을 가져온 이가 있어 서운관(書雲觀)에서 그 오차를 교정하여 권근, 류방택, 권중화 등 11명이 태조 4년(1395)에 만들었다. 양면으로 만들었는데 기록에 따라서는 세종 때까지 해서 완성시켰다고 본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조선은 일찍이 없었던 대전란에 휩싸였다. 전국의 생활 기반 시설은 물론 사회·경제체제 또한 무너져 막대한 국가적 손실을 입었다. 7년간의 임진왜란으로 수도 한양의 궁궐과 종묘, 대부분의 관청과 시전행랑 등 도시 기반 시설과 가옥들이 약탈과 화재로 잿더미가 되었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선조와 광해군 대에 종묘와 창덕궁을 비롯한 도시 시설을 재건하면서 왕도의 모습을 회복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전후 혼란이 채 수습되기도 전에 명·청과의 외교문제로 병자호란이 발발하였다. 병자호란의 전란 기간은 짧았지만 조선의 패배로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비롯한 왕족과 50만 명에 달하는 양민들이 인질로 잡혀가는 등 그 피해는 매우 컸다. 이 두 번의 전란 이후 조선은 전후 복구를 위해 정치·사회·경제 전반에 걸쳐 기존의 국가운영 체제를 재편하는 등 새로운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조선전기 한양은 왕과 고위 관료 등이 주로 거주하는 왕도王都였다. 왕도였던 한양이 상업도시로 변모한 것은 17세기 후반 이후였다. 17세기 후반 삼남 지방의 대동법 실시, 금속화폐 유통 등으로 한양에서 상품화폐경제가 발달하고, 대부분의 거래가 화폐를 매개로 이루어지는 체제가 확립되었다. 노동력을 돈으로 사고 팔 수 있게 되면서 특별한 기술이나 재산이 없는 지방 사람들이 대거 한양으로 몰려들었다.

 

 

한양에서는 이들이 품을 팔아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18세기 후반 이후에는 상업이 크게 발달하였는데, 수상교통의 중심인 마포, 서강, 용산 등 경강의 주요 포구가 상업 발달을 견인하는 중심지로 부상하였다. 상업과 더불어 왕실과 양반들에게 고급 사치품을 제공하는 금방, 은방, 옥방 등과 같은 민영 수공업도 발달하였다. 그 결과 한양의 인구가 많이 증가하였고, 인구의 구성 또한 상인과 수공업자, 임노동자가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조선시대 한양의 도시공간은 한양도성을 기준으로 도성 안과 도성 밖 성저십리 지역으로 나뉜다. 여기에 한성부의 행정편제로 도성 안팎 지역을 동부, 서부, 남부, 북부, 중부의 오부로 나누었다. 한편 한성부의 공식 행정 구역인 오부와는 별개로 도성 안은 지세와 수계를 중심으로 북촌, 남촌, 중촌, 동촌, 서촌(웃대), 아랫대의 지역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백악산 아래인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 지역인 아랫대와 북촌, 남산 북쪽 기슭 아래를 남촌, 광통교에서 종묘 앞 효경교에 이르는 개천 양안 지역을 중촌, 경복궁 서쪽의 개천 상류 지역을 서촌(웃대), 효경교에서 오간수문에 이르는 개천 하류 지역을 아랫대, 낙산 서쪽 기슭을 동촌이라 했다. 이들 지역은 자연 경관과 입지 조건, 거주자들의 신분적 특성에 따라 각각 지역문화 양상이 달랐다.

 

 

 

 

 

 

 

도성 밖 성저십리의 범위는 동쪽으로는 양주 송계원과 대현까지, 서쪽으로는 양화도와 고양 덕수원까지, 남쪽으로는 한강과 노량진까지 속한다. 조선전기에는 도성 밖에 많은 사람들이 살지 않았지만 조선후기가 되면 한양 인구의 약 50%가 거주하게 된다. 성 밖에 살았던 이들 가운데에는 지방에서 상경하여 상업에 종사하거나 날품을 파는 빈민들이 많았다.

 

 

마포, 용산, 서강 등지는 전국에서 올라온 세곡과 상품들이 몰려들어 상업의 중심지로 번성하였다. 그리고 동대문 밖 왕십리나 살곶이벌 등지는 한양 사람들이 소비하는 채소 등을 재배하는 근교농업의 중심지였다. 도성 밖 성저십리는 조선후기 한양이 왕도에서 상업도시로 변모했음을 상징하는 공간이었다.

 

 

 

시전상인과 난전상인

시전상인은 특권상인으로서 국가와 왕실에 국역의 의무를 지는 대가로 독점적 영업권인 금난전권을 보장받았다.

한양이 상업도시로 변모하면서 시전의 규모 이상으로 상품의 종류와 유통량이 많아지자 난전상인들이 성장하게 되었다. 

 

 

 

 

서화사(書畫肆)

광통교를 중심으로 개천 주변에는 책사(冊肆), 서화사(書畫肆) 등 서적과 그림을 판매하는 가게들이 즐비하였다.

 

 

 

 

백자 청화 투각 연꽃무늬 필통

 

 

 

 

백자 상감 연꽃무늬 병

 

 

 

 

분청사기 상감 연꽃무늬 매병

 

 

 

 

자료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홈페이지, https://museum.seoul.go.kr/www/exh/per/exhPer1th.jsp?sso=ok

 

 

 

 

 

 

 

 

 

<참고자료>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14XXE0063914

 

 

 

https://namu.wiki/w/%EC%B2%9C%EC%83%81%EC%97%B4%EC%B0%A8%EB%B6%84%EC%95%BC%EC%A7%80%EB%8F%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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