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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국/대한제국

4.대한제국 문화유산 (2) 경운궁(덕수궁)

대야발 2024. 11. 27. 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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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에 다녀왔습니다.

덕수궁은 대한제국의 황궁이었습니다.

 

 

 

 

덕수궁은 1897년에 선포된 황제국, 대한제국의 황궁으로 옛 이름은 경운궁입니다.

 

 

덕수궁은 원래 조선 제9대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의 사저였고, 그 후에도 월산대군의 후손이 살던 곳이었다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으로 도성의 궁들이 모두 소실되자 1593년(선조 26)부터 임시 궁궐로 사용하여 정릉동 행궁(貞陵洞 行宮)이라 불렸다. 이후 1611년(광해군 3) 경운궁(慶運宮)으로 이름이 정해지면서 정식 궁궐이 되었다가, 창덕궁이 중건되면서 다시 별궁으로 남게 되었다.

 

 

 

 

 

 

 

 

그러다가 1897년(광무 1)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 대한제국의 황궁으로 사용하였다. 이후 황궁에 맞게 규모를 확장하고 격식을 높였으며, 궁궐 내 서양식 건물을 짓기 시작하여 전통 건축물과 서양식 건축물이 조화를 이루게 되었다. 그러나 1904년(광무 8) 대화재로 많은 건물이 소실되었고, 1907년 일제에 의해 고종이 황위에서 물러나자 궁의 이름이 덕수궁으로 바뀌게 되었다.

 

 

 

일제강점기 이후에는 덕수궁의 규모가 대폭 축소되어 대부분의 건물들이 철거되었다. 동시에 공원화가 진행되어 궁궐로서의 면모를 잃게 되었다. 1946~47년에는 덕수궁 석조전에서 제1·2차 미소공동위원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이후 덕수궁의 복원이 꾸준히 이루어져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대한문

 

 

 

대한문(大漢門)은 덕수궁의 정문으로 ‘대한’은 ‘한양이 창대해진다’라는 뜻이다. 원래 경운궁의 정문은 남쪽에 있었던 인화문(仁化門)이었으나, 동문인 대안문(大安門) 주변이 환구단을 비롯하여 새로운 도심의 역할을 하게 되면서 정문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지금의 이름은 1906년(광무 10) 문을 수리하면서 바꾸게 되었다. 원래 대한문은 약 33m 앞에 있었으나 1970년대 태평로를 확장하면서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대한문을 지나서 있는 금천교는 1986년에 발굴하여 복원하였다.

 

 

 

 

대한문 금천교와 하마비

 

 

 

 

중화문

 

 

 


중화문(中和門)은 중화전의 정문으로 중화전과 함께 지어진 문이다. 중화전과 마찬가지로 답도에는 용을 장식하였다. 원래 문 좌우로 행각이 있었으나 없어지고 현재는 동쪽에 일부만 남아 있다. 중화전과 중화문은 1985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중화전

 

 

 

 

중화전(中和殿)은 덕수궁의 정전으로 신하들의 하례, 외국 사신의 접견 등 중요한 국가행사를 치르던 곳으로, ‘중화’는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바른 성정’이라는 뜻이다. 고종이 이곳에 환궁한 후 5년 정도 즉조당을 정전으로 사용하였다가 1902년(광무 6) 다른 궁궐의 정전처럼 중층 구조의 중화전을 지었다.

 

 

 

 

중화전 내부

 

 

 

그러나 1904년(광무 8) 대화재로 소실된 후 1층 규모로 중건하였다. 중화전으로 오르는 계단 답도에는 다른 정전의 답도와 다르게 봉황이 아닌 용 두 마리가 새겨져 있다. 이는 대한제국 선포 후에 지어진 건물로 황제를 상징하는 용을 장식한 것이다. 중화전 마당에는 조회 등의 의식이 있을 때 문무백관의 서 있는 위치를 표시하는 품계석이 좌우에 배치되어 있다.

 

 

 

석어당

 

 

 

석어당(昔御堂)은 즉조당과 함께 덕수궁의 모태가 되는 건물로 정확한 창건연대는 알 수 없다. ‘석어’는 ‘옛날에 임어(왕이 왕림)하다’라는 뜻으로, 임진왜란 때 선조가 임시로 거처했던 곳이다. 광해군 대에는 선조의 왕비 인목왕후가 유폐되기도 하였고, 1623년 인조반정 후 광해군을 문책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인조는 경운궁의 전각 대부분을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었으나 석어당과 즉조당은 보존하였다. 석어당은 덕수궁에 있는 건물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2층 건물이자 단청을 하지 않은 건물이다.

 

 

 

석어당 내부

 

 

 

 

즉조당과 준명당

 

 

 

즉조당(卽阼堂)은 석어당과 함께 덕수궁의 모태가 되는 건물로, ‘즉조’는 ‘왕의 즉위’라는 뜻이다. 이곳에서 15대 광해군과 16대 인조가 왕위에 올랐고, 1897년 대한제국 이후에는 정전으로 사용하였다. 이때 이름을 태극전, 중화전으로 불렀다가 1902년(광무 6) 중화전이 세워지면서 다시 즉조당으로 불렸다. 이후에는 고종의 후궁인 황귀비 엄씨가 생활하다가 1911년에 세상을 떠난 곳이다.

준명당(浚眀堂)은 즉조당과 복도로 연결된 건물로, ‘준명’은 ‘다스려 밝힌다’라는 뜻이다. 이곳은 즉조당과 함께 1904년(광무 8) 대화재로 소실되었다가 다음 해에 복원하였다. 1916년에는 고종의 딸 덕혜옹주의 교육을 위해 유치원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광명문

 

 

 

광명문(光明門)은 함녕전의 정문으로 ‘광명’은 ‘밝음을 맞다’라는 뜻이다. 1938년 일제에 의해 중화문의 서남쪽으로 옮겨져 보루각 자격루와 흥천사 동종 등을 전시하였다. 2018년 약 80여년 만에 현재의 자리로 다시 옮겼다.

 

 

 

함녕전

 

 

 

함녕전(咸寧殿)은 1897년 고종의 환궁과 함께 지어진 황제의 침전으로, ‘함녕’은 ‘모두가 평안하다’라는 뜻이다. 1904년(광무 8) 함녕전 온돌 수리공사 중 일어난 화재로 소실되어 이듬해 다시 지었다. 고종은 이곳에서 생활하다가 1919년에 세상을 떠났다. 함녕전 뒤편에는 계단식 정원으로 꾸며 아름다운 장식을 한 굴뚝들을 설치하였다. 함녕전은 1985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함녕전

 

 

 

 

함녕전 내부

 

 

 

 

덕홍전

 

 

 

덕홍전(德弘殿)의 ‘덕홍’은 ‘덕이 넓고 크다’라는 뜻으로, 이곳은 원래 고종의 황후인 명성황후의 혼전(왕과 왕비의 신주를 종묘로 모시기 전까지 임시로 신주를 모시는 건물)인 경효전이 있었던 곳이었다. 이후 고종은 고위 관료와 외교 사절 등 빈객을 접대하기 위한 접견실로 사용하였다. 내부는 천장의 샹들리에와 봉황문양의 단청, 오얏문양 등으로 화려하게 꾸몄다. 원래 덕홍전 주위에는 행각들이 있었으나 지금은 남행각 일부만 함녕전 남행각에 맞닿아 있다.

 

 

 

 

덕홍전 내부

 

 

 

 

정관헌

 

 

 

정관헌(靜觀軒)의 ‘정관’은 ‘고요히 바라보다’라는 뜻으로, 『고종실록』에 의하면 조선 역대 왕의 초상화인 어진을 임시로 봉안했던 장소로 사용하였다. 정관헌은 동서양의 양식을 모두 갖춘 건물인데 기단 위에 로마네스크 양식의 인조석 기둥을 둘러서 내부 공간을 만들었고, 바깥에는 동·남·서 세 방향에 기둥을 세운 포치(건물의 입주나 현관에 지붕을 갖춘 곳)가 있다. 난간에는 사슴, 소나무, 당초, 박쥐 등의 전통 문양이 조각되어 있다.

 

 

 

 

정관헌 내부

 

 

 

석조전

 

 

 

석조전 내부

 

 

 

석조전(石造殿)은 고종이 침전 겸 편전으로 사용하기 위해 지은 서양식 석조건물로, ‘석조’는 ‘돌로 짓다’라는 뜻이다. 영국인 하딩이 설계한 이 건물은 대한제국의 근대화를 위한 정책의 일환으로 지었다. 석조전은 서양의 신고전주의 건축양식으로 지어졌으며, 건물의 앞과 동서 양면에 발코니가 설치된 것이 특징이다. 지층은 시종이 기거하는 방과 부속 시설이 있었고, 돌계단을 올라 들어가는 1층에는 접견실과 귀빈 대기실, 대식당 등이 있고 2층은 황제와 황후가 거처하는 침실과 여러 용도의 방으로 구성되었다.

 

 

 

석조전 내부 접견실

 

 

 

1910년에 준공된 후 고종은 고관대신과 외국 사절을 만나기 위한 접견실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고종이 세상을 떠난 후 덕수궁이 훼손되는 과정에서 석조전은 일본 미술품을 전시하는 미술관으로 사용되었다. 광복 후 1946년부터 47년까지는 미·소공동위원회가 사용하였고, 1948년부터 50년까지는 유엔 한국위원단의 사무실로 사용하였다. 이후 국립중앙박물관, 궁중유물전시관으로 사용하였다가 2009년부터 복원공사를 하여 현재는 대한제국역사관으로 개관하였다.

 

 

 

돈덕전

 

 

 

돈덕전(惇德殿) 1902년~1903년 고종 즉위 40주년 기념 행사(칭경예식)를 위해 지은 건물로, ‘돈덕 덕이 도탑다라는 뜻이다. 화려한 유럽풍 외관의 벽돌로 지어진 돈덕전은 1층은 폐현실, 2층에는 침실이 자리하였으며, 각국 외교사절의 폐현(황제나 황후를 만나는 일) 및 연회장, 국빈급 외국인의 숙소로 사용하였다. 그리고 1907년에 순종이 이곳에서 황제 즉위식을 가졌던 곳이기도 하다. 돈덕전은 고종이 세상을 떠난 이후에는 방치되었다가 1920년대에 없어진 것으로 보이며, 2023년에 재건하였다.

 

 

 

중명전

 

 

 

중명전(重眀殿)의 ‘중명’은 ‘광명이 계속 이어져 그치지 않다’라는 뜻으로, 1897년 황실 도서관으로 지어진 후 수옥헌(漱玉軒)이라고 불렸다. 1904년(광무 8) 대화재로 고종이 이곳을 임시 거처로 사용하면서, 편전 겸 접견소로 이용하였다. 수옥헌이 중명전으로 불리게 된 것은 1906년 이후로 보여진다.
1905년(광무 9) 을사늑약이 체결된 비운의 장소이기도 하며, 일제강점기 이후 민간에서 활용하다가, 2009년에 복원공사하여 2010년에 전시관으로 개관하였다.

 

 

 

※ 자료출처; 국가유산청 궁능유적본부 홈페이지,

https://royal.khs.go.kr/ROYAL/contents/menuInfo-dsg.do?grpCode=ds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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