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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신석기시대 고고학 (3) 청주 소로리유적 - 1만 5천년전 세계 최고(最古) 볍씨 발견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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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신석기시대 고고학 (3) 청주 소로리유적 - 1만 5천년전 세계 최고(最古) 볍씨 발견

대야발 2025. 1. 2. 1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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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충북대박물관장으로 조사단장을 맡아 청주 소로리 볍씨 연구를 주도해 온 이융조(76) 한국선사문화연구원 이사장은

“소로리에서 발견한 볍씨와 토탄을 미국의 연구소와 서울대에 보내 방사선 탄소 연대 측정을 했더니 이들 볍씨가 1만2000~1만2500년, 토탄은 1만2000~1만3920년 전 것으로 확인됐다”며 “탄소 연대 측정 값을 ‘다시 계산하기’ 방법으로 환산하면 청주 소로리 볍씨의 실제 출토 연대는 약 1만5000~1만7000년 전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1998년 충북 청주시 흥덕구 옥산면 소로리에서 발견된 '청주 소로리 볍씨' [사진 한국선사문화연구원]

 

 

 

“와~. 드디어 볍씨를 찾았다.”
1998년 1월 충북 청주시 흥덕구 옥산면 소로리 A지구(토탄 2구역) 구석기 유적 발굴현장. 97년 11월부터 석달째 밤낮으로 볍씨를 찾던 충북대 조사단 일행에 낭보가 전해졌다. 2.5m 깊이 구덩이 아래 토탄층(土炭層·유기물 점토)에서 형태가 온전한 볍씨가 발견된 것이다. 한겨울 유적지 옆 비닐하우스에서 충북대 학생과 이곳 주민이 일일이 손으로 흙덩어리를 쪼개 볍씨를 찾던 중 벌어진 일이다.

 

 

 

1998년 2월 소로리 구석기 유적에서 파낸 흙 덩어리에서 충북대 조사단이 볍씨를 찾고 있다. [사진 한국선사문화연구원]

 

 

 

충북대 조사단은 그해 4월까지 소로리에서 고대벼(ancient rice) 18톨과 유사벼(quasi rice) 41톨을 발견했다. 이후 2001년 진행된 추가 조사에서 유사벼 68톨을 더 발견해 학계에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청주 소로리 볍씨를 찾았다”고 발표한다.

 

 

당시 충북대박물관장으로 조사단장을 맡아 청주 소로리 볍씨 연구를 주도해 온 이융조(76) 한국선사문화연구원 이사장. 그는 “소로리에서 발견한 볍씨와 토탄을 미국의 연구소와 서울대에 보내 방사선 탄소 연대 측정을 했더니 이들 볍씨가 1만2000~1만2500년, 토탄은 1만2000~1만3920년 전 것으로 확인됐다”며 “탄소 연대 측정 값을 ‘다시 계산하기’ 방법으로 환산하면 청주 소로리 볍씨의 실제 출토 연대는 약 1만5000~1만7000년 전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1998년 충북 청주시 흥덕구 옥산면 소로리에서 발견된 '청주 소로리 볍씨'. 소지경이 인위적으로 잘린 흔적이 보인다. [사진 한국선사문화연구원]

 

 

 

이 이사장은 2003년 미국에서 열린 제5차 세계 고고학대회에서 청주 소로리 볍씨를 세계 최고(最古) 볍씨로 발표했다. 청주 소로리 볍씨가 발견되기 전까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볍씨는 97년 중국 후난성(湖南省) 위찬옌(玉蟾岩) 유적에서 출토된 볍씨다. 이 볍씨는 약 1만2000년 전 것으로 확인됐다. 한국에서 발견된 청주 소로리 볍씨가 중국보다 최소 3000년이나 앞선 것이다.

 

 

고고학계는 뒤집어졌다. 구석기 유적에서 인류 최초의 재배벼 흔적이 발견된 것도 이례적이지만, 중국 양쯔강 유역에서 발원해 한반도 등 아시아로 퍼지는 벼 전파 경로의 정설을 한번에 뒤집는 결과였기 때문이다.

 

 

청주 소로리 볍씨 발견을 계기로 세계적인 고고학 개론서인 『고고학(Archaeology)』에는 쌀의 기원지가 중국에서 한국으로 바뀌었다. 91년에 발간된 이 책은 2003년까지 중국 후난성에서 출토된 볍씨를 근거로 쌀의 기원을 중국 양쯔강 유역으로 표기했다. 하지만 2004년(4판) 출간된 책부터 지난해 발간한 최신 개정판(7판)까지 쌀의 기원지를 한국으로 명시했다. 한국에서는 2006년『현대 고고학의 이해』로 번역 출판됐다.

 

 

세계적인 고고학 개론서인 『고고학(Archaeology)』에 한국이 쌀의 기원지로 표기돼 있다. 한국에서는 2006년 『현대 고고학의 이해』로 번역 출판됐다. 최종권 기자

 

 

 

세계적인 고고학 개론서인 『고고학(Archaeology)』에 벼가 최초로 순화된 위치가 한국으로 표시돼 있다. 1만5000년 전(BC 1만3000년)에 인류가 벼를 생산했다고 연대표에 나와있다. 사진 최종권 기자

 

 

 

소로리 볍씨는 오늘날 재배벼의 기원이자 원조벼로 평가받고 있다. 소로리 볍씨(고대벼)는 벼의 줄기 부분과 낱알을 연결하는 ‘소지경’이 인위적으로 잘린 흔적이 발견된데다 현대 벼의 종류인 자포니카(Japonica)종과 인디카(Indica)종 모양의 볍씨가 모두 발견됐다.

 

 

고대벼 18톨에서는 현대 재배벼의 특징인 '유봉돌기(볍씨 껍질에 있는 젖꼭지 모양의 돌기'가 발견됐다. 자포니카종은 한국과 일본, 중국 등에서 먹는 쌀로 씨앗 길이가 짧다. 반면 인디카종은 낱알이 길쭉하고 밥을 지었을 때 찰기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이 이사장은 “소로리 볍씨는 야생벼의 초기 재배단계와 농경이 완전히 정착되는 과정에 있었던 ‘순화벼(domesticated rice)’로 해석할 수 있다”며 “세계 벼의 기원과 진화의 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라고 말했다.

 

 

 

충북 청주시는 지난해 11월 소로리 볍씨가 발견된 옥산면 소로리 입구에 볍시 모양의 조형물을 세웠다. 청주=최종권 기자

 

 

 

청주시는 지난해 11월 소로리 마을 입구에 높이 5.5m의 소로리 볍씨 조형물을 세우고 시청 상징물(CI) 역시 소로리 볍씨 모양으로 바꿨다. 19년 전 발견한 소로리 볍씨의 의미를 되새기고 청주가 쌀 기원라는 위상을 높이기 위해서다. 이승훈 청주시장은 “소로리 볍씨가 세계 최고의 인류 문화유산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 소로리 볍씨 상징물을 설치했다”며 “소로리 유적을 쌀 농사의 기원지로 국내외에 인식시키고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겠다”고 말했다. 청주=최종권 기자 choigo@joongang.co.kr(1)

 

 

 

 

■ 홀연히 나타난 1만5000년전 '청주 소로리 볍씨'의 정체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1997년 11월 우연치않게도 IMF(국제통화기금) 구제금융 위기와 함께 시작된 충북 청원 소로리 오창과학산업단지 조성을 위한 사전 발굴은 시작부터 파란만장했다. 100일에 맞춰진 발굴기간에 쫓기던 조사단 중 충북대 발굴지역에서 심상치않은 유물이 나왔다.

 

그곳에서 확인된 2매의 토탄층(부패와 분해가 완전히 되지 않은 식물의 유해가 진흙과 함께 늪이나 못의 물 밑에 퇴적한 지층)에서 127톨의 볍씨와 곤충화석, 그리고 각종 식물자료를 찾아냈다. 그런데 볍씨 등이 집중 출토된 확인된 토탄층의 연대측정결과가 놀라웠다.

 

 

소로리에서 확인된 볍씨. 2매의 토탄층(부패와 분해가 완전히 되지 않은 식물의 유해가 진흙과 함께 늪이나 못의 물 밑에 퇴적한 지층)에서 127톨의 볍씨와 곤충화석, 그리고 각종 식물자료를 찾아냈다. |한국선사문화연구원 제공

 

 

 

미국의 연대 측정기관인 지오크론과 서울대 가속기질량분석시스템(AMS)연구실에 같은 시료를 교차검증을 의뢰했더니 자그만치 1만2890년전~1만4090년전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하지만 국내 주류 학계의 반응은 차가웠다. 뭐 ‘벼농사의 기원=중국’설을 믿어온 국내 학계에서도 어느날 갑자기, 그것도 1만5000년전 이전의 볍씨가 한반도 청주에서 나타났다는 소식에 당황했을 법도 했다.

 

하지만 발굴 자체에 대한 회의감은 도에 지나쳤다. 문화재를 처음 담당한 필자의 귀에 들렸던 수근거림도 기가 막혔다. ‘들었어? 소로리 유적의 토탄층에서 비닐이 나왔다는 거야.’

 

 

인간이 수확했다는 증거로 제시된 소지경의 흔적. 벼가 익어 저절로 떨어지면 잘린 단면은 원형이 매끌매끌 하지만 인위적으로 자른 단면은 울퉁불퉁하고 거칠다.(왼쪽 사진) 같은 층에서 확인된 홈날연모. 아마도 1만5000여년전 구석기인들은 이 연장으로 벼를 수확했을 가능성이 있다.|한국선사문화연구원 제공

 

 

 

무슨 말인가. 고고학 발굴조사는 안정적인 층위에서 이뤄져야 가치를 갖게 된다. 그런데 1만5000년전 볍씨가 출토됐다는 토탄층에서 비닐이 나왔다면 층위가 뒤집어졌다는 뜻이고, 현대의 볍씨가 비닐과 함께 토탄층에 혼입되었다는 얘기나 다름없었다. 이런 수근거림은 소로리 유적을 근본부터 불신하는 결과를 낳았다. 역사시대 유적이든 선사시대 유적이든 ‘비닐이 섞여나왔다’는 이야기를 나온다면 그런 유적을 발굴한 고고학자를 어떻게 신뢰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어떻게 ‘비닐’ 이야기가 나왔을까.

 

소로리 볍씨의 성격을 두고 몇가지 의문점을 던진 논문(‘청원 소로리 토탄층 출토 볍씨 제고’, )을 쓴 안승모 전 원광대 교수도 ‘비닐설의 유포’를 완곡하게 비판했다. “발굴 당시 볍씨가 출토된 구역에서는 3.3m 깊이로 토목공사를 위해 주변 저지대를 매립한 인위적인 성토층이 있었다”는 것이다. 안승모 씨는 “아마도 ‘비닐’ 운운한 이는 이 성토층에서 나온 비닐을 토탄층에서 출토된 것으로 착각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해석했다.

 

그러나 좋게 말해 착각이지, 나쁘게 말한다면 악의적인 공격이라 할 수 있다. 어쨌든 이런 공격이 통한 탓인지 1998년 문화재위원회는 볍씨가 출토된 ‘토탄층의 보존안’을 일축했다. 요즘으로 치면 근거없는 악플(비닐 운운)로 죄없는 사람(유적)이 죽는 꼴이 된 것이다. 안승모씨는 “그때 제대로 보존해서 조사했더라면 훨씬 많은 정보를 얻었을 것”이라고 아쉬워했다. 이런 판국이니 필자 같은 비전문가는 ‘비닐’ 이야기 때문에 소로리 유적을 백안시할 수밖에 없었다.

 

 

 

소로리에서 확인된 1만2000~1만5000년전의 벼. 국내외 4개기관의 연대측정 결과 같은 결과를 얻었다고 한다.|한국선사문화연구원 제공.

 

 

 

■토탄에 박힌 볍씨의 연대

 

하지만 소로리 유적의 토탄층 연대측정 결과는 층위상 안정적이다. 가장 오래된 시기층인 밑부분 토탄층은 1만6890년전이고 그 위부터 1만6340년전~1만4090년전~1만3750년전~1만2890년전~9510년전~8800년전 등의 순서이다. 볍씨가 가장 많이 나온 2토탄층의 연대는 1만2500년전~1만4820년전이었다. 맨밑부터 위까지 시기가 차근차근 올라간다는 것은 지층이 뒤집어지지 않았다는 의미한다. 즉 현대에 제작된 비닐이 1만5000년전의 토탄층에 들어갈 수 없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현대의 볍씨’가 1만5000년전에 쌓인 토탄층에 혼입될 수 없다.

 

 

학계 일각에서는 그래도 확실한 것이 좋으니 토탄층에 박힌채 출토된 ‘고대볍씨’ 그 자체의 연대측정이 필요하다고 권유했다. 이에따라 조사단을 이끈 당시 이융조 충북대 교수(현 한국선사문화연구원 이사장)는 ‘토탄에 박힌 볍씨’를 미국 애리조나 주립대 AMS연구실에 보냈다. 그 결과 1만2550년전(토탄)과 1만2520년전(볍씨)이라는 연대가 나왔다. 이것은 서울대 AMS 연구실 측정결과(토탄 1만2900년전, 유사벼 1만2500년전)와 완전히 일치했다. 이융조 교수는 “미국의 지오크론 연구소와 애리조나대와 서울대 AMS 연구실, 한국지질자원연구원 등 국내외4개 연구기관에서 흙과 볍씨, 토탄 등을 시료로 해서 교차검증해보니 동일한 결과를 얻어냈다”고 밝혔다. 이는 토탄 퇴적 층위가 매우 안정적이며, 볍씨들이 바로 그 원위치에서 출토되었음을 일러주는 것이다.

 

 

 

■1만5000년전 자포니카

 

그렇다면 토탄층에서 발견된 볍씨는 요즘의 볍씨와는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가.

서울대 허문회 교수(2010년 작고)는 소로리 출토 볍씨(127톨)을 분석한 결과 기원벼(18톨)와 유사벼(109톨)로 나누었고, 기원벼를 다시 자포니카형(17톨)와 인디카형(1톨)로 구분했다. 허교수는 “소로리 볍씨는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볍씨로 알려졌던) 고양 가와지 볍씨(5200년전)와 크기 및 모양이 비슷하며 현재 재배종에 비해 벼알의 어깨쪽이 약간 좁고 가운데에서 끝쪽으로 약간 굵게 보인다”는 관찰기록을 남겼다.

 

이미 이 시대에도 이른바 자포니카형, 즉 단립형 벼를 선호했다는 사실이 이채롭다. 이융조 교수는 “사람들의 입맛이 작은벼(자포니카형)로 발전해가는 과정은 이미 가와지 1형(5000년전)과 2형(3000년전) 볍씨에서도 보인다”면서 “소로리 볍씨 단계에서 이미 작은벼(자포니카형)에 대한 기호현상이 있었다는 것은 한국벼의 진화과정과 연결되는 중요한 자료”라고 해석했다. 이융조 교수는 “또 볍씨의 DNA 구조를 분석해봤더니 소로리벼는 야생벼에서 잡초벼, 인디카, 자포니카 등이 분화되는 원시형 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물론 소로리 볍씨는 현대벼와는 완전히 다른 그룹이다.

 

 

1만5000년전에도 이른바 자포니카형인 단립형 벼와 인디카형인 장립형 벼가 존재했다. |한국선사문화연구원 제공

 

 

 

■1만5000년전 구석기인의 벼수확 흔적

또 하나 중요한 포인트는 이른바 ‘소지경(小枝莖·줄기에 붙어있는 부분)’의 관찰기록이다.

곡물의 순화, 즉 야생→재배벼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형태변화는 야생형에서는 벼알이 완전히 익으면 저절로 떨어지지만 재배벼에서는 그대로 달려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자연스레 떨어진 부분 즉 탈립면에는 원형의 매끄러운 흔적이 남는다. 반면 순화형 벼의 경우 떨어지지 않고 그대로 달려있다가 인간의 수확행위로 잘리게 된다, 그 경우 잘린 단면은 매우 거칠게 나타난다.

 

 

그런데 당시 박태식 박사(농총진흥청 작물시험장)이 소로리 볍씨 가운데 소지경 분석이 가능한 볍씨 13톨을 분석했더니 그중 4톨에서 아주 유의미한 현상을 볼 수 있었다. 즉 소지경이 매우 울퉁불퉁 거친 상태로 잘렸다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어떤 도구로 수확했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마침 볍씨가 출토된 문화층에서는 사용흔적이 관찰되는 홈날연모가 나왔다.

 

 

이융조 교수는 “소로리 사람들이 이 홈날연모를 써서 다 익은 벼를 수확한 뒤 먹을거리로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다. 이 볍씨가 토탄층에 떨어졌다는 것이다. 이교수는 “그렇다면 소로리 볍씨는 1만2000~1만5000년전 인간의 먹이얻기로 남겨진 유체로 인류가 남긴 위대한 문화유산으로 평가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또한 볍씨가 출토된 시대의 기후는 어땠을까. 볍씨가 많이 출토된 2토탄층의 화분 분석 자료는 ‘상대적으로 온난 습윤한 저습지에 형성된 토탄층’이라는 결과가 나왔다고 한다. 나무분석 자료를 봐도 오리나무-밤나무 류의 낙엽활엽수가 주로 나타났다. 이 시기는 전세계적으로 온난한 기후였던 알레뢰드/뵈링 간빙기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볍씨들이 집중출토된 소로리 토탄층. 토탄층은 부패와 분해가 완전히 되지 않은 식물의 유해가 진흙과 함께 늪이나 못의 물 밑에 퇴적한 지층이기 때문에 유물이 잘 남아있다.|한국선사문화연구원 제공

 

 

 

■국뽕사관의 산물인가?

이 ‘소로리 볍씨’는 국내 주류 학계의 냉대와 외면 속에 발굴·연구자인 이융조 충북대 교수 등의 동분서주로 국제학계에 알려졌다. 2003년 BBC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벼가 발견됐다’는 제목의 기사에서 ‘과학자들이 소로리에서 가장 오래된 순화벼(domesticated rice)를 발견했다’고 보도했다. ‘소로리’ 관련 기사는 이후 르몽드 등에서도 소개되었다.

 

이융조 교수에 따르면 고고학 개론서인 <Archaeology> 제4판(2006년)에 ‘중요한 식량과 짐승종들이 처음으로 순화된 위치’가 담긴 세계지도를 첨부하면서 ‘한반도 청주 부근에 쌀그림’을 표시해두었다. 그 책에는 ‘최초로 순화된 동식물과 전세계 문화발전 편년표’를 작성하면서 ‘벼=한국 1만3000년전’이라 했다.

 

과문한 필자는 ‘청주 소로리 볍씨=세계 최고(最古)의 재배벼’라는 주장이 100% 옳은지 판단할 능력을 갖추지 못했다. 실제로 ‘소로리 볍씨’의 연구·발표 단계에서 ‘검증이 완료되지 않는 가설단계의 내용을 전세계에 홍보하는 국수주의’라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다. 시쳇말로 ‘국뽕 사관’이라는 것이었다.

 

예컨대 ‘소지경’과 관련해서도 탈립면(잘린 부분)이 울퉁불퉁하다고 해서 ‘인간의 수확행위’로 규정하는 것 자체가 무리하는 주장도 있다. 인간이 아닌 다른 짐승이 볍씨를 따먹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또한 ‘벼농사의 기원국’이라는 타이틀을 얻으려면 고고학적으로 연속적인 성과물이 축적되어야 하는데 소로리의 경우 그렇지 않다는 약점도 있다. 즉 중국의 경우 소로리와 비슷한 연대의 벼 유적인 중국 후난성(湖南省) 유찬얀(玉蟾岩) 동굴을 비롯해 허무두(河姆渡) 유적(7000년전)까지 벼농사 역사의 흔적이 계속 나온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1만5000년전(소로리)와 5000년전(고양 가와지) 사이에 무려 1만년의 공백기가 있다. 소로리 단 하나의 에피소드밖에 없다는 한계가 있으며, 이것은 벼농사의 기원·발전을 언급할 때 하나의 약점일 수 있다.

 

1만5000년전 무렵이면 지금의 한반도와 중국 대륙은 육지로 붙어 있었다. 따라서 소로리 벼가 지금의 한반도가 아니라 중국 양쯔강 유역 등지에서 동물(철새)이나 사람(수렵민)에 의해 운반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와관련, 이융조 교수는 벼농사의 기원과 관련해서 “중국학자 옌원밍(嚴文明)의 ‘벼농사 다중기원설’을 주목한다”고 밝힌다.

 

벼농사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이곳저곳에서 시작되었으며 소로리도 그런 지역 중 한 곳이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 경우 소로리 만이 벼농사의 기원지로 주장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융조 교수는 “소로리 볍씨는 재배단계 초기 농경 단계 사이의 순화가 진행되던 순화벼(domesticated rice)라고 해석되며 순화초기단계로 볼 수도 있다”고 밝힌다.

 

 

오창산업단지 부지로 조성되기 전의 소로리. 이곳에서 1만5000년전 벼가 확인됐다.|한국선사문화연구원 제공

 

 

 

■소로리 볍씨의 과제

‘소로리 볍씨’를 정리해보면서 한가지 드는 생각이 있다. 일단 소로리 토탄층과 볍씨의 연대가 1만2500년전~1만5000년전으로 측정된다는 것이 눈에 띈다. 국내외 4개 기관(서울대·한국지질자원연구원·지오크론 연구소·애리조나주립대) 등에서 얻은 연대측정 기록이라 한다.

 

토탄층 연대가 미심쩍다 해서 토탄층에 박힌 볍씨 연대를 직접 측정했고, 그 결과가 같다면 믿어야 하지 않을까. 무엇보다 이 연대측정을 교차검증한 결과 각 층위별로 안정적인 퇴적층을 이루고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소로리 볍씨는 벼농사 기원논쟁의 차원을 떠나서도 그 자체, 즉 ‘1만5000년전의 볍씨’라는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런데도 ‘소로리 볍씨’와 관련해서는 여전히 백안시하는 분위기가 남아있는 듯 하다. 그러나 정작 학술논문으로 문제를 제기한 이는 사실상 단 한 연구자(안승모 전 원광대 교수)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그저 뒷담화 수준이다. ‘소로리 볍씨’가 그렇게 미심쩍다면 안교수처럼 논문으로 제기해야 학문 하는 이의 기본자세일 것이다.

 

 

소로리 토탄층의 연대측정결과. 땅 표면에서부터 깊이 들어갈수록 연대가 올라간다. 층위가 안정되어있다는 이야기다. 볍씨가 집중 출토된 곳은 2토탄층인 6층이다.|한국선사문화연구원 제공

 

 

 

‘소로리 볍씨=1만5000년 전의 볍씨’가 맞다해도 과제는 남아있다. 인근 지역은 물론이고 다른 곳에서 소로리 단계의 볍씨를 찾아내는 것이다. 1998년 ‘소로리 토탄층의 보존’을 일축해버린 문화재위원회의 처사가 두고두고 한심할 따름이다. 지금 청주시 소유지가 된 보존지역이 약간 남아있지만 다른 공장들이 주위를 둘러싸고 있어서 제대로 된 토탄층 발굴은 쉽지 않다. 적어도 10~15m 이상의 깊이에 200㎡(10×20m) 면적을 발굴하기는 턱없이 좁다. 이융조 교수는 “폐교된 인근 소로분교를 박물관으로 조성하고 소로리 주변 지역의 농지에 대한 학술발굴을 벌여야 할 것”이라고 희망했다.

 

또 안승모 교수는 “소로리와 비슷한 중부지역 토탄층에서 학술발굴이 계속 이어져서 추가적인 자료를 확보했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나타냈다. 아닌게 아니라 달랑 소로리 한 곳의 자료 뿐이니 이러쿵저러쿵하는 이야기가 나올 수 있다. 따라서 소로리와 비슷한 환경의 다른 지역 토탄층들을 발굴해서 관련자료를 충분히 확보할 필요가 있다. 가만 보면 남의 발굴 성과를 두고 뒷담화만 할 게 아니라 볍씨와 벼농사 관련 자료를 발굴하고 확보하는 것이 학자들의 자세가 아닐까.

 

이 대목에서 일단 이렇게 정리해두고 싶다. 어느날 갑자기 밑도 끝도 없이 1만5000년전 볍씨가 나타났다고 해서 백안시할 게 아니다. 다른 소로리 단계의 볍씨를 아직까지 찾아내지 못했을 뿐이 아닐까. 그렇다면 소로리 단계의 토탄층 발굴을 해보고 나서야 이러쿵저러쿵 결론을 내릴 수 있지 않을까.(2)

 

 

 

 

신용하교수는 인류 문명사에서 최초의 신석기 농업혁명은 두 곳이 구심지가 돼 일어났는데, 그 하나가 약 1만2000년 전부터 고한반도 중부 남한강과 금강 상류 지역에서 고한반도 초기 신석기인인 ‘밝족’이 단립벼(쌀)·콩·수수·조·기장·깨 등의 농경에 성공해 주변 지역으로 전파한 농업혁명이었다고 봅니다.

 

 

 

<지식카페>1만2500년前 한강유역서… 인류 최초 ‘쌀·콩·깨 재배’ 시작됐다

 

 

약 1만2000년 전(일설 1만2500년 전) 지구 기후가 오늘날처럼 온난화되자, 고(古) 한반도 구석기인들은 동굴에서 나와 인접 강변과 해안에 ‘움막’을 짓고, ‘마제석기(磨製石器)’와 토기를 사용하면서 새로운 신석기 시대를 열었다. 고한반도 중부 초기 신석기인 인구밀집 지역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식료 부족’이었다. 사냥·어로·채집만으로는 과잉인구의 부양이 불가능했다. 식료 부족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우선 야생식물의 종자와 뿌리를 채용해 식료 생산을 위한 ‘농업경작’을 시작하는 것이었다.

 

고한반도 중부 제1동굴지역의 동굴 밖 최근접한 남한강과 금강 상류 유역은 ①석회암 동굴 최근접 하천 유역에 비옥한 충적층 평야가 있었고 ②세계적으로 식물 종류가 매우 많아 온대작물 농업경작의 발생에 매우 적합한 지역이었다. 이러한 유리한 조건에서 식료 부족 문제의 대책으로 ‘남한강’ 유역과 ‘금강 상류’의 저지대에서는 실제로 신석기 시대의 시작과 동시에 1만2000년 전쯤부터 오곡, 특히 단립벼의 재배가 시작됐다.



남한강 유역과 금강 상류 사이의 충북 청원군 소로리에서 볍씨 18톨이 충북대 박물관(관장 이융조)에 의해 발굴됐는데, 농과학자들의 조사 결과 초기 재배벼임이 확인됐다. 서울대 기초과학연구소에서 소로리 볍씨가 포함된 토탄층 윗부분을 탄소측정한 결과 1만2500년 전으로 측정됐다. 이 소로리 단립벼 볍씨와 토탄층을 분리해 볍씨 8톨을 미국 애리조나대 고고연구소에서 탄소측정한 결과 토탄의 연대가 1만2552±90년 전, 고대벼가 1만2500±150년 전으로 측정돼 나왔다.

 

 

 

<그림 1> 한강 유역 출토 신석기 벼·탄화미.



이 사실은 한반도의 남한강 유역과 금강 상류 유역에서는 신석기 시대가 시작되자마자 즉시 ‘단립벼’의 경작이 시도됐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그 후 <그림 1>에서 보는 바와 같이 한강·금강 유역을 비롯해 고한반도의 크고 작은 강변에서는 강 하류에까지 곡물 출토 시계열이 성립되고 5000년 전쯤까지 재배 공간이 대폭 넓어지면서 단립벼·콩·팥·밀·보리·조·기장·수수·깨 등 곡물이 출토되고 있다. 신석기 시대 고한반도 ‘단립벼’ 경작의 발생 기원 지역을 지도에서 그려 보면 <그림 2>와 같다. 이 지역에서 동시기에 오곡이 농기구들과 동반 출토되므로, 이 지역이 동방 신석기 농업혁명의 기원지로 판단된다.

 

 

 

<그림 2> 한강문화의 신석기시대 재배 농경의 발상지역.



국립문화재연구소가 고한반도 출토 신석기 시대 토기 몇 점에 박힌 식물들의 압흔을 탄소측정했더니, 신석기 시대 ‘조기’ ‘전기’부터 조·기장·콩·들깨를 재배해 식용하고 있었다. 특히 주목할 것은 ‘콩’ ‘콩과 작물’이 신석기 초기부터 재배됐다는 사실이다.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오산리 출토 신석기 초기 토기에 박힌 ‘콩’과 압흔 토기에 부착된 탄화물을 연대측정한 결과 절대연대 7175∼7160년 전과 절대연대 7000∼6940년 전으로 측정돼 나왔다. 즉 고한반도에서는 콩과 팥이 기원전 53세기(7175∼7160년 전)경에 이미 재배됐음이 확인된다. 이것은 인류 문명사에서 획기적인 것이다. 중국에는 ‘콩’이 기원전 7세기 고조선 후국 산융에서 도입됐다. 서양에는 ‘콩’이 18세기 초엽 동방에서 들어왔다고 기록돼 있다.



출토 곡물들로 종합해 보면, 고한반도의 신석기 시대 한강 문화에서는 약 1만2000년 전부터 신석기 농업혁명이 시작돼 약 5000년 전까지 단립벼·조·기장·콩·팥·수수·밀·보리·깨(들깨와 참깨) 등의 농업경작이 크게 발전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중에서 고한반도 신석기 농업혁명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것은 ‘단립벼’와 ‘콩·팥’과 ‘깨’의 경작이다.



당시 고한반도 신석기인들은 첫 ‘농업경작’의 큰 성공을 스스로 인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금강 상류에 신석기 시대 ‘농업혁명(농경 성공) 기념 선돌’이 2개나 남아 있다. 충북 옥천군 남곡리 개미재에 밭고랑을 새긴 1개의 선돌(남곡리 1호 선돌)과, 수북리 동정마을에 있는 다른 1개의 선돌(수북리 선돌)이 그것이다.(<그림 3> 참조) 문자가 없던 시대이므로, 농업혁명(농업경작)의 위대한 업적을 ‘논밭고랑’ 그림으로 표시한 기념비 선돌이었다. 대전 괴정동 출토 ‘방패형 농경문 청동기’(약 2600년 전)에 새겨진 밭 가는 농부 그림을 보면, 이 선돌의 줄그림이 논밭고랑임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림 3> 옥천 남곡리 1호 농경기념 선돌(왼쪽)과 수북리 선돌.

 



고한반도의 중부에서 시작된 신석기 농업혁명(농업경작)은 모든 한반도 강변과 해안에 주민 이동과 함께 전파됐다. 농업경작은 태양의 ‘햇빛’과 ‘따뜻한 온도’의 은혜에 직결돼 있으므로, 고한반도 초기 신석기인들은 매우 일찍 ‘태양(해) 숭배’ 사상을 더욱 갖게 됐다. 그들은 ‘태양’(해)이 제공하는 ‘밝음’(광명·光明)을 숭상했으며, ‘태양’이 있는 ‘하늘’을 숭배하게 됐다.

 

 

그들은 또한 족장과 자기들을 ‘태양’의 후손, 즉 하늘(天)의 후손으로 생각해 ‘천손의식’을 갖게 됐다. 또한 그들은 태양이 있는 하늘을 나는 ‘새’를 토템으로 애경했다. 후에 그들과 그 후예들은 자신들을 태양의 ‘밝음’을 의미한 “‘밝’족”으로 자처했고, 고대 중국인들은 이를 차음해 ‘발인(發人)’이라고 표기했다.



인류 문명사에서 최초의 신석기 농업혁명은 두 곳이 구심지가 돼 일어났다. 그 하나가 약 1만2000년 전부터 고한반도 중부 남한강과 금강 상류 지역에서 고한반도 초기 신석기인인 ‘밝족’이 단립벼(쌀)·콩·수수·조·기장·깨 등의 농경에 성공해 주변 지역으로 전파한 농업혁명이었다.

다른 하나는 약 1만1500년 전에 비옥한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유역에서 수메르족이 밀·보리 농경에 성공해 주변 지역에 전파한 농업혁명이다. 실증적으로 발굴 보고서들을 읽어 보면, 단립벼 재배는 고한반도에서 기원해 기원전 28세기경에 중국 산둥반도와 중국 동해안 일대로 전파됐다. 남쪽 일본 열도로는 기원전 7∼5세기경 한반도에서 일본 규슈 지방 등으로 전파됐다(<그림 4> 참조).

 

 

<그림 4> 단립벼의 재배 기원지와 보급 경로도.



중국 학자들도 농업경작을 고조선(이때는 동이(東夷)족으로 표현)에서 도입했음을 기록들에 남겼다. 중국에 농경을 처음 가르쳐 준 것은 동이족인 신농(神農)족이며(‘사기(史記)’ ‘부사년(傅斯年)’), 역시 동이족인 백익(伯益)이 쌀 농경과 목축을 가져와 가르쳐 줬다(‘사기’). 동이족인 근모(根牟)족은 밀·보리 재배를 가르쳐 줬다(중국학자 장푸샹(張富祥)). 가장 질긴 고급 명주와 그 직조 방법도 동이족이 전수해 줬다고 기록돼 있다(‘상서정의(尙書正義)’).



인류 최초 5대 독립 문명은 모두 독특한 농경문화를 문명의 기초로 해 시작됐다. 고조선 문명은 ‘단립벼(및 밀·보리)+콩+깨’ 재배의 농경문화 유형과, 이에 의거한 ‘쌀밥(및 밀·보리 식료)+콩장(간장+된장)+깨 양념(향료)’의 독특한 식문화 유형을 형성했다.

이와 달리 수메르(메소포타미아) 문명은 ‘밀’(및 맥류) 재배와 ‘빵’ 식문화를 형성해 이집트문명과 그리스·로마를 거쳐서 서양에 전파됐다. 인도 문명은 ‘장립벼’ 재배와 장립벼 쌀밥 식문화, 중국 문명은 ‘잡곡’ 재배와 만두·국수 식문화, 아널드 토인비가 뒤에 독립 문명으로 추가한 마야·아즈텍 문명은 ‘옥수수’ 재배, 잉카 문명은 ‘감자’ 재배와 그에 따른 식문화 유형들을 각각 형성했다.



고조선 문명의 식문화는 단립벼 ‘쌀’로 ‘밥’뿐 아니라 무려 200여 종의 떡(이종미 교수)과 과자 등 온갖 파생 음식을 만들었고, 설탕(조청·엿)과 각종 술도 쌀로 빚어냈다. 염분을 소금 가루로 직접 섭취하지 않고 매우 독특하고 현명하게 콩 식물단백질과 융합시켜 섭취하는 콩장(간장·된장) 식문화도 창조했다. 깨(참깨·들깨)는 지금도 주로 한국인이 애호하는 독특한 향료·양념이다. 중국과 일본을 비롯한 동아시아의 이와 유사한 식문화는 사실은 고조선 문명의 식문화가 전파된 것이다.(3)

 

 

 

 

 

 

 

 

<자료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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