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력사를 찾아서

3. 신석기시대 고고학 (2) 제주 고산리유적 - 1만년전 한반도 최고(最古) 마을유적, 고산리식토기, 덧띠무늬토기, 옥귀걸이 본문

환국시대/환국

3. 신석기시대 고고학 (2) 제주 고산리유적 - 1만년전 한반도 최고(最古) 마을유적, 고산리식토기, 덧띠무늬토기, 옥귀걸이

대야발 2024. 12. 29. 0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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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고산리 선사유적은 지금부터 약 1만년에서 1만2000년 전, 후기 구석기문화에서 신석기 초기문화로 옮겨가는 과정을 확인할 수 있는 한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신석기 유적(문화)이며, 시베리아, 만주, 일본, 한반도지역을 포함하는 동북아시아 신석기 초기문화 연구의 가장 중요한 유적입니다.

 

 

또한 신석기시대 초기, 제주 섬 서쪽 끝자락에 자리한 한경면 고산리의 속칭 ‘한장밭’ 해안가에는 한반도 최고(最古)의 마을유적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 한반도 최초의 신석기 유적지인 제주 고산리 선사유적(사적 412호)  ⓒ제주의소리

 

 

 

제주 고산리유적은 1987년 고산리 주민(좌정인 씨)이 타제석창과 긁개 등을 발견한 후 제주대학교박물관에 신고하면서 세상에 그 모습을 처음 드러낸 곳이다.

 

 

 

농부 좌정인씨가 수습했던 석창과 긁개. 

 

 

 

 

이를 계기로 1991년과 1992년 지표조사를 통해 자구내 포구 하천변을 따라 수월봉에 이르는 신석기시대 유물산포지를 확인하고 융기문토기와 찌르개·타제석기·석촉 등을 수거했다.

 

 
 
▲ 한반도 최초의 신석기 유적지인 제주 고산리 선사유적(사적 412호)에 대한 시`발굴조사에서 동 시기 집단 주거지터가 발견돼 학계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고산리 선사유적 발굴 모습.  사진=제주시 제공  ⓒ제주의소리

 

 

 

 

이후 1994년 ‘신창-무릉’간 해안도로 건설 과정에서 일부 지역에 대한 발굴조사가 이뤄졌고, 1997년과 1998년 다시 고산리유물산포지 1지구에서 집중적인 발굴조사를 실시했다.

 

 

출토된 유물은 고산리식 토기와 석촉을 포함한 각종 성형석기·폐기석재들이 대부분으로 1991년 지표조사에서 1998년 시·발굴 조사에 이르기까지 석기 9만9000여점, 토기조각 1000여점 등 10만여 점이 발굴된 바 있다.

 

 

 

▲ 이번 시·발굴에서 원형주거지 10동, 수혈유구 80여기, 집석유구(추정 야외노지) 10여기, 다수의 주혈이 화살촉 등의 석기류 및 고산리식 토기와 동반 출토되는 점은 한반도 최고 신석기시대 주민집인 고산리유적의 정주취락을 살펴볼 수 있는 매우 중요한 학술자료로 평가됐다. 25일 열린 고산리 선사유적 시.발굴 중간설명회. 뒤로 고산리 자구내포구 앞 당산봉이 보인다.  ⓒ제주의소리 김봉현 기자

 

 

 

 

2012년 시·발굴에서 원형주거지 10동, 수혈유구 80여기, 집석유구(추정 야외노지) 10여기, 다수의 주혈이 화살촉 등의 석기류 및 고산리식 토기와 동반 출토되는 점은 한반도 최고 신석기시대 주민집인 고산리유적의 정주취락을 살펴볼 수 있는 매우 중요한 학술자료로 평가됐다.

 

 

제주지역 신석기 유적에서 이 시대 집단 주거지로 추정되는 유구가 발견된 것은 이번이 처음으로, 고산리식토기, 융기문토기, 무문양토기 등 다양한 토기류와 화살촉, 찌르개, 밀개 등 성형석기와 돌날, 박편, 석재, 망치돌 등 석기류도 다량 출토된 것으로 전해졌다.

 

 

이번 조사에서 발굴된 출토유물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단연 ‘결상이식’(둥근 귀고리) 1점이다. 원형 중 40% 정도가 깨진 상태로 출토됐고, 육안으로는 옅은 하늘빛과 살구빛 사이의 색으로 옥 또는 규장암으로 추정되는데 정확한 성분분석을 실시 중에 있다.

 

 

 
 
 
▲ 제주 고산리 선사유적(사적 412호)에 대한 시.발굴조사에서 출토된 유물들.  특히 왼쪽 상단의 결상이식(귀고리) 유물은 제주에서 처음 발굴된 신석기시대 귀고리 유물이다. ⓒ제주의소리
 
 

 

 

 

 

 

 

 

 

주거지는 중앙수혈에 따라 방형, 타원형, 원형으로 나뉜다.

타원형은 가장 많은 데다 조사대상지 전역에 고르게 분포돼있다. 고산리식토기와 무문양토기, 융기문토기(1점)이 발견됐다. 비슷한 분포를 보이는 방형은 고산리식토기가 주를 이룬 가운데 무문양토기, 점렬문토기(1점)이 출토됐다.

반면 원형은 한정된 공간에 집중돼 있으며 융기문토기 개체분이 안정적으로 출토되는 등 방형이나 타원형과는 차별화된 양상을 띠고 있다.

조사단은 방형·타원형(1단계)를 거쳐 원형(2단계)에 이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여태껏 고산리유적에 대한 편년과 단계 설정은 토기유물을 중심으로 연구돼왔다.

대체로 고산리식 토기를 고식으로 보고 점열문토기, 무문양토기가 혼재되며 이후 융기문토기로 변화하는 것으로 추정했다.

 

자문위원으로 참석한 신종환 관장은 "고산리 유적은 신석기 초창기를 여는 중요한 유적이다. 이번 조사 결과를 토대로 연구를 좀 더 진행한다면 국내 고고학에서 가장 화두가 되는 융기문토기와 고산리토기의 연대 서열 관계를 정립할 수 있을 것"이라고 이번 조사의 의미를 설명했다.

 

화살촉·찌르개·밀개 등의 성형 석기 및 격자·연석·요석 등 석기류도 발굴돼 당시 고산리 일대에서 생활했던 주민집단의 성격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를 확보하게 됐다.

 

석촉이 73점으로 가장 많이 출토돼 당시 제주 자연환경이 수렵에 적합했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다. 또한 조사단은 어형 석촉의 발견을 어로 활동의 결과물로 파악하고 있다.(1),(2),(3),(4)

 

 

 

 

1만년 전 이전엔 황해는 바다가 아니라 표고 20~30m 정도 되는 완만한 평원지대였으며, 랴오둥(遼東) 반도에서 흘러오는 여러 개의 강줄기가 주변 대지를 아우르고 있었습니다.

 

 

당시 아무르강 유역에 살던 사람들이 평원이나 혹은 강줄기를 따라 남으로 향해 제주도에 닿아 정착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 육지였던 황해

 

 

 

박용안 서울대 명예교수가 그린 최종 빙하기의 해안선과 강줄기. 중국 대륙과 한반도가 육지로 연결되었음을 보여준다.

 

 

 

 

1만년 전을 전후로 구석기시대는 종말을 고한다. 날이 따뜻해지면서 정착을 하게 된 사람들은 농경생활을 하게 되고 곡식 등을 저장하는 도구, 즉 인류역사상 가장 위대한 발명을 하게 된다. 바로 토기의 발명이다.

 

 

 

■ 지구온난화가 낳은 승자와 패자

 

제주 고산리에서 확인된 식물성 고토기(사진 오른쪽). 아무르강 유역의 고토기(왼쪽)와 유사하다.

 

  

 

“고산리에서는 특히 문양이 없는 원시 고토기 즉 식물성 섬유질이 혼입된 고토기가 전체 수량의 85% 이상 차지합니다. 그런데 이런 고토기는 아무르강 유역의 세형돌날문화(1만1000~1만년 전)에서 보이는 후기 구석기 최말기~신석기 여명기에 출현하는 고토기와 흡사한 모습입니다.”(강창화씨)

 

 

이런 고토기는 인류가 토기라는 것을 처음 만들면서 450~600도에서 구운 저화질 토기이다. 구울 때 성형(成形)을 위한 보강재로 식물의 줄기를 섞었다. 연한 억새풀 같은 것을 짓이겨 썼다. 그런데 쉽게 풀 수 없는 수수께끼가 두개 있다.

 

 

 

 

 

우선 첫번째.

“희한한 것은 이런 고토기가 한반도 본토에서는 보이지 않는다는 거지.”(조유선 관장)

“예. 그래서 학술적으로 이 고토기를 ‘고산리식 토기’라 부르게 되었지요.”(강창화씨)

왜 한반도에는 보이지 않은 고토기가 제주도에서는 보일까.

 

 

두번째 수수께끼.

이런 고토기를 사용했던 사람들이 8000년 전부터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근거는 무엇인가.

 

 

강창화씨가 수습한 융기문토기. 토기는 신석기인들의 화폭이었고, 그들은 토기에 빼어난 예술성을 뽐냈다.

 

 

 

“제주도 유적들을 살펴보면 이상한 현상을 느낄 수 있습니다. 후기 구석기 최말기 세형돌날문화 석기들과 고토기가 함께 출토되는 곳, 즉 1만1000~1만년 전의 유적은 고산리 한 곳밖에 없다는 겁니다.”(강창화씨)

 

 

반면 8000년 전부터로 편년되는 융기문(덧띠무늬) 토기문화가 제주도에서 성행한다는 것이다.

 

 

융기문 토기는 애월읍 고성리, 제주시 아라동, 구좌읍 대천리 등 해발 200~450m인 한라산 중산간 지역에서 흔히 확인되는 유물이다. 또한 발해연안, 즉 동이족의 본향에서 흔히 확인되는 지(之)자문 토기(빗살무늬 토기)도 보인다.

 

 

지(之)자문 토기는 제주도 온평리 유적과 고산리 동굴유적에서 볼 수 있는데 모두 지그재그형의 사선으로 짧고 깊은 문양을 보인다.(4),(5)

 

 

 

 

흔히 고산리식토기 하면 어느 글을 읽어도 흙 반죽에 풀을 섞었다는, '보강제'로 풀을 넣었다고 하는데,

김찬곤교수는 그릇을 빚은 다음 풀대를 그릇 표면에 두드려 붙인 것으로 봅니다.

 

 

 

사진128을 보면 여느 신석기 그릇과 달리 무늬를 새기거나 그리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릇 표면을 보면 뭔가 무늬가 있다. 이 무늬는 풀대 자국이다. 그릇을 찰진 흙으로 빚은 다음 표면에 풀대를 듬성듬성 붙이고 넓적한 돌 같은 것으로 가볍게 두드려 그릇 겉면에 박히게 했다. 이렇게 빚은 그릇을 그늘에 말린 뒤 불에 구우면 불 속에서 풀대가 타고 자국이 남는다. 이 자국이 아래 그릇처럼 기이한 무늬가 된 것이다.

 

 

 

▲ 〈사진128 제주 고산리식토기. 높이 25.6cm. 보는 바와 같이 우리 신석기 그릇은 밑굽이 세모형이 아니라 이렇게 평평한 그릇에서부터 시작됐다. 사진129 고산리식토기 조각.  제주국립박물관

 

 

흙 반죽에 풀대를 정말 섞었을까?

일단 이 그릇과 관련하여 학계에 잘못 알려진 것부터 정정할 필요가 있다.

 

고산리식토기라 하는 원시무문토기는 빚을 때 바탕흙(胎土)에 풀 같은 유기물을 첨가했던 흔적이 남아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처음 나왔다.

-이건무·조현종, 선사 유물과 유적(, 2003), 69

 

 

여기서 이건무·조현종은 이 토기를 '무문토기', 즉 무늬가 없는 토기로 본다. 그런데 이 그릇의 겉면 풀대 자국은 고산리 신석기인이 일부러 낸 무늬로 볼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 자세히 밝히겠다.

 

 

또 흔히 고산리식토기 하면 어느 글을 읽어도 흙 반죽에 풀을 섞었다는, '보강제'로 풀을 넣었다는 말이 나온다. 하지만 이는 아직 밝혀진 바가 없다. 이것을 알려면 투과전자현미경으로 그릇을 찍어 보든지 아니면 깨뜨려 봐야 한다. 그런데 이렇게 해봤다는 연구 성과물은 아직 없다.

 

 

지금 당장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방법으로는 그릇을 확대해 보는 수밖에 없다. 〈사진128〉은 해상도가 아주 높다. 크게 확대해서 보면 흙 반죽에 처음부터 풀대를 넣어 반죽했는지, 아니면 그릇을 빚은 다음 풀대를 그릇 표면에 두드려 붙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나는 그릇을 빚은 다음 나중에 덧붙인 것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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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 세계 신석기인들은 그릇에 무늬를 새기거나 그렸는데, 지금까지 살펴본 바에 따르면 거의 모든 나라 신석기인들은 그릇에 비와 구름을 가장 많이 그렸다. 한반도 신석기인 또한 마찬가지다. 그들은 신석기 1만 년 동안 달, , , 사람 같은 것은 새기지 않았다. 지방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그들은 그릇 겉면에 하늘 속 물, 하늘(경계), 하늘 아래 구름, 구름에서 내리는 빗줄기, 이 비가 흘러가는 심원의 세계를 새겼다. 제주도 신석기인 또한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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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141 네덜란드 영화 레지스탕스 뱅커(2018, 요람 뤼르센 감독)의 한 장면.  Netflix

 

 

한국미술의 기원은 '추상미술'이 아니라 '리얼리즘'

 

사진141은 네덜란드 영화 레지스탕스 뱅커(2018)의 한 장면이다. 신석기 시대 제주도 고산리 앞바다 구름도 어떤 날은 이와 같았을 것이다. 고산리 신석기인은 이 구름을 그릇에 담고 싶었다. 그들은 이런저런 방법을 궁리했고, 흙 반죽에 우연히 풀대 몇 가닥이 들어갔을 때 그릇 겉면 무늬가 저와 같았다는 것을 떠올렸을지 모른다. 그리고 그릇을 빚은 다음 억새, 기장, 강아지풀, 쇠풀, 잔디 풀대 같은 것을 뜯어다 그릇 표면에 붙였다. 처음에는 손바닥으로, 그 다음에는 넓적한 돌로 두드려 붙였다.

 

 

하지만 생각한 대로 구름무늬가 나오지 않았다. 앞에서 든 사진129 같은 구름무늬만 나왔다. 이렇게 실패를 거듭하다 그들은 새로운 방법을 궁리해 낸다. 걸쭉한 흙물에 풀대와 잎사귀를 넣고 그것을 휘휘 저어 막 빚은 그릇에 바르고 물 손질을 한다. 그런 다음 그늘에 살짝 말렸다가 넓적한 돌로 두드려 풀대와 풀잎을 그릇 표면에 붙이고, 마지막으로 풀대 없는 걸쭉한 흙물로 슬립(slip), 즉 물 손질을 한 번 더 했다.

 

▲ 〈사진142-3 제주 고산리 유적 제2구역에서 나온 고산리식토기 조각. 제주 고산리유적(2구역)(2017, 제주고고학연구소)  제주고고학연구소

 

 

 사진142-3 사진129와 견주어 보면 구름무늬가 얼마나 자연스러워졌는지 알 수 있다. 특히 사진143의 동그랗게 말린 풀대와 풀잎을 보면 확실히 차이가 난다. 이렇게 하니 구름무늬가 훨씬 자연스럽고 슬립(slip) 효과도 났다. 고산리 신석기 장인은 마침내 1차원 그릇 평면에 3차원 입체 구름을 거의 완벽하게 표현한 것이다. 이는 세계 신석기 미술사에서 고산리 말고는 찾아볼 수 없다.

 

 

일본의 신석기 조몬인이 그릇 아가리에 3차원 입체 구름을 아주 빚어 붙였다면 제주도 고산리 신석기인은 1차원 그릇 표면에 3차원 입체 구름을 그렸다고 볼 수 있다. 이렇듯 우리 한국미술의 기원이 입체화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한국미술의 기원이 '추상미술'이 아니라 '리얼리즘, 사실주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6)

 

 

 

 

고산리 덧띠(융기)무늬토기에 있는 세 줄을 일반적으로 '아가리 쪽에 흙 띠 석 줄을 에스(S)자 모양으로 덧붙인 기하학 무늬'라고 설명하는데,

김찬곤교수는 가장 위 한 가닥은 하늘(天)이고, 그 아래 두 가닥은 구름(雲)이라고 설명합니다. 

 

 

 

▲ 〈사진112 고산리 유적 출토 융기문토기. 높이 27cm. 보는 바와 같이 우리 신석기 그릇은 밑굽이 세모형이 아니라 이렇게 평형한 그릇에서부터 시작됐다. 이 토기가 중요한 까닭은 한국미술의 시원이자 기원이기 때문이다. 사진113 대전선사박물관, ‘처음 만난 토기, 제주 고산리 유적 전시 포스터. 이 특별전은 오는 2 28일까지이다.  국립제주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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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118 1988년 강창화 씨가 찾은 제주 고산리 융기문토기 조각. 사진119 부산 동삼동 패총에서 나온 덧띠무늬토기 조각. 구름 띠 위 빗금은 수분(물기)을 표현한 것이다. 사진120 경기도 연천에서 나온 빗살무늬토기 조각. 이 조각은 아가리 쪽에 하늘 속 ()을 새겼다.  국립제주박물관

 

 

토기가 세상에 나온 지 벌써 22년째인데도

 

사진118 고산리 덧띠(융기) 무늬와 사진119 부산 동삼동 덧띠 무늬를 보면 아주 닮아 있다. 고고학자들은 이렇게 비슷한 무늬가 나오면 두 지역의 영향 관계부터 따진다. 하지만 학자들은 이것을 밝혀내지 못했다. 부산 동삼동 유적은 최대 기원전 6000년까지 내려잡을 수 있고, 제주 고산리 유적은 기원전 1만 년까지 내려간다.

 

 

그렇다면 굳이 영향 관계를 따지지 않더라도 제주 고산리에서 부산 동삼동으로 이러한 무늬가 흘러갔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두 토기를 놓고 영향 관계부터 따지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경우라 할 수 있다.

 

 

문제는 이 무늬가 무엇인지, 무엇을 '구상'으로 한 것인지 먼저 밝혀야 한다. 이 토기가 세상에 나온 지 올해로 22년째 되어 간다. 그런데도 우리 고고학계와 미술사학계는 이 덧띠 무늬 세 가닥 가운데 어느 한 가닥도 아직 밝혀내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한국미술의 시원이자 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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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미술사의 시작으로 삼을 수 있는 것은 어떤 것이 있을까. 두말할 필요도 없이 사진112 고산리 유적 출토 융기문토기(덧띠무늬토기)를 들 수 있고, 이 토기야말로 우리 한국미술의 시원이고 기원이라 할 수 있다. 그런 만큼 이 토기의 무늬를 해석한다는 것은 한국미술의 시원과 기원을 밝혀내는 일이기도 하다.

 

 

'빗살무늬토기의 비밀' 연재글을 읽은 독자라면 이 무늬가 무엇인지 단박에 알 수 있을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사진112〉 그릇 무늬에서 가장 위 한 가닥은 하늘(天)이고, 그 아래 두 가닥은 구름(雲)이다.

 

 

신석기 미술은 '추상미술'이 아니라 '구상미술'

 

사진122 고산리 융기문토기에 대해 국립제주박물관은 아래와 같이 풀이하고 있다.

 

 

"토기는 대부분 고산리식 토기로 불리는 원시무문토기와 융기문토기, 소량의 압인문토기가 출토되었다. 융기문토기는 아가리 부근에 3줄의 점토 띠를 에스(S)자 모양으로 곡선화 시킨 기하학 무늬로 태선융기문과 유사하다." -국립제주박물관, 제주의 역사와 문화(통천문화사, 2001), 33

 

 

참으로 어려운 설명글이다. 여기서 눈여겨봐야 할 구절은 "아가리 부근에 3줄의 점토 띠를 에스(S)자 모양으로 곡선화 시킨 기하학 무늬"라는 말이다. 이 말을 우리 말법으로 고쳐 쓰면, '아가리 쪽에 흙 띠 석 줄을 에스(S)자 모양으로 덧붙인 기하학 무늬'쯤 될 것이다.

그런데 이게 과연 '무엇을 새롭게' 알려주는 설명글이라 할 수 있을까. 더구나 흙 띠 세 가닥을 보는 눈도 잘못되었다. 가장 위 아가리 쪽 한 가닥은 아가리와 반듯하게 '평행'을 이루고 있고, 밑에 두 가닥만 구불하게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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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123 고산리 덧띠무늬토기 그림. 이렇게 그림으로 그려 놓고 보니 꼭 우동 그릇 같다. 이 그릇은 높이가 27cm, 아가리 지름이 50cm나 되는, 아주 커다란 물독이다. 사진124 미국 미시시피 알칸사스 신석기 토기. 구름이 한 가닥이지만 한 가닥을 석 줄로 그렸다. 고산리와 알칸사스 신석기 토기는 본질적으로 같은 무늬라 할 수 있다.  김찬곤

 

.........

 

 

하지만 그동안 '빗살무늬토기의 비밀' 연재글에서도 밝혔듯이 한반도 신석기인의 무늬는 철저히 구상(천문, 구름, )에서 왔고(앞 글 '빗살무늬는 과연 암호일까?' 참조 바람), 그런 만큼 한반도 신석기인의 미술은 추상미술이 아니라 '구상미술'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하겠다.(7)

 

 

 

 

 

<자료출처>

 

 

(1) 제주 고산리서 한반도 최고 집단주거지 발굴  - 제주의소리 (jejusori.net)2012.07.24

 

 

(2) “만년전 제주도엔 옥 귀고리 찬 사냥꾼 살았다” - 제주의소리 (jejusori.net)2012.07.25

 

 

(3) 국내 '최고' 제주 고산리 유적.."활용은 언제쯤?"  - 제주의소리 (jejusori.net)2013.07.30

 

 

(4) [고고학자 조유전과 떠나는 한국사 여행](5) 1만년전의 세계 제주 고산리(上) - 경향신문 (khan.co.kr)

 

 

(5) [고고학자 조유전과 떠나는 한국사 여행](6) 1만년전의 세계 제주 고산리(下) - 경향신문 (khan.co.kr)

 

 

(6) 한국미술의 기원은 '추상미술'이 아니라 '리얼리즘' - 오마이뉴스 (ohmynews.com) 

 

 

(7) 한국미술의 기원, 드디어 풀리다 - 오마이뉴스 (ohmynews.com) 

 

 

 

 

 

<참고자료>

 

 

 

제주 고산리 유적(濟州 高山里 遺蹟)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aks.ac.kr) 

 

 

제주고산리유적안내센터

https://gosanriyujeo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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