력사를 찾아서
4. 신라 문화유산 (4) 세계문화유산 : 경주역사유적지구 - 남산지구 본문
■ 남산지구
경주 남산은 금오산이라고도 하며, 신라 천년의 역사를 통해 가장 신성시 되어왔던 곳이다. 수많은 전설과 역사 유적들이 펼쳐져 있는 곳으로, 불교 관련 유적 뿐만 아니라 왕릉, 무덤, 궁궐터들이 남아있어 신라 문화의 집결체라고도 할 수 있다.
『삼국유사』에는 남산에서 나라일을 의논하면 반드시 성공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그런 까닭에 남산에 얽힌 전설이 많은 편이다.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는 남산 기슭의 나정이라는 곳에서 태어났다고 하며, 남산의 산신이 나타나 헌강왕에게 신라의 멸망을 경고하였지만, 깨닫지 못하여 결국은 멸망하였다는 전설도 전해지고 있다.
주요 문화유산으로는 경주 남산 미륵곡 석조여래좌상(보물), 경주 포석정지(사적), 경주 남산신성(사적) 등이 있는데, 다양한 문화유산이 곳곳에 산재해 있어 신라문화가 이곳에 집결된 느낌이 드는 곳이다.(1)
경북 경주 남산은 자연 속 박물관이다. 금오봉과 고위봉의 두 봉우리에서 흘러내리는 40여 개의 계곡과 산줄기로 이뤄진 남산 곳곳에 신라시대 100여 곳의 절터, 80여 구의 석불, 60여 기의 석탑이 자리 잡고 있다. 그야말로 부처님의 땅 ‘불국토(佛國土)’다.
● 남산 위의 저 소나무
경주에도 남산이 있다는 말을 하면 고개를 갸우뚱하게 마련이다. 그럼 애국가에 나오는 ‘남산 위의 저 소나무’는 서울인가, 경주인가. 실제로 경주 남산의 능선에도 구부러지고 뒤틀리며 자라는 전형적인 한국의 소나무들이 많다. 사진작가들이 즐겨 찾는 경주 삼릉의 솔숲을 보고 혹자는 “소나무들이 사교댄스를 추고 있는 무도회장에 들어온 기분”이라 말할 정도다.
경주 통일전 부근 염불사지에서 남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동네나 산길이나 굴러다니는 돌들은 모두 석탑 부재고, 바위에 새겨진 것은 마애불이다. 산 입구에서 물이나 김밥이라도 사려고 했는데, 주변에 아무런 가게가 없다. 점심 도시락도 없이 산행을 잘 마칠 수 있을까.
호젓한 솔숲을 걷기 시작한 지 한 시간쯤 흘렀을까. 대나무숲으로 둘러싸인 계단길에 빗자루질을 한 흔적이 선명했다. 이 산속에 누가 계단을 쓸었을까. 약수터 위 대안당(大安堂) 마루에 잠시 걸터앉아 쉬었다가 칠불암(七佛庵)에 도착했다.
남산 문화재 중 유일한 국보인 ‘경주남산칠불암마애불상군’.
경주 남산의 수많은 문화재 중 유일하게 국보로 지정된 ‘경주남산칠불암마애불상군(慶州南山七佛庵磨崖佛像群)’이 눈앞에 나타났다. 절벽 바위에 아미타삼존불이 새겨져 있고, 그 앞 육면체 바위에는 동서남북 4개 면에 사방불(四方佛)이 모셔져 있다. 삼존불과 사방불을 합쳐서 ‘칠불암’이 된 셈이다. 한 시대에 한 명의 부처만 존재한다는 개념에서 사방불은 모든 공간에 부처가 존재한다는 신앙으로 바뀌는 시기에 많이 만들어졌다. 부처는 동서남북 사방은 물론이고 6방, 8방에도 존재하고, 과거 현재 미래의 시공간을 넘어 모든 세계에 존재한다는 개념을 보여주는 마애불이다.
구름이 걷히고 따스한 햇살이 비칠 때마다 더욱 또렷해지는 마애불의 얼굴 표정과 미소를 감상하고 있는데 암자 종무소에서 “식사하세요∼”라는 소리가 들렸다. 이게 웬 떡인가! 김밥을 준비하지 못해 하루 종일 굶으며 남산을 돌아다닐 생각을 했었는데, 너무나 반가운 소리였다. 암자 안으로 들어가니 감자 수제비 한 그릇이 빈속뿐 아니라 마음까지 꽉 채워준다. 부처님의 자비가 현현하는 순간이다. 댓돌 한쪽에 작은 커피 자판기까지 있어 공짜 커피도 마실 수 있었다. 감사한 마음에 얼마 안 되지만 주머니에 있던 현금을 복전함에 넣고 왔다.
칠불암에는 눈이 맑고 푸른 비구니 스님이 계셨다. 12년 전 체코에서 숭산 스님의 책을 읽고 출가를 결심하고, 한국에 온 휴정 스님이다. 경북 청도 운문사에서 공부하고, 경주에 온 지 어느새 10년이 넘었다고 했다. 한국말을 정말 잘하는 휴정 스님은 마애불에 대해서도 깊은 지식을 갖고 있었다. 그는 “칠불암 불상군 터는 오랫동안 숲에 가려져 있었는데, 일제강점기 때 지역 주민들에 의해 발견됐다”고 설명해 주었다. 칠불암에서는 템플스테이도 많이 진행하는데, 외국인들이 특히 많이 찾아온다고 한다.
칠불암 우측 대숲을 지나 다소 가파른 계단을 따라 200m 정도 오르면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이 나온다. 널찍한 경주 평야의 풍광이 시원하게 펼쳐진 벼랑 끝 바위다. 맞은편 토함산의 연봉들도 기운차게 흘러간다. 손에 용화 꽃가지를 들고, 머리에는 삼면보관(三面寶冠)을 쓰고 있는 미륵보살이다. 아래쪽에는 동글동글한 구름 모양이 새겨져 있다. 그야말로 남산 자락 구름 위에 앉아 있는 미륵보살상이다.
● 용장골 세계에서 가장 높은 탑
경주 남산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는 금오봉(468m)과 고위봉(494m)이다. 두 봉우리 사이에 남산에서 가장 크고 깊은 골짜기인 용장계곡이 펼쳐진다. 이곳에는 22곳의 절터와 11개의 석탑 유적지가 있다.
칠불암에서 용장계곡으로 넘어가는 삼화령 고갯길에는 억새가 하늘하늘 빛난다. 고갯길 정상에는 커다란 바위 위가 지름 2m 크기 연꽃 모양으로 장식돼 있는 연화대좌가 있다. 신라 경덕왕 때 안민가와 찬기파랑가를 지은 충담 스님이 해마다 3월 3일과 9월 9일에 차를 공양했다는 남산 삼화령 미륵세존이 있던 자리다.
남산 삼화령 연화대좌에서 바라본 전망.
연화대좌에서 내려다보니 고위봉과 태봉, 열반재, 용장골, 이무기 능선이 한눈에 들어온다. 예전에 몽골 초원에 있는 테렐지 국립공원에 갔을 때 산 중턱 사원에서 초원 계곡에 있는 거대한 거북바위를 바라봤을 때가 생각났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연화대좌에서도 우주의 에너지가 집중되는 장소의 느낌을 받았다.
삼화령에서 용장계곡으로 내려가는 능선에 용장곡 3층 석탑이 푸른 하늘 위에 우뚝 서 있다. 탑의 높이는 4.5m에 불과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높은 탑’으로 불린다. 해발 400m 절벽 자연 바위 위에 세워졌기 때문에, 남산 전체를 기단으로 삼은 탑의 높이는 444.5m나 된다.
용장곡 3층 석탑에서 아래쪽으로 10m쯤 내려오면 마애여래좌상과 삼륜대좌 석불좌상을 만나게 된다. 불상의 눈동자까지 보이는 보물급 마애여래좌상의 품격도 대단하다고 느꼈는데, 뒤를 돌아보는 순간 더욱 놀라운 불상과 마주하게 됐다. 높이 4.65m의 대좌부터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신기한 모습이다. 불상을 받치는 대좌가 시루떡도 아니고, 도넛도 아닐진대 세 개의 둥근 바퀴 모양의 돌이 탑처럼 쌓아 올려져 있다. 이른바 ‘삼륜대좌불(三輪臺座佛)’이다.
‘삼륜대좌불.’ 석조여래좌상은 얼굴이 없다.
그 위에 모셔진 석조여래좌상은 얼굴이 없다. 어느 시대 목이 잘린 불상의 몸에 새겨진 아름다운 옷 주름은 더욱더 처연한 슬픔을 느끼게 한다. ‘삼국유사’에는 용장사에 살던 대현 스님이 불상 주위를 돌며 기도하면 불상도 그를 따라 얼굴을 돌렸다고 한다. 바로 이 불상의 삼륜대좌 바퀴가 360도로 돌아가면서 기도하는 스님을 바라보지 않았을까 상상해 본다.
용장사는 조선시대 생육신 김시습(1435∼1493)이 1462년 27세의 나이에 머물면서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 소설인 ‘금오신화’를 썼던 곳이기도 하다. 용장골 계곡에는 설잠교가 놓여 있다. ‘눈 쌓인 봉우리’라는 뜻의 설잠(雪岑)은 매월당 김시습의 법호다. 금오신화는 조선의 금서(禁書)였다. 그가 쓴 소설의 주인공 이름은 ‘양생’ ‘이생’ ‘홍생’으로 ‘양 생원’ ‘이 생원’의 준말이다. ‘5세 신동’으로 불릴 정도로 뛰어난 재능을 가졌으면서도, 산천을 유람하며 거짓 미치광이로 살았던 자신의 신세와 비슷한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셈이다.
남산 열암곡에는 ‘5cm의 기적’으로 불리는 마애불이 있다. 600년 전 발생한 지진으로 쓰러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 마애불은 엎어진 불상의 얼굴과 바닥 사이에 불과 5cm의 틈밖에 없다. 암벽에서 떨어졌는데도 오똑하게 솟은 부처의 콧날이 그대로였다.
이후 1200년 가까이 자연스레 파묻혀 있던 덕분에 마애불은 통일신라시대 마애불 중 가장 완벽한 얼굴을 온전히 지킬 수 있었다. 이 불상을 세우자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쓰러져서도 얼굴 원형이 완전하게 보존된 기적의 불상을 보고자 하는 수많은 관람객의 발걸음이 이어지고 있다.
● 가볼 만한 곳=경주 동남산 기슭에 있는 ‘경북천년숲정원’은 2023년 경북에서 1호이자 국내 5번째 지방정원으로 지정됐다. 입구에서 가까운 메타세쿼이아 숲길의 실개천 위에는 외나무다리가 있다. 그곳에 서 있으면 실개천에 모습이 비치기 때문에 거울숲으로 불린다. 초겨울까지 단풍이 남아 있는 이곳엔 연인들끼리 인증샷을 남기려는 젊은이들로 긴 줄이 서 있다.
경주의 야경 명소로는 월성(사적 16호)을 휘감아 흐르는 남천 위에 세운 월정교를 꼽을 수 있다. 웅장한 2층 문루와 곧게 뻗은 회랑이 조명에 빛나는 월정교는 특히 달이 뜨는 날에 운치를 더한다. 동아일보. 전승훈 기자. '부처의 땅… 신라의 숨결[전승훈 기자의 아트로드]' 2024. 12. 7. (2)
내 마음대로 사찰여행 비경 100선
사찰은 불교의 공간이면서, 우리 역사와 예술의 유산입니다. 명산의 절경을 배경으로 자리 잡은 사찰들은 지역사회의 소중한 관광자원이기도 합니다. 치열한 일상에서 벗어나 잠시 휴식을 얻고자 할 때 우리는 산에 오르고 절을 찾습니다. 헤럴드경제는 빼어난 아름다움과 역사를 자랑하는 사찰 100곳을 소개하는 ‘내 마음대로 사찰 여행 비경 100선’ 시리즈를 연재합니다.
‘5cm의 기적’ 열암곡 마애불을 보기 위해 두어 달 전 경주 남산에 오른 뒤 글을 썼다. 당시 새갓곡에서 출발해 열암곡을 지나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까지 보고 왔다. 남산의 여러 탐방로 중 일명 ‘봉화골 역사문화탐방로’를 택했던 것이다. 유적과 불상, 탑 등 700여점의 문화재가 있는 경주 남산은 하나의 거대한 박물관인데, 일부만 보고 왔기에 언젠간 다른 탐방로를 걸으며 더 많은 유물을 보고 싶었다. 특히 문화재가 제일 많이 모여 있다는 삼릉계곡을 통해 금오산 정상에 오르고 남산의 마스코트인 삼층석탑과 김시습이 ‘금오신화’를 썼다는 용장사지도 가보겠다고 다짐했다.
다짐은 의외로 빠르게 현실이 됐다. 다시 경주 남산을 방문할 기회가 생긴 것. 특별히 이번 방문길엔 ‘즉문즉설’로 유명한 법륜스님(정토회 지도법사)이 길잡이가 되어주었다. 얼마 전 한 대기업 회장과 법륜스님을 함께 만나는 자리에서 남산 열암곡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눴는데 “기회가 되면 함께 가보자”는 스님의 제안이 있었다. 알고 보니 법륜스님 고향이 경주이고 정토회 회원들과 여러번 경주 답사를 했던 덕분에 남산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한단다.
삼릉계곡 초입부터 스님의 박학다식하고 세세한 설명을 들으며 경주 남산 2차 탐방에 나섰다.
삼릉 역사문화탐방 금오산까지
경주 남산 삼릉골 초입부터 ‘철갑을 두른 소나무’가 지천에 널렸다. 애국가 2절의 구절(남산 위에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의 남산이 경주 남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신라 8대 아달라왕, 53대 신덕왕, 54대 경명왕의 세 릉이 소나무숲에 둘러싸여 삼릉골 초입을 지키고 있다. 올라가는 길에 흩어져 있던 조각난 불상들을 모아둔 장소가 있었는데 이곳이 가장 많은 문화재를 탐방할 수 있는 구간임을 직감했다.
삼릉곡 2사지 석조여래좌상 앞에 섰다. 높이와 너비가 각각 1.6m에 달하는 꽤 큰 좌상이나 머리(불두)와 왼쪽 어깨, 양손이 훼손되어 있다. “불교라는 몸체는 있지만 머리(지혜의 가르침)와 팔(자비로운 실천)이 없음을 표현하고 있는 듯하다”고 법륜스님이 설명했다. 마치 현재 우리 불교계를 보는 것 같다며 스님은 안타까워했다.
삼릉곡 2사지 석조여래좌상. 8세기 신라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머리와 손 부분은 훼손돼 없다.
삼릉계곡 선각여래좌상. 얼굴과 몸 일부만 돋을새김으로 제작했고 나머지는 선으로 조각해 전체적인 형상을 만들었다.
좀 더 위쪽에 올라가니 풍만한 얼굴에 미소를 띠고 입술이 붉은 마애보살상이 아름다운 자태를 드러내고 있고 가파른 길을 더 오르니 두 개의 큰 바위면에 여섯 분의 부처와 보살을 선으로만 새긴 선각육존불(線刻六尊佛)이 나온다. 바위의 윗면에는 지붕을 설치했던 흔적과 배수로마저 보인다. 조금 더 올라가니 경주 시내가 한눈에 들어오고 소나무 사이 서쪽을 향해 있는 넓은 바위에 선으로 새긴 선각여래좌상이 10m의 높은 두 동강 난 바위면의 위아래를 장식하고 있었다.
화강암으로 조성된 여래상이 화려한 연꽃 대좌위에 앉아 있다. 삼릉계 석조여래좌상(보물)이다. 워낙 커서 누가 가져가지 못했다는데, 목 부분이 잘리고 광배(부처의 몸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것)가 깨진 상태로 발견됐다. 흩어져 있던 부위를 찾아서 복원을 거듭한 끝에 지금의 모습이 됐다. 옆에는 어느 고승이 수행했음직한 토굴이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먼발치 바위 절벽에 부처의 머리와 어깨선이 선각으로 새겨진 불상이 보이고(삼릉 선각마애불) 부근엔 석조여래좌상(현재는 국립박물관에 소장)이 있었던 터임을 알리는 표지판이 있다. 상선암이라는 암자에서 불경소리가 요란하다. 잠시 멈춰 숨을 고르고 다시 오르다보니 바위에 하반신만 남아 있는 불상이 길목을 지키고 있다.
삼릉계곡 석조여래좌상. 머리 부위가 잘리고 훼손되고, 광배도 조각나 있던 것을 수차례 복원을 거쳐 지금의 모습으로 정비했다.
삼릉계곡 마애석가여래좌상. 머리와 어깨까지는 입체적으로 조각했고, 그 아래는 바위에 선을 새겨 전체적인 불상 형태로 완성했다. 경주시내가 훤히 내려다 보이는 지점에 있어서, 마치 거대한 불상이 세상을 굽어보는 느낌을 준다.
시내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남산 제일 높은 곳에 삼릉계곡 마애석가여래좌상이 있다. 커다란 바위에 6~7m 높이의 거대한 불상을 조각해 놓았다. 많은 사람들이 찾을 것 같은 신성한 기도처로 보인다. 하지만 마애불 위에 매달린 듯한 위험스런 바위 때문인지 접근이 통제돼 있다. 여기를 관리하는 상선암 관계자의 안내로 다행히 아름다움을 가까이서 감상하고 기도를 드릴 수 있었다. 발걸음을 정상 방면으로 옮긴 끝에 해발 468m 금오봉 정상에 다다랐다. 등산객들이 정상 표지석을 배경 삼아 사진 찍기에 여념 없다. 우리 일행도 이곳에서 단체사진을 남겼다.
금오봉을 올랐으니 이제 내리막길일 것 같은데, 더 높은 고위봉(495m)이 있다고 한다. 내리막 오르막을 반복해야 할 것 같다. 남산을 500m 미만의 산이라고 얕잡아 오르다가는 큰코 다치기 쉽다. 일단 김밥과 경주 황남빵으로 간단히 점심요기를 하고 고위봉으로 방향을 잡았다. 가는 길에 용장골 꼭대기에 거대한 연꽃대좌(蓮華臺座)가 새겨져 있는 큰 바위가 나온다. 바위에 올라서니 고위산 정상, 토함산 등이 훤히 바라다보인다. 과거엔 이 연화대좌 위에 불상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비어있다. 불상은 낭떠러지 계곡 어디엔가 조용히 묻혀 있을 것만 같다.
매월당 김시습이 금오신화를 쓰고 머물렀다고 하는 용장사지와 그곳에 바위산 전체를 기단으로 삼은 것처럼 보이는 삼층석탑은 먼발치에서만 바라보았다. 세 개의 바퀴 같은 삼륜의 대좌 위에 가부좌하고 앉은 목이 없는 석조여래좌상은 결국 보지 못하고 다른 길로 접어들었다. 아쉬움은 또다시 남산길을 올라야 하는 과제로 남았다.
용장사지 방향이 아닌 봉화골 역사문화탐방로로 이어지는 이영재로 넘어오다 보니 깊은 산속에 웬 인공호수가 나온다. 고위봉 아래 농업용수를 위해 만들었다는 남산 고위지(高位池)인데 높은 산이 아님에도 남산계곡에 물이 많은 이유가 여기에 있는 듯도 했다. 저수지 주변에 단풍이 들면 환상적인 풍경을 연출할 듯하다. 인적이 드문 계곡을 따라 걷다 보니 깊은 계곡에 자리 잡은 ‘용장계 지곡 제3사지 삼층석탑’(보물 1935호)이 아름다움을 드러냈다.
기단부에 큰 석재를 사용하고 지붕돌이 윗면까지 계단식으로 되어있는 형태가 특이했다. 이곳도 과거엔 절이 있었던 곳인듯 넓은 터를 형성하고 있다. 계곡 틈새로 시원한 바람이 새로 들어와 이마에 맺힌 땀을 식혔다. “행복 바람이 불어오네요”라는 일행의 외침에 일행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워낙 많은 불교 유물이 있는 삼릉 문화역사탐방로를 뒤로하고 백운재와 백운암을 지나 고위봉을 등지고 천룡사지로 넘어왔다. 여전히 찻길조차 없고 휴대전화 전파도 잘 터지지 않는 곳이다. 고위봉 아래 앞이 훤히 트여 먼 산등성이가 아름답게 펼쳐진 널따란 분지에 천룡사지 삼층석탑(보물)과 넓은 절터(유적 발굴 중)를 바라보니 옛 영화가 보이는 듯하다. 천룡사지에서 급경사길을 20여 분 걸어 내려오다가 만나는 와룡사를 통해 틈수골로 빠져나오니 경주 시내로 통했다.
신라의 흥망성쇠와 함께한 ‘노천 박물관’ 남산은 신라의 귀족불교를 대변했던 토함산과 달리 신라 민중불교의 터전이었다고 한다. 골골마다 산재해 있는 마애불 석탑, 석불 등 불교 유물들을 모두 다 볼라치면 아직도 몇 날 며칠은 족히 필요해 보인다.
지난번 남산 방문 때는 탐방로에서 우연히 만난 ‘경주, 역사를 품은 여행’를 쓴 심상섭 작가의 도움말 덕분에 많은 것을 배웠는데, 오늘은 영광스럽게도 법륜스님의 세밀한 설명과 함께 삼릉 역사 탐방로와 천룡사·와룡사 가는 고위봉 탐방로를 성공적으로 답사했다. 그러나 국사곡 탐방로, 포석정지 탐방로, 약수골과 비파골, 용장사지 등 가야 할 곳은 여전히 많다.
법륜스님은 평화운동가요, 제3세계를 지원하는 구호활동가이며, 수행공동체 정토회를 세워 인류의 문명전환을 실현해가는 사상가다. 2002년부터 대중들과 만나는 즉문즉설(卽問卽說)이 명성을 더하면서 ‘국민 멘토’ 역할도 하고 있다. 그간 많은 이들에게 위로를 전하고 각자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는 힘을 키워주고 있다.
법륜스님은 경주 태생으로 남산 인근에 스님이 다녔던 초등학교 폐교 부지에 두북수련원을 조성하고 아나바다장터와 수련시설, 즉문즉설 스튜디오 등을 만들었다. 인근 논밭에서는 스님이 트랙터를 직접 몰며 정토회 회원들과 함께 농사를 짓는다. 두북수련원 운동장에는 며칠 전 수확한 밀이 초여름 볕을 받고 있었다. 일과 수행의 조화를 이루고자 하는 선농일치(禪農一致)의 실행일까. 헤럴드경제. 글·사진 = 정용식 ㈜헤럴드 상무. 정리 = 박준규 기자. '돌부처님이 세상 굽어보는 경주 남산, 법륜스님과 함께 오르다 [정용식의 내 마음대로 사찰여행 비경 100선]' ㉜경주 남산 삼릉역사문화 탐방로. 2024. 6. 20.
■ 경주 내물왕릉
사적
경주 내물왕릉 (慶州 奈勿王陵)
Tomb of King Naemul, Gyeongju
신라 17대 내물왕(재위 356∼402)의 무덤이다.
내물왕은 김씨 왕으로는 두 번째로 왕위에 올랐으며 이후 김씨 성에 의한 독점적 왕위계승을 이루었다. 마립간이란 왕 명칭을 처음 사용하였고, 중국 전진(前秦)과의 외교관계를 통해 선진문물을 수입하였다. 백제와 왜의 연합세력이 침입하자 고구려 광개토대왕에 도움을 요청하여 위기를 모면하였으며, 국력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시기이다.
높이 5.3m, 지름 22m의 둥글게 흙을 쌓은 원형 봉토무덤이다. 밑둘레에는 자연석을 이용하여 둘레석을 돌렸다. 무덤 주변을 사각형으로 둘러싸고 있는 담장터 흔적이 있어 일찍부터 특별히 보호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신라무덤의 내부형태는 거대한 규모의 돌무지덧널무덤이나, 이 무덤은 규모가 작고 둘레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굴식돌방무덤으로 추정된다.
내물왕릉을 황남대총(98호분)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1)
신라는 낙동강 동쪽을 거의 차지한 내물왕(356∼402) 때부터 왕의 칭호가 '나이 많고 지혜가 풍부한 사람'을 뜻하는 이사금(尼斯今)에서 '대장군'을 뜻하는 마립간(麻立干)으로 바뀌었고, 김씨가 왕위를 세습했다.
▲죽은 뒤에도 머리에 댓잎을 꽂은 '하늘의 군사'를 보내어 적국의 침범으로부터 나라를 구했다는 신라 미추왕릉의 무덤 뒤편에는 지금도 대나무들이 무성하다. 미추왕은 김씨 최초의 신라 임금이다. |
ⓒ 정만진 |
미추왕의 고사는 왕권 강화의 사례를 잘 증언해준다. 미추왕의 고사는 < 삼국사기 > 와 < 삼국유사 > 두 책에 모두 실려 있는 청도 이서국의 297년(유례왕 14) 신라 공격 사건, 즉 죽엽군(竹葉軍) 설화를 말한다.
이서국 군대는 서울 금성을 포위할 만큼 강했다. 신라는 이를 물리치지 못했다(이는 아직 신라가 진한 지역을 완벽하게 장악하지는 못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이때 머리에 댓잎을 꽂은 정체불명의 군사들이 출현해 적군을 물리친 뒤 미추왕릉 부근에서 사라진다.
전투가 끝난 뒤 미추왕릉 일대에는 댓잎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사람들은 14년 전에 죽은 미추왕이 나라를 걱정해 사후에도 군사를 움직인 것이라고 믿었다. 2014년 현재도 미추왕릉 뒤편에는 대나무숲이 무성하다.
왕위 계승 신라 김씨들, 미추왕 미화 작업 골몰
▲두 번째 김씨 임금인 내물왕의 능. 내물왕 이후 김씨들이 왕위를 계승했다. |
ⓒ 정만진 |
'죽엽군 설화'는 김씨 최초의 임금인 미추왕을 미화하기 위해 신라 당대에 널리 회자됐던 이야기로 여겨진다. 미추왕을 미화했다는 것은 김씨계가 신라의 권력을 대물림할 기회를 얻었다는 뜻이다. 왕권이 강화돼 귀족들의 권세를 억누르지 못하는 한에는, 산 임금도 아닌 죽은 임금이 적국을 물리쳤다고 역사책에 기록할 수는 없다.
왕권이 강력해진 것은 정복전쟁의 결과였다. 동진해 동해까지, 남진해 살수(청천강, 淸川江)까지 국토를 확장한 정복군주 태조왕(53∼146)의 업적에 힘입어 고구려 고국천왕(179∼197)은 부족 세력이던 5부를 행정적 성격으로 개편했다. 백제는 한강 일대를 완전 장악한 정복군주 고이왕(234∼286) 때 6좌평제와 16관등제의 기본적인 틀을 마련했다.
신라는 낙동강 동쪽을 거의 차지한 내물왕(356∼402) 때부터 왕의 칭호가 '나이 많고 지혜가 풍부한 사람'을 뜻하는 이사금(尼斯今)에서 '대장군'을 뜻하는 마립간(麻立干)으로 바뀌었고, 김씨가 왕위를 세습했다. 그 후 눌지왕(417∼458)부터 왕위 부자 세습이 이뤄졌다. 법흥왕(514∼540)은 6부의 하급 관료 조직을 정비해 17관등제를 완비했다.
내물왕 때 김씨 왕위 세습, 눌지왕 때 부자 세습
▲법흥왕릉 |
ⓒ 정만진 |
신라는 화백회의의 만장일치를 통해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했다. 하지만 법흥왕은 531년 국무총리에 해당하는 상대등을 뒀다. 왕은 상대등이 화백회의의 논의 결과를 보고하면 최종 결정만을 내렸다. 그만큼 왕권이 강해졌다는 뜻이다.
법흥왕은 517년 처음으로 지금의 국방부에 해당하는 병부(兵部)를 설치했다. 520년 율령을 반포하고 관복을 제정했고, 532년 금관가야를 합병했다. 536년에는 처음으로 독자적인 연호(年號)를 사용해 자주 국가의 위상을 천하에 알렸다. 신하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527년 불교를 공인하는 것도 결국은 그만큼 왕권이 강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미추왕릉은 정면보다 뒤에서 봐야 제맛
▲정면에서 본 미추왕릉. 다른 왕릉과 별 차이가 없다. 역시 미추왕릉은 대숲이 있어야 제격이다. |
ⓒ 정만진 |
미추왕릉은 경주 대릉원 안에 있다. 대릉원은 후문으로 들어서면 황남대총이 먼저 나오고, 정문으로 들어서면 미추왕릉부터 만나게 된다. 미추왕릉은 김씨계의 첫 임금답게 특급의 무덤 보호를 받고 있다. 신라 왕릉들 중 출입문이 따로 있고, 묘석 등이 빠짐없이 갖춰져 있는 무덤은 오릉, 무열왕릉, 신문왕릉, 그리고 미추왕릉뿐이다.
미추왕릉은 정면에서 보는 것보다 뒤로 가서 바라봐야 더 큰 묘미를 느낄 수 있다. 능 뒤편에 대숲이 울창해 '죽엽군 설화'가 생생하게 되살아나기 때문이다. 오마이뉴스. 정만진 기자 '왕들은 뭐 때문에 전쟁을 좋아했을까' 2014. 8. 4. (4)
<자료출처>
(1)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홈페이지,
https://www.heritage.go.kr/heri/html/HtmlPage.do?pg=/unesco/Heritage/Heritage_06.jsp&pageNo=5_2_2_0
(2) https://v.daum.net/v/20241207030418810 동아일보. 2024. 12. 7.
(3) https://v.daum.net/v/20240620173212935 헤럴드경제. 2024. 6. 20.
(4) https://v.daum.net/v/20140804162702881 오마이뉴스. 2014. 8. 4.
<참고자료>
잃어버릴 뻔했다가 되찾은 1400년전 '신라의 미소'..얼굴무늬 수막새의 조각가가 있다?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daum.net) 경향신문 2020. 7. 27.
“헉! 너무 야해” 1500년 전 신라 토우의 성적 욕망과 쾌락[명작의 비밀㉕]|신동아 (donga.com)2021-04-10
<지식카페>얼굴 붉어지는 솔직한 性표현… 신라·로마는 ‘로맨스 왕국’? :: 문화일보 munhwa2018-12-18
포항서 5세기 신라 금귀걸이 발견…"고구려산 모방 제작"(종합) | 연합뉴스 (yna.co.kr) 2019-12-18
잃어버린 70년…‘딱’ 맞았네! (hani.co.kr)2019-10-19
90년전 신라 천년 고도 경주의 문화재들 (daum.net)2017. 2. 1.
'여러나라시대 > 신라(사라)' 카테고리의 다른 글
4. 신라 문화유산 (5) 세계문화유산 : 경주역사유적지구 - 경주 첨성대 : 현존 세계 最古 천문대 (3) | 2025.01.10 |
---|---|
4. 신라 문화유산 (3) 세계문화유산 : 경주역사유적지구 - 황룡사지구 (19) | 2025.01.09 |
4. 신라 문화유산 (2) 세계문화유산 : 경주역사유적지구 - 대능원지구 (14) | 2025.01.09 |
3. 신라 고고학 (11) 경주 황남동 120호, 120-1호, 120-2호 무덤 (77) | 2024.12.16 |
3. 신라 고고학 (10) 경주 쪽샘지구 44호분, 경주 쪽샘지구 C10호 목곽묘 (60) | 2024.12.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