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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신라 문화유산 (3) 세계문화유산 : 경주역사유적지구 - 황룡사지구 본문

여러나라시대/신라(사라)

4. 신라 문화유산 (3) 세계문화유산 : 경주역사유적지구 - 황룡사지구

대야발 2025. 1. 9.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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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룡사지구

 

 

사적

경주 황룡사지 (慶州 皇龍寺址)

Hwangnyongsa Temple Site, Gyeongju

 

 

 

황룡사는 신라 진흥왕 14년(553)에 경주 월성의 동쪽에 궁궐을 짓다가, 그곳에서 황룡(黃龍)이 나타났다는 말을 듣고 절로 고쳐 짓기 시작하여 17년 만에 완성되었다. 그 후 574년, 인도의 아소카왕이 철 57,000근·금 3만분으로 석가삼존불상을 만들려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금과 철, 그리고 삼존불상의 모형을 배에 실어 보낸 것이 신라 땅에 닿게 되자, 이것을 재료로 삼존불상을 만들게 되었는데, 5m가 넘는 이 불상을 모시기 위해 진평왕 6년(584)에 금당을 짓게 되었다. 선덕여왕 12년(643)에는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자장의 권유로 외적의 침입을 막기위한 바램의 9층 목탑을 짓게 되는데, 각 층마다 적국을 상징하도록 하였으며, 백제의 장인 아비지에 의해 645년에 완공되었다.

이와 같이 황룡사는 93년간에 걸친 국가사업으로 조성된 큰 절이었으며, 신라의 3가지 보물 중 천사옥대(天賜玉帶)를 제외한 2가지 보물이 황룡사 9층목탑과 장육존상이었다는 것에서도 황룡사가 차지하는 비중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신라의 땅이 곧 부처가 사는 땅'이라는 신라인들의 불교관이 잘 나타나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황룡사는 고려 고종 25년(1238)에 몽고의 침입으로 모두 불타 없어져 지금은 그 흔적만 남아있다. 늪지를 메워서 그 위에 지은 황룡사는 중문·목탑·금당·강당이 남북으로 길게 배치된 1탑식 배치였다. 그러나 장육존상과 목탑 등이 조성된 후 금당 좌우에 작은 금당이 배치되는 1탑 3금당식으로 바뀌고, 탑의 좌우에 종루와 경루(經樓)가 대칭을 이루어 배치되었다. 또 사방은 복도와 같은 회랑으로 둘러싸여, 독특한 가람배치를 보이고 있다.『삼국유사』에 의하면 종루에는 거대한 종이 있었는데, 몽고가 침입했을 때에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

1976년부터 시작한 발굴조사에서 금동불입상·풍탁·금동귀걸이·각종 유리 등 4만여 점의 유물이 출토되었으며, 높이 182㎝에 이르는 대형치미는 건물의 웅장한 규모를 짐작하게 한다. 금당에는 솔거가 그린 벽화가 있었다고 전하며, 목탑지에서 발견된 당나라 백자항아리는 당시의 문물교류를 잘 알 수 있게 한다.(1)

 

 

 

 

 

1970년대 찍은 경주 황룡사터 건물터 발굴 현장. 문화재관리국이 조사단을 꾸려 1976년부터 1984년까지 2만평 넘는 대사원터를 발굴조사한 것은 국내 고고발굴사상 전례 없는 대역사였다.

 

 

 

왜 궁궐로 짓다가 거대한 절이 됐을까.

신라 천년 도읍 경주의 옛 도심 구황동에 2만평 넘는 터만 남긴 채 사라진 거대사원 황룡사 유적을 답사할 때마다 떠올리게 되는 의문이다. 황룡사는 한반도 역사에 등장한 역대 불교 사찰들 가운데 가장 큰 규모를 자랑했던 절이다. 백제 장인 아비지가 세운 80m를 넘는 목탑과 본존불 장륙존상, 화가 솔거의 벽화로 유명했던 이 절터는 진흥왕 14년인 553년, 왕궁인 월성 동쪽의 광활한 저습지에 지어지기 시작했다.

 

인근의 좁은 반월성 궁성에 덧댄 새 궁터로 짓기 위해 막대한 분량의 흙을 쌓는 대역사를 벌여 대지를 닦았는데, 갑자기 거대한 절을 짓는 쪽으로 공사 방향이 확 바뀐 것이다.

 

일연의 <삼국유사>에는 새 왕궁을 지으려 하니 터에서 기묘하게도 누른빛 황룡이 나타나는 이적이 일어나 절을 짓는 것으로 계획을 바꾸고 절 이름도 황룡사로 지었다고 유래를 설명해 놓았다. 그러나 일연의 설명은 설화적 내용이며 실제 절로 바꿔 건축한 도시사적 배경이 무엇인지는 오랜 수수께끼로 남게 됐다. 그런데 최근 이런 의문에 설득력 있는 풀이를 내놓은 연구 결과가 나왔다는 낭보가 들려온다.

 

 

 

 

하늘에서 내려다본 현재 경주 시가지 모습을 바탕으로 신라 궁성 월성과 주변 큰 사찰들의 연결로를 표시한 설명도. 사진 위쪽이 북쪽이고 아래가 남쪽이다. 가운데 말굽 모양의 반월성 유적과 그 바로 위 사각형으로 표시된 월지(안압지) 동궁 유적과 노란 원 두개가 맞붙은 지점으로 표기된 제석궁(천주사)이 좀 더 큰 왕궁 권역인 ‘만월성’을 형성한다.

설명도 왼쪽 위와 아래, 오른쪽 위, 아래 각각 표기된 노란 원들이 왕궁의 서북쪽, 서남쪽, 동북쪽, 동남쪽에 있는 흥륜사, 영묘사, 황룡사, 그리고 사천왕사 쪽 영역이다. 이 절들을 표기한 원들로부터 이어진 직선로(빨간색)가 월성의 서문, 북문, 동궁의 동문과 월성의 남쪽 누각과 바로 이어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3만평에 육박하는 면적을 지닌 황룡사터 유적 전경. 1970년대 중반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 대규모 조사작업이 진행된 직후의 유적을 공중에서 본 모습이다.

 

 

 

황룡사의 수수께끼에 도전한 이는 신라사 전문가인 윤선태 동국대 역사교육과 교수다. 그는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개소 30돌을 기념해 마련한 학술대회에 ‘신라 왕도와 국가사찰’이란 논문을 발표하면서 연구자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이 논문의 뼈대는 황룡사가 원래 궁터 위에 만들어진 배경으로 왕실의 권력을 시각적으로 잘 보여주기 위한 신라 특유의 도시계획 원리가 작용했다는 분석을 내세운 것으로 집약된다. 황룡사 서쪽 인왕동의 말굽형 언덕에 자리잡은 1000년 왕궁 반월성은 크기가 협소했다. 그래서 신라 중후기 동북쪽 월지(안압지) 권역 등 사방으로 계속 증축, 확장되어 만월성이란 큰 궁궐로 덩치를 키우게 된다. 이 과정에서 월성의 사방에 설치된 4개의 큰 사원(사처가람)들이 월성 궁궐의 권위와 경주 일대를 지배하는 왕의 권력을 더욱 돋보이도록 하는 도시계획이 실행됐다는 게 논문의 요체다.

 

 

 

황룡사의 남쪽 구역 큰 도로와 광장 유적이 서쪽 월성 동궁의 동문과 연결되는 경관을 입체적으로 보여주는 도해도. 윤선태 교수는 황룡사 남쪽 광장의 큰길에 들어서면 길의 축선이 월성의 출입문으로 향하기 때문에 군중이 왕실의 권력 공간을 주시하는 시각적 효과를 낳게 된다고 설명한다.

 

 
 
 
 
황룡사터와 신라 궁궐인 월성이 활짝 트인 큰길로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유적 설명도. 절터 남문 앞 큰 도로(대로)와 광장 유적이 터의 서쪽에 자리한 월성 동궁 동문 터로 연결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단적인 근거로 제시한 것이 2016년부터 지난해까지 신라문화유산연구원이 발굴한 황룡사 남쪽 대로 및 광장 터 발굴조사 결과다. 길이 500m, 너비 50m나 되는 대로가 황룡사 남문 남쪽 광장부터 서쪽의 안압지 인근 신라 궁궐의 동쪽 문까지 이어진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저습지 위에 2m 이상 두둑하게 흙을 쌓아 넓은 대지를 조성하고, 이렇게 궁궐 문과 대찰 문을 잇는 장대한 대로를 닦아 파노라마처럼 노출되면서 연결한 건 신라 경주만의 독창적인 도시계획 구조였다는 것이다.

 

축선은 남북이 아닌 동서 축이지만, 오늘날 서울 광화문에서 세종로, 태평로 대로를 보는 것처럼 장대한 장관을 이루었을 것으로 보인다. 3만평에 가까운 거대한 저습지를 무려 2m 이상 매립하는 대규모 토목공사에 성공한 신라인들은 큰 자신감을 얻었을 것이다.

 

윤 교수는 이런 추론을 바탕으로 오히려 반월성과 황룡사 터 사이 월지 공간 저습지를 추가로 매립해 왕성을 넓히려는 계획을 추진했고, 궁터로 지으려던 황룡사 터는 확장된 왕성의 권위를 돋보이게 하는 시각적 장엄물로서의 효능이 더욱 크다는 입지조건 때문에 절로 전환한 것이라는 견해를 내놓았다. 절로 바뀌어 건립된 뒤 남문 앞 남쪽 대로 광장을 크게 조성해 왕궁과 연결하는 도시계획을 실행하면서 신라 경주 반월성 동쪽의 신도심 핵심이 됐다는 얘기다.

 

 

재미있는 건 이런 식의 큰 절 출입문과 궁궐 문을 활짝 트인 대로로 잇는 도시계획이 황룡사를 포함해 신라 왕경을 둘러싼 네 개의 절에서 모두 확인된다는 점이다. 왕성의 서북쪽 흥륜사, 서남쪽 영묘사, 동북쪽 황룡사, 동남쪽 사천왕사가 모두 ‘전대로’라고 불리는 절 문 앞 큰 도로를 갖고 있는데, 이 도로들이 모두 왕궁 반월성의 동서남북 문과 스펙터클한 경관을 만들면서 그대로 이어지는 얼개를 갖고 있다.

 

왕성을 서남쪽에서 지킨 영묘사의 경우 승려 진자사가 화랑으로 점찍은 소년 미시랑을 만났던 동북로라는 절 앞 도로 명칭까지 <삼국유사>에 전해졌으나, 후대 학계는 단순히 동북쪽 모퉁이로 해석했던 것을 윤 교수는 영묘사 앞 대로가 월성 서문의 누각까지 동북쪽으로 크게 트여 이어졌음을 보여주는 증거로 해석했다. 영묘사 대로에서는 대규모 군사사열이 있었다는 기록도 전해진다.

 

마찬가지로 서북쪽 흥륜사 앞길도 국외에서 들어오는 사신과 불교 승려의 보물들을 왕실이 맞는 길이었다는 점에서 당시 신라 백성들이 장대한 권력의 시각화된 경관을 보게 하면서 권위를 과시하는 구실을 했다는 게 윤 교수의 추정이다.

 

 

 

2016년 당시 황룡사터 남쪽 조사지역을 공중에서 바라본 모습. 허옇게 드러나 가로로 길게 이어진 부분이 당시 새로 드러난 절터 남문 앞 대형 도로·광장 터의 흔적이다. 유적을 맡은 신라문화유산연구원은 2019년까지 발굴조사를 지속해 남문 앞 도로가 폭 50m, 길이 500m로 서울 세종로 거리를 방불케하는 거대한 대로였다는 것을 밝혀냈다. 윤선태 교수는 이 대로의 끝이 월성 권역의 동쪽 끝인 동궁터 동문에 활짝 트인채 잇닿는 얼개를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왕궁의 장대한 경관을 한껏 부각시키는 시각적 장엄물의 기능을 지녔다고 짚었다.

 

 

 

신라인들은 오늘날 국내 위정자들처럼 도시의 옛 시가를 막 부수고 모두 헐어낸 뒤 다시 짓고 하는 도시계획을 한 게 아니었다. 흥륜사 쪽, 영묘사 등 월성 서쪽의 원도심은 강을 끼고 오래전부터 시가지가 조성되고 물류와 인력의 이동이 활발했던 점을 고려해 경관을 손대지 않았다.

 

반면, 저습지를 매립해 새로운 대지를 조성한 동쪽 황룡사 쪽은 새롭게 중국에서 발전하고 있는 도성의 장엄방식인 격자형의 직각적 얼개를 만들어냈다. 최대한 경주의 지세에 맞춰, 중국 북조에서 건너온 격자 가로 중심의 새로운 신도시 안을 기존 건물과 어우러지도록 수용해 법고창신의 태도로 도시계획을 했다는 점은 오늘날 현대 도시 정책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윤 교수는 말한다. 사진도판 문화재청·윤선태 교수 제공. 한겨레. 노형석 기자. 2020. 8. 24. (2)

 

 

 

 

이 밖에도 신라 사람들의 일상생활을 표현한 일종의 '미니어처'인 토우, 기와로서는 처음으로 보물로 지정된 얼굴무늬 수막새, 황룡사의 위용을 엿볼 수 있는 치미 등도 관심을 끈다.

 

 

경주 황룡사 터에서 출토된 치미 (경주=연합뉴스) 김예나 기자 = 경북 경주 국립경주박물관 신라미술관에 황룡사 터에서 출토된 치미가 전시돼 있다. 치미는 목조건축 지붕의 용마루 양 끝을 잡아주고 보호하는 기와로, 황룡사 치미는 우리나라에 현재 남아있는 치미 중 가장 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진은 지난 1월 말 촬영한 것. 2024.4.11 yes@yna.co.kr

 

 

치미에 담긴 얼굴 무늬 (경주=연합뉴스) 김예나 기자 = 경북 경주 국립경주박물관 신라미술관에 전시된 치미 부분. 양 옆면과 뒷면은 연꽃무늬, 얼굴 무늬로 장식했는데 얼굴 무늬 속 남자 얼굴에는 수염까지 표현돼 있어 눈길을 끈다. 지난 1월 말 촬영한 사진. 2024.4.11 yes@yna.co.kr

(출처; 화려한 금관·천년의 미소…한국인이 사랑하는 신라의 흔적 (daum.net) 김예나기자. 2024. 4. 12.)

 

 

 

 

 

■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

 

 

국보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 (慶州 芬皇寺 模塼石塔)

Stone Brick Pagoda of Bunhwangsa Temple, Gyeongju

 

 

현재 남아있는 신라 석탑 가운데 가장 오래된 걸작품으로, 돌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쌓아올린 모전석탑(模塼石塔)이다. 원래 9층이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지금은 3층만 남아있다.

탑은 넓직한 1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착실히 쌓아올린 모습이다. 기단은 벽돌이 아닌 자연석으로 이루어져 있고, 네 모퉁이마다 화강암으로 조각된 사자상이 한 마리씩 앉아있다. 회흑색 안산암을 작게 벽돌모양으로 잘라 쌓아올린 탑신은 거대한 1층 몸돌에 비해 2층부터는 현저하게 줄어드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1층 몸돌에는 네 면마다 문을 만들고, 그 양쪽에 불교의 법을 수호하는 인왕상(仁王像)을 힘찬 모습으로 조각해 놓았다. 지붕돌은 아래윗면 모두 계단 모양의 층을 이루고 있는데, 3층 지붕돌만은 윗면이 네 모서리에서 위쪽으로 둥글게 솟은 모양이며, 그 위로 화강암으로 만든 활짝 핀 연꽃장식이 놓여 있다.

선덕여왕 3년(634) 분황사의 창건과 함께 건립된 것으로 추측되며,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익산 미륵사지 석탑(국보)과도 좋은 대조를 이룬다. 특히, 부드러우면서도 힘차게 표현된 인왕상 조각은 당시 7세기 신라 조각양식을 살피는데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1915년 일본인에 의해 수리된 이후 지금까지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며, 수리 당시 탑 안에서 사리함과 구슬 등의 많은 유물들이 발견되었다.(1)

 

 

 

 

 

경주의 동북쪽. 신라 천 년의 찬란했던 역사와 문화를 간직한 고찰이 하나 있다. 바로 분황사다. 분황사는 경주 도심에서 그리 멀지 않는 곳에 있다. 지금은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어 겉보기엔 조그마한 사찰로 보인다. 그러나 경주 분황사는 신라시대 최고의 사찰로 명성을 날린 황룡사와 견줄 정도로 유명했던 사찰이다.

 

분황사 하면 선덕여왕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삼국유사>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면 분황사는 선덕여왕 즉위 3년(634년)에 창건한 사찰이다. 그리고 신라의 승려 자장과 원효가 머무르면서 불법을 전파했던 유서 깊은 사찰이다. 분황사는 창건 후 현재까지 몸이 불편하고 아픈 사람들이 많이 찾는 절로도 유명하다.

 

  
  선덕여왕이 창건한 국보 제30호로 지정된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 모습
ⓒ 한정환
 
 
 

당 태종이 보낸 모란꽃 그림과 씨앗

신라 최초의 여왕의 자리에 오른 선덕여왕. 여왕으로 즉위(632년)해 16년 동안 나라와 백성들을 다스린 한반도 최초의 여왕이다. 선덕여왕은 재임하는 동안 예지력이 뛰어난 여왕으로 후세에 전해진다. <삼국유사> 기이편에는 선덕여왕이 미리 안 세 가지 일이 기록돼 있다. 그중 하나가 분황사와 관련한 모란꽃 이야기이다.

 

당 태종이 선덕여왕 앞으로 붉은색, 자주색, 흰색의 세 가지 색으로 그린 모란과 그 꽃씨 석 되를 보내왔다. 선덕여왕은 당 태종이 보낸 그림의 꽃을 보고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이 꽃은 정녕코 향기가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여왕의 말이 무슨 뜻을 내포하는지 모르는 신하들이 의아해하며 여왕을 바라본다. 그러자 여왕은 신하들에게 함께 보내온 꽃씨를 바로 앞 뜰에 심도록 한다. 꽃씨를 심은 후 신하들이 그 꽃이 피고 지는 동안 여러 번 꽃의 냄새를 맡아보니 꽃에 향기가 없다. 과연 여왕이 처음 했던 그 말과 같았다.

 

당시 여러 신하들이 여왕에게 "어떻게 그렇게 될 줄 아셨습니까?"라고 하니 왕이 말하기를 "꽃을 그렸는데도 나비가 없었으므로 그 꽃이 향기가 없었음을 알았다, 이는 당 황제가 나의 배우자가 없음을 빗댄 것이다"라고 했다. 이에 여러 신하들은 여왕의 깊은 뜻과 예지력을 알고 모두 뛰어난 지혜에 감복했다고 전해진다. 

 

<삼국사기>보다 136년 뒤에 쓰인 게 <삼국유사>다. 일연은 <삼국유사>에서 모란꽃 설화를 새로 썼다. 내용은 같으나 <삼국유사>는 선덕여왕이 왕위에 올랐을 때로 시기가 바뀌어 있었다.

 

신라불교를 진흥시키고, 불력으로 외침을 막으려고 했던 선덕여왕이다. 선덕여왕은 분황사를 향기로울 분(芬)에, 임금 황(皇)을 넣어 향기가 나는 임금의 절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향기로운 여왕 선덕여왕의 숨결이 느껴지는 분황사. 해마다 분황사 앞에는 유채꽃, 메밀꽃 등 계절별로 아름다운 꽃을 심어 선덕여왕의 영혼을 달래주고 있다.

 
 

  
  경주 분황사 보광전 모습
ⓒ 한정환

 

 

분황사의 천수대비가 눈먼 아이의 눈을 뜨게 하다

<삼국유사> 탑상 편에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해진다. 신라 경덕왕 때 한기리에 희명(希明)이라는 이름의 여인이 살고 있었다. 여인의 아이는 태어난 지 5년 만에 갑자기 시각장애인이 됐다.

 

하루는 어머니가 아이를 안고 분황사를 찾았다. 분황사 왼쪽 전각 북쪽 벽에 그려진 천수대비 앞으로 갔다. 거기서 아이에게 노래를 지어 빌게 했더니 다시 앞을 볼 수 있게 됐다고 한다. 그 노래는 다음과 같다.
 

 
"무릎 꿇으며/두 손바닥을 모아/천수관음 앞에/축원의 말씀 올리나이다.
천 개의 손과 천 개의 눈을 가졌으니/하나를 내놓아 하나를 덜기를/눈이 둘 다 없는 저에게/
하나만 주어 고쳐 주시옵소서,/아아, 저에게 끼쳐 주시면/그 자비심 얼마나 크시나이까."

 
여기서 한번 아이의 어머니 희명이라는 이름을 풀이해 보자. 바랄 희(希)에, 밝을 명(明)은 자식이 시각장애인이 되자 더 함축된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눈을 밝게 해주소서'라는 의미로 풀이된다. 희명이라는 이름은 자식이 눈이 먼 아이가 될 걸 알고, 예지력이 풍부한 사람이 지어준 이름 같다. 눈먼 자식이 눈을 뜨자 희명은 분황사 북쪽 벽에 그려진 천수대비를 다음과 같이 찬양하며 기렸다고 한다.
 

"대나무 말 타고 파피리 불며 거리에서 놀더니 / 하루아침에 푸른 두 눈이 멀었네.
보살님이 자비로운 눈을 돌려주지 않았다면 / 헛되이 버들꽃을 보냄이 몇 번의 봄 제사나 될까."

 

 

 
 
 
  경주 분황사 입구에 세워진 원효성지 분황사 비석 모습
ⓒ 한정환

 

   
원효는 얽매이지 않는다

원효는 태어나면서부터 총명하고 특이하여 스승 없이 혼자 공부를 했다. 원효는 소수 귀족들의 전유물처럼 생각하던 불교를 인간의 고뇌를 해결하기 위한 대중불교로 방향을 전환시킨 대중불교의 선각자다.

 

원효는 저잣거리로 내려가 <화엄경>을 설파하고 백성들과 눈높이를 맞추어 모든 사람이 부처가 되는 것을 하나하나 실현해 나갔다. <삼국유사> 의해편에 이런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예법을 중히 여기고 숭상하던 대사가 어느 날 이상한 행동을 하며 거리에서 노래를 불렀다.

 

"그 누가 내게 자루 없는 도끼를 주려는가 / 내가 하늘을 떠받칠 기둥을 찍어 보련다."

 

사람들은 모두 그 의미를 알지 못했다. 이때 태종 무열왕이 이 말을 듣고는 "대사가 아마 귀한 부인을 얻어 어진 아들을 낳고 싶어 하는 것 같구나, 나라에 위대한 현인이 있으면 이로움이 막대할 것이다"라고 말했단다.

 

하루는 왕이 궁리(宮吏)를 시켜 원효를 불러오게 했다. 궁리는 원효를 찾던 중 남산에서 문천교로 내려오는 원효를 만난다. 원효는 궁리를 만나자 일부러 물속에 빠져 옷을 적셨다. 하는 수 없이 궁리는 원효를 요석궁으로 인도하여 옷을 말리고 그곳에서 머물다 가게 했다. 이때 원효대사가 과부가 된 요석공주와 세속 인연을 맺어서 태어난 아이가 설총이다.

 

 

 
  분황사 바로 앞에 있는 경주 황룡사지 모습.
ⓒ 한정환

 

설총은 태어나면서부터 지혜롭고 영특하며 민첩했다. 경서와 역사 책에도 널리 통달하여 신라의 10 현(賢) 중 한 사람으로 불린다. 원효는 계율을 어기고 설총을 낳은 후부터 속인의 의복으로 바꿔 입고 스스로 소성거사(小姓居士)라 불렀다. 원효는 일찍이 분황사에 머물면서 화엄경소(華嚴經疏)와 사십회향품소(四十廻向品疏)를 지었다.

 

원효가 입적하자 설총이 유해를 잘게 부수어 찰흙으로 빚은 소상(塑像)을 만들었다. 소상을 분황사에 모시고 공경하고 사모하며 예를 표했다. 설총이 매번 옆에서 예를 올리자 소상이 고개를 돌리며 계속 돌아보았다고 전해진다. 이 소상은 일연이 삼국유사를 쓰던 고려 말까지 분황사에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행방이 묘연하다. 일찍이 원효가 거주하던 혈사(穴寺) 옆에 설총의 집터가 있다고 한다.

 

설총은 다음과 같이 찬양하며 기린다.

 

"각승(角乘)은 처음 삼매경(三昧經)의 축을 열었고/표주박 들고 춤추는 것은 마침내 온 거리의 풍습이 되었네/달 밝은 요석궁에 봄 잠이 깊더니/문 닫힌 분황사엔 돌아다보는 그림자 비었다."(각승(角乘) ; 삼매경을 풀이한 법사를 말함) 오마이뉴스 한정환 기자. 2020.01.28. (3)

 

 

 

 

분황사는 선덕여왕 3년(634)에 창건된 고찰이다. 분황사는 몽고의 침략과 임진왜란 등으로 사찰은 불타 없어지고 일부는 유실되었다. 현재는 조선시대에 지은 지금의 보광전만 남아 있을 뿐 그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 현재 경내에는 분황사 모전석탑, 화쟁국사비부, 석정이란 우물만 남아있다.

1991년 분황사 터를 발굴한 결과, 고구려 사찰과 같이 품자형 금당 배치를 하고 있었다. 분황사가 한창 번창할 당시 왼쪽 전각 북편에 영험이 있는 천수대비 그림과 솔거가 그린 관음보살상 벽화가 있었다고 한다.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 기단 위에 있는 사자상 모습(서쪽편은 사자상, 동쪽 편은 물개상)
ⓒ 한정환 관련사진보기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

분황사 모전석탑은 임진왜란 때 반쯤 파괴되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조선시대 분황사 스님이 수리하려다가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대로 방치하던 중 일제강점기인 1915년에 다시 일본인 기술자들에 의해 해체 수리되었다. 타국의 문화재이지만 그때 당시에도 국보급 문화재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수리에 참여한 일본인이 있었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다.

 

안산암을 벽돌처럼 깎아서 차곡차곡 쌓아 만든 모전석탑은 높이가 9.3m이다. 국보 제30호로 관리되고 있다. 현재는 3층만 남아있다. 일부 학자와 학계에서는 9층으로 추측하고 있다. 7층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정확히 몇 층인지는 기록에 남아있지 않아 궁금증만 더한다.

 

모전석탑 기단 네 모서리에는 화강암으로 조각한 네 마리의 사자상이 앉아있다. 공식적으로는 네 마리 모두 사자상으로 표기하고 있다. 서쪽을 바라보고 있는 동물은 누가 보아도 사자가 맞다. 그러나 동해를 바라보고 있는 것는 자세히 살펴보면 물개 형상이다. 동해 쪽으로 쳐들어오는 외적의 침입을 막으려는 선덕여왕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사자는 수호의 기능과 함께, 부처님의 계율을 상징한다.

현재 탑신부 1층 네 면에 감실이 있는데 입구 양쪽에 인왕상을 세웠다. 금강역사상이라고도 불리는 인왕상은 한쪽은 입을 벌리고 있는 상이고, 또 다른 한쪽은 입을 다물고 있다. 현존하는 인왕상 중 가장 이른 것이다. 최고 절정의 인왕상은 석굴암 내부의 인왕상이다.

모전석탑의 3층 지붕돌만은 윗면이 네 모서리에서 위쪽으로 둥글게 솟은 모양이다. 그 위로 화강암으로 만든 활짝 핀 연꽃 장식이 놓여 있다.

 


 

  분황사 모전석탑에서 출토된 사리함 및 사리장엄구 모습.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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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5년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해체 수리할 때 2층과 3층 사이에서 사리장엄구가 발견되었다. 이때 발견된 병 모양의 그릇, 은합, 실패와 바늘, 침통, 금 은제 가위 등은 국립경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선덕여왕 때 건립된 것이라 여성들이 주로 많이 사용하는 물품들이 발견되었다.

모전석탑 안에는 큰 돌과 모래자갈로 가득 채워져 있다. 강력한 지진에도 탑이 무너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모래와 자갈 등을 채워 놓은 것이다. 몇 해 전 경주 지진 때 첨성대가 무너지지 않는 이유도 이와 같은 이유이다.

분황사 석탑은 신라 시대의 석탑 중 가장 오래된 탑이다. 분황사 한편에는 벽돌 같은 돌들이 많이 쌓여 있는데, 이 돌들은 석탑을 쌓았을 때 사용된 돌들이다.

 

 

  경주 분황사 보광전 뒤편에 시대를 알 수 없는 손과 얼굴이 함몰된 불상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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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황사약사여래입상(芬皇寺藥師如來立像) -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319호

분황사 보광전에 모셔져 있는 이 불상은 모든 중생의 질병을 구제해 준다는 의미의 약사여래불이다. 원래 분황사에는 신라 35대 경덕왕 때 주조한 무게 30만 6700근의 동(銅)으로 만든 신라 최대의 불상인 약사여래좌상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다.

1998년에 불상이 있는 보광전을 고쳐 짓기 위해 해체하던 중 발견된 기록을 통해 분황사는 임진왜란 때 불에 탔으며 현재의 불상은 조선시대 1609년에 동 5360근으로 만들었고 보광전은 1680년 5월에 다시 지은 것으로 밝혀졌다.

불상의 왼손 위에 놓인 약그릇 뚜껑 안쪽에 '건륭(乾隆) 39년 을미(乙未) 4월 25일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지만, 건륭 39년은 을미년이 아니라 갑오년이기 때문에 이 기록을 사실대로 믿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 입상이 조선 영조 50년(1774년)에 제작된 것만은 여기서 알 수 있다.

 


 

  경주 분황사 석정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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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황사 석정(芬皇寺 石井) -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9호

분황사 사찰 내에 있는 돌우물이다. 바위틈 사이로 솟아 오르거나 흘러내리는 물이 잘 고이도록 바위를 움푹하게 팠다. 그 위에 다시 돌을 쌓아 만들어 놓은 모습이다. 겉면은 8각을 이루고, 안쪽의 벽은 둥근 원형을 이루고 있다.

경주에는 이런 형태의 석정이 3곳 있다. 분황사 석정과 재매정에 있는 김유신 생가터 우물 그리고 경주향교 우물이다. 이 중에서 분황사 석정은 우물과 관련하여 사연이 많기로도 유명하다.

'호국룡변어정'이라고도 불리는 이 우물은 삼국유사 원성왕 편에 보면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분황사 우물과 금학산 기슭 동천사의 동지와 청지라는 우물에는 각각 통일신라를 지키는 세 마리의 호국룡이 살고 있었다. 원성왕 11년(795년) 중국 당나라 사신이 이 용들을 주문을 외워 물고기로 변신시켜 잡아가 버린다. 두 여인이 왕 앞에 나타나 이 사실을 아뢰며 남편을 찾아줄 것을 아뢰었다. 두 여인의 말을 들은 왕은 사람을 시켜 당나라 사신을 쫓아가, 물고기를 다시 빼앗은 후 각각의 우물에 놓아주어 살게 하였다"라고 전한다.

또 다른 이야기는 우리를 슬프게 한다. 분황사 석정은 통일신라시대에 설치된 우물이다. 조선시대에는 숭유억불정책에 따라 사찰 내의 모든 돌부처의 목을 잘라 우물에 넣었던 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1914년 분황사 뒤뜰의 우물 속에서 목이 잘려나간 석불 여럿이 발견되어 지금 국립경주박물관 뒤뜰(관련기사 : http://omn.kr/s5we)에 진열되어 있다.

 


  

  경주 분황사 경내에 있는 화쟁국사비부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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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황사화쟁국사비부(芬皇寺和諍國師碑趺) -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97호

고려 시대에 세워진 원효대사를 기리는 비의 받침돌이다. 분황사 내의 우물 옆에 놓여 있다. 고려 숙종은 동방의 성인인데도 불구하고, 원효대사에 대한 비석이나 죽은 이의 덕을 기리어 붙여주는 시호가 없음을 애석하게 여긴다. 이에 왕이 '대성화쟁국사(大聖和諍國師)'라는 시호를 내리고 비석을 세우도록 하였다. 현재 비는 없어지고 받침돌만 남아있다.

오랫동안 방치되어 오다가 김정희가 절 근처에서 발견하여 이를 확인하는 글귀를 받침돌에 새겨두었다. "차신라화쟁국사지비적(此新羅和諍國師之碑蹟)"이라 쓰여진 김정희의 친필이 어렴풋이 보인다. 비는 임진왜란 후까지도 보존되었으나, 지금은 이 받침돌만이 남아있다.

받침돌은 직육면체의 모습을 하고 있다. 네 모서리가 떨어져 나가 많이 훼손되어 있는 상태이다. 윗면에는 비를 꽂아두기 위한 홈을 파 놓았다. 옆면에는 옅은 안상(眼象)이 새겨져 있다.

김정희의 친필이 음각되어 유형문화재 제97호로 지정되었다. 지금이라도 보호 덮게를 세워 그나마 조금 보이는 글자만이라도 보호해야겠다. 이대로 방치하면 나중에는 받침돌이 퇴적을 거듭하여 완전히 글자가 보이지 않는다. 그때는 한낱 바위돌만도 못한 취급을 받게 될까 두렵다. 오마이뉴스 한정환 기자. 2020.01.28. (4)

 

 

 

 

 

 

 

 

<자료출처>

 

 

(1)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홈페이지,

https://www.heritage.go.kr/heri/html/HtmlPage.do?pg=/unesco/Heritage/Heritage_06.jsp&pageNo=5_2_2_0

 

 

(2) 왜 궁궐로 짓다가 절이 됐을까..마침내 풀린 신라 황룡사 창건 수수께끼 (daum.net) 한겨레. 2020. 8. 24.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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