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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신라 문화유산 (2) 세계문화유산 : 경주역사유적지구 - 대능원지구 본문

여러나라시대/신라(사라)

4. 신라 문화유산 (2) 세계문화유산 : 경주역사유적지구 - 대능원지구

대야발 2025. 1. 9. 0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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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주 미추왕릉

 

 

 

사적

경주 미추왕릉 (慶州 味鄒王陵)

Tomb of King Michu, Gyeongju

 

 

 

 

 

 

신라 최초의 김씨 왕으로 백제의 여러차례 공격을 막아내고 농업을 장려한 신라 13대 왕인 미추이사금(재위 262∼284)의 무덤이다.

『삼국사기』에는 미추왕릉과 관련된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신라 유례왕 14년(297) 이서고국(伊西古國) 사람이 수도인 금성을 공격하여 위급한 상황에 처하자 대나무잎을 귀에 꽂은 군사가 나타나 적을 물리치고 사라졌다. 누군가 미추왕릉에 댓잎을 수북이 쌓인 것을 보고 미추왕이 죽어서도 신라를 도와주었다하여 미추왕릉을 죽장릉(竹長陵), 죽현릉(竹現陵)이라 부른다고 한다.

경주 황남동 무덤들 중 가장 잘 정비된 대릉원 내에 높이 12.4m, 지름 56.7m의 둥글게 흙을 쌓아올린 원형 봉토무덤이다. 무덤 앞에는 혼이 머무는 자리인 혼유석이 있고, 담장을 돌려 무덤 전체를 보호하고 있다. 무덤 앞쪽에는 숭혜전이 있는데, 임진왜란 때 불에 탄 것을 1794년 다시 세운 것으로 제사를 지내기 위한 곳이다. 내부는 돌무지덧널무덤으로 추정된다.(1)

 
 
 
 

 
▲ 미추왕릉 정문 대릉원내 미추왕릉을 들어가는 정문
ⓒ 배남효
 
 
 
 

남쪽으로 돌아나오면 키 큰 소나무들이 가득하게 늘어선 오솔길이 나 있다. 그 길을 조금 따라 나오니 우측에 낮은 울타리로 경계를 쳐놓은 미추왕릉이 있다. 그 울타리를 따라 계속 들어와 우측으로 꺾어 돌아가면 미추왕릉을 들어가는 입구가 나오는데 정면에는 기와문과 돌담이 아담하게 둘러처져 있어 고풍스럽다. 그 문 우측에 경주 미추왕릉이라 이름붙은 안내 표지판이 있다. 

 

 
"이 능은 신라 제13대 미추왕(262-284년)을 모신 곳이다. 미추왕은 경주 김씨의 시조인 김알지의 후예로 신라 최초의 김씨 왕이며, 여러 차례 백제의 공격을 막아 내고 농업을 장려하였다.

미추왕 사후 제14대 유례왕대에 이서국이 금성을 공격한 일이 있었는데, 이때 대나무 잎을 귀에 꽂은 병사들이 홀연히 나타나 적군을 물리치고 사라진 일이 있었다. 나중에 사람들이 미추왕릉 앞에 대나무 잎이 수북이 쌓여 있는 것을 보고 적을 물리친 것이 선왕의 음덕임을 깨달아 능의 이름을 '죽현릉(죽현령)'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무덤 전체를 담장으로 둘러 보호하고 있으며, 능의 남쪽에는 위패를 모신 송혜전이 있어 매년 후손들이 미추왕의 제향을 받들고 있다."

 
▲ 미추왕릉 대릉원내 미추왕릉
ⓒ 배남효
 
 

 

그 문을 들어서면 커다란 미추왕릉이 좌우로 봉분의 균형을 잘 잡은 채 우람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주변 가장자리에는 벚나무들이 심겨져 아름답고 아늑한 느낌을 주고 있다. 앞에는 재례를 올리는 돌대가 특이하게 만들어져 놓여 있고, 우측 옆에는 '味鄒王陵'이라는 한자가 새겨진 낡은 비석돌이 세워져 있어 세월의 오래됨을 느끼게 한다. 오마이뉴스 배남효 기자. 2019. 12. 9.  (2)

 

 

 

 

■ 경주 황남리고분군

 

 

사적

                                                                       경주황남리고분군 (慶州皇南里古墳群)

Ancient Tombs in Hwangnam-ri, Gyeongju

 
 
 
 

경주시내 평지 무덤들 가운데 서남쪽에 있는 신라의 무덤들이다.

크고 작은 무덤 20여 기가 남아 있는데, 1973년 ‘대릉원’이란 고분공원으로 조성되었다. 이 안에는 천마총·황남대총·검총 등과 미추왕릉이라고 전하는 무덤이 포함되어 있다. 내부구조는 대부분 신라 특유의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으로 보인다. 돌무지덧널무덤은 직사각형의 구덩이를 판 뒤 덧널(곽)을 설치하고 자갈과 냇돌로 덮고 그 위에 흙을 덮어 마무리하는 것이다. 그 중 천마총은 금관·금제허리띠(금제과대)등을 비롯하여 각종 호화로운 유물이 나왔으며, 색이 칠해진 천마도가 나와 신라시대 그림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높이 23m, 남북 길이 120m, 동서 직경 80m로 경주에서 가장 큰 황남대총은 표주박 모양으로 연결된 두 개의 무덤으로, 남자와 여자의 무덤임이 밝혀졌다. 금관·금제허리띠·마구류를 비롯하여 각종 장신구가 출토되었다.

경주 황남리 무덤들은 현재 땅 위로 봉분이 남아있는 것은 20여 기이지만, 땅 속에 작은 무덤들이 무수히 많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들 가운데에는 일부이지만 독무덤(옹관묘) 등 여러 가지 형식의 무덤이 섞여 있어 신라 무덤 양식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1)

 
 
 
 

 

▲ 대릉원 고분 대릉원의 고분이 파란 하늘아래 아름답게 펼쳐진다.
ⓒ 배남효
 
 

경주시내 시외버스 정류장에서 남쪽으로 조금만 가면 대릉원 일대의 커다란 고분들이 보인다. 시내 중심가에 큰 고분들이 보여 경주가 문화유적도시임을 한눈에 실감케 한다. 특히 가을처럼 맑고 파란 하늘이 펼쳐질 때, 녹색의 고분들은 잘 조화를 이루어 천년고도의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대릉원 일대는 경주 문화유적의 중심지이기 때문에 늘 관광객과 자동차들이 북적인다. 휴일에는 차가 막혀 못 다닐 정도로 관광객이 몰리기도 한다. 그래서 경주에 사는 주민들은 불편을 겪기도 하는데, 관광지에 살면서 감수해야 하는 어려움이기도 하다.  

 
 

 
▲ 대릉원 정문 대릉원 북쪽에 나 있는 정문
ⓒ 배남효

 

 

대릉원 안에는 황남대총, 천마총, 미추왕릉 등의 주요한 고분들이 있는데, 정문 앞의 '경주 대릉원 일원'이라고 쓰여진 안내글을 그대로 옮긴다.

 
"경주시내 황남동 일대에 분포되어 있는 신라초기의 무덤들로 일부는 대릉원 구역안에 있다. 일제강점기에 붙여진 일련번호 90∼114, 151∼155호인 원형으로 흙을 쌓아올린 30기의 무덤이다. 큰 무덤은 돌무지덧널무덤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이고 주변에는 봉분이 없어진 작은 무덤이 있다.

대릉원 안에는 미추왕릉을 비롯하여 천마총(天馬塚)과 황남대총(皇南大塚) 등이 있다. 1973년에 발굴조사된 천마총은 지름 47m, 높이 12.7m로 금관을 비롯하여 많은 유물이 나왔다. 당시 천마도가 그려진 말안장 드리개가 출토되었기 때문에 '천마총'이라 이름하여 내부를 공개하고 있다.

또한 1973년부터 1975년까지 발굴조사된 황남대총은 남북길이 120m, 동서길이 80m, 높이 23m의 거대한 쌍무덤으로 남쪽 무덤에서는 금동관과 남자의 뼈 일부 및 많은 유물이 나왔다. 북쪽 무덤에서도 금관과 부인대(夫人帶)라는 글씨가 있는 은제 허리띠 등 많은 유물이 나왔다. 남쪽 무덤의 주인은 남자, 북쪽 무덤의 주인은 여자로, 부부의 무덤을 붙여 만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 대릉원 소나무길 대릉원 정문을 들어서면 키큰 소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다
ⓒ 배남효
 
 
 

대릉원이란 이름은 잘 지었다. 어감에 기품과 부드러움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 이름은 <삼국사기>에 "미추 이사금을 대릉에 장사지냈다"는 구절에서 따왔다고 한다.

 

대릉원은 남북으로 길쭉하게 조성돼 있는데 남쪽의 정문으로 들어가면, 키 큰 소나무들이 울창하게 늘어서 아늑하고 옛스러운 운치를 느끼게 한다. 길을 따라 조금 걸어 들어가면 좌측으로 잔디밭이 조성돼 있고, 잘 다듬어진 녹색의 커다란 고분들이 눈에 들어온다.  

 

 
▲ 대릉원 고분 고분의 선이 균형잡혀 부드럽게 내려오고 있다.
ⓒ 배남효
 
 

 

파란 하늘 아래 깨끗하게 벌초된 녹색의 고분들이 그림같이 아름답고 고운 자태를 드러내고 있어, 죽은 사람의 무덤이라는 어두운 분위기는 전혀 들지 않는다. 오히려 단정하게 잘 다듬어진 조형물처럼 깔끔하게 보이는데, 특히 고분의 좌우 양쪽으로 내려운 부드러운 선이 정말 완벽할 정도로 곱고 아름답다.

 

길을 계속 걸어 들어와 후문 가까이 오면 우측에 황남대총(皇南大?)이라 이름붙은 커다란 고분 두 개가 우람하게 잔디밭에 자리잡고 있다. 두 개의 고분이 쌍을 이루며 좌우 균형이 잘 맞아 보이는데, 봉분이 비교적 완만하게 내려와 그 선이 부드럽고 평안한 느낌을 준다. 

 

 
▲ 황남대총 대릉원의 황남대총이 두 개의 커다란 고분으로 펼쳐지고 있다.
ⓒ 배남효
 
 
황남대총은 안내판도 설명하는 글이 있다.
 
"황남동에 있는 신라 최대의 고분이라는 뜻으로 붙여진 명칭으로 고분 공원 조성 계획에 따라 경주 고적 발글 조사단이 1973년부터 1975년까지 발굴 조사하였다.

황남대총은 남북으로 두 개의 무덤이 서로 맞붙어 있으며, 남쪽 무덤을 만들고 뒤이어 북쪽 무덤을 잇대어 만들었다. 무덤구조는 모두 돌무지 터널 무덤(적석목곽분)으로 남분에는 남자가 묻혔고 북분에는 여자가 묻혔으며, 이들은 부부로 추정된다. 신라의 쌍무덤 가운데 가장 크고 주인공들은 화려한 황금 장신구로 치장하고 있어 마립간(麻立干)기의 왕릉으로 보는데에는 이견이 없다.

현재 학계에서는 무덤의 주인공을 제17대 내물왕과 제18대 실성왕, 제19대 눌지왕 중의 한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황남대총을 보면 살아서 부귀영화를 같이 한 왕과 왕비가 죽어서도 커다란 무덤에 나란히 묻힌 것이다. 존귀한 신분에 금슬도 좋고 얼마나 인연이 깊었는지 짐작케 만든다. 나라를 다스리는 왕권의 존엄과 권위를 세우기 위해 저토록 큰 고분을 만들었을 것인데, 신라시대에 기술도 좋고 만드는 민초들도 고생을 많이 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오마이뉴스 배남효 기자. 2019. 12. 9. (2)

 
 
 
 

5세기후반 신라 왕비의 금관으로 추정되는 황남대총 북분 금관(국보 191호·왼쪽 사진)과 6세기 신라 왕의 금관으로 추정되는 천마총 금관(국보 188호). 천마총 금관은 신라 금관 가운데 가장 화려하고 무겁다. 이한상 교수 제공. 

 
 
 
 
 
 
 
 

지중해보다 더 짙은 파란색 그릇, 파란 물결무늬를 세련되게 덧댄 유리잔, 점박이 무늬가 박힌 찻잔, 입구가 봉황머리처럼 날렵한 유리병….

 
 

국립경주박물관은 4월 11일까지 여는 ‘오색영롱, 한국 고대 유리와 신라’전을 통해 신라를 비롯한 삼국시대 왕릉급 고분에서 나온 당시 초고가 수입품 유리식기와 유리구슬을 선보이고 있다. 신라 고분에서 출토된 국보·보물급 유리식기는 성분 분석 결과 수입한 지역이 다양한 것으로 확인됐다. 유리구슬은 나라마다 취향이 달랐다. 국립경주박물관 제공

 

 

 

지금 봐도 화려하고 고급스럽다. 전시장에 진열된 유리 식기는 놀랍게도 5, 6세기 신라시대 왕릉급 무덤에서 나온 것이다. 1500∼1600년 전 신라의 왕과 왕족이 최고의 권력과 신분을 과시하듯 사용했던 최고 사치품이었다. 신라 왕족 여인들은 짙은 청색 유리구슬을 목이나 귀에 주렁주렁 달거나 옷에 꿰매 장식하기도 했다. 신라 시대 낙타에 실려 멀리 실크로드를 타고 건너온 저 유리그릇들은 어디에서 생산된 것일까. 그 비밀이 풀렸다.

 

 

경북 경주시 국립경주박물관은 그간의 연구 성과를 모아 ‘오색영롱, 한국 고대 유리와 신라’전을 하고 있다. 고대 한국에서 사용한 유리를 주제로 한 전시로는 최초이자 최대 규모다. 철기시대에서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는 유리제품 1만 8000점을 볼 수 있다.

 

하이라이트는 신라 왕릉 급 무덤에서 나온 국보·보물 유리그릇이다. 4∼6세기 신라 권역의 대형 고분에서는 유리그릇이 23점이나 출토됐다.

 

경주의 황남대총(10점), 서봉총(3점), 천마총(3점), 금관총 (2점), 금령총(2점), 경주 안계리 4호분(1점), 합천의 옥천 고분(1점)등이다. 이 같은 발굴 규모는 동양에서도 최대다. 전시에선 그 가운데 국보·보물 등 15점이 한자리에 모여 모처럼 눈 호강을 했다.

 

유리는 모래와 불의 조화로 탄생한 신비로운 물질이다. 딱딱한 고체인 줄 알았던 유리는 불에 녹아 액체 상태가 되고 색깔과 모양, 크기 등 무한 변신이 가능하다. 4500년 전 이집트 혹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처음 만들어졌다. 처음엔 거푸집으로 생산했지만, 기원전 1세기 경 ‘대롱 불기’라는 혁신적 기법이 개발됨에 따라 대량생산이 가능해졌다.

 

덕분에 준보석류의 사치품이었던 유리는 일상 용기로 만들어져 ‘로만 글래스’라는 이름으로 로마제국 시절 지중해 연안에서 유럽과 아시아 전역으로 퍼졌다. 마침내 중국을 건너 한반도로도 흘러왔던 것이다.

 

국립경주박물관은 이번에 일본 아즈텍 회사와 공동으로 형광X선 분석기를 통해 성분 분석을 했다. 유리는 석영 등을 녹여서 제작할 때 끓는점을 낮추기 위해 융제(용융점을 낮추기 위해 첨가되는 물질)를 쓰기 때문에 성분으로 생산지를 유추할 수 있다. 그 결과 다양한 지역에서 유리 식기가 건너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왼쪽 위에서부터 시계반대방향으로 시리아·팔레스타인 산(황남대총 북분), 이집트 산(천마총), 중앙아시아 산(황남대총 남분).

 

 


이를테면 황남대총 북분과 천마총, 경주 안계리 출토 유리잔은 로마의 속국이었던 이집트에서 건너온 것으로 분석됐다. 반면에 황남대총 남분에서 나온 투명한 유리잔과 봉황 모양의 유리병은 중앙아시아에서 것으로 추정됐다. 또 시리아-팔레스타인 지역, 코카서스 산맥 이남 지역 등 다양한 곳에서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제기됐다. 황은순 연구관은 “신라가 여러 지역과 국제적인 교류를 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로, 신라가 얼마나 역동적이고 개방적이었는지 알 수 있다”라고 말했다.

 

 

여인들이 치장했던 유리구슬도 쏟아져 나왔다. 유리구슬은 3세기 삼한시대 이래 한반도에서 사용된 이래, 화려한 색채 덕분에 보석처럼 사랑받았다. 중국의 역사서 위지 동이전에서는 그 시절을 이렇게 전한다. “구슬을 보배로 삼아 장식했고 금·은·비단은 진귀하게 여기지 않았다.” 실제 삼한∼삼국시대 무덤에서 발견된 유리구슬만 해도 수십만 점이다.

 

 

 

왼쪽 위에서부터 시계반대방향으로 신라(황남대총) 출토, 백제(오산 수청동)출토, 가야(김해 양동리) 출토.

 


흥미로운 건 나라마다 취향이 달랐다는 점이다. 백제권역에서는 오색영롱하게 다양한 색상을 즐겼지만 신라에서는 유독 블루톤이 사랑받았다. 가야의 여인들은 작은 유리구슬과 큼지막한 수정을 함께 엮어 멋을 냈다. 반면에 고구려에서는 구슬이 애용되지 않았다.

 

한반도에서 유리를 수입만 한 건 아니었다. 직접 제작한 흔적들이 나온다. 거푸집을 사용해 유리구슬을 제작했음을 보여주는 증거인 토기 거푸집이 삼한 시기 이후 한반도 중부 이남 지역 여러 곳에서 발견됐다. 이번 전시에선 그런 거푸집과 유리를 녹이던 도가니도 나와 당시를 상상하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한반도에서는 진화된 대롱 불기 기법으로 유리그릇을 제작하지는 못했을까. 이에 대한 연구는 아직 학계에 보고되지 않고 있다. 국민일보. 손영옥 문화전문기자. 2021. 3. 17. (3)

 

 

 
 
 
 

경주 노동리고분군 

 
 
 

경주 중심부인 노동동 일대에 자리하고 있는 고신라시대 무덤들로, 봉황대·식리총·금령총 등이 포함되어 있다.

봉황대는 높이 22m, 지름 82m로 황남대총 다음으로 규모가 큰 무덤이다.

봉황대 남쪽에 있는 식리총은 봉분 높이 6.5m, 지름 30m로 1924년에 조사한 결과 덧널(곽)을 설치한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임이 밝혀졌다. 내부에서는 귀고리, 유리옥의 가슴장식과 은제허리띠, 은팔찌, 고리자루큰칼(환두대도), 쌍룡 고리자루큰칼, 말갖춤(마구), 옷칠그릇 등이 출토되었다. 특히 금관이나 금동관이 없는 대신 금동제신발(식리)이 발견되었는데, 문양이 독특하고 매우 우수하여 이 무덤의 이름을 식리총이라 하였다.

봉황대의 남쪽에 있는 금령총 역시 1924년에 조사된 무덤으로 직사각형의 구덩이를 판 뒤 바닥에 냇돌과 자갈을 깐 높이 4∼5m, 지름 약 18∼20m의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이다. 금관, 금제귀고리, 금팔찌, 금제허리띠,동제신발, 철제솥, 옷칠그릇, 유리그릇, 토기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토기 중 배모양 토기와 기마인물 토기가 특이하다. 이 무덤은 규모가 작으며, 금관과 장신구의 크기가 작고 순장의 흔적이 보여 신라 왕자의 무덤으로 추측된다.

식리총과 금령총은 비슷한 규모와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봉황대와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1)

 

 

 

◆금동신발-우주관·내세관의 표현

 

식리총 금동신발 출토 당시 모습.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금관총이 그렇듯 경주의 고분은 대표적인 출토 유물에 따라 이름을 짓는 경우가 종종 있다. 천마총, 금령총이 그렇고 식리총(飾履塚)도 같은 사례다. 금관총 발견 이후 조선총독부박물관은 1924년 노서동 126호분을 발굴했는데 여기서 금동신발, 즉 식리가 나왔다. 좌우와 바닥을 이룬 3장의 금동판에는 사람 머리를 한 새, 기린, 현무, 날개 달린 물고기 등의 무뉘가 새겨져 있다. 이 금동신발은 신라인의 우주관과 내세관을 담은 것으로 해석된다. 

 

가장 오래된 금동신발은 황남대총에서 나왔다. 5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역시 3장의 금동판으로 구성했고, 표면에 ‘凸’ 모양의 무늬를 맞새김했다. (4)

 

 

 

빼어난 제작기술을 보여주는 고신라의 상감유리구슬 네 점. 2번 유물은 경주 인왕동 출토 상감유리구슬이다.

특히 3번 표시가 된 유물은 발굴 이후 90여년 만에 처음 공개되는 경주 식리총 출토 상감구슬로 학계의 각별한 주목을 받고 있다. 

(출처; 1600년전 서라벌에서도 '메이드 인 로마'는 명품이었다 (daum.net) 한겨레. 2021. 2. 24.)

 

 

 

 

■ 경주노서리고분군 

 

사적

경주노서리고분군 (慶州路西里古墳群)

Ancient Tombs in Noseo-ri, Gyeongju

 

 

 

경주시 서북쪽 노서동 일대에 자리잡고 있는 신라의 무덤들로 현재 10여 기의 크고 작은 무덤이 남아있다. 그 중 가장 북쪽에 있는 제130호 무덤은 노동동 고분군의 봉황대와 대칭을 이루어 서봉황대라 불린다.

노서리 고분군의 내부구조는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과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분)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금관총·서봉총·호우총·은령총·제138호 무덤들은 신라 때의 것으로 직사각형의 구덩이를 판 뒤 덧널(곽)을 설치하고 냇돌과 자갈로 쌓은 돌무지덧널무덤이다. 쌍상총·마총·우총 등은 내부에 깬돌로 사각형의 널방(석실)을 만들고 널길(연도)을 둔 굴식돌방무덤으로 통일신라 때의 것이다.

금관총은 1921년에 조사되었는데, 금관과 금제허리띠를 비롯한 각종 호화로운 금공예품이 많이 출토되었다. 서봉총은 표주박 모양 쌍무덤의 북쪽 무덤으로, 봉황장식이 달린 금관이 출토되었다. 또한 연대를 새긴 은으로 된 뚜껑이 있는 그릇(은합)이 출토되어 5세기 전후에 만들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은령총과 쌍무덤을 이루는 호우총은 광복 후 최초의 유적발굴로 광개토대왕을 기념하여 을묘년(451)에 만들었다는 글자가 쓰여진 동합이 출토되었다. 쌍상총·마총·우총 등은 통일신라 초기의 굴식돌방무덤으로 대부분 도굴되어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쌍상총에서는 통일신라시대의 토기조각이, 마총에서는 말뼈와 안장틀 조각 등이 출토되었다.

노서리 고분군은 노동리 고분군과 비슷한 성격을 가진 돌무지덧널무덤과 전기 돌방무덤이 밀집해 두 종류의 무덤 교체과정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는 경주지역의 무덤 변화 과정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1)

 
 
 
 
 

국립경주박물관 기획전 ‘오색영롱, 한국 고대 유리와 신라’는 이런 질문을 던지며 신라인이 등장하는 실크로드 역사의 꿈결 속으로 관객을 안내한다. 철기시대~통일신라시대 2000여년간 한반도 곳곳에서 출토된 구슬과 그릇, 불교 공양구 등 각양각색의 유리 유물 1만8000여점을 엮은 전시는 진기하고 놀랍다. ‘2000년 제국 로마’의 수출품이 ‘1000년 왕국 신라’의 지배층을 결속하는 상징물이었다니!

 

핵심 주역은 이른바 ‘로만 글라스’로 이름 붙여진, 제국 곳곳의 공방에서 만들어 수출한 유리잔과 그릇이다. 초원길 교역품으로 들어온 로만 글라스를 신라인은 금보다 더 높게 쳤다. 임금과 왕족이 독점하고자 기를 썼던 희귀 명품이고, 죽어서 묻힐 때 선호하는 부장품이기도 했다.

 
 
 
 
국립경주박물관 기획전 ‘오색영롱…’의 네번째 부분인 신라 능묘 출토 유리그릇들. 사진 정면 아래쪽 그릇과 가운데 잔은 황남대총 남분 출토품이며, 그 옆 푸른 잔이 북분 출토품이다. 멀리 안쪽에 보이는 유물은 금관총 출토 유리잔이다.

 

 
 
기획전 ‘오색영롱…’의 네번째 부분인 신라 능묘 출토 유리그릇들을 전시한 공간의 전경. 7개 신라 고분에서 출토된 서역 계통 유리그릇 10여점을 한자리에 모아 선보이고 있다.

 

 
 

국내외 고고학계에선 1920년대와 70년대 경주의 대형 고분 발굴과 연구 성과를 토대로 로마산 제품이 4~5세기 신라 경주에 들어와 크게 유행했다는 결론을 최근 잇달아 내놓고 있다. 확실한 증거가 전시장 네번째 영역인 신라 능묘의 유리 출토품 진열장에 나타난다. 황남대총, 천마총, 금령총 등 경주 7개 왕릉급 고분에서 로만 글라스 계통의 그릇, 주전자, 잔 등이 15점이나 나왔다. 한겨레. 노형석기자. 2021. 2. 24. (5)

 
 

 

 

 

 

■ 경주 오릉

 

 

사적

경주 오릉 (慶州 五陵)

Five Royal Tombs, Gyeongju

 

 

경주시내 평지 서남쪽에 위치한 4기의 봉토무덤과 1기의 원형무덤이다.

『삼국사기』에는 신라 시조 박혁거세와 제2대 남해왕, 제3대 유리왕, 제5대 파사왕 등 신라 초기 4명의 박씨 임금과 혁거세의 왕후인 알영왕비 등 5명의 무덤이라 되어 있다. 『삼국유사』에는 혁거세왕이 임금자리에 있은지 62년 만에 하늘로 올라갔다가 7일 후에 몸이 흩어져 땅에 떨어지자 왕비도 따라 죽으니, 사람들이 같이 묻으려고 했으나 큰 뱀이 방해해서 몸의 다섯부분을 각각 묻었는데, 그것을 오릉(五陵) 또는 사릉(蛇陵)이라 했다고 한다.

내부구조는 알 수 없으나 무덤의 겉모습은 경주시내에 있는 다른 삼국시대 신라무덤과 같이 둥글게 흙을 쌓아올린 원형 봉토무덤으로, 1호 무덤이 높이 10m로 가장 크며, 2호 무덤은 표주박형으로 봉분이 두 개인 2인용 무덤이다. 이러한 대형 원형 봉토무덤은 신라에서는 4세기 이후 등장하는 것으로 박혁거세 당시의 무덤 형식은 아니다.(1)

 

 

 

■ 경주동부사적지대

 

사적

경주 동부 사적지대 (慶州 東部 史蹟地帶)

Archaeological Area in Eastern Gyeongju

 

 

신라의 여러 사적이 모여있는 곳을 보존하기 위해 하나의 단위로 정한 것이다.

동서는 안압지부터 교동까지, 남북은 월성남의 남천에서 고분공원 앞 첨성로가 있는 곳까지가 동부사적지대에 해당한다. 월성, 동궁과 월지, 첨성대, 계림 등이 각각 하나의 사적으로 지정 되어있으나, 이들 유적 사이사이에도 무수히 많은 지하유적과 유물이 계속 출토되고 있다. 따라서 신라 도성의 중심지역을 보존하기 위해서 사적지를 연결하여 확대 지정한 것이다.

동궁과 월지, 경주 월성, 첨성대, 계림, 내물왕릉 등 외에도 수십기에 달하는 신라 무덤이 완전한 상태로 보존되어 있다.(1)

 

 

 

■ 경주 재매정

 

사적

경주 재매정 (慶州 財買井)

Jaemaejeong Well, Gyeongju

 

 

신라의 김유신 장군 집에 있던 우물이다.

화강암을 벽돌처럼 쌓아 올려 만들었는데, 이 일대가 장군의 집이 있었던 자리로 추정된다. 김유신 장군이 오랜 기간을 전쟁터에서 보내고 돌아오다가 다시 전쟁터로 떠날 때, 자신의 집 앞을 지나면서 가족들을 보지도 않고 우물물을 떠오게 하여 말위에서 마시고는, “우리집 물맛은 옛날 그대로구나”하고 떠났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1993년 발굴조사에서 재매정을 중심으로 사방 70m 지역을 발굴하였다. 우물의 깊이는 5.7m이며, 가장 넓은 부분은 1.8m이고, 바닥의 지름이 1.2m로 벽돌같이 다듬은 돌로 만들었다. 우물 옆에 비각이 있고 비각안에 조선 고종 9년(1872)에 이만운이 쓴 비석이 있다.(1)

 

 

 

 

 

 

<자료출처>

 
 
 
 

(1)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홈페이지,

https://www.heritage.go.kr/heri/html/HtmlPage.do?pg=/unesco/Heritage/Heritage_06.jsp&pageNo=5_2_2_0

 

 
 

(2) 녹색 왕릉과 파란 하늘이 잘 어울리는 경주 대릉원 (daum.net)2019. 12. 9. 

 
 
 
 

(3) 신라 왕실이 썼던 명품 유리잔·장신구… 원산지 비밀 풀렸다-국민일보 (kmib.co.kr)2021. 3. 17.  



 
 

(4) "개도 금사슬을 했다".. '황금의 나라' 신라의 대표 유물은? (daum.net)2020. 6. 1.  

 
 
 

(5) 1600년전 서라벌에서도 '메이드 인 로마'는 명품이었다 (daum.net)한겨레. 2021. 2. 24.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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