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력사를 찾아서

3. 신라 고고학 (11) 경주 황남동 120호, 120-1호, 120-2호 무덤 본문

여러나라시대/신라(사라)

3. 신라 고고학 (11) 경주 황남동 120호, 120-1호, 120-2호 무덤

대야발 2024. 12. 16. 12:34
SMALL

 

 

 

 

 

 

 

 

2020년 5월 27일 문화재청과 경주시는 신라 왕경(王京, 수도) 핵심유적 복원·정비사업의 하나로 추진 중인 경주 황남동 120-2호분 조사에서 금동 신발과 허리띠 장식용 은판, 각종 말갖춤 장식 등 다양한 유물이 출토됐다고 밝혔습니다.

 

 

신라의 수도 경주에서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전반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신라 시대 금동 신발 한 쌍이 43년 만에 다시 출토된 것입니다.

 
 
경북 경주 황남동 120-2호분에서 출토된 금동 신발과 장신구

(경주=연합뉴스) 임동근 기자 = 경북 경주 대릉원 일원 내 황남동 120-2호분에서 금동 신발 한 쌍이 출토됐다. 경주의 신라 고분에서 신발이 출토된 것은 43년 만이다. 사진은 120-2호분에서 흙 속에 묻힌 상태로 발견된 금동 신발과 금동 장신구(달개). 2020.5.27

 

 

 

금동 신발은 경주 대릉원 일원(사적 제512호) 내 황남동 120호분의 남쪽에 위치한 120-2호분에 묻힌 사람(피장자)의 발치에서 비교적 양호한 상태로 출토됐다.

 

현재 발굴 초기 단계로 흙 속에서 측면 일부가 노출돼 신발 형태를 확인할 수 있다. 군데군데 푸른빛이 감도는 신발 표면에는 'T' 자 모양 무늬들이 뚫려 있고, 발등 부위에는 작은 동전 크기의 둥글납작한 금동 장신구(달개)가 있는 것이 확인됐다.

 

경주의 신라 고분에서 금동 신발이 출토된 것은 이번이 13번째로, 1977년 경주 인왕동 고분군 조사 이후 43년 만이다. 지금까지 신라 무덤에서 출토된 금동 신발은 실생활에 사용하던 것이 아니라 죽은 이를 장사 지내 보내는 의례를 위해 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황남동 120-2호분에서 출토된 금동 말갖춤 장식

(서울=연합뉴스) 문화재청과 경주시가 신라 왕경(王京, 수도) 핵심유적 복원·정비사업의 하나로 추진 중인 경북 경주 황남동 120-2호분 조사에서 금동 신발과 허리띠 장식용 은판, 각종 말갖춤 장식 등 다양한 유물이 출토됐다고 27일 밝혔다.
사진은 황남동 120-2호분에서 출토된 금동 말갖춤 장식. 2020.5.27 [문화재청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photo@yna.co.kr

 

 

 

무덤 주인의 무릎 부분에서는 허리띠 장식용 은판(銀板)이, 머리 부분에서는 여러 점의 금동 달개가 겉으로 드러나 있는 것도 확인됐다.

 

조사기관인 신라문화유산연구원 김권일 선임연구원은 이날 황남동 120호분 주변 정밀발굴조사 현장 브리핑에서 "무덤 주인이 착용한 물건은 그 사람의 신분을 말해 주는데 금동 신발, 은으로 만든 허리띠가 노출된 것으로 봐서 최고 상위 계급, 즉 왕족 내지 귀족으로 보인다"라고 설명했다. 이어 "부장품이 아직 충분히 출토되지 않아 남자인지 여자인지는 아직 확인할 수 없다"고 했다.

 

또 "보통 금동 신발이 출토되면 금관, 은으로 만든 허리띠, 목걸이, 귀걸이, 팔찌 등이 함께 나온다"며 "이번에 무덤 주인의 머리 부분에서 금동 장신구(달개) 일부가 확인됐는데 이것이 금동관이나 관 꾸미개(冠飾·관식)가 아닌가 조심스럽게 추정한다"고 덧붙였다.

 

무덤 주인 머리 쪽 별도 공간에서는 금동 말안장과 말을 장식하는 장신구인 금동 말띠꾸미개(雲珠·운주)를 비롯해 말을 부리는 데 사용하는 각종 말갖춤(馬具·마구) 장식, 청동 다리미, 쇠솥, 다양한 토기류 등이 출토됐다.

 

황남동 120-2호분은 중형분인 120호분 남쪽에 있는 소형분이다. 120호 북쪽에는 또 다른 소형분인 120-1호분이 자리한다. 이곳에선 쇠솥과 유리구슬, 토기류가 출토됐다.

 

 

 

황남동 120-2호분에서 출토된 청동다리미

(서울=연합뉴스) 문화재청과 경주시가 신라 왕경(王京, 수도) 핵심유적 복원·정비사업의 하나로 추진 중인 경북 경주 황남동 120-2호분 조사에서 금동 신발과 허리띠 장식용 은판, 각종 말갖춤 장식 등 다양한 유물이 출토됐다고 27일 밝혔다.
사진은 황남동 120-2호분의 청동다리미. 2020.5.27 [문화재청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photo@yna.co.kr

 

 

 

신라문화유산연구원에 따르면 120호분은 일제강점기에 조사돼 번호가 부여됐으며, 이후 봉분 위에 가옥 3채가 들어서며 훼손돼 최근까지 고분의 존재조차 확인하기 어려운 상태였다. 이에 문화재청과 경주시는 2018년 5월부터 120호분에 대한 발굴조사를 시작했으며, 지난해 조사에서 120-1·2호분을 추가로 확인했다.

 

김 선임연구원은 "길이 12m 중형분인 120호분을 (시기적으로) 후대 소형분인 120-1호분(길이 5.9m)과 120-2호분(6.5m)이 파고든 형태를 보이고 있는데, 이렇게 가운데 봉분을 파고들며 무덤을 쓸 수 있는 사람은 혈연이나 친족인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실제 현장을 보면 120-1호분은 120호분 중앙 가까이 파고들었고, 120-2호분은 가장자리 부분에 자리하고 있다.

 

 

 

하늘에서 본 황남동 120호분 일원

(경주=연합뉴스) 중앙에 있는 120호분 오른쪽에 120-1호분이 가까이 있고, 왼쪽에는 금동 신발 등이 출토된 120-2호분이 약간 떨어져 자리하고 있다. 2020.5.27 [문화재청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한편 봉분이 양호하게 남은 채 발견된 120호분은 마사토를 사용해 북서-남동 26.1m, 북동-남서 23.6m 규모로 봉분을 축조했는데, 경주의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묘) 가운데 마사토로 봉분을 축조한 사례는 이번이 처음이다. 마사토는 화강암이 풍화돼 생성된 모래와 같은 흙으로 쉽게 흘러내려 봉분을 쌓는 데는 잘 사용하지 않는다.

 

 

 

황남동 120호분

(경주=연합뉴스) 임동근 기자 = 경북 경주 대릉원 일원 내에 있는 황남동 120호분. 2020.5.27

 

발굴조사단은 앞으로 120-1‧2호분 조사를 완료한 후 내부 조사가 이뤄지지 않은 120호분도 본격적으로 발굴할 예정이다.

김 선임연구원은 "소형분인 120-2호분에서 이렇게 중요한 유물이 다량으로 나온 것을 볼 때 중형분인 120호분에서는 더 중요한 유물이 나오지 않을까 기대된다"고 밝혔다.(1)

 

 

 

 

 

2020년 9월 3일 신라문화유산연구원은 신라 왕경 핵심 유적 복원‧정비사업 중 하나로 올해 정밀조사 중인 황남동 120-2호분에서 무덤주인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 몸에 둘렀던 6세기 전반의 장신구 일체를 확인했다고 발표했습니다.

 

연구원 쪽은 “묻힌 피장자는 신라 상층 귀족으로 추정되는데, 금동관을 머리 부분에 썼고, 굵은 고리귀걸이를 양쪽 귀에 끼었으며, 금동 신발을 신었던 것으로 파악됐다”고 밝혔습니다.

 

 

 

황남동 신라 무덤 120-2호분에서 금동관, 금드리개, 금귀걸이, 가슴걸이 등이 발굴로 노출된 모습.
 
 
 
 
 

지난 5월 금동 신발과 금동 달개가 나왔던 경북 경주 황남동 신라 고분에서 화려하게 수 놓인 금동관과 금드리개, 가슴걸이, 은허리띠, 구슬 팔찌 등의 장신구가 잇따라 쏟아졌다. 금동관과 장신구는 무덤 속 주검 자리에서 망자가 원래 착용한 상태 그대로 확인돼 눈길을 끈다.

 

 

고신라 특유의 무덤 양식인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묘)에서 금속 관과 주요 장신구(귀걸이, 가슴걸이, 허리띠, 팔찌, 반지, 금동 신발) 등이 망자가 착장한 상태를 그대로 유지한 채 한꺼번에 발견된 것은 1973년∼1975년 발굴된 황남대총 이후 처음이다. 신라 금동관이 경주 고분에서 출토된 것도 1975년 황남대총 남분과 미추왕릉 7지구 5호분에서 나온 이래 45년 만이다.

 

금동관은 지난 5월 금동 달개 일부가 먼저 드러났던 주검 자리의 머리 쪽에서 확인됐다. 관은 가장 아래에 둥글게 만든 띠 모양의 관테(대륜)가 있고, 그 위에 3단 나뭇가지 모양 세움 장식(수지형 입식) 3개와 사슴 뿔 모양 세움 장식(녹각형 입식) 2개를 덧붙인 모양새다. 관테와 나뭇가지형 세움 장식 끝부분에는 거꾸로 된 하트 모양의 장식 구멍이 뚫린 것이 특징이다.

 
 
 
 
 
금동관 아래 굵은 금귀걸이와 그 주위로 노출된 유물들. 파란 색 점선은 금동관의 관테에 뚫린 거꾸로 된 하트 모양의 구멍을 표시한 것으로 다른 금동관 출토품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장식 무늬다.

 

 

 

금동관 관테에는 곱은옥(곡옥)과 금구슬로 이루어진 금드리개(금제수식)가 양쪽에 달렸다. 관테와 세움 장식 사이에는 ‘ㅜ, ㅗ’ 모양의 무늬가 뚫린 투조판이 있는데, 세움 장식 상단에서도 판의 흔적이 일부 확인된다. 투조판이 관 속에 있는 모자인 관모(冠帽)인지, 금동관을 장식하려는 용도였는지는 가려지지 않은 상태다. 관모라면 경주 지역 돌무지덧널무덤의 주인이 관과 관모를 같이 쓴 첫 사례가 되고, 관을 장식한 용도라면 출토 사례가 없는 새 형태의 관이 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박방룡 원장은 “속단은 어렵지만, 현재까지 출토된 경주 지역 신라 금동관 가운데 가장 화려한 장식을 갖췄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금동관 아래에서는 금으로 만든 굵은고리귀걸이 1쌍과 남색 구슬을 4줄로 엮어 만든 가슴걸이(흉식)가 드러났다. 그 아래에서 은허리띠, 허리띠 양 끝부분에 4점이 묶음을 이룬 은팔찌, 은반지도 확인됐다. 오른팔 팔찌 표면에서는 크기 1㎜ 내외의 노란색 구슬이 500여점 나왔다. 작은 구슬로 이루어진 구슬 팔찌를 은팔찌와 함께 끼었던 것으로 보인다. 은반지는 오른손에서 5점, 왼손에서는 1점이 출토됐는데, 왼손 부분이 완전히 드러나지 않은 상태여서 이후 조사 과정에서 은반지가 더 출토될 수도 있다. 천마총의 무덤 주인처럼 손가락마다 반지를 꼈을 가능성도 있다.

 

 

지난 5월 출토된 금동 신발은 분석결과 죽은 이를 위한 의례용으로 추정되며, 1960년대 출토된 의성탑리 고분의 신발처럼 ‘ㅜ, ㅗ’ 모양의 무늬를 번갈아가며 뚫은 앞판과 달리 뒤판은 무늬를 새기지 않은 사각 방형판으로 드러났다. 금동관의 중앙부에서 금동 신발의 뒤꿈치까지 길이가 176㎝여서 피장자의 키는 170㎝ 내외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무덤 속 주검 자리의 유물들이 노출된 모습.
 
 
 
 
 

유물이 나온 황남동 120-2호분은 일제강점기부터 알려진 황남동 120호분의 봉토 일부를 파고 축조된 작은 연접 무덤이다. 120호분의 자취를 파악하기 위해 2018년 5월부터 발굴조사를 하는 과정에서 발견됐다.

 

문화재청 신라왕경사업 추진단은 무덤주인이 착장한 모습 그대로 확인된 120-2호분의 주요 장신구들을 묻힌 부위의 토층째로 떠내어 분석하면서 피장자의 성별 등 세부 정보들을 계속 밝혀낼 계획이다.

 

추진단 쪽은 “은허리띠의 드리개 연결부가 삼각 모양인 점, 부장 칸에서 출토된 철솥의 좌·우에 고리 자루 모양의 손잡이가 부착된 점 등 기존에 보지 못했던 고고학적 자료가 많아 앞으로 더욱 다양한 논의가 진행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경주 황남동 120호분 일대 전경.

 

 

 

경주 고분 전문가인 최병현 숭실대 명예교수도 “경주 시내에서 신라 고분은 대릉원과 노동동, 노서동 고분군 같은 북쪽 지구 무덤 떼만 그동안 주로 관심을 두고 조사해왔는데, 이번 황남동 고분 발굴 성과로 남쪽 지구도 북쪽 지구 못지않게 주목할 부분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의미를 부여했다.(2)

 

 

 

2024년 9월 13일 국가유산청은 "경주 황남동 120-2호 무덤에서 피장자(무덤 주인)와 순장자에 해당하는 두 사람의 치아를 추가로 확인했다"고 밝혔습니다.

 

 

금 장신구 등 화려하게 꾸민 모습으로 묻혔던 경주 황남동 무덤의 주인이 10대 소녀로 추정된다는 분석이 나왔다. 이 소녀의 곁에는 3살 내외의 어린아이를 순장한 흔적도 발견됐습니다.

 

 

 
 
국가유산청이 경주 황남동 120-2호 무덤에서 피장자와 순장자에 해당하는 두 사람의 치아를 추가로 확인했다고 13일 밝혔다. 사진은 순장자의 치아와 목걸이 모습. 연합뉴스

 

 

 

황남동 120-2호 무덤은 경주 대릉원 일원에 있는 황남동 120호 무덤 남쪽에 있는 무덤이다. 2019∼2020년 발굴 조사 결과, 이곳에서는 금동관과 금동신발, 금귀걸이, 구슬 팔찌 등 화려한 장신구 일체가 무덤 주인이 착용했던 상태 그대로 나왔다.

 

발견된 유물을 분석해보니 무덤 주인은 여성으로 추정됐다. 금동관이 나왔다는 점에서 당시 신라의 왕족이나 최고위 귀족층이라는 견해가 많다. 이번에 새로 발견된 치아는 금동관 주변과 금동신발 아래에서 각각 나왔다.

 

 

 

국가유산청이 경주 황남동 120-2호 무덤에서 피장자와 순장자에 해당하는 두 사람의 치아를 추가로 확인했다고 13일 밝혔다. 사진은 경주 황남동 120-2호분의 치아 출토 현황. 연합뉴스

 

 

 


관을 이루는 둥근 밑동 부분인 관테 중앙과 아랫부분에서 출토된 치아 2점은 아랫니의 제1 대구치와 제2 대구치로 파악됐다. 대구치는 앞어금니 뒤쪽에 있는 치아를 뜻한다. 치아의 형태 등을 볼 때 12∼15세로 추정된다고 조사단은 설명했다.

 

 

 

국가유산청이 경주 황남동 120-2호 무덤에서 피장자와 순장자에 해당하는 두 사람의 치아를 추가로 확인했다고 13일 밝혔다. 사진은 피장자의 치아. 연합뉴스

 

 


또 다른 치아는 아랫니와 윗니가 모두 나왔다. 치아는 금동신발의 아랫부분 즉, 신발과 나무곽 아래 판 사이에서 나왔는데 푸른 빛의 구슬 목걸이, 장식용 구슬인 곡옥(曲玉) 등과 함께 발견됐다. 치관(齒冠·치아 머리 부분을 뜻함) 상태를 고려하면 3세 전후의 치아로 추정된다.

 

 

 

국가유산청이 경주 황남동 120-2호 무덤에서 피장자와 순장자에 해당하는 두 사람의 치아를 추가로 확인했다고 13일 밝혔다. 사진은 금동신발 하부에 있던 순장자의 치아와 목걸이. 연합뉴스

 

 


발굴 조사를 담당한 신라문화유산연구원의 김권일 실장은 "발아래 쪽에서 피장자와는 반대 방향으로 순장한 것으로 추정된다"며 "순장자 위치로 보면 특이한 사례"라고 말했다.

 

조사단에 따르면 고대사회에서는 왕족이나 귀족의 무덤을 조성할 때 순장하는 풍습이 있었다. 신라에서는 지증왕(재위 500∼514) 대인 502년에 순장이 금지될 때까지 계속됐다.

 

실제로 황남대총 남·북분에서는 각 10여명, 천마총에서는 5명, 쪽샘 44호 무덤에서는 5명이 순장된 것으로 볼 수 있는 흔적이 확인됐다. 그러나 피장자 발치에서 이처럼 어린 순장자 흔적이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으로 알려졌다.

 

조사단은 "순장된 아이는 이제 막 주인의 비녀(婢女·여종)가 되기 시작한 신분으로 추정되며, 순장을 금지할 무렵의 마지막 순장자일 수도 있다"고 말했다.(3)

 

 

 

이렇게 120-1, 120-2호분의 발굴이 마무리되었습니다.

2021년 4월부터 발굴조사의 핵심인 120호분의 실체를 밝히는 일이 시작되었습니다. 사실 120호분은 봉분의 지름(28m)이 왕릉급(평균 40~60m)은 아니어도 중형급 정도는 되며, 120-2호에서 금동관을 비롯한 금·금동·은의 풀세트를 장식한 여성이 출현했고, 비록 크게 훼손된 무덤이지만 120-1호 주인공도 만만치않은 존재였을 가능성이 짙기 때문에, 120호분의 주인공은 왕과 왕족은 아니어도 신라 최상위 귀족으로 추정되었습니다. 

 
 

‘1호(황오리 1호분), 98호(황남대총), 125호(봉황대), 126호(식리총), 127호(금령총), 128호(금관총), 129호(서봉총), 140호(호우총), 155호(천마총)…’. 일제가 1915년 고적조사사업을 벌이면서 경주 시내의 고분에 일련번호를 붙였습니다.

 

그후 몇몇은 이름을 얻었지만, 여전히 일제가 붙인 번호만 갖고 있는 고분들이 많습니다.

그중 황남동 120호분이 있습니다. 경주 시내에 조성된 왕·귀족 무덤군 가운데 가장 남쪽에 조성되어 있는데요.

 

해방 이후 이 120호분의 봉분을 깎아 민가가 조성되었구요. 봉분 상부와 주변의 교란이 매우 심한 상태로 방치되어 있었죠.

아무래도 ‘왕과 왕비릉’(황남대총, 서봉총, 천마총, 금관총 등)과 멀리 떨어진 곳이어서 상대적으로 중요도가 떨어진 고분으로 여겨졌죠. 그러다 2018년부터 신라문화유산연구원이 담당한 발굴조사가 벌어졌는데요.

 

조사과정에서 120호 일부를 깎고 후대에 조성한 고분 두 기를 뜻밖에 확인했답니다. 두 고분에 편의상 ‘120-1호’, ‘120-2호’의 이름을 붙였구요. 먼저 두 고분을 조사한 뒤 주인공인 120호분으로 마무리짓는 것으로 조사계획이 수정되었습니다.

 

 

 

황남동 120호분에는 딸린 무덤 두 기(120-1, 120-2호)는 존재하고 있었다. 남편과 두 부인의 무덤으로 보인다. 그런데 금동관과 금동신발 등 각종 금·금동·은제 장신구가 출토된 120-2호 부인의 신장(키·170~176㎝)가 남편(120호·165㎝ 이상)보다 큰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문화유산연구원 제공

 

 

 

■딸린 고분에서 뜻밖에 출현한 금동관

그런데 예상밖 유물이 120-2호분에서 확인되었습니다. 금동 허리띠 장식과 각종 금동 말갖춤새, 청동 다리미, 쇠솥 등은 양념에 불과했구요. 발굴과정에서 120-2호의 피장자 발치에서 금동신발 1쌍을 확인한 겁니다.

 

조사단은 이 금동신발의 출현 사실을 언론에 급히 공개했는데요.(2018년 6월2일) 그도 그럴 것이 금동신발이 발굴된 것은 1977년 인왕동 고분 발굴 이후 43년 만의 일이었거든요. 그런데 이 무렵 발굴단이 눈여겨 본 유물 노출 상태가 있었답니다.

 

바로 피장자의 머리 부분에서 노출된 여러 점의 금동 달개였습니다. 그렇다면 금동관의 부속이 아닐까, 발굴단의 기대가 커졌습니다. 과연 그 예상이 맞았습니다. 추가 발굴 결과 금동관이 모습을 드러냈구요.

 

 

 

황남동 120호분은 왕과 왕비, 왕족의 무덤이 집중된 대릉원 지구에서 남쪽으로 뚝 떨어져 있다. 최상위 귀족이 묻힌 무덤으로 알려져 있었다. 2018년부터 시작된 120호분 발굴과정에서 120호분의 일부를 깎고 후대에 조성한 고분 두 기를 뜻밖에 확인했다. 120호분에 딸린 두 고분에 120-1, 120-2호 명칭을 붙였다.|신라문화유산연구원 제공

 

 

 

금동신발, 금드리개, 금귀고리 등 온갖 금·금동제와 금은장도, 은허리띠, 은팔찌, 은반지 등 금은동제 유물 등이 줄줄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4~6세기대에 유행한 신라 돌무지덧널무덤에서 피장자의 착장품이 풀세트로 출토된 것이 몇 년 만입니까. 1973~75년 황남대총 발굴 이후 45년만이었습니다.

 

 

금동관의 장식 또한 매우 특이했는데요. 관테에 여러 개의 거꾸로 된 하트 모양 구멍을 끌이나 망치로 뚫어 장식했습니다. 이한상 대전대 교수는 “6세기초 무덤의 금동관에서는 이런 하트 모양이 보이지 않는다”면서 “오히려 일본 군마현(群馬縣) 금관총 고분의 금관에서 관찰되는 형식”이라고 전했습니다. 일본 군마현 금관총 고분의 주인공이 신라 계통이거나 신라 문물을 받아들인 인물이었을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된 거죠.

 

 

 

황남동 120호분에 딸린 120-2호분에서 금동관과 금동신발 등 각종 금·금동·은제 장신구 풀세트가 착장한 그대로 확인됐다. 착장한 상태 그대로 신장을 측정해보니 키가 170~176㎝ 정도로 추정됐다.|신라문화유산연구원 제공

 

 

 

■키 170㎝가 넘는 장신의 여인

120-2호 주인공은 여성일까요, 남성일까요.

일반적으로 신라 고분에서 주인공이 ‘굵은고리 귀고리’와 ‘가락바퀴(실감는 도구)’, ‘(금)은장도’ 등을 착장하고 있으면 ‘여성’으로 추정하구요. ‘가는고리귀고리’와 ‘큰칼(대도)’ 등을 달거나 차고 있으면 ‘남성’으로 특정합니다.

 

 

120-2호 고분에서는 피장자가 ‘굵은 고리 귀고리’와 ‘금은장도’를 착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여성’이라고 특정했습니다.

이 여성의 허리띠 양 끝에서는 ‘4점 묶음’의 은팔찌와 은반지도 확인됐구요. 오른팔 팔찌 표면에서는 크기 1㎜ 가량의 초소형 황색유리구슬이 500여 점 넘게 출토됐습니다. 작은 구슬 팔찌를 은팔찌와 함께 끼고 있었던 겁니다.

 

 

 

120-1호분은 하필이면 이 고분 위로 민가가 들어서 있었기 때문에 크게 훼손된 것이 유감이었다. 이곳에서 남색 및 상감 유리구슬이 여러 점 출토되었다. 120-1호의 주인공 역시 여성으로 추정된다.|신라문화유산연구원 제공

 

 

 

이 여성의 신장(키)이 특히 눈길을 끌었는데요. 백골이 진토되어 인골은 보이지 않았는데요.

그렇지만 착장한 그대로 노출된 ‘금동관의 중앙부~금동신발 발뒤꿈치’의 길이를 재어보면 어느 정도 주인공의 키를 알 수 있겠죠. 그렇게 재보니 176㎝ 정도 됐는데요. 무덤 주인공의 신장은 최소한 170㎝ 이상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1500년전 이 무덤에 묻힌 여성이 170㎝가 넘는 장신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 신라의 여성들도 금관(혹은 금동관)을 썼다는 이야기인가요. 그렇습니다.

사실 금관 혹은 금동관은 남성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남성무덤인 120호분에는 120-2호에서 보인 금동관과 금동신발은 보이지 않았지만 부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덩이쇠(철정)가 잔뜩 깔려 있었다. 그외에도 금동관모와 은제관식, 큰칼(대도) 등이 만만치 않은 위계의 유물들이 쏟아져 나왔다.|신라문화유산연구원 제공

 

 

 

금령총(1924년 발굴)과 서봉총(1926년 발굴), 황남대총 북분(1973~75년)의 금관 주인공은 어린이(금령총)와 여성(서봉총)으로 알려져 있죠. 그러니 120-2호 무덤의 주인공이 여성이라 해도 하등 문제될 것은 없습니다.

 

그럼 120호분에 딸린 또다른 고분, 즉 120-1호분은 어떨까요. 이 고분은 120호분의 북쪽 가장자리와 불과 20㎝ 간격을 두고 나란히 조성되어 있는데요. 하필이면 이 고분 위로 민가가 들어서 있었기 때문에 크게 훼손된 것이 유감이었습니다.

 

이곳에서 남색 및 상감 유리구슬이 여러 점 출토되었는데요. 발굴단에서는 이 중에 금동관의 장식품이 존재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120-1호의 주인공 역시 여성으로 추정하는데요.(김권일 신라문화유산연구원 학예연구실장)

 

 

 

 

120-2호에서는 여성의 표지유물로 통하는 굵은고리귀고리와 은장도가 확인됐다. 무덤주인공이 여성임을 암시한다.|신라유산문화연구원 제공

 

 

 

■무덤 바닥에 깔린 덩이쇠의 정체는?

이렇게 120-1, 120-2호분의 발굴이 마무리되었구요.

2021년 4월부터 발굴조사의 핵심인 120호분의 실체를 밝히는 일이 시작되었습니다. 사실 120호분의 주인공은 왕과 왕족은 아니어도 신라 최상위 귀족으로 추정되었습니다. 봉분의 지름(28m)이 왕릉급(평균 40~60m)은 아니어도 중형급 정도는 되거든요.

 

무엇보다 그 120호분에 딸린 부속 고분, 즉 120-2호에서 금동관을 비롯한 금·금동·은의 풀세트를 장식한 여성이 출현했잖습니까. 비록 크게 훼손된 무덤이지만 120-1호 주인공도 만만치않은 존재였을 가능성이 짙구요.

 

그렇다면 120호분은 어떨까요. 무덤의 규모를 보면 ‘메인’인 120호(매장주체부 길이 10m80, 너비 7m)는 120-1호(길이 6m10㎝, 너비 3m80㎝), 120-2호(길이 7m20, 너비 5m)의 두 배 정도 되거든요.

 

 

 

신라 고분에서 ‘가는고리 귀고리’와 ‘큰칼(대도)’를 착장하면 ‘남성’으로 추정된다. 120호 주인공 역시 ‘남성’으로 특정할 수 있다.|신라문화유산연구원 제공

 

 

 

그렇다면 핵심인 120호 출토 유물이 얼마나 대단할까, 뭐 이런 생각으로 발굴작업에 돌입했답니다.

그 결과가 며칠전(12월8일) 발표되었는데요. 과연 그 유구양상과 출토유물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주검칸에는 납작한 덩이쇠를 여러 점 깔아놓은 뒤에 주인공을 안치했구요.

 

 

가장자리에는 석단을 놓았는데요. 석단에서는 굽다리접시, 입이 곧은 항아리, 받침대가 있는 목긴 항아리 등의 제사도구가 출토됐는데요. 장례 및 제사행위가 이뤄졌음을 알리는 유물이죠.

 

 

 

다수의 신라 및 가야 고분의 바닥에 깔아놓았던 덩이쇠는 죽은 자의 부와 권력을 상징했다. 덩이쇠는 금괴처럼 돈으로도 쓰였고, 실제로 철제도구를 만들 때도 사용됐다.

 

 

 

주인공의 목과 가슴 부근에는 금제 가는고리 귀고리와, 유리구슬 가슴걸이가, 허리 부분에는 은제 허리띠, 철제 큰 칼(대도) 등을 착장하고 있었습니다. 또 머리 부근에서는 금속판의 일부를 도려내고 남은 부분을 무늬로 표현한 관장식(은제 투조관식)과 금동 투조 관모가 확인됐습니다. 또 주변에서 금동제 말갖춤을 비롯해 청동 다리미, 운모, 각종 토기류 등 많은 유물들이 출토됐습니다.

 

 

이미 언급했듯이 ‘가는고리 귀고리’와 ‘큰칼(대도)’을 착장하면 ‘남성’으로 추정한다고 했죠. 그래서 120호 주인공 역시 ‘남성’으로 특정할 수 있습니다. 또 한가지 다리 부근에 정강이뼈로 추정되는 인골 흔적이 남아 있는데요. 그걸 토대로 키(신장)를 추정하면 ‘최소한 165cm 이상’으로 판단할 수 있답니다.

 

 

 

<삼국유사>는 신라에 이름난 ‘재벌가’가 35곳(실제는 39곳)이 있고, 그중 으뜸은 김유신 장군의 ‘재매정택’이라고 했다.|문화재청 제공

 

 

 

■신라 공주와 제철 가문의 정략결혼?

그렇다면 120호와, 그에 딸린 120-1, 120-2호 무덤의 관계를 어떻게 정리할 수 있을까요.

세 무덤의 위치와 출토 유물을 토대로 매우 흥미로운 스토리텔링이 가능합니다.

우선 세 무덤 주인공들의 신분 차이입니다.

 

120-2호의 주인공(여성)은 금동관과 금동신발을 비롯한 금·금동·은제 유물을 풀세트로 착장했죠. 그래서 연구자들은 120-2호의 주인공을 신라 왕족 여성, 그 중에서도 공주일 가능성을 개진하고 있어요.

 

반면 정작 핵심인물인 120호분의 주인공(남성)은 어떤가요.

물론 금동관모와 관장식 등 만만치않은 유물이 들어있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120-2호 여성만큼은 아니죠.

대신 120호의 남성은 덩이쇠(철정)를 바닥에 깔고 누워 있었죠.

 

 

 

각 고분의 조성시기는 120호(남성)는 5세기 말, 120-1호·120-2호(이상 여성)는 6세기 초로 해석된다. 120호분 남성이 죽은 뒤 20년 사이에 120-1와 120-2호의 주인공들이 비슷한 시기에 묻힌 것으로 보인다.|신라문화유산연구원 제공

 

 

 

다수의 신라 및 가야 고분의 관 밑바닥에 깔아놓았던 덩이쇠는 죽은 자의 부와 권력을 상징했죠. 덩이쇠는 금괴처럼 돈으로도 쓰였고, 실제로 철제도구를 만들 때도 사용됐으니까요.

 

이 대목에서 고고학적인 상상력을 발휘해볼까요. 당대 철과 관련된 일에 종사하면서 막대한 부를 축적한 당대의 ‘재벌’이 신라공주와 정략 결혼을 한 것이 아닐까요. 신분상승을 위해? ‘지나친 억측’이라고 하는 분들도 있겠죠.

 

그러나 멸망한 금관가야의 왕가 출신이면서 신라에서 엄청난 부를 쌓은 세습재벌이 있죠. 바로 김유신(595~673)의 가문인 ‘재매정택’인데요.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39곳의 금입택(金入宅·부자)’ 중 독보적인 가문이죠.

 

그런 김유신 장군이 바로 여동생(문희)을 왕가(태종무열왕 김춘추·재위 661~681)에 시집보냈잖아요. 김유신 자신도 훗날 태종무열왕의 셋째딸(지소부인)과 혼인했구요. 신라에서 돈많은 재력가와 권력가 남성이 공주와 혼인하지 말라는 법이 없죠.

 

이 대목에서 신라의 4대 임금인 탈해 이사금(57~80)을 거론하는 분도 있더라구요. <삼국유사>에 따르면 탈해왕은 “나는 본래 대장장이 출신(我本冶匠)”이라고 소개하는데요. 탈해왕의 성는 석(昔)씨죠. 16대 흘해왕(재위 310~356)까지 왕 8명을 배출했죠.

 

그렇다면 덩이쇠를 무덤 바닥에 깔아놓은 120호분의 주인공은 혹시 흘해왕 이후 100년이 훌쩍 지나 퇴락한 석씨의 후예가 아닐까요. 이제 왕위와는 완전히 거리가 멀어졌지만 그래도 한때는 신라의 왕통을 이었던….

물론 이것은 순전히 제 상상력이 가미된 ‘팩션’이라는 점을 확실히해두고 싶어요.

 

또하나 재미있는 것은 120호 남성과 120-2호 여성의 신장(키)인데요.

120호 남성은 ‘최소 165㎝ 이상’으로, 120-2호 여성은 ‘170㎝ 이상’으로 추정되었는데요. 두 분이 부부였다면 부인의 키가 남편보다 더 컸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드는군요.

 

 

 

120-1호 부인은 남편 무덤의 돌무지 북쪽 가장자리와 불과 20㎝ 간격을 두고, 그것도 같은 방향으로 사이좋게 누워있다. 반면 120-호 부인은 남편과 다소 떨어진 곳에 방향도 약간 틀어진채 누워있다.|신라문화유산연구원 제공

 

 

 

■공주 본부인보다 사랑받은 후처?

이밖에 120호 주인공 남성과, 두 여성(120-1, 120-2호)의 관계는 어땠을까요.

우선 각 고분 출토 유물의 연대로 보아 120호(남성)는 5세기 말, 120-1호·120-2호(이상 여성)는 6세기 초로 해석됩니다.

120호분 남성이 죽은 뒤 20년 사이에 120-1, 120-2호가 비슷한 시기에 묻힌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가족묘로 볼 수 있는데요. 그중에서도 무덤 조성의 간격 등으로 미뤄보면 남편(120호)과 두 부인(120-1, 120-2호)의 고분으로 추정하는 게 상식적이라는군요.

 

두 부인의 무덤 중 금동관과 금동신발 등이 확인된 120-2호분은 남편(120호분)의 남쪽에 조성됐구요. 남편묘의 일부를 뚫고 들어섰습니다. 또 다른 부인묘인 120-1호는 남편(120호분)의 봉분 위 흙을 굴착하고 들어섰는데요.

 

 

 

120호 주인공 남성은 덩이쇠를 깔아 부를 과시한 제철 가문이었을까. 그런 그가 신분상승, 정략 결혼의 차원으로 신라 공주(120-2호)와 혼인했을까. 그렇다면 그 공주는 남편(120호)의 정부인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정작 남편의 사랑을 한몸에 받은 부인은 다른 분(120-1호)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신라문화유산연구원 제공

 

 

 

그런데 남편 무덤의 돌무지 북쪽 가장자리와 불과 20㎝ 간격을 두고 조성된게 눈에 띈다는군요. 무엇보다 남편묘와 마치 나란히 누운 것처럼 ‘북서~남동’으로 방향을 잡았습니다.

 

반면 120-2호 부인은 120-1호 부인보다 상대적으로 떨어져 있고, 또 방향(‘동-서’) 또한 약간 다릅니다.

이 대목에서도 고고학적 상상력을 동원할 수 있는데요.

 

이런 겁니다. 무덤 바닥에 덩이쇠를 깔아 부를 과시한 제철 가문이 신분상승, 정략 결혼의 차원으로 신라 공주(120-2호)와 혼인했다, 그 공주는 남편(120호)의 정부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정작 남편의 사랑을 한몸에 받은 부인은 다른 분(120-1호)이었다, 뭐 이런 상상은 어떻습니까. 물론 이 또한 지나친 억측이 아니냐고 무시하는 분들도 있겠죠.

 

아닌 말로 그냥 최상위 귀족 가문의 직계가족묘일 가능성도 있으니까요. 그러나 120호를 중심으로 확인된 세 고분의 정체를 이런저런 자료를 모아 한번 흥미롭게 정리해본 것으로 만족하겠습니다. 역사는 스토리텔링이니까요.(4)

 

 
 
 

 

 

 

<자료출처>

 

 

(1) 경주 1천500년전 '금동신발' 주인은 "왕족 내지 귀족일 듯"(종합) | 연합뉴스 (yna.co.kr) 2020-05-27

 

 

(2) 화려한 신라 금동관, 경주 고분서 45년 만에 출토 (hani.co.kr) 한겨레 .2020-09-03

 

 

(3) 金 장신구 나온 신라 무덤 주인은 10대女…옆엔 3세 순장 흔적 (daum.net) 중앙일보. 2024. 9. 14. 

 

 

(4) https://v.daum.net/v/20221219060112553 경향신문. 2022. 12. 19.

 

 

 

<참고자료>

 

 

머리부터 발끝까지 장신구 치장… 1500년전 신라의 여성은 누굴까|동아일보 (donga.com)  2020-09-04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