력사를 찾아서
3. 신라 고고학 (9) 경주 서봉총 본문
서봉총은 신라 시기에 조성된 무덤으로, 과거 '노서동 제129호분'으로 불렸다.
일제강점기였던 1926년 기관차 차고를 건설하기 위해 발굴한 결과 금관, 은제 합(盒·높지 않고 둥글넓적하며 뚜껑이 있는 그릇을 뜻함) 등 금속품과 칠기, 토기 등이 출토됐다.
당시 일본에 머물고 있던 스웨덴 황태자 구스타프 아돌프가 발굴에 참여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에 스웨덴의 한자 표기인 '서전'(瑞典)과 금관에 장식된 '봉황'(鳳凰)에서 한 글자씩 따 '서봉총'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국립청주박물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박물관이 새로 선보이는 공간은 '명품' 금관과 금 허리띠를 위한 장소다. 약 216㎡(약 65평) 규모의 전시실에는 오직 두 점의 유물만 전시돼 있다.
보물로 지정된 금관은 관에 새의 형상이 붙어 있는 유일한 신라 금관이다.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등에 따르면 서봉총 금관은 넓은 관 테 위에 5개의 가지를 세웠고 상하로 점선으로 물결 무늬를 찍은 뒤 나뭇잎 모양의 원판과 굽은옥 등으로 장식돼 있다.
[국립청주박물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내부에는 3가닥이 난 나뭇가지를 붙이고, 가지 끝에 새 모양 장식판을 부착해 돋보인다.
금 허리띠의 경우, 섬세한 공예 장식이 길게 늘어져 있는 점이 특징이다.
박물관은 두 유물을 보다 가까이서 생생하게 감상할 수 있도록 공간을 꾸몄다고 강조했다.
박물관 측은 "보통 진열장 유리와 유물 사이 간격은 30㎝ 정도인데 서봉총 금관과 금 허리띠는 25㎝ 간격만 둬 '명품'의 아름다움을 가까이서 볼 수 있도록 했다"고 설명했다.
금 허리띠의 안쪽과 바깥쪽을 모두 볼 수 있도록 일자로 길게 전시한 점 역시 돋보인다.
박물관 관계자는 "서봉총 금관과 금 허리띠는 과거에도, 또 지금도 명품"이라며 "조명 시설을 다각도로 설치하고 진열장과 받침대 디자인도 조정해 특징 하나하나를 집중해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두 유물은 점자 해설, 촉각 체험물도 마련돼 있어 시각장애인도 배려했다.
[국립청주박물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출처; 25㎝ 거리서 느끼는 아름다움…서봉총 금관·금허리띠 공개 | 연합뉴스 (yna.co.kr)2023-05-03)
1926년 경북 경주시에서 발견된 서봉총은 조선총독부의 초청으로 발굴 현장을 찾은 스웨덴 황태자가 봉황이 달린 금관 발굴 작업에 참여해 스웨덴을 뜻하는 '서전(瑞典)'의 '서(瑞)'자와 봉황의 '봉(鳳)'자를 따서 명명됐다.
서봉총 금관(보물 제339호)은 '양대(梁帶·머리에 쓸 수 있도록 테두리 안쪽에 십자로 붙여 놓은 금띠)'와 봉황 장식을 모두 갖춘 유일한 신라 금관이라는 점에서 문화재로서의 가치가 높다.
1926년 발굴 직후엔 멀쩡했는데…발굴 직후인 1926년 촬영한 서봉총 금관(오른쪽 위)은 양대가 금못으로 테두리에 고정돼 있다. 테두리 중앙에 달려 있는 곡옥도 선명하게 보인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훼손돼 현재 금관(아래)의 양대는 금못이 아닌 금사로 테두리에 연결돼 있다. 이 때문에 양대가 우측으로 이동하면서 '맞가지 세움 장식'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다. 테두리에 달려 있던 곡옥도 사라졌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
신라 왕릉인 '서봉총(瑞鳳塚)'에서 출토된 금관이 일제강점기에 심하게 훼손된 사실이 드러났다. 일제강점기에 발굴된 신라 금관이 훼손됐다는 사실이 밝혀진 건 처음이다. 이는 국립중앙박물관이 올해 광복 70주년을 맞아 조선총독부가 파헤친 신라 왕릉의 재발굴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확인됐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일제강점기 자료 조사 사업으로 최근 발간한 '경주 서봉총Ⅰ'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서봉총 금관의 양대가 테두리(臺輪·대륜)에서 떨어져 나간 뒤 원래 위치가 아닌 엉뚱한 곳에 붙어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이와 함께 금관 테두리에 달려 있던 곡옥(曲玉) 6개 중 4개가 떨어져 나간 것도 조사됐다. 이는 일제강점기 때 촬영한 사진과 금관의 부위별 실측 조사를 통해 밝혀졌다.
▼ "1935년 일본인이 금관 외부반출… 평양 기생 씌워주다 망가뜨린듯" ▼
고이즈미 아키오 평양박물관장이 서봉총 금관을 기생에게 씌우고 찍은 사진을 보도한 1936년 6월 29일자 부산일보 기사. 1926년 발굴 직후 촬영한 금관(오른쪽 위 작은 사진)은 일제에 의해 훼손되기 이전의 원형을 간직하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
금관 발굴 직후인 1926년과 조선총독부 박물관에 보관 중이던 1934년에 각각 촬영한 유리 건판 사진을 살펴보면 금관 한가운데 있는 '맞가지 세움 장식(出자 형태로 생긴 금장식) 왼쪽 아래에 '금못'으로 양대를 고정한 모습이 선명하게 보인다. 또 테두리의 곡옥은 6개가 온전하게 달려있었다.
그러나 현재 곡옥은 2개만 남아 있고, 곡옥이 있던 자리에는 금못이 아닌 '금사(金絲·금실)'로 양대가 연결돼 있다. 곡옥이 떨어져 나간 구멍에 양대를 연결해 놓은 것이다.
중앙박물관은 보고서에서 "총독부 박물관이 서봉총 유물을 정식으로 등록한 1939년 12월 자료에 따르면 금관에서 떨어진 곡옥들이 별도 유물 목록에 기재돼 있다"며 "양대를 원래와 다른 위치에 고정하고 곡옥이 대륜에서 떨어진 시점은 1934년과 1939년 사이"라고 결론 내렸다.
양대의 훼손으로 현재의 금관을 머리에 쓰면 기형적인 모양이 된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원래대로 양대를 복원하면 금관을 착용할 때 꼭대기에 있는 봉황 장식이 정확히 정수리 위에 놓인다. 박진일 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는 "당시 신라 금관 장인들이 정수리가 머리의 정중앙이 아닌 후위에 있다는 해부학 지식을 바탕으로 양대의 위치를 잡은 것으로 판단된다"고 설명했다. 신라인의 금속공예 작업이 과학적 사실에 기반해 이뤄졌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일제강점기에 누가, 어떻게 금관을 훼손했을까. 서봉총 금관은 1926년 출토된 뒤 경성(서울)의 총독부 박물관 수장고에 보관됐다가 9년이 지난 1935년 9월 평양박물관 특별전에 대여 형태로 딱 한 번 반출된 적이 있다.
당시 평양박물관장으로 서봉총 발굴을 주도했던 일본인 고고학자 고이즈미 아키오(小泉顯夫)가 특별전 직후 기생에게 서봉총 금관을 씌우고 사진을 찍어 논란이 됐다. 전무후무한 문화재 유린은 9개월 뒤 부산일보 보도로 세상에 알려졌다. 동아일보도 비슷한 시기 '평양기생 차릉파의 수난이야기'라는 부제로 이 사건을 다뤘다.
고이즈미가 금관의 양대와 곡옥을 망가뜨렸다는 직접적인 증거는 없지만 평양 사건의 시기는 박물관 조사팀이 추정한 금관 훼손 시기(1934∼1939년)에 포함된다. 또 유물이 손상되기 쉬운 외부 반출이 평양특별전 외엔 없었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다. 중앙박물관 관계자는 "누군가 억지로 금관을 쓰다가 훼손된 것으로 보인다"며 "훼손 시점은 정황상 고이즈미가 주최한 평양 특별전 때일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중앙박물관은 문화재위원회 승인을 거쳐 서봉총 금관의 원형 복원을 추진할 계획이다. 또 올 4월 서봉총 유물 전시회를 열면서 훼손 전후의 금관 사진을 나란히 게시할 예정이다.
한편 이번 조사에서는 서봉총의 주인이 여자라는 사실을 확증하는 사진 자료도 함께 발견됐다. 1926년 서봉총 발굴 직후 유물배치도를 촬영한 유리 건판을 찾아낸 것이다. 지금까지는 발굴 당시 일본 학자들이 유물 배치도를 그린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이 유물 배치도에 따르면 서봉총의 피장자는 여성의 상징인 태환이식(太環耳飾·금귀고리)을 달고 있다. 남성의 경우엔 대도(大刀)를 차고 있다. 박진일 학예연구사는 "그동안 학계에서는 정황만으로 여성일 것이라고 추정했지만 이번에 확실한 증거가 나온 셈"이라며 "고이즈미가 서봉총 조사 자료를 가지고 평양박물관장으로 부임한 사실을 미뤄 볼 때 유물 배치도 원본은 현재 평양에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출처; [단독]일제때 신라 금관 훼손 드러나 (daum.net)동아일보.2015.02.06.)
2020년 9월 7일 국립중앙박물관은 일제가 조사한 경주 서봉총을 2016년부터 2017년까지 재발굴한 성과를 담은 보고서를 간행했다고 밝혔다.
먼저 국립중앙박물관의 재발굴은 일제가 밝히지 못한 무덤의 규모와 구조를 정확하게 확인하는 성과를 거뒀다. 일제는 북분의 직경을 36.3m로 판단했으나 재발굴 결과 46.7m로 밝혀졌다.
또 서봉총의 무덤 구조인 돌무지덧널무넘의 돌무지는 금관총과 황남대총처럼 나무기둥으로 만든 비계 틀을 먼저 세우고 쌓아올렸음이 최초로 확인됐다.
경주 서봉총은 사적 제512호 경주 대릉원 일원에 있는 신라 왕족의 무덤 중 하나로 서기 500년 무렵에 만들어졌다. 서봉총은 두 개의 봉분이 맞닿은 형태인 쌍분으로, 먼저 만들어진 북분(北墳)에 남분(南墳)이 나란히 붙어 있다.
북분은 1926년에, 남분은 1929년에 각각 발굴됐다. 무덤 이름은 당시 스웨덴 황태자가 조사에 참여한 것과 봉황 장식 금관이 출토된 것을 기념해 서봉총으로 붙여졌다.
서봉총은 금관을 비롯해 다수의 황금 장신구와 부장품이 출토되는 등 학술적 가치가 빼어난 무덤임에도 불구하고 당시 일제는 발굴보고서를 간행하지 않았다.
이러한 문제점을 인식한 국립중앙박물관은 2014년 서봉총 출토품 보고서를 간행하고, 2016부터 2017년까지 서봉총을 재발굴한 후 이번에 그 성과를 담은 유적 보고서를 발간했다.
조사 결과 무덤 둘레돌에 큰항아리를 이용해 무덤 주인공에게 음식을 바친 제사 흔적도 고스란히 발견됐다. 이번 재발굴을 통해 당시 신라에서는 무덤 주인공을 위해 귀한 음식을 여러 개의 큰항아리에 담아 무덤 둘레돌 주변에 놓고 제사를 지내는 전통이 있었다는 것도 알 게 됐다.
이러한 제사는 일제강점기 조사에서도 확인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같은 역사기록에도 나오지 않기 때문에 학계에서도 큰 주목을 받고 있다.
무엇보다 서봉총 남분의 둘레돌에서 조사된 큰항아리 안에서 동물 유체(발굴에서 출토되는 동물 생태물로 뼈, 이빨, 뿔, 조가비 등을 말함)들이 많이 나와 당시 제사 음식의 종류를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이번 재발굴의 독보적인 성과이다.
큰항아리 안에서 종(種)과 부위를 알 수 있는 동물 유체 총 7700점이 확인됐다. 이 중 조개류 1883점, 물고기류 5700점이 대다수이지만, 아주 특이하게 바다포유류인 돌고래, 파충류인 남생이와 함께 성게류가 확인됐다. 이밖에도 신경 독을 제거하지 않으면 먹기 어려운 복어도 발견됐다.
[서울=뉴시스]돌고래 동물 유체 좌측 전지골(사진=국립중앙박물관 제공)2020.09.07 photo@newsis.com
이번에 확인된 동물 유체들은 신라 무덤제사의 일면을 밝힐 수 있는 정보이기도하지만 한편으로 당시 사람들의 식생활을 알려주는 좋은 자료다.
동물 유체에서 연상되는 복어 요리, 성게, 고래 고기는 당시 신라 왕족들이 아주 호화로운 식생활을 즐겼다는 것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증거이다. 조개는 산란기 때 독소가 있어 식용하지 않는 점, 또 많이 확인된 청어와 방어의 회유시기 등을 고려할 때 이들은 대부분 가을철에 포획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함께 이 제사가 무덤 축조 직후에 실시된 점을 고려하면, 서봉총의 남분은 가을에 완성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는 향후 서봉총 북분과 남분의 주인공을 연구하는 데에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앞으로 서봉총의 발굴 성과를 적극 활용하여 전시 등으로 공개하고, 학계와 대중에게 신라 왕족의 무덤을 이해하는 기초 자료가 될 수 있도록 연구를 심화시켜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출처; 서봉총 재발굴, 북분 직경 36.3m →46.7m (daum.net)뉴시스. 2020. 9. 7. )
일제 때 첫 발굴 서봉총, 이제서야 연구 결과 쏟아지는 이유는?YTN
(출처; 일제 때 첫 발굴 서봉총, 이제서야 연구 결과 쏟아지는 이유는? | YTN2020.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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