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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신라 문화유산 (5) 세계문화유산 : 경주역사유적지구 - 경주 첨성대 : 현존 세계 最古 천문대 본문

여러나라시대/신라(사라)

4. 신라 문화유산 (5) 세계문화유산 : 경주역사유적지구 - 경주 첨성대 : 현존 세계 最古 천문대

대야발 2025. 1. 10. 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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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성대는 신라 선덕여왕 때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동양 최고의 천문대입니다. 원통부 27단은 27대 선덕여왕, 쓰인 돌 362개는 음력 1년을 뜻한다고 합니다.

 
 
 
 

동양 최고의 천문대인 첨성대

 

 
▲ 첨성대 경주의 랜드마크 첨성대
ⓒ 문운주
        
▲ 첨성대 위는 둥글고 아래는 네모진 첨성대의 모양은 하늘과 땅을 형상화했다.첨성대를 만든 365개 내외의 돌은 1년의 날 수를 상징하고, 27단의 돌단은 첨성대를 지은 27대 선덕여왕을, 꼭대기 정자석까지 합치면 29단과 30단이 되는 것은 음력 한 달의 날수를 상징한다.관측자가 드나들었을 것으로 추측되는 가운데 창문을 기준으로 위쪽 12단과 아래쪽 12단은 1년 12달, 24절기를 표시한다.[경주 시청]
ⓒ 문운주
 

높이, 형태 등 하나하나에 깊은 뜻이 담겼다. 놀라운 건축 기술이다. 지금까지 몇 번 경주를 찾았지만, 첨성대 앞에서 인증샷 정도의 사진만 남기곤 했다. "천년 고도 경주를 제대로 알려면 경주 한달살이를 해도 부족하다"라고 한 길동무 최교수의 한마디 말이 가슴 깊이 파고든다. 오마이뉴스. 문운주기자. 2024. 4. 11. (1)

 

 

 

 

한국천문연구원 김봉규(사진) 박사는 2011년 4월 7일 충북대에서 열린 한국천문학회 봄 학술대회에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증보문헌비고 등에 실린 고대 천문관측 기록 142건을 분석한 결과 첨성대는 현존 세계 最古 천문대라고 밝혔습니다.

 
 
 

신라시대에 건축된 첨성대가 현존하는 세계 최고(最古) 천문대임을 밝힌 연구 결과가 나왔다.

 

 

한국천문연구원 김봉규(사진) 박사는 7일 충북대에서 열린 한국천문학회 봄 학술대회에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증보문헌비고 등에 실린 고대 천문관측 기록 142건을 분석한 결과 첨성대가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640년대 이후 기록된 유성의 떨어진 위치들이 모두 첨성대를 둘러싸고 있다"며 "이는 첨성대에서 유성을 관측했다는 결정적 증거로, 첨성대가 천체를 관측하는 천문대였음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이는 첨성대가 상징적 건물이라거나 제사를 지내던 제단일 것이라는 기존 학계 일부의 주장과는 다른 것이어서 주목된다.

 

 

김 박사는 "첨성대가 완성된 이후 신라의 천문관측 기록의 수가 이전보다 10배 이상 증가했으며 기록된 내용이 매우 정밀해진 점도 첨성대가 천문대라는 사실을 뒷받침해준다"고 덧붙였다. 541년부터 640년까지 100년간은 신라의 천문관측 기록이 3건에 불과했지만 첨성대 축조 추정 시점인 641년부터 740년까지 100년간의 기록은 38건에 달한다는 것이다.

 

김 박사는 또 삼국사기에 문열림, 영묘사 등의 제단이 별도로 있었다는 기록을 근거로 첨성대가 하늘·별에 제사를 지낸 곳이라는 일부 주장을 반박했다. 이밖에 조선시대 천문대인 관천대의 윗부분이 첨성대와 비슷한 점도 첨성대가 천문대임을 뒷받침하는 증거라고 제시했다.

 

김 박사는 "지금까지 결정적 증거 없이 그저 막연하게 첨성대가 천문대라고만 전해져 왔는데, 이번 연구 결과가 오는 14일 영국에서 열리는 '국제 고천문 학술대회'에서 발표되면 첨성대가 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로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국민일보. 민태원 기자.  2011. 4. 7. (2)

 

 

경주 첨성대 위엔 정자가 있었다?

 
 
 
1937년 경주 첨성대에서 촬영한 고등학교 수학여행 기념사진. 지금은 접근을 통제하지만 과거에는 아무나 첨성대에 올라 갈수 있었다. /사진=대구교육박물관.
 
 
 
 

[국보의 자취-4] "첨성대에 있는 백구정(亭)에서 자주 노닐었다, 상층에 대(臺)의 이름 3자가 크게 남아 있으니, 설총의 친필로 행한 일이다(遊於白鷗亭而瞻星臺, 上上層有臺名三大字, 親筆焉事.)." 경주 순창 설씨 세헌편(世獻篇·설씨 가문의 업적을 적은 책)에 나오는 구절이다.

 

설총은 주지하는 것처럼 원효대사와 요석 공주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이두를 집대성했고 강수, 최치원과 함께 신라의 3대 문장가로 불리는 대학자이다. 그의 정확한 생몰년을 모르지만 태종무열왕대(654~661)에 출생하고 경덕왕대(742~765)에 사망했다는 기록은 전한다.

그런데 이 책이 우리가 천문관측 시설로만 알고 있는 경주 첨성대(瞻星臺)에 '백구정'이라는 정자가 존재했다는 놀라운 사실을 전한다. 이뿐만이 아니라 그 정자에는 설총이 친필로 쓴 현판이 걸려 있었다고 밝히고 있다.

첨성대 위에 정자 등의 건물이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는 문헌은 설씨 세헌편 외에도 다수 발견되고 있다. 조선 중기 문신 홍적(1549~1591)은 그의 문집 '하의유고'에서 "대가 비어 있되 반월이네, 각은 없어졌지만 여전히 첨성이로다(臺空猶半月, 閣廢舊瞻星)"라고 읊었다.

 

홍적은 1572년(선조 5) 별시문과에서 병과(3등급 중 3등급)로 급제해 예조정랑(정5품), 집의(사헌부 종3품) 등을 거쳤다. 선조 13년(1580) 가을에 혜성이 출현하자 이를 측후하도록 명령받은 것으로 미뤄 천문 분야에도 식견이 높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 홍적 역시 반월(경주)의 첨성대에 누각이 있었음을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일본 근대 기상학의 선구자로 일제강점기 통감부 관측소장을 지낸 와다 유지(和田雄治)는 직접 첨성대 원형 추정도를 그리기까지 했다. 와다 유지는 "첨성대 위에 관측기구를 설치하여 상시로 천문 관측을 하였다"고 주장했다.

 


일제강점기 첨성대 문에서 사진을 찍는 사람들. /사진=국립중앙박물관.
 
 
 

 

국보 제31호 경주 첨성대는 신라의 옛 궁궐터인 월성에서 북서쪽으로 400여 m 떨어진 경주 인왕동에 자리 잡고 있다. 신라 27대 선덕여왕(재위 632∼647) 때인 633년(선덕여왕 2) 건설됐다. 첨성대 하면 '현존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이자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로 유명하다.

 

높이 9.17m, 밑지름 4.93m, 윗지름 2.85m로, 중간쯤에 남쪽 방향으로 정사각형의 문이 나 있다. 맨밑에 사각형 기단 2개 층, 그 위에 원통형 몸체 27개층, 맨위에 사각형 정자석(井字石) 2개 층 등 총 31개 층으로 이뤄져 있다. 정자석의 각 면은 동서남북을 가르키고 있다. 몸체 27개 층은 27대 국왕인 선덕여왕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이것은 첨성대의 개요일 뿐 우리는 아직도 첨성대에 대해 많은 것을 모르고 있다.

최초의 첨성대 기록은 일연의 ‘삼국유사'다. 삼국유사 '기이 제1 선덕왕지기삼사(善德王知幾三事)'편 말미에 "별기(別記)에는 선덕왕대에 돌을 다듬어서 첨성대를 쌓았다고 한다"고 기술돼 있다. 같은 책 '왕력 내물마립간'편 끝에도 "(내물왕의) 능은 점성대(占星臺) 서남쪽에 있다"고 씌여져 있다. 여기서는 특이하게 첨성대를 '점성대'로 표기하고 있다.

1454년 발간된 ‘세종실록지리지'에는 보다 자세한 내용과 더불어 실측자료도 실려 있다. "당 태종 정관 7년 계사년(633)에 신라 선덕여왕이 세웠다. 돌을 쌓아 위는 정사각형, 아래는 둥글게 만들었다. 높이는 19척 5촌이며, 위의 둘레는 21척 6촌이고 아래의 둘레는 35척 7촌이다. 그 가운데가 뚫려 있어 사람들이 위로 올라 갔다."

여러 문헌을 종합해 볼 때 첨성대가 천문을 살펴보던 기구인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일단 바깥쪽에 사다리를 놓고 올라간 뒤 중간 부분 입구를 통해 들어가 안쪽에서 별을 관측했을 것으로 추측해 볼 수는 있다. 그렇더라도 형태가 워낙 기이하다 보니 용도를 두고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학설은 거의 백가쟁명 수준이다.

 



첨성대 내부 모습. 사진 국립문화재연구소.
 
 
 

 

 

'우물설'은 석가모니와 박혁거세 등 성스러운 조상의 탄생을 형상화한 조형물이라는 관점이다. 선덕여왕은 우리 역사상 최초의 여왕인 만큼 반대 세력이 많았다. 여왕이 취임한 데 대한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서는 그녀가 신성한 인물의 후예임을 천명해야만 했다. 신라의 시조는 박혁거세다. 박혁거세가 탄생한 곳은 나정(蘿井)이라는 우물이다. 고대인들은 풍요와 생명, 다산을 뜻하는 우물을 신성시했다. 여왕은 우물 모양의 첨성대를 통해 우물 옆에서 태어난 박혁거세의 후계자라는 것을 과시하려 했던 것이다. 여기에 불교적 의미가 가미되고 있다.

 

신라는 왕즉불(王卽佛), 즉 왕을 부처와 동일시했다. 선덕여왕은 신라인이 신성시하는 박혁거세의 후계자인 동시에 석가모니의 어머니인 마야부인의 자손임을 알리고 싶었다. 그런 목적으로 첨성대에 마야부인의 몸을 투영시켰다. 불룩한 아랫부분은 마야부인의 엉덩이이고 중간 창문은 싯다르타 태자가 태어난 오른쪽 옆구리라는 견해다.

우물설은 '우주우물'로도 확대해석된다. 불교적 세계관에 젖어 있던 신라인들이 한 세계와 다른 세계를 연결하는 우주우물로서 첨성대를 만들었을 수 있다. 신라왕실은 불교적 유토피아인 도리천(세상의 중심인 수미산 정상의 33천에 존재하는 세계)을 동경했으며 그곳의 왕이자 불법의 수호신인 제석천을 신봉했다.

 

선덕여왕은 도리천을 동경해 죽음을 맞이하면서 도리천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기기까지 했다. 선덕여왕이 우주우물인 첨성대를 세워 살아서는 신라 땅에 제석천이 강림하기를 바라고 죽어서는 자신이 도리천에 환생할 통로로서 이용하려고 했다는 해석이다.

층수를 보더라도 첨성대는 총 31층인데 대지를 1층으로 환산하면 모두 32천이 돼 이를 거쳐 33천인 도리천으로 올라갈 수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는 것이다.

'불탑설'도 주목받는다. 석가모니가 열반한 후 사리를 차지하려고 주변 여덟 나라가 무력 충돌의 조짐을 보였다. 중재자가 사리를 8등분해 각국에 보내니 각국에 사리탑이 조성됐다. ‘불반니원경'은 사리를 분배받지 못한 나라가 유골을 담았던 병(甁)을 가져와 병탑을, 숯을 가지고 와서 재탑을, 숯을 갖고 와서 숯탑을 세움으로써 11탑이 조성됐다고 설파한다. 이런 불교 경전의 내용을 토대로 첨성대가 '병탑'이라는 의견이다.

그 밖에 학설로 태양에 비치는 첨성대의 그림자로 사계절과 24절기를 측정했다는 '규표(圭表·빛의 그림자로 태양의 고도를 재는 고대의 기구)설', 신라시대 수학인 주비산경(지름·높이·대각선이 3대4대5인 이상적 비례를 다룬 고대 중국의 서적)이 집약됐다는 '주비산경설', 농업신인 영성(靈星)을 숭배하던 제단이라는 '영성제단설',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성스러운 탑인 지구라트를 모방했다는 '지구라트설' 등이 제기된다.

 
 


일제강점기 통감부 관측소장을 지낸 와다 유지가 그린 첨성대 원형 추정도.
 
 
 
 

첨성대는 또한 우리 고대 건축물 중 유일하게 일체의 재건 또는 복원 없이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한다. 조선 중기 성균관대사성, 호조참판 등을 지낸 조위(1454~1503)도 경주 첨성대를 바라보며 "겁화에도 타지 않고 홀로 남아, 쌓은 돌이 비바람을 견디고 우뚝 서 있네. (중략) 신라 때의 제작이 놀랍기만 하구나"라고 했다.

 

이런 통념과는 달리 사실 첨성대에는 붕괴의 흔적이 다수 발견된다. 우선 첨성대 몸통 상부 석재와 하부 석재의 가공법이 서로 다르다. 하층부 석재는 전부 모가 둥글게 가공된 반면 상층부 석재는 전반적으로 모가 각진 데다 중간중간 둥근 석재들이 불규칙하게 섞여 있다. 맨꼭대기인 31층 정자석도 금이 가 있거나 모퉁이가 떨어져 나갔다. 28층에는 분실된 돌이 있고 28층 남쪽 석재들과 27층 서쪽 석재들은 서로 위치가 바뀌어 있다.

첨성대가 붕괴됐다면 그 시기가 언제이며, 피해 규모는 어느 정도였을까. 혜공왕 15년(779)에 100여 명의 사망자를 낸 규모 6.7 지진이 발생했다. 첨성대는 물론 동시대 건물들과 마찬가지로 지진을 고려해 설계됐다. 따라서 지진으로 첨성대가 붕괴됐을 개연성은 낮다. 13세기 몽골군 침입 때, 16세기 임진왜란 때 첨성대도 피해를 입었을 수 있다.

17층 이하는 대체로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볼 때 18층 이상이 타격을 받은 것으로 분석된다. 황룡사 9층 목탑을 불태운 몽골군은 첨성대 윗부분에 밧줄을 걸어 인위적으로 끌어당겼을지도 모른다.

한 번도 발굴 조사된 바 없는 첨성대 지하에는 많은 정보가 숨겨져 있을 것이다. 언젠가 주변을 발굴하게 되면 수많은 의문점도 풀릴 수 있을까. 매일경제. 배한철 기자. 2019-07-31 (3)



 
 
첨성대의 첫 기울기 측정 때 북쪽으로 20㎝ 기울어진 것으로 나타났다. 이후 2016년 경주 지진 때 2.13㎝(동으로는 1㎝) 더 기울어졌고, 이후 2021년 10월까지 4.5㎜ 더 기울어졌다. 동쪽으로는 1.3㎝ 더 나아갔다. 첨성대는 이로써 총 22.58㎝ 북(동)쪽으로 기울어진 것으로 나타났다. / 국립문화재연구원 제공




지진 때문에 북으로 2.13㎝, 동으로 1.3㎝ 기움 ‘기우(杞憂)’는 아닙니다. 실제로 첨성대가 기울어졌으니까요.

2009년 발표된 국립문화재연구원의 〈첨성대 실측 훼손도 평가 보고서〉는 첨성대가 북쪽으로 200㎜(20㎝), 서쪽으로 7㎜(0.7㎝) 정도 기울어져 있다는 측정결과를 담았습니다. 첨성대의 높이(8770㎜)와 기운 거리(북쪽 200㎜)로 계산하면 1.19도 정도의 기울기로 계산된답니다. 2년 뒤인 2011년 국립문화재연구원의 〈석조문화재 안전관리연구 보고서〉는 피사의 사탑을 인용하면서 첨성대의 기울기를 비교하기도 했습니다.

5년 뒤인 2016년 심각한 사태가 벌어지죠. 9월 12일 경주를 중심으로 관측 사상 가장 규모가 큰 진도 5.8의 강진이 발생한 겁니다. 이후 8일간 모두 600회가 넘는 여진이 이어졌습니다. 첨성대는 어찌됐을까요.

지난해(2021) 첨성대 모니터링 결과 보고서를 토대로 분석해봤는데요. 첨성대의 기울기를 처음 공식측정한 2014년을 0으로 놓은 정밀 측정결과입니다. 그랬더니 북쪽으로 2.13㎝, 동쪽으로 1.3㎝ 정도 탑 전체가 기울어진 현상이 일어났답니다. 4.5㎜의 배부름 현상도 포착됐고요.

전체적으로 보면 2016년 경주 지진 이후 2019년까지 3년간 3㎜ 수치 범위를 유지하고 있답니다.

지금까지 22.58㎝ 기울어졌다 다만 연구원은 2020년부터 2년간의 추이를 예의 주시하고 있답니다. 그럴 이유가 있답니다. 2020년 10월 6일 측정 때는 ‘북쪽으로 22.7㎜ 정도’(2014년 기준) 기울었는데요. 6개월 뒤인 2021년 3월 31일에는 그보다 1.8㎜ 더 기운 24.5㎜로 집계됐습니다. 이어 6개월여 뒤인 2021년 10월 7일 측정 때는 ‘25.8㎜’이 됐고요. 1년 사이 22.7→24.5→25.8㎜로 변한 겁니다.

이상의 측정결과를 종합해볼까요. 2009년 첫 측정 때 북쪽으로 20㎝(200㎜) 이상 기울었다는 사실을 밝혀냈는데요. 이후 2016년 일어난 경주 지진 때문에 2.13㎝, 4년간(2016~2020) 1.4㎜, 지난해와 올해 사이 3.1㎜ 정도 계속 기울었다고 했죠.

종합해보면 지금(2021년 당시)은 2009년 이전에 비해 22.58㎝ 더 기운 셈입니다.

현재 첨성대의 관리등급은 ‘주의 관찰’을 요하는 ‘C등급’입니다. 그렇다고 심각한 상태는 아니랍니다.

현대 건축물 관리등급(A·B·C·D)을 첨성대처럼 세운 지 1400년이 넘는 고건축물에까지 똑같이 적용할 수는 없잖습니까. 그래도 늘 예의주시해야겠죠.

북쪽으로 기울어가는 첨성대 첨성대에는 창문(개구부) 높이까지 흙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첨성대가 북쪽으로 기울다 보니 그쪽으로 흙의 압력이 가중되겠죠. 그래서 북쪽을 중심으로 동쪽과 서쪽까지 배부름 현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북쪽의 윗부분 석재 일부가 바깥으로 이탈되는 구조적인 변형이 보입니다.

남쪽 부분은 무사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첨성대가 북쪽으로 기울면서 흙의 압력이 그쪽으로 쏠리겠죠. 반면 남쪽벽에서는 상대적으로 흙의 압력이 약해지게 되겠죠. 그러니 남쪽의 석재들이 이완돼 틈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박찬민 국립문화재연구원 안전방재연구실 학예연구사 제공



2021년 실측조사 보고서도 “첨성대에서 지반침하 등으로 인해 기울기가 변화될 경우, 밑 부분 흙 압력의 증가로 배부름이 증가하거나 상부 석재의 연쇄적인 미끄러짐(이탈) 현상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고 했습니다.

현재 국립문화재연구원이 첨성대 내부에 상시계측시스템을 설치해 수시로 점검하고 있답니다. 안심은 되지만 그래도 경주 지진 같은 대형변수가 생기면 어쩌나 하고 걱정이 되는 건 사실입니다.

‘첨성대는 의심할 바 없는 천문대’ 이쯤에서 첨성대의 기능과 관련된 학계의 견해가 어떻게 정리됐는지 점검해봤는데요.

여전히 ‘백가쟁명(百家爭鳴)’이더라고요. 〈삼국유사〉 ‘선덕여왕 지기삼사’조는 “‘선덕왕대에 돌을 다듬어 첨성대를 축조했다’는 기록(별기)이 있다”고 썼는데요. ‘별(星)을 바라보는(瞻·혹은 우러러보는) 구조물’이라고 했으니 이론의 여지가 없는 천문대로 인식됐죠. 〈세종실록〉 ‘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 ‘경주부’ 등 후대의 사서도 ‘첨성대=천문대’로 설명했습니다.

“첨성대는 선덕여왕이 쌓았다. 돌을 쌓아 만들었는데 위는 방형(方形)이고, 아래는 원형이다…. 가운데를 통하게 하여 사람이 올라가게 돼 있다.”

1476년(성종 7) 편찬한 편년체 사서인 〈삼국사절요〉는 첨성대의 축조연대를 ‘647년(선덕여왕 16) 1월’이라고 했고요.

‘첨성대=천문대’설은 1909년 일본 학자 와다 유지(和田雄治·1859~1918)가 첨성대를 답사한 후 재확인했는데요.

미국의 천문학자 윌 칼 루퍼스(1876 ~1946)와 영국의 과학사가인 조지프 니덤(1900~1995)도 ‘첨성대=천문대’로 국제학계에 소개했습니다.

‘백가쟁명의 설설설’ 1960년대부터 분위기가 달라집니다. 〈삼국유사〉 기록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는 견해가 우후죽순으로 등장하죠.

나름 근거가 있습니다. 첨성대를 보면 오르기가 힘들고 꼭대기 공간이 너무 좁아 천문을 관측하기에 불편하다는 겁니다. 1평도 안 되는 공간에서 무슨 관측활동을 할 수 있었다는 말인가, 뭐 이런 회의감이 든 겁니다.

다양한 학설이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규표설(圭表說·1964)’이 처음 나왔습니다. ‘규표’는 지상에 수직으로 세운 막대를 뜻하는데요. 첨성대는 4계절과 24절기를 정확하게 측정하기 위해 세운 규표라는 겁니다.

이어 ‘주비산경설’이 제기됐습니다. 첨성대에는 1:3의 원주율, 3:4:5의 구고법(句股法·피타고라스 정리)이 상징적으로 숨어 있다는 건데요. 즉 첨성대 몸통의 윗지름이 문(창구) 한 변 길이의 약 3배(원주율 3.14와 비슷)에 해당하고요. 또 몸통 밑지름과 정자석 한 변의 길이는 약 5:3이고 몸통부의 높이와 기단석의 대각선 길이는 약 5:4라는 겁니다. 이는 고대 천문수학서인 〈주비산경〉에 나오는 직각삼각형의 ‘3²+4²=5²’를 상징한다는 겁니다.

 
 
 
첨성대에는 창문(개구부) 높이까지 흙으로 채워져 있다. 언제부터 흙으로 채워 놓았는지는 알 수 없다. / 국립문화재연구원 제공

 



‘수미산설’도 흥미로운 주장인데요. 수미산은 불교에서 세계의 중심에 있다는 상상의 산인데요. 병 모양을 닮은 첨성대가 수미산을 본떠 만든 제단이라는 설이 제기된 겁니다.

최근에는 우물설도 제기되는데요. 첨성대 맨 위에 ‘우물 정(井)’ 자 돌을 올린 모양이 우물을 연상시킨다는 겁니다.

우물은 신라의 개국신화와 연관성이 있죠. 시조 박혁거세(기원전 57~기원후 4)가 나정(蘿井)에서 탄생했다는 신화죠.

‘첨성대=우물설’과 관련해 흥미 있는 견해가 나왔습니다. 첨성대가 선덕여왕의 표상이라는 겁니다. 즉 선덕여왕은 즉위할 때 ‘성스러운 조상을 둔 여황제’라는 뜻에서 ‘성조황고(聖祖皇姑)’의 존호를 받았는데요.

선덕여왕의 ‘성스러운 조상’이 박혁거세와 석가모니였다는 겁니다. 여성의 산도를 닮은 우물은 나정에서 보듯 박혁거세의 탄생을 상징한 것이고요. 한편으로 첨성대는 석가모니의 탄생을 뜻하기도 한다는데요. 첨성대의 창구가 석가모니가 태어난 마야부인(석가모니의 어머니)의 오른쪽 옆구리라는 겁니다.

대낮에 별을 관찰하는 천문대 이렇듯 더러는 일리 있고, 독자들의 상상력을 자극할 만큼 흥미로운 설이 이어지고 있는데요.

여전히 〈삼국유사〉와 〈세종실록〉, 〈삼국사절요〉 등이 소개한 ‘첨성대’, 즉 ‘별을 관찰하는 구조물’이라는 기본틀을 뒤집을 만한 결정적인 반증을 제시하진 못합니다. 그저 연구자들의 견해일 뿐이죠.

어떤 논문을 읽어보면 ‘견강부회’와 ‘아전인수’의 향기가 물씬 풍기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런저런 자료를 살펴보다가 또 한 편의 재미있는 논문에 시선이 꽂혔는데요.

 
 
 
4면의 평면도에서 북쪽 방향으로 기운 첨성대의 모습. 2021년 실측조사 보고서도 “첨성대에서 지반침하 등으로 인해 기울기가 변화될 경우
 
 
 



맹성렬 우석대 교수가 해외 자료를 토대로 작성한 ‘첨성대는 천문대인가’(2017)라는 글입니다. 즉 고대 그리스 천문학자인 클레오메데스(기원전 1세기)는 “우물 바닥에서 태양을 보면 평소보다 크게 보인다”고 했답니다. 또 고대 로마의 자연과학자 플리니(23~79)는 “대낮에도 우물에 반사된 별빛을 관측할 수 있다”고 했답니다.

낮에 별을 볼 수 없는 이유가 뭘까요. 수증기 같은 대기 중 많은 미세입자가 햇빛에 난반사돼 별로부터 지구로 오는 빛을 가려버리기 때문입니다. 낮에 별을 보려면 이런 난반사를 최대한 막을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줘야겠죠.

요즘 대낮의 별 관측은 암상자(camera obscura)를 이용하는데요. 고대의 주간 별 관측에는 이런 깊은 우물이 암상자의 대체물로 이용된 겁니다. 실례가 남아 있습니다. 1428년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에 건립된 울루그 베그 천문대가 그런 형태이고요. 또 1579년 튀르키예(터키) 이스탄불 천문대의 부속건물로 건립된 천체관측용 우물탑을 그린 그림이 전해집니다. 프랑스 파리 천문대(1667)와 오스트리아 크렘스뮌스터 천문대(1748)에도 우물 형태의 부속건물이 있답니다.

첨성대는 우물형 천체관측대? 그럼 ‘첨성대=우물’ 형상이라면 어떨까요. 첨성대가 고대에 알려진 주간 별 관측용 우물일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요.

그동안 제기된 모든 의문점이 어느 정도 해소됩니다. 즉 첨성대 내부에서 꼭대기로 올라가라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천장을 지나는 낮의 별자리를 관측하라는 것이다. 뭐 이렇게요.

이와 같은 서양의 천문관측 지식이 어떻게 7세기 신라까지 들어왔을까요. 고민할 필요가 있을까요. 이미 5~6세기 신라 고분에서 서역계 유물이 쏟아져 나옵니다. 예컨대 페르시아 지방의 기법으로 제작한 ‘커트 글라스(무늬를 새긴 유리)’가 황남대총 북분에서 출토됐습니다.

이 고분에서 확인된 5~6세기 은제 잔은 어떻습니까. 한 여인이 조각돼 있는데요. 이란의 아나히타 여신상과 흡사합니다. 황남대총 남분 출토 봉수형 유리병은 어떻습니까. 이란 국립박물관 소장 유리병과 쌍둥이라 할 만큼 똑같습니다.

또 경주 구정동 방형 무덤의 네 모서리에 부조된 무인상을 보면요. 눈이 깊고 코가 큰 서역인이 페르시아 스포츠인 폴로(격구)용 스틱 같은 것을 잡고 있어요. 우물의 원리를 갖춘 천문지식 역시 이때 들어왔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경북 경주 시내 한복판에 서 있는 첨성대는 요즘도 남녀노소와 밤낮, 사계절을 막론하고 사진발 잘 받는 핫플레이스다. <삼국유사>는 선덕여왕의 3가지 신비로운 일을 기록한 뒤 마지막에 별기를 인용해 “선덕여왕 연간에 돌을 다듬어 첨성대를 쌓았다”고 전했다. / 국립문화재연구원 제공



동지의 새벽에 뜨고 지는 해와 별을 보았다? 그렇다면 우물 형태의 첨성대에서 무엇을 관측했을까요. 겨우 9m도 안 되는 깊이의 첨성대 안에서요.

맹 교수가 인용한 이스탄불의 우물형 천문관측대 그림을 자세히 보면 달과 태양이 동시에 떠 있습니다. 대낮이 아니라 해가 뜨는 여명이거나, 지는 일몰 직후라면 어떨까요.

마침 첨성대의 정자석(井字石) 모서리가 선덕여왕릉과 ‘동지 일출선’에 정렬돼 있다는 연구가 있잖습니까. 동지에 해가 뜨는 ‘동지 일출’은 예부터 태양의 부활을 알리는 새해의 출발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영국의 스톤헨지나 고대 이집트의 카르나크 신전 등이 동지 일출선에 정렬된 대표적인 사례라 합니다. 첨성대도 해 뜨기 직전이나, 해진 직후의 별을 관측했던 시설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답니다.

물론 이 견해 역시 맞는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이 역시 상상력의 폭을 넓힐 수 있는 흥미로운 주장이라는 점에서 소개해보았습니다. 저도 궁금합니다. 1400년 전 신라인들이 이 첨성대에서 관측한 별은 무엇이었을까요. 경향신문. 이기환 역사 스토리텔러. '22.58cm나 기운 첨성대, 진짜 천문대였을까[이기환의 Hi-story](54)' 2022. 10. 18. (4)

 

 

 
 

 

 

https://youtu.be/9A_GYk0zFGs

 

 

 

 

 

 

 

 

<자료출처>

 

 

 

 

 

 

<참고자료>

 

 

[한국사 Live] 첨성대 꼭대기엔 정자가 있었다 (daum.net) 매일경제. 2016.04.20.

 

 

 

 

https://v.daum.net/v/20190321090056884 중앙일보.2019. 3.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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