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력사를 찾아서

황금항아리 세 아들의 지파들 가운데 맏지파 ‘콩그라트’ 종족은 압록강 건너 오늘날의 갈소관으로 피신했습니다. 둘째 지파 ‘예키라스’ 종족은 원래의 길주보다는 좀 더 북쪽으로 잠시 옮겼지만, 그래도 이 땅을 떠나지 않고 함경북도의 두만강 강기슭 지구에 남았습니다. 결국 막내 지파로 칭기스 칸의 직계선조 지파인 ‘코를라스’ 지파는 카이도와 그의 종숙부 나친 때 속말강과 서북의 흑룡강을 따라 오늘날 부랴티아를 거쳐 몽골리아로 불리는 땅으로 떠나 간 것입니다.” 전 박사는 결국 “또 다시 전쟁에 지고 밀려서 그들은 이 땅을 떠나, 오늘날 몽골과 투르크 종족의 나라라고 불리는 이방에서 떠돌이 생활을 하게 된 것”이라며 “그러나 그로부터 6세대 후에 그들은 결국 세계사의 주역을 맡는 세계정복자 징기스칸을 탄생시켰..

주몽예씨의 기고문을 보면, 막연히 ‘몽골과 우리는 서로 관련이 있다’는 식의 주장을 펼친 것이 아니다. 그는 매우 구체적으로 칭기스 칸은 발해(渤海) 고왕(高王) 대조영(大祚榮)의 아우인 대야발(大野勃)의 제19대손이라는 것을 칭기스칸의 ‘족보’ 계보를 통해 증명하고 있다. 뿐만 아니다. 그는 역사언어학적 고증을 통해 칭기스 칸의 어릴 적 이름인 테무진은, 그가 강인하고 위대한 인물이었음을 가리키는 ‘철인’ 이라는 일반적인 풀이와는 달리, 고구려 3대 대무신왕(大武神王)에서 비롯된 것임을 밝혔다. 또 칭기스 칸이라는 칭호도 일반적으로 ‘왕중의 왕’ 이라는 일반적 풀이와는 달리, 대조영의 호칭이었던 ‘진국공(震國公)’ 또는 ‘진국왕(震國王)’에서 나온 것으로, 곧 ‘발해국왕’이라는 뜻이라는 주장을 펼쳤..
한(漢)나라와 흉노제국의 공존은 만주의 탁발선비족(北魏)에 의한 북중국 정복으로 이어졌다. 수(隋)-당(唐)나라와 돌궐제국의 공존은 만주의 거란족(遼)과 여진족(金)에 의한 북중국 정복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몽골 고원에서 징기스칸의 등장은, 북중국에서 만주족 정복국가와 통일된 몽골족 제국의 대결이라는 전혀 새로운 상황을 전개시켰다. 흉노와 위구르 돌궐족은 한족 왕조에 대해 갈취(喝取)전략을 사용했다. 징기스칸의 초기 목표 역시 중국 본토의 정복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한족 조정들과는 달리, 만주족의 금나라 조정은 몽골족에 대한 유화정책을 단호하게 거부했다. (한족 전통을 따라) 갈취에 순순히 응하지 않고, 왕조 자체가 완전히 멸망할 때까지 몽골족에 대항해 싸웠던 것이다. 몽골 지배자들은 몽골어..

⊙ 칭기즈 칸의 이름 ‘테무진’은 고구려 3대 ‘大武神王’에서 유래, ‘칭기즈 칸’은 ‘震國王’ 즉 ‘발해왕’이라는 의미⊙ ‘몽골’은 ‘말갈(靺鞨)’, 즉 고구려-말갈어로 ‘말골(馬忽)’이라는 의미⊙ 몽골족의 역사 다룬 《집사》 등에 나오는 ‘에르게네 콘’ 이야기는 발해 武王 때 발해와 羅唐연합군의 전쟁을 다룬 것⊙ 칭기즈 칸의 조상 엘 콘은 발해 대조영의 동생 대야발의 둘째 아들 일한⊙ 《칭기스의 서(Da’ftari-Cingiz-nama’)》에 나오는 ‘알툰 칸(Altun Han·‘황금의 칸’)’은 金나라 태조 아골타의 조상인 金幸 ■ 한 古代史 연구가의 도발적 문제제기칭기즈 칸은 고구려-발해 王家의 후손이다!글 : 주몽예 북방민족사학자·법률학 박사 06 2015 MAGAZINE 월간조선 ..

한국과 몽골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많은 문화적·심리적 공통성뿐만 아니라 매우 독특한 관습들도 공유한다. 예컨대 아이가 태어나면서부터 한 살을 먹는다든가(중국과는 분명히 다르다), 식당이나 가게 등에 가면 한국에서는 '이모', '아제'라고 하듯이, 몽골에서는 '형', '동생'이라고 부른다거나(의제가족) 아이들이 오래 살라고 귀할수록 '개똥이' 등으로 이름을 비하하여 부른다거나 한다. 또 유난히 흰색을 많이 사용한다. ■ , 한·몽 관계를 왜곡하다 ⑧ 아리랑의 고향, 알타이와 몽골 초원김운회 동양대 교수 | 2014.02.13. 드라마 25부에서는 기양의(후일 기황후)가 황제(순제 : 혜종)에게 "저의 복수가 바로 폐하의 복수"라고 하면서 엘테무르(연철)의 제거에 적극적으로 나선다. 그리고 후..

한국이 몽골의 '어머니의 나라', 이 말은 아마도 몽골의 시조신인 알랑고아의 아버지가 고주몽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일찍 과부가 된 알랑고아의 삶은 참으로 고달팠습니다. 특히 유목생활에서 남편이 없이 살아갈 때의 그 처절함은 말로 다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칭기즈칸의 어머니도 알랑고아와 비슷한 삶을 살았습니다. 일찍 남편을 여의고 처절한 가난과 절망 속에서 자식을 키웠고 그 아들은 '세계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칭기즈칸을 정신적 지주로 삼는 몽골에게는 칭기즈칸의 어머니가 바로 알랑고아이며 민족신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 그 어머니의 나라가 한국일 수밖에요. 한국은 바로 고주몽의 나라이니까요. ■ 김운회의 '대쥬신을 찾아서' 몽골, 또 다른 한국김운회 동양대 교수 | 기사입력 2005.08.0..

몽골·만주·반도 등에 걸친 세 민족은 체질인류학적으로 얼굴과 몸매·골격이 아주 비슷하다. 한국에 거주하는 몽골인이 유학생 3000명을 포함해 3만~4만 명에 달하지만 외모에서는 한국인과 거의 구별되지 않는다. 몽골반점이 공통적으로 90% 이상 나타나고, 유전자 염색체 지도에서 가장 가까운 사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의 나무꾼과 선녀 설화나 ‘까치가 울면 정다운 손님이 온다’는 말이 몽골에도 있다. 몽골인도 음식을 먹을 때 고수레를 한다. 제기차기·공기놀이·씨름 등의 민속놀이 역시 유사하다. ■ “몽골 시조 알랑 고아는 고구려 주몽의 딸”중앙선데이, 2009.05.31 “어머니의 나라에 왔습니다.” 대만에 거주하는 몽골인 사학자 한촐라 교수가 1990년 한국에 도착해 한 말이다. 한촐라 교수의 제자..

“몽골제국 시대에 왕실 간 결혼 때문에 고려는 ‘사위의 나라’로 불렸다. 이제 한국은 몽골에 ‘형(兄)’이 됐다. 오늘날 몽골 사람들은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을 성공시킨 한국을 본보기로 삼고 있다. 그들은 한국 TV프로·음식·음악·대중문화를 즐긴다.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나라 중 하나가 됐다. 한국은 몽골인의 의식에서 큰 자리를 차지한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한국에서 몽골에 관심을 두는 사람은 많지 않다. 내가 희망하는 것은 앞으로 한국인들이 한국과 몽골 사이의 역사적 고리와, 한국이 몽골의 ‘형’으로서 해야 할 일에 대해 보다 큰 관심을 가지는 것이다. 한국은 세계에 가르쳐 줄 수 있는 게 아주 많다.” ■ 아시아가 서구 지성 발전에 큰 역할, ‘종교의 자유’ 가치 칭기즈칸서 유래중앙선데이, 김..
동부 만주 삼림 속에서 살던 여진족은, 서 만주 선비족의 후예인 거란족 요 왕조가 운영하던 2원 통치조직의 효용성을 일찍이 체득했고, 1126년에는 북중국 전체를 정복했다. 중국 역사상 1126년이란 한족이 만주족 왕조에 의해 두 번째로 중원으로부터 쫓겨난 사건을 상징한다. 고려와 금 나라의 창건자들은 모두 옛 고구려의 후계자임을 천명했다. 왕건은 신생왕국을 고구려를 본 따 고려라 불렀고, 금 나라는 실제로 만주 전체를 점거했다. 금사(金史) 기록을 보면, 완안부 시조 자신이 본래 고려(혹은 고구려)에서 왔고, 여진과 발해는 한 가족이라고 말한다. 김부식은 삼국사기를 편찬하면서 고려를 신라의 후계자로 상정하여, 같은 시대의 발해 (689-926) 237년 역사를 제외한 채, 통일신라 (677-935)..

만주 쥬신의 시조이신 김함보는 금나라 태조(阿骨打)의 조상으로 『대금국지(大金國志)』, 『만주원류고(滿洲原流考)』에는 신라(新羅)에서 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그리고 사실 여부와는 상관없이 김함보가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주 김씨이자 안동(安東) 김씨의 시조인 경순왕(敬順王 : 김부)의 후예라고 많이 알려져 있기도 합니다. 신라의 마지막 왕이었던 경순왕의 후손들이 일부는 금강산으로(마의태자 이야기), 또는 강원도 철원 땅으로, 일부는 장백산(백두산)으로 들어가서 후일을 기약했다는 이야기들이 많이 있지요. 시기적으로 봐서는 신라 부흥운동이 실패하자 잔여세력들이 장백산으로 만주로 이동해갔을 것으로 추정할 수도 있지요. ■ 김운회의 '대쥬신을 찾아서' 사라진 ‘영원한 신라’의 꿈 : Millennium Sh..